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4)

* * *

살려달라고, 내보내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몸뚱어리가 공중으로 붕 뜨다 차가운 바닥으로 던져졌다. 노엘이 나를 벽 쪽으로 밀어 버렸다. 퍽, 하고 엎어지면서 잇새로 고통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 윽….”

살갗에 닿은 바닥 위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저벅. 노엘의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예거처럼 또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나 두통, 이명 같은 불안한 징조들이 내 몸을 뒤덮었다.

“저 버러지 하나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겠, 윽…!”

검은 구두가 내게 총을 겨누며 삿대질하던 알베르트의 손을 걷어찼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총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필이면 총구는 나를 향하고 있다. 누구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금방이라도 총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삐이, 이명이 울려 퍼지면서 지끈거리는 두통이 올라왔다.

“도, 도망, 흐으… 죽고, 싶지 않아…….”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떨리는 호흡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겨우 일어났다.

하지만 욱신거리는 발목 때문에 다시 엎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뻐억! 알베르트의 뺨을 후려치는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도무지 이성을 붙들 수 없다. 헛구역질과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미친 새끼, 어떻게 감히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아버지 선거 앞두고, 대체 왜!”

“하나부터 열까지 비서들이 다 해줬구나. 손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네.”

“닥쳐,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 이유가 대체 뭐냐고!”

노엘이 알베르트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내 쪽을 돌아보게 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이목구비는 순식간에 피와 부기로 흉측하게 둔갑 되었다.

“저기 좀 봐. 일어나지도 못하고 가엾게 떨고 있는 애가 누군지 알아?”

“끄, 윽…. 미친, 새끼…….”

퉁퉁 부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눈을 마주하는 것 역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노엘은 보란 듯이 알베르트의 고개를 억지로 들게 했다. 쿵,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만 같다.

“우리 동생이래.”

“누, 가 저따위 버러지…… 윽!”

“버러지라니, 유진이라는 이름이 있어. 그런데 이름을 모르는 건 좀 심했다. 죽이려고 한 동생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아악! 대체 왜 이래!! 당장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놔!”

“멋대로 움직이면 나도 그렇게 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나저나 어서 총을 주워야지. 나랑 협상하러 온 거잖아.”

노엘이 내 앞에 떨어진 총을 힘껏 걷어찼다. 총은 벽에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그 틈을 타 알베르트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는 보기만 해도 역한 검붉은 피로 적셔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으윽!”

알베르트가 손을 뻗기도 전에 노엘이 한발 앞서 나갔다. 퍼억, 퍽! 노엘은 커다란 손을 휘어잡으며 알베르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마치 고깃덩어리를 패대기치는 듯한 끔찍한 소리다. 듣기만 해도 괴로운 파공음과 동시에 알베르트의 얼굴은 기괴한 각도로 틀어졌다.

“총이 필요 없어?”

“으윽, 이, 빌어먹을. 아악!”

“그것보단 총알을 여유롭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 같은데.”

노엘은 알베르트의 뒷머리를 움켜쥐며 벽으로 쾅쾅 처박았다. 하얀색 벽에는 머리가 닿을 때마다 핏자국이 남게 되었다. 덜덜 떨며 그 장면을 하염없이 지켜봐야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그때, 노엘이 내게 했던 행위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발목을 분질러도 잘못했어요, 하고 도망가고. 이름을 새겨주니까 다신 안 그럴게요, 하면서 도망가려고 했잖아.’

‘흐. 그, 그건……. 아흐…….’

금고 속에 머리를 처박고 쾅쾅 내리치던 노엘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발, 제발. 폭행을 당하는 그 이상으로 괴로웠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노엘의 잔혹한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총을 멀리한 채, 노엘은 가학적인 본성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아악!”

모가지를 비틀어댈 기세로 목을 조르며 뺨을 후려치는 손바닥은 계속해서 내 모습을 상기시켰다. 볼품없이 쓰러지며 얻어맞는 알베르트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노엘에게 휘둘리는, 불쌍하고 멍청한 내 얼굴만 나타날 뿐이다. 공포와 불안함에 숨이 막혔다. 마치 노엘은 알베르트가 아닌,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다.

‘개새끼라고 불렸던 내 동생아, 날 보라고.’

‘난 이유 없이 때리지 않아, 유진. 네가 잘못해놓고 눈물 보이는 건 너무 뻔뻔한데.’

‘개 같은 새끼.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나머지 발목도 똑같이 만들어줄 거야.’

‘나한테 벗어나서겠지, 이 개새끼야.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성가신 일에 엮이지도 않았잖아. 안 그래?’

고통의 연속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발목은 발목대로 너덜거렸으며 누군가가 내장을 꽈악 움켜쥐고 비트는 듯했고 비릿한 피 내음에 속이 메스꺼워 토악질이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복도 한가운데에 널브러진 총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하고 싶다. 차라리 내가 사라진다면 그만할 수 있을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에 휩싸였다.

“흐…….”

총을 바라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 환청도 들리진 않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무 생각 할 수 없다. 그저 눈앞에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순간들만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총이 떨어진 쪽으로 기어갔다. 살아도 산 게 아니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옳은 일이다. 그렇게 천천히 총으로 손을 뻗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노엘이 알베르트의 목을 움켜쥐며 나를 쳐다봤다.

“총 버려.”

나긋한 목소리에 되려 공포가 엄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노엘이 두려웠다. 덜덜 떠는 손으로 겨우 총을 쥐며 뒷걸음질 쳤다. 노엘은 어떤 동요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서.”

“흐, 흐으, 제, 제발…….”

나는 노엘이 두려웠다. 나를 구해 준 사람이라는 것보다 두려운 존재로만 인식되었다. 누군가의 머리를 카펫 바닥에 내려치고는 사정없이 비틀며 덤덤한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은 온몸이 벌벌 떨릴 만큼 소름 끼쳤다. 꼭 나를 ‘개새끼’라 부르며 억지로 밥을 먹이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죽지 못하고 벌벌 떨며 총을 떨어뜨리고는 노엘에게 기어가다시피 다가갔다.

“우, 우욱. 그, 그만…….”

나를 버려달라고 애원하려 매달렸으나 노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린 눈빛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지러움에 시야가 흔들려서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이 복잡한 감정으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노엘이라는 사람은, 내게 지배의식만 느끼는 사람인데.

“제, 제발. 그만해요. 제발… 나, 나 좀 그만, 그만 괴롭혀, 요. 제발…….”

노엘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도덕도, 알베르트를 구하기 위한 알량한 정의심도 아니다. 그저 노엘이 보여 주는 모든 행동이 내겐 고통 그 자체였다. 그 고통을 그만두고 싶을 뿐이다.

꺽꺽 숨을 들이마시며 바짝 엎드려 빌고 또 빌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환각이 아니다. 노엘의 시선 역시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으니.

“흐, 으… 그, 그만. 제발 그만해요. 살려 주세요.”

“유진.”

“제발…….”

노엘은 내가 떨어뜨린 총을 발로 밀어버리고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시체처럼 늘어진 알베르트를,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웃었다.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눈이 부신 미소다. 뚝, 눈물이 흐르는 순간 노엘은 나를 끌어안으며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네가 그만하라고 했으니까 여기까지만 할게.”

“흐, 으윽…….”

“이래도 괴롭힌다고 생각해?”

소름이 돋다 못해 피가 식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노엘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온전히 나 하나만을 위한다는 듯이 다정한 눈으로 벌벌 떠는 내 모습을 눈에 담았다. 발버둥 치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나를 끌어안은 손에 계속해서 힘이 들어갔다.

“흐, 으, 윽…. 시, 싫어, 잘못했어요. 제발…….”

“잘못했다는 말보단 흔적 남기는 게 더 좋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흑! 제발, 제발…….”

“이제 방해할 사람은 없어. 유진, 아무 걱정 없이 그저…내 곁에 있으면 돼.”

소름 끼치는 문장이 허공에 흐려지기도 전에 나는 노엘의 품속으로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손들어!”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총을 든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여기저기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상황은 정리되었으나,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곁이라는 그 말은 나의 패배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시야가 흔들렸다.

“괜찮으세요? 정신없으시겠지만, 상황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다친 사람부터 돌봐 주시겠어요?”

내게 다가온 사람이 경찰인지, 의료진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저 소음과 사이렌 소리만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다. 노엘은 끌어안은 손을 풀어내고는 다가온 남자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괜, 으세, 요?”

귓속이 멍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를 보며 손을 휘휘 젓는 남자의 목소리도, 다가온 경찰들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는 노엘의 목소리도, 그리고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알베르트의 모습 역시도 흐릿하게 다가왔다.

“호텔에 도착하면서 제 비서가 남긴 메시지를 듣고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노엘의 연극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아무리 처연한 눈빛을 하고 처절한 모습을 보여도 하얀 손등에 묻은 붉은 피는 감출 수 없다. 비릿한 피 내음에도 헛구역질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떨며 노엘을 바라보다가,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에 시선을 돌렸다.

“알베르트 웨스틴, 당신을 살인 미수 및…… 잠깐! 뭐 하는 거야?! 총 내려!”

바닥을 굴러다니던 총은 어느 순간 알베르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경찰들이 알베르트를 둘러싸며 포위망을 좁혔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알베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눈치챈 노엘이 서둘러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엘이 한 걸음 늦었다. 끼릭, 탄환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총구에서 불꽃이 번쩍거렸다.

“유진! 당장, 이리 와!”

노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피할 수가 없다. 모든 게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만 같다. 다만 심장이 미친 듯이 쾅쾅 뛰어대며 펌프질만 해댔다. 그리고 무언가가 총구에서 튀어나오며 나를 향해 달려 들어왔다.

타앙―!

깔끔한 총성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소리가 컸는지 작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저 정신이 아득하게 흐트러질 뿐이다.

“커, 윽….”

“유진! 이런 씨발, 당장, 당장 병원에 데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다급하게 부르는 노엘의 목소리도, 모든 게 아득해졌다. 단지 내 허리에 박힌 총알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노엘이 내 손을 움켜잡았지만, 힘이 풀려 그대로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허리 위는 붉다 못해 새까만 핏자국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고통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노엘이 줬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노엘을 떠올리는 나 자신이 불쌍해서 미칠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이건 내 계획이 아니었어. 일어나, 유진! 일어나라고!”

“구급차 도착했습니다, 어서 이송시켜야 합니다.”

“커, 윽…….”

노엘이 나를 붙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늘 생기 있던 눈은 붉게 충혈되었으며 나를 붙든 손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계획이 아니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모습은 생경하다 못해 이질적이다.

“흐, 으…….”

“말하지 마. 가만히 있어.”

늘 아무렇지 않은 눈빛으로 내게 모욕감을 주며 흔들던 사람이 왜 절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굳이 발악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지난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늘 무너지는 건 내 역할이었는데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역할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커, 윽…….”

기침을 토해내자, 붉은 피가 입안에서 퍽 터져 나왔다. 노엘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내 허리를 틀어막았다. 파란 동공이 바르르 흔들리고 있다.

안 돼, 안 돼. 제발. 고장 난 기계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멀어져가고 있다.

“이런다고 씨발, 내가 놓아줄 것 같아? 눈 떠. 눈 뜨라고!”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나를 이동 침대에 옮기고는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엘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노엘을 쳐다봤다.

아, 당신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절망이라는 걸 느낄 줄 아는구나. 그런 생각에 노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엘이 왜 나를 보며 절망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표정을 지으리라 상상조차 한 적 없다. 하지만 노엘은, 노엘 웨스틴은, 나를 망가뜨린 사람은 내 손을 잡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절박하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

“비키세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이송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당신이 내 죽음을 바라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다고. 그만큼 내게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조금이라도 자각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이라면,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던가. 내가 겪은 고통을 전부 지워내 달라고.

제발, 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끝으로 어둠이 찾아왔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끔찍한 일이 일어났지만,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갔다. 부친과 알베르트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법의 심판을 기다린다고 전해졌다. 모든 게 노엘의 뜻대로 돌아갔다.

반대당 의원을 이용하여 집안을 갈아 엎어버리고 정의로운 이미지와 어마어마한 포상금까지 챙겨갔지만, 노엘은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속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 나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분노도 원망도 아니다. 노엘은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에 끝없이 짓눌렸다.

“하아…….”

노엘이 길게 숨을 뱉으며 의식을 잃은 유진의 손만 붙들었다. 노엘의 하루는 너무나 간단했다. 필요 진술 외에는 유진에게 꼼짝없이 붙어 있었다. 남을 돌본 적 없던 노엘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 손으로 직접 유진을 돌봤다.

‘아파?’

‘아, 아뇨. 안 아프, 흐읍…….’

노엘이 축 늘어진 손목을 닦아 내리다 멈칫하며 수건을 떼어 냈다. 안 아프다고 한 게 아니다. 무서워서, 무서워서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유진은 섹스할 때도 아프다는 눈을 했고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벌벌 떨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소리 내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노엘은 숨이 막혔다. 응급실에서 데려온 이후로 잘해 줘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굳이 제 성질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저 눈물 뚝뚝 흘리는 모습이 예뻐서,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했던 것뿐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한마디로 말해 화분에 하염없이 물을 퍼부었다. 숨 막혀서 질식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물을 들이부었던 것이다. 그제야 노엘은 깨달았다. 이 생경한 기분은 죄악감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아, 젠장…….”

노엘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일 때, 문이 열렸다. 노엘은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온 신경이 유진과 자신의 과오로 쏠리고 있었으니까.

“노엘.”

쩍쩍 갈라진 목소리는 필립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래도 노엘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유진의 손만 붙들며 고개를 숙였다. 말랑했던 살이 까슬하기만 했다.

노엘은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비참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누굴 탓할 수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까.

“노엘.”

노엘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꼼짝하지 않고 유진의 손만 붙들었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진은… 괜찮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수술 잘 마쳤으니까 경과를…….”

“나가세요. 같잖은 위로 들을 정신 없어요.”

다소 날카로운 답변에도 필립은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멈춰 세웠다. 오랫동안 자신이 모셔온 노엘답지 않다. 상류층을 상대하며 약 거래를 하고, 누군가에게 방아쇠를 당기며 집안까지 박살 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 그 누구보다 힘들어하는 눈을 하고 있다. 필립은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외면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필립이 부상 입은 다리를 억지로 옮기며 노엘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노엘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유진의 손만 붙들었다.

“이거, 저한테 가공해달라고 부탁했던 원석이죠?”

필립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 안에는 조그마한 피어싱 두 개가 들려 있다. 아무래도 수술하기 전에 발견하고 제거한 모양이다.

노엘은 숨이 막혔다. 감히 누군가가 유진의 몸을 건드렸다는 소유욕보다 하기 싫다고, 살려달라고 바둥거리던 유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 미칠 것 같았다.

‘흐… 네, 제,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

‘손가락만……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노엘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알베르트를 유인하여 유진을 지켜 주는 시늉을 해서 마음을 열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한다면 빼도 박도 못하게 알베르트를 완전히 감방으로 보낼 수 있고 유진의 환심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얄팍하게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제 못된 마음을 하늘이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뜻하지 않게 알베르트가 자신이 아닌, 유진에게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노엘.”

겨우 이성을 붙드는 듯한 목소리는 꼭 저를 책망하는 것 같았다. 노엘은 작게 숨을 뱉으며 필립을 돌아봤다. 필립은 명백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엘은 필립을 보다, 유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 감은 유진을 바라본 순간, 죄책감이 제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게 왜 유진의 몸에서 나온 건지, 저한테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노엘은 미칠 것 같았다. 유진이 이런 식으로 제 곁에서 벗어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수술을 마친 유진이 병실에 돌아왔을 무렵, 노엘은 소리를 지르며 유진을 붙들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쳐도 박제라도 해서 곁에 놓을 거라고, 남들이 쳐다봐도 개의치 않고 제 본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유진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의 가학적인 성향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살면서 절대라는 말은 없다. 그건 노엘에게도 마찬가지다. 후회를 해본 적 없다는 노엘은, 지금 굉장히 미칠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다.

“유진이 깨어나면 한국으로 보내자고, 아니, 보낼 거라고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노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진을 위해섭니다.”

“형제라서 그래요?”

필립 역시 후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유진을 적응하지 못하는 유학생이라고만 판단하였던 게 후회스러웠다.

포크로 알베르트를 내려찍으며 도망가던 그 모습, 그 모습을 보고 노엘의 말만 믿었던 저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필립은 죽을 각오를 하며 노엘을 바라봤다. 하지만 노엘은 싸늘한 목소리만 툭 내뱉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형제가 아니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노엘, 제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보내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노엘은 고개를 돌리며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으로 노엘은 후회와 죄책감에 짓눌리고 있다.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두 번 다시 제 방식대로 유진에게 표현하지 않겠다고 부질없는 기도를 하며 유진을 붙잡았다. 하지만 유진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먼 이국땅으로 오게 된 이후, 처음으로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 * *

―그로부터 45일 후.

“좋은 아침입니다.”

필립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달력을 들여다봤다. 그날 이후 한 달하고도 2주가 훌쩍 지나갔다. 필립은 다친 허벅지를 치료하느라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지만, 일상생활로 돌아오기엔 충분했다.

한동안 푹 쉬라는 노엘의 제안을 필립은 극구 거부했다. 노엘이 치료비와 높은 급여를 지급해도 살인적인 집세와 물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본주의 그 자체인 뉴욕에 사는 이상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하아…….”

“필립, 입장문 작성한 거 여기 놓고 갈게요. 검토 부탁드려요. 신문사에서 요청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네, 잠시만요.”

직원이 돌아가자마자, 필립은 한숨 쉬며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유진이 깨어나지 않았다.

45일이라는 시간은 유진에게 부족했던 모양이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으나, 눈 한 번 뜨지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혀를 차게 했다.

유진의 허리에 관통한 총알이 뼈를 건드리면서 장기까지 만신창이가 됐다. 게다가 유진은 몸이 약한 편이라 회복이 더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엘이 구치소에 처박힌 알베르트의 모가지를 따버리겠다는 미친 소리를 할 때마다 필립은 유진을 들먹이며 겨우 말렸다.

수술이 끝나도 마음 놓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열이 오르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 때문에 노엘은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진술하러 경찰서를 방문하는 것 외엔 병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노엘이 노트북을 들고 갔던 이유는 하나뿐이다. 모든 건 유진을 돌보기 위함이다.

‘노엘?’

필립 역시 종종 유진을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단 한 번도 남을 돌본 적이 없던 노엘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물수건으로 유진의 살결을 닦고 있었다. 축 늘어진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사람을 부를 테니까 가서 눈 좀 붙이고 오세요.’

‘새벽에 갑자기 열이 올라서 의사를 불렀거든요. 해열 주사를 맞혔는데도 열이 안 떨어져서 무슨 일 있으면 어쩌나 불안했어요.’

불안하다는 말과 함께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대로 못 자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유진의 손만 붙들고 있는 노엘이, 필립은 꼭 환영이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해 주지 못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도 들고.’

‘노엘.’

‘살면서 이런 기분 느낀 적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노엘 이 유진을 처절하게 붙들고 있다고 해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어찌 됐건, 가족이다. 노엘은 이복동생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필립은 ‘노엘의 방식’대로 설득하기로 했다. 전문 기관에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필립은 구체적인 증거를 들이밀어 노엘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노엘이 받아들인다면 유진을 한국으로 보내서 치료받게 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소용없다면 폭로 사건의 전말을 퍼트리겠다는 치사한 방법을 써서라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노엘이 진술하러 경찰서에 갔을 때, 필립은 그 틈을 타서 유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 지퍼백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노엘이 들어왔지만,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필립은 곧장 가슴 쓸어내리며 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게 2주 전 일이다.

―필립 제스퍼 씨?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스퍼 씨 앞으로 우편물이 하나 왔는데 직접 서명해 주셔야 하거든요.

“네, 곧 내려가겠습니다.”

필립은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사진을 찍으려는 듯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필립은 북적거리는 로비를 파헤치며 집배원을 찾아다녔다.

“제스퍼 씨?”

“아, 네.”

그때, 집배원이 다가와 하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인증 메일―확인 영수증’이라는 초록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발신지는 유전자 감식 연구소다. 필립은 집배원이 내민 종이에 서명하고 즉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곧바로 병원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곳에 노엘이 있으니까.

“이런…….”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엘의 사무실에 조명이 켜져 있다. 안에서는 희미하게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립은 봉투를 들고 사무실 앞으로 다가갔다. 차라리 지금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필립의 머릿속을 스쳤다. 똑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담담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 틀림없는 노엘이다. 필립은 대답을 듣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책상 위에 문서를 한 뭉텅이 올려놓고 파쇄기에 밀어 넣는 노엘이 보였다.

“노엘? 어쩐 일로…….”

“진술하고 바로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파파라치가 너무 쫓아와서요. 사무실 정리도 해야 할 것 같고. 곧 갈 거예요.”

“그렇군요.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빨리 가 봐야 하는데.”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파쇄기 안으로 문서들을 밀어 넣었다. 드르륵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다. 필립은 노엘을 쳐다봤다. 점점 더 갈수록 창백해지는 안색에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없다.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필립의 마음속 깊숙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노엘과 유진, 두 사람을 위해서다. 더 이상 누구도 망가지게 내버려 둘 순 없다. 필립이 작게 숨을 뱉으며 노엘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2주 전에 유진과 웨스, 아니, 로널드 씨의 친자 검사를 의뢰했습니다.”

노엘이 파쇄기 전원을 끄며 필립을 쳐다봤다. 붉게 충혈된 눈이 흔들림 없이 필립을 응시했다. 피로와 지친 기색을 내비치고 있으나, 서늘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필립은 서슬 퍼런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일반 사설 업체가 아닌 법적으로 인정받은 기관입니다.”

“그래서요?”

“유진을 데려오라고 지시한 게 로널드 씨니까 확실하겠죠. 근데 가족이라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못 봐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어 준비했습니다.”

“요즘 한가한가 봐요. 쓸데없는 짓 하는 거 보면.”

노엘이 책상에서 손을 떼며 필립의 앞으로 다가갔다. 분노 하나 담기지 않은, 그야말로 평온한 눈빛이었으나 필립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노엘이 밀봉된 봉투를 집어 들며 필립의 시선을 마주쳤다.

“두 분이 형제라는 걸 확인한다면 유진을 원래 있던 곳에서 치료받게 해주세요.”

“못 하겠다면요?”

“……모든 일을 고발하겠습니다. 노엘이 했던 것처럼요.”

“나한테 잘 배웠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역시 노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빙긋 웃기까지 하는 노엘의 모습에 필립은 절망적이었다. 어떻게든 막고 싶다. 이렇게라도 해야 유진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더 잘못되기 전에 막고 싶습니다. 노엘, 제발.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유진뿐만 아니라 노엘 역시 걱정하고 있다는 걸…….”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노엘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고 다른 직원이 고개만 들이밀며 필립을 쳐다봤다. 필립은 그제야 잊어버렸던 업무가 떠올랐다. 노엘의 폭로 사건 이후, 전시관의 입장을 기사로 내보내야 했는데 최종적으로 필립이 검토하고 내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신문사에서 요청한 마감 시간이 5분밖에 남질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 필립. 부탁 하나만 할게요. 로비에 파파라치들이 있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서류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저랑 같이 있을 때 개봉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들고 가는 게 어때요?”

노엘은 관심 없다는 듯이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득 쌓인 문서를 파쇄기에 넣을 뿐이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여유로운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건 필립이다. 필립은 문서를 파쇄기에 밀어 넣는 노엘을 쳐다보다가, 급히 업무를 보러 사무실 밖에 나갔다.

정신없이 입장문을 검토하고 신문사에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노엘의 심부름으로 로비까지 내려가 파파라치들이 전부 사라진 걸 확인했다. 정확히 8분이 지나갔다.

“노엘!”

필립은 급한 마음에 노크 하나 없이 사무실 문을 열어 재끼며 들이닥쳤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노엘은 눈 깜짝하지 않은 채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서류 봉투 뜯지도 않았어요. 그걸 원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손도 안 댔어요.”

필립은 급히 숨을 고르며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어깨만 으쓱였다.

“파파라치들은요?”

“전부 간 것 같습니다.”

노엘의 말대로 봉투는 밀봉된 상태 그대로였다. 필립은 노엘을 쳐다보며 천천히 다가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확실히 열어보려 했던 흔적도 없다. 필립은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 예민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필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필립의 말이 맞아요.”

봉투를 뜯으려던 찰나, 필립은 고개를 들어 노엘을 쳐다봤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인상은 노엘에게서 지워지지 않았다. 매끄러운 입술이 달싹이며 담담한 목소리를 흘렸다.

“더 잘못되기 전에 막아야겠죠. 필립의 말대로 할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어요. 고맙다고 하지 말아요.”

노엘이 확실하게 정신 차린 것 같다는 생각이 필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필립은 숨을 뱉고는 봉투를 뜯었다. 뚜둑, 소리와 함께 입구가 찢어지고 하얀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필립은 서류를 꺼내 빠른 속도로 내용물을 읽었다.

「의뢰인 A와 의뢰인 B의 모근 및 구강세포 DNA를 추출하여 유전자 동일 여부를 수행하였습니다. 본 검사는 성염색체를 제외한 STR 유전자 좌위를 분석하였습니다. 분석 결과, 유전자 좌위에서 29.1%가 일치하며 친자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친자 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노엘과 유진은 남이라는 뜻이다.

필립은 가슴 위로 무거운 돌덩이가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노엘과 유진이 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애꿎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죄책감이 가시질 않았다.

필립은 떨리는 손으로 노엘의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노엘 역시 담담하게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유진이 깨어나면 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필립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분명 로널드의 지시로 데려왔다. 유진의 모친이 죽기 전에 로널드에게 직접 연락했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선거를 앞두고 스캔들에 휘말릴까 봐 유진을 데려오라고 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서류상에서는 유진을 ‘남’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하…….”

필립의 입에서 헛웃음 섞인 숨이 튀어나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나, 두 사람이 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는 저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어쩌면 필립은 유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엘을 위해서 친자 검사를 진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모시는 존재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줄이려고 발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어요.”

필립은 고개를 들어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덤덤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있는 문서들을 파쇄기에 밀어 넣을 뿐이다. 침묵만이 맴돌았다. 노엘이 한참 동안 책상을 정리하던 그때, 묵직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노엘이 문서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담담했던 표정이 지워지고 미간이 좁혀졌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노엘은 전화를 받자마자, 차 키를 챙겨 들어 출입문으로 향했다. 너무나 급한 발걸음이다. 식은땀을 닦아 내리던 필립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노엘을 불러세웠다.

“방금 유진이 깨어나서 외상 센터로 검사받으러 갔다는 연락이 왔어요.”

“별일 없을 거예요. 다행입니다.”

“나머지 정리 좀 부탁할게요.”

노엘은 필립의 위로를 듣는 체도 하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벅거리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불안하고 급하게 들렸다. 필립은 텅 빈 사무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쳐다봤다. 부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길 바라는 얄팍한 희망과 함께.

* * *

“유진!”

노엘이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콰앙! 커다란 소리를 듣자마자, 노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유진이 놀랄 걸 생각하지 못하고 또 제 성질대로 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자책했다.

“하아…….”

노엘은 숨을 뱉고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유진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 몰라 붙여둔 간병인도 사라졌다. 침대에는 억지로 뽑은 것처럼 링거 바늘이 뒹굴고 있다. 이불이며 슬리퍼며 모든 게 엉망으로 떨어졌다. 노엘의 인내심도 바닥을 쳤다.

“아, 웨스틴 씨 그게…….”

이때, 간병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난 노엘의 모습에 놀란 모양인지 흠칫거리며 들고 있던 생수병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노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미간만 찌푸렸다. 좆같다는 몹쓸 기분이 노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진이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봐야 했던 건 자신이라는 미친 생각이 또 한 번 스쳐 지나갔다. 노엘은 화를 꾹꾹 참으며 간병인을 쳐다봤다. 간병인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움찔거렸다.

“어디 갔어요?”

“그게…….”

노엘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간혹 매스컴에서 내비쳤던 친절한 신사라던가, 집안의 비리를 폭로한 정의로운 사람과는 거리가 먼 눈빛이다. 서늘하게 쳐다보는 것이 금방이라도 병실을 박살 낼 것만 같다. 간병인은 흠칫거리고는 노엘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지금 화장실에, 있어요.”

서슬 퍼런 눈동자가 간병인을 향했다. 간병인은 노엘이 저를 질책하는 것 같아 다급하게 덧붙였다.

“눈 뜨자마자 외상 센터에서 검사받고 다시 왔는데 토할 것 같고 목마르다고 해서요.”

“……알겠습니다, 가보세요.”

탁, 문이 닫혔다.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시 살펴보니 화장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노엘은 화장실 앞으로 다가갔다.

‘우욱…….’

헛구역질하는 목소리, 틀림없는 유진이다. 노엘은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유진이 깨어나자마자 처음 뱉은 것은 구역질이다.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가 괴로움을 토해내었다.

노엘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머리를 잘 쓰는 노엘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각이 멈춘 것 같다.

“……젠장.”

노엘은 입술을 콱 짓이기며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참담한 광경이 나타났다. 물을 틀어 놓은 채 구석에서 바들바들 떠는 유진이 보였다.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았는지 머리와 옷이 흠뻑 젖어 있다.

“유진.”

“흐윽, 모, 목이 마, 말라서…….”

가느다란 팔로 간신히 제 어깨를 끌어안는 모습은 지켜보기만 해도 안쓰럽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다. 노엘은 작게 숨을 뱉으며 수전을 잠그고 문을 닫았다.

“손목 건드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유진은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제 손목을 물어뜯으며 달달 떨어대고 있다. 45일 만에 마주친 유진은 상상 그 이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노엘은 가슴이 저미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죄책감을 느낄 자격이 없다.

“잘못했, 흐으……. 근데 숨이 막혀서. 바늘 싫어. 무서워…….”

뚝뚝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비는 모습에 노엘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참담함을 느꼈다. 사고라는 게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괴로워하는 유진을 보며 노엘 역시도 숨 막혀 미칠 것만 같았다.

“유진.”

“흐으. 그, 그만. 그만…….”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우는 게 예뻐서, 바르르 떠는 걸 귀엽게 여기고 제멋대로 휘두르며 길들이려고 했던 제 과오를 지우고 싶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노엘의 머릿속에 미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유진이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본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게 신경 쓰여 돌아버릴 지경이다. 노엘은 관자놀이가 꾹꾹 눌리는 통증을 느꼈다.

“정신 차리고 나 봐. 숨 쉬어야 해.”

“흐어어엉……. 허엉, 다 그만하고 싶어. 아픈 거 싫어. 맞기, 싫… 끄윽, 잘못했어요.”

“……그만하라고 했잖아.”

유진이 손목을 물어뜯던 찰나, 노엘이 강하게 낚아채며 잡아당겼다. 분명, 유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수백 번, 수천 번 다짐했다. 더는 유진을 강압적으로 휘두르지 않겠다고. 손찌검은 물론이고 어떠한 접촉도 먼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노엘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유진의 앞에서 그 다짐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흐, 으. 노, 노엘 나 때리지, 마, 세요. 때리지 마세요. 잘못, 잘못했어요. 필, 필립한테 소리 지른 것도 죄송하고 혼자, 마, 막, 잘못했어요. 아픈 거 싫다고 해서… 아프다고 해서. 아파요. 아프지 않, 흐윽…….”

고장 난 인형 같다. 마치 실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유진은 이성을 놓은 채 끊임없이 잘못을 빌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잘못했다고 했다. 노엘은 유진의 손목을 붙든 손에 힘을 풀고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아프다고 말해도 괜찮아.”

노엘은 분명히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유진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왔다는 것에 희망을 품는 자신을 미친 새끼라고 여겼다. 체온이 맞닿자, 유진이 몸을 흠칫거렸다.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는 뜻이다.

“나보고 더, 더럽다고……. 바, 바늘, 바늘, 무서…….”

“누가 그래.”

“노엘, 이, 오기 전까지 계속 들렸……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흐윽.”

노엘은 작게 숨을 뱉으며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더럽다는 말. 아무래도 환청을 말하는 것이고 바늘이라면 수액을 뜻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유진은 텅 빈 눈을 하며 바르르 떨어댔다.

노엘은 유진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절망과 죄책감으로 짓눌렸다. 그래도 누굴 탓할 수 없다. 모든 건 제가 저지른 일이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노엘 혼자뿐이어야만 했다.

“아, 아프지 않아요. 넣어, 흐으…. 잘, 잘못했, 끄윽, 아, 아파. 아파. 흐으….”

치료의 여파 때문인지, 유진은 통증을 호소하며 노엘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딱히 노엘이 좋아서 한 행동이 아니라 고통에 이기지 못해 기댄 것뿐이다. 노엘 본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노엘은 유진을 떼어내지 않고 부드러이 다독이며 일으켜 세울 뿐이다.

“……그런 말 안 해도 돼.”

“흐, 으….”

“아프다고 해도 괜찮아. 앞으로 너한테 함부로 손대지 않을게.”

노엘은 제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죄책감, 후회, 그리움, 온갖 감정이 묻어난 음성은 생경하기 짝이 없다. 유진 역시 그렇게 느낀 것인지 울음에 젖어 끅끅거리면서 노엘을 바라봤다.

“네가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해놨으니까 더럽다는 소리는 전부 무시해.”

유진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은 건지 일렁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유진의 입술에선 아픈 울음소리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넌 잘못하지 않았어.”

유진을 움켜잡은 하얀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매일 손찌검을 하고 강압적으로 끌어당기던 손이 떨렸다. 목울대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목소리다. 노엘을 바라보는 새까만 눈에서는 쉴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처절한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맞물렸던 노엘의 입술이 달싹였다.

“잘못, 한 건 나야.”

노엘은 죄의식이라는 게 뭔지 몰랐다. 돈과 힘이 없는 게 잘못이라는 가르침에 길러진 탓이다. 남 앞에서 사람 좋은 척해도 미안하다는 말은 쉽게 꺼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오기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죄책감이 처음인 노엘에게 있어선 최대의 사과였다. 하지만 노엘은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외엔 어떤 말도 변명 같았으니까.

“옛날부터 그렇게 배웠어. 가장 빛나는 건 그 누구도 쳐다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흐, 흐으…….”

“나는 그따위로밖에 못 배워서 그딴 식으로 표현하기만 했어. 그게 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잘못한 건 나라는 간결한 말에는 온갖 죄의식이 담겨 있다. 노엘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잇자국이 선명했다. 노엘의 가슴이 저릿했다. 이 상처는 유진이 아닌, 자신이 낸 것이다.

“아프게 해서 잘못,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노엘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유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다. 환청일 게 분명하다는 눈이다.

하지만 노엘은 파르르 떨리는 유진의 뺨을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부드러운 손길에도 유진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흐, 으읏….”

“멋대로 상처 주고, 사과하는 게 비겁할 거라는 거 알아. 그래도 널 보고 얘기, 하고 싶었어.”

노엘은 움찔거리는 유진을 끌어안았다. 불안한 떨림이 점차 멎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진의 어깨에선 힘 하나 빠져나가지 않았다. 빳빳하게 굳은 어깨를 하얀 손이 쉴 새 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당장은 널 보낼 수 없어. 주치의가 적어도 수개월 동안은 입원 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 그럼…….”

유진은 겁이 났다. 매일 같이 저를 안으며 개새끼 취급을 했던 노엘이다. 그런 노엘이 처연한 눈빛을 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하니, 적응되지 않았다.

“싫다고 하면 한 걸음 물러서 지켜보기만 할게. 그게 평생 간다고 해도, 네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안는 일은 없을 거야.”

“흐읏…….”

“너를 괴롭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무엇이든지 다 할 테니까.”

그래도 무어라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용서라기보다는 습관처럼 틀어박힌 공포심에 가까웠다. 유진은 노엘이 저를 보며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하는 게 불안하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자신이 미쳐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네 몸에 상처 내지 마.”

도망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상처 내지 말라고 했다. 유진은 멍한 눈으로 노엘을 올려다봤다. 늘 살벌한 말만 내뱉던 노엘이, 이제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유진은 제가 바라보는 노엘이 꼭 환상 같아서 손을 뻗었다. 툭, 손가락 끝에 차가운 뺨이 닿았다 떨어졌다. 현실이다.

“허어어엉!”

유진이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으려는 것을 노엘이 붙들어서 끌어안았다. 그러자 유진은 움찔거리며 노엘을 밀어내기 바빴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매일 노엘의 밑에서 괴로워하며 다리를 벌리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자, 유진은 서러움에 참지 못하고 엉엉 목이 터지라 울음을 쏟아내었다.

“아, 아파. 아파요. 흐어엉! 나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는데 이제 와서, 흐윽…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약 하나 던져 주고 알아서 하라는 거랑 뭐, 뭐가 달라요.”

평소라면 얻어맞을 걸 각오하고 바르르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유진은 울음에 젖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꺽꺽 울어대며 제 설움을 토해내었다. 그럼에도 가슴 속에 진 응어리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화장실에선 유진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노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유진을 끌어안으며 제 몸에 기대게 했다. 개새끼라고, 주먹으로 쳐도 모자랄 판에 유진은 그저 엉엉 울기만 할 뿐이다. 울분을 터트리는 순간에도 표현하지 못했다. 습관이라는 건 무서웠다. 이 순간에도 노엘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흐어어엉!”

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매일 제게 가학적인 폭력을 행사한 손은, 하염없이 부드러이 저를 쓸어내리고 있다.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고 보내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유진은 미약하게나마 밀어내려고 했지만, 노엘의 품에 안긴 채 번쩍 들려져야만 했다.

“끄, 윽… 그만, 아프고 싶, 흐으…….”

우느라 모든 기력을 쏟아부은 유진은 까무룩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이 돌아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무리했으니 쓰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노엘은 축 늘어진 유진을 들어 올리며 병실로 나갔다.

노엘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유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유진을 침대에 내려놓은 지 오래였지만, 붙든 손은 떨어질 기미조차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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