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4)

* * *

노엘이 서류를 들고 거실로 내려갔다. 약을 먹고 잠든 유진의 살갗을 물고 빨아들이고 싶었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어쩔 수 없이 서류 뭉텅이만 봐야 했다. 그때, 타이밍 맞춰 핸드폰이 울렸다. 필립이었다.

―노엘, 지금 뉴스 보고 계신가요?

“잠시만요.”

노엘은 대수롭지 않게 리모컨을 들었다. 벽면 가득 찬 TV 화면이 환하게 켜지면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화면 속에는 아나운서가 정면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오후 9시경 마틴 키얼스턴 민주당 대변인의 집으로 괴한 3명이 침입했습니다. 침입한 용의자는 두 시간 만에 검거되었으나, 조사 도중 도청 장치를 소지하고 기업가 알베르트 웨스틴의 개인 비서와 연락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단순 절도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노엘은 형의 이름이 불리어도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사업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정치를 시작한 아버지에게 타격이 갈 게 뻔했지만, 노엘은 그리 큰일이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기만 했다.

―노엘?

“듣고 있어요. 본가 쪽은 어때요?”

부친 로널드의 정계 진출 선언 이후, 본가는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특히 언론과 대중을 사로잡으려 무던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노엘이 모를 리 없다.

주지사 입후보의 아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고 감시하려 했던 의혹이 제기된다면 본가에는 꽤나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며 모든 것을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예상대로 난리가 났습니다.

“그대로 모르는 척하고 있어요. 너무 티 내면 금방 들키잖아요.”

괴한 3명은 노엘과 밀러 의원이 합심해서 보낸 것이다. 지난번 호텔에서 만났던 밀러 의원과의 만남 이후, 노엘은 의원에게 웨스틴의 실태를 흘려 주었다. 주가 조작을 위해 투자 조합을 설립하였고 전시관을 이용하여 탈세와 로비를 진행했다는 추악한 진실을 넘겼다.

―우리의 ‘거래’ 장부는 전부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갱 쪽에서는 약물 제조 공장 부지를 입막음 대가로 요구했습니다.

“수락하겠다고 하세요. 평생을 감옥에 갇힐 바엔 땅 하나 넘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물론 자신이 저지른 행적을 지워가면서 했던 것이다. 억울하게 협박당한 차남의 역할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뒤탈 없이 물러날 수 있다. 사실 노엘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 흐으…자, 잘못했…….’

‘그게 힘들면 네가 정신을 잃은 동안 내가 뭘 했는지 알려줄까?’

유진을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이 알베르트의 수행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병원 CCTV를 보는 것 역시 무리가 없던 것도 노엘이 가진 돈과 지위 때문이다. 노엘은 너무나 손쉽게 CCTV 녹화 파일을 얻을 수 있었다. 화면 속에는 유진을 둘러업고 들어온 알베르트의 수행인이 있었다.

‘그나저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공항에서 블리스를 봤습니다. 알베르트 수행 비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만남이 새어 나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축 늘어진 유진을 응급실에 친히 모셔온 이유는 다음엔 이 정도로 끝나지 않겠다는 경고를 전해 주기 위함이다. 어쩌면 노엘의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가져가겠다는 암시일지도 모른다.

―노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전시관과 에이전시, 전부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그래서 노엘은 자신을 건드리면 배로 갚아 주라는 집안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다.

―네? 그게 무슨…….

“웨스틴 기업에서 전시관과 에이전시를 이용했다는 증거를 만들어야죠. 이곳으로 지분을 취득하고 고액의 미술품으로 탈세와 로비까지 저지른 웨스틴 일가를 고발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잖아요.

―알겠습니다.

”아, 지금 생각났네요. 작년에 알베르트가 전시관에서 걸렸던 작품을 공화당 의원에게 전달한 적 있죠? 그 기사도 잘 체크해 주세요.“

―저,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필립의 목소리에 노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또 가족 얘기를 하는 건가. 노엘은 입 밖으로 답답한 숨이 터져 나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유진 역시 그런 말을 했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뭐?’

‘가족, 흐, 형이잖, 아요…….’

가족, 그 빌어먹을 가족이라는 단어는 유진의 입에서도 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형이라고, 동생이라고. 그래서 노엘은 더더욱 가족이라는 허울이 진절머리났다. 노엘이 서류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가족이라서 약물 관련 문제는 터트리지 않는 거잖아요.”

노엘은 ‘가족’이라는 단어에 심사가 뒤틀려 으르렁거리듯이 내뱉었다. 유진이 아닌 다른 이의 앞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전화 너머에 있던 필립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노엘의 시린 음성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객들 입단속은요?”

―15명 모두에게 3배 이상의 위약금을 돌려드렸습니다. 계약서는 즉시 파기했고 혹시 몰라 호텔 측에도 CCTV 파기를 요청했습니다. 고객들은, 아무래도 뉴스를 보고 겁먹은 모양인지 모두 당분간 피신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치고는 평온한 목소리다. 노엘은 마지막으로 남은 서류를 훑어보며 대꾸했다.

―노엘, 의원님께서 뉴욕으로 와야 하지 않겠냐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던 노엘의 손이 멈췄다. 뉴욕으로 오라는 뜻은 의원 측이 깔아 놓은 ‘기자 회견’이라는 자리에 들어가야 했으며 그곳에서 내부고발자가 되어 역할극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노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바르르 떨어대고 압박을 느끼면 실금하는 지경에 이른 유진만 신경 쓸 뿐이다.

“일정 잡히면 바로 간다고 전해 주세요.”

―항공권은 일정 조율 후에 준비하겠습니다.

“유진의 몫까지 부탁드릴게요.”

―네?

“나보고 아픈 애를 혼자 두고 가라고 하는 건가요? 호텔 예약은 내 이름으로 해주세요.”

―위험합니다, 노엘의 이름으로 예약한다면 분명…….

필립의 목소리에서 염려가 묻어났다. 노엘이 기자 회견을 한다면 알베르트 쪽에서 보복할 게 분명했다. 노엘의 이름으로 호텔을 예약하는 것은 습격당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노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류만 훑을 뿐이다.

“그리고 필립은 기자회견장에 나오지 말고 유진을 데리고 있어 주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왜…….

“염려하는 대로 그 자린 위험하잖아요.”

―노엘.

“나도 총 맞을 각오하고 나가는 자린데 유진을 데려갈 순 없어요.”

―노엘, 전…….

“이거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통보예요.”

노엘은 조소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제 손으로 직접 개새끼를 남에게 맡기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하루면 돼요. 그동안 호텔에 데리고 가주세요. 혹시 알베르트 쪽에서 추적할지도 모르니까 필립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마지막 문장은 본심과 다르다는 듯이 살짝 톤이 흐트러졌다. 알베르트가 저를 추적하길 바라는 말투 같았다. 노엘은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부 검토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말씀하세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유진을 바로 재우세요. 아무 말도 걸지 말고.”

노엘은 필립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끊어버렸다. 필립마저도 신경 쓰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독한 올가미에 감겼다는 생각이 노엘의 머릿속에 가득 사로잡혔다. 노엘은 한숨을 뱉으며 천장만 바라봤다. 모든 게 제 뜻대로 흘러갔지만, 짜증이 가시질 않았다.

* * *

간만에 악몽을 꾸지 않았다.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뜨니, 단단한 팔뚝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깨를 움찔거리자, 노엘은 읽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는 휘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흠칫 소름이 돋아났다. 편안하게 잔 후에 개운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만 같다.

“깨우려고 했는데 딱 맞춰서 일어났네.”

귓바퀴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면서 나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꼭 사귀는 사람한테 하는 행동 같아서 더더욱 소름 끼쳤다. 내가 아니라, 노엘이 미쳐 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태도를 보일 리 없다. 아니면 노엘의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꿈꿨어?”

“……그냥 너무 졸려서요.”

“벌써 두 시야, 언제까지 자빠져 자려고.”

흠칫 놀라며 뒤로 내빼려고 하자,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눕지 말라는 뜻이다. 하는 수 없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앉았다.

“일어났으니까 밥 먹자.”

노엘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뻗었다. 때리는 것 같아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노엘 같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앞머리를 쓸어 만져 주는 것이었다.

“뭐야, 이 반응?”

“아, 아니, 땀이 좀 나서……. 죄송해요. 피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정말 이상했다. 노엘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숨 쉬듯 내뱉던 ‘씨발’이라던가, ‘개새끼’라는 호칭을 눈에 띄게 줄이질 않나, 손찌검도 하지 않고 키스만 해댔다. 어디 가서 벼락이라도 맞은 건지, 아니면 또 하나의 작전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언제 어떻게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까.

“아프면 바로 말해. 손목은 건드리지 말고.”

“……네.”

“이제 밥 먹자, 기다려.”

“조금 이따가 먹으면…… 안 될까요. 바로 밥 먹으면 속이 더 안 좋아서…….”

안 될 걸 알면서도 부탁하는 나도 등신이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노엘이 손을 멈추고 쳐다봤다. 오늘이야말로 얻어맞겠구나 싶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노엘은 손 한 번 올리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꼭 먹을게요.”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 주었다. 노엘이 아닌 것 같아서 허락을 맡아도 편하지만은 않다. 우물쭈물하며 노엘의 눈치를 살폈다. 노엘은 이런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는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근데 이건 좀 아쉽네. 너한테 전해 줄 소식이 있는데 못 들려주겠다.”

“네? 그게 무슨…….”

“안 먹는다며. 네가 내 말 안 듣는데 뭐 예쁘다고 얘기해 줘야 해?”

역시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욕하거나 때리지 않았지, 여전히 자기 멋대로다. 밥을 안 먹으니 말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직 음식물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벌써 속이 메슥거렸다. 하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노엘을 쳐다보기만 했다.

“알아서 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밥보다 전해 줄 소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혹시 한국으로 보내 준다는 걸까? 나를 아주 버린다는 걸까? 온갖 추측이 머릿속에 차오르면서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를 놓칠 것만 같다. 서둘러 노엘의 옷깃을 붙잡았다.

“왜?”

“죄송해요. 밥, 먹을게요.”

“진작 이럴 것이지. 어차피 하게 될 거면서 꼭 이렇게 한 번씩 내빼더라.”

노엘은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머리며 뺨이며 손길 닿는 대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꼭 개새끼를 칭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자, 노엘은 내 뺨을 감싸 쥐며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곧 두려움이 찾아왔다. 혼자 남겨진다면 또 이상한 목소리들이 찾아올까 봐 겁났다.

침대에서 멀어지는 노엘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입으로 노엘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그래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저 멍청히 침대 시트를 꾹 움켜쥐며 방을 나서는 넓은 어깨만 쳐다봤다.

“왜?”

시선을 느껴서일까. 노엘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돌아봤다. 파란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생기 있는 빛을 내비치고 있다. 노엘은 아직 모른다. 내가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노엘보다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노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나 끔찍했다.

“할 말 있어?”

“저…….”

“응, 말해.”

“과일…… 먹고, 싶어요.”

같이 가자는 부탁은 키스보다 하고 싶지 않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무덤을 파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생뚱맞은 핑계를 대면서 노엘을 붙잡았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김유진이라는 사람은.

간절한 마음을 숨긴 채 겨우 입을 열었건만, 노엘에게선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만 대답처럼 돌아올 뿐이다. 꼭 다른 말을 듣고 싶은 것 같은 눈빛이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할까,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끼이익, 덜컥. 노엘은 아무 대꾸 없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흐…….”

쿵, 문이 닫혔다. 아직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홀로 남겨진 게 두려웠다. 계단에서 떨어지던 순간과 예거의 시신을 맞닥뜨렸던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음이 안개처럼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심해.’

‘몸 섞은 대가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것도 형이랑? 기생충이 따로 없잖아.’

응급실에서 들었던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머리를 감싸 쥐며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춥지도 않은데 다리가 저절로 떨렸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노엘이 오길 기다리며 덜덜 떠는 게 전부였다.

“아, 아냐. 싫, 흐…그런…….”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더는 환청이 들리지 않았으나, 두려움은 여전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웅크리던 찰나, 덜컥 문이 열리면서 노엘이 들어왔다.

“온종일 잠만 자려고 하네. 일어나.”

“흐으…….”

담담한 음성에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모든 게 노엘에게 통제당하는 기분이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도 괜찮지 않다. 제법 가까워진 발걸음 소리에 이불을 걷어내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뭐야, 또 왜 울어?”

“아, 아니에요. 머리가 어지러워서…….”

“하아, 미치겠네. 이거 먹고 약 먹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머리가 울리는 어지러움에 휘청거렸다. 내 꼴이 너무나 비참해서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답해.”

“네, 네…….”

노엘은 침대 위로 트레이를 내려놓고는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트레이 위에는 허연 요구르트가 담긴 그릇이 있었다.

“이거 다 먹어. 하나도 남기지 말고.”

내 앞으로 내민 숟가락을 건네받았다. 노엘은 눈물을 닦아 주다가 내 머리로 손을 옮겼다. 머리에서 목덜미로 손이 내려갔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자마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도 마음 편하지 않다. 오히려 언제 후려칠지 몰라 두렵기만 했다.

“근데 저한테 알려주신다는 게 뭐, 예요?”

“다 먹으면 알려 줄게. 난 너랑 다르게 거짓말은 안 하잖아.”

“……네.”

거짓말은 아무래도 도망간 걸 말하는 듯했다. 불만 대신 입술을 꾹꾹 누르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다. 기분은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요구르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과와 곡물 같은 게 있었다.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어.”

요구르트를 떠서 입에 넣었다. 뭐 하나 걸리지 않는 부드러운 요구르트에 사과와 곡물 특유의 단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단내마저 속이 울렁거렸다. 어딘가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헛구역질했다. 가슴이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했다.

“우, 윽…….”

“억지로라도 먹어. 빈속에 약 먹을래?”

“아, 뇨. 근데 먹기가 힘, 우읍…….”

“그만 말하고 입이나 벌려.”

끅끅거리며 헛구역질을 해대자, 노엘이 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가져갔다. 혼자 해보겠다고 손을 뻗는 건 괜한 짓이었다. 허공을 휘적거리던 손은 노엘에게 붙들렸다. 노엘은 내가 입 벌리기를 기다릴 수 없는 사람처럼 내 턱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으으…….”

억지로 입이 벌어졌다. 먹고 싶지 않은 것이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요구르트 특유의 부드러운 맛은 역시 구역질로 이어졌다. 결국, 헛구역질을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상태로 먹어야만 했다. 그릇을 다 비웠을 땐,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었다.

“봐, 다 먹으니까 얼마나 좋아.”

노엘은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내 입에 알약을 밀어 넣었다. 물을 마시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컵은 보이지 않았다. 씹으라는 건지, 그냥 삼키라는 건지 분간되지 않을 때 노엘의 입술이 내 입으로 포개어졌다.

“흐으….”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엘은 익숙하게 내 허리를 휘감아 품속으로 끌어당기며 허리선을 따라 지분거렸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엘의 고개가 틀어지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척추를 타고 쓸어내리는 손가락 끝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 소름 끼치는 생경한 감각이 싫어 입술을 떼어 냈다.

“억지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어깨가 흠칫거렸다. 곧 입술 틈 사이로 타액에 젖은 혓줄기가 유영하듯 파고 들어왔다.

“아, 흐…….”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려지던 키스와는 딴판이다. 분위기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과 다르게 내게는 불안하게 떨리는 호흡이 배경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고통 혹은 두려움뿐인 행위다.

“너, 무 급…….”

혓바닥이 뽑힐 것 같이 빨아들이는 것도, 볼 안쪽이며 치열이며 침범할 수 있는 모든 걸 옭아매는 노엘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다. 노엘의 움직임에 따라 입안에 있던 알약이 굴러다녔다.

“우윽…….”

마침내 커다란 알약이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갔다. 툭 하고 목구멍을 건드리는 알약에 앓는 소리를 살짝 흘려내었다.

“밥 한 번 먹이기 더럽게 힘드네.”

“이, 이제 말해 주세요.”

“뭘?”

“저한테 말할 거 있다고 하셨, 흐으…….”

말은 안 해도 개새끼 취급하는 듯한 손길이다. 머리며 뺨이며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에 기분 나쁘기보단 무섭기만 했다.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내일 뉴욕으로 갈 거야. 필립이 데리러 올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갑작스러운 통보에 내 위치를 까먹고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노엘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담담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갑자기 무슨, 저, 저도 같이 가는 거예요? 저는 왜…….”

“그럼, 여기 혼자 있을래? 목줄이 채워지고 뒷구멍이 막힌 상태로 지하실에 혼자 있을 수 있어?”

설마 본가에 보내지는 걸까? 내겐 안 좋은 기억밖에 없는 곳이다. 냉대 가득한 시선, 하찮다는 듯이 힐끔거리는 고용인들이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우리가 미친 짓에 휘말렸던 장소 역시 본가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누가 갑인지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노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흠칫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노엘이 내 손목을 그러쥐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선택은 네가 해.”

어떤 것이든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본가는 가고 싶지 않지만, 이곳에 혼자 남기는 두려웠다.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참지 못하고 또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 윽…….”

“유진, 가기 싫어? 그럼 지하실에 있으면 되겠네.”

“흐, 거, 거기도…….”

“그럼 도망가지 말았어야지. 네가 믿음을 준 적이 없어서 이러는 거잖아.”

“보, 본가에 가는 거예요?”

마른기침하며 노엘을 붙잡았다. 노엘은 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게 왠지 안달 나게 했다. 잠시 후 굳게 닫힌 입술이 고운 선을 그리며 달싹거렸다.

“왜? 본가 싫어?”

“네, 네에…… 지하실, 도 싫은데 본가는 더, 더 싫어요….”

노엘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애원뿐이라는 게 비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끅끅 울음을 겨우 삼켜내며 입술을 떼어냈다.

“도망 안 갈게요. 손목도 안 건드릴게요….”

노엘의 손목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본가는 싫다. 가고 싶지 않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노엘에게 얻어맞을 것 같아 끅끅 울음만 흘릴 뿐이다. 하지만 노엘은 시선을 마주치게 할 뿐이다.

“본가 가기 싫어?”

“흐으…네, 가, 가기 싫, 잘못했어요. 싫다고 해서 잘, 못했는데 본가는, 거기는…….”

“유진, 부탁할 땐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 벌써 잊어버렸나 봐.”

노엘이 고개 숙여 시선을 마주쳤다. 뺨을 만지는 손길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속삭이는 노엘이 무서웠다.

“키스해 봐. 네가 정말 가기 싫다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애절하게 빌어야지. 그게 부탁하는 자세잖아.”

피부 위로 차가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아났다. 빌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게 너무나 끔찍했다.

“싫어?”

안타깝다는 듯이 웃는 노엘이 두려웠다. 차라리 뺨을 갈기려고 손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끅끅 울음을 삼키며 시선을 회피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본가로 가는 수밖에. 외출시켜줄 겸 급한 일 좀 처리하려고 했는데 아쉽다. 그치?”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목소리다. 오히려 안달 나는 건 나다. 노엘 없이 본가로 보내진다면 나는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노엘이 없다면 나는 또 끔찍한 소리와 함께해야만 했다. 나밖에 듣지 못하는 끔찍한 그 목소리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필립한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본가로 가라고 해야겠네.”

나른한 목소리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에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내겐 선택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덜덜 떨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헛구역질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삼켜내며 노엘에게 다가갔다. 노엘은 웃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끔찍한, 아름다운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키스는 늘 기분 좋지 않다. 해도 해도 적응되지 않았다. 물기 젖은 살덩이뿐만 아니라 시선, 체온, 그 모든 것이 옭아 매어지는 게 두렵기만 했다. 노엘은 어느 순간 내 허리를 끌어당기며 끝없이 파고들었다. 순응해 버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보고 싶지 않다.

“흐읏…….”

미끈거리는 점막을 적시고 파고드는 혀는 탐식하고 싶은 갈증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틈을 가르고 들어온 혓줄기에 숨이 턱 막혔다. 욕망을 숨기지 못한 혀가 부드러이 쓸어내리며 자극했다.

혀뿌리를 잡아당길 것 같은 기세에 패배감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내 운명을 말해 주는 기분이다. 울컥하는 기분에 눈물이 차올랐다. 곧이어 츄읍, 하는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호텔 잡아뒀어. 본가에 갈 생각은 나도 없으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마.”

노엘은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다.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낑낑대던 내 모습이 생각나면서 자괴감이 밀려 들어왔다. 노엘이 떨어지자마자, 아까 먹었던 요구르트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욱욱거리며 상체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욱! 죄, 죄송해요.”

결국,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입술을 타고 목덜미며 티셔츠 언저리까지 모든 게 지저분해졌다. 노엘에게 얻어맞을까 봐 헐떡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구역질 올라오는 냄새에 또다시 토기가 올라오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 윽….”

“일어나.”

“제가 할게요. 빨리 치울 테니까…….”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번쩍 들려졌다. 다 큰 성인이 걷지도 못하고 누구의 품에 안겨진 게 수치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선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거부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노엘은 축 늘어진 내 몸뚱어리를 번쩍 들어서 욕실로 데리고 갔다. 욕조에 엉덩이가 닿기 무섭게 옷이 벗겨졌다. 나체 상태가 된 게 수치스러워 몸을 웅크렸다. 온갖 행위를 다 하는데도 여전히 눈 마주치는 건 힘들다. 아니, 싫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서슬 퍼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노엘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내 어깨를 거칠게 그러쥐어 힘을 주었다. 시선을 마주치라는 뜻이었다. 파르르 떨며 억지로 시린 눈동자를 올려봤다. 이상하게도 노엘은 화를 꾹꾹 참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 들어서 좀 쳐다봐. 씨발, 진짜.”

노엘이 수전을 틀어 욕조 안에 물을 채워 주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가만 바라봤다. 어느덧 무릎 위에 올라오던 물이 가슴까지 올라왔다.

노엘은 소매를 걷고 보디 워시를 꺼내 들었다. 부드러운 거품망이 등에 문질러졌다. 보디 워시 특유의 달달한 향이 느껴졌지만, 역시나 편안하지는 않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잉―.

그때, 밖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노엘이 손을 헹구고는 욕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지만, 겁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릴까 봐 괜히 물을 찰박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내 움직임에 따라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노엘의 통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네, 스크립트 전부 확인했습니다. 필요한 자료는 전부 제 비서에게 넘겼으니 그쪽으로 연락해 주세요.’

욕조 턱에 기대어 바깥에서 들리는 노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남들 앞에서 나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이었으면, 동생이라 부르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다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 늘어진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손목에는 여기저기 물어뜯은 잇자국이 있다. 노엘이 한 게 아닌, 나 스스로 한 짓이다. 붉게 남은 상흔을 홀린 듯이 내려다봤다. 보기만 해도 아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상처가 나을 때쯤이면 나는 괜찮아질까, 하는 멍청한 잡념이 머릿속을 채웠다.

“아프다…….”

괜히 손가락을 들어 상처 난 손목을 툭툭 건드렸다. 죽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게 한심스러워졌다. 멍하니 상처를 건드리며 욕조에 기대앉았다.

생각도 할 수 없는, 무료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이런 씨발, 개새끼가…….”

막 전화를 끊고 들어온 노엘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손목을 만지고 있던 게 오해를 산 모양이다.

“아윽!”

노엘은 핸드폰을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꾹꾹 누르던 성질을 토해내려는 건지 단단한 손아귀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당겼다. 두피가 뜯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개새끼가, 또 거짓말을 해?”

“아, 아니, 으윽…!”

짜악! 노엘의 손이 내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간만에 맞아서 그런지, 아니면 물에 젖어서 그런지 고통은 더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골이 울리면서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괴로워서 발버둥 치고 헛구역질을 해도 노엘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 흐…….”

“입 닥쳐, 이 개새끼야. 감히 또 네 몸에 손을 대려고 해?”

몇 대를 맞았는지 세는 것은 의미 없다. 눈을 뜨지 못하고 날아드는 손바닥을 받아내며 컥컥거렸다. 연달아 들이닥치는 손찌검에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욕조 속으로 버둥거렸다.

첨벙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지자, 코며 입이며 구멍이란 구멍에 물이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다. 캑캑대며 살고 싶다는 본능 하나로 욕조 턱을 붙잡았다.

“말해. 틈만 나면 이 지랄 하는 이유가 뭔지 말하라고.”

“자, 잘못해, 으으아, 안 죽, 어요…그냥, 그냥. 만진, 잘못, 했어요…….”

“씨발….”

물에 빠져서 그런지 귀가 멍하고 골이 울렸다. 노엘은 이런 나를 상관하지 않고 욕실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쿠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이 저릿하게 올라왔다. 허벅지며 허리며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

“잘못했, 어요. 잘못해, 서, 요, 아, 아니, 넣어, 주세요….”

잘못했다는 말 대신 넣어달라는 저급한 말을 하라는 명령이 떠올랐다. 그래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노엘의 발목을 붙잡으며 수치스러운 말로 사죄했다.

하도 얻어터져 떨림이 가시질 않았다. 덜덜 떨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내뱉었다. 아프기 싫다. 맞고 싶지 않다. 눈물을 쏟아내며 힘없는 손으로 노엘을 붙잡았다.

“그럴 의도 없었어도 잘못이야. 내가 만지지 말라고 했지?”

“네, 네. 자, 잘못했어요…….”

“조금만 안 봐줘도 이렇게 낑낑거리는데 어떻게 놓고 갈 수 있을까.”

헐떡이는 숨을 감추지 못하고 욕조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엘은 나를 용서한 모양인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씨발, 옷 다 버렸네.”

노엘은 미간을 구기며 거울을 한 번, 나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고는 팔을 교차해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떨어지는 천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한숨을 뱉을 때마다 목울대가 일렁였고 셔츠를 내던지는 팔의 움직임에 따라 근육들도 같이 움직였다. 저런 몸으로 때리니 아플 수밖에 없다.

“같이 씻은 적 없잖아.”

툭, 노엘이 입고 있던 바지와 드로즈마저 벗었다. 털 하나 없는 거대한 살 기둥이 눈에 들어오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흉기라고 해도 무방한 크기다. 덜컥 겁이 난 나머지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노엘은 나를 안아 들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부턴 손목 만지지도 마. 네가 자꾸 허튼짓하니까 안심할 수 없잖아.”

“흐…….”

노엘이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엉덩이 위로 느껴지는 성기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기 젖은 손은 천천히 내 살결을 따라 어루만져 주고 있다. 쪽, 하는 소리가 어깨에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내가 최근에 화낸 거 본 적 있어?”

“아, 아뇨…….”

“거봐. 말만 잘 들으면 화 안 내는데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치?”

“흐으…….”

“유진.”

“네. 잘못, 했, 어요. 흐윽…….”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가도 그리 비좁진 않지만, 노엘이 꽉 움켜쥔 탓에 벗어날 수 없었다. 하얀 손은 씻겨 주려는 의도가 아닌 다른 의도로 물들어지기 시작했다. 노엘의 손은 어느덧 내 유두를 지분거리며 허리로, 사타구니로 내려갔다. 내 허벅지를 벌려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 입술을 꽉 짓이겼다.

“가만히 있어.”

“흐읏…….”

“씻겨 주려고 그러는 거야. 잘못되게 하려는 게 아니라.”

“흣, 씻기는 게 아닌, 것 같…… 흐.”

씻긴다는 말과 다르게 단단한 손은 내 성기를 움켜잡으며 살살 흔들어댔다. 느릿한 움직임에도 물은 그의 침식을 알려주듯이 찰박거렸다. 물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생경한 자극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자, 잠깐만요.”

물기 젖은 소리에 덜컥 겁이 나 뒤로 내뺐지만, 닿는 거라곤 노엘의 가슴팍이었다. 움직여봐도 하찮은 저항에 그칠 뿐이다. 노엘은 내 발목을 욕조 턱에 걸쳐 허벅지를 최대한 벌리게 하고는 계속해서 성기를 흔들어댔다.

“아, 흐…… 하, 하지 마세요. 이거 무, 무서워.”

“뭐가 무서운데?”

“빠질 것 같아서…….”

“내가 안아 주고 있잖아.”

노엘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성기를 흔드는 손이 점차 빨라지면서 이상한 기운은 발끝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 속이라 그런지 마냥 빠르게 움직일 순 없지만, 묵직하게 짓눌리는 압박감에 더운 숨이 탁 터져 나왔다.

“흐, 으…이상, 해….”

“거울 앞으로 갈까? 네 표정이 어떤지 보여주고 싶은데.”

“아. 아니, 흐…….”

이상해, 싫어, 무서워. 노엘의 손에서 생경한 감각이 느껴질수록 밀려오는 자괴감에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끅끅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어느덧 엉덩이에 닿은 노엘의 성기가 조금 더 단단해진 게 느껴졌다. 또다시 소름이 끼쳤다.

“시, 싫, 흐윽…….”

하지만 몸은 내 의지와 다르게 이상한 기분으로 물들여지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무섭기만 했다. 발버둥 치려고 했지만, 욕조 턱에 걸쳐진 발목은 멍청하게 흔들거리기만 했고 온몸이 벌건 색으로 달아오르는 생경한 느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정말 네 표정 안 궁금해?”

“아, 흣, 하, 하지…….”

노엘의 손에 흔들리는 내가 너무 싫다. 노엘은 내 성기를 움켜잡으며 귀두 끝을 엄지로 뭉근하게 문질러 주었다. 숨이 터져 나왔다. 울고 싶다. 자괴감이 들었다. 이 감각을 어떻게 해도 이겨낼 수 없어 고개를 틀어 닿는 대로 깨물어 버렸다.

“이렇게 해줘야 느끼는 거야?”

“흐, 아, 아니,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넣어 주…… 아흑!”

“뭐가 아냐,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데. 계속 물어.”

“흐, 으…….”

내 이가 닿은 곳은 노엘의 어깨다. 나지막한 음성에 화들짝 입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노엘이 바짝 끌어안은 바람에 떨어질 수 없었다.

“계속 물어, 입 떼지 마.”

“우윽….”

“앞으로 네 손목 뜯어대고 싶을 때마다 날 물면 되겠네. 그치? 너는 좆같은 기분 떨쳐낼 수 있고 나는 네 흔적 얻을 수 있고. 서로 좋잖아.”

하얀 손은 계속해서 내 성기를 자극해댔고 나는 그 움직임에 따라 허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이 싫다. 이상한 기분에 따라 흔들리는 내가 너무 싫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찰박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버티지 못하고 사정하고 말았다.

“이거 봐. 잘 울고 있는데 뭘 안 느낀다는 거야?”

“흐윽… 아, 아니에요, 제발, 제발…….”

맑았던 물속으로 탁한 액체가 가라앉는 게 훤히 보였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만 같다. 나로 인해 깨끗했던 물이 더럽혀졌다는 걸 깨닫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울 틈도 없다.

“뭐가 제발이야?”

“아, 아니. 그러니까…….”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여기서 멈추라고 하면 너무하잖아, 유진.”

“아흐…….”

노엘이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사정의 여운이 가시질 않은 터라 힘없이 휘청이기만 했다.

“혼자 넣어봐.”

“무, 무슨…….”

“왜? 싫어?”

덜덜 떨며 물속을 들여다봤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살 기둥에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흠칫거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노엘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하라는 듯이 내 뺨을 쓸어올리는데 벌써 숨이 막혔다.

“그럼 본가 아니면 지하실로 가면 되겠네.”

“노엘, 제발…….”

“싫으면 해.”

노엘의 성기를 스스로 밀어 넣어보라는 뜻이다. 한입에 넣기도 힘든 거대한 것을 집어넣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동안 느끼지 못한 고통이 아래를 침범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구멍에 넣어달라고 했잖아. 네 입으로 직접.”

“흐윽, 그건…….”

“그럼, 본가에 보내줘?”

“싫, 싫…… 죄송해요.”

“싫으면 빨리 앉아.”

나에게 있어서 넣어달라는 의미는 사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노엘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알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없으니까.

“하나.”

“흐읍…….”

“둘.”

두려운 협박이 이어졌다. 노엘은 한다면 정말 하는 사람이다. 내겐 선택권이라는 게 없다. 덜덜 떨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노엘의 허벅지 위에 자리 잡았다. 허리가 굽혀질수록 엉덩이 끝에 성기가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아나서, 얼른 앞으로 도망치듯 몸을 내뺐다.

“지, 진짜 못 하겠어요. 다른 거, 다른 거 할. 아악!”

“개새끼, 귀찮게 하는 건 알아줘야 해.”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노엘은 내 손목을 끌어당겨 앉은 상태에서 성기를 삽입하게 했다.

첨벙거리는 거친 물소리와 함께 욕조 물이 넘쳤다. 내 안으로 노엘의 성기가 침범했고 잠깐이나마 잊었던 고통이 하반신을 타고 올라왔다.

“아, 아윽…….”

앉은 탓에 거대한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한계를 모른다는 듯이 계속해서 차고 들어오는 성기 탓에 접합부가 찢어지다 못해 갈라지는 통증을 동반했다.

선혈이 물속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뱃가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살 기둥의 인영을 따라 불룩해진 게 보였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 흐. 그, 그만. 천…… 아흑!”

노엘이 성기를 빼지 않은 채 나를 돌려세웠다. 철벅, 철벅. 물소리가 들리면서 한순간에 시선이 맞닿았다. 노엘은 웃고 있다. 타들어 가는 아래에 고통스러워 눈을 질끈 감아도 허리를 움켜쥐면서 제 욕망을 채우려고 퍽퍽 박아대기 일쑤다.

“아파?”

노엘이 허리 짓을 멈추고 내 뺨을 쓸어 만졌다. 하반신이 쪼개지는 통증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지만, 방금 뺨을 맞은 게 생각나서 세차게 고개만 저었다.

“아, 아뇨. 안 아프, 흐읍…….”

안 아프다는 말에 노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에서 위로 쑤셔대기 바빴다. 물 속이라 노엘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빠를 순 없었지만, 나를 괴롭히는 데는 충분했다.

“아, 흐…….”

“나 쳐다보라고 했지.”

노엘이 내 성기를 움켜쥐며 아프지 않을 만큼 힘을 주었다. 그 탓에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젖혔다. 물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결국, 통증을 참지 못하고 노엘의 어깨 위에 고개를 파묻고 이를 세우며 헐떡거렸다. 하지만 노엘은 멈추지 않았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사람은 아니다.

“존나 불편하네. 여기 짚어봐.”

노엘은 나를 번쩍 안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성기는 내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다.

“흐, 으….”

억지로 엎드려진 탓에 욕조 턱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상체만 숙이고 엉덩이만 번쩍 들린 수치스러운 자세에도 고통 때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타액을 뚝뚝 흘리며 헐떡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엘의 추삽질이 이어졌다.

“아, 으. 아, 그, 천, 천천히…… 흐으.”

뱃가죽에 들락날락하는 성기의 인영이 보이자 겁이 나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이제 곧 한계라는 듯이 무너질 기세로 힘이 풀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엘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빨라졌다. 흉포한 살 기둥이 내벽 안을 헤집었다. 퍽, 퍽. 더는 물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고통은 떠나가질 않았다.

“숨, 수, 막, 흐읍…….”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다. 내 안으로 침범한 살덩이는 비좁은 틈 하나 주지 않고 내벽을 찢어놓을 기세로 침범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헐떡거리며 노엘의 손목을 붙잡는 것뿐이다.

허벅지끼리 부딪치는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하반신이 부서지는 고통은 계속해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흔적 남겨. 알았지?”

“아윽…!”

“죄송하다는 좆같은 말보다 훨씬 듣기 좋으니까.”

더는 욕조를 붙들 힘도 없다. 손에 힘이 빠져 상체가 휘청거렸다. 노엘은 내 고개를 욕조 턱에 얹히게 하고는 엉덩이만 달랑 들린 자세로 추삽질을 해댔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노엘의 손등을 물었다. 고통이 이어질수록 이에 힘을 주었다.

“흐, 으…….”

이렇게라도 하면 노엘이 내 아픔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노엘은 내 골반을 부여잡고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를 높일 뿐이다. 점점 속도가 빨라지니, 견디지 못한 고통은 한층 더 깊어졌다.

“잘했어, 내 개새끼.”

노엘이 내게 입을 맞추면서 사정했다. 내벽 밖으로 멀건 정액이 사타구니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아득해진 정신을 그대로 놓아버리고 말았다. 오늘 하루는 여기서 끝나겠구나 하는 불우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노엘이 보이지 않았다. 손목을 휘감은 수갑도, 목을 통제하는 목줄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커튼도 전부 걷어져 있다. 게다가 평소에는 티셔츠 한 장만 입혀놨는데 바지까지 입혀져 있다.

“노엘, 어디…….”

혼자 남겨졌다. 또 이상한 환청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도망가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 얻어맞아도 상관없다.

나 스스로 노엘을 찾는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찾을 수밖에 없다. 눈물이 핑 돈 채로 부엌이며 거실을 돌아다녔다.

띵동―!

띵동, 띵동―!

타이밍 좋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노엘이 사라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는 환청이 너무나 야속했다.

제발, 제발 그만. 아무리 애원해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는 가시질 않았다. 숨이 막혀왔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저 바닥을 뒹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시, 싫어. 그만, 그만해. 그만해, 제발!”

악을 질렀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현실과 환상이 괴롭히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손목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이 찾아왔다. 바르르 떨며 구석으로 기어가려던 찰나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

환청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덜덜 떨며 거실 쪽 창문을 쳐다봤다. 그러자 현관문 앞에 서 있는 필립이 보였다. 그제야 어제 노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필립한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본가로 가라고 해야겠네.’

그제야 떨림이 조금씩 멎어갔다. 내가 듣는 게 환청이 아니라는 안도감에 막혔던 호흡이 터져 나왔다. 띵동, 또다시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지금까지 뭐 하다가,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철컥, 문을 열자 기다리는 게 짜증 났는지 미간을 좁히는 필립이 서 있었다. 필립의 손에는 트렁크 하나가 들려 있다.

“흐으… 아,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필립은 작게 숨을 뱉으며 내 모습을 관찰하듯 쳐다봤다. 괜히 수치스럽고 나 자신이 더더욱 멍청해진 것만 같다. 비집어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뚝, 뚝. 서러운 눈물이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어, 노엘한테 무슨 말 못 들었나요? 오늘 일정 얘기했다고 전해 들었는데요.”

“노, 노엘은 어디 갔어요?”

생각보다 목소리가 먼저 튀어 나갔다. 내가 노엘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느껴지면서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일정이 있어서 먼저 출발했어요. 우리는 나중에 따라오라고 지시받았어요.”

“흐윽…….”

“유진, 내가 혹시 뭘 잘못했나요? 그렇다면 사과할게요. 일단은 차에 타세요. 가면서 얘기합시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나를 망가뜨린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필립에게 붙들려 차에 올라타는 순간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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