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4)

03. 아무리 소리 질러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 하아….”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46분. 5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노엘과 함께 살게 된 지 두 달이나 흘렀다. 우리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포모나라는 도시로 이사 갔는데 뉴욕에 비해 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유독 우리 동네만 이런지 모르겠지만, 학교를 제외하곤 흔한 슈퍼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도 운 좋으면 50분마다 한 번씩 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내겐 더더욱 적막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노엘은 내게 말도 안 되는 규칙을 정해 주었다.

수업 있는 날에는 오후 5시까지 집에 들어와야 했고 그 외의 외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몇 번 길을 헤매느라 5분을 넘겨서 들어갔다.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온 노엘에게 5시 전에 도착했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얼얼한 손바닥이 날아 들어왔다.

‘한동안 내버려 뒀더니 가관이네. 맞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려?’

‘흐, 저, 정말이에요.’

‘저거 보여? 출입 센서야.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나한테 알람이 온다고.’

‘노, 노엘. 나, 나는 그러니까….’

‘오늘도 여기서 들켰구나. 입 닥치고 벗어. 그게 싫으면 직접 벗겨줄 테니까.’

호되게 얻어터지고 아래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맛보고 나서야 노엘에게 거짓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아무리 중요한 과제가 있어도 오후 5시까지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제일 늦게 마치는 수업은 4시. 강의실에서 정문까지 꽤 멀어 30분이나 걸렸고 여기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간다고 해도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조금이라도 굼뜨게 행동했다간 5시 안에 도착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거리다.

“하, 하아… 됐다.”

쾅! 문이 닫혔다. 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노엘이 사준 핸드폰이었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4시 58분. 노엘과 약속했던 5시 안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자마자 안도감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은 맞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내심 마음이 놓였다.

“헉……!”

바닥 특유의 찬 냉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보다 시린 것은 창가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엘의 시선이다. 언제부터 지켜본 것일까? 내가 뛰어오는 것도 다 보고 있었겠지. 그런 상상을 하니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났다.

“왔어?”

“5시 전에 도착했어요.”

노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벅거리는 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긴장감에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또 맞아야 할까? 잘못한 게 없는데. 아냐,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거야. 내가 잘못하지 않은 적이 없잖아. 머리 굴리는 걸 티 내기라도 하듯 시선을 데굴거렸다.

하나, 둘, 셋.

어느덧 노엘과의 거리는 세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른한 목소리가 내려앉을 때, 노엘과의 거리는 엄지손가락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간격으로 좁혀졌다.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네? 아니, 그게…….”

“그게 뭐.”

“약속 지켰다는 뜻… 이에요.”

또다시 간격이 좁혀졌다. 이젠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아주 가까운 거리다. 손바닥이 날아들 것 같은 불안함에 어깨를 흠칫 떨며 노엘의 시선을 회피했다.

약속 지켰다는 말을 한 이유는 때리지 말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한동안 맞지 않아서 그런 건지 노엘을 마주치기만 해도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그게 칭찬해달라는 말이잖아, 유진.”

“그, 그게 아니고…….”

“멍청하고. 자기 위치도 모르고 조르기나 하고.”

“그, 그게…!”

“건방진 개새끼가 따로 없어.”

턱을 콱 움켜쥐는 손가락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 단호하게 명령하는 목소리에 덜덜 떨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노엘은 나를 바라봤다. 더는 때릴 이유가 없는데. 대체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이러는 걸까. 파르르 떨며 내게 내려지는 심판을 기다렸다.

“읏…….”

단단한 손이 내 목을 거칠게 감아 당겼다. 훅, 하고 치고 들어오는 입술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를 개새끼라 부르는 노엘은 끈질기게 입술을 물고 잘근거렸다. 이젠 밀어내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멍하니 입만 벌렸다. 노엘이 주는 열기가 좋아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느끼기 싫은 희망 사항 때문이다.

“흐….”

입을 벌리자, 노엘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손을 뻗었다. 속절없이 갇힌 상태가 되어 버렸다. 흠칫 어깨를 떨며 뱀처럼 허리를 옭아매는 손짓에 몸을 맡겼다.

입술과 입술이 움직일수록 체액에 젖은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끈적하게 젖은 살덩이가 입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허리를 끌어당기던 손이 점점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평소답지 않은 부드러운 키스가 적응되지 않았다. 이쯤이면 손바닥이 날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굳이 꺼낼 이유는 없다. 혹시라도 노엘을 불편하게 한다면 정말 맞을지 모르니까.

“흐, 노, 노엘….”

부드러운 키스는 혀와 혀가 얽히고설킬수록 거칠어졌다. 내 안을 파고 들어온 미끈한 혓줄기가 혀끝을 세워 말캉한 점막을 헤집기도 하고 혀뿌리가 뽑아 당겨질 만큼 빨아들이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목구멍 속으로 넘겨주었다. 더는 숨쉬기가 벅차, 노엘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흐…그, 그만….”

홧홧한 열기와 번들거리는 타액으로 입술의 감각이 무뎌졌다. 고개를 돌리자, 끈덕지게 이어지던 타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져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그것도 잠시, 노엘을 밀어냈다는 생각에 흠칫 떨며 고개를 숙였다.

맞겠지, 맞을 거야. 노엘이 키스를 멈추기 전에 밀어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노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 뺨만 움켜쥘 뿐이었다.

“유진. 네가 이름 부를 때마다 왜 이렇게 개 같은 건지 모르겠어.”

노엘이 축 늘어진 내 손을 움켜쥐며 제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손끝에서부터 쿵쿵 뛰어대는 맥박이 느껴졌다. 손가락에서부터 녹진하게 녹아드는 온기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개 같다고 말하는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 시선을 마주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서늘한 눈빛이다.

“이 개 같은 기분을 어떻게 떨쳐내는지 넌 알아?”

나를 응시하는 새파란 눈동자는 꼭 겨울바람 같았다. 매섭게 들이닥쳐 살갗이 에이는 시린 겨울바람. 두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씨발, 모르니까 이딴 식으로 멍청하게 구는 거겠지.”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서늘한 눈동자에 어딘가 낯선 색이 섞여 들어있었다. 혼란스러움이라던가, 복잡함이라던가. 나는 노엘의 눈을 물들인 색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 * *

「오늘 늦어.」

한참 수업을 듣고 있는데 노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5시 안에 기어들어 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굳이 이런 거 나한테 얘기할 필요 없는데. 알았다고 답장했다간 개새끼가 건방지게 대답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메시지 창을 꺼버렸다. 답장을 하려 해도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문자였다.

지잉―

하지만 핸드폰을 책상 위로 내려놓기 무섭게 또 한 번 메시지가 도착했다.

「읽었으면 대답해.」

노엘의 태도는 묘하게 달라졌다. 아주 미묘하게. 뉴욕에 살 때는 마주치지 않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비서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직접 메시지를 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뭐, 답장을 요구한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고민하다 알겠다고 짧게 답장을 보내니 더는 오지 않았다.

“자, 다 완성한 학생은 제출하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스케치북 안을 가득 채울 무렵,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일찍 끝내준다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에 그림 고치는 것도 포기하고 엉망진창인 스케치북을 교수님께 제출한 뒤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시간은 겨우 1시 30분. 오늘만큼은 5시라는 시간에 쫓길 이유가 없다. 2시간 30분 밖에 없는 자유지만, 내겐 그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 도서관에 갈까. 아니면 제대로 못 했던 학교 구경을 해볼까. 핸드폰을 들고 쭈그려 앉아 이것저것 검색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미국에 와서 햄버거를 먹어 보지 못했다. 평소 노엘이 제공해준 음식만 먹어야 했기에 패스트푸드는 고사하고 즉석요리 한 번 구경할 수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빠르게 인터넷을 켜, 주변 패스트푸드점을 검색했다.

“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미국에 오면 꼭 먹어야 할 음식’ 같은 게시글을 본 적 있는데 그 글에 있던 패스트푸드점이 이 주변에 있다. 다만, 버스를 타면 50분이 넘게 걸렸고 차를 타면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지만 차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으음….”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현금이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싶어, 학교 정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바람에 절로 웃음이 피어나왔다. 이렇게 웃던 게 얼마 만인가.

빠르게 택시 어플을 깔아 패스트푸드점으로 도착지를 지정하여 차량을 호출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만 차 한 대가 내 앞에 도착했다.

“유진?”

스르륵 차 창문이 내려가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갈색 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내 이름으로 예약해서 그런지 남자는 밝은 목소리로 불러주었다. 웃는 게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조수석 위에 올라탔다.

덜컥. 문을 닫자마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풍기는 레몬 향을 맡으며 창가에 몸을 기대었다. 톡톡,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릴 때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 학교 다녀?”

“응.”

“나도 여기 학생이거든. 게임 그래픽 전공이야.”

“아….”

“근데 이름이 유진이라고? 음, 내가 너 어디서 왔는지 맞춰볼까?”

“한국에서 왔어.”

아시아인이라면 무조건 중국인이라고 얘기할 것 같아 먼저 선수 쳤다. 대답하며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갈색 머리를 한 남자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운전대를 잡으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알아, 그럴 줄 알았어. 내 룸메이트 동생 이름도 유진이거든. 걔도 한국인이라서 혹시나 했지.”

“아….”

“무례하게 느꼈다면 미안. 룸메이트랑 꽤 친해서 혹시나 했어. 혹시… 릭이라는 한국인 몰라? 한국 이름이 뭐더라. 아, 갑자기 까먹었네.”

“몰라. 수업 듣는 사람들도 모르는데 게임 그래픽 쪽은 알 리가 없지.”

입 다물고 가만히 창밖을 내다봤다. 바람처럼 스치는 풍경을 말없이 구경하려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났다. 이것저것 말을 거는 남자 때문에 조용히 있을 수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예거 넬슨이고 택시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는 사소한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이곳에 와서 제대로 나눈 대화는 처음이니까.

물론, 학교 다니면서 남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겁을 먹었다. 이 사람도 노엘 같을까, 하는 생각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서다.

“다 왔어.”

“응,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패스트푸드점 간판이 대낮인데도 환하게 깜빡이고 있다. 안전벨트 클립을 풀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예거가 시동을 끄더니 운전석 문을 활짝 열었다.

뭐지? 따라오겠다는 건가? 의아한 눈으로 가만히 예거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예거가 빙글 등을 돌리며 시선을 마주쳤다. 예거는 웃고 있었다. 아주 환하게.

“점심을 못 먹었거든. 일행 없으면 같이 먹어도 될까?”

“응, 상관없어.”

“얼른 들어가자. 3X3 조합이 얼마나 끝내주게 맛있는지 알려줄게.”

“3X3? 뭔데?”

“치즈 3장 패티 3장 추가한다는 뜻이야. 너 나중에 한국 돌아가도 이 조합을 그리워하게 될걸.”

“하하, 그게 뭐야.”

가볍게 농담을 던지는 예거를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생소했다. 정말 오랜만에 집이나 학교가 아닌 다른 장소에 와서 그런지 계속 두리번거리게 된다. 햄버거는 금방 나왔다. 예거와 함께 각자 트레이를 들고 테이블로 갔다.

“어때, 맛있지?”

“응, 진짜. 나 이렇게 맛있는 패티 처음이야. 감자튀김도 진짜 맛있다.”

“거봐, 뭐랬어. 맛있다고 했잖아.”

햄버거 한 입을 베어 무니 육즙이 줄줄 흘러 입안을 가득 메웠다. 냉동 고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다. 이제껏 먹었던 햄버거 중에서 최고 맛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햄버거를 오물거리며 먹다가, 콜라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라지 사이즈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컵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내 얼굴보다 큰 것 같다. 혹시 잘못시킨 게 아닐까. 눈치를 보며 카운터 쪽을 힐끔거렸다.

“왜 그래?”

“콜라 사이즈 잘못 나온 것 같아. 라지 시켰는데 너무 크잖아. 잘못 받았다고 뭐라 하면 어떡해.”

“너 내 친구랑 진짜 똑같다. 푸하하, 걔도 여기 올 때 이 소리 했거든.”

“지, 진짜? 이렇게 크다고?”

“지, 진짜? 이렇게 크다고?”

“따라 하지 마, 예거.”

“하하, 농담이야. 농담.”

장난스레 흘겨보자, 예거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어깨 위로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마 만에 웃는 걸까. 앞에 앉아 환하게 미소 짓는 예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

「점심 같이 먹자, 유진. 너 아직 못 가본 데 많다며.」

「응. 그럼 내일 만날래?」

「나야 좋지.」

어느덧 시간은 흘러 4시 30분이 되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예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예거는 더 놀다 가라고 붙잡았지만, 노엘과의 약속을 생각하면 계속 있긴 어려웠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가며 메시지만 주고받았다.

「지, 진짜 이렇게 큰 콜라 잘 가져가고.」

「놀리지 말라고 했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또 다른 손엔 예거가 사준 콜라가 들려 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오기 전, 예거는 내게 친구가 된 기념이라며 콜라를 사주겠다고 했다. 극구 사양해도 다음엔 내가 선물을 주면 되지 않겠냐는 말로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알았어! 다음에 봐!」

텍스트에서 예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실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또 보자며 답장을 보냈다.

플라스틱 컵 안에서 찰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투명한 컵을 보자, 조금 전 예거와 함께 나눴던 대화가 탄산 거품처럼 몽글몽글 솟아났다. 간만에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거창한 속담을 붙이기엔 우스웠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대화는 오랜만이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시간은 어느덧 4시 45분. 오늘은 노엘이 늦을 거라 했으니 맞을 거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노엘이 들어오기 전에 잠든 척하고 이불을 뒤집어쓰자고, 그런 생각으로 흥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철컥―

“캑…!”

문 열리자마자 불쑥 튀어나온 손아귀가 내 목을 움켜쥐었다. 쾅! 어깨가 움찔거릴 만큼 커다란 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문이 닫혔다. 어두운 그림자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 개새끼가 감히 어딜 돌아다닌 거지?”

“노, 노엘!”

퍽, 소리와 함께 손에 들린 콜라가 바닥 위로 뒹굴었다. 차가운 액체가 신발을 적시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포심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노엘은 현관문을 닫으며 내 목에서 손을 떼 멱살을 움켜쥐었다.

“왜? 뭐가 그렇게 신났어?”

“하, 학교 다녀 왔, 어요…….”

버둥거리며 노엘을 밀쳤지만, 노엘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바닥 아래에 떨어진 얼음 하나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 개새끼가 왜 신났는지 곧 답이 나오겠지.”

차가운 얼음이 뚝뚝 녹아내려 노엘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다시 불안함이 밀려 들어왔다. 아무래도 나한테 웃음이라는 건, 즐거움이라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내 팔다리는 자유로웠다.

이 개새끼, 그러니까 내가 왜 신나서 들어온 건지 알고 싶다던 노엘은 내 옷을 찢어발기듯이 벗겨 내고는 부엌으로 끌고 들어갔다. 머리채가 붙잡히는 것은 이제 익숙했지만, 나체 상태로 현관에서부터 끌려가는 건 처음이라 두려움이 일찍 찾아왔다. 파르르 떨며 바닥만 내려봤다.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리랬더니.”

“윽!”

“열 받게 하는 법만 골라서 배워 오나 봐, 유진.”

노엘은 막아내기도 전에 재빨리 양 손목을 움켜쥐며 테이블 위로 눕혀버렸다. 차가운 대리석이 등허리에 닿자마자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노엘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발버둥 치니, 허벅지 위로 구둣발이 날아 들어왔다.

“아윽!”

퍽, 소리와 함께 얼얼한 통증이 정강이에 울려 퍼지자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약속했던 5시에 도, 돌아왔잖아요.”

“뭐?”

“따, 따지려는 게 아니, 죄, 죄송해요. 근데 왜, 왜 맞는지 몰라서…….”

“몰라? 정말 몰라?”

“아윽!”

왜 뺨을 맞지 않나 했다. 대답하기도 전에 큼지막한 손바닥이 오른뺨을 갈겼다. 짜악! 짝! 넓은 집에 매 맞는 소리만 가득 퍼져 나갔다. 설마 들고 온 콜라 보고 이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들킬 일은 계산도 현금으로 했고 택시 탈 때도 현금으로 결제 했는, 아.

“이제 눈치챘나 봐. 그딴 표정 짓는 거 보면.”

지금 내가 가진 핸드폰은 노엘이 사줬다는 것을 잊어버린 게 잘못이다.

핸드폰에 연결된 이메일 계정 역시 노엘이 만들어 주었다. 택시 어플을 가입할 때 연결된 이메일을 통해 외출 사실을 알아낸 듯했다. 젠장. 뒤늦게 입술을 깨물어 봐도 소용없다.

“그래, 이건 내 실수지. 개새끼한테 목줄 채워야 한다는 걸 잊어버렸으니 말이야.”

“자, 잘못했어요. 근데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햄버거만 머, 먹었는데….”

“씨발 그게 뭐. 내가 말했지. 학교 외엔 외출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고. 방금 네 입으로 잘못했다고 했어, 유진.”

“하지만….”

노엘이 셔츠 소매 단추를 풀고는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정말 죽는구나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아프게 맞을까. 지금까지 맞았던 것은 비교도 되지 않겠지. 두 눈 질끈 감으며 아무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움직이지 마, 잠자코 누워 있어.”

“네, 네….”

낮게 으르렁거리던 노엘은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내 손목에 단단히 묶어 식탁에 연결했다. 어찌나 세게 묶었는지 손목이 보랏빛으로 푸르딩딩하게 물들여질 지경이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한 팔을 꿈틀거렸다.

노엘이 뒤돌아 찬장에서 아이스 버킷을 꺼내 들더니 곧바로 냉동고 문을 열었다. 뭘 하려는 건지 가늠할 수 없다. 덜덜 떨며 고통을 기다릴 뿐이다.

“전시관 측에서 중요한 기획안을 검토해달라고 연락이 왔어.”

쾅! 쾅쾅! 노엘이 선반 위로 트레이를 내려치고는 버킷 속으로 얼음을 쏟아부었다.

“마침, 전시회 라인업에 들어가는 아티스트들이 롱비치에 산다길래 그곳에서 보자고 했지. 개새끼가, 감히 일정도 마치지 못하게 하고 돌아오게 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만 들어도 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노엘은 제법 묵직하게 채워져 잘그락거리는 버킷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몇 개나 들어가려나.”

탁, 버킷을 내려놓던 노엘은 내 입술을 엄지로 쓸어 만지며 뚫어지라 쳐다봤다.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그 눈빛이 어쩐지 신경 쓰여 흠칫거렸다.

“…네?”

“하나, 둘, 일단 네 개까지 해볼까?”

“무슨 말인, 우읍!”

설명보다 실전이라는 듯이 단단한 손가락이 얼음 네 개를 움켜쥐고는 내 입으로 우악스럽게 쑤셔 넣었다. 우윽. 잠깐 숨이 막혀 몸을 뒤로 젖혔지만, 손목이 묶여 있는 탓에 어디로 도망갈 수 없었다. 순식간에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에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적당히 녹이고 있어. 너무 녹이지는 말고. 다 녹으면 재미없거든.”

“우, 으….”

“유진, 지금부터 게임 하나 할까?”

“아흐….”

노엘이 내 앞으로 바짝 밀착하더니 버킷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유두 위를 빙글 문지르다 가슴선을 따라 주욱 미끄러뜨렸다. 얼음이 닿는 길을 따라 온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차갑다는 의사 표현을 하고 싶었으나, 입 안에 얼음이 가득 물린 상태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욱욱거리기만 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이 재밌는 모양인지 쿡쿡 웃음 터트렸다.

“여기에 얼음 놓을 테니까.”

“흐…….”

“물 흘리면 벌 받는 거 어때? 흘리지 않으면 이쯤에서 용서해줄게.”

“우욱.”

“싫다고 해도 괜찮아.”

“흐으….”

“그래도 할 거니까.”

그 ‘벌’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얼음을 들어서 내 가슴팍 위에 올려놓겠다는 시늉을 하는 노엘은 무섭기까지 했다. 게임이라고 하기엔 우위가 확연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노엘이 얼음 세 개를 가슴팍 위에 올려놓았다.

“흐, 읏…….”

차디찬 감촉에 바르르 떨렸다. 노엘은 얼음이 녹도록 유두에 갖다 대며 뭉근히 문질러대었다. 찌르르한 감각에 허리를 움찔거리며 노엘을 바라봤다.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주륵 떨어질 것 같다.

“노, 으….”

노엘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얼음이 잘그락거려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다. 어쩐 일인지 노엘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정말 동등하게 게임을 할 생각인가. 차디찬 얼음에 몸을 흠칫 떨면서 노엘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쉽게 하는 건 재미 없잖아.”

“아, 아윽!”

노엘은 내 사타구니를 활짝 벌려 축 늘어진 성기를 움켜쥐고는 입에 머금었다. 어쩐지 노엘이 세운 조건치고는 너무 쉽다 했다.

내겐 허락되지 않은 원망을 하며 가슴팍을 뒤로 젖혔다. 어느샌가 체온에 닿은 얼음이 녹아내렸다. 금방이라도 흘릴 것 같아 허리에 힘을 주었지만 성기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자극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 아으….”

우위에 있는 사람이 반칙을 저지르면 그것은 규칙이 되었다. 아니, 이건 반칙도 아니다. 애초에 이 게임은 노엘이 이기기 위해 시작된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내가 멍청했다.

움찔거리며 허리를 떨었다. 노엘은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혀를 놀렸다. 기둥을 휘감는 말캉한 살덩이에 후끈 열이 달아올랐다.

“하, 하지, 으으….”

“물 흘리면 벌 받는다고 했을 텐데.”

“으, 읏.”

혀끝을 세워 귀두 끝을 뭉근하게 눌러대고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힘 있게 빨아들이는 혀 놀림에 도무지 참기 어려웠다. 아래가 뻑적지근하게 달아오르자, 찌르르하게 타고 올라왔던 냉기도 조금씩 잊혀졌다. 발끝을 오므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열기가 오른 것이다.

“아윽!”

볼 안쪽 말캉한 점막이 페니스를 감싸며 빨아 당겼다. 점점 더 성기에 피가 몰리고 열이 오르며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헐떡거리며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로 노엘을 밀어내려 안간힘 썼다.

하지만 노엘은 보란 듯이 내 발목을 콱 움켜쥐고 은밀한 부위까지 훤히 드러낼 정도로 벌려 주었다. 수치스러움이 배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제발, 제발, 제발. 입 안에선 여러 말이 맴돌았지만, 내뱉지 못하고 녹인 얼음물만 입 밖으로 줄줄 흘리고 말았다. 얼음이 어느 정도 녹아 작아졌어도 내 의사 한 번 제대로 펴내지 못하고 허리만 들썩거렸다. 결국, 예상대로 노엘의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흐으….”

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했을 때, 허리를 들어 올렸고 그 반동으로 얼음이 식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죄, 죄소해요….”

얼음 탓에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노엘 말대로 발정 난 개새끼가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부드러운 입술이 성기를 물어댔다. 살 기둥을 스치는, 입천장 특유의 매끄러운 감촉 역시 살갗을 통해 선명히 전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을 맴도는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치솟는 쾌락에 속절없이 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결국, 가슴팍에 남아 있는 물방울이 주륵 떨어지면서 사정하고 말았다.

“죄송, 해요…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주세요…….”

노엘이 손바닥 위로 끈적한 체액을 투욱 뱉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 벌이라는 걸 내리려는 걸까. 쾌락의 여운도 잠시, 곧이어 날아 들어올 고통을 생각하니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그런데 노엘은 예상과 다르게 손찌검하지 않았다. 그저, 척추 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속삭일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았어?”

“네, 네?”

뭐가 좋았냐니? 머리를 굴렸다. 지금 행위에 대해 얘기하라는 걸까. 아니면, 아니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멍청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노엘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엘은 말갛게 웃으며 내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얘기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길래 씨발 집 앞까지 실실 웃으면서 들어왔냐고.”

“읏...!”

“왜? 가게에서 발정이라도 났어? 누가 네 구멍에 박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 아뇨. 그런 게 아니, 윽!”

우악스러운 손이 거칠게 입을 벌리며 입안에 돌아다니던 얼음 네 개를 꺼내 들었다. 씨발. 얼음을 집어 든 노엘이 미간을 구기고는 작게 욕을 뱉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어디서든 웃으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고. 실실 웃으면서 들어왔다는 그 말이 한 글자 한 글자 비수가 되어 가슴에 쿡 처박혔다.

이미 개새끼라 불리는 게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체념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노엘이 축 늘어진 허벅다리를 활짝 벌리며 얼음으로 입구를 문질러댔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 얼음이 닿자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흐으. 아, 아파요. 하지 마세요….”

“이번엔 질질 흘리면 진짜 얻어맞을 줄 알아. 씨발, 개새끼가 어딜 돌아다녀. 너 학교마저 그만두고 싶어? 이번엔 어떤 역할을 해줄까? 대마 피우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한 동생을 걱정하는 형?”

“아, 안 돼. 하, 하지 마세요. 하지, 흐읏!”

노엘이 손가락 두 개를 입구에 갖다 대더니 검지와 엄지를 아래에 넣고 벌렸다 오므리길 반복했다. 간질거리는 묘한 감각에 허리를 떨기도 전에 입구 안으로 무언가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머금었던 얼음이다.

차가운 감각에 흠칫 몸을 떨며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다. 하지만 발목을 움켜쥔 노엘이 힘을 주는 탓에 이마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하, 하지, 하지 마세요. 차, 차가, 으읏!”

“잘 먹고 있어. 싸면 정말 혼나, 유진.”

“아흑!”

하나, 둘, 셋. 곧이어 얼음 세 개가 연이어 들어왔다. 뱃속에 찰그락거리는 차가운 것들이 돌아다니며 예민한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가만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개 더 넣어볼까?”

더는 안 돼. 제발, 제발.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내벽 안에서 차가운 것들이 알아서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건드렸다. 노엘은 내 사타구니를 붙잡으며 버킷에 들어있던 얼음 두어 개를 꺼내 입구 안으로 쑤욱 밀어 넣었다.

“아윽!”

“왜? 싫어? 아깐 잘 웃었으면서. 얼음 하나만 봐도 웃길래, 씨발 구멍에다가 얼음이라도 쑤신 줄 알았는데.”

잘그락, 잘그락. 노엘이 힘 있게 하반신을 들어 올리자, 얼음이 내벽에 부딪히며 미끄러졌다.

웃는 게 잘못이었구나. 내가 웃는 게 잘못한 거구나. 나 같은 건 웃으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그저 웃어서라고 했다. 내가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는 게. 가만히 고개 들어 벌게진 눈으로 노엘을 바라봤다.

“…겨우 그깟 음료수 하나에 쳐 웃을 줄이야.”

노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웃는 것조차 싫다면 왜 나를 이 집에 가둬놓으려고 하는 거지? 왜 자기 손바닥 안에 놓으려고 하고, 살 섞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동생인 나를 혐오하지만, 내가 없는 상황은 용납하지 못하는 이상하고도 무서운 사람.

“다른 생각 하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차, 차가워요. 이런 거 시, 싫, 어…….”

“거짓말. 이렇게 질질 흐르는데 뭐가 싫다는 거야? 이런 쪽이 취향이었나 봐, 유진.”

“흐읏….”

얼음이 녹아내리는 입구를 하얀 손가락이 꾸욱 눌러댔다. 그 반동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노엘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며 큭큭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런 쪽이 취향이라는 말이 어쩐지 수치스럽게 들렸다. 나체 상태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상태보다 더 창피했다. 고개를 저으며 묶인 손목에 힘을 주었다.

“왜 웃었어, 씨발 기껏해야 2달러겠지. 별거 안 되는 음료수에 왜 웃었냐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사 줘서,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그렇게 솔직하게 말한다면 노엘은 날 내보내 줄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었지만, 노엘의 표정을 보니 나뿐만 아니라 예거까지 얻어터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기로 다짐했다.

“그, 그냥 나, 나가서. 그래서 좋았, 자, 잘못, 했어요. 제발 그만….”

“뭘 그만.”

“아, 아윽!”

잘못했다고 빌었는데도 용서를 받을 수 없다. 노엘은 내 사타구니를 활짝 벌리고는 얼음을 빼지 않은 채 그대로 성기를 꽂아 넣었다. 차가운 것과 함께 커다란 살덩이가 안으로 푹 파고 들어오자 비명을 지르며 목을 뒤로 젖혔다.

“소리 지르라고 한 적 없어, 유진. 왜 웃었냐고.”

“죄, 죄송해요. 그냥 바깥에, 흣, 나가는 게, 좋, 아서. 흐윽….”

“……씨발, 학교 보냈더니 헛생각만 하고 있었네. 다리 더 벌려.”

“아윽…!”

노엘이 내 엉덩이를 찰싹 갈기면서 골반을 움켜잡았다. 거침없이 들어온 성기가 안을 맴돌던 얼음과 함께 맞물리자, 예민한 부분이 더더욱 건드려지며 허리를 떨 수밖에 없었다. 내벽에 닿는 감각에 허리를 들썩였다.

“이거 봐.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물이 흐르고 있잖아.”

“아으, 아, 아프, 흣….”

사타구니를 활짝 벌린 노엘이 허리를 거칠게 쳐대기 시작했다. 귀두까지 뺐다가 뿌리 끝까지 삽입하며 퍽퍽 쳐댈 때마다 얼음과 함께 복부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는 없었다. 어딜 보는 거냐고 머리채를 잡은 노엘이 억지로 시선을 마주치면서 퍽퍽 박아댔으니 안 보고 싶어도 시선을 고정해야만 했다.

“흐… 아, 아파요. 아, 프단…… 말, 흐읏…….”

“벌 받는 거야, 유진. 개새끼 좋으라고 하는 짓이 아니니까 한 번만 더 아프다고 하면 바깥에서 할 줄 알아.”

“흐, 읍….”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노엘이 한 번 더 엉덩이를 후려치며 허리를 쳐올렸다. 홧홧한 통증에 허리를 흔들며 아픈 신음만 턱턱 뱉어냈다. 찌걱찌걱, 끈적한 체액과 내벽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기 탓에 오늘따라 유난히 젖은 소리가 선명했다.

“아, 흐으….”

“유진, 네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말해.”

“그, 그마안. 아, 아프, 아악! 아, 아파!”

“말해, 당장.”

“하, 으윽! 아, 아파. 저, 저는, 흐읏…….”

“오늘 네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못 알아낼 줄 알고 묻는 줄 알아? 아냐, 네 입으로 씨발 직접 말할 기회를 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말해. 당장 말하라고.”

노엘은 내 다리를 활짝 벌리고는 퍽퍽 소리 내어 박아댔다. 평소보다 더 거칠게 박아 대는 움직임에 그를 받아내는 허리는 두려움과 고통으로 파르르 떨어댈 수밖에 없었다. 퍽, 퍽. 골이 울릴 정도로 살갗이 부딪쳤다. 아래에는 이미 감각 하나 없었다. 내벽 안에서 녹아든 얼음이 뚝뚝 입구를 따라 흘러내렸다.

“흐, 윽. 그, 그냥 다 잘못 했, 아흑!”

“똑바로 대답하라고 했지.”

“약속, 흐읏, 했던 거 어, 어기고. 아흑…. 멋대로 돌아다녔, 읏…….”

“알면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뒷구멍 박히고 싶어서 그랬어?”

“흐, 으으…….”

“걱정 마, 안 그래도 네 아래가 허전해 보여서 채워준 거니까. 이 개새끼는 여길 채워줘야 도망가지 않지.”

“아흑!”

얼음이 녹아내려서 그런지, 이전보다 덜그럭거리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노엘이 내 다리를 부여잡고 밑도 끝도 없이 퍽퍽 박아 대는 탓에 통증은 흐려지기는커녕 선명해졌다. 쾌락 같은 걸 느낄 여유 같은 건 없다. 괴롭게 숨을 뱉으며 노엘의 성기가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큭, 개새끼가. 네가 뭔데, 네가 왜 씨발…….”

노엘이 내 손목을 움켜쥐며 성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위에서 아래로 짓눌리는 압박감에 괴롭게 호흡을 뱉어냈다. 퍽퍽 쳐대는 움직임에 맞춰 힘겹게 헐떡였다. 뿌리까지 들어온 성기가 얼음의 빈자리를 대신하듯이 내벽 여기저기 쑤셔대며 박아 올렸다.

“그만, 그, 마안. 잘못 했, 어요. 제발…… 흐!”

이쯤 되니 내가 느끼는 것이 쾌락인지 고통인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다. 찌르르한 자극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서서히 온몸이 침식되었다. 노엘이 움직이는 대로 허리를 들썩이며 아래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내벽 안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차가운 물과 함께 뚝뚝 떨어졌다. 노엘이 사정한 것이다. 입구에서 사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노엘은 성기를 빼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그 후 몇 번이나 사정을 했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식탁에서 벗어나도, 손목을 묶은 매듭이 풀려 바닥에서 굴러도 노엘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도.

* * *

눈을 뜨자마자 손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노엘과 살을 섞고 정신을 잃을 때마다 항상 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오늘도 그런 줄 알고 익숙하게 테이블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익숙하게 손에 닿아야 할 테이블이 잡히지 않았다. 휑한 감각에 이게 뭔가 싶어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이곳은 내 방이 아닌 노엘의 침실이었다.

“흐으……!”

“씻겨줬으니까 그냥 자.”

화들짝 놀라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다 깬 노엘이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히며 내 뒷덜미를 끌어당겨 침대 위로 눕혔다. 출렁이는 매트리스의 감촉마저 생경할 지경이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아니, 문장이 잘못되었다. 노엘이 왜 나를 여기에 데려온 거지? 어찌나 놀랐는지 잠이 다 달아났다. 등 위로 스며드는 온기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불편했다. 아니, 두려웠다. 습관처럼 맞을 걸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좀 자라고. 귀찮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네.”

노엘이 낮게 웅얼거리며 내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쓱 쓸어내렸다. 더 꼼지락거렸다간 손바닥이 날아올 것 같아 눈치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 학교 갈 거라서요.”

“못 가, 벌써 3시 넘었어.”

“네? 아, 안 되는데…….”

“뭐가 안 되는데. 내가 나가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까 입 닫고 잠이나 자.”

“저…….”

“씨발 또 뭐.”

노엘이 나를 밀어내고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만 더 토 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내 입은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목 마른데…….”

“내려갔다가 바로 올라와.”

“……네.”

다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릴까 두려운 나머지, 후다닥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만큼 급하게 계단 아래를 내려갔다. 목마르다는 건 핑계다. 나를 침대 위에 올려진 쿠션처럼 대하는 노엘이 불편해서였을 뿐이다.

“후…….”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예거의 존재를 노엘에게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엘이 설마 새로 사귄 친구에게도 해코지할까 싶었으나 만일을 대비해서다. 노엘은 ‘보통’ 형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사람이니까.

“어떡하지…….”

벽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잤던 걸까. 과제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컴컴했다. 한숨 푹 내뱉으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냉장고 문손잡이를 움켜쥔 순간, 어제의 기억이 울컥 튀어 올랐다.

“하아….”

당분간 냉장고 열 때마다 어제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수치스러웠다. 잊자, 잊어. 억지로 고개를 저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뭐, 뭐야…… 이거?”

냉장고 안에는 다른 내용물 하나 없이 오로지 탄산음료 캔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콜라로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고 일어났더니 냉장고가 콜라 보관고로 되어 있을 줄이야. 경악하며 냉장고 내부를 살펴봤다. 야채칸이며, 과일 칸이며, 심지어 냉동실까지 전부 다 콜라 캔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나는 냉장고에 있는 콜라 캔 하나를 꺼내 들고 노엘이 있는 위층을 바라봤다. 마시면 개새끼가 잘도 마신다고 뭐라 할 게 뻔했지만, 안 마시면 어떤 식으로 숨통을 조일지 가늠되지 않았다.

“하…….”

맞더라도 덜 아픈 쪽을 택하는 게 나았다. 딸깍, 캔 따개를 따고 입에 가까이 갖다 대며 계단 위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노엘은 없었다.

“흐읍, 또라이 새끼….”

노엘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웅얼거렸다. 지금 아니면 언제 욕을 하겠나 싶었다. 한숨 푹 쉬며 콜라를 콸콸 들이켰다. 따가운 탄산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이곳 생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서서히 적응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다 마신 콜라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왠지 구겨진 캔이 꼭 내 모습처럼 보여 처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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