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0)

14.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꿔라

사내는 제 이름을 제럴드라고 소개했다. 루시엘의 이름을 묻길래, 잠시 고민하다가 루엘이라고 대답했다. 원래 이름에서 중간글자만 빼낸 것이었다. 정체를 숨기기에는 굉장히 부실한 가명이었지만, 이것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제럴드는 루시엘의 가명을 듣자마자 껄껄대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루엘, 루엘이란 말이지. 큼. 예쁜 이름이네. 그럼 일단 코트부터 벗어볼까?”

“코트를 벗으라고?”

루시엘은 반사적으로 코트 앞섬을 움켜잡았다. 코트를 벗으면 알몸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자수처럼 남겨진 키스 마크도, 오랜 마찰로 불그스름해진 볼기와 허벅지도 다 보이게 된다.

“비에 젖은 코트를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잖아.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 문제는 없지.”

루시엘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겉옷 단추를 느리게 풀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이너도 드로즈도 입지 않은 나신이었다.

양쪽으로 벌어진 코트 사이로, 맨살이 목덜미부터 발목까지 매끄럽게 이어졌다. 진흙투성이가 된 코트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럴드의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부지런히 맨몸을 훑었다.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무료했던 눈동자에, 일순 번뜩이는 불씨가 일었다.

“일단 몸부터 씻어야겠군. 오른쪽 복도 끝에 욕실이 있으니 거기서 씻도록 해.”

루시엘은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손으로 중심부를 가리고서 후다닥 욕실로 뛰어갔다. 나무 바닥에 물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체액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그 물기를, 사내는 음험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받은 지 오래된 목욕물은 미지근했다. 나는 나무로 된 욕조에 몸을 구겨 넣었다. 욕조라기보다는 둥근 통에 가까웠다. 다리를 쫙 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카인은 이러지 않았다. 그는 대리석 욕조에 언제나 따듯한 물을 받아주었고, 양손 가득 비누 거품을 내어 정성스레 살결을 씻어주었다. 매일매일 다른 입욕제를 골라 목욕물에 넣어주기도 했다. 장미, 시트러스, 로즈메리, 프리지아… 욕실을 떠돌던 그 사랑스러운 향기들.

자기 집만큼 편한 곳은 없다더니, 옛말에 틀린 점 하나 없었다. 집을 나간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체감상으로는 열흘이 훌쩍 지난 것 같았다. 벌써부터 카인이 보고 싶었다.

나는 두 무릎을 살며시 모아 양팔로 끌어안았다. 고개를 기울여 무릎에 볼을 맞댔다. 나는 카인에 대해, 베넬에 대해, 그리고 잔혹한 신벌과,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탈출을 돕는 것은 어찌 되었든 베넬이여야만 했다. 베넬은 황제의 명보다 제 육욕을 더 중요시하는 이였다.

그는 욕망에 휘둘려 나를 범하고-정확히 말하면 범했다는 환상을 본 거였지만-, 나를 황제에게 데려다주는 대신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루시엘이 단테에게 제 죄를 일러바칠까 겁이 나서였다.

만약 내 시종이 베넬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내가 별 탈 없이 단테와 만나게 되었다면… 카인의 적은 이제 단테가 되어버린다. 나를 되찾기 위해서는 황제와, 나아가 제국 전체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카인의 삶이 너무 피폐해질 거다.

게다가 단테는 카인의 처남이다. 둘 사이가 나빠지는 건 딱 질색이다. 물론 지금도 딱히 친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현재의 이 상황이, 내가 짤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너는 괴롭고 나는 아프겠지만. 네 영혼은 녹슬고 내 육신에는 푸르른 멍이 들겠지만. 너는 나를 찾아 어둑해지는 밤거리를 떠돌고, 나는 표류자의 기분으로 식어가는 물에 몸을 담그겠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어. 이제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게. 도망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을게. 운명처럼 네 곁을 머물며, 내 영혼의 마지막 조각까지 전부 그러모아 너에게 바칠게.

그러니 너를 사랑해. 재앙처럼, 또는 축복처럼. 앙상한 겨울나무나 생기가 흘러넘치는 봄꽃처럼. 너를 사랑하고 있어.

피로가 쌓였기 때문일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욕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의 세상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는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다.

꿈속에서 루시엘은 스스로 황위를 양보했다. 황좌에서 내려온 이유는 단 하나, 황후를 맞는 대신 제 연인과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루시엘은 모두의 축복 속에서 카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역사는 그를 무능한 폭군이 아닌, 사랑을 위해 권력을 포기한 로맨티스트로 기록했다.

결혼생활은 평범했다. 감금도 강압도, 농도 짙은 절망과 소스라치는 비명도 없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그렇듯, 잔잔하고 시시콜콜한 대화들이 오갔다.

루시엘은 많이 말했고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카인은 루시엘의 말에 귀 기울이며 얼핏 따라 웃었다. 햇살처럼 헝클어지는 밝은 웃음소리들.

루시엘은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카인은 곤히 자고 있는 루시엘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잘 잤어요, 루시엘?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루시엘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카인을 마주 보며 옅게 웃었다. 사랑하는 이의 음성으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다니, 이래서 다들 결혼을 하는구나 싶었다.

루시엘에게는 딱히 직업이랄 게 없었다. 카인을 사랑하기만 해도 바쁜 인생이었다. 그는 아침이면 카인을 따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는 기사단 연무장에 쭈그려 앉아 카인의 검술을 감상하기도 하고,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일하는 카인을 구경하기도 했다. 검을 제 몸의 일부인 양 자유롭게 다루는 모습도, 머리를 부여잡으며 빼곡하게 쌓인 서류와 씨름하는 모습도,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카인.”

검지를 세워 볼을 쿡쿡 찌르자, 서류에 붙박여있던 눈동자가 루시엘을 향했다. 봄날의 햇볕처럼 채도 높은 홍채가, 제 앞의 이를 오롯이 담았다. 그 따스한 시선을 마주할 때면, 루시엘은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요, 루시엘?”

루시엘은 대답 대신 카인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희고 가는 손끝이 카인의 뺨을 쓸었다. 다사로운 온기가 손마디를 타고 번져나갔다.

밤하늘을 엮어 만든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장난스럽게 머리를 헤집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귓불을 천천히 더듬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일컬어지는 기사 부단장의 귓가가,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이렇게까지 신호를 보낸다면, 카인도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고개를 기울여 그의 입술을 덮쳤다.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온 혀에서는 단내가 났다.

카인은 능숙하게 뜨거운 입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입천장을 긁고 혀뿌리를 빨았다. 거친 유린이 아닌 상냥한 애무였다.

루시엘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화답했다. 혀와 혀가 얽혔고 타액과 숨결이 섞였다. 새하얀 뺨에 붉은 기가 번져갔고, 포개진 입술 틈으로 으응, 읏, 하는 달큰한 신음이 흘렀다.

루시엘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들썩였다. 더 큰 자극을 찾는 듯 카인의 중심부에 제 둔부를 비벼댔다. 그의 시선이 자꾸 부단장실의 소파를 향했다.

“멀쩡한 침실이 있는데 왜 자꾸 집무실에서 하려고 하는 건지….”

카인이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하기 싫어?”

“그럴 리가요.”

카인은 루시엘을 안아 들어 소파에 눕혔다. 그 전에 집무실 문을 꽉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혈관이 팽창해 새빨간 빛을 띠는 입술 위로, 몇 번 더 다감한 입맞춤을 쏟아내었다.

키스는 입술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으로 이어졌다. 단추를 풀어 쇄골과 가슴팍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얄팍한 피부를 입술 사이에 머금고 세게 빨았다. 입질하듯 몸 곳곳에 순흔을 새기자, 간지러운지 루시엘이 몸을 움츠렸다.

움푹 파인 곧은 등골을 더듬어 쓸어내리다가, 움찔거리는 엉덩이를 두 손 가득히 쥐었다. 뒤를 주무르던 손이 엉덩이골 사이를 더듬었다.

중지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얕게 추삽질을 하다가 검지까지 한데 밀어 넣었다. 벌름거리는 구멍을 찬찬히 풀어주는 사이, 손가락을 문 안쪽이 녹진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안 풀어도 되니까, 아읏, 흐… 빨리 넣어줘, 응?”

루시엘이 칭얼대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카인의 목을 양팔로 세게 감고서, 그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었다. 카인이 구멍을 눌러 넓힐 때마다, 그의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안 돼요. 지금 넣었다가는 분명 아플 거예요.”

“아파도 상관없어. 네가 주는 거라면 통증이라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몽롱한 물기로 젖어든 눈빛이 카인을 바라보았다. 한 줄기 이성이 단숨에 뜯겨나가는 순간이었다. 곧 손가락이 뽑혀 나갔다. 성기가 단번에 안쪽을 꿰뚫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가쁜 헛숨과 유리된 신음만이 대화를 주도했다. 루시엘은 그의 허리에 제 다리를 감았다. 이편이 더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맞물린 접합부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와, 내벽을 턱턱 치받는 이물. 분홍색 돌기를 둥글리는 손끝과, 선율처럼 고막을 울리는 사랑의 밀어. 그 모든 자극이 쾌감으로 치환되었다.

“흐으, 읏, 좋아, 카인, 좋아해… 정말 많이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루시엘은 온몸으로 카인에게 매달렸다. 사랑한다는 단어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오직 카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아래에서 퍼져나간 쾌락이 머릿속을 흐무러지게 만들었다. 눈꺼풀 안쪽에서 붉고 푸른 꽃이 피어났다.

“하응, 읏, 하아앙…!”

루시엘은 목을 뒤로 젖혔다. 성대에서 높고 가는 교성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벌어진 요도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연인의 품 안에서 맞는 절정은, 항상 그래왔듯 황홀했다.

그날의 업무를 다 마친 후, 두 사람은 데이트를 즐기러 거리로 나갔다. 꿈속의 루시엘은 미움받는 폐제가 아니었으므로,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들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넓적한 은접시 위, 미디엄으로 구워진 스테이크에는 연갈색 소스가 뿌려져 있었다.

카인은 나이프를 들어, 루시엘 몫의 고기를 먼저 썰어주었다. 먹기 좋게 잘린 스테이크를 집어 루시엘의 입안에 쏙 넣어주었다. 사르르 녹을 정도로 보드라운 육질. 한 입 크게 씹을 때마다 진한 육즙이 송골송골 흘러내렸다.

맛있어요? 카인이 묻고, 루시엘은 눈꼬리를 나긋하게 접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오페라를 관람했다. 카인은 서정적인 멜로디에서 아리따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는 단지, 노래를 경청하는 루시엘의 옆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루시엘은 웃긴 장면에서는 한껏 입꼬리를 올리고, 어두운 장면에서는 저도 같이 눈가를 찡그리고는 했다. 그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게 좋아서, 카인은 오페라를 즐기게 되었다.

집에 돌아간 후에도 둘은 서로 꼭 붙어 있었다. 목욕도 같이할 정도였다. 욕조는 성인 남자 두 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루시엘은 카인의 가슴에 편히 등을 기대었다. 얇은 살갗 사이로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연인의 탄탄한 살결, 은은한 체취, 등줄기를 타고 아롱거리는 온기….

반짝이는 축복의 한가운데에서, 루시엘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이름 모를 신에게 빌면서.

그러나 언젠가는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법이다.

‘…….’

나는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출렁이는 물과 낡은 나무통이 들어왔다. 이곳은 나와 카인의 신혼집이 아니었다. 신벌이 주어지지 않은 순한 세계가 아니었다. 카인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어둡고 스산한 욕실이었다.

베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짐을 챙겼다. 아끼는 옷들을 가방에 쑤셔 넣고, 루시엘을 팔아서 번 금화 뭉치도 같이 챙겼다.

그는 방금 전 시종직을 사임했다. 사유는 황제의 밀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사임하기에는 꽤 적절한 이유였다.

단테나 루시엘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이리 발등을 찍히는 거겠지.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는 건가. 베넬은 키득거리며 가방을 단단히 잠갔다. 그는 이 돈 가방을 들고 멀리로 떠날 거였다. 저 변방에서 떵떵거리며 부자 놀음이나 해볼 생각이었다.

베넬은 양손으로 가방을 들었다. 금화로 묵직한 가방을 끌고서, 낑낑거리며 방 밖을 나섰다. 복도는 고요했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어슴푸레 깔렸다. 흰 바닥이 핏빛으로 얼룩졌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뱀의 똬리처럼 목을 얽어맸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가, 베넬의 목덜미 어딘가를 짚어 눌렀다. 순간 숨골이 딴딴하게 뭉쳤다.

“…윽!”

베넬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기절한 몸이 바닥에 질질 끌리더니, 비좁은 창고 안으로 처넣어졌다.

퍽.

“크억!”

베넬은 배가 걷어차이는 감각에 번쩍 눈을 떴다. 의자에 묶인 몸이 의자 채로 나동그라졌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목에 칼날이 들이밀어졌다. 무거우나 결코 둔하지는 않은 검이, 베넬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도 카인의 금안은 선명하게 빛났다. 사신의 손에 들린 낫보다 더 매섭게 벼려진 눈매였다.

“루시엘은 어디에 있지?”

칼날이 목을 얕게 파고들었다. 가늘게 베인 살갗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조금만 더 깊게 찔렀다가는 경동맥까지 긋게 되었을 거다. 파괴된 살들 사이에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을 수준으로 굴러떨어졌겠지.

쓰라린 통증에 베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나 그에게는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루시엘이요?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폐하의 명령을 따라서, 루시엘을 폐하께 인도해드렸을 뿐이에요. 제가 아니라 황제께 직접 물으셔야죠.”

“…….”

카인은 검을 놓지 않았다. 대신 검 손잡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설마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전 황제께서 내리신 밀서를 받고 움직인 것뿐입니다. 저를 죽이는 건 황제 폐하의 명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

“거짓말 마라. 황제의 명을 어긴 건 네놈이 아니더냐. 루시엘을 단테에게 넘기기는커녕, 비싼 값으로 노예 상인에게 팔아넘긴 주제에.”

“……!”

베넬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서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낯빛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믿고 있던 유일한 방패가 사라져버린 지금, 베넬이 할 수 있는 것은 혼절할 듯 파리하게 얼굴을 굳히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다시 묻겠다. 루시엘은 어디 있지?”

사신의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물었다. 그리고 원하는 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는 베넬의 생명을 앗아갈 작정이었다.

카인은 불길한 핏물을 흠뻑 묻힌 채로 밤의 거리를 달렸다. 피로 젖은 제복에서는 희미한 쇠 비린내가 났다. 바짓단 위에 떨어진 투명한 빗방울이, 피를 가득 머금고서 발목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가 내디딘 자리마다 붉은 피가 가는 줄기를 이뤘다. 혈관처럼 땅 곳곳으로 스미는 핏자국들. 그것은 카인의 피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끗힐끗 카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있었다면, 피로 물든 제복부터 먼저 갈아입었을 터였다.

빗줄기가 세상을 눅눅하게 적시고 있었다. 굽이굽이 몰아치는 길도,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 공간도, 회색으로 바랜 낡은 골목도. 사방으로 툭툭 튀는 저 무수한 울음들.

루시엘이 몇 시간 전 걸었던 길을, 카인은 그대로 따라 달렸다. 비는 카인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처럼 부드럽게 떨어지기도 하고, 그를 책망하는 것처럼 세차게 뺨을 할퀴기도 했다.

절버덕, 진흙이 반죽처럼 흘러내렸다. 구둣발로 짓이겨진 흙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카인은 언뜻 이런 생각을 했다. 무의식 한 귀퉁이에 언제나 품고 있었던 소망. 그러나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모진 바람.

당신이 아예 망가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자유도 탈출도 꿈꾸지 않겠지. 나를 증오하며 스스로 곯아가는 대신, 순전한 쾌락을 좇아서 내 품에 안기겠지.

어쭙잖은 다정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낫겠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할 바에는, 제 과거도 담아내지 못하는 망가진 그릇이 되어라. 그럼 당신은 더는 괴롭지 않을 테다.

예전에 제국에서는 포로를 고문할 때 쾌락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역치 이상의 쾌감을 계속해서 준다면, 정액을 끝까지 짜낸 후에도 연신 마른 절정을 겪게 한다면, 어느 순간 이성이 뚝, 부러져버린다고. 자유를 부르짖는 한 ‘인간’은 사라지고, 깨진 영혼을 지닌 텅 빈 육체만이 남게 된다고.

원래는 영혼을 흩트리는 걸 돕는 향초를 피워야 하나, 당신에게는 그런 향초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당신은 쾌락에 약한 몸뚱이를 가졌으니, 더욱 쉽게 허물어질 수 있겠지.

사실 아주 조금은 기대했었다. 당신을 내 곁에 두고 정성으로 돌본다면, 언젠가 당신도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내가 이토록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도 내게 한 조각의 마음 정도는 내어주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꿔왔던 것이다. 헛것을 바란 대가는 참혹했다. 당신은 또 도망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회만 생긴다면 새장을 떠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망가져야 한다. 맨정신으로 슬픔과 원망을 곱씹으며 말라갈 바에는, 찌그러진 영혼을 부여잡고 배시시 웃어 주기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역시 당신은 부서져 버리는 게 낫다.

나는 산산조각 난 당신마저 사랑할 수 있다. 그것 또한 당신이기에.

저 멀리서 삼 층 주택이 보였다. 주술사의 집처럼 음침한 검은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베넬이 벌벌 떨며 알려준 장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 안에 루시엘이 있었다. 카인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러나 절대로 카인을 사랑해주지는 않을 소중한 배우자가.

루시엘은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따로 옷이 마련된 게 없어서 큼지막한 수건을 둘렀다. 제럴드에게 옷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수건을 꼭 그러잡고 거실로 향했다.

“어…?”

거실에는 제럴드 말고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와 있었다. 루시엘이 익히 아는 사내였다.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결단코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에반?”

루시엘을 강간하려다가 실패했던 전 기사 단장이, 벽난로 옆에 떡 하니 앉아있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이거 영광입니다. 폐하. 아니, 이제 폐제 나리라고 불러야 하나?”

에반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루시엘에게로 다가왔다.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분명 먼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을 터인데…”

“그쪽이 폐위당하면서 제 유배도 함께 풀렸습니다. 지금은 기사직을 내려놓고 친구의 노예상 일을 돕는 중이지요. 명예와 충성만 중시하는 기사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돈이 된답니다.”

“노예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루시엘이 겁에 질려 한 발짝 물러나면, 에반은 긴 다리를 놀려 두 발짝 다가왔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딱딱한 벽에 등이 닿았다. 퇴로가 차단되는 건 순간이었다.

으슥한 그림자가 루시엘의 위로 드리워졌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루시엘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고양이 앞의 생쥐, 매 앞의 참새. 도망갈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일단 신체검사부터 해볼까요?”

험악한 손아귀가 루시엘의 어깨를 틀어잡았다.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나 싶더니, 루시엘의 나신이 에반의 어깨 위에 얹혔다.

루시엘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손톱을 세워 에반의 등을 긁었으나, 작은 고양이의 하악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에반은 그를 테이블 위에 눕혔다. 테이블의 네 다리에는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싫다고 아우성치는 루시엘을 가차 없이 짓뭉개고는, 밧줄로 사지를 동여매었다.

무릎을 굽히고 두 다리를 벌리게 만들자, 국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씻어서 그런지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물방울이 허벅지를 타고 굴렀다.

“역시 제일 중요한 구멍 검사부터 해야겠지.”

“네놈, 무슨 헛소리를… 흐익!”

파득거리던 수족에 일제히 힘이 풀렸다. 몸에 맺혀있던 물기가 테이블로 떨어졌다. 에반의 손가락이 루시엘의 양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손가락이 예고도 없이 꽂혀, 검사하듯 꼼꼼하게 내벽을 훑어댔다.

거칠고 메마른 손가락이었다. 루시엘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버거워했으나, 안쪽의 숨겨진 극점을 더듬자 구멍이 스스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습기 찬 점막이 검지와 중지에 달라붙었다. 기민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이물질을 빨아들였다.

쑤셔지는 건 뒷구멍인데, 목구멍에 이물질이 밀어 넣어진 것마냥 숨이 막혀왔다. 허리가 아가미처럼 파드득 튀었다. 숨을 들이켜려고 벌어진 입술 새로, 타액이 질질 흘렀다.

성기는 반쯤 부풀어 오르기는 했으나, 아직 완전히 발기하지는 않았다. 카인이 만져줄 때에 비해서는 확연히 굼뜬 반응이었다.

꽂혀든 손가락이 셋으로 늘어났다. 손가락을 구부려 손끝으로 뱃가죽 근처를 살살 문지르다가, 엄지로 회음부를 간질였다. 침 고인 혀에서 열띤 헐떡임이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잔뜩 개발된 몸뚱이는, 강압적으로 범해지는 와중에도 쾌감을 주워 담았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경험한 성교 중 강간이 아닌 게 있었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강간이었다.

미약을 먹였던 에반, 제 뱃속에 알을 산란시킨 촉수 괴물, 늑대 상태로 저를 범한 발정기의 카인. 최면에 걸린 채로 이뤄졌던 수많은 관계들과, 한쪽의 사랑으로만 치러진 치욕스러운 결혼식. 심지어는 범해지는 모습을 이복동생에게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더 떨어질 곳도 없다 여겼는데, 아직 밑바닥이랄 게 남아 있었나 보다. 이제는 노예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하게 되다니.

‘어쩌면 이건 천벌인 걸까.’

아버지를 살해해서,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해서, 이복동생인 단테를 하대해서, 신하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지도, 아랫사람들을 너그러이 보듬어주지도 않아서… 그래서 신이 이토록 혹독한 벌을 내린 것일까.

시야가 맥없이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뜰 때마다 눈물이 장마처럼 흘러넘쳤다. 제럴드가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기에, 도리질을 치며 반항했다. 묶이지 않은 고개를 움직이는 것, 그것이 루시엘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저항이었다.

세 손가락이 일거에 뽑혔다. 흐읍, 아악! 루시엘은 쉰 목으로 쪼개진 숨을 들이쉬었다. 잡아 물 것을 잃은 구멍이 멋대로 여닫히며, 멀건 애액을 꾸물꾸물 흘려보냈다.

제럴드가 테이블 밑에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상자 안에는 갖가지 흉흉한 성기구들이 담겨 있었다. 루시엘은 고개만 위로 들어 기구를 살폈다.

로터나 딜도, 애널 비즈와 아네로스… 익숙한 물건들 중에서 처음 보는 물건이 눈에 밟혔다. 오므라든 튤립 송이처럼 생긴 기구였다. 미끄러운 금속 표면이 벽난로의 불빛을 받아 벌겋게 빛났다. 기괴한 느낌을 주는 물체에, 루시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 한 번 볼까나?”

제럴드에게 기구를 건네받고서, 에반이 음흉하게 웃었다. 정욕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미소였다.

그는 도톰하게 부은 애널 가장자리에 기구를 대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느긋하게 기구를 모두 밀어 넣고서 나사를 조였다.

꽃이 개화하듯 기구가 천천히 벌어졌다. 구멍이 둥글게 열리며 선홍색 내벽이 외기에 노출되었다. 조밀한 점막 주름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들여다보였다.

“버, 벌리지 마… 아, 싫어엇…”

발가벗겨져서 결박당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수치스러웠는데, 이제는 구멍이 저 안쪽까지 활짝 벌려진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모였다.

루시엘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책상다리가 덜컹거리며 테이블이 흔들렸다. 허나 그뿐, 밧줄은 풀리지 않았다. 도리어 손목과 발목을 억세게 잡아매었다. 밧줄에 쓸린 무른 살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랐다.

에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길고 가는 금속봉을 꺼냈다. 교편과 유사한 모양새였다. 교사의 손에 들려 칠판을 가리켜야 할 교편이, 꽃처럼 활짝 열린 구멍을 쿡쿡 찔러대었다.

“네, 네놈… 정녕 미친 거냐? 지금 무슨 짓을…”

“움직이지 마. 노예 성감대가 어딘지는 미리 파악해 놓아야 할 것 아니야.”

에반이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창살 같은 눈초리가 다리 사이를 적나라하게 핥았다. 원래 청록색이었던 눈동자는, 벽난로의 불꽃에 비쳐 더운 주황빛으로도 보였다. 어쩌면 타오르는 욕망 때문에 새빨갛게 변색되었는지도 몰랐다.

“어디 보자, 여기려나?”

금속봉이 속살을 문질렀다. 단단하고 서늘한 막대가, 여리고 홧홧한 안쪽을 헤집어대는 감각이 기묘했다. 무심하게 내벽 이곳저곳을 더듬대다가, 유독 도톰하게 부풀어있는 부위를 꾹 눌렀다.

“흐으, 아, 아앗!”

신음소리가 높아졌다. 백합처럼 희었던 볼이 눈 바로 아래까지 발간 핏기를 머금었다. 흥분과 수치심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낯빛이었다. 필연적으로 외설적인 얼굴이었다.

“아아, 여기구나. 꼴에 꽤나 깊은 곳에 있네.”

에반이 피식거렸다. 그는 한 번 더 전립선을 거세게 문질렀다. 찔러댈 때마다 루시엘은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쳐들었다.

한 편, 제럴드는 작은 노트를 손에 쥐고서, 루시엘의 반응을 꼼꼼히 필기했다. 그가 적은 정보들은 후에 노예 경매를 할 때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뒷구멍은 이쯤 하면 됐고, 이제 가슴 감도를 볼 차례네.”

에반은 금속봉을 내던지고 이번에는 장갑을 끼었다. 장갑의 손등 부분은 보통 가죽장갑과 진배없었으나, 손바닥과 손끝에 우둘투둘한 돌기들이 돋아나 있었다.

안 그래도 카인에게 조교 당해 민감해진 가슴이었다. 저런 해괴망측한 장갑으로 유두를 거칠게 자극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필시 꼴사납게 가버리게 되리라. 허리를 들썩이고 눈을 뒤집으면서 절정을 맞을 게 확실하다.

“하, 하지 마, 가슴은 안 돼. 가슴은…”

울음 때문에 말끝이 뭉개졌다, 루시엘은 헐떡거리며 싫다는 말만을 반복했지만, 그의 의사는 정욕 앞에서 무참히 사살되었다.

에반이 루시엘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둥근 원을 덧그리며 쓰다듬었다. 볼록한 돌기가 색이 옅은 유륜을 간지럽히자, 직접 자극을 받지도 않은 유두가 발딱 일어섰다.

작은 젖꼭지를 짓뭉개듯이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루시엘이 아랫입술을 윽물었다. 가슴으로 느낀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며 신음을 참았다. 소리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중심부는 발기해서 쿠퍼액까지 흘리고 있었다.

꼬집힌 유두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비벼졌다. 자잘한 돌기들이 민감한 젖꼭지를 꾹꾹 찔러대었다. 가슴께에 희석되지 않은 미약을 들이부어도, 이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가슴으로 느끼는 게 부끄러워?”

“느낀 적, 없… 흐으, 윽…”

반박하려고 입을 열면 곧바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루시엘은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폭력적으로 밀려오는 쾌감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리하여 이성을 잃고 떠밀려가지 않도록 애를 썼다.

“가슴으로만 가는 건 아직 무리인가?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한참 동안 살없는 가슴을 주무르던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떼어냈다. 루시엘의 성기는 금방이라도 파정할 것처럼 부어있었지만, 아직 정액은 나오지 않았다.

“쟤도 싸고 싶어 할 거 같은데, 앞도 좀 만져줘. 겸사겸사 뒤도 적셔주고.”

제럴드가 윤활제를 집어 에반에게 던졌다. 꿀처럼 향긋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암갈색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최음 효과가 없는 그냥 평범한 향유였다.

항유를 기울여 빳빳이 솟은 살기둥 위로 늘어뜨렸다. 곧고 말간 성기를 따라 흘러내린 액체는, 음낭과 회음부까지 질척하게 적셨다. 둔부 사이로 흘러 엉덩이골 쪽으로 꿈질꿈질 배어들었다.

“흐… 흐으… 아, 악, 아앙!”

액체가 성기를 타고 흐를 때는 가쁜 숨만 몰아쉬더니, 구멍 쪽으로 스미자 눈을 홉뜨고 탄성을 내지른다. 앞과 뒤를 만져줄 때의 반응 차이가 극명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좆을 달고 있으면서 뒤로 더 느끼는 건가?”

에반은 짓궂게 귀엣말하며 루시엘의 샅을 꽉 쥐었다. 질척한 윤활제가 살기둥에 달라붙었다. 길게 늘어진 젤을 살살 문지르다가, 호흡하듯 벌름거리는 요도구 근처를 꾹꾹 눌렀다. 여전히 돌기형 장갑을 착용한 채였다.

“아, 아냐… 틀려어… 흐윽…”

루시엘이 힘없이 울먹였다. 제 중심부를 움켜잡는 손에서 벗어나려고 허리를 비틀었다. 엄지 배로 요도구를 거칠게 비비자,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달뜨게 호흡했다.

유리병에는 젤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기구가 삽입되어 한계까지 열려 있는 애널 안으로, 남은 윤활제를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히 벌어진 구멍 사이로, 진득한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꿈틀거리는 내벽 주름을 적시고 꾸물꾸물 안쪽으로 나아갔다. 금속제의 기구로 벌려놓은 점막이 눈에 띄게 움칠거렸다.

그 모든 광경을, 제럴드가 수첩에 착실히 기록하고 있었다.

에반은 기구의 나사를 풀어, 기구가 다시 꽃봉오리 모양으로 우므러들게 만들었다. 느릿하게 기구를 빼내자, 점막이 휘감기듯 금속에 달라붙으며 이물질을 조였다.

내벽이 기구의 끝부분을 빨아들였다. 힘을 주어 완전히 뽑아낸 후에도, 도톰한 입구가 살짝 열려 있었다. 충혈된 점막이 살짝 들여다보였다.

“얼마나 잘 조이는지만 테스트하면 되겠는데?”

제럴드가 에반에게 제안했고, 에반은 알았다며 앞뒤로 고갯짓했다.

철컥, 허리벨트를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가 꺼덕거리며 드로즈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지막 테스트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반은 루시엘을 강간하려고 하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제 좆으로.

“시, 싫어. 도와줘, 제발…”

루시엘이 애처롭게 허덕거렸다. 긴장감으로 혀가 굳은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만약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었어도, 아무도 그의 절규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저택은 번화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데다가, 방음 마법까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와줘, 카인.

우습게도 루시엘은, 하마터면 카인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그의 인생을 망친 이는 카인인데, 이런 상황에서 카인을 떠올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시엘은 이를 윽물었다.

커다란 손이 달아나려는 허리를 붙잡았다. 검붉은 귀두가 보드라운 허벅지에 슬슬 문질러졌다. 조금만 앞으로 나아간다면, 흉흉한 좆이 안쪽을 꿰뚫고 말 거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진창이 고인 눈가가 눈물로 일렁였다.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문짝이 뜯어지듯 열렸다. 루시엘! 다급한 음성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익숙하다 못해 귀에 박힌 목소리. 잊어버리고 싶던, 그러나 한시도 잊은 적 없는 그 목소리.

“저놈은 또 뭐야?”

“에반, 멍하게 있지 말고 어서 검을 들어. 너 수준에 저런 잔챙이는 금방이잖아?”

제럴드가 에반을 다그쳤다. 에반은 벽난로 위에 걸려있던 장검을 냉큼 뽑아 들었다. 넓고 무거운 칼날의 브로드 소드였다.

“루시엘, 눈을 감아요.”

허리춤에 찬 검을 빼내 들며, 카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리고 루시엘은 눈꺼풀을 닫았다. 금 간 틈으로 빛이 새어들지 않게끔, 위와 아래가 굳게 맞물렸다.

사방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빛 알갱이들이 먼지처럼 떠다니는 암흑 속에서, 선득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잘 버려진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 날카로운 칼끝이 공기를 가르고, 허공을 베고, 끝내는 살갗을 파헤치는 소리. 선연한 피 냄새, 단말마의 비명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아비규환.

손발을 묶고 있던 밧줄이 헐거워졌다. 듬직한 팔이 루시엘의 허리를 감싸고서, 그를 탁상에서 끌어내렸다. 한참 동안 결박당한 까닭에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발목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카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서, 무너지려는 루시엘을 제 품으로 받아 안았다. 카인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는 순간, 소름 끼치는 혈향이 확 풍겼다. 피에 젖은 제복이 끈적거렸다. 그중 카인의 피는 어디에도 없었다.

루시엘은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려움으로 경련하는 눈동자가 붉디붉었다. 안도가 아닌 새로운 공포다. 구원자가 아닌 침략자를 보는 눈이다. 루시엘은 카인을 겁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카인의 늑골에 검날처럼 싸늘한 감각이 뿌리내렸다. 칼에 베이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아팠다. 울컥거리며 역류하는 피를 쏟아내고 싶어졌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루시엘이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네가 뭔 짓을 해도, 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발 날 놔줘. 포기할 때도 되었잖아. 너랑 있으면 난 괴로울 뿐이야.”

음절 뒤로 다음 음절을 이어 붙일 때마다 격정이 벅차올랐다. 마지막 문장은 말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깝게 느껴졌다.

카인은 놀라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기대한 적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루시엘의 등을 다독였다.

“더는 괴롭지 않게 해줄게요.”

“…어떻게…?”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면 돼요. 과거를 기억해내지 못할 만큼 부서져서, 제가 주는 쾌감만 기쁘게 받아먹는 거예요. 그럼 저도, 루시엘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여상스러운 어조로 뱉어내는 기묘한 문장. 비틀린 사랑으로 점철된 언어들이, 루시엘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단편적인 단어들이 흩어져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루시엘이 이해한 게 맞다면, 카인은 저의 영혼을 망가뜨릴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쳤어?”

“부디 제 품 안에서 망가져 주세요. 내 사랑.”

피가 점점이 흩뿌려진 얼굴로, 카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이게 나의 최선이라서. 나는 당신에게, 이런 뒤틀린 사랑밖에 바칠 수 없어서.

당신은 울고 헐떡이고 살려달라고 울부짖겠지만, 한계를 넘는 절정에 괴로워하며 몸서리를 치겠지만.

쾌감이 당신의 영혼을 모조리 좀먹게 된다면, 당신은 더는 그만두라 외치지 않을 것이다. 외려 헤실헤실 웃으며 본능이 이끄는 대로 허리를 흔들 것이다.

카인은 기사단의 상징인 붉은 망토를 벗었다. 그 천으로 루시엘의 나신을 빈틈없이 감쌌다. 망연자실한 루시엘을 안아 들며, 퍽 달달한 어조로 속살거렸다.

“가요. 우리 신혼집으로.”

“부디 제 품 안에서 망가져 주세요. 내 사랑.”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었다. 너의 그 고백을 듣고 싶어서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 순했던 네가 끝내 나를 부수기로 마음먹기를, 그리하여 내가 ‘망가진’ 연기를 할 수 있기를.

나는 네 품속에서 망가질 것이다. 너에 대한 해묵은 증오, 자유를 향한 갈망, 동성에게 안긴다는 본능적 거부감…. ‘루시엘’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산산이 깨진다면, 결국 남는 것은 쾌락에 솔직한 몸뚱이뿐이다.

그러면 나는 이제 너에게 안아 달라 조를 수 있다. 너의 입술에 내가 먼저 입 맞출 수 있다. 카인이 좋다고, 카인이 이렇게 날 안아주는 게 너무 좋다고, 눈웃음을 치며 애교 부릴 수도 있다.

내가 사랑을 고백한다 해도 신벌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신벌은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순애’라고 인식할 때에만 내려진다.

카인의 기준에서 이것은 순애가 아니다. 단지 내 영혼이 깨져버린 것에 불과하다. 망가진 채로 내뱉는 사랑은 진짜가 아니다.

나는 너를 응시한다. 피를 흠뻑 묻히고도 찬란하게 웃는 너를. 너의 이마에 맺힌 피가, 눈꺼풀을 타고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뺨을 따라 흐른다. 그 모습은 꼭, 네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핏방울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루시엘’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사랑을 말하기에는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것이 나의 최선이야, 카인. 나 역시 너처럼, 이런 뒤틀린 사랑밖에 건넬 수가 없어. 온 힘을 다해 나를 망가뜨려 줘. 그래서 내가, 맘껏 사랑을 말할 수 있게 해줘.

“가요. 우리 신혼집으로.”

그래, 가자. 우리 둘만의 안락한 신혼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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