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유진 2권
06. 말 안 듣는 개새끼는 어떻게 길들여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이었다.
―노엘, 큰일 났습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노엘은 유진의 발목에 진통제를 놓아주며 전화를 받았다. 늘 침착하던 필립의 목소리가 불안하리만치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엘의 시선은 정신 잃고 축 늘어진 유진에게만 향했다.
―캐린이 거래를 취소했습니다.
“그렇군요. 이게 새벽 3시에 호들갑 떨면서 전화할 일인가요, 필립? 뉴욕은 아침이겠지만, 여긴 새벽이에요.”
―단순 변심이 아닙니다. 누군가 캐린을 뒷조사해서 우리의 거래까지 눈치챈 모양입니다. 이걸 빌미로 캐린에게 협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귀찮게 됐네.”
귀찮다는 사람치고는 평온한 목소리다. 노엘은 메마른 발목에 석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팅팅 부어오른 살을 보자, 노엘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는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할 거라 여겼으니까. 하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붕대를 쓸어 내렸다.
―협박범이 누군진 알아냈습니다. 캐린의 개인 비서에게 미행을 붙였거든요. 다이아몬드를 줬던 남자 말입니다.
“역시 필립이네요. 그래서 누구예요? 그 협박범.”
―이름은 브루노 넬슨. 평범한 회사원인 줄 알았는데 항구에서 체포된 밀수범과 친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2년 전, 축제에서 마약 거래를 하다가 연행된 기록이 있거든요. 밀수범이랑 동일하게.
노엘이 미간을 좁히며 뒤돌았다. 시리게 가라앉은 시선이 유진을 향하면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지난번에 제가 알아보라는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아, 예거 넬슨, 말입니까?’
‘네.’
‘유진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겹치는 수업은 하나 없었습니다. 아, 2년 전에 축제에서 약물을 소지하다 연행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적발된 기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엘의 머리 위로 필립과 나눴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넬슨이라는 성. 2년 전 축제, 그리고 약물. 노엘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어둔 옷을 쳐다봤다. 바지 밑단에는 검붉은 피가 어두운 빛으로 말라붙었다.
유진이 달아났을 당시 입었던 옷이다. 노엘은 마음 같아선 찢어발기고 싶었으나, 더는 도망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걸어둔 것이다.
―노엘? 제 말 듣고 있어요? 일단, 캐린에겐 위약금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검은색 구두가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으로 움직였다. 노엘은 벽에 걸린 옷을 꺼내 들었다. 어쩐지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노엘이 제 손에 들린 옷을 천천히 뒤집었다. 도청기나 카메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노엘의 발끝 아래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정갈하게 접힌 종잇조각이었다.
노엘이 유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도망치려 발악하던 유진도 짜증 났지만,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어깨로 핸드폰을 받쳐 들고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열었다.
―노엘!
종이 만큼 새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노엘이 새하얀 가루를 콕 찍어 코끝에 갖다 대었다. 노엘의 눈이 감겼다. 생아몬드 냄새가 났다. 시안화칼륨, 독극물이었다.
“……씨발.”
―노엘, 지금 욕한 건가요? 아, 이해는 합니다. 아무리 노엘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진정하긴 어렵겠죠.
“다시 전화할게요.”
통화는 종료되었다. 호들갑 떠는 필립과 다르게 노엘은 점차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약물 거래를 주도한 탓에 어지간한 화학물을 꿰차고 있던 노엘이다. 노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에 담긴 가루를 내려다봤다. 가루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노엘은 유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종이를 든 채 지하실 밖을 벗어났다.
“좆같게 하는 것도 재능이지.”
노엘은 쓰레기통을 열어 재꼈다. 어찌나 신경질적으로 열었는지 쾅 소리가 날 정도였다. 생각만 해도 열 받았다. 유진이 왜 이걸 가지고 있을까. 날 죽이려고?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한 손에 잡히는 게 누가 누굴 죽이겠다고. 노엘은 기가 차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씨발.”
하지만 더 열 받는 것은 이 독극물이 유진의 입에 들어간다는 상상이었다. 노엘은 제 속이 뒤집히다 못해 열이 날 정도로 몹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노엘은 망설임 없이 하얀 가루를 쓰레기통에 쏟아부었다.
“개새끼가, 감히.”
그 ‘감히’라는 단어가 무엇을 향하는지 노엘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 때문인지, 아니면 허락하지 않은 ‘무언가’인지. 노엘 스스로도 제 감정의 근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모든 원인은 유진 때문이라고. 제 머리를 짓누르는, 가슴을 억누르는 이 감정은 유진 때문이라고. 노엘은 확신했다.
「I’ll tell you the truth, Yujin.」
종잇조각을 찢어버리려던 찰나, 노엘의 눈에 묘한 문장이 들어왔다. 그 밑에 깨알 같이 적힌 전화번호. 노엘은 손에 들린 종이를 움켜쥐며 서재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필립?”
―아, 예. 이제 좀 진정 되셨습니까?
“지금 내 메일로 예거 넬슨의 인적 사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아니, 다른 건 필요 없고 입학 동의서만 있어도 괜찮아요.”
―예거 넬슨이라면,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유진의 친구 말인가요?
“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내 전화 끊지 말아요. 어쩌면 지시 사항이 더 있을지 모르니까.”
노엘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노트북을 열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필립은 노엘의 말대로 즉시 예거에 대한 정보를 메일로 보내주었다. 노엘은 다른 걸 확인하지 않고 입학 동의서만 살펴봤다.
입학 동의서 파일이 열리고 맨 아래, 수기로 적힌 예거의 이름이 있었다.
「Jaeger Nelson.」
노엘이 종이 속 문장과 예거의 서명란을 비교했다. ‘E’, ‘J’와 ‘N’을 쓰는 방식이 매우 흡사했다. 아니, 일치했다.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문장과 예거의 글씨체가 똑같았다. 유진에게 이 가루를 쥐여 준 사람은 예거다.
“하아…….”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갱단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지만, 상대가 유진에게 접촉했다는 사실이 노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확인하셨습니까? 유진의 친구는 갑자기 왜……. 잠깐, 이 자식도 넬슨이네요? 캐린 협박범도 넬슨인데. 2년 전에 연행한 것도 그렇고.
“우연의 일치치곤 너무 신기하네요.”
―노엘, 이쪽에서 알아보고 처리하겠습니다. 윗선에 보고하겠습니다.
“아뇨, 하지 마세요.”
노엘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새 종이를 꺼냈다. 반들거리는 종이 아래 구겨진 종잇조각을 올리고는 펜을 끄적였다. 노엘은 지금 예거가 쓴 글자를 그대로 따라 베끼는 중이었다.
“뒤치다꺼리하는 건 제 일이잖아요.”
한 글자 한 글자 정교하게 옮기던 노엘은 ‘Yujin’이라는 이름 대신 ‘Eugene’으로 바꿔버렸다. 이 역시 예거의 글씨체를 모방했다. 모든 이니셜이 문장 속에 담겨 있어 모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은 그저 예거 넬슨의 위치만 주기적으로 보고 해주세요. 한 시간, 아니, 10분 단위로요.”
―알겠습니다. 노엘, 그리고 웨스틴 씨가 이제 뉴욕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딱히 처리해야 할 일이 없으면 일주일 안에 들어오라고 그러셨는데… 유진은 학교 때문에 거기 있어야겠군요.
노엘이 힐끗 달력을 봤다.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은 4월이었다. 막무가내로 데려갈 수 있었으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노엘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진을 억누를 계획이었다.
“남은 일만 처리하고 돌아갈게요. 다시 연락하죠.”
노엘은 전화를 끊자마자 금고로 향했다. 끼릭, 끼릭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금고문이 열렸다. 안에는 수많은 현금다발과 유진의 여권, 장갑, 그리고 총 한 자루가 있었다. 노엘은 장갑을 끼고 총기를 살펴봤다.
‘필립은 어떤 사람이 제일 의지 됐어요?’
‘네? 무슨…….’
‘먼 나라에서 혼자 힘들게 고생할 때, 어떤 사람이 제일 생각나고 의지 됐는지 궁금해서요.’
노엘이 총을 내려놓고는 금고 안에 있던 현금다발을 꺼내 세 번째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여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유진이 가져가기 쉽게 잠금장치 하나 없는 서랍으로 옮겼다.
‘제가 학교에서 의도치 않게 오해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물건을 훔쳤다나 뭐라나.’
‘아, 정말요?’
‘네. 그때 지나가던 룸메이트가 도와주는 바람에 오해를 풀 수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 친구가 도와준 이후로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연락은 끊겼지만요.’
‘그렇군요.’
‘지금도 그 친구가 가끔 생각납니다.’
노엘은 필립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뉴욕에 돌아가지 않을 방법을, 쥐새끼도 처리하고 유진을 길들일만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하얀 손이 장갑과 총을 밀어 넣고 금고문을 닫았다. 탕, 깔끔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노엘은 원래 있던 종이를 버리고 자신이 쓴 종잇조각을 들여다봤다.
「I’ll tell you the truth, Eugene.」
만족스럽다는 듯이 노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엘은 종이를 들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서랍장을 뒤져 단백질 파우더를 종이 속에 넣고 원래 있던 모양대로 접었다.
할 일을 마친 노엘이 검은색 구두를 신고 천천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끼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노엘은 힐끗 쓰러진 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짙어지자, 유진은 잠든 와중에도 불안한지 몸을 움찔 떨어댔다.
“유진.”
노엘이 손을 뻗어, 하얀 뺨을 쓸어 만졌다. 아프다고 해서 며칠 동안 손찌검하지 않았더니, 상처가 보기 좋게 아물었다. 저 하나만 보고 눈가가 벌게져 펑펑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참기로 했다.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볼까.”
노엘은 픽 웃으며 손길을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어뜨린 옷을 제자리에 걸어두고는 준비해둔 종잇조각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유진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하고 싶던 ‘그것’을 노엘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듯이.
* * *
새벽이라 버스 운행이 끊긴 지 한참 되었고 택시조차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조금 편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로등 앞에 주저앉았다.
“맞아, 그 전화번호.”
도망치면서 챙긴 것은 여권과 돈다발뿐만이 아니었다. 낯선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수면제가 들어있지 않아, 곧바로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후미진 동네라서 그런지, 자판기 옆에 낡은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아직 이런 게 남아 있구나 하면서도 힘겹게 걸어갔다. 자꾸 절뚝거리는 발목을 보며 목발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꼈다.
“후….”
아까 챙겨온 10달러 지폐를 밀어 넣고 제일 비싼 과자를 선택했다. 텅 소리와 함께 과자가 떨어졌지만, 줍지는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동전이었으니까. 후두두 떨어지는 동전을 주워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노엘이 쫓아오지 않을지 신경 쓰였다.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지만, 노엘은 보이지 않았다. 수면제의 효과가 꽤 큰 것 같았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작게 숨을 뱉으며 투입구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I’ll tell you the truth, Eugene.」
진실을 말해 주겠다는 문장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무슨 진실? 내가 노엘과 얽힌 것에 무슨 이유가 있단 뜻일까. 가만히 쪽지를 응시하다 버튼을 눌렀다. 틱, 틱, 틱. 버튼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보세요.
딱딱한 기계음을 끝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거였다. 가벼운 음성에 나도 모르게 숨을 뱉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때 경찰에게 어떻게 신고했어? 살려줘? 나 좀 도와줘? 가쁜 숨을 고르며 수화기를 붙들었다.
―여보세요? 젠장,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웬 장난 전화야.
“…예거.”
겨우 입을 떼었으나 수화기 건너편에선 침묵만 맴돌았다. 잘못 전화했을까. 아니면, 내가 괜히 연락한 걸까? 불안한 마음에 입술만 물어뜯었는데 예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진? 너 그 쪽지 보고 전화한 거야?
늘 밝게 웃어주던 예거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자, 듣기만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딱딱한 수화기를 꼭 붙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나야, 예거. 그, 그 사람한테 네, 네가 준 약 먹이고 도망쳤어.”
―……약을 먹였다고?
“응, 예거. 나, 나 좀, 나 좀 살려줘…….”
떨리는 목소리로 예거를 불렀다. 예거의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가볍지만, 어딘가 불안한 파동이 묻어난 것 같이 흔들리고 있다. 꼭 내가 전화할 줄 몰랐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잘못한 건가? 내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아릿한 통증과 함께 혀끝에 피 맛이 감돌았다. 어느새 내 입에는 엄지손가락이 물려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톱을 잘근댔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문제 되지 않았다. 살려달라는 응답에 쿡쿡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곧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하하하하!! 진짜? 진짜 먹였다고?! 아하하하, 유진 네가?
“……예, 예거?”
스피커를 타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듣던 예거의 웃음소리가 아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럼 노엘 웨스틴을 죽이고 왔다는 거잖아? 와, 그 노엘 웨스틴이 죽어? 하하하하!!
“…뭐?”
죽여?
누가? 누가, 누굴 죽여?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친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생각하는 방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반문조차 할 수 없었다. 소름 끼치는 오싹한 웃음소리가 귓속으로 파고 들어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하하하! 내일이면 노엘 웨스틴이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뜨겠네? 하하하, 덕분에 포상금 좀 받겠는걸? 고마워, 유진. 아주 잘했어. 아하하!
“무, 무슨. 예, 예거, 너 대체…….”
―미안해, 유진. 다 널 위해서 그랬던 것뿐이야…… 라고 할 줄 알았어?
걱정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목소리 위로 소름 끼치는 음성이 덮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기를 움켜잡은 채, 쿵 주저앉았다. 발목 위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건 아무 문제 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들은 진실에 비하면.
―유진, 큭큭. 네가 이 번호로 연락했다는 건 노엘 웨스틴한테 ‘그 약’을 먹였다는 거잖아.
“무, 무슨, 무슨 말이야? 수, 수면제라고 해, 했잖아!”
―상당히 바쁘지만, 노엘 웨스틴을 죽인 대가로 말해 줘야겠지?
쾌활한 목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내가 누굴 죽여? 죽이다니.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받아들이기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바르르 떨어대며 수화기만 잡았다. 아냐,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원하지 않았어. 부정하려 고갤 저어 봤지만, 예거의 웃음소리는 떠나가질 않았다.
―우리 학교 등록금 존나 비싸잖아. 너도 알 거야, 큭큭. 거기다 집세까지 감당하려면 택시 드라이버로는 부족하지.
“예, 예거…….”
―그런 생각으로 약을 팔거나, 사고 싶은 사람을 판매인에게 이어주는 일을 시작했어. 한 2년쯤 됐을걸?
“너 대체…….”
―근데 어느 날부터 거래가 뚝, 끊겨버린 거야. 웨스틴 새끼들 때문에.
거짓말,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전부를 바칠 테니 내가 보는 광경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해줬으면 했다. 어느샌가 눈가 위로 뜨거운 눈물이 가득 고이며 뚝뚝 떨어졌다. 살려주세요, 제발.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아무리 기도해 봐도,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신은 없다. 만일 신이 있다면,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았을 테니까.
―동부 쪽에서도 거래가 뚝 끊기더라? 돈 많은 인간은 웨스틴에게 직접 얻길 원했어. 왜인 줄 알아? 그 인간들은 우리랑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거든. 하루에 몇천을 벌어도 감흥이 없어. 그러니까 경찰이 뒤를 봐주며 약을 파는 인간들이 있으니 얼마나 고맙겠어.
“아, 아냐, 나는…….”
―그렇다고 돈 없는 인간들이 거래를 안 하냐? 아니, 절대 아냐. 인간은 자기보다 위에 있는 것만 바라본다고. 없는 빚 내서 웨스틴이랑 거래하려고 줄 선 갱단 새끼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밝은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빠졌다. 숨을 쉴 수 없다. 이 끔찍한 악몽 속에서 벗어나려 허우적거렸지만, 헤어나기는커녕 더 큰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누가 받게?
“…….”
―나 같이 힘없는 중개인들이야, 유진. 갱 쪽에서는 매일 같이 나를 개처럼 패고 협박했어. 일정 판매량을 채우지 않으면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기도 했지.
“예거…….”
―근데 그때, 노엘 웨스틴이 동네로 이사 왔다네. 그것도 웨스틴이랑 전혀 관계없는 인간이랑 같이?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만 같다. 두려웠다. 모든 화살을 내게로 돌릴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그저, 나는 단지 행복을 바란 것뿐인데. 내가 큰 욕심을 부린 걸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눈물을 터트리는 일이 전부였다.
“흐, 아냐, 아냐. 네가 분명, 수면제라고 했잖아. 분명히 그랬잖아! 나, 날 도와준, 다고….”
―하하, 수면제는 맞지. 영원히 잘 수 있는 수면제니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망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노엘이 원망스럽고 끔찍하게 여긴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손으로 직접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이 머릿속으로 휘몰아쳤다. 도무지 제정신으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너나 나나 좋은 거 아냐? 나는 보스한테 맞지 않아서 좋고 너는 노엘 웨스틴에게 벗어나서 좋고.
“그, 그래도 이런 식, 흐윽, 가, 갈 거야. 다시 가서…….”
―그거 소량만 섭취해도 죽는 독극물인데. 네가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유진?
나오기 전, 미약하게나마 노엘의 숨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내가 들은 숨소리가 잠결에 내뱉은 것이 아닌, 살려달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손발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숨이 차올랐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차라리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 너 살인범이야, 그 꼴로 돌아다녀도 돼?
“아, 아니, 아니야. 나, 나는 그런 사람이…….”
―지금 내가 바로 전화 끊고 신고하면 어떻게 될까?
유일하게 웃음을 주었던 예거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예거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절망감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시키는 대로 할 거지, 유진?
“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운 나쁘게 걸린 것도 잘못이지.
운이 나빠서라고 했다. 이 모든 일을 겪은 이유가 전부 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예거의 말이 맞았다. 내게 들이닥친 불행을 설명할 길은 이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데 예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 내 말만 잘 들으면 한국으로 보내줄 거야. 학교 앞에 있는 공원으로 와.
“시, 싫…….”
―싫어?
예거의 목소리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했지만, 어딘가 소름 끼쳤다. 싫냐고 반문하는 말투에 다른 사람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덜덜 떠는 입술을 꾹 깨물며 전화기를 붙들었다.
―그럼, 살인자가 된다고 해도 괜찮다는 뜻이지?
“그, 그건 아, 아냐. 노엘은 주, 죽지 않았어. 나는 분명…….”
―확실해?
확실하냐는 말에 마지막으로 봤던 노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약한 숨소리에 핏기가 가신 것처럼 온몸이 싸늘해졌다. 확실하다는 물음은 다른 답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노엘의 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사실을.
―아니잖아. 유진, 나 이제 슬슬 지루해지려고 해. 학교 앞에 있는 공원으로 와. 공중화장실 앞, 거기에 있을게. 살인자로 쫓겨 다니든지 내 말 얌전히 듣고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네가 선택해.
“…….”
―10분만 기다리고 가버릴 거야.
선택권을 주겠다는 말과 다르게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노엘을 죽였다고?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사실이 그러해도 있는 힘껏 저항하려고 발버둥 쳤다.
숨 막히도록 집요하게 굴던 노엘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디선가 계속해서 노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싫어, 아니야. 난 당신을 죽이지 않았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쉴새 없이 걸어갔다.
“흐으, 나, 나는…….”
울음에 젖은 입술은 계속해서 달달 떨렸다. 그저 가난이 싫어서 이곳에 온 것뿐인데 왜 이런 진흙탕 속으로 떨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다. 울고 싶지 않다고, 이제 그만 아프고 싶다고. 나의 바람은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현실은 감히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내 삶을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예, 예거!”
발목이 고통스럽다는 듯이 비명을 질러대도 멈추지 않고 공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한참 절뚝거리며 걸어갈 때, 어디선가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어디서 들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지 않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떨어댔다. 소음마저 나를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아윽!”
한계치에 다다랐다. 발목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타이밍에 맞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젠 내가 듣는 게 환청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다. 거짓말 같은 일들이 내게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흐으…….”
무릎이 흙바닥에 긁혀 따끔거렸지만, 허우적대며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을 향해 걸어갔다. 가로등 옆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앞에는 벤치가 있었는데, 익숙하게 앉아 있는 뒷모습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예거였다.
“예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숨기지 못한 채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예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냉랭한 모습에 벌써 눈물이 차올랐다. 예거가 내게 시킬 일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예, 예거. 나, 나 왔, 아악!!”
예거의 어깨에 손을 올리던 그때, 차갑고도 딱딱한 감촉에 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생경한 감각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앉아 있던 예거가 내 쪽으로 퍽 쓰러졌다.
“아, 아아악!!”
예거의 텅 빈 눈동자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생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이마 위로는 검붉은 피가 쉴새 없이 흘러내렸고 쩍 벌어진 입속에는 총과 함께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마, 말도 안, 사, 살려 주, 주세, 살려주세… 흐읍…….”
예거를 밀치고 뒷걸음질 쳤다. 왜 하늘은 내게 시련만 안겨주는 걸까. 아니,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내 탓이다. 바르르 떨며 허겁지겁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췄다.
“움직이지 마!”
“윽…….”
누군가가 내 팔목을 잡아 꺾어 도망가지 못하게 등허리를 무릎으로 짓눌렀다. 철컥, 소리를 내는 소름 끼치는 쇳덩이의 감촉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겁이 났다. 말도 안 되지만, 노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이거 놔…! 놓으, 아악!”
내 허리를 짓누른 남자의 무릎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위압적인 힘이 가해졌다. 노엘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가 내 앞에 있는 것만 같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질문을 받을 때 변호인에게 대신 발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변호사를 쓸 돈이 없다면 국선변호인이 선임될 것입니다.”
“자, 잠시만요! 저, 저는…….”
남자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지금 내가 느끼는 발목의 고통은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발버둥 치며 저항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남자는 공원 입구 앞에 세워진 차 앞으로 나를 끌고 갔다.
“여기는 클렌 에비뉴, 그레이슨 공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며 현행범, 아니,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했다.”
쾅! 뒷좌석 문이 열리고 나를 끌고 온 남자가 무전기에 입을 대었다. 아니라고,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죽고 싶지 않지만, 살아가긴 두려운 밤에 내 얘기를 들을 사람도, 내 곁에 있어 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 * *
쾅! 책상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고개 들어.”
내 앞의 남자가 나를 팔짱 낀 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공원에서부터 취조실까지 끌고 왔던 장본인이다.
“저, 저는…….”
취조실에 들어오기 전, 온갖 검사를 해야만 했다. 머리카락이 뽑히고 입천장이나 손바닥을 면봉 같은 것으로 닦여지는 등 내 의사와는 무관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지금도 그러했다.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었다.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딱딱한 투로 말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치곤 겁이 너무 많군. 도망가기 전에 잡힐 줄 몰랐던 건가.”
검은색 머리칼과 확연히 대비되는 하얀 피부가 어쩐지 겁이 나게 했다. 온정 하나 베풀지 않겠다는 듯이 싸늘한 눈빛은 흔들림 없이 나를 향했다. 저 사람은 내 얘기를 들어줄까. 남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철컥거리는 수갑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아, 아니, 저, 저는 주, 죽이지 않… 흐윽…….”
차가운 쇳소리가 철컥거리자, 잠깐이나마 잊었던 기억이 나를 괴롭혔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예거의 눈, 그리고 내 손에 숨이 끊긴 노엘. 노엘의 환영은 점점 선명해져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 걱정하지 마. 죽여버리지는 않아. 나는 내 개새끼 쉽게 놓아줄 생각 없거든. 내가 말했지. 죽어서야 날 벗어날 수 있다고.’
머릿속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가득 찼다. 아냐, 아냐. 아니라고. 난 노엘을 죽이지 않았어. 나는, 나는. 이 목소리를 내 안에서 꺼내버리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움켜쥐고 잡아 뜯어댔다.
“이봐,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당장 손 내려.”
“주, 죽이지 않, 죽이지 않았어…….”
맞은 편에 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손목을 잡아 내렸다. 철컥, 하는 수갑 소리에 어깨가 딱딱히 굳어가는 듯했다.
“저, 저기, 저기요…….”
무서움이 극에 달해, 알파벳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감정에 지배당한 나머지, 이성이 억눌려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파르르 떨며 수갑이 채워진 주먹에 힘을 주었다. 찰박 소리와 함께 수갑이 흔들렸다.
“저, 저, 지, 진짜 아,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저는요, 저는…….”
“뭐라고 말하는 거지? 영어 할 줄 모르는 건가?”
“저는 그냥 살고 싶어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 틈 사이로 눈물이 흘러 들어갔다. 혀끝을 스치는 짠 기운에 더욱이 서러워졌다. 내 인생이 온통 눈물로 푹 젖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케일라, 케일라!”
“네?”
남자가 누군가를 불렀다. 벌컥, 문이 열리고 밝은 머리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어 할 수 있는 사람 없나요? 젠장, 말이 통하질 않아서 골 때리네.”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들린 여권을 펄럭였다. 내 여권이다. 낯선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모양새가 꼭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네가 돌아갈 수 있냐고.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환청은 노엘의 흉내를 내며 귓가에 속삭여댔다.
“찾아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다시 올게요. 탄약 반응 검출 결과가 나왔다고 하네요.”
“그렇게 빨리요?”
“입에 코카인과 총을 물고 살해당한 사건은 흔하지 않잖아요.”
여자는 나와 남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어깨만 으쓱하며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안은 또다시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올랐다. 남자는 길게 숨을 뱉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건 알아들을 수 있겠지. 이름.”
남자가 뭐라 말하는지 알고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불행의 구렁텅이 속으로 끌려갈 게 뻔했으니까. 덜덜 떨며 주먹만 움켜쥐었다. 쾅! 남자는 이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이름을 말해, 여기서 입 막고 있어봤자 당신한테 도움 되는 거 하나 없다고.”
나지막이 흘려보내는 목소리에서 노엘이 떠올랐다. 내 뺨을 후려치고 목을 조르던 노엘의 모습. 그 모습이 생각나, 뻣뻣한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유, 유진…이요. 하, 한국에서, 와, 왔고 칼트 대학에 다, 다니고 있, 어요.”
“알아듣는 거 보니 통역은 필요 없겠군.”
“저, 정말 주, 죽이지 아, 않, 아니, 노엘. 노엘은, 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을수록 공포심은 짙어졌다. 노엘, 내 손으로 숨을 앗아간 노엘은 어떻게 된 거지?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심장을 움켜쥐는 것만 같다.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그 시간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상세하게 말해.”
“…….”
“입 다물고 버틸수록 너만 불리해져.”
“그러니까, 그러니까…….”
“답답해 미치겠군.”
차라리 내가 못 알아들었으면 덜 무서웠을까. 남자의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도 나를 때릴 건가? 여기가 경찰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거리며 수갑 찬 손으로 얼굴을 틀어막았다.
“제이?”
아까 케일라라고 불렸던 여자다. 여자는 종이를 들고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긴장감이 풀려,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면서 테이블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검사 결과 나왔어요?”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짚은 것 같아요.”
여자는 나를 힐끔 보다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에 시선도 주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잡아가라고 발버둥 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애원할 수 없어 내 머리만 움켜잡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현장에서 내 손으로 직접 체포했어요. 현장에 있던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탄약 반응 검사 결과는 음성이에요. 저 남자 방아쇠는커녕 총을 잡은 적도 없다는 뜻이라고요.”
머리를 잡아당기던 손에 힘을 풀고 형사들을 바라봤다. 남자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고 여자는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말을 믿어주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아직, 노엘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까.
“약물 반응은요?”
“역시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았어요. 용의자가 아니라 목격자겠네요. 제이, 과잉 진압이라고 기사 나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수갑 풀어주는 게 좋을 거예요.”
“하, 미치겠군.”
“참, 그리고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수사관은 없어요. 사람을 부르려면 오후까지 기다려요.”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달칵 소리와 함께 또다시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
“……젠장.”
남자는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내게 손찌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더욱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갑을 풀어 주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수갑이 떨어져 나갔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은? 아, 학생이라고 했으니 여기 남아 있겠군. 아니더라도 당분간 여기 있는 게 좋을 거야.”
“저…….”
“그리고 내 이름은 제이 피터슨, 이 사건의 담당 수사관이라는 건 알 테고.”
남자, 아니, 제이는 한숨 푹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보다 누그러졌지만, 딱딱한 말투는 여전했다. 노엘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또다시 무서운 모습으로 돌변하겠지. 어느 쪽도 안심할 수 없어 덜덜 떨기만 했다.
“네. 죄송, 해요….”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며 휑한 손목만 바라봤다. 아직 수갑을 풀면 안 되는데. 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지 못한 채 남자의 시선을 응시했다. 노엘 웨스틴을 내가 죽였다고. 노엘을 죽인 사람이 나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말하는 게 힘들다면 쉬었다가 말하지 그래? 어차피 통역할 사람이 도착하려면 오후쯤이나 되어야 할 테니까. 뭐, 이건 알아들을 수 있겠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한숨을 작게 뱉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름이 유진이고, 칼트 대학 다닌다고 했나?”
“……네.”
“그렇군.”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이며 손톱 거스러미를 몇 번 뜯어댔을 때, 제이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대학 졸업하고 뭘 할 생각이지?”
“네? 갑자기 무슨…….”
“아냐, 쓸데없는 질문. 그냥 있어.”
“……네.”
어드바이저가 할 법한 질문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제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런 질문은 왜 한 거지. 그 후, 취조실 안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무게가 실렸다. 무거운 진실을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책상 위에 올려진 수갑이 눈에 들어왔다. 저 수갑을 다시 채워달라고 할까. 노엘 웨스틴을 죽였다고 지금 털어 놓아볼까. 머릿속은 핑핑 돌았고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예거가 오라고 해서 간 거예요. 제가 갔을 땐 이미 그렇게 됐고…….”
“몇 시쯤에.”
“그건 잘 모르겠, 어요.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죄송, 해요.”
제이가 기다리는 진실과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무척이나 달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선, 노엘을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얘기해야겠지. 끔찍한 사실을 얘기할 생각에 벌써 몸이 떨렸다.
“유진? 이봐, 괜찮아?”
“사, 사실 제가, 제가 노, 노엘, 노엘 웨스틴을, 제, 제가. 죽…….”
똑똑똑―.
이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고 없이 들린 소리에 제이와 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이는 작게 숨을 쉬고 앞머리를 넘기며 대답했다.
“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나갔던 수사관이겠거니 싶어 두 손만 꼭 붙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만한 착각이었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단정한 발걸음 소리는 너무나 익숙해 소름이 끼쳤다.
“유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 쿵쿵. 잠잠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나른한 음성에 습관처럼 몸이 반응하며 손이 떨려왔다. 환청이길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미쳐버린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휩쓸린 나머지 너무 지쳐서 정신이 나가버린 거라고 절박하게 애원했다.
“마, 말도 안 돼…….”
너무 놀라 입술만 달싹이며 멍청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말도 안 돼, 거짓말. 분명 독극물이 녹은 주스를 마신 걸 내 두 눈으로 봤는데. 심장이 멎을 기세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어댔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분명, 노엘에게 입을 맞추며 나 역시 주스를 머금었는데 왜 멀쩡한 걸까.
둘 중 하나였다. 예거가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유진,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응? 갑자기 어딜 나가나 했는데 네가 왜 여기 있어?”
노엘이 이미 알고 있거나.
현실을 부정할수록 노엘은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늘 나를 공포로 몰아갔던 정갈한 걸음과 함께 천천히 간격을 좁혔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하는 놀라움보다 다시 붙잡혔다는 절망감에 소름이 돋아났다. 너무 놀라 발목이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당신이 어떻게…….”
차가운 벽이 등에 맞닿았다. 이젠 내가 도망칠 데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내 앞으로 다가오는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은 처연한 눈빛을 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미안해, 유진. 미안해. 내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네 심정을 더 헤아려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들어서는 안 될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나를 끌어안은 온기에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내 몸을 휘감으며 부드러이 쓸어 만져주는 이 사람은, 노엘이다. 내 뺨을 어루만지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 역시 노엘이다.
“제이, 보호자 노엘 웨스틴이에요.”
케일라 수사관이 옆에 서 있던 제이에게 노엘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보호자라는 호칭에 넋이 나갈 것 같다. 아니야, 이 사람은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망치려고 온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엘의 처연한 시선 속에 불안한 미래를 예감하고 말았다.
“맥이 연락했어요. 지난번에 가출 신고받고 나간 적이 있나 봐요. 두 분이 잘 아는 사이라고 하시던데요.”
“아. 안녕하세요, 노엘 웨스틴 씨. 담당 수사관 제이 피터슨입니다. 새벽 3시 29분경에 그레이슨 공원에서…….”
“여기 오면서 전부 다 들어서 따로 설명 들을 필요는 없어요, 형사님.”
노엘은 형사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내 뺨을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 눈빛은 마치 자신이 모아둔 수집품에 흠이 갔는지 확인하는 모습 같았다.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노엘을 마주하니 숨이 턱 막혀버려 도망칠 시도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유진을 지금 당장 데리고 갈 수 있는지, 그것뿐이에요.”
형사들에게 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안아 드는 노엘의 온기에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 노엘의 품에서 발버둥 치려고 했다. 그럴수록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내 허리를 옭아맨 손엔 힘이 들어갔다.
“실례지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웨스틴 씨 일가에 동양계 사람이 끼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서요.”
“형이에요.”
“네?”
제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욕심부리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제이를 바라보게 되었다. 노엘을 의심해달라고. 선한 얼굴 뒤에 감춰진 두려운 모습을 알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거 잘 알아요. 알려진 적 없는 이야기고 저희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이제 유진을 데려가도 될까요?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수갑 채워서 데려온 것만으로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유진에게 진술을 듣고 싶습니다, 노엘 웨스틴 씨가 아니라.”
단호하게 가로막는 제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노엘은 나를 끌어안으며 뒤통수부터 목선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뱀이 피부 위를 기어 내려가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이 떨렸다.
“저는 형사님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수사관들을 존경해요.”
“…….”
“하지만 일개 수사관이 이 동네를 움직이게 할 힘은 없잖아요, 그쵸?”
노엘은 여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제 앞길을 막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가 느껴져, 움켜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이 차갑게 굳어버린 것 같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목격자에게 제대로 된 진술을 받지 못한 상태라서요.”
“변호사를 부를게요.”
세상은 힘 있는 자에 의해 움직인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제이가 아무리 노엘을 막아도 소용없었다. 다시 돌아온 불행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노엘을 밀어내는 건 불가능이었다. 노엘에게 벗어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절망적인 현실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때까지 유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테니까 미리 힘 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형사님.”
제이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노엘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은 여전히 끊임없이 이어졌다. 노엘을 보던 제이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향하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서 말하라고.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그 눈빛에 주먹 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유진?”
“흐읍…….”
그때, 하얀 손이 어깨를 쓸어내리듯 내려와 내 손을 감싸 잡았다. 서늘한 감촉에 두려움은 배가 되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집에 가야지, 이제.”
“나, 나는…….”
“응, 알아. 끔찍한 사건을 눈앞에 겪었으니까 많이 놀랐을 거야, 그치? 생각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노엘은 처연한 빛을 띠며 옅게 웃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동생을 진정시키려는 다정한 형처럼 보이겠지만, 오로지 나만이 진실을 들여다봤다.
‘또 도망가면 어떻게 할 거야?’
‘네?’
‘저번에는 발목, 이번에는?’
질 수밖에 없는 내기를 제안한 눈빛과 똑같았으니까. 노엘이 나를 끌어안으며 등허리를 조심스레 토닥여 주었다.
“유진, 이제 집 가자. 우리가 한 약속도 있잖아.”
노엘은 나의 무언가를 망가뜨린다고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 * *
끼이익, 경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노엘이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금까지 누워 있던 유진은 희미한 온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손, 잡으면 안 될까요?’
‘뭐?’
‘죄송해요. 제가 잘못 말했… 윽!’
노엘은 유진이 누워 있던 자리에 손을 얹었다. 겁에 질리면서도 손잡아달라 말하던 유진이 아직도 제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없었다. 손끝에도 잡히지 않는 온기에 노엘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면서도 모른 척했으나 막상 겪어보니 괜찮은 문제가 아니었다. 노엘은 터져 나오는 욕을 헛웃음으로 대체했다.
“우리 개새끼 취향이 숨바꼭질이라 좆같아도 어쩔 수 없지.”
노엘은 천천히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허겁지겁 도망치는 유진이 보였다. 노엘은 조소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유진의 목덜미를 낚아채 끌고 오고 싶다. 손발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은 후 인정사정없이 박아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제 계획을 생각하며 간신히 마음을 다스렸다.
“어디까지 갈 수 있으려나.”
노엘은 탁자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낸 후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공항으로 사람 보내서 사진 속 남자를 발견하면 조용히 데리고 와요.”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반항해도 상처 내면 안 돼요.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노엘과 통화하는 사람은 갱단 일원이다. 유진이 예거를 만나지 않고 곧장 공항에 갈 것을 대비하기 위해 연락했다. 노엘은 전화를 끊은 후, 뻐근한 어깨를 매만졌다. 필립을 시키는 게 빠르고 깔끔했으나, 그는 지금 다른 업무를 보고 있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 노엘은 곧바로 필립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엘, 예거 넬슨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요? 이제 처리하러 가면 되겠네요. 어느 쪽인가요?”
―클렌 에비뉴에 있는데, 아마 운전 중인 것 같습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계속 지켜보, 아. 그레이슨 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엘, 저희가 움직이겠습니다. 괜히 손 쓰지 마세요.
노엘은 전화를 끊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즐겨 입던 셔츠가 아닌, 검은색 폴라티를 착용했다. 가벼운 코트까지 걸쳐 입고 노엘은 계단으로 향했다. 단정한 걸음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아뇨, 저도 가야겠어요. 쥐새끼 잡는데 제가 빠지면 아버지나 알베르트에게 면목이 없거든요.”
―노엘.
“염려 놓으세요.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 제 손에 직접 피 묻힐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저희가 가겠습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그 말이 노엘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노엘은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걸음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필립.”
―네?
끼릭, 끼릭. 하얀 손이 금고문을 열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장갑과 총기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난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노엘은 장갑을 낀 채, 총을 집어 들었다. 오늘따라 노엘의 입가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 * *
늦은 새벽, 그레이슨 공원.
동네 자체가 사람이 없어 조용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이때,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와 함께 예거가 나타났다. 예거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망할. 이 생활도 빨리 끝내든지 해야지.”
예거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평소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기종이다. 거래할 때마다 쓰는 용도였다. 지금 예거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거래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울린 거래용 핸드폰에 예거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달려왔다. 하지만 예거의 신경을 곤두세운 건 따로 있다.
「I’ll tell you the truth, Yujin.」
종이에 적어놓은 사인을, 유진은 과연 발견했을까. 예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멍청한 남자의 절박함을 이용해서 노엘의 숨을 끊어버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예거는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지잉―.
핸드폰이 울리기 전까지는.
“여보세요?”
예거가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쳐다봤다. 통화 중이라는 문구가 쓰였는데 상대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구매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밤중에 나왔다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예거의 목구멍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젠장,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웬 장난 전화야.”
―……예거.
구매자가 아닌 유진의 목소리에 예거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별 볼 일 없는 놈에게 시간 따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거는 자신이 건넨 쪽지를 떠올렸다. 예거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눈에 띄게 빛났다.
“유진? 너 그 쪽지 보고 전화한 거야?”
―나, 나야, 예거. 지금 네, 네가 준 약 먹이고 도망쳤어.”
“약을 먹였다고?”
―응, 예거. 나, 나 좀 살려줘…….
기대도 하지 않던 결과가 빠르게 찾아왔다. 그랬다. 예거가 유진에게 주었던 것은 시안화칼륨, 소량만 먹어도 즉사할 수 있는 위험한 독극물이었다. 이제 보스의 매질을 받지 않아도 되고, 엄청난 포상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상상을 하니 예거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내일이면 노엘 웨스틴이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뜨겠네? 하하하, 덕분에 포상금 좀 받겠는걸? 고마워, 유진. 아주 잘했어. 아하하!”
웨스틴이라면 치를 떠는 보스 탓에 예거는 뜻하지 않게 노엘의 정보를 알 수밖에 없었다. 동부까지 직접 쳐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할 무렵, 노엘이 이 동네로 이사 왔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천운이 따로 없었다. 만나기 힘들다던 사람을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예거는 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붙들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노엘의 집에 한 남자가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지켜본 걸로 봐선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 학교 다녀?’
‘응.’
‘나도 여기 학생이거든. 게임 그래픽 전공이야.’
‘아…….’
‘근데 이름이 유진이라고? 음, 내가 너 어디서 왔는지 맞춰볼까?’
‘한국에서 왔어.’
유진은 알까. 예거가 무엇을 위해 접근했는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해서 말하는 유진을 속으로 얼마나 한심하게 보고 있는지. 예거는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 무슨. 예, 예거 너 대체….
“미안해, 유진. 나는 너, 널 위해서 그랬던 것뿐이야…… 라고 할 줄 알았어?
소리 없는 절망이 이런 걸까. 예거는 제 눈앞에 유진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예거의 웃음소리가 짙어질수록,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유진의 목소리는 가엽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유진, 큭큭 네가 이 번호로 연락했다는 건 노엘 웨스틴한테 ‘그 약’을 먹였다는 거잖아.”
―무, 무슨, 무슨 말이야. 수, 수면제라고 해, 했잖아. 주, 죽이다니…….
예거는 조금 더 비웃어줄까 했지만, 손목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구매자가 올 시간이었다. 자신의 행적을 장황하게 자랑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예거는 그동안의 일을 아낌없이 털어놓았다.
“상당히 바쁘지만, 노엘 웨스틴을 죽인 대가로 말해 줘야겠지.”
이제야 털어놓은 진실에 유진은 소리 없이 절망했다. 문득, 예거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노엘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던 그 날의 통증. 가끔 언론에 언급되는 노엘 웨스틴은 신사 중의 신사라는 이미지로 포장되었다. 갱단에게도 정중하게 대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가족이 타인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짐승 패듯 다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가족이 맞는 건가. 예거는 턱을 매만지며 그날을 회상했다. 노엘의 태도로 봐선 가족이 아니라 소유물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거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핸드폰을 바로 잡았다.
“그, 그건 아, 아냐. 노엘은 주, 죽지 않았어. 나는 분명…….”
―확실해?
유진의 무엇이 그 노엘 웨스틴을 건드린 걸까. 정말 형제가 맞을까?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친구와 수업을 빼먹은 것 때문에 죽일 기세로 때리지는 않았다. 예거는 호기심이 생겼다. 손바닥에 입을 맞춰도 멍청하리만큼 당혹스러워하던 그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지금도 바르르 떠는데 더 심한 짓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거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아니잖아. 유진, 나 이제 슬슬 지루해지려고 해.”
시곗바늘이 움직였다. 새벽 3시 15분. 아쉽지만, 구매자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학교 앞에 있는 공원으로 와. 공중화장실 앞, 거기에 있을게. 살인자로 쫓겨 다니든지 내 말 얌전히 듣고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네가 선택해.”
―…….
“10분만 기다리고 가버릴 거야.”
거래는 5분이면 충분했다. 예거는 구매자와 거래를 마친 뒤, 벌벌 떨며 서성이는 유진을 낚아채 화장실 안에서 범할 생각이었다. 지금 유진의 상태로 봐선 무엇이든 시키면 다 할 것 같았다.
예거는 큭큭 웃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어쨌든, 유진이 노엘에게 독극물을 먹였다는 사실은 변함없었으니까.
“하, 보스가 얼마나 주려나.”
예거가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달콤한 미래를 그려내었다. 보스에게 돈을 받는다면 제일 먼저 차를 바꿀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드라이버를 하며 돈 모으던 시간을 떨쳐내고 싶다.
하지만 돈은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기껏해야 싸구려 대마에 행복해하던 예거였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스튜어트 씨? 뭐, 뭐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예거의 행복한 상상은 누군가의 발소리에 멈춰졌다.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여러 명의 걸음 소리가 예거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분명 혼자 온다고 했는데? 혹시 경찰인가.
도망가야 한다는 신호가 예거를 강하게 흔들었다. 예거가 뒷걸음질 치며 달아나려던 찰나, 뒤에서 접근하던 누군가가 예거의 팔을 결박해 움직임을 통제했다.
“제, 젠장. 놔, 놓으라고! 무슨 짓이야, 이게?!”
“입부터 막는 게 좋겠네요.”
“노, 노엘 웨스틴? 뭐, 뭐야. 씨발, 주, 죽은 거 아니었어?”
버둥거리는 예거의 앞에 두 명의 남자와 함께 노엘이 나타났다. 노엘의 옆에는 필립과 갱단 일원이 있었다. 예거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눈으로 노엘을 쳐다봤다.
“오랜만이네.”
가볍게 안부 인사를 하는 노엘의 표정은 덤덤했다. 거래자로 위장하여 CCTV 하나 설치되지 않은 열악한 공원에 예거를 부른 사람치고는 두려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이거 뭐, 윽…!”
다른 남자가 예거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노엘의 옆에 있던 남자가 예거에게 다가와 입속에 천을 물리고 주먹을 내리꽂았다. 퍼억! 퍽! 내장이 찢어지고 튀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예거는 윽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일방적으로 맞는 예거의 모습에 노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예거를 붙든 남자에게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남자는 그 신호를 보고 예거의 입속에 욱여넣은 천을 빼내었다. 그러자, 예거는 기다렸다는 듯이 헐떡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씨발, 어떻게 된 일이지? 부, 분명 죽였다고 했는데? 유진 그 새끼가 당신을…….”
노엘은 예거를 바라봤다. 예거의 입에선 타액과 피가 섞여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럽다는 생각에 노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불쾌함보다는 유진의 이름을 감히 담았다는 사실이 신경에 거슬렸다. 우선순위가 이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노엘, 이건 또 무슨 소릴까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댁에서 기다려 주세요.”
“아, 하하. 하하하……. 돈 많아서 좋긴 좋네. 한 사람 때문에 여러 명이 움직이니 말이야.”
옆에 있던 필립이 미간을 찌푸리자, 예거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서늘한 총구가 예거의 뒤통수를 눌렀다. 끼릭, 탄환이 돌아가는 소리에 예거의 탐욕스럽던 눈이 커졌다.
“어떻게 할까요?”
“자, 잠깐만.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사, 삼촌한테 말할게. 당신들을 방해하지 아, 않겠다고! 보스에게도 마, 말할게!! 내가 웨스틴 쪽에 드, 들어가면 어때? 응? 충분히 이득이지 않나?!”
총을 겨눈 남자가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은 여전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엘은 거래를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집안과 긴밀하게 이어진 갱단 측의 도움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노엘이 직접 자리에 나타난 건 드문 일이다.
힘든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시키라고, 그들은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노엘이 집안에서 교육받았던 사고방식 때문이다.
“씨발, 유진 그 새끼 일을 어떻게 한 거야.”
“……뭐?”
하지만 비틀어진 입에서 유진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노엘이 반응을 보였다. 예거는 히죽 웃으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예거의 통제 밖 일이었다.
“하하, 왜? 그 새끼가 그렇게 신경 쓰여? 그러고 보니까 뭐 하나 생각나네. 내 거 진짜 잘 빨더라. 5달러 준다니까 학교 화장실에서 바로 해주더라고. 변기 취급받아도 웃으면서 다 해주던데.”
예거의 협상에도 미동하지 않던 노엘이 미간을 좁혔다. 노엘의 하얀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예거가 위압감을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노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늘한 눈빛으로 예거를 응시했다.
“지난번엔 콜라를 사줬거든? 겨우 2달러인데 고맙다고 차 안에서도 빨아 주더라. 고고하게 혈통 따지던 웨스틴이 왜 그런 남창 새끼를 들여왔을까. 그 집안 사람들도 이런 취향인가?”
예거는 덜덜 떨면서도 노엘을 도발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겁을 상실한 것인지, 죽기 전에 발악해 보겠다는 건지 예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모욕적인 말이 오가도 노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린 눈동자로 예거를 응시할 뿐이었다.
“왜? 뭐라 말해보시지, 노엘 웨스틴? 근데 동생은 맞아? 아무리 봐도 남창 새끼 같은데.”
“노엘, 더는 상대하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 아쉽다. 그 새끼가 여기 오기로 했는데. 이번에도 얼마나 앙앙거릴…….”
탕―!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엘이 자켓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예거의 이마를 정확히 사격했다. 필립도, 예거를 결박하던 남자도 예고 없는 총성에 당황하며 바닥 아래로 엎드렸다. 제 손으로 피 묻히기 싫다던 노엘이 직접 방아쇠를 당겼다.
“…후.”
노엘이 길게 숨을 뱉었다. 노엘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봤다. 부친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지하실로 끌려갔던 어린 시절에도, 거래를 망치려는 갱단들의 방해에도 돌발행동은 결코 저지른 적 없었다.
‘취향이 바뀌었나.’
‘네?’
‘콜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 그건…….’
노엘은 유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손에 들린 총기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집안을 모욕해서가 아닌, 감히 저 더러운 입으로 제 소유물을 건드렸다는 게 화가 치밀다 못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노엘!”
노엘은 총기를 내려다봤다. 만일을 대비해서라는 말에 총을 가져왔지만, 자신이 직접 방아쇠를 당길 생각은 없었다. 기껏해야 손발에 구멍을 뚫어버릴 정도만 생각했다.
“노엘, 미쳤어요?! 이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필립이 아무리 소리 질러도 노엘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죄책감이 아닌, 복잡함 때문이다. 만일, 유진이 예거를 이 자리에서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비뚤어진 상상만 그려내기 바빴다. 노엘은 무거운 숨을 뱉었다. 어떤 일이든 원인을 찾으려면 유진의 이름부터 떠올리는 이 증세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다.
‘온 세상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것 같다는 기분, 느낀 적 있어?’
‘네?’
‘지금 내가 그래. 네 새끼랑 엮이고 나서 아무것도 안 보여. 세상이 다 검게 변해 버렸는데 너 하나만 색이 입혀진 것처럼 느껴져서 성가실 지경이라고.’
유능한 아티스트들을 후원하고 전시관을 운영하는 노엘은 단 한 번도 ‘색깔’이라는 것에 관심 가지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룻밤의 별생각 없는 행위로 이렇게까지 갈증을 느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스며들었다는 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노, 노엘. 신고가 들어올 겁니다, 빨리. 빨리 움직이십시오.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어서요.”
세상이 온통 새까맸다. 저를 보며 벌벌 떠는 필립도, 주변 정리를 하는 수하들의 모습도 전부 다 어둠 속에 가려졌다. 노엘은 단단히 미쳐버렸다는 확신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에서 유진이 올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노엘, 제가 나서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노엘은 공허한 하늘을 바라봤다. 오점 하나 없이 살아온 제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이유로 억압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잔뜩 울어서 벌게진 눈가를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예고 없던 감정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 감정의 종류가 무엇인지, 노엘은 정의할 수 없다. 그저 침대에 미약하게 남은 온기를 생각하니 한숨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노엘!”
필립은 겨우 이성을 찾고 노엘을 붙들었다. 하지만 노엘은 예거의 시신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새파란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단지, 차갑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필립.”
“지시 사항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알리바이 같은 건 걱정하지 마세요, 늘 잘 해왔지 않습니까. 사흘 뒤에 경찰서에 가서 자백할 사람도 만들어놨고, 경찰 쪽에서도 우리를 봐주고 있고. 그리고, 그리고…….”
필립이 이성을 찾으려고 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허둥지둥 헤매는 거로 봐선 진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필립은 노엘이 직접 방아쇠를 당길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약물 거래를 주관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일반적인 기준’에선 선하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필립에게는 웨스틴 집안에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사람이라 여겨졌다. 아랫것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가 사람들과 다르게 노엘은 늘 친절한 태도를 보였으니까.
“왜 그렇게 겁먹어요.”
“네?”
“필립이 말했잖아요. 늘 잘 해왔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저는…….”
“필립이 이렇게 떨면 난 누구한테 일을 맡겨야 할까요?”
노엘은 평소 같은 모습으로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필립을 바라볼 뿐이었다. 공원에는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만 미약하게 들렸다.
“필립.”
무거운 침묵을 제일 먼저 깬 사람은 노엘이었다. 필립은 현장을 정리하던 수하들을 보다가 두려운 눈으로 노엘을 응시했다. 노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필립이 그랬죠?”
“네?”
“유학 시절에 제일 생각나고 의지 된 사람이 필립을 도와줬던 룸메이트라고.”
필립이 그 얘기를 왜 꺼내는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노엘은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쳐다볼 뿐이었다.
“나도 제일 생각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유일한 구원이 된다면 더는 억지로 붙잡아둘 필요 없이 스스로 내 손 안에 들어오겠죠.”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방아쇠를 당겼어요.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길들이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는데. 노엘은 뒷말을 삼키고는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필립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어도 제 앞길만 걸어갈 뿐이었다.
* * *
그 후, 노엘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바깥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필립의 말대로 누군가가 총소리를 듣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노엘은 물기 젖은 머리를 닦아내며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두 시간이 흘렀다. 필립이나 경찰에게선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아직 멀었나.”
사이렌 소리가 들렸던 걸 봐선 경찰은 늦지 않게 공원에 도착했을 것이다. 유진 역시 그 장소에 나타났다면 경찰에게 바로 체포됐을 거란 예상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노엘, 더는 상대하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 아쉽다. 그 새끼가 여기 오기로 했는데.’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 생각을 정리했다. 예거를 약물 거래로 유인한 건 3시 15분. 그렇다면 적어도 10분 뒤에 유진을 만나기로 했다는 것인데, 유진의 다리로 봐선 시간에 맞춰 나타나진 못했을 것 같다.
“어디 숨어버린 거야, 이 개새끼.”
노엘은 제 행동반경 밖으로 벗어난 유진을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그때, 잠잠하던 노엘의 핸드폰이 울렸다. 형사 맥이었다.
집안에서는 주기적으로 경찰에 막대한 로비를 제공해,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노엘의 집안이 약물 거래 의심을 받지 않고 다른 사건에서도 비교적 낮은 형량을 받을 수 있던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네.”
맥은 지난번 유진의 행방을 찾아줬던 남자다. 노엘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노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아무래도 오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유진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원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유진이 여기에 휘말린 것 같아서요.
“그게 정말인가요?”
노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표정은 평온했다. 노엘은 거울 속에 제 모습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별일 없을 겁니다. 저도 방금 탄약 검사 결과를 봤는데 음성이에요.
“곧 갈게요. 그동안 제 동생, 놀라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매번 폐를 끼쳐서 어쩌죠.”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다른 수사관들에게 잘 말해놓겠습니다.
노엘은 전화를 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우리 개새끼. 이번에는 좀 더 오래 도망치게 내버려 둘 걸 그랬나.”
* * *
집이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배웠지만, 내겐 예외였다. 그 지옥 같은 곳에 다시 끌려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노엘은 나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손길로 내 어깨를 토닥여줬지만, 두려움 탓에 온기 하나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놔, 놔 주세요. 제, 제발!”
“유진.”
노엘의 가슴팍을 밀치며 발버둥 쳤다. 만일,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으면 노엘의 손바닥이 날아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머지 발목 역시 깨지고 망가질 게 뻔했다. 망치를 들어 올리던 노엘의 모습이 떠올라 미친 사람처럼 바르르 떨어대며 주저앉았다.
“유진, 내가 미안해. 너한테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않게 조금 더 배려했어야 했어. 미안해. 내 실수야.”
“하, 하지, 마, 마세요. 펴, 평소처럼 그냥, 평소처럼. 개, 개새끼라고 그, 그렇게…….”
“유진, 집 가자. 응? 집 가서 얘기하자.”
“자, 잡지 마…!”
처연한 표정을 하며 다가오는 노엘을 밀어냈다. 그 탓에 노엘의 뺨을 손톱으로 할퀴고 말았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다. 하얀 뺨에 붉은 생채기가 나타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노엘 역시 더 다가오지 않고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괜찮으세요?”
“저보단 유진이 우선이죠, 여러모로 폐 끼치네요.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저희가 뭘.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노엘은 주변 수사관들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이 안에 있던 형사들 모두 똑같은 시선을 하고 있다. 의붓동생 하나 잘못 둬서 귀찮은 일이 생긴 안타까운 남자를 바라보는 눈이다. 미칠 것 같다. 아니, 미쳐 버리는 과정에 들어선 것 같다.
대체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노엘 웨스틴이라는 사람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잘 나가는 사업가라서? 단지 선한 미소를 짓는다는 이유 때문일까? 아무리 울어 봤자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다.
“집으로 가자, 유진. 너 많이 지쳤어.”
“지금 당장 돌아가셔도 추후 다시 연락 드릴 수 있습니다.”
노엘이 나를 일으키려고 손 뻗던 그때,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기 하나 없는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노엘 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제이를 쳐다봤다.
“아시다시피 그 공원, CCTV 하나 없고 유일한 목격자는 여기 있는 유진입…….”
“제 답변은 똑같을 거예요.”
노엘은 제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딱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소름 끼쳤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연락 주세요. 개인 변호사와 함께 오겠습니다. 가자, 유진.”
노엘은 다정한 손길로 나를 쓰다듬었다. 가자고? 어딜? 또 그 지옥으로 끌려가야 한다고? 컴컴한 지하실에 축 늘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눈앞이 아찔해졌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주변 사람을 바라봤지만, 누구 하나 나를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제일 두려운 건 애달프게 바라보는 노엘이었다.
저 가면 속에 숨겨진 시린 눈빛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대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노엘의 손에 붙들린다면 두 번 다시 달아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결국, 노엘의 손을 뿌리치고 제이에게 달려갔다.
“제, 제가 그랬어요, 형사님!”
차라리 경찰서에 갇히는 게 나았다. 누가 그랬던가. 연옥과 지옥은 한끝이라고. 연옥은 죄를 씻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고 지옥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끝없이 갇혀 있는 세계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먼 훗날에라도 빠져나올 수 있는 연옥이 더 나았다.
“제가요. 흐으, 제가 다 그랬어요. 예, 예거가 저, 저한테 혀, 협박해, 했는데 제가 너, 너무 무서워서. 저를 주, 죽일 것만 같아서,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제이의 옷깃을 잡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그러나, 제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노엘과 나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제발 저 잡아가세요, 살려 주세요. 저 이, 이 사람한테 가, 가기 무, 무서워요, 시, 싫어요…….”
제이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다. 주변 형사들이 나를 떼어내려고 일으켜 세웠지만, 처절하고 절박하게 제이를 붙잡았다. 살려달라고, 당신이 잡아가지 않으면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그렇게 수없이 애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단 한 곳 뿐이다.
“유진, 이러지 마, 응? 집 가자, 이런 식으로 거짓말하면 형사님들도 곤란하고 너도 힘들어.”
노엘의 곁이었다.
* * *
다시 경찰서에서 나왔을 땐, 밝은 아침이었다. 온통 어둠밖에 없는 내 인생과 다르게 눈 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수사관들의 인사를 받고 차에 올라탔다. 노엘이 운전석에 앉았다. 차 안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뺨부터 갈길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적막만 흘렀다.
경찰서를 빠져나갈 때까지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노엘이 입버릇처럼 부르던 ‘개새끼’라는 말조차 들을 수 없었다.
차라리 개새끼라고 부르며 때리는 게 나을 지경이다. 노엘은 운전대를 잡으며 앞만 쳐다봤다. 떨림이 멎지 않았다. 노엘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다시 붙잡히면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잡히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알량한 자신감이었다.
“노, 노엘.”
노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정면만 바라봤다. 운전대를 잡은 커다란 손이 곧 나를 때리고 옭아맬 것 같았다. 두려웠다. 학습된 두려움이 금세 내 몸을 뒤덮었다. 곧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왜, 왜 저예요?”
“…….”
“다른 사, 사람도 이, 있잖아요. 제발….”
제발 놓아달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 안으로 삼켰다. 운전대를 잡은 노엘의 손에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게다가 정면만 바라보는 시린 눈동자는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공포심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노엘은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저 좀 놓아주시면 안, 돼요?”
지금 내 꼴은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것 같다. 하지만 노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 한 번 열지 않고 운전대만 잡았다.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창밖에 펼쳐졌다. 노엘과 내가 사는 동네였다. 아무리 비명 질러도 누구 하나 듣지 않는 빌어먹을 동네.
“노엘, 제발. 제발…… 허어어엉…….”
제발 나를 놓아달라고, 아니, 버려달라고 빌던 것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개새끼가 감히 선을 넘는다는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노엘 앞으로 다가갔다. 어깨가 덜덜 떨리면서 숨통이 조였다.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끅끅댔지만, 노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를 끔찍하게 싫어 하시잖, 아요. 제가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잖아요…….”
점차 집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맞을 걸 알면서도, 분명 나중에 후회할 걸 알면서도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떻게든 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노엘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저 좀 놓아주세요, 제발…….”
차는 어느덧 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맑은 하늘이 가려지고 벽면에 걸린 망치 같은 공구 용품에 더는 입을 열지 못하고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다. 제발, 제발. 제발이라는 말을 한국어로 말했는지, 영어로 뱉어냈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달칵 소리와 함께 벨트 클립이 풀어지고 시동이 꺼졌다.
“못 본 지 고작 3시간쯤 되었던 것 같은데.”
“노, 노엘…….”
“3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따위로 말이 많아지고 건방진 거지, 우리 개새끼가?”
“제, 제발, 나, 나 좀, 놔, 놔 주세, 흐윽!”
짝 소리가 나면서 뺨이 돌아갔다. 매서운 손찌검에 몸이 반응하듯 덜덜 떨렸다. 몸을 웅크렸지만, 노엘이 거친 손아귀로 멱살을 들어 올려 또 한 번 내리쳤다. 짜악! 거칠고 날카로운 소리에 살갗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집이 친하게 지내는 부류 중 하나가 경찰이라는 거 모르지 않잖아, 유진. 지난번에도 충분히 학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윽!”
찰싹하는 마찰음과 함께 왼쪽으로 뺨이 틀어졌다. 제대로 얻어맞았는지 입 안에선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뺨이 퉁퉁 부어오르고 머리가 울려도 노엘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다시 잡히면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봤어?”
“아, 아니, 저, 저는, 죄, 죄송, 해요. 제가 잘못, 했…… 으윽!”
짜악!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고 연달아 뺨을 갈겼다. 몇 대를 맞았는지는 셀 필요가 없었다. 고통에 눈앞이 흐려지고 골이 울리면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두 뺨에 고통스러운 열이 피어오르고 나서야 노엘은 손찌검을 멈췄다. 입가가 찢어진 것 같은 통증에 눈물을 터트렸다.
살갗이 터지는 고통보다 미쳐버릴 것 같은 괴로움이 앞서 나갔다. 숨을 쉬고 싶었다. 마음 편하게 호흡하고 싶다는 생각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선택지를 줄게.”
“흐…….”
“질질 짜지 마, 나중에 벌 받을 때 어쩌려고 이래.”
“죄, 죄송해요. 근데 눈물이, 아흑…….”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뒤로 꺾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던 간격은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좁혀졌다. 가까이서 본 노엘의 눈동자에 덜컥 겁이 나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선택해, 유진.”
“흐윽, 흡.”
“하나, 귀찮게 하지 않고 얌전히 따라온다.”
“흐…….”
“둘, 몇 대 처맞고 옷 벗겨진 채로 끌려온다.”
“노엘,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후자가 네 취향이지? 그치?”
“흐윽,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지만, 노엘은 서늘한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제 알아서 선택하라는 뜻이다. 무엇을 해도 이 집에 끌려 들어갈 게 뻔했다. 자의든 타의든 결과는 똑같았다.
“흐으…….”
결국, 울면서 집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노엘이 내게 발길질을 하지 않은 것은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그런 게 분명했다.
끼익, 문이 열렸다.
“들어가.”
“제발, 제발요.”
“어서.”
“흐으, 시, 싫…….”
쾅! 노엘이 나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문을 닫았다. 이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노엘은 무엇을 앗아가려고 하는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바르르 떨며 잔혹한 심판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철컥, 문이 잠겼다.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소리다.
“유진.”
“…네, 네. 잘못, 했… 어요….”
“뭘 잘못했는데. 약쟁이 살인사건에 휘말린 거? 아니면 나한테서 도망친 거?”
“두, 둘 다 죄, 죄송…….”
“나한테 벗어나서겠지, 이 개새끼야.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성가신 일에 엮이지도 않았잖아. 안 그래?”
“자, 잘못했, 흐으…….”
노엘의 시퍼런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담겨 있다. 멍청하게 바르르 떨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못 하는 내 모습. 나른한 목소리는 숨통을 조여왔고 호흡하기도 벅찰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 두려웠다.
노엘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퍽, 주저앉았다. 노엘을 피하려고, 이 차가운 시선을 피하려고 앉은 상태에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딱딱한 벽이 내 등을 툭 건드렸다. 더는 내가 도망칠 곳은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극도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액체를 흘리고 말았다.
“씨발.”
노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둔부에서 흘러나오는 소변 줄기는 멈추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그만. 나 자신이 더럽게 느껴지면서도 한 편으론 노엘이 역겨운 취급을 해주길 원했다. 이렇게 한다면 노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개새끼 교육 처음부터 시켜야겠네.”
“자, 잘못, 놔, 놔주세…… 아흐!”
노엘이 나를 끌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화장실이었다. 노엘은 빠르게 내 옷을 벗겨내고는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숨 쉴 겨를도 없이 수압이 센 물줄기가 흘러나와 몸을 적셨다. 한창 허우적거릴 때,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다시 밖으로 끌어당겼다. 그 반동에 수건이며 보디 워시 같은 물건들이 욕조 안으로 딸려 들어왔다.
“켁. 사, 살, 아악!”
하도 움직여서 그런 걸까, 노엘이 물에 푹 젖은 수건으로 등을 후려쳤다. 숨이 막혔다. 거울을 본다면 내 눈동자는 벌게졌을 테고 두 뺨은 퉁퉁 부어올랐고 찢어진 입가엔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을 것이다.
컥컥 괴로운 기침을 토해내며 노엘에게 끌려갔다. 노엘은 자비가 없는 사람이다. 괴로워 몸부림치는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노엘은 한 손에는 내 머리채를, 또 다른 손에는 두꺼운 수건을 든 채 지하실로 향했다.
쾅! 거친 소리와 함께 지하실 문이 열렸다. 발목에 힘을 줄 수 없어, 노엘의 손길에 질질 끌려갔다.
“아흐…….”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노엘은 내 허벅지를 꾸욱 짓밟고는 두꺼운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수건을 잡은 하얀 손이 유난히 목덜미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우리 개새끼는 어떻게 해야 알아들을까. 아무 데서나 발정하고 싸기까지 하네.”
“자, 잘못, 잘못했… 어요….”
“근데 유진. 네가 정말 예거 넬슨을 죽였어?”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새벽에 봤던 끔찍한 광경에 눈이 커지며 고개가 저절로 들어 올려 졌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과 달리, 아무런 감흥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아, 아니에요! 저, 정말 아니에요. 매, 맹세해요….”
“그럼 됐어.”
“흐읍…….”
“넌 그런 짓을 할 수 없으니까, 죽였을 거라고 생각 안 해.”
믿어주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노엘이? 오히려 내가 죽였다고 몰아붙일 줄 알았는데 믿어준다는 태도에 어딘가 석연찮았다. 그 와중에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노엘이 덤덤한 시선으로 마주해도 어쩐지 두려움은 가시질 않았다. 이때, 노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럼 나한테 준 음료수에도 아무것도 안 탔겠네?”
“그, 그건, 그건…….”
“네가 준 음료수 마시고 조금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 없더라고. 지금도 살짝 피곤하긴 해.”
다른 약일까? 분명 독극물이라고 했는데. 필사적으로 머릴 굴렸지만, 죄책감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 축 늘어진 손은 여전히 바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변명하지? 뭐라고 해야 하지? 관자놀이가 꾹꾹 눌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고개만 푹 숙이던 그때, 철컥하는 무언가가 내 목덜미에 채워졌다. 또 목줄일까. 그렇기엔 뭔가 이상했다. 플러그 같은 것이 목울대를 살짝 눌러댔다.
“뭔가를 탔구나, 그치?”
노엘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변명하길 기다리는 걸까. 시린 시선을 느끼며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노엘, 저, 저는. 아악!! 아, 아프, 악!!”
지잉 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찌릿하다 못해, 칼로 쑤셔지는 듯한 통증에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낼수록 고통은 배가 되었다. 목에 가해지는 충격이 줄어들었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이 벌어진 채로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은 고개를 기울이며 내 모습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디서 감히 이빨을 드러내, 개새끼가.”
난생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다. 바늘 수천 개가 내 목을 찌르다 못해 쑤시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고통에 말하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멍청한 표정으로 입이 벌어진 채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그저 고개를 기울이며 내 반응을 관찰하기만 했다.
“생각할수록 좆같네, 뭐라고 했더라. 이 사람한테 가기 싫어?”
경련 일어나듯 몸이 덜덜 떨렸지만, 노엘에게 맞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금 느꼈던 고통이 아직까지 피부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사람 무서워, 가기 싫어라고 했지.”
“그, 그건, 악!”
또 그 고통이다. 잠깐 입을 열었을 뿐인데 지잉 소리가 나면서 목울대를 찢어버릴 기세의 통증이 뒤따라왔다. 노엘이 때렸을 때도 아팠지만, 지금 내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수치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당하기 벅찼다.
혹시 이거, 말을 할 때마다 충격이 오는 장치일까. 벌벌 떠는 손으로 목줄을 움켜잡으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노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짖음 방지기라고 들어 봤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더듬거리며 목울대를 감싼 장치를 만졌는데 손끝 위로 미약한 전류가 느껴졌다. 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눈 크게 뜨고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들어봤구나, 놀라는 거 보면.”
“흐…….”
찌릿하다 못해 살갗이 찢어지는 통증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노엘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칠 뿐이었다. 새파란 눈동자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그러게 왜 싫다고 했어, 개새끼야.”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노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 붙잡혀 신경 쓰이게 했다는 것보다, 자신을 싫다고 말한다는 게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굴었다. 왜? 노엘은 분명 나를 싫어하고 경멸하는 사람인데. 가까이 다가온 노엘의 시선을 바르르 떨며 회피했다.
“왜 놓아달라고 했지? 다른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너냐고?”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어느샌가 목덜미로 향했다. 단단한 손이 목덜미 위를 툭 건드렸다. 전기 충격에 상처가 났는지 노엘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무척이나 따끔거려 눈물이 삐져 나왔다.
“그러게, 왜 하필 널까. 근데 그거 알아, 유진? 싫다고 발악하는데도 울면서 발버둥 치는 모습 보면 오히려 즐거워.”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지독한 늪에 빠진 것만 같은데 노엘은 즐겁다고 했다. 모든 게 끔찍했다. 나를 보는 노엘의 시선도, 그리고 노엘을 회피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어릴 땐 숨바꼭질이라는 걸 안 해봐서 몰랐는데 좋아하는 것 같아. 네 눈 보면 장단 맞추길 잘했다는 느낌이 들거든.”
“흐…….”
“근데 씨발 이 사람 싫다는 말은 왜 했어?”
“윽!”
무슨 심경 변화가 왔는지, 나른하게 흘러가던 목소리에 뚜렷한 파장이 묻어났다. 잘못했다고 빌고 싶지만, 목에 가해질 고통에 바르르 떨며 노엘의 손에 얌전히 끌려갔다. 노엘은 내 머리채를 잡고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혀 주었다. 억센 손아귀에 팔이 뒤로 꺾이면서 수갑이 채워졌다. 철컥 소리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경찰서로 가면서 생각해봤어.”
“끄윽…….”
“유진 네가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된다면, 나만 너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소리 내면 고통이 잇따라 왔다. 그 생각 하나로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고 덜덜 떨리는 입술 틈 사이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마저도 두려워 필사적으로 입술을 짓이겼다.
“그럼 넌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싫다는 씨발스러운 소리도 뱉지 않고 내 곁에만 있을 수 있겠지.”
“흐, 으.”
“며칠 건드리지 않으니까 상처 하나 없어서 예뻤는데 아쉽더라.”
“흐윽…….”
“그래도 역시 이 개새끼한텐 내 흔적이 있어야 해.”
노엘이 상냥하게 웃으며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일어나선 안 될 상상이 현실이 되어 내 목을 졸라댔으니까. 그저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잘해줄 때 알아서 기어, 자꾸 여기저기 이상한 벌레 꼬아내지 말란 말이야.”
“흐…….”
“부족한 게 뭔지 모를 정도로 잘해주려고 하는데, 왜 씨발…… 사람을 미친 새끼로 만들어버리는 거냐고.”
털썩, 목에 감겨 있던 잠금장치가 풀어졌다. 그러나 목이 자유로웠어도 말을 할 수 없다. 아까 느꼈던 고통을 잊을 수 없어 노엘을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개만 흔들었다. 잘못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감히 무언가를 하려고 해서 잘못했다고. 그런 마음을 담아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하게도 노엘은 내 마음 같은 건 읽지 못한 채 사타구니를 활짝 벌렸다.
“흐…….”
“못 본 사이에 무슨 짓을 했는지 구멍 검사나 해볼까. 다리 더 벌려.”
“아, 윽…!”
다리를 벌리라는 말에 움찔거렸다. 그러자, 노엘은 내 허벅지를 활짝 벌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전부 다 드러나게 했다. 너무 벌린 탓에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땅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입구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아래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틀린 신음만 흘렸다.
“다른 새끼 좆 물은 없네. 3시간 동안 뭘 한 거야?”
“흐…….”
내벽 안을 밀고 들어온 손가락 두 개가 부드럽게 점막을 문질러댔다. 우악스럽게 침범한 손가락은 안쪽을 넓히려는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이고 오돌토돌한 내벽을 꾹꾹 눌러댔다. 거침없이 긁어대는 자극에 몸을 떨어댔다. 신음이 나오지 않게 하려 입술을 깨물었다.
장치가 내 목에서 떨어졌지만, 언제 어디서든 또다시 그러한 고통을 느끼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앞으로 자세 잡으라고 하면 구멍 벌려. 대답해.”
“흐, 으윽.”
“유진.”
“아흑! 네, 그, 그럴, 게요…….”
대답하라는 말과 동시에 손가락이 내벽을 휘저었다. 쾌감보단 두려움이 앞서 나갔다. 말을 했다. 말해버렸다. 또 그 고통스러운 느낌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바르르 떨어댔다. 그때, 노엘이 다른 손으로 내 성기를 움켜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직접적인 쾌감이 예고 없이 찾아오자 벅차게 숨을 헉 들이마셨다.
“흐…….”
내 목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통증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엘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얀 손이 움켜쥔 내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이 새어 나왔다. 찌걱거리는 물소리는 수치심으로 돌아왔다.
“울어봐, 유진.”
“으윽, 으.”
“울어, 내가 허락했잖아.”
“노엘, 제, 제발, 흐…….”
“그만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라고 애원해야지. 개새끼니까 우는 건 잘하지 않아?”
“아흐…….”
성기를 빠르게 흔들수록 찌걱거리는 소리는 짙어졌다. 귀두 끝에서 새어 나온 액이 뱃가죽으로, 사타구니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 탓에 내벽을 휘젓는 손길에서도 물기 젖은 소리가 묻어나왔다. 노엘이 울라고 명령하지 않아도 이미 내 눈은 눈물범벅이다. 그저 헐떡거리며 두려움 섞인 달뜬 숨을 터트리기만 했다.
“진짜 안 되겠네, 이런 얼굴로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벌레를 꼬아냈을까.”
“흐, 하, 하지 마, 세요.”
“이제 밑에서 울어보자.”
노엘이 내벽을 휘젓던 손가락들을 빼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자, 상체가 헐떡거릴 정도로 가쁘게 호흡했다. 그래도 내 성기를 움켜쥔 노엘의 손은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흐, 으….”
“잘 울었으니까 이제 상을 줄게, 유진.”
“아흐……!”
노엘이 내 성기를 움켜잡은 채 시선을 마주치며 귀두 끝을 할짝였다. 왜 이걸 상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개새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내 성기를 핥아 올리는 노엘의 시선은 수치스러울 만큼 노골적이다.
“흣….”
움켜쥔 손으로 단단해진 살 기둥을 위아래로 흔들어 문질러대며 자극했다. 활짝 벌어진 허벅지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타이밍에 노엘이 허벅지를 쓸어 만지면서 성기를 핥아 올렸다.
“흐…….”
부드러운 입술 감촉에 점차 얼굴이 달아올랐다. 노엘은 허벅지를 움켜잡고는 혀끝을 세워 할짝대기도 하고 혀로 살 기둥을 말아 올리며 자극을 주었다. 수치스러운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나를 응시하며 입술을 움직이는 노엘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다.
어느새 말캉한 살덩이는 성기의 뿌리까지 침범했다. 성기를 삼키고 빨아들이는 자극은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했지만, 완전히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울어보라는 명령이 있어서 작게라도 신음을 흘려보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방금 내가 겪었던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안 돼, 소리 내면 안 돼.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몸 여기저기에 피어나오는 열꽃은 두려운 쾌락을 안겨 주었다. 결국, 비릿한 피 맛이 혀끝을 감돌면서 사정하고 말았다.
“소리 내라고 할 땐 안 내고 입 닥치라고 할 땐 시끄럽게 구네. 아직도 머리 안 돌아가?”
노엘은 손바닥 위로 사정액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으로 올라갈 줄 알았는데 그 옆에 있는 서랍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드르륵, 서랍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엘이 무언가를 꺼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플라스틱 성기 모양의 도구였다.
“흐으, 죄송해요. 잘못 했, 어요…….”
“뭘.”
“흐, 읍.”
“뭘 잘못했는데.”
“소, 소리 안, 내, 아흣…!”
잘못을 빌기도 전에 벌이 내려졌다. 노엘이 들고 있던 기구가 내 안으로 쑤욱 밀려 들어왔다. 아니, 내 안을 쑤셨다.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홧홧한 통증에 두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젖혔다. 찰박 소리와 함께 수갑이 흔들렸다. 괴롭다는 걸 표현할수록 기구는 밑도 끝도 없이 침범했다. 차라리 손가락이 나았다, 노엘의 것을 입에 무는 게 훨씬 나을 지경이다. 바르르 떨면서 노엘을 쳐다봤다.
“틀렸어, 다시.”
“아흑! 도, 도망간, 흣……!”
“다시 생각해.”
웅웅거리는 진동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내벽을 휘저었던 것보다 몇 배나 선명한 자극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노엘은 기구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내가 유독 소리를 내는 부분을 향해 쿡 찔러댔다.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즐기는 게 아니다. 노엘에 대한 공포심으로 억지로라도 미약한 쾌락을 꺼낸 것이다.
“으응, 흐, 모, 모르겠, 흐읏. 잘못, 했, 아흑…!”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왜 빌어? 계속 생각해.”
“하윽…….”
진동 세기가 올라갔다. 듣기 싫을 정도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기구가 쭉 빠져나왔다가 다시 뿌리 끝까지 밀어 들어오는 움직임에 속절없이 허리만 움직일 뿐이었다. 허리가 절로 움직여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노엘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두려웠다.
“모, 모르겠, 어요. 흐으, 잘, 잘못, 했, 용서, 아윽!”
찌걱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기구를 움직이는 노엘의 손짓이 빨라졌다. 정말 삽입을 한 것처럼 퍽퍽 쳐올리는 손길은 거칠다. 나를 농락하는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의자 위에 다리를 활짝 벌려, 허공에 떠 있던 발은 노엘이 움직이는 대로 휘청거렸다.
뭘 잘못했지, 내가. 쾌락과 고통에 눈물을 흘리면서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정답은 이것뿐이었다.
“노엘이 흐으, 싫, 어하는, 데도 눈앞에, 있, 아흑, 아, 흐, 자, 잠깐…….”
“이 씨발, 뭐라고 했어?”
“싫, 잘못, 했…….”
지금까지 상냥하게 대한 거라고 말하듯이, 기구를 움직이는 노엘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속도를 높였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구로 고통스럽게 박아 댔다.
쉬지 않고 뛴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고 쾌감과 통증이 발끝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이것도 정답이 아니구나.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찰박거리는 수갑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리면서 또 사정하고 말았다.
“하아, 하아….”
“개새끼가, 씨발, 뭐가 그렇게 싫은데. 뭘 더 해줘야 입에서 싫다는 개소리를 지껄이지 않을 건데, 어?”
“흐, 잘못, 했어요. 제가 다 잘못…….”
“알면 씨발, 싫다는 소리 꺼내지도 마. 좆같으니까.”
노엘이 내 안에 밀어 넣었던 기구를 빼내자, 온몸의 장기까지 딸려 나가는 기분이 들어 몸을 떨었다. 흠칫거리며 수갑에 묶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내 고통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때처럼 웃어 봐.”
“흐윽…….”
“콜라 들고 집에 들어올 때 웃었잖아. 웃어보라고.”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반쯤 감긴 눈으로 노엘을 올려다봤다. 웃고 있을 줄 알았던 노엘이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가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가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웃어보라는 말이 본인의 욕구충족에서 비롯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노엘은 꽤나 두려웠다. 웃으라는 말에 입꼬리를 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씨발.”
그게 노엘의 심기를 자극했던 걸까. 내 망할 태도가, 개새끼가 감히 웃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노엘은 바지 버클을 풀고 성기를 꺼내어 내 안으로 삽입했다. 손가락이나 기구와 비교되지 않는 크기가 내벽을 침범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윽 소리를 내며 노엘을 받아들이는 게 전부였다.
“아, 아파. 아프, 싫, 아니. 잘, 잘못 했…… 흐. 아윽!”
싫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노엘 앞에서는 싫다는 감정도 드러내선 안 될 것만 같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거친 추삽질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단단한 성기는 한계를 모르고 파고들었다.
“아흐…….”
소리 내면 시끄럽다고 또 방지기를 채우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히끅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문 이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아픔은 가시질 않았다. 그때, 노엘이 내 엉덩이를 찰싹 소리 나게 후려쳤다.
“힘 빼고 제대로 벌려. 이따위로 하면 옷 하나 입히지 않고 바깥에 내쫓을 거야. 벌려.”
“흐으, 죄, 죄송해요. 아윽!”
두려움 탓인지 긴장감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노엘의 명령을 따르기 힘들었다. 짜악, 짝! 몇 번 뺨을 때리는 손찌검이 날아들자 그제야 몸에 힘이 빠졌고 내 안을 침범한 성기는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아, 흐…….”
고통, 두려움, 그리고 비참함. 이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주르륵 눈물만 흘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저 생활고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온 것뿐인데. 남의 방에 잘못 들어갔던 것뿐이다. 내가 저지른 실수에 비해 대가는 너무나 잔혹했다.
“아직도 싫어?”
“아, 아뇨. 시, 싫지 않, 흐윽…….”
벌어진 허벅지에는 감각이 사라졌다. 헐떡거리며 노엘이 하는 말에 생각하지 않고 고개만 움직였다. 쾌락보다 고통, 공포가 가득한 행위를 버티기엔 힘이 부족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한계를 모르고 파고드는 성기에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지?”
“아, 흐…….”
“다시 붙잡히면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는데. 기억나?”
“윽!”
노엘이 아래에서 위로 허리를 퍽 쳐올렸다. 강한 움직임에 접합부가 움찔거리며 성기를 조여댔다. 퍽, 퍽, 퍽. 계속 들이박는 행위가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강렬한 감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목덜미를 뒤로 젖혔다.
“너는 평생 내 밑에서 울어야 할 거야.”
“아읏!”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입술이 내 목덜미를 할짝대며 물어뜯었다. 숨 막혔다. 집요할 정도로 잘근거리며 빨아들이는 입술을 감당하기 벅찼다. 그저 헐떡거리며 발버둥 쳤다. 이마저도 노엘에겐 욕망으로 돌아왔는지 내 성기를 감싸 쥐며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흐윽…….”
신음인지 서글픈 울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거친 움직임에 아래가 너덜너덜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나 망가졌을까, 내 위치는 얼마나 바닥을 쳤을까. 그 생각으로 사타구니를 내려다봤다.
“흐어엉, 아, 흐…….”
노엘의 것을 받아들인 내 아래에선 미끈거리는 액체와 피가 섞여 줄줄 흐르고 있었다. 노엘은 지금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놓았다. 나는 철저하게 ‘개새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도망가긴 왜 도망가.”
“아, 흐. 그만, 제발, 그만…….”
그만두는 건 바라지 않았다. 속도라도 낮추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노엘의 서늘한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아까 채워진 방지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만이라는 말을 했다는 두려움에 히끅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죄, 죄송해요. 아흑….”
두꺼운 성기가 한계를 모르고 내벽 안을 휘저었다. 노엘이 내 것을 움켜쥐며 골이 울릴 정도로 박아 댔다. 퍽퍽 소리가 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노엘의 손에 움켜쥔 성기가 사정했다.
그 이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뭔가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저 몸을 축 늘어뜨려 노엘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개새끼가, 감히.”
그 말을 끝으로 정액이 내벽 안을 채워댔다. 하지만 노엘은 성기를 빼지 않고 연이어 추삽질을 했다. 노엘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내벽 안을 채운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아픔은 무뎌지지 않았다. 내 안을 채운 정액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갔다 싶으면 또다시 채워 넣는 행위를 반복했다.
“……한 번도 쳐다보질 않잖아.”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면서 노엘이 내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여전히 허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질척이는 액에 미끌거리는 소리, 내 안을 휘젓는 흉포한 움직임, 나를 씹어 삼킬 것 같은 시선.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었다.
몇 번의 행위가 이어진 뒤에야 노엘이 내 안에서 빠져나갔다. 텁텁하고 비릿한 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아 헛구역질만 연신 해대며 의자에 늘어졌다. 가쁜 숨이 가라앉지 않아,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똑바로 봐, 유진.”
“흐…….”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시선을 억지로 마주치게 했다. 새하얀 얼굴에선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얌전히 굴었는데도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힘이 빠질 대로 빠져,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씨발, 좀 보라고.”
깜빡, 깜빡.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노엘을 응시하던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내 앞에 있던 노엘이 사라졌다. 어디 간 거지, 아니면 내가 정신을 잃어버린 걸까. 캑캑 마른기침만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점차 의식이 멀어져갔다. 그때, 희미한 시야 안에 단정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개새끼 길들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번엔 또 무엇으로 날 괴롭히고 압박할까. 목소리 내는 것도 두려워 비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그저 헐떡거리며 의식이 흐트러지길 기다렸다.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했는데.”
노엘의 손에 들린 것이 반짝하고 빛났다. 라이터가 켜졌다. 새빨간 불꽃은 노엘이 들고 있는 무언가로 옮겨갔다.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그제야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찰박거리는 수갑에 묶여 벗어날 수 없었다. 노엘이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유진, 약속 지킬 시간이야.”
“무, 무슨…….”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게 뭔지 알아?”
본능적으로 차오른 공포심에 고개만 휘휘 저으며 떨어 댔다. 누군가가 내 가슴을 쥐어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뻐끔거렸다. 도망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허옇게 지워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계약서에만 찍는 도장이야. 특별히 금속으로 제작해서 내구성도 좋더라고.”
“무, 무슨…….”
“딱 세 번 밖에 안 썼어.”
빨갛게 피어오른 불꽃이 사라졌다. 다만, 노엘의 다른 손에 들린 도장에 타는 냄새가 역하게 새어 나왔다. 이건 아무 문제 되지 않았다.
“전시관 지을 때, 에이전시를 차릴 때, 그리고 지금.”
도장을 내리지 않은 채, 내 앞으로 다가오는 노엘의 모습에 멀어졌던 의식이 선명해지며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 아, 안, 제, 제발…… 제발, 제발요. 시, 싫, 흐…….”
“쉿, 시키는 대로 다 하기로 했잖아.”
“자, 잘, 시, 싫어. 흐으… 제발…….”
“내가 잘못했어?”
“아뇨, 제, 제가 도, 도망쳐서. 흐, 하, 한 번만, 제발. 아악!!”
노엘이 축 늘어진 허벅지를 활짝 열어 재꼈다. 위험한 예감을 느껴 발버둥 치기도 전에 금속 도장이 허벅지 살결 위를 꾸욱 눌렀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작 엄지손가락도 안 되는 도장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선사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과 악취를 풍기며 타는 냄새, 이 모든 게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사, 살려주, 세…… 아윽!”
“내가 말했잖아, 유진.”
노엘이 빙글 웃으며 도장을 떼어냈다. 나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어떤 빛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몸이 고꾸라졌다. 하지만 노엘은 이 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새끼 밑에서 다리 벌려도 내 이름만 부르게 될 거라고.”
의식이 멀어져갔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눈이 감기는 와중에 나를 안아 드는 노엘을 쳐다봤다. 노엘의 눈은 웃고 있다. 나의 몸에서는, 나의 인생에서는 쓰레기보다 더한 악취가 난다는 것처럼.
* * *
노엘은 유진을 안아 들어 침실로 데려갔다. 의식을 잃어서 그런지, 몸뚱어리가 번쩍 들려도 유진의 입에선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노엘은 성질 같아선 유진을 지하실에 처박아 두고 싶었지만, 길들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지하실에 있다면 두려움도 무뎌질 게 뻔했다. 노엘은 유진이 텅 빈 동공이 아닌,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쳐다봐 주길 원했다.
“……볼품없군.”
노엘이 유진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매트리스 위에 늘어졌다. 새파란 눈동자가 유진의 목덜미를 향했다. 가느다란 목선 위로 붉은 자국이 물들여진 걸 확인하자, 노엘의 입가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짖음 방지기의 여파로 인해 희미하게 남은 상처다.
‘왜, 왜 저예요? 다른 사, 사람도 이, 있잖아요…….’
그때, 애원하던 유진이 노엘의 뇌리를 스쳤다. 노엘 유진을 만지던 손을 거두고 미간을 좁혔다.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평소와 다를 거 없이 유진은 덜덜 떨었고 노엘은 가학적인 태도를 취했다. 단지, 유진이 ‘다른 사람’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노엘은 입술을 깨물며 갑갑함을 떨쳐내려 했다.
‘저 좀 놓아주시면 안, 돼요?’
만족스러운 웃음도 잠깐이었다. 노엘은 차 안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니 갑갑하다 못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쥐방울만 한 게 자꾸만 달아나려 하질 않나, 감히 자신을 ‘이 사람’으로 정의했다. 노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싫다고 울부짖으며 수사관의 바짓단을 붙잡던 유진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머리채를 잡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노엘은 평생 해본 적 없는 인내심 테스트를 한 것만 같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유진. 왜 하필 나야?”
노엘이 축 늘어진 손목을 그러쥐고 씹어 삼키듯 으르렁거렸다. 당연하게도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졌을 뿐이었다. 이딴 개새끼 안 보면 그만이지. 노엘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노엘의 시선은 다시 유진에게로 돌아갔다. 본능적인 행위였다. 노엘 본인조차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가느다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씨발, 어디까지 몰아붙일 건데.”
누구에게도 감정 하나 드러낸 적 없던 노엘이다. 선대 때부터 만들어진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약한 모습을 내비치지 말라는 방침에 길러졌던 터라, 노엘은 단 한 번도 진실된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이성과 본성의 경계선에 유진이 제멋대로 침범해 버렸다.
“……유진.”
노엘은 나지막이 유진을 불렀다. 의식을 놓아버린 유진은 그저 축 늘어져 불안한 호흡만 터트릴 뿐이었다.
“이건 이거대로 좆같네.”
거친 말과 다르게 손길은 부드러웠다. 노엘은 유진의 가슴팍을 둥글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정신 잃은 사람을 불렀으니 대답이 없는 건 당연했다. 어째서인지 노엘은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며 숨을 뱉었다. 또 갈증이 차올랐다.
“흐…….”
노엘이 유진의 목덜미 위로 입술을 묻었다. 상처를 건드려서 그런지,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작은 숨결에서도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멈출 노엘이 아니다. 노엘은 집요하리만큼 목덜미를 주욱 빨아들였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이를 세워 잘근거리며 갈증을 달랬다.
“……고 싶어…….”
“씨발, 뭐라는 거야.”
유진이 작게 중얼거리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결에 뱉어서 그런지, 유진의 입에서는 다른 언어가 새어 나왔다.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유진의 손을 끌어당겼다. 지난날, 도망치기 직전 손을 잡아달라고 입술을 달싹이던 유진이 떠올랐다.
‘손, 잡으면 안 될까요?’
‘뭐?’
‘죄송해요. 제가 잘못 말했, 윽……!’
노엘은 알고 있었다. 유진이 개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유진의 수작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장단 맞추고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려고만 했다. 하지만 노엘은 예상과 다르게 이성을 내려놓고 탐욕적인 욕망을 따라갔다.
실수였다고 여기면서도 노엘은 유진의 가슴팍으로 입술을 옮겼다.
“으음….”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뒤척이자, 커다란 손이 유진의 손을 한 번에 움켜쥐고는 위로 올렸다. 사나운 손길에 깨어날 법도 한데 유진은 눈 한 번 뜨지 않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노엘이 유진의 유두를 입에 머금고 혀를 굴렸다.
단 것이라곤 머금어본 적 없는 것 같은 혀 놀림으로 유두를 할짝거렸다. 노엘은 움찔거리는 유진의 손에 힘을 주고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갔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유두가 부풀어 오르는 걸 보자, 노엘은 픽 웃음이 나왔다. 새어 나오는 호흡이 살결을 간지럽혀서일까. 유진은 움찔거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유진.”
방 안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노엘의 음성만 맴돌 뿐이다. 노엘은 고개를 떼고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다. 하얀 손이 축 늘어진 유진의 손을 움켜잡았다.
문득, 노엘은 모래를 붙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반짝반짝해서 잡아보려고 했더니 줄줄 빠져나가는 모양새가 유진을 닮았으니까.
“아.”
노엘은 유진의 허벅지를 벌리며 자신이 새긴 낙인을 보고 탄식했다. 안타까웠다. 좀 더 선명하게 찍을 걸, 하는 욕심이 노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욕망을 표현하듯이, 허벅지를 붙든 손이 힘을 주어 간격을 벌렸다.
하얀 살결 위로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다. 노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응시했다.
처음에는 그저 ‘완벽한 인생’을 망친 대가를 주고 싶었다. 감히 자신을 건드렸다는 대가를 톡톡히 돌려주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망가지고 있는 건 노엘 본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만 같다.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시선의 끝은 한 사람을 향했다. 생경한 감정이 바늘처럼 노엘의 가슴을 쿡 찔러왔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 짧은 순간에 노엘은 자신이 왜 목마름을 느끼는지 자각하고 말았다.
“씨발…….”
낯선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된 첫 소감은 거친 비속어였다.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유진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잠기운이 묻어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엘은 가슴께가 저릿한 것을 느꼈다. 부정하려고 해도 명백했다. 쿵쿵, 낯선 맥박 소리가 온몸에 퍼져 나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노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정신 차렸을 땐 이미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아…….”
붉은 입술에서 작은 탄식이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노엘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이름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