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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희수가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집 안에서는 밥 짓는 냄새가 고소하게 났다. 이제 논문 작업도 끝나고, 아직 출근을 하기 전이라 시간이 넉넉한 편인 희수는 최근 집에서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해 보고 있었다.
밥이 아직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고 해서 거실의 간이 소파에서 희수와 노닥거렸다. 그러더니 문득 희수가 나한테 안마를 해 주겠다고 했다. 온종일 일하느라고 피곤해서 근육이 뭉쳐 있을 것 같다나.
등을 돌리고 희수에게 어깨를 내줬다. 곧 내 손에 비하면 한참 작은 희수의 가늘고 얇은 손이 내 어깨 근육을 조물거렸다. 사실 막 시원한 건 모르겠는데, 희수 손가락이 이리저리 살갗 위로 은근하게 오가니까 솔직히 좀 다른 쪽으로 흥분이 되기도 하고 나쁘지 않았다.
희수에게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기분이 좀 나른해졌다. 밥 거의 다 됐다고 했지. 근데 섹스하고 싶다. 그런데 희수 나름은 굉장히 열심히 안마하고 있는데, 지금 그만두라고 하면 삐지려나? 내리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저런 생각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아, 승규야.”
희수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희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깜찍한 생각을 하는 건지, 조금 머뭇거리는 얼굴로 희수가 주춤거렸다.
“너 진호 기억나?”
문득 희수가 내게 던진 질문은 사실 뜻밖이었다. 나는 희수와 내가 동시에 알고 있는 진호를 찾아 기억을 더듬거렸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에서 뿔테 안경을 쓰고 쾌활하게 다니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를락 말락 했다.
“성진호?”
“응, 맞아 걔.”
희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쫓기듯 자퇴를 하면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인맥은 억지로 끊어내다시피 했다. 어쩌면 그건 나 나름의 생존을 위한 도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잘은 모르지만, 희수도 그렇게 전학을 훌쩍 떠난 후 어지러운 소문이 퍼진 고등학교의 사정은 그대로 외면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희수가 먼저 그때 그 시절 친구 얘기를 꺼내다니 의외였다.
“내가 걔랑 아직도 연락하거든.”
“아, 정말?”
“응. 나름 제일 친해.”
좀 예상 밖의 얘기라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실 나랑은 그렇게 모르는 사이가 되어 놓고서는, 희수가 고등학교 때의 친구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는 데서 뭔가 떨떠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를 갉아먹는 생각들은 이제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번민을 털어냈다. 다만 희수가 갑자기 이 얘기를 왜 꺼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걔한테 너랑 만난다고 얘기를 했는데.”
“응.”
“같이 얼굴 한번 보고 싶나 봐.”
“…….”
“뭐, 나도 이제 출근하면 바빠서 걔 얼굴 볼 일도 줄어들 거고.”
사이를 밝히자마자 단박에 부정당하고 거부당했던 희수의 부모님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지금까지 희수와 나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공식적으로 밝혀본 적이 없었다. 딱히 희수랑 만나는 게 껄끄럽거나 부끄럽다기보다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상황이 마련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동안은 당장 코앞에 닥친 일 처리해내느라 바쁘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할 공통적인 지인이 희수와 나 사이에는 전혀 없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오고 있었다.
“너 안 불편하면 같이 술 한번 마실래?”
희수가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수야 뭐 진호와 가장 친한 친구라니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 왔겠지만, 나로서는 칠 년 전에 뚝 끊겨버린 연이었다. 그때 당시를 더듬어 봐도 가끔 좀 까분다 뿐이었지 비교적 선생님 말 잘 들으며 반듯하게 생활하던 진호와 나는 접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썩 내키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
“내 주위 사람들한테 너 애인이라고 보여주고, 음.”
“…….”
“사실 좀 자랑도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는 애기처럼 배시시 웃는데, 아, 나는 정말이지 평생을 가도 희수를 단 한 번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돌이켜 보니까 진호 녀석 얼굴 한번 보는 것도 썩 나쁜 생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그러자.”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대답을 받아낸 희수가 눈을 반짝였다.
“아.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너한테 얘기하기 전에 나 좀 긴장했어.”
희수는 뭔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희수가 너무 귀여워서 쓱 웃었다. 이제는 그냥 손을 조물거리는 것에 가까운 안마는 그만해도 될 것 같았다. 내 어깨 위에 얹힌 희수의 손등 위로 손바닥을 가볍게 얹어서 떼어냈다.
“배고프다, 밥 먹자.”
“그래.”
경쾌하게 대답한 희수가 팔랑팔랑 부엌으로 달려갔다.
***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어색했다. 아까운 주말은 솔직히 희수랑 둘이서만 보내고 싶은 생각이 커서, 약속을 평일로 잡았다. 내가 일을 하다 보니까 시간 맞추기가 어정쩡하기도 했고, 솔직히는 일부러 저녁을 거르고 아홉 시 즈음에 신촌의 룸소주방에서 진호를 만났다.
닫힌 미닫이문 안으로 그다지 넓지 않은 밀폐된 공간에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남겨졌다. 나와 희수가 나란히 앉은 채였고, 진호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나는 진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촌스러운 뿔테 안경 쓰고 멋 부리는 거라고는 전혀 모르는 어수룩한 애였는데, 깔끔한 무테안경을 쓰고 세련된 옷차림을 하는 걸 보니 진호도 지난 칠 년 동안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사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비단 진호의 겉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렇게 희수와 함께 진호를 보는 것 자체가, 열여덟 살의 우리를 되새기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학교를 자퇴하기 직전, 희수가 그렇게 전학을 가고 남겨진 나는 호모로 찍혀서 학교에서 온갖 소문을 버텨내야 했다. 당연하게도, 나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 그냥 모른 척 덮어두고 싶은 과거였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나마 고등학생 때 희수와 나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알고 있는 진호 앞에서 지금 이렇게 연인으로서 희수와 함께 있는 게 무척 어색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사교적인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적당히 분위기는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오늘만은 진호를 앞에 두고 뭐라고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희수는 눈을 댕그르르 뜨고 그런 진호와 나 사이를 번갈아서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 내게 먼저 용기를 내어 다가온 것은 진호였다.
“어, 진짜 오랜만이다 승규야.”
“그래, 반갑다.”
“그동안 잘 지냈냐?”
“뭐, 그냥 그럭저럭.”
나는 씩 웃어 보였다. 내가 막연하게 두려워했던 것과 다르게, 진호는 나와 희수를 두고 판단하거나 힐난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 눈치를 많이 보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나를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동창 정도의 온도로 대해 줘서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때마침 미닫이문이 열리고 주문한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소주 두 병과 희수가 먹고 싶다고 했던 과일 화채였다. 셋이서 같이 술잔을 부딪쳤다. 입가심이나마 알코올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긴장이 좀 느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뻣뻣하게 당겨져 있던 목이 느슨해졌다. 나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승규 너는 군대는 어디로 다녀왔냐?”
“나는 최전방에 있다 왔어.”
“아, 정말?”
“어, 좀 급하게 가느라고.”
“고생했겠다, 야.”
나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가 비워진 내 술잔을 눈치채고는 다시 채워줬다. 우리는 다시 한번 술잔을 맞댔다.
“너는?”
“아, 나는 의경이었어. 작년에 제대했다.”
“그렇구나.”
“너는 군대를 일찍 갔나 봐?”
“응. 스무 살 때 바로.”
내 말에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술자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회포를 푸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진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희수가 자연스럽게 조금 소외되었다. 혼자서 소주를 홀짝거리고 있던 희수가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로 끼어들었다.
“성진호, 너 깜짝 놀랐지.”
“뭐가.”
“조승규 변한 거 하나도 없어서.”
“응?”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하게 잘생기지 않았냐?”
그리고 흐뭇한 듯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진호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좀 민망하기도 한데, 그보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희수의 뾰족이는 입술이 너무 귀여웠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니가 그렇게 말 안 해도.”
“…….”
“너희 사귀는 거 이미 알고 있거든.”
나와 희수를 한 번 슥 번갈아 본 진호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썩 내키는 마음으로 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진호의 말에 조금 감동했던 것 같다.
사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면서 희수를 만나는 건 아니다. 타인의 인정이 최종적인 목표였다면, 희수의 표현대로 내게는 분명히 좀 더 편한 길이 있었다. 그냥 희수와 나 이렇게 두 사람이 행복한 것만으로 모든 게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희수가 내게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고스란히 받아들여 준다는 생각이 들자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내도록 음지에 숨어 있던 관계가 비로소 양지로 환하게 나아가는 것 같았다.
“고맙다.”
나는 진호에게 인사했다. 진호는 못 들은 척 한쪽 눈을 슥 찌푸리고는 소주잔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너는 그럼 희수랑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
말을 마친 나는 진호를 슬쩍 쳐다봤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희수가 아니라 진호에게 물어보게 됐다.
“그런 건 아니고. 쟤 독해서 그렇게 전학 가고 연락 다 끊었잖아.”
“야, 성진호! 그건 우리 엄마가!”
“아 됐고요.”
“하, 참나.”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경영학과 신입생 OT에서 딱 마주칠 줄 누가 알았겠어.”
“아,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도 굉장한 우연이네 싶었다. 사실 나만 해도 희수와 헤어졌던 고등학생 때에는 이대로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절대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희수와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이어질 인연은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는 다시 접착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 사람이 모여 있는 이 자리가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술잔을 부딪치고 소주를 마셨다.
“그나저나 조승규 너도 진짜 보살이다.”
태연한 척 굴었지만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좀 어색한 자리라서 그런가, 진호는 술을 제법 빠른 속도로 들이켜고 있었다. 어느새 취기가 적당히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진호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진호가 별안간 내뱉은 말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친구지만, 윤희수 가끔 좀 얄밉지 않냐?”
“아. 희수가?”
“솔직히 저걸 어떻게 데리고 살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희수랑 사는 게 힘든가? 확실히 희수가 나이 또래와 비교하면 생활력이 좀 부족한 건 맞는데……. 그래도 같이 살면서 희수가 얄밉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희수가 나를 떠났을 때 죽도록 밉기는 했지만, 결국에 다시 마주하게 되면 나는 항상 희수가 좋았다. 나에게 이기적으로 굴고 나쁜 짓을 할 때도, 희수에게 속수무책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나 안 그렇거든?”
희수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눈을 뾰족하게 뜨고 잔뜩 억울한 얼굴을 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정말이지,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발음이 슬슬 풀리는 거 보니까 희수 얘도 퍽 취했나 보다. 평소에는 밀가루 덩어리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한 얼굴이 어느새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게 또 귀여워서 희수를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작스레 내게로 몸을 붙인 희수가 덜컥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승규야, 나 진짜 그래?”
그러고는 내 가슴에 찰싹 붙어 나를 올려다봤다. 취기에 흠뻑 어린 얼굴이었다. 나는 찰박찰박 헤엄칠 수도 있을 만큼 크고 깊은 희수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가에 붙어 있는 속눈썹을 슬쩍 떼어주었다. 내 손이 가까이 다가가자 희수의 커다란 눈이 살짝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아니, 안 그래.”
“그치이.”
“응. 하나도 안 그래.”
희수가 이것 보라는 듯 진호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향하고는 생글생글 웃었다. 아. 너무 예뻤다. 그대로 얼굴을 끌어올려서 쪽쪽 뽀뽀해주고 싶은데, 참아야 해서 곤란했다.
문제는 비단 희수와 이대로 계속해서 스킨십하고 싶은 내 충동만이 아니었다. 잠깐 내 허리를 껴안는 것 같았던 희수는, 그대로 내 가슴팍에 얼굴을 찰싹 붙인 채 계속해서 내게 안겨들었다. 내가 희수의 어깨를 잡고 슬쩍 밀어내려고 해도 여전히 말랑한 볼을 문지르며 마구 치댔다.
“희수야, 여기 진호도 있잖아.”
그런 우리를 지켜보는 진호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희수가 이렇게 살랑살랑 닿아 오면 나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진호에게 영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을 단호하게 먹고 희수의 어깨를 꽉 잡아 밀어냈다. 내게서 뚝 떨어진 희수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아쉬운 듯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나는 그런 희수를 보고 살짝 웃었다. 다시금 진호가 내게 했던 질문을 되새겼다. 얄밉나? 그건 역시 잘 모르겠고, 지금처럼 가끔 철없어 보일 때는 확실히 있긴 하다. 근데 사실 그냥 그것도 다 애기 같아서 너무 귀엽다.
“치이.”
입술을 뾰족거린 희수가 내게서 돌아서 소파에 몸을 푹 하고 기댔다. 나는 희수의 유려한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평소보다 불퉁하게 솟아올라 있는 볼과 퉁퉁하게 불어있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그런 것도 다 좋았다. 희수가 나한테 어리광부리는 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나를 완전히 믿고 기댄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런 희수를 보고 있으면 항상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야, 나 더 못 있겠다.”
“어?”
“진짜 남녀 가릴 것 없이 커플이랑은 상종을 말아야지.”
어유, 진짜 토 나와. 부러 오버하며 반응하는 진호를 보자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야, 마저 마셔라. 진호의 잔을 보니까 소주가 반도 안 남아 있길래 재촉했다. 다시 비워진 잔에 소주를 마저 채워주고 함께 원샷 했다.
“그냥 나랑 술이나 마셔.”
“조승규 보고 참는다, 내가.”
하하하. 진호의 넉살에는 웃음을 크게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웃음소리와 더불어 크고 작은 이야기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계속 팩 토라져 있을 것만 같던 희수도 어느새 다시 몸을 일으키고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나는 솔직히 희수가 이제는 그만 마셨으면 좋겠어서, 계속해서 희수 술잔을 뺏고 빈 컵에 물을 따라 손 근처에 놓아줬다. 희수는 은근히 애가 둔한 면이 있어서 이런 것도 잘만 하면 눈치 못 채고 살살 주는 대로 먹는다.
그렇게 술자리가 세 시간 정도 이어졌던 것 같다. 술에 취한 희수를 부축하고 진호와 함께 룸소주방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나와 퍽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은 진호가 2차 왜 안 가냐고 눈을 치켜뜨는데, 나도 순간 혹했지만 아무래도 내일 출근이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너도 회사 다니면 형님 마음을 알게 될 거라고 진호에게 말해주고 자리를 파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그때는 희수 빼고 너 혼자 나와.”
“야, 성진호!”
“들어가라!”
끝까지 희수를 놀려먹는 것을 잊지 않은 진호가 먼저 택시를 탔다. 택시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고 희수와 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목이 유난히 희고 길어서일까, 희수가 어딘지 추워 보였다. 손을 뻗어 희수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단단히 여며줬다. 여전히 취기가 어린 희수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손길이 목 근처에 닿자 희수가 나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시간은 아직 열두 시가 채 되지 않았다. 아직은 사람들이 제법 오가는 신촌은 적당히 소란스럽고 산뜻하게 흥겨웠다. 거리에 즐비한 화려한 장식들을 보니 이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물씬 묻어났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팔짱을 꼭 끼고 돌아다니는 커플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넉넉한 코트 소매 아래로 희수가 꼭 쥐고 있는 주먹이 핏물이 든 것처럼 새빨갰다. 그런 희수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희수를 빤히 바라만 보는데,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희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승규야.”
“응?”
“오늘 괜찮았어?”
희수가 슬며시 내 눈치를 봤다. 막상 술자리에서는 아무런 걱정 없는 것처럼 잘 마시고 재잘재잘 떠들더니, 희수는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오랜만에 진호 얼굴 보니까 좋더라.”
“그래?”
“응, 다음에도 한 번 더 보자.”
내 말을 들은 희수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웃음이 천진하게 번져나가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결국 못 참고 손을 들어 희수의 볼을 톡 건드려봤다. 한동안 지그시 희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속 이렇게 푹 빠져 있을 수만은 없어서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희수가 머뭇거렸다. 희수는 무언가를 곰곰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슬쩍 갸웃했다. 계속해 보라는 듯 희수에게 살짝 턱짓했다.
“있잖아, 다음에는.”
“응.”
“나 네 친구들도 소개해줘.”
쑥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희수는 고개를 팩 돌리고 살짝 아래로 숙였다. 희수 나름은 내게 용기를 내서 한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얼굴이 좀 굳었다. 사실, 딱히 안 내키는데.
“싫어?”
그런 나의 기색을 금세 눈치챈 희수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 희수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나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건은 정말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내 주변 인맥이란 게 그다지 넓지는 않아서, 가까운 사람은 이전에 일하던 정비소 형들과 군대를 다녀오기 전후 막살면서 함께 어울렸던 좀 험한 친구들 몇몇이 다였다. 일단 희수가 정비소 형들이야 이미 봤고, 나머지는 그 친구들인데.
“너 보여주기 싫은데.”
뭐라고 거를 새도 없이 본심이 툭 하고 튀어나갔다. 놀란 희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져서는 표정이 울망울망했다.
“왜. 나 창피해? 남자라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희수가 아무래도 뭔가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지하철역이었는데, 발걸음을 내디디는 대신에 나는 멈춰 섰다. 희수도 나를 따라 그 자리에 섰다. 희수는 여전히 절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톡 하고 건드리면 툭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희수를 바라보며 나는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슬쩍 적셨다.
“몰라. 질투 나.”
그 말을 들은 희수의 입이 헤벌어졌다. 나는 괜히 화끈거리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그대로 한번 슥 쓸어내리고는, 팔을 뻗어 희수의 손목을 홱 움켜쥐었다. 그대로 잡아끌고 빠르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쫑알쫑알 뭐라고 말을 덧붙일 것도 같았는데, 입술을 꼭 다문 희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힐끔 바라본 희수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뭘 그런 걸로 질투를 하고 그래.”
우리가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희수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냥 희수를 보면서 씩 웃기만 했다. 나도 물론 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내 친구들이 남자인 희수를 보고 눈독 들이거나 작업 걸 확률 같은 건 사실 희박하다는 걸.
하지만 그래도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희수는 내 눈에 너무 예뻤다. 사람 보는 눈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데, 다른 사람 눈에도 똑같이 예뻐 보일 것 같았다.
희수는 이미 자신이 나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해주었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희수를 탐낼까 봐 걱정됐다. 희수에게 표현은 많이 안 하는 편이지만, 길거리 지나가다 사람들이 희수 쳐다보는 것만 느껴도 나는 신경 쓰이고 때로는 짜증도 난다.
솔직히 그래서 가끔은 그냥 희수를 집에 가둬두고 나 혼자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어느새 조금 발간 기운이 가라앉아 말간 얼굴을 하는 희수를 슬쩍 돌아보았다. 희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해 보였다. 이런 내 맘도 희수는 절대 짐작 못 하겠지 싶어 괜히 혼자 슬쩍 웃게 됐다.
***
본인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희수는 확실히 술에 많이 약한 편이었다. 가볍게 우리끼리 맥주를 마실 때는 물론이고,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다 하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에 톡 떨어졌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 들어오고 나서 희수는 씻자마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에 푹 누웠다. 나도 욕실에서 몸을 씻어내고 잘 준비를 했다. 우리의 침대로 돌아가 희수의 따뜻하고 말랑한 몸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희수를 깨우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였다. 진호를 만나고 와서인가, 마음 한쪽이 영 싱숭생숭했다. 진호는 희수와 내가 껑충 건너뛰었던 7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내 바로 옆자리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희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섬세한 윤곽을 조금씩 더듬듯 파악할 수 있었다. 희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은 정말 천사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걱정 없이 평온해 보이는 얼굴은 결이 보들보들하다.
그냥 이제는 이렇게 희수가 내 옆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게 참 새삼스러웠다. 별안간 내 인생에 다시 나타난 희수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을 때에도, 사실 나는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리라는 상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나와 섹스를 하면서도 희수가 그때 사귀던 사람과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희수를 만나는 것은 사실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동이었다. 섹스 외에는 희수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고, 내가 희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남자였나 하고, 좀 자괴감 비슷한 게 들기도 했다.
모든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희수를 놓지 않고 싶었던 건 사실은 나의 욕심이기도 했다. 희수를 안고 있으면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욕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끓었다. 원망보다 더 컸던 것은 그 애를 향한 갈망이었다. 우리를 험악하게 둘러싼 모든 것들을 모른 척하고, 나는 그렇게 잠깐이나마 희수를 내 것으로 해두고 싶었다.
언제고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가져오던 만남이 기어코 들통나 버리고 말았을 때는, 나는 사실 깊이 자책했다. 희수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내게 달려들었더라도, 내가 단호하게 그 애를 밀어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희수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 달랐고, 그래서 함께는 행복할 수 없다고 느꼈다. 결국, 그 애가 있어야 할 곳은 원래 편안하게 살아오던 세계라는 사실이 자명했다. 그곳을 버릴 용기도 없고 사실은 버려서도 안 될 애를 내가 괜히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끝장을 보고서야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우스웠지만, 나는 그래서 정말 희수와 헤어지려고 했었다. 우리는 역시 악연인 것 같다고, 서로를 놓아주는 게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매달리는 희수를 보면서도 애써 단호하게 떼어내려고 했다.
김지운이 와서 나를 짓밟고 갔을 때는, 솔직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가 하는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희수와 나 사이에는 명백한 현실의 벽이 있었다. 희수가 원하는 것들과 누리고 있는 생활 수준을, 내 경제적인 능력으로는 완벽하게 채워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부정할 수 없어서일까, 좌절감이 더욱 극심했다. 그 애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비참해져야 하나 싶었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김지운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너무 지치고 힘들다 보니까, 옆에서 내게 어깨를 빌려주는 윤정이에게 기대고도 싶어졌다.
그냥 나도 이제는 나 좋아해 주는 사람이랑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실제로 앞으로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술에 흠뻑 취해 엉엉 울면서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희수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분명히 너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자신이 아닌 김지운의 말을 믿냐며 희수는 길쭉한 몸을 마구 휘청거렸다.
처음에는 솔직히 얼떨떨하고 떨떠름했다. 하지만 울먹이는 희수가 자신의 진심을 내게 꺼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손에 닿은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녹아내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황한 내 얼굴을 한가득 담고 있는 희수의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바라보자 가슴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나의 심장은 당연하다는 듯 또 한 번 희수에게 반응했다. 희수를 처음 사랑한다고 인지한 이후로는, 나는 한 번도 희수를 제대로 밀어낼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망설임은 있었다. 김지운이 언급했던 냉혹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고, 이제 막 관계를 맺기 시작한 윤정이에 대한 죄책감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품에 쓰러진 희수를 결국 다시금 안아 들었다. 나는 희수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허리를 감싸고 그 애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내 안에서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던 불씨가 다시금 활활 불타올랐다. 네가 이렇게 나에게 사랑을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너에게 다시 처참하게 배신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
“와.”
큰방의 문을 열고 희수가 걸어 나왔다. 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탄성을 터뜨렸다. 면접 보러 다닐 때 희수가 슈트 입은 걸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에 옷이 착 감겨드는데, 슈트가 저렇게 섹시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안 이상해?”
말도 안 되게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조금 어색한지 희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쭈뼛거렸다.
“처음 입어본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좀 그래.”
“하하.”
“다들 완전 빡세게 하고 오는 거 아냐?”
오늘은 희수가 처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어젯밤에도 설렘과 걱정이 뒤섞여서 좀처럼 잠들지를 못하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는 희수의 얼굴이 어딘가 심란했다. 기껏 빼입은 슈트 주름 잡힐까 봐 마구 껴안지도 못하고, 희수의 턱만 살짝 들어 올려 통통하게 튀어나온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니 희수가 눈을 살짝 깜빡인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애인이 제일 잘났을걸?”
톡톡, 희수의 볼을 두드려 줬다. 희수가 슬쩍 웃자 희수의 얼굴에 가져간 손가락 아래로 볼우물이 쏙 파인다. 평소엔 새침한 게 고양이 같은데 이렇게 샐샐 웃을 때는 좀 다람쥐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몰라아.”
그래도 희수는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에휴,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런 희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한숨 푹푹 내쉬어야 하는 건 이쪽이라고 생각한다.
“너보다 내가 더 착잡하다.”
“응?”
“아무래도 이대로 못 보내겠어.”
희수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속눈썹이 길고 예쁜 눈이 느리게 깜빡인다. 이윽고 드러나는 커다란 눈동자가 청명한 호수 같았다. 그런 희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방금 나를 언뜻 스쳐 갔던 생각이 더욱 강력해졌다.
“너무 예뻐서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그게 뭐야아.”
“나 진짜 진지한데?”
원래도 지나치리만큼 출중한 외모인데, 작정하고 슈트까지 빼입으니 오늘은 정도가 좀 심했다. 평소에 희수는 가볍고 심플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편인데, 대체로 학생다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천진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데, 이렇게 세련되고 잘빠진 슈트를 입혀 놓으니까 부쩍 어른스러워 보이면서 위험하고 섹시한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우리 애인 못 말린다 진짜.”
“농담 아니라니까.”
평소와 다른 느낌을 주는 그 갭 때문에 더 눈을 못 떼겠는 것 같기도 하고,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하고 도도해 보이니까 사람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희수가 슈트 입은 거 보고만 있어도 흥분된다.
희수에게는 장난스러운 투로 얘기했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들도 희수를 두고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할까 봐 무척 찝찝하다. 나는 희수가 어떻게 보든 너무 예뻐서 마냥 좋기만 한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희수가 똑같이 예쁘다고 생각하면 속이 막 부글부글 끓는다.
“윤희수, 나 봐봐.”
희수는 내가 일부러 농담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생글생글 웃고 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해서 희수 기분이 좀 나아졌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는 좋지만…….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찝찝함을 그러안고, 나는 팔을 뻗어 희수의 왼손을 붙잡았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희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르륵 손깍지를 끼우고, 익숙한 감촉을 찾아 헤맸다. 네 번째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대로 잡은 손을 들어 희수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희수의 눈이 반짝 동그래졌다.
“누가 들이대면 이거 반지 꼭 보여줘.”
“…….”
“애인 있다고 철벽 쳐야 해, 알았지?”
희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입꼬리를 빙그르 끌어올리고 있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빠졌다. 희수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커다란 눈동자가 조금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도 같았다. 여전히 겹쳐져 있는 우리의 손에 희수가 힘을 주었다.
“승규야.”
“응.”
“나는 진짜 너 아니면 아무도 눈에 안 차.”
“…….”
“하나도 걱정하지 마, 응?”
나도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히고 내게 조곤조곤 말하는 희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조금 머쓱해진 기분도 들었다. 내가 느끼는 건 사실 사소한 질투심인데 희수는 어느새 우리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까지 파고들고 있는 것 같아서.
“알았어.”
“…….”
“그럴게, 희수야.”
까놓고 나 혼자 보기도 아까워서 다른 사람 눈에 닿는 것 자체가 싫은 거지, 나도 희수가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곁에 머무르는 희수가 충분히 확신을 주어서,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희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희수의 말을 믿는다. 그렇게 희수와 나는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서로 맞잡은 채,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을 애틋하게 응시했다.
“어, 우리 이러다 늦겠다.”
일부러 일찍 일어나서 요란을 떨었는데, 정신을 놓고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나도 희수도, 이제는 정말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미 나갈 준비는 다 되어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새롭게 열릴 하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브레이크가 고장 난 아우디 수리를 막 완료했다. 시험 주행을 마치고 차량 상태를 확인한 후 정비소로 돌아오는데, 한눈에도 연식이 좀 돼 보이는 벤츠 C클래스를 앞에 두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잠시 정비소를 비운 사이에 새로 입고된 차량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부대껴서인지, 이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정비소 사람들의 배려에 힘입어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새로운 일터에 적응하고 있었다. 별다른 어색함 없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있는 정비사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 승규야. 네가 이거 한번 봐봐라.”
나는 영훈이 형이 시키는 대로 차량에 접근했다. 보닛을 활짝 열고 있는 벤츠가 낡고 먼지가 낀 부품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었다.
“부조 현상이 심해서 운전할 때마다 차체가 굉장히 떨리나 봐.”
“아, 그래요?”
“근데 이거 좀 오래된 차라 그런가, 원인이 영 안 잡혀.”
“…….”
“아까 재형이는 만지다가 시동까지 꺼트려 버리고 말이야…….”
영훈이 형이 불만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일단 나는 엔진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엔진 기통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곳을 찬찬히 살피다 보니, 부품의 배열과 상태에서 조금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거 혹시 개조한 차량 아닙니까?”
“어, 그랬다고 했던 것 같아.”
이제야 감이 좀 잡혔다. 차량의 인젝터를 뽑아 봤더니 역시 그쪽에 문제가 있었다. 한 번 대대적으로 차를 뜯어고치면서 문제가 생겼는지, 인젝터에서 연료 분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행 중 떨림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인젝터에 이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그래?”
“네, 개조하면서 인젝터에 무리가 갔나 봅니다. 연료가 잘 안 퍼져요.”
“흐음.”
인젝터를 살펴보는 영훈이 형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형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내가 짐작한 바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럼 네가 이 차 좀 만질래?”
“네, 그러죠 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사실 이 정도 연식이 된 차면 자칫하면 폐차까지 확률이 높은데, 이대로 수리를 마치면 차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 퍽 기분 좋았다. 나는 영훈이 형에게 인젝터를 다시 건네받았다.
“가만 보면 승규가 은근히 실력이 있다니까.”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이래도, 칭찬을 듣는 건 역시 조금 쑥스럽다. 나는 좀 머쓱해진 기분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영훈이 형이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그때 막 정비소에 접근하는 인피니티를 확인하고 손님을 응대하러 갔다.
담당한 차를 수리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수리를 마친 벤츠 C클래스의 보닛을 닫고 슬쩍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퇴근까지 이제 삼십 분 정도가 남았다. 원래는 퇴근에 그렇게까지 목매는 스타일 아니었는데, 시간이 가까워지니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 희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희수가 오늘 김치볶음밥 만들어 준다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
남은 삼십 분이 어찌나 느리게 흘러갔던지. 정각이 되자 나는 하던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사무실에서 정비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막내이고 신입인데 민망했지만, 인사를 꾸벅하고 가장 먼저 정비소를 나섰다. 가뿐한 마음으로 막 차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나지금퇴근!]
[빨리집에가서 승규안고싶다♥]
[사진]
희수에게서 도착한 카톡을 확인하자 실실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지금 나 되게 바보 같을 것 같아서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찍은 건지 상상도 안 됐다.
희수는 마치 뽀뽀하는 것처럼 입술을 통통하게 쭉 내밀고 있었다. 클로즈업된 분홍색 입술 사진이 핸드폰 액정에 가득 차올랐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희수를 껴안고 진짜로 뽀뽀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 거실이 휑뎅그렁하니 고요했다. 어두운 거실에 불을 켜는데 마음 한쪽 끝이 씁쓸했다. 희수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항상 나보다 먼저 들어와서 현관으로 마중 나왔는데, 이제 희수가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그럴 수는 없었다.
허전하다는 마음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정비소에서 일하는 나를 기다리며 학교에서 집으로 먼저 들어온 희수가 똑같이 쓸쓸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 중에 상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나는 그것이 희수이기보다는 나이길 바랐다.
그리고 희수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일하느라 늦게 들어오는 건데, 지나치게 감상적인 생각에 젖어 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집안이 너무 조용한 건 싫어서, 희수 아이패드에 예능을 틀어놓았다. 생활 소음이 좀 생겨나기 시작하자 살 만했다.
예능을 보기 시작한 지 오 분이 지나지 않아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희수를 반기기 위해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승규야!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며 환하게 웃은 희수가 내 품에 안겨들었다. 축 늘어지는 나긋한 몸을 단단하게 받쳐 들었다.
“우리 희수 왔어?”
“으응.”
희수가 어리광 가득한 목소리를 내면서 손끝으로 눈가를 비비적댔다. 너무 귀여워서 그대로 동그란 코끝을 깨물었다. 좀 아프게 물었는지 희수가 인상을 팍 썼다. 딱 심기 불편한 고양이 얼굴이었다.
킥킥 웃으며 나는 희수가 내게 사진을 보낸 그 순간부터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뽀뽀를 쪽 했다. 희수가 내 목덜미를 매만지며 바짝 나를 끌어당겼다. 희수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빠져나온 혀가 내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하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짧은 숨소리가 안개처럼 퍼졌다. 그렇게 우리는 현관을 떠나지 못한 채 오래도록 키스했다.
“배고프지?”
“어? 으음. 어.”
“내가 밥 빨리 해줄게.”
최근 희수는 요리에 부쩍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요리는 희수보다 내가 더 익숙한 편이라, 잘하는 사람이 맡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굳이 부엌을 향하려는 희수를 말리고는 했는데, 그러다 한번은 희수가 정색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동안 요리는 그냥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치부했는데, 사실 나부터도 희수와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좀 달라지기는 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희수가 먹는 걸 보면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올라 간질거렸다. 그런 감정을 나 혼자만 독점하는 것도 희수한테 어딘가 잘못하는 일 같았다.
그래서 희수가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할 때 빠르게 납득했다. 내가 희수에게 사랑을 줄 때 행복한 만큼, 희수도 나에게 사랑을 줄 때 행복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이해했다. 물론 마르고 판판한 실루엣의 몸에 앞치마를 걸치고 조리대 앞에 서 있는 희수의 모습이 몹시 섹시해서이기도 했다.
“어때, 맛있어?”
희수가 만든 김치볶음밥을 한입 떠먹었다. 아삭아삭한 김치와 고슬고슬한 밥알이 입안에서 씹혔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우물거렸다. 햄을 너무 많이 넣은 건지, 김치 국물을 제대로 안 뺐는지 사실 좀 짜긴 했다.
“엄청 맛있는데?”
입안에 삼킨 것을 꿀꺽 삼킨 내가 희수의 김치볶음밥을 칭찬했다. 좀 짜지 않아? 미심쩍은 표정을 한 희수도 접시에 담긴 김치볶음밥을 떠먹었다. 숟가락을 입에 넣은 희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야, 진짜 맛있어. 서둘러 둘러댄 나는 희수의 눈을 피해 슬쩍 물을 마셨다.
요리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늘 테니까. 한 번에 완벽한 음식을 내어놓았다면, 사실 좀 재미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가 그러했듯, 이리저리 부딪히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아지는 과정 역시 즐거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식탁 위에 놓인 지나치게 짭짤한 김치볶음밥이 어딘가 사랑스럽게도 느껴졌다.
“오늘 많이 힘들진 않았고?”
“어, 오리엔테이션이라 딱히 그렇지는 않았어.”
“그래도.”
사실 오늘은 일하면서 온종일 희수 생각을 했다. 아침에 그렇게 긴장하고 나가더니 별일은 없었을까 희수가 걱정됐다. 나는 볼을 오물거리는 희수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확실히 평소보다 좀 지쳐 보이는 기색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희수는 내 예상보다 훨씬 의연해 보였다.
“아니 진짜로. 막 나갈 때는 좀 긴장되긴 했는데.”
“응.”
“막상 가니까 괜찮고, 동기들이랑도 좀 친해지고 좋았어.”
희수가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을 옆에서 내도록 지켜봐서인가, 막상 이렇게 첫 출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소감을 말하는 모습을 보자 어딘가 뭉클했다. 물론 희수가 내게 고충을 털어놓았다고 해도 나는 언제든지 기댈 수 있도록 나의 어깨를 내어줬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 하루 무사히 잘 마치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으니 뭐랄까, 그런 희수가 나는 좀 기특했다.
“회사에서 뭐 했어?”
“아, 자기야 나 자기소개 했다?”
“진짜? 뭐라고 했는데?”
맛있는 거 먹을 때도 그러는데,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을 두고 희수가 배불리 먹을 리가 없었다. 겨우 몇 입 떠먹는 것 같더니, 금세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좀 더 먹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오늘 같은 날 괜히 희수 스트레스 주는 일일까 봐 말았다. 대신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희수의 이야기에 집중하길 택했다.
“아포가토 같은 남자!”
“으응?”
“처음엔 쌉싸름한 것 같지만, 알고 지내다 보면 달콤한 매력이 있는 반전 있는 남자라고 그랬어.”
희수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스스로를 꾸미기에는 되게 간지러운 말 같았는데, 희수는 굉장히 뿌듯한 기색이었다. 정말이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한 태도라서 듣는 내가 오히려 눈이 좀 휘둥그레졌다.
“너 진짜 그대로 말했어?”
“응. 상무님까지 오셔서 다 보고 계셨어.”
“와. 우리 애인 생각보다 좀 뻔뻔한데?”
나는 손을 들어 희수의 볼을 잡고 살짝 꼬집었다. 사실 희수가 아닌 다른 누가 했다고 하면 좀 재수 없고 황당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저렇게 예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솔직히 조금 뻐기는 듯한 태도의 희수가 너무 귀엽고 웃겼다.
“야, 나 그런 거 엄청 잘해.”
“그래?”
“면접 볼 때도 내가 입만 열면, 어, 사람들이 다 나 쳐다봤어.”
풋. 진지하게 들어주고 싶었는데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는 먹는 걸 포기하고 희수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마구 문질렀다. 얘는 진짜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지? 내가 스킨십을 하자 희수가 눈을 부드럽게 휘고 유순하게 웃었다. 심장이 막 간질거렸다.
요리는 희수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오늘 내가 하기로 했다. 간단한 요리라서 그릇이 많지는 않았다. 고무장갑을 손에 끼우고 스펀지로 그릇을 뽀득뽀득 닦아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희수가 내 허리를 껴안아 왔다.
“승규야.”
“왜?”
희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희수가 나를 부드럽게 매만지자 급격하게 나른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작게 숨을 내쉬고 희수에게 대답했다.
“있지.”
“응.”
“나 회사 생활 진짜 열심히 할 거야.”
결연한 어조로 말한 희수가 내 등에 슬며시 뺨을 기댔다. 등 뒤로 따뜻한 희수의 체온이 느껴졌다. 희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희수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희수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역시 알 것 같았다.
“…….”
조용히 거품이 묻은 그릇을 흐르는 물에다가 헹궈내는데,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하고 가슴에 차올랐다. 희수가 저렇게 미래에 대한 성공을 내 앞에서 다짐하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렸다. 희수가 나로 인해서 어쩌면 평생 감내하지 않아도 됐을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걸까 봐 마음이 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지운을 만났어야 했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지만, 희수는 어쩌면 김지운처럼 돈 잘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과 살면서 고생 하나 안 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혀끝이 씁쓸했다.
“그래, 희수야.”
그래도 결국에는 나와 있기를 선택한 희수가 예쁘고 고마웠다. 그래서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강력하게 느꼈다. 단순히 일터에 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 이상으로, 나도 자기계발을 통해 더 능력 있고 기술이 뛰어난 정비사가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성공을 이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설거지를 마친 후에도, 희수는 그렇게 한참 동안 내 허리를 껴안고 내 등에 마른 몸을 기대고 있었다. 우리가 얕게 호흡할 때마다 맞닿은 몸이 같이 오르내렸다. 나는 그렇게 희수를 느꼈다. 함께 있기 위해 매 순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지금의 우리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