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0)

2. 신이여 나를 버리소서

방안은 성교의 열락으로 뜨거웠다.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온 열감이, 루시엘의 머릿속을 녹여가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 이드의 좆을 문 채, 클로에에게 박히고 있었다.

성기가 목구멍과 직장 점막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대었다. 우욱, 윽, 신음조차 되지 못한 뭉개진 흐느낌이 틀어막힌 입술 사이로 흘렀다. 그의 몸이 앞뒤로 거칠게 흔들렸다.

숨이 턱턱 막혔다. 윗입과 아랫입을 동시에 쓰는 것은, 아무리 꿈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시엘은 컥컥대며 입안에 삽입된 성기를 뱉어내었다. 뽑힌 음경이 그의 이마와 콧등에 문질러졌다.

“똑바로 빠셔야죠.”

“이드, 나 힘들… 우웁-”

이드가 루시엘의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턱을 잡아 억지로 벌리게 한 후, 다시 제 좆을 밀어 넣었다.

쯔걱, 허리를 쳐올리자, 산소가 부족한지 루시엘의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뒤집혔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새하얀 목줄기가 드러났다. 그의 목은 잇자국과 키스 마크로 엉망이었다. 이드와 클로에가 번갈아 가며 남겨놓은 자국이었다.

클로에는 루시엘의 골반을 꽉 틀어잡고 퍽, 퍽, 추삽질을 했다. 이 작은 구멍에 돌아가며 몇 번을 사정했던가. 흐무러진 내벽은 별다른 저항 없이 완만하게 좆을 집어삼켰다.

성기가 내벽을 치받았다. 꽉 들어찬 접합부에서 온갖 체액들이 굼실굼실 흘러나왔다. 액체들이 허벅지를 타고 시트로 망울져 흘렀다.

그리고 곧 정액이 윗입과 아랫입으로 동시에 퍼부어졌다. 뜨거운 액체가 전신을 꽉 채우는 감각이, 루시엘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는 혓바닥에 비벼지는 진득한 백탁액을 간신히 받아 마셨다. 정액이 식도와 직장 벽에 달라붙었다. 루시엘은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렸다. 삼키지 못한 정액이 말간 타액과 섞여 혀끝에 방울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풀린 것 같은데.”

클로에는 루시엘을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마른 등을 가슴으로 받치고서, 이드가 볼 수 있도록 루시엘의 다리를 넓게 잡아 벌렸다.

천 한 조각 걸치지 않은 치부가 훤히 드러났다. 팽팽히 발기한 성기는 선액을 질금질금 흘리고 있었고, 배 위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액이 잔뜩 말라붙어 있었다.

도톰하게 부푼 애널이 빠끔거리며 백탁액을 토해내었다. 성기 두 개를 삼키기에는 아직도 빽빽해 보였지만, 강제로 밀어 넣는다면 어떻게든 들어갈 터였다.

클로에의 것이 다시금 안쪽을 짓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루시엘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서, 왼손으로 이드를 향해 손짓했다.

이드는 무릎걸음으로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이미 좆으로 꽉 들어차 있는 구멍에, 이드의 손이 와 닿았다.

비좁은 애널 안으로 오른쪽 엄지를 밀어 넣어 공간을 만들었다. 작은 틈 사이로 제 성기를 맞추고서, 느릿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선홍색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좆 두 개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아으, 흣, 너무, 커서… 조금만 천천히… 히익…!”

꿈인데도 촉감이 무척 생생했다. 루시엘은 고개를 수그려 접합부의 상태를 살폈다. 채 절반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벌써 복부가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아, 잠시만… 배가 터질 것 같, 흐윽, 흣!”

“엄살 부리기는.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당신. 아프고 괴로운 거.”

이드의 손이 루시엘의 양 볼을 감쌌다. 축 처진 그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루시엘은 이드를 따라 부드럽게 혀를 움직였다. 서로의 민감한 입천장을, 여린 볼 점막을, 고른 치열들을 혀끝으로 낱낱이 쓸었다. 황홀한 키스가 아릿한 통증을 완화시켜주었다. 그 와중에도 성기는 조금씩 안쪽으로 진척하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긴 삽입이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구멍이 성기 밑동을 가까스로 잡아 물었다. 두 사내 사이에 낀 보드라운 육체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장기가 압박되고, 안쪽이 최대한으로 벌어지는 감각. 보통 이들이라면 버겁게만 느꼈을 그 감각을, 루시엘은 꽤나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살기둥의 윤곽을 더듬다가 가볍게 눌렀다. 안 그래도 꽉 찬 안쪽에 또 다른 압력이 더해졌다. 불거진 혈관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커윽, 흡, 전신이 잘게 떨렸다.

곧, 클로에와 이드가 허리 짓을 시작했다. 두 물건이 번갈아 가며 루시엘의 안쪽을 헤집어놓았다. 규칙이라고는 없는 완연한 엇박자였다. 예측하기 힘든 추삽질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나가 전립선을 짓누를 때면, 다른 하나는 결장 부근을 짓이겼다.

직장 깊은 곳까지 성기가 삽입될 때마다, 잔뜩 무르익은 내부가 살기둥을 옥죄었다. 복상사로 죽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쿵, 쿵, 둔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이게 심장에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접합부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클로에, 이드…. 다른 곳도, 다른 곳도 만져줘.”

그는 물기 어린 어조로 연인들에게 애원했고, 두 연인은 기꺼이 화답했다.

클로에는 루시엘의 목뒤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붉은 순흔이 곧은 등줄기를 따라 송이송이 피어났다. 그에 질세라, 이드가 루시엘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마치 루시엘의 몸을 두고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희디흰 살결 위로 키스 마크가 몇 겹씩 덧씌워졌다.

“아흣, 흑, 좋아, 좋아해, 클로에… 이드도….”

“저도요. 사랑해요, 나의 루시….”

어디를 애무해도 루시엘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온몸이 성감대 같았다. 없는 가슴살을 애써 끌어모아 주무르면 새된 비명을 질렀고, 유두를 검지 배로 짓이기면 혀를 내밀고 헐떡거렸다.

휘청거리던 상체가 앞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이드가 그의 몸을 받쳐 안았다. 루시엘은 이드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울먹였다. 아파서 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각은, 오로지 쾌감뿐이었다.

“고개 숙이지 말고. 여기, 저를 보셔야죠.”

이드는 루시엘의 머리채를 잡아 올려, 저와 눈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거친 손길이었다. 루시엘의 욕망이 꿈에 다분히 반영된 탓이었다.

“흐, 아, 하응, 이, 이드… 흐으, 아아…!”

루시엘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미지근한 액체가 뺨에 긴 궤적을 그렸다. 이드는 짓무른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짐짓 다정하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상냥한 것은 손길뿐이었고, 아래를 들쑤시는 허리 짓은 다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단한 귀두가 점막을 짓쳤다. 하나가 빠져나가면 다른 하나가 치고 들어왔다. 루시엘이 힘없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눈물이 밀알처럼 비산했다. 눈물은 닦아내도, 닦아내도 계속해서 흘렀다.

“예뻐요, 루시엘.”

“하응, 아, 힉, 읏!”

“우는 모습 정말 예쁘다. 더 많이 울어줬으면 좋겠는데.”

이드는 루시엘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가냘픈 목은 양손으로 잡히고도 한참 남았다. 루시엘이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그에 맞춰 울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드, 지금 뭘 하려는….”

루시엘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루시엘은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목 졸리면서 흥분하고, 변태 같아.”

이드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아프지는 않게,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아으, 큭, 으윽-”

기도가 좁아 들었다.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한 탓에, 안 그래도 아득했던 머릿속이 더욱 흐무러졌다. 루시엘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버둥거렸다.

목을 짓누르는 손과 아래쪽을 짓이기는 좆. 강렬한 자극이 위와 아래를 동시에 괴롭혔다. 목구멍에서는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겨우 새어 나왔다. 산소를 갈구하며 애타게 뻐끔거리는 입술 틈새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루시엘의 세계에서, 폭력과 쾌락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호흡을 통제당하는 느낌은 기분 좋았다. 과다한 쾌감에 의식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깜빡, 깜빡. 천장의 마법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꿈속의 조명도 저렇게 깜박일 수 있는 건가.

아니, 고장 난 것은 제 머릿속일지도 몰랐다. 조명이 아닌 뇌 내가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껌벅, 껌벅. 점멸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깜빡. 완전한 암전이 루시엘을 덮쳤다.

“아흣, 으응…!”

조명에 갑자기 불이 켜지듯, 삽시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루시엘은 황급히 눈을 떴다. 앞과 뒤에 변함없이 더운 체온이 느껴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클로에가 앞쪽, 이드가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안쪽을 헤집는 성기는 여전히 두 개였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잘 쓰러지는 건 어느 생에서나 똑같다니까….”

루시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이며, 클로에가 나긋하게 속살거렸다.

“그래서 항상 루시에게 부드럽게 대해주고 싶었어요. 조금만 거칠게 안아도 다칠 것 같아서, 아프다고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아서.”

“클로에…”

“아픈 걸 좋아하는 취향일 줄은 전혀 몰랐네요.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요?”

“크, 클로에 네가… 평범한 섹스를, 흐읏, 좋아하니까아… 평범한 연애를, 하으, 윽, 원하니, 까앗…”

목을 조르고 있는 손도 없는데 숨이 막혔다. 루시엘은 갈급하게 열 오른 숨을 들이마셨다.

“아아, 저를 위해서 취향을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으응. 맞아….”

루시엘은 지난 연애를 회상했다. 카인은 모든 생에서 바르고 순했으며, 그중 클로에는 특히 더 상냥했다. 사귄 후 키스를 할 때까지 무려 1년이 걸릴 정도였다.

마조히스트인 루시엘. 절대로 사디스트가 될 수 없는 클로에. 루시엘은 클로에의 취향에 저를 맞추었다. 사랑하기에, 제 은밀한 욕망을 꼭꼭 감췄다.

“숨기느라 고생했어요.”

클로에가 루시엘의 어깨를 잘근잘근 짓씹었다. 깨물린 자리가 열상을 입은 것처럼 화했다. 루시엘은 양팔을 뻗어, 클로에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넓고 따듯한 등이었다.

클로에의 입술이 루시엘의 입술 위로 덮였다. 이드와는 다르게 유한 입맞춤이었다. 끈끈한 은실이 입술에 달라붙었다. 달큰한 숨결이 진주알처럼 입천장과 혓바닥 위를 굴렀다. 단단히 맞물린 입술 틈새로, 들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클로에가 입술을 떼었다. 침이 거미줄처럼 길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루시.”

조금은 씁쓸하게,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감추지 않아도 괜찮았을 거예요.”

그가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단단한 귀두가 전립선을 정통으로 내리찍었다.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크게 맥박치더니,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아, 아아-”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뒷구멍을 조였다. 내벽이 수축하며 아플 정도로 두 성기를 잡아 물었다.

확 벌어진 동공 안으로 흰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시야가 창백하게 질렸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시각도 청각도 지금은 무용했다. 다만 쓸모 있는 것은 촉각뿐이었다. 쾌감이 전신을 예리하게 들쑤셨다.

“하으응-”

요도구가 벌름거리며 무엇인가를 배출했다. 정액은 아니었다. 색깔도 냄새도 없는 투명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체액으로 범벅이 된 시트에, 또 하나의 얼룩이 생겨났다.

클로에와 이드가 느릿하게 성기를 뽑아내었다. 벌어진 애널이 움찔거리며, 정액을 콸콸 쏟아내었다. 벌어진 게 언제였냐는 듯 또 빠르게 수축했다.

클로에의 시선이, 루시엘의 나신을 진득하게 훑었다. 무른 살갗 위에 순흔들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클로에가 키스 마크를 남기면, 이드가 그 위에 잇자국을 덧씌웠다. 두 연인의 욕망을 고스란히 받아낸 몸은 엉망이었다.

엉망이라고 하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흠 없이 깨끗했던 그 전의 육체도 좋았지만, 지금의 흐트러진 모습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더 범하고 싶어질 만큼.

“벌써 지치신 건 아니겠죠?”

클로에는 루시엘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정액과 애액, 온갖 체액들이 거품 진 구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성기가 처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루시엘, 정신이 들어요?”

카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루시엘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꿈속과는 다르게, 현실의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루시엘은 발가벗고 있는 대신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몸에서 뽀송한 비누 향이 났다.

“카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난 분명 촉수에게 당해서…”

루시엘이 더듬거리며 제 호위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목소리가 몽롱하게 흐려져 있었다.

물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치료라고 쓰고 수면간이라고 읽는 행위를 한 후, 루시엘을 깨끗이 씻겨놓은 것이겠지. 일단은 작전상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것보다 제 질문에 먼저 답해줄래요?”

카인이 루시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펴게 한 후, 손바닥 위에 진실의 눈동자를 올려놓았다. 반 뼘 크기의 돌은 사늘하고 딱딱했다. 반짝, 반짝. 광석이 조명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클로에랑 이드가 누군가요?”

그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눅눅한 골목처럼.

나는 자주 거짓말을 한다. ‘자주’라는 표현도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많이. 남들이 보는 내 모습부터가 거짓으로 조각된 것이니 말 다 했다.

이번에 계곡에서 아련한 표정으로 고백한 이야기들 역시 대부분 거짓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도 맞고, 나랑 단테를 대놓고 차별한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단테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이복동생보다는, 피가 아예 섞이지 않은 카인이 더 가족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 실은 그것도 거짓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진실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애당초 단테는 황제의 자식이 아니다. 단테의 친어머니가 남편 몰래 바람을 피워 생겨난 아이다. 그 비밀을 아는 자는 세상에 오직 하나, 나밖에 없다. 단테의 생부도 친모도, 심지어는 단테 본인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단테의 생부는 자안을 가졌고, 친모는 흑안을 가졌다. 그런데 단테의 눈동자는 붉은색이다. 전 황제와 똑같은 색. 비록 머리색은 은색이 아니라 빛바랜 회색이었지만, 황제는 단테를 제 아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원래 단테는 제 생부에게서 머리색과 홍채 색을 물려받아야 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환한 금발과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황제의 친자식은 아니었다.

만약 단테가 그 머리와 눈 색 그대로 태어나게 된다면, 황실이 발칵 뒤집힐 것은 뻔했다. 단테의 어머니는 황제를 우롱한 죄로 처형당하고, 단테 또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될 터였다.

그런 결말은 단테에게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좋지 않았다. 나는 폐위를 당해야 한다. 만약 단테가 황제의 핏줄이 아닌 게 밝혀진다면, 나는 황제의 유일한 장자가 되어버린다. 반란도 황위를 물려받을 사람이 있을 때나 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단테가 태어나기 전에, 마법으로 그의 눈과 머리색을 바꿔놓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완벽한 은발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은발은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이며 고귀한 황실 혈통의 상징이다. 마법으로 함부로 모방할 수 있는 색깔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 흑마법으로는 차분한 회색을 덧입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황제는 단테의 머리색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납득한 것 같았다. 이번 아기는 축복을 조금 덜 받았나 보다, 하는 식이었다.

촉수에게 범해지는 모습도 당연히 연기였다. 나와 촉수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이다. 촉수의 이름은 ‘토토’. 내 귀여운 애완촉수다. 토르토파를 줄여서 토토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토토는 말을 조금 안 듣기는 해도 착한 아이였다. 이번 생에서 나는 카인을 꽤 늦게 만난 편이었다. 카인을 만나기 전인 스물다섯 살까지, 나는 늘 외로웠고, 홀로 침대에 누워 청승맞게 쓸쓸함을 곱씹고는 했다.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물인 토토였다. 토토는 스멀스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다독였다. 인간의 체온처럼 따스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서늘한 온도에서 무엇보다 큰 위로를 얻었다.

가끔은 위로가 너무 과해질 때도 있었다. 어깨를 어루만지던 촉수가 갑자기 가슴팍을 지분댄달지, 등이 아니라 엉덩이를 토닥이려고 한달지 등등.

그때마다 나는 애써 토토를 달랬다. 내 처음은 사랑하는 카인에게 주기로 결심했다고. 그러니까 너는 조금만 참아달라고. 토토는 그만하라고 말하면 일단 멈추기는 했지만, 다음 날이 되면 시치미를 뚝 떼고서 다시 내 엉덩이를 만져댔…

…착한 게 맞나?

음. 착할 거다. 아마도.

이번 계획에서 토토의 역할은, 적당하게 나를 만지다가, 적당한 수준의 알을 낳고서 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교미에 너무 신난 건지, 아니면 나랑 속궁합이 끝내주게 잘 맞은 건지… 토토는 원래 계획했던 알맞은 선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열정적이고 본격적으로 나를 범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먹만 한 알은 역시 좀 그랬다. 이번 생에서 내 육체는, 아직 성 경험이 별로 없단 말이야. 좀 봐주면서 설렁설렁해도 됐잖아.

그래서 싫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몸은 좀 버거웠지만 기분은 끝내주게 좋았다. 카인이 토토의 핵을 꺼내지만 않았어도, 계획은 나름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을 터였다.

솔직히 인정하겠다. 토토가 제압당한 건 내 불찰이다. 카인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핵이 그 부위에 숨겨져 있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짐승의 본능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토토가 자발적으로 사라지는 게 본래 계획이었는데, 결국에는 카인이 토토의 핵을 빼내 버렸다. 핵이 아예 부서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핵만 온전하다면 토토를 다시 재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핵은 지금, 내 손에 들려있었다. 카인이 억지로 쥐여준 것이었다. 그는 상처받은 짐승을 닮은 눈망울로, 묵묵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건대, 카인은 토토의 핵이 ‘진실의 눈동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질문이든 던져봐라. 교묘하게 핵심만 회피해서 대답해주마.

“클로에랑 이드가 누군가요?”

“아아, 내 전 애인이야.”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전생에 사귄 애인이었으니 엄밀히 보면 ‘전 애인’이 맞았다.

애인, 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카인의 오른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황제가 성 경험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예상은 했지만, 설마 애인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눈치였다.

내가 구축한 ‘루시엘’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폭군이었다. 한 여자에게 정착해 연애라는 걸 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 추측이 그나마 카인에게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몸 말고 마음까지 통하는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되뇌며 질투심을 겨우겨우 억눌렀을 것이다.

그런데 ‘루시엘’이 연애를 했었다니….

카인은 루시엘의 연인을, 그리고 연인을 보며 밝게 미소 짓는 루시엘을 상상했다.

루시엘이 웃는다. 그보다 한 뼘은 더 작은 여인을 품에 안고서. ‘사랑해’라는 무거운 문장을 가볍게 입에 담으며 생글거린다. 상상 속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서, 카인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을 것 같다.

“많이 좋아했어요?”

카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고저 없는 어투. 나는 부러 단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결혼을 약속할 정도로 사랑했어.”

결혼이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들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진실의 눈동자는 여전히 희디흰 빛을 띠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니 당연했다.

“지금까지 연애를 몇 번이나 해보셨는데요?”

“흠, 10번은 넘을걸?”

이 말 역시 진실. 연애 상대가 전부 전생의 너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럼… 방금 꾸신 꿈은 무슨 내용이었어요?”

“전 애인 두 명이랑 동시에 섹스하는 꿈.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어봐?”

카인은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말문이 턱 막힌 것 같았다. 카인의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보일까.

술 퍼마시고 사치 부리면서 국가 돈 낭비하는 와중에 꼬박꼬박 연애는 하고. 촉수 점액에 당해 허덕이면서 전 애인들이랑 셋이서 떡치는 꿈이나 꾸고. 심지어 그걸 갓 스물이 된 제 기사한테 당당하게 털어놓는다.

내가 설정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정말 답이 없었다. 슬슬 카인의 정신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카인의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멀쩡해 보이는 낯빛과는 다르게, 그의 속은 필시 가장자리부터 너저분하게 썩어가고 있으리라.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남자하고는 교제해 볼 생각 없으시나요?”

귀여운 질문이었다. 스무 살 다운 물음이기도 했다.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척 눈가를 구겼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네. 남자든 여자든 간에, 더 이상 누군가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 내 지난 사랑들은 전부 마무리가 안 좋게 끝났거든. 이번에 또 연애를 한다면, 분명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겠지. 연애는 내게 사치야.”

나는 잠잠히 눈을 내리깔았다. 두 눈 속에 차오른 쓸쓸함은 연기가 아니었다.

연애는 사치다. 순애는 죄다. 사랑은 너의 육신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썩게 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다정한 손길이나 따스한 사랑의 밀어 따위가 아니다. 집착과 감금, 폭력과 강압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 될 것이다.

진실의 눈동자는 일곱 번까지 쓸 수 있을 텐데, 카인은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말없이 토토의 핵을 만지작거렸다. 토토를 생각하니까 또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조금만 참아, 토토야. 형이 곧 너를 살려줄게. 나는 핵을 슬쩍 잠옷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고…

“그거 제 겁니다. 다시 돌려주세요.”

카인에게 딱 걸렸다.

아. 제발. 너는 모르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핵은 내 소유라고. 내 애완촉수인, 아니, 애완촉수였던 토토의 핵이란 말이야.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애완촉수니, 토토니 하는 얘기들을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한테 주는 거 아니었어? 네가 너 손으로 직접 건네준 거잖아. 줬다 뺏는다니 치사하다, 정말.”

나는 결국 성격 더러운 폭군답게 ‘우기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카인 앞에서 대놓고 성격 더러운 티를 내는 건 처음인데, 조금 떨리네.

“그건 준 게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잠깐 쥐여 준 거예요.”

“잠깐 쥐여줘?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나 줘. 갖고 싶단 말이야.”

“…저 돌이 뭔지는 알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예쁘잖아. 다이아몬드인가? 다이아몬드치고는 색이 희끄무레하긴 하네. 뭐든 간에 내 보석함에 넣어놓으면 딱 좋겠다.”

정정하겠다. 이건 뭐 딱히 폭군 같지도 않다. 그냥 사탕 많이 먹고 싶다고 떼쓰는 꼬마 같다. 나보다 한참 어린애랑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힘겹게 민망함을 이겨냈다. 눈앞에서 토토를 뺏길 수는 없었다. 진실의 눈동자를 넘기기 싫은 건, 카인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광물이라니. 그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을 터였다.

미안해. 카인. 다른 거라면 뭐든 너한테 양보했을 건데. 이것만은 안 되겠다. 토토가 이렇게 된 건, 날 도와주려고 했기 때문이잖아. 난 주인으로서 토토를 살려낼 의무가 있어.

내가 정 안 되면 권력으로 찍어 누를 생각까지 하고 있을 때, 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가 원하신다면.”

카인은 의외로 흔쾌히 물러났다.

“정말로? 나 주는 거야?”

“네. 루시엘이 원한다면 드려야죠. 루시엘은… 저의 주군이니까.”

‘루시엘은’과 ‘저의 주군’ 사이의 짧은 적막. 카인이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은, ‘주군이니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뭐였을까. 나는 그의 마음을 살짝 엿보기로 했다.

‘루시엘이 원한다면 뭐든 줄 거야. 루시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아. 내 양심.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욱신욱신 쑤셨다.

카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비록 제멋대로에, 천방지축이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만 하지만.’

‘내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알아차릴 생각도 없지만.’

‘갖고 싶은 건 모조리 가져야 직성이 풀리면서,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는 하나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루시엘이 좋아.’

‘그리고 원래 사랑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져주는 거랬어.’

아, 안 돼. 카인. 져주지 마! 나한테 지면 어떻게 해. 무럭무럭 자라서 나를 납치 감금하란 말이야. 나를 이겨 먹으라고.

아무래도 카인은, 양보하지 않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대체 뭘 가르치고 있는 거람.

나는 잠옷 앞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토토의 핵이 닿았다. 토토야, 미안하다. 닿지 않을 사과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진실의 눈동자를 꺼내 카인에게 건넸다.

“여기. 그냥 너 가져.”

“네? 하지만 갖고 싶으시다고…”

“마음이 바뀌었어. 그렇다고 아예 주는 건 아니고, 빌려주는 거야. 필요 없어지면 다시 나한테 돌려줘야 해.”

“네, 물론이죠.”

카인은 소중하게 광석을 받아들었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꼭 광석을 쥐고서, 그는 소년처럼 말갛게 웃었다.

“고마워요. 루시엘.”

살포시 접힌 눈꼬리, 웃음이 새어 나오는 뺨. 옛 연인들에 대한 질투도, 갈수록 무게를 더해가는 소유욕도, 지금 이 순간만은 모조리 어두운 바다 아래 묻어두고서… 카인은 진심으로 밝게 미소 지었다.

‘루시엘이 나한테 준 보석.’

‘자기가 갖고 싶었던 걸 내게 양보했어.’

‘기뻐.’

‘아아, 나는 역시…’

‘루시엘을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하려 할 때마다 자꾸 희망을 심어주는걸.’

허나 희망의 싹에서 피어나는 것은, 화사한 꽃은 절대로 아니리라. 내가 그에게 심은 희망은 꽃의 씨앗 따위가 아니다. 무성한 가시덩굴이고,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다투라다.

그 희망은 도리어 너를 괴롭게 할 거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신 침과 함께 되삼키며, 나는 카인을 따라 마주 웃었다.

촉수에 당했다가 깨어난 이후로, 나를 보는 신하들의 눈초리가 한층 더 음험해졌다. 늑대랑 붙어먹는다는 소문이 돌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기야 늑대와 섹스를 한다는 건 근거 없는 낭설이었지만, 촉수에게 박혔다는 건 누가 뭐래도 진실이었다.

시선 끝에서 욕망이 은은히 배어 나왔다. 사람이 열세 번 정도 환생을 반복하다 보면, 없던 눈치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눈만 보고 사람의 속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헷갈릴 때는 마법을 써서 직접 마음을 읽으면 되었고 말이다.

‘황제가 토르토파한테 겁간당했다니. 믿기 어렵군. 그렇지만 의원인 아이작이 해 준 얘기니,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황제가 얼굴 하나는 반반하기는 하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군. 꽤 볼 만한 꼴이었을 것 같은데….’

‘아이작에게 너무 엄청난 얘기를 들어서 그런가, 이제 폐하를 순수하게 못 보겠어. 토르토파에게 당한 이는 알을 배게 된다는데. 그렇다면 폐하도 산란을 했겠지? 부른 배를 부여잡고 끙끙대며 알을 낳는 폐하라니. 그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봤어야 했었는데. 아까워.’

‘아이작이 해준 말에 따르면… 폐하가…’

‘아이작이 그러던데…’

‘아이작…’

하여간 아이작 이 자식은 입이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대체 몇 명한테 내 얘기를 떠들고 다닌 거야? 뭐,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입 가벼운 것까지 고려해서 아이작을 황실 의원으로 뽑은 거니까.

이번 일로 나는 ‘싸가지 없는 폭군’에서, ‘싸가지는 없지만 한 번쯤 품어보고 싶은 상대’로 승격한 듯하다. 이걸 승격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봤자 신하들은 나를 건들지 못한다.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황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하늘 아래 나보다 높은 존재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폐위당하게 된다면? 황제라는 직함을 제외하면, 설정상의 ‘루시엘’에게 남는 것은 반반한 얼굴밖에 없다. 체력도 약하고, 검술도 못한다. 제 몸 하나 건사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권력을 잃었으나 생긴 건 예쁘장하고, 성격이 더러워 이래저래 원한을 많이 사 온 폐제. ‘루시엘’이 당할 일은 뻔하다. 모든 신하가 그러지는 않겠지만, 혈기 넘치는 몇몇 기사들이나, 지켜야 할 체면이 없는 하인들은 거리낌 없이 나를 윤간하려고 할 터였다.

‘그리고 역시나 카인이 그 광경을 목격하겠지.’

내가 원하는 건 윤간당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카인이 내게 더욱 매달리게 되는 거였다.

계획은 완벽하다. 카인이 빨리 각성해서 날 폐위시키는 일만 남았다. 현재의 카인이라면 반란에 가담하기는커녕, 반란군에게서 날 지키려고 애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언제쯤 폐위당할 수 있으려나.’

폐위에 대해 그날따라 오래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날 밤, 나는 기괴한 꿈을 꾸었다.

꿈속의 광장은 성난 군중들로 바글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동일한 곳을 향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 설치된 무대. 무대 위에 놓인, 벽돌로 된 벽의 일부분. 벽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에 끼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황제였다. 아니, 한때 황제‘였었던’ 자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는 힘껏 벽을 두드렸다. 손만 욱신거릴 뿐 역시나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정말 꿈은 맞나? 꿈치고는 촉감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인파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쾌한 열기나, 허리를 꽉 죄어오는 벽의 구멍 따위가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범해라!”

“복상사로 죽여!”

“앞과 뒤를 정액으로 꽉꽉 채워버려!”

잠깐만. 군중들 대사 왜 저래.

평범하게 폐위당하는 꿈이라고 치기엔, 상황이 뭔가 이상했다. 단두대가 아니라 벽에 끼어있는 것도 그렇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전부 성인 남성뿐이라는 점도, 스무 명이 넘는 사내들이 무대에 줄지어 서 있다는 점도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내 옷차림이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나… 옷을 입고 있지 않다. 목에 무희나 찰 법한 화려한 붉은 초커를 차고, 귀에 큼지막한 루비 귀걸이를 착용했을 뿐, 천을 걸친 것은 아니다.

나는 손가락을 굽혔다가 다시 폈다. 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이 무거웠다.

설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차디찬 바깥바람이 맨 살갗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몸을 떨며 잔기침을 했다.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게 꿈이라면 카인, 카인은 어디에 있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무대 아래의 구경꾼들을 살폈다. 처음 보는 얼굴을 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물결. 그 어디에도 카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낯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남자’는 맨 앞줄에 조용히 서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바람결에 나부끼는 길고 고운 백발. 시린 벽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신전의 벽화에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그 얼굴. 신관이었을 시절, 매일 질리도록 찬양했던 그 존재. 그리고 그제야, 나는 비로소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의 계시, 어쩌면 경고인가.’

신관이었던 첫 번째 생 이래로, 나는 종종 신의 계시를, 아니, 계시를 빙자한 경고를 받았다.

경고는 꿈의 형태로 찾아왔다.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어수선한 꿈과는 확연히 달랐다. 현실처럼, 때로는 현실보다 더 생동감 넘쳤다. 꿈의 내용은 저마다 달랐지만, 결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꿈속에서 나는 늘 비참해졌다.

신은 꿈을 통해 이리 말하고 있었다.

네가 제아무리 운명을 바꾸려고 버둥거려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카인을 져버리지 않는 이상, 너는 영원토록 불행할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카인과의 사랑을 포기해라. 한낱 필멸자에게 집착하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신에게 와라.

이번 계시도 비슷한 맥락일 터였다. 폐제가 된 너는 필시 백성들에게 윤간당한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일찌감치 네 계획을 내려놓아라. 대충 이런 식의 경고겠지.

‘하하… 그래서 준비한 게 고작 이런 꿈이야?’

어이가 없어서 원. 자꾸만 실소가 새어 나오려고 했다. 나는 비죽비죽 올라가려는 왼쪽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렸다.

신은 나를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범해지는 꿈을 꾸면, 내가 겁이라도 먹을 거라고 생각했나? 덜덜 떨면서 카인을 포기할 줄 알았어?

신은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나는 여러 명에게 돌려 먹히는 플레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는 카인이니까, 카인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다. 이게 꿈이 아니었다면, 나는 흑마법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이 난국에서 벗어났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꿈이고, 꿈속의 나에게는 마법 능력이 없다. 나는 꼼짝없이 다수와 몸을 섞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시, 최선을 다해 즐기는 수밖에.

꿈을 꾸는 내내 억지로 겁탈당하는 폐제를 연기하다가, 꿈이 깨기 직전에 신을 보며 입꼬리를 올릴 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잘난 낯에다가 대고, 이렇게 툭 쏘아붙여 줄 거다. ‘황홀한 꿈을 선물해줘서 감사해요, 신님.’이라고.

새로운 연극의 막이 올랐다.

“히야, 그 잘나신 황제님이 벽에 끼여서, 백성들 좆 받아낼 준비나 하고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응?”

벽 뒤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루시엘의 양 허벅지를 붙잡고 좌우로 벌렸다.

“미친, 미친 건가…. 그 더러운 손 치워라, 어서!”

루시엘은 발버둥을 치며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다. 발목에 걸린 백금 발찌들이 서로 부딪치며 탁한 소리를 만들었다.

철썩! 사내의 두툼한 손바닥이 황제의 둔부를 내리쳤다. 아으윽…! 루시엘이 앓는 소리를 냈다. 시종들에게 오냐오냐 떠받들어지기만 했던 그였다. 그런 자신에게 감히 손찌검을 하다니, 그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이를 악물었다.

“나는 황제다. 신이 선택한 지도자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종알종알 시끄럽네. 차라리 주둥이를 틀어막아 버릴까? 아아, 그건 안 되겠군. 입을 막으면 신음소리를 못 들으니 말이야.”

“무엄하다! 어디서 감히… 하읏!”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커다란 손이 루시엘의 허벅지를 쓰다듬더니, 둔부를 제멋대로 주물럭거렸다. 수십, 수백 마리의 벌레가 맨살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역겨운 감각에, 루시엘은 컥컥거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작은 엉덩이가 좌우로 벌어지더니, 옅은 분홍색의 애널이 드러났다. 무대 아래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군중들은 반쯤 광란 상태가 되어,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발기한 성기를 빼내어 자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작정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으려던 남자가 끌끌 혀를 찼다.

“너무 좁고 메말랐는데. 뭐 적실 거 없나?”

옆에 있던 기사가 냉큼 윤활제 한 통을 건넸다. 길고 가느다란 입구와 넓은 몸통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는 부분을 구멍에 꽂아 넣고, 통을 눌러 안으로 젤을 짜내는 형태였다.

남자의 손이 구멍을 비죽이 벌렸다. 검지 하나 굵기만 한 관이 내벽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자가 통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뜨거운 안쪽으로, 서늘한 젤이 쏟아졌다.

“아, 아앗…”

기묘한 감각에 무릎이 움츠러들었다. 안쪽에서 젤이 요동쳤다. 고체와 액체 중간 사이의 담황색 젤이, 내벽에 치덕치덕 달라붙었다.

“뭐, 뭐야, 이거…”

젤은 적응할 여유도 주지 않고 밀려 들어왔다. 아랫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루시엘이 혀를 내밀고서 힘겹게 호흡했다. 코끝에 인공적인 복숭아향이 스쳤다. 토기가 일 정도로 달달한 향기였다.

미처 삼키지 못한 젤이 허벅지를 따라 뭉근하게 흘렀다. 구멍 주변과 회음부, 허벅지에 윤활제가 치덕치덕 달라붙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나무로 된 무대 바닥에 스며들었다.

“흐읍-!”

젤로 척척히 젖은 내벽 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손끝으로 눅진한 내벽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다가, 손톱을 세워서 약하게 긁어내렸다.

애액을 닮은 젤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의 툭 튀어나온 손마디를 타고 흘러 팔목까지를 적셨다. 어느덧 반쯤 선 성기가 꺼덕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검지와 중지를 좌우로 벌리자, 구멍이 열리며 불투명한 젤이 주르륵 쏟아졌다.

“하, 하지 마, 벌리지 마라!”

루시엘이 다급하게 애원했다. 구멍이 가쁘게 빠끔거리며 젤을 뱉어내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배출하는 감각이 싫었다. 행여 그것이 단내 나는 젤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아래에 힘을 주었다. 구멍이 조여들며 손가락을 감아 물었다. 끊이지 않고 쏟아지던 젤이 뚝 멈췄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세운다는 건가? 어이, 폴. 이것 좀 도와줘.”

폴이라고 불린 청년이, 남자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폴은 루시엘의 배를 가차 없이 꾹 짓눌렀다. 하복부에 꽉 들어찬 젤이 출렁거렸다.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커억, 크윽…”

입가에 고인 침이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그는 윗입으로도 아랫입으로도 물줄기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뒤로 싸는 게 좋은가 본데?”

“나중에는 뒷구멍으로 정액도 양껏 싸게 해드릴게요.”

“하으, 읏, 어디서 그런 망발을…! 이런 천박한, 하윽!”

폴이 루시엘의 좆을 세게 움켜잡았다. 반쯤 발기해있던 그것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안에서 단단하게 굳는 물건을 보며 낄낄대었다.

“천박? 누가 누구보고 천박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몇백, 몇천 명이 보는 앞에서 세우는 황제 폐하가 훨씬 천박한 것 같은데요? 이런 싸구려 몸뚱이를 가지고 그동안 어떻게 황제를 했지? 뭐, 그러니까 폐위당한 거겠지만.”

“하으, 으윽…”

이제는 대꾸할 힘도 없었다. 루시엘은 고개를 푹 떨구고서 헐떡거렸다. 체온으로 덥혀진 젤이, 비부에서 몇 줄기씩 새어 나왔다. 뒷줄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왔다.

“역시 보기만 하는 건 좀 힘드네. 저는 아래 말고 윗구멍 좀 쓸게요.”

루시엘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루시엘은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었다. 낯익은 적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루시엘을 섬기던 붉은 머리의 시종이었다.

“너는, 그… 이름이…”

“제 이름도 모르시나요? 이래 봬도 5년간 폐하를 섬겼는데, 조금 슬프네요. 하기야 고귀하신 폐하께서 어떻게 저 같은 천것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시겠어요. 맨날 술 마시고 사치 부리는 데에만 관심 있으시지.”

경어를 썼으나 존중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루시엘을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베넬이에요. 제 이름.”

시종이 선심 쓴다는 듯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베넬, 도와줘. 너는 내 시종이잖아. 이건 명령이다. 어서 날 구해!”

루시엘이 베넬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었다. 의복을 쥔 손이 불쌍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거만한 황제가, 한낱 시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흐느끼는 꼴이라니. 베넬은 이를 드러내고 히죽거리며, 몰락한 폭군의 말로를 지켜보았다.

“제가 왜 당신을 도와야 하죠? 그쪽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베넬은 곧장 루시엘의 손을 쳐내었다. 바지 버클을 풀고 드로즈를 반쯤 내려 성기를 꺼내었다. 카인의 것만큼은 아니었으나, 평균에 비하면 상당한 크기였다.

쿠퍼액으로 반들거리는 귀두가, 루시엘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빨리 입을 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루시엘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시, 싫다. 같은 남자의 것을 내가 왜…”

그가 고개를 뒤로 빼었다. 베넬은 굴하지 않고 루시엘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그의 입술을 제 성기에다가 억지로 갖다 대었다.

루시엘은 입술을 굳게 앙다물었다. 순순히 빠는 게 더 편할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세우는 게 참 루시엘답다 싶었다. 멍청하고 건방진, 얼굴만 예쁜 천덕꾸러기.

그때였다. 벽 뒤에서 루시엘의 엉덩이를 희롱하던 남자가, 마침내 제 좆을 꺼내 들었다. 귀두 끝이 구멍에 닿았다. 남자는 허리를 당겼다가 그대로 세게 튕겼다. 성기가 난폭하게 속살을 가르고서, 내벽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악-!”

꾹 닫았던 입이 크게 열렸다. 새빨갛고 말랑한 혀, 연약한 목젖, 검은 동굴을 닮은 좁은 목구멍까지 한 번에 들여다보였다. 베넬은 그 짤막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성기가 입 안으로 틀어박혔다.

“물면 혼날 줄 알아요.”

베넬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명령하는 이와 복종하는 이의 위치가 완벽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난생처음 맛보는 지배의 기쁨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았다. 베넬의 녹색 눈이 환희로 번들거렸다.

“우욱, 윽, 읍-”

길고 뜨거운 막대기에 관통당한 것 같았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두 사내가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콧날에 꺼슬꺼슬한 음모가 비벼졌고, 젤로 범벅이 된 뒷구멍에 성기가 퍽퍽 박혔다.

루시엘의 두 다리가 안쓰럽게 경련했다. 벽에 허리가 끼어 있지 않았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을 것이었다.

“크윽. 성격은 더러운 주제에, 뒷구멍은 제법 쓸 만한데?”

남자는 곧 루시엘의 안에 제 씨물을 한껏 쏟아내었다. 허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루시엘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두 번째 타자가 그의 엉덩이를 꽉 붙잡았다. 방금 전 타인이 사정한 구멍 안에다가, 주저 없이 자신의 좆을 밀어 넣었다.

줄은 길었고, 악몽이 끝나기에는 아직 멀었다.

“아…, 으, 우욱…”

아랫구멍의 정액이 마를 새가 없었다. 둔부를 움켜잡히고 구멍을 벌려져서 강제로 삽입 당한다. 쉴 새 없는 추삽질에 혀를 빼물고 신음하다 보면 어느새 오르가슴이 찾아온다. 정액이 내벽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성기가 빠지고, 또 다른 이의 물건이 안쪽을 파고든다.

그 뒤로는 똑같은 상황의 반복, 그리고 반복. 이런 짓을 벌써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는 건지 몰랐다. 아니, 몇 번이 대수일까. 적어도 십수 번은 넘은 것 같았다.

“히긋, 아, 싫어, 이런 건, 하읏, 차라리 다른 벌을 내려다오… 적어도 나를, 전 황제답게 대해달란 말이다….”

눈물과 타액, 정액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루시엘은 무너져 내릴 것처럼 훌쩍였다. 그러나 그의 부탁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성기가 다시금 내벽을 가르고 들어왔다. 하도 오랫동안 박혀서 도톰하게 부푼 구멍에서, 바로 전에 사용한 이가 퍼부어놓은 정액이 왈칵 쏟아졌다. 퍽, 퍽, 땀으로 젖은 살과 살이 마찰했다. 사방이 자신의 적뿐인 상황에서, 루시엘은 한없이 무력했다.

“황제답게는 무슨! 네놈이 임금처럼 행동했는지부터 생각해보라고. 허구한 날 향락에 빠져 산 주제에. 네놈은 임금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어!”

솥뚜껑만 한 손이 루시엘의 볼기를 후려쳤다. 그는 변변찮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서, 엉덩이를 내리치는 손길을 그대로 견뎌야만 했다. 벽에 고정된 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희고 무른 살갗 위로, 붉은 손자국이 짙게 남았다. 외설스러운 모습이었다.

“네놈이 함부로 대했던 모든 이들한테 사과해, 빨리!”

“내, 내가 왜… 사과 같은 것을… 아흐흑…!”

남자는 성기를 삽입한 걸로도 모자라, 엄지로 애널을 잡아 벌렸다. 성기를 집어삼켜 이미 빠듯하게 열린 구멍이 한층 더 벌어졌다. 엄지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덩어리진 정액들이 틈 사이로 주르륵 쏟아졌다.

남자는 루시엘의 골반을 세게 틀어잡고서 거친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접합부에 흰 거품이 일었다. 정액과 젤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거품에서는 달고도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직도 같잖은 자존심을 세울 여유가 있나 보지?”

“흐힉, 아악, 멈춰, 라앗, 가아, 또 갈 것 같, 으응!”

저릿한 쾌감이 아랫배를 자극했다, 벽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가 허공을 유영했고, 희게 지린 발끝이 안쪽으로 굽어들었다. 연분홍빛 귀두 끝에서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도 많이 사정한 탓에 정액은 희멀겠고 점성이 거의 없었다.

루시엘의 안에 사정한 후에도, 남자는 성기를 빼내지 않았다. 그는 안을 몇 번 느리게 휘젓고 나서야 제 좆을 빼내었다. 엉덩이골 사이로 백탁액이 질질 흘렀다. 뒤로 정액을 싸게 만들어주겠다는 어떤 사내의 엄포가,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바지를 올려 입었다. 그는 바닥에 놓여있는 붓펜을 들어, 루시엘의 오른쪽 허벅지에 빗금을 그었다. 윗입을 사용해서 사정한 것은 왼쪽 허벅지에, 아랫입에 사정한 것은 오른쪽 허벅지에 기록하는 중이었다. 각각 열셋과 열여덟 개의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저벅저벅.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졌고, 또 다른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성기가 둔부 사이에 느리게 비벼졌다. 부피감과 무게감이 남달랐다. 정액과 젤로 안이 질퍽하게 젖어든 상태라고 해도, 저 정도 크기를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루시엘의 몸이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좆이 구멍을 강제로 벌렸다. 정액을 윤활제 삼아서 꾸역꾸역 내벽을 파고들었다. 삽입은 끝이 없었다. 젤과 정액이 철벅거리며 음란한 물소리를 연주했다. 안쪽이 벌려지다 못해 이제는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하복부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따라 내벽이 더 수축하며 성기를 끊어먹을 듯이 조였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힘을 빼셔야죠. 폐하.”

“너는…!”

루시엘이 소스라쳤다. 그는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한때 황실의 기사 단장이었던 사내, 에반이었다.

“네놈은, 으흣, 분명 저 멀리 섬으로 유배를…”

“폐하도 참. 역시 생각이 짧으시군요. 유배를 명령한 황제가 폐위되었는데, 제가 아직까지 섬에 박혀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뭐, 뭐라고… 아흑, 아, 아악!”

안쪽을 쑤컥거리던 귀두가 내벽을 긁으며 서서히 빠져나갔다가, 다시 단숨에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선단이 깊은 곳을 턱턱 헤집어대었다.

루시엘은 몸을 비틀며 가쁘게 신음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흐릿한 눈을 감았다가 겨우 뜰 때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시울에 고인 액체를 닦아내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사죄하세요. 폐하. 이처럼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한마음으로 폐하의 사죄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싫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 건 네놈들이겠지. 감히 짐을,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다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벽에 끼인 채 고스란히 사내의 욕망을 받아내는 와중에도, 루시엘은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하하, 정말이지. 입만 살아가지고는….”

에반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손이 루시엘의 성기를 잡아 쥐었다. 곧 사정하려고 벌름거리는 요도구를 엄지배로 막았다. 사정할 수 있었는데 막혔다. 루시엘의 낯이 희게 질렸다.

“뭐, 뭐 하는 거냐! 어서 그 손 떼… 아흑, 윽, 으흣!”

루시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함을 지르려고 했으나, 목이 쉬어버렸기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내뱉을 수 있는 것은 달뜬 신음뿐이었다.

“어서 사죄하세요. 부족한 황제라서 미안하다고. 이 죄는 몸으로 갚겠다고 말하란 말입니다.”

에반이 말도 안 되는 사과를 요구했다. 엄지로 요도를 슬슬 문지르고, 남은 네 손가락으로는 살기둥을 감싸 자극을 주었다.

루시엘이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화려한 루비 귀걸이가 머리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거렸다. 큼지막한 루비 아래에 늘어진 은장식들이 찰랑, 찰랑하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정말로 사과하지 않을 겁니까?”

“흐아, 흡, 하앙, 아으으…”

목구멍과 아랫구멍이 얼얼했고, 오랫동안 마찰된 허벅지가 쓰라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이제는 성기에 압력까지 가해지고 있었다. 토정하고 싶은데 앞이 막혔다. 괴로웠다. 배출되지 못한 열기로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었다.

“사과한다면 벽에서 해방시켜 줄 수도 있는데….”

에반이 짐짓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루시엘은 몽롱한 뇌리로 멍하게 생각했다. 이제는 지킬 자존심도 없었고, 자존심을 지켜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미 나락이었다.

진창 속에서 황제의 긍지를 부여잡아봤자,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도리어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마음은 이미 망가졌다. 몸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었다.

“미, 미안… 미안해….”

그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음성이었다.

“사과할 때는 공손하게, 존댓말을 쓰셔야죠.”

에반이 억지를 부렸다. 얼마나 더 황제를 모욕해야 만족할 것인지. 루시엘의 마음속에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벌컥 고개를 들었다가 빠르게 허물어졌다. 그는 에반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 하으읏, 윽, 죄송합, 니다… 히익! 부족한, 하읍, 황제라서… 미안해요…. 으읏! 앙!”

루시엘이 더듬더듬 사과를 하는 도중에도, 에반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안쪽을 들쑤시는 좆 때문에 말을 똑바로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루시엘은 여러 번 말을 멈추고 헐떡거렸다.

“몸으로… 몸으로 갚을 테니까… 으흑, 악! 아아… 용서해, 주세…요….”

루시엘의 말이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에반의 성기가 크게 맥박쳤다. 에반은 사정하기 바로 직전 자신의 것을 잡아 빼고는, 루시엘의 골반 위에 제 정액을 흩뿌렸다. 그는 붓펜으로 루시엘의 허벅지에 사정 횟수를 표기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서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자, 잠깐!”

루시엘이 급박하게 에반을 불러 세웠다.

“네 말대로 했잖아. 왜 그냥 가는 거야? 미안하다고 하면 벽에서 빼준다면서…!”

“그걸 믿었습니까? 그쪽한테 박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리도 많은데, 어떻게 벌써 벽에서 빼줄 수 있겠어요? 그럴 수야 없죠.”

에반은 키득거리며 루시엘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붉은 눈동자가 절망으로 어둡게 가라앉는 광경을, 기사 단장은 퍽 즐겁게 지켜보았다.

또 다음 사람이 바로 루시엘의 뒤에 와서 섰다. 좆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던 뒷구멍은 흐물흐물하게 풀려 있었다.

곧장 성기가 구멍을 파고들 거라고 추측했지만, 무슨 일인지, 예상했던 감각은 찾아오지 않았다.

흉흉한 성기 대신, 일반적인 인간의 것보다 조금 더 서늘한 손이 둔부를 어루만졌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진득하게 말라붙은 정액을 닦아주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그 상냥함이, 거친 섹스보다 더 두렵게 여겨지는 건 왜일까.

빠끔거리며 정액을 내뱉는 애널 사이로, 손가락 두 개가 침입했다. 갈고리처럼 손마디를 굽혀서, 안을 가득 채운 욕망의 흔적을 긁어내었다.

남자는 루시엘의 안에서 타인의 정액을 모두 빼낸 후, 이번에는 손을 뻗어 벽을 가볍게 건드렸다. 툭, 하고 한 번 쳤을 뿐인데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지탱할 만한 게 없어진 몸뚱이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남자는 쓰러진 루시엘을 양 팔로 감싸 안았다. 윤기 흐르는 백장발이 루시엘의 뺨을 간질였다.

“루시엘, 네가 폐제가 된다면, 이보다 더한 일들도 겪게 될지도 몰라. 그들은 너를 능욕하고, 짓밟고, 몸과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란다.”

자비를 미소로 형상화한 것 같은 웃음을 띠고서, 신이 부드럽게 읊조렸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렴.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카인을 살리고 싶니? 너는 무능한 폭군인 척하기에는 너무 뛰어나. 오직 연인을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배운 덕에, 정치와 경제, 철학과 제왕학, 심지어는 마물학과 치료술에도 능하지. 흑마법을 배운 것은 조금 괘씸하지만…”

“…….”

루시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얌전히 신의 품에 안긴 채, 색색거리며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혀를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희고 마른 흉곽이 불규칙적으로 들썩거렸다.

“카인 말고, 너를 위해서 살렴. 그 능력들을 온전히 너와, 너의 나라를 위해 사용해라. 그럼 너는 무능의 극치를 달리다가 쫓겨난 폭군이 아니라, 제국을 부흥시킨 성군으로 역사에 기록될 거다.”

“…폭군이 아닌, 성군으로…?”

“그래. 내가 온 힘을 다해 너를 도우마. 그러니 약속해주렴. 카인을 포기하고 내게로 오겠다고. 이번 생에서는 너의 사랑을, 오로지 신인 나에게만 주겠다고 말해주려무나.”

루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신은 놓치지 않았다. 신은 그 부서지려는 마음에 굳건한 쐐기를 박았다.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서, 루시엘의 어깨를 가만가만 다독였다.

“감… 감사, 합니다….”

정액 범벅이 된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넘어왔다! 신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나절 내내 윤간당하는 악몽을 꿨으니, 영혼이 부식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이 파악한 루시엘은 조금 변태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간에 제 연인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이였다.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범해진다니, 세상 어느 누가 그런 행위를 즐기겠는가. 아무리 루시엘이라도, 이번 일은 까무러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 터다. 신은 루시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액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혀를 움직여, 루시엘은 이렇게 말했다.

“황홀한 꿈을 선물해줘서 감사해요, 신님.”

“…뭐라고?”

“덕분에 즐거웠어요.”

루시엘이, 그러니까 ‘내’가 말갛게 웃었다. 두려움의 가면을 손쉽게 벗어던지고서. 연기 따위 완전히 집어치운, 진짜 나의 모습으로.

그때 신의 표정은, 나름 볼 만했다. 그 자신만만하던 낯이 일그러지는 꼴이라니. 나는 내 전생의 연인을 속이고, 신하들을 속이고, 마침내는 신마저 속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만 포기하시죠. 당신이 계시니, 경고니 하는 것들을 보내봤자, 제 마음을 돌리지는 못해요. 제가 원하는 것은 카인뿐이에요. 성군이라는 칭호, 그에 따라오는 백성들의 칭송… 그런 것들은 제 삶에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이해되지 않는군. 모든 인간은 명예욕을 가지고 있지 않나? 너 역시 추앙받고 싶은 욕구가 있을 텐데?”

“저는 카인이 없는 천국보다는, 카인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원해요.”

그리고 사실 저는, 추앙받는 것보다는 매도당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나는 눈가를 생글거리며 이 문장을 덧붙였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는?”

열세 번의 생 동안, 신이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봤다. 그는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눈꼬리를 살포시 접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내 목소리에는 일말의 떨림도, 버벅거림도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보여준 이 꿈,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어요. 카인은 제가 윤간당하게끔 놔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저를 빼내 올 거예요.”

“어떻게 그리도 확신할 수 있지?”

“그야, 제가 카인을 그렇게 키울 거니까요. 질투와 집착, 소유욕에 찌든 사내로 만들 겁니다. 카인은 필시, 타인이 제게 손을 대는 걸 용납하지 못할 거예요. 저는 카인의 소유니까. 저를 범하고 찍어 누를 수 있는 이는 오직 카인뿐이니까.”

느린 호흡으로 말을 이으며, 나는 신의 품에서 벗어났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팔을 밀어내고, 내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섰다.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뭉근하게 흘러내렸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제정신이 아니로군.”

“열두 번쯤 연인을 눈앞에서 잃으면, 멀쩡했던 사람도 미치기 마련이랍니다.”

나는 기도하듯 경건하게 양손을 모았다. 전혀 경건하지 않은 눈빛으로 신을 응시하며, 단어를 짓씹듯 한 마디, 한 마디씩 또렷하게 내뱉었다.

“그러니 신이여, 나를 버리소서.”

나를 버리소서.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신관이 아닙니다.

신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더러운 손… 치워… 나는 황제다. 어떻게 이런 짓을….”

대체 어떤 종류의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루시엘은 비명 같은 잠꼬대를 토해내며 끙끙거렸다.

카인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새벽 내내 루시엘을 깨우려고 애썼다. 그의 어깨를 흔들기도 하고, 핏기 없이 질린 뺨을 가볍게 건드려보기도 했지만, 루시엘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습은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악몽 안에 갇힌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벌리지, 마아… 천박한…. 이런 건… 차라리 다른 벌을… 적어도 나를, 전 황제답게 대해달란 말이다….”

식은땀으로 베갯잇이 다 젖었다. 그는 몸부림치며 베개에 옆얼굴을 비볐다. 혓바닥에 고여 있던 침이 흰 천에 얼룩을 만들었다. 혀와 입술이 공포와 열기로 말라가고 있었다.

“루시엘, 제발 일어나요. 무슨 악몽을 꾸고 있길래 이렇게…”

카인은 말끝을 흐렸다. 루시엘을 괴롭히는 꿈의 내용은, 그가 잠결에 흘린 말만 잘 조합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왕좌에서 쫓겨난 후, 평소 그를 아니꼽게 여겼던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겁탈당하는 꿈. 그것도 벽에 몸이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처절하고도 잔혹했다. 악몽이라는 표현이 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루시엘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도 그를 구해냈을 텐데.’

상상이 머릿속에서 메마른 가지를 쳤다. 멋대로 뻗어나갔다. 벽에 끼어 있는 루시엘.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루시엘…. 그를 짝사랑하게 되면서 상상력만 늘었다. 이 감정에 짝사랑 같은 귀엽고 말랑말랑한 단어를 붙여도 될지, 사실 확신은 없었지만.

앙상한 가지들이 겨울바람에 서로 비벼지며 웅웅거리듯, 온갖 상상들이 뇌 내에서 뒤섞이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상상 속의 루시엘은 벽에 박힌 채로, 하반신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둔부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자욱이 찍혀 있었고,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에서는 정액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몇 명의 욕망을 삼킨 걸까. 도톰하게 부은 애널에서 흰 거품이 일었다.

곧은 척추를 따라 꼼꼼히 적어진 갖가지 상스러운 단어들. 골반 아래쪽에 휘갈겨진 ‘박아주세요’라는 문장, 그리고 그 옆의 빨간 하트까지. 비릿한 정액으로 범벅이 된 몸은, 멀쩡한 부위를 찾는 게 더 힘들어 보였다. 난잡한 폭력으로 덮인 육체는 어지러웠다.

카인은 벽 앞으로 다가가 루시엘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반신만큼은 아니었으나, 상반신의 상황 또한 처참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빼꼼 보이는 새빨간 혀와, 혀끝에 망울진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 퉁퉁 부은 유두와 잇자국이 선명히 남은 가슴팍.

정액이 이마와 콧날을 타고서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기력이 다해서 쓰러진 걸까,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답이 없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그의 몸이 벽 밖으로 서서히 빠져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품듯, 두 팔로 조심스레 루시엘을 안아 들었다.

그제야 루시엘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눈동자 속에 카인이 담겼다.

“…카인.”

작고 뭉개진 발음으로, 루시엘이 제 기사의 이름을 속삭였다.

“너는 항상 나를 구해주는구나.”

눈꼬리를 휘며, 그가 하얗게 웃었다.

허나 이것은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 실제 카인은 루시엘의 꿈속에 들어갈 수 없고, 따라서 그를 구해낼 수도 없다.

루시엘, 일어나요, 어서 악몽에서 나와요! 황제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는 것. 그가 깨어날 때까지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 그것이 카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으윽, 커흑-”

그의 외침이 꿈속의 루시엘에게도 닿은 건지, 마침내 루시엘이 눈을 떴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마른기침을 했다.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루시엘, 괜찮아요? 도대체 무슨 꿈을… 아니,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카인은 말을 아꼈다. 루시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주려는 찰나, 루시엘이 먼저 카인의 품속에 와락 안겼다.

“무서웠어. 살면서 이렇게 끔찍한 꿈은 처음이야.”

그는 카인의 가슴께에 눈물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심장에 가장 가까운 부분에, 루시엘의 이마가 닿았다. 쿵, 쿵, 정신없이 뛰는 심장 박동이 들키면 어떻게 하나.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고 하여 루시엘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꼭 끌어안았다. 제 심장 소리가 루시엘의 귀를 간질일지라도, 그래서 그가 무엇인가를 눈치채게 되더라도… 지금은 루시엘을 안아주고 싶었다. 비에 젖은 새처럼 희미하게 떠는 저의 주군을.

“그러니까… 꿈에서 나…”

루시엘이 훌쩍거렸다. 그는 어물거리면서도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나… 같은 것 달린 사내들한테 범해지는 꿈을 꿨어.”

그런 꿈일 거라고는 예측했지만, 꿈의 내용을 직접 말할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뭐라고 위로를 건네야 하는 걸까. 카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그렇지만 괜찮아. 지금은 다 괜찮아졌어. 어차피 꿈인걸. 꿈이니까….”

루시엘은 몸을 웅크리고서, 괜찮다는 말만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실제로 벌어질 리 없어. 카인, 네가 날 지켜줄 거잖아. 너는 내 호위 기사니까. 그렇지?”

루시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젖은 눈시울이 별처럼 반짝였다. 오로지 신뢰만이 묻어나는 눈빛. 그 말간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황제는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주군의 잠꼬대를 들으며 기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실 카인이 싫었던 건, 루시엘이 범해진다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제 주군이 ‘타인에게’ 범해졌다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행여 꿈속의 일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를 지켜줄 거지?”

루시엘이 다시 한번 물었다.

지킨다는 건 뭘까. 값비싼 보석을 창고 깊숙이 숨겨놓는다면, 그건 보석을 지키는 일인가? 자유롭던 새의 날개를 잘라 새장에 넣어놓는다면, 새를 지켰노라 말할 수 있는 건가?

기사는 주군을 그런 방식으로 지키고 싶었다. 타인들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꼭꼭 숨기고 싶었다. 기사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주군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므로 카인의 이 대답은, 순전한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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