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빌어먹게도 끔찍한 사람
LA 중심부 호텔의 스위트룸.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샹들리에와 화려한 조각품, 풀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있는 호화로운 객실이다. 하지만 이제 막 객실에 들어선 노엘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갑습니다. 캐린 씨의 대행인 콘라드 로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노엘은 필립의 안내를 받아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낯선 남자가 노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노엘은 가볍게 악수를 하고 손을 떼 내며 자리에 앉았다. 이미 테이블 위엔 와인을 비롯한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충분히 설명을 드린 것 같은데 아직도 캐린의 호기심을 해결하지 못했나 봐요. 어떤 게 궁금하시죠?”
빙그레 웃던 노엘이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캐린은 얼마 뒤에 있을 거래의 고객 중 하나고 지금 이 남자는 대행인이다.
“아시다시피 지난번 뉴욕 항구에서 필로폰이 적발된 것 때문에 캐린 씨가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필립, 체포된 밀수범이 독일인이라고 말씀드린 적 없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고객에게 정보를 돌렸습니다.”
노엘은 필립의 대답을 듣자마자 뭐가 문제냐는 듯 눈짓만 했다. 하지만 남자의 걱정스러움을 잠재울 순 없었다. 남자는 난감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며 노엘을 쳐다봤다.
“언론에서 계속 이 사건을 언급하는 바람에 경찰들이 더 귀찮게 굴 거라고 예상돼서요. 아, 물론 웨스틴 쪽에서 경찰 내부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알지만, 불안해서요.”
“그래요?”
“죄송합니다. 못 믿는 게 아니라 걱정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못 믿는 거죠, 어쩔 수 없네요. 고객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판매자라니. 그럼, 거래는 이쯤에서 그만두죠. 받은 돈은 필립을 통해서 전해드릴게요.”
노엘은 미련 없다는 듯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립 역시 군말하지 않고 노엘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당황한 남자가 노엘의 앞을 막아섰다. 계약을 앞두고 거래를 망친다면 분명 제 밥그릇은 날아갈 게 뻔했으니 어떻게든 붙잡아야만 했다.
“노, 노엘! 잠시만요!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제가 대신 온 건 캐린 씨가 해외로 나가 계셔서 그런 겁니다. 죄송합니다.”
노엘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모르는 남자의 모습을 제 시야 가득 담아냈다. 하지만 이내 남자는 지워지고 붉게 물든 눈가에 눈물을 달고 있는 유진이 떠올랐다.
‘여길 벗어나고 싶냐고 물었잖아, 유진.’
‘흐윽, 네, 제, 제발 보내주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 바로 한국으로 갈게요. 여기서 겪은 일 전부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노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선 경매를 가장한 거래를 성사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으나, 사소한 무언가가 노엘의 신경을 쑤셔댔다.
지난 몇 달간, 아니, 유진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이 빌어먹을 기분은 노엘에게서 떠나가질 않았다. 노엘은 유진을 떠올릴수록 속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요?”
“…….”
“노엘?”
필립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노엘을 불렀다. 하지만 노엘은 대꾸하지 못할 만큼 강한 사념에 사로잡혔다. 어떤 상황에서도 울먹거리는 유진의 모습은 잊을 수 없었다.
‘흐으, 잘,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을, 흐으…….’
‘왜 그렇게 울어? 내가 나쁜 짓 하는 거야?’
‘아, 아뇨. 그런 게 아니, 에요…….’
유진은 노엘에게 살려달라고 했다. 보내 달라 말하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까지 했다. 빌어먹을 개새끼가, 감히. 노엘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노엘은 웨스틴이라는 성을 달았으면 남 앞에선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집안 방침에 따라 흠 없이 완벽하게 살았다.
그래서 유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웨스틴에서 인정하지 않는 출신인 것, 같은 피가 흐르는 동생과 살을 섞게 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 만으로도 노엘은 유진을 말려 죽여도 시원찮다고 생각했다. 감히, 제게 오점을 안겨준 사람이니까.
‘거봐. 너도 알잖아. 내가 이유 없이 때리는 게 아니라는 거. 유진, 나는 말이야. 내 말만 잘 들으면 화내지 않아.’
‘네, 네. 제가 다 잘못, 했어요….’
‘그 친구도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체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제 시야 밖으로 벗어나려는 게 무엇보다 노엘을 분노하게 했다.
지정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동네로 데리고 온 것인데 계속해서 달아나려는 유진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노엘은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애초에 유진을 놓아줄 생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역시 개새끼한테 햇빛을 보여주면 안 된다니까.’
‘아, 악!! 이거 놔, 놔주세요!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유진의 발목을 치료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쿡 찌르면 피가 철철 흐를 기세로 부풀어도 노엘은 그저 석고 붕대를 감아주며 진통제만 놓아줄 뿐이었다. 묶어두려고 망치를 들었으니, 치료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노엘?”
“아, 잠시 뭘 좀 생각하느라. 그럼, 캐린과 우리의 신뢰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할게요. 필립, 계약서 다시 가져와요.”
노엘은 필립이 내려놓은 계약서를 보다 만년필을 꺼내 가벼이 서명했다. 서명하는 와중에도 유진이 신경 쓰였다.
“전시관 주변 스트릿을 순찰하는 경찰들도 우리 쪽 사람들이지만, 요청하신다면 그들의 정보도 언질 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엘은 필립과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예상대로라면 유진은 적어도 석 달간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을 대비해 목줄을 채워 지하실에 가둬 두었지만, 노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유진이 가만히 앉아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진 그럴 예정이다. 노엘은 저를 기다릴 유진을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 이걸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계약을 마친 남자가 노엘 앞으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방에 있는 그 어떤 장식도 상자 속 보석에 비하면 비루할 정도였다. 노엘의 시선이 보석으로 향하자, 남자가 뿌듯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보츠와나에서 발굴한 다이아몬드입니다. 원석의 가치로는 최상품이죠. 캐린 씨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늘 그랬듯이 잘할 테니까요.”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남자가 옷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노엘과 필립만이 남았다. 방 안을 맴돌던 침묵은 노엘이 상자를 닫으며 걷어졌다.
“아버지나 알베르트에게 말 안 들어가게 해주세요. 이런 뒤치다꺼리하는 게 제 일이잖아요.”
“저희 쪽 일이 아니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체포된 밀수범은 독일인입니다.”
“그래도 더 신경 써주세요. 고객이 이런 것까지 주는 거 보면 상당히 걱정하는 모양이에요.”
노엘이 생글 웃으며 건네받은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손 흔들림에 따라 조명에 반짝이는 것이 제 가치를 알아달라 하는 듯했다. 노엘은 천천히 상자 속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들여다봤다. 고민할 것도 없이 노엘의 머릿속엔 유진이 스쳐 지나갔다.
“흐음.”
고작 2달러짜리 음료수로도 웃던 유진이다. 몇억을 훌쩍 웃도는 다이아몬드를 안겨준다면 유진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노엘은 다시 상자를 열고 보석을 들여다봤다. 다이아몬드는 손 하나 까딱하기 꺼려질 만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 고객이 참 좋은 걸 선물해 줬네요.”
노엘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반지를 만들지, 목걸이를 만들지, 그게 아니라면 개 목줄에 달아버릴지 나름의 고민이 생긴 것이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유진이 학교 끝날 시간이 되었어요. 여기서 2시간 정도 걸리니까 지금 가면 다 같이 저녁 먹을 수 있겠네요.”
“아, 저는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해서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아쉽네요, 필립.”
노엘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미소 지었다. 훤한 미소 위로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다. 지하실에 유진을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필립 역시 그러했다. 필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노엘을 따라 출입문까지 걸어갔다.
“저, 유진 말입니다.”
“나쁜 얘기 하려면 안 들을래요. 필립은 유진을 나쁘게만 보잖아요.”
“그게 아니라, 웨스틴 씨가 양자로 받아들이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시겠죠. 예상은 했어요.”
노엘이 옅게 웃으며 씁쓸하다는 듯이 내색했다. 아쉬운 이유는 단 하나, 유진을 법적으로도 묶어놓을 장치가 사라졌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필립의 눈에는 제 동생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해 씁쓸한 형의 모습만 보였다.
두 사람은 사치스러운 스위트룸을 고작 두 시간만 이용하고 미련 없이 빠져나왔다.
“이번 거래가 잘 끝나면 다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어쩌면 웨스틴 씨의 출마에 유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필립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분명 노엘이 좋아하리라 생각하며 무심하게 툭 던진 한마디였다.
“무슨 말이에요?”
“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려도 두 사람 모두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노엘은 웃음을 거두고 서늘한 눈으로 필립을 응시했다.
“아버지 선거에 왜 유진이 필요하냐고 물었어요, 필립.”
가만히 응시하는 푸른 눈은 시리고 날카롭다. 필립은 단 한 번도 노엘에게서 이러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어 당혹스럽기만 했다. 늘 웃기만 하던 노엘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친과 그 눈빛이 꼭 빼닮았다.
냉랭하고 서늘하며 금방이라도 목이 조일 것 같은 압박감에 식은땀까지 흐르는 듯했다. 필립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언론에선 웨스틴 씨의 혈통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론도 마찬가지고요. 웨스틴 씨의 취약점이 바로 이겁니다. 유진을 양자로 들인다면 분명 달라질…….”
“그래서, 내 동생을 쇼하는 데 이용하겠다?”
노엘이 천천히 필립을 향해 다가갔다. 상대방이 긴장한 걸 알면서도 웃기만 하는 노엘의 태도는 배려 하나 묻어 있지 않다. 단지, 제 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백한 신호만 보낼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표 하나 못 얻는다고 아버지께 전해요, 필립. 요즘 사람들 눈이 꽤 높아졌거든요. 진부한 가족 얘기에 눈물 하나 흘리지 않는다고.”
“죄송합니다.”
“이 문제 때문이라면 입양 얘길 꺼내지 않는 게 좋겠네요. 그게 아니더라도 유진은 내가 챙길 수 있어요.”
하얀 손이 필립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응원 혹은 격려가 아닌, 경고의 의미다. 필립은 아까부터 느껴지는 압박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목소린데 왜 이렇게 냉랭하게 들리는 건지 저조차 모를 일이다.
“이만 가요, 필립.”
“네.”
손이 떨어지고 나서야 필립은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필립이 노엘을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로비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소음 하나 없이 빠르게 내려갔다.
“지난번에 제가 알아보라는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아, 예거 넬슨 말입니까?”
“네.”
“유진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겹치는 수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 2년 전에 축제에서 약물을 소지하다 연행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적발된 기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진이 도망쳤던 날, 노엘은 유진을 집으로 끌고 오자마자 필립에게 연락을 취했다. ‘예거 넬슨’이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유진을 구워삶아 먹었는지 그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물론, 필립에게는 유진과 어울리는 친구인데 아무래도 질이 나쁜 것 같아 걱정된다는 식으로만 얘기했다.
“뭔가 나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더 물어볼게요.”
노엘이 생글 웃으며 필립을 쳐다봤다. 필립은 언제봐도 아름다운 미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노엘이 보여줬던 서늘한 눈빛이 다시 떠올라 뒷목만 매만졌다.
“필립도 유학 경험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유학이라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상하이에 2년 정도 있었거든요.”
“그래요? 말도 안 통하고 힘들었겠네요.”
“유진처럼 누구와 싸우고 가출하진 않았습니다. 대마초나 피우는 친구랑 놀지도 않…….”
“나쁜 소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노엘의 말에 필립은 입만 꾹 다물었다. 어느덧 로비에 가까워진 숫자가 엘리베이터 번호판에 깜빡였다.
“필립은 어떤 사람이 제일 의지가 됐어요?”
“네?”
“먼 나라에서 혼자 힘들게 고생할 때, 어떤 사람이 제일 생각나고 의지 됐는지 궁금해서요.”
노엘이 미소 지으며 필립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선 어떠한 흑심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노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필립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제가 학교에서 의도치 않게 오해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물건을 훔쳤다나 뭐라나.”
“아, 정말요?”
“네. 그때 지나가던 룸메이트가 도와주는 바람에 오해를 풀 수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 친구가 도와준 이후로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연락은 끊겼지만요.”
“그렇군요.”
“지금도 그 친구가 가끔 생각납니다.”
“잊지 못했다는 거네요?”
“뭐, 그런 셈이죠.”
띵,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노엘은 충분한 답을 들었다는 듯이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어쩐지 아까보다 가벼워진 걸음이다. 노엘은 제 손에 들린 상자를 가볍게 흔들며 로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노엘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저를 생각하며 눈가가 벌게지도록 울고 있을 유진을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노엘은 호기심을 품었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을 유진은 어떤 모습일지.
* * *
얼마나 지났는지, 지금이 무슨 요일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컴컴한 지하실에서 갇혀 있는 주제에 요일이나 시간 같은 걸 알아서 뭐하겠나 싶어 관심을 내려두었다.
“흐, 아파…….”
노엘은 상상 그 이상으로 끔찍한 사람이었다. 열이 올랐을 때를 제외하고는 밥도 주지 않았다. 저항할 기력을 완전히 빼버리겠다는 기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은 맞은 편에 걸린 옷과 거울이었다.
발목이 망가지던 당시에 입었던 바지다. 바짓단이 검붉은 피로 짙게 물들여졌는데도 버리지 않은 이유는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다른 쪽 다리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압박이 느껴져 도망치고 싶다는 의욕도 사라졌다. 그런 멍청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 지켜보는 것 역시 힘겨웠다.
“추워…….”
차가운 바닥에 기대앉자, 발목에서 시큰시큰한 통증이 미약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통제 효과가 떨어졌다. 아릿한 통증에 억지로 눈을 붙이려던 찰나, 무언가가 떠올랐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 가지고 있어.’
‘응? 이게 뭔데?’
‘수면제야. 다시 노엘에게 붙잡히면 이런 방법이라도 써야지. 안 그래?’
맞아, 수면제. 망설임 없이 곧바로 몸을 일으키자, 뼈마디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입술을 콱 짓이기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목줄이 채워져 벽에 걸린 바지까지 다가갈 수 없었다.
“으윽.”
노엘이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발견했다면 진작 박살 냈을 것이다. 예거가 무사한지에 대한 여부는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단지, 주머니 속에 넣은 수면제가 제대로 들어있는지, 그것만이 간절하게 궁금할 뿐이다.
끼익―.
그때, 지하실 문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엘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목줄을 풀어달라고 하면 또 얻어맞을 것 같아서 얌전히 자는 척하려 재빨리 드러누웠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지하실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달칵, 조명이 켜졌다. 순식간에 훤해진 시야에 눈이 부셔 제대로 눈꺼풀을 들 수 없었다.
“일어나.”
갑자기 조명이 환하게 켜지면서 서늘한 목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잠든 척이라도 하면 노엘이 돌아갈까 싶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단단한 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움찔거리는 거 다 봤어, 일어나.”
겨우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아릿한 통증에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노엘이 무릎 굽혀 앉은 채 시선을 마주쳤다. 손에 무언가 들고 있지만, 관심이 가지 않았다. 무어가 되었든 나를 고통 주기 위한 물건일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노엘….”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노엘이 내게 저지르는 모든 행위가 고통을 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심장이 억눌리는 기분이 들 만큼 두려웠다.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살 순 없다. 컴컴한 지하실에 묶인 채로 노엘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건 끔찍했다.
내가 궁금한 건 단 두 가지뿐이다.
어떻게 해야 나를 놓아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나를 내버릴 수 있을지. 단지 그것만이 전부다.
“어떻게 하면, 저를 버릴 수 있으세요?”
“뭐?”
“저, 절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온종일 물을 마시지 못해 말을 할수록 목구멍이 찢어질 듯 따끔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노엘의 미간 역시 좁혀졌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보고 개새끼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럼. 차라리, 차라리요. 몸 파는 곳에 넘겨진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계속 말해봐.”
“차라리 그런 곳에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노엘은 내가 망가지는 걸 볼 수 있고, 나는, 나는 이곳에서 나갈, 윽!”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노엘이 내 뺨을 후려쳤다. 짜악! 짝! 연달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입안에서 아릿한 피 내음이 퍼지고 시야가 흔들리는 어지러움을 겪었다.
“아윽…!”
평소의 강도라기엔 너무나 지나쳤다. 발목 통증이 잊힐 만큼 너무나 사나운 손찌검이다. 몇 대를 맞았을까, 셀 필요도 없다. 수도 없이 맞고 바닥을 뒹굴고 짓밟혔다. 뭐가 노엘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봐, 이 개새끼야.”
“내보내 달, 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개새끼, 개새끼 하니까 아무한테나 다리 벌리는 남창이 되려고 하네. 유진, 개새끼랑 남창은 달라.”
“아윽!”
뭐가 다르냐고 묻고 싶다. 대체 뭐가 다르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지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내 몸뚱어리는 어느샌가 노엘의 손에 덜렁 들려 엎드려졌고 보이고 싶지 않은 입구까지 노엘의 눈앞에 훤히 드러내고 말았다.
“남창 취급을 받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해줘야지. 이 씨발 개새끼가 그걸 원하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아, 아파요. 아파, 아윽…!”
노엘이 축 늘어진 내 성기를 움켜쥐고는 빠르게 흔들어댔다. 차가운 바닥 위로 무릎을 꿇은 채 노엘의 손길을 받아냈다. 어떤 전희도 없이 흔들어대는데 쾌락보단 고통이 앞서 나갔다. 계속해서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시큰한 통증에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사정할 수 없었다. 쾌락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 벌려, 처맞기 싫으면.”
“우읍…….”
노엘이 입 안으로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혀 위를 굴러다니는 단단하고도 매끄러운 물체는 구슬 같다. 노엘이 내 몸을 뒤집어 눕히고는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하여 성기를 움켜쥐었다. 계속 흔들어대는 손길에 속절없이 앓는 소리를 뱉고 말았다.
“아, 아파. 흐, 그만, 그마안…….”
“뭘 그만. 아래는 어서 박아 달라고 움찔거리고 있는데.”
노엘이 내 성기를 흔들어대며 입구 안으로 손가락을 헤집어 넣었다. 부러 예민한 부분만 골라 건드렸지만, 고통을 잊을 만한 쾌락은 아니다. 다만 눈물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개새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지.
그런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하, 흐…우으…….”
헐떡거리며 노엘의 손길을 받아냈다. 노엘은 평소보다 거친 손짓으로 내 안을 헤집고 성기를 흔들어댔다. 미미한 쾌락에도 성기에서는 끈적이는 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노엘은 내가 배출할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국, 이번에도 노엘에게 지고 말았다. 나는 아래에 찌르르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고통과 함께 사정하고 말았다.
“거봐, 이러면서 뭘 그만이래. 틀려? 이 천박한 새끼야.”
“흐, 흐읏…….”
노엘은 내게서 떨어지더니 입안에 굴리던 구슬 같은 것을 빼내었다. 역시 예상대로 투명한 구슬이었다. 무슨 용도인진 모르겠으나, 너무 반짝거려서 구슬로 쓰기엔 아까울 정도였다.
“저, 아, 아파요. 정말 아파요….”
“천박한 새끼.”
“다음에 할게요. 다음엔 더 잘할 테니까… 제발요, 제발. 오늘은 그만…….”
사정의 여운과 발목에서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헐떡이며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애원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여기서 멈출 거라 생각하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쑤셔지는 취급 받고 싶다며. 그럼 입 닥치고 구멍이나 벌려.”
하지만 그것은 내 안일한 생각이었다. 노엘이 내 다리를 활짝 벌려 입구에 구슬을 문질러댔다. 이질적인 감각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쓰라린 발목 탓에 반항할 수 없었다. 잠깐 내려놓았던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친절하게 굴고 싶었는데 네가 먼저 좆같이 굴어놓고 잘못한 사람 보듯 쳐다보면 어떡해, 유진.”
“자, 잠깐. 하, 하지 마세, 요. 이, 이거 싫…….”
“잘 쌌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아, 아, 안, 아악!!”
타액으로 번들거리던 구슬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노엘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크기지만,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르르 떨며 허벅지를 오므렸다. 그러자 노엘이 목줄을 벗겨내고는 몸뚱어리를 들어 올렸다.
“하지, 하지 마. 하지 마. 흐……!”
엉엉 울어봤지만, 노엘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나를 거울 앞에 내려놓았다. 엉덩이가 딱딱한 바닥에 닿자마자 안에 들어간 구슬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노엘은 내 사타구니를 활짝 벌린 채 거울과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하지 말라면서 이렇게 물 흘린 건 누구야?”
“아흐!”
“남창 취급해달라고 했지? 그럼 소원대로 해줄게. 유진, 5분 줄 테니까 네 구멍에 들어간 걸 내보내. 그럼 원하는 액수만큼 네 구멍에 꽂아줄게.”
“하, 하지, 하지만 시, 싫어. 거울 앞은, 이거, 싫….”
“왜 싫어? 눈물 그렁그렁 달고 아래가 채워진 네 모습이 얼마나 재밌는데. 유진, 똑바로 봐. 이게 네 진짜 모습이야.”
노엘이 내 턱을 움켜쥐고는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그야말로 끔찍한 모습이다. 입가엔 피딱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살갗은 붉은 울혈로 가득 물들여졌다. 사타구니는 허여멀건 한 정액이 질척하게 묻어 있다. 이게 내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나는 어디까지 망가져야 하는가.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지만, 노엘이 내 허벅지를 움켜잡으며 거울 앞에 엎드리게 했다.
“아윽…!”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거세게 느껴져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시에 안에서 돌아다니던 구슬이 내벽을 느릿하게 건드렸다. 소름 끼치도록 생경한 감각에 움찔거렸지만, 노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노엘은 멈추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거봐, 너는 남창이 아니라 개새끼 행세를 하는 데 재능 있어.”
“아, 흐. 아, 아파. 아파요, 제, 제발, 하, 하지, 아악!!”
아프다고 발버둥 쳐봤자 헛수고다. 바지 버클을 풀러 내리는 소리와 함께 노엘의 성기가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구슬을 빼지 않은 채, 단단한 기둥이 한계를 모르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반동으로 안에서 나뒹굴던 구슬이 내벽을 뭉근하게 눌러댔다.
“아, 아악! 아파, 아, 흐… 아, 아파…….”
아프다고 발버둥 쳤지만, 노엘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단단한 구슬이 내벽 안을 돌아다녔다. 예민한 곳을 건드리면서 피부가 찢기는 고통과 발목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힘 빼, 이 개새끼야. 뭘 잘못했다고 울어.”
철썩 소리와 함께 엉덩이 위로 홧홧한 열이 올라왔다. 노엘은 낮게 으르렁거리듯 속삭이며 연신 허리를 움직였다. 평소보다 거칠고 빠른 움직임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흘려댔다.
“제, 제발…….”
제발 나를 놓아달라고. 제발 나를 버려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다. 하지만 노엘은 골반을 움켜쥐고 허리를 쳐올릴 뿐이다. 간간이 등허리 위로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 고통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몸에 있는 온 세포가 고통스럽다고 울부짖는 것만 같다.
“아윽!”
“다른 생각 하지 마, 유진.”
“아, 흐윽, 그만, 그마안…….”
“넌 그냥 지금처럼 내 좆만 받아들이고 울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 흣…….”
“부족한 게 뭔지 모르게 해주는데도 왜 자꾸 달아나려고 해? 아래가 그렇게 허전했어? 매번 박아줘도 갈증 나?”
“아흑…!”
퍽, 퍽!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에 맞춰 정수리가 거울에 계속해서 부딪혔다. 골이 울리고 아래가 찢기며 발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에 정신 차릴 수 없다. 노엘이 귀두 끝까지 성기를 빼냈다가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하, 하지, 하지 마. 제발, 제발…!”
복부까지 느껴지는 묵직함에 소름이 끼쳤다. 등골이 오싹한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노엘을 밀쳐댔다. 하지만 노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노엘은 내 골반을 움켜쥐고는 위에서 아래로 박아 댔다. 쳐올리는 속도가 더는 빨라질 수 없을 때, 노엘은 내 안에서 사정하고 성기를 빼내었다.
“흐…….”
노엘의 성기가 빠져나오면서 입구가 마비된 것처럼 경련이 일어났다. 거대한 것을 삼켰다는 흔적을 남기듯 다물어지지 않는 접합부에서 멀건 정액과 함께 구슬이 툭 떨어져 나왔다.
데구르르, 탁. 굴러가는 구슬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노엘이 내 턱을 움켜쥐고 거울을 보게 하는 바람에 구슬을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구멍 벌린 값이야, 유진.”
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을 멍하니 바라봤다. 뿌연 액이 잔뜩 묻어 있는 구슬을 쳐다보고 싶지 않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멍해지고 몸뿐만 아니라,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개 같은 새끼.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나머지 발목도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노엘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실 계단 위로 올라갔다. 내가 어떻게 늘어지든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지하실 문이 닫혔다. 또 혼자 남게 되었다. 덜덜 떨며 거울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바라봤다.
“더러워, 흐으. 더러워. 더러워. 더러, 워…….”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내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깨달았을 뿐이다.
더럽다, 김유진이라는 사람은. 노엘 웨스틴에게 범해지는 존재로만 살 수 있다. 그런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고 스스로 목을 졸랐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때까지 계속 스스로를 괴롭혔지만, 불행하게도 정신을 잃는 일은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 차가운 바닥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거울을 힐끔 보다가, 벽에 걸린 옷가지를 쳐다봤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천 조각을 힘없이 바라봤다.
잠깐만, 혹시.
불현듯,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거가 준 수면제가 여기 있지 않을까?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바지에 손을 대었다. 주머니가 불룩하지 않아 어쩐지 불안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수면제를 떠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또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거라고. 살고 싶어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손끝에서 두꺼운 종이가 스쳤다. 예거가 줬던 종이의 감촉과 똑같다. 아직 여기 있는 걸 보면 노엘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눈을 크게 뜨며 주머니에 들어있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조심스레 펼쳐내자,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뭔가 쓰여 있는 것 같다. 하얀 가루 사이로 매직 자국이 비쳤다. 글씨를 볼 수 있게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옆으로 옮겼다. 살며시 가루를 옮기자, 내가 보고 싶었던 글씨가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I’ll tell you the truth, Eugene.」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문장 밑으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석연찮다. 이것은 누가 쓴 것일까. 예거가 전해주긴 했지만, 의심을 거둘 수 없다.
‘Yujin’이 아닌, ‘Eugene’.
예거와 내가 처음 만났던 건 택시 어플을 통해서였다. 어플에 가입할 때 입력한 이름 역시 유진이었지만, 스펠링이 달랐다. Yujin. 내가 당시 입력했던 이름이다. 게다가 우리가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도, 잠깐이나마 메시지를 할 때도 예거는 나를 ‘Yujin’이라고 칭했다.
더 수상한 것은 전화번호 위에 적힌 문장이다. 진실, 대체 무슨 진실을 말하는 걸까. 예거가 나를 일부러 가출한 사람으로 신고한 게 맞을까? 그럼 대체 왜 이런 쪽지를 남긴 거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우선은 이 약을 노엘의 입에 넣는 게 우선이다. 내가 감히 할 수 있을까. 나를 무너뜨린 그 사람에게 수면제를 먹일 수 있을까. 해야겠다는 생각보단 두려움이 앞서 나갔다.
* * *
“흐…….”
몸이 쇠약해진 탓에 열이 자주 올랐다. 오늘도 그랬다. 노엘은 끙끙 앓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옷 입는 것을 허락했다. 그 덕에 수면제를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오한은 가시지 않았다.
“아파요……. 발목, 도 아프고 전부 아파요.”
“쓸모없는 개새끼인 거 티 내지 말고 일어나.”
“발목 아파, 흐윽…….”
너무 아파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런 걸까. 일어나라는 명령에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예전에 비하면 발목 통증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몇 번 절뚝거려야 한 걸음 걸을까 말까였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노엘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미간을 좁히는 것이 금방이라도 한숨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씨발’이니, ‘개새끼’ 같은 거친 욕설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숨결을 뱉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노엘이 이런 표정을 짓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나를 개새끼로 다루고 발목을 꺾어버린 그의 심정이 무엇인지 헤아리지도 못했으니까.
“노엘, 저 진짜 아파요.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일어나라고 했지 누가 징징거리라고 했어? 입 닥치고 일어나.”
“흐윽…….”
역시나 내 착각이었다. 노엘은 거친 말과 함께 나를 업어 들었다. 꼭 짐짝 드는 것 같은 움직임이라 차라리 내려주는 게 낫다 싶었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여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노엘에게 들쳐 업힌 채로 지하실 밖을 나섰다.
“……성가신 개새끼.”
노엘은 계단을 올라가며 낮게 읊조렸다. 아픈 것도 잘못이라는 걸까. 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노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려움 때문이다. 수면제를 들키거나 노엘에게 얻어터지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안한 미래가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당분간 여기 있어. 또 도망치다 걸리면 다시 지하실에 집어 던져 버릴 줄 알아.”
노엘이 나를 침대 위에 눕혀주며 시선을 마주쳤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노엘의 침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살벌한 협박과 함께 목줄이 채워졌다.
“대답해.”
“알겠어요.”
노엘은 으르렁거리듯 읊조리며 목줄을 침대 헤드에 묶어두었다. 어찌나 꽉 묶던지, 하얀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내 뺨을 매번 후려치고 발목을 꺾어버린 손이라 그런지 오싹해졌다.
“개새끼 한 번 잘못 들였다가 왜 이렇게 성가신 건지 모르겠네.”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말이야 덮어주는 거지, 거의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꺼운 이불에 폭 파묻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노엘도 나를 꼴 보기 싫어할 테고 나 역시 노엘이 보고 싶지 않으니 이렇게 있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
“뭐해, 이 개새끼야. 죽고 싶어?”
“흐…….”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노엘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내 얼굴을 가릴 수 없게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비치는 시퍼런 눈동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는 수면제가 신경 쓰였다. 제발 들키지 말자, 제발.
“……노엘.”
“부르지 마. 입 벌려.”
“으웁.”
“약도 제대로 못 먹는 게 아프긴 왜 아파.”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입을 벌리게 한 다음 알약을 밀어 넣었다. 진통제 아니면 해열제일 게 뻔해 무슨 약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차가운 손이 뺨 위에 닿자, 저절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궁금한 게 있어요.”
나는 공포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얻어터질 걸 알면서도 호기심이 이성을 이겨 먹고 말았으니까. 노엘이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봤다. 손목을 걷어붙이는 걸 보면 손찌검이 날아들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노엘의 손이 내 어깨를 그러쥐었는데 소름이 끼쳤다.
“잘,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냥 조용히 잘게요. 죄송, 해요.”
개새끼한테 질문 같은 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지만, 어깨를 붙든 손은 떨어져 나갈 기미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수면제를 가지고 있던 것도 들키면 어쩌지. 심장이 철렁거렸다.
“넌 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게 아니라, 사람 성가시게 하는 법을 배워왔구나?”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서늘한 냉기에 눈이 떠졌다. 시야 안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마주치는 노엘이 있었다.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걸까. 평소대로라면 뺨을 맞아야 하는데 때리지 않는 게 더 무서울 지경이다.
“뭔데. 말해 봐.”
“뉴욕에 있을 때, 기억나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는 듯이 노엘이 미간을 좁혔다. 손찌검이 날아들까 봐 움찔하며 몸을 뒤로 내뺐다. 하지만 침대에 고정된 목줄 때문에 아주 멀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노엘이 내 손목을 바짝 끌어당겨 어딜 가지도 못하게 붙들었다.
“왜? 처음 봤을 때처럼 박히고 싶어서 이래?”
“아, 아뇨! 그, 그게 아니라, 노엘이 그때 저보고 그랬, 아, 아니에요. 물어봐서 죄송해요.”
“……씨발, 돌아버리겠네.”
바짝 다가온 노엘 때문에 겁을 먹었다. 무릎이 달달 떨리면서 몸이 웅크려졌다. 노엘이 낮게 욕을 뱉는 모습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맞을 거야, 맞을지도 몰라. 파르르 떠는 손으로 이불을 꽈악 붙잡았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노엘이 멱살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확 당겨진 탓에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붙들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겁 좀 그만 먹고 똑바로 봐. 내가 너한테 뭐라고 얘기했는데.”
“……모르겠다고 했어요.”
서늘한 눈동자를 피하지 못하는 게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시큰거리는 발목도, 목줄에 압박된 목덜미도 노엘의 눈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차라리 아픈 게 나았다. 그 어떤 고통도 노엘의 시선을 마주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움찔하며 그날 노엘이 내게 말했던 문장을 더듬어서 떠올렸다.
‘씨발, ……도 모르겠잖아.’
뉴욕에 있었을 때, 노엘은 내 멱살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뭘 모르겠다고 하는 건지. 이것을 알면 나를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조그마한 희망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하지만 노엘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조금 더 진득한 시선으로 파란 눈동자에 내 모습을 담아냈다.
“좆같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네?”
“온 세상이 새까맣게 변해 버린 것 같은 기분, 느껴봤어?”
노엘이 내 턱을 움켜쥐고는 시선을 회피하지 못하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섬찟함을 느꼈다.
“지금 내가 그래. 네 새끼랑 엮이고 나서 아무것도 안 보여. 세상이 다 검게 변해 버렸는데 너 하나만 색이 입혀진 것처럼 느껴져서 성가실 지경이라고.”
“흣!”
“씨발, 개 같은…….”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노엘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나른한 목소리와 다르게 거칠게 파고드는 입술을 밀어내지 못하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었다. 당연하게도 허락 없이 타액으로 젖은 살덩이가 파고 들어왔다.
며칠 동안은 맞지 않아서 입가가 찢어지진 않았지만, 노엘의 거친 움직임에 또 상처가 날 것 같다. 노엘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밀어 넣은 혓줄기를 내 것에 얽혀대면서 제 욕망을 채울 때까지 탐식했다.
타액에 젖은 살갗이 부딪치면서 물기 어린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노엘은 두 손으로 내 귀를 틀어막으며 혀를 옭아매며 빨아들였다. 젖은 소리가 더욱이 선명해졌다. 흠칫 놀라면서 상체를 뒤로 빼자, 노엘이 내 허리를 쓸어 만지며 가까이 밀착했다.
우리가 얽힌 것은 입술뿐만이 아니다. 두렵도록 시린 시선, 도망치기 바쁜 불안한 눈빛. 내 몸을 옭아매는 서늘한 손길과 열이 올라 달아오른 살갗. 모든 것이 얽혀지면서 입맞춤은 짙어졌다.
“그래서 내가 널 잘 찾아. 어딜 가도 개새끼만 눈에 밟히거든.”
“하아, 하아…….”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너는, 유진 넌.”
내 입술을 매만지던 노엘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손가락은 점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쇄골이며 허리선을 쓸어 만졌다. 이 순간만큼은 두려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떤 것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단순히 사고라고 생각하겠지.”
“그, 그건…….”
“난 아냐. 난 씨발, 이 좆같은 기분을 매일 같이 느껴. 유진 너 하나 때문에.”
“노엘, 나는…….”
“이제 됐어? 성가시게 하지 말고 자.”
노엘이 나를 억지로 눕혔다. 출렁이는 매트리스조차 발목이 아리게 했다. 허우적거리며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노엘의 손목이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 에요.”
어쩐지 얻어맞지 않는다고 했다. 서둘러 노엘의 손목에서 손을 떼려던 찰나, 이번에는 노엘의 큼지막한 손이 나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거친 손길에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주욱 끌려가고 말았다.
“일부러 그런 거 맞네.”
“뭘, 뭘 일부러, 아흐! 자, 잠시, 잠시만요!”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노엘이 내 바지를 드로즈와 함께 벗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아, 맞다. 수면제. 화들짝 놀라 바닥을 내다보려고 할 때, 노엘이 다시 나를 눕히며 양 손목을 머리 위로 올렸다.
“개새끼는 그런 말 안 들어 봤어? 감기 걸렸을 땐 땀 흘리면 낫는다고 하더라.”
“가, 갑자기 왜,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수작 부렸잖아, 해달라고.”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억지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또 아래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걸까. 두려운 마음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근데 진짜 오늘은 안 돼요. 내일요, 네? 내일, 내일은….”
“내가 개새끼 편의 봐준 지 며칠이나 됐는데.”
“제가 언제 그런, 흣!”
노엘이 내 목덜미 위로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그러면서도 힘주어 빨아들이는 것이 꼭 영역 표시라도 하는 것만 같다. 흠칫거리며 노엘이 하는 대로 눈살만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만 잘 넘기면 노엘에게 수면제를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아, 흐…….”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노엘의 기분만 맞춰준다면 목줄이 벗겨질 테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음식이나 음료수에 약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지금의 행위를 중단해선 안 됐다.
“흐으…….”
“거봐. 만지기만 해도 좋아하는데 뭘 내일 하자는 거야.”
고개를 젓자, 노엘이 상의까지 벗겨내더니 툭 튀어나온 쇄골을 핥다가 아래로 입술을 옮겼다. 간간이 신음을 뱉어내자, 내 살갗을 물고 늘어지는 뜨거운 입술이 붉은 울혈을 새겼다.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자. 전부 다 나가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그런 생각으로 평소보다 달뜬 숨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여기 좋아하나 봐. 더 만져줘?”
노엘이 내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까이서 보는 눈빛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차마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자, 노엘이 부풀어 오른 내 유두를 지분거리며 힘주어 비틀었다. 저릿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렸다. 그게 시발점이라도 된 건지 노엘은 곧게 선 유두를 입에 머금고 사탕 빨 듯 혀를 굴렸다.
“아흐…….”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더라. 어떻게 해야 노엘의 기분이 좋아질까. 어떻게 해야 이 목줄을 풀어줄 수 있을까. 평소 관계를 할 때 노엘이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개새끼니, 구멍이니, 저급한 말만 떠올랐다. 이런 말을 할 자신이 없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노엘의 손을 움켜잡았다.
“……노엘.”
단단히 선 돌기를 입에 머금고 빨아들이던 노엘이 뭔가 잘못 봤다는 것처럼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아닌가. 지금은 모 아니면 도다. 망하거나, 성공하거나. 덜덜 떨며 노엘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얻어맞을 것 같았지만, 이 방법뿐이다.
“손, 잡으면 안 될까요?”
“…뭐?”
“죄송해요. 제가 잘못 말했, 윽…!”
맞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노엘은 내 손을 꽉 움켜쥔 채로 가까이 바싹 끌어당겨 허벅지를 벌리게 했다. 이미 자극받아서 그런지, 내 성기는 단단해진 상태다. 움찔하며 노엘을 바라봤다. 허벅지를 움켜쥔 손엔 점점 더 힘이 들어갔고 노엘의 눈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이러면서 뭘 그만하래. 박아달라는 표현을 참신하게 하고 있네?”
“소, 손잡아 달라고 한 건데….”
“그게 그거지, 씨발. 더 벌려, 그래야 네 안에 잔뜩 박아 주잖아.”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 노엘의 눈빛은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크게 웃지는 않았으나, 눈만 보면 흥미롭다 못해 황홀경에 들어선 것 같았다.
노엘이 사타구니를 벌려 입구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내벽을 휘젓는 손길에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신음을 더 많이 흘려버린 것 같다.
“아, 흐….”
“이젠 조를 줄도 아네. 여기야? 여기가 그렇게 좋았어?”
“흐윽. 노엘, 바, 발목, 발목이, 아파요…….”
“그럼 잊게 해줘야지.”
“아윽…!”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노엘이 오돌토돌한 내벽을 손가락을 세워 긁고 눌러대며 마구잡이로 침범해갔다.
노엘은 다른 손으론 깍지끼듯 내 손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안을 마구 침범하며 짙은 쾌락을 안겨 주었다. 기구를 사용하는 것보단 덜 모욕적이라 그런지, 평소보단 덜 아프게 느껴졌다. 비튼 신음을 터트리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노, 노엘. 아, 아프, 그, 그만. 그만…….”
“내 좆도 잘 먹으면서 뭐가 아프다는 건데. 이거 봐. 안 박아 주니까 더 뻑뻑하잖아.”
“흐읏…!”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깊숙이 파고들며 헤집는 손가락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내 몸은 붉은 열기로 뒤덮이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내 입으로 직접 쾌락에 물든 목소리를 내뱉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꾹 짓이겼지만, 노엘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삽입한 손가락들을 빙글 돌려 내벽을 긁어댔다. 그 움직임에 허리가 움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아파요! 아, 흐…….”
정말 스스로 좋아서 하는 행위라고 세뇌하듯 말해서 그런 걸까. 발목의 통증을 잠깐이나마 잊을 만큼 쾌락도 짙어졌다. 노엘은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성기를 입에 물고 혀를 굴려댔다. 말캉한 혀가 성기를 휘감자, 선명한 쾌락이 내 몸을 옭아매었다.
“하, 하지, 아흐. 하, 하지 마세, 더러, 워. 더러워요, 하윽…….”
노엘은 내벽을 휘젓던 손가락을 거칠게 빼내고는 내 살 기둥을 움켜쥐고 혀를 할짝거렸다. 여전히 깍지낀 손은 풀지 않은 상태다. 타액에 젖어 미끈거리는 혓줄기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노엘의 눈에서 일렁이는 정염이 내게도 번진 것만 같다. 아래에 피가 몰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사정하고 말았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노엘의 입에 사정하고 말았다. 노엘이 내게서 입을 떼어내고는 손바닥 위로 정액을 뱉어냈다. 때릴 게 분명했다. 감히 허락 없이 사정해버렸다고 하면서.
하지만 노엘은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정액이 묻은 손바닥을 입구에 문질러댔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맞물리며 미끈한 액체가 느껴졌다.
“노엘, 나, 나는, 그러니까…….”
“무슨 말 하고 싶은지 관심 없어. 그냥 잘 벌리기나 해.”
“아흑!”
노엘이 내 허벅지를 잡고 활짝 벌려댔다. 아직 삽입된 것도 아닌데 벌써 겁이 났다. 노엘의 것을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사람 팔뚝만 한 크기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싫다, 무섭다. 두렵다는 생각뿐이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성기를 받아들여야 할 생각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씨발, 또 뭐야.”
“목이 답, 답답해서…….”
인상 찡그리는 노엘을 바라봤다. 목줄을 가리키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다는 듯이 깍지낀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노엘이 가까이 다가와 헤드에 묶인 목줄을 흔들었다.
“또 도망가면 어떻게 할 거야?”
“네?”
“저번에는 발목, 이번에는?”
어쩐지 내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무조건 노엘이 이기는 게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노엘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서재로 들어가 현금이며 카드를 몽땅 챙겨 공항으로 도망친다. 이 계획만 성공하면 나는 노엘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다만, 노엘이 잠깐의 틈도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응? 유진. 이번에는 뭘 걸 거야?”
“정말 도망 안 가요. 발목 아파서 움직일 수도 없어요.”
“거짓말. 걸을 순 있잖아.”
“그, 그래도 도망 안 가요.”
“흐음, 뭘 해야 할까.”
노엘이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또 어떤 방식으로 나를 옭아맬까.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노엘이 내 어깨를 움켜쥐고는 꼼짝하지 못하게 힘을 주었다.
“…노엘, 정말 아니에요. 도, 도망 안 갈 테니까 이것 좀….”
“아, 걱정하지 마. 죽여버리지는 않아. 나는 내 개새끼 쉽게 놓아줄 생각 없거든. 내가 말했지. 죽어서야 날 벗어날 수 있다고.”
노엘이 목줄을 흔들며 시선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 거짓말하는 게 들킬 것만 같은 초조함이 들어 쾌락의 여운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히끅거리며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내 모습을 오롯이 담아냈다.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당신 하나밖에 모르는 멍청한 사람처럼 살아가겠다고, 이걸 어떻게 영어로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저 침묵하며 노엘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손, 잡게 해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박이다. 그것도 얻어터질지 아닐지 눈치를 보면서 해야 했다. 이것만 참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억지로 노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노엘이 목줄을 벗겨 주었다.
“조르는 법 금방 배웠네.”
“흣!”
노엘이 바지 버클을 풀고는 성기를 꺼내며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성기가 아니라 흉기 같았다. 저 거대한 크기가 밀어 들어올 생각에 수면제고 나발이고 그만둘까 싶었다. 두꺼운 귀두가 입구를 건드리는 것조차 긴장되었다. 노엘은 입구 주변부터 성기를 문지르며 깊숙이 밀어 넣었다. 피부가 찢어지는 감각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아, 아파! 아, 아파요, 흐…….”
“이젠 그만하라는 말 안 하네. 이 개새끼, 더 박아 줄까?”
“흐윽…….”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온 노엘은 퍽 소리 나게 허리를 쳐올렸다. 사타구니를 조금이라도 오므리려고 하면 되레 활짝 벌려 골반을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빠르게 움직이자 숨이 막혔다. 척추 선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느낌과 전신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눈물이 맺혔다.
“아, 흐윽! 노, 노엘, 제, 제발…….”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살려달라는 절박한 마음을 담아, 노엘의 손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노엘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전보다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오른손으로 내 성기를 움켜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 흐….”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눈앞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발끝을 오므리자, 성기에서 탁한 액이 흘러나왔다. 노엘이 더는 빨라질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허리를 쳐올렸다. 골이 울릴 정도로 박아 대던 노엘은 몇 번 치대더니 내 안에 사정하고 말았다. 뿌옇고 끈적한 정액이 사타구니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유진.”
“하, 하아….”
“뒷구멍으로 질질 흘리는데 어떻게 한 번만 하고 끝낼 수 있지? 말이 안 되잖아.”
노엘이 내 엉덩이를 움켜쥐며 엎드리게 했다. 성기가 삽입된 상태에서 몸이 뒤집히니, 별다른 자극을 받지 않아도 숨이 차올랐다.
노엘이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달뜬 숨을 뱉으면서도 내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바지 주머니 사이로 수면제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종이는 빠져나오지 않았다.
* * *
다리가 멀쩡하기 전까지만 해도 부엌까지 가는데 3분이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통증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움직여 겨우 부엌에 내려왔다.
“하…….”
냉장고 문을 열어 주스를 꺼냈다. 덜덜 떠는 손으로 유리잔을 꺼내 수면제를 쏟아냈다. 다 쏟아낸 종이 위엔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모호한 문장이 나타났다.
“……예거.”
이 글을 쓴 사람이 예거가 아니길 간절히 기도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웃어준 사람에게 아픈 기억을 얻고 싶지 않았으니까. 눈을 질끈 감으며 수면제가 들은 유리컵에 주스를 부었다. 향긋한 오렌지 주스와 함께 하얀 가루가 녹아내렸다.
“죄송해요. 죄송, 해요.”
나는 누구에게 비는 걸까. 속여야 하는 노엘에게? 아무런 증거 없이 의심의 화살을 받은 예거에게? 이런 상황이 된 게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컵을 쥔 손을 꾹 움켜쥐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종이를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발목이 유난히 시큰거렸다.
“어디 다녀와.”
“……헉!”
다시 침실로 들어갔을 땐, 노엘이 깨어 있는 상태였다. 내 기척을 느끼고 일어난 모양이다.
“아, 그게 음료수….”
“그래?”
“……네.”
“콜라로 냉장고를 가득 채워도 입도 안 댔으면서 갑자기 무슨 음료수를 마시겠다고.”
“이거 제 거, 아니에요.”
“뭐?”
“노엘 주고 싶어서 챙겨온 건데…….”
노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얽힌 순간, 술 마신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안 돼. 떨면 더 의심받는다고. 유리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엘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독이라도 탄 건가?”
순간 유리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노엘은 지나가듯이 던진 농담이었겠지만,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꼭 취조실에 끌려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냐, 진정하자. 진정해. 입술을 깨물며 고개 숙였지만, 떨림은 가라앉질 않았다.
“왜 이렇게 떨지?”
노엘이 컵을 쥐지 않은 손을 깍지 끼듯 움켜잡았다. 서늘한 냉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키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심장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요란하게 쿵쿵 소리를 내며 계속 뛰어댔다.
“유진, 네가 안전하다는 걸 직접 보여주면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른한 목소리가 작게 속삭이며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저절로 고개가 들려지고 노엘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증명해.”
바르르 떨며 시선을 마주쳤다. 노엘에게 이걸 마시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두 눈 질끈 감고 오렌지 주스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노엘의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노엘이 내게 키스했던 것을 따라 하듯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입술 틈 사이로 주스가 주륵 흘러내렸다. 노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벌렸다.
느릿하게 입술이 움직이면서 턱선을 따라 차가운 액체가 줄줄 샜다. 목덜미며 가슴팍이며 주스가 뚝뚝 떨어졌지만, 노엘은 계속해서 나를 탐하기 바빴다. 이미 입 안에 주스는 남아있지 않았다.
“흐…….”
내 뺨을 어루만지던 노엘의 손이 허리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자 나도 모르게 달뜬 숨을 뱉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럴 때가 아닌데 싶으면서도.
“취향이 바뀌었나.”
“네?”
“콜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그건…….”
노엘은 나를 흘끗 보더니 유리잔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스가 흔들렸다. 노엘은 나를 한 번, 유리잔을 보다가 주스를 들이켰다.
투명한 유리컵 속에 있는 액체가 천천히 사라진다.
“됐으니까 다음부턴 이딴 짓 하지 마. 개새끼는 뭘 해도 개새끼지. 안 그래?”
탁,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주스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과연 효과가 있는 걸까? 조바심이 났지만, 노엘에게 들킬 것 같아서 흘끗 쳐다보며 침대 위에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시곗바늘 소리만 셀 수 없이 듣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오죽하면 숨소리도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 어딘가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홀린 듯이 노엘을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엘?”
숨소리만 미약하게 들릴 뿐, 노엘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노엘.”
역시나 대답이 없다. 예거가 준 수면제는 진짜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노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생각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빠져나갔다.
“흐…….”
제일 먼저 한 일은 노엘의 서재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분명, 노엘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니 돈은 여기에 보관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샅샅이 뒤졌다. 그 덕에 책상 두 번째 칸에선 내 여권을, 맨 아래 칸에서 현금다발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간간이 10달러도 있었지만, 거의 100달러 지폐밖에 없었다.
보이는 대로 집어 들었다. 이 돈이면 2시간이나 떨어진 공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권과 현금다발을 허겁지겁 챙기고는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통증이 느껴져 절뚝거리는 바람에 예전만큼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최대한 속도를 내어 움직였다.
“흐…….”
현관문을 열기 전에 흠칫 어깨를 떨어댔다. 어디선가 노엘이 나를 지켜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노엘은 없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래도 노엘은 오지 않았다. 덜덜 떨며 바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기 전에 뒤돌아봤다. 여전히 노엘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죄송, 해요.”
내가 노엘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작별인사였다. 잘못한 거 하나 없지만, 노엘에겐 죄송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부디, 당신의 집요함을 받아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나길 바란다고 잠깐이나마 중얼거리고 문을 닫았다.
쾅, 문이 닫혔다. 동시에 노엘과의 지독한 악몽도 덮어버렸다. 더는 내게 어떤 시련도 존재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웅얼거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안녕, 노엘 웨스틴.
안녕, 나의 두 번째 시련.
<「너의 유진」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