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숨을 쉬고 싶어 달아나기를 결심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학생 식당은 꽤 붐볐다. 멀리서 봐도 식당에는 발 디딜 틈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로 때워야 할 듯싶다.
“하아…….”
한숨 퍽 내뱉으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야 할까 생각하다가 카페테리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먹고 수업에 들어가려고 했다. 빵 쪼가리는 이제 그만 먹고 싶은데.
시간이 흘러도 내가 밟은 이 땅에 정 한 번 붙일 수 없었다. 흰 쌀밥을 먹던 내 입으로 밀가루만 주야장천 들어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피자나 감자튀김도 한국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짰다. 오죽하면 혀가 얼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나를 제일 괴롭히는 건 노엘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를 동생으로, 그것도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만들어온 자식을 같은 핏줄이라 여겨야 하는 게 엿같을 수 있다. 내가 노엘이라도 나 같은 걸 동생이라 한다면 인정하지 않고 밀어내기 바빴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숨통 조이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지 물을 수 없었다. 감히 시선을 마주치고 놓아달라 요구하려는 의욕도 들지 않았다. 한 발짝 뒷걸음질 치면 세 걸음 가까이 와, 내 뺨을 후려치는 게 나의 형이었으니까. 흠칫 어깨를 떨었다. 꼭 어디선가 노엘이 지켜보는 것 같은 서늘함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상하네.”
착각일까? 아까부터 묘하게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 설마, 노엘이 이젠 학교까지 따라오는 건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뒤돌아볼 용기가 없다. 그 서늘한 눈동자를 당당히 마주치겠다는 생각은, 이미 두려움에 짓눌려 형태조차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주먹을 꽈악 움켜쥐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터벅, 터벅, 터벅.
발소리가 등 뒤에서 멈췄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소리의 주인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어깨를 탄탄한 팔로 휘감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레 닿은 체온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노엘인가? 노엘일까? 불안함으로 번진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어대자, 급히 숨을 들이켰다.
“유진, 여기서 뭐해?”
“헉!”
예상과는 다르게 쾌활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예거다. 노엘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과한 착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머리와 다르게 몸은 딱딱히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꽉 쥔 주먹에는 힘이 빠지질 않았고 팔뚝에서부터 어깨 근육까지 빳빳해졌다.
“유진? 왜 그래? 많이 놀랐어? 미안, 미안해.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났으니까 반가워서 그런 거야.”
“아무것도 아니, 야…….”
“아무것도 아니긴. 얼굴도 부은 것 같은데? 잠깐, 누구랑 싸웠어? 나 좀 봐.”
“정말 미안한데 이거 놔 주면…….”
“유진?”
“안 될, 아니, 미안. 미안해.”
아무 의도 없이 그저 친밀함의 표현으로 내게 어깨동무를 했겠지만, 어쩐지 이 손에서 노엘의 모습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를 ‘개새끼’라 부르며 뺨을 후려치는 그 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예거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네가 왜 미안해, 유진. 미안하다고 하게 해서 미안.”
“…….”
“다음부턴 가볍게 인사할게. 많이 놀랐어?”
예거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내게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꼭 쥐여 주었다. 조그마한 사탕이다.
이마저도 노엘이 생각났다. 입안으로 우악스럽게 사탕을 집어넣어 나를 이상하게 만들던 그 미소가 또다시 아른거렸다. 두 눈을 질끈 감자,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햄버거 같이 먹은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잖아. 반가워서 달려왔어. 미안.”
끔뻑 눈을 뜨니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예거가 나타났다. 노엘은 없어, 지금은 내 곁에 없다고.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근데 유진, 밥은? 점심은 먹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냥 샌드위치나 먹으려고. 학생 식당에 자리도 없어서…….”
“그래? 그럼 나랑 같이 기숙사 식당 갈래?”
“어? 거기 기숙사 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냐?”
“5달러만 내면 외부인도 출입 가능해. 유진, 진짜 학교에 관심 없구나?”
“아.”
작게 탄식을 내뱉으니 예거는 따라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같이 보폭을 맞추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경계태세를 보여버려서 다가가기도 민망했다. 동그란 뒤통수만 빤히 쳐다보며 예거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도서관과 학생 회관을 지나, 낯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 여기야. 기숙사 식당. 다른 데가 맛있어서 그렇지, 여기도 나쁘지 않아.”
“앞으로 여기 와서 먹어야겠다. 사람도 적어서 좋네.”
“근데 자리 괜찮아, 유진? 네 뒤에 TV 있잖아.”
“상관없어.”
“사람 적은 게 좋다고 하길래. TV 소리 들리면 거슬릴 것 같아서.”
“괜찮아.”
음식을 이것저것 접시에 담아 조용히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예거 역시 한가득 음식을 담고 와, 내 앞에 자리 잡았다. 어쩐지 패스트푸드점에서 봤던 모습이 데자뷔처럼 나타나는 것 같다. 해맑게 말 거는 예거 탓에 빳빳이 굳었던 어깨도 조금씩 풀렸다. 그렇게 한참을 대화를 나누던 그때,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포크질을 멈췄다.
「개인 사업가 로널드 웨스틴 씨가 정계 진출에 대한 의사를 밝히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로널드 씨는 부동산 개발이나 제약 쪽에서 주로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다음 뉴욕 주지사 선거에 관심을 보였다는 소문이 돌면서…….」
「잠깐 타일러, 로널드라고 하면 웨스틴 쪽에서 항의가 들어온다고요.」
「하하, 시청자 중에 웨스틴 씨가 계실지 모르니 사과드려야겠네요? 좋아요. 언론에 따르면 최근 웨스틴 씨가 몇몇 의원들과 접촉했다는 제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포크질을 멈추고 잠깐 귀 기울였다.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이리저리 떠드는데도 기분 나쁘기는커녕 남의 일처럼 느껴져 라디오 듣듯이 감상했다. 샐러드를 포크로 쿡쿡 쑤시며 입에 넣으려고 할 때, TV를 보던 예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웨스틴 하니까 생각났네. 유진, 그거 알아? 웨스틴 아들이 여기로 이사 왔대.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뉴욕에나 있지 재미없는 시골로 이사 온 이유가 뭘…….”
“컥, 커흑!”
“괜찮아?”
“어, 어어. 괜…… 쿨럭, 쿨럭!”
연신 쿨럭거리며 가져왔던 음료수를 들이켰다. 인터넷에서도 돌아다니는 이름이 TV에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왠지 마냥 편하게 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특히, ‘웨스틴의 아들’이라는 사람은.
만약, 예거한테 그 사람이 나랑 같이 산다고. 내 형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며 숨을 들이켰다.
“유진, 오늘 너한테 괜찮냐는 말만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어.”
“하, 하하. 그러게. 오늘 참 날이…….”
지잉―!
멋쩍게 목덜미를 매만지던 찰나, 긴 진동이 주머니에서 느껴졌다. 연락 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 탐탁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만, 여보세요?”
―유진, 저 필립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무슨 일로…….”
예상과는 달리, 스피커 너머에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가에서 봤던 비서였다.
* * *
“오랜만입니다, 유진.”
“안녕하세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 앞에는 비서가 서 있었다. 여전히 그는 까만 양복에 까만 구두를 고수하고 있었다. 인사만 했는데도 괜히 눈치 보였다. 시간은 4시 51분. 오늘은 노엘에게 트집 잡힐 것 같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은 왜. 하아, 노엘의 말이 맞았네요.”
“네? 무슨…….”
“적응 못 하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좀 구세요. 모든 유학생이 적응 못 한다고 유진처럼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다니지 않는다고요.”
“저, 그런 적 없…….”
“부탁드립니다, 제발 노엘이 경찰서를 찾아가는 일 없게 하세요. 대학생이면 알아서 처신할 나이 아닌가.”
정말 틈 하나 없다. 혹시나, 비서가 내 입술에 맺힌 상처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미 노엘이 비서한테 얘기해놓은 상태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만 치는 골칫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적당히 좀 하세요, 적당히. 아무튼, 그건 됐고. 노엘은요?”
“잘, 모르겠는데…요.”
정말 모르니까 답을 할 수 없다. 어떤 날은 집에 있고 또 어떤 날은 들어오지 않는 사람인데 무슨 수로 확정을 내린단 말인가.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비서에겐 내 대답이 탐탁지 않게 들린 모양이다. 후, 짧게 숨을 뱉는 모습이 어쩐지 한심하게 여기는 것만 같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뉴욕에서 바로 온 거예요?”
그때, 차고에서 나온 노엘이 우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인가. 가만히 노엘의 손에 들린 차 키와 가방을 빤히 쳐다봤다. 가방 속에는 뭔가 들어있는지 보기만 해도 묵직함이 느껴졌다.
“네, 두 분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웨스틴 씨의 심부름차 왔습니다.”
“일단 들어와요, 멀리서 온 손님을 계속 앞에 세워둘 순 없잖아요?”
정말 같은 사람이 맞을까. 욕이 없으면 말을 못 할 것 같은 사람이 비서 앞에서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다른 태도를 보이는 노엘이 썩 좋게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맞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해 먹을 만한 게 있나….”
가방을 놓고 내려온 노엘이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살펴봤다. 다른 사람이라면 다가가서 도와주겠다고 했겠지만, 말 걸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나중에 또 어떤 트집이 잡힐지 알 수 없었으니까.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방에 올라가 있을 생각이었다. 비서도 그리 반가운 사람이 아니기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이 집에 돌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조심히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유진?”
“흐읍…….”
그때, 나를 붙잡는 상냥한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개 돌리기가 무서웠다.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로 옆에 손님이 있었다. 그것도 노엘을 철저하게 믿는 손님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나만 더 이상해지는 상황이라 노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노엘은 웃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형처럼.
“손 씻고 여기 앉아 있어. 저녁 금방 해줄게.”
“……그럴게요.”
“하하, ‘그럴게요’가 뭐야. 격식 같은 거 차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나도 유진처럼 격식 차리면서 말할까? 그게 편하신가요?”
장난치듯 정중하게 말하는 모습에 이를 꽉 깨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았길래 씨발, 집 앞까지 실실 웃으면서 들어왔냐고. 왜? 가게에서 발정이라도 났어? 누가 네 구멍에 박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지난번, 나를 식탁 위에 매달아 못살게 굴던 노엘의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았으니까. 슬쩍 비서를 쳐다봤다. 비서는 노엘이 아닌,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나를 한심하게 보는 듯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손 씻고 올, 게…….”
이 장단에 맞추지 않으면 비서가 돌아가고 얻어터질지도 모른다. 겁이 나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을 씻었다. 비누칠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거품이 씻겨 내려가고 손에는 물기만 가득했지만, 화장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 쓴 그의 모습에 장단을 맞추는 것조차 힘들다.
“하아…….”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언제까지 노엘의 가면 놀음을 버텨낼 수 있을까. 수건을 들어 아주 천천히 물기를 닦았다. 마디마디 빠짐없이 닦아내고 오죽하면 화장실 카펫에 떨어진 물기까지 닦아내었다. 최대한 노엘에게서 벗어날 시간을 만들어냈다. 이제 나가자. 후,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열자,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전에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유진, 어서 와. 필립도 널 기다리고 있어.”
“매일 같이 이렇게 챙겨 주세요?”
“그럼요, 내 동생인데. 유진, 어서 이리와 앉아.”
흔들리는 동공으로 유진을, 비서를 바라봤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비서가 눈치채지 않을까. 하지만 비서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쳐다보지 않는 모습에 조바심이 나면서도 한 편으론 두려웠다.
목소리를 내면 들어줄까. 나를 데려가 달라고, 노엘이 내게 한 짓을 얘기하면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주먹을 꽉 움켜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가진 최대한의 용기를 밑바닥까지 끌어모아 도와달라는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저, 필…….”
“유진.”
비서의 이름을 온전히 말하기도 전에 노엘이 다가와 다정한 손길로 어깨를 감싸 잡으며 토닥여주었다. 톡, 톡.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는 손길엔 입 닥치라는 경고가 묻어났다.
“이제 밥 먹어야지. 멀리서 온 필립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 없잖아, 그치?”
“알겠, 어…….”
“어서 앉아, 이리 와.”
노엘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서가 보기엔 친절한 형이 동생을 의자에 앉혀 주는 장면이겠지만, 체감상 감옥에 끌려가는 기분이다. 노엘이 매끄럽게 웃으며 내 앞에 접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로즈메리가 올려진 스테이크다. 힐끔 노엘과 비서 쪽 접시를 바라봤다. 역시나 똑같은 메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계속 계실 겁니까?”
단조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어쩌면, 나 혼자만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식사 자리인지 모르겠다. 그저 스테이크를 입 안에 구겨 넣기만 했다. 빨리 올라가야지. 어서 먹어치우고 올라가야지. 노엘과 비서가 주고받는 대화를 가만히 엿들으며 고기를 우물거렸다.
“필립, 내가 여기로 왔다 해도 에이전시나 전시관 일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살짝 서운하려고 해요.”
“알아서 잘하시는 건 알지만, 아닙니다. 이 얘기는 식사 마치고 하시죠. 제가 실수했습니다.”
“유진한테는 뭐 안 궁금해요?”
“네? 무슨…….”
스테이크 조각을 자르던 노엘이 생글 웃으며 비서를 쳐다봤다. 비서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갔다. 한순간에 시선이 집중되자, 나도 모르게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을 꾹 움켜잡았다.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건가.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었다. 당황해서 그런 건지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열이 올라왔다.
“아…….”
잠깐만. 당황한 것 치곤 너무나 짙은 열기다. 온몸에 힘이 주욱 빠지고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이상한 증상.
쨍그랑―!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래가 간질거리고 머릿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며 현기증까지 일어났다.
그때, 그 이상한 사탕을 먹었을 때와 똑같은 증상이다.
“흐…….”
“유진?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유진?”
노엘이 손 뻗어 나를 붙잡자, 잔잔히 피어오르던 열꽃이 몸 전체에 퍼져 나갔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허리 숙였다. 비서가 이상하게 볼까 전전긍긍했지만, 홧홧한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이 하얘지고 마디뼈가 도드라졌다.
“이런. 열이 심한데? 필립, 미안한데 먼저 먹고 있을래요? 유진을 방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일어나자, 밥은 나중에 먹고.”
이상해, 정말 이상해. 왜 나만 이상해진 거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나를 부축하는 노엘을 올려다봤다.
“유진, 괜찮아? 똑바로 걸을 수 있겠어?”
노엘은 웃고 있다. 이런 모습을 예상했다는 사람처럼.
그 미소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몸을 달구는 열기를 어떻게든 가라앉히고 싶었으니까. 그저 허리를 푹 숙이며 입술을 꾹 깨문 채, 노엘의 손목을 붙들었다. 노엘은 나를 부축하며 계단 위를 올라갔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고 내 방문을 열 때까지 친절한 형의 행세를 멈추지 않았다.
“아, 재밌었어. 조금만 더 소리 냈다면 필립이 눈치챘을 거야.”
달칵, 문이 닫힌 순간 연극은 중단되었다.
노엘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위험하다는 사이렌이 환청처럼 웽웽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널브러진 보스턴 백에 걸려 휘청거렸다. 아까 노엘이 들고 있던 가방이다.
자기 방이 아닌, 내 방에 가져다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다. 그저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을 뿐이다.
“하으…….”
“쉿, 밑에 필립이 있어. 안 그래도 이상하게 보던데 들켜도 괜찮아?”
“아, 아뇨, 아니. 흣….”
노엘은 휘청거리던 내 허리를 감싸 안고는 등줄기를 따라 쓸어내렸다. 귓가에 가까이 입술을 갖다 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속삭임조차 자극이 되는 지금,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달뜬 신음을 숨겨내었다.
“아, 흐… 가, 갑자기 몸이…….”
“지금은 친절한 형이니까 알려주고 싶었어.”
말끔히 입꼬리를 올리던 노엘이 내 앞에 새끼손톱만 한 병을 흔들어 보였다. 찰랑거리는 액체에 소름이 돋아났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큰일 난다고.”
노엘은 주머니 속에 병을 집어넣고는 내 손목을 결박하듯 붙잡아 머리 위로 올리며 침대에 눕혀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쾌락은 더해 갔다. 허리를 헐떡거릴수록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두 눈 질끈 감고 발가락을 오므리던 그때,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내 몸을 들어 올렸다.
“아윽!”
노엘은 내 바지와 속옷을 재빠르게 벗기고 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지익, 가방 지퍼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던 찰나, 철컥하는 쇳소리가 손목에서 울려 퍼졌다. 수갑이다.
“아, 아래에 필, 이, 흐읏…! 하, 하지 마, 하지 말, 으읏…….”
“사실은, 필립이 돌아가고 나서 놀아주려고 했어.”
침대 헤드와 손목을 낯선 쇳덩이가 이어주었다. 이게 뭐야. 싫어, 싫다고. 서늘한 감촉에 버둥거릴수록 자극은 더해져만 갔다. 고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타구니를 잡아 벌린 노엘이 내 안으로 길쭉한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성기 모양을 본 따 만든 실리콘 기구다.
“아, 아파. 이, 이거 놔, 주, 흣!”
아무리 버둥거려도 노엘은 놓아주지 않았다. 발버둥 치니 보란 듯이 끝까지 밀어 넣고는 미소만 지었다.
“네가 먼저 좆같이 굴었잖아. 왜? 도와달라 하면 필립이 널 구해줄 거라 생각했어?”
“으읏….”
“아냐, 그거 착각이야. 필립은 널 성가셔해. 생각보다 아주 많이. 바깥에서 나온, 그것도 우리 집안 사람과 연관 없는 애가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그러더라고. 그 정도 눈치는 키워야지.”
“아, 흐… 제, 아윽!”
배시시 웃던 노엘이 손에 쥔 조그마한 리모컨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우웅 거리는 듣기 싫은 진동이 내벽 안에 삽입된 기구에서 울려댔다. 미칠 것 같다. 노엘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타액을 뚝뚝 떨어뜨리며 헐떡거렸다.
“할 일 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잘 참고 있어 봐.”
“자, 잠시…… 읏!”
매끄러운 미소를 짓던 노엘은 내 몸 위로 이불을 거칠게 던져주고는 나가버렸다. 끊임없이 아래를 괴롭히는 쾌락에 수도 없이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열기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아흐….’
달칵, 문이 닫혔다. 노엘은 문고리를 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문을 닫아도 간간이 들리는 유진의 신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필립을 보낸 후 어떤 모습으로 울릴지 상상만 해도 미소지어졌다.
“개새끼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지.”
작게 중얼거리던 노엘이 등을 돌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단정한 걸음 소리는 흐트러짐 하나 없다. 당장 유진의 안에 제 것을 쑤시고 박아대고 싶은 충동을 들키지 않을 정도다. 노엘은 곧장 계단 아래로 내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필립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채 노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필립. 멀리서 온 손님한테 이런 모습 보여서.”
노엘이 작게 한숨 쉬며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고 치는 동생 때문에 속 썩는 형처럼 보였다. 필립 역시 그렇게 보였는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내려놓았던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노엘, 그만 포기하세요. 남입니다. 철저하게 남이라고요. 웨스틴 씨가 유진을 집에 들였어도 웨스틴이라는 성을 주지 않는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게 곁에 두는 것뿐입니다.”
“필립이야말로 그만 해요. 내 동생 모욕하는 거.”
노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상냥한 미소였으나, 어딘가 압박감이 느껴졌다. 필립은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선을 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받은 것이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할 분위기는 끝났다. 필립은 등 떠밀린 것처럼 급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뭐가요?”
“노엘이 그렇게 유진을 감싸는 게 이해되질 않아요.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20년 넘게 모르고 살았던 타인 아닙니까?”
노엘은 필립의 질문에 스테이크를 썰던 손을 멈췄다. 힐끔, 시계를 바라봤다. 유진이 최음제에 절여져 덜덜 떤 지 겨우 10분이 지났는데 왜 이리 올라가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벌벌 떨며 제 이름 부르고 울고 있을 유진을 생각하니, 노엘은 아래가 뻐근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노엘이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얀 손 위로 파란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물론, 필립의 눈에는 동생을 걱정하는 형처럼 비치겠지만.
“20년 넘게 모르고 지냈던 타인이니까 지금부터 잘해 주려고요. 잘못됐나요? 내가 가족을 챙기는 게?”
“……노엘.”
“난 가족이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다들 너무 바빠서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더 그렇게 느껴졌어요.”
필립은 할 말을 잃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린 시절부터 노엘은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가족의 애정을 모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립은 노엘이 유진을 감싸고 도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라면 가족이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힘들지만, 계속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 언젠간 유진도 제 마음을 알아주겠죠.”
노엘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몇 초의 정적이 지나갔다. 필립은 더는 유진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건지 들고 왔던 서류 가방을 달칵 열어 노엘 앞으로 내밀었다. 서류 봉투다. 노엘은 익숙하게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몇몇 사람들의 사진이 들어있었고 짤막하게 번호가 붙어 있었다.
“다음 달 전시관에 방문하실 고객 명단입니다.”
“그렇군요.”
“오프닝 파티에 ‘거래’ 시간을 잡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시간대라면 순찰하는 경찰들이 스트릿을 빠져나갈 거라 예상되어서요.”
노엘이 천천히 건네받은 서류를 살펴봤다. 중년의 여자와 남자가 찍힌 다섯 개의 사진. 이번에 맞이할 고객들이다. 백악관에선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주지사가 되고자 했던 부친은 제약사업이라는 눈가리개를 통해 상류층에게 약을 판매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직원들에게 티켓 확인 철저히 하라고 지시해둘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매끄럽게 웃던 노엘은 테이블 위에 켜놓은 촛불에 사진을 갖다 대었다. 증거 하나 남기지 않는 게 상책이다. 노엘은 붉은 화염에 침식되는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운영하는 전시관과 에이전시 역시 그냥 받은 게 아니다. 약물 거래는 주로 노엘의 전시관에서 이루어졌다. 에이전시 소속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경매에 내놓고 작품 안에 약물을 숨겨 밀반출시켰다.
때로는 부친과 가까운 정치인들의 돈세탁 혹은 세금을 덜어주는 목적으로 경매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 노엘의 전시관은 물밑에 어둠이 깔린 곳이다.
웨스틴 일가는 부의 축적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적인 사람들이다. 이 일가 사람들은 도덕을 ‘돈’과 ‘지위’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다. 그래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지금 필립의 앞에서 선한 눈을 하는 노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말씀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로 가시게요? 너무 늦었어요, 필립. 뉴욕에서 오자마자 바로 가는 건 피곤하지 않아요? 여기서 자고 가요.”
“괜찮습니다. 바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
노엘은 아쉽다는 듯,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아쉬운 건 사실이다. 다만, 그 대상이 필립이 아닐 뿐이지. 생각보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유진에게 최음제를 먹인지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들어가세요, 노엘. 유진도 아픈데 제가 이렇게까지 있는 건 민폐입니다.”
당연히 노엘의 심정을 모르는 필립은 말없이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엘은 아쉽다는 듯 옅게 웃고는 필립을 따라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요.”
“노엘.”
무언가 말하려는지 필립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노엘은 미간 한 번 좁히지 않고 필립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이 거래가 아닌, 유진에 대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단박에 눈치챌 수 있다. 지금 필립의 눈은 유진을 볼 때처럼 답답하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정말 죄송하지만, 유진에 대해 알아봐도 될까요? 웨스틴 씨는 아들이 맞다고 하시지만, 저는 왠지 믿기지 않…….”
철컥, 노엘은 필립의 말에 대꾸 한 번 하지 않고 문을 열어 재꼈다. 끼이이익. 경첩 맞물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필립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서늘한 눈동자 탓이라고 일순간 생각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어둑한 그림자가 내려앉은 하늘이 나타났다.
“필립, 더 무례하게 하면 곤란한 거래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노엘이 활짝 웃으며 필립의 시선을 마주쳤다. 필립은 어쩐지 압박감이 돌아, 노엘의 시선을 회피했다. 늘 다정하기만 했던 노엘에게 부친과 똑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필립은 짧게 숨을 뱉으며 서류 가방을 고쳐 잡았다.
“……죄송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노엘은 밝은 미소와 함께 문을 닫았다. 쾅! 문을 닫자마자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며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남 앞에서 거짓 놀이하는 걸 즐기는 노엘이지만, 감히 ‘개새끼’를 가족이라 칭했다. 노엘은 미간을 콱 찌푸리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유진이 먹다 남긴 스테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노엘은 유진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 결점 하나 없던, 절망을 모르고 자랐던 제게 이복동생과 살을 섞었다는 오점을 남긴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씨발.”
게다가 유진이 하는 행동, 눈빛 모든 게 짜증이 났다. 저를 보며 바르르 떠는 모습도 그렇고 몇 대 맞았다고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세상만사 전부 포기했다는 태도로 구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다. 고작 2달러짜리 음료수를 들고 환하게 웃던 태도까지 전부 다 거슬렸다. 작게 욕을 뱉던 노엘이 고개 돌려 벽시계 쪽을 쳐다봤다.
겨우 40분이 지났다. 한 시간 정도는 버텨 보게 하려고 했는데. 이젠 노엘 역시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 유진이 짜증 나고 거슬린다 생각한 지 겨우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노엘은 빨리 보고 싶었다.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이고 입이 벌어져 타액을 질질 흘리며 제 이름만 부를 유진의 모습을.
“아, 싸지 못하게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더 재밌었을 텐데.”
노엘이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발걸음은 단정한 형태를 유지했지만,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한 칸, 한 칸 올라갈수록 걸음 속도는 빨라졌다. 어느샌가 2층으로 올라갔다. 노엘은 유진의 방 앞에 멈춰 섰다.
“흐윽…….”
신음인지 울음소리인지 뭔지 모를 소리가 노엘의 가슴을 자극했다. 노엘은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굳이 문에 귀를 대지 않아도 희미하게 떨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진이 헐떡거린 지 겨우 45분이 지났다.
“조금 더 울면 좋을 텐데.”
노엘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필립이 보여줬던 고객의 리스트가 스쳐 지나갔다. 저녁 시간에 일할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 보내기엔 이 방법밖에 없다. 노엘은 발걸음을 돌려 제 방 쪽으로 걸어갔다.
“많이 울어줘, 개새끼.”
빙글 웃는 노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노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짙은 쾌락이 내려앉은 울음소리를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당장 유진이 울고 불며 매달리는 걸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게 있다. 노엘은 빙글 웃으며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 * *
끼이이익―.
정확히 1시간 56분 만에 유진의 방문이 열렸다.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에 노엘이 들어왔다. 얼마나 사정한 건지 문을 열자마자 정액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노엘은 픽 웃으며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스위치를 켜니, 조명이 환하게 켜지며 침대 위에 늘어진 유진이 보였다.
“유진.”
노엘이 유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움직였는지 바이브레이터는 유진에게 떨어져 나와 정액으로 범벅된 채 방전된 상태였다. 사타구니며 종아리까지 푹 젖어있어 보기만 해도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유진이 보였다. 눈물로 붉어진 눈가에 노엘은 입꼬리를 올리며 유진의 뺨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새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유진. 벌써 자려고?”
“아, 아니, 아니요. 아니, 그게. 자, 잘못했어요.”
손가락으로 툭, 뺨을 건드리니 유진이 자지러지게 파르르 떨며 허리를 뒤로 내뺐다. 약의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는지 미약한 자극을 받아도 흠칫 몸을 떨어댔다. 노엘은 그런 유진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가만히 눈에 담았다.
“벌써 이만큼이나 싼 거야? 물 흘린 것 좀 봐. 아래층에 손님이 왔는데도 발정 났던 거야?”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거짓말. 그럼 이건 뭔데?”
“흣!”
노엘이 허벅지를 쓸어 올리다 유진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끈적한 정액으로 범벅된 살덩이가 손에서 찌걱 소리를 내며 미끈거렸다. 이미 몇 번이나 사정했는데도 직접적인 자극을 받으니 유진은 어김없이 신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알까? 우리 개새끼가 필립 목소리 듣고 이렇게 질질 싸버렸다는 거.”
“아, 아니, 아니에요. 노엘이 나한테 이상한 걸 먹, 흣…….”
“그래서 느꼈어, 안 느꼈어?”
“아윽!”
유진은 제 성기를 감싸 쥐며 위아래로 흔드는 손길에 속절없이 신음을 흘려보냈다. 저항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는지 축 늘어뜨린 다리를 헐떡이며 허리를 움직이기만 했다.
“유진, 똑바로 말해. 지금 이런 꼴을 하고 안 느꼈다고 하는 건 엄청난 거짓말이야.”
“흐, 아, 아니, 아윽!”
“뒷구멍도 봐. 엉덩이만 만졌는데 어서 박아달라고 움찔거리잖아.”
“아, 아니, 아흣…….”
“똑바로 말할 때까지 계속할 거야.”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때까지 노엘은 유진을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다. 사타구니를 활짝 벌려 고개 들이미는 노엘의 행위는 성기를 집어삼키는 것으로 이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짙은 교성을 내뱉었다.
“느, 느낀, 것 같, 흣…!”
유진은 계속되는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젠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직 미약하게 남아 있는 약 기운 때문인지, 노엘한테 얻어맞기 싫은 두려움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제 본능 중 일부인지 유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결국, 유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수치스러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성기를 빨아들이던 노엘이 입을 떼고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은 갑자기 멈춘 노엘의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거 봐, 너 개새끼 맞다니까.”
“흐….”
“솔직하게 말해줬으니까 이제 제대로 놀아줄게.”
방긋 웃던 노엘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진의 입술을 엄지로 쓸어 만져주었다. 유진은 조그마한 손길 하나에도 흠칫거렸다. 노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있던 보스턴 백 지퍼를 내렸다. 지익, 소리와 함께 유진을 놀아줄 장난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엘의 입꼬리가 또 한 번 올라갔다.
* * *
수갑이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오래 결박되어 있어서 그런지 양팔엔 힘 하나 남아나지 않았다. 추욱 팔을 늘어뜨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노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시야가 흐릿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무엇을 들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노엘…….”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노엘의 이름을 불렀다. 기다란 손가락이 목선을 가만히 쓸어 만져주었다. 잘했다는 건가, 아니면 이제 시작이라는 건가. 어떤 것도 가늠되지 않았다.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은 노엘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으니.
“도망가고 싶어?”
“흐…….”
“여길 벗어나고 싶냐고 물었잖아, 유진.”
“흐윽, 네, 제, 제발 보내 주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 바로 한국으로 갈게요. 여기서 겪은 일 전부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헐떡거리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웃고 있었다. 만족스럽다는 눈으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늘한 손길을 견딜 수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손 뻗을 힘도 없다. 가만히 나를 쓰다듬는 노엘을 바라봤다. 몽롱한 시야 사이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매끄러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노엘은 내가 무너질수록 기뻐했으며 눈물 흘리기를 원하는 사람 같았다. 축 늘어진 손을 시트 위에 떨어뜨리고 주륵 눈물을 떨어뜨렸다.
“네 대가리에 총을 겨눈 것도 아닌데 왜 살려달라고 빌어, 애초에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안 그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노엘이 내 눈꺼풀을 엄지로 슬쩍 닦아주었다. 너무나 따스한 손길이라, 하마터면 노엘과 내 관계를 잊어버릴 뻔했다.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엘의 손목을 붙들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애원했다.
“마, 맞아요. 제가, 제가 다 잘못 했, 흐윽…그러니까 보내주세요. 제발, 제발요. 경찰에 신고도 안 할게요. 등록금 갚으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 갚을, 흐윽…. 그러니까 제발…저 좀 보내 주, 흐어어엉…….”
지금 내 꼴이 어떤지도 모르고 노엘 앞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울었다기보다는 처절하게 애원했다는 모양새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바지는 벗겨진 채, 정액으로 범벅된 허벅지를 가리지 않고 노엘을 붙들기 바빴으니까. 제정신으로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엘은 이런 나를 가만 쳐다보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도망쳐 볼래?”
“네?”
“지금 기회 줄게. 한 번 도망쳐 봐. 그 대신 나한테 잡히면 평생 벗어나지 못할 거야. 어떡할래?”
도망치라고 했다. 노엘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내게서 살짝 몸을 떼어냈다. 쿵, 쿵쿵. 맥박이 빠른 속도로 쿵쿵 울려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지 미약한 통증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지금 아니면 도망칠 수 없다. 노엘의 눈치를 가만히 살펴봤다. 그의 입꼬리가 빙그레 올라갔다.
“하나.”
잔인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더는 생각할 시간도 없다. 바지를 입지 않은 채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노엘은 빙글 웃으며 잡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때리려고 손도 들지 않았다. 덜덜 떨며 비틀거리는 다리를 옮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바닥에만 철퍼덕 넘어질 뿐이었다.
“둘.”
“제, 제발…….”
신호를 듣자마자 억지로 다리를 들어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지? 이 꼴로 나갈 수 있을까? 다리가 풀릴 대로 풀려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퍼덕거리며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려 미칠 것 같았다.
“아윽!”
온 힘 다해 1층까지 내려갔지만, 힘이 풀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채로 바닥에서 뒹굴다 부엌 쪽을 바라봤다. 혹시 비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이미 가버렸다. 차라리 이 모습을 보였더라면 천박하다는 욕을 들어서라도 쫓겨날 수 있었을 텐데.
“흐…….”
이미 사라져버린 동아줄에 대해 미련 가지는 건 시간 낭비다. 축 늘어진 다리를 겨우 일으켜 세우며 헐떡거렸다.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철컥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 개새끼, 기회를 줘도 못 나가네.”
“커윽!”
소리가 난 쪽은 현관문이 아닌, 내 목이었다. 뒤에서 다가온 노엘이 내 목에 무언가를 채워 거칠게 잡아당겼다. 힘 한 번 주지 못하고 노엘 쪽으로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노엘이 내 목에 채운 것은 목줄이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나한테 잡히면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 이거 치, 치워! 시, 싫어. 아윽!”
짜악!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손찌검이다. 홧홧한 열기가 오른뺨에 느껴지면서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노엘은 들고 있던 목줄을 콱 잡아당기며 계단으로 등을 돌렸다.
“개새끼는 사람 말을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흐, 으으. 이, 이거 놔주, 세, 켁……!”
노엘이 힘을 주어 목줄을 잡아당겼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물이 부옇게 올라오면서 마른기침이 컥컥 튀어나왔다. 목줄을 채운 이유는 단 하나다. ‘개새끼’에 알맞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안 가겠다고, 이번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버텨봤지만 돌아오는 건 아픈 매질뿐이었다. 세 대쯤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나서야 노엘을 따라 2층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걸 잊었네. 구멍 벌려 봐.”
“그, 그건. 흐윽…!”
“개새끼는 사람 말 못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처맞고 싶지 않으면 다물어.”
또 한 번 내 뺨이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직접 비부를 벌려 보였다. 스스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인간인가?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잘못했던 걸까? 눈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그렇게 박아 댔는데도 뻑뻑하네.”
“하으…….”
“또 짖으면 발가벗겨서 산책 갈 거야, 알았지?”
노엘은 입구 안으로 무언가를 쑤욱 밀어 넣었다. 아까 내게 꽂혔던 실리콘 기구보다 더 조그마한 물체였지만, 들어오자마자 내벽을 쿡쿡 찔러가며 강한 진동을 웽웽 울려대는 것이 결코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흐, 아읏…….”
“정말 말 안 듣는 개새끼라니까.”
노엘이 목줄을 주욱 잡아당기며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이 노엘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노엘은 두 발로 걸어갔으며 나는 네발로 기어갔다. 하반신만 벗은 채로 무릎으로 기어가는 것은 고통뿐만 아니라 수치심까지 안겨주었다. 윙윙거리는 진동 소리에 괴로울 지경이다.
“흐…….”
이걸 빼달라고 요청하려 했지만, ‘개새끼’는 사람 말을 하지 못한다는 노엘의 말이 떠올라 입술을 꾹 깨물며 버텨냈다. 맞고 싶지 않다. 더 이상의 수치심은 느끼고 싶지 않다. 노엘의 말을 따른다면 내가 겪을 고통은 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봐, 이렇게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치?”
무릎이 화끈거리고 손목이 저릴 때 즈음, 내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약에 절어 끙끙대던 순간이 다시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삽입된 기구가 푹 찔러 들어왔다. 그저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흐, 으읏…….”
“개새끼, 장난감을 줄게. 말 잘 들어서 주는 상이야.”
침대에 걸터앉은 노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려, 방문 쪽으로 집어 던졌다. 가느다란 줄에 무언가가 연결된 것 같은데 순식간에 지나가니 알 길이 없다. 언뜻 보면 무언가를 집는 클립 같기도 하고.
“가져와.”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노엘은 나를 매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내 뺨을 후려칠 것 같은 공포심이 들이닥쳤다. 두려움에 황급히 클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어서 가져오라는 명령에 어리둥절하며 바닥에 떨어진 클립을 바라봤다.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장난감이라고 하니 더더욱 두려웠다. 파르르 떨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노엘이 잡고 있던 목줄을 콱 잡아당겼다. 그 반동으로 또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커헉…!”
“어떻게 두 발로 걸어. 그치, 유진?”
철저하게 ‘개새끼’ 역할을 요구하는 노엘이 무서울 지경이다. 싫다고 발악하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바닥에 엎드린 후 무릎으로 클립이 떨어진 지점까지 기어갔다.
뒤에서 계속 괴롭혀대는 진동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클립에 손을 뻗던 그때, 위잉― 소리를 내며 진동 세기가 더욱 강해졌고 그대로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아, 흣!”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유진, 개새끼는 손도 쓰지 않아. 물어 와.”
“으윽…….”
“유진, 멍청하게 굴지 말고 개새끼답게 해. 그게 네가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
노엘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수치스러운 명령에 정말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다. 끊임없이 뒤를 괴롭히는 물건에 후들거리며 천천히 바닥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클립을 입에 물고 노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노엘이 직접적으로 접촉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선만으로 내게 수치심을 주는 순간이었다.
“잘했어. 이제 상을 줄게.”
노엘은 목줄을 잡아당겨 허리를 세우게 한 뒤 내 입에 물고 있던 클립을 빼 유두에 채웠다. 강한 압력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거렸다. 누군가 내 가슴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고통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뒤를 찔러대는 기구는 아직도 빠지지 않고 내 안에서 윙윙 울려대고 있다.
“아흐윽…! 흣, 아, 으….”
“좋아할 줄 알았어. 유진은 이런 걸 좋아하잖아. 그치?”
“아, 아니. 흐윽!”
“함부로 짖지 마. 허락 안 했어.”
노엘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힘 있게 눌러댔다. 그 여파로 바닥 위로 푹 주저앉아버렸고 내벽을 찌르던 기구가 쑤욱 들어와 더더욱 쾌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수치스러운 클립과 기구를 매단 채 노엘 앞에서 헐떡거렸다. 이런 내 모습을 보던 노엘은 바지 버클을 풀러 내고는 성기를 꺼내 들었다.
“우읍!”
목줄이 당겨지면서 커다랗고 단단한 성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거절하기도 전에 잡힌 머리채가 뒤로 꺾여지면서 입이 벌어지고 그 틈으로 성기가 들어왔다. 노엘은 내 머리를 잡고 몇 번이나 움직이더니 무언가 생각났는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이거 되려나 모르겠네. 워낙 가슴이 작아서.”
“컥, 커헉. 아, 아흐….”
노엘은 내 머리채를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 삼키지 못한 살 기둥을 내 가슴팍에 기대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가늠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기침만 토해 내었다.
그러자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내 손을 들어 올려 스스로 가슴을 움켜쥐게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가슴으로 커다란 성기를 감싸려고 하니 역부족이다. 게다가, 클립이 꽂혀 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유두가 얼얼하게 당겨왔다.
“아, 아파. 아, 흐으…….”
“입이 작으니까 다 삼키지 못하잖아. 대신 다른 방법을 알려주는 거야.”
“하윽….”
“가슴도 작고, 뭘 잘하는 것도 없는데 밝히기만 하잖아. 유진은 쓸모없는 개새끼네. 허리 움직이면서 빨아. 그나마 네가 잘하는 짓이잖아.”
단단해진 성기를 가슴으로 겨우 감싸며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손이 저리고 유두가 세게 잡아당겨 졌지만, 노엘에게 얻어터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상체를 들어 올리며 혀를 놀렸다. 혀를 내밀어 귀두를 살살 핥아대며 가슴을 움직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며 허리를 들썩이자, 타액과 살갗이 접촉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정말 형편없네. 이 세우지 말랬지.”
“우윽…….”
찰싹, 노엘이 성기를 물고 있는 내 뺨을 내리쳤다. 평소 노엘이 때리는 강도보단 아주 약했지만 무서운 건 마찬가지다. 가슴을 움켜쥐며 왕복 운동하듯 움직였다. 점차 숨이 차올라 버거워졌다. 그때, 노엘이 내가 달고 있는 클립을 예고 없이 콱 잡아당겼다.
“아흑…!”
잡히는 것보다 뺄 때가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가슴 쥐던 손을 떨어뜨리고 상체를 푹 숙였다. 그와 동시에 성기가 목구멍 끝까지 닿았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노엘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노엘은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잘하라는 듯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 개새끼, 위아래로 좆물 줄줄 흐르니까 얼마나 예뻐.”
“아읏…….”
“이걸 필립이 볼 뻔했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짜증 나네. 우리 개새끼는 안 그래? 남 앞에 보여지는 걸 더 좋아하나.”
숨이 막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이 노엘에겐 자극이 되었을까. 내 거부 의사가 그에게는 쾌락으로 돌아왔을까. 거부 반응을 표현하듯 성기를 밀어내려 했지만, 노엘은 더더욱 성기를 들이밀며 혀를 움직이게 했다.
속도가 빨라질 수 없을 만큼 힘에 부쳤을 때, 부풀어 오른 성기에서 끈적한 사정액이 흘러나왔다. 입안뿐만 아니라 목덜미며, 뺨이며 가슴팍에 온통 노엘의 사정액이 들러붙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감각에 소름이 끼쳐 두 눈을 감았다.
“눈 떠.”
“아, 아으응! 이, 이거…….”
눈뜨라는 명령과 함께 뒤에서 울려대는 기구의 진동이 최대로 올라갔다. 우웅, 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눈이 뒤집힐 것 같다.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는 자극에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바닥 위에 엎드린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노엘이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나를 내려다봤다.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럴수록 내벽 안으로 삽입된 기구가 여기저기 민감한 부분을 푹푹 찌르고 자극했다.
“아, 흐…아윽…!”
성기에서 말간 액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사정하기 일보 직전이다. 최대한 노엘에게서 보이지 않게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노엘이 발로 내 몸을 뒤집고는 성기를 콱 움켜쥐어 사정하지 못하게 막아내었다.
“개새끼가, 주인 허락도 없이 가려고 해?”
“아, 아니. 아뇨, 하, 으윽! 제, 제발…….”
“제발 뭐.”
“…하, 으으…하, 할 것 같, 은, 흐읏…!”
“그것만으론 안 되지. 솔직하게 말해. 네가 뭘 하고 싶은지.”
“하, 하지, 흐. 자, 잘못 했, 어요….”
미칠 것 같았다. 가득 몰린 액이 금방이라도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뒤에서는 삽입된 기구가 괴롭혀댔고 앞에서는 노엘이 사정하지 못하도록 막아대니 그야말로 몸뚱어리가 하얗게 점멸할 것 같았다.
“뭘 하고 싶은지 말하라고 했더니 잘못했다는 건 또 뭐야? 근데 잘못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
“흐, 네. 자, 잘못 했, 어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이것 좀 놔주, 세….”
“그럼, 시키는 대로 다 하겠네. 그치?”
“네, 시, 시키는 대로 하, 할 테니까. 제발, 제발….”
계속되는 쾌락에 어딘가 이상해질 것만 같다. 정말 내가 하는 말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노엘은 내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 짓다, 삽입된 기구를 들었다 놨다 하며 피스톤질 하듯 움직였다.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 손은 위아래로 흔들었다. 결국,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사정하고 말았다. 노엘의 손바닥 위로 끈적한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읏…!”
“핥아.”
기구가 빠져나간 반동으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노엘이 내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멀건 정액이 바닥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네?”
“깨끗이 청소하라고. 네가 싼 거잖아.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건…….”
“씨발, 카펫 더 더러워졌네. 이러려고 좋은 카펫 깔아둔 게 아닌데.”
“흐으… 알겠어요….”
상체를 겨우 들어, 정액이 주륵 흘러내리는 손바닥을 할짝거렸다. 비릿하고 짭짜름한, 역겨운 냄새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 누군가가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노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을 만큼 두려웠다. 그저 덜덜 떨며 손바닥에 혀끝만 갖다 댈 뿐이다.
“좆은 못 빨면서 이건 잘하네. 이걸로는 안 끝나, 유진.”
“아흑…!”
내 손목을 움켜쥐던 노엘이 바닥으로 엎드리게 하더니, 제 성기를 망설임 없이 푹 찔러 넣었다. 안쪽까지 밀려드는 성기에 헉 숨을 들이마시며 고꾸라졌다.
노엘은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는 자비 없이 콱콱 쑤셔댔다.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퍽퍽,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카펫만 콱 쥐었다.
“아흑. 제발, 그만, 그만…… 해 주, 아흣!”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다른 새끼도 아니고 유진 너라고.”
“아, 흐으읏…… 제발, 그, 아흐…….”
“씨발, 나는 너만 생각하면 좆같고 눈 돌아가기 일보 직전인데 넌 안 그런가 봐? 더 박아 줘야 눈알이 뒤집히려나?”
계속되는 허리 짓에 골이 울릴 지경이었지만, 저항할 힘이 없어 맥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노엘은 제 성기를 빼지 않은 채 그대로 내 몸을 돌려 눕혀 연신 박아 댔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쾌락을 채워가고 있었다. 마치,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풀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개 같은 새끼.”
“아악, 아파, 아파요!”
내 안으로 들어온 성기는 사정없이 침입하여 여기저기 헤집어 놓았다. 쾌락, 비참함, 고통, 온갖 감정에 의해 몸 안이 침식되었다. 노엘의 움직임이 계속해서 빨라졌고 뜨거운 액이 종아리까지 흘러내리고 나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유진.”
“으으….”
“벗어나려고 해도 죽고 멀어지려고 해도 내 손에 죽어.”
귓가에 속삭여 주던 노엘은 내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다, 목덜미 위로 입술을 파묻으며 빨아들였다. 노엘이 살갗 위로 흔적을 남겼다. 정말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 * *
목덜미에 노엘이 새긴 자국은 아무리 긁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노엘한테 얻어터질 때까지 목덜미를 긁어 댔다. 이렇게라도 해야 자국이 지워질 것 같았다.
“하아…….”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 정문이 보일 때 즈음, 불안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 자국을 보고 누군가가 오해하면 어쩌지? 노엘의 말대로 정말 개새끼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때, 지나가던 행인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셔츠를 끝까지 채워 그 자국이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만 같아 불안함을 잠재울 수 없었다. 결국, 길거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흐어엉…….”
목 놓아 울었다. 한국어든 영어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흘려보내며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수군거리며 지나갈 뿐이다.
누가 좀 도와달라고.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꺼내 주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괴롭게 사는지 알아달라고 목 놓아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도움의 손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따사로운 햇살만이 내 머리에 내리쬘 뿐이었다.
“유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유진, 너 왜, 여기서 뭐 해? 무슨 일 있어?”
유일하게 웃을 기회를 주는 예거가 내 앞에 서 있다. 하필 이럴 때 마주칠 줄이야. 미간을 찌푸리다,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예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무슨 일이야, 어? 집에 무슨 일 있어?”
“흐, 아냐. 아무, 일. 미,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유진.”
미안하다고 연신 빌빌거리며 예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예거는 한숨을 푹 쉬고는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오늘 수업 가지 마. 나랑 있어.”
평소답지 않게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다. 진지한 음성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예거의 얼굴에 늘 내비쳤던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가만히 고개 끄덕이며 예거를 따라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뭐가 됐든 상관없다. 지금 내 앞에 노엘, 나의 형만 없다면.
예거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기숙사다. 룸메이트는 수업에 들어갔으니 안심하고 울라고 해서 소파에 웅크린 채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목 놓아 우는 게 전부였다.
“이제 다 울었어?”
울다 지쳐 소파에 기대앉았을 때, 예거가 코코아 한 잔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에 계속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흐으, 다, 우, 울었, 흐어어엉….”
“웃게 해주려고 데려왔더니 더 우네. 나를 울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어떡해, 유진.”
“흐윽, 미안,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이제부터 금지야.”
“흐…….”
예거는 내 입술 위로 손가락을 얹으며 픽 웃어주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노엘처럼 벌이라도 내리는 걸까. 그런 불안함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툭 흘러내렸다.
“이제 물어봐도 돼? 너 왜 울었는지.”
투박하지만, 따스한 손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이런 친절을 받아도 될까? 혹시 나중에 노엘한테 들켜서 얻어맞으면 어쩌지?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알만 요리조리 굴려댔다. 그러자 예거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실은, 그냥 지나치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아직 듣지도 않았는데 겁부터 났다. 시끄럽고 꼴사납게 왜 울었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다. 예거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신경 쓰이게 해서 마음이 좋지 않다. 대답 대신 주먹을 꾹 쥐었다.
“우는데 누가 옆에 있으면 걸리적거리잖아. 혼자 시간을 갖게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았어.”
따스한 목소리에 빳빳하게 굳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은 안심하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참았던 숨을 뱉었다.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거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근데 그냥 지나가기엔 네가 너무 서럽게 울더라.”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예거를 바라봤다. 예거의 옅은 미소 위로 걱정스러운 눈빛이 서려 있다. 이곳에선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배려다.
특별한 거 하나 없는 미소였으나, 내 마음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가슴 위로 무거운 돌덩이가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예거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망가지는 것을 멈춰줄 수 있지 않을까? 부질없는 욕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 한국으로 가고 싶어. 흐으…….”
그래서 조금이나마 꽁꽁 감춰뒀던 내 진심을 뱉어 버렸다.
“유진?”
“흐으, 흐어어엉……. 여기 싫어, 무서워. 다시 돌아가고 싶, 흐윽…….”
다만, 아직 완전히 털어놓을 용기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핏줄 섞인 형과 살을 섞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예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역겨워할까? 더러운 자식이라고 침을 뱉고 돌아설까? 예거한테 얻어맞거나 욕먹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이 따스한 미소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까 두려울 뿐이다.
“유진.”
예거가 내 이름을 부르며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계속 도닥이는 손길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지금 예거의 눈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불쌍한 유학생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위로가 필요했다. 예거의 옷깃을 붙잡고 엉엉 소리를 내며 눈물을 터트렸다.
“미안, 흐윽…… 근데 나 여기 너무 싫은데…… 자꾸 싫다고만 해서 미안해…….”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거란 희망을 품는다면 나만 비참해질 테니까. 그럼에도 예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매번 찬 바람만 맞다가 따스한 햇빛을 보게 된 것 같았으니까.
예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품에 안긴 상태라 예거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순 없었지만,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확연히 느껴졌다.
“이럴 줄 알고 같이 있자고 한 거야, 유진. 옆에 있고 싶어, 진심이야.”
“흐윽…….”
“매번 기운 없어서 걱정했는데 이러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잖아.”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예거의 손이 내 등을 쓸어 만졌다. 따스한 손길이 등허리를 어루만지자 불안히 뛰어댔던 심장은 조금씩 진정 되었다.
눈물 때문에 예거의 옷이 더러워지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머리가 차분해졌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예거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뒷머리를 쓸어 만져주었다.
“너 외롭잖아. 어디 가려고 그래.”
“……예거.”
“응, 나 여기 있어.”
머리를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감았다.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가만히 고민하다가 입을 닫았다. 페이지가 온통 새까만 책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이제 좀 진정 됐어?”
“응, 고마워. 덕분에 좀 괜찮아진 것 같아. 그리고…미…….”
“미안하다고 말하면 정말 수업 보낼 거야, 유진.”
“어, 어디 데려가는 거야?!”
“내 침대.”
예거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붙잡고는 방 안으로 데려갔다. 침대와 책상 하나 덜렁 있는 방이지만, 두 사람이 머물기엔 충분했다. 어리둥절하며 예거를 바라보자, 내 손을 잡아 침대 위에 앉혀 주었다.
“수업 갈 생각하지 말고 푹 자. 나 있는 거 불편하면 나가 있을게.”
“왜?”
“그 기분으로 공부 어떻게 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수업에 들어간다면 카운슬러에게 불려가서 상담을 받아야 할 게 뻔했다. 얼 빠진 표정으로 예거를 쳐다봤다. 예거는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교수님이든 누구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꿈 없이 자, 유진.”
가볍게 농담하듯 미소 짓던 예거는 손을 흔들며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왠지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멀어지는 예거의 손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예거.”
“어?”
“…가지 말고 나랑 있으면 안 돼?”
“뭐?”
“그, 왠지 집주인을 쫓는 느낌이라서.”
나를 바라보던 예거의 눈이 조금 커져서 그런지, 왠지 변명을 덧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묘하게 달라진 눈빛을 슬쩍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린 애가 된 듯한 느낌에 두 뺨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간만에 나도 낮잠이나 잘까. 푹 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때?”
“응, 좋아.”
“그래, 나도 좋아.”
예거는 내 어깨를 휘감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보다 키가 커서 그런지 품에 폭 안기는 듯한 모습이 되어 왠지 민망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다. 노엘과 함께 있을 때와 달리 불안함 한 번 느끼지 않았으니까.
“…몇 시야?”
“아직 3시밖에 안 됐어. 더 자도 괜찮아.”
머리를 쓸어 만지는 손길에 슬며시 눈을 떴다. 매일 내 숨을 옥죄는 노엘 대신 부드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예거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이나마 겁먹지 않아도 괜찮다 싶어서.
“그래도 지금 가봐야 해. 오늘 정말 고마웠어, 예거.”
“드디어 미안하다는 소리 안 하네.”
“응?”
“아까부터 계속 울었잖아. 자면서도 미안하다고 중얼거렸어.”
“…미안.”
“하지 마.”
단호하게 내 목소리를 막아내던 예거는 부드러이 손을 잡아 주었다. 괜찮은 걸까?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떻게 할 줄 몰라 눈알만 요리조리 굴려댔다. 예거는 잠깐 힘을 주더니 내 머리를 쓸어 만지며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는 거두지 않은 채였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해진단 말이야. 너한테 위로 제대로 못 해준 것 같아서.”
“…예거.”
“그런 눈으로 보니까 보내기 싫잖아.”
예거는 멋쩍게 웃으며 제 뺨을 긁적였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뺨이 붉어진 것 같다.
“내일 또 와도, 괜찮아?”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데.”
“응?”
“룸메이트 며칠 정도 쫓아낼 수 있어, 유진.”
“하하, 아니야. 괜찮아. 남한테 민폐 끼칠 순 없….”
띵동―!
그때, 뜬금없는 초인종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거는 의아한 눈을 하며 방 밖을 내다봤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예정에 없는 손님 같았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룸메가 열쇠 잃어버려서 그런가. 유진, 여기 잠깐 있어.”
“아냐, 나도 이제 가볼게.”
가방을 챙겨 들고 예거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띵동,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성질 급한 자식. 예거는 낮게 웃으며 중얼거리고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열린 문틈 사이로 말도 안 되는, 도무지 납득 할 수 없는 광경이 이어졌다. 노엘이다. 노엘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환청도 나의 빌어먹을 착각도 아니다.
“누구세요?”
노엘은 대답 대신 내게 시선을 던졌다. 매끄러운 미소와 함께 내게 눈을 맞추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지면서 들고 있던 가방을 퍽 떨어뜨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지난번처럼 카드를 쓰거나 택시를 탄 것도 아닌데?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고. 어디로 가지? 다급한 눈길을 숨기지 못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릭이랑 아는 사, 어, 혹시 웨스틴?”
예거의 기숙사는 3층이다. 뛰어내려도 될까? 죽을 거야. 분명히 붙잡히면 목을 졸라댈지도 몰라. 힘이 빠져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창문 쪽으로 향했다.
노엘에게 붙잡히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지금 나를 보는 노엘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숨통을 옭아매기 일보 직전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예거의 비명이 들렸다.
“자, 잠깐. 왜, 왜 이러세, 아악!!”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예거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거칠게 문이 닫히며 노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단정한 걸음으로 들어왔지만, 하는 행동은 들이닥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노엘은 예거가 일어나기도 전에 복부를 짓눌렀다.
“으, 아악! 왜, 왜 이러시는, 으윽!”
예거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퍼덕거렸다. 노엘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는 모습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게 따스함을 알려주던 친구가, 내 앞에서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제, 제발, 제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장 난 기계처럼 제발이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흘리며 온몸을 떨어댈 뿐이다. 노엘의 가혹한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노엘은 예거의 고통 따윈 보이지 않는다는 듯, 가슴팍을 구둣발로 꽈악 짓이겨댔다.
“대체 이게 무, 아악!! 유, 유진. 얼른 신고, 우윽!”
예거가 발버둥 치며 내 쪽을 쳐다봤을 때, 하얀 주먹이 예거의 뺨을 갈겨버렸다. 뻐억, 하는 소리에 어깨를 흠칫거렸다. 예거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추욱 늘어지자, 노엘은 예거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더니 향을 맡는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곧, 노엘이 못 맡을 냄새를 맡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신고해 봐. 너처럼 싸구려 떨이나 피워 대는 멍청한 학생의 말을 들을까. 아니면,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선량한 사람의 말을 믿을까.”
“유, 유진. 이, 이 사람 뭐, 아악…!”
내 이름이 예거의 입에서 새어 나온 순간, 노엘은 자켓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예거의 입안에 물리고는 연신 주먹질을 했다. 잔인한 폭행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 돼, 그러지 마. 처음으로 나한테 편안함을 안겨준 사람이야.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기만 했다.
겁이 났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하얘지고 노엘을 말리려고 다가갈 힘도 남아나지 않았다.
“유진.”
끔찍한 타격음 대신 노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으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정했다. 덜덜 떨며 대답 대신 노엘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눈물범벅인 얼굴을 숨길 생각 같은 건 없다.
“네 친구도 같은 전공인가?”
“…….”
“대답을 안 하네?”
“아악!”
대답하지 않자, 노엘은 곧바로 응징하듯 예거의 뺨을 갈겨버렸다. 어디가 부러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예거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내 잘못이다. 다 내 탓이다. 펑펑 눈물을 쏟으며 머리를 감싸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노엘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다시 물을게. 네 친구 전공이 뭐야?”
“게, 게임… 그, 그래, 픽…이요….”
“셋 셀 테니까 기어와. 안 그러면 네 친구는 네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만져야 할 거야.”
“노, 노엘…….”
“하나.”
“흐, 흐윽…….”
“둘.”
“가, 갈게요. 제,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힘이 남았어도 두 발로 걸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엘이 기어오라고 했으니까. 두 발로 걸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목줄이 채워진 것처럼 숨이 막혀 갑갑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바닥에 짚고 축 늘어진 다리를 억지로 끌어 노엘 앞으로 기어갔다.
“우으…….”
손수건에 입이 막힌 예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눈물로 시야가 얼룩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예거의 얼굴은 온통 검붉은 피로 가득했다. 나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죄책감에 짓눌려 고개를 푹 숙인 채, 노엘의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두려움 때문에 손이 딱딱하게 굳어 감각이 사라졌다.
“이렇게 해야 말을 듣는구나, 유진.”
상냥한 손길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말 잘 듣는 개를 칭찬하는 주인의 손과 비슷했다. 덜덜 떨며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예거를 바라봤다. 예거의 두 눈과 콧등이 퉁퉁 부풀어 올라 있다.
“네 친구 잘 봐둬. 어떤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는지.”
“흐윽…….”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이니까.”
그때, 노엘의 손이 내 머리채를 움켜잡아 당겼다. 어찌나 억센지 발버둥 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질질 끌려가듯 노엘을 따라 현관으로 나섰다.
* * *
‘어제 오후, 마약 단속국은 뉴욕 부근 항구에 정박한 화물선에서 많은 양의 코카인을 적발했습니다.’
차 안에선 유일하게 라디오 소리만 들렸다.
예거는 괜찮을까? 경찰에 신고했을까? 예거에 대한 걱정도 잠시, 노엘이 미간을 좁히며 라디오를 꺼버렸다. 두려운 침묵이 찾아오자,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노엘의 차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조수석에 올라탄 순간부터 지금까지 노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차라리 욕을 하는 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두려웠다. 어떤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잘못했다고 말하면 조금이라도 너그러이 대해 줄까? 그런 생각에 덜덜 떨며 손톱만 뜯어댔다. 창밖에는 끝없이 휑한 도로만 펼쳐져 있다. 아무것도 하나 없이 텅 빈 모습이 꼭 내 인생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노엘, 어, 어디 가는…….”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지금 이 차가 가는 길은 집과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노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입 닥쳐. 죽여 버리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살벌하게 말하는 노엘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침내, 차는 도로에서 벗어나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숲길에 들어섰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간인데도 주변이 캄캄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볼 때, 시동이 꺼졌다.
“세상 참 편리하더라, 유진. 핸드폰에서 친절하게 네 위치도 알려주고.”
노엘이 집요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발자취를 따라왔다는 걸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고 해서 누굴 탓할 수 없었다. 전부 내 잘못이었다. 핸드폰을 껐어야 했다. 그랬다면 예거가 저렇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밀려오는 죄책감에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짓이겼다.
“안 하면 큰일 날 뻔했어. 내 개새끼가 구멍이 허전하다고 다른 새끼를 꼬아낼 줄이야.”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아냐?”
“윽!”
노엘이 순식간에 내 멱살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가까이서 본 노엘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개새끼가 발정 나서 박아달라고 구멍 벌렸을지.”
“노엘, 제발. 정말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그래?”
“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럼 벗어 봐.”
“……네?”
믿을 수 없는 말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노엘은 나를 바라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다.
“벗어 보라고. 네 구멍에 다른 새끼 좆이 들어갔는지 검사받아야 하잖아.”
멍청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이 벌어졌다. 벗으라니? 설마, 여기서? 당황스러운 마음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노엘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엘이 몸 기울여 쇄골 부근을 꾸욱 눌러댔다.
“바로 안 벗네? 그 새끼랑 좆질한 거 맞나 봐.”
“노엘. 뭘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저, 저는….”
“너한테서 그 새끼 냄새가 나거든.”
“아윽!”
노엘이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깨 위에 얹어진 하얀 손에 마디가 두드러지며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짓이겨지는 듯한 통증이 스며들자, 숨을 헉 들이켰다.
“죽고 싶지, 유진.”
“흐, 아, 아파요. 아파요, 제발! 저 진짜 그런 거 한 적 없, 흐윽…….”
“그럼 벗어. 네 구멍 벌려서 검사받으면 그만이잖아, 안 그래?”
“윽!”
여전히 노엘은 다정하게 웃고 있지만, 손아귀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다음엔 내 모가지를 쥐고 비틀어 버리겠다는 기세다. 이해되지 않았다. 나를 그토록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지 수긍할 수 없다.
순간, 발밑에서 핸드폰 화면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주머니에서 굴러떨어진 모양이다. 액정 위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나타났다. 노엘의 눈치를 보느라 누가 보낸 건지 알긴 어려웠지만, 예거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강하게 솟구쳤다.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확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 알았어요. 할, 할게요. 할 테니까 소, 손 좀…….”
노엘이 눈치채기 전에 입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노엘에게 들키는 일은 없었다. 매번 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 다녔던 습관 때문인지 별 트집은 잡히지 않았다.
“이 개새끼, 역시 이런 취향이었구나.”
결국, 나는 오늘도 노엘 웨스틴에게 지고 말았다. 애초에 이길 생각은 없었다.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이 힘을 거역하기란 쉽지 않다. 두 눈이 퉁퉁 부르틀 정도로 얻어맞던 예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다음은 내가 되겠지. 불안한 예감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이곳은 아무도 없는 풀숲이고 차 안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는 얄팍한 위로를 하면서 헐렁거리는 티셔츠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노엘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모멸감을 떨쳐낼 수 없다.
매번 내 옷을 찢어발기던 노엘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는 것이 꽤나 수치스러웠다. 속옷까지 전부 벗어 내고 성기를 가리듯 몸을 웅크렸다. 짜악! 곧바로 응징이 날아들었다. 뺨 한쪽이 틀어지면서 사타구니에서 손을 떼어냈다.
“뭐가 부끄러워, 그 새끼 앞에선 다리 잘도 벌렸으면서.”
“아, 아니, 아니에요. 저 그런 짓 한 적 없…….”
“그 새끼 이름이 뭐지?”
“그건…… 자,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예, 예거 넬슨. 예거 넬슨, 이요…!”
노엘이 곧바로 손을 들자,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맞은 것도 아닌데 벌써 잘못했다는 소리가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추위보다 두려움 때문에 두 다리가 바르르 흔들렸다.
“독일인인가. 이젠 온갖 새끼들을 다 꼬아내네. 우리 개새끼, 목줄 안 채우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박아달라 끙끙거리나 봐.”
“그, 그건…….”
“네 의견 들을 생각 없으니까 닥치고 구멍 벌리기나 해. 검사받아야 하잖아?”
섬뜩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노엘의 음성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사람 인기척 하나 느낄 수 없다. 차 안이라 괜찮을 거라고 또 한 번 스스로를 세뇌하듯 웅얼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이 차갑게 굳어가는 것 같다. 노엘의 시선을 외면한 채, 시트 위에 엎드려 비부를 벌렸다.
“흐…….”
“엉덩이 더 들어.”
“네, 네. 그럴, 게요.”
수치스러운 명령에 스스로 따랐다는 게 자괴감 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훑으며 스쳐 지나갔다. 두려웠다. 누군가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평소보다 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와중에 노엘은 어떤 접촉도 하지 않고 차 창문에 기댄 채 내 모습만 쳐다봤다.
“섰어?”
“아, 아니에요! 그, 그런 건. 언제까지 해야, 죄송해요…….”
“검사 끝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 손에 힘 빼지 마. 구멍 더 벌려.”
평소보다 수치심이 배가 되었다. 누군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면 어떡하지?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할까. 노엘의 명령대로 엉덩이를 최대한 올려 들고 구멍을 벌렸다.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덜컹―!
“헉!”
멀건 액이 성기에서 떨어져 허벅지를 적시던 그때. 창문에 기대고 있던 노엘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벌컥 문을 열어 재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찬 바람이 살갗을 스치자 재빨리 손을 떼고 노엘을 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개새끼는 거짓말을 너무 잘해.”
“아윽!”
쾅!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닫았다. 따가운 풀의 감촉이 허벅지를 스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차 문을 잡아당겼다. 철컥. 잠금장치가 걸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엘은 빙글 웃으며 운전석에 앉을 뿐이었다.
“노, 노엘! 노엘, 아니, 형, 제발,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네? 제발, 제발요!”
너무 급해서 영어든 한국어든 구분하지 않고 입에서 뱉어 버렸다. 쿵쿵, 쿵, 쿵. 계속해서 창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찬 바람이 다시금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들리는 거라곤 바람 소리와 내 울음뿐이다.
“노엘, 끄윽…. 제발, 제가 잘,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흐, 제발 문 좀, 열어주세, 노엘!”
시동 거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렸다. 온몸에 피가 가시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이런 몰골로 버려지고 싶지 않은 절박한 마음에 몸 숨기는 것도 잊어버리고 운전석 쪽으로 달려갔다.
“노엘, 흐으, 제, 제발.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이랑 얘, 얘기하지 않을게요.”
새까맣게 선팅된 차 창문 너머로 노엘의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노엘은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웃고 있었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모습은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노엘에게 납작 엎드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개, 개새끼 다, 답게…… 흐으, 행동할 테니까 제발 용서 해주세요.”
어떻게든 노엘의 기분을 돌려놓고 싶었다. 노엘이 가지 못하게 백미러며 와이퍼며 잡히는 대로 움켜잡고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아무리 따뜻한 날씨여도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고 있으니 온몸이 바르르 떨려 미칠 지경이었다.
“이 개새끼는 친절하게 대하면 말을 안 들어서 어떡하지.”
시동 끄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금처럼 노엘을 떠나고 싶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 그런 건 생각할 겨를이 없다. 펑펑 눈물을 터트리며 노엘의 바짓단에 매달렸다.
“흐으… 잘,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을, 흐으…….”
“왜 그렇게 울어? 내가 나쁜 짓 하는 거야?”
“아, 아뇨. 그런 게 아니, 에요…….”
“거봐. 너도 알잖아. 내가 이유 없이 때리는 게 아니라는 거. 유진, 나는 말이야. 내 말만 잘 들으면 화내지 않아.”
“네, 네. 제가 다 잘못, 했어요.”
“그 친구도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노엘의 말에 누군가가 내 목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노엘의 말대로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바르르 떨며 바짓단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실내가 아닌 바깥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수치심과 나 같은 것 때문에 애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새끼가 따라오라고 했어도 가지 말았어야지. 개새끼가 주인 말고 다른 사람한테 꼬리 흔드는 거 본 적 있어?”
“흣……!”
노엘이 입안으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볼 안쪽에 닿는 단단한 손가락에 몸을 흠칫 떨었다. 안으로 침식한 손가락은 내 입안을 헤집으며 빙글 돌려댔다. 파르르 떨며 달뜬 숨을 턱턱 뱉어냈다. 밀어내려고 혀를 움직였다. 하지만 노엘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픽 웃으며 다른 손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유두를 잡아당겼다.
“우으….”
“이거 봐. 손가락을 좆 빨아대듯이 핥고 있잖아. 그렇게 구멍이 허전했어? 우리 개새끼는 얼마나 박혀야 만족하려나.”
“아니, 그런… 흐…….”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노엘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노엘은 내 유두를 힘주어 비틀고는 손가락을 빼내었다. 타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져 가슴팍 위로 뚝뚝 떨어졌다. 헐떡거리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차 안에 들어가고 싶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 눈에서 벗어나고 싶다.
“노엘, 저 들어가게 해주세요. 흐으,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그래? 그럼, 거기 있어.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했잖아?”
“제발, 흐윽!”
“우리 개새끼 손가락도 잘 빨았으니까 좆은 더 잘하겠지.”
노엘이 바지 버클을 풀고 성기를 꺼내었다. 그 모습을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관계를 할 때마다 노엘만 옷을 입고 있었다. 나 혼자 발가벗겨져 노엘의 아래에서 헐떡거려야만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정말 주인과 개새끼가 따로 없다. 히끅거리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빨아.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했잖아.”
“여, 여기서요? 노엘, 제, 제발…… 흐, 들어가서 하면 아, 안 될까요?”
“내가 지금 개새끼 편의 봐주는 줄 알아? 집에 가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흣…….”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아 옆으로 밀어내고는 운전석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운전석에 앉은 채 내 쪽으로 몸을 돌려주었다. 어서 입에 물라는 듯이 커다란 성기가 단단해졌다.
“저, 지, 진짜 안 되겠어요. 차에 들어가서…… 윽!”
“우리 개새끼 좋게 말하면 안 듣지.”
단단한 성기가 내 뺨을 툭 내리쳤다. 노엘의 손바닥에 비하면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모멸감은 배로 일어났다. 결국, 머리채가 붙잡힌 채로 성기를 물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노엘의 성기가 계속해서 입 안으로 들어왔다.
“허, 윽…….”
“예거 넬슨의 좆은 어떻게 빨았어?”
“아, 으…….”
커다란 성기가 입안에 가득 찼다. 숨을 쉬기 어려워 컥컥거리며 몸을 뒤로 내뺐지만, 노엘의 손에 붙들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숨을 쉬고 싶어 혀를 움직이고 목구멍을 열었다. 하지만 노엘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만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려 버둥거렸지만, 노엘의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까지 들어왔다.
“컥…….”
숨을 쉴 수 없어 마른기침이 연신 터져 나왔다. 하지만 노엘은 머리채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뒤로 빼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노엘은 털 하나 없는 사타구니에 뺨이 닿을 정도로 나를 잡아당겼다.
“허, 으으. 아…….”
“유진, 이 세우지 말라고 매번 말하잖아.”
“우, 우윽….”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나를 내려다보는 노엘이 어떻게 웃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엘의 움직임에 맞춰 숨을 쉴 수밖에 없다.
“아, 흐…….”
노엘이 내 머리를 뒤로 내뺄 때, 약간의 산소가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숨을 쉬고 싶어 캑캑대면 노엘의 허벅지 안쪽까지 잡아 당겨져 숨을 쉴 수 없었다. 호흡하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컥컥 마른기침을 내뱉다, 노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새파란 두 눈은 오로지 나만을 향하고 있다.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노엘은 내 입안에 사정했다.
“하아, 하아…….”
“우리 개새끼 못한다면서 잘 빠네. 앞으로는 종종 밖에 나와서 할까? 곤란한데 어쩌겠어. 네 취향이 이런데.”
“아, 아니… 흐윽…, 아니에요…….”
노엘이 성기를 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좁았던 기도가 갑작스레 확 트이니 머리가 핑글 도는 느낌이 났다. 헐떡거리며 노엘을 바라봤다.
이제 들여 보내주겠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괜찮겠지?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을 꽈악 짓누르며 간절하게 쳐다봤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난번 필립이 우리 집 왔을 때도 발정 나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들어갔잖아.”
“아, 아니, 그건…….”
“네가 아니면 누가 느꼈는데.”
약 기운 때문이었지만, 그날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노엘의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으면서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지금도 느끼고 있잖아.”
“아흑!”
걷어차는 발길질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뒹굴었다. 노엘은 운전석에서 일어나, 풀밭에서 뒹굴던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허벅지 위에 엎드리게 했다. 내벽이며 성기며 하나도 빠짐없이 노엘에게 보이는 자세다. 수치스러워서 그런지 조금만 맞닿아도 어깨가 움찔거렸다.
“확인해 볼래?”
“힉! 하, 하지, 하지 마세요, 제발…….”
내벽 안으로 노엘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노엘은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리를 움켜쥐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막무가내로 내벽을 휘젓는 손길에 달뜬 신음만 흘려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오돌토돌한 내벽을 뭉근하게 누르는 손가락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아흑!”
“유진, 그렇게 소리 내면 사람들이 찾아와. 난 내 개새끼 다른 사람이랑 공유하고 싶지 않거든.”
“죄, 죄송해요. 흐으…….”
노엘의 경고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히끅거렸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손가락이 내 안을 휘저었다. 손끝으로 속을 긁고 꾹꾹 눌러가는 손길에 머리가 하얗게 타들어 갔다. 그만해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찰나 카 시트 위로 사정하고 말았다.
“죄, 죄송해, 요. 잘못했, 어요. 때리지 마세요…흐으….”
허여멀건 한 정액이 카 시트 위를 적셨다. 노엘의 표정을 바라보지 못하고 벌벌 떨며 조수석으로 기어갔다. 최대한 노엘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다. 노엘은 표정 변화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오히려 그게 더 위압감이 들었다.
“죄, 죄송, 죄송해요…….”
죄송이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웅얼거리다, 혀를 내밀어 시트 위에 흩뿌려진 정액을 핥아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노엘에게 얻어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노엘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학습된 행동을 하듯 스스로 움직였다.
“좆같게 하네, 진짜.”
“아흑…!”
노엘이 내 머리채를 잡고 조수석 시트 쪽으로 처박듯 집어 던졌다. 제대로 맞아 어깨뼈가 얼얼했다. 안전벨트 클립에 긁혀 허벅지 위로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그것도 잠시, 시트가 뒤로 밀어지면서 공간이 조금 더 넓어졌고 노엘이 내 위로 올라탄 상태가 되었다.
“정말 개새끼가 따로 없잖아. 이래서 어떻게 내보내지?”
노엘이 내 허벅지를 잡아 활짝 벌리고는 성기를 가져다 대었다. 이미 사정액이 뚝뚝 떨어져 입구까지 적셔진 상태였기에 찔걱거리는 소리가 적잖이 흘러나왔다. 물기 젖은 소리가 귓가를 자극함과 동시에 두꺼운 살덩이가 내 안으로 푹 파고 들어왔다.
“아, 아악!! 아, 아파! 아파요! 아파, 제발…!”
“노엘 웨스틴과 예거 넬슨. 둘 중 어떤 게 네 취향이야?”
“아흑!”
아까 전 내 입안을 괴롭히던 성기가 내벽 안으로 쑤욱 밀고 들어왔다. 고통스러운 나머지 신음을 터트리며 노엘의 셔츠를 꽈악 움켜잡았다.
“그 멍청한 새끼는 자주 웃던데. 너한테 박아 댈 때도 이렇게 웃으면서 해줬어?”
“아, 흐, 아윽! 아파, 아, 아파…제발!”
노엘이 내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허리를 쳐올렸다. 어느 정도 넓혔어도 비좁은 공간이라 도망칠 수 없다. 그저 노엘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달뜬 숨을 턱턱 내뱉을 뿐이다.
“아, 아파요. 아프, 하윽….”
“노엘 웨스틴, 예거 넬슨. 어떤 게 네 취향인진 관심 없어.”
“하윽!”
“네가 아픈 것도 상관없어. 힘 빼고 허리나 더 움직여.”
“아, 흐, 아윽!”
노엘이 내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사정액으로 번들거리는 접합부에서 찔꺽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엘의 움직임에 맞춰, 내 허리뿐 아니라 차도 함께 흔들렸다.
안 돼, 누가 보면 안 돼. 다급하게 노엘을 밀어냈지만, 노엘은 내 손목을 움켜쥐며 더욱이 세게 허리를 쳐올릴 뿐이다. 반항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유진, 이 개새끼.”
“흐읏. 아, 노엘. 하지, 아, 안, 안 돼. 싫, 흐으…!”
“넌 다른 새끼 밑에서 다리 벌려도 내 이름 부르면서 울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노엘이 고개 숙여 내 귀를 잘근거렸다. 잘근거리는 이와 함께 체액에 젖은 말캉한 살덩이가 귓불을 스치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노엘이 주는 뜨거운 열기에 점차 잠식되는 순간이다. 노엘은 움직일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허리를 쳐댔다.
퍽, 퍽.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흔들렸다. 노엘의 어깨가 이따금씩 천장에 닿았다 떨어지는 장면이 점차 흐릿해졌다. 고통과 미미한 열기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이성과 본능을 집어삼킨 지 오래다.
“역시 개새끼는 목줄을 채워놔야 했어.”
다소 살벌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노엘은 무자비하게 허리를 쳐올리며 내 안에 사정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체액이 허벅지에서 차 시트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깜빡, 깜빡. 나를 바라보는 노엘도, 그리고 내가 지금 있는 장소도 전혀 자각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해졌다. 하얗게 점멸하는 시야를 붙잡으려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그날 이후. 내게는 그 어떤 외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유는 예거였다. 집으로 돌아온 노엘이 내 짐을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봐버렸다.
‘거봐, 이럴 줄 알았어. 기숙사 식당 건물 앞에서 만나? 씨발, 유진 이 개새끼를 어떡하면 좋지?’
‘흐읍… 노, 노엘, 잘못했어요. 제 친구는 그냥, 아악!’
‘네가 이런 식으로 구니까 못 믿는 거야.’
예상대로 차에 있을 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예거였다.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예거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뺨을 후려치고 족쇄와 목줄을 채우는 노엘의 행동 때문에 도무지 나갈 수 없었다.
“오늘 뭐 했어.”
뭐 했냐는 말에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보는 파란 눈동자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바르르 몸이 흔들렸다. 입술도 떼지 못한 채 고개만 숙였다.
“유진.”
“그냥 그림, 그렸, 어요.”
학교도 가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노엘에게 잡혀 살아야만 했다. 노엘이 집에 있으면 목줄과 족쇄가 채워지지 않았고 외출할 때는 목줄이 채워진 채 멍청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노엘이 허락한 시간에만 그려야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자. 같이 밥 먹어야지.”
“……노, 노엘.”
“왜?”
“씻고 가면 안 될까요? 손이…….”
노엘 앞으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마침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 손이며 팔뚝이며 온통 검은 칠로 범벅이었다. 노엘은 미간을 좁히며 내게 채운 족쇄와 목줄을 풀어 주었다.
“허튼짓하지 마.”
노엘은 나를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듯한 노엘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강 손을 씻고 거울을 쳐다봤다. 노엘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지 않아 검은 칠이 다 씻겨 내려갔어도 손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노엘?”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땐, 앞에 서 있던 노엘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혹여나 싶은 마음에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할게요. 그럼요, 우리 물건은 싸구려 대마초랑 차원이 다르니까.”
서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노엘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아직은 내가 나왔는지 모르는 낌새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나갈 수 있는 기회라는 걸까? 그 순간, 잠잠했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해, 나가야 해. 맥박 소리가 점차 커졌다. 쿵, 쿵쿵. 점점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에 가슴팍을 움켜쥐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마침내 현관 앞까지 다다랐고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철컥―!
“흐….”
쇳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지만, 계단 위에도 내 뒤에도 노엘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파르르 떨며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흘 만에 집 밖에 나온 것이다.
“흐, 흐윽…….”
쉴새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학교 방향으로 뛰어갔다. 집, 학교, 집, 학교. 매번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세상이 좁아지는 건 당연했다. 학교, 그리고 살이 터지도록 얻어맞은 예거의 모습만 떠올랐다.
“흐…….”
캄캄한 저녁이라 그런지, 동네에는 깊은 어둠이 서려 있었다. 까끌까끌한 아스팔트 바닥에 발바닥이 쓸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신발 하나 신지 않은 상태다. 하도 급하게 달려서 슬리퍼가 벗겨 진지도 몰랐다.
그때, 바로 옆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헉!”
혹시 노엘일까? 노엘이 나를 잡으러 온 걸까? 쿵쿵,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은 통증까지 안겨 주었다. 가슴팍을 콱 움켜 쥐며 되는 대로 몸을 던졌다. 하필이면 쓰레기통 옆이었다. 구역질 날 정도로 썩은 내가 진동했지만, 개의치 않고 몸을 웅크렸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노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이번엔 잡힌다면 정말 영영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만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 나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었다.
‘너는 이제 죽어. 노엘 웨스틴에게 죽을지도 몰라.’
파르르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환청은 노엘의 목소리, 억양, 숨결까지 그대로 빼닮았다. 차라리 여기서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런 취급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까?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머리가 아팠다. 입을 틀어막고 온몸을 웅크렸다.
바스락―.
“읏……!”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누구지? 아직, 아직 난 노엘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설마 노엘이 벌써 나를 잡으러 온 걸까? 쾅쾅 뛰어대는 심장 소리를 누군가가 들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빠져갔다.
“흐…….”
온몸이 떨렸다. 숲속에서 발가벗겨진 것보다 더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저 몸을 웅크리며 최대한 쓰레기통 속으로 몸을 밀어붙였다. 덜컹, 쓰레기통 문이 열리면서 서늘한 공기가 역한 냄새와 함께 흘러들어 왔다.
노엘일까? 이젠 내 목을 졸라대겠지. 나를 죽이겠지. 두 주먹 꽉 움켜쥐며 내게 가해질 폭행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유진?!”
“흐읍…….”
“어서 나와, 여기서 뭐 해?!”
예거다. 번쩍 고개를 드니, 콧등에 거즈를 붙이고 여기저기 퉁퉁 부은 듯한 얼굴이 나타났다. 예거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 혹시 이 모습을 본다면 노엘이 지난번처럼 예거를 후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나, 나는…….”
“……괜찮아. 여기 그 사람 없어.”
없다고 해도 마음 놓을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나를 보는 예거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을 만큼 두려웠다.
“일단 차에 타. 응? 내가 도와줄게. 유진, 나 믿어.”
“아, 안 돼, 예거. 나는, 나는……. 나랑 있으면 네가 큰일 날지도 몰라.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 제발.”
말을 하던 도중, 예거는 자기가 입던 자켓을 벗어 내 머리 위로 덮어주었다.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나를 잡아당겨 밖으로 빼주었다. 쓰레기 특유의 역한 냄새가 여전히 따라왔지만, 예거는 상관없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재킷을 여며주기만 했다.
“너 그냥 보내는 게 나한텐 큰일이야.”
“하, 하지만…….”
“어서 가자, 씻어야지.”
예거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노엘과 마주치지 않을까 불안에 떨며 머리에 덮인 자켓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예거의 차에 올라탔을 뿐이다. 텅, 조수석 문이 닫혔다. 문득, 노엘과 관계를 했던 기억에 어깨가 흠칫거렸다.
“벨트 매, 유진.”
“예, 예거 미안, 한데 뒤에 타면 안 될까?”
“응?”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근데 여긴….”
“냄새 때문에 그래? 정말 괜찮다니까.”
“아, 아니…그게 아니고….”
“알았어, 유진. 뒷좌석에서도 벨트 해야 해.”
파르르 떨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든 노엘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노엘 웨스틴은 내 세상을 비틀다 못해, 좁혀버린 사람이니까.
허겁지겁 차 문을 열지 않은 채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고 내부는 금세 쓰레기 냄새로 가득 찼다. 더러워, 더러워. 꼭 내게 더럽다고 비난하는 것만 같다.
“택시 콜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널 보고 온 거야.”
“하필이면 내가 나타난 거네.”
“하필이면, 이 아니라, 타이밍이 참 좋은 것 같다. 그치, 유진?”
“미안, 해….”
“뭐가.”
“지난번에…….”
문장은 완성되지 못한 채 입안에만 맴돌았다. 예거는 내가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평소 같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여기저기 들러붙은 반창고가 마음에 걸렸다. 입을 꾹 다물고 룸미러를 통해 날 쳐다보는 예거를 응시했다. 예거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흠, 역시 TV에 나온 사람은 믿으면 안 되나 봐. 노엘 웨스틴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거든. 신사 중의 신사라면서. 근데 유진, 너랑 그 사람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
“…물어보진 않을게.”
말없이 예거의 눈을 마주쳤다. 거울 속에 담긴 예거의 눈은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를 구해줬으면서 미안하다고 느끼는 게 분명했다.
“내, 형이야.”
“어? 형이라고? 진짜 몰랐어. 웨스틴 꽤 유명한 집안이잖아. 혈통이나 돈 엄청 따지고. 유일한 정상인이 노엘이라고 하던…미안. 진짜 미안.”
예거는 당황했는지 꽤나 버벅거리며 핸들을 잡았다. 그런 예거를 힐끗 보다, 고개를 푹 숙이며 손톱 거스러미를 뜯어댔다. 내가 잘못했지, 내가. 그냥 여기에 온 게 잘못이지. 이런 자책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여기에 왔으니까.”
“그럼, 그 사람한테도 그런 취급을 받아? 내가 맞았던 것처럼?”
“환영받진 못하더라도 괴롭힘당할 줄은, 몰랐어.”
“유진.”
“그냥 다 내 탓이야. 가난이 싫다고, 좀 편하게 살고 싶다고 욕심부린 대가를 받나 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예거는 지금도 충격받은 얼굴을 하는데 관계를 가졌다는 말까지 하면 정말 나를 어디론가 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노엘이 나를 차 밖으로 밀어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시동 꺼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섰다. 낯선 건물 앞이었다. 학교도 아니었으며, 내가 머무는 동네도 아니었다. 심지어, 예거의 기숙사도 아니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얘기하던 것을 멈추고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예거를 바라봤다.
“여, 여긴…….”
“아, 우리 삼촌 집이야. 당분간 안 들어온다고 해서 내가 살고 있어. 이 꼴로 학교도 못 가니까. 원래 삼촌이랑 같이 지내려고 했는데 워낙 아침잠이 많아서 말이지.”
남의 집에 신세 져도 괜찮을까. 노엘이 또 쫓아오면 어떡하지. 불안한 의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대답 대신 눈알만 대록 굴렸다.
“안심해. 여긴 노엘 웨스틴이 모르는 장소잖아.”
예거는 눈치가 빨랐다. 내 눈빛만 읽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토닥여주었다. 그런 예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주머니 속에 핸드폰이 있는지 마구 뒤적거렸다. 예거가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개의치 않았다. 핸드폰이 없다는 걸 확인해도 안심되지 않았다. 노엘은 어떤 방법으로도 날 찾아올 것 같았으니까.
“계단으로 올라가자, 엘리베이터 진짜 느려. 오래된 아파트라 좀 많이 후지거든.”
예거가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내 손을 잡아도 괜찮을까? 예거한테 더러움이 묻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힐끔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예거는 보란 듯이 내 손목을 들어 올려 손바닥 위로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떨어졌다.
“예, 예거. 나, 이, 이런…….”
“장난이야, 장난. 너 자꾸 냄새나는 것 같다고 신경 쓰길래. 괜찮아, 이거 봐. 내 코 고장 나서 냄새나는지도 모르겠어. 진짜야.”
“그, 그래도.”
“얼굴 빨개졌네.”
“장난치지 마.”
“알았어. 그럼 지, 진짜 큰 콜라 마시러 얼른 가자.”
“놀리지 말라니까.”
끝까지 나를 놀리는 예거를 얄밉게 보다가 계단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두려움은 떨쳐 낼 수 없었다. 난간 사이 사이마다 어디선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서늘한 시선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아니야, 여기에 노엘은 없어. 그랬다간 당장 내 목을 비틀어대겠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진 손을 꾹 움켜쥐며 예거를 따라갔다.
“씻고 와.”
“으응…….”
집 안은 지극히 평범했다. 예거의 기숙사보다 조금 더 넓을 뿐 별다른 점은 없다. 멋쩍게 서 있던 도중, 예거가 내 앞으로 다가와 새 옷을 내밀었다. 이걸 입어도 되나 머뭇거리다 얼른 받아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샤워 커튼을 치고 구석구석 비누칠했다. 나를 감시하는 노엘은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아직도 내 몸 곳곳엔 울긋불긋한 멍이 가득했으니까. 따뜻한 물이 흘러내렸지만, 떨림은 멎지 않았다. 덜덜 떨며 수전을 잠그고 물기를 닦았다. 섬유유연제 향이 폴폴 풍기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노엘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다 씻었어?”
“응.”
“훨씬 좋아 보인다.”
예거가 내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포근한 비누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아까보다 훨씬 더 편안한 기분이 느껴졌다. 숨을 작게 뱉으며 예거를 쳐다봤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유진.”
“응?”
“경찰에 신고 하자.”
“무슨…….”
“굉장히 심각한 문제야. 너 학교에서 며칠 동안 안 보였던 것도 설마 그 사람 때문이야?”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는데 예거가 작게 숨을 뱉었다. 왠지 내 잘못 같아서 어깨를 움츠렸다.
“거봐. 너도 안 좋은 일이라는 거 알잖아.”
“도망…… 갈래.”
“무슨 수로? 여권은?”
여권도 노엘에게 있다.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긴, 여권이 없으면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데 무슨 수로 도망친단 말인가. 서 있을 힘이 없어 소파에 웅크린 채 기대었다. 그러자 예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 방법밖에 없어. 경찰에 신고해야 해. 내가 증언해줄게. 나도 이 일을 겪었잖아.”
“하, 하지만.”
“유진, 도와줄게.”
예거가 내 손을 움켜쥐며 시선을 마주쳤다. 제법 진지한 눈빛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누군가를 걱정하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노엘이 만든 세상에 갇혀 지내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거의 손을 붙잡았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 가지고 있어.”
예거가 내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두꺼운 종이가 여러 번 접혀 있었으나, 이 안에 가루 뭉텅이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응? 이게 뭔데?”
“수면제야. 다시 노엘에게 붙잡히면 이런 방법이라도 써야지. 안 그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예거가 준 수면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게 꼭 호신용 총처럼 느껴졌다. 이걸 쓸 순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예거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커 소리를 크게 설정했는지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911의 칼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보세요? 제 친구가 누구한테 맞아서……. 왔거든요.”
듣고 싶지 않다. 내 입으로 끔찍한 기억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두 눈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 툭툭.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들어가서 할게. 예거가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하아…….”
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이제 끝인 건가 싶은 마음에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예거가 덮어준 재킷을 꽉 움켜쥐며 얼굴을 가렸다. 혹시나 노엘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유진. 10분 이내로 형사님이 올 거래. 혹시 모르니까 내 핸드폰 가지고 있어.”
“…정, 말?”
한참 소파에 기대 있을 때, 예거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내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친절을 받아도 되는 걸까. 괜히 미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예거가 내 손에 핸드폰을 쥐여 주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한국 돌아가서도 나 잊지 말라는 뜻이야.”
“예거.”
“병원비로 나 이번 달 완전 거지인 거 모르지?”
“미, 미안. 그건 내가 어떻게든…….”
“농담이야. 무사히 돌아갔으면 좋겠다.”
가만히 입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예거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을,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도와줄 수 없을 텐데.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좀 이기적인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너 다시 보니까 정말 좋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유진.”
예거가 나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튀어 나왔다. 정말 이제 다 끝난 게 맞을까. 그런 생각에 바르르 떨며 예거의 온기만 받아내었다.
지잉, 손에 들린 핸드폰이 긴 진동을 울려댔다. 예거의 핸드폰에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전화 왔는데…….”
혹시 중요한 전화일까 싶어 예거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예거는 액정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계속 울리는 진동에 예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곧,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아, 유진. 그거 아마 형사님일지도 몰라. 어서 내려가자.”
“나 혼자 갈게.”
“그래도…….”
“CSI 같은 수사 드라마 보니까 이것저것 조사받는 것 같은데, 시간 엄청 걸릴 거야.”
“유진, 너 혼자 어떻게 가려고?”
“이젠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
예거를 안은 손에 힘을 한 번 주고는 떨어져 나갔다. 더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을뿐더러, 예거에게 성가신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됐다. 손사래 치며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이때, 예거가 신발장에서 신발 한 켤레를 꺼내 내게 신겨주었다.
“조사 마치면 전화해. 삼촌 집이라고 저장된 게 여기 번호야.”
“응, 알았어.”
“다 됐다. 유진, 다녀와.”
신발을 신겨주던 손이 발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젠 발바닥이 아프지 않다. 떠나기 전에 예거를 슬쩍 쳐다봤다. 예거는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아주 따뜻하게. 예거를 뒤로 한 채 문을 닫았다.
“후…….”
난간을 잡고 1층 현관 쪽을 내다봤다. 검은 차 한 대가 현관 앞에 세워져 있다. 방금 연락한 형사일지도 모른다. 정말 끝이라는 예감에 쿵쿵 뛰어대는 가슴을 붙잡고 쉴 새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내려갈 때까지 검은 차는 떠나지 않고 1층에 그대로 서 있었다. 경찰차가 아닌 개인 차량 같다. 형사가 맞나 싶었지만,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 타이밍 좋게 운전석 문이 열리며 낯선 남자가 나왔다. 역시 노엘은 아니었다.
“혹시 형사님이세요? 아까 전화한…….”
“유진!”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뒷좌석에서 내린 노엘이 단박에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스며드는 온기가 숨통을 조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노엘이 내 뺨을 감싸 쥐며 걱정했다는 표정으로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또다시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것이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제 동생을 잃어버릴 뻔했어요.”
“제가 뭐라고 했어요, 노엘. 가출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마침 순찰 가는데 센터에 신고 전화가 들어왔대요. 누구한테 맞은 것 같은데 집 나와서 방황하다가 자기 집에 있다고.”
형사의 입술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줄줄 새어 나왔다. 무슨 소리야? 가출이라니? 예거는 분명, 분명.
‘여보세요? 제 친구가 누구한테 맞아서……. 왔거든요.’
다시 생각해보니, 예거의 전화 내용을 완전히 듣지 못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 거라는 얕은 안도감에 대화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혹시, 예거는 내가 무서워해서 배려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로 방에 들어가서 신고 전화를 건 걸까?
나를 꽉 끌어안는 노엘의 온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톡, 톡. 등허리를 두들기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몸을 가눌 수 없다.
“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놔!! 혀, 형사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 죄송해요. 제 동생이 아직 적응을 못 해서. 제가 좀 더 잘해야 했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에이, 제 딸도 덕분에 뉴욕에서 아무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걸요. 이렇게라도 도움 드릴 수 있다니 기쁩니다.”
버둥거리는 내 모습에 형사는 쯧, 혀를 차고 노엘에게 호의적인 표정을 내비쳤다. 형사도 노엘의 편이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닫자, 버틸 힘조차 사라졌다.
나는 망가지기 위해서, 노엘 웨스틴의 개새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걸, 세상이 말해주는 것 같다.
어지러운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휘청거렸다. 노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살려줘, 제발. 숨 좀 쉬게 누가 제발 도와줘. 힘없이 허공을 향해 손짓해봤지만, 내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우릴 데려다준 형사가 떠나자마자, 노엘은 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철컥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역시 개새끼한테 햇빛을 보여주면 안 된다니까.”
“아, 악!! 이거 놔, 놔주세요! 자, 잘못했어요, 제발!”
머리채를 움켜잡은 손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사나웠다. 노엘은 내 머리채를 잡은 채, 어디론가 끌고 갔다. 버둥거리며 버텨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달칵 소리와 함께 조명이 훤하게 켜졌다. 지하실이다. 냉랭한 기운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안 돼, 안 돼. 제발. 바르르 떨며 노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술래잡기해본 적 있어?”
“흐으, 잘, 잘못했, 악!”
짝, 소리와 함께 덜덜 떨리던 뺨이 돌아갔다. 노엘은 나를 집어던지듯이 내동댕이치더니 내 발목 위에 구둣발을 올렸다. 어디선가 쇠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엘의 손에 들린 기다란 망치가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해본 적 있냐고.”
“해, 해봤, 하, 하지 마세요. 자, 잘못했어요.”
“어릴 때도 못 해본 술래잡기를, 유진 네 덕분에 하게 됐지 뭐야. 이거 고마워해야 할까, 아니면 이 씨발스러운 개새끼를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
“아윽!”
내 발목을 짓이긴 노엘의 구두에 힘이 들어갔다. 살갗이 쓸리는 듯한 통증이 꽤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는 따로 있다. 바로, 노엘이 들고 있는 망치다.
“하, 하지, 하지 마세요. 제발….”
불안한 미래가 앞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채 노엘을 올려다봤다. 노엘은 웃고 있다. 노엘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난 이만하면 충분히 기회 줬다고 생각해, 유진.”
“자, 잘못, 잘못했, 했….”
“응, 알아. 그래도 모르는 것 같으니까 알려주는 거야. 우리 개새끼는 이런 취향이니까.”
발목을 지르밟은 구둣발이 떨어졌다. 공포, 불안함, 절망, 두려움. 그 어떤 단어로도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파르르 떨며 힘없이 도망치려 했지만, 금세 노엘에게 붙들렸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바닥에 엎어졌다. 노엘의 손에 들린 망치가 머리 위로 올라갔다.
“얌전히 묶여 있어, 유진. 그래야 내가 널 제대로 쳐다볼 수 있으니까.”
허공을 맴돌던 망치가 내려오는 모습이 영화 속 장면처럼 느릿하게 그려졌다. 내게 닥친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미쳐버려서 만들어낸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 아악!!! 아악!! 사, 살려주세요! 아악!!”
우둑,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 끼치고 기괴한 소리와 동시에 발목이 지져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열기가 올랐다.
“아악!!제발, 제…… 아악!”
온몸을 뒤덮는 격통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산산 조각난 발목에선 절망 외엔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노엘이라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잠깐이나마 이 지옥에서 벗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겐 기적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말했지, 내가 느낀 좆같은 기분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겠다고.”
노엘은 웃고 있다. 그의 웃는 얼굴은 어떤 감정에서 나오는 걸까. 쾌락일까, 아니면 즐거움일까. 어쩌면 나를 다시 잡아두고 괴롭힐 수 있다는 안도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고통이 간신히 붙잡아놓은 이성을 흩뜨려 놓았다.
나는 어느샌가 노엘의 품속에 갇혀 있었다. 앞으로의 내 미래가 어떤지 예고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