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0)

7. 폭풍 전야

단테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먼저 온 이들이 이미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하르트만 공작, 힐데인 백작. 게다가 황제의 호위 기사인 카인까지. 카인을 보자마자, 단테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황제의 최측근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겁니까?”

합당한 의문이었다. 이 회의의 목적은, 루시엘을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카인이 이런 자리에 참석하다니. 기사도는 어디에다가 버렸단 말인가. 황제 쪽 첩자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카인도 우리와 함께 뜻을 모으기로 했네.”

“그렇지만 저자는 황제의…!”

“아아, 염려하지 말게. ‘진실의 눈동자’를 사용해 그의 속내를 검증했는데, 진심으로 루시엘을 폐위시키고 싶어 하더군.”

“그럴 수가….”

“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 폭군 곁에서 몇 년을 보냈나. 슬슬 질릴 만도…”

“필요 없는 얘기는 그쯤 하십시오.”

카인이 낮게 읊조렸다.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주변인들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백작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원래는 황제를 암살할 생각이었는데, 단테 대공도 카인도 그 방법은 꺼리는 것 같더군.”

공작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는 습관처럼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암살만큼 편한 방법도 없다네. 반란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지. 황제는 신이 내린 자리야. 웬만한 허물은 반란의 당위성이 될 수 없어. 인륜을 저버리는 죄를 지었다면 모를까.”

“인륜을 저버리는 죄라면?”

“여러 종류가 있겠지. 예를 들자면 친부모를 살해한달지….”

일동은 잠시 침묵했다. 존속살해라니! 그것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중죄였고, 루시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죄였다. 루시엘의 친모는 그를 낳자마자 돌아가셨고, 친부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오랜 적막을 깬 것은 카인이었다.

“그 반란의 명분이라는 것, 제가 어떻게든 찾아내 보겠습니다.”

“오오, 그래! 그대는 황제와 친분이 두터우니, 중요한 정보를 캐내기도 쉬울 테지.”

공작이 반색하며 카인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라고?”

“제가 반란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면,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좋네. 뭐든 못 해주겠는가.”

공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첫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루시엘은 침대 위에 웅크려 있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금실이 수놓아진 이불보가 꿈틀거렸다. 자고 있다고 보기에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러나 깨어 있다면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카인을 반겨주지도 않고, 계속 이불을 덮어쓰고 있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카인의 시선이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에 닿았다. 빈 유리병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엎어진 술병에서 핏빛 과일주가 졸졸 흘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루시엘?”

카인은 침대로 올라갔다. 주군의 이름을 부르며, 이불을 확 젖혔다. 알코올에 잠식당한 발간 얼굴이 보였다. 얇은 잠옷 한 겹만 걸친 상반신과, 이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반신. 이불 속으로 들어간 양손이 연신 꼼지락거렸다.

“어어, 왔구나, 카인….”

루시엘은 실타래가 풀린 듯 느슨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이불은 그리 두껍지 않았고, 손과 다리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다리는 벌어져 있었고, 손은 양 허벅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 는데….”

술에 잠긴 발음은 구불구불했다. 혼자서 와인 네댓 병을 내리 마셨으니, 만취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불 밑에서 희미하게 찔꺽, 찔꺽하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 수인만 겨우 잡아낼 수 있을, 아주 작은 물소리였다.

카인은 이불을 마저 걷으려고 했다. 히익-! 루시엘이 새된 숨을 들이마시며 이불을 꽉 움켜잡았으나, 딱히 소용은 없었다. 그는 너무나 간단하게 이불을 빼앗겼다.

“보, 보지 마…!”

루시엘이 양손으로 황급히 셔츠 자락을 잡아 내렸다. 바지는 입고 있지 않았다. 셔츠 아래로 늘씬한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정체 모를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서 느리게 흘렀다. 점성이 있는 액체에서는 기묘한 단내가 났다. 향유라도 쓴 걸까. 녹녹하게 젖은 손끝에서도 비슷한 향기가 풍겼다.

필사적으로 중심부를 가리려는 손을 억지로 떼어 내었다. 긴 셔츠를 들어 올리자, 꼿꼿이 선 중심부가 눈에 들어왔다. 바지는 물론이고, 속옷도 벗은 모양이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벅지를 움켜잡아 벌렸다. 동시에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접었다.

“뭐 하는 거야, 카인!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뭐 하는 거야, 라니. 그것은 자신이 루시엘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술에 잔뜩 곯아서, 셔츠 한 장만 입고 대체 무엇을 한 건지 알고 싶었다.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카인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루시엘이 직접 본인의 입으로,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털어놓길 바랐다.

느슨하게 풀어진 구멍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목한 틈으로 붉은 속살이 언뜻 보였다. 호흡하는 것처럼 빠끔거리며 투명한 액을 질질 토해냈다. 손과 허벅지 안쪽의 단내가, 구멍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점성 있는 향유를 윤활제 대용으로 사용한 모양이었다.

루시엘이 자기 몸 상태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가끔씩 뒷구멍을 만지작거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윤활제까지 써가면서 자위를 할 줄은 몰랐다. 구멍이 벌름거렸다. 무언가를 넣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물을게요. 뭘 하고 있었어요, 루시엘?”

“그냥, 그냥 자고 있었어. 술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카인은 동일한 질문을 한 번 더 던졌고,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여기는 왜 젖었어요?”

“무, 무슨 소리야… 어디가 젖었다고… 흐앗!”

카인의 손가락이 루시엘의 비부를 툭 건드렸다. 혼자 만지작거려 충분히 풀린 구멍은, 손가락 두 개를 어렵지 않게 삼켰다. 삽입 당하기 위한 길이라도 난 듯이, 검지와 중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흐읏, 아, 아앙…!”

손가락이 전립선을 건드렸다. 도톰하게 융기한 곳을 집중적으로 눌렀다. 루시엘은 허리를 들썩이며 신음을 내질렀다. 말랑하고 습기 찬 안쪽이 손가락을 꽉 조여 왔다. 손마디를 타고 장액이 흘렀다.

사정하기 직전에 손가락을 빼내자, 구멍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카인은 제 손을 보란 듯이 루시엘의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끝은 향유와 애액으로 진득하게 젖어있었다. 루시엘이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움칫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 제 구멍을 가렸다.

“보지 마. 이건 명령이다! 황제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새삼스레 위엄 있는 어투로 말해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겁먹은 소동물을 달래듯, 카인이 루시엘의 뺨을 가벼이 쓸었다. 주군을 염려하는 기사를 연기하며, 짐짓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는 단지 루시엘이 걱정되어서 그래요. 몸에 문제가 생긴 거잖아요. 맞죠?”

“으응… 맞아….”

루시엘이 코를 훌쩍거렸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말해줄 수 있겠어요?”

“그건… 그게…”

루시엘은 주저하다가, 구멍을 가린 손을 치웠다.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들을 저지르는 걸 보니, 술에 제대로 취한 성싶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애널을 비죽이 벌렸다. 구멍이 동굴처럼 열렸다.

“앞을 만져도 발기가 안 되고, 대신 여기가 자꾸 욱신거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오늘 한 번 이곳…에 손가락을 넣어봤는데…”

안 그래도 발갛던 뺨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뺨만 아니라 귓바퀴와 귓불까지 온통 새빨갰다.

“기분이 좋아져서… 너 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만지고 있었어.”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끝부분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루시엘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주군이 되어서 기사한테 못난 모습을 보였다. 제 기사는 분명 자신을 경멸하리라. 결혼을 앞둔 작자가, 앞이 아닌 뒤를 쑤시면서 쾌감을 얻는다니. 누가 저런 이를 주군으로 섬기고 싶겠는가.

그러니 나는 결국 또 버려지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가 날 버렸듯이, 믿었던 호위 기사마저도 내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다. 두려움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루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와드릴게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기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루시엘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어둠에서 빛으로, 순식간에 세계가 뒤바뀌었다. 천장의 조명이 찬란하게 부서졌다.

눈이 부셨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온통 흐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루시엘이 울고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카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는 예정된 불행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때 카인은 웃고 있었다. 충동으로 들끓는 눈동자와, 환희로 옅게 올라간 입꼬리. 앞만 만져서는 사정할 수 없다는 주군의 고백이, 그 치태가, 카인을 들뜨게 만들었다.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그렇지만, 왜 도와주는데? 이런 거, 더럽고… 이상한데….”

“왜냐하면, 제가 루시엘을…”

루시엘을 사랑하는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도 말할 뻔했다. 루시엘이 카인의 말허리를 자르지만 않았어도, 카인은 충동적인 고백을 내뱉었을지도 몰랐다.

“아, 알겠다. 기사 서약을 지키려고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주군을 위해 충성하려는 거구나. 고마워. 카인, 넌 정말 최고의 기사야.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지.”

루시엘이 카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꼬인 혀를 힘겹게 움직이며 그에게 귀엣말했다. 루시엘의 혀에서는 발효한 과일의 냄새가 났다. 술기운도 전염되는 것이었던가.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올라왔다.

루시엘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달싹거리는 작은 입술을 무작정 집어삼키고 싶었다. 이 상황에도 끝끝내 충성이니, 기사니 하는 말을 내뱉는 못된 혀를, 제 혀로 칭칭 감기를 원했다. 뒷일은 어떻게 되든 좋았다.

“있잖아. 카인, 너한테만은 내 비밀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나 사실, 엄청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있어. 지금 몸이 이상해진 것도, 어쩌면 그때의 업보가 아닌가 싶어. 신이 내게 벌을 내린 걸지도….”

키스를 하려던 카인이 멈칫했다. 폐위의 명분을 찾겠다고 다짐하기는 했으나, 그런 걸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빨리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맥락이야 이해할 수는 있었다. 루시엘은 술에 취했고, 몸이 아파 불안했고, 카인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갑작스럽게 과거의 죄를 고백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 사람을 죽였어.”

이건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리고 예쁘장한 외모와는 다르게, 어쨌든 루시엘은 폭군이었다. 사람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누굴 죽였는지 알아?”

카인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정말 미워하는 사람.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화만 내고, 애정은 한 조각도 주지 않은 나쁜 사람.”

루시엘은 첨예한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 카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우리 아빠를 죽였어.”

나는 과연 내 아버지를, 그러니까 전 황제 폐하를 죽였는가. ‘네’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니다’라며 당당하게 부인하기도 석연찮다.

전 황제, 로만은 지병을 앓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그를 치료하려고 노력했지만,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하루하루 통증만 더해질 뿐이었다. 나도 남몰래 치료법을 연구해봤는데, 도통 성과를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만은 의원들을 싹 물리고서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내게 부탁했다. 목재로 된 서랍 세 번째 칸에 검보라색 가루가 있는데, 그 가루를 차에 타서 자신에게 먹이라고 말이다.

“아픔 없이 죽을 수 있는 독약이다. 단테는 너무 심약하고, 신하들은 무슨 짓이냐며 말릴 게 뻔해.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

로만은 내 옷자락을 꽉 붙들고서 간곡히 부탁했다.

그 기분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죽고 싶은데,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하는 그 절망을.

신벌이 또 연인을 죽였다. 같이 따라서 죽고 싶지만 그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죽어봤자 또 다른 생이 반복될 테니까. 새로운 생에서, 나는 다시금 연인을 잃을 테니까.

그래서 난 남은 삶을, 다음 생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 소모했다. 치료술을 더 연마하고, 흑마법을 단련하는 등… 사람을 구하는 데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을 익혔다.

토할 것 같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아득한 슬픔을 간신히 되삼키면서도, 자연사로 죽을 때까지 자결하지 않고 버텼다. 이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카인을 구해내리라 다짐하며, 병상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곧바로 새로운 삶이 들이닥쳤다. 그 뒤로는 동일한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카인은 죽고, 나는 또 혼자 남겨지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하루를 버텨내고….

아마 내 아버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겠지.

나는 잠자코 로만의 명을 따랐다. 찻물을 진하게 우리고, 독을 타 섞었다. 가루는 뜨거운 물에 닿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렸다. 로만은 주저 없이 차를 받아 마셨고, 곧 평안히 눈을 감았다. 어렴풋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였다.

천장 틈의 영상구가 그 장면을 고스란히 녹화하고 있었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영상구에는 녹음 기능이 없고, 녹화만 가능하다. 고로 황제의 목소리는 영상구에 담기지 않았다. 누가 봐도 내가 황제를 독살한 꼴이었다.

그리고 어언 9년이 흘렀다. 그간 아무도 그 영상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은신마법으로 영상구를 꼭꼭 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슬슬, 마법을 해제할 때가 온 것 같다.

나, 우리 아빠를 죽였어.

그 고백을 들었을 때 카인은 놀라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냐며, 루시엘을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카인은 폐위의 명분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루시엘의 망가진 유년기가 안타까웠다. 예쁘장한 얼굴과 호화로운 의복에 감춰져 몰랐을 뿐, 루시엘의 속마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멍들어 있었다.

몸의 상처는 치료하면 낫는다. 최고의 황실 의원들이, 항상 황제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고통은? 잘 제련된 칼로 심장 한가운데를 찔린 듯한 이 통증은, 대체 어떻게 이겨내야 하지?

루시엘의 마음속 상처는 낫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곯아갔다. 짓무른 흉터에서 누런 고름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흉터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아, 아무도 루시엘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아빠가 죽고 나는 황제가 되었어. 내 불행의 원흉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열일곱의 나한테 왕관은 너무 무거웠어. 나라를 잘 다스려보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고.”

눅눅한 목소리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술의 힘을 빌린 고백이, 소나기처럼 카인의 귓가를 마구 두드렸다. 춥고 무거운 얘기들이 카인의 마음을 적셨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내가, 어떻게 백성들을 사랑해? 어떻게 신하들을 아껴줄 수 있어? 나는 그런 거 몰라. 화내고, 무시하고, 하찮다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것밖에 못 해. 아버지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루시엘은 폭군이 된 걸까. 아니,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너를 만났어.”

기적, 이라는 단어가 고막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기적 같은 만남이라니. 루시엘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기사는 황제의 기적이 아니었다. 도리어 재앙이었다. 그는 황제가 몰래 고백한 비밀을 만천하에 까발릴 것이다. 그걸 명분 삼아 황제를 폐위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래. 카인 너라면…”

루시엘이 웃었다. 은빛 속눈썹이 장맛비에 젖은 나비처럼 파르르 떨렸다. 눈물을 머금고 휘어지는 그 눈꼬리를 보고 있으면, 심장이 간질간질하다.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마음속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

“이런 걸 도와 달라 부탁해도 괜찮을 것 같아.”

황제가 기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젖은 손끝이 중심부에 닿았다. 손목을 잡은 손은 따스하고, 손마디를 휘감는 안쪽은 부드러웠다. 다정한 연인 간의 섹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카인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루시엘의 ‘애정’과 자신의 ‘사랑’은 달랐다. 루시엘은 카인을 반려동물로써, 기사로서, 동생으로서 좋아한다. 거기에 연애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잠깐만, 카인… 이 자세는 조금 부끄러운데….”

알코올 수조에 담갔다가 꺼낸 뇌로도, 수치심이 느껴지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이 가려지자 확실히 마음이 안정되었다.

“됐어. 이제 치료하는 거 도와주라.”

셔츠 한 장만 입고 침대에 엎드려, 제 치부를 완전히 드러낸 자세. 기사의 앞에서, 황제는 우스울 정도로 무방비했다.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겠지만, 정작 기사는 그 신뢰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배신할 텐데. 당신이 내린 검으로, 당신의 심장을 겨누고야 말 텐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어느 것도 쉬이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카인이 내뱉은 말은 이게 전부였다.

“넣을게요.”

“응….”

루시엘은 베갯잇을 꽉 물었다. 아무리 치료 목적이어도, 볼썽사나운 신음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곧 손가락이 안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굵고 길고 뜨거웠다. 뿌리째 욱여넣듯이 안쪽으로 들어가, 내벽을 퍽퍽 쳐올렸다. 전립선이 두들겨 맞는 감각에, 루시엘은 물고 있던 베개를 놓치고 말았다.

“아윽! 아악! 하읏, 조금만, 히익! 아! 조금만 천천, 히잇…!”

벌어진 입술에서 덩어리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인은 루시엘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그의 골반을 양손으로 잡고서 세게 내리눌렀다. 흐아, 악! 루시엘이 교성을 내질렀다. 새빨간 혀가 바깥으로 흘러내리며, 베개에 신 얼룩을 만들었다.

베개에 이마를 비비며, 루시엘은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지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정말 손가락이 맞나? 그렇지만 카인의 양손은 지금 내 허리를 붙잡고 있는데?

손가락이 아니라면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으나, 그 가설은 곧 기각되었다. 카인과 자신이 섹스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사가 주군에게 욕망을 품을 리도, 주군을 보며 세울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의 안에 삽입된 건 과연 뭘까. 머리를 들어 뒤를 돌아보기만 해도 알아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싶지는 않았다. 카인에게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게 싫었다. 체액으로 얼룩지고 쾌락으로 일그러진 낯은, 분명 엉망진창일 터였다.

“으응, 아, 아앗!”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침대 헤드에 덜컹대는 머리가 부딪칠 것 같았다. 카인은 루시엘의 위로 몸을 수그리고서,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성기가 직장을 깊숙하게 찔러왔다. 깊게 밀어 넣었던 성기가 주욱 뽑힐 때마다, 애액이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진득한 액이 실타래처럼 가늘게 늘어졌다. 향유와 장액으로 젖은 애널이 번들거렸다.

수축하려는 구멍에 다시금 살기둥을 밀어 넣었다. 구멍을 한계까지 넓히려는 것처럼, 내벽을 마구잡이로 들쑤셨다.

“술에 진짜 많이 취하기는 했나 봐요. 자기가 지금 뭘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술이 아니라, 그 빌어먹을 신뢰가 문제일지도.”

귓가를 간지럽히는 음성이 아득했다.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알아… 치료, 해주는 거잖아…. 나아, 흐읏, 몸이 이상해져서, 카인이 도와주려고… 흐앙, 앗!”

루시엘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말끝이 자꾸만 배배 꼬였다.

“네. 그렇겠죠. 어떤가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뭐,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카인은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루시엘의 샅을 움켜잡았다. 잔뜩 불거진 물건이 움찔거리며, 고장 난 것처럼 정액을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저와 이렇게나 많이 몸을 섞었는데, 똑바로 기억하는 건 하나도 없네요. 심지어 이제는, 섹스를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다니.”

루시엘은 카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청각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었다. 말을 이해할 여력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더 이상 머릿속을 드나들지 않고, 점막만이 서로 달라붙어 뇌에서 교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기억에도 없는 섹스는 오늘부로 끝이니까. 이후에는 싫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흐읍, 아, 으읏! 하으… 처, 천천히, 제발, 좀… 흐익!”

루시엘의 발끝이 버둥거리며 시트를 밀어냈다. 얇은 얼음장 위를 걷는 듯, 발가락이 뻣뻣하게 세워져 있었다. 카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 빠르게 추삽질을 이어갔다. 쿠퍼액이 치덕치덕 구멍에 달라붙었다.

루시엘은 어깨를 덜덜 떨며, 두 손으로 베개 양옆을 꽉 붙잡았다. 투명하리만치 휜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향유로 반들대는 손톱이 조명 빛에 반사되었다.

선액과 장액으로 축축해진 안쪽에, 더운 백탁액이 퍼부어졌다. 루시엘은 기사의 정액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한 번 더 절정에 도달했다. 발갛게 물든 목덜미가 움칫거렸다.

“이, 이건 뭐야… 배 안에, 뜨거운 액체가 가, 가득 차서….”

루시엘이 멍하게 헐떡거렸다. 그게 정액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술과 신뢰는 최면술만큼이나 사람의 판단력을 흩뜨려놓았다. 이 얼마나 바보 같고 사랑스러운지. 방금 사정해서 늘어져 있던 카인의 물건이, 삽시간에 경도를 되찾았다.

카인이 다시금 루시엘의 허리를 다잡았다.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제 쪽으로 끌어, 단번에 박아 넣었다. 구불구불한 내벽이 살기둥을 진득하게 감쌌다. 오랜 마찰로 예민해진 점막은, 어디를 찌르든 간에 꿈틀거리며 애액을 분비했다.

“하으, 읏, 흐에…”

신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찔꺽대는 물소리에 신음이 묻힐 정도였다.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목이 쉬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됐어어… 치료, 이제 됐으니까아….”

루시엘이 자그맣게 흐느꼈다. 하도 많이 사정한 탓에, 루시엘의 성기는 이제 서지도 않았다. 수그러든 상태에서 정체 모를 투명한 물만을 줄줄 흘려대었다. 전립선이 뭉개질 정도로 거세게 성기를 꽂아 넣자, 그는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발발 떨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턱을 잡아 돌려, 제 쪽을 보게 만들었다. 눈물로 망그러진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얼굴을 보지 말라고 말할 힘도, 정신도 없었다. 타액으로 젖어든 입술이 유독 붉었다. 입술 사이로 무지근한 날숨이 새어 나왔다.

카인은 홀린 듯이 루시엘에게 입술을 포갰다. 웅얼거리는 신음도, 알콜에 젖은 타액도, 남김없이 삼켰다. 그의 입술에서는 여전히 달큰한 술내가 났다. 그뿐이 아니라 야살스러운 살내음도 풍겼다. 교미 중인 짐승이 퍼뜨릴 만한 야한 체향이었다. 그 향취가 카인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루시엘은 카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사지를 늘어뜨리고서, 일방적인 입맞춤을 받아낼 뿐이었다. 마침내 입술을 떼어내자, 루시엘이 꿈결처럼 웅얼거렸다.

“…너 치료, 너무 과해….”

끝까지 이게 치료라고만 생각하는구나.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성기를 빼내었다. 헤 벌어진 구멍이 붉은 속살을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애널 사이로 정액이 줄줄 흘러나와 시트를 적셨다. 탄력을 잃고 퉁퉁 부은 뒷구멍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걸 알게 된다면, 루시엘은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미약, 수면간, 발정기, 최면, 루시엘의 기억에는 없는, 허나 카인의 머릿속에는 똑똑히 남아 있는 사건들.

그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전부 말해준다면… 그는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을까, 아니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이처럼 울까. 카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세 경우 모두 정답 같기도 했고, 그중 무엇도 답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곧 정답을 찾을 수 있겠지.’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카인은 레라지에의 펜듈럼, 즉 최면추를 부술 것이었다. 추 자체를 파괴하면, 최면이 완벽하게 풀리게 된다.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저지른 행동들이, 모조리 떠올라 버리는 것이다. 제 몸을 이상하게 만든 이가 바로 자신의 호위 기사임이, 드디어 밝혀지게 된다.

‘많이 울려나.’

루시엘이 나 때문에 울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명백한 모순이었다.

카인은 혼절한 루시엘을 씻기고 잠옷을 입혔다. 그를 침대에 눕혀놓고 이불까지 덮어주고서, 카인은 곧바로 단테의 방으로 향했다.

단테의 침소는 전 황제, 그러니까 루시엘과 단테의 아버지가 쓰던 곳이었다. 황제가 서거한 후, 새 황제가 된 루시엘은 황제의 방을 물려받는 대신, 새로운 방을 제 침실로 삼았다. 전 황제의 방은 자연스레 단테의 것이 되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곳이다. 별로 머물고 싶지 않았을 테지.’

카인은 형식적인 노크를 두어 번 하고 문을 열었다. 단테가 벌떡 일어나 카인을 맞았다.

“무슨 일이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9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때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는 불확실했으나, 확인해볼 가치는 있었다. 그리고 짐승의 직감이, 이 방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카인은 단테에게 방을 조사해도 되느냐고 물었고, 단테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카인은 천장에서 영상구를 찾아내었다. 전 황제가 작고한 날로 시간을 설정하고, 녹화된 장면을 확인했다. 단테 역시 카인을 따라, 영상구에 시선을 고정했다.

영상이 진행될수록, 단테의 낯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파리하게 질린 미간에 잔금이 갔다.

영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병상에 누운 황제가 괴롭게 각혈하고 있다. 웬일인지 의원들은 온데간데없고, 루시엘만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다.

황제와 루시엘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눈다. 루시엘은 독을 탄 차를 황제에게 건네고, 황제는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 마신다. 힘을 잃은 손이 찻잔을 놓친다. 쨍그랑, 도자기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마지막 단말마의 숨. 그리고 모든 게 끝이 난다.

“이 정도면 반란의 명분은 충분한 것 같은데, 대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인이 물었다. 감정이라고는 묻어나지 않는 무덤덤한 어조였다.

단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끼가 나무의 아랫동아리를 찍듯이, 그의 발목이 느리게 허물어졌다. 그는 폐허처럼 주저앉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카인은 단테의 옆에 묵묵히 서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단테의 입술이 서서히 달싹였다. 회색 먼지가 자욱이 쌓인 고성처럼, 창백한 색채를 띤 입술이었다.

“…충분한 것 같군.”

갈라지고 메마른 문장을 힘겹게 토해내며, 단테는 제 심장 부근을 꽉 움켜쥐었다.

반란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거사 일자는 두 달 후, 12월의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해졌다. 12월 6일, 그날은 루시엘의 생일이었다. 성대한 탄신제와 호화로운 무도회가 계획되어 있었다. 술과 유흥에 취한 황제를 제압하는 건, 비에 젖은 아기 새를 새장에 가두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 터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황제파마저 모조리 반란 쪽으로 돌아섰다. 아비를 죽인 쓰레기를 황제로 모실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이 정도라면 무혈입성도 가능할 듯했다. 영상구를 발견해낸 카인의 공이 컸다.

반란의 명분을 찾아내면 제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카인은 그리 말했었다. 카인의 소원이 무엇이든, 공작은 능히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부? 명예? 높은 지위? 뭐든 좋았다. 심지어는 공작가의 양자가 되겠다고 해도 받아줬을 터였다.

그러나 카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원을 빌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었다. 다만…

“루시엘을 제게 주십시오.”

폐위된 루시엘의 처분을, 전적으로 자신이 맡는 것. 그것만이 카인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두 달. 마지막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단 두 달뿐이라면, 그 짧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카인은 루시엘이, 적어도 남은 시간만큼은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기사는 황제의 눈을 가리고 날개를 꺾어 새장에 가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산산이 조각날 것이며,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터다.

그러니 이것은 루시엘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유였고, 카인과 루시엘이 쌓을 수 있는 마지막 추억이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아침마다 황실 밖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거의 평생을 황실 안에서만 살아온 황제에게, 그리고 남은 자유마저 완전히 빼앗기게 될 그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언제는 정체를 숨기고 남몰래 마을로 내려간 적도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써 특유의 은발을 감추기만 해도, 행인들은 황제를 알아보지 못했다. 거리를 따라 줄지어 선 낮고 작은 상점들과, 좁은 흙길에서 공놀이를 하는 꼬마들. 루시엘은 카인과 팔짱을 끼고서,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걸었다.

이른 저녁으로는 허름한 음식점에서 수프와 감자를 먹었다. 작은 원형 테이블은 두 명만 앉았는데도 거의 무너질 것 같았다. 다리를 흔들 때마다 낡은 의자가 삐거덕거렸다.

루시엘은 수프가 너무 싱겁다고 투덜거리다가, 가게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보고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늘 한 점 없는 앳되고 말간 얼굴. 친아버지를 죽인 폭군으로는 보이지 않는, 유리창처럼 투명한 미소.

또 언제는 수도에서 인기가 높다는 제과점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진열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들이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바삭한 크러스트에 달콤한 살구를 올린 데니시 페이스트리, 초콜릿 알갱이가 듬뿍 박힌 쿠키, 하얀 포장지에 싸인 과일 타르트까지.

루시엘은 고민 끝에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을 골랐다. 먹기 좋은 크기로 케이크를 잘라, 카인의 입안에 쏙 넣어주었다. 생크림이 혓바닥에 엉켰다가 빠르게 녹아내렸다.

부드러운 단맛은 카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군말 없이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맛있지? 루시엘은 또 천진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혀끝에서 크림처럼 녹았다. 지나칠 정도로 달았다.

단둘이서 오랫동안 화원을 거닌 적도 있었다. 저 멀리서 희미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신전의 신관들이 부르는 것이었다.

춤출래? 루시엘이 먼저 오른손을 내밀었다. 느릿한 찬양의 템포는 무도회용 댄스를 추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인은 주저 없이 루시엘의 손을 잡았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감쌌고, 루시엘은 카인의 목에 팔을 얹었다. 둘은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춤을 췄다. 둥근 돌이 깔린 오솔길은 무도회장의 벨벳 융단을 닮아 있었고, 살랑이는 나무 그늘은 우아한 커튼이 되어주었다. 웅장한 성가 위로 엇나간 발소리가 겹쳤다.

11월의 마지막 날에는 바다에 갔다. 가을의 바다는 차가웠고 하늘은 그날따라 흐렸다. 우중충한 하늘에선 파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회색 햇빛이 먼지처럼 루시엘의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그런 날씨도 마냥 좋은지, 루시엘이 배시시 웃었다.

짠 바닷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루시엘은 신발을 벗어 왼손에 들고, 맨발로 백사장을 걸었다. 잔잔한 파도가 발끝을 적셨다가 다시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나, 파도 처음 봐. 예쁘다.”

루시엘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조금은 쓸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푹 눌러쓴 로브에 얼굴이 가려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하관, 입꼬리가 얼핏 올라간 것도 같았다.

갑작스레 세찬 바람이 불었다. 비릿하고 소금기 어린 바람이 눈동자를 할퀴어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카인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앞의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바람 때문에 로브가 벗겨지고, 드러난 은빛 머리칼이 흩날린다. 루시엘은 웃는다. 해변의 젖은 모래처럼, 반짝반짝, 방글방글, 희게 빛나는 그 미소를 보고 있자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카인.”

황제가 기사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 내년 여름에도 바다에 가자. 그때는 꼭 수영을 하는 거야. 모래찜질도 하고….”

하지만 루시엘의 소망은 결단코 이뤄지지 않을 터다. 그는 내년 여름에 바다에 갈 수 없다. 내후년도,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다.

루시엘은 지하 깊은 곳에, 욕실이 딸린 작은 방에 감금될 것이다. 발목에 서슬 퍼런 족쇄를 차고서, 그렇게 평생을 갇혀 살 테다. 그리고 루시엘은, 다시는 카인을 향해 웃어주지 않을 것이다.

일순 토기가 올라왔다. 카인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열어, 모든 해묵은 감정들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허나 루시엘이 지금처럼 환하게 미소 지을 때마다, 마모된 줄 알았던 양심이 카인의 마음을 후벼 팠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감지 않았다. 카인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루시엘을 응시했다. 그 환한 미소가, 망막 한가운데에 생생히 새겨졌다. 마치 낙인처럼.

닷새 후, 축복받아야 마땅할 생일날, 황제는 가장 믿었던 기사에게 배신당할 것이다.

생일 전날에는 눈이 내렸다. 루시엘은 창가에 걸터앉아, 창밖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온통 희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옆에 조용히 섰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11시를 가리키던 시침이 느릿느릿 12시로 걸음을 옮겼다. 댕, 댕, 댕, 종이 열두 번 울렸다. 오늘은 루시엘의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루시엘.”

카인은 흰색 보석함을 꺼내 들었다. 상자 안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옅은 노란빛의 카나리 옐로우였다.

카인은 루시엘의 손을 잡고는,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루시엘은 손을 천장 쪽으로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쫙 펴고서, 조명에다 대고 다각도로 반지를 비춰보았다. 카인의 눈동자를 닮은 보석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고마워. 카인. 색깔 정말 예쁘다. 너 눈 색이랑 비슷해서 더 좋아. 이거 볼 때마다 너 생각 날 것 같아.”

루시엘은 알고 있을까. 그가 별 고민 없이 내던지는 말들이, 카인에게 얼마나 묵직하게 다가오는지. 분명 모를 것이다. 모르기에 저렇게 엄청난 얘기를 툭, 툭 뱉어내는 것이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카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이제 신물이 날 만큼 익숙했다.

그러나 루시엘이 카인의 어깨를 붙잡고, 예고도 없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을 때에는, 아무리 카인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과 함께, 한 움큼의 온기가 느껴졌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입술이 떨어졌다.

“이건 반지의 답례.”

루시엘이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달의 왕국 인사법이래. 거기는 부위별로 키스의 의미가 다른가 봐. 이마는 우정과 신뢰의 의미라나? 달의 왕국 공주랑 결혼하게 될 텐데, 인사법쯤은 미리 익혀놔야지.”

“우정과 신뢰라….”

신뢰라는 단어가 문득 우습게 느껴져서, 카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루시엘은 그 웃음을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기사의 속을 절대로 알 리 없는 황제는, 제풀에 신나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잘 들어봐. 볼은 친애의 의미고,”

매끄러운 섬섬옥수가 스스로의 뺨을 꾹 눌렀다. 손가락은 볼을 타고 흘러 목을 건드렸다.

“목에다가 하는 키스는 욕구…”

카인의 시선이 루시엘의 목에 닿았다. 유려한 선을 가진 그 목을, 카인은 지금껏 수도 없이 깨물고 핥았다.

“허벅지는 당신을 지배하고 싶습니다, 라는 뜻이래.”

희고 가지런한 손끝이 제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카인 역시 루시엘의 허벅지에 손을 뻗었다. 루시엘을 따라, 그의 허벅지를 뭉근하게 어루만졌다. 간지러운지, 루시엘이 움칫 몸을 떨었다.

“…루시엘.”

기사가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것은 고백이라기보다는 담담한 절규였다. 평서문의 형식을 빌린 비명이었다.

“응. 나도 너 좋아해. 너는 내 훌륭한 기사인걸.”

그리고 루시엘은 역시나, 그의 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루시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루시엘을 좋아해요.”

“그래, 그래.”

루시엘은 카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강아지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주인처럼,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손짓이었다. 그리고 루시엘의 애정은, 카인이 루시엘에게 품은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카인은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곤히 잠든 루시엘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평온한 낯을 볼 수 있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다.

탄신제는 불꽃놀이와 함께 시작했다. 마법으로 만든 폭죽은, 낮의 하늘을 배경으로도 충분히 밝게 빛났다. 벽 한 면이 전부 유리로 된 홀, 사람들은 창 너머로 보이는 불꽃을 보며 감탄했고, 박수를 쳤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루시엘은 상석에 앉아 와인을 홀짝였다. 귀족들은 의례적인 축하 인사와 함께, 저마다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그들의 시선은 사분의 일쯤 비워진 유리잔에 붙박여 있었다. 황제가 와인 한 잔을 다 비우고,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을 때, 그때가 신호였다.

루시엘은 손에 든 잔을 느리게 흔들었다. 붉은 포도주가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찰랑거렸다. 스템을 잡고 있는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물결치듯 반짝였다.

잔에 입술이 닿았다. 핏빛 음료가 입술 틈새로 넘어갔다. 목울대가 크게 두 번 출렁였다. 유리잔이 바닥을 보였다. 황제는 텅 비워진 잔을 내려놓았다. 황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들이,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뒤로는, 예상했던 대로의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기둥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저마다 칼을 빼 들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 속에 숨겨놓았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천장에 숨어있던 무장한 병사들이, 줄을 타고서 밑으로 뛰어내렸다.

모든 검과 창이, 일제히 루시엘을 향했다.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축제가, 폭군을 벌하기 위한 심판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게 무슨….”

루시엘이 말을 더듬었다. 맥박이 늑골을 울릴 만큼 세게 뛰었다. 심장의 박동이 뇌까지 쿵쿵 진동시키는 듯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겨우 굴려, 들이닥친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분노와 경악이 온 얼굴을 뒤덮었다.

“카인!”

루시엘은 반사적으로 제 호위 기사를 찾았다. 루시엘의 옆에 앉아있던 카인이,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집에서 예리한 검이 뽑혔다. 기사 서약식을 치를 때, 루시엘이 수여한 검이었다. 그리고 검 앞에서 기사는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루시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사는 검을 들어 황제를 지키리라. 카인은 강하니까, 이 위기에서 기필코 주군을 건져내리라. 세상 모두가 자신을 배신해도, 카인은 끝끝내 제 편에 설 것이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기사고,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이며,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니까.

카인은 심호흡을 하고는 검을 고쳐 잡았다. 빙그르르, 그가 반 바퀴 몸을 돌렸다. 잘 버려진 검날이, 태양 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의 검이 향하는 곳은,

“카인…?”

다름 아닌 황제의 목이었다.

희게 드러난 목 바로 앞에서, 칼끝이 우뚝 멈춰 섰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다가는 필시 피를 봤을 터였다. 황제가 내린 검이, 황제를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검이, 지금 이 순간 루시엘을 겨누고 있었다.

“하, 하지만 어째서? 카인, 너는 내 호위 기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야 하는 거잖아!”

숨을 쉴 수 없었다. 루시엘은 탈색된 호흡만을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그는 충격으로 혼탁해진 눈동자를 들어, 눈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카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온갖 소음으로 얼룩진 공간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저는 더 이상 당신의 기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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