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20)

13. 너의 생일을 축하해

오늘은 카인의 생일이다.

생일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태어난 날은 아니었다. 카인이 실제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카인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는 부모가 버린 자식이었다.

카인의 생일을 정해준 이는 루시엘이었다. 자신이 카인을 주워 온 그날을 생일이라고 하자 했다. 루시엘 덕분에 카인이 새 삶을 얻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라면 ‘생일’이라 칭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지난 생일까지, 카인은 제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카인은 인간이 아닌 짐승의 형상을 하고서 축하를 받았다. 그는 고맙다는 말 대신, 늑대 울음소리만 겨우 낼 수 있었다.

오늘은 카인이 인간인 채로 맞는 첫 생일이었다. 단원들은 돈을 모아 부단장에게 투헨더 소드를 선물했다.

손잡이에 장식이 거의 없는 고풍스러운 검이었다. 검날에는 첨예한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최고급 마법으로 강화된 검은, 실력자가 쓰게 된다면 드래곤의 머리도 능히 벨 수 있었다.

카인은 육중한 양손 검을 한 손으로 잡고 가볍게 휘둘렸다. 칼끝이 눈보라처럼 매섭게 공기를 파고들었다. 연무장 한가운데 쭈그려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단원들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중 밤톨 머리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기사의 이름은 마론. 아직 앳된 티가 가득한 신입이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존경심으로 반짝거렸다.

“역시 부단장님과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쓰셨던 검은 뭐랄까… 너무 화려하고 연약한 느낌?”

카인은 연무장 구석에 곱게 내려놓은 제 검을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기사 작위와 함께 수여한 레이피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카인과 함께 해왔다.

그것은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가늘고 가벼웠으며, 또한 기사에겐 과도하리만치 호화로웠다. 은도금한 손잡이에는 새빨간 루비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검날과 검집에는 귀부인의 치맛자락처럼 세밀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루시엘을 닮아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검이었다.

“그럼 이제 저 레이피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파실 건가요? 좋은 검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비싼 것 같기는 합니다.”

밤톨 기사는 카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인상이 냉랭한 탓에, 보통 이들은 카인과 말 섞기를 어려워하는 편인데, 마론은 원체 넉살이 좋은 건가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카인은 대답 대신 레이피어를 집어 들었다. 오늘 선물 받은 소드는 등에 메고, 레이피어는 다시금 허리춤에 동여맸다.

“앗. 또 그 검을 차시는 겁니까?”

“…그래.”

“그렇지만 안 어울리… 읍!”

마론의 선배 기사가 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이 녀석이 정식 기사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지나치게 들뜬 모양입니다. 제가 한 번 제대로 정신 교육 시켜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마론의 뒤통수를 잡고 꽉 내리눌렀다. 허리를 깍듯이 숙이며 죄송하다고 대신 사과를 건넸다.

마론은 한쪽 귀가 잡힌 채로 창고 뒤편으로 끌려갔다. 곧 기합을 주는 소리와 질질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의 위계질서는 상당히 살벌한 편이었다.

카인은 말없이 허리의 장검을 만지작거렸다. 붉은 천이 감긴 자루를 쓸어내리다가 은색 폼멜을 더듬었다. 사후경직이 일어난 시체를 만지는 듯, 소름 돋을 정도로 싸늘한 감각.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굳혔다.

어쩌면 마론의 말이 옳은 걸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연약한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가볍고 가느다란 것.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 쉽게 달아오르고 간단히 부서지는 것. 그런 것을 소유할 만한 이는, 적어도 나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검만은 절대로 남에게 넘겨주지 않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가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카인은 부단장실에 들어가, 서랍 안에 넣어둔 수정 구슬을 꺼냈다. 그 구슬은 지하실에 설치된 영상구와 연동되어 있었다.

루시엘이 감금된 방 안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수정구에 비쳤다. 루시엘은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고, 베넬은 화분의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정경이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종일 루시엘을 만나지 못했다. 수도 근처에 마물이 나타난 탓이었다. 굳이 황실 기사단이 나설 필요는 없는 임무였으나, 황제는 그 임무를 기사단에게 맡겼다. 카인은 어제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을 퇴치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부로 귀환하자마자, 곧장 기사단이 준비한 깜짝 생일 파티가 이어졌다.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에는 검술 시연이 있었고, 이제야 겨우 숨 돌릴 틈이 생긴 참이었다. 말 그대로 딱 숨만 돌릴 수 있을, 짧은 여유였다. 한 시간 후에는 연습 대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련이 끝나고 나면, 루시엘을 만날 수 있겠지.’

루시엘이 제 생일을 축하해주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온한 축복의 말 같은 게, 이 관계에 들어맞을 리 없었다.

그는 다만 루시엘을 보고 싶었다. 너 같은 건 아예 태어나지 않아야 했다는 등의, 악독한 저주의 말을 듣게 될지라도 상관없었다. 루시엘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었으므로.

카인은 가만히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루시엘이 책을 한 장 넘겼다. 바다의 일러스트가 양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마르고 파란 파도가 넘실거렸다. 금세라도 종이 밖으로 흘러넘칠 것 같았다.

‘…저건…?’

카인은 얻어맞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혈관 속으로 불길한 한기가 돌았다.

카인은 저 책을 본 적이 있었다. 바다 생물들의 삽화가 담긴 해양 백과였다. 진청색 가죽 표지에 회색 가름끈의 양장본.

그의 기억이 맞다면, 루시엘은 닷새 전에 저 백과사전을 완독했다. 카인이 방을 나간 후부터 읽기 시작해서, 카인이 돌아오기 바로 전에 책을 덮었다. 업무 중에도 간간이 수정구를 살폈기에 알고 있었다.

루시엘은 동일한 책을 두 번 이상 탐독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이 의견에 동의할 터였다.

루시엘은 뭐든 쉽게 질려했다. 그가 처음 새끼 늑대를 황성에 들였을 때, 늑대가 얼마 만에 버려질지를 두고 시종들이 내기를 했을 정도였다. 길어봤자 일주일도 가지 못할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런 루시엘이, 불과 닷새 전에 읽었던 책을 또 집어 든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였다. 지금 수정구에서 나오는 영상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 수정구에 마법을 걸어, 닷새 전 과거가 재생되도록 조작해놓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루시엘은…!’

카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단장실 문고리를 막 잡아당기려는 그때,

“부단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론이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방 안으로 가쁘게 뛰어 들어왔다. 물에 불은 것마냥 눈두덩이 퉁퉁 부어있었다.

“제가 너무 예의 없게 굴었죠.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세요.”

마론은 바닥에 철푸덕 엎드려 싹싹 빌어댔다. 카인이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제 마음이 편치 않다며 카인의 바짓단에 눈물을 닦아댔다.

지금처럼 이렇게 바짓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행위가, 훨씬 더 예의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 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정부터 정오가 된 지금까지, 온통 정신 사나운 일투성이였다.

그는 마론을 걷어차듯 떼어내었다. 마론이 뭐라고 외치며 카인을 붙잡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그의 손을 세게 밟아주었다. 한시가 급했다. 하찮은 일에 귀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실을 향해 달렸다.

마론은 훌쩍거리며 연무장 뒤뜰로 향했다. 다른 기사들은 마물 소탕에 필요한 무기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그 누구도 질질 짜고 있는 신입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넝쿨 속에 몸을 숨겼다.

마론은 주머니에서 엄지손톱만 한 펜던트를 꺼냈다. 황제의 밀서와 함께 주어지는, 연락용 마법 도구였다. 그는 보랏빛 펜던트를 입가로 가져다 대고는, 작지만 또렷하게 속삭였다.

“이봐, 내 말 들리나?”

“네, 들립니다.”

펜던트 너머로, 베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인이 눈치챈 것 같다. 물론 우리 쪽에는 휴대용 텔레포트 기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여유 부리지는 마라. 최대한 빨리 목표물을 탈출시키도록.”

“크흣, 네에… 알겠, 흡, 습니다.”

펜던트에 주입된 마력이 부족한 걸까. 들려오는 문장이 뚝뚝 끊겼다. 쉼표와 쉼표 사이마다, 신음을 닮은 소음이 자글자글 섞여 있었다.

“폐하의 특명이다. 목숨을 바쳐 수행해라.”

마론이 엄중하게 당부했건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길고 두꺼운 무언가가 식도를 찌르는 듯, 욱욱거리는 앓는 음이 배경처럼 깔렸다. 소리만 들으면, 베넬이 폐제에게 구음을 강요하는 건가 싶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무래도 펜던트가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이라고, 마론은 추측했다. 그것은 퍽 합리적인 추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베넬은 그런 추론이 통할 만큼 상식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두 발로 달렸고, 나중에는 네 발로 뛰었다. 열쇠는 손에 드는 대신 입에 물었다. 인간의 보폭에 맞춰 만들어진 지하 계단을, 늑대의 형상을 하고서 단번에 일고여덟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육체적 피로가 아닌, 정신적 고통 때문이었다. 루시엘을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선명한 공포가, 머릿속과 심장을 꽉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어떤 날카로운 검 앞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심이었다.

카인은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달리는 와중에도 연신 머리를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사실 영상구를 아예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작이 가능했다면, 루시엘을 폐위시키는데 영상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범인은 영상구 자체의 시간을 닷새 전으로 돌려, 예전에 나왔던 장면이 거듭 비치게 만든 듯했다. 사물의 시간을 돌릴 수준의 최고위급 마법사는,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자는 단테의 측근이었다.

또한 황제는 뭐든지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실의 자물쇠를 푸는 건 문제도 아닐 터였다.

‘역시 황제의 짓인가.’

황제가 루시엘을 앗아가려 한다면, 나는 제국 전체에 칼을 겨눌 테다. 신이 나의 사랑을 방해한다면, 나는 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릴 테다.

루시엘은 내 것이다.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나의 운명이다. 빼앗긴다면 어떤 수를 써서든 되찾겠다. 다친다면 악마와 계약해서라도 그를 치료하겠다. 그리고 혹여 죽는다면… 나 또한 그를 따라 목숨을 내던지겠다.

카인은 문 앞에 섰다. 늑대의 앞발로는 열쇠를 문고리에 꽂기는커녕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감정이 격해져서인지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카인은 이를 아득 갈며, 육중한 철문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한다.

카인은 문을 향해 무작정 몸을 날렸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첩이 삐걱거렸으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거대한 늑대의 육체가 한 번 더 문을 들이받았다. 단련된 몸이라고는 하나, 금속의 경도에 비하면 한참 물렀다. 부딪힌 살과 뼈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허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흔한 신음 한 마디 토해내지 않고, 온몸으로 계속해서 문을 내리쳤다.

필시 카인의 몸뚱이에는, 보기 흉한 멍이 들 것이다. 지금 그가 느끼는 이 감정, 이 공포와 불안감은, 분명 잔혹한 멍이 되어 전신에 고이게 될 테다. 오늘의 기억을 손끝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푸르게 멍울진 살갗이 아프다며 고함을 내지를 테다.

콰앙!

마침내, 그 커다란 문짝이 뒤쪽으로 허물어졌다. 회색 먼지가 착란처럼 자욱이 날렸다.

활짝 뚫린 입구 너머로, 눈치 없이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빛이었다. 카인의 동공이 확 좁아 들었다. 검게 질린 동공 안으로, 방 안의 윤곽이 그려졌다.

오늘은 카인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지금껏 받은 선물 중 단연 최악의 것이었다.

카인의 생일 전날, 베넬은 내게 자세한 탈출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영상구의 시간을 돌려 과거의 장면이 재생되게 하고, 황제의 열쇠로 지하실 문을 열고 나간다.

준비한 텔레포트 기기는 지하실 밖에서 사용해야 했다. 방 내부에 마력 감지용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자잘한 마법 도구는 마법사의 역량으로 그 기척을 감출 수 있었지만, 텔레포트 기기처럼 많은 마력을 포함한 것은 숨기기 어려웠다.

“황제의 열쇠라면… 설마 단테가 나를 구하라고 시킨 거야?”

“아니요.”

베넬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 모든 건 순수한 저의 선의예요. 황제의 의사와는 전혀 관련 없어요.”

“…….”

“그래서 말인데, 가는 정이 있다면 오는 정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루시엘은 제 은혜를 뭐로 갚을래요?”

야. 방금 네가 순수한 선의라며. 뭘 갚아라 마라야.

“미안하지만 베넬, 난 이제 돈도 권력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갚으라는 거야?”

“없긴 뭐가 없어요.”

그가 쿡쿡 웃었다. 쭉 뻗은 검지 끝이 내 쪽을 향했다.

“그쪽 몸뚱이가 아직 남아 있잖아요.”

“…….”

그래. 이런 전개일 줄 알았다. 베넬 같은 변태가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리지는 않겠지.

그런데 베넬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나에게는 몸 말고도 많은 게 남아 있다. 예를 들자면 흑마법 같은 거. 사랑스러운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울 수는 없으니까, 흑마법 써서 적당히 환각이랑 환청으로 때워야겠다.

“알았어. 여기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뭐든 못할까.”

나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작전의 실행 날짜는 내일이에요. 그날 영상구의 시간을 돌릴 거니까, 겸사겸사해서 은혜도 갚자고요.”

“내일이라면 3월 20일 말이야?”

“네. 갇혀만 계셔서 모를 줄 알았는데, 나름 날짜 감각이 있으시네요?”

그 많은 날짜 중에서 하필 카인의 생일날이라니. 이건 좀 서글펐다. ‘루시엘’이나 카인이나, 행복해야 할 생일에 큰 불행을 겪게 되는 것 같다. ‘루시엘’이 폐위된 때도 생일이고, 카인이 나와 이별하게 될 날도 생일이다.

그렇지만 괜찮을 거다. 하루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이별일 테니까. 내 일련의 계획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나는 카인에게 소리 내어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카인의 볼을 감싸고 입술을 비벼댈지라도, 신벌은 내려지지 않을 테지.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그 당연한 권리를, 오랜 고생 끝에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내일이 기대되네요.”

‘나도.’

카인이 문을 열었을 때, 루시엘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구겨진 시트와 널브러진 이불이 그를 반겼다. 반쯤 사용한 윤활제와, 시트에 남아 있는 비릿한 물 얼룩. 정사 직후의 방 안에는 기묘한 열감이 젖은 구름처럼 떠돌고 있었다.

카인은 손을 뻗어, 두 사람이 나뒹굴었을 침대 위를 찬찬히 쓸었다. 녹녹한 온기가 손바닥을 적셨다. 루시엘이 얼마 전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상황을 직시하자, 온갖 혼란이 명치로부터 기어 올라왔다. 카인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느리게 내뱉었다. 격정과 낙담은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휘몰아치는 머릿속을 간신히 정돈했다. 지금 이 현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베넬은 황제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결론은 삽시간에 도출되었다.

루시엘을 구하라고 명령한 자는 단테가 맞을 테다. 황제의 분부대로라면 베넬은 첫째로는 루시엘을 지하실에서 탈출시키고, 둘째로는 그 후 루시엘을 황제에게로 데리고 왔어야 했다.

베넬은 첫 번째 명령은 따랐으나 두 번째 명령에는 불복했다. 생생한 성교의 자취가 그 증거였다.

베넬이 루시엘을 순순히 단테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다면, 루시엘에게 육체관계를 강요하지 않았을 테다. 단테를 만난 루시엘이, 베넬이 제게 한 짓을 일러바친다면, 그는 분명 큰 벌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베넬은 애당초 폐제를 황제에게 데려다줄 생각이 없었다.

아마 베넬은 루시엘과 단테 양쪽에게 전부 거짓말을 했을 거다.

루시엘에게는 ‘내가 널 구해줄 테니, 이 은혜는 몸으로 갚아라’ 따위의 소리를 지껄였을 터고, 단테한테는 ‘루시엘을 지하실에서 꺼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루시엘이 사람들 틈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놓쳐버렸습니다’ 라고 보고했을 테다.

그럼 루시엘은, 탈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베넬에게 몸을 내준다. 그럼 단테는, 계획의 절반이라도 성공한 게 어디냐며 외려 베넬을 북돋아 준다. 두 사람 다 베넬을 신뢰하고 있으니, 베넬이 거짓을 고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베넬은, 루시엘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할까?

시종들은 황실에서 마련해준 공용 숙소를 쓴다. 숙소에 루시엘을 숨겼다가는, 다른 이들에게 금방 들킬 게 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불법적인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다. 호리호리한 미인은 성별을 막론하고 수요가 있을 테지. ‘전 황제를 꼭 빼닮은 노예’라는 식으로 홍보하면, 상품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추적의 방향은 정해졌다. 카인은 노예시장, 그것도 성적인 용도의 노예를 주로 취급하는 불법 경매장에 가야 했다. 물론 그전에 베넬을 잡아다 족친다면 더 명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각난 먹구름 사이로는 햇빛 한 줌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정오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루시엘은 차라리 이런 날씨가 더 낫다고 여겼다.

오늘 같은 날이라면,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비인지 눈물인지 판단할 수 없을 테지. 더운 살내음도 비릿한 정액 냄새도, 빗줄기에 씻겨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지.

루시엘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베넬이 그린 약도였다. 삐뚤빼뚤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텔레포트 기기를 이용해 황실 밖을 나온 후, 베넬은 지도가 그려진 쪽지를 건네주었다. 지도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가면, 조력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조력자가 루시엘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줄 거라고. 텔레포트 기기로는 이동 가능한 거리에 한계가 있기에, 이 뒤로는 직접 길을 찾아 걸어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루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고인 빗물에 제 얼굴이 비쳤다. 발그스름한 뺨, 불긋하게 달아오른 눈가, 침에 불어 붉게 달아오른 입술. 희고 발간 것들로만 빚어진 낯은, 왠지 모르게 야살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베넬의 말마따나, 황제가 아닌 창부 같았다.

찰박. 물웅덩이를 밟자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흙이 종아리까지 내려온 코트 밑단에 달라붙었다. 희었던 코트가 이제는 탁한 물로 엉망이었다. 본디 새하얀 것은 빨리 더러워지는 법이었다.

정액을 너무 많이 받아 마신 탓인가, 뱃속이 더부룩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일순 구역질이 올라왔다. 루시엘은 양손으로 담벼락을 짚었다. 허리를 수그리고서 입을 벌렸다.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희고 시큼한 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액 말고 기억까지 함께 게워낼 수는 없는 걸까. 베넬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고막을 거칠게 후벼 파고 머릿속을 들쑤셨다.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창부들의 왕이라고 불러야 하겠네요.

허리 좀 제대로 움직여 봐요. 닳고 닳은 주제에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아아, 그래. 나 같은 인간보다는 늑대 자지가 더 좋으시겠죠. 개랑 접붙여드리는 게 더 나았으려나?

베넬은 루시엘을 돈을 주고 몸을 파는 남창처럼 취급했다. 정액을 꿀꺽꿀꺽 받아 마시라고 강요하고, 제 입술을 툭툭 두드리며 먼저 입을 맞춰 보라고도 했다.

루시엘은 그 요구들을 모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하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베넬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했다. 자존심은 속옷과 함께 벗겨져, 저 바닥을 나뒹군 지 오래였다.

서투르게 허리를 돌리면, 요분질도 못하냐면서 엉덩이를 맞았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허리를 흔들면, 굴러먹은 티 내지 말라며 젖꼭지를 꼬집혔다. 구음을 하다가 실수로 살기둥을 긁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험악한 손찌검이 떨어졌다.

베넬은 제멋대로 폐제를 유린했다. 체벌하듯 끈질긴 추삽질을 반복했다. 마찰음이 살갗에 입김처럼 달라붙었다. 체액으로 범벅이 된 살결이 맞붙고 비벼졌다. 루시엘을 원치 않는 오르가슴으로 이끌었다.

다섯 번 정도 절정을 맞았을 즈음, 베넬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쾌감에 취해 바르작거리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카인이 눈치챘다는 문장만큼은 확연히 귀에 박혔다. 그제야 베넬은 루시엘을 놓아주었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코트 밑자락이 흔들리며 맨다리가 언뜻 드러났다. 종아리의 가늘고 고운 선을 따라서, 정액 한 방울이 느리게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코트 하나만 겨우 걸치고 있었다. 속옷도 입지 않은 둔부 사이로, 정액이 울컥 흘러넘쳤다.

“…빌어먹을.”

압축된 욕설에 기력이라고는 없었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허리와 골반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루시엘은 담벼락에 몸을 기대며, 필사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옅게 울렸다. 그는 후드를 더 꾹 눌러썼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삼 층짜리 주택. 검은 지붕에는 이끼가 흐릿하게 끼어 있었다. 베넬이 알려준 장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노크를 한 후, 누가 보냈냐고 물으면 베넬의 이름을 대라고 했었지.’

루시엘은 착실하게 베넬의 말을 따랐다. 똑, 똑, 똑,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곧 덩치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른 눈의 안대와 뺨을 가로지르는 큰 상처. 옷소매 아래로 슬쩍 보이는 문신까지.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일이지?”

사내가 불통하게 물었다. 안 좋은 약이라도 하는 걸까, 목소리가 깔깔하게 갈라져 있었다.

“베, 베넬이 보내서 왔… 다만.”

루시엘은 쭈뼛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문장을 끝마쳤다.

“아아, 베넬이 보냈다고? 네가 베넬이 말했던 걔로구나? 좋지. 어서 안으로 들어오렴.”

무뚝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르르 풀렸다. 그는 루시엘의 손목을 잡아당겨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찌나 억세게 잡았던지, 손가락의 모양대로 얕은 피멍이 들 정도였다. 쾅!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때의 루시엘은 미처 알지 못했다. 생명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 실은 교수대의 밧줄과 진배없는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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