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축복받지 못한 결혼
전 황제, 루시엘의 호위 기사였던 카인은, 루시엘이 폐위된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황실 기사 부단장으로 승진했다.
단테는 원래 카인에게 단장 직위를 맡기려고 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부단장보다는 단장이 훨씬 바쁠 터였다. 카인에게는 돈과 명예보다는, 루시엘과 보내는 여유 시간이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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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은 제과점에서 먹음직스럽게 생긴 생크림 케이크를 구입했다. 전에 루시엘과 함께 방문했었던 그 빵집이었다. 진열된 메뉴도 가구의 배치도 똑같은데, 제 옆에 루시엘이 없다는 것만 달랐다.
그는 의상실에 들러 의뢰했던 물품들을 찾았다. 치렁치렁한 면사포와, 레이스와 꽃으로 장식된 순백의 웨딩 가터.
마음이 급해서 의상은 맞추지 못했다. 맞춤형 예복은 최대 한 달까지 소요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을 마냥 기다리기는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다. 요새 루시엘의 행동으로 짐작하건대, 결혼 예복을 보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
카인은 웨딩 정장이나 드레스를 맞추는 대신, 하늘하늘한 슬립을 구입했다. 얇고 가벼운 천을 써서 살갗이 훤히 비춰 보였다. 아랫자락에는 섬세한 레이스가 덧대어져 있었다.
슬립은 지나치게 짧았다. 허벅지를 채 절반도 가리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그걸 슬립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가슴을 가려야 할 부분이 동그랗게 뚫려 있었다.
결혼식에 입기에는 지나치게 음탕한 옷이었지만, 카인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루시엘에게 있어서, 옷이라는 건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카인의 기분에 따라 벗겨지고 덮이고를 반복하는 천 조각일 뿐이었다.
의상실 다음에는 악세사리점을 방문했다. 결혼반지를 끼워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대체품으로 피어싱을 준비했다. 쉽게 뺄 수 있는 반지와는 다르게, 유두 피어싱은 함부로 빼내지 못할 터였다.
근처 꽃집에서 부케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백의 장미 다발은 아름다웠다. 조금만 힘을 줘도 진창으로 짓이겨질, 그 작고 여린 꽃잎들. 카인은 장미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꽃잎 한 장이라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카인과 루시엘이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공식적인 결혼식은 아니었다. 주례를 설 신관도, 축가를 부를 가수나 박수를 보낼 하객들도 없었다.
결혼식은 지하에서 비밀스럽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식장-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작은 공간-을 꾸미는 것도, 부케와 웨딩 케이크를 준비하는 것도 전부 카인의 몫이었다.
타인의 축복은커녕 인정조차 받을 수 없었다. 주군을 배신한 기사와, 쫓겨난 황제의 조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 결혼에는 루시엘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오로지 한쪽의 사랑만으로 이뤄진 결혼이었다.
그렇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진작 버렸다.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결혼을 올린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면사포를 쓰고 부케를 든 루시엘은 분명 아름다울 터였다.
물론 루시엘의 성격상, 결혼식에 순순히 참가할 리 없었다. 필시 싫다며 도리질을 치리라. 분을 이기지 못해 냅다 혀를 깨물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카인은, 웨딩의 형식을 멋대로 바꾸어 놓았다. 루시엘의 영혼은 어쩔지 몰라도, 육체는 이 결혼식을 즐길 터였다. 죽고 싶다는 충동 같은 건, 쾌락에 묻혀 희미해질 것이었다.
카인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서, 루시엘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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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미친놈….”
루시엘은 짤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단어와 단어를 이어 붙일 수 없었다. 조각난 문장들이 멍한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면사포가 그 스스로의 고갯짓에 나풀거리며 흔들렸다.
붉은 융단이 화려하게 깔린 복도. 복도 끝에는 둥근 홀이 있었고, 홀은 싱그러운 꽃들과 은은한 조명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객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간이 예식장은 꽤 그럴듯했다. 연주자도 없는데 웅장한 축가가 울려 퍼졌다. 마법의 힘을 빌려 만들어낸 거짓이었다.
“자, 루시엘.”
카인이 루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엘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제 옆에 선 카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계열의 옷을 주로 입는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카인은 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은 구김 하나 없이 단정했다. 왼쪽 가슴에 달린 가넷 브로치가 반짝거렸다. 심장을 형상화한 것 같은 붉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여기를 걸으라고?”
루시엘의 손끝이 새빨간 밧줄을 가리켰다. 복도의 끄트머리와 홀의 벽 사이, 굵고 긴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밧줄 군데군데에는 굵은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밧줄은 루시엘의 중심부보다 살짝 위에 있었다. 이 사이를 걸으려면, 까치발을 들고 가야 할 성싶었다. 회음부가 쓸리는 건 물론이고, 잘못해서 밧줄 위로 주저앉았다가는 뒷구멍도 자극당할 것 같았다.
“괜찮을 거예요. 아프지 않도록 미리 적셔놨으니까.”
카인의 말대로, 밧줄에는 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약한 최음 성분이 있는 젤이었다. 밧줄 사이를 걸으며 느끼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친 로프에 살이 쓸리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나, 나는, 이런 거 싫…”
“왜 아직도 스스로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머뭇거리는 루시엘을, 카인이 강제로 잡아끌었다. 밧줄이 여린 중심부를 문질렀다. 질척한 젤이 회음부로 스며들었다. 기묘한 감각에, 루시엘이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루시엘은 카인의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카인에게 기대서라도 균형을 잡아야 했다.
“아읏, 윽…”
다리를 벌리면 몸이 낮아져서, 그만큼 밧줄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쓸리는 걸 피하려면 허벅지를 딱 붙이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굵은 밧줄이 허벅지 안쪽의 살을 쓸었다. 허벅지는 물론이고, 반쯤 발기한 성기까지 툭툭 건드렸다. 누군가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워 넣고 비비는 것 같았다. 허벅지 안쪽에 젤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최음제가 발라진 부위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건…”
신음을 내지르고 싶지는 않아서, 루시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입술에 비릿한 빗방울이 고였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한 줄기 피가, 턱을 타고 흘렀다.
“안 돼요. 루시엘.”
손가락이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더 이상 입술을 깨물지 말라고 나무라며, 혓바닥을 세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제 것에 상처를 입히면 안 되잖아요.”
누가 네 거라는 거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치켜떠 카인을 노려보는 것, 그게 루시엘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꿋꿋한 눈초리가 카인의 신경을 거슬렀다.
카인은 줄을 위로 잡아당겼다. 꺼슬꺼슬한 밧줄이 둔부 사이로 파고들었다. 민감한 안쪽을 압박했다. 구멍이 저절로 꾸물거리며 말간 애액을 흘려보냈다. 애널이 엉덩이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윤활제를 빠끔빠끔 빨아먹었다.
“하읏, 아, 아앙! 힉!”
발돋움한 발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걸음을 떼기는 고사하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뭔가를 삽입하지도 않았는데, 구멍에서 애액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밧줄이 축축한 이유가, 미리 발려놓은 윤활제 탓인지 아니면 애액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루시엘은 힘겹게 발을 떼었다. 붉은 융단 위로 질척한 얼룩이 남았다.
그냥 밧줄만 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문제는 중간중간 매듭진 부분이 있다는 거였다. 단단하게 묶인 부위가 성기와 회음부를 건드릴 때마다, 흥분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래에서 시작된 열락은 금세 가슴께까지 번졌다. 판판한 가슴 위, 분홍색 유두가 쾌감으로 발딱 서 있었다. 마치 만져달라는 것처럼.
“더, 더는 못해… 못 가겠어….”
루시엘이 훌쩍였다. 풀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밧줄이 더 깊게 박힐 거였다.
“카인, 제발….”
그가 애원했다. 습기 어린 눈으로 카인을 올려다보며 간곡하게 빌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밧줄 밖으로 빼내 주는 대신, 주머니에서 은빛 감도는 집게를 꺼냈다. 집게 두 개가 체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잡아당기기 좋은 모양새였다.
“또 뭘 하려는 거야?”
루시엘이 움칫했다. 카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뾰족이 솟은 루시엘의 양 유두에 집게를 매달았다. 작은 유두를 집게가 짓이겼다. 통증과 쾌락 그 어딘가의 감각이 젖꼭지를 들쑤셨다. 감각은 빠르게 쾌락 쪽으로 기울어갔다.
“뭐 하는 짓거리냐고 물었잖아!”
“걷기 힘들다면서요. 도와주려는 것뿐이에요.”
카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는 집게에 달린 체인을 세게 끌어당겼다. 히익! 루시엘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상체가 앞으로 확 젖혀졌다.
루시엘은 카인이 이끄는 대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젖꼭지가 통통하게 부어버릴 것 같았다.
“흐응, 아, 하으…. 드, 드디어… 흐읏….”
마침내 목적지인 홀까지 도착했을 때, 루시엘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밧줄에 하도 비벼지는 바람에, 회음부와 허벅지 안쪽 살이 붉었다. 진득한 젤과 애액이, 둔부와 밧줄 사이로 은실처럼 길게 이어졌다. 뭉개진 유두는 집개를 꽂기 전보다 훨씬 부풀어 있었다. 발기한 성기가 슬립 자락을 들어 올렸고, 정액이 슬립 밑부분을 축축하게 적셨다.
카인은 루시엘의 가슴에서 집게를 떼어냈다. 떼어낸 후에도 화끈거리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단상 바로 앞에 섰다. 대리석을 만들어 다듬어진 단 위에는, 화사한 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왼쪽의 웨딩 케이크와, 오른쪽의 작은 신상. 제국식 결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카인은 단상에 놓인 서약서를 집어 들었다. 큰 소리로 또렷하게, 결혼 서약의 내용을 읊었다. 서약을 진행하는 것은 본디 신관의 역할이었지만, 축복받지 못한 예식에 신관을 부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의 곁을 지키며 서로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카인은 대답했으나 루시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도리어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닫았다.
“루시엘.”
카인이 채근하듯 루시엘을 불렀다. 그제야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건… 결혼식도 뭣도 아니야. 이런 억지 맹세에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기대했던 긍정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루시엘은 악에 받친 어조로 씨근거렸다.
“전부 엉터리야. 서약식을 진행할 신관도, 서약의 증인이 되어줄 하객도 없어. 애초에 내 의사가 반영되지도 않았잖아. 난 이딴 거, 절대 인정 못… 으흑!”
카인이 루시엘의 둔부를 꽉 움켜쥐었다. 엉덩이가 주물러지는 것만으로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카인은 루시엘의 턱을 틀어잡아 뒤를 보게 만들었다. 텅 빈 하객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루시엘은, 하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많은 이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거잖아요.”
“무, 무슨 소리야. 이런 꼴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보는 사람이 있어야 서약을 할 수 있다면야, 지금이라도 하객을 불러야겠네요. 누굴 부를까요? 당신의 이복동생?”
카인의 속삭임이 스산한 안개처럼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필연적으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다. 기사는 옛 주군을 겁박하고 있었다.
“궁금하네요. 예식장에서 좆을 발딱 세운 형을 보면서, 동생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
흰 장갑을 낀 손이 루시엘의 성기 밑동을 그러쥐었다. 단단하게 굳은 귀두를 문지르다가, 손끝으로 요도를 툭툭 건드렸다. 벼락같은 쾌감이 하체를 내리쳤다. 루시엘은 카인에게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서 신음했다. 애무 당하는 건 앞인데, 이상하게 뒷구멍이 우그러들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하객을 부를까요?”
“아니야. 부르지 마아… 그 사랑의 맹세인지 뭔지 할 테니까, 제발…!”
루시엘이 애타게 카인의 팔에 매달렸다. 달아오른 볼을 어깻죽지에 부비며 애원했다. 보름 남짓 감금을 시켜놓았더니, 애교부리는 법이라도 익힌 모양이었다.
“잘 생각했어요.”
카인은 샅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기특함을 담아서, 루시엘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여주었다.
“그럼 말해볼래요?”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이 상냥한 말투였다. 루시엘은 시큰거리는 콧날을 손으로 문질렀다. 훌쩍거리며, 카인이 시키는 대로 혀를 움직였다.
“저는, 평생… 히윽, 읏, 카인의 곁을 지키…면서… 흡,”
눈물이 말끝을 흐릿하게 적셨다. 루시엘은 더듬거리며 가까스로 말을 이어 나갔다.
“카인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사랑을 입에 담는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진심 없는 고백일지라도 기꺼웠다. 카인은 루시엘을 꼭 껴안았다. 눈물 젖은 뺨에 대고, 수십 번의 키스를 퍼부었다.
결혼 서약 다음에는 반지 증정식이 이어졌다. 카인은 제국의 예법을 나름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세세한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카인의 손에는 반지가 아닌 피어싱이 들려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팍이 저릿해지는 느낌에, 루시엘은 어깨를 움츠리며 가슴을 가렸다. 시, 싫어, 하지 마… 옛 주군이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가운 솜이 왼 가슴을 닦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어, 루시엘은 눈꺼풀을 꽉 닫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여린 젖꼭지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니플 클램프에 혹사당해 잔뜩 부은 유두에, 이번에는 자그마한 피어싱이 달렸다. 샛노란 보석이 처연하게 빛났다.
“…, …!”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카인이 루시엘에게 입술을 포개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내지른 신음도, 더운 타액과 거친 호흡도, 전부 입안에 고여 사라졌다. 붉고 습한 두 개의 살덩이가 질퍽하게 얽혔다. 달큰하고 농도 짙은 키스였다. 가슴의 욱신거림을 날려 보낼 만큼 달았다.
루시엘의 상체가 휘청이더니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의 등이 꽃으로 만발한 단상에 닿았다. 슬립이 위로 젖혀지며 허벅지가 완전히 드러났다. 새하얀 허벅지를, 더 흰 레이스 가터가 감싸고 있었다. 웨딩 가터를 입으로 빼내는 것은, 결혼식의 오래된 전통 중 하나였다.
카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시엘의 다리를 들어 올려 제 한쪽 어깨에 얹었다.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입술로 맨살 위를 거닐 듯 사뿐하게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은 눅눅하고도 따스했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여린 살갗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입술이 허벅지 안쪽을 간질였다. 그 별것 아닌 자극에도 루시엘의 몸은 쉽게 달아올랐다. 불과 몇 분 전에 사정했건만, 성기가 다시금 빳빳이 발기했다.
카인은 입술을 열어 웨딩 가터를 물었다. 행여 부드러운 천이 찢어질까 봐, 조심스레 가터를 끌어내렸다. 허벅지를 지나 종아리로, 가느다란 발목으로.
툭, 웨딩 가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터가 벗겨진 맨 허벅지 위로, 다시금 카인의 입술이 닿았다. 허벅지 안쪽을 지분거리다가 이를 세워 강하게 깨물었다.
허벅지에 하는 키스는, 당신을 지배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했다. 폐위당하기 바로 전날, 루시엘이 카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카인은 그가 새겨놓은 자국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지배욕이 선연히 묻어나는 시선으로, 루시엘을 삼킬 듯이 응시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찰나, 루시엘은 숨 쉬는 법도 잊어버렸다.
“아, 싫어, 싫어…!”
몸을 섞는 게 처음도 아닌데, 루시엘은 오늘따라 격렬하게 거부했다. 제단에 흩뿌려져 있던 꽃잎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버둥거리던 손이 단상 왼쪽의 케이크를 내려쳤다. 과일과 크림으로 정성스레 장식되어 있던 케이크가, 순식간에 형태를 잃고 뭉그러졌다. 푹 파진 형상이 처참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카인은 말없이 루시엘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혀를 움직여, 크림 범벅이 된 손가락을 핥았다. 지문까지 읽어 들일 것처럼 세심하게, 손끝과 손마디를 훑어 내렸다. 손등과 손바닥에 질척하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사람처럼, 거룩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카인의 입술이 루시엘의 약지를 머금었다. 피가 살짝 배어 나오도록 손가락을 깨물었다. 약지 밑동에 선명한 잇자국이 남았다. 언뜻 보면 반지를 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반지와는 다르게, 이 자국은 함부로 빼낼 수 없을 터였다. 카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카인은 손끝으로 생크림을 떴다. 생크림에 푹 젖은 손으로, 루시엘의 입술을 더듬었다. 붉은 입술에 묻어난 흰 크림은, 크림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연상시켰다.
다물린 입술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를 잡아 누르고, 점막과 입천장을 더듬으며 생크림을 묻혔다. 뜨거운 점막에 닿은 크림이 빠르게 녹아갔다.
카인은 루시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진득한 크림이 혓바닥에 닿아 뭉그러졌다. 생크림과 숨결, 눅눅한 타액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홀린 듯이 달큼한 키스를 이어 나갔다.
“하아, 흑, 허억, 헉….”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루시엘은 막혔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편하게 호흡을 고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가슴에 생크림이 펴 발라졌다. 피어싱을 하지 않은 오른쪽 유두에, 차가운 크림이 덕지덕지 묻었다.
“크, 림을… 왜 이런 데다가, 흐에, 힉!”
입술이 분홍색 돌기를 머금었다. 카인은 그 조그마한 젖꼭지를 끈덕지게 물고 빨았다. 무언가가 나올 리 없는 가슴에서는 달달한 우유 맛이 났다.
가슴에 바른 크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카인은 한동안 루시엘의 가슴을 애무했다. 입으로는 유두를 자극하면서, 손으로는 비부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을 모아 아래를 들쑤시며, 구멍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넣을게요.”
살이 없는 둔부를 잡아 양쪽으로 당기자, 눅진하게 풀린 애널이 그대로 드러났다. 귀두가 구멍에 문질러졌다.
“하으윽-”
푹, 성기가 깊이 처박혔다. 안쪽은 부드럽고 축축했고,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살기둥을 감쌌다. 루시엘 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의 몸뚱이는 이미 사내를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으, 흐긋, 흑. 아, 싫, 제발…”
루시엘은 희게 질린 손톱을 세워 애꿎은 단상을 긁었다. 몸을 뒤로 물려 도망치려고 해봤으나, 안쪽 깊이 박힌 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허리를 뒤로 빼면 다시 따라와 쳐올리고, 물러난 만큼 더 강하게 추삽질을 하고….
몸이 밀려 머리카락이 제단 밖으로 삐져나왔다. 흐트러진 면사포가 달빛처럼 일렁였다. 귀두 끝이 배꼽 바로 아래쪽을 쑤컥였다.
루시엘이 어깨를 바르작거릴 때마다, 단상을 가득 채운 꽃들이 그의 몸에 눌러 짓이겨졌다. 독한 꽃향기가 비강에 엉겨 붙었다. 제가 처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내음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발갛게 짓무른 눈시울 위로, 또다시 눈물이 아롱졌다.
아, 자신은 그때, 다친 새끼 늑대를 줍지 말았어야 했다. 황궁에 데려가 치료하지도, 이름을 붙여주고 기르지도 않았어야 했다. 제가 키운 아이가 저를 배신할 줄은, 순수한 동정심이 족쇄로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족쇄는 루시엘의 자유를 뺏고, 그를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젠장, 젠장!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본디 모든 후회는, 너무 늦은 후에 이뤄지는 법이었다.
“역시 너를 구하는 게 아니었어.”
음절 하나하나에 원망이 실려 있었다. 부릅뜬 눈꺼풀 위로 증오가 아른거렸다. 카인은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대신 그저 웃어넘겼다. 루시엘의 폭언에 일일이 상처받다가는, 카인의 정신이 루시엘보다 먼저 망가질 터였다. 그는 무뎌지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웃어야죠, 루시엘. 기쁜 날이잖아요. 결혼 첫날밤인데….”
카인의 손끝이 루시엘의 양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눈물로 얼룩진 낯에 기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웃음이라고 보기도 힘든 비틀린 표정이었지만, 카인은 충분히 만족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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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은 트레이에 빵과 수프를 담았다. 잘 씻어진 딸기, 포도와 체리,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복숭아도 같이 챙겼다. 마법으로 재배한 과일은 제철의 것만큼 신선했다.
결혼 첫날밤이라고 너무 무리한 탓일까. 루시엘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몇 번이고 깨워봤지만, 그럴수록 이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자느라 아침은 걸렀어도 점심은 반드시 먹어야 했다. 어젯밤 고생시킨 만큼 든든하게 먹이고 싶었다.
카인은 쟁반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 음식을 나르는 것은 시종의 역할이었지만, 카인은 그 일을 본인이 직접 하고 있었다. 둘만의 보금자리에 타인을 들일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지하 맨 밑층, 커다란 철문을 열자 빛이 쏟아졌다.
언제 잠에서 깨어난 걸까. 루시엘은 침대에 앉아있었다. 상반신을 침대 헤드에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였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의 방이었다면 창문이 있었을 위치였다.
“루시엘.”
카인이 루시엘을 불렀지만, 루시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체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핏빛 홍채 너머, 주검처럼 싸늘한 감정들이 울혈처럼 피어났다.
“식사 시간이에요.”
루시엘이 카인을 외면하든 말든, 카인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침대 위에 접이식 테이블을 편 후, 주방에서 가져온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빵과 수프, 과일, 그리고 숟가락. 일부러 포크와 나이프는 가져오지 않았다. 행여 루시엘이 몹쓸 마음을 먹을까 걱정되어서였다.
그제야 루시엘이 겨우 고개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트레이 위의 요리들을 훑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수프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안 먹을래. 입맛이 없어.”
루시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침도 걸렀잖아요. 조금이라도 먹어야죠.”
카인은 수프를 떠서 루시엘의 입가로 가져갔다.
“먹기 싫다니까!”
테이블이 나동그라졌다. 수프가 이불보를 축축하게 적셨고, 과일 알갱이들이 시트 위를 굴렀다.
“네가 주는 걸 먹을 바에는, 차라리 굶어 죽을래. 그편이 낫겠어.”
루시엘은 눈을 굳게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층층이 쌓여있던 눈물이, 눈꺼풀에 밀려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카인은 우는 루시엘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 또 우는구나. 부드럽게 대해주든, 거칠게 몰아붙이든, 어쨌든지 당신은 울게 되어 있구나. 내 상냥함이 당신을 울린다니. 그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비참한 일이다. 이럴 바에는 한없이 강압적인 게 낫겠다. 어쭙잖은 다정은 독에 불과하니까….
카인은 수프로 더럽혀진 이불을 밑으로 던졌다. 루시엘의 어깨를 잡아 눌러 침대에 눕히고, 팔랑거리는 윗옷을 들어 올렸다. 감금당한 이후로 쭉 그래왔듯이, 속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한 번의 손짓으로 바로 드러날 무방비한 치부였다.
수치심에 오므라들려고 하는 다리를 우악스럽게 벌렸다. 어젯밤의 정사로 아직 부어있는 구멍을 건드리며, 부러 빈정거렸다.
“윗입으로 먹기 싫다면, 아랫입으로는 잘 받아먹을 수 있겠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말과 행동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새삼 이런 걸 신경 쓰는 것도 우스웠다.
앞으로도 자신은 루시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를 울리고, 범하고, 몸과 영혼을 잘근잘근 밟아놓을 것이다. 가장 최악의 방식을 써서라도, 루시엘을 제 곁에 영원히 잡아매려고 할 터다.
그러니 나의 사랑은, 결코 순애라고는 불리지 못 하리라.
왼손 엄지로는 뒷구멍을 잡아 벌리고, 남은 손으로는 딸기를 집어 들었다. 새빨간 딸기가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잘 익은 딸기는 물컹했고 루시엘의 안은 좁디좁았다. 내벽이 수축하며 반사적으로 이물질을 조여 왔다. 망그러진 딸기의 과즙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미친, 그걸 왜 거기에… 제정신이, 흣, 아냐…”
“잘 안 들어가네. 힘 좀 풀어요.”
딸기 세 개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서, 다물리지 않는 구멍 가장자리를 엄지 배로 문질렀다. 손끝에 끈적끈적한 과즙이 묻어났다. 짓이겨진 과육의 향기가 허공으로 번져나갔다. 그 향기가 시작되는 곳이 제 아랫구멍이라는 게, 견디기 어려울 만큼 수치스러웠다.
“앗, 잠깐, 이번에는 또 뭘, 흐읍, 악!”
차갑고 무른 복숭아 조각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물렁물렁한 과육들이 회음부와 구멍에 치덕치덕 펴 발라졌다. 이제는 하다못해 과육을 윤활제로 쓰려는 걸까. 과육이 진득하게 묻은 손가락이 구멍을 휘저었다. 굵고 긴 손가락이 뒤에 들어간 과일들을 완전히 으깨놓았다.
입에 들어가야 할 과일이 아래를 벌려놓고 있다. 딸기며 복숭아가 처덕이며 내벽에 즙을 발라대고 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또 몸은 느끼고 있었다.
뻣뻣이 선 성기에 반쯤 잘린 복숭아가 문질러졌다. 자위 기구라도 되는 듯 귀두를 감싸며 자극을 주었다. 그 애타는 느낌에,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이며 복숭아에다 대고 추삽질을 했다. 이제 앞은 쓸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꼴에 사내라는 걸까. 카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카인은 귀두에서 복숭아를 떼어내고는, 뭉개질 대로 뭉개진 복숭아의 단면을 루시엘의 가슴에 대고 문질렀다. 하아, 흐응, 응! 신음이 한층 더 높아지는 걸로 보아, 성기보다는 가슴으로 더 잘 느끼는 것 같았다. 잘 느끼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상으로 가슴을 빨아주었다.
“으응! 읏! 흐아, 아아…!”
끈적끈적해진 유두를 입에 넣고 굴리자, 다듬어지지 못한 신음이 마구잡이로 새어 나왔다. 혀끝을 적시는 복숭아의 과즙보다, 그 앓는 소리가 훨씬 달콤하게 느껴졌다.
“커억, 그만, 멈춰…”
“잘 먹네요. 착해요, 루시엘.”
“그만두라고 했잖, 흐아, 앙!”
애원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루시엘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뺨을 시트에 문지르며 잘게 헐떡였다. 어금니 사이로 질질 흐르는 타액이 시트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한쪽 다리를 자기 어깨에 걸쳤다. 세 손가락을 모아 구멍을 부지런히 넓혀 나갔다. 벌름거리며 물크러진 과육을 쏟아내는 안에, 이번에는 포도 두 알이 밀려 들어왔다. 안쪽을 구르며 주름진 내벽을 눌러대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워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온갖 과일로 범벅이 된 안쪽에 성기가 처박혔다. 안쪽을 꿰뚫고 마구 헤집어대었다. 내벽과 성기가 마찰하며, 삽입된 과일들을 짓눌렀다.
허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가 다시 뒤로 물릴 때마다, 접합부에서 체액과 과즙이 함께 흘러내렸다. 뭉텅이 진 과육이 툭툭 떨어져 시트를 더럽혔다. 진창이 된 시트에서는 단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 엉망인 모습을 보며 카인은 웃었다. 예쁘다. 한껏 벌어진 구멍을 지분거리며 작게 속살거렸다.
“이상한, 흣, 소리 하지 마아…. 뭐가, 흐윽, 예쁘다는, 아!”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배우자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식은땀이 루시엘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아무리 루시엘이 하지 말라고 바동거려도, 카인은 꿈쩍도 하지 않을 터였다. 사랑이 그를 비정상으로 만들었다.
카인은 검붉은 체리를 집어 제 입에 머금었다. 혀 위에 체리를 올려놓고는 루시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반질반질한 체리가 혓바닥 위를 굴렀다. 온기와 숨결이 넘어가고 넘어오며, 맞닿은 자리가 비슷한 체온을 띠었다.
루시엘은 카인이 건넨 체리를 씹어 삼켰다. 아직 덜 익었는지 끝맛이 약간 시었다. 그는 씨를 뱉어내며 작게 콜록거렸다.
“흐읏, 하아, 앙! 하응!”
퍽, 퍽, 추삽질이 빨라졌다. 루시엘은 좆에 꿰인 상태로 백탁액을 쏟아내었다. 루시엘이 허리를 뒤틀며 두 번 정도 더 파정하고 나서야, 카인도 루시엘의 안에서 절정을 맞았다. 성기를 뽑아내자, 덩어리진 정액들과 형체를 잃은 과일들이 한데 울컥울컥 쏟아졌다.
“좋아해요.”
속삭이는 음성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장마철에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 밝은 어조가, 역설적으로 루시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카인은 얼룩진 침대 시트를 치우고 새 시트를 꺼내 깔았다. 바닥에 엎어진 트레이와 그릇들을 치우고, 더러워진 바닥을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시종의 업무를 수행했다.
“다시 식사 가져올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과일 빼고.”
루시엘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퉁명스러운 어투였지만 상관없었다. 대답이 돌아온 게 그저 기뻤다.
똑같은 트레이에 다른 음식이 담겨 왔다. 버터가 녹아든 휜 빵과 쇠고기 크림수프였다. 희노란 수프 위, 보슬보슬 뿌려진 연녹색 파슬리가 색감을 더해주었다. 호화로운 식사보다는 이런 단출한 메뉴가 나았다. 값비싼 해산물도 금박을 뿌린 디저트도 지금은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루시엘은 빵을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맛을 평가할 여력은 없었고, 그냥 기계적으로 씹고 삼키는 게 전부였다.
수프를 한 숟갈 퍼서 무작정 입속에 쑤셔 넣었다. 뜨거운 수프가 혓바닥에 스며들었다. 뱉으려고 했는데 식도 아래로 넘어가 버렸다.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카인이 황급히 찬물을 건네주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자 식도의 불이 조금은 사그라진 것 같았다.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조금씩 먹어요.”
카인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수프를 떠서 입으로 호호 불었다. 적당히 식은 수프가 루시엘의 입가로 향했다.
“자, 아- 해요.”
“…….”
루시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상반신을 기울였다. 입을 열어 순순히 수저를 머금었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슬쩍 카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됐지? 나 배불러.”
빵은 앞부분만 약간 뜯어진 채고, 수프는 양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매일 이렇게 먹었다가는 이른 시일 내로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게 분명했다.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하고 수프를 집어넣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구토라도 한다면 그것대로 낭패였다. 카인은 고민 끝에 곧 적절한 타협안을 떠올렸다.
“다 먹으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어?”
“여기서 내보내 달라, 다시 황좌를 되찾고 싶다, 이런 건 어렵겠지만…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소원이면 뭐든 괜찮아요.”
카인이 다시금 수프를 떴다. 수저가 입술 바로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크림과 옥수수를 넣고 끓여 노랗고 뭉글뭉글한 수프를, 루시엘은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저를 배신한 기사가 주는 음식을, 아기 새처럼 얌전히 받아먹는 폐제라니. 기괴하고도 단란한 정경이었다. 수프 그릇이 매끈한 밑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빵을 담은 접시 위에 부스러기만 남을 때까지, 그는 천천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다 먹었다!”
루시엘이 뿌듯하게 입술 양 끝을 끌어올렸다. 감금된 이후 처음으로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내 소원은 뭐냐면…”
루시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저러는 걸까. 적막이 길어질수록, 묘한 긴장감이 그 위에 층층이 쌓였다.
결심한 듯, 마침내 루시엘이 똑똑히 혀를 움직였다.
“신혼여행 가고 싶어.”
“네?”
“신혼여행 가고 싶다고.”
신혼여행이라는 말이 두 번 연속 고막을 때렸다. 루시엘이 두 번이나 말실수를 했을 리도, 자신이 두 번이나 그의 말을 잘못 들었을 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째서 소원이 신혼여행인 거지?
마음을 가라앉히자 답은 금방 나왔다. ‘신혼여행’은 탈출을 위한 빌미에 불과했다. 카인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내놓은 후, 아득바득 달아나 볼 심산인 듯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낸 게 하필 신혼여행이라니. 귀여웠다. 카인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속이 너무 뻔히 보여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루시엘은, 저랑 신혼여행을 가고 싶은 거예요?”
“으응. 너랑 나는 그… 신혼부부니까.”
루시엘은 어렵게 ‘신혼부부’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 흔한 단어의 울림이 오늘따라 아름답게 들렸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음… 어디든 좋긴 한데, 황궁이랑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면 좋겠어. 한적한 시골 마을도 괜찮고, 숲속 농가나… 아, 목장 구경을 하는 것도 재밌겠다.”
“그래요. 루시엘이 좋아할 만한 곳으로 한 번 찾아볼게요.”
카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
루시엘은 카인이 제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기에 이토록 희망찬 미소를 짓는 것이겠지.
카인은 오늘 저녁 암시장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거래되는 상품 중에는, 루시엘을 도망치지 못하게 할 물건도 있을 것이었다.
“신혼여행이 기대되네요.”
“응. 나도.”
◊
카인은 한참 동안 내 곁에 머물다가, 업무 때문에 방을 떠났다. 나는 이불 속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렸다. 적당히 노곤하면서도 녹아내리는 듯한 이 기분을, 오래오래 즐기고 싶었다.
나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 진실의 눈동자를 집어 들었다. 카인이 나가기 전 내게 준 것이었다. 보석처럼 생긴 이것은 사실 토르토파라는 촉수 마물의 핵이다. 하지만 설정상의 ‘루시엘’은 이를 그냥 희귀한 광물로만 알고 있다.
나는 핵만 남기고 죽은 내 애완촉수를 되살리기 위해, 카인에게 저 보석을 달라 떼쓴 적 있었다. 몇 분에 걸친 공방전 끝에, 보석은 일단 카인이 갖되, 필요 없어지면 나한테 주는 걸로 결론이 내려졌다.
진실의 눈동자의 사용 횟수는 총 일곱 번. 그중 한 번은 아이작이 보석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고, 나머지 여섯 번은 카인이 썼다. 저번 여름에는 내 마음을 알아내려고 다섯 번의 기회를 단숨에 날렸고, 두 달 전쯤 자신의 반란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남은 하나마저 써버렸다.
카인이 광물에 대해 딱히 언급하지 않길래 까먹은 줄 알았는데, 잊지 않고 내게 되돌려주다니. 솔직히 조금 감동이었다. 역시 카인은 착하다.
나는 양손으로 핵을 감싸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불길한 녹색 안개가 핵을 감싸더니, 꾸물거리며 촉수의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토토야, 보고 싶었어!”
나는 되살아난 토토를 꼭 끌어안았다. 토토는 내 볼에 착 달라붙어 애교를 떨었다. 한 번 망가졌다가 마법으로 복구해서 그런지, 크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발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토토야, 그거 알아? 나 결혼했다.”
토토가 흠칫 몸을 굳혔다. 놀란 건지 촉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토토를 내 무릎에다가 올려놓았다. 애완촉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들뜬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곧 신혼여행도 가기로 했어. 단둘만의 여행이라니 너무 설렌다.”
허벅지 위에 있던 토토가 꿈틀거리며 내 배 위로 기어 올라갔다. 토토는 촉수를 뻗어, 옷의 목 부분을 쭉 잡아당겼다. 의복에 가려져 있던 왼쪽 유두가 드러났다. 샛노란 보석이 달려 있었다.
“끼엑, 끼에엑.”
설명이 필요한지 토토가 끼잉거렸다.
“아, 이거? 결혼반지 비슷한 거야. 어제 달았는데… 야, 잠깐만, 뭐 하는 거야?”
그때였다. 토토가 내 옷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 가슴팍에 착 달라붙더니, 촉수를 이용해 피어싱을 빼내려고 했다.
“야야, 빼지 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끼에엑, 끼엑! 끼에엑!”
토토가 괴랄한 고성을 질러댔다. 나한테 남편이 생겼다는 게 상당히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마물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좀 뭐하지만, 미련 많은 전남친 같았다.
“토토,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포탈 열어서 네가 원래 사는 곳으로 돌려보내 줄게. 시킬 일 생기면 그때 다시 부를 테니까, 일단은 밖에 나가 있어.”
“끼엑! 끼에엑!”
헤어지기 아쉬운지, 토토가 촉수 다리를 격렬하게 휘둘렀다. 나는 자그마한 포탈을 열어, 거의 반강제로 토토를 집어 던졌다. 다시 기어 나올까 걱정이 돼 급하게 포탈을 닫았다.
포탈로 생명체를 이동시키는 데에는, 매우 많은 마력이 소요된다. 아주 잠깐 포탈을 열었는데도 진이 쭉 빠졌다.
“하아….”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슬슬 카인을 만나러 암시장에 가야 했다.
나는 주섬주섬 검은 로브를 꺼내 입고 흰 가면을 썼다. 오늘 저녁, 나는 카인에게 엄청난 물건을 팔 예정이었다. 도망가는 ‘루시엘’을 쉽게 잡을 수 있는, 흑마법사 인생 최대의 걸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