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4)

09.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이자 불행이다.

노엘은 나를 태워다 주고는 곧장 캠퍼스 밖으로 빠져나갔다. 까만 차가 캠퍼스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섰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커터칼을 빼내고 나머지는 전부 버려 버렸다.

‘그래도 얘기 들어줄 사람 필요하면 나한테 전화해. 찾아와도 상관없어. 물론, 근무 중엔 받을 수 없겠지만.’

그때, 내게 위로를 건네주던 제이가 떠올랐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버렸던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악취가 풍겨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개의치 않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제이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가 툭 하고 떨어졌다.

“큭큭, 쟤 진짜 미친 거 맞나봐.”

“웃음이 나와? 난 소름 끼친다고. 지난번에 복도에서 봤는데 혼자서…….”

지나가던 백인 무리가 킥킥대며 수군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쪽지를 주운 다음 건물 밖으로 나갔다. 강의 시간이 시작되었으나, 돌아가지 않았다. 한 손에는 커터칼을, 또 다른 손에는 여권을 꽉 움켜쥔 채 학교 밖을 벗어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니, 어디서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예거의 죽음을 마주쳤던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땅하게 생각나는 장소는 거기가 전부였다.

집, 학교, 집 학교. 온통 노엘이 지정해준 대로 살아갔으니 시야가 좁은 건 당연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절뚝거리는 발로 겨우 공원에 도착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무래도 흉흉한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어댔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자판기 옆에 붙어 있는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전화기 옆에는 동전 몇 개가 놓여 있다. 그게 꼭 선물처럼 느껴졌다.

“……생일 선물인가.”

아무 생각 없이 동전을 집어넣었다. 연락처에 적힌 번호를 꾹꾹 눌러, 신호가 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제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 음성만 들릴 뿐 제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인사는 하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정말 끝낼 시간이다. 망설임 없이 공중화장실로 들어갔다. 철컥, 개인 칸에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변기 뚜껑을 내려 그 위에 앉았다. 손목을 걷어내며 허여멀건 살갗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흐…….”

여권과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살갗 위로 커터칼을 갖다 대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망설임 없이 찔러 넣을 장면을 예상했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니 덜컥 겁이 났다.

“아냐, 난 돌, 아가고 싶지, 않…아….”

부정하듯이 툭 불거진 핏줄 위로 칼날을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갗을 조금씩 파고들 때, 무언가가 심장을 조여대며 터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맴돌던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쿵쿵 뛰어대던 심장은 다급한 외침을 하듯 펌프질을 해댔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지독하게 붉은 핏방울이 살갗 위로 흘러내렸다.

“우욱!”

피를 보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즉시 변기 뚜껑을 열어서 구역질해 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터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누런 위액을 뚝뚝 뱉어냈다.

“흐, 윽….”

하지만 이대로 실패하고 싶지 않다. 다시 노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는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목을 졸라댔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의식조차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살려달라고 발악하듯이 구역질이 올라왔고 노란 위액만 줄줄 새어 나왔다.

“흐으…… 김유진 이 등신, 멍청한 자식… 왜 못 해, 왜…왜 못하냐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뜯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벽에 머리를 여러 번 박아댔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이듯이 선명한 고통만 되돌아왔다.

제발 죽게 해주세요, 제발 그만 살게 해주세요, 더는 살고 싶지 않, 아니, 살고 싶어요. 아프지 않고 싶어요. 누구에게 비는 건지 모르겠지만 속으로 빌어대며 엉엉 울음만 터트렸다. 역시 나는 쓸모없는 개새끼다. 내 이야기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지 못하는 개새끼.

쾅, 쾅쾅!

한참 훌쩍거리던 때, 내가 있는 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죽지도 못하면서 요란을 떨어댔으니 눈에 띄는 게 당연했다. 죄인처럼 허겁지겁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유진.”

“무, 무슨…….”

문을 열자, 거짓말처럼 제이가 서 있었다. 분명 연락을 못 했는데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거지? 나를 따라오기라도 한 걸까? 노엘이 시켜서 날 감시라도 한 걸까?

심장이 저릴 정도로 미친 듯이 뛰어댔다. 하지만 제이는 묵묵히 내 앞으로 빨간 사탕을 내밀 뿐이다.

“말했잖아, 위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옆에 있어 주겠다고.”

“제이, 난…….”

눈물 가득 고인 눈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제이가 아닌 세면대에 붙은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 아무도 없다.

분명 내 앞에는 제이가 있는데,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은 제이가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거울 속에는 허공을 붙잡는 내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쿵, 가슴 위로 무거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이가 준 사탕에선 왜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를.

“아, 아니, 아니, 야. 아니, 아니… 흐으, 아니…….”

“괜찮아?”

“그, 그만, 흐…….”

“괜찮아?”

“제발 이러지, 흐읍, 싫…….”

“괜찮아?”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들려줬구나. 머리를 감싸 쥐며 울음을 토해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 앞에 있는 제이의 모습이 흐려졌다. 쾅! 쾅쾅!! 쾅쾅, 띵동, 띵동, 띵동. 저릿한 두통이 느껴지면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초인종 벨이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그, 그만, 그만… 제발…….”

제이의 모습이 다시 또렷해졌다.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르는 환청이 사라졌다.

“말했잖아. 위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잖아. 위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잖아. 위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옆에 있어 주겠다고.”

“아흐흑… 제발, 제발…….”

환청이 사라지면 기계처럼 읊조리는 제이가 나타났다. 싫어, 제발 그만해. 제발. 더는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도 악몽 같은 환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흐으, 윽……”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뛰어갔다. 아니, 거의 기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다. 쓸모없는 발목에 절망감이 줄줄이 매달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어, 흐읏…….”

나는 생각보다 지독하게 망가졌다. 더는 서 있을 힘도 없다. 어디까지 무너져야 할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육교 계단 중간까지 올라와 있었다.

“어, 어떡해. 나, 나 이제… 흐으…….”

끅끅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 삼키며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되지 않아 두려웠다. 그때,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흑…….”

가까워지는 발소리마저 환청 같다. 두려웠다. 내가 어디까지 미쳐 버린 건지,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 머리를 쥐어뜯고 덜덜 떨어댔다. 쾅, 쾅쾅! 또다시 어디선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노엘이 떠올랐다.

빌어먹게도, 노엘이 곁에 있으면 환청이 멎는 저주가 떠올랐다.

“흐… 노엘…….”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눈 질끈 감으며 노엘의 이름을 불렀다. 터벅, 터벅, 터벅. 노엘이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환청 같은 발걸음 소리는 또렷해졌다. 이윽고, 걸음 소리가 등 뒤에서 멈춰졌다.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커다란 손 두 개가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더니 나를 계단 아래로 밀었다.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악!”

허공으로 몸이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퍽,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다. 내 몸뚱어리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수록 온몸의 세포는 불안하게 요동치며 살려달라는 듯이 발악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마 위로 찢어질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흐으….”

의식이 멀어져갔다. 필사적으로 나를 밀어낸 손을 좇아 시선을 올려다봤다. 범인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손의 주인이 실재하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손의 주인이 누군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가, 제이, 예거의 얼굴까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윽…….”

그리고 노엘의 얼굴로 변해 버렸다. 낯선 남자, 제이, 예거, 노엘. 나를 밀어낸 정체가 무엇인지, 환상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봤던 마지막 얼굴은 노엘이었다. 나는 그렇게 밀려오는 어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 * *

“아, 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병원이었다. 의식이 돌아오자, 온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손목에는 내 이름이 영어로 적힌 띠가 걸려 있다. 덜덜 떨며 몸을 일으켰다. 선명한 고통이 몸을 덮친 걸 보니, 환상은 아닌 모양이다.

“마, 말도 안, 흐윽…….”

내가 살아 있는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느껴지면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생각에 충동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있는 힘껏 잡아당긴 탓인지 손등에 꽂힌 수액 바늘이 흔들렸다. 숨이 막혔다. 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봐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흐…….”

이때, 지나가던 간호사가 나를 붙잡아 제지 시켰다. 낯선 손길이 피부에 닿았다. 그 온기에 안심이 되면서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환상이 아니었으니까.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구분되지 않았다.

“내 말 알아듣겠어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자 간호사는 내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살펴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주머니에 쪽지가 있던데 연락처 두 개가 적혀 있더라고요. 노엘 웨스틴이 그쪽 보호자가 맞나요?”

노엘의 이름에 경련 일으키듯 몸이 떨렸다. 싫다고, 제발 그 사람을 내 앞으로 데려오지 말라고 대답 대신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보호자가 대기실에서 있……. 환자분, 정신 차려요. 담당 의사도 곧 올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으, 윽….”

나를 민 사람이 노엘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은 노엘이었다. 환각마저도 두려웠다. 노엘의 이름만 들어도 떨림이 멎지 않고 귀가 먹먹해졌다. 나를 보며 뭐라 말하는 간호사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것처럼 굴더니 죽지도 못하고 여기 누워 있는 거 봐. 멍청한 새끼.’

‘근데 좋아할 게 아니잖아. 노엘 웨스틴이 진료비를 내줄 텐데. 뭐야, 그럼 구멍 벌린 값으로 사는 거네?’

‘더러운 새끼.’

‘형이랑 몸 섞는 게 그렇게 좋은가?’

‘진짜? 몸 팔은 돈으로 살아남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큭큭.’

큭큭 대며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주변을 돌아봤다. 내 앞에 있는 간호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뭔가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조롱하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간호사를 밀어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맞아. 병원비는 노엘이 내줄 건데. 그럼 나는 노엘의 돈으로 치료받는 거잖아. 몸 팔아서 번 돈이라는 말에 숨이 막혀왔다. 손등에 꽂힌 바늘을 보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환자분!”

“우윽….”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링거 바늘을 뽑아버렸다. 기다란 바늘이 뽑혀 나가는 순간, 숨이 막혀와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칠게 빼낸 탓에 바닥 아래로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

“환자분, 자꾸 이러시면 안 돼요.”

“치, 치료 안 받을… 래요. 싫, 아니, 싫다고 해서 죄, 흐으. 죄송, 해요…. 안, 잘, 잘못, 했, 잘못했…….”

간호사가 다가오자, 두려움은 배로 커지고 메스꺼움은 더더욱 짙어졌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내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밀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스르륵, 자동문이 열렸다. ‘대기실’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흐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출입문이 코앞에 있다. 서둘러 움직여 보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아윽…!”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의료진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죽여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다.

덜덜 떨며 구석에 들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더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애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마에 닿은 팔뚝에서 까슬한 거즈 감촉이 느껴졌다.

“미치겠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애스터, 뭐해요? 얼른 붙잡지 않고?”

“시, 싫…….”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이마가 찢긴 모양이다. 이것도 노엘의 돈으로 치료받을 게 분명했다. 이마에 들러붙은 거즈를 뜯어내려던 찰나 싸늘한 목소리가 대기실 안에 울려 펴졌다.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머릴 굴릴 필요도 없다. 차라리 심장이 멎었으면 하는 냉기는 환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또렷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엘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그 순간, 나를 괴롭히던 환청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알던 노엘이 아니다. 남이 있을 때만큼은 다정한 형의 흉내를 냈는데 지금은 달랐다. 나를 쳐다보던 차가운 눈빛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그 눈이 두려웠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나를 옭아매는 덫과 같다. 지옥에서 내보내지 않겠다는 지독한 덫.

“흐… 아, 아파…. 수, 숨 막혀…….”

노엘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짙은 그림자가 머리 위에 내려앉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전히 시린 시선은 떨어져 나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작게 내뱉던 노엘은 내 앞으로 하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유진.”

“흐, 으…….”

“어서.”

단정한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등에 맞닿은 차가운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앞으로 다가온 하얀 손에 시선이 갔다. 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면서 시야가 핑글 돌아갔다.

‘예거 넬슨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뭔지 알려줄까?’

‘우윽….’

‘그 새끼가 여기 오기로 했는데.’

예거를 죽였던 손이다. 예거를 죽이고 나를 나락으로 밀어 버린 손이다. 왜 잊고 있었을까. 왜 순응하면서 살았던 걸까. 덜덜 떨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일으켜주기 전에 일어나.”

“흐. 나, 나는, 난…….”

그때,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봤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봤던 노엘의 얼굴. 그 얼굴은 다음엔 환각이 아니라,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주, 죽여, 줘. 차, 차라리, 그냥 주, 죽여 주, 흐윽…… 이제 그만, 그만하고 싶, 흐윽…….”

허벅지를 타고 소변이 뚝뚝 흘러내렸다. 남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실수를 했다는 사실보다 노엘의 눈빛이 두려웠다. 맞을 거야. 아니,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공포심에 견디지 못하고 노엘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싫, 아, 아니, 죄송, 해요…. 제, 제발 저, 때리지, 말, 흐윽…….”

빌고 또 빌었다. 우리 곁으로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도 개의치 않고 애원하기만 했다. 노엘 역시 옆에서 무어라 떠들어대는 의사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떻게 죽일까, 얼만큼의 고통을 줘야 하나 계산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아직 용서를 받지 못했다. 그때, 내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잘못했다는 말 대신 넣어달라고 빌어 봐.’

그래, 그 말을 안 해서 용서받지 못하는 걸 거야. 주변에 몇몇 의료진들이 서 있었지만, 집에 돌아가면 죽도록 얻어맞을 것만 신경 쓰였다. 벌벌 떠는 손으로 단추 하나를 붙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주, 죽고 싶지 않…흐으…… 싫, 아니, 죄, 죄송, 해요. 잘못, 했어요. 넣, 넣어 주, 흐읍…!”

“보호자님!”

그때, 문장을 완전히 뱉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며 잡아당겼다.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붙들린 손목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저릿한 고통에 힘없이 휘청거렸다. 의료진들이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얻어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개새끼가….”

남들 앞에서 욕 한 번 하지 않았던 노엘이다. 철저하게 가면을 써 나를 이상하게 만들기 바빴던 노엘이 이 자리에서 본 모습을 드러냈다. 노엘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욕설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때, 때리지, 마세… 흐윽…….”

나를 내려다보던 자비 없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아직 노엘에게서 어떤 답변도 듣지 못했으니까. 그저 바짓단을 움켜쥐며 살려달라고,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기만 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계속되는 정적이 이어졌다.

“하, 하지 마세요. 제발…….”

떨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의료진을 밀치고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던 찰나, 노엘은 제가 입던 코트를 내 머리 위로 덮어주며 일으켜 세웠다. 닿은 온기가 두려워 뒷걸음질 쳐봤지만, 속절없이 두려운 손아귀에 끌려가고 말았다.

“보, 보호자님도 진정하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어요.”

코트에 얼굴이 덮여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이 가려진 채로 덜덜 떨며 붙들리고 있을 뿐이다. 나를 붙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치우라고 발악하지 못하고 노엘과 의사의 대화만 들었다.

“어디서 데려온 건가요?”

“그레이슨 공원 옆에 있는 육교 아래에서 쓰러진 걸 누군가 발견했습니다.”

“…공원이요?”

“네.”

어깨를 움켜쥔 손에 또 한 번 힘이 들어갔다. 내 계획, 생각 전부 들킨 것 같아서 점점 더 두려워졌다.

“이마는 크게 찢어진 게 아니지만, 최대한 흉터 남지 않게 잘 봉합했습니다.”

“…….”

“녹는 실이니까 재방문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영양결핍 증상이 보여서 수액을 넣어드리려고 했지만, 보시다시피 환자분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수액만 맞으면 되는 건가요?”

아주 미약하게 움찔거렸을 뿐인데 노엘은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가슴이 옥죄는 기분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치료받고 싶지 않다. 더러운 돈으로 살아남았다고 조롱하던 목소리들이 떠올라 숨이 막혔다.

“네, 일단은요. CT, X-ray 모두에서 뇌출혈 증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부어오른 곳이 많긴 하지만, 골절된 것도 없고요. 아, 근데 발목이…….”

“예전에 사고로 다친 거예요. 다른 특이사항은 없나요?”

발목에 관한 얘기를 빠르게 정돈하는 노엘이 무서웠다. 어찌 보면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붙들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던 노엘에게 붙들린 건 사고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일단은 혹시 모르니 지켜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떨고 있는데 별다른 증상이 없다는 말을 하시네요.”

“그게, 출혈도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어전트 케어로 가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노엘은 대답 대신 시린 시선으로 응시하기만 했다. 그 때문인지 복도에는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약물이 들어가서 일시적인 증상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내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받아들이기 버겁기만 했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시린 목소리에 의사는 입만 꾹 다물었다. 제일 무서운 건 노엘이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엘 웨스틴 씨? 어떻게 할까요.”

“수액만 맞으면 된다고 했죠?”

“네, 그렇긴 하지만…….”

“그럼 억지로라도 하세요. 지금처럼 발악하고 고꾸라지든 상관하지 마시고 묶어서라도 맞히세요.”

“네?”

“죽여달라는 게 아니라, 살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해달라는 말이에요.”

하나하나 씹어 뱉듯 말하는 모습에 의료진들은 우리를 보며 수군거렸다. 얼굴이 알려진 사업가가, 볼품없는 유학생을 싸고도는 게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시선을 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치료받고 싶지 않다. 노엘의 돈으로 치료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료진들은 나를 데리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놓, 아주, 숨, 숨 막, 흐으…….”

“환자분, 진정하세요.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의료진 여럿이 내게 달려들어, 붙잡은 팔뚝에 링거 바늘을 찔러 넣었다. 노엘이 내게 줬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통증이다. 그래도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쾅, 쾅, 쾅. 어디선가 계속해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들려오는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에 가슴팍이 짓눌려지는 느낌이었다.

“우윽…….”

이런 상황에서도 노엘이 필요한 나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노엘일까. 왜 하필 노엘 웨스틴일까. 몇 번 발버둥 치고 헛구역질을 반복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쾅, 쾅쾅. 띵동, 띵동.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소음들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 * *

다시 깨어났을 땐 익숙한 공간에 있었다. 노엘과 매일 같이 살을 맞대고 잠들었던 그 침대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매일 같이 내게 채워 졌던 목줄과 수갑은 바닥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흐…….”

창문이란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바깥이 어떤지 보이지도 않았다. 벽에 걸렸던 시계조차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문득 겁이 났다. 노엘이 없다. 그의 부재가 싫은 게 아니라, 두려웠다. 눈앞에 보이질 않으니 어떤 식으로 나를 괴롭힐지 가늠되지 않았다. 게다가 곧이어 들려올 환청을 생각하면 벌써 숨통이 졸리는 것 같았다.

“노, 노엘. 흐…우, 윽…….”

나 스스로 노엘을 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메스꺼운 느낌과 함께 속이 울렁거리면서 헛구역질로 이어졌다. 꺽꺽거려 봤자 나오는 거라곤 누런 위액이 섞인 타액이 전부다.

내가 싫다. 노엘을 거부하면서도 필요로 한다는 게 너무나 싫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손목을 물어뜯고 손톱으로 할퀴었다. 살갗 위로 생채기가 새겨졌다. 그래도 괴로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깨어났네.”

노엘이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트레이에는 멀건 수프와 오렌지색 액체가 담겨 있는 유리컵, 그리고 약봉지가 있다. 저 약이 무엇인지는 관심 없다. 왜 노엘 답지 않게 온화한 목소리로 부르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어?”

“흐, 흐윽…….”

“……화 안 낼 테니까 겁먹지 말고 말해.”

“거, 흐으…….”

거짓말이라고 습관처럼 튀어나올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노엘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 다른 사람 대하는 듯한 말투도 믿기지 않았지만, 내게 손찌검 하나 하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다.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노엘은 한숨 푹 쉬며 수프를 떠서 내 앞으로 숟가락을 내밀었다.

“먹어, 그래야 약 먹지.”

“나중에 먹으면 안, 흐으… 죄송해요, 근데 먹기가 너, 너무 힘, 들어서…….”

“……나중에 언제 먹게? 답답하게 굴지 말고 먹으라면 좀 먹, 이런 씨발.”

이때, 노엘이 내 손목을 내려다보고는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렸다. 화내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은 체감상 10분도 가지 않았다. 노엘은 내 손목을 들어 올렸다. 손목 위에는 물어뜯고 할퀸 상처가 여실하게 남아 있다.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이딴 짓을 한 거겠지. 누가 이러래. 씨발, 기껏 살려놨더니 죽고 싶어서 발악하네.”

“노, 노엘, 저는……. 제, 제가…….”

“어디서부터 설명할 거야?”

“흐윽…….”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노엘이 테이블 위로 수프 그릇을 집어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집어 던졌는지, 옆에 있던 컵이 기울어지면서 침대 시트까지 적셔버렸다.

차갑게 쏟아지는 물에 흠칫 몸을 떨어댔다. 안에 있는 내용물이 바닥까지 흘러내렸지만, 노엘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학교에서 30분이나 떨어진 공원에, 그것도 예거 넬슨이 죽었던 장소에 간 이유부터 말할 거야?”

“흐, 흐으… 자, 잘못했…….”

“그게 힘들면 네가 정신을 잃은 동안 내가 뭘 했는지 알려줄까?”

노엘이 내 손을 억세게 붙들고는 시선을 마주 보게 했다. 거친 손아귀가 상처에 짓눌리자, 비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나 노엘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필립에게 시키지도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지난 몇 주간 네가 돌아다녔던 모든 곳을 뒤져봤어.”

“수, 숨 막…….”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입 닥쳐, 이 빌어먹을 개새끼야.”

“우윽…!”

무어라 말하기 무섭게 입 안으로 알약이 쑤셔지면서 찬물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노엘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밀어내려고 하던 순간,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갑이 채워졌다. 더욱이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흐, 으…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는 행위는 키스가 아니다. 입맞춤으로 인해 호흡이 통제되는 것은 가학적인 폭력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 벌어진 틈 사이로 입에 퍼부어졌던 찬물이 목덜미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윽…….”

여전히 입 안에서는 알약이 맴돌았다. 피어싱이 박혔던 자리가 스치자 저릿한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노엘이 내 뒷머리를 잡아당겨 입을 더 벌리게 했다. 억 소리와 함께 숨이 들이쉬어 지자 알약이 넘어갔다.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좁아진 목구멍 사이로 통통한 알약이 들어오자,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우, 으…….”

“그러니까 잘해 줄 때 알아서 기었어야지.”

얼얼한 통증과 함께 노엘의 입술이 떨어졌지만, 내 머리채를 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허, 으…….”

“강의실에서 네 구멍에 박아 줬던 거 기억나지? 잊을 수 없을 거야. 가만 돌이켜보니까 그날 집으로 돌아갈 때 제이라는 이름을 불렀던 게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이 제이라는 새끼가 널 꼬아냈나. 이번에는 이 잔챙이를 처리할까, 싶었어.”

“아, 아니…. 나, 나는…….”

“근데 있지. 제이라는 수사관은 예거 사건 이후로 곧장 네바다주로 발령받았다고 하더라. 그날 이후, 너를 만난 적이 없다는 거지.”

“하, 하지 마아…. 그, 그만. 흐으, 그만해 주세…….”

“뭘 그만해?”

노엘이 내 허벅지를 억지로 붙잡아서 인정사정없이 훤히 벌렸다. 어느새 바지가 발목 아래까지 주욱 내려졌다. 고통스러운 행위에 덜컥 겁이 나면서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씨발, 너희 학교 소문까지 알아내야 할 줄은 몰랐는데.”

“그, 그만. 제발…….”

“널 유진이라는 이름 대신, 혼잣말하는 애로 아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가슴께가 짓눌리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보고 들었던 게 환상이라는 걸, 적어도 노엘의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았다.

밀려오는 비참함에 견딜 수 없었다.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수갑에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부옇게 가려진 시야 사이로 노엘의 얼굴이 들어왔다.

“개새끼가, 감히 이딴 식으로 사람을 좆같이 만들 줄이야.”

시퍼런 눈동자에 분노가 서려 있다.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눈빛이 틀림없이 흔들린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저 끅끅거리며 거친 침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면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

“아, 윽…….”

“너 때문에 미쳐 버렸으니까, 죄책감이라도 가지게 하고 싶었어?”

“흐, 흐윽…….”

“어쩌지, 난 태어나면서부터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게 뭔지 모르겠거든.”

허벅지를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하체 근육이 아플 정도로 당겨졌다. 또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오면서 고통스러운 기침만 연신 터져 나왔다. 노엘은 내 허벅지를 움켜쥐면서 비부까지 훤히 드러나게 벌렸다. 노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도 밀어낼 수 없는 이유는, 아무리 역겨워해도 그가 필요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순간이지만, 끔찍한 환청이 들리지 않았다.

“유진.”

“으, 으윽.”

“나를 경멸하고 증오해?”

“흐, 으…….”

“대답 못 하는 거면 맞나보네.”

“아윽…!”

그리고 곧이어 끔찍한 행위가 이어졌다. 바지 버클이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무런 예고 없이 거대한 성기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쑤셔졌다.

살이 강제로 벌어지고 찢어졌다. 홧홧한 통증이 온몸을 뒤덮으면서 폭력적인 행위가 이어졌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부딪히고 침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에 고통스러운 눈물만 뚝뚝 흘러내렸다.

“좋아하는 감정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해?”

“아, 흐… 제발, 그, 만 아니, 죄송해요. 그만…….”

“대답해.”

“아흑!”

노엘이 벌어진 내 허벅지를 꽉 붙잡으며 퍽 들이박았다. 아래가 찢어져야 만족하는 모양인지 흉포한 성기는 한계를 모른 채 내 안으로 침범했다.

두꺼운 귀두를 내벽 입구까지 빼내다가도 퍽 소리 나게 밀어버리는 행위가 이어졌다. 접합부를 드나드는 살덩이가 두려웠다. 쾌락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운 숨만 턱턱 터져 나왔다.

“시, 싫어, 하는, 흐윽… 아, 아파. 그만, 그만해 주세요…. 제발 넣, 흐으… 넣어 주, 흐윽…!”

‘넣어달라’는 말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노엘은 보란 듯이 내 안을 쑤시고 박아대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내 골반을 틀어잡을 뿐이다.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고통으로 이어지는 게 학습된 걸까. 접합부가 퉁퉁 붓고 너덜거리며 선혈이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저절로 입을 벙긋거리면서 헐떡이는 호흡을 내뱉었다. 하지만 노엘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사람이 아니다.

“틀렸어. 싫어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모두 감정이 담겨 있잖아. 그게 어떻게 반대라고 생각해?”

“흐, 읏…….”

“좋아한다는 말의 반대는 무관심이지. 그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아, 아프….”

고통에 절인 허리가 번쩍 들리면서 노엘의 추삽질도 빨라졌다. 퍽, 퍽,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는 계속해서 선명해졌다. 일부러 고통 섞인 신음에 맞춰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그럭거리는 수갑이 손목에 짓눌렸다. 살갗 위로 붉은 자국이 퉁퉁 부풀어 올랐다. 눈물이 툭 떨어지면서 내벽 밖으로 질척이는 정액이 새어 나왔다.

“유진, 너는 나를 증오하지.”

“아흐…!”

“두렵고, 경멸스러워하고 있어?”

노엘은 사정해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득하게 달라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침대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으윽…아, 흐으. 잘, 못…넣, 흐윽….”

“그렇다면 너도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유진.”

이성을 내려놓고 본능만 좇는 짐승 같은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툭, 눈물이 떨어지자 노엘은 허리를 붙든 손을 떼어내고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네가 날 두려워해도 괜찮아.”

“아, 흐윽!”

“죄책감을 안겨주려고 해도 아프지 않아, 상관없어.”

“제, 발, 그만…….”

“마음껏 저주해. 어떻게든 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달아나도 개의치 않아.”

노엘이 나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고 잠깐이라도 상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노엘은 내 목덜미에 이를 박고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아래에서 쑤셔대고 위에서 물어 뜯어대는 감각은 고통뿐이다. 눈물도 메말라 더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지금처럼 네가 봐주면 다 괜찮아지거든.”

“그, 흐으….”

“이게 내 방식이야. 너를, 내 감정에 담아두는 내 방식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적응해. 적응하는 것도 힘들면 체념해.”

또 한 번 질척이는 정액이 내벽 밖으로 새어 나왔다. 노엘의 허리 짓에 맞춰 허여멀건 한 액체가 허벅지며 여기저기 튀어 나갔다.

하지만 노엘은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았고 내게 입을 맞췄다.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엘의 표정이, 처음으로 절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고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물든 노엘의 눈을 뒤로 한 채 정신을 잃었다. 기절한 게 아니라 두려운 현실을 회피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 *

노엘은 오늘도 유진을 바라봤다.

“일어났어?”

하지만 유진은 오늘도 노엘을 바라보지 않았다.

“유진, 대답 좀 해.”

“……죄송해요.”

노엘이 몸을 웅크린 채로 가만히 눈만 뜬 유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유진은 흠칫거리며 시트만 움켜쥘 뿐이다. 죄송하다는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노엘은 속이 뒤집히다 못해 유진을 제멋대로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응급실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다.

‘주, 죽고 싶지 않…흐, 아니, 죄, 죄송, 해요. 잘못, 했어요…넣, 넣어 주, 흐읍…!’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다. 세뇌당한 사람처럼 바르르 떨어대는 유진을 보며 노엘은 무언가 어긋났다는 걸 깨달았다. 텅 빈 동공으로 저를 쳐다보며 죄송하다고 읊조리는 모습에 노엘은 가슴이 아릿거리는, 묘한 통증을 느꼈다. 어찌나 생경하던지 미간이 좁혀질 지경이었다.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일어났, 어요.”

하지만 노엘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는지 유진이 흠칫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노엘은 답답하다 못해 다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노엘 본인이니.

‘네가 뒷구멍 박아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나를, 씨발 감히 날…….’

‘아, 흐윽!’

‘동생한테 좆질해 버린 발정 난 새끼로 만들어 버렸잖아.’

노엘은 복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더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이복동생과 살을 섞은 발정 난 새끼가 됐다는 모멸감 하나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텅 빈 동공을 저 하나로 가득 채우고 싶은 욕심만 자리 잡았다. 정말이지, 좆같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흐…….”

“유진, 우유 데워 올 테니까 손목 뜯는 짓거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확실히 유진은 제 의도대로 망가지고 무너졌다. 하지만 노엘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만 또렷하게 잡힐 뿐이다. 원하지도 않은 화분에 잡히는 대로 물을 퍼부었으니 숨이 막힐 만했다.

그래서 노엘은 노선을 바꿔보기로 마음먹었다. 제 행동을 어느 정도 후회하긴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유진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더러운 성질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다정함을 보여 주려 애쓰는 건 이 때문이다.

“……러요?”

“뭐?”

“아, 아니, 에요. 죄송해요. 그냥 잘못, 말했, 흐읍…!”

하지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노엘의 다정함은 여기까지였다. 유진이 죄송하다는 말 외에 무엇을 말했는지가 우선이다. 노엘은 거친 손길로 유진의 손목을 붙잡아 제 품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말해.”

“흐…….”

“화 안 낼 테니까 말하라고 했지.”

“왜 그, 그렇게, 부르시는지… 무, 무서워서요.”

“뭐?”

“워, 원래는 개새끼라고 더 많이 불렀잖아요. 흐읍….”

특별하게 불러 줬는데도 싫다고 하는 유진이 답답했지만, 할 말이 없다. 모든 건 노엘 스스로가 저지른 일이다. 노엘은 제가 붙든 유진의 손목을 가만히 쳐다봤다.

“너 또…….”

또 유진의 손목에는 잇자국이 있다. 언젠가부터 유진은 저 스스로 상처 내는 일을 스스럼없이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손톱자국이 없는 건 노엘이 바짝 깎아 버린 덕분이다. 노엘은 길게 숨을 뱉으며 유진의 손목을 어루만지고는 서랍에서 밴드와 연고를 꺼내 들었다.

“……손목 안 깨물면 하루 종일 그림 그리게 해줄게.”

그제야 유진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노엘은 그 모습을 보고 거친 비속어를 내뱉을 뻔했지만, 꾹꾹 참기만 했다. 29년 살면서 이토록 성질 누르며 남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했던 적이 있던가.

텅 빈 동공에 겨우 빛이 스며든 것 같지만, 노엘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무언가에 밀린 기분이 들었으니까.

“잠깐 있어. 밥 가져올게.”

“노, 노엘…….”

노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다급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노엘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겨우 참으며 유진을 돌아봤다. 언제부턴가 유진은 노엘이 자리를 비우려고 할 때마다 흠칫거리며 이름을 불렀다. 심지어 밥을 가지러 가는 이 순간 조차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그 환청 때문인 게 분명했다. 유진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누가 옆에 있지 않으면 그러한 소리를 듣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노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유진을 쳐다봤다.

“왜?”

“지금 그림 그리면 안 돼요? 손목 안 만질게요.”

노엘은 가만히 유진의 시선을 응시했다. 유진은 키스해 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노엘에게는 입을 맞춰달라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이건 제 잘못이 아니다. 한 손에 잡히고 말랑거리는 유진의 잘못이라고, 노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흐읍!”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노엘은 유진의 목을 감싸 안으며 입술을 포개었다. 발갛게 물든 뺨이며 귓가며 어디 하나 만지지 않을 수 없다. 갑작스러운 입맞춤 탓에 유진이 가쁜 호흡을 뱉어내려 입술을 열었다.

“흐…….”

노엘은 파르르 떨어대는 입술 틈새로 혓줄기를 비집어 치열을 훑고 여린 살을 탐하듯이 빨아들였다. 짧은 신음이 터지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이 흘러내렸다. 노엘이 떨어지며 유진의 입술을 슬며시 닦아 주었다.

“손목 건드리지 말고 있어.”

쪽, 하는 짧은 입맞춤이 유진의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였다. 노엘은 유진을 더 쓰다듬어 주고 싶었으나 덜덜 떨어대는 어깨를 보니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싶어 침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기 전에 유진을 돌아봤다.

“흐윽… 죽기 싫어. 더, 럽지 않아. 가족, 아니, 흐으…….”

유진은 귀를 틀어막으며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노엘은 문을 닫을까 말까 잠깐이나마 고민을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목줄이나 족쇄 같은 걸 채우지 않아도 유진이 제 곁에 있는 이유는 저 환청 때문이다.

끼이익, 쾅. 문이 닫혔다. 노엘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유진의 혼잣말을 떠올렸다. 죽기 싫다고 겁에 질려 벌벌 떨어대는 모습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아.”

노엘은 작은 탄식을 뱉으면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필립과 나눴던 대화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도 제일 생각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유일한 구원이 된다면 더는 억지로 붙잡아둘 필요 없이 스스로 내 손 안에 들어오겠죠.’

지난 대화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노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유진이 가진 두려움을 모두 해결하고 제 품 속으로 서서히 들어올 방법이 생각났다. 노엘은 서둘러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진을 재우고 일할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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