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4)

외전 1. 적응할 수 없는 일상

눈 부신 햇살이 눈꺼풀을 꾹꾹 눌러댔다. 빵빵 울리는 시끄러운 경적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적응되지 않는 평화로운 일상의 시작이었다.

“……더 잘까.”

잠기운이 가시질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더니 현기증이 올라오면서 속이 쑤셨다. 그나저나 오늘 병원 가는 날이었나? 예전에는 매일 병원에 가야 했으나, 이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가면 될 정도로 나아졌다.

“우욱…….”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헛구역질은 멎질 않았다. 컥컥 기침하며 핸드폰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병원 가는 날이 아니라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하….”

지금 내가 눈을 뜬 곳은 호텔이 아닌 노엘의 집이다. 같이 산 지는 일주일이 조금 넘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아니, 실은 노엘 웨스틴이라는 인간 자체가 낯설었다. 매일 같이 ‘개새끼’라고 부르며 물어뜯기 바쁘던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게 매일 봐도 익숙하지 않다.

이따금 두려웠다. 언제 어떻게 노엘이 옛날 모습으로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따라오니 마음 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발목은 여전히 절뚝거렸다. 예전 노엘의 모습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느릿하게 걸어가 칫솔을 꺼내 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 5건, 읽지 않은 메시지 3건. 확인할 필요도 없다. 노엘일 게 뻔했다. 나중에 왜 확인 안 했냐고 캐물을 것 같아서 메시지 어플을 눌렀다.

「사무실 도착했어. ― 10:01AM Wed, Jau 15」

「아직도 자? ― 10:03AM Wed, Jau 15」

「유진 ― 10:05AM Wed, Jau 15」

“……아.”

뭐라 답장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할 말이 없으니까. 칫솔질하며 텍스트 창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치아 안쪽까지 구석구석 닦아도 생각나는 건 없다. 입안을 헹군 뒤에 핸드폰을 들었다. 여전히 할 말이 없다.

「이제 일어났어? ― 1:39 PM Wed, Jau 15」

“와, 진짜 대단하다.”

읽자마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직 답장도 안 보냈는데 말이다. 노엘은 꼭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사람 같았다. 하긴, 예전엔 위치 추적도 했었는데. 핸드폰을 계속 보고 있는 건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노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읽었으면 대답 좀 해줄래? ― 1:40 PM Wed, Jau 15」

‘대답해 줄래?’가 아니라, ‘대답해.’라는 명령 어조로 들렸다. 흠칫 놀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천천히 키패드를 눌렀다.

「일부러 답장 안 한 거 아니에요. ― 1:43 PM Wed, Jau 15」

「그럼? ― 1:43 PM Wed, Jau 15」

「뭐라고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까… 죄송해요. ― 1:47 PM Wed, Jau 15」

「지금 집 갈게. ― 1:47 PM Wed, Jau 15」

“아니, 대체 왜…….”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이런 생각을 한 걸까. 일하는 사람이 멋대로 자릴 비워도 되는 건가? 오지 말라고,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고 싶었으나, 예전처럼 얻어맞을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노엘은 내가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올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에휴…….”

답장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복도로 나갔다. 쓸데없이 넓은 집엔 온갖 게 다 있었다. 심지어, 마음껏 그림 그릴 수 있는 공간도 존재했다.

검은색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작업실이 보였다. 문고리를 돌리자,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큰 창문이 나를 반겨주었으나, 내게는 뉴욕의 모습을 한 폭에 담는 액자에 불과했다. 내 마음대로 열 수 없었다. 키가 닿지 않는 곳에 잠금장치가 있었다. 노엘이 아니면 거의 열지 못했다.

하지만 창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작업실은 화방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온갖 미술 재료로 가득 찼다. 목탄뿐만 아니라, 잘 안 쓰는 유화물감도 있었다. 모든 게 날 위한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음…….”

스케치북을 꺼내면서 주변을 살펴봤다. 물론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는 건 좋았지만, 언제까지 이 집에서 지내야 할지 궁금했다. 집세 같은 거 내지 않아도 괜찮을까?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나를 여기서 지내게 하는 걸까. 그리고 노엘은 왜 나를 내보내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붓을 들었다.

“아, 맞다.”

팔레트를 펼치고 스케치북을 꺼내다가 물을 떠 오지 않은 걸 깨달았다. 작게 숨을 뱉고 물통을 든 채로 밖에 나갔다. 그러자 1층 현관 쪽에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필립이나 가사 도우미일까 싶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는데 익숙한 금발 머리가 보였다.

“유진.”

큰 체격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뒷걸음질 치며 들어가려고 했지만, 노엘이 활짝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

역시 사람은 하던 걸 해야 한다. 목탄이 아니라,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할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나 온다니까 마중 나온 거야?”

“네? 그게, 아…….”

하필 화장실 가는 길에 마주쳐서 그런지 마중 나온 꼴이 되고 말았다. 뭐라 변명해야 할까.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노엘의 걸음이 한발 앞섰다.

“착하다. 씨발, 머리 쓰다듬으면 안 되겠지.”

“저기…….”

하지 말라고 입술을 달싹였는데 왜 허락한 거로 알아듣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하얀 손은 내 머리며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뒷목에 손끝이 닿는 순간 속이 찌르르 거리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기분 나쁘다고 하기엔 묘한 감촉이다.

“아직도 잠 덜 깼나 봐.”

느릿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는 손이 문제다. 찌르르 울리는 이상한 감각에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신경 쓰였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음성도, 나를 보는 노엘의 눈빛도 피할 수 없이 집요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했다.

“네, 방금 일어나서…….”

“볼이 빨개졌어, 귀여워.”

“왜, 왜 그러세요.”

흠칫거리면서 떨어지자, 노엘은 빙그레 입꼬리만 올렸다. 호텔에서 총격 사건을 겪고 나서부터 노엘은 정말 이상해졌다. 다른 사람 같기도 하고 때로는 빙의라도 된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부끄러워하기는.”

파르르 떨어대는 내 모습을 부끄러워한다고 인식한 모양이었다. 노엘이 내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려움과 함께 팥이나 소금, 혹은 성수 같은 걸 뿌리고 싶은 충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처럼 얻어터질까 봐 가만히 시선만 돌렸다.

“유진.”

노엘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무래도 곧 만지고 싶다고 말할 기세다. 노엘은 정말 약속대로 억지로 관계를 가지진 않았다. 사실, 크리스마스 때 키스 하고 난 후에도 끌어안고 자기만 했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만지고 싶다고 강렬하게 쳐다보는 눈빛을 외면하긴 어려웠다.

“……네, 네.”

“밥은?”

“생각 없어서. 저 그리고 손, 손 좀…….”

“손 아파? 주물러 줘?”

주물러 줘도 되냐는 물음과 함께 내 손을 덥석 잡는 노엘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곤 잡고 있던 물통을 내려주었다. 이걸로 후려치지 않을까 싶었지만, 뒤통수가 얼얼한 일은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서 이렇잖아.”

“저 이제 일어났는데…….”

노엘이 양손으로 내 손을 살피며 이리저리 만져댔다. 손 좀 놔달라고 하고 싶지만, 차가운 손이 닿는 감촉이 그리 나쁘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눈치 보이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했지만.

“저….”

“응, 말해.”

“사무실 안 들어가세요?”

“뭐?”

내 손을 붙잡은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이 사라지는 걸 보니 예전처럼 변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덜컥 겁이 나서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바쁜데 괜히 저 때문에 시간 낭비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하니 노엘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두려움에 차올라,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흠칫거리기만 했다. 맞고 싶지 않았다. 또 맞을 것 같아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절, 절대 가라는 뜻이 아니에요, 저도, 가, 같이…….”

같이 밥 먹자는 말은 어쩐지 나오지 않았다. 얼버무리면서 고개를 돌리자, 노엘이 품으로 확 끌어당겨 시선을 마주 보게 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딘가 이상했다.

“같이 뭐?”

“네?”

“같이 뭘 하고 싶은데.”

서늘한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려고 했으나, 노엘이 있는 힘껏 붙잡는 바람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갈 곳이 없었다.

“저, 저기…….”

“내 이름 부르면서 대답해.”

“……노엘,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까지만 해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 서린 눈동자였다. 녹색 빛이 섞인 파란 눈동자는 처연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해서 보는 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걱정이고 뭐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도 모자라, 물기 젖은 진득한 눈빛으로 내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노엘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와 간격을 좁혔다. 손가락 마디 하나 남지 않은 간격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뭘 하고 싶은데?”

“아, 아니……. 바, 밥 드시라고 말하려고 했어요.”

“밥? 생각 없다며.”

“저 말고 노, 노엘…….”

“뭐?”

“피, 필립이랑 같이 밥, 밥 드시라는 뜻이었어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밥 먹으러 가시라고…….”

밥 먹으러 가라고 확실하게 표현했다. ‘가자’가 아니라, ‘가라고’라는 말을 썼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노엘의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피해야만 했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 관계를 가지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노엘은 떨어지기는커녕 내 손을 깍지껴 붙잡으며 입술만 쓸어 만졌다.

“휴가 간 필립을 왜 찾는 거지.”

“휴, 휴가 좋겠다…….”

“그게 뭐 부러워. 우리도 여행 갈까?”

“네? 아, 아뇨, 그게…….”

“유진, 나 좀 봐.”

봐달라는 그 말에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시선을 마주치자, 나른한 눈동자가 내 모습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분위기 탓이라고 여기며 키스했으나, 이번에는 핑계 댈 명목이 없다. 단지 노엘의 목소리나 눈빛을 거역할 수 없다는 느낌만 들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넌 거짓말에 재능이 없어.”

“네, 네?”

“같이하고 싶은 게 뭔지 말 안 해줄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심장이 쿵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내 뺨을 쓰다듬던 하얀 손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분명히 입을 맞추고 싶다는 신호지만, 대답할 수 없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기분에 심장이 요란히 뛰기 시작했다. 노엘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 만큼 심박 수가 빨라졌다.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흐…… 잠깐만요.”

노엘이 내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거짓말처럼 손길이 닿자마자 열기가 훅 치밀어 오르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쿵, 쿵.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 소리를 외면하려 했지만, 노엘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럼 내가 맞춰볼까?”

“아, 잠, 시만…….”

하얀 손끝을 따라 목덜미에서는 붉은 열꽃이 피어났다. 그에 맞춰 심장도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노엘은 아예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는 목덜미 위로 뜨거운 숨결을 불었다. 살갗을 간질이는 묘한 느낌에 바르르 몸을 떨며 노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을 잡고 싶은 건가.”

“읏…….”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노엘이 내 손을 깍지 끼고는 목덜미 위로 입술을 포개었다. 말캉하고 따뜻한 입술이 목덜미를 잘근거리자, 뱃속이 간질거리는 이상한 느낌에 숨을 내뱉었다.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닌 것 같다. 너무 낯설고 생경한 기분에 노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것도 아냐?”

“느낌이 이상, 으응…….”

“그럼, 이건가.”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면서 입술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포개어졌다. 이상했다. 확실히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간질거리다 못해 찌르르 울려대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일 것만 같다. 노엘이 내게 입을 맞추며 귓불이며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또 묘한 느낌에 입을 벌렸다.

“아, 흐…….”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렇기엔 너무나 또렷한 목소리다. 노엘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벌어진 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볼 안쪽 살을 툭 건드리다가 치열을 훑고는 혓줄기를 옭아매어 강하게 빨아들였다.

기분이 이상하고 낯설어 두렵기까지 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노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도망치듯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하아…….”

기분이 이상했다. 생경한 감촉에 뜨거운 열기가 오르고 온몸 구석구석 미칠 것 같은 떨림이 전율처럼 퍼져 나갔다.

그 와중에 나를 더 흔드는 건 노엘이었다. 노엘이 내 입술을 쓸어 만지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말캉한 감촉에 또다시 속이 찌릿찌릿했다.

“흣…….”

노엘이 혀끝을 세워 목선을 따라 핥아 올렸다. 타액에 젖은 미끈한 혓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기분 나쁜 대신 머릿속이 하얘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표정 보니까,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샤워, 아니 목욕하러 가, 가, 갈게요.”

달뜬 열기는 계속해서 내 안을 침식했다. 과거와는 다른 느낌으로 도망치고 싶다. 노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스스로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바짝 다가온 가슴팍을 밀어내며 노엘을 쳐다봤다.

“혼자?”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이질적인 파란 눈빛은 오롯이 벅찬 숨을 내뱉는 내 모습만 담아 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랐던 모양인지 손을 뻗어 내 뺨을 살살 쓸어 만져 주었다.

하얀 손이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나를 감싸 쥔 손은 시린 겨울바람처럼 차가웠지만,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씻겨 줄게.”

어쩌면 노엘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아, 아뇨! 저, 저 혼자 갈게요. 제, 제발….”

이성과 과거, 그리고 쾌락의 교차 선에서 서 있는 기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느낄 이유가 없다.

“기다릴게. 필요하면 불러.”

“……네, 네.”

도망치듯 욕실로 뛰어갔다. 오늘따라 넓기만 한 집이 원망스러웠다. 쾅! 문을 닫자마자, 문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노엘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는데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가슴팍 위에 손을 얹었다. 쿵, 쿵, 쿵. 불규칙한 맥박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노엘이 아니어도 이상한 느낌이 들 수 있다고 자신하며 티셔츠를 조금 내려 어깨 위에 입술을 포개었다. 쭈욱 빨아들였지만, 어떤 기분도 들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심장은 평온한 속도로 뛰어대고 있었고 나의 혼란스러움과 창피한 기분만 선명해질 뿐이다. 그걸 놀리듯이 내 어깨에 새겨진 붉은 자국은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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