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혼여행은 호수로
“또 만나네, 형씨.”
“너는….”
담벼락 위에 걸터앉은 흑마법사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검은 로브와 흰 가면. 본연의 체향을 숨기는 독한 향수. 몇 달 전 카인에게 최면 추를 판매했던 그 흑마법사였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분명 기분 나쁠 정도로 생글생글 웃고 있을 터였다.
“신혼여행을 가는데, 신부가 도망갈까 봐 걱정이라는 거지?”
그가 담벼락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발목을 장식한 해골 발찌가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원하는 것을 알아내다니. 또 카인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에게 새까만 욕망이 선연히 까발려지는 기분은, 솔직히 달갑지는 않았다. 이래서 흑마법이 배척당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남의 마음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이를 그 누가 반기겠는가.
카인은 눈앞의 흑마법사에게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대신, 그냥 생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 배우자는 남자다. 신부라는 표현은 옳지 않지.”
“하아, 이런 데에서는 의외로 상식적이네. 타인이 네 배우자를 신부라고 칭하는 게 싫은 건 아니고?”
“…….”
“대답이 없네. 뭐, 네가 싫다면야 배우자라고 할게.”
흑마법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하고, 물건이나 보여줘라.”
“네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흑마법사는 들고 있던 자루에서 적색 초커를 꺼냈다. 투박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인간이 쓰는 초커보다는 짐승의 목줄에 가까워 보였다. 별다른 장식이 없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초커야.”
“의외로 평범하군.”
카인은 초커를 받아 꼼꼼히 살폈다. 특이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물론 추적 기능만 있는 건 아니야. 이 초커를 찬 사람이, 초커를 채운 사람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또 다른 기능이 발동하거든.”
“그게 뭐지?”
“보이지 않는 이물질이 안쪽을 쿵쿵 쑤시게 돼.”
“……?”
민망한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또한 흑마법사들의 특징인 걸까. 카인은 누가 들었을세라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시끌벅적한 암시장 속, 두 사람을 주시하는 이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잘 걷지도 못하겠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박히는 느낌이 더 심하게 들 테니까.”
“좀 더 평범한 물건은 없나?”
흑마법사는 카인에게 그 외에도 이런저런 물건들을 보여줬지만, 아까의 초커만큼 효과적인 물품은 없었다. 카인은 결국 그 초커를 구매하기로 했다.
“탁월한 선택이야! 그리고 이건 덤.”
흑마법사는 초커와 함께 선분홍색 부적을 얹어주었다. 부적에는 하트 형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이 부적을 신부… 아니, 배우자의 아랫배에 대고 문지르면, 분명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
카인은 그 부적도 건네받았다. 초커와 부적을 가방에 막 집어넣으려는 그때,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날카로운 고함이 공기를 갈랐다.
“큰일이다! 단속 떴어, 다들 도망쳐!”
“단속이라고?”
암시장이 결국 꼬리를 밟힌 모양이었다. 카인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흑마법사가 카인의 옆으로 찰싹 붙었다. 그는 자루에서 큼지막한 망토를 꺼내었다. 망토가 두 사람을 완벽하게 덮었다.
“이건…?”
“투명 망토야. 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소리도 안 들려. 심지어는 형체도 만져지지 않지. 소란이 끝날 때까지만 같이 쓰고 있자.”
“…알았다.”
카인은 슬쩍 몸을 틀어, 저에게 달라붙어 있는 흑마법사를 떼어내었다. 망토 속은 좁았지만, 그래도 몸을 맞대는 건 싫었다. 루시엘이 아닌 다른 이와의 신체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하, 지금 유부남이라고 티 내는 거야?”
흑마법사가 키득거렸다. 카인은 대답하는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나를 도왔지?”
“응?”
“왜 나한테까지 망토를 씌워준 건지 궁금하군. 내 마음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카인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입술 틈새로 희미한 잔설이 새어 나왔다. 밤공기 속에서 흐릿하게 헝클어지는 그 하얀 입김을, 흑마법사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도 내 자신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고 있다. 기사 서약을 깨고,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 주군을 배신했다.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지.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도운 이유가 뭐지?”
여느 때처럼 덤덤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무감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하얀 가면이 카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떤 구조인지 눈구멍조차 뚫리지 않은 가면이었지만, 카인은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거든. 지금도 하고 있고.”
흑마법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독한 향수가 망토 안을 맴돌았다. 인공적인 향기가 사정없이 코를 찔렀다. 정신이 이토록 아득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저 향기 때문일 터다. 흑마법사가 속삭인 말 때문은 아닐 테다.
시끄럽던 바깥소리들이 점점 잦아들었다. 마지막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흑마법사는 망토를 걷어 젖혔다.
그때였다. 세찬 겨울바람이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었다.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였다. 카인의 후드는 속절없이 벗겨졌지만, 흑마법사의 로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옷에다가 미리 마법진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가면에, 벗겨지지 않는 로브라. 준비성이 철저하군.”
“흑마법사라는 게 들키면 당장 사형인데. 이 정도 대비는 해놔야지.”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만만한 말투였지만 재수 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럼 행복한 신혼 되기를.”
흑마법사가 카인 쪽으로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손을 휘적거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검은 붕대로 감싸인 손과 손목이, 공중에서 유쾌하게 팔락거렸다.
바람이 불었다. 눈동자를 할퀴어오는 찬바람에, 카인은 굳게 눈꺼풀을 닫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 흑마법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신혼여행은 수도에서 마차로 대여섯 시간 걸리는 휴양지로 가기로 했다. 공기 좋기로 유명한 산골이었다. 산 밑에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호수 요정들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고도 했다.
카인과 루시엘은 호수 근처의 숙소에서 2박 3일간 묵을 계획이었다. 비수기라 숙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황실에다가는 요양차 휴가를 간다고 말해두었다. 그 휴가에 루시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황실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디 보자. 이것도 챙기고, 갈아입을 옷도 여러 벌 챙기고….”
루시엘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짐을 쌌다. 신혼여행 자체가 좋은 건 물론 아니었다.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것뿐이었다.
“신혼여행이 그렇게 기대돼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물어보았다. 사이좋은 부부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어서. 예상했던 대로 응, 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카인은 이제 그 진심 없는 긍정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다.
가방은 옷과 신발로 그득그득 찼다. 카인한테 빌린 비상금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루시엘은 구두끈을 꽉 매고, 흰색 털이 달린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었다. 신나게 걸음을 옮기려는 루시엘을, 카인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루시엘.”
“응?”
새빨간 초커가 그의 목에 단단히 채워졌다. 루시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초커를 매만졌다. 단단한 가죽을 손톱으로 긁었다.
“이게 뭐야?”
“선물이에요.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붉은색이 잘 어울리네요.”
사람 말고 동물한테 채워야 할 것 같은데, 라는 문장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루시엘은 고맙다고 말하며, 영혼 없이 미소 지었다.
◊
마차까지 가는 내내, 카인과 루시엘은 단 한 명의 시종도 마주하지 않았다. 새벽 일찍 나간 보람이 있었다.
허나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 근처에서, 단테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단테라니. 최악의 우연이었다.
“이 이른 새벽에 어인 일이십니까, 폐하?”
카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복잡한 마음을 달랠 겸 산책을 하고 있었네. 그런데 자네는 대체 뭐 하는 건가?”
단테는 카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루시엘에게 붙박여 있었다. 어렴풋한 새벽빛 속에서도, 새빨간 목줄은 선명하게 보였다. 머리색도 살갗도 입고 있는 옷도 흰데, 목줄만은 지나칠 정도로 붉었다. 눈밭을 적시는 어린 짐승의 핏자국처럼.
일순 어지럼증이 일었다. 단테는 출렁이는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느리게 심호흡을 내뱉은 후, 카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휴가를 가는 길입니다.”
“그건 나도 알겠는데, 대체 왜 형님… 아니, 저 자가 자네랑 같이 가냔 말일세.”
단테의 지적은 타당했다. 자신을 배신한 기사와 함께 휴가를 떠나는 황제라니.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본디 휴가는 절친한 친구나, 사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떠나는 것이 아니었던가. 강제로 끌려가는 건가 싶어 루시엘의 안색을 살폈지만, 루시엘은 묘하게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루시엘은 제 소유입니다. 문제 될 건 없겠지요.”
무감한 낯빛으로 꺼내는 비틀린 문장. 카인의 어조는 평온하기 그지없어서, 단테는 어쩌면 비정상은 나였나, 하는 생각마저 했다. ‘소유’라는 단어의 울림은 이상했다. 적어도 호위 기사가 폐제에게 붙일 만한 표현은 아니었다.
단테는 소리 없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부디 강녕하시길.”
카인은 말문이 막힌 단테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루시엘을 먼저 마차에 태우고, 그 후 자신도 루시엘 옆에 앉았다. 루시엘은 목줄이 갑갑해서 힘들다고 칭얼대었고, 카인은 목줄을 조금 더 헐겁게 풀어주었다.
마차 문이 닫히기 전, 단테는 분명히 본 것 같았다. 목줄로 단단하게 감싸인 희고 가는 목에, 발간 순흔들이 난잡하게 찍혀 있었다. 노예 계약서에 찍는 붉은 인장 같았다. 그 붉은 상이 단테의 눈동자에 악몽처럼 맺혔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지워지지 않았다.
◊
루시엘은 마차에 달린 창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지나갔다. 공간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함께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았다.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갈수록 낮아지더니, 좁은 도로 양옆에 낮고 낡은 지붕들이 즐비했다. 세월에 바랬는지, 원래 그 색이었는지 모를 회색 외벽이 흐릿했다.
방 안에 가만히 갇혀 있는 대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앉아있게 될 줄이야. 조금의 기대감과 그림자처럼 짙게 깔린 불안감이 빈속을 울렁이게 했다.
칼바람이 그의 볼을 세차게 할퀴었다. 볼은 물론이고 코끝과 귀까지도 온통 불그스레 물들었다. 여기서 더 바람을 쐬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루시엘은 코를 훌쩍이며 마지못해 창문을 닫았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어?”
코트 앞섬을 굳게 여미며. 루시엘이 물었다.
“이제 절반쯤 왔어요. 힘들면 조금 쉬었다 갈래요?”
“아냐. 쉴 필요는 없어.”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카인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골랐다. 점심은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볼까. 호수 말고도 또 보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여는 게, 오늘따라 어렵게만 느껴졌다. 추워 보이는데 목도리를 하겠냐고 물어보자. 마침내 적당한 질문을 찾아낸 그가, 루시엘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엘.”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인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어, 제 옆의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벌써 곤한지,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상반신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루시엘이 제 허벅지를 베고 편히 잘 수 있게 만들었다.
추운지 루시엘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카인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루시엘을 덮어주었다. 짐 가방에서 루시엘의 옷을 꺼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역시 체온이 스며든 코트가 훨씬 따뜻할 것이었다.
마차가 숙소 바로 앞에서 멈췄다. 루시엘은 도통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카인은 비척거리는 루시엘을 등에 업었다. 루시엘은 비몽사몽간에 카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은 따스했다.
카인은 한 손으로는 루시엘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짐을 들었다.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예약된 방으로 향했다. 방은 3층 복도 맨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방은 연식이 느껴졌으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낡은 선홍색 리시안셔스 꽃무늬 벽지. 녹색으로 색칠된 창틀. 더블 침대 위에는 베개 두 개와 이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희고 깨끗한 이불보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다.
귀족 나리들이 머물만한 화려한 호텔보다는, 적당히 허름한 숙소가 나았다. 평민들은 폐제의 얼굴을 모른다. 게다가 겨울이라서 여행객도 적다. 이곳에서라면 굳이 로브를 눌러쓰지 않아도 되었다.
“으응… 도착했어?”
루시엘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카인은 루시엘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눈두덩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은빛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루시엘은 몇 번 멍하게 눈을 끔벅였다.
“잠은 다 깼어요?”
카인이 루시엘의 볼을 쿡쿡 건드렸다.
“응. 대충은….”
평소라면 카인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겠지만, 루시엘은 의외로 고분고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짐 풀기 전에 점심부터 먹는 게 좋겠어요. 이 숙소, 식당도 같이 겸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루시엘도 배고프죠?”
“좋아.”
루시엘은 온순하게 답하며, 카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은 제일 구석진 곳의 각진 나무 탁자에 앉았다. 식당의 메뉴는 끼니마다 달라졌는데, 오늘의 요리는 생선구이와 통밀빵, 토마토 수프였다.
음식은 곧 나왔다. 카인은 나이프와 포크로 익숙하게 생선 살을 발라내었다. 긴 가시를 한쪽으로 치우고, 잘 발라진 흰 살을 루시엘 쪽으로 밀어주었다. 소금이 잔뜩 뿌려진 농어구이는 약간 짰지만, 토마토 수프가 삼삼한 편이라서 간이 맞았다.
투박한 통밀빵을 집어 들어 나이프로 먹기 좋게 잘랐다. 수프에 빵을 찍어 루시엘에게 건네자, 루시엘은 조금 망설이더니 곧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여보.”
“어?”
어리벙벙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묽은 수프가 주르륵 흘렀다.
◊
“여보.”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여’자로 시작해서 ‘보’자로 끝나는, 굉장히 말랑말랑하고 간질거리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았는데. 아니, ‘같았다’가 아니고 그런 단어를 확실히 들었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정지했다. 수프가 턱을 타고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못 했다.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결혼을 했으니까 여보가 맞기는 한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건 반칙이지!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탁상을 엎고, 카인을 꼭 껴안고서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너, 너어… 누가 그렇게 예쁜 말만 배워 오랬어! 신혼여행 서비스 장난 아니네. 쿵,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수프를 코로 넣어야 할지, 입으로 넣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표정이 사르르 풀릴 수는 없었다. 내가 연기를 처음 배운 게 여섯 번째 생이었고, 지금은 무려 열세 번째 생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연기를 갈고 닦았던가. 표정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냅킨으로 턱 밑을 닦았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연기하는 사람’을 연기하며 허겁지겁 수프를 떠먹었다.
식기와 스푼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적막한 식당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카인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또 싱긋 웃었다. 순전한 기쁨으로만 이루어진 미소였다.
그러나 이 행복은 위태롭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흔들다리 같은 것이다. ‘루시엘’은 카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카인은 ‘루시엘’이 도망을 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루시엘이 도망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찰나, 다리는 완전히 허물어지게 될 터였다.
그래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깨지는 게 예정되어 있는 행복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온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나는 수프를 싹싹 비웠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까지 남기지 않고 먹었다.
“잘했어요.”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카인의 손길을 더 오래 느끼고 싶어서였지만, 카인은 내 의도를 전혀 다르게 해석할 터였다. 카인을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순종적인 척한다고 추측하겠지. 카인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야 편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는 호수를 구경하러 갔다. 호수는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고운 물결이나 반짝이는 윤슬은 없었지만, 얼어붙은 호수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겉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워서 카인의 얼굴이 잘 비쳤다. 나는 호수를 보는 척하면서, 표면에 반사된 카인의 모습을 실컷 감상했다. 잘생겼다, 내 남편.
그때였다. 쩌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수 가장자리의 얼음이 갈라지더니, 녹색의 물컹한 무엇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발바닥만 한 크기에 여러 개의 촉수 가닥을 가지고 있었다.
“끼에엑! 끼엑!”
정체 모를 ‘무언가’가 해괴망측하게 울었다. 토토와 똑같은 색깔에 같은 크기. 심지어는 목소리도 비슷했다.
음. 하지만 저건 절대 토토가 아닐 거다. 얼음 위를 달려 맹렬한 속도로 내게 다가오는 저 마물이, 토토일 리가 없다.
나는 분명 토토에게, 부르기 전까지 얌전히 숨어 있으라고 부탁했다고. 마물이 계약자의 말을 무시한다니, 말도 안 되잖아. 나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했고…
“끼엑! 껙! 께에엑!”
…토토가 분명한 그것은, 말릴 틈도 없이 내 발목에 달라붙었다. 흑마법의 힘을 빌려 마물의 언어를 해석해보자면, 대충 ‘이 결혼 반댈세!’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얘는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전남친에서 시어머니로 역할을 바꾸기라도 한 건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토토는 내 바지 소매 안으로 쏙 들어갔다. 꾸물거리며 다리를 타고 올라가, 속옷 안으로 꿈틀꿈틀 기어들어 갔다. 촉수 다발이 능숙하게 구멍을 더듬었다.
신혼여행인데 대낮부터 섹스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까지는 평범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고 했었다. 예쁜 경치를 구경하고, 상점에서 커플 아이템도 사고, 레스토랑에서 낭만적인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보통의 신혼부부가 그렇듯 말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어쩔 수 없다. 사실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카인의 옷소매를 양손으로 그러잡았다. 눈동자를 글썽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인, 도와줘. 촉수가 옷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
“도와줘… 흐읏, 촉수… 가, 옷 속으로, 하으… 들어가 버렸… 흐익!”
루시엘은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추위로 발그스름해졌던 얼굴이 한층 더 붉은 빛을 띠었다. 두꺼운 코트를 걸쳤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도드라진 중심부가 들켜버렸을 테였다.
카인은 일단 주변부터 살폈다. 겨울의 호수는 여름에 비해 인기척이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호숫가를 산책하는 이들이 두 명, 얼음을 깨고 그 사이로 낚싯줄을 늘어뜨리고 있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이런 야외에서 촉수를 빼어내는 것은 무리다. 더군다나 지금은 한겨울이다. 섣불리 옷을 벗겼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루시엘.”
카인은 루시엘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남들이 루시엘의 느끼는 표정을 함부로 보지 못하도록, 코트를 벗어 루시엘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바늘 같은 추위가 전신을 찔러댔지만 견딜 만했다.
숙소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루시엘은 카인의 품 안에서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히읏, 아, 아앗… 열기 어린 신음이 천 밑으로 새어 나왔다. 소리를 참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카인의 손이 코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루시엘의 얼굴을 더듬더니, 그의 입가에 제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차갑고 탄탄한 손이 입술을 문질렀다.
“소리 참기 힘들면, 깨물어도 괜찮아요.”
루시엘은 크게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고른 치아가 얇은 살갗을 파고들었다. 깨물린 자리에 피가 고였지만,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달려서 십여 분은 걸렸을 거리를, 카인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 시간에 완주했다. 그는 루시엘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두툼한 털코트와 칭칭 감긴 목도리, 안에 받쳐 입은 이너까지 모조리 벗겼다.
애액인지 점액인지 모를 것으로 흥건히 젖은 다리 사이에, 촉수가 고집스럽게 달라붙어 있었다. 발갛게 부은 바닥으로 기어들어, 꿈질거리며 안쪽을 희롱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카인은 황급히 루시엘의 다리를 열고서 안쪽에 손가락을 넣었다. 아악! 루시엘이 날선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꽉 조였다. 내벽 안에서 꿀렁이는 괴생명체가 손끝에 닿았다. 검지와 엄지로 그것을 집어서 끌어내듯 당겼다.
“흐읏, 아, 아윽…!”
루시엘은 숨을 드세게 들이켰다. 벌어진 구멍 가장자리가 괴롭게 경련했다. 안쪽에서, 촉수가 빠져나가지 않으려고 저항하고 있었다.
가는 촉수 다발이 내벽 주름에 달라붙었다. 물컹한 촉수가 멋대로 형상을 바꾸었다. 안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모양새가, 노팅하는 짐승의 성기를 닮아 있었다.
“안 되겠어요. 루시엘, 배에 힘을 줘봐요.”
“뭐, 뭐라고…?”
루시엘이 어물거렸다. 과도한 쾌감과 통증으로 뒤엉킨 머리는, 카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빨리, 배에 힘을…!”
“읏, 윽…”
루시엘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힘이 실린 마른 복부가 잘게 떨렸다. 발갛게 물든 눈가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내벽이 요동치며 촉수를 밀어내었다. 느리게 앞으로 밀려오는 촉수를, 카인은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루시엘이 다치지 않을 만큼, 적당한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조금씩, 조금씩, 촉수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민감한 속살까지 같이 딸려 나오는 듯한 감각에, 루시엘은 허리를 젖히며 자지러졌다. 촉수가 뱃속에서 묵직하게 출렁였다. 분탕질을 치며 속을 괴롭혔다.
“거의 다 나왔어요. 조금만 더….”
“나, 나 너무 힘들… 하응! 윽!”
뿁, 기묘한 소리를 내며 촉수가 완전히 뽑혔다. 움켜 물고 있던 것을 놓친 구멍이 숨구멍처럼 벌렁거렸다. 촉수가 남기고 간 점액질이 골을 따라 주르륵 흘렀다.
카인은 창문을 열고는, 주저 없이 촉수를 창밖으로 던졌다. 아련한 포물선을 그리며 저 하늘 높이 날아간 촉수는, 얼음 호수 위로 퍽, 하고 떨어졌다. 얼음이 깨지며, 시린 물살이 촉수를 집어삼켰다. 쾅, 소리를 내며 창문이 닫혔다. 그 일련의 과정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루시엘, 몸은 좀 괜찮아요?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호수 보러 갈래요?”
카인이 부드럽게 물었다. 루시엘은 대답 대신 멍하게 카인을 바라보다가, 카인의 손을 끌어 제 구멍에 가져다 대었다. 점액으로 녹진해진 안쪽은, 손쉽게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나, 촉수 때문에 여기가 너무 뜨거워서…”
루시엘이 울먹였다. 그는 다리를 넓게 잡아 벌리고서, 제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그러니까… 마저 도와줄 수 있을까?”
신혼여행 계획을 구상하면서, 카인은 이렇게 다짐했다. 절대로 대낮부터 섹스를 하지는 않겠다고. 섹스는 루시엘을 감금해놓은 지하실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뿐인 특별한 여행인 만큼, 해가 떠 있을 때는 관광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었다. 대부분의 신혼여행이 그렇듯 말이다.
그렇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되려 더 좋았다.
“그래요. 루시엘. 도와줄게요. 마침 루시엘이 좋아할 만한 것도 가져왔어요.”
“내가 좋아할 만한, 거…?”
카인은 가방에서 선홍색 부적을 꺼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종이 위에는, 하트 모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카인은 그 부적을 루시엘의 배 위에 올려놓고서, 손바닥으로 하복부를 뭉근히 문질렀다.
“뭐, 뭐야, 이건 또… 흐윽?”
루시엘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허덕거렸다. 부적이 기묘한 빛을 발하더니, 부적의 마법진이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부적을 떼어내자, 하트를 닮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드러났다. 형광색 문양이 흰 피부 위에서 음탕하게 빛났다. 경매장의 노예한테나 새길 법한 문신이, 그의 배꼽 아래를 장식하고 있었다. 현실성 없는 현실이었다.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루시엘이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그간 카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요. 루시엘이 좋아할 만한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카인은 루시엘의 복부를 꾹꾹 짓눌렀다. 순간 아랫배에 확 열기가 몰렸다. 뱃가죽 아래의 장기들이 멋대로 웅웅 울리며 쾌감을 증폭시켰다. 복부에 새로운 성감대가 생긴 것 같았다. 분노로 활활 타던 핏빛 눈동자가, 금세 열감으로 흐릿해졌다.
“이, 이건 무슨… 하으, 응! 윽!”
루시엘이 움칠움칠 몸을 떨었다. 온 혈관이 부글부글 끓었다. 배 위를 눌렀을 뿐인데, 내벽이 쑤셔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개발된 몸이어도 그렇지, 배를 문질러주는 것만으로도 흥분하다니. 기괴한 일이었다. 저 부적이 뭔가 이상한 작용을 한 게 틀림없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몸을 돌려, 가슴과 배가 침대에 닿게 만들었다. 서늘한 시트가 화끈거리는 복부를 쓸었다. 문신이 생겨난 부위가 자극을 받을 때마다, 루시엘은 마른 목으로 컥컥거렸다.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네요. 기뻐요.”
카인은 침대 시트와 루시엘의 배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새하얀 살결을 쓸어내리자, 그의 몸뚱이가 퍼뜩 튀었다. 발기한 성기에서 쿠퍼액이 줄줄 흘렀다.
카인이 루시엘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를 가볍게 끌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잡아 넓게 벌리게 했다. 분홍색 애널 틈새로 불그스레한 속살이 보였다. 키스를 요구하는 둥근 입술처럼, 빠끔거리며 자지를 넣어 달라 성화였다.
하지만 카인은 구멍에는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다. 그는 오직 문신이 새겨진 아랫배만을 쓰다듬었다. 팽팽하게 발기한 연분홍빛 성기가 꺼덕거리고, 젖꼭지가 만지기 좋게 빳빳이 서 있었지만, 그의 손은 문신 주변만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제, 제발 그만해, 그렇게 계속, 만지며언… 아앙, 흑! 흐앙!”
활짝 열어진 무릎이 파드득 경련했다. 아래에 열기가 몰리다 못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절정으로 치닫는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상반신이 밑으로 허물어지려고 했다.
카인은 한쪽 팔로는 루시엘의 몸을 잡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계속해서 그의 아랫배를 지분거렸다. 손으로 내벽을 후벼 파듯, 세 손가락을 모아 배꼽 아래를 짓눌렀다.
“아, 안 돼…! 가버렷… 하읏. 응-!”
루시엘은 너무나도 쉽게 절정을 맞았다. 정액이 복부에 길게 튀었다. 아래로 흘러 배꼽 주위에 고였다.
“배, 배 싫어, 나 이러다가 죽, 흐잇, 헤엑, 큽…!”
“배 말고 다른 데도 만져줄게요.”
“그런 뜻이 아니잖… 아, 아윽!”
왼손은 여전히 루시엘의 배 위에 두고서, 오른손으로 애널을 만지작거렸다. 촉수 때문에, 구멍은 이미 흐물흐물 풀려있었다. 바로 성기를 삽입한다면, 조금 빠듯하기는 해도 어쨌든 살기둥을 잡아 물 것이었다. 그리고 카인도 이제 한계였다. 바지 안이 비좁게 느껴진 지는 오래였다.
카인은 다급히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바지와 드로즈를 완전히 벗는 대신, 절반만 내리고서 성기를 꺼내었다.
엉덩이골 사이로 문질러진 귀두는, 곧 익숙하게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직통으로 길을 뚫고서 뿌리째 꾸역꾸역 욱여넣어졌다. 단번에 삽입했다가 부러 느릿하게 빼내자, 애액으로 젖은 속살이 울며불며 살기둥에 매달려왔다.
“무, 무서워, 이런 건… 히윽, 흑…”
감당하기 힘든 쾌락에, 루시엘은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붉게 상기된 뺨 위로, 둥근 물방울이 맺혔다. 탐스러운 과실을 닮은 눈물이었다.
“흐악, 아, 아악, 힉! 흐앙!”
눌리는 것은 아랫배인데, 왜 쾌락이 뇌를 곧바로 찌르는 것 같을까. 눈꺼풀 뒤로 반쯤 넘어간 눈동자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전립선이 뭉그러질 만큼 거칠게 성기를 꽂아 넣을 때면, 루시엘은 신음도 제대로 토하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극점이 아닌 다른 곳을 찔러도, 그는 발끝을 둥글게 말며 교성을 내질렀다. 타액으로 입술이 젖어들었다. 젖은 입술이 배에 새겨진 문신만큼 붉었다.
카인은 손끝으로 문신을 덧그렸다. 발광하는 선을 섬세하게 훑자, 루시엘은 겨우 그것만으로 몸을 떨었다. 하반신이 아릿했고, 뱃가죽 아래가 따갑게 쑤셔왔고, 안쪽의 장기들이 웅웅 경련하는 듯했다. 온몸의 신경들이 모조리 중심부에만 쏠린다면 이런 느낌이 들려나, 싶었다.
문신을 조심스레 더듬다가, 이번에는 손바닥에 힘을 주어 배를 눌렀다. 복부를 가르고, 드러난 안쪽에 원액 그대로의 미약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안에 삽입된 성기가 같이 눌리는 바람에, 쾌감이 배로 증폭되었다.
“시, 시러, 나, 또, 또 가앗… 하으응-!”
강렬한 오르가슴이 다시금 루시엘을 덮쳤다. 열락으로 들뜬 뺨의 홍조 같기도,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같기도 한 문신. 새빨간 문신 위로 허여멀건 정액이 튀었다.
그때였다. 배를 만지던 손이 방향을 바꿔 이제는 방광을 꾹 자극했다. 루시엘은 붉은 눈을 부릅떴다. 쾌감과는 또 다른 자극이 하복부를 맴돌았다. 기묘한 압박감이 아랫배를 시시각각 조였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몸은 이렇게 뜨거운데, 어째서 땀은 이토록 싸늘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자, 잠깐만, 안 돼, 카인, 진짜 안 돼! 흐응, 읏, 여기서, 더 누르면…”
루시엘은 발작적으로 사지를 버둥거렸다.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배를 자극하는 손길이 더 강해졌다.
카인은 루시엘의 골반을 꽉 잡아 쥐었다. 성기가 여린 점막을 치고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손바닥이 배를 느리게 눌렀다. 문신과 함께 방광이 짓눌렸다.
“싸, 쌀 것 같아… 진짜 쌀 것 같다고!”
“괜찮아요. 방금 전에도 정액을…”
“정액 말고, 다른 거, 다른 게 마렵단 말이야…”
카인은 루시엘의 애원을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춥다고 말하면 자기가 입던 옷까지 벗어 걸쳐주고, 안에 들어간 촉수도 당장에 빼내 주면서, 왜 이런 부탁만 들어주지 않는 걸까. 밀려든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눈꼬리에 한가득 고였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화장실, 에, 가고 싶…”
루시엘이 애처롭게 울먹거렸다. 가느다란 몸이 카인의 무릎 위에서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복강이 움츠러든다. 요도의 말단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더운 살갗에 초조한 땀이 배어 나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한계는 빠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아아, 악-!”
루시엘은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외마디 탄성을 토해내었다. 뱃속에 쥐가 난 것 같았다. 짓눌린 장기에서 액체가 흘러 내려와, 활짝 열린 요도구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졸졸,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흐윽, 아, 아아…”
루시엘은 입을 헤 벌리고서 가느다랗게 헐떡였다. 아직도 손바닥으로 짓뭉개지고 있는 아랫배, 선명하게 빛나는 하복부의 하트 모양 문신, 마지막으로 하반신을 빠르게 적셔가는 치욕적인 액체까지. 수치스러운 일투성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기분 좋아요?”
“흐읏, 아, 아냐, 흐에, 엣…”
“거짓말. 이렇게 느끼면서. 조금만 더 솔직해져 봐요.”
“으응, 사, 사실 좋, 아아… 기분이, 너무 좋아서, 힉!”
자신이 배뇨를 하면서, 명백한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끄러움과 만족감. 두 가지 전혀 상반된 감정이 머릿속에서 마구 널을 뛰었다.
“사랑해요. 말로는 차마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당신을 아껴요.”
그 와중에 카인은 또 사랑 고백을 했다. 아무 때나 느끼는 자신의 몸도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제 모든 행동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카인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아아, 빨리 도망가야지.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가물거리던 시야가 끝내 완전히 어두워졌다. 감긴 눈두덩 위로, 언제나처럼 달달한 입맞춤이 쏟아졌다.
◊
실금을 한 게 꽤나 수치스러웠는지, 루시엘은 몇 시간째 카인과 말을 섞지 않고 있었다. 그는 카인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애꿎은 벽만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나름대로의 의사 표현 같긴 한데, 솔직히 무섭지는 않았고 마냥 귀여웠다.
“루시엘, 많이 화났어요? 화 풀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
침묵.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데, 배 안 고파요?”
“…….”
역시 침묵.
“내일은 뭐 하면서 보낼래요? 루시엘이 원하는 거 하면서 놀기로 해요.”
“…진짜?”
그제야 루시엘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카인 쪽으로 휙 몸을 돌리더니,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외쳤다.
“그럼 우리, 시장 가자!”
“시장이요?”
“응.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점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내일 상당히 큰 장터가 열리나 봐. 사람들도 꽤 오고, 볼거리랑 살 거리도 많을 거야.”
황궁과 먼 한적한 시골 마을로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던 루시엘이, 이제는 또 사람으로 와글거리는 시장터에 가고 싶어 한다. 명백한 모순이었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은 금방 나왔다. 루시엘은 감히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북적이는 시장통에서, 넘치는 인파 사이에 섞여서… 저 멀리로 달아나길 꿈꾸는 것이다.
“그래요. 루시엘이 원하는 대로 해요.”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당신은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못해.
“시골 장터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재밌겠네요.”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당신은 내 손 안이다. 어떤 수를 써서든 붙잡고 말 테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카인은 무구한 낯빛으로 웃었다.
◊
장날. 다행히도 날씨는 나쁘지 않았다. 봄의 초입이라도 해도 믿을 만큼 포근했다. 줄줄이 늘어선 천막과 진열대.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고, 길거리 음식을 한 입 크게 베어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들떠있는 공간에서, 루시엘만 혼자 말이 없었다. 그는 장터에 내놓아진 물품들을 구경하는 대신, 복작이는 인파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보폭에 맞춰, 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시큰둥한 태도로 가판대를 지나치던 루시엘이, 누런색 돗자리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예민한 인상의 노인이, 직접 만든 악세사리들을 올려놓고 팔고 있었다.
나무를 조각해 만든 반지, 조약돌을 깎아 만들어낸 목걸이, 유리에 색을 섞어 빚어낸 브로치 등등. 저렴한 가격의 하급품이었지만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꽃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화관이었다. 이 추운 겨울에 꽃이라니.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엘은 허리를 숙여 냉큼 화관을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꽃잎을 쓸어내렸다. 싱그러운 생화와는 아예 다른, 억세고도 인공적인 감촉. 그럼 그렇지. 이 겨울에 진짜 꽃이 있을 리 없었다. 정교하게 만든 조화인 모양이었다.
비록 진짜는 아니었으나, 화관은 충분히 어여뻤다. 흰색, 연노랑과 진노랑, 주황과 다홍빛. 주로 노란 계열의 꽃으로 이루어진 화관은, 루시엘의 은발과 상당히 잘 어울릴 성싶었다.
“한 번 써 봐요, 루시엘. 분명 예쁠 거예요.”
“그럴까?”
루시엘은 화관을 제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카인 쪽으로 사뿐히 몸을 돌렸다.
“어때, 괜찮아?”
루시엘이 멋쩍게 물었다. 찬란한 햇살이 꽃에 감싸인 머리 위로 부서져 내렸다. 빛에 반사된 꽃잎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카인은 그 모습에서 왕관을 연상했고, 황제였던 예전의 루시엘을 떠올렸다. 볕이 강하지도 않은데 눈이 부셨다. 카인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네, 예뻐요. 라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구입할 의향이 있소? 동화 다섯 닢이요.”
노인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카인은 루시엘에게 눈빛으로 물었고, 루시엘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계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카인의 주머니에 동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화 한 닢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노인은 물건은 제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라며 은화를 거절했다. 대부분의 세월을 수공예품을 만드는 데에 투자한 만큼, 공예에 대한 자신만의 철칙이 있는 듯했다. 결국 카인은 은화의 값만큼 다른 물건들을 더 골라야만 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계산을 끝마치고서, 고개를 돌리며 루시엘을 불렀다.
“루시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인은 루시엘이 사라졌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초커까지 사서 채워놓지 않았던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루시엘이 도망갔다는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사건에 대한 스스로의 심정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습기로 녹슨 마음이 덜컹거렸다. 왜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린 걸까. 일어날 거라 짐작한 일이 벌어졌을 뿐인데, 어째서?
카인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짓이겼다. 늑골을 가르고 흉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 카인은 퍼뜩 모든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아, 사실 나는 믿고 싶었던 거구나.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는 그 얘기가 진심이기를,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었던 거구나.
진실일 리 없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루시엘이 나를 진짜로 사랑해주기를, 그리하여 내 사랑이 온전히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원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랑이라니, 루시엘이 나를 사랑한다니. 어째서 그런 허무맹랑한 기적을 꿈꾼 걸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허나 자기 비하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찾아야만 했다. 날개를 꺾었음에도 자꾸 새장을 떠나려고 하는 새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붙잡아야 했다.
그는 화관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런 건 이제 필요 없었다. 어차피 정말로 갖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닐 테다. 카인을 방심시키기 위해 한 행동일 게 뻔했다.
카인은 주저 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웅성거리는 초면의 사람들, 그 사이로 숨어든 제 보석을 찾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
루시엘은 도망가고 있었다. 무엇을 피해 도망치는지는 극명했으나.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풀거리던 목도리가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렸다. 단단히 얽혀 빼내기가 쉽지 않았다. 루시엘은 황급히 목도리를 벗었다. 나뭇가지에 목도리를 남겨두고서 다시금 뛰었다.
그렇게 5분 정도 달렸을까. 슬슬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기 위해 한껏 입을 벌린 그때,
“하응-!”
비음 섞인 신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열기를 머금은 목소리 끝이 흐릿하게 퍼졌다. 루시엘은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랫구멍을 파고들었다. 내벽이 이물질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그것은 손가락 같기도 했고, 예전에 품었던 로터나 바이브 같기도 했다. 루시엘은 눈을 찡그리고서 애써 신음을 참았다. 눈매 밑으로 붉은 열감이 번져나갔다.
루시엘은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원인도 모를 자극에 져서, 탈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간신히 발을 들어 올려 한 걸음 앞의 땅을 밟았다. 루시엘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이물감은 계속해서 그의 아랫배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물감은 진정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손가락 두세 개의 두께만큼 벌어진 구멍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몸서리를 치며 느끼는 안쪽을 매섭게 긁어댔다. 보이지 않은 이물질이 전립선을 후벼 파듯 눌렀다.
“하읏, 윽!”
루시엘의 입가에서 짧게 토막 난 숨이 새었다. 앞섬을 살며시 들어 올릴 만큼 발기한 성기에서, 비릿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속옷이 금세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말도 안 돼, 흐익, 윽! 이건 또, 뭐야…”
시장을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거기에서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루시엘은 비쩍 마른 겨울나무에 몸을 기댔다. 흉곽을 부풀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물질이 나긋하게 점막을 훑었다. 내벽의 주름을 일일이 덧그리다가 전립선을 꾹꾹 눌렀다.
“흐읏, 아, 아악…!”
루시엘은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참으려고 했지만, 잇새로 툭툭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범해지는 일이야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곳은 야외였다. 언제 누가 올지 모르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두려움에 구역질이 났다. 지금 안을 들쑤시고 있는 건 대체 뭐고, 무슨 연유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쾌감으로 둔중해진 머리를 굴려봤자,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루시엘은 나무에서 겨우 등을 떼어내었다. 뒤로 넘어가려는 눈동자를 간신히 앞으로 고정시켰다.
눈길이 닿는 곳에 두 갈래의 길이 보였다. 한쪽은 잘 닦인 도로였고, 다른 한쪽은 좁고 으슥한 골목길이었다. 전자보다 후자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을 게 뻔했다. 그래, 일단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길, 이건 대체… 흐읍…”
겨울인데도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루시엘은 자주 휘청거렸고 여러 번 쓰러졌다. 넘어지는 빈도는 갈수록 잦아지는데, 다시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내벽 가장자리의 어디쯤이 자극당하자, 새된 비명과 함께 무릎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맥없이 바닥을 긁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물이 목구멍 밖으로 울컥 올라왔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서, 흐느끼며 타액을 토해내었다.
“여기서,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
루시엘은 이를 아득 갈았다. 두 발로 갈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이물이 더 안쪽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입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가, 단번에 뿌리 끝까지 파고들었다. 정사 때와는 다르게, 살갗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루시엘은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서, 사람들이 오는지를 확인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코트 단추를 끌렀다. 발갛게 질린 손은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겨우 단추를 다 풀어낸 다음에는, 바지와 속옷을 벗어 내렸다. 행인에게 목격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보다는, 현재의 몸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배는 더 컸다. 공포와 쾌감이 양옆으로 이성을 갉아먹었다.
루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아래로 쏟아진 은발 틈으로, 팔랑이는 속눈썹과 떨리는 입매가 얼핏 비쳤다. 그는 제 아랫도리로 시선을 고정했다. 껄떡이며 실금하듯 정액을 흘리는 물건 아래, 살구색 통통한 회음부 아래에, 벌름거리는 애널이 보였다.
딱히 삽입된 것은 없는데도, 구멍이 제멋대로 벌어져 옴칠대고 있었다. 활짝 열린 구멍 너머로 발간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주름진 내벽이 숨을 쉬듯 꿈질거렸다.
그는 뒷구멍으로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뜨겁게 열이 오른 공기만이 손마디에 달라붙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루시엘은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존재에게 범해지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둔중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두개골이 충격으로 웅웅 울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지? 머리가 움직이며 답을 내놓기도 전에, 이물질이 도톰한 전립선을 쑤시듯이 밀고 들어왔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들이 단번에 침몰했다. 질퍽한 주름들만이 천박하게 뇌에서 교미하는 것 같았다.
“시, 싫어, 하지 마, 제발…!”
싫다고 외쳐봤자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범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항은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물건이 안쪽으로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는 뻐끔거리는 제 뒷구멍을 볼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이물질을 따라, 밖으로 딸려 나오는 선홍빛 점막 역시 볼 수 있었다.
“이, 이상해, 이런 거… 무서워, 무섭단 말야….”
속살이 삽입된 물건의 모양대로 갈라졌다. 투명한 유리 딜도를 삽입 당한 것 같았다. 진득한 점막이 물건의 움직임에 맞춰, 짓눌리고 뭉개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든 변화를, 루시엘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평소라면 불투명한 물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안쪽이, 제 비밀스러운 속을 빠끔히 드러내고 있었다.
전립선이 짓눌렸고 애액이 쏟아졌다. 회음부를 타고 흐른 선액이 미끈한 애액과 뒤섞여, 바닥에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에 박히며 한 번 더 사정했다.
백탁액이 맨 살갗 위로 엉겼다. 파정했으나 뱃속의 열기는 꺼지지 않았다. 안쪽이 쾅, 쾅, 치받혔다. 얌전히 수그러들려던 성기가 또다시 부풀어 올랐다.
“크읏, 으, 으아, 아악! 흡! 하앙!”
골목은 고요했다. 조용하기에 자신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들리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숨소리다. 단 한 명의 심장만이 요란하게 고동치고 있다. 카인과 몸을 섞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카인도 자신과 함께 호흡했는데, 두 사람의 심장이 격하게 맥박쳤는데…. 카인을 피해 떠난 길에서, 루시엘은 카인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 그만… 그만해, 하윽, 응, 이러다가…. 주, 죽어… 흐윽! 정말로 죽… 아흑!”
카인을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몸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기세 좋게 정액을 뿜어내던 샅에서는, 이제 투명한 물만 줄줄 흘렀다. 무색무취의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눈가도 뺨도 온통 발그스름했다. 볼이 홧홧거리다 못해 촛농처럼 녹아버릴 것 같았다. 루시엘은 서늘한 벽에 볼을 비비면서 헐떡였다. 이렇게라도 열기를 식히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친 추삽질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안을 빽빽이 채웠던 물건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한껏 입을 벌려 바닥을 보여주던 구멍도 빠르게 오므라들었다.
드디어 끝, 난 건가… 루시엘은 떨리는 손을 뻗어 바지 윗단을 그러잡았다. 정신을 추스르고 하의를 올려 입으려던 찰나,
“찾았다.”
루시엘밖에 없었던 골목 안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음성이기도 했다.
저항할 틈도 없이, 어깨가 틀어 잡혔다. 싸늘한 시선이 루시엘을 내려다보았다. 핏발 선 눈동자 안에 숨겨진 해쓱한 어둠. 암흑이 이빨을 드러내고서, 삽시간에 폐제를 집어삼켰다.
◊
카인은 두 갈래 길의 초입에서 멈춰 섰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스산한 담벼락의 그늘 아래, 내려앉은 인간의 실루엣이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굴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와 어둠이었지만, 카인은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갖춘 수인이었다. 미간의 일그러지는 선, 열기가 고인 눈가, 호흡을 따라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까지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물건을 조이며, 잘게 경련하는 내벽까지 전부.
“그, 그만… 그만해, 하윽, 응…!”
힘이라고는 실리지 않은 작은 신음이었다. 보통의 청력으로는 듣지 못했을 그 조그마한 소리를, 그의 귀는 놓치지 않고 주워 담았다.
어서 루시엘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카인은 꾹 눌러 참았다. 일단은 휘몰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먼저였다. 그는 루시엘과 일정 간격 떨어진 곳에 서서, 잠시만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 싫어, 하지 마, 카인…”
그리고 그때, 루시엘이 카인의 이름을 불렀다. 저를 범하고 있는 이가 카인이라고 착각한 듯했다. 쾌감에 취해 착란 증상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하, 으읏… 카, 카인… 으흑…”
카인에게 안긴다고 생각하니 더 흥분하기라도 한 걸까. 숨결에 섞인 단내가 짙어졌다. 마른 등줄기를 관통하는 쾌락에, 기절하듯이 덮인 눈꺼풀이 보였다.
“흐읏, 아, 하응-!”
루시엘은 목덜미를 뒤로 젖히며 파정했다. 정액이라고는 보기 힘든 맑은 물이, 떨리는 배 위로 흩뿌려졌다.
지켜보는 건 이쯤이면 되었다. 카인이 발을 떼었다. 사정의 여운으로 연신 움칠거리는 루시엘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찾았다.”
카인은 루시엘을 끌어 일으켰다. 그의 몸을 벽 쪽으로 돌려, 담벼락에 손바닥을 대도록 만들었다. 루시엘은 두려움으로 몸을 굳힐 뿐,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했다.
흐늘거리는 허리를 한 팔로 감싸 고정시켰다. 부어있는 구멍에 선단을 맞추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두터운 성기가 주름을 빠듯하게 당기며 몸을 열었다.
“아읏, 하… 흐익!”
오랫동안 혹사당해 흐무러진 애널이었지만, 길고 두꺼운 물건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이제 다 들어온 건가, 라고 생각할 때마다 귀두가 쑤컥거리며 더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상반신이 휘청였다. 하마터면 돌로 된 벽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카인의 손이 루시엘의 이마를 감싸지 않았더라면 흰 살갗에 피가 뱄을지도 몰랐다.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카인이 속삭였다. 뺨을 스치는 날숨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안쪽 깊이 파고들었던 성기가, 구멍 가장자리를 간질이며 느릿하게 뒤로 빠져나갔다. 애태우듯 입구를 갉작이다가 미끄러뜨리듯 성기를 삽입했다. 손을 밑으로 내려 아랫배를 문질렀다. 문신은 어젯밤에 진작 사라졌는데도, 루시엘은 컥컥거리며 입을 헤 벌렸다.
바람이 불었다. 앞머리가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피부의 열기가 약간은 식혀지는 것도 같았다. 그 순간, 날아갔던 이성이 번쩍 되돌아왔다.
루시엘은 야외에서 섹스를 하고 있었다. 언제 타인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장소에서. 상의만 갖춰 입은 채로 범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돌벽에 대고 있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카인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어조로 애원했다.
“이… 이건 아니야. 여기는 밖이잖아. 누가 보면 어쩌려고… 흐윽!”
뱉어내야 했을 말이 아스러졌다. 의미 없는 신음이 빈자리를 메꿨다. 카인이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체액으로 미끄럽게 젖어든 둔부에 허벅지 살갗이 부딪쳤다. 성기가 안쪽에 마구잡이로 처박혔다. 폭력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난폭한 추삽이었다.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어요.”
“뭐…?”
“아니, 오히려 봐주었으면 하네요. 당신을 품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그들이 똑똑히 알 수 있게끔.”
카인이 말을 끝내자마자, 루시엘의 안쪽이 경련하듯 조여왔다. 뱃속에 품은 것을 쥐어 짜내려는 듯이, 하, 저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에게 보여지는 걸 상상하면서 느끼기라도 한 건가. 지나치게 음란한 몸이었다.
“으읏, 윽… 흐아…”
골목은 조용했다. 적막 가운데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얽혔다. 살과 살이 불규칙적으로 맞닿는 소리, 의복이 마찰하면서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열띤 소음들이 끈끈하게 이어졌다.
카인은 루시엘의 등을 더듬었다. 곧고 마른 허리를 손끝으로 쓸어 올리다가, 하얀 셔츠에 감싸인 날개뼈를 살며시 더듬었다. 루시엘이 내뱉던 숨을 멈췄다. 날개뼈 사이의 오목한 공간을 지분거리다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보았다. 당신에게 날개가 없다는 게 그 얼마나 다행인지.
장갑을 낀 손이 셔츠 단추를 풀었다. 와이셔츠를 뒤로 젖혀 어깨가 드러나게 했다. 카인은 이를 세워, 툭 튀어나온 날개뼈 부근을 깨물었다. 뚜렷이 남은 잇자국 위로 입술을 포갰다. 절대로 날개가 돋아날 리 없는 어깨 위로, 입맞춤이 눈송이처럼 내렸다.
“다시는 달아날 생각 하지 말아요. 만약 또 이런 일을 벌인다면…”
카인은 말끝을 흐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하기에는 너무 모진 말을, 묵묵히 목뒤로 삼켰다. 굳이 밖으로 내보낼 필요 없는 문장이었다. 이 정도만 경고해도, 루시엘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였다. 도망치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회색 돌벽에 백탁액이 몇 겹씩 덧칠될 즈음, 삽입된 살덩이가 움찔거리더니 정액을 토해내었다. 성기가 뽑혔다. 핏줄이 도드라진 살덩이가 붉게 번들거렸다. 벌어진 애널에서 흰 체액이 쏟아져 나오려고 하길래, 둔부를 한 대 찰싹 때려주었다. 뒷구멍이 반사적으로 오므라들었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담고 있어요.”
울림도 없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카인은 제 의복을 단정히 추스른 후, 발목에 걸쳐져 있던 루시엘의 하의를 끌어 올렸다. 허리띠를 매주고, 먼지를 털어주고, 구김을 대강 정리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루시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순순히 카인에게 안겼다. 카인의 어깻죽지에 푹 이마를 묻었다. 움츠러든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루시엘은 울고 있었다. 그치지 않는 눈물에 어깨 한쪽이 점점 젖어 들어갔다.
카인은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장터의 분위기는 여전히 흥겨웠다. 차양을 펴서 만든 간이식 술집 아래, 한 무리의 청년들이 먹고 떠들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시끄러운 말소리 속에서도, 루시엘의 흐느낌은 똑똑히 귀에 와 박혔다. 오직 카인만이 들을 수 있는, 약하고 힘없는 소리였다.
카인은 앞만 보며 걸었다. 양옆에서 이어지는 상인들의 호객행위도, 번잡한 시장을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오래된 명화처럼 희미해지고, 이곳에 단 두 사람만이 머무는 것 같았다.
발아래에 무언가가 밟혔다. 카인은 고개를 숙였다. 아까 버렸던 화관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수많은 굽에 짓밟혀 망가진 후였다. 영롱한 노란색은 흙탕물에 물들어있고, 섬세한 가장자리도 엉망으로 찢겨 있다. 더는 화관이라고도, 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짓이겨진 꽃잎이 기도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카인은 화관에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었다. 고개를 정면에 고정하고서, 걷고 또 걸었다.
◊
당초 2박 3일이었던 신혼여행은, 1박 2일로 짧게 마무리되었다. 중간에 그 사달이 났으니, 여행을 더 진행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루시엘은 반쯤 넋을 놓고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창틀에 손을 올려놓고 상반신을 앞으로 빼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뒷모습만을 주시할 수 있었다. 옷 아래 감춰진 볼록한 양 날개뼈에서, 금방이라도 커다란 날개가 움틀 것 같았다. 카인을 버리고서 머나먼 하늘 위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니, 버린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카인은 루시엘의 소유가 아니었다.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옛날. 시간상으로는 그리 예전은 아니지만, 체감상으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 그 과거에, 카인이 루시엘의 것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충직한 기사였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그의 주군을 지켰다. 그 시절에는, 루시엘이 틈만 나면 카인을 향해 방긋방긋 웃어줬었다.
과거와 현재,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고 신이 묻는다면, 그래도 카인은 현재를 고를 터였다. 마음을 숨기고자 전전긍긍했던 과거보다는, 사랑을 양껏 고백할 수 있는 지금이 나았다.
카인은 팔을 뻗어 루시엘을 끌어당겼다. 그의 목덜미에 살포시 코끝을 문지르다가 이를 세웠다. 이미 순흔이 자욱하게 찍혀 있는 흰 살결에다, 또 다른 낙인을 새겨 넣었다. 루시엘은 아주 잠깐 몸을 바르작거리다가 곧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가슴을 매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능숙하게 바지 끈을 풀고 드로즈를 벗겼다. 흐읍, 루시엘이 억센 숨을 들이켰다.
“여기에서 하는 거야? 마차 안인데?”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둔부를 파고들었다. 엄지 배로 밑을 간질이며 내벽을 헤집었다. 그 단호한 손길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충분한 대답이 되어 주었다.
◊
밖의 공기는 선선했으나, 마차 내의 공기는 덥게 달궈져 있었다.
“흐, 아… 카인…”
침대로 쓰기에는 비좁은 좌석 위에서, 두 사람은 몸을 섞고 있었다. 돌길을 건너는 마차가 덜컹일 때마다, 그 반동으로 둘의 허리도 같이 튀었다.
성기가 직장을 깊숙이 찔러왔다. 우욱, 윽, 새된 신음이 목구멍 안쪽을 울렸다.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침대 위라면 몸을 뒤로 물릴 수라도 있었겠지만, 이곳은 좁은 마차 안이었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으윽, 아… 윽…”
루시엘은 소리를 내기 싫어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칫하다가는 마부한테 신음소리가 와 닿을 것 같았다.
들키게 된다. 폐제가 된 자신이 육노예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한낱 평민이 알게 된다. 비밀은 소문으로 화하고, 소문은 곧 황실 구석구석 퍼질 것이다. 사람들은 더러운 소문들을 씹어대고, 비웃고, 떠들면서 소문의 부스러기를 흘려대고….
비참한 상상에 토기가 올라왔다. 그는 두 눈을 찡그려 감았다.
바퀴가 자갈 위를 지나갔다. 또 한 번 크게 마차가 덜컹였다. 성기가 안쪽으로 푹 파고들었다. 아악! 원치 않았던 신음이 흐느끼듯 토해졌다. 루시엘의 표정이 무너졌다. 가늘게 뜨인 눈꺼풀 사이, 농익은 과실 같은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혀끝으로 핥으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카인은 그의 눈동자를 혀로 더듬는 대신, 그저 달싹이는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앞니 아래로 혀끝을 미끄러뜨렸다. 고른 치열 안쪽, 힘없이 늘어져 있던 혀를 제 혀로 감았다. 그와 동시에 내장이 울릴 정도로 강하게 좆을 찔러 넣었다. 루시엘은 카인의 입안에서 달뜬 신음을 내질렀다. 단 교성이 혀끝에서 혀끝으로 전해졌다.
얽혔던 혀가 느리게 풀렸다. 침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은 조금 부어 있었다. 홧홧한 날숨을 내뱉는 입술을, 카인은 뚫어져라 응시했다.
루시엘은 그 고운 입술을 움직여 카인에게 거짓말을 했다. 언제는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고, 또 언제는 장터를 구경하고 싶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열심히 지어내었다. 카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순종적인 척 되지도 않는 연기를 했다.
구태여 무엇인가가 거짓이어야만 한다면, 나를 겁내고, 피하고, 증오하는 그 모습이 연기였다면 좋을 텐데.
사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영영 함께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꾸민 거라면… 나는 반짝이는 환희로 내 남은 생을 모조리 칠할 수 있을 텐데.
허나 이 모든 바람은, 허황된 망상에 불과할 것이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