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4)

* * *

수업이 끝나자마자, 노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데리러 왔다. 목탄은 어떤 재질을 쓰느냐, 수채화 물감은 어디 브랜드를 쓰냐는 이상한 질문이 노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대화를 끝으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제이와 있었던 일만 생각났다. 속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만약 내가 노엘과 필립의 대화 내용을 말해 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허튼짓하지 말고 먹기나 해.”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노엘을 쳐다봤다. 여전히 집요한 시선이다.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움찔하면서 샐러드 조각을 찔렀다. 입에 넣기도 전에 또 헛구역질이 올라와 삼킬 수 없었다.

“……뭐야, 씨발.”

밥 먹는데 더러운 짓을 해서 그런 건지, 노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어느새 노엘의 손에 들린 포크는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뺨을 갈길 건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가오는 노엘을 외면했다. 그때, 노엘이 내 턱을 움켜쥐어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학교 헬스센터에 안 갔어? 씨발, 어떻게 된 게 신경 써주지 않으면 이따위야?”

“죄송, 해요.”

입 다물라고 해도 뜻처럼 되질 않았다. 계속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약을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노엘의 서재를 살펴보면 어떨까 하고. 자꾸만 눈앞에서 제이가 아른거렸다. 나를 위로해준 만큼 그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다. 마른기침만 콜록거리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저, 약 받아왔는데 그거 먹고 오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헛구역질해서 그런지,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노엘은 작게 숨을 뱉으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때릴 것 같아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내 입술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히기만 할 뿐이다. 어떻게 때릴지 간 보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약 어디 있는데.”

“아,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죄송해요. 그냥 밥 먹고 방에 가서 먹을게요.”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이 불안했다. 이쯤 되면 뺨을 쳐야 하는데 손바닥은커녕 냉랭한 시선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서 빨리 사과해야만 했다. 고개 숙이며 작게 웅얼거렸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 해요.”

울 것 같다. 혹시 이번에도 노엘이 내 생각을 읽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힐끗 쳐다보더니 짧게 숨을 뱉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기 몸 하나 관리 못 하는 게 뭘 하겠다고. 약 가지고 내려와. 밥 다 처먹기 전까지 그림 그릴 생각하지 말고.”

“……네.”

귀찮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을 힐끔 쳐다보다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갈수록 등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들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없다. 지금 나는 유일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계단을 다 올라가고 나서 아래층을 쳐다봤다. 노엘은 더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안도감에 짧게 숨을 뱉고는 침실이 아닌, 서재 쪽으로 발을 돌렸다.

바닥 위를 울리는 걸음 소리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금고를 열지 못하더라도 여기저기 뒤지면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작은 희망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고 살살 돌리자 두려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

실패하면 그만한 대가가 돌아왔다. 발목과 낙인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떨렸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어쩌면 이번에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달달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던 찰나, 쾅! 쾅쾅! 쾅쾅쾅! 현관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오늘도 잘못 찾아온 사람일까.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서재 문을 닫았다.

지난번 도망칠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공간이다. 특이하게도 책 냄새가 아닌 머스크 향이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물건은 없다. 제일 먼저 책상을 살폈다. 위에는 새것처럼 보이는 상자가 있었다.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몹쓸 호기심이 이성을 이기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고 그 안에는 피어싱 세 개와 날카로운 바늘이 들어있다. 피어싱에 달린 보석은 얼핏 봐도 값비싼 것 같다. 나랑 상관없는 물건이라 그대로 내려놓았다.

“장갑…….”

분명 노엘이 그랬다. ‘그날’ 꼈던 장갑을 금고 안에 넣어 놓았다고. 장갑이 왜 중요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 사건을 설명하는 증거 중 하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금고 앞으로 다가갔다. 온통 새까만 외형이 쉽게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 주는 것 같다.

비밀번호가 뭔지 몰라 열어볼 수 없다. 그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는 게 전부였다. 아무래도 제이에게 의논해봐야 할 듯싶다. 가방 속에 제이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집어넣었던 게 생각났다. 노엘이 의심하기 전에 슬슬 돌아가야만 했다. 작게 숨을 뱉으며 돌아서던 그때,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약 가지고 내려오라고 했지, 여기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소름 끼치도록 나른한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 그게…….”

뭐라 변명하지도 못한 채 뒷걸음질만 쳤다. 문 앞에 기대있던 노엘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만 하다 노엘의 손에 목덜미가 붙들렸다.

“켁…!”

“이 개새끼가 감히, 또 나를 속여?”

“그, 그게 자, 잘못했, 윽…!”

짜악! 짝! 연달아 뺨이 돌아갔다. 노엘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내 뺨을 후려쳤다. 너무 아파서 캑캑 마른기침을 토해내도 소용없다. 내게 손찌검을 하던 노엘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금고 벽에 들이박았다.

이마며 광대뼈며 콧대며 얼얼하지 않은 곳이 없다. 코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선혈이 티셔츠에 뚝뚝 떨어졌다. 고통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컥컥거리기만 했다.

“씨발, 아프다고 해서 손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개새끼야, 이번엔 또 뭐. 어디까지 도망갈 건데?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네가 씨발, 또 어딜 도망가려고?”

“으윽…!”

“왜? 또 누가 꼬드겼어?”

“아, 아니. 제발, 으윽…….”

말로 할 수 없는 통증에 휘청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노엘이 내 머리채를 움켜잡고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볼품없는 내 모습을 담은 눈동자는 명백하게 흔들리고 있다. 노엘은 분노하고 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다.

“어디 한 번 계속 도망쳐봐. 숨어버리는 족족히 찾아줄 테니까.”

“아흐… 제, 발 자, 잘못했, 제발…….”

머리가 울리면서 나를 옭아매는 노엘이 하나로 보였다가 여러 명으로 보이길 반복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천천히 손바닥을 드는 노엘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깐이라도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내 잘못이다.

“노엘이 그 남자한테… 흐읍, 총을 줬다고 했, 잖아요…….”

“뭐?”

“그래서, 그래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얼마나 많은 고통이 가해질지 알면서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안 돼, 그만해. 제발, 여기서 멈춰. 노엘이 아닌 나 자신에게 빌었다.

하지만 추한 울음만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한마디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지우개처럼 뭉개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금고를 뒤지려고 했어?”

“흐…….”

“거짓말, 내 개새끼는 왜 솔직하지 못할까. 의심하고 있잖아. 근데 어떻게 의심하고 있었어? 개새끼 생각 좀 듣고 싶은데.”

노엘의 손바닥이 서서히 내려가면서 시야가 또렷해졌다. 나를 보고 있는 노엘은 여전히 덤덤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기색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디까지 들었어, 응?”

“아, 윽…!”

내 머리채를 움켜쥔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나는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엘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끼릭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고 다이얼이 돌아갔다.

“필립이 있을 동안 지하실에 처박아놓을 걸 그랬나.”

“윽…….”

덜컹, 금고문이 열렸다. 머리카락이 뜯어질 것 같은 고통에 안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빼곡히 채워진 현금 앞으로 총과 장갑이 들어있는 게 보였다.

노엘은 내 머리를 금고 안으로 쑤셔 버리고는 있는 힘껏 비틀어 콱콱 눌러댔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자, 그제야 내 목덜미를 잡아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어?”

“켁…….”

“말 안 해? 그래야 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있잖아, 유진.”

“커억!”

“우리 개새끼는 거친 걸 좋아하니까, 거칠게 대해 줘야 대답하려나.”

노엘이 내 머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면서 입이 벌어졌다.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입 안으로 총기가 쑤셔졌다. 단단하고 끔찍한 물체가 혀를 꾹 누르며 목구멍을 향했다.

숨이 쉬어지질 않아 헛구역질해 댔지만, 노엘의 손에 들린 총기는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호흡을 할 수 없는 것은 나중 문제다. 목구멍으로 들어온 총기가 나를 위협한다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얽히고설켜서 정신을 갉아먹었다.

캑캑거리며 노엘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자 노엘은 입꼬리를 올리며 총을 빼어냈다. 멀건 타액이 총구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제일 두려운 건 나를 담는 노엘의 시선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어떠한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보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우으, 노, 엘을… 의심한, 게 아니, 라…….”

“응, 그럼?”

“다른, 사람이 범, 쿨럭, 쿨럭!”

“다른 사람? 누구? 필립?”

“우윽…!”

또다시 총기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딱딱하고도 매끄러운 총은 내 혀를 아래로 짓누르며 입을 벌리게 했다. 기침을 컥컥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넘어졌지만, 노엘은 그럴수록 내 입안으로 쑤셔 넣은 총기를 돌려대며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입안에서 총이 빠져나갔다. 이제는 정신이 혼미해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필립은 아니야, 날 도와준 사람이거든.”

도와줬다니? 무슨 소리야? 머릿속이 핑 돌아갔다. 숨을 쉴 수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내 앞으로 다가온 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목을 졸라왔다. 아니야, 아닐 거야.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코에서는 비릿한 선혈이 흘러내렸지만, 고개를 젓기 바빴다.

“예거 넬슨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뭔지 알려줄까?”

“우윽…….”

“그 새끼가 여기 오기로 했는데.”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 한마디에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그랬다. 나는 앞만 보고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지금 내 목을 졸라대는 이 사람이 만들어놓은 놀이판에서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을 쳤다. 노엘은 덤덤했다. 그저 차가운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어내릴 뿐이다.

“유진, 나를 죽이고 예거 넬슨과 도망칠 생각에 설렜지? 그러니까 중요한 물건은 안 들키게 조심히 보관했어야지.”

“흡!”

노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약물을 숨긴 것을 일부러 모른 척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믿음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하고 역겨워하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노엘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노엘이 만들어놓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멍청하고 순진하게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웠다.

“윽!”

“어쩜 너는 이렇게 성가시게 하는 걸까. 예거 넬슨 같은 놈들을 꼬아내서 내 일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한순간에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건 알아줘야 해, 그치?”

총구가 입에 쑤셔지는 것을 감당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노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버둥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노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노엘은 웃고 있다. 그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소 같은 미소다.

“제발 그…… 우윽!”

입안을 휘젓던 총기가 빠져나가자 갑작스럽게 숨통이 트였다.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 노엘이 내 머리채를 붙잡고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근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누굴 생각했어? 응? 이 빌어먹을 개새끼야.”

노엘은 나를 끌고 책상으로 다가가, 머리를 쾅 처박았다. 비명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노엘의 그림자에서 뛰어다닌 내 모습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끅끅거리며 흘려보내던 찰나, 책상 위에 있던 상자가 열렸다. 아까 내가 봤던 피어싱 세 개와 바늘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는 항상 계획을 엇나가게 만들어.”

노엘의 손가락이 내 귓가를 쓸고 목덜미로 내려갔다. 보석에서 나오는 반짝거리는 광채에 소름이 끼쳤다.

내 이름은 유진. 있을 유(有), 보배 진(珍). 어머니는 태어난 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눈을 가졌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친구들이며 선생님까지 내게 반짝인다는 표현을 많이 써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내 눈앞에 반짝이는 빛깔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내 인생을 저주했다.

“자, 모, 해, 흐으….”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서 그런지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잘못한 이유가 뭘까.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걸까.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 벌벌 떨어댔다. 노엘은 내 등을 무릎으로 짓이기고는 상자 속에 있는 바늘과 피어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살아오면서 후회를 해본 적이 없는데 네 발목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잘모, 했, 아윽…!”

“발목이 아니라 다른 곳을 망가뜨려야 했다고. 더 절박하게 애원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을 말이야.”

고개를 돌리자, 노엘은 똑바로 처박으라는 듯이 내 발목을 짓밟았다. 멀쩡한 다리가 아닌 망가진 발목 위로 강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사, 살려 주세요. 아악!!”

비명을 질렀다. 누구라도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왜 지금 들리지 않는 걸까. 누구라도 좋으니, 내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목청을 높였다.

“……씨발, 이 개새끼가.”

하지만 이내 곧 노엘의 손에 멈춰지고 말았다. 노엘은 내 머리채를 붙들고 책상 위로 여러 번 내리쳤다. 얼얼하다 못해 아리는 통증이 머리뼈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무, 제, 제발…… 하, 하지, 마.”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목덜미를 내려와, 내 손등을 살살 쓸어 만져 주었다.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운 손길은 곧 손가락으로 향했다. 오른손 검지였다. 노엘의 손이 내 검지를 감싸 쥐었다. 바르르 떨며 빼내려고 했지만, 노엘은 힘주어 붙잡으면서 더더욱 압박을 느끼게 했다.

“하지 마?”

“흐… 네, 제, 제발… 하, 지 말, 아 주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 했…….”

이 와중에 소변으로 허벅지가 적셔졌다. 창피함보단 두려움이 앞서 나갔다. 소변 줄기가 카펫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노엘은 개의치 않고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똑같은 게 반복되잖아. 유진.”

“흐으. 제, 제발요.”

“발목을 분질러도 잘못했어요, 하고 도망가고. 이름을 새겨주니까 다신 안 그럴게요, 하면서 도망가려고 했잖아.”

“흐. 그, 그건… 아흐…….”

날카로운 바늘이 귓바퀴를 타고 목덜미에서 가슴팍을 따라 쓸어내렸다. 아직 살을 꿰뚫은 게 아니었지만, 닿기만 해도 두려웠다. 바르르 떨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오히려 내가 잘못했다는 눈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내 개새끼가 일찍 잡혀서 선택권을 주는 거야. 손가락으로 할래, 이걸로 할래?”

“제, 발.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제발요. 제발 저 좀 놓…… 아흑!”

쾅! 또 한 번 머리가 책상 위에 찧어졌다. 노엘이 저지른 죄 보다는 당장 그가 나를 망가뜨릴 것 같은 불안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바르르 떨면서 노엘을 붙들었지만, 싸늘한 음성만 돌아올 뿐이었다.

“셋 셀 동안 선택해.”

드르륵, 첫 번째 서랍 칸이 열렸다. 노엘이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뻗어 조그마한 통을 꺼내 들었다. 싸한 향이 느껴졌다. 알코올 솜이다. 알코올 솜으로 바늘을 문지르는 모습에 온몸이 떨려왔다.

“흐…….”

“하나.”

“흐, 으.”

“둘.”

“끄윽… 손, 가락만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흐으….”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왜 내가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보단 손가락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끅끅 터져 나오는 울음을 숨기지 못한 채 어깨를 떨어댔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네가 해달라고 했잖아.”

“제, 제발…….”

“내가 강요했어?”

“아, 아뇨. 아뇨, 제, 제가 그랬, 흐윽…….”

“근데 씨발, 왜 그런 눈으로 보냐고.”

“아윽…!”

거친 손바닥이 내 옷을 전부 벗겨내었다. 천 쪼가리가 볼품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수치스러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 노엘은 단 한 번도 옷을 벗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모멸감을 안겨 주었다. 그저 바르르 떨며 책상 위에서 심판을 기다렸다.

“또 누구 좆 물었어?”

“아, 아니에요. 전혀, 저, 정말….”

“내가 아는 건 예거 넬슨뿐이야. 화장실에서도 빨아 주고. 차 안에서도 빨아 줬다면서.”

“아, 아니. 나, 나는 아니에요. 그런 짓, 한 적 없….”

“내가 어떻게 믿어? 네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거짓말뿐이잖아.”

“절대, 그런 적 없, 아윽…!”

노엘이 내 유두를 세게 비틀어댔다. 쾌락이 아닌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처럼 세게 짓눌렀다. 살이 뜯어질 것 같은 고통에 나도 모르게 다리를 들썩거렸다.

그러자 노엘은 한 손으로 내 머리채를 붙잡으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었다. 머리가 뜯길 것 같은 고통에 헐떡이며 눈을 감았다.

“개새끼, 눈 떠.”

“흐…….”

여전히 유두에선 아픈 손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무르는 수준이 아니다. 살점을 짓이기고 뜯어내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그때, 노엘이 들고 있던 바늘을 살갗 위에 갖다 대었다. 심장이 멎을 기세로 쿵쿵거렸다.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지만, 그새 노엘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왜? 싫어?”

“그, 그만. 그만해 주세, 요.”

“근데 네가 선택한 거잖아. 손가락만 건드리지 말라며.”

지금 이 순간마저 나는, 기울어진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아무것도 걸쳐 입지 않고 두려움에 떠는 나와 다르게, 노엘은 온전한 옷을 갖춰 입고 권위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럼, 손가락만 건드릴까?”

“아, 아니, 아니에요. 제, 제발. 제, 제가, 흐으…살, 려주세, 아악!”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두에 바늘이 쑤셔져서 비명만 터져 나올 뿐이다. 가슴을 비틀어대던 손길, 그 이상으로 엄청난 고통이다. 칼로 찌르다 못해 내려치는 것만 같다. 노엘이 아프게 주무른 감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계속되는 공포는 내 숨통을 졸라댔다. 가슴팍을 쳐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손발에 힘이 풀려 바르르 떨어대었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릴 지경이다.

“흐으…….”

고통에 시야가 흔들렸다. 나를 보고 있는 노엘이 웃고 있는지, 화내는지 그런 것 따위를 깊게 알 수 없었다. 바늘이 쑤욱 빠져나가면서 또 한 번의 고통이 찾아왔다. 가슴팍을 타고 붉은 선혈이 주륵 흘러내렸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역겨운 고통의 부산물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유진, 가슴은 회복력이 빨라서 순식간에 아물어 버린대. 내버려 뒀다가 다시 뚫어버리는 걸 반복하면 진짜 예민해지겠다, 그치?”

“아, 프… 제발, 제발. 그만, 윽…!”

바늘로 뚫렸던 공간에 피어싱이 채워졌다. 홧홧하다 못해 아린 통증이 가슴 위로 선명히 느껴졌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고 헛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정신 차릴 수 없어 헐떡이던 그때, 노엘은 피어싱이 달린 내 유두를 꽈악 잡아당겼다.

“그만, 제발…….”

“그만?”

“아, 아뇨. 흐으………자, 잘못, 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 했, 어요. 잘못, 했으니까 제발, 그, 만. 제발… .”

되묻는 시선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어댔다. 입안에서 타액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도 무시한 채, 가슴팍에 몽글몽글 올라온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외면한 채 자존심을 내다 던지고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노엘은 내 입술을 매만지며 입을 맞출 뿐이다.

“아흑!”

노엘이 입을 맞추며 피어싱이 달린 유두를 지분거렸다. 입을 다물려고 해도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틈을 내지 않으면 유두를 비틀어 내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노엘이었다.

혀를 움직이지 않고 가쁜 숨만 뱉어내었다. 그러자 검지와 엄지로 유두를 지분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파, 제발. 두 가지 말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우리 개새끼, 많이 아파?”

“흐… 네, 아, 아뇨. 자, 잘못, 했어요. 아프다고, 해서… 죄송, 해요. 흐으… 제발, 제발…….”

아프다고 하면 정말 더 큰일 날 것 같다.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와중에도 용서받았다는 기분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제 어디다 해줄까.”

하지만 멍청하게 울고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노엘은 새로 꺼낸 바늘을 알코올 솜으로 닦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두 개의 피어싱이 남았다.

반항할 기력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덜덜 떨며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만끽해야 하는 것뿐이다. 눈물과 타액으로 얼굴이 엉망이 되었지만, 노엘은 개의치 않고 내 뺨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마주쳤다.

“내 개새끼라서 해주는 거야.”

“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진 네가 내 개새끼라서.”

“흐. 하, 하지, 하지… 흐으… 죄송, 해요…. 잘못, 우윽!”

헛구역질하며 상체를 들썩거렸다. 그때, 노엘이 내 턱을 억지로 잡아 벌리게 한 후, 혀를 잡았다. 혀 위에서 느껴지는 손가락의 감각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노엘의 손에 들린 바늘이 천천히 다가왔다.

“흐… 아, 아이…… 마, 에요….”

“어릴 때 안 배웠나 봐.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고.”

“흐으… 제, 제바…….”

혀를 잡는 노엘의 입꼬리는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 모습에 무릎이 저절로 덜덜 떨려왔다. 이제는 통증에 무뎌진 발목도 아팠다. 혀가 붙잡혀 소리 내어 울 수도, 애원할 수 없다. 공포심을 떨쳐내지 못한 채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은 다른 손으로 축 늘어진 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손가락 건드릴까? 응?”

“아, 아. 아여, 자못, 앴, 아악!!”

이어서 날카로운 고통이 혓바닥 위로 덮쳐왔다. 살갗에 들러붙은 세포와 혈관이 고통스럽게 찢기는 것만 같다.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산소 하나 통하지 않는 방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쑤욱 빠져나가는 바늘에 몸이 휘청 흔들렸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낼 수 없다.

“개새끼 이제 거짓말 안 하겠네.”

“아, 아윽!”

어느새 뚫린 구멍 안으로 피어싱이 들어왔다. 피어싱 침이 구멍 속에 관통하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피부가 찢기고 신경이 쑤셔지는 잔혹한 통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비릿한 피 내음이 입안에 맴돌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면서 숨이 막혔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으…….”

홧홧한 열기와 함께 혓바닥이 퉁퉁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고통밖에 남지 않은 행위지만, 노엘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다정한 미소다.

기절하고 싶다. 눈을 감으면 의식을 잃어버렸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희망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정신을 잃었으면 하는 마음이 솟구칠수록 통증은 선명해졌다.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책상 위에 엎어져 헐떡거리기만 했다. 숨을 쉬는 것 자체 역시 고통스러운 행위였다.

“흐윽!”

하지만 노엘은 나를 쉽게 놓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바지 버클이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는 노엘의 성기가 들이밀어 졌다. 하지 마, 싫어. 무슨 행위가 이어질지 뻔히 보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내가 울수록 노엘은 웃었다. 내가 망가질수록 노엘은 기뻐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내가 죽는 모습까지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시선 피하지 말라고 했어.”

“컥!”

머리채가 잡히면서 입이 벌어졌다. 이윽고 입안으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뚫린 지 얼마 안 된 혓바닥을 단단한 성기가 건드리며 침입했다. 고통을 참을 수 없다. 그저 헐떡거리며 노엘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돌아오는 거라곤 손찌검뿐이었다. 노엘에게 있어서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흐, 흐으….”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차라리 정신이 나가버렸더라면 덜 아팠을까. 고통에 헐떡이며 내 목구멍을 찔러대는 성기를 억지로 핥아댔다. 쓰라렸다. 쓰라리다 못해 아리고 감각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

어느새 고통은 내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욱욱거리면서도 입에 머금은 성기를 힘겹게 할짝거렸다.

“아으….”

“제대로 빨아. 손가락도 분질러줘?”

한입에 머금기 힘든 크기다. 한꺼번에 입에 넣고 혀를 움직이려고 하니, 살 기둥에 닿은 피어싱이 쓸려 눈물이 나왔다.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거리자 손바닥이 날아 들어왔다. 성기를 입에 머금은 채 뺨을 맞으니 숨이 막혀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씨발, 똑바로 해.”

“우, 으윽…….”

“아, 형 좆이라서 빨기가 싫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인데?”

“아, 흐…….”

노엘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억지로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속절없이 흔들렸다. 노엘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내 목을 조여오는 고통은 선명해졌다.

혓바닥에 박힌 피어싱이 스칠 때마다 홧홧한 열기가 느껴져,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숨이 막혀 마른기침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흐릿한 시야와 함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우욱…!”

피어싱에 쓸려 아리기도 했지만, 비릿한 액체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욱욱거리며 헐떡거렸다. 입안에서 정액이 섞인 타액이 줄줄 새어나갔다. 내 위치가 어딘지 알려주는 수치스러운 행위에 눈물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개새끼, 입 벌려서 혀 내밀어봐.”

“흐…….”

“안 해?”

“아, 아이, 에, 요. 하, 하게, 요.”

얼얼한 통증을 안겨주는 피어싱 탓에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멍청한 개새끼가 되어버린 것 같아 자괴감이 밀려왔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후들거리며 떨어대는 턱을 간신히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혀끝에 달린 피어싱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눈물이 떨어졌다.

“아윽… 아, 프…….”

노엘이 내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미끈한 혓줄기가 입안을 파헤치면서 혀끝에 달린 피어싱을 툭 건드렸다. 퉁퉁 부어오른 혓바닥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만 같다.

노엘의 어깨를 꽉 붙잡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표현을 할 수 없어서다.

“아파서 어떡해?”

물기 젖은 소리와 함께 노엘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치고 호흡을 옭아매며 서로를 탐했다는 게 역겹고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하나 남았잖아.”

“흐!”

마지막 하나 남았다는 말이 이렇게 두려울 수가 없다. 덜덜 떨며 책상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노엘이 열린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사탕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피어싱에 걸리적거려 고통만 커질 뿐이다. 노엘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씹어 삼켜 넘겼다. 퉁퉁 부어오른 혓바닥에 무언가 닿기만 해도 쓰라렸으니까.

“이제 안 아프게 해줄게.”

“흐윽…….”

아프지 않게 해준다는 의미는 내게 수치스러움을 안겨 준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노엘이 내 성기를 움켜쥐며 천천히 흔들어댔다. 고통에 미쳐버린 걸까. 발끝에서부터 다른 느낌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흣…….”

살 기둥을 엄지로 살살 쓸어올리는 움직임에 허리를 들썩였다. 내 몸을 물들이려는 쾌락이 무서웠다. 무서워서 달아나고 싶다.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서 노엘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 개새끼가 어딜 가려고.”

“죄, 소해요. 흐윽….”

“소리 내. 못 하겠어? 네 혀에 달린 거 뽑아서 다른 데에다 꽂아줘?”

“흐, 으… 아읏…….”

노엘이 내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피어싱이 박힌 유두를 잡아당겼다. 저릿한 고통에 아픈 소리를 흘려내었다. 이것만으로는 만족을 못 한 모양인지 노엘은 유두를 입에 머금고 혀를 굴렸다.

“흐으….”

이상했다. 노엘이 만지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라,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것만 같다. 아니, 내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분을 느낄 리 없으니까.

한참 덜덜거리며 노엘의 손길을 받아들일 때, 거친 손아귀가 나를 돌려세워 책상 위에 엎드리게 했다.

“가만히 있어. 그래야 예쁘게 박히지.”

“무, 스, 으응….”

“아, 이렇게 끙끙거리니까 얼마나 좋아. 앞으로도 자주 먹여야겠는데. 엉덩이 들어.”

찰싹, 엉덩이를 스치는 마찰음마저 역한 느낌으로 돌아왔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싸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스치면서 아직 닫히지 않은 서랍 속에서 노엘이 무언가를 꺼내었다.

“유진, 이젠 안 아파?”

“흐…….”

“기분 좋냐고, 이 개새끼야.”

“흐윽. 조, 아읏….”

차가운 무언가가 회음부 위에 발라졌다. 치덕거리는, 연고 특유의 느낌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아프지 않아도 두려운 건 여전했다.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노엘은 내 목덜미 위로 짧게 입을 맞춘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

“개새끼, 앞으로 싫다는 소리 하면 안 돼. 네 입으로 분명히 좋다고 했어.”

“흐윽….”

하얀 손이 미끄러지듯 성기부터 음낭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노엘이 먹인 사탕 때문인지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락이 피어났다. 이상한 기분을 감당할 수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정할 것 같은 충동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노엘은 내 성기를 만져주기는커녕 허벅지 같은 곳만 쓸어내리며 살살 달아오르게 했다.

사소한 순간마저 스스로가 역겨웠다. 가장 두려워하고 증오스러운 상대의 손길에 열이 올랐으니까. 이내,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 흐으…….”

“이제 좀 됐으려나.”

미끄러지는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그마저도 움찔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짝! 엉덩이를 들라는 손찌검이 날아 들어왔다. 부들부들 떨며 천장을 향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때, 날카로운 바늘이 회음부를 쿡 찔러댔다. 소름이 돋아나는 순간이다.

“아, 안 돼. 하, 하지, 마세요. 제발….”

노엘이 발라놓은 연고 때문인지 살갗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그리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까지 완전히 없앨 순 없다. 고개를 돌려 몸을 비틀어 봤지만, 이미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꼼짝달싹하기 힘들었다.

“유진 네가 그랬잖아. 손가락만 건드리지 말라고.”

“아, 아니. 하, 하지 마, 세요. 하지, 마. 아악…!”

뚝, 뚜둑. 가죽 뚫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바늘이 관통했다. 살이 뚫린다는 공포에 숨이 막혔다. 혓바닥이며 유두를 뚫어대던 감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통증이 쫓아왔다. 내가 느꼈던 이상한 기분 역시 전부 잊을 정도다.

“아, 아악!!”

날카로운 유리 파편 위로 던져진 것만 같은 고통이다. 회음부 위를 뚫어대는 바늘에 숨이 막혔다. 바늘은 금방 내 몸에서 빠져나갔고 이어서 상자 속에 들어있던 마지막 피어싱이 채워졌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올라왔다.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온몸이 경직되고 무릎이 덜덜 떨렸다.

“아, 으… 싫어…. 아흑!”

“싫다는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아악! 흐. 살려, 주….”

하얀 손가락은 잔혹하게도 회음부에 박아 버린 피어싱을 잡아당겼다. 그 반동에 고통이 느껴지면서 책상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노엘이 내게 먹인 사탕도, 연고도 소용없다.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르르 떨어댔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성기를 움켜쥐며 천천히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제일 궁금한 건 네가 왜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던 걸까, 싶어서. 그래서 눈을 뗄 수 없는 것 같아.’

노엘의 손에서 울부짖으면서도 제이가 들려줬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울었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꺼낼 수 없다면 숨통을 끊어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노엘의 손에 뒤집히면서 다리를 벌리고 헐떡이는 게 전부다.

“제, 흐…….”

“개새끼한테 아주 잘 어울려. 온몸 여기저기 내 흔적 박아놨으니까 다른 새끼들도 좆 들이밀지 않을 거야.”

살 기둥을 엄지로 살살 쓸어올리는 움직임에 쓰라려 허리를 들썩였다. 쾌락은 흔적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성기를 움켜쥔 노엘의 손이 회음부에 달린 피어싱을 스치면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무서워서 달아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서 노엘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흑…!”

집요한 손가락이 유두에 달린 피어싱을 잡아당겼다. 노엘은 손끝에 검붉은 피가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우욱, 비릿한 피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또 한 번 뺨이 돌아갔고 책상 위로 엎어지는 꼴이 되어 버렸다.

잘못했다는 말 대신 넣어달라고 빌어 봐.”

‘으, 으윽. 하지만....’

‘어서.’

‘아윽! 잘, 아니, 넣어…주…으….’

‘이래야 내 개새끼지.’

잘못했다는 말 대신 수치스러운 말을 하며 빌어 보라던 그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걸 알려주면 노엘은 나를 놓아줄까.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내 성기를 흔들던 노엘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아파, 무서워. 제발 그만둬. 쾌락의 행위는 내게 있어서 두려움 그 자체였다.

“노, 흐… 너, 넣어, 주세….”

“뭐?”

“넣어, 주세요… 흐윽….”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치스러운 문장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이상해지는 게 싫어서, 더는 아픈 게 싫어서, 노엘의 시선을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차라리 아래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게 나았다.

바르르 떨면서 노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내 것을 잡아 흔들던 노엘은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더욱 빠르게 흔들어댔다.

“박히고 싶어?”

“흐으…….”

“유진, 똑바로 말해야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아흑!”

아픔밖에 남지 않는 행위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성기를 흔들던 손이 점차 빨라졌다. 노엘은 내가 쾌락을 느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얀 손이 살 기둥을 엄지로 쓸어올리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밀려오는 이상한 감각이 내 몸을 물들였지만, 완연한 고통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으….”

“유진,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어?”

“흐, 제, 발….”

발가락을 오므리며 홧홧한 통증에 집중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노엘은 픽 웃더니 내 귓가에 수치스러운 문장을 속삭여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된 실수를 처음으로 저질렀을 때, 내 입으로 직접 내뱉어야 했던 문장이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보, 보내, 줘… 보내주세요…….’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할 수 있어?’

타액이며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어서 해보라는 듯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흐…….”

“싫으면 계속해야지.”

“아, 아니. 하, 할게요. 제발…….”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나를 재촉하는 손길이 이어졌다. 내 성기를 감싸 쥔 손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회음부에 박힌 피어싱이 손에 스치면서 머릿속이 바짝바짝 하얗게 타들어 갔다.

툭, 흘러나온 눈물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선택권 하나 없이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뒷, 구멍에 박아 주세, 흐윽….”

“내 개새끼 이제야 말 잘 듣네.”

모멸스러운 문장을 말함과 동시에 내 성기에서 탁한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노엘의 손바닥을 어김없이 적시는, 저 역겨운 물은 내가 내보낸 것이다.

수치, 모멸, 치욕, 온갖 부정적인 단어가 밀려왔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내 기분을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켜내기만 했다.

“박아달라고 했으니까 해줘야겠지. 거봐, 이렇게 똑바로 말하니까 서로 말도 통하고 얼마나 좋아?”

“흐읏…….”

“근데 씨발, 내가 잘못했어? 왜 이딴 표정 지어. 네가 박아달라고 했잖아.”

“마, 맞, 흐윽…….”

“웃어 봐, 그럼. 잘못한 사람처럼 쳐다보는데 씨발 어떻게 박아줘?”

“흐, 아니에요…….”

“끝까지 안 웃지, 이 개새끼가.”

“아윽!”

흔한 유희 하나 없이 내벽 안으로 성기가 들어왔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은 이제 당연했다. 숨도 뱉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노엘은 내 다리를 어깨 위로 걸치고는 거칠게 추삽질을 해댔다.

“으윽…….”

노엘이 허리를 움직일수록 피어싱이 스쳐 홧홧한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 몸을 망가뜨리겠다는 듯 박아대는 기세에 온몸이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허벅지 근육이 당겨지고 아래가 벌어지는 통증에 숨이 막혔다. 헐떡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복부가 불룩 튀어나온 모양새를 보고 덜컥 겁이 났다.

“……웃기 싫으면 쳐다보기나 해.”

“아윽…!”

“시선 피하지 마.”

노엘이 유두에 달린 피어싱을 잡아당겼다. 살갗에 가해지는 통증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헐떡거리며 노엘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를 움직였다. 좋아서가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아, 아파요. 제, 아윽…….”

“나 봐, 보라고. 이 빌어먹을 개새끼야.”

시선을 피하자, 하얀 손이 거칠게 내 머리통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새파란 눈동자가 볼품없는 내 모습을 담아내었다. 두려운 시선 속에서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노엘은 내 입술을 집어삼킬 기세로 입을 맞추며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흐으…….”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하자, 내벽 어딘가를 콱 찔러댔다. 골반이며 허벅지며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아픔에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로 노엘은 내 입 안으로 파고 들어와 집요하게 빨아들였다.

밀어내려고 하면 거센 움직임이 대가처럼 돌아왔다. 입술에 숨이 막혀 노엘의 옷깃을 붙잡았다. 혓바닥에서 찌르르 울려대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만히 생각을 해봤어.”

“아, 흑!”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이 찾아 들어왔다. 노엘은 내 골반을 움켜쥐고 거칠게 찍어 내리며 목덜미 위로 입술을 묻었다. 잘근거리는 소리와 함께 듣고 싶지 않은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땠을까 싶었거든?”

“아윽! 그, 마, 흐으…….”

“먼 미래를 알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아, 프… 제발, 제발….”

“너는, 틀림없는 내 개새끼니까.”

“아악…!”

노엘이 내 목덜미 위로 이를 박았다. 동시에 내벽 안에 끈적이는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노엘은 제 성기를 빼지 않은 채 연신 추삽질을 해댔다.

그 반동으로 노엘이 움직일 때마다 접합부 사이로 멀건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빨리 행위가 끝나길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하지만 노엘은 내가 기절할 때까지도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의식을 잃었을 때도 계속해서 내게 고통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눈이 감기면서 또 한 번 생각했다. 두 번 다신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이것마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 *

“흐….”

견딜 수 없는 오한에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눈으로 창문을 내다봤다. 하늘이 새까만 걸 보면 새벽인 듯싶다. 오늘도 어김없이 노엘의 곁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옆에서 잠든 노엘과 내 목에 채워진 목줄이 상황을 알려 주고 있었다.

“윽….”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가 달달 떨리는 오한이 느껴졌지만, 굳이 노엘을 깨우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웅크렸다.

눈만 꾹 감으며 무릎을 끌어안을 때, 노엘의 손이 내 목덜미를 콱 끌어당겨 이불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가지가지 하네, 이 개새끼가.”

내 몸을 끌어안은 온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놔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제발 나 좀 보내 달라는 음성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할 수 없었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새끼다.

“…헬스센터 갔다는 거 거짓말이지.”

애써 잠든 척하려 했지만, 서슬 퍼런 음성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눈치챈 모양인지 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유진.”

“네, 네. 잘못, 했어요.”

“……씨발.”

노엘은 나를 거칠게 밀어내고 어딘가로 나가버렸다. 매질할 몽둥이를 가져오기라도 하는 걸까 싶었지만, 의외로 물컵과 약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알아서 처먹고 자. 자는데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툭, 이불 뒤로 던져지는 약과 신경질적으로 쥐어진 물컵을 빤히 쳐다봤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나를 노려보는 두려운 시선에 억지로 약을 들었다.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혓바닥에 박힌 피어싱이 알약에 걸릴 걸 생각하면 벌써 아리는 느낌이 들었다.

“입 벌려 봐.”

“제, 제가 할게요. 제가…….”

“입 벌리라고.”

“아윽!”

노엘이 내 턱을 벌리고는 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억지로 입술에 컵을 갖다 대었다. 싫다고 고개를 젓기도 전에 컵이 기울여졌고 찬물이 입안으로 들어와 알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귀찮은 개새끼.”

노엘은 나를 끌어당기면서 침대 위에 누웠다. 내 살갗 위로 스며드는 온기가 두려웠다. 어김없이 올라오는 메스꺼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붙든 손에서 달아날 수 없다면 나 스스로 이 굴레를 끊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 *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유진에게 또 다른 흔적이 새겨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유진은 예전처럼 어디론가 도망치거나 노엘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따금씩 텅 빈 눈으로 천장과 창문을 응시하긴 했지만, 노엘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노엘은 체감상 만족스러운 나날들을 보냈다. 더는 유진의 입에서 듣기 싫은 문장이 튀어나오지 않았으니까.

“개새끼, 이리와.”

고요한 아침은 노엘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유진은 멍한 눈으로 노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낫지 않은 발목 때문인지, 절뚝거리는 모양새가 보기만 해도 불편해 보였다.

“느려 터져 가지곤.”

먼저 오라고 한 건 분명 노엘이었지만, 그의 발걸음이 앞서 나갔다. 노엘이 유진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있었다.

“유진.”

노엘이 손을 뻗어 유진의 뺨을 매만졌다. 차가운 손길이 닿아도 이제는 움찔거리지 않았다. 이제는 받아들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노엘은 제 가슴 위로 찌르르 울리는 전율을 느꼈다.

며칠 전부터 유진이 고분고분해져서 손찌검할 일이 없었다. 그 탓에 유진의 입가에 자리 잡았던 상처가 조금씩 옅어졌다.

노엘은 제법 깨끗해진 얼굴도 나름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유진을 매만졌다.

상처가 아무는 하얀 피부를 만지는 손가락에서 불순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멀쩡한 살갗 위에 또 다른 흔적을 새기고 싶다는 충동이 노엘을 자극했다. 미친 가학심이었으나, 노엘은 그것이 애정 표현이라 여기면서 유진을 어루만졌다.

“대답 좀 해.”

“……죄송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순 없다. 노엘에게 어려운 게 생겨버렸다. 노엘은 유진과 대화하는 게 어려웠다. 말을 걸어도 ‘네’라는 한마디만 대답해서 답답하다 못해 속이 터졌다.

“오늘 시간표 말해 봐.”

키스든 섹스든 내키는 대로 다 했던 노엘이다. 굳이 유진의 의사를 묻지 않아도 제가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노엘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진을 만나고 나서 그 고정관념은 조금씩 흐트러졌다.

“유진.”

“의상 드로잉이랑 키아로스쿠로 수업이 있어요.”

“그게 뭔데?”

“목탄으로 명암 공부하는 건데요.”

노엘이 미간을 좁히자, 유진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거렸다. 노엘은 유진의 시간표가 뭔지 알았고 전시관을 운영하는 사람답게 미술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며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유진은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옷 갈아 입힐 동안 계속 설명해. 목탄하고 연필의 차이점이 뭔데.”

바싹 마른 입술이 달싹거리자, 노엘은 가슴이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유진.”

“…목탄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어긋나고 종이에 뭉개지거든요. 심지어 스케치북에도 번질 때, 도 있고요.”

“그리고.”

“종이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져요.”

노엘은 유진의 티셔츠를 벗겨내었다. 한쪽 유두에 박힌 피어싱을 보자,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정말 제 소유물이 된 것 같아서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노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에게 새 옷을 입혀 주었다. 티셔츠부터 속옷, 양말까지 제 손으로 골라주고 입혀 주니 그제야 만족스러웠다. 노엘은 유진의 옷을 한 번 더 매만져주며 등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힘주는 만큼 종이에 나타나요. 연필도 마찬가지지만, 목탄은 그게 더 잘 보이니까 신경 쓸 게 많은 것 같아요.”

“네가 사용하는 종류가 뭔데?”

“유탄이요.”

모를 리 없다. 노엘은 유진의 바지에 벨트를 매주면서 끌어당겼다. 아니, 유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벨트를 매주는 것은 핑계고 수작이다. 아무 이유 없이 접촉한다면 유진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건 물론이고 노엘 스스로도 낯간지럽게 느껴져서 이따위 핑계를 댄 것이다.

“설명 멈추라고 한 적 없는데.”

“……유탄은 쉽게 그려지는데요. 그만큼 부러지기도 쉬워요. 조금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욕심부리면 어느샌가 부러져있더라고요.”

“그걸 왜 목탄 탓을 해? 힘 조절 못 한 네 잘못이지.”

노엘이 좀 더 힘을 주어 유진을 끌어안던 그때였다. 조곤조곤 입을 열던 유진이 멈칫하며 노엘을 돌아봤다. 희미한 조명에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노엘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안고 싶다는 충동밖에 들지 않는 새까만 동공이 저를 흔드는 것만 같다. 그래도 유진은 웃지 않았다. 가만히 노엘을 응시할 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검은색 눈동자는 끝이 어딘지 모를 만큼 아주 새까맸다. 유진은 그런 눈으로 계속해서 노엘을 바라봤다. 감히, 겁도 없이.

노엘은 묘한 반응에 어쩐지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미안하진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유진은 아무 반응 없이 노엘을 제 눈으로 담아낼 뿐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메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맞아요, 제 잘못이에요.”

처연함 하나 묻어나지 않는 눈동자다. 유진의 눈에선 싫다, 그만해달라는 부정적인 문장을 찾아볼 수 없다. 노엘은 가만히 유진을 쳐다보다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제 품에 닿았던 온기가 괜히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제 됐어, 아침 먹고 가.”

유진은 대답 대신 멍한 눈으로 노엘을 올려봤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에 노엘은 석연찮은 기분이 느껴졌다.

“뭐야, 씨발 또.”

“……노엘.”

순간, 유진의 입에서 제 이름이 튀어나오자 노엘은 미간을 좁혔다. 유진이 먼저 불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선을 응시하며 저를 찾고 있다. 유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유난히 특별하게 와닿았다. 묘한 기분이다.

노엘은 감히 개새끼가 자신을 흔들려고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지만,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잠시 후 짧은 침묵 끝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오늘은 제가 아침 준비해도 될까요?”

“뭐?”

“죄송해요.”

노엘은 제 귀가 잘못된 것 같았다. 유진이 스스로 아침을 차려 주겠다고 했다. 키스해달라는 뜻일까, 박아달라는 뜻일까. 노엘이 미간을 좁히며 유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진은 떨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노엘을 응시할 뿐이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또 도망가려고?”

“아뇨, 도망 안 가요.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씨발, 그럼 그렇지.”

“죄송해요.”

“……뭔데.”

저 눈빛이 거슬려서다. 노엘은 단지 그뿐이라 생각하며 유진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유진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ID카드를 잃어버렸어요. 재발급해야 하는데 유학생들은 신분증이랑 보호자 연락처가 필요하대요.”

노엘은 평소 같으면 제 성질머리대로 입 다물라는 소리를 했겠지만, 흔들림 없이 말하는 유진이 묘하게 느껴져 가만히 쳐다봤다.

“여권이랑 노엘의 연락처가 필요해서요. 못 믿으시겠다면 사본만 주세요. 아, 아니다. 필립 번호도 필요할 것 같아요.”

노엘은 유진을 바라봤다. 눈빛을 보면 지난번처럼 도망갈 것 같지는 않다. 처음으로 유진이 무언가를 부탁했다.

오늘따라 처음의 연속이었다. 유진이 먼저 제 이름을 부르고, 먼저 아침을 차려 주겠다고 하며 부탁까지 해댔다. 노엘은 당장이라도 저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개새끼가 뭘 할 줄 안다고.”

“저 과일은 잘 깎아요.”

이젠 말대답도 한다. 노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유진을 응시했다. 개새끼가 미쳤거나, 순응했거나 둘 중 하나다. 뭐 어떻게 되었든 노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알아서 준비해.”

“……네.”

유진은 곧바로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사이로 손을 씻고 재료를 꺼내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노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노엘은 책상 서랍 속에서 유진의 여권을 꺼내 들었다. 그냥 가져갈까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초록색 여권을 펄럭거리자,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유진의 사진이 나타났고 그 옆으로 알지 못하는 글자와 영어가 섞여 있었다. 그중 노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Date of birth 14 Apr.」

유진의 생일이다. 4월 14일, 오늘이다.

“……씨발, 이 개새끼가 왜 이걸 말 안 해?”

그래서 아침을 차려 주겠다고 한 거였나.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책상 위에 놓았던 핸드폰을 들어 메모를 적었다.

유진이 부탁했던 제 연락처와 필립의 연락처가 하얀 종이에 써졌다. 마음 같아선 필립의 번호를 도려내고 싶었지만, 유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적어 버렸다.

―노엘.

이때, 스피커 너머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노엘은 필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공항 도착했습니다. 의원님 역시 호텔에 계신다고 연락 왔고요.

“그럼, 일정까지 4시간이나 넉넉하게 남았다는 뜻이네요?”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키실 일이라도…….

빨리 전화를 끊고 유진에게 가고 싶었으나, 어물쩍거리는 필립이 노엘을 방해했다. 노엘은 불편한 심기를 티 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핸드폰을 꽉 쥐는 손까지 막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공항에서 블리스를 봤습니다. 알베르트 수행 비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만남이 새어나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노엘은 두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개새끼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가만히 떠올려봤다.

―노엘?

“잠깐만요.”

노엘이 생각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짧게 답했다. 뻐근한 목을 매만졌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분위기 있는 라운지에서 야경을 보며 밥을 먹는 행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혹여 바깥바람 잘못 쐬었다가 내보내 달라고 낑낑거릴지도 모르니까.

“……참 까다로워.”

―네?

“아니에요. 필립, 시간 좀 남았을 테니까 괜찮은 스튜디오 좀 알아봐 주세요. 이왕이면 동네 근처로요.”

―저 동부 쪽 일만 해도 산더밉니다. 이런 것까지 알아보면…….

“4시간이나 있는데도 못 해요?”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노엘이 전화를 끊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생일 선물이야 늦게 줘도 상관은 없었지만, 노엘은 오늘 안으로 유진의 환한 웃음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유진과 학교나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엘은 여권에 메모지를 꽂아 넣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으로 내려가자, 정갈하게 깎아놓은 사과와 계란 토스트가 있었다.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죄송해요.”

노엘이 유진을 쳐다봤다. 유진은 혼나는 줄 알았는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걸 본 노엘은 유진을 당장이라도 안아버리고 싶었지만, 충동을 꾹꾹 누르며 여권만 내밀어댔다. 유진은 접시를 내려놓고 여권을 건네받았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발음을 할 때 입술이 저런 모양이었던가. 노엘은 가만히 유진의 입술을 쳐다봤다.

유진은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여권을 움켜쥔 채 노엘을 응시했다. 하얀 뺨에 여기저기 옅게 남아 있는 상흔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노엘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검은 구두가 점차 간격을 좁혀 나갔다.

노엘이 유진의 뺨에 손을 대었다. 따뜻하다, 안고 싶다, 품고 싶다. 붉은 입술이 오로지 저 하나만 부른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노엘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하는 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행각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노엘.”

이때, 유진이 한 번 더 노엘을 불렀다. 미친 게 분명했다.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노엘은 그게 꼭 해서는 안 될 도발을 받은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씨발, 노엘이 미간을 좁혔다. 제 시선도 마주치지도 못하던 유진이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잠시 후 믿기지 않는 문장이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키스해 드릴까요?”

“뭐?”

“그냥 해드리고 싶어서요.”

무언가 이상했다. 피어싱을 단 게 큰 효과가 있었던 걸까?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유진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냥 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고분고분해진 게 마음에 들었지만,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엘의 고개는 어느 순간 유진에게로 향했다. 메마른 입술에 노엘이 입을 맞추려던 찰나, 하얀 손이 노엘의 뺨에 손을 대었다.

“……근데 피어싱 빼주시면 해드릴게요.”

“이 개새끼가 지금 무슨,”

“아파요.”

노엘의 미간이 더더욱 좁혀졌지만, 손 하나 올라가지 않았다. 무기력한 눈빛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다. 노엘은 대답 대신 유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유진은 움찔거리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혀에 있는 것만이라도 빼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마음에 안 드시면 학교 갔다 와서 다시 할게요.”

“……좆같은 소리만 하네. 입 벌려.”

유진이 입을 벌리자, 하얀 손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노엘은 빨간 혀에 달린 피어싱을 살살 돌리며 빼주었다.

유진은 또 통증을 느낀 건지 노엘의 어깨를 붙잡고 움찔거렸다. 살이 미끌대는 감각이 피어싱까지 스며들었다. 피어싱이 떨어져 나가자, 유진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흐….”

노엘은 유진을 바라봤다. 아픈 모양인지 눈가에 눈물이 부옇게 차오른 모습은 금방이라도 키스해달라고 조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 노엘은 피어싱을 테이블에 올리자마자 입술을 포개었다. 곧 시선이며 살갗이며 더는 닿을 틈 없이 옭아매었다.

노엘은 감히 개새끼가 제 머리에 기어올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가끔은 이런 맛도 있어야 하니까.

* * *

오후 1시. LA 시내 한 호텔 다이닝룸. 노엘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단 하나, 밀러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처음 뵙겠습니다, 노엘 웨스틴입니다.”

“마침 여기에 일정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인사를 드리지 못할뻔했습니다.”

노엘의 앞에 있는 남자는 브루노 밀러다. 집권당 소속도 아니고 당내 대표 의원도 아니라, 목소리 한 번 낼 수 없는 남자였다. 게다가 이렇다 할 업적도 없어 평가도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노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자를 부른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까.

밀러는 ‘가장 많이 버는 이들이 누리기만 하는 것은 도둑질’이라며 웨스틴 집안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노엘의 전시관을 방문한 것 역시 마냥 좋은 이유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어찌 보면 노엘과 밀러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밀러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노엘을 응시했다.

“그래서, 용건이 뭔가요? 전시회 티켓을 주는 건 아닌 것 같고. 아, 참고로 난 전시회를 자주 가지 않아요. 갈 시간도 없고.”

“용건이라뇨. 단지 의원님과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서일 뿐인걸요.”

“노엘 웨스틴 씨,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이것들을 돌려주기 위해섭니다.”

밀러 옆에 앉아 있던 수행원이 가방을 내밀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필립을 시켜 보냈던 귀중품과 전시회 티켓이었다. 밀러는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럼에도 노엘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러신가요? 유감이네요.”

“다음부턴 이런 거 보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로 내게 접근하는지 모르겠지만, 불쾌합니다. 특히 웨스틴 쪽이 저를 만날 이유는 더욱이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럼, 이만.”

밀러는 노엘에게 눈길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면만 응시했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건 필립이었다.

덜컥 소리와 함께 다이닝 룸 문이 열렸다. 밀러가 수행원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가던 찰나, 노엘의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춰 세웠다.

“의원님께 필요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것도 싫으신가요?”

밀러가 멈칫하며 뒤돌았다. 노엘은 여전히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차를 들이마실 뿐이다. 아쉬워해야 할 사람은 노엘인데 전혀 보채는 투가 묻어나지 않았다.

밀러는 문을 닫고 노엘의 앞으로 걸어갔다. 기척을 느낀 노엘은 계속해서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필요한 선물이라니, 무슨 말씀이죠?”

“저희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왔어요.”

태어난 게 아닌, 들어왔다는 묘한 말에 밀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웨스틴이라면 새로운 아이를 위해 기사를 낼 게 뻔했으나 그런 거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노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꼬리만 올렸다.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아버지가 몰래 밖에서 만들어놓은 동생이니까.”

“노엘.”

가만히 얘기를 듣던 필립이 눈치를 줬으나, 노엘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밀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핏줄에 집착하는 집안에서 사생아라니? 노엘은 덤덤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구질구질한 속사정은 관심 없으실 테니 본론만 말씀드릴게요. 눈치채셨겠지만, 내 동생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밀러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어루만지며 노엘을 쳐다봤다.

“동생을 아버지나 형에게 인정받게 하려고 수도 없이 노력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협박받았죠. 제가 운영하는 전시관, 에이전시 모두 내부 감사가 들어갈 것이고 동생마저 위협받고 있어요.”

노엘은 저를 응시하는 필립을 무시했다. 물론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유진을 내놓지 않으면 분명 알베르트 쪽에서 움직일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노엘은 그쪽이 움직이기 전에 알베르트를 밀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 이 앞에 서 있는 밀러라는 체스 말을 이용해서.

“집안을 위해 몸 바쳐 일했지만, 소용이 없더라고요. 나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과연 가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흠,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의원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주 절실하게.”

노엘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밀러를 쳐다봤다. 무거운 침묵이 룸 안을 맴돌았다.

지잉―.

그 순간, 노엘의 핸드폰에서 긴 진동이 울려 퍼졌다. 노엘은 받지 않은 채, 밀러만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유진을 빼앗아가려는 집안을 저지해야만 했다.

결국, 핸드폰 진동이 멎었고 밀러는 어느 순간 다시 노엘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죠?”

“제가 안전하게, 뒤탈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만 해주세요. 그렇다면 의원님을 도와 드릴게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치고는 여유가 넘쳤다. 분명, 도움을 요청한 건 노엘이었는데 선심 쓴다는 듯한 미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밀러가 아무 말할 수 없는 건, 자신에겐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였다.

“곧 선거가 다가오는데. 강력한 카드가 필요하시잖아요.”

노엘은 흔들리는 시선에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대로 흘러갔다. 밀러는 아까와 다르게 불쾌한 기색을 걷어내고 노엘을 응시했다. 강력한 카드라는 말에 밀러와 수행원의 표정이 묘한 빛을 내비쳤다.

지잉―.

그 순간, 이번에는 필립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노엘이 필립에게 눈길을 주자 필립은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까?”

“후회요?”

노엘은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후회라는 단어는 자신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으며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아주 옅게 입꼬리만 올릴 뿐이었다.

“저는 후회할 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의원님.”

노엘은 옅은 미소를 띠며 밀러를 쳐다봤다. 후회, 후회라고 했다. 노엘은 우스웠다. 29년 동안 살아오면서 노엘이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은 절망과 후회, 간절함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라는 생각이 노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와 제 동생의 안전만 보장해 주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밀러는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아마도 그의 머릿속은 웨스틴을 잡기 위해 웨스틴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로 복잡해졌는지도 모른다.

노엘은 가만히 밀러를 쳐다봤다. 마침내 밀러의 찻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노엘 웨스틴 씨, 갑자기 일정이 취소된 것 같은데, 보내 주셨던 전시회 티켓은 다시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거래가 성사되었다.

노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날이라는 기분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얼른 저녁 시간이 되었으면 싶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 오로지 유진과의 시간에만 집중할 예정이다.

그때, 덜컥 문이 열리면서 필립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쥐고 안으로 들어왔다.

“노엘, 잠시만요.”

“무슨 일이에요?”

필립이 이상했다. 여기서 할 말이 아니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축이며 노엘의 눈치를 쳐다봤다. 노엘은 무언가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노엘은 필립과 함께 다이닝 룸 밖을 나왔다. 통제를 받아서 그런지, 넓디넓은 복도에는 다른 손님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필립은 주변을 살피며 다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노엘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필립?”

“저, 그게…… 방금 캘리포니아 메디컬 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메디컬 센터? 무슨 말이에요. 거기서 왜 연락이 와요?”

병원에서 왜 필립에게 연락한단 말인가. 노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필립을 응시했다.

필립은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필립이 단 한 번도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노엘은 다그치지 않은 채 필립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에요, 알베르트나 아버지가 다쳤다면 거기서 연락이 올 리 없잖아요?”

“그게…….”

“필립, 나 슬슬 재미없어지려고 해요. 당장 두 사람이 죽은 거 아니면 나중에 얘기해요.”

“유진이 응급실에 있다고 합니다.”

다이닝 룸으로 돌아가려던 노엘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노엘과 제 연락처 적힌 쪽지가 유진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했는…… 노엘!”

잠시 뒤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노엘은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필립이 노엘의 이름을 외칠 때, 노엘은 어느샌가 긴 복도를 빠져나가 버렸다.

<「너의 유진」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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