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소식입니다. 제약,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을 받던 웨스틴 기업이 벼랑 끝의 위기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키얼스턴 민주당 대변인의 자택에 침입한 괴한이 웨스틴 기업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분식회계 및 미술품을 이용한 정치 비자금 로비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관련 제보자는 놀랍게도 웨스틴의 차남 노엘 웨스틴으로 밝혀졌습니다.
쨍그랑! TV를 지켜보던 알베르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알베르트의 뜻과 다르게 재떨이는 바닥에서 볼품없이 산산 조각났다. 뉴스 화면 속에 나타난 노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목소리를 낼 뿐이다.
―자부심 하나로 운영했던 전시관이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용된 걸 알게 되고 나서 저 역시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형, 모두를 설득하려 했지만 오히려 위협만 받았습니다.
노엘이 말을 할 때마다 카메라 셔터가 미친 듯이 터졌다. 담담하지만, 처연한 빛으로 물든 눈동자는 누가 봐도 가족에게 위협받는 불쌍한 사람이다. 노엘은 지친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 만지고는 손바닥만 한 사진을 들어 보였다.
―수차례 목숨을 잃을 뻔하고 제 측근에게도 위협을 가하는 일이 다분히 일어나 뉴욕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밀러 의원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사진 속에는 누군가의 발목이 근접하게 찍혀 있었는데 팅팅 부어오르고 보랏빛 멍으로 물든 게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화면을 보던 알베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엘의 발목은 아니다. 지나치게 가냘팠다. 누구인지 추측을 하기도 전에 사진이 넘어갔다. 노엘은 이제 다른 사진을 들고 있다. 응급실에서 축 늘어진 동양인 남자를 부축해서 데리고 온 알베르트의 수행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동양인 남자, 응급실. 두 가지 조합만으로 알베르트는 눈치챌 수 있었다. 노엘은 지금 집안에 들어온 버러지, 유진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쇼를 하는 중이라고.
“노엘 웨스틴 이 개자식이!”
알베르트가 분개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지만, 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뒤치다꺼리만 할 줄 알았던 노엘이 이런 식으로 집안을 엎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알베르트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화면 속 노엘은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다.
―대변인의 집에 침입한 괴한이 제 형과 접촉했다는 의혹이 밝혀지면서 더는 숨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공화당에 소속된 걸 알지만, 방관도 죄라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큰일이 나기 전에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습니다.
처연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노엘의 모습에선 거짓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분풀이뿐이다. 스크린을 향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지만, 힘 조절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화면에 적중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수행원이 들어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걸 보면 꽤 급한 모양이다.
“저, 저 큰일 났습니다. 로널드. 아니, 웨스틴 씨께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조사를 받으러 가셨다고 합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아버지가? 이런 젠장, 당장 법무팀에 연락해. 당장!”
“그리고…… 이사님 역시 곧 소환될 텐데, CFO 자격 모두 소환 즉시 45일간 강제 정지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시를 내릴 권한이…….”
“이런 빌어먹을! 갱단에 연락 돌려서 당장 데리고 와. 직접 못 오면 내가 간다고 해. 노엘 웨스틴 이 빌어먹을 새끼. 혼자 무사할 줄 알았어? 감히, 감히!”
그저 집안에 어울리지 않은 핏줄을 가진 사람을 내보내려고 했을 뿐이다. 알베르트는 끓어 넘치는 속을 참지 못하고 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이제 책상 위에 던질 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피가 식어버리는 기분이다. 선대 대대로 내려오던 부와 명성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알베르트는 체면 가리지 않고 핏대 세우며 수행인에게 명령했다.
집안에 들인 버러지를 없애려고 했을 뿐인데 그 버러지가 집안을 뒤집어 버리는 결과로 이어지게 했다. 너무 화가 나면 피가 식는다더니 딱 지금 그 꼴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그의 수행원은 우물쭈물하며 서성이기만 했다.
“저 그게, 시도 해봤는데 갱 쪽에서는 아예 자취를 감춰 버린 상태입니다. 공장에도 연락을 돌렸지만, 굳게 닫힌 상태였고 하다못해 거래했던 고객들 역시 전부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장부도 남아 있질 않습니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리고 다른 기업에서도 폭로전이라도 하겠다는지 입장 발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대책을 마련하셔야 합니다.”
알베르트가 사람을 보내 유진을 해코지했을 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다. 단지 노엘이 겁을 먹고 제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숙여야 할 것은 노엘이 아닌 자신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알베르트의 고귀한 자존심이 금이 가다 못해 곤두박질쳤다.
“빌어먹을…….”
당했다는 문장이 알베르트의 머릿속을 강하게 침식했다. 민주당 의원과 노엘이 접촉했다는 수행원의 보고를 들었을 땐, 단순한 약물 거래를 위함이라 여겼다. 노엘이라면 유진의 몰골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알베르트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실을 위해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면 속에 있는 노엘은 처연한 눈빛으로 집안을 무너뜨리고 있다. 가족이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도려내 버릴 사람처럼 굴었다.
“당장, 당장 노엘 웨스틴 그 새끼 소재 파악해.”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기자 회견이 끝난 후에 신원 보호를 요청해서 아무래도 접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이대로만 당하고 있으라고?!”
“윽!”
수행원의 멱살을 움켜쥔 알베르트의 손에는 온갖 감정이 섞였다. 동생에게 뒤통수를 후려 맞은 거북함, 선대부터 이어지던 집안의 위상이 무너졌다는 두려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모든 게 알베르트를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해서 노엘이 얻을 게 뭔지, 잃을 것밖에 없는 싸움에서 노엘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알 수 없다. 알베르트는 머리를 압박해오는 두통을 무시한 채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루빨리 노엘이 더 막 나가기 전에 막아야만 했다. 그때, TV에서 알베르트를 더 미치게 할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노엘 웨스틴이 과연 정의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했을까요? 노엘 웨스틴이 제공할 증거가 인정된다면 그는 돈벼락을 맞게 될 겁니다. 재판에서 부과된 추징금 액수가 100만 달러를 초과한 경우에는 10~30%를 지급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사례에서는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역대 최대 포상금은 3000만 달러였으니, 제 예상으로는 비슷하게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네요.
노엘은 잃을 게 없다. 잃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과 집안뿐이다. 알베르트는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도는 것을 느끼며 책상 서랍을 열어 재꼈다. 협상할 가치도 없다. 말이 안 통한다면 억지로라도 끌어 내려야만 했다. 알베르트의 눈이 차갑게 식어버리자, 지켜보던 수행원이 겁을 내며 쳐다봤다.
“노엘 웨스틴이 어디서 지내는 건지도 파악 못 했어?”
“아, 아뇨. 그게, 투숙한 호텔이 어딘지는 파악했는데 다시 들어왔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
뭔가 이상했다. 신변 보호를 요청한 노엘답지 않게 호텔을 자기 이름으로 직접 예약했다는 게 수상쩍다. 하다못해 수행 비서인 필립의 이름으로도 할 수 있을 법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노엘을 만나는 게 우선이다.
“내일 돌아오지. 그때까지 시간을 끌어봐.”
“하지만…….”
알베르트는 서랍 속에 들어있는 소음기가 달린 총과 탄환을 발견했다. 탄환은 단 두 발뿐이다. 차갑고 딱딱한 총기가 떨리는 손에 잡혔다.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 집안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오지 않을 미래만 바라봤던 게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알베르트는 총기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는 서랍 문을 닫았다.
머리통에 총기를 들이민다면 노엘 역시 어쩔 수 없어 꼬리를 내릴 것이다. 알베르트는 입술을 꽉 짓이기며 서재 밖으로 나섰다.
* * *
6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도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호텔에 도착하면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알려 주겠다고 할 뿐이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왔지만, 노엘은 보이지 않았다.
‘개인 사업가 노엘 웨스틴, 신념을 위해 집안의 비리를 고발.’
‘로널드 웨스틴, 현재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조사에 임하는 중.’
지나갈 때마다 TV 스크린이며, 사람들이 들고 있는 신문에서 웨스틴이라는 이름을 심심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집안의 비리, 조사라는 단어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세한 내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복잡한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도 여기로 데려온 걸까.
“유진? 얼른 가요. 호텔에 가서 설명할게요.”
필립이 내 등을 떠밀며 걸음을 재촉했다. 머리가 아팠다. 가족이 아닌 개새끼 취급을 받는데 왜 이런 일에 신경 써야 하는지 억울할 지경이다. 그 순간 노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금만 안 봐줘도 이렇게 낑낑거리는데 어떻게 놓고 갈 수 있을까.’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복잡한 일에 얽힐까 봐 데려온 게 분명했다. 내가 아닌, 본인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다. 살결을 쓰다듬는 손길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유진, 괜찮아요?”
“속이 좀…….”
“일단 빨리 호텔로 가야 해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호텔로 들어가는 게 우선이라서요. 이런 답변 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요.”
필립이 내 앞으로 생수병을 들이밀었다. 사소한 배려에도 어쩐지 불안했다. 학교 외에 장시간으로 돌아다닌 적은 처음이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낯선 것이 두려웠다.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충동까지 들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걸 굳이 내뱉지는 않고 생수병만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많은 인파를 비집고 터미널 밖으로 나가자,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타세요.”
필립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텅,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조수석 위로 필립이 올라타면서 차는 곧장 출발했다. 공항을 빠져나가면서 창밖의 풍경만 멍하니 쳐다봤다.
넓은 도로가 빽빽한 빌딩이 가득한 시내 풍경으로 바뀌던 찰나 차가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빠앙, 빵!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클랙슨 소리에 움찔거리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조금 놀라서…….”
“호텔 다 오면 말씀드릴게요. 눈 붙이고 계세요.”
“저…….”
“네, 말씀하세요.”
“라디오라도 틀어 주시면 안 될까요.”
내 말을 듣던 기사가 곧장 라디오를 틀어 주었다. 차 벽에 몸을 기대었다. 기내식도 먹지 못해 내장이 꼬이고 속이 쓰렸다. 클랙슨 소리 대신 다른 거라도 들으면 조금 괜찮아질까 싶었다.
―사실, 가족을 고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노엘 웨스틴이 기자회견에서 보여줬던 사진을 보면…….
―그가 받을 포상금도 기대된다는 반응이 있습니다. 정의를 대가로 받을 금액은 얼마일지 저 역시도 궁금하네요.
하지만 음악이 끊기고 곧 노엘의 얘기만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귀를 틀어막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하는 내 꼴을 보니 노엘의 그림자 안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 컥컥 마른기침만 내뱉었다.
룸미러를 통해 내 모습을 보던 필립이 기사에게 라디오를 끄라고 저지하는 손길이 보였다.
픽, 라디오가 꺼지고 다시 클랙슨 소리만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원망스럽게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 가슴께가 졸리는 듯한 답답함에 움찔거리기만 했다.
“우, 윽….”
호텔에 도착해서도 헛구역질은 멎지 않았다. 미간 찌푸리며 쳐다보는 필립의 모습에 눈치 보였지만, 끅끅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룸서비스 시켰어요. 식사 마친 뒤에 약 먹고 주무세요. 식사 준비되는 동안에 샤워라도 하는 게 어떠세요?”
“저…….”
룸서비스는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다.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다 필립을 올려다봤다. 짙은 눈동자에서는 연민도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말씀하세요.”
“이유…… 말해 주신다고, 해서요.”
괜한 것을 물었을까. 필립이 거칠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왜 뉴욕까지 와야 했는지.
“제가 왜 여기 와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오면서 비리 고발이니 뭐니 그런 내용을 들은 것 같은데…….”
내 말을 듣던 필립이 입을 꾹 다물었다. 미간이 좁혀지며 숨을 턱 뱉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노엘에게 맞으면서 생긴 습관이다. 왠지 비참해졌다. 남의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유진이 얼마 전에 사고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필립은 시선을 회피하더니 짧게 숨을 뱉었다. 사고라면 계단에서 떨어진 걸 말하는 듯했다. 대답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이자, 필립이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가 고의로 유진에게 접근했던 것입니다.”
“무, 무슨 말이에요. 누, 누가 저한테…….”
숨이 턱 막혔다. 나를 계단에서 밀어 버렸던 얼굴을 떠올리려 무던히 애썼다. 낯선 남자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 예거, 제이, 그리고 노엘. 그때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노엘 외에 또 다른 형제가 있다는 거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네.”
“알베르트 웨스틴, 장남이자 집안을 물려받기로 예정된 후계자이고요.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어요. 그저 서로가 필요할 때마다 연락하는, 아니, 알베르트의 뒤처리나 곤란한 일을 도맡는 게 노엘이었고요. 곤란한 일, 에 대해선 사업상의 이유라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사고와 사업상의 업무, 두 단어를 듣자마자 지난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노엘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전화기를 붙들며 예거에게 애원하던 그 날의 기억이다.
‘그런 생각으로 약을 팔거나, 사고 싶은 사람을 판매인에게 이어주는 일을 시작했어. 한 2년쯤 됐을걸’
‘약?’
‘근데 어느 날부터 거래가 뚝, 끊겨 버린 거야. 웨스틴 새끼들 때문에.’
예거가 말했던 ‘거래’. 그리고 필립이 말했던 ‘곤란한 일’. 모두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했다. 약물 관련 거래와 관련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순간, 아주 예전에 노엘에 대해 검색을 했던 게 떠올랐다. 웨스틴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제약 분야다.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최근, 알베르트 쪽에서 유진을 본가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예거 넬슨 사건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노엘이 거절했고요.”
“왜, 왜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 쪽에도 재차 보내야 한다고 말씀드렸거든요.”
필립은 힘겹게 숨을 내뱉고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명령을 따르지 못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유진에게 그런 피해를 준 것 같습니다. 응급실 CCTV를 뒤졌는데 유진을 업고 들어온 사람이 알베르트의 수행원이었으니까요.”
맥이 탁 풀리면서 힘이 빠졌다. 한마디로 말해, 내게 분풀이를 했다는 뜻이다. 노엘이 아닌, 내게 분풀이를 했다는 게 참담하고 처참했다. 가만히 있었음에도 내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말이다. 눈물이 핑 돌면서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유진, 괜찮아요?”
“마, 만지지 마, 마세, 우욱…….”
이젠 어떤 배려도 받고 싶지 않다. 내게 손을 뻗으려는 필립을 밀어내고 손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가만히 있는 내게 왜 이러는 건지 억울할 지경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노엘이 유진을 뉴욕으로 데려온 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지켜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지켜…… 주겠다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면서 봤겠지만, 노엘은 지금 평범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지켜 준다고?”
노엘이 나를 지켜 준다는 말에 조소가 터져 나왔다. 지켜 주겠다는 사람이 나를 이토록 망가뜨린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숨을 들이마시며 휘청거렸다.
“그, 그럼 나를, 나를 지켜 주겠다는 이유로 나를 이, 이렇게 만든 거였어요?”
“유진. 대체 무슨 말을. 노엘은 유진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오히려 적응 못 하고 나도는 건 유진이 아닙니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필립은 되려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노엘이 아닌, 내게 잘못이 있다는 눈빛에 넋이 나갔다. 아무리 절망해도 필립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런 말씀까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알아보니까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최선이라서 내가 예거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게 한 거예요? 노엘이 한 짓인데?”
필립이 내게 뻗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쳐다봤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허울 좋은 척하며 내게 접근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나를 망가뜨렸다. 단지 가난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로 왔던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며 물어뜯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내 몸은, 내 정신은 찢기다 못해 너덜거렸다.
필립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마른세수하며 내 앞으로 다가오는 필립의 모습에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에요. 노엘이 그런 게 아닙니다. 범인은 사건 발생 며칠 후에 자백했고요.”
필립의 목소리가 떨렸다. 담담한 목소리에 불안한 파동이 묻어났다. 거짓말이다. 전부 거짓말.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필립을 쳐다봤다.
“거짓, 말…….”
“유진.”
“노엘이, 직접 저한테 얘기했어요. 자기가 했다고. 필립도 자기를 도와줬, 우, 윽…!”
“노엘은 그럴 사람이, 유진!”
총기를 입에 물리고 나를 범하던 노엘이 떠올랐다.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런 사람을 내가 필요로 하고 있다. 피를 묻힌 손길을 절실하게 떠올리는 나 자신이 너무나 싫다. 바닥에 엎어져 구역질해 댔다. 먹은 게 없어 더욱 괴로웠다. 게워내는 건 오로지 비참함 뿐이다.
“뭔가 오해가 있나 봅니다. 노엘은 그 시간에 저와 업무상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할 거잖아요!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노엘의 말만 믿으시잖아요! 내가, 내가 어떤 짓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유진!”
“왜, 왜, 내 말은 안 믿어주는…… 아악!!”
미쳐 버릴 것 같다. 아니, 나는 이미 미쳤을지도 모른다. 절망스럽다 못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절박한 몸부림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필립은 내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왜, 왜!”
“유진, 그만해요. 제발 좀 그만해요. 그래도 난 노엘을 감쌀 수밖에 없어요.”
“놔! 놓으라고. 아악!”
발버둥 치면서 소릴 질러대자, 필립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듯이 붙잡으며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분노, 절망, 비참함. 어떤 감정으로도 내 기분을 설명할 수 없다. 목구멍 안쪽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져도 멈추지 않았다. 나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요. 나는 노엘 덕분에 살고 있어요. 오랫동안 이 집안을 위해 일했지만, 그 누구도 저를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남들이 뭐라고 해도 저는, 저는…….”
“흐, 놔, 놔아. 놓으라고…….”
“유진, 제발. 그만해요, 제발…!”
머리가 핑글 돌아갔다. 결국,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필립을 팔꿈치로 밀어내었다. 퍽, 하는 소리가 들려도 필립은 밀리지 않았다. 억지로 팔목을 비틀어 내가 입던 셔츠의 단추를 반쯤 풀어냈다.
“뭐 하는 짓…….”
필립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벌어진 천 사이로 드러난 살갗에는 그동안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잇자국과 붉은 울혈. 그것을 봤는지, 나를 붙든 필립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더럽구나. 역시 더러운 취급을 받아야 하는구나. 헛웃음과 함께 서러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래도 착한 사람이에요?”
“유, 유진.”
“잘못한 건 나라고 하시겠죠! 무조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질책할 거잖아요. 왜 나만 이래야 해요? 왜, 왜…….”
나를 붙들던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필립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느낌이 묻어나는 눈이다. 지금 필립은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생각 할 수 없는 사람 같다.
“또 흐으, 나만 더럽다고 할 거죠. 그럴 사람 아니라고. 내가, 내가 잘못했다고 할 거잖아요…….”
셔츠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필립은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숨만 뱉을 뿐이다.
“……미안해요.”
“흐, 으……저한테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요.”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졌다. 그동안 내 절규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울지 말라고, 다 내 탓이라고 몰아세우는 공허함만 밀려들 뿐이었다.
서러울 정도로 아팠다. 그래서 울음을 틀어막을 수 없었다.
“제가 뭘, 뭘 할 수 있었는데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데. 내가, 왜, 왜 이래야 하는 건데!!”
“유진!”
쾅! 벽에 머리를 찧으며 울분을 토해냈다. 골이 울리고 이마 위에 무언가가 주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저 악을 지르며 내 처절함을 토해낼 뿐이다. 필립이 힘을 주며 나를 막아 세웠다.
“흐어어엉…….”
바닥을 뒹굴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 와중에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들이 나를 찾아왔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등신, 스스로 치부를 드러낸 등신. 온갖 비난 섞인 목소리가 내 안을 파고들었다. 어서 노엘을 찾으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다.
“싫어, 흐으… 싫다고.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허어어엉!”
싫어, 싫다고 해서 죄송해요. 싫어, 잘못했어요. 두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엉엉 울면서 목이 찢어지라 울분을 터트렸지만, 필립은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는 뜻이다.
노엘 웨스틴에게 얽힌 것도, 이 빌어먹을 일에 끌어들여진 것도 전부 다 내 탓이라는 것이다. 필립은 한숨만 뱉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약 먹고 다시 얘기해요. 이 문제는 나도 노엘과 같이 얘기해 볼게요.”
“흐… 싫어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먹어요, 제발.”
제발이라는 단어에 힘이 실린 느낌이다. 카펫을 부여잡고 끅끅 울음을 터트렸다. 속이 꼬여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숨이 막혔다. 이윽고 환청이 찾아왔다. 역시 넌 아무것도 못 하는 등신이라고, 가만히 있는 것조차 잘못이라는 조롱 섞인 목소리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룸서비스가 도착해도 먹지 않을 것이다. 침대에 눕지도 않을 것이다. 이 호텔은 노엘의 돈으로 잡은 곳이기에 마음 편하게 있을 수가 없다. 그저 무릎을 웅크리며 구석으로 들어갔다.
띵동―.
“유진, 식사부터 하고 얘기해요. 내가 말을 안 듣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한테도 방법을 마련할 시간을 줘요.”
“안 먹는, 우욱…!”
안 먹겠다고 완곡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지 헛구역질만 올라왔다.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사치스러운 호텔답게 화장실도 넓다. 이 역시도 노엘이 준 특권이다. 더러워, 더러워. 눈물만 펑펑 쏟아내며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해댔다.
“흐, 으…….”
숨을 헐떡거렸지만, 가슴이 답답한 건 가라앉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노엘의 판단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역겨웠다. 차라리 필립을 밀어 버리고 여권을 들고 도망쳐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엘에게서 벗어난다고 해도 이 빌어먹을 환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두려워졌다. 벌벌 손이 떨렸다. 살려줘, 제발. 이 지옥에서 꺼내줘.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런데 그때 기이한 소음이 귓속에 파고들었다.
쿵―!
‘으윽….’
바깥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비튼 신음과 함께 무언가가 떨어진 것 같다. 고통 섞인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환청치고는 어쩐지 섬뜩했다. 신음을 낸 사람은 다름 아닌 필립이니까.
밖으로 나가야 할까 고민할 때 낯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덜컥, 쾅!, 덜컥, 쾅! 문을 여닫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기척이다.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그 찾고 있는 누군가가 꼭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노, 노엘. 아, 아니. 나, 나 좀…….”
환청일 거야. 분명 빌어먹을 환청일 거야. 벌벌 떨며 욕실 바닥을 기어갔다. 하지만 넓은 욕실에도 내가 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갈수록 발걸음 소리는 선명해졌다.
하는 수 없이 잠금장치에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환청이든 무엇이든 일단 숨어야만 했다. 잠금장치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뭐야, 이건 또?”
쾅! 문이 열리면서 낯선 남자가 욕실 안으로 들어와 순식간에 내 머리채를 낚아채며 이마 위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노엘 웨스틴은 어디 있지?”
“으윽!”
“잠깐, 이거 혹시 노엘이 끼고 도는 그 버러지 새끼인가.”
“흐, 사, 살려 주세요…….”
남자는 노엘과 닮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 금발과 시리도록 푸른 눈은 그들이 형제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중후한 느낌을 풍기며 숨통을 조르는 이 남자는 필립이 말했던 알베르트가 분명했다. 가족이라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알베르트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턱 끝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말 다 했지.”
“사, 살, 우윽!”
두피가 뜯길 것 같다. 숨이 막혀왔다. 이것은 환상이라고, 노엘이 없으면 안 된다고 부추기는 나의 환상일 뿐이라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생각했다. 하지만 끼릭, 하고 탄환 돌아가는 소리는 너무나 생생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보는 건 환상이 아닌, 현실이다.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까 천박하기 짝이 없군.”
“흐… 제, 제발…….”
턱을 강하게 짓누르는 총구에 오금이 저렸다. 시린 눈빛과 싸늘한 목소리가 숨통을 졸라 댔다. 대답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입을 열어도 살려달라는 말 밖에 터져 나오지 않았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가 파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얀 피부에 조명에 따라 빛을 내는 금발, 색소 옅은 푸른 눈동자는 섬뜩하기 그지없다.
또 다른 이복형 알베르트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말하는 태도로 봐선 알고 있다고 했다간 정말 죽을 것 같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알려주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둔 건가. 노엘 웨스틴 이 미친 새끼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면서 턱 끝에 총구가 바싹 달라붙었다.
“모, 몰라요. 사, 살려, 흐읍… 제, 제발…….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럼 그렇지. 같은 핏줄이라고 똑같은 건 아니었어. 우리 집안 사람이라면 살려달라고 빌지 않아. 죽었으면 죽었지 이딴 식으로 애원하지 않는다고. 이런 빌어먹을 버러지는 진작에 없애버려야 했는데.”
“사, 살, 흐….”
“이 볼품 없는 몸뚱어리에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피를 나눴을 뿐인데도 모욕적이군.”
“그, 흐…… 사, 살려 주세요. 제발…….”
한국말이든 영어든 입에 닥치는 대로 흘려보내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문득 머릿속에 예거의 마지막이 스쳐 지나갔다. 입에 총기가 물린 채로 싸늘하게 눈을 감았던 그 모습. 그게 내 차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예전에 ‘실수’를 했다고 들었어. 중국인지 어딘지 출장 갔다가 호텔 직원과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셨지.”
어머니는 나를 가지기 전 호텔에서 근무하셨지만,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었다. 알베르트가 다른 나라를 언급한 건 그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티끌만도 못한 존재. 나를 응시하는 알베르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흐, 으으…….”
“그때 그 ‘실수’가 생긴 거야. 아버지도, 나도, 노엘도 전혀 모르던 그 실수.”
실수라는 단어와 함께 내 턱을 짓누른 총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실수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시린 눈동자가 일러주고 있지만, 단단한 총기만큼 두렵지는 않다. 그저 무릎을 덜덜 떨어대며 버둥거릴 뿐이다.
“필립 저 새끼가 같이 있는 걸 보면 분명 노엘이 데려왔겠지. 노엘 그 자식 어디 있어?”
“흐읍, 모, 몰라요. 전 진, 진짜 아무것…… 커윽!”
퍼억, 복부 안으로 주먹이 꽂혔다. 숨 막히는 압박감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입안에선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곧이어 호흡이 터지면서 괴로운 고통이 몸을 뒤덮었다.
마른기침을 연신 토해 내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손은 떨어져 나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어?”
“저, 정말 몰, 아악…!”
다시 주먹질이 이어졌다. 커다란 주먹이 복부를 내려치며 쑤셔 대기 바빴다. 컥컥 기침을 토해 내며 주저앉았지만, 또다시 머리가 덜렁 들리고 말았다. 서슬 퍼런 총기는 어느덧 턱에서 관자놀이를 꾸욱 짓누르고 있다.
“어디 있어, 노엘 웨스틴.”
“아, 흐… 진짜 몰, 커윽!”
퍽, 퍼억! 알베르트가 나를 욕실 바닥에 내팽개치고 복부며 허벅지며 발에 닿는 대로 걷어찼다. 앞으로 고꾸라지면 주먹을 쥐어 턱을 갈겨 버리고 뒤로 엎어지면 발길질을 하며 숨도 쉬지 못하게 했다. 볼 안쪽 살이 터졌는지 입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가만히 앉을 힘도 없어 철퍼덕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묻지, 노엘 웨스틴은 지금 어디에 있지?”
“진짜 몰라요. 커윽. 전 그냥 따라 왔을 뿐, 아악!!”
“진짜 쓸모없는 버러지가 따로 없군.”
알베르트는 내 발목을 구둣발로 짓이기며 으르렁거렸다. 온몸 여기저기 얻어맞아 상처투성이지만, 성치 못한 곳이 건드려지니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통증은 나를 찢어버릴 기세로 발목부터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단단한 다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노엘이 내 것을 전부 가져갔으니 나 역시 똑같이 해줄 수밖에.”
“흐… 아, 안 돼. 흐윽…….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 흐윽….”
“살고 싶으면 그 자식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관자놀이를 꾸욱 누른 총구에 힘이 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하며 요란하게 뛰어 댔다. 죽고 싶어 발악하던 순간이 잊힐 만큼 절박해졌다.
살고 싶다. 시련과 고통의 연속뿐인 인생이라도 간신히 붙잡고 발악이라도 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버둥거렸지만, 총기를 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방아쇠를 걸친 손가락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아래까지 쿵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 윽! 911이죠? 여기 MOT 호텔 3711호입, 쿨럭! 지금 습격을 당, 했습니다. 저는 지금 허벅지에 총, 상을 입었고 인질 하나가 붙, 크윽…….’
밖에서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에 알베르트도, 내 고개도 돌아갔다. 필립이다. 필립이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쳐 가기도 전에 알베르트가 내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나갔다. 비명도 지를 새 없이 거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어느덧 경치 좋은 객실은 스위트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못하게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습격을 당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 주듯이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엎질러져 있다. 그 가운데 필립은 피가 철철 흐르는 허벅지를 붙들며 전화를 하고 있다.
“제, 제 이름은 필, 립 제스퍼. 습격자는 알베르트 웨스, 으윽…!”
“기절한 줄 알았는데 꽤 멀쩡하군.”
알베르트가 나를 내동댕이치며 곧장 필립에게 달려가 등허리를 걷어찼다. 빠악!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참 얻어맞던 필립은 저항하는 것이 무색하게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알베르트의 손에 들린 총이 필립을 걷어찰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필립은 얻어맞는 순간에도 나를 쳐다보며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노엘에게 메시지 남, 겼으니까 어, 어서 가, 세요. 아악!”
“참 부러워. 충성심 높고 일 잘하는 부하를 뒀으니 저따위로 날뛰지. 노엘이 어디 있는지 필립, 네가 말할 건가?”
“모릅, 니, 으윽…. 911에 전화, 하는 것만으로도 추적이 시작되, 니까 여기서 그만하시, 아악!!”
하지만 필립의 손길은 거기까지였다. 곧이어 알베르트의 보복이 이어졌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손은 빼앗은 핸드폰으로 머리통을 연신 내려쳤다. 그 와중에도 알베르트는 손에 든 총기를 놓치지 않았다. 퍼억, 퍽! 방 안에는 온통 폭력적인 소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서, 도망…….”
내가 무얼 할 수 있을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라는 걸 정리 할 수 없었다. 그저 덜덜 떨며 뒷걸음질 치는 게 전부였다.
그때, 등에 차가운 무언가가 턱하고 부딪쳤다. 필립이 나를 위해 준비했던 룸서비스 카트다. 아무래도 알베르트는 룸서비스 카트를 가로채서 이곳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그만하세요. 경찰이 오기 전에…….”
“그래? 그럼, 여기서 다 죽이고 끝내지. 어차피 잃을 것밖에 없으니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으윽…!”
뻐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필립의 뺨이 돌아갔다. 어느덧 하얗던 필립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으며 여기저기 퉁퉁 부어올랐다.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그저 폭력적인 주먹질만 가하는 뒷모습을, 구둣발에 얻어맞는 축 늘어진 몸뚱어리를 쳐다봤다.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다. 곧이어 삐이, 거리는 이명이 들리면서 두통이 찾아왔다.
“아, 윽!”
필립이 맞는 소리도, 알베르트의 협박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찢어질 것 같은 두통에만 신경이 쏠릴 뿐이다. 제발, 제발. 머리를 움켜쥐며 뒷걸음질 쳤다. 카트를 세게 건드렸는지 와장창 소리와 함께 접시며 포크, 나이프가 떨어졌다. 산산조각이 난 접시 파편이 손바닥에 들이박혔다.
“윽…!.”
그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시야 안으로 바닥을 뒹구는 포크가 눈에 들어왔다.
“흐, 으…….”
불안한 호흡을 내뱉었다. 숨만 쉬어도 내장이 찢기는 고통이 몸 안으로 차올랐다. 아직도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무언가를 저질러야겠다는 충동에 홀린 듯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살고 싶다. 나는 분명히 살고 싶었다. 죽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서다.
“유진, 으윽, 도망…….”
그렇다고 해서 도망가라 처절하게 외치는 필립을 두고 홀로 떠날 수 없다. 바르르 떨며 포크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유독 섬뜩하게 와닿으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순간 노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지금처럼 이렇게 흔적 남겨. 알았지?’
흔적을 남기라는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인데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포크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에 닿자마자 소름이 돋아났다. 시키지도 않은 명령에 나도 모르게 따르고 말았다. 쿵, 쿵.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댔다.
“노엘 웨스틴이 저따위로 날뛰는 거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는 건 너도 도왔다는 거지, 그치?! 어떻게, 감히, 감히…….”
“크, 으…….”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연신 내리치는 손을 봤다. 그리고 그 앞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필립의 모습을 응시했다. 손에 쥔 포크를 움켜쥐고 천천히 알베르트를 향했다.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단지 살고 싶어서다. 필립을 구해야겠다는 도덕적인 신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지나칠 수가 없다.
“필립, 잘못된 주인 밑에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오늘 톡톡히 배워 봐.”
“이런다고 소용 없, 윽…….”
자세히 들여보지 않아도 알베르트라는 사람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채, 분노만 쫓아가는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정성껏 넘긴 머리는 어느샌가 흐트러졌으며 뺨이며 셔츠며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다.
알베르트가 목덜미를 닦아 내리며 단추를 풀어냈다. 옷깃 사이로 드러나는 허연 목덜미에 피가 묻어났다. 그러한 감상은 잠깐이다.
알베르트는 무릎을 굽혀 앉아, 필립의 머리채를 콱 움켜쥐며 총구를 들이댔다. 끼릭, 탄환 돌아가는 소리와 동시에 내 발은 움직였고 후들거리는 손을 겨우 들어 포크를 움켜쥔 채 알베르트의 뒤로 향했다.
“비열한 노엘 웨스틴을 감싸다가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알란 말, 윽…….”
그리고 망설임 없이 어깨에 찔러 넣었다. 푸욱,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단단한 살덩이에 박힌 감촉이 포크를 타고, 손바닥에 퍼지면서 온몸 구석구석 자리 잡은 세포까지 퍼져 나갔다. 불쾌함, 죄책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느껴지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개자식이……”
순식간에 셔츠가 피로 물들여지면서 모든 행위가 중단되었다. 알베르트는 총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쨍그랑! 어깨에 꽂힌 포크가 떨어지면서 두려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알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콰앙! 덜덜 떠는 손으로 겨우 문을 열며 도망쳤다. 넓디넓은 복도에는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다. 벽면에 써진 ‘VIP 전용’이라는 글자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신발이 벗겨져도 앞만 보며 달아났다. 목 터지게 살려 달라 소리 질렀지만, 그 누구도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절망은 고요 속에서도 찾아왔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건 오로지 답 없는 메아리뿐이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 흐윽…….”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저 멀리 서 있는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 하나만을 좇으며 미친 듯이 뛰어갔다. 하지만 나를 쫓는 알베르트 역시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성큼성큼 쫓아왔다. 큰 체격이라 그런지 금방 따라 잡힐 것만 같다.
“이 빌어먹을 버러지 새끼, 거기 안 서?!”
“흐, 하, 하지, 마. 하지 마세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쾅! 총을 벽에 내리치는 손동작에 움찔거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노엘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등신 새끼, 멍청한 새끼. 그냥 지금 죽어버리는 게 어때? 나를 괴롭히는 속삭임은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싫어, 제발 그만해. 머리를 쥐어뜯고 미친 듯이 앞만 보며 달려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아랫배가 찢어질 듯이 당겨졌다.
“그, 그만. 제발…….”
쉴새 없이 누군가를 향해 애원하던 그때,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금방 붙잡힐 예감이 들어, 고민할 것도 없이 비상계단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곧 머리채가 붙들려 질질 끌려나가고 말았다.
“아악…! 사, 살려, 주세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벌 떠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군. 아버지가 네 놈한테 새 이름을 주지 않는 게 이해가 돼.”
“아, 흑…! 도, 도와주세요. 살려 주, 으윽…….”
거친 손아귀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어당겼다. 온 힘을 다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아무리 고함을 쳐도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다. 복도를 비치는 형형한 조명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손가락 끝을 세워 버텨 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가학적인 손길이 어김없이 나를 덮쳤다.
“아, 흐… 하, 하지, 마세요, 잘못했, 사, 살려 주세요.”
“노엘 웨스틴을 불러. 그럼 살려 준다니까, 이 빌어먹을 버러지 새끼야!”
퍼억! 뺨이 돌아갔다. 단단한 주먹에 시야가 일순간 흐려졌다. 다시 또렷해졌을 땐 복부에 주먹이 꽂히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아파. 제발, 살려줘, 제발. 덜덜 떨며 알베르트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비릿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불러, 그 자식.”
“저, 정말 몰, 흐으…….”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하, 하지 마세요. 사, 살려, 살려 주세, 우윽!”
바들거리며 입을 벌리던 찰나, 단단한 총기가 우악스럽게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방아쇠에 걸친 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알베르트는 웃고 있다. 그때와 똑같다. 노엘이 내 입 안에 총을 쑤셔 넣던 그 순간, 그 두렵던 시간이 또다시 돌아왔다. 바르르 떨면서 손목을 붙잡았지만, 전부 부질없는 짓이다.
“마지막 남은 총알을 여기에 박는 수밖에.”
“살려 주세요. 제바, 으윽…!”
살려달라고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처절하다 못해 인간이 아닌 짐승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흘리며 애원했다. 부디 내가 보는 환각이길 기도했지만, 내 목구멍을 찌르는 총기와 헛구역질을 일으키는 탄약 냄새는 소름 끼치도록 지독했다.
이게 내 마지막일까.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살려달라고, 올 리 없는 도움의 손길을 감히 욕심냈다. 끼익, 방아쇠에 힘이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두려움에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헐떡이는 숨만 내뱉었다. 그리고 곧 정신이 아득해졌다. 스르르 열리는 엘리베이터 소리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조차도 환청 같았다.
그때, 알베르트가 갑자기 크게 신음했다.
“으윽…!”
뻑! 무언가가 알베르트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지나치게 깔끔한 소리와 함께 목구멍에 쑤셔진 총이 떨어지면서 알베르트가 자빠졌다. 동시에 모든 게 또렷해졌다. 알베르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내 등 뒤에 있는 무언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좋은 변호사는 찾았어?”
알베르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내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익숙한 목소리, 나를 망가뜨린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상황을 제쳐두고 노엘의 음성에 안도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던 찰나, 노엘의 손이 나를 끌어당겼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내 다리는 유난히 볼품없이 느껴졌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경찰서에 처박혀 있을 시간인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내 어깨를 움켜쥔 하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지만, 목소리만큼은 온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