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4)

외전 4. 노엘 웨스틴: 그 정도의 인간

목요일 오후, 노엘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노엘은 검토한 서류를 내려놓고 스피커 볼륨을 올렸다. 노엘의 귀에는 허연 이어폰이 꽂혀 있다. 무엇을 듣는지 매끄러운 입꼬리가 더욱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우욱!

―유진, 괜찮아요?

―입에 안 맞아서…….

―다른 걸 주문할게요. 남기지 말아요. 약 먹을 때 더 힘들어요.

―네, 그럴게요.

노엘이 듣는 것은 우아한 클래식이 아닌, 유진과 필립의 대화다. 그랬다. 노엘이 유진에게 선물한 시계에는 도청 장치가 들어가 있다. 거금을 들여 시계를 제작하게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결국 노엘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 미친 계획을 실행했다.

“내 개새끼, 이번에는 잘 먹으려나.”

무슨 배경 음악이라도 듣는 것처럼, 노엘이 기분 좋게 웃으며 서류를 검토했다. 웨스틴 기업을 관리할 전문 경영인의 프로필이었다.

사실 노엘은 기업 경영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돈이야 얼마든지 있고 막대한 보상금까지 챙겼기에 일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전시관이나 에이전시 사업만으로도 머리 아픈데 뭘 더 한단 말인가. 쯧, 혀를 차며 서류를 검토하던 노엘이 유진과 필립의 대화에 신경을 돌렸다.

―요즘은 노엘이랑 별일 없으신가요.

―아…….

노엘은 서류 검토를 멈추고 대화에 집중했다. 마음 같아선 저 자리에 뛰어가고 싶었으나, 노엘은 제 나름의 신비감을 주기 위해서 일하는 시늉을 하려 했다.

―참, 필립 씨, 약혼하신다면서요.

―그런 대화도 나누나요? 많이 발전했네요.

일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노엘의 귓가에 들어온 ‘약혼’이라는 단어가 신경을 사로잡았다. 노엘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유진과 제 모습을 떠올렸다.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영락없는 부부 같았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같은 게 아니라, 맞지.”

부부가 아니면 연인이었다. 확실했다. 노엘은 유진이 들으면 기겁할 것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집중했다.

―네, 뭐…….

―무슨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노엘을 설득해서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아직도 재활 치료는 끝나지 않았고. 그리고…….

―맛있게 드세요.

“후. 이런 씨발.”

달그락, 소리와 함께 유진의 목소리가 묻혔다.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낌없이 욕을 퍼부었다. 잠시 후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면서 유진의 음성이 들렸다.

―……노엘도 많이 노력하는 것 같아서 같이 밥 먹는 건 괜찮아요.

같이 밥을 먹는 건 괜찮다. 싫다는 뜻은 아니다. 싫다는 게 아니면 좋아한다는 뜻인가. 노엘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내 개새끼, 씨발. 부끄러워서 표현을 못 하고 있었구나.”

지금 이 자리에 유진이 없길 망정이지, 매끄러운 입술에선 미친 본성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노엘은 지금 당장 서류고 뭐고 내팽개치고 유진이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고 싶었다.

컴퓨터 화면 구석에는 작게 지도 맵이 깜빡이고 있다. 위치 추적 장치도 시계 속에 심어놨다. 노엘 본인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미친 인간인지.

―근데 정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일부러 보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카드 내역서를 정리하다 보니까 아예 외출을 안 하는 것 같아서요.

―아…….

―가끔은 놀러도 다니세요.

놀러 다니라는 필립의 제안에 노엘은 미간을 구겼다. 유진이 몸이 약한 건 사실이었으나, 무리하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외출을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노엘은 그게 싫다. 그래서 어떻게든 유진을 살살 구슬려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계획을 필립이 망칠 생각을 하니 노엘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음……. 그러고 싶은데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요.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아니면, 피트니스 센터라도 알아봐 드릴까요?

―아, 근데 노엘이…….

―설마 운동하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노엘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저 매일 가는 건 그렇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잘 생각했습니다. 근처에 있던 것 같은데 나온 김에 등록하고 갈까요?

“……이런 씨발.”

노엘은 그 정도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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