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4)

02.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항상 먼저 떠나버렸다. 혹은 떠나보냈던가.

「Noel Arvard Westin」

이불 속에 웅크려 핸드폰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렇게 넓은 저택에 산다면 평범한 직장인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역시 예상대로 어렵지 않게 노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아....”

실수로 이미지 탭을 누르자, 환하게 웃는 노엘의 사진이 페이지 가득 나타났다. 사진인데도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글만 있는 페이지를 살펴봤다.

“노엘 웨스틴…….”

눈알 굴려 열심히 화면을 들여다봤다. 말이 통한다고 해서 빽빽한 원문을 전부 해석하긴 어려웠지만, 이 집안에 대한 사소한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하나, 웨스틴이라는 집안은 선대 덕을 톡톡히 본 사람들이다. 선견지명이 있던 조상들이 사놨던 땅으로 막대한 재산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업 분야는 여러 가지였으나, 주력하는 분야는 부동산과 제약산업.

“돈이 돈을 부르는구나.”

둘, 웨스틴의 구성원은 집안을 이끄는 로널드 웨스틴과 아들 두 명이었다. 알베르트와 노엘. 특이하게 이 집안의 주인은 이름이 아닌, ‘웨스틴’이라는 성으로 불렸다. 웨스틴이라는 이름에 자부심 있다는 게 톡톡히 느껴지는 구절이었다.

그리고 셋, 차남 노엘 아르바드 웨스틴. 미국 기준으로 29살에 아티스트 에이전시와 전시관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다. 신문이나 SNS에 떠도는 글을 대강 훑어보니, 매너가 좋은 신사라는 평이 대다수였고 갱 쪽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루머성 짙은 글이 몇 개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엄마는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으며 나는 왜 이런 곳에 오게 된 건지. 그리고 무얼 잘못했길래 개새끼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흐…….”

깨질 듯한 두통에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이내 깨달았다. 남 탓하지 말고 내 탓을 하자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도망치려 했던 내 탓이고 술에 취해 실수로 남의 방에 들어간 내 탓이다.

이불을 꽈악 끌어당겨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 무거운 솜덩이가 내 몸을 삼켜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지잉―!

그때, 옆에 놓았던 핸드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누구지? 연락 올 사람이 딱히 없는데. 손만 뻗어 화면을 켰다. 깜빡, 깜빡.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팝업창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불안에 떨지 않고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던 건 익숙한 한국어라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노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내 몸에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야 김유진 ㅡㅡ」

「너 어디 갔냐? 핸드폰은 왜 꺼져 있는 건데?」

「어라?」

「폰 꺼져 있는데 톡은 읽네? 이거 뭐냐?」

“예, 예준아….”

때마침 도착한 메시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내 친구 예준이었다. 별거 아닌 사소한 대화가 위로의 손길을 내민 것만 같다. 늘상 봤던 익숙함이 이렇게 소중할 때가 있을까. 나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아버렸다.

「나 뉴욕이야...급하게 와서 유심칩만 바꿨어」

눈물 북북 닦으며 겨우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예준이에게 답장이 왔다.

「뉴욕? 구라 즐」

「여행 감?」

「진짜 못 믿겠는데; 김유진 영통 하자」

「요금 내가 낼 테니까 돈 아깝다는 핑계 ㄴㄴ」

지금 뉴욕에 있다고 하니 연달아 보낸 메시지에 살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처음으로 웃은 것 같았다. 큼큼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이 들리지 않았다. 전화 걸리고 있는 걸까. 초조하게 손톱 거스름만 툭툭 뜯어냈다.

―어, 김유진. 뭐냐? 진짜 뉴욕이야? 언제 갔어? 왜 나한텐 말 안 하고?

초조한 기분은 잠깐이었다. 반가운 목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자, 거짓말처럼 걱정스러운 염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게…….”

―야, 너 목소리 왜 그래? 울었어?

“…안 울어, 내가 바보도 아니고. 방금 자다 일어났어. 근데 한국은 지금 새벽 아니야?”

―아직 안 자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자다 깬 목소리가 아닌 것 같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뉴욕은 갑자기 왜 갔고?

“…….”

―김유진, 나 너한테 궁금한 거 존나 많아. 그러니까 대답 좀 해라. 너 같으면 걱정 안 하겠냐.

틱틱거리면서도 걱정이 묻어나는 소리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한테 아버지와 형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한테 몹쓸 짓을 당했다는 말을 꺼내기엔 두려움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저으며 숨을 뱉었다.

“사실…아버지가 계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알려주셨는데 이것저것 집안 사정 때문에…….”

―아니, 미친. 그럼 너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존나 잠수타고 이제야 나타난 거라고? 쓰레기 아냐? 미국으론 왜 튀었대?! 거기 씨발 꿀이라도 처발라놨대?

“꿀은 모르겠고 미국인이라서….”

―엥? 그럼 아버지가 외국인이라고?

예준이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이목구비에선 이국적인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아, 그래서 너 눈이 그렇게 생겼나.

“어?”

하지만, 예준이는 예상과 다른 대답을 남겨주었다.

―야, 이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 처음 봤을 때 눈이 참 예, 아오, 씨발 존나 오글거리네.

“왜 욕하고 그래....”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장난 빠냐, 김유진? 너 왜 이런 문제 나한테 말도 안 했어?

“미안.”

―나쁜 새끼.

예준이가 섭섭하다는 투로 지나가듯 얘기했다. 지금도 이렇게 걱정하는데 내 상황을 털어놓는다면 힘들어하겠지. 나 때문에 예준이까지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노엘에게 얻어터져 찢어진 입꼬리가 계속해서 신경에 거슬렸다.

‘벌써 설레잖아, 널 어떻게 망가뜨릴지 상상하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늘하게 말하던 노엘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여기서 더 얼마나 망가뜨린다는 걸까. 어제를 생각하니 축 늘어진 두 다리가 덜덜거렸다.

―야, 김유진? 내 말 안 들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노엘의 이름만 떠올리면 금세 온몸이 딱딱히 굳은 것 같은 공포감에 물든다. 이제 겨우 며칠 알게 된 형일 뿐인데.

―그래서 언제 한국 올 건데? 응?

“어, 그게....”

―평생 거기 살 거 아니잖아. 급하게 갔으면 관광비자로 갔겠네, 그치? 그럼 오래 걸려도 한 달인가?

이렇게는 살 수 없다. 당장 돌아가야 했다. 이런 호화스러운 집에 사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만, 원한 적도 없을뿐더러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집에 계속 있게 된다면 정말 나는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

“예준아, 곧 다시 돌…….”

“유진.”

그때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소리가 아닌, 살짝 열린 문을 밀어내는 소리다. 경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문 앞에는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노엘이 서 있었다. 바르르 떨며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노엘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바닥에 뒹굴던 핸드폰을 주워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뭐 해, 계속 안 하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어떻게 할지 몰라, 바르르 떨며 바닥에 널브러진 핸드폰을 바라봤다. 하지만, 핸드폰이 시야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미친 듯이 펄떡대는 심장 박동 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여보세요? 야, 김유진. 내 말 들려? 여보세요?

노엘은 예준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한 번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욕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거슬린다는 눈을 하고 있다. 파르르 떠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 탓에 잠깐이나마 손이 닿았지만, 무서운 나머지 얼른 뒷걸음치며 물러섰다.

―근데 아까 뭐라고 했어?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으, 응. 나 한국으로 다시 돌, 아갈…… 흐읏!”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잠자코 지켜보던 노엘이 내 어깨를 움켜쥐고 매트리스 위에 던지듯 밀어내었다. 어찌나 세게 밀쳤는지 출렁이는 매트리스에 골이 울릴 지경이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쥐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노엘이 거친 손길로 귓가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목덜미 위로 입술을 파묻었다.

“흐, 자, 잠깐… 이러지…….”

“네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 넌 어떻게 대답했는지 빠짐없이 얘기해.”

“윽!”

소리를 참으려 입술을 깨물자, 노엘이 힘주어 핸드폰을 더욱 밀착시켰다. 가져다 댄 게 아니라, 귓바퀴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핸드폰을 들이밀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려냈다. 입술 꽉 깨물며 대답을 회피하자, 노엘은 목덜미부터 쇄골까지 잘근거리며 살갗을 주욱 빨아들였다. 간질거리면서도 따가운 통증에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뒤로 내뺐다.

―여보세요? 야, 김유진. 잘 안 들리니까 똑바로 말해.

예준이의 목소리에 더더욱 입술을 깨물었다. 소중한 친구 앞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노엘이 내 턱을 억세게 붙잡고 입을 맞췄다. 입을 벌리지 않겠다고 깨물고 버텨봤자 소용없다. 곧바로 노엘의 손이 내 뒷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꺾어버린 탓에 입을 벌려야만 했다.

“흐읍...!”

―야, 김유진. 너 어디 아파?

입이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노엘이 거칠게 파고 들어왔다. 완강한 힘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노엘은 집요했다. 내가 곤란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츄읍, 겹쳐진 입술이 교차할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여 예준이에게 알려질까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윽!”

“말할 때까지 계속할 거야.”

노엘이 턱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움켜쥐고는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미끈하게 젖은 혓줄기가 다시 안으로 들어와 내 혀와 얽히고설키며 욕망을 채워나갔다.

숨 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한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 다가오는 게 노엘이었으니까. 툭, 입천장을 건드리는 혀에 움찔하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키스가 진득하게 이어질수록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벅찰 지경이었다.

―야, 김유진! 내 말 안 들려?! 옆에 누구 있냐?!

언성을 높이는 예준이의 목소리에 노엘을 밀어냈지만, 곧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 홧홧한 입술 사이로 체액에 젖은 살덩이가 드나들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입안을 빨아들이는 노엘을 감당하기 벅찼다. 키스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내가 하는 행위는 키스가 아니라 강압적인 행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항복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틀어내고 핸드폰을 꾹 움켜쥐었다. 노엘의 말에 복종하겠다는 뜻이다. 노엘은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자, 잠깐만 예준아…….”

―야, 너 또 목소리 왜 그래? 울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 윽!”

예준이와 조금 더 얘기하려 했지만, 내 손목을 움켜쥔 노엘 탓에 더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노엘이 힘 있게 끌어당겨 그와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달리 유난히 차갑게 가라앉은 것만 같다.

“네 친구가 뭐라고 했지?”

“왜, 왜 뉴욕에 있냐고 그랬어요. 그래서 아버지 만나러 왔다고…….”

“그리고 넌.”

“네?”

“넌 뭐라고 대답했는데.”

“저, 저는…….”

“유진.”

“한국에 다시 돌아가겠, 아윽…!”

짜악! 짝!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노엘의 손바닥이 날아 들어왔다. 오른뺨을 맞았는지, 왼뺨을 맞았는지 가늠되지 않을 만큼 얼얼한 세기다. 멍청하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감각이 무뎌진 뺨을 움켜쥐었다.

“뭐라고 했어, 이 개새끼야. 다시 말해.”

“그, 그치만….”

“다시 말하라고 했지.”

“돌아가겠다고 했, 윽!”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얼얼한 통증이 찾아왔다. 노엘이 또 한 번 내게 손찌검을 했다.

“다시.”

“하, 한국으로 돌…….”

짝! 짜악! 한 대, 두 대, 세 대. 세 대쯤 넘어가니 내가 몇 대를 맞은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저 감각 없을 만큼 얻어맞았다. 나를 혐오스러워하는 노엘이, 대체 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처럼 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벌벌 떨며 노엘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노엘이 내 머리를 움켜쥐며 시선을 마주쳤다. 노엘은 화가 난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니, 지금 상황에선 내게 이해라는 건 필요하지 않다. 단지, 노엘의 목소리에 따라야만 할 뿐이지.

“내가 언제 널 놓아준다고 했어?”

“아, 아뇨…그런 적 어, 없, 없어요….”

“어딜 가. 내가 느낀 좆같음을 너도 똑같이 느끼고 가야지. 안 그래? 더 맞기 싫으면, 네 친구한테 네가 있어야 할 장소를 말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노엘의 눈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두려운 나머지 두 눈 질끈 감았다. 그러자 노엘이 내 어깨를 콱 그러쥐며 힘을 주었다.

“어서, 유진.”

“흣…….”

“살려달라는 개수작 부리면 네 친구 앞에서 뒷구멍 박히는 소리를 들려줄 거야.”

꾸욱, 귓바퀴를 짓누르듯이 노엘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수화기 너머에는 내 목소리를 기다리는 예준이가 있다. 예준이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붙잡았다.

“다,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해, 예준아. 더 이상 이겨낼 자신이 없어. 말을 뱉자마자 질끈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툭 흘러내렸다.

―뭐?! 야, 아깐 다시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야, 그리고 기계가 이상한 거냐? 아까부터 쾅쾅 소리 나는데.

“잘, 잘못, 잘못 들은 거야.”

―너 목소리 왜 그래? 야, 김유진. 야, 잠깐만. 얘기 좀 더 해. 김유진.

“……다시 전화할게. 피곤해.”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종료됐다는 글귀와 함께 화면이 나갔다. 사소한 순간마저도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구나. 그런 생각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대체 어디까지 날 밀어 넣을 셈인가.

노엘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푹 숙여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때, 노엘이 내 손에 쥐던 핸드폰을 앗아가더니 그대로 던져버렸다.

콰앙!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며 주저앉았다.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딜 도망가려고, 유진.”

저벅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노엘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부터 내려와 뺨, 턱, 목선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저절로 온몸이 떨려왔다. 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떻게 내 숨통을 조일지가 상상되었으니까.

“이제 우리 할 일 해야지. 입 벌려.”

“……흐윽.”

“입 벌려, 유진.”

내겐 선택권이 없다. 어떤 짓을 해도 지독한 늪으로 빠지는 결과는 똑같았다. 별수 없이 덜덜 떠는 입을 겨우 열었다. 그러자 하얀 손가락이 입안에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혓바닥 위를 맴도는 매끄러운 감촉에 입안에 들어온 이것이 사탕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씹어 삼켜.”

“우윽…!”

턱 밑을 받치고 있던 엄지에 힘이 들어갔다. 거부권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노엘의 말에 복종하듯 입을 꾹 다물고 안으로 들어온 사탕을 씹어야만 했다.

사탕이라 여기기엔 조금 물렀다. 껌인가 싶었지만, 깨물자마자 터져 나온 액체가 거슬렸다. 무슨 이유로 이걸 먹인 걸까.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노엘을 올려다봤다.

“왜.”

정확히 말하자면, 새파란 눈동자가 아닌 입술만 쳐다봤다. 시선을 마주치기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당당히 고개 들어 시선을 응시한다면 감히 내 눈을 마주 보고 말하는 거냐며 뺨을 후려칠 것 같았으니까.

“왜 그렇게 쳐다봐. 할 말 있으면 해.”

“혀, 형. 저 지금 나, 나가봐야 하는, 윽…!”

짜악! 뺨이 돌아갔다. 제대로 맞았는지 사탕 특유의 달달한 향과 함께 비릿한 피 내음이 맴돌았다. 개새끼라 불러주는 노엘을 보니, 또 지난번처럼 몹쓸 짓을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밀려 들어왔다.

너무 무서웠다. 어찌나 두려운지 영어가 나오지 않고 ‘형’이라는 호칭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도 또 손찌검을 당하고 말았다.

“알아듣게 얘기해. 방금 뭐라 했어.”

“그, 그쪽 불렀어요. 자, 잠깐 나갔다 온, 죄, 죄송…해요. 너무 무, 무서워서….”

“노엘. 내 이름 놔두고 왜 다른 호칭으로 불러.”

“…노, 노엘.”

“내가 못 알아듣는 말 쓰지 마, 방금 네 친구와 통화 했을 때처럼.”

“그, 그럴게요.”

“어딜 나간다는 헛소리할 거면 입 쳐 다물어. 갈 곳도 없는 새끼가 어딜 쳐 기어나간다고.”

파르르 떨리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거렸다. 노엘은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웃으며 뺨을 쓸어 만져 주었다. 홧홧한 열이 오른쪽 뺨 위로 차가운 손이 닿자, 등골 위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끔찍하지도 역겹지도 않다. 그저 두려움만이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나머지 사탕 조각까지 꿀꺽 삼켜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흣….”

발끝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척추뼈 하나하나 타고 올라오는 찌르르한 감각에 온몸이 바르르 떨려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이상했다. 기분이 이상하다는 말로만 표현이 되지 않았다.

달뜬 숨을 삼키려고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이것마저 속을 간질거리는 자극을 주었다. 내가 왜 이러지? 끙끙 앓는 소리가 입술 틈 사이로 새어 나갔다. 노엘이 먹인 사탕 때문이라는 걸,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진, 왜 이래? 끙끙거리는 게 꼭 발정 난 것 같잖아.”

“흐으….”

“아아, 맞다. 내 동생이 개새끼라는 걸 잊어버렸지.”

엎어진 내 등을 발로 쓸어내리는 노엘은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노엘이 픽 웃으며 등 선을, 허리를 구둣발로 쓸어내렸다. 느릿하면서 부드러운 움직임에 발끝이 오므려졌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조금이라도 건드려지면 미칠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노엘의 시선을 회피했다. 노엘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사탕을 먹인 거라면 더더욱 보여주고 싶지 않다.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웅크려 얼굴을 감췄다.

하지만 저항은 거기까지였다. 노엘은 큭큭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어깨를 움켜잡아 억지로 돌려세우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찢어버릴 기세로 벗겨 내었다. 안 된다고 소리 낼 수 없었다. 지금은 입만 열어도 신음을 터트릴 것 같은 열기에 휩싸였으니.

노엘은 벗긴 티셔츠로 내 손목을 묶어,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주었다. 작은 접촉 하나에도 미칠 것 같은 쾌락이 일어났다.

쾌락. 지금 내가 느껴서는 안 될 감각이 온몸에 전율처럼 퍼져 나갔다. 내 몸을 지배하는 이 열기를 참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발끝을 오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엘의 기다란 손가락이 쇄골을 타고 가슴선을 따라 쓸어내렸다.

“내 동생이 발정 난 개새끼라니.”

“읏!”

“분명 아버지한테선 곧 도착할 내 동생이 멀리서 온 불쌍한 아이라는 말 밖에 못 들었는데.”

“흐으…하, 하지, 으읏…!”

“다른 사람이 관람해도 좋다면 계속 소리 내는 게 좋을 거야.”

거부할 권리도 말할 권리도 앗아가겠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내 꼴을 본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비서에게 매너 좋은 형처럼 대했던 노엘이기에 이 집안사람 모두 내가 아닌 노엘의 편을 들 것이다. 누가 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노엘을 밀어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입술만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만하라는 의미를 담았지만, 노엘은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가슴도 예민하고.”

“으읏!”

“여기도 예민하네. 만져주니까 너무 좋아하잖아.”

노엘이 내 유두를 잡아 비틀곤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지분거렸다. 하지 말라고 밀어내기도 전에 노엘의 말캉한 입술이 부푼 유두를 입에 머금고 혀를 굴리며 주욱 빨아들였다. 허리선을 따라 손을 내리며 입고 있던 바지며 드로즈까지 망설임 없이 벗겨내었다.

“으으응…….”

“조용히 하라니까 말 정말 안 듣네.”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마저 자극이 되었다. 노엘이 내 성기를 움켜쥐고 귀두 끝을 엄지로 뭉근하게 쓸어 올리며 품 안으로 바짝 밀착시켰다. 꼼짝달싹 못 하는 자세라 허리만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게도 이런 상황에서 점점 더 쾌락이 느껴졌다.

“아, 흐… 자, 잠시, 잠, 잠깐…….”

“사람이라서 개새끼가 끙끙거리는 말은 못 알아듣겠는데, 유진.”

지난번 악몽이 떠올라 다급하게 불러봤지만, 노엘은 빙그레 웃으며 내 것을 움켜쥐고 위아래로 흔들 뿐이다. 노엘이 먹인 사탕 때문인지 온몸이 바싹바싹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은 지난번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손이 기둥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위아래로 흔들어대니 미칠 것 같았다.

울고 싶다. 몸이 불덩이같이 새빨갛게 달궈지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충동에 이르렀다. 지금의 나는, 노엘 앞에선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했다. 이미 노엘이 움켜쥔 내 성기에선 끈적한 액이 울컥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 아, 으읏…! 하, 하지…… 제, 제발…… 흐, 아윽!”

“사람 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 집 사람들한테 발정 난 개새끼라고 알려지고 싶은 거야?”

“아, 아니, 나, 흐읏, 이상, 으응….”

“유감스럽지만, 그건 내가 싫은데.”

쾌락 섞인 목소리로 애원해봐도 노엘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듯했다. 뭐가 싫은 건지. 나를 역겨워하고 경멸하면서 왜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건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부드럽게 어루만져지는 감각에 온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만져지면 만져질수록 더 강렬한 쾌락을 원했다.

“아, 흐으… 제, 제발…….”

귀두 끝에서부터 음낭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교성 섞인 숨을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성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열락을, 두려움처럼 걷어낼 수 없다. 노엘의 가슴팍에 기대어 허릴 들썩였다.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직접적인 자극이 지속 되자 머릿속은, 시야 앞은 까맣게 뒤덮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노엘이 아니라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갈 무렵 사정하고 말았다. 또 한 번 노엘의 손에서 사정했다.

“싫다면서 할 건 다 하잖아.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만하라면서 제일 잘 느끼잖아. 이거 봐.”

“우윽!”

찌르르 울리는 쾌락의 여운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노엘이 사정액이 묻은 손가락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비릿한 액이 혀끝에 닿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컥컥 마른기침을 뱉던 찰나, 노엘이 내 몸뚱어리를 번쩍 들어 침대 위에 엎드리게 하고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게 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질 않아 힘없이 축 늘어진 채로 노엘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철썩!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노엘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내리쳤다.

“더 높이 쳐들어.”

“흐… 네, 그, 그럴, 게요. 아윽!”

짜악! 대답과 함께 또 한 번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아까 먹었던 사탕 때문인지 얼얼한 통증마저 화한 열기로 돌아왔다. 빌어먹게도 노엘이 더 내 것을 만져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미한 이성을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노엘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더더욱 무너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다.

어찌나 쾌락이 강한지 아랫배가 욱신거리는 게 아프기까지 했다. 뱃속이 간질거리던 쾌락이 통증으로 변했다.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묶인 손목을 꿈틀거리며 겨우 침대 시트를 붙잡았다. 손에 들어오는 게 얼마 없어서 그런지 움켜쥐는 것조차 힘들다. 제발 여기서 그만해달라고 노엘에게 빌 생각이었다.

“으으.”

놓아달라고,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고개 돌려 노엘을 쳐다봤다. 그러자 노엘은 내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는 침대 시트 위에 푹 처박았다. 코와 입이 매트리스 위로 파묻혀지니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발버둥 치기 바빴다.

노엘은 놓아주지 않았다. 달칵, 벨트 푸는 소리와 함께 입구 안으로 흉포한 성기를 밀어 넣을 뿐이었다.

“어딜 가려고.”

“아악! 아, 으윽!! 흐, 아, 아파....으, 아윽!”

머리채와 골반이 억세게 붙잡힌 채 흔들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입구에 거대한 살덩이가 들어가자, 살갗이 찢겨 나갔다. 사탕이 안겨주었던 쾌락은 어느샌가 통증에 묻혀 미미하게 존재감만 드러낼 뿐이다.

“그, 그만, 아, 으… 제발 그, 그만… 아악!”

“뭘 그만해.”

노엘이 내 둔부를 움켜쥐고 위에서 아래로 박아 내렸다. 접합부에 끈적이는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물기 젖은 살이 부딪히자, 철썩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교성 섞인 신음이 젖은 소리와 함께 고조되어 갔다.

“아, 아파…… 아윽!”

거친 허리 움직임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퍽퍽 박아댔다. 골이 울려 어지러웠지만,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단 덜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노엘에게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흐, 제발….”

제발이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노엘은 나를 고통과 쾌락이 어디까지인지 알려주겠다는 사람처럼 강하게 몰아붙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노엘의 아래에서 울부짖으며 허릴 움직였다. 퍽, 퍽. 살 부딪히는 소리가 거세지면서 노엘이 나를 끌어안은 채 밀착했다. 끊임없이 아래에 찢어지는 쾌락이 이어졌다.

“내가 쉽게 놓아줄 거라 생각하지 마, 유진.”

“흐, 윽.”

“너만 생각하면 상당히 좆같으니까.”

“아읏!”

노엘은 내 허리를 붙들고는 고개 숙여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협박에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아직 쾌락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도 있지만 늘상 따라오는 두려움이 내 발목을 움켜잡은 것이다.

퍽퍽 박아대는 노엘의 허리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면서 매트리스가 요란하게 삐걱거렸다. 결국, 눈꼬리에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와 동시에 노엘은 내게서 페니스를 빼고 허벅지 위로 사정했다.

“…같아, 감히 저딴 개새끼 때문에…….”

침대 위에 엎어져 몽롱한 눈으로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전혀 듣지 못해 대꾸할 수 없었다.

분명 무슨 욕을 한 거라는 추측밖에 들지 않았다. 완전히 약 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몸을 움찔거리며 시트 위로 늘어지기만 했다. 점차 시야가 흐릿해졌다.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눈물이 두 눈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 눈으로 가만히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 저 그냥 나갈, 게요. 어디 가서 이 집안사람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을게요. 경찰에 신고도 안 할 테니까요….”

“뭐?”

“저 좀 놓아주시면 안, 으윽!”

그때, 노엘이 내 입을 우악스럽게 벌리고는 사탕 여러 개를 쑤셔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막아내지 못하고 컥컥거리며 발버둥 치기만 했다. 씨발 지금 뭐라고 했어. 그런 말이 귓가를 스칠 때, 우욱 헛구역질을 하고 머금었던 사탕을 전부 흘려보냈다.

나간다고 했을 뿐인데, 말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인데. 노엘은 아까 전보다 훨씬 더 화를 내며 거칠게 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배다른 형제가 살을 섞고, 나를 혐오하는 사람이 어딜 가지 못하게 막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다시 날아오는 노엘의 손찌검을 받아내면서 정신을 잃었다.

* * *

“유진, 일어나요. 당장!”

“으…….”

얼마나 잠들었는지 가늠하기도 전에 부스스 눈을 떴다. 분명 나체 상태로 정신을 잃었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땐 옷이 입혀져 있었다. 노엘이 입혔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입술이 깨물렸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욱신거리는 하체 탓에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잔뜩 화난 비서가 내 앞에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이거, 유진이 갖고 있던 거 맞아요?!”

“무슨…….”

“똑바로 대답해요!”

비서의 손엔 투명한 병이 들려 있다. 또르르 굴러다니는 사탕을 보니, 방금 기억이 떠올라 어깨를 흠칫거렸다. 노엘이 내게 욱여넣었던 사탕이다.

이게 왜? 뭔가 이상한 사탕임을 알았지만, 비서가 화낼 정도인가 싶다. 바싹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비서를 바라봤다. 비서는 크게 한숨을 쉬며 내 눈을 쳐다봤다.

“먹었습니까, 이거?”

“그게…….”

“어떻게 약을 할 생각을 해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네?! 그, 그게 무슨…….”

“이거 어디서 났어요. 당장 말해요, 어서!”

“저, 그, 그게, 저, 아, 아니에요. 아니…….”

비서가 내 어깨를 붙잡고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댔다. 골이 울렸다. 해명할 시간 같은 것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라 말을 해야겠는데. 내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 노엘이라 말해야 하는데. 입을 벙긋거리며 아니라고 했지만, 비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식사하라고 유진을 부르려고 했어요. 문을 여니까 이 병이 저를 반겨주더군요.”

“그건…….”

“바닥에도 몇 알 굴러다니고 있어요. 얼마 전, 뉴스에서 검거됐다던 마약사범이 제조한 거랑 똑같은 약이!”

약? 약이라고? 이게 그 약이라고? 정신을 잃기 전 내가 느꼈던 감각이 다시 한번 생생히 떠올랐다. 그 사탕이 선사했던 끝없는 쾌락이.

더듬거리며 애써 변명하려고 했다. 이곳에서 약물에 대한 일은 꽤나 심각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노엘이 말한 게 이런 건가. 바르르 떨며 비서를 붙잡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두 눈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비서는 냉랭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유진, 이 집에 들어온 게 우스워요? 어떻게 이런……. 웨스틴 씨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런 줄 아세요.”

“자, 잠깐만요. 저는…!”

다급히 비서의 옷깃을 붙잡아봤지만, 이미 늦었다. 잔뜩 성이 났다는 듯이 저벅저벅 빠르게 걸어가고 있다. 잡아야 해, 잡아야 한다고. 어항에서 떨어진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비서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빙그레 웃는 노엘이 비서 앞을 막아 세웠다.

“집안이 너무 소란스럽잖아요. 이래서 내가 쉴 수 있겠어요? 무슨 일인데요. 필립이 이렇게까지 화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것 좀 보세요. 유진이 갖고 있던 겁니다.”

“제,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용기 내어 변명해 봐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비서는 크게 한숨을 쉬며 노엘 앞으로 투명한 병을 내밀었다. 뻔뻔스러운 건지, 아니면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노엘은 눈을 끔뻑이며 비서가 내민 병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제법 오랫동안 들여다보던 노엘은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또 누가 알아요?”

“아직은 저 혼자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나왔던 마약사범이 제조한 약과 동일해요. 이 약을 유진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웨스틴 씨뿐만 아니라, 일가 모두가…….”

“흐음, 이거 가짜인 것 같은데요?”

“…네?”

노엘이 방긋 웃으며 병에서 사탕을 꺼내 살짝 향을 맡더니 비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거 말하는 거 맞죠? 농축된 헤로인으로 만든 초콜릿과 사탕을 팔아 유통한 사건.”

“네, 그건 그런데…….”

“식초 냄새가 안 나잖아요. 헤로인을 가공하면 나는 그 특유의 냄새.”

“아…….”

“그리고 유진한텐 섭취 증상도 없고. 집 밖에 나가지 않았던 애가 어디서 구했겠어요. 그것도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사람인데. 너무 앞서 나간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유진한테 말해야죠. 겁주면 더 적응 못 해요, 필립.”

노엘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 말을 듣던 비서는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이다, 내 쪽을 힐끔 바라봤다.

“미안해요, 유진.”

“……아니에요.”

여전히 의심의 눈길은 거두지 않았지만, 싸늘한 냉기가 도는 건 여전했다. 누명이 벗겨져도 노엘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런 취급을 받게 한 게 노엘이고 자상한 형의 가면을 쓴 것 역시 노엘이니까.

“어쨌든, 이런 걸 가지고 있던 유진 역시 잘못이니까. 일단 아버지껜 말씀드리지 마세요. 진짜가 아니라서 여기까지만 하죠.”

“네, 알겠습니다. 식사하러 내려오세요. 웨스틴 씨는 급한 일정이 생겨서 방금 출발하셨고요. 알베르트 씨 역시 업무로 바쁘시고요.”

“새로운 가족이 온 기념으로 밥을 먹을까 했는데. 아쉽네요.”

방긋 입꼬리를 올리는 노엘의 모습은 가증스럽기는커녕 두렵게 다가왔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왜 나를 손에 쥐고 흔들려는 걸까. 그런 물음에 빠질수록 현기증만 일어났다.

노엘을 멍하니 바라보다 비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도움의 손길을 뻗으려고 비서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필립.”

“네?”

“방금 생각난 건데.”

내가 아닌, 노엘의 목소리가 먼저 비서를 불렀다. 노엘은 내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비서에게 시선을 던졌다.

“유진이 다닐 학교, 알아봤어요?”

“아, 안 그래도 식사 자리에서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쪽에 오픈 어드미션으로 입학 가능한 학교가 있습니다. 꽤 작은 지역 같더군요.”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노엘이 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비서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뭐가 잘 됐다는 거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불안한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 역시 비서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노엘이 너무나 익숙히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근한 미소를 보냈다. 꼭 동생을 걱정하는 형처럼.

“안 그래도 캘리포니아 쪽에서 한동안 쉴 생각이었는데. 유진과 함께 가면 되겠네요. 사실, 서부 쪽으로 알아보라고 한 건 이것 때문이었거든요.”

매끄러운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내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 끔찍한 말이 현실이라는 것처럼. 말도 안 돼, 싫어.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절대 아냐. 부정하듯 설레설레 고개 저어봤지만, 또렷한 감각은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노엘이 유진과…… 함께요?”

“사실, 기숙사 보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지금 보니까 안 되겠어요. 낯선 땅에 혼자 와서 그런가. 영 적응하지 못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이제 가족 될 사람이니까 정 붙이고 싶어서요.”

“유진은 어때요?”

비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싫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비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때, 노엘의 다른 손이 내 허리선을 타고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흠칫 어깨를 떨었다. 비서는 내게 시선을 보낸 탓에 노엘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괘,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유진의 비자부터 해결해야겠네요. 유진, 갖고 있는 포트폴리오 파일이 있으면 제게 넘겨주시고요.”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앞으로 잘 부탁해, 유진.”

승낙 혹은 복종. 내 대답을 들은 노엘은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형 행세를 하며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두렵게 다가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내 뺨을 후려치던 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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