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4)

외전 6. 여행

집을 벗어나고 싶다고 매일 같이 생각했건만, 막상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집 밖에 나와서가 아니라, 노엘과 함께 ‘여행’을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노엘은 내 생일을 챙겨주겠다며 괌으로 데려왔다.

사실 노엘에게 부탁해서 한국으로 가자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가 가려던 일정의 항공권 티켓이 매진되는 바람에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노엘 역시 아쉬워하면서 다음엔 꼭 한국으로 가자고 했다. 그게 언제인지 답변은 들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괌도 나쁘지 않아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금 쉬다가 밥 먹으러 가자. 아니면 룸서비스 시킬까? 그게 낫겠지?”

“네.”

“오늘 재밌었어?”

“네, 네…….”

노엘은 내 생일을 축하해 주다 못해, 분에 넘칠 정도로 챙겨 주었다. 크루즈를 빌려서 돌고래 떼가 지나가는 걸 구경할 수 있었고 스노클링이며 해본 적 없는 온갖 액티비티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지금 들어온 숙소도 꽤 비싸 보였다. 넓은 객실에 테라스에는 스파가 딸려 있다.

“뭐가 제일 재밌었어?”

“그냥 다 재밌어서 꼽을 수가 없는데……. 아, 돌고래 보는 거 좋았어요.”

“액티비티 같은 건? 재미없었어?”

“아뇨, 재밌긴 한데 운동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좋아서요.”

“다행이네.”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조심히 끌어안는 노엘의 모습에 질문을 삼켜 내었다. 이제는 마주 닿는 노엘의 온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노엘이 내 등을 토닥여 주는 걸 가만히 느끼기만 했다.

“저….”

“응? 왜? 어디 불편해?”

“테라스에 가 있을게요.”

“아, 스파가 있지. 이리 와. 옷 갈아입혀 줄게.”

옷 갈아입혀 준다는 말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손을 휘휘 저으며 뒤로 물러났으나, 노엘이 금방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해주고 싶어서 그래.”

노엘은 아직까지 나를 애 취급했다. 어쩌면 개새끼 취급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눈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노엘이 내가 걸친 옷을 하나하나 벗겨 주기 시작했다. 설마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가 싶은 마음에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노엘은 수영 바지를 입혀 주고 시계를 빼낼 뿐 별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왜?”

“아,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 있다고 쳐다보면서 또 아니래.”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와인 가져올게. 아, 술은 아직 좀 그런가?”

“아니에요. 한 잔 정도는…….”

노엘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냉장고가 있는 바 쪽으로 걸어갔다. 거실 밖으로 나가는 노엘을 가만히 보다가 테라스로 나가 스파에 들어갔다.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누르자 따뜻한 물이 금방 차올랐다. 허리까지 넘실거리는 물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전망을 내려다봤다.

“와, 예쁘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숙소에서 투몬 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넘실거리는 에메랄드빛 해변을 멍하니 바라보다,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일몰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푸른 하늘에는 분홍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여졌다. 카메라 렌즈가 아닌, 맨눈으로 보고 싶어 멍하니 쳐다만 봤다.

“뭐가 예뻐.”

“아, 아니에요.”

“놀라기는.”

이때, 노엘이 와인과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왔다. 어느샌가 옷을 갈아입었는지, 나와 같은 수영복 차림이다. 탄탄한 가슴팍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하늘을 쳐다볼 수 없다. 괜히 민망해졌다.

“유진.”

“네, 네.”

“또 왜 떨어? 추워? 그만 들어가자.”

“아, 아뇨! 그냥 들어 오시면…….”

기분 탓인지, 노엘의 앞에서 말 더듬는 게 부끄러워졌다. 나를 응시하는 파란 눈동자가 말도 안 되게 예쁘게 느껴져서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이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괜히 입술을 꾹꾹 누르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안 될까요?”

노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이게 다 노을 탓이다. 괜히 예쁜 색으로 내려앉아서, 사람을 의식하게 만드는 묘한 하늘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아무 잘못 없는 하늘을 탓하면서 노엘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노엘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주면 생각해볼게.”

아무래도 내가 민망해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픽 웃는 노엘을 보고 한숨 쉬다가 내게 뻗은 손을 잡았다. 먼저 잡은 일은 별로 없어서 괜히 민망해졌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면서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 찰박, 물소리와 함께 노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계속 떠네. 많이 추워?”

“조금 춥긴 한데. 그래도 노을을 좀만 더 보고 싶어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건…….”

“별수 없네. 안아 주는 수밖에.”

이러려고 물었던 거냐고 얘기하고 싶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입만 꾹 다물었다. 노엘은 이게 허락을 받은 줄 안 모양이다. 하얗고 단단한 팔뚝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느샌가 나는 노엘의 가슴팍에 기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여행 어디 가봤어?”

노엘이 내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다가 입술을 묻었다. 쪽, 하는 짧은 마찰음이 들리면서 시선이 맞물렸다.

노을이 내려앉아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노엘의 얼굴이 눈에 좀 더 뚜렷하게 들어왔다. 선명한 눈매며, 날렵한 콧날이며 도톰한 입술까지 어디 하나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친구들이랑 기차 타고 여기저기 다닌 적은 있는데 해외는 한 번도, 아니. 지금이 처음이네요.”

“친구들?”

“네, 네. 아윽……. 잠, 잠깐만요!”

“미안.”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내 목에 입을 맞추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세워 잘근거리는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노엘이 곧이어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전혀 미안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노엘은요?”

“응?”

“여행, 많이 다녀보셨겠죠.”

문득, 나를 바라보는 이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새파란 눈 속에는 어떤 감정이 감춰져 있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나를 보고 있는지. 노엘이 완전히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 예전처럼 마냥 무섭지는 않았다.

말도 안 되지만,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노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안 가본 데는 없을 거야, 아마.”

“아…….”

“단순히 놀러 갔던 적은 없어. 다 일 때문에 돌아다닌 것뿐이니까.”

“근데 저,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어떤 거?”

“생일이 언제예요?”

지금 아니면 물어볼 수 없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준 사람을 위해, 역시 보답을 해주고 싶다. 아니, 어쩌면 역시나 호기심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노엘 웨스틴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말도 안 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곤란, 하시면 얘기하지 않으셔도 돼요.”

“12월 24일.”

“아…….”

그래서 이름이 노엘이구나. 지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노엘에게 해준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안함을 가질 필요는 없다.

노엘이 그동안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은 편하지 않다. 괜히 잡힌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뭘 해주려고 하지 마. 너 이미 다 해주고 있으니까.”

“네?”

“내 옆에 있어 주잖아.”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살벌하게만 느껴졌던 음성이 감미롭게 들렸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내 손을 잡으며 간격을 좁히는 노엘을 밀어내지 않을 리 없었다.

“날 떠나지 않고.”

“노엘.”

“네 이름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유진.”

노엘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마주쳤다. 어느샌가 찰랑대던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귓가에 속삭이는 부드러운 음성만이 전부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아내었다. 노엘의 눈 속에 있는 나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떨지 않았다.

“사랑해.”

“노엘…….”

“응, 그렇게. 그렇게 계속 내 이름 불러 줘.”

내 뺨을 어루만지던 노엘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좁아지는 간격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심박 수가 쾅쾅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마디 하나 남지 않는 간격이 되었다.

“키스해도 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분위기에 홀린 탓이 아니다. 노엘은 내 반응을 보자마자 즉시 입술을 포개었다. 쪽, 하는 짧은 마찰음과 함께 잠깐이나마 부드러운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사랑해, 유진.”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더는 파도 소리도,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 뺨을 움켜쥐고 삼키듯이 입을 맞추는 움직임에만 신경이 쏠릴 뿐이다.

“흐….”

노엘이 입을 맞추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따라 속이 간질거리면서 묘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쪽, 쪽, 낯뜨거운 마찰음이 목덜미에 닿았다 떨어졌다.

“잠, 으응….”

부끄러운 소리를 내자, 나를 끌어안은 손이 더욱 힘을 주어 노엘과 가까이 밀착시켰다. 목덜미며 쇄골이며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물기 젖은 소리가 끈적하게 들리면서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는 이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돋아났다. 이상하다 못해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다.

“간, 간지럽, 흐읏…….”

“기분 좋은 거야. 그거.”

뒤에서 끌어안은 손은 물속에서 내 허리를 살살 쓸어 만지고는 천천히 수면 위로 나타났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허리 위로, 가슴팍으로 서서히 올라왔다. 어느샌가 기다란 손가락이 곧게 선 유두를 지분거리며 살살 비틀어댔다.

“아, 으응. 잠, 흐, 이상…….”

유두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에 입이 벌어지며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침실이 아닌, 테라스다.

혹시나 다른 객실에 머무는 손님들이 들을까 봐 입술을 짓이겼지만, 목덜미를 잘근대는 입술이나, 유두를 살살 굴리며 만져 주는 손가락에 참을 수 없다. 아래가 묵직해지는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많이 춥나 봐.”

“흐읏…….”

노엘이 나를 번쩍 들어 업고는 스파 옆에 있던 선베드에 내려놓았다. 어느샌가 하늘은 좀 전보다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엘은 내 위에 올라타고는 입술을 매만졌다. 계속 물속에 들어가 있어 한기가 느껴졌지만, 어쩐지 마냥 춥지만은 않았다.

“따뜻하게 해줄게.”

“누, 누가 들을, 흐읏…….”

“괜찮아, 그럴 일 없으니까.”

“그걸 어떡, 흐응…….”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봤지만, 질문은 노엘의 입술에 삼켜지고 말았다. 쪽, 쪽. 가벼운 마찰음이 들린 것도 잠시, 벌어진 틈 사이로 타액으로 푹 젖은 혓줄기가 들어왔다. 붉은 혓바닥이 둥글게 치열이며 점막을 훑고는 혓줄기를 옭아매며 주욱 빨아들였다. 혀와 혀가 얽히며 질척한 소리를 내뱉었다.

“아흣!”

숨을 뱉으며 노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나를 끌어안던 커다란 손바닥이 점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푹 젖은 바지에 손을 대었다.

어느샌가 내 성기는 쾌락을 기다린다는 듯이 부풀어 있다. 쾌락, 결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눈물이 삐져 나왔다.

“흐으…….”

“유진, 나 봐. 무슨 생각 했어?”

멍청히 눈가에서 흐르던 눈물이 노엘의 뺨으로 옮겨갔다. 노엘은 축축한 물기를 느끼자마자 입술을 떼어내고 시선을 보냈다.

사실 무서웠다. 언제 노엘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종종 옛날처럼 ‘개새끼’라 불렀지만, 이건 문제 되지 않았다. 다만 또 지하실 같은 곳에 가두며 뺨을 후려칠 생각을 하니 두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아, 아니에요. 너, 너무 아파서…….’

‘아파서, 뭐?’

‘그, 그래서 자, 자꾸 눈물이 났는데, 전혀 싫지 않아요. 지, 진짜예요…….’

‘그럼 좋다는 뜻이네?’

‘흐…….’

‘내가 그랬잖아. 너는 이런 취향이라고.’

맞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는 게 아니다. 노엘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괜히 서러워졌다.

아름다운 일몰로 물들어진 하늘 아래에서 서러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말았다. 노엘이 나를 끌어안은 채 뺨을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더더욱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끄윽…….”

“유진, 나 봐.”

“흐, 으. 죄송해요. 화, 화내지 마세…… 흐윽!”

“잘못한 거 아니야. 걱정되어서 그런 거니까 편하게 말해.”

“때, 때릴까 봐…….”

“뭐?”

팔뚝이며 허리며 닿는 대로 지분거리던 손이 멈췄다. 덜컥 겁이 났다. 바르르 떨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내가 도망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나는 괴로운 과거 속에 갇혀 있다. 아직도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펑펑 터져 나왔다.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 요. 흐윽…….”

“……유진.”

“흐어어엉.”

엉엉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자, 노엘이 하던 행위를 멈추고 나를 끌어안으며 다독여 주었다. 묵직한 머스크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과거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찰나다.

하지만, 노엘은 내게 손찌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젖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며 낮은 음성만 흘려댔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아픈 생각하지 마.”

“흐윽…….”

“널 때리는 일은 없어. 맹세할게.”

내 손을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엘은 다른 손으로 내 눈꺼풀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었다. 과거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심한 손길이다. 과거 속의 내가, 그리고 과거에 갇힌 내가 가여워서 서럽게 흐느꼈다. 그럼에도 노엘은 아무 말 없이 안아 줄 뿐이다.

“유진.”

“잘못…….”

“아냐, 내 잘못이야.”

그만하라는 말을 할 줄 알았으나, 노엘은 자기 잘못이라 치부하며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예상과 다른 행동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전부 다 내 잘못이야.”

“…….”

“내 탓을 해, 혼자 앓지 마.”

맞닿은 온기에 눈물이 멈춰졌다. 미안해, 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노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내 세상에는, 이 사람밖에 없다는 현실이 절실하게 와닿았다. 혼자 힘들어하지 말라는 그 말이 나를 흔들었다. 노엘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두 눈을 감은 채 노엘의 팔뚝을, 손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눈가에 매달리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응, 말해.”

“자꾸 옛날이, 끄윽, 떠올라서…….”

“이리 와.”

낮은 음성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조금 더 끌어 안겨졌을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엘이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유진, 나는 널 사랑해.”

“흐, 으…….”

“사랑하는 만큼 늘 과거를 후회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있어.”

오묘한 기운이 살갗을 맴돌았다.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노엘에게 죄의식을 안겨주려고 했던 과거가 떠올렸다. 그 당시 노엘은 후회 같은 걸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처연하고도 절절한 눈으로 내 모습을 담아내려 애쓰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같은 순간이 그래. 네가 오늘 하루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몇 마디밖에 못 하잖아.”

“끄윽, 그, 그건…….”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졌다. 예쁜 빛으로 일렁이는 바다도, 드넓은 전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를 오롯이 담아내는 노엘의 눈빛까지 감출 수 없다.

노엘은 처연한 눈빛으로 나를 담아내고 있다. 나는, 그런 노엘을 밀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절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쉬이 밀어낼 수 없던 것이다.

“손, 잡아, 흐읏, 주세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울음을 삼켜내었다. 덜덜 떠는 손을 뻗어, 노엘의 앞으로 내밀었다. 노엘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움켜잡았다.

“네 상처가 아물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흐, 흐읏…….”

“그래서 널 못 보내.”

사뭇 진지해진 말투에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떨림이 심장 가득 차오를 뿐이었다.

“도망치지만 마, 다른 건 바라지 않아. 계속 내 곁에만 있어 줘, 유진.”

대답 대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노엘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달아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따스한 온기가 필요할 뿐이다. 가늘게 떨리는 호흡을 짧게 뱉고는 노엘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줄게.”

“하, 하지만……. 읏!”

노엘은 나를 선베드에 눕히고는 목덜미 위로 이를 박아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미칠 것 같은 감각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은 다정다감한 말투다. 꽤 의심스러웠지만, 살갗 위로 피어오르는 열기 탓에 금방 잊고 말았다.

“흐으, 으, 응!”

말캉한 입술이 유두를 머금으며 사탕 빨듯이 혀를 굴렸다. 쪼옥, 쪽. 물기 젖은 마찰음에 견디지 못하고 목덜미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노엘이 목선을 따라 지분거리며 허리선을 쓸어내렸다.

“유진.”

“하, 으…….”

가슴을 배회하던 입술이 쇄골이며, 허리며 천천히 내려와 툭 불거진 뼈를 입에 머금고 살살 굴려댔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괜히 이상한 기분에 노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심장 박동이 크게 들려, 노엘에게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 천, 흐으…….”

“천천히 해달라고?”

“으응!”

질문과 동시에 내가 입고 있던 바지가 쑤욱 내려갔다. 어느샌가 자극을 받아 부풀어 오른 성기가 훤히 드러났다. 창피한 나머지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노엘이 내 성기를 움켜쥐며 툭툭 자극을 준 탓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내 다리를 조심스레 벌리는 노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았어, 천천히 할게.”

“이, 이거, 하, 으, 누가 들…….”

“아무도 안 들어. 괜찮아.”

노엘이 내게 가까이 밀착하며 귓불을 잘근 깨물고는 움켜쥔 성기를 살살 흔들어댔다. 강렬한 쾌감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발가락을 오므리며 몸을 뒤로 젖혔지만, 쾌락을 밀어낼 순 없다.

어느샌가 내 발목은 선베드 손잡이에 걸쳐 있었다. 노엘은 사타구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성기를 입에 삼키고는 주욱 빨아들였다. 사고 회로가 정지하기 시작했다.

“아, 흐으, 아, 읏, 이상……. 흐읏.”

노엘이 혀끝을 세워 귀두를 꾹꾹 눌렀다. 어느샌가 혓줄기는 정성스레 살 기둥을 핥아 올리며 적나라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회음부며 고환이며 빠짐없이 탐하는 혓바닥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아, 읏, 기분, 이, 이상…….”

허리가 절로 움직여졌다. 침대에 걸쳐진 발목은 볼품없이 흔들거렸다. 노엘은 괜찮다고 했지만, 이곳은 침실이 아니다. 깜깜한 밤하늘이 내려앉은 테라스라, 누구에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회음부를 핥아 내리던 노엘의 입술이 어느 순간 입구로 향했다.

“거기, 하, 하지, 아, 읏!”

하지 말라고 했지만, 몸은 말과는 다르게 반응했다. 창피한 기분마저 열락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입구를 쭈욱 빨아들이며 자극을 주었다. 혓바닥을 넓게 펴서 입구 주위를 배회하더니 힘을 주어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기로 하듯, 내 허리가 휘청거렸다.

“으응, 하, 으… 그, 으읏!”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밀어내야 하는데. 어쩐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헐떡거리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느샌가 노엘의 손에 내려져서 제대로 가릴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려고 해도 소용없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입이 벌어져 타액이 목덜미까지 죽죽 흘러내렸다.

“아, 으읏…….”

“괜찮아, 유진. 소리 내도 돼.”

“무, 무서……. 하, 으. 거, 거기!”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말캉한 혀가 내벽 안으로 들어와, 빙글 움직여댔다. 입구 주름을 펴듯 혀를 꾹꾹 누른다. 입술에 힘을 주자, 쪼옵거리는 물기 젖은 소리에 온몸이 화악 달아올랐다. 밀어내야 한다는 의지와 다르게 성기에는 금세 사정감으로 차올랐다.

“아흑!”

잠시 후,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구 사이로 손가락 하나가 밀어 들어왔다.

노엘의 입술은 입구에서 성기로 향했다. 내벽으로 파고든 손가락은 희롱하듯 점막 안을 빙글 휘저으며 예민한 부분을 쿡쿡 건드렸고 단단해진 성기를 할짝대는 혀는 뱀처럼 휘감으며 살갗을 쓸어 만졌다. 사정감을 참지 못했다. 위아래로 가해지는 쾌락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하, 할, 것, 같……. 하, 하지, 그마안. 제발…….”

이대로 가다간 노엘의 입에 사정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수치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버둥거리며 노엘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노엘은 꿈쩍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으며 성기를 핥을 뿐이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흐으…….”

“잘했어, 괜찮아.”

“흐어어엉!”

노엘이 사정액을 손바닥에 뱉으며 입구를 지분거렸다. 정액이 묻지 않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퍽이나 다정했다.

“아프지 않게 할게.”

입구가 미끈거리는 액체로 뒤덮였다. 방금 노엘이 물고 빨고 별짓을 다 한 바람에 살갗은 물기에 젖어 흐물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을 수 없다.

노엘이 입고 있던 바지가 떨어지면서 거대한 성기가 드러나자 덜컥 겁이 났다. 조심히 들여보낸다고 해서 문제가 아니다. 다른 의미로 겁이 났다.

“아, 아니, 그, 그게…….”

“응?”

“흐, 아, 아무것도, 아, 아니에요. 처, 천천히…….”

“응,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아윽!”

대답을 듣자마자, 노엘이 접합부 주변으로 성기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살갗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몽둥이 같은 물건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두 눈으로 볼 자신이 없다. 아무리 풀어 주고 물기로 젖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숨을 쉴 수 없어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 으읏…….”

“힘 빼, 유진.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온 성기 탓에 입이 막혔다. 천천히 움직이던 허리도 어느 순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내벽을 쾅쾅 처박는 움직임에 입이 벌어졌고 앓는 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아, 흑! 처, 천천히 한, 읏, 다고, 했, 아읏!”

노엘의 등을 끌어안았다. 내벽을 쑤시며 퍽퍽 박아댈 때마다 살가죽이 찢기는 통증에 참지 못하고 등줄기에 손톱을 세워 버렸다. 하지만 그게 노엘에게 자극이라도 된 모양인지 내 중심을 움켜쥐면서 빠르게 추삽질을 해댔다.

성기를 움켜쥐며 흔든 탓일까. 좀 전보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느껴지면서 통증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반신이 쪼개질 것 같다.

“아, 윽!”

한계를 모르고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온 성기는 내벽을 콱콱 박아 대면서 제 욕구를 충족시켰다. 내장까지 차는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일순간 스치면서 몸이 떨려 왔다. 깊숙이 파고든 성기는 점막을 찔러대며 내 안을 헤집어댔다.

“흐, 흐읏!”

“하아, 다른 데 쳐다보지 마.”

“아흑…! 이, 이상, 흐….”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거대한 성기가 내벽에 가득 찬 바람에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좀 전에 봤던 노을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붉은빛이며 보라색 빛이며 온갖 색이란 색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번뜩거렸다. 퍽, 퍽, 퍽. 적나라한 물기 젖은 소리에 시야가 어지러울 만큼 쾌락이 올라왔다.

“아, 아앗!”

더는 누가 들을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 아니, 걱정할 수 없다. 내 몸을 침식한 쾌락에 견디지 못하고 달뜬 소리를 내뱉었다.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온 노엘의 성기에서 정액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몇 차례 허리를 움직이자, 노엘의 사정액이 접합부를 타고 흘러나와 허벅지며, 선베드며 온갖 것에 묻어났다.

“하아…괜찮아, 괜찮아, 유진.”

어쩌면 내 몸을 젖게 한 건 정액이 아닌, 쾌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엘이 내 다리를 들어 올리며 연신 박아 댔다. 퍼억,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번쩍 들렸다.

성기를 삽입한 채로 노엘이 내 등을 돌려 엎드리게 했다. 내벽 안에서 돌아가는 성기에 목덜미가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노엘이 내 골반을 움켜쥐며 추삽질해 댔다. 침대를 움켜쥔 손에 힘이 풀어지면서 상체가 무너졌다.

“흐, 으….”

아까보다 깊숙이 삽입된 탓에 쾌락은 더해졌다. 고개를 시트 위에 파묻고는 엉덩이만 들린 채로 노엘을 받아들였다. 하얀 손이 내 골반을 움켜쥐고는 연신 박아 댔다. 찔꺽거리는 소리는 자극적인 분위기를 짙어지게 했다. 노엘의 다른 손이 내 성기를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결국, 나 역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했고 노엘은 또 한 번 내 안에서 사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을 잃었다.

* * *

“일어났어?”

“몇 시, 으윽…….”

다시 눈을 떴을 땐 침대였다. 비릿한 냄새 대신 산뜻한 비누 냄새만 풍기는 걸 보면 노엘이 씻겨 준 모양이다. 옷도 새것으로 갈아 입혀져 있다. 노엘은 내 왼쪽 손목에 쪽쪽 입을 맞추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러고 보니 시계도 다시 채운 모양이다.

“오후 4시쯤 됐네.”

“아…….”

“공연은 다음 기회에 보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이 몸으로 어딜 가겠다고.”

천천히 하겠다면서 빠르게 허릴 쳐올리던 지난 밤의 노엘이 떠올랐다. 내 손을 붙잡으며 연신 쪽쪽거리는 입술을 쳐다보다, 파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어쩐지 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사랑해, 유진.”

불쑥 들리는 고백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러나, 노엘은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뺨을 감싸 쥐며 연신 입을 맞췄다.

“읏, 잠시만요. 왜 또…….”

“키스만 할게.”

“거, 거짓, 마알. 흐읍…….”

“너 닮아서 그래.”

쪽, 하는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포개어졌다. 곧이어 내 뺨을 감싸 쥐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내가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어내었다. 나는 이 침대 밖을 벗어날 수 없다는 예감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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