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24)

10. 12월 24일의 끝에서.

누군가가 뉴욕에서 보낸 6월이 어떤지 물어본다면 두렵다고 말할 것이다. 화려한 뮤지컬 대신 병실 천장만 바라봐야 했고 미술관 티켓이 아닌, 링거 바늘만 손에 닿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악질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노엘은 내 곁에 있었다.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데도 직접 밥을 먹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넘기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고 노엘의 옷에 지저분한 것을 묻히는 일은 다분히 일어났다.

“흐읏…… 죄송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지?”

예상외로 노엘은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손목만 물어뜯지 않으면 된다고 토닥이기만 했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웠다. 내게 뻗는 손길은 눈물 나도록 따스하고 부드러웠지만, 습관처럼 스며든 기억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전히 환청은 나를 괴롭혔고 노엘의 곁에 있으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증상이 무엇보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6월이 가고 비참한 7월이 찾아왔다.

“할 말이 있습니다.”

1

“할 말이요?”

“유진이 깨어나기 전에 로널드 씨와 유진의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습니다.”

7월은 어땠을까. 다른 의미로 고통스러웠다. 처음보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지고 환청을 듣는 일도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병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필립은 참담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그럼 그동안, 나, 나는 왜 그런 취급을 받고, 끄윽…….”

“유진!”

내가 노엘의 이복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어려운 말이 잔뜩 쓰여 있지만, 일치하지 않는다는 단어는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형제가 아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최소한 배덕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처절함은 견딜 수 없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노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울부짖었다.

“나, 나한테 왜, 왜 그랬어. 대체 왜! 흐윽…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느은… 흐어어엉…….”

“내 말 좀 들어봐, 유진. 우선은…….”

“무슨 말을 들어요?!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별것도 아니었잖아요. 남이잖아요!”

“뭐? 남이라고?”

“자, 잘못, 잘못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잘못했…….”

목줄이 풀려도 영원히 개새끼라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를 두려워했다. 미간을 좁히며 반문하는 모습은 예전처럼 내 숨통을 졸라댈 것만 같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떨어대기만 했다. 하지만 노엘은 한숨만 푹 뱉으며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다독여줄 뿐이다.

“……잘못했다고 말하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별거 아니라고 하지 마.”

노엘이 손을 뻗어 조심스레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도 두려움은 멎질 않았다. 노엘의 눈빛엔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 서려 있었으나, 공포와 좌절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네가 이렇게 봐주는 것만으로도 별일이라서,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

“흐, 윽….”

“감히 욕심부릴 자격 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못 놔줘. 네 말대로, 큰 상처를 줘놓고 약 하나 던진 다음 내팽개치는 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며칠 간은 하루 종일 꺽꺽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날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점은, 항상 내 곁에 노엘이 있다는 것이다.

죄송하다고, 제발 나를 버려달라고 애원하면 노엘은 간병인을 부르고 밖으로 나갔지만, 저녁에는 다시 돌아와서 내 곁에서 하루의 끝을 보냈다.

“스케치북이랑 연필하고 목탄 가져왔는데 나중에 하고 싶을 때 그려.”

지금 내 상태론 그림도 그릴 수 없었다. 그림에 대한 작은 희망까지 앗아가곤 이제 와 다정하게 그릴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노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손 주물러줘도 될까?”

나가라는 말이 없으면 온갖 수발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두려움은 가시질 않아, 노엘이 들어올 때마다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오늘은 손목 안 만졌네.”

노엘은 내 손을 붙들며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다. 끔찍하게 싫어하는 키스도 하지 않았고 억지로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노엘은 내가 잠들지 않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꾹 감은 눈꺼풀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은 무슨 수로도 막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여름과 가을을 병원에서 노엘과 함께 보냈다.

창문에 김이 서리고 마른 나뭇잎이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고 노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퇴원을 해도 계속해서 병원에 다녀야 하는 몸이다.

“저,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

“어디 가긴? 우리 집으로 가야지. 본가 아니야. 거기 갈 필요도 없어.”

사람은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노엘이 본성을 드러내고 나를 옭아맬 것만 같았다. 두려웠다. 아직 그려지지 않는 미래가 벌써 내 숨통을 조르기 시작했다.

“불편하지 않게 필요한 거 미리 다 준비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

퇴원 후, 나는 노엘과 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한동안 생각나지 않던 지하실이 떠올랐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는 가만히 입술만 짓이겼다.

“같이 있는 게 불편해?”

“저, 그냥 한국으로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 해요. 근데 병원비는 시간이 걸려도 제가 다 갚을 테니까.”

“어디 갈 건데.”

“원래 살던지, 집에…….”

“너 여기 올 때 다 정리했잖아. 기억 안 나? 그리고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하……. 호텔 잡아 줄게.”

또 거절하면 한 대 칠 것 같은 살벌함에 입만 꾹 다물었다. 게다가 반박할 수 없다. 노엘의 말대로 미국으로 오기 전에 모든 걸 정리해 버렸으니까. 멍청한 내 행동을 원망하며 고개를 숙였다.

“간병인이나 필립을 보내긴 하겠지만, 저녁마다 들릴 테니까 문 열어줘.”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몸이 괜찮아진 다음에 고집부려.”

예전보다 조심스러운 태도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강압적으로 굴었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가 떠올라서 몸을 움츠렸더니 노엘이 작게 숨을 뱉었다.

“화내려는 게 아냐. 그냥 네가 잘 있는지, 손목 건드리지 않았는지 확인만 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것만 보고 갈 테니까. 말없이 어디 가지 마.”

노엘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곧바로 호텔을 잡아 주고 저녁마다 들렀다. 들린다고 해도 잘 있었냐고 묻고 가는 게 전부였다. 더 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가 회피하고 싶은 걸 아는 모양인지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게 아닌 이상,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 없었다.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느릿하게 찾아왔다.

“사람 진짜 많다.”

내가 지내는 호텔은 고급스럽다 못해, 분에 넘친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호화로웠다. 창문 앞에 다가가면 앞에 있던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그런지, 공원에는 아이스 링크장과 마켓이 설치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알리듯 여기저기 장식품으로 도배 되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땐 뭘 했더라. 가만히 창가에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작년에는 집에 있으려는 걸 예준이가 꾸역꾸역 끌고 가서 시간을 보냈다.

‘야, 김유진. 논리적인 사람이 총 쏘는 소리를 네 글자로 뭐라 하게?’

‘너 또 이상한 개그 치려고 그러는 거지? 재미없어. 하지 마.’

‘예준이 미친 새끼야, 큭큭. 유진이가 네 얘기 안 들어주면 진짜 심각한 거야. 그만둬.’

창밖 너머로 들리는 캐럴과 함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곧 이마저도 사라졌다. 또다시 깨닫고 말았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늘 혼자였고, 내 세상은 좁아지다 못해 비틀렸다는 것을. 내 시야는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흐으…. 왜, 왜 아무도, 왜…….”

올해 크리스마스는 혼자 보내야만 했다. 올해는 혼자다. 아니, 앞으로도 혼자일지도 모른다. 비틀린 세상에서 아무리 울어봤자,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무릎을 웅크리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그럼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외로움은 나를 갉아먹었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크리스마스에, 나는 하염없이 서러움을 토해 내었다.

* * *

한참 울다 지쳐 잠들었는데 벌써 저녁 8시다.

해가 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포모나와 다르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네온사인이 번쩍거렸다. 낮보다 훤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호텔에서도 훤히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소파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쳐 들었다.

무얼 그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고 싶지 않다. 주변을 살펴보다가, 어제 먹다 남긴 케이크와 쿠키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

이미 퍼석하게 굳어버려 먹을 수는 없다. 접시를 돌렸다. 케이크 반대쪽은 건드리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은 부분을 앞으로 돌려서 그림을 그렸다.

서걱거리는 목탄 소리만 들릴 뿐이다. 하지만 뜻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욕심을 부릴수록 내 손에 있던 목탄은 뚝뚝 부러지고 뭉개지기 일쑤였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새까맣게 물들어진 종이가 이죽거리는 것만 같다. 가슴이 답답했다. 머리가 핑글거리는 아찔함도 느껴졌다.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은 나를 놀리듯이 커졌다. 밀려오는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흐, 으…….”

성탄절이라고 해서 들뜨거나 특별하게 여길 생각은 없다. 다만 정말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공허함이 유난히 선명히 느껴졌다. 그래서 비비던 목탄을 떼어내고 눈물을 훔쳤다. 서럽지 않으려고 해도 서러운 크리스마스다.

똑똑―.

그때, 단정한 노크 소리에 입술을 짓이겼다. 흠칫 떨며 시계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해가 저물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노엘밖에 없다. 크리스마스라고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아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노엘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어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그 와중에도 울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허겁지겁 물티슈로 손을 닦고 눈물을 훔쳤다.

‘……유진.’

똑똑―.

조금 더 선명해진 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몇 달 동안 노엘이 내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마냥 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두려움은 습관처럼 내 발목에 들러붙어 있다. 더 재촉하기 전에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묵직한 머스크 향이 코끝을 스치면서 코트를 걸친 노엘의 모습이 나타났다.

“죄송, 해요. 문 늦게 열어서…….”

노엘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미간을 구겼다. 울었다는 것에 대해 꼬투리를 잡으려는 걸까. 흠칫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 치자 노엘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 아픈 거야? 약은?”

하지만 노엘의 손은 내 뺨에 닿질 않았다. 그저 허공에만 맴돌 뿐이다. 고개를 저으며 갈 곳 없는 손만 쳐다봤다. 하얗고 기다란 손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듯이 한참 머뭇거리다 주먹을 쥐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그런 말 하지 말고 왜 울었는지 말해.”

두려움에 입을 다물자, 노엘이 미간을 좁히고 씹어뱉듯 말을 건넸다. 때릴 건가. 한동안 안 때리더니 역시 달라진 게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서.”

주먹을 쥔 손이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노엘은 입술을 짓이기며 시선을 마주쳤다. 화를 꾹꾹 누르는 듯한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과거에 나를 다뤘던 잔혹한 눈빛이 떠올라 살벌하기 그지없다.

외로워서 울었다는 멍청한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 정말 내 곁에는 노엘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목탄을 얼굴에 쓴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조금 전 눈물을 닦다가 숯검정이 묻은 모양이었다. 멍청한 모습을 보였다. 그 생각에 나 자신이 더더욱 초라해졌다.

“내가 닦아 주면 안 될까?”

예전이라면 개새끼가 제대로 하는 것도 없다면서 몰아붙였을 것이다. 부드러운 말투는 들어도 들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노엘은 내게 손을 대지 못한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명에 비쳐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다.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호흡하기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리 와.”

쿵, 문이 닫혔다. 노엘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소파까지 데리고 갔다. 객실에 노엘이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하…….”

“죄, 죄송해요. 바로 치울게요.”

노엘은 테이블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테이블 위에는 숯이 묻은 물티슈 조각이 엉망으로 나뒹굴고 있다. 괜히 눈치 보여 허겁지겁 치우려고 했다. 그때, 노엘이 내 손을 잡아 소파에 앉혀 주었다.

“네가 왜 치워, 이걸.”

“네?”

“치우지 마. 괜찮아.”

노엘은 물티슈를 꺼내 내 뺨을 닦아 주었다. 나를 때리기만 하던 손이 조심스레 움직이자 덜컥 겁이 난 나머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분명 때릴 거야. 그다음엔 멍청하다고 욕을 할 거야. 그런 생각에 바르르 떨어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노엘은 내 손가락 하나하나 섬세하게 닦아 주었다. 물티슈가 새까매질수록, 내 손은 깨끗해졌다.

“하루 종일 호텔에 있다면서.”

“네, 네…….”

“산책이 힘들면 로비라도 돌아다니는 거 어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내 손을 잡은 노엘은 걱정스러워 미칠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쓸어 만지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손을 빼고 싶어 입술만 꾹 깨물었는데 노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손이 왜 이렇게 차. 잠깐 봐도 돼?”

“네, 네. 죄송해요.”

“혼내려는 게 아냐, 유진.”

숯이 지워져도 노엘의 손은 떠나가질 않았다. 어느덧 닦아 주던 행위는 내 손을 주무르는 손길로 이어졌다. 노엘은 내 눈이 아닌 손바닥만 쳐다보면서 아프지 않을 정도로 꾹꾹 눌러 주었다. 가만히 노엘을 쳐다봤다.

흐트러짐 없는 금발은 조명에 비쳐 반짝였다. 가까이 봐서 그런지 노엘의 눈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랗기만 한 게 아니라, 녹색이 살짝 감도는 눈이다. 이런 눈을 하고 있구나, 하다가도 감히 쳐다봤다는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사실 오늘만큼은 오지 않으려고 했어.”

나른한 목소리에 대답 대신 어깨를 흠칫거렸다. 노엘은 주무르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맞물렸다. 집요하게 좇았던 그 눈동자 속에는 차고 쓸쓸한 기운만 맴돌았다.

“무서워하는 걸 알아서 오늘 같은 날에 내가 널 만나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 을 했어.”

망설임이라는 감정은 노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엘은 도톰한 입술을 꾹 짓이기다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노엘은 주저했다.

“그래서 문 두드릴 때까지 계속 고민했고.”

“…….”

“또 혼자 울고 있을까 봐, 손목 건드릴까 봐, 그 걱정 때문에 돌아가질 못했어.”

걱정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저릿하게 울렸다. 크리스마스라는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세상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 누가 손을 뻗기만 해도 덥석 붙잡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노엘을 밀어내기는커녕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다.

“유진.”

혼나지 않는 걸까. 부드러운 음성에 가슴이 시렸다.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으나, 절절히 들끓는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다. 어느덧 노엘은 내 뺨을 부드러이 감싸 쥐더니 가만히 시선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네가 내 곁에만 있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어.”

엄지로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손끝 하나하나 다정함이 묻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래서 두려웠다. 이 생경한 기분에, 내가 겪었던 끔찍한 상처들이 전부 덮일까 봐 무섭기까지 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겁이 나서 움찔거렸다.

“근데 이제는, 네가 웃는 걸 보고 싶고.”

“흐…….”

“죄송하다거나 아프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그런 욕심을 가져버렸어.”

노엘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간격이 좁아졌다. 묵직한 머스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 같은 거리는 낯설고도 두려운 기분을 안겨 주었다. 그때, 밖에서 들리던 캐럴이 멈췄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캐럴이 멈추자 노엘의 시선을 응시했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하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유진.”

고요함이 찾아오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 세상에 들리는 거라곤 이 목소리 하나뿐이라는 것 같다.

쿵, 하고 심장 위로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움찔거리며 노엘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노엘은 가지 말라는 듯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나를 망가뜨리던 손이 이제는 다정하게 변해 사이사이로 들어오려고 했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지만, 내 몸은 빳빳하게 굳어 어떤 식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무슨 감정이 나를 옥죄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계속 네 이름을 부르고 싶어.”

나를 어루만지는 손은 어느덧 뺨에서 입술로 옮겨졌다. 투욱, 툭. 검지로 아랫입술을 쓸어 만지는 손길에 홧홧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대답할 수 없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이 생경한 기분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너도 나를 불러 줬으면 하고.”

분위기 혹은 과거의 잔상이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짓눌린 게 아니라 홀렸다는 말이 가까울지도 모른다. 혼자가 싫다고. 내가 보는 시야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밀어낼 수 없다.

“……키스, 해도 돼?”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심스레 다가오는 태도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처음 직면하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노엘은 단 한 번도 내 의사를 물은 적이 없었다.

“싫으면 밀어내. 화내지 않을 테니까.”

대답 대신 입만 꾹 다물었다. 노엘이 내게 요구했던 말이 떠올랐다. 싫다는 말 대신 저급한 문장을 요구하던 그 순간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밀어내면 얻어맞을 것 같아서. 이 다정한 태도가 사라지고 강압적인 모습으로 돌아올까 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노엘은 이게 허락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나를 바짝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개었다. 등허리를 살살 쓰다듬는 손,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 감각에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이내 입 안으로 미끈한 살덩이가 유영하듯 파고들었다. 머리가 하얘지고 배 속이 간질거리는 묘한 기분에 덜컥 겁이 나, 얼른 뒷걸음질 쳤다.

“……아직은 아냐?”

“그게 아니라…….”

“응, 그게 아니라?”

노엘이 내 손을 잡고 손가락 마디마디 가볍게 입을 맞추며 쳐다봤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적응되지 않아 무릎이 달달 떨릴 지경이다.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까 봐 겁까지 났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노엘의 태도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무서워서 그래?”

“흐…….”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도 화 안 내.”

쪽, 쪽. 가벼운 마찰음이 손가락 끝을 지나 손등으로 올라왔다. 노엘은 깍지 낀 손을 빙글 돌려 손목에 연신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흉터 위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지난 기억이 촛불처럼 일렁거렸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천천히 할게.”

“흐읏.”

“네가 겁먹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노엘은 감싸 안은 허리를 쓸어 만져주었다. 간격이 좁혀지고 고개가 틀어지면서 입술이 포개어졌다. 다시 입술이 벌어졌다. 타액과 함께 달뜬 숨이 새어 나갔다. 내 안을 파고들며 치열을 쓸어내는 움직임은 느릿했지만, 집요했다.

“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달아오른 숨을 뱉을 때마다, 노엘은 내 안으로 들어와 정신없이 옭아매며 내 입 안을 침식했다. 아랫배가 찌르르 거리는 묘한 느낌에 어깨를 흠칫 떨어댔다. 낯설고 생경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노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직도 내 안엔 두려움이나 불안함 같은, 나를 갉아먹는 감정들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부드러이 입을 맞추며 손을 잡는 행위에 홀리기라도 하듯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잠깐이나마 희미해졌다.

이 다정함이 얼마나 지속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누군가의 온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어느덧 노엘의 어깨를 움켜잡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저 내 안을 침식하는 온기만 인지했다.

Epilogue. 한 번 개새끼는 영원한 개새끼다.

“이게 뭐예요?”

“2주 전에 유진과 웨스, 아니, 로널드 씨의 친자 검사를 의뢰했습니다.”

노엘은 제 앞으로 서류를 건네는 필립을 쳐다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뭐 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머리를 만져요? 내 허락 없이?’

진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왔을 때, 필립은 연락도 없이 찾아와 유진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게다가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고 필립에게 사람을 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엘의 예상대로 필립은 수상한 짓을 꾸미는 중이었다. 그는 노엘을 감쪽같이 속이고 몰래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노엘은 굳이 내색하지 않고 필립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저래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딱히 말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당하고 있을 노엘이 아니다. 노엘은 필립마저 저를 방해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났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사설 업체가 아닌 법적으로 인정받은 기관입니다.”

“그래서요?”

“유진을 데려오라고 지시한 게 로널드 씨니까 확실하겠죠. 근데 가족이라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못 봐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어 준비했습니다.”

“요즘 한가한가 봐요. 쓸데없는 짓 하는 거 보면.”

그 가족이라는 단어가 참 싫다. 노엘은 성질 같아선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면을 써야 했기에 처연한 눈빛으로 필립을 쳐다봤다.

물론 유진에게 함부로 대했던 과거는 잘못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동생’을 건드렸다는 것만큼은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두 분이 형제라는 걸 확인한다면 유진을 원래 있던 곳에서 치료받게 해주세요.”

“못 하겠다면요?”

“모든 일을 고발하겠습니다. 노엘이 했던 것처럼요.”

“나한테 잘 배웠네요.”

필립이 봉투를 뜯으려던 순간, 다른 직원이 와서 급한 업무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필립은 노엘이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불안한지 나가면서도 두리번거렸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노엘은 필립이 가져온 서류 봉투를 열어 재꼈다.

「의뢰인 A와 의뢰인 B의 모근 및 구강세포 DNA를 추출하여 유전자 동일 여부를 수행하였습니다. 본 검사는 성염색체를 제외한 STR 유전자 좌위를 분석하였습니다. 분석 결과, 유전자 좌위에서 99.9%가 일치하며 친자 관계가 성립됨을 증명합니다.」

노엘과 유진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보여 주고 있다. 동생이 맞다. 유진은 노엘의 가족이 분명했다.

“그랬구나.”

노엘이 서류를 내려놓고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필립이 가져온 것과 똑같은 봉투가 있었다. 영수증 스티커도 동일하게 붙어 있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건 노엘에게 어렵지 않았다. 노엘이 어려워하고 신경 쓰는 일은 유진의 마음을 얻는 것뿐이었다.

서류의 표면은 동일했으나, 내용만 달랐다. 노엘은 똑같은 자리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사실 노엘은 유진이 동생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유진 때문이다.

‘이, 러면 안 되잖아요…….’

‘뭐?’

‘가족, 흐으, 형이잖아요…….’

가족이 아니라면, 형이 아니라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빌어먹을 환청을 듣게 하지 않으려면, 유진이 거부감 없이 저 하나만 사랑하게 하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노엘은 이 거짓말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

“노엘!”

쾅! 문이 열리며 필립이 들어왔다.

“서류 봉투 뜯지도 않았어요. 그걸 원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손도 안 댔어요.”

노엘은 필립을 보며 진실이 담겨 있는 문서를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필립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책상에 올려진 서류 봉투에만 신경을 쏟아낼 뿐이다.

“필립의 말이 맞아요. 더 잘못되기 전에 막아야겠죠.”

노엘은 유진에게 더는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손도 올리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유진을 놓아줄 생각은 없다. 그래서 비틀거리는 발목을 치료하라는 요청을 따로 하지 않았다.

노엘은 어느샌가 조용히 미쳐 버렸다. 아니 이미 처음부터 미쳤을지도 모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어요. 고맙다고 하지 말아요.”

위이잉, 파쇄기에서 종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립은 노엘이 만들어놓은 진실을 보며 허탈해하면서도 다행스럽다는 눈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노엘은 웃음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아내고 처연한 눈빛을 내비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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