16. 불완전한 나날
오월의 아침은 포근했다. 루시엘을 깨운 것은 느지막한 햇살이었다. 새로 얻은 신혼집은 지하실이 아닌 땅 위에 있어서, 자그마한 창 너머로 아침 빛이 새어들고는 했다.
양 손바닥 너비만 한 작은 창인데다가 늘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루시엘은 창문의 존재가 퍽 마음에 들었다.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괜한 희망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카인과 같은 햇빛 아래에서, 함께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햇볕이 방 안으로 드리워졌다. 인공적인 조명이 아닌 자연스러운 빛이, 곁에 누운 카인의 윤곽을 그려내었다.
루시엘은 곤히 잠든 카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훑었다. 왼눈의 흉터를 더듬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볼을 쿡쿡 찔렀다.
“…루시엘…?”
카인의 눈두덩이 꿈틀거렸다. 바스스 눈꺼풀이 열리며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늘의 해보다 더 환하고 따스한 빛이, 그 안에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막 잠이 깬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루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카인의 바지를 벗겼다. 생리현상 때문에 발기해있는 성기를, 보드라운 뺨에 대고는 문질렀다.
뜨겁고 맥박치는 것이 볼에 닿았다. 끈적끈적한 쿠퍼액이 얼굴을 더럽히는 감각마저 기분 좋은지, 루시엘이 헤실헤실 웃었다.
“오늘도 기분 좋은 거 하자.”
섹스를 외치는 목소리가 해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카인은 당연하게도, 루시엘의 유혹을 거절하지 않았다.
비록 어제도 섹스를 했었지만, 너무 격렬하게 해서 나중에는 루시엘이 질질 짜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었다. 새로운 해가 떴으니 새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게 옳았다.
요즘 카인과 루시엘의 하루는 거의 이런 식이었다. 카인이 아무 말이 없을 때면 루시엘 쪽에서 냉큼 섹스를 권했고, 루시엘이 섹스를 입에 담지 않을 때면 카인이 먼저 루시엘의 옷을 벗겼다. 오늘처럼 휴일이 아닌 날에도 아침부터 몸을 섞을 정도였다.
물론 언제나 섹스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두 사람도 그들만의 방식대로 데이트라는 걸 했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루시엘의 정신 상태가 정상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그는 공식적으로는 죽은 걸로 공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인은 자살. 이유는 폐위된 후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서. 호위 기사가 폐제를 감금하고 있다고 밝히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더 깔끔하고 납득하기 쉬웠다. 루시엘이 살아있다는 걸 아는 자는 단테와 하르트만 공작, 그리고 카인뿐이었다.
둘의 데이트는 늘 집에서 이루어졌다. 카인은 루시엘에게 책을 읽어주고,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여러 벌 사서 갈아입히고, 길가의 꽃을 꺾어다가 귀 옆에다가 꽂아주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루시엘을 위해, 최근에는 거실에 피아노를 들였다. 루시엘은 식당에 가는 대신 카인이 마련한 정찬을 먹었고, 연주회에 가는 대신 카인이 치는 피아노를 감상했다. 마지막으로는 흰 천을 깐 테이블에서 다과를 즐기는 여유까지.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한 데이트 코스였다.
사실 카인의 피아노 솜씨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피아노를 배운 것은 고작 두 달 전이었다. 순전히 루시엘의 즐거움을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연주법을 익혔다. 열 살이나 칠 법한 곡을 불협화음을 내면서 연주해도, 루시엘은 좋다며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카인은 음악에는 그리 흥미가 없었지만, 루시엘이 기쁘다면야 세상의 모든 악기를 섭렵해보고 싶었다.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게 된 다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워야지. 가능하다면 첼로도 플루트도 연주하고 싶어. 우리에게는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전문가는 아니어도 나름 소리는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 미소를 보았다면, 필시 제 눈을 의심했으리라. 카인이 저렇게 눈부시게 웃을 리 없다고, 애꿎은 눈만 연신 비벼대었겠지.
카인의 미소는 루시엘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루시엘이 오롯이 카인만을 위해 존재하듯이.
“흐읏… 딱딱해지고, 있어….”
루시엘은 양손으로 성기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아래로 열기가 느껴졌다. 정성스레 살기둥을 매만지는 모습에서 거부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손끝으로 악보를 따라 읽는 듯 섬세하고 부드러운 애무였다. 음경과 음낭 사이의 이음새를 꾹꾹 누르다가, 귀두를 둥글게 덧그렸다.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루시엘의 낯빛은 기대감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뺨을 손끝으로 가만가만 쓸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볼이 예뻤다.
아마 저 색은 일몰이 아니라 일출의 붉음일 것이라고, 카인은 생각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산한 어둠이 아니었다. 아침의 푸른 하늘이었다.
루시엘이 입을 벌려 막 귀두를 머금으려던 찰나, 카인이 루시엘의 어깨 아래로 팔을 끼웠다. 납작 엎드려 있던 상반신을 들어 올려 키스부터 했다. 작고 도톰한 입술을 통째로 삼키고, 복사빛 혀를 쪽쪽 소리가 나도록 집요하게 빨았다.
파고든 혀가 입천장을 간지럽혔다. 녹녹히 젖은 입 안에서는 단맛이 났다. 달콤한 체취가 입술과 비강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슬슬 숨이 딸리는지 루시엘이 허덕거리며 입술을 떼어내려고 했다. 달아나려고 몸부림치는 뒤통수를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능숙하게 키스를 이어가면서, 카인은 루시엘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침대에 등이 파묻히면서 반듯했던 시트가 구겨졌다.
“우응, 으응…”
위에서 내리누르듯이 입맞춤을 쏟아내자, 루시엘의 목구멍 안쪽에서 흐릿한 신음이 새었다. 카인은 그 신음조차 삼켰다. 입술을 핥고 혀를 부드럽게 빨아올리다가 볼 점막을 쓸어내렸다. 질척한 애무가 작은 입 안 전체를 잠식했다.
루시엘의 볼이 더 달아오르기 힘들만치 붉어졌을 때에야, 카인은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내었다.
농도 짙은 키스가 기분 좋았는지, 루시엘이 몽롱하게 웃었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 너머로 붉은 열기가 출렁거렸다.
루시엘은 카인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아기 새가 모이를 쪼듯 서툰 입맞춤이었으나, 루시엘이 먼저 다가왔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어서 넣어줘… 응…?”
루시엘이 카인을 졸랐다. 주어가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굳이 구멍을 풀지 말고 바로 삽입해달라는 뜻이었다.
정신이 망가지면서 성적 취향에도 이상이 생긴 건지, 루시엘은 이제 달달한 섹스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가학적인 성교를 할 때 가장 큰 쾌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풀지도 않고 바로 좆을 처넣는다던가, 아니면 목을 조른다던가, 가슴과 엉덩이를 얻어맞는다던가….
하얀 몸 가득히 순흔과 손자국을 달고서도, 루시엘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웃었다. 그럴 때면 루시엘이 ‘부서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카인은, 망가진 루시엘을 사랑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다. 혹여 지금보다 더 부서지게 되더라도, 카인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조르는 겁니까?”
오랫동안 검을 잡아 굳은살이 박인 손이, 루시엘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하읏! 루시엘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을 내질렀다. 성대를 울리는 교성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았다. 두툼한 귀두가 발갛고 조밀한 주름을 조금씩 가르고 들어왔다.
“아흐, 윽, 흐읏…”
루시엘이 달아나고 싶은 듯이 허리를 위로 들썩였다. 제가 먼저 넣어달라고 졸랐으면서, 막상 삽입 당하고 보니 쾌감이 지나치게 강한 모양이었다.
마른 몸뚱이를 아래로 한 번에 훅 끌어당기자, 살기둥이 안쪽으로 깊숙이 진척했다. 선액으로 미끈미끈해진 기둥이, 어젯밤의 정사로 살짝 부어오른 내벽을 들쑤셨다. 뜨거운 태양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듯 뱃속이 화끈거렸다. 그 열기가 기분 좋아서, 루시엘은 추삽질에 맞춰 쭈뼛쭈뼛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으응, 좋아, 카인, 좋아해….”
루시엘이 두 다리로 카인의 허리를 꽉 감았다. 빈틈없이 맞물린 결합부에서 찔꺽거리는 물소리가 튀었다. 둔부는 물론이고 허벅지까지 선액과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기둥의 혈관이 전립선에 문질러질 때마다, 루시엘은 흐응, 읏, 하는 비음을 흘렸다.
황제였던 과거? 주군을 배신한 호위 기사? 강제적인 결혼식과 감금 생활? 그런 것 따위 루시엘은 몰랐다. 그는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그럴 만한 정신머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카인이 좋다는 것뿐이었다.
카인이 좋았다. 보통 인간보다 살짝 높은 체온도, 날렵한 눈매와 오똑한 콧날도, 자신을 금방이라도 삼킬 듯 응망하는 금빛 눈동자도. 하나 같이 사랑스러웠다.
루시엘은 카인의 손도 마음에 들어 했다. 검을 잡고 휘두르는 그 손이, 이토록 섬세한 애무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특히 커다란 손으로 가는 목을 졸릴 때면, 흥분감으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목… 졸라주라….”
루시엘이 웃었다. 이지라고는 한 톨도 없는 흐물흐물한 미소. 그는 카인의 손을 잡아다 제 목 위로 올려놓았다. 어젯밤도 내내 졸린 탓에, 그의 목에는 손자국이 울긋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도 과도한 쾌감으로 숨을 쉬기 힘들어하면서, 루시엘은 완전히 숨길이 차단되길 원하고 있었다.
“변태.”
카인은 루시엘의 목을 조르는 대신, 자그마한 소리로 그를 매도했다.
“그, 그런 거 아냐… 변태가 아니라… 흐익!”
루시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인이 루시엘의 하복부를 꾹 눌렀기 때문이었다. 압박받은 내벽이 요동치며, 이물질을 억세게 조였다. 이제는 이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익숙해진 물건이었다. 툭 불거진 혈관이 점막의 주름을 지익, 하고 긁는 느낌에, 루시엘은 전신을 파득거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내… 내가 되고 싶, 어서 이런 게 아니라아… 카인 네가 날, 흐으, 이렇게에…. 만, 들었잖, 아… 아앙!”
루시엘은 힘겹게 할딱거리면서 애써 문장 하나를 완성했다. 카인을 탓하는 내용이었으나 정작 듣는 당사자는 기뻐 보였다.
“그래요. 루시엘.”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저예요.
카인은 루시엘의 배를 누르던 손을 떼어냈다. 루시엘의 바람대로, 이번에는 그의 목에 양 손바닥을 얹었다. 기도가 틀어 막혔다. 좁아진 숨통에서 쉭쉭 하는 갈급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윽, 으으, 극, 크으, 케엑…”
루시엘은 할딱거리며 절박하게 입을 벌렸다. 입 밖으로 삐져나온 혀끝이 애타게 허공을 핥았다. 혓바닥에 산소가 달라붙었지만 도저히 목구멍 너머로 넘길 수가 없었다. 흉곽이 다급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허나 그 안에 공기는 없었다.
모자란 숨이 끝내 폐부를 짜부라들게 만들었다. 땀이 눈물처럼 흘렀다. 볼을 적시고 흐르는 것이 진땀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몸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거세게 튀어 오르는 그 순간, 카인이 비로소 손에 힘을 풀었다.
“흐읏, 아, 하앙…!”
산소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자마자, 루시엘은 간단히 절정을 맞았다.
눈앞이 희게 명멸하고 내벽이 한데 수축한다. 신경이 도화선마냥 타들어 가다가 결국 폭발한다. 카인에 의해 주어지는 오르가슴은, 항상 루시엘에게 황홀경을 선사했다.
“사랑해. 카인.”
제게 기쁨을 선물해준 이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루시엘은 해맑게 방글거렸다.
◊
카인은 검은 제복을 입었다. 허리춤에 칼을 착용하고 보다만 서류를 챙겼다. 집을 나가기 전 배우자의 이마에 뽀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남기고 문턱을 넘으려는 찰나,
“카인, 잠깐만. 이거!”
루시엘이 급하게 카인을 잡아 세웠다. 그의 손에는 반지가 들려있었다. 가운데에 루비가 박힌 심플한 은반지였다.
“결혼반지 차는 거, 잊으면 안 되지.”
잊은 게 아니라 일부러 놔두고 간 거였다. 오늘의 임무는 황실에 반기를 든 중범죄자를 심문하는 것이었다. 소중한 반지에 타인의 피가 튀게 할 수는 없었다.
카인은 ‘오늘의 임무는…’까지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순순히 루시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반지 위에 가죽 장갑을 착용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루시엘이 직접 끼워주세요.”
“으응. 그래!”
루시엘은 엄지와 검지로 반지를 집었다. 카인의 왼손 약지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런 루시엘의 약지에도 작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카인의 홍채를 닮은 금빛이었다.
◊
카인은 떠났고 나는 혼자 남았다. 평소라면 카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때웠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신혼집에 침입한 불청객을 나무라는 일 말이다.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신님.”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렁이더니, 긴 백발의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길고 섬세한 속눈썹 아래 푸른 눈이 감싸여 있었다.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존재,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신이었다.
신이 입을 열었다. 성격과는 다르게 나긋한 음성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
“일어나자마자 바로요.”
신력이 없는 카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전생에 신관이었던 나는 신의 존재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아침부터 정사에 몰두했다는 건가?”
신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몰두는 기본이고, 남에게 관음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흥분하기까지 했다.
“그 쪽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지.”
내친김에 손가락을 쫙 펴서 결혼반지도 자랑했다. 나와 카인의 반지는 같은 디자인이었고,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보석의 종류만 달랐다. 배우자의 홍채 색깔을 닮아 있었다.
보란 듯이 대놓고 반지를 흔들자, 신의 미간이 무참히 구겨졌다.
“루시엘, 거짓 위에다가 지은 집은 말이다.”
신이 내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두 뼘 거리가 훅 좁혀졌다. 백장발이 서릿발처럼 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맨살을 쓰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섬뜩했다.
“들키는 순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버리게 된단다.”
차가운 숨결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수의 첨예한 발톱이 가슴을 내리찍기라도 한 것처럼, 쿵, 하고 심장이 세차게 경련했다. 나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고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거야 들키지 않으면 될 일이죠.”
“상당히 자신 있는 말투로군.”
“실제로 연기에는 꽤 자신이 있답니다.”
나는 신의 눈초리를 피하지 않았다. 떳떳하게 턱을 쳐들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한 번 내린 신벌의 내용은 바꿀 수 없다. 카인이 지금처럼 내 사랑을 믿지 않는 한, 신은 결단코 카인을 죽이지 못한다. 그걸 알고 있기에, 신은 나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대가 목이 쉬어라 우는 모습을 꼭 보고 싶군.”
“카인은 매일 밤마다 특등석에서 관람하고 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말버릇하고는.”
신이 쯧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카인에게 하도 물고 빨린 탓에 혈관이 붉게 팽창해있었다. 툭,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가를 엄지 배가 쓸고 지나갔다.
입술을 지분거리던 손이 이번에는 목울대를 스쳤다. 카인이 남겨놓은 흔적을 되짚기라도 하겠다는 듯, 발간 자국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독을 품은 뱀이 목 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목덜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신의 손길을 냉담하게 쳐내었다. 하하,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신이 청량하게 웃었다. 웃는 낯으로 속살거리는 참담한 저주의 말.
“그대의 연극이 하루빨리 막을 내리기를 기대하지.”
공간이 한 번 더 출렁거렸다. 신의 윤곽이 빠르게 공기 중으로 녹아들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텅 비어버린 방의 한가운데로, 햇빛이 말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눈부신 허공을 바라보았다. 짓씹듯 이 한 문장을 내뱉었다.
“아니요. 연극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
카인은 심문실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경첩이 덜컹거리며 귀신의 울음 같은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저벅, 저벅. 쇠로 된 바닥과 구둣발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어스레한 울림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오셨습니까. 부단장님.”
심문관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카인은 대강 인사를 받아주고서, 곧바로 죄수를 심문할 준비를 했다. 어젯밤 황제를 암살하려고 한 중죄인이었다. 황제의 침실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잡혔지만, 그렇다고 하여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죄인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심문관에게 한참을 시달린 모양인지, 그의 꼴은 처참했다. 핏기 없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과 핏발 선 눈동자. 신음을 참는답시고 하도 깨물어댄 탓에 헤지고 부르튼 입술. 그가 입을 벌려 간신히 호흡할 때마다, 검붉은 피 뭉텅이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여기, 제가 심문을 통해 얻어낸 자료입니다. 조금만 건드렸는데 술술 불더군요.”
카인은 심문관이 건넨 노트를 받아들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페이지를 넘겼다. 죄인의 이름은 세드릭. 백작 가문의 삼대독자. 암살을 시도한 이유는…
‘단테는 회색 머리칼을 가졌다.’
“…고작 이런 이유로 폐하께 반기를 들었다고?”
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세드릭이, 그의 말에 반응하여 턱을 번쩍 쳐들었다.
“고작이라니! 예로부터 은발은 황권의 상징이었다. 황제의 피가 섞인 이상, 은빛 머리칼을 가질 수밖에 없어. 심지어 폭군으로 악명 높았던 루시엘도 머리는 은색이었다.”
녹슨 멍으로 아롱진 몸뚱이에도 아직 힘은 남아 있었던 걸까, 세드릭은 마지막 기력을 끌어모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회색이다. 찬란한 은발을 퇴색시킬 만큼의 불결한 피가 섞였든지, 아니면 아예 황실의 혈통이 아닌 것이 분명해! 분명 어미라는 자가 황제 몰래 바람을 피웠겠지. 저런 자가 제국의 최고 지도자라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는 의자에 결박된 채로 발버둥을 치다가, 제풀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완전 돌아버렸나 봅니다.”
심문관이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더 이상의 심문은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이쯤에서 끝낼까요? 부단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동의하는 바다.”
카인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
카인은 심문실을 나왔다. 가죽 장갑을 벗어 안쪽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세드릭의 말을 곱씹었다. 은발은 황권의 상징이라고 했었지.
아무리 황제가 어질어도, 불만을 표하는 무리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었다. 특히 단테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핏줄이었다.
단테의 어머니는 자작가의 둘째 여식이었고, 뒷배라고 할 게 없었다. 게다가 단테의 머리는 빛을 잃은 회색이다. 혈통주의자들이 불만을 가질 만했다. 루시엘이 친부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않았어도, 단테가 황위에 오를 일은 없었을 터였다.
‘정치란 건 복잡하군.’
카인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서 신경을 껐다. 비록 황실 소속의 기사이기는 했으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신경은 오직 한쪽에만 쏠려 있었다. 루시엘과 단둘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카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카인!”
삼 층 복도를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계단 위에서 카인을 불렀다. 카인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채도 없는 머리칼이었다. 조각난 먹구름을 닮아 어렴풋한 회색빛. 그다음으로는 붉은 눈동자가 주의를 끌었다. 루시엘과 엇비슷한 핏빛이었다.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자네를 부르려던 참이었어.”
단테가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왔다. 둘은 인기척 드문 복도 구석에 섰다. 햇살도 채 발이 닿지 않는 곳, 어스레한 그림자가 모퉁이에 구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 베넬 일 말일세.”
베넬. 간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베넬이 루시엘에게 저지른 죄만 생각하면, 두 달이 훌쩍 지난 지금도 피가 자글자글 끓었다. 뇌가 불타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그때 베넬을 너무 쉽게 죽였다. 수십 번도 더 해온 후회를 또다시 반복하며, 카인은 단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루시엘의 시종으로 뽑았던 자가 저런 인간 말종일 줄은 몰랐네. 자칫하다가는 영영 루시엘을 잃을 뻔했어. 내 불찰이야. 진심으로 사과하지.”
사과를 건네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인은 무감한 낯빛으로 단테를 응시하다가, 창밖으로 눈길을 고정시켰다. 사방이 붉었다. 노을이 불길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카인이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용건이 뭡니까?”
“…….”
“미안하다는 말만을 전하는 게 목적은 아닐 테지요. 솔직하게 말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나는…”
단테는 한참을 어물거렸다. 쉬이 뱉어낼 수 없는 문장들이 입가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카인은 순순히 단테를 기다려줄 만큼 여유가 있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할 말이 없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인이 냉정하게 몸을 돌리려는 찰나, 단테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작고 뭉개진 음성이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저 말을 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형은… 잘 지내나?”
오랜만에, 단테가 루시엘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도 ‘형’이라는 표현을 쓰십니까.”
“알았네. 정정하지. 루시엘은 요즘 어떤가?”
“잘 지냅니다. 많이 웃고요.”
단테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처음에 단테는, 카인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루시엘이 웃는다니. 농담이라 치기에도 질이 나빴다.
루시엘의 인생을 망쳐놓은 것은 카인이다. 카인과 함께 있으면서 제 형이 행복할 리 없다.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라고, 카인을 다그치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르던 그때.
창문만 바라보던 카인이, 단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시야 가득히 기사의 얼굴이 비쳤다.
말갛고 캄캄하고 반짝이는 낯빛. 사근사근한 행복이 층층이 얽혀 있는 표정. 온화하게까지 보이는 그 얼굴을 마주하는 찰나, 발끝부터 소름이 고였다.
거짓을 고하면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카인의 대답은 순전한 진실이었다.
위아래로 요동치던 석류색 눈동자가 언뜻 카인의 손을 훑었다. 왼손 약지. 심장과 가장 가까운 혈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새빨간 루비와 광택 나는 은. 색의 배합이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 순간 단테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가. 루시엘은 결국 정신을 놓아버린 건가.
심장이 욱신거렸다. 누군가가 제 심장을 손아귀에 넣고 세게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손은 루시엘의 것일 테다. 루시엘을 향한 자책감이, 이토록 단테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치료한다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네.”
단테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애써 기워나가며, 너덜너덜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최근에 달의 왕국에서, 정신이 불안정한 이들을 위한 치료제를 개발했다고 들었어. 내가 녹시아에게 부탁해서 약을 얻어올 테니…”
“필요 없습니다.”
“뭐… 라고?”
“제정신이 박힌 채로 괴로운 것보다는, 미친 상태로 행복한 게 더 나을 겁니다. 저도, 루시엘도….”
그러니 이편이 최선입니다. 폐하. 카인이 빛바랜 미소를 지었다. 창문 틈새로 흘러내린 노을이. 카인의 뺨 위로 붉은 장막을 쳤다.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발그스레한 두 볼.
그제야 단테는 깨닫고야 말았다. 미쳐버린 자는 루시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카인도 루시엘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대가 하는 건… 결코 사랑이 아닐세.”
단테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카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망연자실한 단테를 내버려 두고, 제 사랑이 기다리는 신혼집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
“…루시엘?”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루시엘은 책상에 앉아 두꺼운 도서를 읽고 있었다. 초창기 제국 황실의 향락 문화를 설명해놓은 역사책이었다. 루시엘이 책을 읽는다고? 그것도 황실에 관한 서적을? 설마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루시엘,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
루시엘이 슬며시 책을 덮었다. 그는 머쓱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
“수업 전까지 책 한 권을 다 읽어오라는 숙제, 하지 못했어요….”
숙제?
“저는 나쁜 학생이에요. 체벌해주세요….”
루시엘은 울먹거리며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루시엘의 정신이 예상보다 꽤 많이 붕괴된 모양이었다. 카인을 교사로, 스스로를 학생으로 착각할 정도라니.
카인은 루시엘이 학생이 아님을 상기시켜줄 수도, 루시엘에게 맞춰 상황극을 이어 나갈 수도 있었다. 카인은 별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숙제 안 했으니까… 선생님 거, 빨아 드릴게요.”
숙제를 안 한 것과 가정교사에게 구음을 해주는 것 사이에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카인은 조금 궁금해졌지만 구태여 따지지 않기로 했다. 루시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즐거울 따름이었다. 경어를 쓰는 루시엘은 귀했으니 말이다.
카인은 침대 머리맡에 앉았고, 루시엘은 그 아래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카인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잡고서, 이빨로 바지 지퍼를 잡아 내렸다. 입술만을 사용해 드로즈를 벗기자 성기가 퉁, 하고 튀어나왔다. 원을 그리듯 움켜쥔 손아귀에서 더운 맥박이 뛰었다.
루시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양손으로 붙잡은 음경 끝을 서서히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입술을 한껏 벌려 귀두를 머금고는,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은빛 머리칼이 허벅지 안쪽을 살짝 간질였다.
“우웁, 욱…!”
뜨거운 이물이 구강을 가득 채우자 턱 하고 숨이 막혀왔다. 루시엘은 괴로운 듯 눈을 흘겼다. 속눈썹이 깃털처럼 팔랑거렸다.
“그으, 윽, 으응…”
물론 고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단한 좆이 입천장과 볼 점막을 쓸어 올릴 때마다, 등줄기에 저릿한 전류가 흘렀다. 깊숙이 받아들이는 순간 작열하는 이물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구음을 하는 것만으로 중심부에 열이 몰렸다. 옷 위로 성기의 윤곽이 언뜻 드러났다.
“이걸 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상이라고 해야 할지….”
카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는 루시엘의 아랫도리로 발을 가져다 대었다. 반쯤 부푼 좆을 지그시 누르자, 울컥거리는 성기가 표피를 뚫을 만큼 단단해졌다.
“우윽, 웅, 으… 극…”
그러나 입과 사타구니를 자극받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카인의 물건이 윗입 말고 아랫입을 채워준다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을 하자 배 안쪽이 쿵쿵 울렸다.
루시엘은 손을 뒤로 뻗었다. 애널 주위를 꾹꾹 누르다가 검지부터 슬쩍 밀어 넣었다. 뒷구멍을 만지작거리는 데에 정신이 팔려, 정작 구음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집중해야지.”
말 안 듣는 과외생을 타이르듯이 얘기하며, 카인은 루시엘의 가는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뒤통수를 꽉 눌러 그의 얼굴을 제 허벅지 사이로 끌어내렸다. 부릅뜬 붉은 눈에 검은 음모가 비쳤다.
“커억, 큭, 우윽, 윽…!”
뜨거운 살덩이가 여린 입속을 제멋대로 침범했다. 목젖이 짓눌렸고 목구멍이 관통되었다. 이러다가 비좁은 식도까지 열어젖힐 기세였다.
구강도 목도 머릿속도 온통 질척질척했다. 열감으로 뇌수까지 타버릴 것 같았다. 루시엘은 카인의 허벅지에 손톱을 세웠다. 머리를 누르는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루시엘은 빠르게 저항을 그만두었다. 대신 낑낑대며 목구멍을 열었다. 귀두가 안쪽을 파고들며 무른 살을 들쑤셔놓았다. 깊은 삽입에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는데, 그 감각이 미치도록 기분 좋았다.
크읏. 카인이 짧은 숨을 들이켰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로 내동댕이치듯 쏟아졌다. 끈덕진 백탁액이 목구멍을 휘감았다.
루시엘은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 필사적으로 정액을 삼켰다. 미처 삼키지 못한 남은 정액과 쿠퍼액이, 입술 위로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열락으로 불긋하게 물든 낯빛이 선정적이었다.
“책 읽는 거 말고, 다른 숙제는 다 끝냈어?”
루시엘의 입가에 묻은 체액을 닦아주며, 카인이 물었다. 교사답게 반말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숙제요?”
루시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숙제를 내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카인은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는 서랍에서 모조 성기를 꺼내었다. 아랫부분에 부착 면이 있어서, 바닥에 붙여 고정시킬 수 있는 형태였다.
“이거 사용해서 구멍 쓰는 법 연습해오라고 했잖아. 설마 이것도 잊어버렸나?”
“아, 아니에요. 혼자서 성실히 공부했어요.”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네, 선생님.”
루시엘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구부리고서, 딜도 끄트머리를 입구에 맞추었다. 도톰한 애널이 뻐끔거리며 첨단부를 욕심껏 잡아채었다.
천천히 허리를 내리며 딜도를 받아들였다. 내벽이 꿈틀꿈틀 수축하며 무기질의 기둥을 빨아들였다. 전립선을 정통으로 눌리자 무릎이 바르르 경련했다. 하응, 흣! 눈앞이 하얗게 퇴색되며, 저절로 뒷구멍이 조여들었다.
“으응, 읏! 흐으… 응…”
별로 허리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허벅지에 힘이 풀렸다. 루시엘은 가까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둔부를 밑으로 내릴 때면 딜도가 깊숙한 곳을 들쑤셨고, 힘을 주어 허리를 올릴 때면 기둥이 내벽을 그으며 길게 빠져나갔다. 땀으로 허벅지 안쪽이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흐읏, 힘들… 선생님, 힘들어, 요… 아앗! 흐읍…!”
루시엘이 끙끙대며 잇새로 앓는 소리를 토해냈다. 요분질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흐물흐물하게 녹아가는 점막 사이로 애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딜도도 바닥도 축축한 얼룩이 졌다. 이러다가는 애액의 웅덩이가 생길 판이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낙제점인데.”
카인이 짐짓 심각한 목소리를 내었다.
“선생님께 아니라서 그래요….”
루시엘이 자그마한 어조로 칭얼대었다. 부끄러운지 볼뿐 아니라 귓바퀴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응?”
“이런 장난감 말고, 선생님 걸로 할래요. 그럼 더 잘할 수 있어요.”
루시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반듯이 세웠다. 눈앞에 있는 가정교사의 품에 폭 안겼다.
그는 카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목마른 자가 생수를 갈구하듯이 카인의 혀를 빨아대었다. 입 안은 물론이고 입가까지 흥건해지도록, 타액을 나누고 볼 안쪽을 더듬었다.
그래. 낙제점이면 뭐 어떠랴. 제 학생이 이렇게나 귀여운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카인은 루시엘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이미 흐물흐물 녹아있는 안쪽에 성기를 처박았다. 활짝 열린 구멍이 오물거리며 이물질을 반겼다. 오랜 마찰로 흐물흐물하게 풀린 내벽이, 검붉은 살기둥에 진득하게 휘감겼다.
흉흉히 불거진 핏줄이 전립선을 후벼 파듯이 누를 때면, 루시엘은 달뜬 숨을 뱉어내며 카인을 힘껏 껴안았다. 두 다리로 카인의 허리를 꼭 감았다.
“하읏, 응, 기분… 좋아아… 으읏, 하으응…. 흐으…”
그래, 이걸 원했다. 장난감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뜨거운 것이, 점막에 치덕치덕 쿠퍼액을 펴 발랐다. 내부가 한계까지 벌어지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루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으면 성기에 돋아난 혈관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느낄 수 있어서 기뻤고, 눈을 뜨면 카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점유하고 있어 흡족했다.
“좋아, 해요… 선생님,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루시엘은 가만가만 사랑을 속삭였다. 카인의 어깨에 제 뺨을 부비며 서툰 교태를 부렸다. 그런 루시엘을 보며 카인은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만은 확실히 우등생이라고.
상대의 몸을 사슬처럼 휘어감은 팔과 다리. 카인이 없으면 자신도 살 수 없다는 듯, 애타게 등을 찍어 누르는 손톱. 사랑인지 쾌감인지 모를 것으로 발개진 두 뺨.
할딱거리는 입술과 흘러내리는 혀를 기꺼이 놀려, 루시엘은 카인에게 사랑을 말한다. 진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몽실몽실하게 녹아 있는 목소리.
시각, 청각, 촉각…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워 루시엘을 느끼고 있노라면, 카인은 종종 이런 착각을 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정말로, 루시엘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착각은 항상 몇 초도 되지 않아 머릿속에서 휘발된다.
사랑이라니. 그럴 리 없다. 루시엘은 단순히 망가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제 원수를 향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깨진 거울이 달싹이며 의미 없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이걸로 족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수업, 또는 수업을 빙자한 섹스는 밤 내내 이어졌다. 루시엘이 스스로가 학생이 아님을 깨달은 후에도 계속.
“저도 사랑해요, 루시엘.”
“으응, 당연히 알고 있지… 카인이 나, 많이 좋아하는 거…. 사랑해줘서, 흐으, 고마, 워…”
카인은 거칠게 허리를 파묻었다. 내벽이 압박되어 일순 형태를 바꿀 만큼 세찬 추삽을 이어 나갔다. 탐미하듯 일부러 느리게 좆을 빼내자, 루시엘은 손톱을 세워 카인의 등을 긁었다. 쓰라림은 없었다. 그저 제 등에 루시엘의 흔적이 남는다는 게 기꺼웠다.
정액이 분출되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것보다 서너 배는 많은 수인의 씨물이, 안쪽 깊은 곳에 쏟아졌다. 애액으로 매끄럽게 젖어 있던 내부를 더욱 흥건하게 적셨다. 후응… 루시엘이 만족스러운 비음을 토해냈다.
◊
노곤하게 늘어진 루시엘을 들어 욕조에 눕혔다. 루시엘이 좋아하는 달달한 향유를 두어 방울 떨어뜨렸다. 오늘의 향기는 무화과.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이 물에 섞여 묵직하게 퍼져나갔다.
루시엘은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생글생글한 미소가 얼핏 번져가는 걸로 보아,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요즘 루시엘이 하는 생각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밝은 망상. 그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행동했다.
미쳐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날 놓아달라며 밤마다 울어 젖혔던 옛날보다는, 고장 난 지금이 훨씬 나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으응.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루시엘이 보드랍게 방실거렸다.
“계속 이렇게 즐거운 일만 있었으면 좋겠어.”
물에 젖은 손가락이 카인의 뺨을 쓸었다. 그의 손에서는 막 쪼갠 무화과향이 났다. 새큼하고 달차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볼에 닿는 손끝의 감촉이 기분 좋아서, 카인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루시엘.”
카인은 루시엘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물먹은 은발을 상냥하게 쓸어내렸다. 루시엘은 얌전하게 카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사실이 또 새삼 기뻤다. 그가 더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거예요.”
◊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입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카인과 나는 천생연분이 맞았다. 내 즉석 역할극에 이렇게 잘 어울려줄 줄이야.
숙제 운운하면서 성기구를 꺼내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감동이었다. 고마워, 카인. 너는 최고의 가정교사야.
그 후로도 나와 카인은 자주 롤플레잉을 했다. 대본 따위는 없는 조잡한 연극이었지만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내가 소매치기인 척하면 카인은 경관 흉내를 내며 반응해줬고, 내가 적국의 첩자가 되면 그는 군말 없이 심문관이 되어주었다. 말이 롤플레이지, 카인 입장에서는 내 정신이 굉장히 오락가락하는 걸로 보였을 거다.
그리고 역할극을 하면서 느낀 건데, 카인도 연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주어진 역할에 착실히 임하는 건 물론이고 대사도 정성껏 꾸며낸다. 어떻게든 나한테 맞춰주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고도 귀여웠다.
역할 플레이는 대강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
[경관과 소매치기]
“몇 번을 말해야 해. 난 도둑이 아니라고 했잖아. 잃어버린 지갑을 왜 나한테서 찾는 건데!”
“그야 그쪽 몸을 뒤져보면 밝혀지겠지.”
“어… 어딜 만지는 거야? 미쳤어?”
카인은 반항하는 루시엘을 찍어 눌렀다. 상체가 뒤로 넘어가며 등이 테이블에 닿았다. 윗옷에 달린 큼지막한 주머니부터 바지의 앞주머니와 뒷주머니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허나 먼지만 떨어질 뿐 동전 하나 나오지 않았다.
“봐봐. 없지? 괜히 생사람 잡지 말고… 흐읍!”
하반신을 더듬던 손이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하의 위로 구멍을 꾹꾹 누르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바동거릴 틈도 없이 바지가 벗겨졌다. 흘러내린 천이 족쇄처럼 발목을 감쌌다.
“거, 거기는 대체 왜… 흐으, 읏…”
손가락이 아래쪽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섬세하게 내벽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점막이 억눌리듯이 위로 밀렸다. 툭 불거진 손마디가 내벽을 강하게 누를 때면, 허리가 허공으로 가볍게 떴다.
“…없군. 좀 더 안쪽에 있으려나.”
카인은 이상한 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였다. 평소였다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끈덕진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취해버린 탓이었다.
가운뎃손가락이 삽입된 안쪽에 중지와 약지까지 한꺼번에 넣었다. 애액이 찔꺽거리며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안쪽을 끈질기게 파고들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유난히 도톰하게 융기되어 있는 부위, 전립선이었다. 힘을 주어 그곳을 거칠게 쑤시자, 루시엘의 신음이 높아졌다.
“하아… 으, 아극, 흐읏…!”
연약한 속살이 격렬하게 애무되는 감각은, 루시엘에게 오싹함과 쾌락을 동시에 선사했다. 말캉한 내벽을 거침없이 찌르다가 극점을 뭉근히 쓰다듬었다. 머릿속이 한데 휘저어지기라도 하는 듯, 정신이 몽롱했다.
“난, 훔치지 않았… 흐응, 아악, 아!”
혀가 맥없이 늘어졌다. 입을 열면 신음이 쏟아지는 통에, 이제는 무죄를 주장하는 것마저 버거웠다.
이쯤 되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릴 법도 한데. 아니, 애당초 그런 곳에 물건이 감춰질 리 없는데…! 비합리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비상식적인 쾌감에, 루시엘은 애꿎은 탁자만 긁어내렸다. 손톱이 희게 질렸고 손등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손가락으로는 닿지 않는 모양이군.”
한참 동안 안쪽을 헤집어대던 카인이, 마침내 손가락을 빼내었다. 세 손가락이 한꺼번에 뽑히며 찌꺽거리는 물소리를 만들어내었다. 물기를 머금고 활짝 열린 애널로 시선을 옮겼다. 구멍 가장자리가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힘없이 빠끔거리는 꼴이 곧 망가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뭐… 대체 뭘 하려고…”
바들바들 떠는 루시엘을 무시하고서 그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쉴 틈도 주지 않고 무작정 제 것을 찔러 넣었다.
루시엘이 컥컥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는 목줄기가 카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르르 울렁이는 목젖을 잠깐 바라보다가 가만히 입술을 포개었다. 입속에 뭔가를 감춰놓았는지 찾아내겠다는 듯, 구강 안쪽을 섬세하게 훑어나갔다.
“흐으, 우응, 윽…”
키스는 짙고도 길었다. 폐 속의 숨마저 남김없이 훔쳐 갈 것 같았다. 카인은 위로는 루시엘의 입술을 삼키면서, 허리 아래로는 계속해서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윗입도 아랫입도, 붉고 습한 살덩이로 가득 들어찼다. 부족한 숨이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루시엘은 너무나도 손쉽게 절정을 맞았다. 줄줄 흘러넘치는 백탁액이 맞붙은 카인의 복부를 적셨다.
이쯤에서 한 번 도둑의 변명을 들어주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카인은 입술을 떼어내었다. 잠깐 허리 짓을 멈추고서 루시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훔친 적, 히윽, 없다니까… 흐읏, 응…”
아무래도 더한 체벌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
[심문관과 첩자]
눅눅하고 캄캄한 심문실…이 아니라 밝고 안락한 침실. 루시엘은 수갑을 찬 채로 하염없이 박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성기 밑동을 꽉 동여매고 있는 천 때문이었다. 천이 사정을 막고 있었다. 하필이면 리본 모양으로 묶어져 있어 수치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가, 가고 싶어… 풀어줘, 부디…”
루시엘이 마른 목으로 애원했지만, 카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뒤로 물렸다. 아예 빼내는 대신 구멍에 귀두 부분만 걸치듯이 넣었다. 선단부를 삼킨 채 움찔거리는 주름을 문지르다가 양쪽 볼기를 잡아 벌렸다.
“전에 말했을 텐데. 사정하고 싶으면 네놈의 정체부터 밝히라고. 어디에서 보낸 첩자냐? 반란군 측이냐, 아니면 흑마법사의 잔당이냐?”
“내가… 말할까 보냐… 후응, 아… 읏!”
성기가 점막을 긁으며 느리게 삽입되었다. 천천히 내벽을 헤집는가 싶더니 예고도 없이 퍽, 하고 안쪽을 강하게 쳐올렸다.
긴장감에 구멍을 조이면, 아랫배에서 들끓는 열이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 답답한 열기에서 해방되고 싶은데,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성감이 과했다. 체내에 피 대신 정액이 부글거리는 것 같았다.
성기는 끝을 모르고 꾸역꾸역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더는 삽입할 공간이 없는 것 같은데도 어떻게든 연약한 점막을 벌려놓았다. 귀두가 결장 부근을 쿡쿡 건드렸고, 살기둥이 전립선을 압박했다. 배꼽 안쪽이 문질러질 때마다 시야가 새하얗게 터져 나갔다.
“우윽, 아흐, 하으응-!”
절정은 절정인지도 모르게 찾아왔다. 파정은 하지 못했으나 내벽이 확 수축했다. 루시엘은 허리를 비틀며 눈을 부릅떴다. 오르가슴을 맞았지만 성기는 발기한 그대로였다. 혈관을 쟁쟁 울리는 열기 또한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거 풀어엇… 앞쪽, 제바알… 흐읏, 으으…”
루시엘이 절박하게 흐느꼈다. 이러다가는 복상사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네놈의 소속을 밝히는 게 먼저겠지.”
카인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이미 좆을 빠듯하게 물고 있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엄지가 꿈질꿈질 애널을 파고들었다. 목 너머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 반란군… 반란군 측에서…”
결국 루시엘이 백기를 들었다. 통각에 가까운 쾌감을 이기지 못해, 제 정체를 고백해버리고 만 것이다.
“잘했다. 어차피 말하게 될 거, 진작 털어놓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카인은 착한 아이를 칭찬하듯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곧 성기를 압박하고 있던 끈을 풀어주었다.
벌건 요도구가 안쓰럽게 벌름거리며 희멀건 정액을 뿜어내었다. 정액을 다 쏟아낸 후에는 실금하듯 말간 체액을 질금질금 흘렸다.
카인은 부러 느긋하게 성기를 빼내었다. 정욕으로 물든 허벅지 안쪽을 따라 애액이 주르륵 떨어졌다. 선홍색 속살이 성기에 붙어 밖으로 언뜻 딸려 나갔다. 내벽에 미지근한 공기가 닿았다. 꽉 차 있던 복부가 갑자기 훅 꺼지는 느낌이 기괴했다.
루시엘이 기묘한 감각에 적응하기도 전에, 카인이 한 번 더 허리를 밀어붙였다. 구멍 주름이 진득하게 귀두를 휘감았다. 루시엘은 박힐 때마다 맑은 물을 줄줄 쌌다.
“어, 어째서… 심문은, 이제 끝났, 흐윽, 악!”
“제국을 기만한 죗값은 따로 치러야겠지?”
카인이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심문의 탈을 쓴 성교는 아주 오래 이어질 예정이었다.
◊
‘하아… 오늘도 즐거웠다.’
나는 침대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푹신한 시트가 등을 떠받치는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몸을 돌려 카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막 씻은 몸에서는 나와 똑같은 비누 향기가 났다.
이렇게 우리가 한 침대를 쓸 수 있다는 게, 같은 이불을 덮고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기쁘고도 뭉클한지. 이 흔한 일상을 가꾸기 위해 우리는 참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아주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신의 살기 어린 눈초리는 여전히 나와 카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름 전만 해도 신이 친히 지상에 강림하지 않았던가. 그대의 연극이 빨리 막을 내리기를 기대한다는, 소름 끼치는 경고의 문구를 전하려고 말이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루시엘.”
카인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굳어지려는 얼굴 근육을 풀었다.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서 카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라고 물었다. 밝다 못해 슬픔이 모조리 사장된 음성.
“점술가들이 나누던 얘기를 주워들었는데…”
그가 조곤조곤 귀엣말을 했다.
“오늘 새벽 두 시경에 유성우가 떨어질지도 모른대요.”
“정말? 예쁘겠다.”
딱히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맞장구를 쳐주었다. 별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추락하든,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유성을 관찰할 시간에 카인의 얼굴이나 더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같이 별똥별 보러 갈래요?”
“응. 좋아!”
하지만 카인이 별을 보러 가자 권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애인과 함께 집 앞 정원에 앉아 유성우를 관람한다니. 낭만의 현신 그 자체였다.
나는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려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지고 말았다. 거친 정사의 여운이 전신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카인이 나를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필시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으리라.
카인은 이불째 나를 안아 들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금세 현관문 앞에 다다랐다.
덜컥, 문이 열렸다. 서늘한 바깥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월이었지만 밤공기는 아직도 차가웠다. 다행스럽게도 기침은 나오지 않았다. 카인의 체온이 따듯한 덕분이었다.
“루시엘, 저기!”
카인이 검지를 쭉 뻗었다. 답지 않게 들떠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높은 천장에서 저기 산 너머로, 별똥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긴 꼬리가 환영처럼 따라붙었다. 밝은 빛줄기들이 검보라색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별을 보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무엇을 기원할지는 일찍이 정해져 있었다. 첫 번째 생부터 열세 번째 생까지, 내가 바라왔던 것은 단 하나였다. 오직 하나의 소원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추락하는 별을 쳐다보았다. 별똥별의 꼬리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런 평화로운 하루가 계속되기를.
카인은 과연 어떤 소원을 빌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어내고는, 카인의 속마음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잘게 무너지는 별빛을 응시하며, 카인은 생각했다.
‘루시엘이 영영 망가진 채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