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선물
“유진, 일어나.”
“으음…….”
“응? 일어나, 어서.”
조금만 더 자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노엘이 이마며 뺨이며 눈에 닿는 대로 쪽쪽거리는 탓에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억지로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쪽 하는 소리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무서워서 대답 대신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렀다.
“저, 더 자면 안 될까요. 허리가 너무 아파서…….”
“10분이면 돼. 아니, 어쩌면 5분도 걸리지 않을 거야.”
노엘이 내 뺨을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얼한 허리 둔통에 아픈 소리를 흘렸지만, 노엘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노엘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아직도 잠기운이 가시질 않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사진 속에서나 볼 법한 뉴욕 시내 전경이 펼쳐졌지만, 별 감흥 없다. 이젠 익숙해졌다. 화려한 도시도, 매일 같이 노엘과 함께 한 침대를 쓰게 된 사실도.
“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이면 벌써 4월이다. 이곳으로 온 지 1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고 4월은 내 생일이다. 생일 같은 것에 의미 두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핑계를 대고 싶다. 매일 집 아니면 병원밖에 돌아다니질 못했고 외출도 노엘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다. 솔직히 작년 생일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근데 피어싱 빼주시면 해드릴게요.’
‘이 개새끼가 지금 무슨,’
‘아파요. 혀에 있는 것만이라도 빼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마음에 안 드시면 학교 갔다 와서 다시 할게요.’
‘좆같은 소리만 하네. 입 벌려.’
어서 죽으라고 등 떠미는 것과도 같은 날이었다. 잊고 있던 작년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과거에 갇혀 있다는 표현이 딱 맞다.
노엘이 알면 화낼 텐데. 노엘이 이 모습을 보면 때릴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웅크린 채 끅끅 울음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익숙하면서도 두려운 발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울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허겁지겁 얼굴을 닦아내었다.
“유진, 잠깐만 일어나라니…… 뭐야, 씨발.”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노엘은 내 얼굴을 보더니 거친 욕을 내뱉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노엘이 나를 잡아끌어 당겨 손목을 살펴봤다. 스스로 물어뜯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 같다.
“어디 아파, 응?”
“아, 아뇨. 죄송해요….”
“근데 왜.”
왜냐는 물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는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으나, 아직까지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또 이 손으로 나를 때리지 않을까. 고통을 안겨주지 않을까, 모든 게 두려워 대답 대신 시선만 회피했다. 그러자 노엘이 내 턱을 움켜잡아 고개를 돌리게 했다.
“괜찮으니까 말해.”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싸늘한 표정이다.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노엘의 모습에 어깨를 흠칫 떨면서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붙잡혀 품속으로 안기고 말았다.
노엘이 내 등을 쓰다듬으며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췄다. 찌르르한 감각이 두려웠던 기분을 지워 주겠다는 기세로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왜 울었어?”
“흐, 흐읍…….”
“유진.”
노엘이 가지고 왔던 조그마한 상자를 옆에 내려놓고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른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두려움인지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싫지 않은 기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예전이라면 스스로를 더럽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배다른 형제끼리 살을 섞는다는 것은 내 신념과 가치관에 완전히 어긋났으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이라서 망정이지, 형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이런 관계를 이어간다면, 나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끌어안은 노엘을 밀어내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래, 정말 어디 아파? 약 가져올게.”
“……노엘.”
“응, 말해.”
노엘이 부드럽게 대꾸하며 내 목덜미를 쓸어 만져 주었다. 목소리만 들으면 화낼 사람 같지 않다. 당장 내보내 달라고 해도 그게 무슨 말이냐고 대답할 것만 같다. 훌쩍거리는 울음을 애써 참지 못한 채 본심을 흘려 내었다.
“저 하, 한국…… 흐읍, 가면 안 될까요?”
“씨발 뭐?”
내 어깨를 움켜쥔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아, 아니에요. 잘못, 말, 했어요.”
“그래. 잘못 말한 거 맞지?”
노엘은 기회를 주고 있다. 내 뺨을 살살 만지며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은 부드럽기 짝이 없으나 속내를 알긴 어려웠다. 쓸어내리는 손길이 언제 나를 후려칠지 몰라, 내 욕심을 접어 둔 채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흐윽……. 네, 네에. 그냥, 여, 여행, 가고 싶어서…….”
변명했는데도 싸늘한 눈빛이 가시질 않았다. 꼭 나를 의심하고 추궁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다른 말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덜덜 떨며 필사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도, 도망, 가, 가려고, 그런, 게 아, 니라…… 흐으.”
“그럼?”
“다음, 달, 끄윽…… 제, 생일이라서…….”
유치하기 짝이 없어도 어쩔 수 없었다. 맞는 것보다 낫다 싶어 생각나는 대로 뱉으며 노엘을 쳐다봤다. 그런데 노엘의 표정이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무언가 호기심이 생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쩐지 두려웠다.
“죄송…… 해요. 잘못했어요.”
얻어맞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 노엘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 차마 시선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이자, 노엘이 내 뺨을 어루만지고는 연신 입을 맞췄다.
쪽, 쪼옥, 하는 짧은 입맞춤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엘은 웃고 있다. 꼭 예쁜 짓을 하는 개새끼를 보는 눈빛이다.
“여행 가고 싶었어? 나랑?”
“……네?”
노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생뚱맞은 단어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노엘과 가고 싶다는 전제에서 누그러진 듯했으니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자 노엘이 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는 연신 입을 맞췄다. 그만하라고 밀어내려던 찰나 입술이 포개어졌다. 짧은 입맞춤이 진득한 키스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아, 진작 말하지 그랬어.”
“흐…….”
“생일을, 나랑 보내고 싶었다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차라리 도망갈 걸 그랬나.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흐름으로 흘러갔지만, 여전히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노엘은 언제 달라질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눈을 굴리다가, 침대 위에 놓인 케이스를 바라봤다. 언뜻 보기엔 액세서리를 담은 케이스처럼 보였다.
“응, 나도 여행은 생각해 봤는데 당분간은 일이 바빠서 멀리 가긴 어려울 것 같아.”
바쁘다는 사람이 왜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칼 같이 퇴근을 하는지 묻고 싶지만, 입을 꾹 다물며 고개만 돌렸다. 그러자 노엘은 흡족하다는 듯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잘근거려댔다.
“아, 흐……. 자, 잠깐만요.”
“안 해. 다시 사무실 들어가야 하니까. 키스만 할게.”
“이거 제, 제 선물이에요?”
“아.”
짧은 탄식과 함께 노엘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살갗에 닿은 말캉한 감촉도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노엘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옆에 두었던 케이스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네가 열어 볼래? 아니면 내가 해줄까?”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더니, 노엘이 웃으면서 손등을 쓸어 만졌다. 손가락 사이 사이로 들어온 단단한 손가락에 흠칫거렸다.
“아니다. 같이 열자.”
물어본 지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노엘은 내 손을 깍지낀 채로 케이스를 열었다.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열렸고 그 안에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언뜻 봐도 평범한 시계는 아닌 듯했다.
“이, 이거…….”
블랙에 가까운 남색 시계다. 시계를 둘러싼 은색 테두리는 깨알 같은 보석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오죽하면 시계 분침을 맞추는 다이얼에도 보석이 박혔다.
시계 12시 방향에는 명품이라는 걸 과시하듯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고 그 밑에는 문페이즈 달력과 ‘Yujin’이라는 내 이름이… 낯간지럽게 새겨졌다.
“첫 번째 생일 선물이야.”
“네, 네?”
첫 번째? 첫 번째라면 또 있다는 뜻인가? 벙찐 표정으로 노엘을 쳐다봤다. 그러자 노엘은 슬쩍 웃으며 케이스에 있던 시계를 꺼내 내 손목에 채워 주었다.
찰칵거리는 게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엘은 웃으면서 내 앞머리를 쓸어 만져 주었다. 그러고 보니 노엘의 손목에도 시계가 걸쳐 있다. 같은 시계다.
“저…….”
“응?”
“가, 같은 시계 찼어요?”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내가 생각하는 커플 아이템 따위가 절대 아닐 거라고 애써 당황스러움을 숨기려 했다. 반면, 노엘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다른 시계를 찰 이유는 또 뭔데.”
“아…….”
“왜?”
“아, 아뇨. 신기해서요.”
경악하고 싶었지만, 겨우 숨을 삼켰다. 본인 생일이 아닌데도 자기 하고 싶은 선물을 주는 것도 그렇고 그 선물이 커플 시계라는 사실에 한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꾹꾹 참으면서 시계만 내려다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시계, 몇천만 원을 오가는 브랜드인데. 노엘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노엘은 돈 걱정이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내 뺨만 붙잡으며 연신 입을 맞출 뿐이다.
“원래는 이걸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지금 당장 해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마음에 들지.”
“네, 감사해요.”
“여행 가고 싶다고 했지? 한국처럼 먼 곳은 아직 무리야. 지금도 병원에 다니고 있잖아.”
다정히 속삭이는 노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재활 치료 때문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게다가 내가 겪은 사건은 한동안 뉴스에서 끊임없이 나왔을 만큼 엄청났기에 멋대로 돌아다니긴 힘들었다.
“너 한국 생활 다 정리했잖아. 근데 또 신경 쓸 게 있어?”
“그, 그렇지만.”
“비행시간도 16시간이나 되는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하려고. 가지 말라는 게 아냐, 유진.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야.”
노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내 손목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왼쪽 손목에는 흉터 대신 노엘과 똑같은 시계가 걸쳐 있다. 노엘은 손목 위로 연신 입을 맞추며 쳐다봤다. 파란 눈동자가 절절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 그치만…….”
“대신 가까운 곳으로 여행 가자. 네 생일 때.”
“흐…….”
노엘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목덜미 위에 입술을 묻고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잘근거렸다.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어깨가 빳빳이 굳었다. 그 틈을 타, 하얀 손이 미끄러지듯 목선을 쓸어 만졌다.
“흐, 그럼, 언, 언제 갈, 수 있, 으응…!”
“그러게. 언제 갈 수 있을까.”
노엘은 내 목에 이를 박고 잘근거리면서 깊게 빨아들였다. 목덜미에 가해지는 감각에 아래가 달아오르며 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키스만 한다고 했는데 노엘의 손은 어느 순간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내 유두를 지분거렸다.
“키, 키스, 만, 흐읏…….”
“보채기는.”
키스만 하는 게 아니냐는 물음은 노엘에게 있어서 애달픈 애원으로 돌아왔다. 그게 아니라고, 제발 출근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목소리는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결국, 몇 시간 뒤에 필립이 전화를 하고 나서야 노엘은 옷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달칵, 문이 닫히면서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저녁때쯤이면 노엘이 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멀어지는 의식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