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붕괴
‘신혼집’으로 향하는 내내, 루시엘은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손톱을 세워 카인의 등을 할퀴고, 어깨를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기력이 다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카인은 루시엘을 소중하게 안아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차디찬 밤이 길게 누운 거리를 지나, 호화롭고 웅장한 황궁의 정문을 거쳐, 먼지가 착란처럼 떠도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 기어이 익숙한 방의 문턱을 넘었다.
늘 같은 장소에 놓여있는 가구들과, 엷은 잔무늬가 새겨진 밝은색 벽지. 테이블 위의 화병과 그 안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노란 수선화. 낯익다 못해 아예 질려버린 정경.
아, 결국은 돌아와 버렸구나.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루시엘은 눈을 꾹 감았다. 밀폐된 눈꺼풀 위로도 방의 모습은 생생히 그려졌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는 끅끅거리며 깨진 거울처럼 울었다. 쓰라릴 정도로 부어오른 눈가에서, 눈물이 거울 조각처럼 아롱져 떨어졌다. 허나 그 싸늘한 파편은, 카인의 마음에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카인은 루시엘을 안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도 루시엘도 일단은 씻는 게 급선무였다. 핏물을 흠뻑 뒤집어쓴 기사와, 샅과 둔부에 윤활제가 치덕치덕 묻은 폐제. 기실 카인은 저에게서 풍기는 짙은 혈향보다는, 루시엘에게 달라붙은 타인의 체취가 훨씬 거슬렸다.
몸에 물을 부어 대강 피를 씻어낸 후, 욕조 한가득 물을 받았다. 딱 기분 좋게 노곤해질 만큼 물의 온도를 맞추었다. 먼저 루시엘부터 욕조 안에 집어넣은 후, 카인도 천천히 몸을 담갔다.
새하얀 욕실 바닥으로 물이 철썩 흘러넘쳤다. 표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작고 따스한 바다에 와 있는 듯했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덮개를 씌우듯 발그레한 등을 제 상체로 감쌌다. 심장 아래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일렁이는 수면 아래로 루시엘의 마른 몸이 보였다. 따스한 물이 배어든 살결은 예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나긋나긋한 몸통, 가는 팔과 늘씬한 다리. 군살 하나 없는 호리호리한 나신을 눈 끝으로 살피다가, 판판한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잡을 살도 없는 가슴을 그러모아 손끝으로 유두를 툭 건드렸다. 긴장이라도 한 건지, 루시엘이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아흐, 읏, 목욕 중에, 지금 뭐 하는…”
“씻겨주고 있잖아요.”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카인은 루시엘을, 저만의 방식대로 씻기고 있었다. 잠깐이라고는 하나 남의 손을 탄 몸 위로, 제 흔적과 체취를 덮어씌우고 있었다.
가슴팍을 슬슬 쓸다가 유륜을 둥글리듯 문질렀다. 젖은 피부는 손에 달라붙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얼마 만지지도 않았는데, 젖꼭지가 금세 뾰족하게 섰다.
부푼 유두를 지분거리다가 잡아 비틀자, 루시엘의 허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 연분홍색 성기가 벌써 꺼덕거리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카인의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성기는 건드리지도 않고 곧바로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손가락이 구멍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내벽을 파고들고 점막을 더듬으며 안쪽을 넓혔다.
검지와 중지를 가위질하듯 넓게 벌리자, 좌우로 비죽이 열린 구멍 틈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따스한 물이 윤활제마냥 점막을 적셨다. 그 생경한 감각에, 루시엘은 혀를 빼물고서 할딱였다.
“이, 이거 이상, 흐읏, 으, 그만…. 물이, 안쪽에 들어가, 서… 흐익!”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허전한 듯 옴죽거리는 구멍에 선단 끄트머리가 닿았다. 오밀조밀한 주름이 벌어지며 조금씩 성기를 집어삼켰다. 질펀하게 젖은 내벽이 살기둥에 휘감겼다.
카인이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추삽질을 할 때마다 물이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욕조 물이 찰랑이며 살갗을 쓸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꼭 끌어안은 채로, 그의 목덜미와 뺨, 붉어진 귓바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제 살내음으로 루시엘을 온통 덮으려는 듯이, 집요한 키스를 이어 나갔다.
입술 아래로 느껴지는 살결은 물에 젖어 보드라웠다. 입욕제를 풀지도 않았는데, 루시엘의 몸에서는 달큰한 향기가 났다. 그 체향에 취해 아주 죽어버려도 좋을 것만 같았다.
“하응, 앗! 흐아, 아아…!”
루시엘은 몸을 떨며 허덕였다. 눈물과 수증기, 그리고 쾌감. 온갖 것으로 젖어든 눈앞이 뿌옜다. 시야가 흐릿해지자 청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욕실 벽에 부딪힌 신음이 웅웅 울렸다. 장소 때문인지 유달리 소리가 크게 들렸다. 교성을 참아보려고 입술을 꾹 깨물어봤지만, 잇새로 새어 나오는 달뜬 신음은 막을 수 없었다.
이 뒤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자신은 또 절정을 맞을 것이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뒤가 쑤셔지고 전립선이 짓눌리는 행위로 오르가슴을 느끼고, 파정하고, 아양을 부리는 듯한 신음을 내지를 테다.
욕실을 나온 후에도 섹스는 계속될 거다. 침대, 탁상, 바닥… 자신은 가능한 거의 모든 곳에서 범해질 거다. 혼절할 때까지, 어쩌면 혼절한 후에도 끊임없이. 카인이 분명 그리 말했으니까. 루시엘을 망가뜨릴 거라고 했으니까….
‘…망가지고 싶지 않아….’
두려움이 몰려왔다. 루시엘은 결국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그을린 울음이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
◊
카인은 침대 위로 올라가, 루시엘을 제 무릎 위로 엎드리게 했다. 카인의 허벅지에 루시엘의 하복부가 닿는 자세였다. 카인은 검은 옷을 위아래로 단정하게 갖춰 입은 것에 반해, 루시엘은 속옷도 입지 못한 완연한 알몸이었다.
자세도 옷차림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엄한 부모에게 체벌받기 직전의 철없는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루시엘은 아득바득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지만, 카인이 루시엘의 등을 한 손으로 꽉 짓누르고 있는 통에 쉽지 않았다. 희고 가지런한 발이 맥없이 시트를 구겼다.
“몇 대 맞을 겁니까?”
카인이 서느렇게 물었다. 말투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제 아랫것을 대하는 듯, 차갑고 딱딱한 어조. 날카로운 말의 날에 베일 것 같았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데? 뭘 잘못했다고?”
루시엘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서 바락 소리를 질렀다. 몸을 움직일 힘은 없어도, 입을 놀릴 기력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반성할 때까지 맞는 걸로 하죠.”
“뭐, 자, 잠깐… 흐윽!”
카인은 손을 번쩍 치켜들고는, 루시엘의 오른쪽 볼기를 내리쳤다. 단단한 손바닥과 말랑한 살집이 부딪히며 짝, 소리를 냈다. 루시엘이 몸을 움찔거렸다. 크게 홉뜬 눈동자 너머로, 경악과 수치심이 내달리고 있었다.
맞고 있다. 불과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지도자였던 자신이, 제가 주워 기른 늑대에게 엉덩이를 맞고 있다. 심지어 비부를 모조리 드러내고서, 허벅지 위에 엎어진 굴욕적인 자세로.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었다.
“아, 아악! 아, 아파… 하지 마아… 으흑!”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몸을 제압하고서, 반복해서 엉덩이를 때렸다. 루시엘의 둥근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신경을 타고 퍼졌다. 희었던 둔부가 금세 울긋불긋하게 물들었다.
“시, 시러, 아파, 아파아…”
고통에도 쾌락에도 철저하게 약한 몸뚱이였다. 루시엘은 아프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흐느꼈다. 얼마 맞지도 않았는데 엉덩이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실핏줄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손바닥 모양대로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 카인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루시엘의 허벅지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반쯤 발기한 샅을 움켜쥐었다.
“대체 뭘 했다고 세운 겁니까?”
엉덩이를 맞는 것만으로도 발기하다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음란한 몸이었다.
네 손가락으로 좆을 감싸고 가볍게 압박하자, 손안에서 성기가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한 손으로는 빠르게 기둥을 훑고, 남은 손으로는 연신 엉덩이를 후려쳤다.
얻어맞은 둔부가 쓰리고 압박당하는 성기가 저릿했다. 고통과 쾌감이 뱃속에서 절묘하게 섞였다. 이제 뭐가 좋은 거고, 뭐가 나쁜 건지도 구별하기 힘들었다. 루시엘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침대 시트가 엉망으로 물결쳤다.
카인이 손에 힘을 실어 볼기를 세게 내리치는 그 순간, 루시엘은 끝내 그의 손안에 파정하고 말았다. 정액으로 축축해진 손끝이, 아직 다 수그러들지는 않은 성기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는 겁니까?”
루시엘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든 저항해보려는 것 같았다. 카인은 엉덩이를 때리는 것을 멈추고, 이번에는 마찰열로 뜨거워진 엉덩이를 잡아 주물렀다. 살집을 손안에 가득히 움켜쥐자, 루시엘은 허리를 비틀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흐읏, 아, 아흐으…”
으스러진 신음이 맥없이 새어 나왔다.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신음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음성을 잠시 감상하다가, 왼손으로 볼기를 잡고 열어젖혔다. 안쪽에 숨겨져 있던 치부가 드러났다. 조그마한 분홍색 구멍이 혼자 벌름거리고 있었다. 손끝으로 주름진 가장자리를 덧그리자 축축한 애액이 배어 나왔다.
찰싹.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마찰음이 들렸다. 후윽, 하는 새된 신음이 공기 중을 떠돌았다. 루시엘의 얼굴이 모멸감인지 흥분인지 모를 것으로 일그러졌다.
양 볼기를 내리치던 그 손바닥으로, 카인이 이번에는 루시엘의 구멍을 때린 것이었다. 엉덩이를 맞았을 때와 감각의 농도가 전혀 달랐다. 넓게 퍼져있던 감각이 한 점으로 집중된 것만 같았다.
“우으, 윽… 뭐, 뭐야… 이게…”
루시엘은 제가 어디를 맞았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엉덩이를 얻어맞은 것도 과하게 비현실적인데, 그 사이의 치부마저 같은 방식으로 괴롭혀진다니. 루시엘은 몽롱한 숨만을 간신히 들이켰다.
카인은 루시엘의 엉덩이를 작게 토닥거리다가, 움찔 떨리는 구멍을 한 번 더 때렸다. 너무 아프지는 않게, 그렇다고 솜털처럼 가볍지도 않게. 손바닥이 여린 구멍을 꾹 눌렀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흐읍, 아, 아악…!”
루시엘이 비명과 비슷한 신음을 내질렀다.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벌써 애널이 살짝 발갛게 부어 있었다. 울컥 새어 나온 장액이 애널을 매끄럽게 적셨다. 손바닥과 구멍 가장자리 사이로, 가늘고 투명한 실이 이어졌다가 짧게 끊어졌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루시엘이, 양손으로 황급히 뒷구멍을 가렸다. 납덩이처럼 파르께하게 질린 손끝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구멍도 싫다, 엉덩이도 싫다. 도대체 어디를 맞고 싶은 건지….”
카인이 끌끌 혀를 찼다. 그는 턱을 매만지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올랐는지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가슴은요?”
그가 제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안의 탈을 쓴 통보였다. 루시엘에게 거부할 권한은 주어진 적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가슴 열 대. 맞을 때마다 숫자를 셀 것. 자세가 무너지거나, 숫자를 잘못 셀 때마다 한 대씩 추가.
“어떻게 네가… 네가 나를 때려…”
손찌검을 당한 게 꽤나 충격이었는지, 루시엘이 어금니를 으드득 갈았다. 분노로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는 카인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뒷짐을 지고 다리를 어깨너비로 살짝 벌렸다. 때리기 좋게 가슴을 내밀었다.
카인은 벽장에서 검고 납작한 패들을 꺼내 들었다. 꼿꼿이 선 젖꼭지를 패들 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돌연 힘을 주어 아프게 긁었다. 허리가 휘청거렸다. 루시엘은 서둘러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패들이 심지를 갖고 솟은 유두를 내리쳤다. 짝, 소리와 함께 유두가 사정없이 짓눌러졌다. 하, 한 대… 루시엘은 힘겹게 숫자를 입에 담았다.
두 대, 세 대, 네 대… 느슨하게 풀린 혀로는 간단한 수마저 발음하기 어려웠다. 왼쪽 유두에는 피어싱을 했기에, 오른쪽만 반복해서 맞아야 했다.
색소 적은 분홍빛의 유두에는, 어느새 불그스름한 빛이 짙게 올라와 있었다. 여전히 설익은 분홍색을 띠는 왼쪽과, 퉁퉁 부은 오른쪽. 색의 차이가 명확했다.
패들이 다시금 가슴 위로 떨어졌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저릿한 쾌락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가슴의 열기가 아래쪽으로 확 밀려오는 그 순간, 위태롭게 비틀거리던 무릎이 마침내 허물어졌다.
루시엘은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차게 식은 방바닥에 발갛게 짓눌린 둔부가 닿았다. 뜨거운 살갗이 차디찬 바닥에 문질러지자, 기괴한 감각에 전율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서 서럽게 울먹거렸다. 긴 눈꼬리 위로 눈물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가슴을 맞는 게 그리도 좋습니까? 질질 흘리기는….”
카인이 빈정거렸다. 그는 패들 끝으로 루시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나약한 쾌감이 발갛게 번진 얼굴이었다. 물기 어린 눈망울이 새끼 짐승의 것인 양 유약했다. 더 울리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루시엘은 세 번 숫자를 잘못 세었고, 네 번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러니까 그는 총 열일곱 대를 맞았다.
새하얀 가슴팍 위로 발간 매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노란 피어싱이 반짝이는 왼쪽 가슴과, 과실처럼 붉게 여문 오른쪽 가슴. 어느 쪽도 일반적인 모양새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카인은 통통해진 젖꼭지에 후, 하고 입김을 불어주었다. 간지러운지 루시엘이 어깨를 움츠렸다.
“다… 끝난 거지? 열 대보다 훨씬 많이 맞았잖아.”
루시엘은 제 가슴을 양손으로 감싸며 뒷걸음질 쳤다. 부릅뜬 눈동자에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여기서 끝날 리가 없잖습니까.”
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본래의 카인이라면, 루시엘의 눈물 몇 방울에 쉬이 녹슬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카인은 다르다. 이제 그는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눈물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충분히 굳건해졌고, 또 충분히 뒤틀렸기에. 루시엘의 울음은 결단코 카인을 적시지 못할 것이다.
◊
수족을 파득거리며 도망치려는 몸을 잡아 눌렀다. 기름을 먹인 붉은 줄을 꺼내 들어, 루시엘의 나신을 단단히 동여매었다. 먼저 밧줄을 목에 걸고, 가슴을 가로지르듯 밑으로 떨어뜨렸다.
목과 가슴팍, 배꼽 아래에 중간중간 매듭을 만들어주었다. 밧줄을 다리 사이로 파고들게 하여 회음부를 꾹 조였다. 로프가 연약한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감각에, 루시엘의 낯이 딱딱히 굳었다.
밧줄을 등 위로 끌어올린 후 목덜미 쪽의 줄에다가 묶었다. 그러자 로프가 상체를 세로로 한 바퀴 감은 꼴이 되었다.
만들어놓았던 매듭에 밧줄을 교차시켰다. 밧줄이 얽히고설키며 가슴을 압박하듯 조였다. 붉은 로프가 희고 무른 피부를 짓눌렀다. 로프 때문에 도드라진 가슴팍 위로, 밧줄처럼 발간빛을 띠고 있는 젖꼭지가 돋보였다.
발씬거리는 돌기를 가볍게 꼬집자, 루시엘은 컥컥거리며 헛숨을 토해냈다. 원체 예민했던 가슴이 패들로 맞은 탓에 더 민감해져 있었다. 손끝으로 슬며시 쓰다듬기만 해도 저릿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타구니와 허벅지에도 밧줄을 끼우고, 작은 고리를 만들어 성기를 그 틈으로 빼내었다. 밧줄이 밑동을 억세게 조여 왔다. 조금만 더 강하게 묶었다가는 사정도 제대로 못 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양팔을 등 뒤로 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했다. 카인은 루시엘의 고개를 부여잡고, 억지로 거울을 보게 만들었다.
잘 닦인 거울이 폐제의 모습을 왜곡 없이 비추었다. 가슴, 허리, 허벅지와 엉덩이, 심지어는 달랑거리는 샅까지. 연약한 부분들이 질긴 밧줄로 꼼꼼히 묶여 있었다. 로프가 말랑한 살결 사이로 박혀 들었다. 천박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루시엘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목덜미 위로 더운 땀이 알알이 맺혔다.
“너, 너… 이런 건 어디에서 배웠어?”
“책에서 읽었어요.”
카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대체 어떤 책에서 이딴 게 나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읽은 거야?”
“루시엘 방 서재에 꽂혀 있던데요?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샀는지.”
“…….”
루시엘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가학 성애에 관한 금서를 산 것 같기도 했다. 가학과 피학 성애에 진지하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냥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책장 구석에 처박아두고 가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을 하필 카인이 읽었을 줄이야. 이 또한 루시엘의 업보라면 업보였다.
“넣을게요.”
카인이 작게 귀엣말했다. 둔부 사이로 파고든 밧줄을 옆으로 살짝 비키게 했다. 방금 전까지 욕실에서 잔뜩 희롱당했던 안쪽으로, 이물질이 느릿하게 삽입되었다.
애널이 주름을 활짝 펼치며 성기를 받아들였다. 점막이 능숙하게 살기둥을 휘감았다. 흉흉한 좆이 내벽을 벌려대는 감각은, 이제는 익숙한 것이었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고 싶진 않았는데… 루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몸의 변화에 구역질이 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익숙하다 하여 쾌락에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반대였다. 그는 익숙해진 만큼 쾌감에 더욱 예민해졌다. 결장 안쪽까지 철저하게 개발되어버린 탓이었다.
‘계속 들어오고, 있, 어….’
귀두가 농익은 점막을 문지르듯 파고들었다. 눅진히 젖어든 속살을 가르며 구멍을 넓혔다. 내부가 빠듯하게 채워지는 느낌에, 저절로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뜨겁게 녹아드는 눈매가 밧줄처럼 붉었다. 카인은 손끝으로,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야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와 기사가 아닌 다른 관계로 만났어도, 자신은 루시엘에게 욕정 했을 거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러자 불현듯, 이 얼굴을 타인도 목격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어졌다. 시종 베넬과 전 기사 단장 에반, 이름 모를 노예 상인… 그자들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단칼에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무리된 일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쾅, 하고 강하게 허리를 쳐올리자, 루시엘의 몸이 팽팽하게 경직되었다. 그에 따라 내벽이 수축하며 성기를 진득하게 억죄었다. 불거진 혈관이 점막을 긁듯이 문질렀다.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팔을 버둥거리며 카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로프가 손목과 팔뚝을 칭칭 감고 있어 쉽지 않았다. 손과 목의 밧줄이 이어져 있던 탓에, 목이 졸리며 기도가 콱 조여들었다.
“커억, 큭, 으흑…”
루시엘이 컥컥거리며 메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산소는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카인은 목과 연결된 등 뒤의 밧줄을 잡아당겼다. 루시엘의 호흡을 통제하며 거친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흐익, 아, 하으, 수, 숨이… 케엑, 크윽!”
숨구멍이 닫히면서 내벽도 함께 요동쳤다. 루시엘은 입을 벌리고 힘겹게 숨을 할딱거렸다. 삐져나온 혀끝에서 말간 타액이 방울져 떨어졌다. 목줄기를 타고 흘러 밧줄을 축축하게 적셨다.
루시엘이 눈을 까뒤집으며 폭력적인 절정에 한 번 도달한 후에야, 카인은 비로소 손에서 줄을 놓았다. 배꼽 부근에 매듭지어진 밧줄 위로, 백탁액이 너덜하게 튀었다.
“흐아, 아, 흐읍, 읏…”
루시엘은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산소가 가쁘게 밀려오면서 머리를 둔하게 만들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목을 차분히 더듬었다. 밧줄로 억척스럽게 졸렸던 목에는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목줄 같기도 목걸이 같기도 한 그 자국을, 카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매만졌다.
퍽, 카인이 또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방금 사정해서 한층 더 민감해진 안쪽을, 성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으흑, 아, 아아… 나, 나 방금 갔… 방금 갔는데에… 흐아, 악!”
귀두가 아랫배를 난폭하게 치댔다. 자비 없이 극점만을 짓이기는 것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축 늘어졌던 성기가 다시금 팽창했다.
배꼽 밑이 쑤컥쑤컥 들쑤셔질 때마다, 마른 뱃가죽이 불룩 튀어나왔다. 밧줄이 복부를 꽉 누르고 있어서 그런지, 아랫배를 슬슬 문지르는 성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쾅쾅 내리치듯 좆을 박아대었다. 접합부가 온전히 맞붙었다. 깊게 파묻힌 선단이 결장 부근을 찍어 눌렀다. 살기둥이 그 아래쪽의 전립선을 비벼대었다.
극점에서 시작된 아릿한 열기가 성기 끝에 고였다. 터지듯 요도구 밖으로 방출되었다. 루시엘은 너무나 간단히 절정을 맞았다.
“이, 이제 됐잖아… 나, 더는 못 가앗… 흐엑! 힉!”
또다. 또 일부러 전립선만 겨냥해서 들쑤시고 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성감대만 집요하게 쿡쿡 찔러대고 있다. 끊이지 않는 열락은 고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루시엘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통증인지 쾌감인지 모를 것이 입가를 경련시켰다.
샅이 깊숙한 곳을 꿰뚫으며 밀려들었다. 점막에 박혀드는 성기는 거침없었다. 루시엘은 결박된 몸뚱이를 바르작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밧줄이 살결에 박히듯 쓸렸다.
“후에, 읏, 하윽!”
그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삽입은 과도하게 깊었고 쾌감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머릿속에 아지랑이가 일었다. 뇌가 흐물흐물해지다 못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 아흐, 주, 죽을 것 같…. 흐으…응… 나, 이러다가, 진짜로 죽… 흐앙! 악!”
루시엘의 성기는 희멀건 정액을 줄줄 흘려내더니, 나중에는 물에 가까운 투명한 액체만을 쏟아내었다.
루시엘이 네다섯 번 정도 파정하는 동안, 카인도 루시엘의 안에 마침내 사정했다. 수인의 사정은 길었고 양이 많았다. 장액과 정액으로 흠뻑 젖은 안쪽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액이 반쯤 삽입된 성기를 타고 꾸물꾸물 흘렀다.
루시엘은 고개를 뒤로 돌려, 저를 안고 있는 카인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제, 제발 멈춰… 멈춰줘…. 그는 느슨해진 혀를 겨우 놀렸다. 흐느끼면서 그만해달라고 애원했다.
“뭘 멈춰 드릴까요?”
카인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하읏, 응, 싸는 거… 싸는 거 멈추고, 흐으, 싶어…”
하도 여러 번 벌름거리며 열리는 바람에, 요도구 전체가 욱신거렸다. 실금하듯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것을, 카인은 찬찬히 응시했다.
“좋아요. 그럼.”
카인은 의외로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느긋하게 성기를 빼내었다. 감전된 듯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에 정액이 튀었다.
헐떡거리며 바닥을 나뒹구는 루시엘을 잠깐 내버려 두고서, 카인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상자 안에는 철로 된 기구가 들어있었다. 사정은 물론이고 발기조차 힘들게 하는 도구, 정조대였다. 옛날에는 배우자의 바람을 방지하는 데 쓰였다지만, 요새는 가학적인 성교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카인의 손에 들린 정조대는, 루시엘이 익히 알고 있는 형태와는 조금 달랐다. 보통의 정조대가 새장의 축소판처럼 생겼다면, 이것은 드로즈와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앞은 물론이고 뒤쪽에도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왜, 왜 정조대를…”
루시엘의 얼굴이 희게 떴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당혹감에 말까지 더듬었다.
“그야 루시엘이 그만 싸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 나는, 이런 거 싫어…”
루시엘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손이 묶인 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쉽지 않았다. 그는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카인이 루시엘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끌려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싫다며 탈진할 듯 우는 루시엘을 간단히 제압하고, 강제로 다리를 벌리게 했다. 시들어버린 성기에 단단히 정조대를 채웠다.
차가운 금속이 말랑한 샅을 스치듯 건드렸다. 선단부터 뿌리 끝까지, 사방이 감옥 같은 철장으로 감싸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함부로 발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주 살짝만 팽창해도, 중심부를 뒤덮은 금속이 샅을 옥죄고 말 거였다.
카인은 루시엘의 앞뿐만 아니라 뒤도 막아놓을 작정인 듯했다. 윤활제로 적셔둔 딜도가 애널 가장자리에 닿았다.
한껏 물크러져있는 입구를 부러 끈질기게 어루만지다가, 힘을 주어 단박에 기구를 쑤셔 넣었다. 울퉁불퉁한 딜도의 첨단이 내벽을 잡아 벌렸다. 진작 질척하게 젖어버린 안쪽을 자비 없이 꿰뚫었다.
“흐읏, 으, 아, 아악!”
뒤가 자극을 받자 자연스레 앞에 피가 몰렸다. 하지만 정조대를 차고 있는 탓에 제대로 발기를 할 수 없었다. 열기가 쏠려 부풀어 오르다가도, 금속에 막혀 빳빳이 서질 못했다. 안에 갇혀 있는 물렁한 살덩이를 보자 명치께가 턱하니 아려왔다.
“앞을 세우지도 않고 느낀다니. 달려 있을 이유가 없겠는데요?”
카인이 낮게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나 눈초리는 여전히 싸늘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그런 말, 하지 마아…”
루시엘이 울먹였다. 그렇지 않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카인의 말이 전부 옳을지도 몰랐다. 사정이 없는 마른 절정을 겪은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정조대를 찬 상태에서 뒤를 쑤셔지며 느끼고 있다. 음경보다는 가슴이나 뒷구멍 쪽이 오히려 더 성기에 가까워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짙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아니라는 말은 안 하네요. 거짓말은 그만두기로 한 건가?”
“나, 나는, 그게… 흐읏, 윽…!”
딜도의 가장 두터운 부분이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겨우 다 받아들인 건가.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이 막 이완되려던 찰나, 기구가 진동하며 뱃속을 뭉근히 휘저었다.
벌름거리는 구멍에서 애액과 윤활제가 뒤섞여 줄줄 흘렀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적시고서 바닥을 더럽혔다.
루시엘은 반사적으로 배에 힘을 주었다. 내벽이 꿈틀거리며 이물질을 내보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앞과 뒤를 모두 틀어막는, 입는 형태의 정조대였다. 정조대를 아예 벗어야만 딜도를 빼낼 수 있었다.
“왜 이딴 걸 채우는 거야…”
“이딴 거라뇨. 루시엘한테 꼭 필요한 거잖아요.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몸을 내주는 것보다는, 이편이 당신에게도 훨씬 나을 텐데요.”
“낫기는 무슨. 이러나저러나 범해지는 건 마찬가지잖아. 내 눈에는 베넬이나 너나 똑같아!”
감정이 복받쳤다. 입 밖으로 내도 될 문장과, 침묵으로만 남아 있어야 할 문장을 구분할 수 없었다. 뇌를 거치지 않은 단어들이 무작정 튀어나왔다.
“…똑같다고요.”
카인이 숨 막히는 얼굴을 했다. 그 파랗게 질린 낯빛을 보자마자, 루시엘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미 한 말을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 닳을 대로 닳았으나 아직 꺾이지는 않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루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쾌감과 통각으로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가 보였다. 괴물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요. 그렇다면…”
카인은 차분하게 정조대를 풀었다. 먼저 샅을 압박하고 있는 앞쪽 부분을 푼 후, 뒷구멍에 깊숙이 박혀 있던 딜도를 느긋하게 뽑아내었다. 기둥이 질펀하게 녹은 점막을 문지르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뱃속을 휘저으며 내벽을 질질 끌어 내렸다.
“하으, 아, 읏, 아앙! 히으윽, 응!”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이 목구멍 너머로 터져 나왔다. 이명처럼 고막을 울렸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딜도가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녹진녹진해진 애널과 딜도의 끝부분이, 끈적끈적한 애액으로 길게 이어졌다. 구멍이 뻐끔거리며 불그스름한 속살을 보여주는 모습이 선정적이었다.
“어차피 다 똑같다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네요.”
카인이 아랫입술을 윽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루시엘을 힐난하는 것 같기도 했고, 완연히 체념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뭐… 뭐라고…?”
카인은 루시엘을 침대에 눕혔다. 목욕을 시키기 위해서 잠깐 풀어놨던 족쇄를 다시 발목에 채웠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이 모든 일을 수행했다.
“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불온한 예감이 머릿속을 덮쳐왔다. 루시엘은 엉덩이를 뒤로 밀며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라도 카인과의 거리를 벌려놓고 싶었다.
발뒤꿈치가 시트의 주름에 느리게 파고들었다. 구겨진 주름이 찬찬히 물결쳤다. 의미 없는 도망이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했는데 침대 헤드에 등이 닿았다.
카인은 서랍에서 검은 벨벳 천을 꺼냈다. 루시엘의 턱을 잡아 고정시키고서 천을 눈가에 가져다 대었다. 두꺼운 천이 안대가 되어 루시엘의 눈을 가렸다.
“제길, 이거 풀어!”
루시엘이 격하게 다리를 휘적거렸다. 시각이 차단된 만큼 청각이 더 예민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족쇄와 연결된 쇠사슬이 서로 부딪치며 쨍한 소리를 내었다. 철커덩, 묵직한 뱀처럼 침대 위를 기었다.
쉭쉭거리는 금속의 소음 틈새로, 카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걸 보아, 루시엘을 두고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덜컥, 문고리가 돌아갔다. 끼이익, 경첩이 불길하게 울었다.
“카인, 어딜 가는 거야? 가지 마!”
루시엘은 목이 터져라 카인을 불렀다. 여기서 카인을 그냥 보낸다면, 분명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빛이 새어 나올 틈 하나 없이, 굳건하게.
“…무서워….”
루시엘은 몸을 옹송그렸다. 그는 양팔로 가슴과 어깨를 감쌌다. 입을 멍하게 열고서 얕은 호흡만을 가까스로 반복했다.
카인이 짓씹듯 내던진 문장이 머릿속을 표류했다.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말, 안대와 구속구, 루시엘을 결박해놓은 채로 떠나버린 카인. 이건 설마…
◊
‘설마가 아니지. 누가 봐도 롤플레이잖아. 이거!’
나는 속으로 꺅! 하고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얼핏 보면 카인이 생판 타인에게 나를 돌리려는 것 같겠지만, 카인 성격상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인 척 나를 범하고, 내 반응을 보려는 생각인 게 확실했다. 카인에게 범해지는 것보다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게 더 정신이 망가지기 쉽기도 하고 말이다.
이러고 묶여 있자니 아홉 번째 생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롤플레이에 한참 빠져있었다. 교수와 학생, 황제와 황후, 귀족과 시종… 카인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도, 내가 원하니까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딱 한 번, 내가 제안한 역할극이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안대와 구속구를 사용하는, 강압적인 컨셉의 플레이. 그런 건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부디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겨요.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아 주세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카인은 진지한 어조로 설교 비슷한 것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이런 취급을 받을 만큼, 가치 없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니야. 오해야, 오해. 이건 그냥 내 취향…”
“거짓말. 이런 게 취향인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여기 있어. 바로 네 옆에. 그런 사람이 바로 너 애인이야.
카인은 끝끝내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다정히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내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내 장점을 읊어주었다.
아, 기대했던 플레이는 물 건너갔구나. 아쉬움은 심연 아래로 침몰시키고서, 나는 카인을 마주 안았다. 어쨌든지 간에 내 연인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거친 섹스를 할 수 없다는 건 흠도 아니었다.
비단 아홉 번째 생이 아니라 열 번째도, 열한 번째도, 카인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내 앞에서 유독 헤퍼지는 미소와, 몸에 밴 상냥함. 그에게 다정이란 일종의 습관이었다.
카인은 모든 생에서 나와 순애를 했고, 그 결과 신벌을 받아 늘 스물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런 적도 있었지.’
추억을 더듬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 지금 중 언제가 더 낫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현재를 고를 터였다. 성격이나 말투나 애무 방법 같은 요소들을 다 차치하고, 순전히 수명만 고려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순하고 바른 너는 일찍 죽는다. 순애를 포기한 너는 오래오래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선택은 당연히 후자다. 선하지 않아도 좋다. 다정다감하지 않아도 좋다. 너를 너답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이 전부 사라져도 괜찮다. 그저 살아만 있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러니까 살아라. 그늘로 얼룩진 마음을 안고서, 어찌 되었건 살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도 함께. 침대가 출렁거렸다.
크고 탄탄한 손이 내 다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무릎이 가슴팍에 닿았다. 두 다리가 벌어지며 비부가 활짝 벌어졌다.
그러니 저 손의 주인은 너다. 네가 아닐 수가 없다. 오직 너에게만 열려 있는 몸이니까. 네가 타인에게 내 몸을 허락할 리 없으니까.
허나 내가 연기하는 ‘루시엘’은 그게 너라는 사실을 모른다.
◊
“누, 누구야. 너… 누군데 이러는 거야? 꺼져! 더러운 손 치워!”
싫다고 아무리 비명을 질러봤자 소용은 없었다. 손목은 밧줄로 결박되어 있고, 발목은 족쇄에 묶여 있다. 루시엘의 저항은 힘을 갖지 못했다.
무언가가 애널에 문질러졌다. 두껍고 뜨거운 것. 주름을 펼치며 안으로 침입하려는 단단한 흉기.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기였다. 그것도 카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 싫어… 이런 건 싫어… 아악, 아, 흐아앗-!”
이해되지 않았다. 축축한 애액을 머금고서 이물을 빨아들이듯 휘감는 내벽도, 끝도 없이 안쪽을 헤집고 들어오는 거대한 성기도. 어둠 속에서 착란처럼 번쩍이는 불꽃들과, 정체 모를 이에게 겁탈당하며 발기하는 제 자신도. 온통 이해하기 힘든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카인, 어디 간 거야, 카인! 도와줘… 제발 도와줘…!”
자신이 정신없이 카인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카인이든 저 낯선 이든, 루시엘을 겁간하려 든다는 건 동일했다. 그런데 왜일까. 어째서 이토록 심한 토기가 올라오는 걸까. 아랫배가 울렁거렸다. 뱃속의 장기들이 멋대로 얽히고 꼬이는 것 같았다. 카인에게 안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부감이 강했다.
루시엘은 사지를 잔뜩 굳히고서 온몸으로 버티었다. 깊숙이 진척하는 성기를 거부하듯 하복부에 꽉 힘을 주었다. 내벽이 수축한 만큼 삽입된 좆의 굵기가 더욱 생생히 느껴져서, 루시엘은 그만 높은 교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흐윽, 아, 아흐, 흐아악!”
남자가 루시엘의 골반을 틀어잡았다. 못에 망치질을 하듯 쾅쾅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입구에 귀두가 걸쳐지도록 허리를 물렸다가 단박에 가장 안쪽까지 박아 넣었다.
상대가 보이지 않는 바람에,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손이 어느덧 입술 근처로 다가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우으, 윽, 우응…!”
힘없이 벌어진 입속으로 손가락이 침범했다. 타액이 흥건히 고인 혀를 검지와 엄지로 잡고서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뭉개진 신음이 침과 함께 방울져 흘렀다.
남자는 손끝으로 한참 루시엘의 혓바닥을 더듬다가, 그의 혀 위로 제 혀를 덮었다. 습하고 붉은 두 살덩이가 문질러졌다. 달뜬 침으로 반들거리는 입술 위로, 누군지 모를 이의 입술이 포개졌다. 카인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키스는 처음이었다.
루시엘은 몸서리치며 남자의 입술을 피했다. 그러나 남자는 루시엘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타액에 젖은 손가락으로 양 뺨을 감싸 쥔 후 억지로 혀를 밀어 넣었다. 치열 안쪽으로 축 늘어진 혀를 감쌌다. 더운 입 안을 헤집으며 타액을 섞었다. 가장 안쪽의 어금니까지도 샅샅이 핥아준 후 혀를 빼내었다.
남자는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쾌감과 공포감에 흐트러져 우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는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평생 제 앞에서만 울어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땀에 젖은 은발과 달아오른 볼. 천으로 눈이 가려진 탓에,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천을, 남자는 조심스레 매만졌다. 눈가를 더듬던 손이 밑으로 향했다. 외설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여린 몸 선과, 마디마디가 붉게 달아오른 손끝과 발끝까지. 그 모든 부분들을 섬세하게 쓸어내리며, 눈으로 몸으로 새겼다.
카인은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말도 안 돼… 카인이, 날… 버릴 리가…”
루시엘은 거의 공황 상태였다. 허리를 움직여 점막을 쿵쿵 때리듯 두드리자, 그는 훌쩍이며 괴롭게 신음했다.
두툼한 귀두가 연약한 속살을 밀어젖혔다. 뱃속을 거침없이 들이받고 전립선을 찔러 올리는 걸로도 모자라, 결장 부근을 쿡쿡 두들기기까지 했다.
“맞아요. 루시엘. 저는 결코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카인이 속살거렸으나 루시엘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카인이 준비한 안대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안대를 착용하고 있는 이상, 루시엘은 카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청각이 아예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성기가 내장을 퍽 쳐올리는 타격음도, 제 자신의 농익은 교성도 전부 들렸다. 카인의 음성을 제외한 나머지가, 루시엘의 귓가에 질척하게 엉겼다.
카인은 루시엘의 골반을 잡은 채로 허리를 물렸다. 입구까지 물러났다가 힘을 주어 한 번에 안쪽을 꿰뚫었다. 아, 아악! 흐앙! 목소리가 높아졌다.
루시엘은 쉬이 절정에 올랐다. 정액이 마른 복부를 가로질러 가슴께까지 튀었다. 루시엘의 숨이 더 빨라질 수 없을 정도로 가빠졌다. 카인은 어느새 제 호흡 또한 거칠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엘의 다리를 잡아 위로 들어 올린 후, 무게를 실어 강하게 내리찍었다. 물건이 과도하리만치 깊이 들어왔다. 한계점을 초과해서 결장 입구를 드득 뚫었다. 번개라도 맞은 듯 몸뚱이가 퍼뜩 튀었다.
감당하기 힘든 열락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루시엘이 바쁘게 도리질을 쳤다. 바들바들 떨리던 구멍이 세차게 조여들었다. 다시 힘을 잃고 벌어지며 애액을 줄줄 흘렸다. 속도를 올려 내벽을 지근지근 치받을 때마다, 루시엘의 허리가 달아나려는 듯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아요.”
가는 허리를 붙잡아 거칠게 끌어내렸다. 안쪽까지 깊게 삽입한 채로 결장부를 휘저었다. 루시엘이 컥컥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침이 잘못 넘어가 사레라도 들린 모양이었다.
“아, 싫어, 카인… 카인… 도와, 줘어… 흐읏, 윽!”
루시엘의 눈을 보고 싶다고, 카인은 생각했다. 핏빛 눈동자 위로 떠오른 감정은 무슨 색을 띠고 있을까. 절망? 두려움? 이런 상황에서도 하염없이 느껴버리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감정의 명칭에 어느 것이 붙든 간에, 일렁이는 눈동자는 필시 어여쁠 터였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보다 더 소리 높여 울 때까지,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르게 될 때까지. 그리하여 완전히 망가져 버릴 때까지… 카인은 안대를 벗겨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안대 위, 아마도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을 부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천에서는 짠맛이 났다.
◊
“으응, 아, 아악, 아아악!”
루시엘은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죽어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카인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카인의 모든 행동은 소유욕을 기반으로 한다. 고로 그는 제 애인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가리고서 강간당하게 하는 일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라고, 적어도 루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루시엘의 예측은 처참히 무너졌다. 카인은 루시엘을 버렸다. 다른 이가 그를 겁간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째서… 흐윽, 윽, 왜… 흐앙! 악!”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좆이 결장을 쾅쾅 짓이길 때마다, 허리가 안쓰럽게 휘청거렸다. 허리의 움직임을 따라, 빳빳이 선 젖꼭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남자의 손이 오른쪽 가슴을 억세게 주물렀다. 왼쪽 가슴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서, 피어싱과 함께 유두를 머금었다. 혀로 피어싱을 툭툭 건드리다가, 이를 세워 유륜을 잘근잘근 씹었다. 성기를 품은 내벽이 바짝 수축했다. 쾌감으로 물결치는 안쪽을, 성기가 무자비하게 들쑤셨다.
쿵, 하고 다시금 결장 안쪽으로 처박힌 좆에서 진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어떤 정액은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갔고, 나머지는 내벽 주름을 스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분출된 백탁액이 전립선을 자극이라도 하면, 루시엘은 목줄기를 뒤로 젖히고서 긴 교성을 뽑아내었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눈물은 천을 적시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기가 빠져나갔다. 루시엘이 충격과 절망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사이, 사내는 침대에서 내려와 하의를 추슬렀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또다시 열렸다.
그리고 이번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 발로 걷고 있었다. 짐승의 냄새가 났다. 사람과는 전혀 다른, 털 달린 동물의 체취.
“카인이야? 카인 맞지?”
루시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것은 반드시 카인이어야 했다.
만약, 침대 위로 올라온 저것이 늑대 상태의 카인이 아니라면, 피부를 간질이는 저 털이 생판 모를 떠돌이 개의 것이라면… 그는 진짜로 수간을 당하는 게 되어버린다. 수화한 수인에게 범해지는 것과, 실제 짐승의 좆에 박히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카인이면 내 볼을 핥아줘. 응? 장난치지 말고 빨리…”
루시엘이 간절히 애원했다. 넓적한 늑대의 혀가 제 볼을 진득이 핥아주기를, 루시엘은 그 어느 때보다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엘이 원하는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이, 루시엘의 목에 걸린 밧줄을 잡아 물었다. 버둥거리는 몸뚱이를 반 바퀴 돌렸다. 가슴과 배가 시트에 닿았다. 엉덩이가 들리며, 개폐를 반복하는 애널이 드러났다. 퉁퉁 부은 채 정액을 떨구고 있었다.
저것은 늑대가 아니라 필히 개일 것이라고, 루시엘은 추측했다. 늑대보다는 개 쪽이 ‘이런 용도’로 길들이기 쉬울 테지.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것도 끔찍한데, 개한테까지 범해지게 생겼다. 당최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흐익, 아, 아악… 뭐, 뭐야…!”
날름거리는 살덩이가 뒷구멍에 닿았다. 혀였다. 짐승의 혀가 회음부와 애널을 끈질기게 핥아 올리고 있었다. 분홍색 주름을 펴기라도 하는 것처럼 혀끝으로 구멍을 진득하게 할짝거렸다. 본능적인 반감에, 애널이 옴죽거리며 오므라들었다.
뾰족하게 말아진 혀끝이 구멍을 찌르다가, 마침내 안쪽을 파고들었다. 개의 타액이 구멍 가장자리는 물론이고 내벽 구석구석을 적셔나갔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갖가지 끈적끈적한 소음들이, 고막을 범하듯 저어대었다. 인간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두터운 혀가, 점막을 낱낱이 훑었다. 오돌토돌한 혓바닥이 과도한 자극을 주었다.
“흐읏, 아, 아흐, 흐으윽…”
루시엘은 그저 어깨를 떨면서 울고 있었다.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달아오른 뺨을 시트에 부비면서 울먹였다.
혀가 타액을 드리우며 빠져나가더니, 이번에는 짐승의 좆이 구멍에 문질러졌다. 타액으로 눅진눅진하게 풀린 안쪽으로, 인간의 것보다 훨씬 딱딱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루시엘의 등을 제 몸으로 덮고서, 개가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점막이 찍어 올려졌다. 턱, 턱, 소리를 내며, 성기가 울퉁불퉁한 장벽을 뚫고 들어왔다.
개가 찍어 누르듯 추삽을 이어갈 때마다, 벌름거리는 요도구에서 묽은 정액이 픽픽 튀어나왔다. 루시엘은 짐승의 자지를 삽입 당하며 사정을 하고 있었다.
통통하게 부푼 애널이 기쁘게 좆을 삼켰다. 한계까지 열리며, 배꼽 근처까지 치고 들어오는 성기를 받아들였다. 성기가 뒤로 빠질 때마다, 속살이 살기둥에 붙어 뒤로 내려갔다. 네발짐승의 것이라도 좋다는 듯이, 좆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읏, 아, 아응, 아흐읏, 윽!”
서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루시엘은 생각했다.
이게 뭐지? 나는 왜 이러고 있지? 어째서 개의 좆을 받으면서 앙앙대고 있는 거지?
몰라. 모르겠어. 하나도 알 수가 없어. 그냥… 나에게는 카인이 필요해. 카인이 나를 이 지옥에서 건져줬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날 지옥에 처박은 것도 카인인데?
생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너절한 사고였다. 똑바로 머리를 굴리려고 할 때면, 성기가 어김없이 극점만을 치받았다. 예리한 감각이 신경을 후벼 팠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짐승의 숨결은 간지럽고, 제 등에 닿은 윤기 흐르는 털은 부드럽고, 또, 또… 사고가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카인이 보고 싶어.
왜? 내 인생을 망친 건 카인이잖아.
그래도 카인이 보고 싶어. 나를 안고 있는 게 차라리 카인이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은 싫어. 다른 동물도 싫어. 나는,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시야가 열려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천장의 무늬라도 세면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을 텐데.
시각 대신 촉각이 날을 세웠다. 루시엘은 제 뒤가 어떤 식으로 헤집어지는지 느낄 수 있었고, 뱃속을 유린하는 성기의 형태와 움직임 또한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흐윽, 아, 아악. 하으응-!”
그 순간, 거대한 통증이 해일처럼 아랫배를 두들겼다. 이미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이 전보다 더 열리고 있었다.
성기가 마개처럼 빈틈없이 애널을 틀어막았다. 짐승의 냄새가 전신을 으깨버릴 것처럼 쏟아졌다. 삽입된 좆이 한층 더 부풀어 오르더니, 정액을 끝없이 쏟아내었다. 그와 동시에 루시엘도 오르가슴을 맞았다.
가고 있다. 한낱 짐승의 씨물을 머금으며, 앞뒤로 천박하게 액체를 흘리고 있다. 그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루시엘은 더는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해? 전혀 모르는 이에게, 심지어는 개한테까지 몸을 굴려야 하는 거야?
싫어. 이럴 바에는 카인이 나아. 카인은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잖아. 제 욕망만 채우는 남들과는 다르게, 사랑해서 이러는 거잖아.
위태로운 돌탑을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주춧돌이, 끝내 훼손되어 버린 것 같았다. 탑이 와르르 붕괴된다. 묵직한 돌들이 그의 이성을, 자아를, 사고력을 짓뭉갠다.
와장창, 머릿속에서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환청처럼.
카인이 보고 싶어.
카인이 필요해.
나는, 카인을…
좋아해?
눈동자가 완전히 이지를 잃었다. 멍하게 벌어진 입술이 달싹이며, 이 한 문장을 간신히 뱉어내었다.
“좋아해.”
루시엘의 안에 정액을 쏟아붓고 있던 짐승이, 흠칫, 몸을 떨었다.
“좋아해… 카인을, 좋, 아해…”
진심으로 사랑해서 한 고백은 아닐 터였다. 망가진 오르골이 연주하는 비틀린 선율이었다. 음도 박자도 맞지 않는 그 노래는, 단 한 명의 청취자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들렸다.
“사랑해, 카인, 그러니까…”
제발 나를 구해줘.
등을 간지럽히던 털의 감촉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개의 앞발이 아닌 사람의 손이, 루시엘의 살갗을 억누르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여린 살에 엷게 남은 구속흔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뻗어 눈가의 천을 벗겨주었다.
암흑에 익숙해져 있던 동공 너머로, 빛이 들어왔다. 신의 뒤를 비추는 후광처럼 환한 빛이었다. 그 빛이 어떤 이의 실루엣을 감싸고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과 해처럼 찬란한 금안. 밤하늘에 뜬 태양을 닮은 남자.
루시엘이 배시시 웃었다. 눈앞의 사내가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된다는 듯, 사내에게 악착같이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그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동일한 말만을 연신 되뇌었다.
카인은 양팔을 벌렸다.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루시엘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날카로운 조각이 심장을 후벼 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통증은 그에게 있어 아픔도 아니었다.
사랑해요, 루시엘. 당신의 부서진 파편 하나하나마저 사랑해요.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해, 카인….”
망가져 버린 채로 토해내는 고백이다. 저 안에 사랑이 실존할 리 없다. 그는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엘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은 다디달았다.
“저도 사랑해요.”
진심 없는 고백에 마음을 실어 답하며, 카인은 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