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4)

* * *

행위가 끝난 후, 노엘은 내게 옷 입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노엘의 코트 때문에 바닥은 더러워지지 않았지만, 정액 특유의 탁한 냄새까지 없앨 순 없었다.

“네가 싼 거잖아. 치워.”

노엘의 명령에 더러워진 코트를 화장실에 버리고 왔다. 화장실까지 오는데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지만, 수치스러움은 떨쳐낼 수 없었다. 당분간 더더욱 고개를 들고 돌아다니지 못할 것 같다.

주차장에 내려가서 차에 오를 때까지 바닥만 내려다봤다. 강의실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죄의식이 떠나가질 않았다. 이 미친 짓을 하는데 장소야 무엇이 대수겠나 싶었지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노엘은 잠자코 안전벨트 클립을 채워 주고는 운전석 위에 올라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차는 곧 출발했다.

역시 우리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내다봤다. 도로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마트조차 보이지 않는 텅 빈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았다.

끼이이익―.

신호에 맞춰 차가 멈춰 섰다. 신호등 그림자만 길게 늘어진 바닥을 내려보다, 신호등을 쳐다봤다. 깜빡, 깜빡. 초록 불이 꺼지고 빨간불이 켜지던 찰나, 신호등 아래 서 있던 누군가의 인영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제이?”

아까 만났던 제이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 조금 더 쳐다보려고 욱신대는 하체를 무시한 채 몸을 당겼다. 예거에게 당했으면서, 유일한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한테 뒤통수 맞았으면서 타인에게 눈길 돌리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주 가깝진 않았지만, 제이는 차 주변에 있었다. 나를 못 본 건지 제이는 계속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도중, 옆에서 들리는 노엘의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뭐 보는데?”

“얼마 전에 경찰서에서 봤던 수사관, 이…….”

“그래서.”

“그, 그게.”

“네가 그 잔챙이들을 왜 신경 쓰냐고.”

“죄송, 해요.”

“아무것도 없는데 뭘 봤다는 거야, 멍청하게. 졸리면 잠이나 자.”

다시 창가를 내다봤다. 제이는 그새 건너편으로 넘어갔는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빨간불인데. 그런 생각을 얼핏 하다가 시선을 떼어냈다. 초록 불로 신호가 바뀌었다.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유진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가 볼품없이 하수구로 향했다. 노엘은 당최 유진이 이해 가지 않았다. 보내달라던 학교도 보내 주고 그림도 그리게 해주는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노엘로서는 납득 되지 않았다.

“씨발.”

노엘은 유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 특히 지금은 더 그랬다. 뭘 해줘도 구역질만 해대니, 성가시다 못해 속이 뒤집혀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앉아서 너 가방에 뭐 들어있는지 말해 봐.’

‘무슨…….’

‘씨발, 어떻게 바로 대답하는 법이 없어? ESL 안 들을 정도면 말귀 알아듣는 거 아냐? 뭐 있냐고.’

‘스케치북이랑 물감, 이요. 목탄도 있고…….’

‘무슨 물감? 수채화?’

‘네.’

‘씨발.’

신경질적으로 접시를 쓰레기통에 쑤셔 버리던 손이 멈칫했다. 노엘의 머릿속에서 지난 일이 스쳐 지나갔다. 노엘은 유진과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 없던 터라 말을 걸었던 것뿐이었다.

그림을 좋아한다길래 미술 도구라도 물어보면 조잘거릴 줄 알았는데 ‘네’란다. 고작 ‘네’. 노엘은 그 한마디 들으려고 말 붙이려던 저 자신이 환멸 날 지경이었다. 저딴 개새끼한테 자비를 베풀려고 했던 제 생각이 실수라 생각하면서.

“좆같이 구는 건 알아줘야 해.”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단백질 파우더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제 말을 듣는 건 마음에 들지만, 헛구역질을 계속하며 손을 떠는 모습은 상당히 거슬렸다. 쾅! 침실 문이 열리고 노엘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유진이 나타났다. 노엘은 물끄러미 유진을 내려다봤다. 또 울었는지 뺨에는 눈물 자국이 눌어붙었고 눈가에는 붉은 기가 맴돌았다. 노엘은 파우더를 내려놓고 유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짙게 내려앉은 속눈썹도, 둥근 코끝도, 불그스름한 입술도 전부 건드려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진.”

유진은 잠들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호흡을 뱉으며 상체를 들썩거릴 뿐이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힘없는 손이 움찔거리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노엘은 유진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반응이 없다. 완전히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자, 노엘은 아예 유진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는 그 위에 올라타 목덜미 위로 입을 맞췄다. 잠들었든, 잠든 척을 했든 상관없다. 노엘이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뿐이다.

“으음…….”

“잘 땐 이런 소리 잘 내면서.”

노엘은 잠투정을 부리는 유진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며 도톰한 부분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느덧 노엘의 손에는 욕망이 가득 차올랐다.

어디까지 건드려야 깨어날까. 노엘은 그런 생각으로 유진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티 하나만 걸쳐 입은 하얀 몸이 시야 안으로 들어오자, 노엘은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천천히, 손끝에 닿은 살결을 탐하던 그때, 노엘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씨발.”

노엘의 손이 거친 비속어와 함께 멈췄다. 오후 9시. 필립이 방문하기로 했던 시간이다.

띵동, 또 한 차례 초인종이 울렸다.

노엘이 유진의 목에 채워진 목줄을 풀어 주었다. 필립이 이곳에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다.

노엘은 움찔거리며 잠든 유진을 내려다봤다. 몸을 웅크린 모양새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려 주었다. 게다가 유진이 도망쳐봤자 노엘의 손바닥 안이다. 노엘은 유진의 뺨을 쓸어 만지고는 상처 위로 입을 맞췄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이젠 정말 나갈 시간이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노엘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필립을 서재로 데려갔다. 쿵, 문이 닫히면서 가벼운 안부 인사가 스쳐 지나갔다. 노엘은 필립을 마주했으나, 온 신경은 문 너머로 향했다. 절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노엘이 문 쪽을 힐끔 보다, 필립이 들고 있던 가방에 시선을 돌렸다. 저것만 아니었어도 문 열어주지 않고 유진을 물고 늘어졌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앉아요, 필립.”

“…아, 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 있던 필립이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노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필립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심부름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알베르트의 명령대로 유진을 데리러 온 게 뻔했다. 분명 본가로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노엘은 모른 척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필립, 그렇게 서 있으니까 꼭 잘못한 사람 같잖아요. 앉아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유진을 뉴욕으로 보내라고 말할 거면 괜히 오셨네요. 시간 아까운데 차 한 잔이라도 하고 가는 게 어때요?”

노엘이 웃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필립은 상냥한 미소 뒤에 감춰진 압박을 느꼈는지 대답 대신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 사건 이후로 유진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본가에 가면 분명 더 힘들어질 거예요. 굳이 아픈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야 해요?”

“유진이 목격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요?”

필립은 대답 대신 입을 닫았다. 노엘은 그 모습에 더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예거의 죽음 이후. 노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필립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음을 체감했다. 아무래도 그 앞에서 방아쇠를 당긴 게 원인인 듯싶다.

하지만 노엘은 후회하지 않았다. 감히 제가 데리고 있는 ‘개새끼’를 멋대로 눈에 담은 대가라고 여겼으니까. 노엘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내가 직접 해명할게요. 지금 당장 아는 기자들에게 전부 연락해서 인터뷰 잡아 주세요. 유진이 아니라, 내가 목격자라고 하면 괜찮을까요?”

“노엘!”

유진 역시 기사에 언급됐지만, ‘한 명의 목격자’라는 호칭 외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언론은 오로지 웨스틴의 자제가 경찰서에 등장했다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된 지금까지 노엘은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부친이나 알베르트의 영역에 작은 걸림돌이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럼, 유진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필요도 없잖아요. 근데 아버지가 좋아하시려나 모르겠네요.”

“노엘.”

“이제 겨우 잠잠해졌는데. 다 끝난 사건을 굳이 또 언급해서 시끄럽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중한 질문 따위가 아니다. 더는 제 말에 토 달지 말라는 신호다. 노엘은 빙그레 입꼬리를 올리며 필립을 쳐다봤다. 필립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입만 꾹 다물었다.

“노엘, 단지 유진을 본가로 보내자는 거예요.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단지?”

싸늘한 목소리에 필립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분명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어디선가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정말 이기적이네요, 필립. 지금 당장 유진을 이 앞에 데려올까요? 예거 넬슨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그만두겠어요?”

노엘이 미소를 거두고 필립을 응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따스한 미소를 보여줬던 그 눈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안 그래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유진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은데 별 잔챙이 같은 놈들이 자꾸만 끼어드니, 노엘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러면 안 되잖아, 요.’

‘뭐?’

‘가족, 흐으… 형이잖, 아요….’

아직도 아른거렸다. 하지 말라면서 울먹거리는 유진의 얼굴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본성 때문일까. 아니, 모든 건 유진의 탓이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내버려 둘 사람은 없다. 그걸 증명하듯 노엘의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목격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으셨을 거예요. 유진은 가문에서…….”

“네, 알아요. 인정받지 못하는 내 동생이죠.”

좆같다는 표현이 아니고서야 노엘의 심정을 대변할 수 없다. 노엘은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본가에 데리고 가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유진을 남에게 보인다고 상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필립만 아니었으면 지금 당장 유진을 품에 안고 물고 빨아들이며 박아대는 행위를 했을 것이다. 노엘은 답답함에 숨을 뱉었다. 물론 필립의 눈에는 동생을 보내기 싫어하는 모습으로만 보이겠지만.

“해결된 게 아니었나요? 총도 그 자백한 남자에게 줬잖아요.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 거죠?”

“그게 아니라….”

“아, 아버지 선거에 방해될까 봐 그러는구나.”

단정한 목소리가 필립의 가슴팍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내가 경찰서에 간 건 동생 때문인데. 그 동생은 우리 가문에 어울리지 않은 피를 가졌다는 게 알려질까 두려워서죠.”

노엘은 고개를 기울이며 필립과 시선을 마주쳤다. 필립은 대답 대신 눈을 피했다.

웨스틴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선악의 기준을 ‘혈통’과 ‘재산’으로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죄를 저지른 노엘보다 유진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노엘이 조소 섞인 웃음을 흘리며 차를 머금었다.

“근데 그것보다는 내가 총을 쏜 사실이 드러나지 않길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얘긴 두 번 다시 하지 않기로 했지 않았나요.”

“나 아직 그날 꼈던 장갑 안 버렸어요. 저기 금고에 잘 보관해 뒀거든요.”

“무슨…….”

“총을 쐈을 때 꼈던 장갑 말이에요.”

“노엘!”

필립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노엘을 쳐다봤다. 그럴수록 노엘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금고를 가리켰다. 필립의 두 눈이 커질수록, 노엘의 즐거움 역시 짙어졌다. 물론 저를 보며 바르르 떨어대는 유진의 모습에는 비교할 순 없지만.

그날, 노엘은 장갑을 낀 채 방아쇠를 당겼다. 장갑에는 탄약의 흔적이 묻어 있을 테고 그게 경찰에 알려지면 변명할 여지 없이 노엘이 예거 넬슨을 죽였다는 사실을 드러내야만 했다. 하지만 노엘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지 말아요.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필립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오랫동안 노엘의 곁을 지켜왔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행동한 적은 없었다. 가족이 필요해서, 가족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굴기에는 너무나 지나쳤다.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노엘,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웨스틴 씨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간다면 전시관과 에이전시에 내부 감사가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노엘이 가진 권리에 제한이 갈 거고요.”

“그것참 무서운 일이네요.”

“그게 아니더라도 유진에게 손을 쓰실 겁니다. 아니, 이쪽이 더 유력하겠죠. 노엘을 굳이 건드리지 않고 해결하는 방향이 빠르니까요.”

이 정도로 말했으면 별말 없이 유진을 보내 줄 것이라 예상했다. 이렇게 말한 필립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모두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노엘은 빙그레 입꼬리만 올렸다. 이런 일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필립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봐요.”

“네?”

“돈 있는 건 아버지나 알베르트뿐만이 아닌데.”

나른한 목소리를 끝으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노엘이 필립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던 찰나. 쿵, 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노엘이 미간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유진이 이 대화를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유진?”

“무슨 일이에요?”

“잠시만요.”

노엘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컴컴한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복도 끝 화장실에서 희미한 조명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이 개새끼가, 노엘은 터져 나오려는 욕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화장실로 향했다.

“우윽…….”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변기를 붙잡고 욱욱 대는 유진이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 또 구역질해 댔다. 그 모습에 노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누가 기어 나오래?”

“켁, 죄송…해요. 우윽!”

쾅! 노엘이 문을 닫자마자, 유진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유진은 반쯤 감긴 눈으로 헐떡이며 노엘을 바라봤다. 먹질 않으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건 당연했다. 얼마나 많이 구역질을 했는지, 유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고 입가에는 타액이 뚝뚝 새어 나왔다. 노엘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좆같네. 대체 뭘 얼마나 더 해줘야 해?”

“윽…….”

노엘은 수도꼭지를 틀어 손바닥에 물을 묻히고는 유진의 뺨을 거칠게 닦아 내렸다. 제 손길이 거친 것도 모르고 닦는 행위에만 집중했다. 유진은 콜록거리며 미세하게 어깨를 떨어댔다.

“너 누가 함부로 나오래? 목줄 다시 채워 줘? 얌전히 침대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누구 마음대로 기어 나와?”

“죄, 죄송해요. 근데 초인종 소리가 계속 들, 우욱…….”

유진은 노엘의 손을 빼내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먹은 것이 없어 나올 게 없는데도 연달아 헛구역질을 해댔다. 노엘은 빨리 필립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이 있으니, 제 성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노엘은 유진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화장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커다란 손이 문고리를 돌리던 찰나 희미하게 발소리가 들렸다. 필립이 앞에 서 있는 모양이다.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여기 있어.”

가학적인 명령에 유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입을 틀어막았다. 노엘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이 자리에서 범하고 싶었으나, 방해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노엘은 작게 숨을 쉬며 처연한 표정과 함께 문을 열고 나왔다. 달칵, 문이 닫혔다. 노엘의 예상대로 복도에는 필립이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늘 있는 일이에요. 유진이 그날 이후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몸이 많이 안 좋아졌거든요. 이런 애를 어떻게 뉴욕에 보내라는 건지.”

“볼 때마다 아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신경 안 쓰잖아요, 필립은.”

노엘은 필립을 힐끔 쳐다봤다. 아닌 척하지만, 마음 무거운 것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말이 필립의 죄책감을 건드린 것 같다. 어두운 낯빛을 보아하니, 알베르트에게 제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것 같다.

노엘은 속상한 낯빛으로 필립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노엘의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어쨌든 이만 가주세요. 유진을 돌봐야 하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노엘의 의견을 전해 드리겠지만, 본가에서 연락이 온다면 그땐 저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청하신 물건은 서재에 두었습니다.”

노엘은 필립을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노엘은 빙그레 웃으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덜컥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노엘의 귀에 가볍게 들려왔다.

“참, 필립.”

“네?”

“브루노 의원님께 전시회 초대권 두 장 보내 주세요. 작은 선물이랑 같이 부탁할게요. 얼마 전에 우리 전시관에 방문했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직접 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브루노 의원, 이라면 브루노 밀러 의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브루노 밀러. 그는 부친이 소속된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 측 인물이다. 게다가 상, 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브루노 의원은 원내 대표도 아니었다.

즉, 초대권을 보내라는 것은 자리를 만들라는 의미였다. 필립은 가만히 노엘을 올려다봤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연락 기다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노엘은 현관문을 잠갔다. 철컥, 잠금장치가 돌아가자 노엘이 곧장 서재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선 유진이 있는 화장실로 가고 싶었으나, 두려움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데려가고 싶었다. 노엘은 바닥 치는 인내심을 꾹꾹 누르며 필립이 놓고 간 가방을 열어 재꼈다. 커다란 가방 속에는 거래 일정에 대한 보고서와 상자 두 개가 있었다.

먼저 열어본 상자는 총기와 탄환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노엘은 총을 꺼내 천천히 쓸어 만졌다. 원체 제 것에 대해 집요한 노엘이었다. 그래서 금고에 있던 물건이 사라진 것에 꽤나 신경 쓰였기에 필립을 시켰던 것이다.

총의 종류는 휴대하기 편한 권총이었다. 노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금고문을 열었다. 장갑의 옆자리에 총기와 탄환을 내려놓았다. 철컹, 금고문이 닫히고 노엘은 다른 가방에 있던 또 다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피어싱 3개가 들어있었다. 피어싱에 달린 보석은 하나 같이 사치스러운 빛을 뿜었다. 노엘이 조명에 따라 반짝이는 보석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난번 유진의 안에 쑤셔버렸던 다이아몬드 원석은 지하실 어딘가를 뒹굴고 있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원석을 구매해 필립에게 맡긴 것이다.

“한 번에 다 달면 재미없는데.”

노엘은 피어싱이 든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어디에 달지는 바르르 떨어대는 유진의 모습을 보며 결정하기로 다짐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유진이 나타났다.

“유진.”

나지막이 부르는 음성에도 유진은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채 덜덜 떨어댔다. 노엘의 발끝만 겨우 바라보는 모습이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표현하는 듯했다.

“나 쳐다봐.”

“노엘 누가 온, 것 같아요.”

“필립 보내고 왔어.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

“흐으, 흡.”

“어서.”

유진이 히끅거리며 노엘의 앞으로 다가갔다. 발목이 낫지 않아 절뚝거리는 모양새도, 뭐가 그리 두려운 건지 건드리지 않아도 벌건 눈매도 노엘을 자극했다. 노엘은 유진이 제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번쩍 들어 안아 침실로 데리고 갔다.

“개새끼, 혼자 못 자는 것 같으니까 오늘도 재워줄게.”

“밖에 누가 온 것 같은, 데요.”

노엘이 유진을 침대 위에 눕히며 침대 헤드에 연결된 목줄을 채워 주었다. 이제 익숙한 건지, 유진은 목줄에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힐끔거리며 창밖으로 고갯짓을 할 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장난해? 누가 왔는데.”

“흐…….”

유진의 뺨이 어김없이 손찌검으로 돌아갔다.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유진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낮부터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는 거리에서 수사관을 봤다고 하질 않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얘기했다. 또 무슨 개수작일까. 노엘은 거칠게 숨을 뱉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다시 대답해 봐. 누가 왔는데. 필립이 너 구하려고 왔대?”

“아니에요. 잘못 들었나 봐요.”

유진이 멍한 눈으로 노엘을 쳐다봤다. 텅 빈 동공과 축 늘어진 팔다리를 보자, 노엘은 왠지 짜증이 났다. 고분고분해지길 기다렸으나, 왠지 텅 빈 껍데기를 안아 드는 기분이라 썩 좋지만은 않았다. 노엘은 억지로 유진의 턱을 움켜쥐었다.

“키스해 봐.”

“…….”

“어서.”

노엘은 알고 있다. 유진이 자신과 입을 맞추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 시키고 싶다. 감히 지 까짓 게 뭔데 싫어하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진은 힘없이 눈을 끔뻑거리며 노엘에게 입술을 포개었다.

여전히 형편없고 서툴기 짝이 없는 키스였다. 그럼에도 노엘을 달아오르게 하기는 충분했다.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바르르 떨어대며 눈치 살피는 움직임은 절박해서 금방이라도 집어삼키고 싶었다.

유진의 등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점점 내려갔다. 노엘은 유진을 재워 주려고 했다. 다만 조금 농밀한 방식일 뿐이다.

* * *

언제부터인가 잠을 자는 게 두려웠다. 또 다른 내일이 나를 기다리는 게 무서워서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게 더 끔찍했다.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이 매일 같이 꿈속으로 되돌아와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유진. 너 살인범이야, 그 꼴로 돌아다녀도 돼?’

‘아, 아니, 아니야. 나, 나는 그런 사람이…….’

‘지금 내가 바로 전화 끊고 신고하면 어떻게 될까?’

오늘도 똑같은 꿈이다. 컴컴한 방에서 목소리만 끊임없이 울리는, 지독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등 뒤에 칼을 감춘 것도 모른 채 손 내민다고 믿었던 예거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아냐, 아냐. 제발, 그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가 뒤이어 흘러들어왔다.

‘적응 못 하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좀 구세요. 모든 유학생이 적응 못 한다고 유진처럼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다니지 않는다고요.’

‘쟤가 걔 아냐? 그 죽은 애랑…….’

‘야, 듣겠다. 총 맞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자고.’

나를 향해 수군거리던 목소리들도 이어서 찾아왔다. 그만 듣고 싶다. 가장 괴로운 건 지금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꿈이 슬픈 이유는 이루어질 수 없는 행복한 일을 겪어서라고. 하지만 내겐 달랐다. 애초에 괴롭힘을 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고통스러운 메아리를 들어야만 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유진.”

그때,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이 돋아났다.

“흐… 제발, 제발…….”

“나는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믿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바닷속에 던져진 것처럼 입도 벙긋할 수 없다. 어느샌가 나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빛 하나 남겨지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갈 희망 같은 건 없다.

내 목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주던 찰나,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우윽.”

일어나자마자 식은땀과 헛구역질이 반겨 주었다. 노엘은 서재에 간 건지 옆자리가 비워졌다. 멍하니 침대 시트를 바라보다, 목이 허전한 게 느껴졌다. 채워져 있어야 할 목줄이 없어졌다. 이젠 허전할 지경이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목덜미를 꼬집었지만, 손끝에는 살갗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설령 돈과 여권이 내 손에 있다고 해도 달아날 수 없다. 망가진 발목이 그걸 말해 주고 있고 티셔츠 자락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가 내 실수의 결과를 보여줬다. 노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그저 멍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다 침대에 누웠다.

띵동―.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에 시트를 움켜쥐었다. 내가 나간다면 노엘에게 더 얻어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시트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또다시 초인종이 울려 퍼졌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미친 듯이 울리는 벨 소리는 나를 잡으러 온 것 같았다.

“흐….”

귀를 틀어막고 시트 속에 웅크려도 초인종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띵동, 띵동, 띵동― 쾅쾅쾅!!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노엘에게 뺨을 얻어맞았을 때처럼 머릿속이 울려댔다. 노엘은 어딜 간 걸까. 내가 도망치는지 시험하기라도 하는 걸까. 바르르 떨며 베개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떨림도, 나를 부르는 초인종 소리도 멎지 않았다.

“우욱…….”

헛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상체가 들썩거리며 숨통을 조여 대는 느낌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노엘을 찾으러 가야 했다. 누군가가 나를 잡으러 온 것 같다고 알려줘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노엘뿐이었다.

혹시 예거 사건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걸까? 낮에 봤던 제이가 떠오르자 불안함은 배가 되었다. 힘없는 다리를 이끌어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더는 초인종 소리도, 거칠게 문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복도를 맴도는 불안한 호흡만 들릴 뿐이다.

“하아….”

아무래도 누군가 집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다. 소란이 가라앉았지만, 속이 메스꺼운 것은 그대로다. 내가 직접 노엘을 찾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꿈에서 봤던 장면이 내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아났다. 나를 망가뜨린 사람을 유일하다 인식하는 나 자신이 싫다. 언제부터일까. 내 모든 것을 노엘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

그때, 바로 앞에서 노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 몸뚱어리는 서재 앞에 있었다.

‘유진이 목격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요?’

노엘과 필립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아무래도 필립은 그 사건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다. 필립이 초인종을 눌렀겠지 싶어 참았던 숨을 뱉었다. 대화를 완전히 듣지 않아도 내 이름이라든가 ‘목격자’ 같은 단어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내가 직접 해명할게요. 지금 당장 아는 기자들에게 전부 연락해서 인터뷰 잡아 주세요. 유진이 아니라, 내가 목격자라고 하면 괜찮을까요?’

‘노엘!’

노엘은 나 대신 자기가 나서겠다고 했다. 분명히 저것도 연극이겠지. 남 앞에선 사람 좋은 행색 하면서 나를 망가뜨리려는 속셈이겠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꽉 쥔 채 서재 앞을 서성거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목격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으셨을 거예요. 유진은 우리 가문에서…….’

‘네, 알아요. 인정받지 못하는 내 동생이죠.’

노엘의 입에서 나온 ‘동생’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짓눌렸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이런 가혹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하룻밤의 잘못된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할 만 한 일이었을까.

그런 의문에 눈물만 뚝뚝 흘렸다. 문을 열고 모두 거짓말이라 외칠 용기 따윈 없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계속되는 헛구역질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믿을 수 없는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총도 그 자백한 남자에게 줬잖아요.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 거죠?’

총을 자백한 남자에게 줬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장이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총? 자백한 남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들은 건지 파악되지도 않았다.

‘근데 유진. 네가 정말 예거 넬슨을 죽였어?’

‘아, 아니에요! 저, 정말 아니에요. 매, 맹세해요.’

‘그럼 나한테 준 음료수에도 아무것도 안 탔겠네?’

‘그, 그건…….’

덤덤하게 말을 건넸던 노엘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노엘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추측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연필심처럼 머릿속이 닳아버리는 기분이다. 노엘 역시 예거 사건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가슴 위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절망감은 절뚝거리는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저 멍청하게 주춤거리며 서재에서 뒷걸음쳤다. 툭, 등 뒤에 차가운 벽이 맞닿자 내가 물러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덜덜 떨며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천천히 되짚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노엘이 이 사건에 연관됐다는 사실을 떨쳐낼 수 없었다.

‘넌 그런 짓을 할 수 없으니까 죽였을 거라고 생각 안 해.’

그래서 믿어준 걸까.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아무 감흥 없는 눈으로 쳐다본 걸까. 그날, 내게 추궁했던 노엘의 시선을 떠올리자 온몸을 맴돌던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근데 그것보다는….’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쾅쾅쾅쾅!

그때, 또다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신경질적으로 다가오는 소음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꼈던 장갑 안 버렸어요. 저기 금고에 잘 보관해 뒀거든요.’

노엘과 필립은 초인종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화에만 집중했다. 살려달라고 빌어 봐도 두 사람은 나를 구해주기는커녕, 절망 끝으로 걷어 차버릴 것 같았다. 도망쳐야 했다. 아니, 숨어야만 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를 해하려는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침실로 가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그만해 주세요, 제발…….”

변기 옆 공간으로 들어가, 머리를 감싸 쥐며 바르르 떨어댔다. 계속 들리는 초인종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아 변기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멀건 타액만 뚝뚝 떨어졌다. 그러던 중에 곧 이게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화장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욱…….”

숨어야 하는데. 당장 구석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메스꺼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장이 꼬인 듯한 느낌에 머리가 핑글 돌아가는 증상까지 느껴졌다. 쾅쾅거리며 문 두드리는 소리마저 커졌다. 차라리 잡혀서 죽는 게 낫다 싶었다. 힘없이 헐떡이던 그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노엘이었다.

“누가 기어 나오래?”

“켁, 죄, 송해요. 으…….”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리며 억지로 시선 마주치게 했다. 신기하게도 노엘을 마주하니, 초인종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어서 나오라고 문 두드리는 소리도 멎었다. 헐떡거리며 내 뺨을 씻겨 내리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노엘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봤다.

“너 누가 함부로 나오래? 목줄 다시 채워 줘? 얌전히 침대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누구 마음대로 기어 나와?”

“죄, 죄송해요…. 근데 초인종 소리가 계속 들…… 우욱.”

묻고 싶었다. 당신이 예거의 죽음에 어떤 관련이 있냐고. 정말 이 세상에는 당신 외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인지 입을 열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허락된 것은 여기 있으라는 것밖엔 없었다.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여기 있어.”

빌어먹게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노엘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눈앞에 노엘이 서 있으면 무서운 소리가 멎는 우연이 일어났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노엘을 바라봤다.

하지만 요청할 수 없었다. ‘개새끼’가 감히 명령을 했다면서 뺨을 맞을 게 뻔했으니까. 그저 끅끅 터지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을 뿐이다.

처음으로 당신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나 자신을 누구보다 역겨워하며 가여워했다.

* * *

“오늘 몇 시에 끝나?”

날이 밝아도 정신은 맑아지지 않았다. 어젯밤 내가 들었던 대화를 도무지 잊을 수 없다. 자백한 남자에게 총을 줬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 노엘이 범인을 알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먹지도 못하는 샐러드와 고기만 뚫어지라 쳐다볼 때, 노엘이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유진.”

“네?”

“수업 몇 시에 끝나냐고.”

“세, 세 시쯤이요. 데, 데리러 오실 거면 제가 그냥, 그냥 혼자…….”

시간표를 꿰차고 있는 사람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노엘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는 눈빛에 숨이 막혔다.

“아침부터 기분 좆같이 만들지?”

“죄송해요. 수업 끝나고 바로 내, 려갈게요.”

씹어뱉듯 말을 건네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시선을 마주칠 수 없다. 노엘이 예거의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생각을 하자, 얼굴을 마주 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티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범인을 밝히겠다는 거창한 목표 때문이 아니라, 위험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다.

“뭐야, 왜 이렇게 떨어?”

그때, 노엘이 내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차갑고 커다란 손이 이마에 얹어지자 저절로 어깨가 흠칫거렸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좁히며 손을 떼어냈다.

“열은 없는데.”

“죄송, 해요…….”

“뭐?”

곧바로 날이 선 목소리가 돌아왔다. 괜히 말했다. 괜히 용서를 빌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노엘이 낮게 욕을 지껄이며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은 통증에 입이 벌어졌다. 이어서 고기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삼켜.”

“흐… 못, 먹겠…….”

“몇 대 쳐 맞아야 먹을래? 씨발, 좀 삼키라고.”

“우윽….”

입안에 밀려오는 음식물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노엘을 생각하면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끅끅거리면서 힘겹게 음식물을 삼켜 내었다.

접시 하나가 비워질 때까지 노엘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토악질해댄 것처럼 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빌어먹을 개새끼.”

위압적으로 말하는 노엘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죄송하다고 빌 힘도 없었다. 아무 감정 하나 없는 텅 빈 눈으로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나를 놓아주면 그만인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옷 갈아입고 내려와.”

노엘은 신경질적으로 나를 밀어내곤 2층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떨림은 가시질 않았다. 띵동, 또 한 번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엘의 부재를 기다린 것처럼. 울음을 삼키며 창문 쪽으로 다가가 현관을 내다봤다. 하지만 현관문 앞에는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학교까지 도착했는지 알 수 없다. 멍한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을 때 북적이는 강의실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강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퍽! 지나가던 백인 하나가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쳐댔고 그 반동으로 차가운 바닥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친놈.”

나를 쳤던 남자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욕을 뱉고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어깨가 얼얼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내가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깨를 감싸 쥐며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내 앞으로 거친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괜찮나?”

제이였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지, 제이는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여긴 또 어떻게 왔을까. 아직도 예거에 대해 조사할 게 남은 걸까. 제이가 왜 자꾸 학교에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경계심을 낮추지 않고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러자 제이는 작게 숨을 뱉으며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일주일 뒤에 온다고 해놓고 또 마주치니 뭔가 민망한데.”

제이가 뺨을 긁적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어쩐지 가엽게 바라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선을 외면하고 고개 숙였다.

“함부로 잡아서 미안하지만, 일어나는 법을 까먹은 것 같아서 지나칠 수 없었어.”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간간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속닥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예거 사건에 얽혀 있는 데다 수사관까지 마주하니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주변 시선이 따가워 힐끔대다 제이를 지나쳤다.

“유진.”

그때, 제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필이면 노엘과 함께 지나갔던 복도다. 강의실에서 저질렀던 행위가 떠올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제이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졌다. 노엘과 확연히 다른 조심스러운 느낌이다.

“오늘은 알고 있는 게 뭔지 묻지 않을게.”

손길보다 더 조심스러운 건 제이의 목소리였다. 배려 깊은 음성에 감았던 눈을 떴다. 제이는 동정심이 아닌, 진심으로 날 걱정한다는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응시했다.

“위로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지난번에 공원에서 너한테 실수한 것을 만회하고 싶거든.”

제이가 미간을 좁히며 내 앞으로 사탕을 내밀었다. 새빨간 사탕에 시선이 쏠리면서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고작 입술을 달싹였을 뿐인데, 아직 한마디도 채 하지 못했는데 눈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그쪽은 왜 제가 이런, 모습일 때만 나타나요?”

“혼자 울면 창피할 테니까.”

경계심을 풀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취조실에서 봤던 제이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랜만에 듣게 된 따스한 말 한마디가 가슴을 두드렸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옆에 있어 줄 사람 필요하잖아, 너.”

“내가, 나는… 흐윽…….”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물을 뚝뚝 흘려보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내 등을 떠밀며 어딘가로 데려갔다. 싫다고 밀어내야 하는데, 비키라고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은 떨어지질 않았다.

천천히 제이가 이끄는 대로 복도를 나섰다. 제이의 말대로 나는, 그 어느 것보다 내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쩌다 보니’라는 말로 변명할 수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노엘과 얽히게 된 것도, 지금 이 순간처럼 제이의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는 일도 어쩌다 보니 일어났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 스스로를 탓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제이가 내 손목을 잡아끌어 내렸다.

“그러지 말고 화를 내.”

“네?”

“너 스스로한테 화내지 말고 말을 하라고. 네 말 들어주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잖아.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다고.”

“흐…….”

제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건물 뒤편 주차장이었다. 공터에 가까운 장소라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다. 제이의 말이 맞았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풀이해댔다. 무엇이든지 나를 탓하는 게 그나마 마음 편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눈꺼풀이 팅팅 부어오르고 목이 따끔거릴 때까지 울음을 토해냈다. 그래도 제이는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말없이 투박한 손길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어도 괜찮다고, 내가 울어도 때리지 않겠다고. 오랜만에 다정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투욱 흘러내렸다.

“……옆에, 있어 줘서 감사해요. 그쪽이 옆에 없었으면 많이 창피했을 거예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숨을 뱉었다. 제이는 아무 말 없이 사탕을 까서 내밀었다. 상처 가득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사탕을 집어 먹었다. 하도 울어서 그런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내며 눈꺼풀을 비볐다. 손가락 마디마디 눈물이 축축하게 묻어났다.

“딸기 맛은 별론가.”

“아, 아니에요. 근데 계속 여기 계셔도 돼요? 괜히 저 때문에…….”

“얘기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신경 쓰지 마.”

“……네.”

제이가 내 등을 툭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무뚝뚝한 표정만 지을 줄 알았는데 웃기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는 사탕을 오도독 씹어대면서 제이를 바라봤다. 너무 뚫어지라 쳐다봐서 그런지, 제이는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유진.”

“네?”

“원래 이런 말 안 하는데 지난번엔 미안했어.”

“무슨…….”

“공원에서 말이야.”

어떤 말도 듣지 않고 바로 수갑 채우던 그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슴이 짓눌러지는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제이는 작게 숨을 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현장에 있던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당연히 네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어. 너라서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상황을 보고 판단했던 거였어.”

“……아니에요,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사탕을 깨물었다. 오도독 소리와 함께 남은 사탕이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왠지 더 먹고 싶은 느낌이 들어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때, 제이가 내 앞으로 사탕 하나를 더 내밀었다.

“사탕 좋아하나 봐.”

“싫어하진 않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제이는 사탕 껍질을 까서 손바닥 위로 올려 주었다. 동전보다 조금 더 큰 사탕이다. 새빨간 게 먹음직스러워 보여 당장 입안에 넣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헛구역질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 걸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걸까. 제이를 힐끔 보다가 사탕을 입에 넣었다.

“더 챙겨올 걸 그랬나. 이게 마지막이야.”

“아니에요. 이걸로 충분해요. 근데 그쪽도 사탕 좋아하나 봐요.”

“내 조카가 잘 울어서 사탕을 항상 들고 다녀.”

“조카요?”

“네가 애 같다는 게 아니라, 이런 젠장.”

주절주절 자기 얘기를 꺼내던 제이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앞머리를 넘겼다. 그 모습이 왠지 우스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멋쩍게 사탕을 입에 넣으며 오도독 씹어댔다. 여전히 사탕에선 딸기 맛이 나질 않았다. 유리구슬을 삼키는 듯한 느낌이다.

“저 고등학생 때요, 친구 사귀는 게 겁나서 입학식 날 학교 가기 싫다고 아픈 척했거든요.”

갑자기 내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조카가 잘 울어서 사탕을 들고 다닌다는 그 말에 엄마가 떠올랐다. 제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쳐다봤다. 여전히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텅 빈 거리가 있었다.

“그냥 막연히 두려웠던 것 같아요.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나 혼자만 다른 학교로 배정받았거든요.”

“그럴 수도 있지.”

“하도 겁을 먹으니까 엄마가 사탕 한 봉지 사줬어요. 이거 친구들한테 나눠주면서 얘기해보라고. 갑자기 그때가 생각났어요.”

돌아가신 엄마를 어렴풋이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프다고 거짓말해서 지금 이렇게 벌 받은 건가 싶은 허무맹랑한 생각이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노엘 웨스틴이 네 형이라고 했지?”

듣고 싶지 않은 그 이름에 사탕 씹던 것을 멈추고 제이를 쳐다봤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제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불편한 얘기 하게 해서 미안. 근데 그날 네 모습을 잊을 수 없었어.”

“아, 그건…….”

“그 집안은 핏줄 따지기로 유명한 곳이라.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면 벌써 신문에 나왔을 텐데 어디에도 네 얘기는 보이지 않더군. 널 동생이라고 하니까 믿기 어려웠어.”

나조차도 그랬다. 어디 하나 닮은 구석 없는데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멍한 눈으로 제이를 쳐다봤다. 제이는 뺨을 긁적이며 작게 숨을 뱉었다.

“제일 궁금한 건 네가 왜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던 걸까, 싶어서. 그래서 눈을 뗄 수 없는 것 같아.”

마지막 말만 아니었어도 나는 제이를 믿지 않으려고 했다. 이 사람도 예거처럼 나를 속이고 달아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경찰이라는 확실한 지위는 더더욱 믿음을 주지 않았다. 제이가 내뱉은 마지막 문장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곧바로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너 우는 거 아무도 몰라, 나만 알고 있잖아.’

노엘의 말과 다르게 내가 우는 걸, 처절하게 무너지는 걸 본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제이는 애써 웃으며 내 등을 툭 두드려 주었다.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돼.”

“…….”

“그리고 이미 다 끝난 사건을 계속 들쑤시니까 내부에서 좋지 않은 얘기를 하더군.”

“네? 그게 무슨…….”

이미 다 끝난 사건이라는 말에 지난밤 내가 들었던 대화를 되새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엘이 자백한 남자에게 총을 주었고 금고 속에 ‘그날’ 꼈던 장갑을 넣어놨다는 섬뜩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진? 괜찮아?”

“흐…….”

제이에게 말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말한다면 무언가 도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제이 역시 잘못되면 어쩌지? 온갖 불안한 생각이 피어오르면서 손이 떨려왔다.

그때, 제이가 내 손등을 툭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별 얘길 다 했군. 놀라게 해서 미안해, 신경 쓰지 마. 나도 이제 이 사건에서 손 털 거니까.”

“어째서, 요?”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노엘이라면 이 자리에서 뺨을 후려쳤겠지만, 제이는 달랐다. 그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잘리고 싶지 않아서지, 뭐. 난 그렇게 사명감 넘치는 수사관이 아니야.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도 있고. 할 만큼 했어.”

“그럼, 이제 올 필요가 없으시겠네요.”

“그런 셈이지.”

고작 몇 번 마주친 사람일 뿐인데. 나랑 몇 마디 나눴다고 그새 아쉬워하는 게 스스로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사탕을 오도독 씹어 삼켜내던 찰나, 제이가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종이를 찢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 주는 금요일이 제일 한가해.”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쪽지다.

“그래도 얘기 들어줄 사람 필요하면 나한테 전화해. 찾아와도 상관없어. 물론, 근무 중엔 받을 수 없겠지만.”

쪽지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필요하면 전화하라는 말에 가슴이 저릿했지만, 제이는 미소 지으며 내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안 온다고 했지, 안 만나고 한 적은 없던 것 같은데.”

대놓고 아쉬워해서 그런 걸까. 제이가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짝 누르며 흔들어댔다. 가볍지만, 어쩐지 기분 좋은 움직임이다. 쓰다듬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예외다. 나도 모르게 제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연락, 늦게 해도 괜찮아요?”

“얼마든지.”

“어쩌면 할 말이 생길지도 몰라서요.”

고개를 올려 제이의 시선을 마주쳤다. 제이는 한참이나 나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주머니 속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내 입에 물려주었다.

이상하다, 분명 아까 줬던 게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입안으로 사탕이 밀려 들어왔다. 여전히 아무 맛이 안 났다. 멍하니 제이를 바라보며 오도독 사탕을 씹어댔다.

이 편안함을 계속 만끽하고 싶다. 감히 욕심을 부려도 될까. 언제까지나 목줄에 걸린 개새끼로 살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과 함께 눈을 감았다. 산뜻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아무것도 없는 푸른 하늘이 어쩐지 슬프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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