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4)

너의 유진 3권

08. 맑은 하늘은 내가 절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새끼, 이리 와.”

내 이름은 김유진이 아닌 ‘개새끼’다. 허벅지까지 조금 내려오는 티셔츠 하나 겨우 걸치고 수치스러운 곳에 피어싱이 박혀 있는 모습은 내가 영락없는 ‘개새끼’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 이제는 아프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무뎌진 걸지도 모르겠다.

노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김유진이 아닌, 개새끼로 살아가는 방법은 쉬웠다. 시키는 대로 입을 맞추고 다리를 벌리면 그만이다.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면 되었다. 고통을 얻지 않는 방법은 복종뿐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느려 터져 가지곤.”

이리오라고 하던 노엘은 내 앞에 서 있었다. 하얀 얼굴이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뺨을 어루만지며 입가를 매만지는 모습은 꽤 즐거워 보였다. 조명에 비쳐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빌어먹게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유진, 대답 좀 해.”

노엘이라는 사람이 빛날수록 나는 한 없이 초라해졌다. 가슴께가 저릿거렸다. 무뎌진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아픔과 절망을 외면했다.

“……죄송해요.”

단순한 대답 대신 죄송하다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학습된 개새끼 같지만,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하얀 도화지가 아니라, 여기저기 짓밟히고 찢긴 더러운 종이나 마찬가지니까.

“오늘 시간표 말해 봐.”

노엘 역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들면 버려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유진.”

“의상 드로잉이랑 키아로스쿠로 수업 있어요.”

“키아로스쿠로? 그게 뭔데?”

“목탄으로 명암, 공부하는 건데요…….”

노엘의 이상한 질문은 오늘도 이어졌다. 왜 이런 질문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혓바닥에 박힌 피어싱이 잘 있나 검사라도 하려는 건가. 하지만 궁금할 필요는 없다.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복종하면 그만이니까.

“유진.”

노엘은 인내심이 바닥 쳤는지 조금만 입 다물고 있어도 미간을 찌푸렸다. 내 어깨를 붙든 손이 뺨으로 날아들기 전에 입을 열었다.

“목탄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어긋나고 종이에 뭉개지거든요. 심지어 스케치북에도 번질 때도 있고요.”

“그리고.”

“종이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져요.”

노엘이 내 팔을 들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겨 주었다. 걸친 거라고 해봤자 티셔츠 한 장이 전부다. 노골적인 시선이 유두에 닿았다. 신경 쓰였다. 혀에 박힌 피어싱 역시 거슬려서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리고.”

“……힘주는 만큼 종이에 나타나요. 연필도 마찬가지지만, 목탄은 그게 더 잘 보이니까 신경 쓸 게 많은 것 같아요.”

제대로 말하는 게 벅찼다. 노엘의 눈이 내 입가로 향하자, 수치심은 더해졌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나를 응시하는 파란 눈동자는 다시 한번 내 위치를 자각시켜 주었다.

“네가 사용하는 종류가 뭔데?”

“유탄이요.”

노엘은 어느 순간 내 뒤로 가서 벨트를 매주었다. 뒤에서 안긴 것 같은 자세다. 노엘의 턱이 어깨에 얹어졌고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훅 치고 들어오는 열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온몸이 빳빳해졌다. 맞고 싶지 않아서 주먹만 꾹 움켜쥐었다.

“설명을 멈추라고 한 적 없는데.”

따스한 체온이 천으로, 살갗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는 온기에 숨이 막혀, 가슴이 답답해졌다. 벗어나고 싶은 온기다. 노엘이 내게서 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벨트 클립을 닫았는데도 여전히 나를 옭아매는 하얀 손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유탄은 쉽게 그려지는데요. 그만큼 부러지기도 쉬워요. 조금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욕심부리면 어느샌가 부러져 있더라고요.”

“그걸 왜 목탄 탓을 해? 힘 조절을 못 한 네 잘못이지.”

마지막 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토록 흔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잘못이라는 한마디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이어서 삐이, 시끄러운 이명이 따라왔다. 내 잘못. 내 잘못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가슴이 조여왔고 눈앞이 캄캄하게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다 내 잘못이 맞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목탄에 힘을 준 것도 내 탓이고 노엘의 손길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가진 것 역시 내 잘못이다. 목이 메었다. 또다시 악몽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내 말이 틀려?”

대답을 하지 않자, 노엘은 내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어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나는 말 없이 노엘을 응시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걸어도 걸어도 빛이 보이지 않는 먹먹한 안개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순응할 수 없어 악 지르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맞아요, 제 잘못, 이에요.”

어쩌면 체념하고 살아가는 것 역시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포기하면 전부 다 괜찮을 거라 여겼다. 아픔에 무뎌지자고, 이게 내 운명이라 받아들이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끔찍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거리낌 없이 훤히 비출 만큼 평온했다. 꼭 눈물 흘리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유진, 고개 들어.”

그만할 때가 되었다. 부질없는 체념도, 나의 욕심도.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제 됐어, 아침 먹고 가.”

끝내야겠다고 결심하니 이제는 시린 눈동자마저 두렵지 않았다. 가만히 쳐다보니, 노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씨발 또.”

“……노엘, 오늘은 제가 아침 준비해도 될, 까요?”

“뭐?”

“죄송해요.”

개새끼가 감히 주인을 불렀으니 어이없을 만도 했다. 당장 손바닥이 날아올 거라 예상했지만, 평소처럼 크게 두렵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게 편해졌다. 노엘이 미간 좁히면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또 도망가려고?”

“아뇨, 도망 안 가요.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씨발, 그럼 그렇지.”

“죄송해요…….”

“뭔데.”

“ID 카드를 잃어버렸어요. 재발급해야 하는데 유학생들은 신분증이랑 보호자 연락처가 필요하대요.”

입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꽤나 침착했다. 충동적으로 마지막을 생각한 사람이 맞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즉흥적인 결심은 아니다. 나는 노엘을 만난 순간부터 하나둘씩 포기했다.

“여권이랑 노엘의 연락처가 필요해서요. 못 믿으시겠다면 사본만 주세요. 아, 아니다. 필립 번호도 필요할 것 같아요.”

노엘이나 제이 외에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했다. 혹여 연고지를 모르는 불쌍한 이방인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 신분증과 노엘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 노엘은 이런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그저 미간만 찌푸렸다. 괜히 내 계획을 들킨 것 같은 죄의식이 스쳐 지나갔다.

잘못한 게 없는데 죄의식을 느끼는 나도 우스웠다.

“개새끼가 뭘 할 줄 안다고.”

“저 과일은 잘 깎아요.”

감히 눈 마주치는 불상사를 저질렀지만, 노엘은 손찌검하지 않았다. 알아서 준비하라는 말만 하며 계단 위로 올라갈 뿐이다. 아무래도 여권을 가져오는 것 같다.

“우윽…….”

노엘이 위층에 올라간 동안, 냉장고를 열어 재꼈다. 냉기와 함께 살짝 맴도는 음식물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먹는 식사라고 생각하니 구역질도 무시하게 되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재료를 꺼내 들었다.

“더 맛있는 거 먹고 싶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희망 사항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한때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순간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던 시시콜콜한 시간마저 아리게 다가왔다.

멍한 머릿속으로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짚다 보니 어느새 음식이 준비되었다. 그래 봤자 사과를 깎고 계란 프라이를 올린 토스트가 전부다.

음식을 식탁으로 옮겼을 때, 타이밍에 맞춰 노엘이 내려왔다. 노엘의 손에는 메모지가 꽂힌 초록색 여권이 들려 있다. 주방에 있는 물기를 닦고 노엘에게 다가가 여권을 건네받았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도 어쩐지 이상했다. 죄송하다고 해야 했는데. 조금은 멋쩍게 느껴져 목덜미를 매만졌다. 노엘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구겨버렸다.

문득 노엘이 다른 사람처럼 대하듯이 내게도 다정하게 대해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괜히 서글픈 마음에 얼른 시선을 떼고 여권 속을 들여다봤다. 그러던 도중, 4월 14일이라는 숫자에 눈길이 갔다.

“아…….”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4월 14일은 오늘이자 내 생일이고 내가 마침표를 찍게 될 날이다. 점점 더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

“노엘.”

식탁으로 가려던 노엘을 붙잡았다. 개새끼가 먼저 불렀다는 게 역시 용납되지 않았는지 노엘의 미간이 선명히 구겨졌다.

“키스, 해드릴까요?”

“……뭐?”

“그냥 해드리고 싶어서요.”

죽으러 가는 마당에 뭘 못하겠나 싶다. 노엘을 가엽게 여겨서 입을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다. 노엘이 적어도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 절박함 때문이다. 아니, 죄책감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내 흔적을 떠올리며 괴로워했으면 싶다.

그래서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 주려고 했다.

노엘은 나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는 사람이다. 대답 대신 곧장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입을 맞추려고 하는 태도 역시 이 때문이다. 매끄러운 입술이 다가오려던 찰나,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노엘을 막아 내었다.

“근데 피어싱 빼주시면 해드릴게요.”

“이 개새끼가 지금 무슨,”

“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노엘이 멈칫하며 나를 쳐다봤다. 잘못 본 게 분명했다. 노엘은 내가 나락으로 떨어질수록 기뻐하는 사람이니까.

“혀에 있는 것만이라도 빼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마음에 안 드시면 학교 갔다 와서 다시 할게요.”

조금이라도 추하지 않게 눈을 감고 싶다. 노엘은 자기가 해준 것을 빼버린다는 이유로 짜증이 난 건지 냉랭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좆같은 소리만 하네. 입 벌려.”

개새끼가 선을 넘었는데도 단 한 번도 얻어맞지 않았다. 생일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그토록 매일 같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야 이루어지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입을 벌리자, 노엘의 손가락이 들어와 피어싱을 살살 돌려 빼주었다.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단단한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 스스로 노엘을 붙잡은 게 자괴감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마지막을 지켜봐야 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기도 바쁜 시간이다.

“흐…….”

피어싱이 떨어져 나가 혓바닥이 아려왔다. 나를 아무 감정 없이 쳐다보는 노엘을 천천히 올려다봤다.

부디 당신이 지금 이 순간으로 인해 평생을 악몽에 시달리길 바라는 의미였다. 곧이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노엘의 입술이 나를 덮쳐왔다.

더운 숨결이 나를 침식했다.

나의 불행은 당신이었고, 당신이라는 불행으로 마침표를 찍을지도 모르는 내 삶을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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