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장 안락한 새장
황제는 말없이 기사를 응망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수조 밖으로 나온 열대어처럼, 입술이 소리 없이 뻐끔거렸다.
동공에 물방울이 스몄다. 눈앞이 온통 뿌옇게 번졌다. 수백 개의 칼날도, 환호성을 지르는 수많은 이들도 잘 보이지 않는데, 유독 카인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세상에 오직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카인 너도… 날 혐오하고 있구나.”
드디어, 목구멍 너머에서 목소리가 기어 올라왔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침음에 가까웠다.
“내가 친아비를 죽였으니까, 백성을 내팽개친 폭군이니까… 나 같은 건 폐위되어야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루시엘은 빈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그의 시선이 약지의 반지에 닿았다. 그 샛노란 보석을 눈에 담는 순간, 루시엘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루시엘이 술김에 유년기의 상처를 고백한 이후, 카인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루시엘이 원하는 곳을 순순히 따라가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앞장서서 나들이 갈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루시엘에게 정성을 쏟았다. 제 자신의 인생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루시엘과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는 데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루시엘은 카인의 행동이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다. 주군의 과거를 연민한 기사가, 주군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루시엘은, 카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암담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 모든 게 반란을 위한 연막작전이었을 줄이야.’
루시엘의 얼굴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툭 치면 부스러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닷새 전 갔던 바닷가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발밑으로 밀려들던 바다, 모래 위에 찍히던 두 사람의 발자국. 파도가 몰려든다. 독한 소금물이 추억을 부식시킨다. 추억은 침몰하고, 녹슬고, 이끼가 낀다. 수천 번의 물결이 추억을 휩쓴다.
추억은 더는 반짝이지 않는다. 아름답지도 찬란하지도 않다. 그저 한없는 슬픔만이, 버려졌다는 분노만이, 파도에 실려 해안가로 떠밀려온다.
“아뇨. 루시엘.”
카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엘은 소스라치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카인은 팔을 뻗어 루시엘을 끌어안았다. 루시엘은 버둥거리며 카인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카인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폭군이든 성군이든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폭군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속삭임이 들렸다. 품에 갇힌 루시엘만 들을 수 있는, 작고 나직한 음성이었다. 루시엘이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눈빛으로 흐릿하게 물었다.
“당신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군이었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가질 수 없었겠죠.”
겨우 한 뼘 거리에서, 둘의 눈빛이 맞닿았다. 금빛 눈동자가 붉은 눈을 진득하게 물고 늘어졌다.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짙은 욕망이, 샛노란 홍채 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 시선은 증오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설마 너… 날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사랑이라. 완전히 그릇된 말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은, 분명 사랑에서 파생되었으므로. 그렇지만 카인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이처럼 깊고 어두운 감정에, 그토록 아름다운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카인은, 루시엘이 타인의 옆에서 행복하기보다는, 자신의 곁에서 평생 불행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카인은 잠시 멈춰 말을 골랐다.
“당신을 갈망해요.”
다정한 손끝이 눈물로 얼룩진 뺨을 쓸었다. 남은 손으로는 루시엘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루시엘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을 떨쳐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러운 눈물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루시엘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반지를 빼내 바닥에 내던졌다. 수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간 바닥 위, 값진 반지가 썩어빠진 낙엽마냥 나뒹굴었다.
◊
나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감옥은 삭막했다. 깔고 누울 이불보 하나 없었다. 창살 밖에서는 간수와 병사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힘없이 눈을 내리닫고서, 병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꺼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하나 고민도 해봤는데, 역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게 더 맞을 성싶었다. 믿었던 호위 기사한테 배신을 당한 설정이니까, 정신이 나갈 대로 나갔겠지.
“그럼 황제는 계속 여기에 가둬놓는 건가?”
“아니. 이건 임시방편이고, 사태가 다 수습되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하더군. 아마 감옥에는 채 하루도 있지 않을걸?”
“어디로 옮기는데?”
“그건 호위 기사만 알겠지. 그 작자가 마련한 공간이니까. 아니, 이제는 전 호위 기사라고 불러야 하려나?”
뭐가 그리 웃긴지 사내들이 낄낄거렸다. 명백한 빈정거림이었지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신혼집 입성이 멀지 않았다는 게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카인이 나를 위해 준비한, 우리 둘만의 방. 그 방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침대가 작으면 서로 꼭 붙어 잘 수 있어 좋고, 큼지막하면 편하게 다양한 플레이를 즐길 수 있어 좋다. 방이 좁으면 감금당했다는 상황이 극대화되고, 넓으면 침대 외의 온갖 곳에서 색다른 섹스가 가능하다.
아, 하나 욕심을 내보자면, 성인용품은 많았으면 한다. 딜도랑 로터는 물론이고, 밧줄과 패들도 구비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벽장을 빼곡하게 채운 성기구를 상상하고 있을 때, 간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이, 황제 양반. 아, 이제는 폐제라고 불러야 하나?”
“…….”
한창 즐거운 상상 중이었는데 왜 방해해. 나는 두 눈을 치켜뜨고 간수를 노려보았다.
“생일날 황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는데, 기분이 어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당연히 좋지. 반지 선물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는데, 폐위까지 시켜주다니 행복해서 날아갈 지경이다.
물론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텅 빈 약지가 눈에 밟혔다.
카인이 선물해준 반지, 연기상 어쩔 수 없이 던지기는 했는데 좀 아깝기는 하다. 그거 우리 결혼반지 비슷한 거였잖아. 그래서 약지에다가 끼워준 거고. 반지 볼 때마다 카인 눈동자가 떠올라서 흐뭇했는데….
나중에 보석만 따로 떼어내서 유두 피어싱으로 만들어주면 안 되나?
…아무리 그래도 카인이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니겠지. 아쉽다.
“하, 대답도 안 하네. 하찮은 평민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이거야? 지가 아직도 황제인 줄 아는 건가? 건방지기는.”
간수가 언성을 높였다. 이럴 때는 무시가 상책이었다. 나는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말할 힘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손끝과 발끝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내가 적의를 표출해야 할 대상은 오로지 카인뿐이었다. 이미 폐제가 된 지금, 다른 이들과 굳이 실랑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덜컥.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우악스러운 손이 내 어깨를 잡아채더니, 강제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딱딱한 바닥에 무릎 꿇려졌다. 여섯 명의 사내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욕망이 그득한 시선이 목덜미를 훑었다. 징그러운 눈빛이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어디, 이래도 무시할 수 있는지 볼까?”
간수가 손을 뻗었다. 새하얀 제복에 달린 섬세한 금단추가, 뚜둑 소리를 내며 단번에 뜯어졌다.
◊
“치, 치워라! 이런, 더러운 물건을, 감히 누구 입에 넣으려고…!”
루시엘은 붉은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그는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사내들의 음심을 더욱 자극시킬 뿐이었다.
“닥치고 어서 빨기나 하십쇼.”
간수는 제 성기를 움켜잡고는, 루시엘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새하얗게 빛나는 뺨 위로 번들거리는 쿠퍼액이 묻어났다.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에, 루시엘의 낯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얼굴만은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황제는, 과연 찌푸려진 눈가마저 아름다웠다. 그 눈가가 발갛게 물드는 꼴을 꼭 보고 싶었다. 너무 아름다워, 울리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루시엘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순순히 빠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은데, 하여튼 자존심 하나만은 강한 황제였다. 간수는 루시엘을 말로 독촉하는 대신, 그의 코를 꽉 꼬집었다. 숨이 새어 나올 구멍을 완벽히 차단했다. 창백하게 시든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끝내 살포시 열렸다.
간수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성기가 단숨에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입안에 가득 고인 비린 냄새가 곧바로 코로 올라왔다. 역겨운 체취에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든 성기를 밀어내려고 혀를 움직였지만, 애무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우욱, 윽, 으윽…!”
남자는 루시엘을 제 오나홀인 양 취급했다. 두 손으로 작은 머리통을 움켜쥐고는 퍽 소리 나게 허리를 쳐올렸다. 핏줄 선 살기둥이 연약한 입천장을 긁었다.
루시엘은 남자의 허벅지를 꽉 붙잡고,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었다. 밀어붙이려는 자와 밀어내려는 자 사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말은 뻔했다. 가느다란 손으로 돌덩이 같은 허벅지를 밀어내봤자, 간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친, 이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 이건 뭐, 입이 아니라 성기잖아?”
남자가 볼썽사납게 헐떡거렸다. 입강간의 일환으로 뱉어낸 말이 아닌, 순전한 진심이었다. 살기둥을 떠받치는 말캉한 혓바닥과, 활짝 열려 선단부를 받아들이는 목구멍. 무의식적으로 성기를 조여 오는 솜씨에서, 남근을 많이 빨아본 티가 났다.
이성애자라더니 사실은 거짓말이었나? 호위 기사랑 붙어먹기라도 한 건가?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성기를 반쯤 뺐다가 다시 찔러 넣을 때마다, 투명한 쿠퍼액이 입술과 살기둥 사이로 길게 이어졌다. 눈물과 타액, 선액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예뻤다. 그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쌀 것 같았다.
간수는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작은 입 안 가득, 끈적끈적한 백탁액이 터져 나왔다. 루시엘은 콜록거리며 정액을 뱉어내었다. 코 점막에 들러붙은 비릿한 냄새는, 정액을 토한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감히 황제를 능멸하다니, 네놈이 이러고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루시엘이 씨근거렸다. 생리적인 눈물로 젖어든 눈동자가 간수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간수가 제 윗입술을 핥았다. 그는 루시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는, 주변의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쾌감에 취해 앙앙거리는 폐제를 보고 싶었다. 열락으로 흐무러진 눈동자를 보며, 이딴 게 잘도 황제 노릇을 했다며 비웃고 싶었다.
“그럼 아랫입 상태도 한 번 볼까나.”
“시, 싫다. 하지 마라!”
그들은 일제히 루시엘에게로 달려들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의복마저 남김없이 벗겼다. 양손을 위로 올리고 다리를 벌리게 한 후, 그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간수가 루시엘의 둔부를 잡아 벌렸다. 만지지도 않은 아랫구멍이 벌름거리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고 빙글빙글 돌려주자, 빽빽했던 안쪽이 금세 부드럽게 젖어 들었다. 입구는 좁았으나 내벽은 기꺼이 이물질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저 지랄맞은 황제는 놀랍게도, 뒤를 사용한 경험이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면서 내숭 부리기는…. 누구한테 대준 겁니까? 역시 그 호위 기사려나.”
탄식 어린 감탄을 터뜨리며, 간수는 루시엘의 엉덩이를 아프게 내리쳤다. 고통과 수치심이 뒤엉킨 얼굴이 볼 만했다.
“네놈들, 대체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
루시엘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가 뒤의 경험이 있을 리가… 하윽-!”
점막을 더듬던 손가락이 금세 전립선을 찾아내었다. 검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전립선을 후벼 파자, 잠잠했던 성기가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손가락 두 개만으로 세운다니. 타고난 몸뚱이에, 꾸준한 조교까지 더해진 게 분명했다.
“뭐, 뭐야… 어째서…?”
루시엘은 덜렁거리는 제 샅을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촉수에게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뒤를 쓴 기억이 없는데, 아랫구멍은 익숙하게 손가락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육체와 기억의 괴리감에 머리가 아득했다.
흐물흐물 풀린 애널 안으로, 손가락 세 개가 푹 꽂혔다. 긴장으로 오므라든 내벽을, 툭 불거진 손마디가 비틀어 열었다. 간수의 손은 남들보다 크고 두툼했다. 세 손가락을 한데 모으니 굵기가 상당했다. 손이 아닌 좆을 삽입 당하는 것 같았다.
“흐으… 아, 이상해… 이거… 하으응-!”
루시엘이 고개를 뒤흔들었다. 구멍의 주름이 팽팽히 펴지는 감각에, 그는 희미한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 소리에 담긴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쾌락이었다. 제 것 같지 않은 높고 얇은 음성에, 그는 깜짝 놀라 얼굴을 굳혔다.
“그렇지만 왜…? 어째서?”
루시엘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정오부터 저녁이 된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생일에 일어난 반란, 저를 배신한 기사,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까지…. 억지로 몸이 열리고 있는데, 구멍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벌어지는데,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공중에 들려 발발 떨리던 몸이, 맨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차디찬 쇠 바닥에 뒤통수가 짓눌렸다. 여섯 명의 그림자가, 가냘픈 몸뚱이를 덮었다.
“당장 그만둬라! 무례한 놈들. 이 몸은 황제… 흐읏!”
발딱 선 젖꼭지가 거세게 꼬집혔다. 두 손으로 유두를 비틀어 위로 잡아당기자, 상체가 따라 들렸다. 여린 살덩이가 꼬집혔으니 아파야 맞을 텐데, 기묘하게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아랫도리에 더 열이 몰렸다.
“저런 게 황제라니, 농담도 정도껏이지.”
“이제 와서 순진한 척이라도 하는 건가? 몸은 닳고 닳은 티가 나는데?”
열 개가 훌쩍 넘는 손들이 루시엘에게 달라붙었다. 험상궂은 손길로 이곳저곳을 희롱했다. 가슴팍을 더듬고 허벅지를 주물렀다.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는, 이미 세 손가락이 삽입되어 있는 구멍에 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안쪽에서 얽혔다. 후미진 내부를 휘저으며 구멍을 넓혔다. 꼭 주먹을 삽입 당하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꺽꺽대었다.
“네 이놈… 천한 것, 들이, 어디서… 아, 아악!”
말이 뚝뚝 끊겼다. 짤막한 문장도 끝맺기 힘들었다. 잔뜩 꼬집힌 유두가 얼얼했고, 장기가 짓눌리는 압박감에 구역질이 났다. 이건 성교도, 전희도 아니었다.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악독한 고문이었다.
귓바퀴를 핥다가 귓불을 깨물고, 귀 안쪽으로 파르스름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젖꼭지를 잘근잘근 짓씹고, 목뒤나 허벅지 안쪽 같은 무른 살결을 깨물어댄다. 여러 명의 손이 짓궂게 구멍을 잡아당기고, 내벽을 후벼 파듯 들쑤신다. 그런 상황에서도 루시엘의 중심부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쿠퍼액을 질금질금 흘리기까지 했다.
“으윽… 싼다…!”
루시엘의 얼굴을 반찬 삼아 자위를 하던 병사가, 그의 위로 진득하게 사정했다. 입을 벌린 채 허덕이던 예쁜 얼굴 위로, 비릿한 정액이 튀었다.
오랫동안 빼질 않았는지, 남자의 정액은 양이 많았고 진했다. 백금처럼 고귀한 머리칼 위로, 정액이 자욱하게 묻어났다. 그 찬란한 은발이 한낱 아랫것들의 정액으로 더럽혀진다니. 정복욕에 불을 지르고도 남았다.
“아예 온몸을 정액 범벅으로 만들어버릴까?”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루시엘의 몸 곳곳에 제 좆을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매끄럽게 빛나는 뺨,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운 손바닥, 심지어는 유두와 허벅지 사이까지.
“흐으… 아, 아긋, 하으읏…!”
단단한 귀두가 융기한 젖꼭지를 쿡쿡 건드릴 때마다, 루시엘의 입에서 열기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열이 올라 복숭앗빛으로 물든 살갗 위로, 질척한 선액과 끈적끈적한 정액이 퍼부어졌다.
가슴팍 위로 흩뿌려진 백탁액을 유두에 펴 발랐다. 선홍색 돌기 끝에 희노란 정액 방울이 맺혔다. 꼭 젖이라도 나오는 것 같았다. 사내는 입술을 둥글게 모아, 루시엘의 가슴을 쭙쭙 빨았다.
“싫어, 빨지 마아… 가슴으로 느끼는 거, 시러엇… 아흑! 흐읍!”
신음을 참으려고 힘껏 입술을 깨물어 봐도, 교성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리에도 색깔이 있다면, 루시엘이 뱉어내는 날숨과 신음은 달콤한 분홍색을 띠고 있을 것 같았다. 열기로 달아오른 두 뺨이나, 선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입술처럼 고운 분홍빛. 그 신음을 더 듣고 싶어서, 병사들은 더욱 격렬하게 폐제를 희롱해대었다.
“이건, 이건 아냐… 말도 안, 돼앳… 아응! 힉, 히익!”
감옥의 공기는 서늘한데, 몸은 식기는커녕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절정은 순간이었다. 선단이 부르르 떨리더니 곧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오르가슴의 여파로 내벽이 수축하며, 삽입된 손가락을 꽉 조였다. 때마침 손가락이 전립선을 만지작거리는 통에, 루시엘은 곧바로 또 절정을 맞았다. 마른 등이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침과 정액이 뒤섞여 턱을 타고 질질 흘렀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가기 시러, 이런 걸로 가고 싶지 않, 아앗…!”
그때 루시엘을 짓누른 감정은, 공포였다. 미지의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이 그의 숨통을 억죄었다. 난생처음, 그것도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동성과의 성교. 심지어 자신이 박히는 포지션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의 반응이었다. 느끼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비틀면서, 이런 무뢰배들의 손에 한없이 가버리고 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서, 오랫동안 개발되어 왔던 것처럼.
“이럴 리가 없, 하으, 응! 몸이, 흐윽, 이상…”
네 손가락을 잡아 문 구멍이 빠끔거렸다. 손가락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실실거리며 비웃기만 할 뿐, 쉽게 좆을 넣어주지 않았다. 실상 그들도 한계였으나, 더 좋은 광경을 보기 위해 잠시 인내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폐제가 오롯이 이성을 잃어버리기를, 그래서 허리를 살랑거리며 자지를 조르기를. 루시엘이 먼저 애원하기 전까지는, 삽입을 참을 작정이었다.
한 사내가 루시엘의 두 다리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허벅지를 붙이고는, 그 사이의 공간으로 제 좆을 들이밀었다. 단단한 살기둥이 허벅지 안쪽을 쓸고 지나갔다. 젖은 살과 살이 마찰했다. 선액이 허벅지 위로 질퍽한 길을 남겼다. 허리 짓이 점점 거칠어졌다. 뽀얗던 살갗에 발간 열이 올랐다.
“크윽-”
남자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사정했다. 허벅지에 고였던 정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질금질금 흘렀다. 손으로 정액을 떠내어 구멍 가장자리에 발랐다. 분홍색 애널에 정액이 치덕치덕 묻었다. 여러 명에게 돌려 먹히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실제로도 곧 돌려 먹히게 될 거였다.
“자자, 폐하. 솔직해지자고요. 원하는 게 뭡니까?”
정액이 묻은 손가락이, 도톰한 구멍을 툭툭 건드렸다. 오래 이물질을 물고 있었던 구멍이 너절하게 벌어졌다. 아쉽다는 듯 벌름거리며, 손끝이라도 기어이 잡아 물려고 했다.
“네놈들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
루시엘이 이를 아득 갈았다.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워보겠다고, 두 눈에 힘을 주는 꼴이 우스웠다. 온몸이 정액 범벅이 된 상태에서, 사과받기를 바라고 있다니. 간수는 배를 움켜잡고 폭소했다.
“하, 이거 쉽지 않네. 약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나. 누구, 좋은 약 가진 사람?”
갓 성인이 된 듯한 앳된 병사가 삐죽삐죽 손을 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아이보리색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타원형의 알약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에반이 썼던 미약과 같은 종류였다. 에반은 미약을 물에 희석해서 썼다면, 이것은 갓 정제된 고체 상태였다.
간수는 냉큼 약을 집어, 제 혓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루시엘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는 그와 입술을 겹쳤다. 늦가을의 과실처럼 붉게 익은 입술을 깨물다가 혀를 밀어 넣었다. 알약이 혀에 문질러졌다. 고여 넘어오는 타액이 다디달았다.
“으읍, 으…”
루시엘은 도리질을 치며 간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난잡한 키스가 이어졌다. 혀가 입안 구석구석을 더듬으며 약을 묻혔다. 볼 점막과 입천장, 혓바닥과 혀뿌리, 어금니 안쪽까지, 반쯤 뭉개진 알약이 달라붙었다.
간수는 혀를 깊숙이 밀어 넣으며, 루시엘이 알약을 완전히 삼키도록 유도했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약은 타액과 함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아, 우욱, 우웨엑-!”
루시엘은 목을 움켜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는 제 입에 손까지 밀어 넣어가며 약을 다시 뱉어내려고 했다. 허나 시큼한 타액만 흘러나올 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약 기운이 신경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눈의 빛이 완전히 꺼지고, 찌푸려진 미간이 반듯하게 펴졌다. 원체 예민한 육체에 희석되지 않은 약까지 먹었으니, 정신이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간수는 양손으로 폐제의 허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성기를 곧장 처넣는 대신, 살기둥을 엉덩이골에 느릿느릿 문질렀다. 쿠퍼액이 둔부를 적셨다. 구멍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삽입을 갈구했다.
“자아, 마지막 기회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고귀하신 황제 폐하?”
극존칭을 썼으나 존경의 의미는 아니었다. 오므라든 입구를 귀두가 툭툭 건드렸다.
루시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정욕이 불길처럼 번졌다. 머릿속에 뇌수가 아닌, 정액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를… 주세요….”
루시엘이 활짝 다리를 열었다. 스스로 구멍을 잡아 벌렸다. 정액과 애액으로 질퍽해진 입구가, 흐느끼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욕망에 찬 시선이 성기처럼 강하게 꽂혔다. 울먹이는 신음을 토해내며, 그가 말했다.
“자지, 주세요… 여기에다가, 넣어 주세, 요….”
애교라도 부리는 듯 허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더러운 물건이라면서? 입에 넣기도 싫다더니, 그새 생각이 바뀌었나?”
“아니야, 안 더러워. 좋아해, 좋아하니까아…. 빨리 주세요. 흐읏, 응… 아무나 좋으니까, 어서어…”
루시엘이 달차근하게 신음했다. 간수는 히죽거리며 선단부를 구멍에 조준했다. 그대로 허리를 밀어붙이려는 찰나,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냉혹한 음성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허공을 가르는 칼날이 먼저였을까. 간수의 어깻죽지가 깊게 베였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에 젖은 육신이 애처롭게 꿈틀거렸다.
“루시엘, 괜찮아요?”
단단한 팔이 루시엘을 안아 들었다. 입고 있던 검은 블레이저를 벗어, 루시엘의 알몸을 덮어주었다. 옷에서는 익숙한 살내음이 났다. 그리운 향취였다. 맡고 있으면 묘하게 안심되는 체향이기도 했다.
루시엘은 두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팔 안에서, 넓은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구하러 올 줄 알았어.”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를 글썽이며, 루시엘이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카인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정작 카인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과거의’ 카인이었다. 황제를 배신하기 전, 호위 기사였던 시절의 카인. 약 때문에 몽롱해진 머리는, 본인이 편할 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다.
“카인, 나아… 몸이 또 이상해져서… 아랫배가 쿡쿡, 하고…”
루시엘이 훌쩍거리며 제 하복부를 문질렀다.
“도와줘. 카인. 너는 내 기사잖아.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루시엘의 무의식은 자꾸만 진실을 회피하려고 했다. 약 기운을 빌려서라도, 이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이작에게서 해독제를 받아올게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줘요. 루시엘.”
카인이 가만가만 루시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미약과 최면을 쓰는 섹스는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다. 카인은 ‘진짜’ 루시엘을 안을 생각이었다. 약이나 최면의 영향에서 벗어나, 제 의지대로 행동하는 루시엘을 품고 싶었다. 육체만이 아닌 영혼까지도, 모조리 소유하고 싶었다.
이것이 카인의 사랑이었다. 어쩌면 사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유해한 무언가였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작은 방이 있어요. 우리, 거기로 가요.”
◊
꿈을 꿨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환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약과 해독제가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몸. 루시엘의 아픈 몸은 새벽 내내 헛것을 보았다.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세계,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인다.
그 절벽 끝에, 웬 사내가 서 있다.
칠흑빛 머리칼이 흔들린다. 검은 제복에 달린 붉은 망토가 바람결에 나부낀다. 금방이라도 투신할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그자는… 다름 아닌 카인, 루시엘의 호위 기사였다.
“카인, 뭐 하는 거야? 위험해! 그러다가 떨어지겠어!”
있는 힘껏 외쳤지만 카인은 듣지 않았다. 그는 시체처럼 해쓱한 낯빛으로, 묵묵히 루시엘을 주시했다. 참혹한 절망으로 물든 얼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넘어, 눈물 그 자체가 되어 흘러내릴 듯한 눈동자. 그런 표정의 카인은 처음 보았다.
“카인!”
루시엘은 카인을 향해 달려갔다. 이러다가는 그가 바다에 몸을 던질 것 같았다.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달리는 데에 익숙지 않은 몸이었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숨이 찼다. 발이 꼬였다. 균형을 잃은 몸이 크게 비틀거리더니 끝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흙먼지가 자욱이 날렸다. 자갈이 쓸린 손바닥과 무릎이 쓰라렸다. 루시엘은 입술을 지르물었다. 양손으로 땅을 짚고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다시 절벽을 보면,
카인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자칫하다간 곧장 추락할 위치였다.
카인의 입술이 느리게 달싹였다. 창백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다가오지 마요, 루시엘.”
“무슨 말이야?”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네가 날 다치게 할 리 없잖아.”
“당신한테 미움받기 싫어요.”
“아니야. 내가 왜 너를 미워하겠어.”
루시엘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카인을 붙들기 위해서, 카인의 추락을 막기 위해서. 신발이 벗겨져 땅바닥을 나뒹굴었지만, 주울 여유가 없었다.
뾰족한 돌들이 발바닥을 긁었다. 흙 알갱이들이 발뒤꿈치에 박혔다. 허나 이런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카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는 맨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도 있었다.
“카인!”
마침내, 루시엘이 카인의 손목을 잡아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카인의 금안이 번뜩인다. 제 눈동자 안에 루시엘을 가두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시선이 오롯이 루시엘에게로 고정되었다.
“…이젠 미움받아도 상관없어.”
카인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루시엘의 오른 발목을 감쌌다. 차갑고 단단한 쇠사슬이, 가녀린 발목을 꽉 물고서 놓지를 않았다.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촉감.
“헉!”
루시엘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고, 입에는 해독제의 쓴맛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황급히 이불을 젖혔다. 바지와 속옷은 입고 있지 않았고, 긴 윗옷인지 원피스인지 모를 옷 한 벌만 걸친 채였다. 침대 위를 방황하던 시선이 오른 발목에 안착했다. 단단한 족쇄가 발목에 채워져 있었고, 족쇄와 연결된 쇠사슬은 벽에 박혀 있었다.
“일어났어요?”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엘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때 그가 무엇보다 아꼈던,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루시엘은 카인을 세게 밀었다. 그의 위로 올라타 무작정 목을 졸랐다. 원한다면 간단히 루시엘을 제압할 수 있을 텐데도, 카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누운 채로, 루시엘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죽어… 죽어! 너 같은 거 정말 싫어, 그러니까 제발 죽어버려….”
두 손으로 힘껏 카인의 목을 잡아 누르며, 루시엘이 가늘게 헐떡였다. 목을 조르고 있는 이는 자신인데, 이상하게 제 숨통이 막힌 것 같았다.
“날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미움받기 싫다고도 그랬잖아. 그런데 왜…”
고여 있던 눈물이 끝내 넘쳐흘렀다. 카인의 뺨 위로 루시엘의 눈물이 떨어졌다. 언뜻 보면 카인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너도 싫고…”
새벽처럼 창백한 낯빛을 하고서, 루시엘이 날연히 중얼거렸다.
“병사들에게 범…해질 뻔했을 때, 그 상황에서 널 보고 안심한 나도 싫어.”
손에 힘이 풀렸다. 목울대를 짓누르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상체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카인은 몸을 일으켜, 루시엘을 제 품으로 받아 안았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루시엘.”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 따스한 손길에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안심했고, 그런 것에 안심한 제 자신이 또 혐오스러워졌다.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시야가 온통 흐릿하게 아롱졌다.
“당신이 나를, 그리고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보다,”
옷자락이 위로 올라갔다. 윗옷 한 장 말고는 무엇도 입지 않은 탓에, 치부가 곧바로 드러났다.
“내가 훨씬 더 당신을 좋아하니까.”
둔부가 틀어 잡혔다. 저항할 틈도 없이, 흉기 같은 샅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불과 두어 시간 전쯤에 병사들의 손가락으로 헤집어진 장소였지만, 좆을 받아 삼키기에는 한참 빽빽했다.
애널이 성기의 형태대로 벌어졌다. 주름 하나 없이 펴진 구멍이 쓰라렸다.
“커흑! 윽, 아, 아파… 괴로워, 흐아, 악!”
루시엘이 비명을 내질렀다. 헉헉거리며 헛숨을 들이쉴 때마다 아랫배가 꽉 조여왔다. 안에 삽입된 이물질의 형태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픔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저를 범하고 있는 이가 ‘카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범해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온 존재에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꼈던 상대에게. 옷 같지도 않은 얄팍한 천 하나만 걸치고,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진 채로 강간당하고 있다. 그 선연한 사실이, 루시엘의 마음을 처참히 짓밟았다.
죽이고 싶었고, 죽고 싶었다. 저가 카인을 죽일 수 없는 건 당연지사였으니, 카인이 저를 죽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시엘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간신히 움직였다. 허리를 쥐고 있는 카인의 손을 끌어, 제 목을 잡게 했다.
“죽여….”
폐제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뭐해? 죽이라고! 이런 굴욕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 말을 듣자마자, 카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의 볼에는 눈물자국이 별의 꼬리처럼 남아 있었다. 아까 전 루시엘이 흘렸던 그 눈물이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그러니까 어서 날 죽여. 괜한 짓 하지 말고 빨리… 크흣-”
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 아래로, 경동맥이 아가미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허억, 윽…! 마른 바닥 위의 물고기처럼, 루시엘의 몸뚱이가 퍼뜩 튀었다. 산소를 찾아 본능적으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시큼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헉, 으윽… 큭…!”
조각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입술을 뻐끔거려도 산소를 들이마실 수는 없었다. 호흡이 차단된 탓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파리하게 질린 뇌 내가 흐물흐물 녹아가는 것 같았다.
“읏, 크흐… 허억!”
그때였다. 카인이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내벽이 요동치며 성기를 꽉 잡아 물었다. 순간, 머리로는 낯선, 그러나 몸으로는 익숙한 쾌감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중심부로 피가 몰렸다. 성기가 심지를 갖고 단단히 섰다. 기도가 눌리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새된 교성을 내질렀을 터였다.
발기했다. 목이 졸리고, 뒷구멍이 쑤셔지면서 느껴버렸다. 산소가 딸려 멍한 머리였지만, 그럼에도 수치심은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하지만 대체 왜?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좁아든 목구멍 사이로, 색색대는 여린 숨소리만이 가까스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 소리마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붉은 안구가 눈꺼풀 뒤로 넘어가고, 흰자가 눈을 독식했다. 죽기를 결심했지만,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카인이 손에 힘을 풀었다. 삽시간에 기도가 트였다. 카인이 허락한 숨을, 루시엘은 다급하게 들이마셨다. 산소를 들이켜는 그때에 맞춰, 성기가 거세게 안쪽을 치받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삐져나왔다. 혀를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루시엘은 헐떡거리며 흉곽을 부풀렸다.
“흐엑, 헉, 하윽, 아앙! 악!”
평소였다면 신음을 참는답시고 입술을 꾹 닫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저 숨을 쉬고 싶었다. 어떻게든 호흡을 이어가고 싶었다.
“루시엘.”
퍽, 퍽, 찔꺽찔꺽, 젖은 마찰음이 고막을 울렸다. 그 사이로 카인의 음성이 들렸다.
“죽는다는 얘기, 함부로 하지 말아요.”
꿈결처럼 멀게만 들리는 목소리.
“당신은 내 거예요. 몸도 마음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전부 내 소유야.”
“흐읏, 아, 아니야, 싫… 하읏, 윽!”
아니라고 명확하게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루시엘은 오직 농익은 신음만을 뱉어낼 수 있었다.
벌어질 대로 벌어진 내벽이 차지게 살기둥을 조였다. 무게 때문에 성기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귀두가 점막을 퍽, 퍽, 거칠게 치받을 때마다, 안쪽에 묵직한 압력이 쏠렸다. 루시엘은 절정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아, 안 돼, 가기 싫어, 흐윽, 아, 아아…!”
“가요. 루시엘.”
시야가 하얗게 질렸다. 루시엘은 고개를 젖히고서 가늘고 긴 교성을 내질렀다. 뒤로 맞는 절정은 강렬하고 파괴적이었다.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황제의 고결한 육신이 산산이 분해되어, 단지 좆을 받아내기 위한 생식기로 재구성되는 것 같았다.
발기한 샅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루시엘이 먼저 절정을 맞고, 그 후 카인도 루시엘의 안에 정액을 퍼부었다. 샅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내벽을, 뜨거운 백탁액이 빈틈없이 채웠다. 성기가 속살을 끌며 밖으로 느긋하게 빠져나갔다. 게게 풀려있는 구멍 틈으로, 정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루시엘은 카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원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단지 몸을 추스를 힘이 없었다. 그치지 않는 눈물이 어깻죽지를 적셨다.
“앞으로도 많이, 기분 좋게 만들어줄게요.”
카인이 선언하듯 읊조렸다.
“죽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하도록.”
카인은 두 팔을 벌려 루시엘을 끌어안았다. 쿵, 쿵,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품에 안긴 루시엘은, 여리고 보드랍고 따스했다. 그만이 품을 수 있는, 온전한 그의 것.
“사랑해요, 나의 루시엘.”
카인이 속살거렸다. 예상했던 것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흐느끼는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렸다.
◊
카인은 공작의 부름을 받고 방을 나갔다. 카인은 나보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냉큼 침대 밖으로 나왔다. 쇠사슬은 충분히 길었고, 나는 무리 없이 방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카인은 ‘작은 방’이라고 말했지만, 방은 상당히 넓었다. 내가 원래 머물던 침실보다 두 배는 컸다. 섹스하기 좋은 침대도 있고, 섹스하기 좋은 소파도 있고, 섹스하기 좋은 튼튼한 테이블도 있었다. 창문은 없었지만 공기는 산뜻했다. 공기 청정 마법진을 설치해둔 것 같았다.
한쪽 벽에는 거대한 벽장이 놓여 있었다. 감금 장소에 쓸데없이 커다란 벽장이라. 이러면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끙끙거리며 벽장의 미닫이문을 열었고, 거기에는…
‘아… 최고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기구가 들어있었다.
그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것은 나무 목마였는데, 안장 부분에 그로테스크한 딜도가 붙어 있었다. 말 자지를 본떠서 만들기라도 했는지, 크기와 생김새가 장난 아니었다.
아마 여덟 번째 생이었을 거다. 그때 나는 이렇게 딜도가 붙어있는 목마를 꼭 쓰고 싶었다. 그래서 카인 몰래 그걸 구입해서, 우리 침실에다가 살포시 가져다 두었다. 나름의 깜짝 선물이었다.
다음날 보니까 목마는 산산이 부서져 있고, 카인은 그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타닥타닥, 벽난로 불소리가 이렇게 서글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가 우리 집에 흉물을 갖다 놓았더라고요. 그렇게 끔찍한 물건은 처음 봤어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차마 내가 한 짓이라고 고백할 수 없어서,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내 딜도 목마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나와 비교하면 카인이 너무 순수했던 탓이었다.
‘그랬던 카인이, 이번 생에서는 직접 목마를 사서 구비해놓다니.’
나는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대놓고 히죽대기에는 천장에 감시 목적의 영상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질색하는 연기를 하며 목마를 째려본 후, 목마를 발로 걷어찼다. 아니, 걷어차려고 했다. 때마침 들어온 카인이 나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는 바람에, 장대히 실패했지만 말이다.
“얌전히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요.”
화라도 난 걸까.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아, 섹시하다.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카인은 그걸 공포심이라고 오해한 것 같았지만…
◊
안장에 달린 딜도에다가 윤활제를 질척하게 묻혔다. 카인은 루시엘을 가볍게 안아 들고는, 구멍이 딜도 끄트머리에 닿게 만들었다.
발갛게 부푼 애널이 살아있는 생물인 양 뻐끔거렸다. 구멍이 딜도의 첨단부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이물질을 기꺼이 맞이하려는 구멍과는 반대로, 루시엘의 몸은 두려움으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무릎을 잡아 받쳤다. 허리를 밑으로 내리누르자, 딜도가 서서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잔뜩 범해져 민감해진 내벽이, 거대한 이물질에 의해 억지로 벌려지고 있었다.
루시엘은 안간힘을 다해 카인에게 매달렸다. 제 앞의 카인이 마지막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하지 마아, 무, 무서워, 그러니까 제발… 히익-!”
안장에 둔부가 완전히 맞닿았다. 절반쯤 남아 있던 성기구가 안을 꿰뚫듯 삽입되었다. 젤로 흥건히 젖은 기둥이, 내벽을 우악스럽게 열어젖히며 깊숙이 푹 박혔다.
“하, 아악, 우, 우윽, 힉, 아…”
발기한 성기 끝에서 희멀건 정액이 튀어나왔다. 루시엘은 삽입 당한 것만으로 손쉽게 절정을 맞았다. 그는 혀를 내밀고 힉힉거렸다. 복숭앗빛 혀끝이 잘게 경련했다. 주름이 한껏 펼쳐진 구멍이 욱신거렸지만, 젤이 안쪽을 적셔준 덕분에 상처는 없었다.
“루시엘, 말 타는 법 알아요?”
“모, 몰라, 그런 거…”
황제라면 승마 정도야 당연히 익혀야 했겠지만, 루시엘은 원체 운동을 싫어했다. 게다가 균형감각도 없었다. 그는 말을 타고 달리기는커녕, 고삐도 잘 잡지 못했다.
“잘됐네요. 오늘 배우면 되겠네.”
“무슨 헛소, 리를… 흐읏?”
목마에 붙어 있던 청회색 부적을 떼어내자, 말이 끼익거리며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마의 흔들림에 따라, 삽입된 기구도 함께 요동치며 쿵, 쿵, 안쪽을 치받았다.
목마가 들썩거릴 때마다, 허리가 허공으로 들렸다가 다시 밑으로 푹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젤과 땀으로 젖은 둔부가 안장에 부딪히며 찔꺽, 찔꺽하는 소리를 연출해냈다.
“하으, 배, 배가… 하응, 윽…”
배 안이 이물질로 꽉 찼다. 울퉁불퉁한 돌기가 달린 딜도가, 화끈거리는 점막을 헤집어댔다. 목마가 조금만 더 거칠게 움직인다면, 자칫하다가는 결장 안쪽까지 꿰뚫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어서 둔부를 들어 올렸지만, 균형을 잡지 못해 다시 시트 위로 털썩 주저앉는 신세가 되었다. 그 모습이 실제로 말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내벽의 주름이 기둥을 조붓하게 감쌌다. 귀두를 흉내 낸 끝부분이 결장 입구를 쿡쿡 찔러대었다. 이물질을 받아들이기 좋도록, 뱃속에 길이 난 것만 같았다. 루시엘은 원한 적 없는 절정의 나락에서 몸부림쳤다.
“시, 시러어… 왜 자꾸, 느끼는 거야, 하응! 읏! 이런 거, 이상한데…”
루시엘은 말목을 간신히 부둥켜안고서 바르작대며 울었다. 붉게 물든 뺨 위, 반짝이는 물방울이 과실처럼 탐스러웠다.
또다. 또 흥분하고 있다. 병사들에게 윤간당할 뻔했을 때도 느꼈고, 카인한테 강제로 범해지면서도 느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철저하게 조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제 몸을 멋대로 개발했다면, 그런 짓을 할 만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황제와 함께 보내는 자, 황제와 같은 침소를 쓰는 것을 허락받은 자. 카인, 카인밖에 없었다.
“너, 내 몸에 무슨 짓을, 흐읏, 하으…”
숨이 벅차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언어가 나와야 할 자리를, 조각난 신음들이 대신 채웠다. 여린 몸은 목마가 움직이는 대로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타액과 함께 신음이 넘쳐흘렀다.
딜도가 밖으로 빠져나올 때는 내벽이 함께 딸려 나왔고, 전립선을 뭉근히 문지를 때면 시야가 온통 희게 질렸다. 딜도가 배꼽 바로 밑을 쾅쾅 들쑤실 때마다, 마른 복부 아래로 울룩불룩한 기둥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카인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품 안에서 작은 추를 꺼내었다. 낡은 동전에 실이 달린 간단한 구조였다. 언뜻 보기에는 싸구려 장난감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 추는 최면의 힘을 지닌 ‘레라지에의 펜듈럼’이었다.
무슨 짓을 했냐고. 말하자면 길었다.
최면의 힘을 빌려 그를 안았다. 사내에 익숙지 않은 몸을, 강제로 파헤치고 비집어 열었다. 스스로 뒷구멍을 풀게 하고, 요분질 하듯 허리를 들썩이며 자지를 조르게 만들었다. 진수성찬에 익숙한 고운 혀를 움직여, 좆을 빨고 정액을 받아 삼키라고 명령했다. 몇 달에 걸친 꾸준한 조교 끝에, 루시엘은 앞의 자극만으로는 가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
긴 이야기였다. 설명한다고 해서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최면을 완벽히 해제하는 게 답이었다.
“알려드릴게요.”
카인은 최면 추를 쥔 손에 힘을 쥐었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동전이 구겨졌다.
펜듈럼이 파괴되자마자, 그간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루시엘에게로 몰려왔다. 성난 바닷물처럼 밀려들어 머릿속을 휘저었다. 최면의 기억을 받아들이며, 루시엘은 한 번 더 사정했다. 파도의 거품처럼 흰 정액이 허벅지를 더럽혔다.
흔들리는 동전과, 흔들리는 기억들.
자위는 원래 뒤를 써서 하는 거라고 했다. 비즈며 딜도 등등을 직접 넣어보라고도 했다. 최면에 걸린 황제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만지고, 구음을 하고, 안에 로터를 품고서 업무를 보았다. 가슴만 만져도 갈 수 있게끔, 볼록 솟아오른 유두에 약을 바르고 집게를 꽂은 적도 있었다.
황제를 제 입맛대로 조교하는 기사라니. 기사의 위에서 요분질을 하는 황제라니. 명백한 하극상이었지만, 황제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기사가 제 육신을 흩트려놓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 아아… 아악!”
루시엘은 머리를 움켜쥐고서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발작적으로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 반동으로 목마가 크게 삐끄덕거렸다. 딜도가 안쪽 깊숙이 수직으로 꽂혔다. 머릿속을 뭉개는 음란한 기억들과, 내벽을 사정없이 짓이기는 모조 성기.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망가지고 있었다.
기억 속 카인은 낯설었다. 그는 무해하게 웃지도, 루시엘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지도 않았다. 대신 거칠게 루시엘을 안고, 끝까지 허리를 밀어붙였다. 싫다고 도리질하는 루시엘의 턱을 붙잡아, 집요하게 입술을 물고 빨았다.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루시엘의 몸 구석구석 제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사랑, 이라니….”
루시엘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머리를 헝클던 손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루시엘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카인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낯선 표정이었다. 앳되고 순진했던 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금빛 눈동자 안, 날것의 열기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루시엘과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서 미안해요.”
여느 때처럼 고저 없는 음성이었다. 허나 끝부분이 아주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카인은 다시금 루시엘을 안아 들었다. 구멍과 기구 사이에 투명하고 끈적끈적한 실이 이어졌다. 애액이 광원을 받아 희게 반짝였다. 활짝 열려 벌름거리는 구멍 틈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공기가 덥게 달궈진 내벽에 달라붙었다. 그 선연한 감각에, 루시엘은 훌쩍거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렇지만…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
루시엘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카인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루시엘은 고개를 떨구고서 서럽게 울었다. 낙하하는 눈물에서는 단맛이 났다.
◊
둘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같은 침대를 쓴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루시엘은 사슬을 풀어보겠다고 바동거렸으나 카인에 의해 금방 제지당했다. 루시엘은 한참을 씩씩대다가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카인은 몸을 돌려 자고 있는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꿈에 잠긴 얼굴은 평안했다. 불그스름한 눈매를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그 흰 낯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자니, 충족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끝맛이 약간 씁쓸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만족스러웠다. 루시엘이 결혼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최면으로 쌓은 몸정이 효과가 있었는지, 루시엘의 저항도 예상했던 것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카인은 루시엘의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려, 제 팔을 베게 만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팔뚝에 닿았다. 고른 숨결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카인도 곧 잠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에는 루시엘이 나왔다. 카인은 그게 꿈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는데, 루시엘이 자신을 향해 웃어줬기 때문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도 그의 미소는 선명하게 보였다.
루시엘은 카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개었다. 입술을 떼어내고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재잘거렸다.
“나도 그래, 카인.”
루시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하게 들렸다. 카인은 눈을 뜨려고 했지만, 피로가 눈두덩을 짓이기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나도… 너처럼,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 루시엘의 음성이 띄엄띄엄 귓가를 스쳤다. 의식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모든 문장들이 나른히 녹아내렸다.
“…사랑해서 미안해.”
루시엘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꿈은 완전히 끊겼다. 지각도 환상도 없는 온연한 어둠이 카인을 덮었다.
◊
푸른 새벽이었다. 새벽이 아니라 아침일 수도, 어쩌면 정오일 수도 있었다. 지하에는 작은 창문 하나 없어서, 시간을 추측하는 게 불가능했다.
나는 찌뿌둥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내 옆에서는 카인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카인이 아직 방에 있는 걸로 보아서, 해가 뜨지는 않은 듯했다.
사랑해서 미안해요, 라고 카인이 말했을 때, 나는 그를 그저 꼭 안아주고 싶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절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그에게 내 진심을 쏟아붓고 싶었다.
네가 날 사랑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너는 내 삶의 유일한 의미야. 너의 사랑을 받는 것은, 내게는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이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줘. 응?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가는, 즉시 신벌이 내려질 게 뻔했다. 또다시 카인을 잃는 건 싫었다.
카인이 방에 성기구를 한가득 마련해놓은 이유는, 단순히 섹스를 즐기기 위함은 아니었다. 카인의 최종 목표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 몸과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도록. 쾌락에 취해서, 죽을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못하도록.
그 사고방식이 너무 사랑스럽게 여겨져서, 나는 참지 못하고 카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카인은 잠귀가 어두우니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혹시나 깬다 해도,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나도 그래. 카인. 나도 너처럼,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 끝끝내 살아서,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거야. 내가 가진 모든 걸 내려놓을 거야. 가족도 제물도, 타인들의 인정과 황제의 지위도… 모조리 버려왔고, 앞으로도 더 버릴 수 있어.
그리고 나 역시, 너를 사랑해서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신의 저주에 말려들게 되어서, 젊은 나이에 끔찍하게 생을 마감하게 돼버려서… 미안해. 또,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그 말이 진짠가 보다. 너랑 내가 이렇게 많이 닮은 걸 보면.
내가 만약 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다면, 흐느끼며 내 사랑을 사죄한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를 꼭 안아주며, 너는 필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절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루시엘은 제 삶의 유일한 의미니까, 부디 자책하지 말라고. 내가 너에게 하고 싶어 했던 말을, 똑같이 읊을 것이다.
사랑하면 닮는 법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