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20)

0. 황제와 늑대

황제가 꼬질꼬질한 새끼 늑대 한 마리를 안고 돌아온 날, 황성 안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살던 폭군이 처소에 동물을, 그것도 한쪽 눈을 다친 야생 늑대를 들이다니. 평소의 황제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관용이었다.

“폐하께서 드디어 동정심을 배운 게 분명해. 저 약하고 어린 짐승이 폐하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동정심이 아니라 호기심이고, 연민이 아니라 유흥일걸? 저 늑대 역시 폐하의 장난감에 불과해. 얼마 못 가서 질렸다고 버려버리겠지. 너도 폐하 성격 알잖아. 한 번 입은 의복은 두 번 다시 입지 않는 거. 반려동물이라고 뭐 다르겠어?”

시종들은 새끼 늑대의 앞날을 걸고 내기를 했다. 머지않아 성에서 내쫓길 거라는 주장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황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 제 백성들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폭군이,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애정을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황제는 7일 내내 의술사를 불러 늑대를 치료하게 했다. 내로라하는 황실 의술사들이 밤낮으로 힘을 쏟은 결과, 늑대의 눈은 거의 완벽하게 나았다. 왼쪽 눈가에 긴 흉터가 남았을 뿐, 시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보름이 지났다. 황제는 제 침소에다가 늑대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인형을 안고 자는 꼬마처럼, 그는 매일 밤 늑대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황제는 의외로 정성껏 늑대를 키웠다. 늑대의 먹이를 챙겨주는 것도, 검은 털을 살살 빗겨주는 것도, 전부 본인이 직접 했다. 잘 먹이고 잘 씻긴 늑대에게서는 귀티가 좔좔 흘렀다.

그는 늑대에게 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카인, 하고 부르면, 늑대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황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한 달이 지났다. 황제의 무릎은 아기 늑대의 전용 의자가 되었다. 황제는 사람을 대하듯이 늑대를 대했다. 늑대를 제 무릎에 앉히고서 책을 읽어주고,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를 들려주었다. 폭군이 드디어 미쳤나 보다. 시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쑥덕거렸다.

황제가 늑대를 주운 지 일 년이 흘렀다. 조그마했던 새끼 늑대는, 무럭무럭 자라 대형견과 흡사한 크기가 되었다. 이제는 무릎에 올려놓기 힘들 정도로 커버렸다.

첨예한 눈초리와 잘 벼려진 치아, 흉기에 가까운 뾰족한 발톱. 늑대에게서 예전의 귀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늠름하다, 나쁘게 말하면 무섭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늑대를 아꼈고, 늑대 또한 황제를 잘 따랐다. 제가 아직도 덜 자란 꼬맹이인 줄 아는 건지, 늑대는 자꾸만 황제에게 엉겨 붙었다. 황제의 허벅지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거나, 혀를 내밀어 뺨을 핥아대었다. 황제는 늑대의 어리광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황성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황제가 늑대와 몸을 섞고 있다는, 해괴망측한 소문이었다. 대부분의 추문이 그렇듯 소문의 근원지는 불분명했다. 허나 많은 이들은 그 근거도 없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었다.

“저런 짐승에게 몸을 대준다니. 황제도 참 제정신이 아니로군.”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흘겨보며, 빨간 머리의 시종이 혀를 끌끌 찼다. 옆에 서 있던 말라깽이 시종이 빨간 머리를 따라 늑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단 말이지. 황제는 뼛속까지 이성애자가 아니었나? 황제가 남색을 즐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는데….”

“사람 자지는 싫지만 짐승의 물건은 좋은가 보지.”

“하기야 그런가? 개나 늑대 같은 짐승들은 인간보다 사정량이 많다고들 하니까… 박힐 때 기분 좋겠어.”

늑대를 앞에 두고, 시종들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음담패설을 뱉어냈다. 목소리를 낮추지는 않았다. 짐승이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으니까.

“하아, 늑대가 부러워질 줄이야. 황제도 따먹고 아주 좋으시겠어.”

“황제가 아름답기는 하지. 황제는 짐승한테 박히면서 어떻게 울까? 앙앙거리려나, 아니면…”

빨간 머리 시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늑대가 갑작스레 그에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꼭 사람의 말을 이해라도 한 것처럼.

첨예한 발톱이 시종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그는 낙엽처럼 복도를 뒹굴었다. 흰 대리석 바닥 위로 피가 점점이 번졌다. 늑대는 흉포한 이를 드러내고서 시종을 위협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기사들이 늑대를 제압하지 않았다면, 시종은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늑대는 처음으로 황제와 한 침대를 쓰지 않았다. 황제가 낑낑대며 늑대를 침대 위로 올려놓아도, 곧바로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라도 늑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황제는 침대 위에서, 늑대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자는 걸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늑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황제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불규칙적이었던 숨소리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곧 규칙적으로 변했다. 황제가 깊은 잠에 빠졌다는 뜻이었다.

늑대는 온몸의 힘을 풀었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날카로운 앞발톱이 무딘 손톱으로 변했고, 짐승의 털이 사라지고 매끈한 인간의 피부가 드러났다.

검은 늑대 대신, 차분한 흑발을 가진 사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성숙하고, 청년이라기에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늑대가, 아니, 카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니.’

카인은 지근거리는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눌렀다. 늑대 수인이라는 걸 감추고 있었더니, 이런 망측한 소문이 진실로 둔갑해버렸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제 주인인 루시엘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는 짐승보다는 인간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였다.

수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루시엘이 귀여워하는 건 ‘늑대’인 카인이다. 정성껏 키우던 동물이 실은 수인이라니. 당장에 내쳐져도 할 말이 없었다. 루시엘과 오래오래 함께하기 위해서는, 제 정체를 꿋꿋이 숨겨야 했다.

물론 이건 전부 카인 혼자만의 추측이었고, 루시엘의 속마음은 또 달랐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얘기를 떠들어대는 거야. 나는 루시엘과 섹스를 한 적도 없고, 애초에 그런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고.’

루시엘을 좋아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답은 당연히 ‘네’였다. 성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호감이었다.

루시엘은 제 생명의 은인이었고, 이름과 거처를 선물해준 사람이었으며, 그의 소중한 주인이었다. 카인에게 있어 루시엘은 결코 성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주인에게 발정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아름답기는 하지. 황제는 짐승한테 박히면서 어떻게 울까? 앙앙거리려나, 아니면…”

빨간 머리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짐승에게 박히면서 앙앙거리는’ 루시엘의 모습이, 카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제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카인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상상은 더욱 또렷해져 갔다.

상상 속에서, 카인은 첫 번째 발정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완전한 어른 늑대였다. 늑대 수인은 첫 발정기를 기점으로 몸이 확 자라고는 했다. 큰 개 정도의 사이즈에서, 잘하면 최대 2미터 이상까지 커질 수 있었다.

상상 속 카인의 몸집은 2미터가 훌쩍 넘었다. 그는 커다란 몸으로 루시엘을 짓눌렀다. 두툼한 허벅지가 루시엘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억지로 다리를 벌리게 만든 후, 둔부 사이로 발기한 성기를 문질러댔다.

루시엘은 화려하고 복잡한 황제의 의복이 아니라, 가벼운 셔츠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딱 한 번만 휘둘러도, 얇은 천은 순식간에 조각조각 찢길 터였다.

카인은 위로는 루시엘의 가슴을 집요하게 핥으면서, 아래로는 바지에 대고 허리 짓을 했다. 물기를 머금은 셔츠 위로, 분홍색 유두가 선명하게 비쳤다. 젖은 옷감이 가슴에 달라붙었다.

싫어, 하지 마…! 루시엘은 그만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카인은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혐오감으로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목구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를, 애써 무시했다.

루시엘의 의사와 상관없이, 카인은 루시엘을 안고 싶었다. 비좁은 구멍 안에 제 욕망을 마음껏 쏟아붓길 원했다.

단 두 겹의 천을 사이에 두고, 구멍과 귀두가 맞닿았다. 카인의 앞발톱이 바지에 닿았다. 여린 피부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톱을 그어 내렸다. 바지와 드로즈가 단번에 찢겨지고, 찢긴 틈 사이로 은밀한 치부가 드러났다.

카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쿵, 쿵,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했다.

그리고 카인은,

“…아.”

카인은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감각은, 그를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고개를 숙여 하반신의 상태부터 살폈다. 반쯤 일어난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이슬처럼 번져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성기를 움켜쥐려다가 다급히 손을 뒤로 물렸다. 여기서 자위까지 하게 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다.

제발 가라앉아라. 가라앉아라….

카인은 루시엘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카인의 삶 자체가 온통 루시엘이었으므로, 그 외의 다른 것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카인을 돌보아주는 부모도, 카인과 함께 노는 친구도, 카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교사도, 모두 루시엘이었다.

허공을 맴돌던 손이 끝내 샅을 감쌌다. 카인은 루시엘을 생각하며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같이 목욕할 때 보았던 그의 나신, 웃을 때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긴 눈꼬리, 가운만 걸치고 침대에 누워있는 무방비한 모습….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그의 주인에게 욕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자각하지 못했을 뿐.

시종이 떠들어댄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름도 몰랐었던 감정들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 혼자서는 도저히 해갈할 수 없는 지독한 갈증들.

나는 당신을, 갈망하고 있구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은 이르게 찾아왔다. 연속으로 정액을 토해내는 귀두를 손으로 짓누르면서, 카인은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제 정욕을 쏟아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바닥에 끈덕진 정액이 엉겨 붙었다. 그것은 죄의 흔적이었다. 그가 감히 제 주인을 탐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카인은 소리 없이 침대 밖을 빠져나왔다. 침실 옆에 딸린 욕실에서 깨끗이 손을 씻었다. 흐르는 물이 더러운 욕망까지 씻어주기를 바라면서.

…카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이 때 루시엘은 깨어 있었다.

자는 연기는 여섯 번째 생에서 이미 마스터했다. 나는 잠든 척 색색 숨을 고르며, 침대 아래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짤막한 숨소리가 밤의 적막을 으스러뜨렸다. 거친 숨소리 사이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섞여 흘렀다. 루시엘, 루시엘…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성기를 위아래로 문지르면서, 너는 ‘루시엘’이라는 이름을 날숨처럼 뱉어냈다. 만난 지 1년 만에, 나는 드디어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음성이었다.

키우던 늑대가 갑자기 사람의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 네가 수인이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일 년 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기 늑대를 발견한 그날, 나는 저 조그마한 늑대가 실은 수인임을, 그리고 너의 환생임을 바로 눈치채었다.

비록 시대가 달라지고 겉모습이 변해도, 나는 늘 너와 만났고 한눈에 너를 알아보았다. 이번 생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를 모를 리 없었다.

‘카인’은 첫 번째 생에서 너의 이름이었다. 너의 본래 이름을, 열세 번의 생을 겪은 네게 다시 돌려주었다. 카인, 하고 부르면 너는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내 허벅지에 머리를 비비며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너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뽈뽈거리며 나비를 쫓아다녔던 너는, 어느새 발 빠른 사슴을 물어올 만큼 늠름해졌다.

변화한 것은 비단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네 시선 또한 달라졌다. 스톨게(στοργη)에서 에로스(ἐρως)로. 가족을 향한 사랑에서 연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으로. 너는 명백히 나를 욕망하고 있었고, 오늘 밤 마침내 스스로의 감정을 자각했다.

자위를 마친 너는 욕실에서 손을 씻었다. 물소리는 한참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너는 십여 분을 훌쩍 넘긴 후에야 겨우 욕실 밖으로 나왔다.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너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한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너는 묵묵히 나를 응시하다가 돌연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섬세한 숨결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느껴질 정도로,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두근두근, 기대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첫 키스였다. 아니, 차마 키스라고 할 수도 없는 여린 입맞춤이었다. 타액도 숨결도 섞이지 않은, 깃털처럼 희고 가벼운 접촉.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만족했다는 듯 배시시 웃으려나, 밀려드는 죄책감에 얼굴을 굳히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더 커다란 욕망을 꾸역꾸역 눌러 참는 중이려나. 새벽녘의 어둠이 너의 얼굴을 가린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다시 늑대로 변한 네가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래 뒤척였고, 나 역시 너를 따라 밤을 새웠다.

사실 내가 기대한 건 수면간이었지만, 일단은 도둑키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괜히 마음을 급하게 먹을 필요는 없었다. 내 계획대로라면, 너는 내일 무조건 나와 몸을 섞게 되어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황실 내 나의 평판부터 얘기해야 한다.

내가 연기하는 ‘루시엘’은 폭군이었다. 그것도 무능한 폭군. 술과 사치에 빠져 사는 망나니. 지략도 무력도 부족한 쓰레기. ‘루시엘’은 정치에 하등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황제로서 마땅히 익혀야 할 기본적인 검술조차 연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난 사실. 그리고 그 위로, 근거 없는 소문들이 덧입혀졌다.

홍차 온도를 못 맞춘 시종을 바로 내쫓았다더라. 아니다. 잔인하게 죽였다더라. 황제의 눈 밖에 나면 무조건 사형이다. 재판도 뭣도 없다더라….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점점 더 난폭해졌다. ‘황제는 이성애자다’라는 문장이, 불과 보름 만에 ‘황제는 여색에 미친 폭군이다’로 탈바꿈할 정도였다.

물론 전자도 후자도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내가 사랑하는 건 카인이었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전혀 끌리지 않았다.

악의적인 루머들은 지금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날 선 혀끝에서, 나는 산산이 분해되었고 최악의 방향으로 재조립되었다.

나는 떠도는 소문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더 퍼져나가도록 은근히 물밑작업을 했다.

내게 악소문은 정정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완벽한 계획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나쁜 소문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야 훗날 만장일치로 깔끔하게 폐위당할 수 있었다.

특히 짐승과 붙어먹는다는 추문은 여러모로 써먹을 때가 많았다. 덕분에 카인이 제 욕정을 자각하게 되었고, 내일 벌어질 사건 또한 그 소문과 연관되어 있었다.

내일 오후, 나는 기사 단장, 에반에게 범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범해질 위기에 놓이나, 카인이 극적으로 나를 구한다.

기사 단장이 황제를 강간한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 같겠지만, 상황의 특수성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에반은 실력은 뛰어났지만 도덕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범죄를 저질러도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주의였다. 그리고 그는 골수까지 남색가였고, 내 외모는 그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그걸 알았기에 나는 에반을 굳이 황실의 기사로 임명했다.

에반은 쓰레기였지만 멍청이는 아니었다. 황제를 건드렸다가는 인생 종 칠 게 뻔한데, 뭐 하러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그는 나를 주제로 온갖 더러운 망상을 일삼았지만, 그 상상을 결단코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소문’이 에반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황제가 제 늑대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하는 기괴한 소문. 그 얘기를 듣자마자, 겨우 부여잡고 있던 이성이 뚝 끊어졌다.

‘늑대한테도 대주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거지?’

에반은 암거래 시장에 들러 미약을 샀다. 시장에서 만난 흑마법사에게서 그 구하기 힘들다는 망각 포션도 구입했다.

망각 포션은 흑마법의 정수로서, 이 약을 복용한 자는 세 시간 동안의 기억을 통째로 잃게 된다. 이 약을 황제에게 먹인다면, 황제는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기억조차 못 할 터였다.

에반에게 포션을 판 흑마법사는 바로 변장한 나였다. 검은 로브를 푹 눌러써 머리색을 숨겼고, 얼굴을 다 가리는 흰색 가면을 썼다. 흑마법사답게 해골 모양 목걸이에 팔찌까지 주렁주렁 매달았다.

나는 탐색 마법을 사용해 에반의 위치를 추적한 후, 우연을 가장해 에반과 마주쳤다. 과연, 에반은 흑마법사를 보자마자 반색을 했다.

“흑마법사 맞지? 혹시 망각 포션 있냐?”

“딱 한 병 남아 있습니다.”

“좋아. 한 병이라도 구할 수 있는 게 어디야. 당장 사마. 얼마지?”

에반은 포션을 소중하게 품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 에반이 내게 독대를 청했다. 엄청나게 귀한 술을 입수했는데, 주군과 나눠 마시고 싶다나 뭐라나.

“굳이 둘이서만 만나야 하나?”

“주군께 긴밀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고 싶어서….”

너는 대화를 섹스로 하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내일 오후 2시경, 내 침소에서 보지. 거기는 방음 마법이 걸려 있으니,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을 거다. 카인을 함께 데려가고 싶은데 상관없겠지? 짐승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말이다.”

“네. 물론입니다. 카인을 위한 먹거리도 따로 준비해놓겠습니다.”

에반이 짐짓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입속으로 작게 마법 주문을 영창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마법이었다. 에반의 속마음이 벌레의 날갯짓마냥 귓가를 웅웅 울렸다.

‘침소에 방음 마법을 걸어 놓다니…. 역시 얼굴만 반반하지 생각은 짧군. 암살당하려면 어쩌려고. 하기야, 짐승과 뒹굴려면 방음은 필수겠지. 뭐, 잘 됐어. 입마개를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겠군.’

굳이 더 마음을 읽지 않더라도, 에반의 계획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는 술에다가는 미약을, 카인의 고기에는 마비약을 탈 것이다. 세 시간 후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망각 포션을 먹여 내 기억을 지우겠지.

그러나 에반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카인은 보통 늑대가 아닌 늑대 수인이므로, 일반적인 마취제로는 카인을 재울 수 없었다. 기껏해야 5~10분 후면 약효를 이겨내고 깨어날 거였다.

카인이 강간당하기 직전 내 모습을 목격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옷은 반쯤 벗겨지고, 다리가 넓게 벌려져 있고, 미약 때문에 성기는 빳빳이 발기해있다. 무방비하게 헐떡이는 나를 보며, 카인은 과연 무슨 행동을 할까? 답은 명확했다. 카인은 분명….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동이 텄다. 따스한 햇살이 눈두덩을 간지럽혔다. 나는 두 팔을 위로 쭉 올려 기지개를 켰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머릿속은 기묘하리만치 상쾌했다. 어제 그토록 고대했던 내일이, 드디어 찾아왔다.

에반과 루시엘은, 둥근 대리석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카인은 탁자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엎드려, 에반이 준 간식을 먹고 있었다.

에반은 준비한 음료를 꺼내 들었다. 투명한 와인병 속에 잠긴 액체가 출렁였다. 에반은 유리잔에 음료를 따라 루시엘에게 건넸다.

루시엘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서, 느릿하게 술을 홀짝거렸다. 음료는 지나치게 달았다. 와인 특유의 묵직한 목 넘김도, 여운도 없었다. 알코올의 쓴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술이 아니었다.

손에 힘이 풀렸다. 쨍그랑! 유리 파편이 바닥을 굴렀다. 쿵, 쿵,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식도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분명 찬 음료를 마셨는데, 어째서 용암을 삼킨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뜨거운 열이 온몸을 잠식했다.

루시엘은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의자에서 떨어지려는 그를, 에반이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네놈, 대체 나한테, 흐읏, 뭘 먹인… 하으, 윽…!”

“즉효성의 미약입니다. 술보다 미약에 취하는 게 훨씬 기분 좋을 거라 사료됩니다만.”

“미약이라고…?”

천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몸 깊은 곳에서 더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에반은 루시엘을 들어 침대 위에 내던졌다. 곁눈질로 흘끗 늑대가 있는 곳을 살폈다. 마비약이 잘 든 모양인지, 카인은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카인은 어떻게든 약 기운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무릎만 풀썩 꺾일 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인은 눈을 부릅뜨고서 에반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았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매서운 살기가 넘실거렸다. 짐승이 저런 눈빛을 가질 수도 있는 건가. 괜스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에반은 카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늑대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는 없었다. 세 시간 동안 원 없이 황제를 탐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에반은 황제의 허리끈을 풀어 내렸다. 바르작거리는 그를 간단히 제압하고, 끈으로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그는 능숙하게 루시엘의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겼다. 크고 두툼한 손으로 양 허벅지를 넓게 벌리자, 루시엘의 치부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군살 없는 허벅지와 봉긋한 둔부. 그 사이로 보이는 오목한 틈. 분홍색 애널은 손가락 하나도 집어삼키기 힘들 만큼 좁아 보였다. 경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짐승과 접붙었다는 건 헛소문에 불과했나.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에 서렸던 의아함은 곧 빠르게 사라졌다. 헛소문이었다면 오히려 더 좋았다. 오만하고 아름다운 황제의 처음을 가져갈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흥분되는 일은 없었다.

“네놈이 정녕 미친 건가…. 나는 제국의 황제다! 황제를 건드리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거냐?”

루시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에반의 어깨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발목이 잡혀 저지당했다.

“두렵긴 무슨. 애초에 너는 이 일을 기억하지도 못할걸?”

이제 에반은 형식적인 존댓말마저 집어치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두 손가락으로 약병을 집어, 루시엘의 코앞에 대고 보란 듯이 흔들었다. 검고 탁한 액체가 손의 움직임을 따라 넘실대었다.

“이건… 망각 포션?”

“잘 알고 있네. 금지된 약물이라 양지에서는 팔지도 않더라? 엄청 힘들게 구했다고.”

“…미친놈….”

루시엘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름답다 여겼던 눈동자 위로, 새빨간 분노가 피어났다. 아직도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다니, 아무래도 약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에반은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빛이 쾌감으로 이지러지는 꼴을 꼭 보고 싶었다. 루시엘은 입술을 굳게 앙다물었다. 마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표명이었다.

“하하… 순진한 척하긴. 미약을 윗입으로만 마셔야 한다는 법은 없답니다. 폐하?”

에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손가락을 구멍에 걸쳐 입구를 벌리고서, 뻐끔거리는 애널 안으로 느릿하게 병목을 밀어 넣었다. 루시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눈가에 짙은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무슨… 아, 아앗…”

내벽이 꿈틀거리며 병을 잡아 물었다. 뜨거운 속살이 서늘한 유리에 달라붙었다. 섬뜩한 온도 차이였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안쪽이 수축했다. 안쪽이 꿈틀거리며 병을 잡아 물었다. 에반이 병을 더 기울였다. 검붉은 액체가 직장 안으로 콸콸 쏟아졌다.

“으윽, 컥, 커흑…”

루시엘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숨결과 함께 터져 나왔다. 내장에서 직접 흡수된 다량의 미약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액체가 스며든 내벽이 질펀하게 쑤셨다.

그는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로 가쁘게 헐떡였다. 흉부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불규칙적으로 훅 꺼졌다. 투명한 유리병 너머로, 붉은 내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외설스러웠다. 선정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음외한 단어를 붙여도 모자랐다.

병의 액체가 전부 흘러나온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에반은 천천히 병을 빼냈다. 매끄러운 병목이 전립선을 자극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루시엘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병목의 굵기만큼 벌어졌던 구멍이 빠르게 오므라들었다.

“하으, 몸이, 몸이 뜨거워어… 괴로, 워… 으흣, 응…”

루시엘이 흐느꼈다. 초점을 잃은 동공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붉은 눈동자는 완전히 익어 흐무러진 과육마냥 탐스러웠다. 에반은 기꺼이, 눈앞의 과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 전희를 즐길 여유는 충분했다. 에반은 먼저 루시엘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작은 돌기를 힘껏 잡아당겼다가 엄지 배로 짓눌렀다. 오른쪽 유두를 계속해서 지분거리면서, 에반은 만지지 않은 왼쪽 돌기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침이 흥건히 얽힌 혀가 판판한 가슴팍에 닿았다. 그는 혀를 날름 내밀고서 젖꼭지를 핥아 올렸다.

순간 루시엘의 신경을 타고 날카로운 전류가 흘렀다. 파르르 떨리는 발끝부터 땀으로 젖은 머리끝까지, 타들어 가는 쾌감이 온몸을 장악했다.

“하아, 아, 앙! 흣, 안 돼, 싫, 엇, 으응…!”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허리가 붕 떴다. 발갛게 열이 오른 낯빛을 하고서, 루시엘은 고장 난 오르골처럼 싫다는 말만 반복했다.

입술이 유두를 머금고서 강하게 빨아올렸다. 사탕을 핥듯 혀끝으로 진득하게 굴렸다. 루시엘은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빛 머리칼이 흰 침대보에 문질러졌다. 그러다가 가슴에서의 쾌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에반은 부어오른 유두를 가볍게 깨물었다.

“아악- 그만해…!”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에반은 가슴에서 입술을 떼어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은실이 뚝 끊겼다. 분홍빛을 띠고 있었던 젖꼭지는 붉게 물든 채,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꼭 설탕 코팅을 한 체리처럼. 핥으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은 꽤 민감한 것 같은데, 아래쪽은 어쩐지 한 번 볼까나?”

“흐으, 읏, 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에반은 손끝으로 애널 가장자리를 덧그렸다. 달콤한 미약이 좁은 틈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저 좁고 척척한 구멍에다가 제 좆을 찔려 넣으면, 분명 기분 좋으리라. 에반은 황급히 제 바지춤을 풀어 내렸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둔부를 잡아 벌리려는 바로 그 순간,

“으아아악!”

에반이 볼썽사나운 비명을 질렀다. 늑대가 아가리를 벌려 그의 맥이 뛰는 목덜미를 잡아챈 것이었다. 송곳니가 곧 혈관을 뚫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고작 숨통을 쥐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늑대가 고개를 쳐들었다.

에반의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쿵! 육체가 호선을 그리고 침대 아래로 처박히는 건 순간이었다.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혔다. 세상이 온통 빙그르르 도는 감각과 함께, 에반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카인이 작게 그르렁거렸다. 무뢰배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카인의 시선이 루시엘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미약으로 흠뻑 젖어든 구멍에서는 달큰한 내음이 물씬 풍겼다. 음란한 향이 늑대의 후각을 자극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으, 으읏, 윽, 이상해, 안쪽, 욱신욱신해서… 흐응, 응…”

루시엘은 손이 뒤로 묶여있는 채로 몸을 뒤척였다. 그는 카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약 때문에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안쪽이 미칠 것처럼 저릿했고 또 간지러웠다.

루시엘의 손끝이 스스로의 구멍을 툭 건드렸다. 아흐, 흣, 순간 전류가 통하는 듯한 감각에, 루시엘은 허리를 뒤로 젖혔다. 이걸로는 부족했다. 좀 더 깊숙한 곳을 들쑤시고 싶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곳 만지는 건, 흐읍, 이상한데… 히익, 흣…!”

루시엘은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고, 결국에는 본능이 승리했다. 이성은 약 기운에 먹혀 거의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벽이 꿈질거리며 멋대로 손가락에 얽혀왔다. 하얗고 가느다란 섬섬옥수가 안쪽을 파고들었다. 그 희고 붉은 색의 대비에, 카인은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진정하자. 카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침착해야 해. 어서 머리를 굴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의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해독제를 먹는다면 약 기운도 금방 정화될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공간. 정사 직전의 열기와 어지러운 미약 냄새로 가득 찬 이 방 안에, 타인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루시엘의 모습을, 나 외의 다른 이가 보게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탔다.

의원을 부르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카인이 직접 루시엘을 돕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늑대의 투박한 앞발로는 섬세한 애무가 불가능했다. 사람의 손으로만 구멍을 눅진하게 풀어줄 수 있었다. 짐승보다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게, 루시엘한테도 더 나을 거다.

카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몸이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늑대의 시각이 아닌 인간의 시점으로, 눈 깜짝할 사이 세계가 재구성되었다.

“루시엘.”

카인은 입술을 달싹이며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어젯밤 그토록 애타게 되뇌었던 이름. 내가 애정하고 또 갈구하는- 나의 사랑하는 폭군.

“여기를 봐요. 루시엘.”

루시엘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핏빛 눈동자 위로, 한 청년의 윤곽이 어렴풋이 비쳤다. 털로 뒤덮인 네발짐승 대신, 매끈한 살결과 두 손을 가진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금빛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혹시 카인?”

루시엘이 멍하게 읊조린 말에, 카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인간의 모습이 되어도, 당신은 나를 알아봐 주는구나. 기쁨에 젖은 심장이 작은 새처럼 지저귀었다.

“네, 맞아요. 당신의 카인이에요.”

카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뒤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그동안 수인이라는 걸 숨겨서 죄송하다고? 언젠가는 꼭 고백하려고 했는데, 마땅한 때를 잡지 못했다고?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는 사죄와 변명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둘 중 어느 것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정체를 감춰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는 미약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제 주인이 있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도와야만 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은 없었다.

“도와드릴게요. 혼자서는 힘들 테니까.”

카인은 루시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목을 감은 끈을 풀어준 후, 반쯤 걸쳐져 있던 셔츠를 벗겼다.

완연한 나신이 된 그를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두 다리를 활짝 열어젖히고, 움찔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삽입했다. 단단히 조여든 입구와 빽빽한 내벽이 손가락을 힘겹게 물었다.

“힉, 으윽, 하지 마아… 나는, 남자랑 섹스하는, 읏, 취미 따위는 없단 말이야….”

루시엘은 카인의 품속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는 풀린 손으로 카인의 어깨를 밀어내었으나, 카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인은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루시엘의 아래를 헤집으며, 남은 손으로는 그의 등을 어르는 듯 다독였다.

“그런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돕고 싶은 것뿐이에요. 일단은 손가락만 넣을게요. 루시엘이 바라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아요.”

카인은 최대한 차분하게 속삭였다. 들끓는 욕망이 심연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루시엘이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도록.

“정말로…?”

“네. 정말로.”

카인이 진심을 담아 답했다. 루시엘이 원치 않는 행위는 그 역시 원하지 않았다. 극단으로 치달은 작금의 상황에서도, 카인은 우습게도 순애를 바랐다.

여기서 자신이 루시엘을 강간한다면, 그는 에반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카인은 루시엘에게 맑고 깨끗한 사랑만을 주고 싶었다. 집착과 육욕으로 찌든 상처투성이 사랑이 아닌, 얼룩 하나 없는 희디흰 마음을.

그렇지만, 과연 자신이 끝까지 참을 수 있을까. 치솟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확신은 없었다. 카인은 피가 밸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지러운 잡생각들을 애써 털어내고, 묵묵히 손을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 흐읏, 윽…”

몇 번 출입을 반복하는 사이 구멍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카인은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검지와 중지를 넓게 벌리자, 억지로 열린 입구가 파르르 경련했다.

말캉한 내벽을 문지르다가 손끝으로 가볍게 안쪽을 긁었다. 느리게 손가락을 빼냈다가 손마디 끝까지 잠기도록 단번에 처박기도 했다.

카인의 손은 루시엘의 손에 비해 훨씬 컸고, 뼈대가 굵고 손마디가 불거져 있었다. 그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미약 때문에 민감해진 안쪽을 자비 없이 헤집었다. 쾌감이 너무 과했다.

“아악-!”

비명인지 교성인지 모를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루시엘은 카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움츠러든 어깨가 바들바들 경련했다. 선단에서 뿜어져 나온 정액이, 루시엘의 배는 물론이고 카인의 복부에까지 튀었다.

하지만 한 번의 사정은 약 기운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루시엘의 물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빳빳이 고개를 들었다.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제 중심부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방금 갔는데 왜 또… 그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카인은 루시엘의 내벽을 진득하게 더듬었다. 보이지 않는 안쪽 곳곳에, 자신의 지문을 낱낱이 묻혀놓겠다는 것처럼. 엄지 배로 팽팽히 벌어진 구멍 가장자리를 쓸어내리고, 가위질을 하듯 검지와 중지 사이를 벌리며 안쪽을 넓혔다.

“하으, 윽, 힉, 아응…”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유독 도톰히 튀어나온 부위를 꾹 짓누르자, 신음 소리에 한층 더 열띤 색이 덧입혀졌다.

“…아무래도 두 개로는 부족한 모양이네요.”

흐무러진 내벽을 휘저으며, 카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검지와 중지로 채워진 곳에 약지가 비집고 들어갔다. 밑을 가득 채운 손가락이 이제는 세 개였다.

굵고 긴 손가락을 튤립 모양으로 한데 모으면 웬만한 성기구 사이즈는 되었지만, 루시엘을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모자랐다. 손가락으로는 닿지 않는 부위가 질퍽하게 쑤셨다. 손가락 말고 다른 것, 더 길고 두터운 게 필요했다.

“거기는, 이제 됐으니까… 흐읍, 흣, 더 안쪽, 으응, 거기보다 좀 더, 안을…”

루시엘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흐느꼈다. 둥글게 무너지는 말끝을, 카인은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온전히 잡아내었다.

“하지만 루시엘, 손가락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에요.”

카인이 손가락을 빼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흐무러진 치부에 달라붙었다. 둥글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바람이 와 닿는 감각이 기묘했다. 흐읏, 으… 안쪽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느낌에, 루시엘은 아쉽다는 듯 허리를 들썩였다.

“아까 말했었죠. 당신이 원치 않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말해줘요, 루시엘.”

무엇을 원해요?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카인도 이제 한계였다. 아니, 흐트러진 루시엘을 처음 본 순간부터, 한계는 진작 찾아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구멍을 풀어주지 않고, 발기한 좆을 곧장 쑤셔 넣고 싶었다. 루시엘의 허락이든 뭐든 상관없이 본능을 따라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카인은 제 욕망을 꾹꾹 억눌렀다. 루시엘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은…”

루시엘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바라는 건 명백했지만, 남아 있는 한 조각 자존심이 혀를 잡아매었다.

뼛속까지 이성애자라서 그런가, 루시엘은 좆을 삽입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커 보였다. 심지어 그는 제국의 황제였다. 남자의 좆을 원한다고, 어떻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루시엘은 대답 대신 이를 꽉 앙다물었다.

“루시엘.”

카인이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오랜 마찰로 퉁퉁 부어오른 애널 가장자리에 굵직한 무엇인가가 비벼졌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뜨거운 것.

루시엘은 긴장감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들어온다. 공포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튀어 올랐다.

그러나 예상했던 삽입은 일어나지 않았다. 뭉툭한 귀두는 입구를 노크하는 듯이 툭툭 두드릴 뿐,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흐읏, 응… 루시엘은 애타는 비음을 흘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밑으로 내려, 제 둔부를 잡아 벌렸다.

“여기 안에다가, 너 꺼… 너 꺼 넣어줘… 손가락 말고, 다른 거…”

목소리 끝이 수치심으로 물결치듯 요동했다. 제정신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카인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부드럽게 안아드릴게요. 카인이 나직하게 속살거렸다.

그리고 곧, 성기가 느릿하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너무 욱신거려서 가려움마저 느껴졌던 안쪽으로, 굵고 긴 좆이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첫 삽입이었지만, 손가락으로 충분히 풀어준 덕분인지 아픔은 없었다. 대신 통증보다 더 묵직한 쾌감이 루시엘을 덮쳤다.

“하읏, 윽, 아, 이거, 싫어… 망가, 져어…”

루시엘은 짤막한 단어들을 신음과 함께 토해내었다. 뭐가 싫다는 건지, 뭐가 망가진다는 건지, 루시엘 본인도 잘 알 수 없었다. 언어는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다. 열락으로 부글부글 끓는 머리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아, 흐읏, 윽…"

루시엘은 카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 보여주세요."

카인은 루시엘의 턱을 잡아, 반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늘 화사하고 자신만만했던 얼굴이, 눈물과 타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온갖 체액으로 얼룩진 낯은, 추잡하기는커녕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카인은 루시엘의 뺨에 살포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눈물 자국이 길게 남은 뺨에서는 짠맛이 났다.

카인이 크게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안겨있는 루시엘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허공을 휘젓던 손이 끝내 카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루시엘은 손톱을 세워 카인의 등을 긁어내렸다. 넓은 등 위로 손톱자국이 길게 남았지만, 카인은 아픈 줄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흣, 아, 잠깐, 너무 세, 천천히, 아앙, 하윽, 그만!”

느렸던 추삽질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젖은 살결이 부딪히며 질척한 마찰음을 만들어내었다. 부드럽게 안아주겠다는 초반의 목표는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카인은 쾌감을 쫓아 난폭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좋아해요, 루시엘. 좋아해요….”

거친 추삽질과 상반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카인은 루시엘의 무릎을 잡아 구부리듯 가슴에 밀어붙였다. 다리가 한껏 벌어지며 접합부가 시야에 노출되었다.

카인은 허리를 밀어붙였다. 둔부와 허벅지가 빈틈없이 맞닿을 때까지, 그의 안을 파고들었다. 삽입이 너무 깊어 고통스러운지, 루시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러다가, 흐윽, 진짜 죽, 어, 복상사할 것 같… 아읏, 윽, 제발 멈춰…”

루시엘의 입에서 목을 긁는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도 신음을 많이 내지른 탓에 성대가 아릿했다.

루시엘은 몇 번이고 그만두라고 외쳤지만, 카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미약을 먹은 건 루시엘인데, 카인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원래 섹스란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건가. 아니면 이번이 첫 경험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역시… 상대가 루시엘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세 번째가 정답일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황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지만.’

짝사랑.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머리의 열이 서늘하게 식었다.

‘루시엘은 이성애자야. 내가 오늘 그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미약 때문이야. 미약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내게 뒤를 허락한 거야. 만약 내가 에반을 제지하지 않았다면… 루시엘은 에반에게 범해지며 지금처럼 앞을 세우고 헐떡거렸겠지. 복상사로 죽을 것 같다고 신음하면서.’

마음 저 밑바닥에서 어두운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좆이 삽입된 이후로, 루시엘은 한 번도 카인의 이름을 불러준 적 없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 자신이 누구에게 안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루시엘?”

“흐으, 아, 하읏, 윽, 아아…”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루시엘의 초점은 이미 어긋나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카인은 없었다.

“루시엘, 저를 봐요. 지금 당신이 누구한테 안기고 있는지, 똑똑히 봐주세요.”

카인은 루시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의 뺨을 툭툭 건드리자, 흐릿했던 눈동자가 잠시 초점을 찾았다. 붉은 입술이 찬찬히 달싹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음성이었다.

“…카인….”

차라리 모르겠다고 답했다면, 포기하기 좀 더 편했을 거다. 아예 타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면, 카인은 평생 짝사랑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정사 내내 자기가 누구한테 안기는지도 몰랐던 루시엘은, 혼절하기 바로 직전에 카인의 이름을 불렀다. 카인은 그 사실에서 일말의 희망을 얻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절망보다 더 질이 나빴다.

온몸에 맺혔던 땀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카인은 루시엘의 안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저 좁은 구멍 안에 얼마나 많이 사정했던가. 벌어진 구멍에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루시엘은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쳐 쓰러진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정교한 인형 같았다. 얕게 들썩거리는 흉곽만이, 그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겨우 증명하고 있었다.

카인은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에반에게 다가가, 그의 품속을 뒤졌다. 작은 유리병이 손에 잡혔다. 에반이 말했던 망각 포션이었다.

남자와의 첫 섹스가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이뤄졌다니. 루시엘에게는 딱히 좋은 기억이 아닐 것이다. 루시엘을 위해서라도 이 기억은 지워버리는 게 나았다.

망각 포션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 다만, 포션을 제조한 흑마법사 본인은 약을 복용해도 기억을 잃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루시엘이 그 흑마법사일 리는 없겠지.’

카인은 자고 있는 루시엘의 턱을 잡아 벌린 후, 열린 입속으로 포션을 부어 넣었다.

망각 포션은 효과가 전혀 없었다. 내가 만든 약을 나에게 먹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카인과의 성교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척했다.

설정상의 내가 기억하는 건 카인과 섹스하기 전의 상황뿐이었다. 에반에게 겁탈당한 위기에 처한 나를 카인이 구해줬다는 것과, 카인은 사실 평범한 짐승이 아닌 수인이었다는 것.

나는 먼저 에반을 기사 단장 자리에서 잘랐다. 그리고 저기 멀리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황제를 강간하려 했던 죄는 무조건 사형에 처해야 맞겠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아니, 죽이지 못했다.

어떻게 내가 에반이 날 범하려 했다고 떠들고 다니겠는가. 자존심 센 ‘루시엘’의 성격상 절대 그러지는 못한다. 고로 공식적으로 에반의 죄는 괘씸죄였다. 에반이 정확히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나와 카인, 그리고 에반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뭐? 괘씸죄?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기사 단장 직위를 거둬갔다고? 미친놈….”

“쉿. 목소리 낮추게. 황제가 듣겠어. 그 기사 단장도 괘씸죄로 유배당하는 판국이야. 우리도 언제 에반 꼴이 될지 몰라.”

“에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신하들의 쑥덕거림을 수정 구슬로 살펴보며, 나는 자축의 박수를 쳤다. 이렇게 한 걸음 더 폐제에 가까워졌다.

죄인에게 벌을 내렸으니, 다음은 은인에게 상을 줄 시간이다. 나는 카인을 내 호위 기사로 임명했다. 카인은 에반에게서 날 구했고, 기사 단장을 제압할 만큼 실력도 출중했다. 그에게는 호위 기사 자리가 딱 어울렸다.

물론 이건 카인을 납득시키기 위한 표면상의 명분이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는 내 사심. 검은 기사 제복을 입은 카인은 분명 멋있을 거다. 그리고 카인이 내 호위 기사가 되면, 나는 그를 언제나 곁에 둘 수 있다. 회의, 공식 석상, 심지어는 취침 시간이나 목욕 시간까지…. 호위를 빌미로 카인을 내 옆에 꼭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

둘째는 기사 서약의 내용 때문이었다. 서약에 따르면, 기사는 육욕에 휘둘리면 안 되며, 언제나 주군에게 충성해야 한다.

호위 기사가 주군을 성애적으로 좋아한다? 큰일 날 소리다. 기사가 주군에게 바쳐야 할 감정은 오직 충심밖에 없다.

내가 황제고 루시엘이 내 기사인 이상, 그는 내게 연심을 품어서는 안 되며, 품는다 해도 드러낼 수는 없다. 주군과 기사 사이에서 순애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면… 호위 기사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물론 황제인 나는 절대로 루시엘을 사임시켜주지 않겠지만! 기사직을 버리고 싶다면 먼저 날 황좌에서 내쫓아야 할 거다.

내가 카인에게 호위 기사 자리를 제안했을 때, 카인은 쉽게 긍정의 답을 하지 못했다.

“카인, 내 호위 기사가 되어줄래? 아니, 되어 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그렇지만 저는…”

카인은 말끝을 흐렸다. 생략한 뒷말을 유추하는 건 쉬웠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걸요.

아아, 그래. 역시 고민할 줄 알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준비했던 말들을 술술 쏟아냈다.

“그간은 호위 기사를 따로 두지는 않았지만, 이번 에반 일을 겪으면서 느꼈어. 언제 또 누군가가 내게 해를 끼칠지 몰라. 내게는 믿을 만한 기사가 필요해. 바로 너 같은.”

“…….”

“설마 황제의 명을 거절하려는 건 아니지?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겠다. 내 곁에 온종일 붙어서 나를 지켜줄 만한, 힘세고 건장한 사내로. 목욕도 같이하고, 침실도 같이 쓰고….”

“…하겠습니다. 호위 기사.”

“좋아. 잘 생각했어. 서임식은 삼일 뒤에 치르도록 하자. 괜찮지?”

“네.”

그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사 서임식은 동이 트기 바로 직전, 신전에서 치러졌다. 신전은 내게 결코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첫 번째 생에서 나는 신관이었고, 생의 대부분을 신전에서 보냈었다.

나는 카인과 신하들을 대동하고 신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푸른 어둠에 잠긴 새벽녘의 신전. 대리석 바닥에서 섬뜩한 냉기가 올라왔다.

굳건하게 솟은 돌기둥과 섬세하게 조각된 신상들. 빛과 어둠과 액체가 뒤섞인 천장의 유화, 사제들의 조용한 그림자….

신전은 옛날과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 한결같음이, 나는 싫었다. 처음으로 카인을 잃은 날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복도를 가득 채운 벽화에는, 신의 모습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성화 속 신을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백발에 얼음처럼 시린 눈동자, 유려한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신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옅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온전한 선(善) 그 자체였다. 신자들은 확신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저런 겉모습을 가진 이라면, 심성도 필시 자애로울 것이라고.

허나 나는 알고 있다. 신은 온전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완벽한 껍데기 속에는, 그와 대조되는 불완전한 감정들이 가득하다. 애증, 질투, 집착과 소유욕. 인간이나 가질 법한 어긋난 감정들을, 신은 제 심연 한구석에 꼭꼭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내게로 향했다.

신을 저버린 신관. 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내준 신관. 신은 나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며, 내 연인인 카인을 질투했다. 그 질투로 인해, 카인은 모든 생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거야. 당신은 절대로 카인을 죽이지 못해.’

나는 한참 동안 신의 푸른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그림 속 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긴긴 복도를 지나면 둥근 홀이 나온다. 기사 서임식은 바로 이 넓고 화려한 홀에서 행해진다.

나는 홀 한가운데에 섰고, 카인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제와 신하, 그리고 신상을 증인 삼아, 나는 카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칼등으로 카인의 어깨를 세 번 두드리며,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서약을 읊었다.

"신의 이름으로 그대를 기사로 서임하노니 그대는 다음 세 계명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지켜라.

첫째, 육체와 영혼을 갈고닦아라. 육욕에 휘둘리지 마라.

둘째, 언제나 정의의 뜻을 좇아 행하라. 욕망에 못 이겨 불의와 타협하지 마라.

셋째, 주군을 배신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라."

…보소서, 신이여. 신의 비호 아래 임명한 기사가, 어떻게 신의 뜻을 저버리는지.

나의 사랑스러운 기사는 육욕에 휘둘릴 것이요, 욕망에 못 이겨 기사로의 정의를 내려놓을 것이며, 충성을 바쳐야 할 주군을 감금하고 범할 것입니다.

내 기사는 나의 것이요, 나 역시 그의 것이니, 신일지라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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