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0)

6. 전조

“또 마물이 난동을 부리다니….”

달의 나라 국왕, 페레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파리해진 안색은 양손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았다. 그는 시끄러울 정도로 다리를 떨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어젯밤, 날개 달린 도마뱀이 왕성의 하늘 위를 휘젓고 다녔다. 마물이 공중에 보랏빛 화염을 쏘아대는 통에, 어두워야 할 하늘은 밤 내내 밝게 번쩍였다가 섬뜩한 보라색으로 물들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국왕이 느낀 공포심은 어마어마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제국과는 정반대로, 달의 왕국은 마땅한 무기랄 게 없었다. 철을 제련해 만든 검이나 창 따위를 겨우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제국처럼 칼에 검기를 덧씌우지도, 마물의 핵을 녹여 창에 도금하지도 못했다. 만약 상급 마물이 악의를 가지고 왕성을 공격한다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성이 함락될 게 분명했다.

제국이 새로 개발했다던 ‘마물 대항용 마법 장치’를 빌릴 생각도 해보았으나, 황제 성격상 순순히 마법 장치를 넘겨줄 리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제국과 좀 더 친선을 다져놓을걸. 이제라도 사절단을 보내 열심히 아부를 떨어야 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어떤 생각 하나가 왕의 뇌리를 스쳤다. 국교를 다지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도 전통적인 방법이.

“황제가 올해로 몇 살이라 했지?”

“스물여섯이라고 들었습니다. 올가을과 12월만 넘기면 스물일곱입니다.”

페레스의 물음에, 옆에서 업무를 보조하던 책사가 차분하게 답했다.

“제국민들은 스물 초반에 결혼하는 것이 평균 아닌가? 후사를 보고도 남을 나이인데, 아직 미혼이라지? 신하들이 걱정이 많겠어.”

“그 말씀은…”

“마침 내게도 혼기가 찬 딸이 있으니, 딱 잘되지 않았나. 이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일세.”

“저, 전하, 그렇지만 공주님의 의사는…”

“여봐라! 지금 당장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라!”

책사가 황급히 왕을 만류했지만, 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좋은 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작자였다.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불타는 재에 섞여 공중으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결혼이라고?”

루시엘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달의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들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으로 비스듬히 턱을 괴고, 두 다리를 느슨하게 꼰 채였다. 사신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힐끔힐끔 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저희 국왕께서는 첫째 따님과 폐하와의 국혼을 바라고 계십니다. 저희 왕국은 예로부터 치료술에 능했습니다.”

“…그래?”

“네. 특히 공주님은 그와 관련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달맞이꽃과 정령의 눈물을 섞어 심장 강화제를 발명하기도 하셨지요. 뛰어난 무력을 가진 제국에 치료술까지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더욱 그 위상을 떨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사신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고서, 유려하게 준비한 말을 이어 나갔다. 중간중간 힐끔 고개를 들고서, 조심스레 폭군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신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가는 입가 근육을 펴서, 애써 미소를 만들어냈다.

허나, 이 홀에는 사신보다 더 굳은 표정을 한 이가 무려 두 명이나 존재했다. 그중 한 명은 황제의 곁에 서서 묵묵히 주군을 지키고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신하들 사이에 끼여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결혼이라. 나는 딱히….”

루시엘이 무심하게 뺨을 긁적였다. 카인과 단테의 낯빛이 동시에 확 밝아지려는 찰나,

“폐하! 그건 안 될 말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슬슬 결혼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신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까지 의견이 하나로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황후를 들여 후사를 보는 것은 황제의 의무입니다. 폐하는 이미 혼기가 지나시지 않았습니까.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결혼하셔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 신하들은 황제를 결혼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백방으로 뛰어도 제국 안에서는 도저히 결혼 상대를 구할 수 없었다.

이미 폭군으로 소문이 자자한 황제다. 거기에다가 무능하고 체력이 약하기까지 하다. 어느 귀족이 미쳤다고 제 귀한 딸을 성큼 내주겠는가.

황후로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도 분명 크지만, 루시엘과 결혼했다가는 부귀영화를 온전히 누리기 전에 화병으로 앓고 말 거다. 어쩌면 황제의 성질을 건드려 성 밖으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

이런 여러 이유로, 신하들은 아직까지 괜찮은 신붓감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 나라에서 먼저 혼인을 제안하다니. 이 기회는 꼭 잡아야 했다.

“으음,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루시엘은 웬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평소에는 신하들이 뭐라고 간언하든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말이다. 이때를 놓칠세라, 사신이 공주의 초상화를 꺼내 황제에게 건넸다.

흑단 같은 긴 생머리에 풀빛 눈동자를 가진, 단아한 인상의 여성. 초상화 아래쪽에는 ‘녹시아 필리듐 메네시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달의 왕국 공주의 이름이었다. 루시엘의 눈초리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훑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카인, 이 여자, 너랑 머리색이 똑같아!”

해맑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외치며, 루시엘은 카인의 눈앞에 대고 초상화를 흔들었다. 천 위에 그려진 그림이 부드럽게 펄럭거렸다.

“나 머리 검은 사람 너 빼고는 처음 봐. 신기하다.”

무엇이 그토록 루시엘을 들뜨게 만든 걸까. 루시엘은 초상화를 응시했다가, 고개를 들어 카인을 바라봤다가, 다시 초상화로 눈길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의 눈동자는 한동안 그림과 카인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마침내 마음이 정리되었는지, 루시엘이 또렷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경들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폐하. 약혼식은 올해 말에, 결혼식은 내년 3월에 올리는 것이 어떨까요? 아무래도 만물이 움트는 봄날에 결혼식을 치르는 것이…”

“그건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그 순간 카인은 어느 때보다, ‘황제’라는 신분의 무게를 여실히 느꼈다.

제국에서는 동성 결혼이 금기시되지는 않았다. 동성과 결혼한 이들은 단둘이서 행복한 삶을 꾸리거나, 아니면 양자를 입양하는 식으로 가족의 형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황제는 다르다. 황제는 제 피가 섞인 후계자를 ‘생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신에게 선택받은 증거라는 그 찬란한 은발을, 다음 세대에도, 그다음 세대에도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사랑 없는 결혼이라도 상관없다. 순전히 국익만을 고려한 정략결혼이어도 괜찮다. 아니, 부국강병을 위해서라면 정략결혼을 하는 게 옳다.

루시엘이 황제인 이상, 그는 언젠가는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가슴만 만져줘도 선액을 질질 흘리면서, 앞보다는 뒤를 만져줄 때 훨씬 쉽게 절정하면서, 그래도 꼴에 사내라고 결혼을 하려 드는 것이다.

결혼을 막을 방법은 이론상 단 하나밖에 없었다. 루시엘이 더 이상 황제가 아니게 되는 것.

침대가 오늘따라 황량하게 느껴졌다. 희고 고운 시트가 거친 모래 알갱이 같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다.

아무리 넓은 침대도, 루시엘과 단둘이 누워있으면 꽉 채워졌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도 모든 것이 텅 빈 양 외로울까. 두 눈꺼풀 속에 메마른 모래바람이 먹먹히 차올랐다. 사막 한가운데 조난당한 여행객처럼, 목이 말랐다. 물로도 해갈할 수 없는 오래된 갈증이었다.

루시엘은 카인의 허벅지를 베고서 누워있었다. 기사의 복잡한 심경을 알 리 없는 주군은, 심간 편하게 생긋생긋 웃고만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십니까?”

카인이 나직하게 물었다.

“누구?”

“주군의 결혼 상대… 달의 왕국의 첫째 공주 말입니다.”

본디라면 루시엘이라고 꼭꼭 이름을 불렀을 텐데, 카인은 유난히 격식을 갖춰 말을 걸었다. 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랑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걸. 국가 간 이익에 따라 치러지는 결혼이야. 사랑이 꽃필 틈이 있겠어?”

루시엘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그는 이 결혼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루시엘이 이 한 문장을 덧붙였다. 지나칠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어떻게 그리도 자신하십니까? 말도 한 번 나눠본 적 없으면서.”

“그야…”

루시엘은 손을 뻗어 카인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새까만 머리칼을 다정히 어루만지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너랑 똑같잖아, 머리색이. 흑발인 사람들 중에서 나쁜 사람은 없더라고.”

“…주군 주변에 흑발은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머리를 간질이던 손이 언뜻 귀에 닿았다. 가냘픈 섬섬옥수가 귓바퀴를 쓸다가, 볼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카인의 뺨이 붉은빛으로 옅게 물들었다.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아주 희미한 색이었다.

“너처럼 착하고 다정하고, 말수는 적지만 따스한… 그런 사람일 거야.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메말라가는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루시엘은 꿈꾸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매일 같이 그 검은 머리를 쓰다듬을 거야. 흐트러진 머리를 빗겨주며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되면 짓궂게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면서 하루를 마칠 거야.”

루시엘은 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으로 빗질해 주었다. 짓궂게 헝클어뜨렸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행복할 거야.”

그가 카인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루시엘이 말하는 ‘우리’. 그 우리가 그녀와 루시엘이 아닌, 자신과 루시엘로 들리는 이유는 뭘까.

카인은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모래가, 연약한 심장을 사정없이 할퀴는 것 같았다. 아팠다. 너무 아픈데, 이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침대는 여전히 넓고, 고급 시트는 사막의 모래처럼 껄끄럽고, 선선한 가을 공기도 지금은 숨통을 억죄는 모래바람처럼 느껴진다.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 모래 둔덕에 발이 푹 빠질 것 같다. 모래에 잠겨 아예 죽어버릴 것만 같다.

아아, 그를.

앞을 만져서는 갈 수도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완전히 부서지고 망가져서, 뒷구멍을 쑤셔줘야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대로 사정도 하지 못하고, 마른 절정만을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겪게 해버리고 싶다. 그런 몸으로는 감히 결혼을 꿈꾸지도 못할 테지.

카인은 제 허벅지를 베고 있던 루시엘의 머리를 들어, 베개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협탁 마지막 서랍을 열어,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를 꺼내었다. 막대의 절반은 매끄러웠고, 나머지 절반은 우둘투둘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루시엘이 앞으로 좋아하게 될 도구에요.”

가라앉은 어조로 읊조리며, 기사는 황제를 으스러뜨릴 듯이 껴안았다.

최면에 걸린 루시엘은 순종적이다. 황제보다는 노예 같다. 좆을 핥으라고 명령하면 정액까지 깨끗이 삼키고, 다리를 벌리라고 요구하면 순순히 치부를 드러낸다.

지금껏 그 무엇도 받아들인 적 없는 요도구에 플러그를 찔러 넣어도, 루시엘은 저항하지 않는다. 쉬어버린 비명을 지르면서도 끝끝내 참는 것이다. 그게 카인이 내린 명령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카인은 루시엘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살기둥을 몇 번 쓸어내리자, 말랑하던 좆이 곧 단단해졌다. 왼손으로 살기둥을 감싸 고정하고, 오른손으로는 요도 플러그를 집어 들었다. 뭉툭한 끝부분을 빠끔거리는 요도구에 가져다 대자, 루시엘이 히익, 하는 밭은 숨을 되삼켰다.

“아, 안 들어갈 것, 같…”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알았, 어어….”

플러그를 곧바로 푸욱 꽂아 넣는 대신, 첨단을 간지럽히듯 살살 문질렀다. 윤활제 대용으로 쿠퍼액을 쓰려는 것이었다. 선액이 플러그를 매끄럽게 적셨다.

“넣을게요. 움직이면 다치니까, 가만히 있어야 해요.”

“으응. 얌전히 있을게.”

가느다란 플러그가 조금씩, 조금씩, 좁은 안쪽을 파고들었다. 결코 삽입당하는 용도가 아닌 부위가, 억지로 벌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질감이 여린 점막을 들쑤셨다. 루시엘은 공포심으로 몸을 굳혔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 아파아….”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것치고는 성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걸 보아, 나름대로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이 천천히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중간 부분까지는 요철이 없어 그나마 넣기 쉬웠는데, 울퉁불퉁한 끝부분이 문제였다. 플러그를 조금 빼내었다가 단번에 깊이 박았다. 요철이 달린 기둥이 점막을 드득 긁었다.

“으윽, 커억…!”

허리가 저절로 붕 떴다. 달아나려는 것처럼 들썩이는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아 고정시켰다. 막대를 잡고 빙그르르 한 바퀴 휘젓자, 요도 틈새에서 맑은 쿠퍼액이 주르륵 새어 나왔다. 루시엘의 눈꼬리에도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이제 거의 다 삽입했는데, 내벽이 움츠러들며 플러그 끝을 밀어내었다. 카인은 플러그 끝에 엄지 배를 가져다 대고서, 힘을 주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윽, 아, 아파앗… 하응, 아, 아앙!”

앓는 듯한 신음에 묘한 변화가 생겼다. 신음이 가늘어졌고 끝이 둥글게 휘었다. 뭉툭한 플러그가 앞쪽에서 전립선을 건드린 것이었다. 뒤가 자극당할 때와 비슷한 쾌감이, 루시엘의 전신을 휩쓸었다. 뒷구멍이 반사적으로 오므라들었다. 뭔가를 넣지도 않았는데 움찔거리는 모습이 외설스러웠다.

샅에서 손을 떼고는, 이번에는 검지와 중지로 애널을 빠끔히 열어젖혔다. 두 손가락으로 내벽을 슬슬 더듬다가 약지까지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조밀한 주름이 벌어지며 손가락을 익숙하게 잡아 물었다. 세 손가락을 튤립 모양으로 모아서, 뒤쪽의 전립선도 꾸욱 눌러주었다.

“뭐, 뭐야, 이게… 아, 아앙! 흣!”

앞과 뒤가 동시에 자극당했다. 차가운 금속제의 플러그가 앞쪽을 짓이겼고, 굳은살과 생채기가 가득한 검사의 손이 뒤쪽을 문질렀다. 평소의 배가 되는 쾌락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그마안, 이상해, 앞쪽이, 쿡쿡 쑤셔서… 아, 안 돼… 흐악! 아아…!”

루시엘이 애원하며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벗어나려고 허리를 퍼덕거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발적으로 허리를 흔드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과 눈물로 푹 젖은 얼굴이 예뻤다.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 오만한 폭군이, 앞과 뒤에 이물질이 박힌 채로 교태롭게 신음한다니. 카인을 제외한 어떤 이도, 황제의 저런 표정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리라. 초점을 잃고 젖어든 눈과 반쯤 벌어진 입술. 그는 온전히 쾌락으로 도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아… 나 이제 안 돼애…. 하응, 아흐으… 빼줘어… 제발….”

“빼달라니 어디를? 앞인가요, 뒤인가요?”

“앞…! 앞에 이거… 이 이상한, 흐응! 기다란 거…”

요도 플러그가 뭔지도 모르는지, 루시엘은 ‘이상한 기다란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게 또 귀엽고, 왠지 모르게 안심되었다.

“카인, 부탁할게… 나, 더 이상은 못 버텨….”

사정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루시엘은 울상을 지으며 제 샅을 거머쥐었다. 자기 힘으로 플러그를 빼보려고 했지만, 손톱은 볼록 튀어나온 손잡이를 틱틱 긁을 뿐 잡아 빼지는 못했다.

카인은 요도 플러그를 서서히 잡아 빼었다. 요철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기둥이, 민감한 점막을 지익 긁었다. 루시엘은 목줄기를 뒤로 젖히며 가쁘게 헐떡였다. 긴 막대가 완전히 다 뽑혔다. 요도구가 벌름거렸지만 정액은 나오지 않았다.

“으응…? 뭐, 뭐야… 왜 안 나와….”

루시엘은 당황한 눈초리로 제 중심부를 내려다보았다. 사정감은 한계까지 차오른 지 오래인데, 이상하게도 사출할 수 없었다. 꽤 오래 앞쪽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와드릴게요.”

카인이 루시엘의 물건을 잡아 흔들었다. 그제야 진득한 정액이 맥없이 흘러나왔다. 느리게 흘러 허벅지와 배를 적셨다. 예상했던 것만큼 기세 좋은 사출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다시.”

“자, 잠깐만…! 흐익-!”

플러그가 다시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전보다 더 빠르고 거친 손길이었다. 올록볼록한 기둥이 점막과 마찰했고, 플러그의 첨단이 전립선을 집요하게 짓뭉갰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빠져 허전함이라도 느끼는지, 옴죽거리는 애널에 귀두가 닿았다. 움찔 튀어 오르려는 허리를 움켜잡고는,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 아악! 흐읏, 아…!”

루시엘은 절정에 오른 것처럼 몸을 뒤틀었지만, 기대했던 오르가슴을 느끼지는 못했다. 플러그가 요도구를 빈틈없이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액이 새어 나올 공간도 없었다.

“왜, 왜 다시 넣은 거야… 흐읏, 아! 빼줘, 빼달란 말야…!”

황제가 울먹거렸지만, 기사는 제 주군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결합부가 마찰열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귀두가 쑤걱거리며 성감대만을 골라 찔러대었다.

가고 싶다. 그런데 갈 수 없다. 열이 몰린 아래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해소할 수 없는 쾌감이 아랫배에 차곡차곡 쌓였다. 겹겹이 쌓인 열락이, 묵직하게 안쪽을 짓눌렀다. 이 아릿한 열감을 분출할 방법이 없었다.

“나, 나 이러다가 망가져… 앞, 앞 못 쓰게 돼… 흐응, 아으, 읏!”

정말로 앞이 망가질 일은 없었지만, 쾌락에 젖은 머리로는 이성적인 생각이 힘든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플러그를 빼내 보려고 손을 뻗었으나, 카인이 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희고 가는 손목에다가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망가져도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쓸 일도 없는데.”

언뜻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카인이 속살거렸다.

“아, 아니야앗… 쓸 일, 있어…”

루시엘이 다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반짝이는 눈물이 사방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어디에 쓰려고요?”

“나, 결혼, 결혼해야 해… 후사를, 으응, 흣, 낳아야 한다고… 했어… 아흐흑!”

하, 대책 없이 조소가 터져 나왔다. 꼴에 황후를 들인다니, 후계를 생산하려 하다니. 앞보다는 뒤를 만져줄 때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어떻게? 황후 대신 그쪽이 임신이라도 할 셈인가?

카인은 요도 플러그의 고리를 잡고 돌렸다. 플러그를 절반쯤 뽑았다가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하며 전립선을 눌렀다. 사정하지 못하도록 작은 구멍을 꼼꼼히 막았다.

“하지 마…! 나 가고 싶엇… 아흡, 윽, 가게 해줘, 응? 해주세요…”

시키지도 않은 경어까지 사용하는 걸 보니, 사정이 급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옛날의 카인이었다면 또 금방 마음이 약해졌을 거다. 루시엘이 원하는 대로 당장 플러그를 빼줬을 게 분명하다. 아니, 예전의 그였다면, 애초에 이런 강압적인 짓을 벌이지 않았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들의 관계는 다시는 전과 같아질 수 없으리라.

“충분히 갈 수 있어요. 루시엘.”

카인은 손을 뻗어, 땀에 젖어 달라붙은 루시엘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살짝 드러난 이마가 예뻤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 구멍이 막혀 있는데….”

“사정하지 않아도 오르가슴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그럴 리가, 하읏, 으응…! 못해. 그런 건 불가능… 아앗!”

“루시엘이라면 가능해요.”

카인이 단호하게 일축했다. 카인은 거세게 루시엘의 안을 치받는 동시에, 두 손가락으로 유두를 꽉 비틀었다.

“아…! 하, 하으읏-!”

순간 내벽이 확 수축했다. 부글거리던 체내의 열기가 일순간에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루시엘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면서 절정을 맞았다. 여전히 요도구는 막힌 채였다. 사정을 동반하지 않은 마른 절정이었다.

“루시엘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요.”

카인의 입술이 루시엘의 뺨을 스쳤다. 도장을 찍듯 그의 볼을 꾹 내리눌렀다. 루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흐느끼듯이 헐떡일 뿐이었다.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테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황제의 침소 앞을 서성였다. 일 분에 한 번씩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다듬어진 손톱이, 먹구름에 파먹히듯 빠르게 일그러졌다. 단테가 손거스러미까지 잡아 뜯으려는 그때,

“…….”

카인이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오래 세워둬서 미안하다는 흔한 사과도 없었다. 황제의 동생을 대하는 것치고는 버릇없는 태도였지만, 단테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카인을 지나쳐서 곧장 루시엘에게로 다가갔다.

루시엘은 침대 헤드에 상반신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두 뺨이 발갛게 상기되고, 이마에는 땀이 알알이 맺힌 것이, 영락없는 병자의 인상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프다’보다는 ‘선정적이다’가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단테가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 폐하.”

“무슨 일이지?”

루시엘이 두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서 단테를 노려보았다.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단테는 괜스레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해야 할 말을 힘겹게 이어갔다.

“이 결혼, 재고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뭔데 내 결혼에 참견이야?”

“녹시아 스승… 아니, 공주님은 이미 사랑하는 상대가 있습니다.”

“뭐?”

루시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막 결혼하기로 정한 여자한테 숨겨진 애인이 있었다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영원을 약속한 사이라고 했습니다. 연인을 두고 타지에서 결혼생활을 해야 한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물론 폐하는 이 사실을 모르셨으니 결혼을 승낙하셨을 테죠.”

한 번 입술을 떼자 말이 술술 나왔다. 단테는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나야 당연히 몰랐지.”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럼 당장 신하들에게 가서, 결혼을 취소하겠다고 말…”

“그런데 단테. 넌 타국의 공주에 대해 어찌 그리도 잘 아는 거냐?”

루시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설마 그 ‘사랑하는 상대’가 네놈인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스승님과… 녹시아 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자 인생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제자다운 마음으로 흠모하고 있어요.”

단테는 홰홰 고개를 저으며 손까지 함께 흔들었다.

“녹시아 님이 불행하면 제 마음도 편치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저는 은사님의 행복만을 바랄 뿐입니다. 녹시아 님이 기쁘면 저도 기쁘고, 슬프면 저 역시 슬퍼져요.”

“아, 그래? 그 공주가 슬프면 너도 슬퍼?”

각오했던 것보다 대화가 훨씬 술술 잘 풀려나갔다. 형이 이렇게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들어주다니. 형을 만나기 전, 신전에서 정성 들여 기도한 보람이 있었다. 역시 제 형은, 남들이 떠들어대는 것보다 배는 더 착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네. 그러니까 하나뿐인 동생인 저를 생각해서라도, 이 결혼은 취소하시는 것이…”

“그럼 절대 취소하면 안 되겠네. 이 결혼.”

“네?”

처음에는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제 청각과 이해력에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단테의 낯은 핏기를 잃었다. 와장창, 부서진 말들이 파편이 되어 고막을 아프게 긁었다.

“혀, 형님… 어째서 그런 말씀을….”

단테는 시든 입술을 간신히 비틀어 열었다. 또렷하게 말하려 할수록 발음은 뭉개졌다.

“어째서냐고? 우스운 질문이구나. 고민할 필요도 없지.”

이 상황이 재밌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루시엘이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아니, 올라간 것은 입술 양 끝뿐이다.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네놈이 불행해지기를, 이 세상 누구보다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단테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적막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단테는 그 바람 소리가, 비명이나 절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 형님이라니. 착각도 유분수지. 난 단 한 번도, 네놈을 동생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우리 어머니가 날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나시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아버지는 후궁을 들였지. 그 후궁에게서 나온 자식이 너다. 그런데도 동생 취급을 받길 바라는 거냐?”

루시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붉고 예쁜 입술을 움직여, 차가운 말들을 툭툭 뱉어낸다. 듣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문장들이 여과 없이 귀에 박힌다. 결국에는 이해해버리고 만다.

“총애하는 후궁이 낳은 아들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유독 너만 예뻐하시더군. 틈날 때마다 너 손을 잡고 나들이를 가시더구나. 내 손은 결코 잡아주시지 않았으면서.”

원망 섞인 어조였다. 그 원망의 화살은 모조리 단테를 향했다. 아버지는 구 년 전에 돌아가시고, 단테의 어머니도 같은 해에 자취를 감춘 판국이다. 이제 루시엘이 미워할 대상은 단테밖에 없었다.

그때 동생은 아직 어렸음에도, 따지고 보면 동생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유년기의 상처가 너무 큰 탓에,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모든 흉터의 책임을, 단테에게라도 돌리고 싶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네놈은 모르겠지. 혼자 남겨진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친아버지는 내게 관심조차 없다. 너만 없었어도, 아버지는 날 버리시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최소한의 애정이나마 베푸셨을 테지.”

어느덧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빛이 멋대로 흘러내렸다. 그중 어떤 빛은 루시엘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아, 단테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런 표정의 형은 처음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절대로 네놈을 좋아할 수 없어. 아니,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증오해. 내가 외로웠던 만큼, 아팠던 만큼, 너 역시 불행했으면 좋겠다. 네 불행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거다. 나는 제국의 황제다. 그 정도의 권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어.”

단테의 두 무릎이 허물어졌다. 그는 차가운 방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고, 눈물이 스민 눈동자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잠시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세요.”

이런 상황에서도, 단테는 여전히 루시엘을 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친한 척 형, 형 불러대기는…. 가식 떨지 마. 넌 영원히 나를 이해하지 못해.”

“물론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형님처럼, 저 역시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으니까요.”

“…….”

“돌아가신 건 아니고, 치료할 도리 없는 전염병 때문에 저 먼 시골에 격리되셨지만…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 잃었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겁니다.”

루시엘이 아무리 가시를 세워도, 단테는 여전히 다정하다. 다정하고 따스하다. 그 따듯한 말들을, 루시엘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냥함이 역류했다. 모조리 토해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더 형님이 눈에 밟혔던 건지도 모릅니다. 저도, 형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끼리, 이제라도 서로를 위로하면서…”

“닥쳐! 그 입 닥치라고!”

루시엘이 귀를 틀어막고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같은 슬픔이라고? 아니. 완전히 달라. 너의 어머니, 에스테릴은 전염병에 걸려 격리된 게 아니다. 살기 위해 변방으로 도망친 거야.”

목구멍 근처에서 꿈틀거리던 말이, 절대로 하면 안 되었던 말이, 끝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 말해버렸다. 감정에 휩쓸려서, 꼭꼭 감춰야 했던 진실을 토해버렸다. 막상 말하고 나니 속은 후련했다. 루시엘은 단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더, 몰아붙이고 싶었다.

“형…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미없습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곧바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채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에스테릴이 전염병에 걸렸다며 황궁을 떠났지. 황후의 아들이 황제가 되자마자, 황궁을 빠져나간 전 황제의 후궁. 이걸 보고도 떠오르는 게 없어?”

한 번 입술이 열리자 그 뒤로는 멈출 수 없었다. 루시엘은 단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서, 한 마디 한 마디 짓씹듯 내뱉었다.

“자, 그럼 생각해봐라. 단테. 네 어미가 왜 도망갔을까? 답은 뻔하지. 내가 자기를 암살할까 봐, 겁에 질려서 달아난 거다. 같은 슬픔을 지녔다고? 서로를 위로하자고? 아니, 그럴 수야 없지. 내 슬픔의 원인이 너이듯, 네 슬픔의 원인도 나인데.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다독이겠어?”

단테의 낯빛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경악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더 깊은 절망으로. 단테는 깨져가는 정신을 애써 수습하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그건 형님의 탓이 아닙니다. 진짜로 어머니를 죽일 생각은 없으셨잖습니까? 그저 오해가…”

“오해가 아니라면?”

“…네?”

“난 네 어미를 정말로 죽이려고 했다. 독을 먹여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하려고 했지. 그런데 눈치 하나는 빨라서 잽싸게 시골로 숨더구나. 어찌나 꼭꼭 숨었던지 찾아내지도 못했다.”

…하하. 단테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반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입가가 바르르 경련했다.

제 형은 또 이런다. 저에게 상처를 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형이 그럴 리가 없잖아. 형은 악인이 아닌걸. 자주 못된 말을 던지지만, 본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야. 형은 내가 선물해준 연고를 받아줬고, 잘 사용해줬고, 고된 업무로 지친 몸을 추스르고 내 얘기를 들어줬어.

주위 사람들은 형을 폭군이라고, 무능한 주제에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다고 욕하지만, 내가 아는 형은… 그런 사람이…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게 자신의 오해였다면? 주변인들이 맞고 그가 틀렸다면?

루시엘이 정말로… 극악무도한 폭군이 맞다면?

단테는 제 형을, 아니, 한때 형이라고 여겼던 이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은발도, 화사한 얼굴도 전과 다를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붉은 눈동자가 단테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끝없는 화와 시기심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단테는 깨달았다. 저것이 형의, 아니, 폭군의 진심이라는 것을.

“뭐,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지. 내가 황좌에 앉아있는 이상, 너와 네 어미는 영원토록 만나지 못할 테니까.”

루시엘의 발이 단테의 허벅지를 꽉 밟았다.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애초에 고통을 주려고 한 행위도 아니었다. 그저 굴욕을 주고 싶었다. 햇빛을 받지 않아 유난히 희고 가지런한 발이, 힘을 실어 단테의 허벅지를 짓눌렀다.

단테는 고개를 떨구었다. 루시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눈을 마주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황제의 멱살을 잡아 흔들지도 몰랐다.

단테는 잠잠히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 아래에서 희고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 들어. 시선 피하지 말고, 내 얼굴을 똑똑히 봐.”

루시엘이 단테의 턱을 잡아들었다. 허리를 굽혀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단테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눈빛은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 이게 맞았다. 자신과 단테 사이에, 형제간의 우애는 필요 없었다.

“그 눈빛은 뭐지? 신하들에게 이르기라도 하게? 말해봤자 죄가 될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실제로 에스테릴을 죽인 것도 아니니 말이다.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도 없지.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것을.”

사특한 눈꼬리가 샐쭉 접혔다. 단테의 귓가에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 대고서, 루시엘은 퍽 들뜬 음성으로 속삭였다.

“네 스승이라는 그 여자, 이름이 녹시아라고 했던가? 녹시아와의 결혼식이 기대되는구나. 내년 3월이라고 했었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끝내 황제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일단 단테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지금 여기서 혼잣말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려봤자, 단테한테는 닿지 않겠지만.

단테는 지금 황제의 멱살을 잡은 죄로 감옥에 있다. 그래도 오래는 안 있고, 한 삼일 정도만 살다가 나올 거다. 혹시라도 감옥이 추울까 봐, 마법으로 바닥을 후끈후끈하게 데워 놓았다.

참고로 단테 옆방에는 힐데인 백작이 갇혀 있다. 힐데인 백작은 단테를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 중 하나다. 분명 단테에게 이런저런 작업을 걸 테지. 백작의 설득이 통하기를 간절히 빌어야겠다.

내가 단테한테 한 얘기들은 거의 다 거짓이다.

단테의 어머니, 에스테릴은 전염병 때문에 격리당한 게 맞다. 그리고 나는 네 번째 생에서 배운 치료술을 활용해서, 꾸준히 에스테릴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치료술사로 변장하고, 매주 시골로 내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처음 접하는 종류의 병이라, 초반에는 치료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그러나 장장 구 년에 달하는 노력 끝에, 에스테릴의 병은 조금씩 완화되고 있었다. 아마 이 속도라면 올겨울에 완치될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침상에서 끙끙 앓을 일도, 남에게 병을 옮길 일도 없을 테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도 마음껏 만날 수 있다.

에스테릴이 다 나으면, 나는 기억 조작 마법을 써서 그녀의 기억을 바꿔놓을 거다. 사실 그녀는 병에 걸린 적이 없고, 루시엘을 피해 변두리로 피신을 온 거라고 말이다. 거짓을 참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흑마법의 특기다. 단테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녀는 아들을 만나러 황궁으로 돌아올 거다.

에스테릴 이야기는 내 비장의 카드였다.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던 카드이기도 했다. 가능하면 녹시아 결혼 건에서 단테를 각성시키고 싶었는데, 단테가 너무 착했다. 온갖 험한 말을 듣고도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다니.

나는 고민하다가 자연스레 단테의 어머니 얘기를 꺼냈고, 그 결과가 이거다. 착하디착한 단테가, 성자의 현신이라고 불리는 동생이, 내 멱살을 잡았다. 카인에 의해 곧바로 제압당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단테한테 사과할 게 하나 더 있다. 나는 순수하게 단테의 허벅지만 밟으려고 했다. 그래서 왼쪽 허벅지에 발을 올렸는데… 아. 단단한 허벅지 위에 뭔가 말캉하고 두툼한 게 만져지더라. 나는 본의 아니게, 내 동생의 수납 방향을 알아버렸다. 좌수납이었구나.

그렇다고 질색하면서 떼는 것도 이상해서, 눈치 없는 척 계속 밟고 있었다. 그래도 약하게 눌렀으니까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동생은 나를 대신해 황위에 올라야 한다. 황제가 고자면 곤란했다.

단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단테의 어머니를 구해내었다. 어머니의 병은 단테가 가진 가장 큰 아픔이었다. 어머니를 만난다면, 단테는 더 이상 슬프지 않을 것이었다.

어쨌든 동생 일은 나름대로 잘 해결했는데, 이제는 또 카인이 문제였다.

단테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카인은 언짢은 표정으로 나와 단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발이 단테의 허벅지를 꾹 밟았을 때에는 얼굴이 완전 사색이 되었다. 보통 사람은 분간하지 못했을,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카인, 무슨 일이야? 안색이 나빠 보여.”

나는 손바닥으로 카인의 이마를 짚었다.

“이상하네. 열은 없는데, 뭐가 문제지?”

“…루시엘.”

“응?”

“남의 허벅지를 막 쓸어내리는 건 좋지 않아요.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도 그렇고요.”

“어, 그, 그래….”

카인은 이제 내 파탄 난 인성보다는, 외간 남자와의 스킨십 정도를 더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다. 허벅지를 밟는 걸 스킨십이라 봐야 하나 싶기는 한데, 하여튼.

“그럼 우리, 아까 하던 거 마저 할까요?”

카인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서, 내 발목을 잡고는 복사뼈에 가볍게 키스했다. 입술이 발등에 닿았다. 간지러운 감각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루시엘은, 본인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자각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카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 누군지 모를 이의 모습이 비친다. 은빛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는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흐물흐물 풀린 눈동자나,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복숭아색 혀는 낯설기만 하다. 수치심도 없는지 넓게 벌어진 다리와, 꾸물꾸물 선액을 흘리는 작은 구멍. 손가락으로 안쪽을 들쑤실 때마다 찔꺽거리는 물소리가 새어 나온다.

루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저 거울 속 남자는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가 있지.

손가락이 구멍을 확장시키듯 내벽을 문지르자, 남자의 입에서 달콤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던 얼굴이 열락으로 빠르게 녹아내렸다.

“이상한 표정…”

루시엘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하하, 등 뒤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으응…?”

“거울에 비친 게 자긴지도 모른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확 들었다.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루시엘은 눈을 크게 홉뜨고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울을 응시했다. 루시엘이 눈살을 찌푸리자, 거울 속 남자도 동시에 눈썹을 구겼다. 흐무러진 얼굴로 삽입을 졸라대는 저 사내는,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아, 안 돼, 싫어….”

루시엘이 거세게 도리질 쳤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손가락이 반쯤 빠져나갔다가 강하게 푹 꽂혔다. 도톰한 전립선을 손끝으로 굴리듯이 자극했다. 그간 차곡차곡 누적되었으나 느끼지 못했던 쾌감이, 한꺼번에 하복부를 치받았다.

“흐익, 아, 아흑!”

루시엘이 반사적으로 다리를 꼬옥 오므렸다.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 카인은 뒤에서 루시엘의 양 허벅지를 붙잡았다. 아무것도 감추지 못하도록, 다리를 넓게 벌려 놓았다. 치부를 숨기는 일 따위가 용납될 리 없었다.

루시엘은, 제 모든 것을 또렷이 봐야만 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발기해서,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연분홍빛 성기. 이물질을 삼켜보겠다고 힘겹게 입을 벌리는 작은 구멍. 빳빳하게 펴진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망막에 때려 박아주고 싶었다.

“똑바로 보셔야죠.”

“시, 싫어, 표정 이상해… 보고 싶지 않아… 하읏!”

루시엘의 턱을 잡아 올려 강제로 앞을 보게 만들었다.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겁에 질린 얼굴은 예뻤고, 할 말을 잃고 뻐끔거리는 입술은 귀여웠다.

루시엘은 두 손을 모아, 필사적으로 제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두 팔을 잡아 등 뒤로 고정시키고, 근처에 나동그라진 허리끈으로 손목을 꽁꽁 묶었다. 루시엘이 흐흡,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똑똑히 보세요.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제 기사의 좆을 집어삼키면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뭉그러진 애널에서 손가락이 뽑혔다. 귀두 끝이 구멍에 닿았다. 선단으로 구멍을 살살 문지르기만 했는데, 촘촘한 주름이 레이스처럼 펴지며 멋대로 귀두에 달라붙었다. 삽입 당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듯, 오물거리며 성기를 자극했다.

카인은 루시엘의 무릎 뒤를 잡고서, 그의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천천히 허리를 아래로 내리자, 성기가 조금씩 안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느리게 삽입하며, 루시엘이 이 광경을 충분히 눈에 담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애널이 마치 입을 맞추듯, 굴곡진 살기둥을 받아들였다. 체중 때문인지 성기는 평소보다 더욱 깊게 삽입되었다.

“후읏, 아, 아악-!”

루시엘은 꿰뚫린 것만으로도 간단히 가버렸다. 사출된 정액이 거울을 더럽혔다.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고, 벌어진 입 안에서 새빨간 혀가 파르르 떨렸다.

흐릿해진 시선이 거울을 훑었다. 초점을 잃고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 얼핏얼핏 보이는 흰자위. 체액으로 젖어든 눈시울과 입술. 아, 이런 건 이상하다. 맨정신이 아닌 상태로도 알 수 있었다.

황제라면 마땅히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여야 하는데, 자신의 표정은 위엄과는 거리가 멀다. 돈을 벌려고 아양을 부리는 남창 같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 비유는 옳지 않다. 그들은 손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신음을 꾸며내지만, 루시엘은 다르다. 꾸며내지 않은 온전한 진심이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자제할 수 없는 교성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으극, 아, 아흐… 움직, 이지 마아… 나, 나 방금 가서, 또 가버리면…”

“혼자서 먼저 가버린 루시엘이 나빠요.”

카인은 루시엘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퍽, 퍽 하는 타격음이 공간을 울렸다. 희었던 볼깃살이 마찰로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히윽, 아, 아앙!”

한 번 더 절정이 찾아왔다. 충혈된 성기에서 정액이 물처럼 줄줄 흘렀다. 바깥쪽으로 허리가 둥글게 말렸다. 루시엘은 카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은빛 머리칼을 문지르며 흔들었다. 흉흉한 성기가 배꼽 아래를 들쑤실 때마다, 활짝 벌어진 다리가 맥없이 버둥거렸다.

“빼애… 빼 줘어, 흐읍, 아악…!”

카인이 천천히 성기를 뽑아내었다. 성기를 꽉 감싸 쥐던 내벽이 살기둥에 붙어 딸려 나왔다. 바깥바람에 붉은 속살이 언뜻 노출되었다. 히익- 루시엘이 새된 신음을 뱉어냈다. 잡을 것을 잃은 구멍이 허전하다는 듯 벌름거렸다. 그 모습까지도 거울에 선명하게 비쳤다.

그의 둔부를 두 손으로 잡아 벌리고, 다시금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하지 말라고 고개를 흔들어대면서도, 내벽은 꿈틀거리며 좆을 강하게 조였다.

카인이 마침내 루시엘의 안에 사정했다. 뜨거운 열이 안쪽으로 쏟아졌다. 정액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루시엘 또한 한 번 더 절정을 맞았다.

거울 속의 자신과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쾌감으로 붉게 달아오른 난잡한 얼굴. 시선을 밑으로 내리면, 정액으로 얼룩진 아랫배와 통통하게 부어오른 회음부가 눈에 들어왔다. 빠끔거리는 구멍에서는 백탁액이 망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루시엘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야릇하게 부은 눈덩이 위로, 카인의 입술이 닿았다. 그 입술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정사 후의 방은 항상 고요했다. 루시엘이 늘 먼저 기절하듯 곯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낯빛으로, 루시엘은 새근거리며 잠에 빠졌다.

잠든 주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기사의 맘속으로 쓸쓸함이 물안개처럼 스며들고는 했다. 그리고 외로움의 농도는 오늘따라 짙었다.

방금 전 단테와 루시엘의 대화를 들으며, 카인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다.

차라리 단테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단테가 루시엘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루시엘은 결혼 같은 거, 영원히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허나 그것은 루시엘을 비참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증오해 마지않는 동생에게 왕관을 빼앗기다니. 이보다 더 큰 굴욕은 없을 것이다. 자존심 강한 루시엘의 성격상,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루시엘의 호위 기사인 자신이, 단테가 황제가 되기를 바란다니. 그것은 명백한 죄였다. 루시엘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었다. 카인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루시엘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카인의 곁에서 평생을 머문다. 폐제의 몸으로 좁은 방 안에 갇혀서, 그렇게 간신히 숨만을 이어간다. 그 행복한 미래는, 필연적으로 루시엘의 불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루시엘을 소유하고 싶다. 그때의 푸른 장미처럼, 시들더라도 자신의 옆에서 말라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론, 루시엘이 너무 힘들어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은연중에 루시엘이 폐위되기를 꿈꾸기는 했으나, 폐위된 후 누가 왕위에 오를 것인지는 고려해본 적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빈 황좌에 앉을 자는 단테밖에 없었다. 그는 루시엘 다음으로 황족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이였으니.

루시엘이 타인의 옆에서 행복하기보다는, 제 곁에서 불행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불행해지길 원하지는 않았다.

나의 사랑이 루시엘을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혹여나 루시엘이 정말로 죽음을 바라게 된다면…

역시 그런 사랑 따위는, 집어치우는 게 낫겠다.

날 선 충동이 가슴을 저몄다. 카인은 최면 추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 펜듈럼을 쓸 상대는 루시엘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깊이 생각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둘 중 하나가 죽을 것 같았다. 그든 그의 주군이든, 한쪽은 반드시 파멸하고 만다. 사랑 때문에 참혹히 무너지게 된다.

녹슨 동전이 눈앞에서 흐리게 반짝였다. 그 찢기고 멍든 빛이, 카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동전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추의 움직임을 눈동자로 쫓으며, 카인은 이렇게 읊조렸다.

“나는 루시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에게 거는, 처음이자 마지막 최면.

“나는 루시엘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루시엘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반복했을까. 그것은 수십 번일지도, 어쩌면 수백 번일지도 몰랐다. 카인은 가까스로 동전에서 눈길을 떼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루시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깊은 밤이었다. 서너 개의 촛불만이 어둠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촛불의 심지는 검게 타 죽어가고, 촛농은 두 눈을 부릅뜨고 희게 굳어간다.

그 얼마 되지 않는 빛으로도, 루시엘의 나신은 선연하게 보였다. 매끄러운 피부가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루시엘이 잠결에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은빛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반짝였다. 은하수처럼.

아, 어째서.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카인은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헐떡였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가느다란 숨을 애써 몰아쉬었다.

기사의 눈동자에 비친 황제는,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이 추를 판 흑마법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명령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하면, 최면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고. 연인에게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최면을 걸었는데, 최면이 들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고.

‘그렇구나. 나는…’

카인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시엘은 여전히 잠에 취해있고, 카인의 심장은 아직도 거세게 박동하고 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루시엘은 아름답고, 반짝이고, 사랑스럽다.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다.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고 싶다. 행여 그 ‘무슨 수’라는 것이, 단테를 황제로 만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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