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는 당신을 담아낼수록 희미해졌다.
경찰서에서 끌려 나온 이후, 나는 달아나기를 포기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줄 알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끔찍한 동네에서 벗어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보란 듯이 나를 비웃었다.
나의 일상은 하얀 와이셔츠 하나만 달랑 걸쳐 입고 노엘이 정해준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학교도 못 간 지 오래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살인 사건에 휘말린 충격 때문이라고 했지만, 노엘이 허락하지 않아서 나갈 수 없었다.
지금은 거실에 앉아, TV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고작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들여다봐야만 했다. 이 역시 내 의사와는 무관했다. 멀쩡한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소파와 이어졌다.
더 멍청해지지 말라는 뜻인가.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던 도중, 뉴스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밤, 캘리포니아주 포모나시의 공원에서 시신이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한편, 이 사건으로 개인 사업가 노엘 웨스틴 씨가 경찰서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허, 으…….”
뉴스 화면 속에 노엘의 사진이 나타났다. 사진이어도 역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손에 힘이 풀려 쥐고 있던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아직도 겁이 났다. 내게 가혹한 짓을 저지르면서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으니까.
“뭐 해?”
“그게…….”
뒤에서 드리워진 그림자에 몸을 떨었다. 노엘이었다.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나온 건지, 노엘은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내 옆에 앉았다.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어댔다. 또 맞을까 봐 겁이 나 얼른 리모컨을 주워 TV를 껐다.
“말을 할 거면 쳐다보고 얘기해. 내가 어려운 질문 했어? 뭐하냐고 물었잖아.”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벌벌 떨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이런 내 모습이 짜증 났는지 노엘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움켜쥐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로 안 하면 대답도 안 하겠다는 건가? 유진.”
“죄, 죄송해요. 그, 그냥 볼 거 없어서 채널 도, 돌리다가 뉴스가 나왔, 는데.”
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맞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발목은 시큰거렸고 허벅지 안쪽에는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으니까. 덜덜 떨며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여전히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슨 뉴스.”
“예, 예거… 사건…… 이요.”
더듬거리며 노엘의 시선을 마주쳤다. 온 힘을 다해 눈을 바라봤다. 그때, 노엘의 손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서늘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
정말 이상한 것은, 끔찍한 시신을 마주친 기억보다 나를 끌어안는 노엘이 두려웠다는 점이다.
“네가 죽인 게 아니라며.”
“네, 그건 그런데…….”
직접적으로 말하는 입술로 시선이 옮겨졌다. 끔찍한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입술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느 순간 노엘은 내 턱을 움켜쥐며 제 품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심장이 딱딱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손찌검을 당할까 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근데 뭐.”
“네, 네?”
“뭐가 문젠데.”
“아니에요,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 해요. 저 그림, 그려도 돼요?”
“벌벌 떨면서 무슨 그림? 그냥 가만히 있어.”
“하, 한 시간만이라도…….”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엔 한 시간은 부족했다. 이대로 가다간 입을 맞출 것 같은 예감에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핑계를 댔다. 파르르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노엘은 봐주지 않았다. 내 턱을 움켜쥐어 멀어진 것만큼 가까이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좁혀진 간격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키스는 하고 싶지 않다. 어떤 행위도 상관없지만, 입술을 맞대며 호흡을 나누는 짓을 노엘과 하는 일이 없으면 싶었다.
“너 씨발 뭐해?”
“죄송, 해요……. 근데 아니, 아니에요…. 그냥 가만히 있을게요.”
힘없이 고개를 내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노엘의 커다란 손바닥이 뺨을 갈길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타액에 젖은 혀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생각에 벌써 두려움으로 물들여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노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린 눈으로 내 턱을 움켜쥐기만 했다.
“왜? 너 키스 잘하잖아. 나한테 약 먹이려고 키스했던 거 잊었어?”
“그, 그건…….”
“해 봐.”
“네?”
“나한테 키스하라고. 그림 그리고 싶다며.”
노엘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시선을 마주쳤다. 나를 산산조각 내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덜덜 떨며 노엘의 옷깃을 붙잡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못하겠어?”
죽어도 키스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노엘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형제라면서, 형제끼리 왜 이런 행위를 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 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노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스스로 입술을 맞대는 행위를 할 수 없었다.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는데 노엘이 내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억지로 쳐다보게 했다. 어쩐지 노엘은 심사가 뒤틀린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그림 그리지 마, 씨발 오늘은 계속 지하실에 틀어박히면 되겠네.”
“아, 아뇨! 죄, 죄송해요. 하, 할게요. 할 테니까 제발, 흐윽…….”
지하실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듯이 몸이 덜덜 떨려왔다. 컴컴한 계단 밑으로 내려간다면 나는 욕구 해소의 수단이 될 것이다.
어느샌가 눈물로 시야가 가려졌다. 노엘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때다 싶어 그대로 입술을 맞대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입술 틈 사이로 들어갔다. 짠 기운이 입안에 맴돌면서 나 자신이 볼품없게 느껴졌다.
“키스 존나 못하네, 우리 개새끼.”
모욕적인 말과 함께 노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치스러움보다 맞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낀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한 시간만 그려. 그 이상은 안 돼.”
“……네, 감사해요.”
노엘은 내게 스케치북과 목탄, 지우개, 그리고 커터칼을 갖다 주고 방으로 올라갔다.
하루 중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림을 그리면 잠깐이나마 나의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오늘은 뭘 그려야 할까. 손이 가는 대로 목탄을 움직였다. 하지만 힘 조절이 안 되어서 계속 뚝 뚝 부러졌다.
별거 아닌 일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시꺼먼 자국을 남기며 부러지는 모양새가 꼭 나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손바닥에는 온통 숯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서글프게 느껴졌다. 아무리 비벼도 손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꺼먼 자국을 내려다봤다.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흐…….”
마음 같아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싶다. 하지만 이보다 더 모욕적인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끅끅거렸다. 그래도 울음소리가 새어나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절박한 마음에 손목을 물어뜯으며 울음을 삼켜내었다.
“흐읍, 흐윽…….”
그래,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자. 분풀이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나고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죄인이다. 한참을 훌쩍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문득 테이블에 올려진 커터칼이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이 멍하니 커터칼을 집어 들었다. 목탄을 깎으려고 가져온 것이었는데 이제는 숯덩이 대신 내 아픔을 깎을 차례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매서운 날이 튀어나왔다. 금방이라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에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래도 분을 풀 수단은 이것밖에 없다. 천천히 서늘한 날을 손목 위에 갖다 대었다.
“이 씨발, 개새끼는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면 지랄이야.”
칼날이 살결을 향하던 찰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깜짝 놀라 어쩌지도 못하고 커터칼만 잡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노엘은 화가 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음성에 다리가 저절로 떨렸다.
“죽고 싶어?”
“아흑!”
성큼성큼 다가온 노엘은 내 손에 들린 커터칼을 거칠게 낚아채어 집어 던졌다.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이 뺨으로 날아들었다. 경찰서에서 돌아오던 길에 맞은 것보다 더 아팠다. 살려달라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윽윽거리며 노엘의 손에 놀아날 뿐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었어? 그래?”
한참 손찌검하던 노엘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시선을 마주쳤다. 티 하나 없던 눈동자가 벌게진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망가지면 누구보다 좋아할 사람이 노엘이니까.
“그래, 개새끼야.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해줄게.”
“윽!”
철컥, 발목을 옭아매던 족쇄가 떨어지면서 나는 속절없이 지하실 아래로 끌려가고 말았다. 감히 노엘의 허락 없이 행동했다는 대가는 잔혹했다.
* * *
쉴 틈 없이 바쁜 이들로 붐비는 뉴욕 맨해튼. 사방이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였지만,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거대한 빌딩이 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은 건물은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는 듯 차가운 냉기를 내비쳤다.
그 빌딩의 주인은 웨스틴 일가였다. 온갖 사업을 주도하여 자신들이 가진 부를 과시하는 경향이 번쩍이는 건물 외관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 오만한 빌딩 앞에 필립이 걸음을 멈췄다. 겁 없이 들어갔던 필립이지만, 오늘만큼은 내키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때문이다.
일명, ‘포모나시 대학생 살인사건’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약물을 얻지 못한 중독자가 충동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자백하면서 수사는 종결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실상은 거액의 돈을 받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생을 판 사람이었지만, 세상은 알지 못했다. 그저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신사’라고 불리던 사업가가 왜 얽혔는지에만 주목했을 뿐이다.
노엘이 경찰서에 방문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언론은 웨스틴 일가를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물질과 혈통에 집착하며 고고한 척만 해댔던 웨스틴 일원이 왜 이런 끔찍한 사건에 얽혔는지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노엘뿐만 아니라, 일가 사람 모두가 주목을 받았다. 필립이 오늘 이 빌딩으로 호출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유일한 구원이 된다면. 더는 억지로 붙잡아둘 필요 없이 스스로 내 손 안에 들어오겠죠.’
‘노엘!’
‘그래서 방아쇠를 당겼어요.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필립은 아직도 그날의 노엘을 잊을 수 없다.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는 눈빛이 선하게 그려졌다. 그 이후, 필립은 노엘 역시 이 일가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친절함과 선함은 철저하게 달랐으니까.
“하, 미치겠군.”
여기서 서성여봤자 소용없다. 필립은 한숨을 푹 쉬며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엄격한 보안 검사를 거쳐 알베르트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알베르트, 그는 노엘의 형이기 전에 부친의 뒤를 이을 사람이었다.
노엘이 신사였다면, 알베르트는 사람을 가려 행동하는 개차반이었다. 힘이 있는 사람들에겐 정중한 태도를 내비쳤고 약자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처럼 취급했다. 그랬기에 필립은 알베르트의 뒷모습만 봐도 바짝 긴장했다. 노엘이 멋대로 캘리포니아에 간다고 선언했을 때, 알베르트는 노엘이 아닌 필립을 향해 재떨이를 던지며 소리 질렀다. 필립은 올라오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필립의 인사에도 알베르트는 돌아보지 않았다. 조그마한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필립은 서류를 들고 알베르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지잉하고 울리는 진동음이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필립은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을 꺼냈다. 노엘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다. 사무실에 오기 전, 알베르트를 만나러 간다고 언질을 주었더니 뭔가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필립은 빠르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뉴욕에 가지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미리 말해두지만, 알베르트가 멋대로 움직이면 나도 그렇게 할 거예요. 그리고 필립의 집으로 원석을 보냈어요. 필립이 알아서 가공할 만한 사람을 찾아줬으면 해요. 크기는 0.8mm 정도로 적당히. 여기엔 의뢰할 만한 가공사가 없거든요.」
용건만 적혀 있는 노엘의 메시지에 필립은 한숨이 나왔다. 지금 노엘은 이 사건에 얽혔다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은 사람 같았다.
갑자기 뜬금없는 원석은 왜 보낸 걸까. 그것도 1cm도 안 되는 크기를 대체 왜? 필립은 나중에 묻기로 하고 우선 눈앞에 있는 긴급상황을 처리하기로 했다.
“노엘인가?”
묵직한 저음이 들렸지만, 알베르트는 창가만 내려봤다. 필립은 책상 위에 캘리포니아 살인사건 자료들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우선은 여기서 상황을 지켜본다고 하셨습니다.”
필립은 일부러 원석 얘기를 하지 않았다. 굳이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아버지 선거를 신경 쓰느라 골치가 아픈데 이런 구질구질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죄송합니다.”
“누구 짓이야?”
창가만 내려다보던 알베르트가 등 돌려 필립을 쳐다봤다. 필립은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처리한 것은 노엘이지만, 엊그제 경찰서로 자백할 사람을 보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시끄러운 건 금방 멈출 겁니다.”
“누구 짓이냐고 물었는데 왜 쓸데없는 변명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무거운 목소리에 필립은 움찔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노엘이라면 적당히 처리하라고 하겠지만, 유약한 유진이 저질렀다면 말은 달라졌다. 아무리 유진이 같은 피를 물려받았다고 해도 가족 취급은 받지 못했다. 잠깐이나마 타국에서 공부해서 그런지, 필립의 가슴 한편에 미미한 동정심이 일어났다.
“노엘이 왜.”
알베르트는 들고 있던 신문을 책상 위로 던졌다. 신문에는 노엘의 사진이 있었다. 신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조롱 섞인 기사였다. 알베르트는 웨스틴 일가가 나쁜 소문에 휩싸일지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자신의 ‘집안’에 흠을 만들었다는 게 거슬렸을 뿐이다.
“유진, 아니, 그분이 사건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노엘이 경찰서에 갔다가 사진이 찍힌 모양입니다.”
“그 버러지를 감싸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버러지’는 유진을 칭하는 것이다. 정계 입문을 앞둔 부친이 굳이 필요 없는 사람을 집안에 들인 것은 꽁꽁 감춰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면 말이 달라졌다. 서늘한 눈빛으로 필립을 응시하는 알베르트의 눈에 한기가 맴돌았다.
“변명은 필요 없어. 노엘이 싸고도는 그 버러지, 당장 내 앞에 데려와.”
* * *
“아, 아윽! 아, 아파요. 제…… 흐윽!”
가혹한 매질에 몸이 흔들렸다. 노엘은 내 손목을 의자 등받이에 묶어, 상체를 엎드리게 한 후 나무 막대기로 엉덩이를 후려쳤다. 손이 묶여 빌지도 못했다. 평소 맞던 소리와 달랐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면 살갗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숨이 막혔다. 매질 한 번에 감당하기 벅찬 쓰라림이 이어졌다.
“흐윽. 자, 잘못했어요. 아파요, 흐, 흐윽…… 죄송해요. 때, 때리지, 흐으…….”
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다. 내겐 거부할 권리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노엘이 잠시 매질을 멈췄다. 가슴을 옥죄는 매질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얻어맞은 건지, 후려치던 막대기가 떨어졌어도 홧홧한 열기는 계속해서 살갗을 쿡쿡 쑤셔댔다.
“아직도 죽고 싶어?”
“흐, 흐어엉, 자, 잘못, 했, 어요. 아, 아파요. 제가 다 잘못, 했, 아악!”
“움직이지 마. 이제 겨우 시작인데 뭘 벌써 빌어.”
짜악! 잠깐 잊었던 고통이 돌아왔다. 계속 맞으면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은 오만함 그 자체였다. 노엘이 막대기를 후려칠 때마다 숨이 막히면서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온몸에 힘이 빠져 맞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노엘이 막대기를 내려칠 때마다 손목을 결박한 수갑이 흔들렸다.
“아윽!”
“개새끼가 감히, 잘 대해줘도 기어오르고 지랄이네. 넌 이래야 해? 이런 취급을 받아야 만족스러운 거지, 그치?”
“아, 아니, 아악! 자, 잘못, 흐윽, 잘못, 해, 으… 다신 안, 그럴게요, 윽……!”
“누가 네 몸에 손대래, 이 개새끼야. 엉덩이 똑바로 들어.”
“허, 으…… 자, 잘못, 했어요. 제발…….”
하도 맞아서 엉덩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다. 바르르 떨며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이성이고, 자존심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옥죄는 존재에게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맞다 보니 혀를 깨물어서 피 맛이 맴돌았다. 내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 더 역하게 느껴졌다. 나는 더럽다. 나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새끼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속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흐….”
“…씨발, 이딴 개새끼한테…….”
“아, 악……!”
매질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질러댔다. 그때, 매질이 멈추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산소에 머리가 핑 돌아가며 무릎 꿇은 상태로 주저앉았다. 팅팅 부어오른 살갗 위로 차가운 바닥이 닿자,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콜록거리며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겨우 호흡을 좇으며 헐떡거리던 찰나,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뽑힐 듯한 통증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흐, 흐으, 아, 아파요. 노엘, 제가 다 잘못했… 어요….”
“할 거 다 하면서 맞고 나서 잘못했다고 빌면 무슨 소용이지?”
“으, 으으…….”
“유진, 나 봐.”
“흐윽….”
“나 보라고, 이 개새끼야.”
“아흑, 죄, 죄송, 해요….”
찰싹 소리와 함께 뺨이 돌아갔다. 이제는 맞는데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덜덜 떨며 억지로 노엘의 눈을 올려다봤다.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얽매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저앉은 허벅지가 바르르 떨려왔다. 잔뜩 굳어 오므려진 다리 사이로 하얀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간격을 벌렸다. 노엘이 내 허벅지 안쪽에 손을 뻗었다.
“아윽…!”
아직도 아물지 않은 낙인의 흔적에 손가락이 닿았다.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숨을 헐떡였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해 봐. 다음엔 여기가 아니라, 네 목에 새겨버릴 거야. 네가 주인 있는 개새끼라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알아보게 할 거라고.”
“아흐. 자, 잘못했어요. 다, 다신 안 그럴, 게…… 아악!”
잘못했다고 빌어도 노엘은 가차 없었다. 다시 매를 들어, 내 엉덩이를 셀 수 없을 만큼 후려쳤다. 짜악, 짝! 지하실 가득 날카로운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몇 대를 맞았는지 세어보는 건 의미 없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노엘의 기분이 가라앉았는지가 관건이다.
“흐….”
묶인 손목이 긁혀 생채기가 나고 엉덩이에 감각이 없어지고 나서야 매질은 멈췄다. 내 손목을 옭아매던 가죽끈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벌이 끝난 건가. 어찌나 혼이 나갔는지, 입을 닫지 못한 채 노엘을 올려다봤다.
“죄송, 해요…….”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해요’라는 문장뿐이었다.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면서 끅끅거렸다. 주저앉을 힘도 없었다. 내게 어울리는 건 여기 밑바닥뿐이다.
도망가지도 못하고 내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거면 안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차라리 지하실에 가둬달라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또 얻어맞을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잘해 줘도 만족을 모르는데 이걸 어쩌면 좋을까.”
“흐, 다신 안 그럴, 게요…….”
“용서받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야지.”
“무슨, 흐윽…!”
노엘이 바지 버클을 풀고 성기를 꺼내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지만,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내 자존심이 남아 있던 모양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엘은 친절하게 거친 손아귀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가까이 끌어당겼다.
“커헉…….”
노엘의 성기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한입에 삼키는 게 버거워 기침을 토해냈지만, 두꺼운 살 기둥은 한계를 모르고 계속해서 쳐들어왔다.
이대로 가다간 숨도 쉬지 못하고 질식할 것 같다는 불안함이 덮쳐왔다. 최대한 입을 벌렸지만, 역시나 버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컥컥거렸고 남아 있는 피 내음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메말랐던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용서 빌지 마. 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잖아.”
“허, 으….”
“내 말이 틀려?”
“아윽…!”
엉덩이 위로 억센 손바닥이 날아왔다. 철썩 소리와 함께 고통이 찾아오자 흠칫 몸을 떨어댔다. 노엘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계속해서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찌나 깊숙이 들어왔는지, 성기가 목구멍을 툭 찔러댔다. 호흡할 수 있는 틈도 없어지자, 시야가 핑 돌아가 어지러움이 올라왔다.
노엘은 정말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살려달라고 처절하게 빌 수 있도록.
“켁, 커윽…!”
“이젠 좀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멀었잖아? 이 세우지 마, 진짜 뽑아버리는 수가 있어.”
“흐….”
이를 뽑아버린다는 말은 노엘에게 있어서 그냥 하는 협박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르르 떨며 입을 벌렸다. 끝을 모르고 목구멍 안쪽까지 들어온 성기에 숨을 쉴 수 없어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느릿하게 성기를 물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곧 내 머리를 잡아당긴 노엘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흐, 으…….”
거친 손길에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올라오는 현기증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이 개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쳐?”
멍청하게 있어서 그런지, 노엘의 손바닥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찢어질 듯한 통증에 벌벌 떨며 입을 움직였다. 발버둥 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귀두 끝이 목구멍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곧 비릿한 액체가 입안을 채웠다. 노엘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뱉고 싶었지만, 얻어맞을 것 같은 두려움에 어쩌지 못하고 욱욱거리기만 했다.
“입 벌려 봐, 유진.”
“으, 으욱.”
“어서.”
거부라는 건 내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수치스러운 액체를 삼키지 않은 채 입을 벌렸다.
수치스러웠다. 절망적이었다. 입안에 담긴 사정의 흔적을 거리낌 없이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망가져서 좋은 걸까. 자기가 만족할 만큼 괴롭혀서 웃는 걸까. 노엘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봐, 시키면 잘하잖아. 말 잘 들으면 서로 좋은데 왜 이렇게 엇나가는 짓만 하는 거지?”
“아, 우욱.”
“많이도 먹었네.”
“우윽……!”
‘잘한다.’라는 말의 정의가 언제부터 달라진 걸까. 그런 의문을 품던 도중, 노엘이 내 입 안에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고는 정액을 긁어내듯 휘저었다. 또 한 번의 침범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배려 없는 손길을 하면서도 노엘은 웃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인연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나는 노엘을 보며 눈이 부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노엘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오지 않을 현실을 상상하자,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울어?”
기다란 손가락이 내 입구를 문질렀다. 미끌거리는 정액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떨어댔다. 그때, 노엘이 손가락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내가 또 뭘 잘못한 걸까? 미간 찌푸리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아, 싫다는 티를 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맞고 싶지 않다. 두려운 마음에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에요. 너, 너무 아, 아파서…….”
“아프면 뭐 어쩌라고. 왜 우냐고 물었잖아. 내 좆 빠는 것밖에 안 시켰는데 왜 싫다는 표정을 지어?”
“아, 아파서…… 자, 자꾸, 눈물이 났는데, 전혀 싫지 않아요. 지, 진짜예요…….”
“그럼 좋다는 뜻이네?”
“흐…….”
“그럼 입 닥치고 제대로 해.”
노엘의 입술이 이마 위에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몰라 바르르 떨기만 했다. 나를 아프게 만들 거라는 예고인 걸까 싶은 마음에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곧, 하얀 손이 내 허벅지를 활짝 벌렸다.
지난번 노엘이 새겨놓은 낙인이 허벅지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하지만 노엘은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의자 위에 앉히고는 낙인 위로 입술을 포개었다. 역시나 의미 모를, 고통뿐인 행위였다.
“아흐…….”
“자세 잡아, 유진. 집 밖에서 처맞고 싶지 않으면.”
“어, 어떤…….”
“구멍 벌려.”
의자 특유의 냉기가 피부 위로 올라오는 것 같다. 움찔하면서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어서 해보라는 듯이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응시할 뿐이다. 여기서 거역하면 얻어터질 게 뻔해서 힘없는 손으로 비부를 벌렸다. 그깟 자존심도 고통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거 봐, 벌써 넣어달라고 움찔거리고 있네?”
“아흐…! 아, 아니에요. 그, 그런…….”
활짝 벌린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노엘이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성기를 휘감으며 위아래로 흔들었다. 연이어 손가락 하나가 더 쑤셔졌다. 손가락 두 개가 내벽을 휘저어대고 다른 손으로는 끊임없이 쾌락을 안겨 주려고 하니 더욱이 두려웠다.
내게 쾌락이란 두려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엘과의 행위를 즐기게 된다면 완전히 길들었다는 증거니까.
“아윽…….”
“눈 감지 말고 나 쳐다봐.”
“으, 흐윽.”
“유진, 나 보라고.”
내벽을 휘젓는 손길도, 성기를 쥐고 흔드는 움직임도 모든 게 두려웠다. 내 몸을 이상하게 만드는 느낌도 전부 다 무서웠다. 억지로 눈을 뜨고 노엘의 시선을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폭언으로 나를 산산조각 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노엘이 내게 입을 맞췄다.
“흐…!”
키스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젖은 살덩이가 맞물리면서 질척대는 소리를 흘려보냈다. 싫다는 말 대신 불안정한 호흡을 내뱉었다. 나를 탐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노엘은 내벽을 휘젓던 손가락을 빼고는 내 목을 휘감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도망가지 말라고 했잖아, 이 개새끼야.”
목을 옭아매듯 감싸 안은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엘은 내 목덜미 위로 입술을 묻고 잘근잘근 깨물면서 움켜쥔 성기를 계속해서 흔들어댔다.
내가 키스하는 걸 원치 않아서 이 방법으로 괴롭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엘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노엘의 손에서 놀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정하고 말았다.
“흐…….”
“조금만 만져줘도 좋아하는 건 어쩜 이렇게 변함이 없지? 엎드려서 자세 잡아.”
좋아한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토록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노엘의 손에 사정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정의 여파로 흔들리는 몸조차 역겨웠다. 덜덜 떨며 고개 숙이자, 노엘이 내 어깨를 비틀어 잡고는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구멍 풀어줬잖아. 벌리라고.”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자, 뺨이 돌아갔다. 어서 빨리 움직이라는 신호였다. 입술을 꾹 깨물다 손찌검을 맞아서 그런지 피 맛이 맴돌았다.
헛구역질 나올 것 같아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천천히 엉덩이를 잡아 입구를 보이게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세뇌하듯 스스로를 타일러봤지만, 떨리는 건 여전했다.
“흐…!”
노엘이 정액을 입구에 발라버린 탓에 불쾌한 끈적임이 느껴졌다. 그 위로 귀두가 꾹 찔러대자, 흠칫거릴 만큼 소름 끼치는 감각이 척추뼈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곧 억지로 파고드는 성기에 불쾌감은 고통으로 덮어졌다.
“아, 아. 아프, 아악!”
“싫다는 소리 하면 또 맞을 줄 알아. 힘 빼.”
아래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과 함께 노엘의 성기가 들어왔다. 깊은 곳까지 밀어 넣어도 만족하지 않았는지, 내가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트려도 노엘은 계속해서 안으로 침범했다.
너무 아파서, 내 인생에 남아 있는 감정은 고통밖에 없는 것 같아서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손바닥이 날아올까 봐 팔뚝을 깨물며 싫다는 소리를 억지로 삼켜댔다.
“뭐 하는 거야, 씨발.”
“아윽!”
“더 쑤셔달라 지랄하는 것도 신선하게 하네, 내가 말했지. 네 몸에 손대지 말라고. 또 맞고 싶어?”
“아, 아뇨. 그게…… 흑!”
“아니라면서 즐기기는.”
즐긴다는 표현과 다르게 내 아래는 너덜너덜해졌고 차가운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정액처럼 끈적하지도 않았고 아픔만 안겨줄 뿐이었다. 선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파. 제발, 그, 아니, 잘못했, 어요. 흐윽….”
“잘못했다는 말 대신 넣어달라고 빌어 봐.”
“으, 으윽. 그, 그마안… 제, 제발…….”
“어서.”
“아윽! 잘, 아니, 넣어주세, 흐으…….”
“이래야 내 개새끼지.”
노엘의 성기는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두꺼운 살덩이는 나를 매질하던 막대기를 방불케 했다. 내 입으로 직접 넣어달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성기가 계속해서 파고들며 내벽을 헤집었다. 더는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뿌리 끝까지 박아 대는 살덩이는 나를 무자비하게 짓눌러 댔다. 고통스럽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넣어, 주, 흐윽. 아. 아프…… 아윽!”
싫다고, 제발 나를 버려달라는 말을 노엘이 명령한 수치스러운 문장으로 대신했다. 그래야 덜 아플 테니까. 헐떡거리며 아무것도 바닥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끝이 까끌까끌했다.
“제대로 벌리고 요구를 해. 더 벌려.”
추삽질을 하던 노엘의 허리가 빨라졌다.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내 아픔은 거세졌다. 내벽뿐만 아니라, 장기까지 통증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새로운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아파?”
“흐으… 네, 아, 아뇨. 아, 흑!”
골이 울릴 정도로 퍽퍽 박아 대는 움직임에 말은 노엘이 가르친 대로 흘러나왔다.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노엘은 자세를 바꿔 성기를 빼내지 않은 상태로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는 추삽질해 댔다. 허공 위로 다리를 뻗은 자세가 되었다. 성기가 드나드는 접합부며, 허벅지 안쪽에 새겨진 낙인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노엘이 움직이는 대로 허리를 뒤로 내뺐다. 하지만 곧 노엘의 손아귀에 이끌려 허리가 들썩이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아프라고 한 건데 좋아하면 어떡해, 우리 개새끼.”
“아, 윽. 처, 천히 넣, 넣어주세요, 제발, 제발….”
“내가 이래서 내보낼 수 없다니까.”
나에게 있어서 ‘넣어주세요’라는 문장은 그만해달라는 의미였다. 노엘이 그렇게 시켰으니까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다. 결코, 쾌락을 좇기 위함이 아니다.
바르르 떨며 허공을 응시했다. 노엘이 귀두 끝을 입구까지 빼내고는 퍽 소리 나게 쳐올리자, 하반신이 비명을 질러댔다. 노엘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 올라간 발목이 휘청거리면서 고통이 따라왔다.
이 모든 게 고통뿐인 행위였다. 노엘은 본인이 만족할 만큼 허리를 움직이겠다는 듯이 연신 추삽질을 했다. 그리고 한참 힘없이 몸이 흔들리던 때, 노엘이 사정하면서 성기를 빼내었다.
“똑바로 봐.”
“흐…….”
노엘이 성기를 빼내는 것도 고통이었다. 긴장한 탓에 성기를 꽉 조인 내벽에서 힘이 빠지질 않았다. 살갗이 벌어질 것 같은 통증이 따라 나왔다. 장기가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멍청한 두려움이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접합부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몽롱한 정신으로 거친 숨을 헐떡이며 아픔을 달랬다. 그 순간, 노엘의 성기가 내 뺨을 건드렸다.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해줘야지.”
콜록거리면서 일어났다. 이젠 반항할 의지 같은 건 남아나지 않았다. 멀건 사정액이 묻어난 성기를, 노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래야 용서받잖아.”
웃고 있는 새파란 눈동자는, 나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망가지는 것도, 절망에 울부짖는 것도, 주변에 아무도 없이 어두컴컴한 길을 혼자 걷는 모습도. 그리고 나의 비참한 마지막까지 전부다.
툭, 내 뺨을 건드리는 살덩이가 느껴졌다. 별다른 저항 없이 눈물만 흘리며 입에 머금었다. 오늘도 나는 어디까지 떨어졌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 * *
깊게 잠들지 못했다. 입구 주변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 때문이다. 단단한 손가락이 입구를 문지르는 게 느껴져서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하, 하지…….”
“약 바르는데 뭘 하지 말래, 가만히 있어.”
“제가 할게요. 하지…… 윽!”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어깨 위로 연고를 집어 던졌다. 매트리스 위로 툭 떨어진 연고를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네가 직접 해. 괜히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죄송해요.”
“그거 바르고 밥 먹으러 내려와.”
‘밥 먹어.’도 아닌, ‘내려와.’라는 문장이 귓속으로 들어왔다. 같이 식사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 말에 부쩍 겁이 났다. 시트를 꽉 붙들며 바르르 떨어댔다. 무섭다는 걸 티 내지 말아야 했지만, 불안한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못 알아듣겠어? 밥 먹자고.”
노엘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때리려고 손을 올리진 않았지만,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벌벌 떨며 고개 숙였다. 그러자 내 앞에 노엘의 구두가 가까이 멈춰 섰다.
“뭐야, 이 표정. 내가 지금 뭘 한 것도 아닌데 왜 떨어?”
가까이 다가온 노엘의 얼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운 티를 내버렸다. 노엘에게 얻어맞을 게 뻔했다. 곧 날아들 손바닥이 내게 안겨줄 고통을 상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엘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해서 살며시 눈을 떴다. 노엘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쳐다보는 것이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다.
“밥 먹을 시간이라고. 밥 같이 먹기 존나 힘드네.”
“저, 저기.”
“뭐? 저기?”
“그, 형, 아, 아니…… 노, 노엘…….”
자기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해서 그런지 노엘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졌다.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에 흠칫 떨며 영어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노엘은 여전히 짜증 난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냥 계속 잠든 척할걸. 일어나지 말걸. 후회스러웠다.
“아, 아니에요. 밥 먹을게요. 죄송해요.”
“뒤처리 알아서 하고 내려와.”
내 대답에 노엘의 표정이 달라졌다. 한결 누그러진 눈빛이다. 안 맞는 건가. 노엘은 그저 내 목에 감긴 목줄만 풀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문이 열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엘은 먼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한 대도 맞지 않은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바라봤다. 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기도를 하고 싶었다. 창가에 다가가 높게 떠 있는 해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오늘은 덜 아프게 해주세요.”
오늘은 노엘에게 한 대만 맞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처음부터 안 맞게 해달라는 건 욕심이다. 잠깐 중얼거리고 손을 떼어냈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 오늘의 할 일은 그것뿐이다.
“흐…….”
창가 속 풍경에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동네는 유난히 서글프게 느껴졌다. 저 멀리서 보이는 학교 건물이 아른거렸다. 싫어하던 공부도, 버거운 과제도, 나를 힘들게 괴롭혔던 등록금까지 모든 게 그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감히 탐내선 안 되는 것들이다. 노엘이 윽박지르기 전에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발목은 삐걱거려 걸을 때마다 거슬렸다. 통증이 없어진 게 아니었다. 무뎌졌다는 걸 깨달았다.
부엌으로 내려가자, 식탁 위에는 이미 고기와 샐러드 같은 요리와 함께 빈 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먼저 앉으면 무슨 말을 들을 것 같아서 가만히 서성거리며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부엌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요리한 것 같다.
그래서 더 먹기 싫었다. 내 삶의 모든 게 노엘의 손이 닿지 않은 게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그때, 부엌 정리를 마친 노엘이 등을 돌렸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대화 대신 어색한 침묵만 주고받는 순간이었다. 노엘이 말 걸기 전까진 딱히 입을 열지 않는 편이라 입술만 짓이겼다.
노엘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내게 어떤 식으로 고통을 줘야 할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걸까? 발목, 허벅지, 그다음에는 어디에다 자신의 흔적을 남길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져, 고개를 숙였다.
“앉아.”
“…….”
“대답하는 법 까먹었어? 구멍에 박아 주면서 밥 먹여줘야 해?”
“아, 아뇨. 앉을게요.”
낮은 목소리에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다. 구석에 앉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노엘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긴 불가능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또 입에 맞지 않는 것들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앞에 있는 사람도 불편하고 음식도, 내가 들고 있는 포크도 전부 불편했다.
하나 같이 숨통을 조이는 것뿐이다.
대화 한 마디도 없이 노엘과 밥을 먹기는 고통스러웠다. 노엘이 먼저 일어나길 바라면서 샐러드 조각만 입에 넣었다. 하지만 노엘은 턱을 괸 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너무나 집요해서 물도 넘길 수 없었다.
지잉―.
그때, 노엘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노엘은 화면을 슬쩍 보더니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는 멎지 않았다.
“전화 안, 받으세요?”
“뭐?”
“중요한 전화처럼 보여서…….”
핑계다. 노엘이 전화 받으러 나가면 잠시라도 편하게 먹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다. 차라리 한 대 얻어맞고 마음 편하게 먹는 게 나았다. 눈치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선 넘지 마, 네가 신경 쓸 일 아냐.”
“……죄송해요.”
불편한 대화가 이어지자, 속이 어지러워 아무것도 넘길 수 없었다. 고기를 입에 갖다 대었지만, 먹지는 못했다. 허브 솔트의 향마저 역하게 느껴졌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더는 먹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쑤셔 넣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또 왜 그러는데.”
“흐…….”
“아, 씨발, 말을 하라고.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잘못, 했어요…….”
“씨발, 개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고개 들어봐.”
“자, 잘못했어요… 잠, 잠깐만요… 흐읍.”
쾅! 노엘이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늘은 딱 한 대만 맞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역시 신은 없는 모양이다. 노엘의 손아귀가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대답하라고 했지.”
“자, 잘못, 했…….”
“씨발, 그 잘못했다는 소리 좀 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라고.”
“모, 못 먹겠어요. 나중에 먹을, 우, 윽!”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접시 위로 고개를 처박았다. 단단한 도자기 접시에 제대로 박았는지 광대뼈가 얼얼해졌다.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내 머리를 음식 위에 짓눌러댔다. 이젠 괜찮을 줄 알았는데 가슴이 철렁이는 걸 보면 아직도 가학적인 행동에 면역력이 없는 모양이다.
“흐…….”
“이렇게 먹여줘야 해, 어? 씨발, 잘해주려고 해도 왜 좆같이 구는 건데.”
“커윽!”
“망할 개새끼.”
소스며 음식이며 온갖 것이 내 얼굴을 더럽혔다.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그 반동으로 입술 사이로 소스가 들어왔다. 코와 입이 막혀 숨을 쉬기 힘들어 버둥거렸다. 필사적으로 잡을 곳을 찾아 손을 휘적거렸다. 불안한 흔들림의 정착지는 노엘의 손목이었다. 억센 손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러자 노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거 다 먹어.”
“흐, 으욱…….”
“10분 내로 먹어, 다시 왔을 때도 그대로면 가만 안 둬.”
질퍽거리는 소스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겨우 숨통이 트여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호흡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어지러움보다도 수치심이 강했다. 덜덜 떨며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나 쳐다보고 대답해.”
“네…….”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노엘의 명령에 콜록거리면서 억지로 시선을 마주쳤다. 좋아할 거라고, 만족스러워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노엘은 짜증 가득한 눈빛이었다. 대체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묻고 싶었다. 성가시면 버리면 될 텐데.
노엘은 핸드폰을 들고 2층 위로 올라갔다. 족쇄나 목줄을 채우지 않는 걸 보면 내가 도망가지 않을 걸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노엘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손바닥에 묻어난 양념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끄, 윽….”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닦아내고 왔다. 그래도 눈물 자국은 지울 수 없었다.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입에 넣었는데 구역질이 올라왔다.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수록 싫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조금 후에 있을 노엘의 검사를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입에 쑤셔 넣어야 했다. 하지만 입에 넣은 걸 다 토해내고 말았다.
“흐, 어, 어떡해…….”
엉망으로 널브러진 음식물을 싱크대 속 음식물 분해기에 흘려 버렸다. 손이 지저분해졌다. 급한 마음에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여전히 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 앞에 주저앉아서 헛구역질해 댔다. 입 안에서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안 보낸다고 말했죠, 필립.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신경 안 쓰는…….”
하필이면 그때, 통화하며 내려오는 노엘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노엘은 말을 멈추고 내 쪽을 쳐다봤다. 맞을 거야, 또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웅크렸다.
“……끊어요. 절대 안 보낸다고 했어요.”
노엘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걸음이 두려웠다. 방금 노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0분 내로 먹어, 다시 왔을 때도 그대로면 가만 안 둬.’
가만 안 둘 거란 그 말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망치로 내려치던 손, 짖음 방지기를 채워 주던 손, 낙인을 찍어버리던 손, 그리고 내 숨통을 조여오는 손.
환상은 점차 선명해졌다. 두려움을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메스꺼움을 견디지 못하고 노엘 앞에서 속을 게워내고 말았다.
“씨발, 너…….”
“잘못했어요. 잘, 잘못했어요…….”
내가 걸친 옷은 하얀 셔츠뿐이었다. 셔츠가 지저분해지고 말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사타구니를 타고 소변 줄기가 흘러나왔다.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역겨웠다. 이런 모습을 보인 나 자신이.
“치, 치울게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행주를 집어 들던 순간, 노엘이 목덜미를 붙잡고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
“흐. 죄, 죄송해요. 제발, 때리지, 마, 마세요. 제발…….”
“입 닥쳐.”
“흐, 윽…….”
지하실일까? 아니면 바깥으로 내쫓는 걸까?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노엘이 데리고 간 곳은 욕실이었다. 환한 조명이 켜지면서 하얀 욕조 속으로 던져졌다. 엉덩이며 허벅지며 얼얼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흐….”
욕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노엘은 더러워진 셔츠를 벗겨내어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쾅! 거친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커다란 손이 내 살결 위로 보디 워시를 묻혀 비누칠을 해주었다. 물줄기가 상처에 닿으니 따끔거려서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성가신 개새끼, 왜 이렇게 멍청해?”
“죄송해요. 근데 학교 안, 가도 괜찮으니까요.”
“…….”
“때리지만 마세요, 제발…….”
침묵이 찾아왔다. 나를 때릴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음을 삼키며 어깨를 떨어댔다. 그 순간 비누칠하던 손이 멈춰졌다. 하얀 손에서 시선을 올려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묘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죄송, 해요.”
“다시 고개 숙여, 거품 안 닦였잖아.”
“……네.”
꿈이라도 꾸는 걸까. 노엘이 때리지 않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거친 손바닥 대신, 목덜미 위로 따뜻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노엘은 부드럽게 살결을 문지르며 거품을 씻겨 주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개새끼’라고 부르면서 후려쳐야 하는 건데.
“너, 그림 왜 그려?”
“……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뭘 하든 관심 없던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됐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딴 실력으로 왜 그리려고 하는지 궁금하다고 할 것 같아서였다.
“왜 그리냐고. 이것도 대답 못 해?”
“아, 아뇨, 좋아해서요.”
내 몸을 씻기던 노엘이 손을 멈추고 가만히 쳐다봤다. 부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걸까. 좋아한다는 말에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얼른 몸을 웅크리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림 그리는 거…….”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던 노엘은 숨을 짧게 뱉고 내 살결을 쓸어내렸다. 생채기에 물이 닿을 때마다 따끔거려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부터 그렸는데.”
“초등학생 때부터요.”
“영어는?”
“아, 그, 어, 어머니가, 아니, 그러니까 제 어머니가 계속, 배, 배우라고 해서…….”
얻어맞을까 봐 허겁지겁 대꾸했는데 노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 살갗만 쓸어내렸다.
“계속 보니까 목탄만 만지던데 다른 재료는 안 써?”
“아뇨, 쓰, 쓰긴, 하지만 그게 제일 좋아서…….”
“제일 좋다는 새끼가 커터칼로 그딴 짓을 해?”
“……죄송, 해요. 흣.”
목덜미를 배회하던 손이 이제는 귓가로 향했다. 노엘은 내 귓불을 엄지로 뭉근하게 누르기도 하고 귓바퀴를 둥글게 문질렀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작게 소리를 뱉었다.
무서웠다. 이상한 기분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마음에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노엘이 귓불을 입에 물어 잘근거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학교 다시 가고 싶어?”
“흣. 보, 보내 주시는, 으읏…!”
노엘이 귓불을 할짝거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노엘의 손은 내 가슴을 움켜쥔 채 유두를 비틀어대고 있었다. 노엘이 가까이 붙을 때마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생채기가 따끔거렸다. 쾌락은 미미한 간질거림에 불과했다. 흠칫거리며 노엘을 붙잡았다.
“근데 어쩌지?”
“무, 무슨….”
“학교에 이미 소문 다 났을 텐데. 예거 넬슨 일에 네가 끼어 있는 거.”
간질거림도, 통증도 ‘예거 넬슨’이라는 이름에 사라지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며 노엘에게서 떨어졌지만, 그는 봐줄 사람이 아니다. 내 손을 붙잡아 자기 앞으로 확 끌어당겨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내가 두려워할수록, 노엘은 기뻐하는 것 같다.
“필립한테 부탁해서 학교 쪽으로 진단서 제출했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잖아, 안 그래? 수업은 그렇다 치고. 소문은 어떡할 거야?”
“그, 그런…….”
“사람들은 범인이 잡힌 걸 알면서도 네가 경찰서에 갔다는 사실 만으로도 안 좋게 보겠지.”
노엘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며 나를 쳐다봤다. 비릿한 웃음에 소름이 돋아나 손가락만 꿈틀거렸다.
“유진,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
“흐으…….”
노엘이 내 사타구니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허벅지 위로 새겨진 낙인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 고통이 피어올랐다. 쓰라린 통증에 입술을 꽉 짓이겼다. 그토록 가고 싶던 학교도 두렵게 느껴졌다. 정말 내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걸까. 눈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때리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데 왜 울어?”
“흐, 저는 죽, 이지 않았어요. 정말, 이에요.”
끅끅거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켜보려 애썼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울음에 젖어 어깨가 떨렸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의심받아야 하는 게 답답하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노엘은 빙그레 입꼬리만 올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진.”
“흐…….”
“나는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믿어.”
노엘답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이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이, 나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이 유일하게 나를 믿어주는 존재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너 우는 거 아무도 몰라, 나만 알고 있잖아.”
노엘이 내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