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겨울의 낙원>-1화 (20/23)

‘솔직히 너도 알잖아.’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파리하게 질려 있는 흰 얼굴은 조금 겁을 먹은 것도 같았다. 희수는 고작 운을 뗐을 뿐인데도, 느릿하게 벌어지는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희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린 그냥 달라.’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욕심이었을까. 아랫입술을 슬쩍 깨문 희수는 내게 선고했다. 겨울바람이 우리를 에워싼 달동네의 낡은 골목들을 그대로 허물어버릴 기세로 매섭게 휘몰아쳤다. 나는 몸을 작게 움츠렸다.

‘네 옆에 있으면 행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슬쩍 고개를 돌린 희수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쌀쌀맞은 선언은 반짝반짝 빛나던 여름의 기억을 단번에 박살 냈다.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어쩌면 나 혼자 애써 매달려오고 있었던 행복을 잔인무도하게 깨부수었다. 가만, 그런데 희수가 내 곁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했던 게 언제였더라?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나 만나는 거 네 욕심인 거.’

나는 조금 어지러운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향한 희수는 나를 날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나의 머릿속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끄집어내는 것만 같은 희수의 그 말에 뒷목이 쭈뼛 곤두섰다. 어느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작고 허름한 나의 원룸이 되어 있었다.

‘…….’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희수는 마치 내게 당연한 진리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떳떳했다. 나는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온몸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희수는 여기를 떠날 거야. 왜냐하면 이곳에 희수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 애는 이미 한 번 그런 적이 있으니까.

‘희수야…….’

희수를 강하게 붙잡아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망설이는 동안 희수가 점점 희미해졌다. 희수는 조금 웃고 있는 것도 같았고, 약간은 애달파 보이기도 했다. 마음이 지끈거렸다. 그렇게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희수에게 나는 애써 손을 뻗어보았다.

‘가지 마!’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나는 희수에게 닿지 않았다.

“헉.”

눈을 번쩍 뜬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여러 번 눈을 끔뻑거린 후에야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꿈에서는 항상 이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었다. 나의 약점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내가 가진 공포를 최대한으로 부풀렸다.

“…….”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깨어나고 한참 동안은 아득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러 번 반복되어도 언제나 악몽의 뒷맛은 씁쓸했다. 나는 식은땀이 배어 있는 이마를 손으로 슥 쓸어냈다. 손바닥이 삽시간에 축축해졌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악몽은 매번 괴롭지만 사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악몽이 차라리 현실보다 더 낫게 느껴질 정도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던 날들에 비하면 역시 그랬다. 어쨌든 지금 내가 돌아온 현실에는 희수가 있으니까,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옆에 얌전히 누워있는 희수를 꼭 끌어안았다. 내 옆에서 느껴지는 따끈한 체온을 느끼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으음…….”

희수가 귀여운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희수를 바투 당겨 안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을 더듬거렸다. 팔을 뻗어 희수가 왼손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고 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손끝에 닿았다. 순간 급하게 뛰어오르고 빠듯하게 조여오던 심박이 마법처럼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이제는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내게 사뭇 경건하게 약속했던 희수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날 희수가 내게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말해준 뒤로는 한결 덜했는데, 오늘만은 유난히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원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어서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아…….”

조금 망연해진 기분으로 나는 희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희수와 같이 살게 된 지도 거의 석 달이었다. 희수와 같이 있으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며칠 전에는 첫눈이 내린다고 희수가 아이처럼 좋아했었다. 의식하고 보니 어느새 겨울이 한창이었다.

내가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겨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사실 겨울이 오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했다. 매서운 바람과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가 나를 에워싸면, 혹독하고 암담했던 열여덟의 기억으로 속수무책하게 끌려가기 때문이었다.

그 겨울 나는 여름 한나절 꾸었던 단꿈에서 억지로 깨워졌다.

사실 처음부터 희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희수는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애 같았다. 가정환경을 제외하더라도,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팍팍하고 건조한 삶에 비뚤어져 있던 나와 다르게, 희수는 언제나 눈부시게 해맑았고 자기감정에 놀라우리만큼 솔직했다.

내게 먼저 다가온 것은 희수였다. 희수는 말갛고 순수한 얼굴로 나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다. 그 애가 나를 보고 하얗게 웃으면 나를 둘러싼 우중충한 세상이 단번에 밝아졌다. 불운과 가난으로 잔뜩 쪼들려 있던 내 삶에 처음으로 내렸던 따스한 빛이었다. 너무 가까이하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애와의 시작을 나는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솔직히 자격지심도 있었다. 내가 함부로 손을 대면 혹시라도 그 애에게 손때가 묻을까 나는 걱정했다. 하지만 한번 물꼬를 튼 감정은 거침없이 그 크기를 부풀려 갔다. 희수가 내 품에 안겨서 나는 네 것이라고 말하고 수줍게 웃으면 나는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 들었다. 나를 향하는 그 빛을 꽉 붙들고 싶었다.

희수를 만나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뾰족하게 날 세웠던 주변 환경에 대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애는 내가 은연중에 가져오던 삶에 대한 피해의식마저도 부드럽고 말캉하게 녹여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희수와 계속해서 옆에 있기 위해서, 내가 체념하고 틀어박혔던 바닥에서 벗어나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희수가 나와 같이 있으면 나는 그대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희수가 이별을 선언했을 때 더 배신감이 극렬했다. 희수가 너와 나는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다고, 우리는 살아가며 만날 일이 없는 사이라고 내게 통보하는 순간, 내가 그 애와 같이 있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모든 노력이 처참하게 짓밟혔다. 한순간에 나 자신이 참담하리만큼 우스워졌다.

희수는 그렇게 모든 게 장난이었던 것처럼 쉽게 떠나갔다. 희수가 다가오기 전에도 이미 나는 불행했는데, 희수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후에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비참했다.

그 애와 함께하길 꿈꿨던 하늘의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없는 땅 밑으로 단박에 끌어내려지자 박탈감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지독한 장난을 너는 왜 하필 나에게 쳐야 했을까. 너에게는 단순히 장난이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나는 인생을 송두리째 걸었었는데.

그 애가 내게 했던 약속을 생각하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절대로 혼자 있지 않게 같이 있어 주겠다니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었다. 그냥 희수는 처음부터 나를 완전히 가지고 논 거였다. 나는 희수에 의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완전히 짓뭉개졌다.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희수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희수가 나를 버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다 보면 나 자신을 깊이 원망하게도 됐다. 그때 내가 권재준 새끼를 때리지만 않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희수가 그렇게 나를 외면할 필요도 애초에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수없이 우리의 과거를 곱씹어보는 나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뜨거웠던 한여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사이는 이미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애와 나는 닿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깊숙하게 파인 골이 관계의 끝을 재촉했다.

희수가 전학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예감해오던 대로, 나는 그렇게 세상에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내 인생을 신경 써 주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완전히 버려지지도 않는 없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있는 힘껏 내팽개치고 싶었다. 나는 학교를 자퇴했다. 집을 나오고 나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애들과 내키는 대로 어울렸다. 그렇게 나는 열여덟의 겨울을 버텨냈다.

유난히 혹독했던 추위 속에서 나는 고통스러웠고 비참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희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솔직히 억울했다. 왜 나는 희수가 빛인 줄 알았을까. 그 애가 나에게 행복의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 삶이 상대적으로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수를 잊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 애를 상대로 나는 마음을 처음으로 열어보았다. 결과가 참담했다고 할지라도, 희수는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버린 채였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열지 않겠다고 꼭 닫아놓은 그곳에는 우습게도 희수만이 고스란히 갇혀 있었다.

희수가 나를 버리고 간 뒤에도, 희수와 함께한 시간은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눈부시게 찬란했다. 그 애는 존재 자체로 나에게 꿈이고 열망이었다. 나는 희수를 통해 처음으로 마음 가득 벅차오르는 행복을 느꼈다.

짧은 사랑은 강렬한 후유증을 남겼다. 저릿한 통증 같은 여운을 나의 온몸에 퍼뜨렸다. 그 애가 내게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 그 애가 나를 보고 지었던 사랑스러운 표정, 그 애가 내게 열어줬던 부드러운 몸. 지나가 버린 순간의 달콤함이 지금의 내게 독이 될까 봐 무서워서, 나는 그 시간을 차마 제대로 다시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얼얼하고 홧홧하게 낙인찍힌 기억을 심장에 품고 반병신이 된 채 살았다. 파탄이 난 잔해를 하나하나 다시 주우며 억지로 붙들고 내게 남겨진 세월을 보냈다.

그때 희수는 꼭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인제 와서 소용없는 얘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막연한 의문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희수는 다시 내 품에 있으니까. 나는 희수의 야트막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달큰하고 향기로운 희수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

기분 탓일까, 문득 방 안이 어딘가 선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현듯 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져서 침대에서 일어나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돌아왔다. 어느새 창밖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동틀 녘의 해가 희수의 얼굴을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희수의 얼굴을 더듬어 내렸다.

“아…….”

내 침대에서 천사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희수의 얼굴을 보자 작게 탄성이 터졌다. 심란했던 마음도 한순간이었다. 막상 이렇게 희수를 보면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리고 웃음이 비죽비죽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 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희수의 얼굴을 살폈다.

발그레한 뺨이 베개에 짓눌려서 살짝 통통해져 있었다. 입안이 마르는지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이 꼭 애기 같았다. 오똑하게 솟아오른 콧대 끝에는 콧망울이 살짝 동글동글해서 참 귀엽다.

뾰루지 하나 없이 고운 피부 결을 보니 다가가 만지고 싶은 마음에 손끝이 간지러워졌다. 그렇게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가 흐물흐물하게 풀리려고 들었다. 혹시나 웃음소리가 새어나가서 희수가 깰까 봐 서둘러 입을 꼭 다물었다.

여전히 희수의 얼굴을 살피던 나의 시선은 마침내 희수의 속눈썹에 닿았다. 희수 속눈썹은 보고 또 봐도 신기하다. 감탄스럽다고 해야 하나. 촘촘하고 길게 뻗어서 끝머리가 그림같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모양이 예뻐서 나는 입을 헤벌리고 바라봤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후두둑 쏟아지던 빗물이 고여 있는 희수의 촘촘한 속눈썹. 소나기에 흠뻑 젖은 채로 우리가 나누었던 첫 키스. 그렇게 나는 그 애를 처음 사랑하게 됐던 순간을 되새겼다. 나는 작게 웃었다. 그 결과로 상처투성이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래도 역시 나는 그때 너를 만나서 정말로 행운이라고.

“으응, 승규야?”

“깼어?”

내가 너무 뚫어져라 쳐다봐서일까, 희수가 슬며시 눈을 떠올렸다. 희수가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흐릿하게 바라보았다.

“거기서 뭐 해애.”

“그냥.”

“…….”

“너 예뻐서 보고 있었어.”

희수가 몇 번 속눈썹을 깜빡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희수가 웃는 게 좋아서 나도 입꼬리를 쓱 끌어올려 웃었다.

“얼른 이리 와.”

“…….”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응.”

다시 침대로 돌아간 나는 희수를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편안해졌다.

***

“승규야, 용달차 기사님 몇 시에 오신댔지?”

“열 시 반!”

“으아,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큰일이야!”

희수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종종거렸다. 호들갑을 떠는 희수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사실 내게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일에도 희수는 쉽게 놀라고 야단을 떨고는 했는데, 그런 희수의 풍부한 감정 표현이 대체로 무덤덤한 나의 눈에는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어제 짐 거의 다 싸놨잖아.”

“그래두.”

사실이었다. 어제 마트에서 박스를 사다가 희수와 함께 온종일 이삿짐을 챙겼다. 평소에는 단출하게만 느껴지던 원룸이었는데 막상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하니 챙길 물건들이 끝없이 나와서 당황했다. 원룸 구석에 수북이 박스를 쌓아 놓고도, 한 번 더 박스를 사와 정리를 해야 했다.

“빠트린 거 없나?”

“응. 이제 들고 갈 짐만 챙기면 돼.”

군대를 다녀온 후 정비소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부천에 자리를 잡았다. 나의 일상은 충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불만을 가질 만한 구석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마 나는 별다른 일이 없다면 계속해서 이렇게 부천에서 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희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정말이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희수와 함께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 이사를 한다는 것이 나는 아직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막상 원룸에 있는 짐을 챙기고 나니, 혼자였던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한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출발을 향하고 있었다.

“아휴.”

“이리 와 봐, 안아줄게.”

희수는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포장된 박스 사이를 까치발을 들고 오가면서 집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런 희수를 가만히 불러 보았다. 안아줄게, 라고 자상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내가 희수를 안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반짝 고개를 돌린 희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흐응.”

그리고 사뿐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안겨들었다. 나는 희수의 부드러운 몸을 꽉 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코끝을 문질렀다. 간지러워어. 희수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입꼬리를 쓱 끌어당기면서 희수를 들이마셨다. 희수의 달콤하고 향긋한 체향을 들이키면 나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기분 조금 이상하다.”

“왜에?”

“그냥, 여기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희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제게 파고든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희수를 안고 있었다. 느릿하게 얼굴을 떼어내고 희수를 바라보았다. 실내가 살짝 추운 것인지 희수의 코끝이 살짝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채기하려는 듯 눈가를 가늘게 찌푸리는데 그 표정이 너무 깜찍했다.

“윤희수.”

“아야.”

양손을 들어 희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뺨을 단단히 부여잡으니 입술이 쭉 하고 튀어나왔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진분홍색 입술에 쪽쪽 뽀뽀했다. 마주한 입술로 따뜻한 감촉이 닿아오자 기분이 부드러워졌다. 그대로 더 깊숙이 안으로 파고들고 싶었는데, 그러면 정말 자제가 안 될 것 같아서 그쯤에서 마무리했다.

“아, 형 오셨어요?”

열 시쯤 되자 정비소에서 같이 일하는 형들이 원룸에 왔다. 나는 얼마 전 거의 3년을 쭉 일해 왔던 정비소를 그만두었다. 사장님과 형들에게는 사정을 뭉뚱그려 설명했다. 그렇게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됐다고 얘기하자, 정비소의 형들이 짐 옮기는 걸 도와준다고 했다.

희수는 낭창하게 마른 게 온몸이 말랑말랑하기만 해서, 험한 일 하는 게 좀처럼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모든 짐을 나르기에는 솔직히 무리였다. 그래서 형들의 제안을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희수도 얌전한 얼굴을 하고 납득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막상 정비소 형들을 마주한 희수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희수가 나와 같이 일했던 형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창 나 쫓아다니고 정비소 근처를 맴돌 때 왠지 그들에게 자신이 정신 나간 스토커처럼 보였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솔직해지자면 현실도 희수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굳이 그런 희수를 괜찮다고 다독이지는 않았다.

“예, 안녕하십니까.”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는 희수를 흘끔 바라본 형들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야, 너는 방도 작은 놈이 짐은 뭐 이렇게 많냐. 형이 괜스레 쿠사리를 주기에 피식 웃고는 말았다. 나도 눈앞에 보이는 박스를 번쩍 집어 올렸다. 희수도 낑낑대며 비틀비틀 박스를 드는 게 보였다. 솔직히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또 괜히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내버려 뒀다.

그래도 성인 남자가 넷이라서 짐 옮기는 것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룸 건물 앞에 이사용 박스가 수북하게 쌓였다. 시간을 흘끔 확인하니 십 분쯤 있으면 용달차가 도착할 것 같았다.

“조승규 이제 진짜 가는 거냐.”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형들과 가볍게 악수를 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못 했는데, 막상 한가득 쌓인 짐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인가 형들과 인사를 나누자 어딘가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비소에서 일하는 동안, 형들이 나에게 친동생처럼 마음을 써준 것을 알고 있다.

이사를 한다고 해서 이대로 영영 인연이 끊기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할 때 비하면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아마 바쁘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지기도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는 형들과 꽉 잡은 손에 그동안 마음 깊이 간직해 왔던 고마움을 실었다.

“거기, 형씨. 이사 가서는 승규 속 썩이지 말아요.”

“그래, 그쪽 때문에 승규 얼굴이 반쪽이 되는 줄 알았어.”

“아…….”

나와 인사를 마친 형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쭈뼛거리고 있는 희수에게 한마디씩을 던졌다. 방관하는 듯 살짝 뒤로 물러나 있던 희수는 형들이 자신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포식자를 발견한 초식동물처럼 깜짝 놀랐다. 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했다. 나 역시 조금 당황했다.

“아, 형! 저 그런 적 없어요.”

“없긴 뭐가 없어. 너 쟤가 들볶는 동안 반송장이 되어 다니더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친하게 지내는 친구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어디 믿어줄 줄 알고?”

형들 중 하나가 씩 웃으며 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형들에게 희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솔직히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희수가 워낙 정비소에서 안 좋은 방향으로 유명하다 보니 괜히 희수를 더 이상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거를 석 달 가까이 하고 급기야는 같이 이사를 한다는데 내가 원한다고 해서 사실이 완전히 가려질 수 있는 노릇은 아니었다. 말 안 해도 무슨 사정인지 뻔히 안다는 듯 은근한 눈짓을 보내는 형들 앞에서는 정말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어깨를 으쓱하고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저기…….”

망설이던 희수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희수에게 쏠렸다.

“그동안 승규한테 잘 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수가 나를 대신해 형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딘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형들이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무슨 별말이라고 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이럴 때면 희수 말대로 우리가 진짜 부부 같아서…….

그렇게 또 한 번 희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내 마음을 들었다가 놓았다. 그런 내 속은 전혀 모르는 채 어느새 생글생글 웃고 있는 희수와 눈이 마주쳤다. 희수의 커다랗고 맑은 눈이 반들반들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때마침 도착한 용달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

가을 동안 희수와 동거하면서 희수가 등하굣길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원래 서울에서 학교 가까운 곳에 편하게 살던 앤데 괜히 나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고생하는 것 같아 희수가 안쓰러웠다. 결국은 희수에게 내 차를 내주었지만, 그 역시 임시방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희수가 취직하면, 희수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희수의 회사가 있는 강남과 출퇴근이 편리한 지역을 위주로 함께 집을 알아보고 다녔다. 솔직히 지금의 예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집이 많지는 않았다. 군대 다녀오고 바로 일 시작하면서 나름은 성실하게 돈을 모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희수와 내가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마련하는 건 역시 어려운 것 같아서 속도 좀 상했다.

처음에는 경기권 위주로 알아보다가, 애매하게 경기도로 빠지느니 차라리 서울에서 집값이 좀 싼 지역을 노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곳이 신림이었다. 일단 희수가 환승 없이 지하철로 코엑스까지 출퇴근할 수 있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가 모아놓은 돈에다, 희수도 은행에서 대출을 좀 받은 걸 합쳐서 신림역 근처의 투룸에 반전세를 잡았다.

용달차 기사님이 빌라 앞에 박스를 한 무더기 하차하고 가셨다. 희수와 함께 빌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약을 하면서 몇 번이고 들락거렸던 집인데, 막상 앞으로 이곳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지은 지 몇 년 안 됐다는 빌라는 세련되고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고 깔끔했다. 혼자 생활하기에도 썩 여유롭지는 않았던 이전의 원룸에 비해 희수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쩍 넓어져서 좋았다.

희수가 큰방과 작은방, 베란다를 바쁘게 오가며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돌아다니는 희수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희수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풀어야 할 짐이 산더미였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기야.”

희수가 보드라운 목소리로 나를 속삭이듯 부르면 언제나 처음처럼 가슴이 설렜다. 나는 슬쩍 웃으며 희수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빙그레 웃는 희수가 내게로 다가왔다.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나에게 몸을 딱 밀착시키고 빼꼼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희수가 귀여웠다.

“응?”

“나 지금 너무 좋다.”

그렇게 말하는 희수의 얼굴은 벅찬 감정으로 담뿍 젖어 있었다. 아. 사랑스럽게 휘어지는 희수의 눈가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낮은 탄성이 터졌다.

“여기가 우리 가족 첫 집이네?”

우리 가족 첫 집. 나는 희수가 한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애교스럽게 웃고 있는 희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딘가 감격스러웠다. 구성원이 단 둘뿐인 단출한 가족이지만, 지금 이대로 충분하게 느껴졌다.

“…….”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이 없는 상태로 칠 년을 살았다. 혼자인 게 차라리 내게는 훨씬 당연하고 익숙했다. 희수가 내게 선물해준 반지와 함께 나에게 새롭게 생겨난 가족의 존재가 사실 아직도 잘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희수가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여긴다는 생각을 내비치면 가슴이 감동으로 뻐근해졌다.

“희수야.”

“으응.”

“나도 너무 좋다.”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희수를 단단히 끌어당겨 안았다. 사실 세 들어 사는 거라 완전히 우리 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희수의 마음만은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가족으로 사는 삶을 정식으로 시작하는 보금자리였다. 희수와 내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 꿈꾸는 미래가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짐을 절반 정도 풀었더니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다 뻐근했다. 희수가 이사하는 날은 원래 짜장면을 시켜 먹는 거 아니냐고 눈을 댕그랗게 뜨고 물어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렇게 낯선 부엌에서 희수와 함께 짜장면을 먹었다. 아침부터 이사 때문에 바쁘게 움직여서인지, 짜장면이 유난히 맛있었다. 뭐 먹을 때면 좀처럼 한 그릇 다 비우는 일이 없던 희수도 오늘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싹싹 먹었다. 그런 희수를 보고 있으니 괜히 흐뭇하고 내가 다 배가 불렀다.

짐을 대강 풀어놓자 창밖이 어두워졌다. 희수와 자리에 누웠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이사하면서 새로 주문한 퀸사이즈 침대는 그동안 원룸에서 억지로 버텨 오던 낡은 싱글 침대보다 훨씬 편안했는데도 그랬다. 몸은 충분히 피곤했는데, 어쩐지 잠들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희수도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말똥말똥했다. 희수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새 출발이란 게 사람의 마음을 참 벅차게 했다. 마음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이제는 적응될 법한데도 여전히 나는 내 앞에 있는 희수가 믿기지 않아서, 손을 뻗어 희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희수는 살랑살랑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냥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평생 희수와 함께 살고 싶었다. 조금 먹먹해진 기분으로 희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희수는 마냥 천진난만해 보였다. 희수의 뺨을 슬며시 쓸어내렸다.

“조승규.”

“응?”

“침대 커졌어도 나 계속 안아주고 자야 돼?”

희수가 내게 몸을 치대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물거리는 분홍색 입술에 쪽 입 맞췄다. 희수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희수를 단단히 당겨서 내 품에 꼭 껴안았다.

“근데 우리 내일 몇 시에 일어나야 하지?”

“글쎄. 열 시쯤 일어날까?”

“너무 늦지 않아?”

“주말인데 늦잠 자지 뭐.”

“그래도.”

마주 본 우리는 영양가 없이 사소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말을 하다 보면 별로 웃긴 얘기가 아닌데도 갑자기 까르르 웃음이 터지곤 했다. 그렇게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러다 의식할 새도 없이 잠에 폭 하고 빠져들었다. 희수가 내게 부탁한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은 채였다.

***

그동안 희수는 대형 캐리어로 두어 번 옮긴 짐으로 나의 원룸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완전히 동거한다기보다는 임시로 같이 지낸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희수도 당장 입을 옷가지 정도를 제외하면 자기 물건이 없어서 생활할 때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신림의 투룸은 희수가 온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거처가 되었다. 집도 이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으니, 희수가 원래 살던 오피스텔에서 사용하던 물건들도 편하게 두고 쓸 수 있다. 이번 기회에, 희수의 본가에 들러 희수 짐을 정리해 가져올 생각이었다.

어쩌면 희수의 부모님은 희수가 나와 함께 지내던 것을 오래 가지 않을 치기 어린 반항으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솔직해지자면 나 역시 처음 희수가 원룸으로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희수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지낼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수와 나는 이제 가족이 되었다. 우리가 각자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고 있는 반지는 서로를 하나로 엮는 단단한 약속이었다. 화려한 예식도, 거창한 공표도 없었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굳건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본가에 있는 희수의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남아 있는 짐을 모두 우리의 집으로 옮기면서, 희수는 부모님으로부터 제대로 독립하고 나와 삶을 완전히 합치고 싶다고 말했다.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희수의 마음이 참 예뻤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나는 저번처럼 희수를 혼자 본가로 보내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일단은 옮겨야 할 짐의 양이 지난번보다 너무 많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부모님을 대하는 일이 희수 혼자만의 책임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희수의 부모님은 나와 같이 살아가는 희수를 영영 받아들이기 어려우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와 설득의 과정에 서 있는 것은 희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껄끄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질지라도, 나는 일단은 그분들께 얼굴을 계속해서 비추고 싶었다. 희수는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본가에 꼭 같이 가야 한다는 나의 말에 결국 동의했다.

“음. 빈손으로 가기 좀 그런데.”

희수에게는 당당하게 선포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난번에 희수와 같이 간 적이 있던 서래마을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떠올려봤다. 아무래도 희수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이니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영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집에 사는 분들께는 대체 무슨 선물을 들고 가야 할지 영 막막했다.

“아냐, 우리 부모님 뭐 안 필요하셔.”

“그래도, 내 마음이 안 편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희수가 살래살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선물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그분들이 이미 풍요롭게 갖추고 계실 것 같다. 그러니 희수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그래도 희수의 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한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썩 탐탁지 않은 기분으로 입술을 슬쩍 짓씹었다. 희수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수가 내게 쪽 하고 뽀뽀했다. 말랑한 촉감이 입술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지자 심란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싹 가셨다.

“승규야.”

“응?”

“너는 우리 부모님 안 미워?”

별안간 희수가 던진 질문은 사실 뜻밖이었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껌뻑이며 희수를 바라보았다.

“그냥. 너한테 못된 말 하고, 많이 상처 주셨잖아.”

“…….”

“내가 너라면 되게 싫을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린 희수가 멋쩍은 듯 히히 웃었다.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나는 뺨에 살짝 그림자를 내리는 희수의 기다란 속눈썹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희수의 어머니가 내게 뾰족한 말을 내던지셨던 것은 사실이다. 어머님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무시하시는 듯해 자존심이 퍽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지운 같은 새끼가 내게 와서 개소리를 지껄였던 그때와는 상황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희수가 부모님을 평생 미워할 수 없기 때문에, 나도 그분들에게 마냥 싫고 원망스러운 마음만을 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으응.”

“너 낳고 키워주신 분들이잖아.”

“…….”

“그래서 지금 네가 내 눈앞에 있는데.”

희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나에게도 동등하게 소중하지는 않을지라도 나는 희수의 부모님을 존중해 드리고 싶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희수를 예쁘고 똑똑하게 잘 키워주셔서 그분들 덕에 희수가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거였다.

“그냥 나는, 나 때문에 네가 그분들 영영 안 보고 사는 거 싫어.”

나는 희수가 부모님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초에 희수는 나처럼 부모님과 애착 관계가 거의 없는 종류의 인간과는 달랐다. 화목하고 평화로운 과정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성장해 왔다.

어쩌면 그 관계가 나는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정말로, 나 하나 때문에 희수가 지난 이십오 년간 쌓아온 부모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길 원하지는 않았다. 처음 나와 함께 본가에 다녀오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희수는 부모님과 연이라도 끊겠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그것은 진심으로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노력해서 너희 부모님께 인정받아야지.”

희수의 부모님 눈에 내가 성에 차지 않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그분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희수와 내가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의 진심이 그분들께도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전해지기를 바랐다.

“…….”

“…….”

희수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씩 웃어 보였다. 희수가 그런 나에게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감쌌다. 희수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내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우리 애인 진짜 멋있다.”

“하하.”

“진짜로.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희수가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내가 객관적으로 멋진 남자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윤희수 한 사람에게만은, 나는 희수의 표현대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나는 그저 계속해서 이렇게 희수가 나를 단단하게 기댈 수 있는 상대로 여겨주길 바랐다.

***

내 차를 타고 희수와 함께 서래마을로 향했다. 희수가 알려주는 대로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막상 대문 앞에 서자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런 나를 눈치챈 것일까, 희수가 내 손을 한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옆을 슬쩍 돌아보자 희수가 배시시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런 희수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희수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찍었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함께 희수 부모님이 거주하는 저택으로 들어섰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망고 주스 박스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희수보다 살짝 뒤처진 걸음으로 집 안으로 향했다.

“희수 왔니?”

“네, 엄마.”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나 보다. 집안에서도 말끔한 옷차림을 한 희수의 어머니가 거실로 나오셨다. 나는 숨을 슬쩍 들이쉬고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어머님은 내게는 전혀 눈길을 주시지 않고 희수만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짐을 가져가긴 왜 가져가, 여기가 너 사는 집인데.”

“엄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이사했다고요.”

“어휴…….”

희수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어머님이 인상을 확 찌푸리셨다. 희수도 조금 짜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영영 인사를 못 할 것 같아서, 내가 용기를 내서 먼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머님이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냉랭하고 날카롭던지 어깨가 흠칫 떨렸다. 희수가 언젠가 아버지보다 엄마가 훨씬 무섭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왠지 그런 희수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리자 어머님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계셨다. 입술을 꼭 다문 채 말 한마디도 없으셨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희수가 조금 초조해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 맞다, 엄마.”

“…….”

“이거 승규가 사 왔어요. 드셔보세요.”

내 손에 있는 망고 주스 박스를 가져간 희수가 어머님 앞에 내밀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머님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을 하셨다. 아니 사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으셨던 것 같다. 나는 긴장했다.

“부엌에다가 가져다 둬라.”

“네, 엄마.”

말을 마친 어머님은 그대로 돌아서셨다. 약간 밝아진 목소리로 희수가 어머님의 뒷모습에다 대고 대답했다. 나는 조금 안심했다. 이런 거 필요 없다고 강하게 뿌리치시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와 희수는 함께 희수의 방에서 짐을 챙겼다. 말끔하게 정리된 희수의 방은 넓고 쾌적했다. 그때와 집은 달라졌지만, 새삼스럽게 고등학생 때 희수의 방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의 내게 희수가 자는 방이란 얼마나 비밀스럽고 야시시한 공간이었던지. 그런 곳에서 대담하게 삽입 섹스를 하고 싶다고 나를 유혹했던 윤희수를 생각하니 픽 웃음이 터졌다. 어렸을 때부터 보면, 희수는 범생이같이 얌전해 보이는 게 묘하게 도발적인 구석이 있었다.

어지간한 물건들은 이번에 다 우리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으니, 챙겨야 할 짐이 또 한참이었다. 우리는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청테이프를 붙여 이사 박스를 만들고 있는 사이, 희수가 옷장을 열어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순간 희수 쪽을 돌아본 나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널찍한 옷장에서 옷이 폭포처럼 끝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와, 너 진짜 옷 많다.”

“좀 너무 많나?”

“이거 다 입어?”

“아니이.”

새침하게 대답하는 희수가 귀여워서 다가가 볼을 살짝 꼬집었다. 히히. 작게 웃은 희수가 내 허리를 껴안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너무 많은가도 싶었는데,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희수가 이 옷들을 입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나도 앞으로 돈 많이 벌어서 희수 좋아하는 옷 많이 사줘야지 생각했다.

희수가 내 가슴에 말랑한 볼을 슥슥 문질렀다. 촉촉한 눈으로 슬쩍 나를 올려다본다. 이렇게 붙어 있으니까 또 마냥 좋았다. 짐을 싸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희수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문고리가 절걱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희수가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희수 너 짐은 꼼꼼하게 챙기고 있니?”

문이 열리고 어머님이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렇게 쌩하게 돌아가셔 놓고, 아무래도 희수가 걱정되셨나 보다. 어머님은 여전히 나는 없는 사람인 것처럼 쳐다보시지도 않고 희수에게만 말을 거셨다.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엄마.”

“저번에 보니까 겨울옷 다 놓고 갔던데.”

“그때는 집이 좁아서 그랬고요. 필요한 것들 다 챙기고 있어요.”

팔짱을 단단하게 낀 어머님이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방안을 훑어 내렸다. 에휴. 또 한 번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 이사는 어디로 했고.”

“신림이요. 회사랑 가까워서요.”

“…….”

“투룸에서 승규랑 같이 살아요.”

희수의 말이 끝나자 어머님의 시선이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른 태도로 어머님께 웃어 보였다. 얼굴 근육이 빳빳하게 땅겨왔다. 역시, 아직 많이 어색했다.

솔직히 예전에는 희수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어딘가 죄책감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귀하게 키워온 아들 인생 탄탄대로 걷는 거 괜히 내가 채 오는 걸까 봐, 자격지심을 가지게 됐다. 어떻게 보면 나를 만나 고생하는 대신 부모님에게 듬뿍 사랑받으며 그동안 살아왔던 대로 앞으로의 삶을 사는 게, 희수에게 나은 일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희수가 밝은 목소리로 어머님에게 말했다. 한동안 내게 머물러 있던 어머님의 시선이 다시 희수에게로 향했다. 희수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 지금 정말 행복해요.”

“…….”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희수를 바라보는 어머님의 얼굴에 작게 파문이 일었다. 무어라고 말을 꺼내려던 어머님은 그저 아랫입술만 살짝 깨무셨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희수가 반복해서 내 옆에 있을 때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내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희수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희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자신감을 가지려고 한다. 희수와 내가 서로를 채워주고 완성한다는 마음으로 희수의 부모님 앞에서도 조금 더 당당해지려고 한다.

“마저 치워라.”

어머님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방금보다는 조금 더 누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어머님이 방에서 나가시자 두근거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 나를 알았는지 희수가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나도 희수를 보고 씩 웃은 다음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 맞다. 이것도 챙겨야겠다.”

수납함을 뒤적거리던 희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반짝 돌아보는 희수에게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게 뭔데?”

그리고 희수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발견한 나는 그대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7년 전 희수의 생일에 선물해준 페라리 프라모델이었다.

***

희수의 생일을 알게 되고 저 애한테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시절 내게 희수는 이미 원하는 건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그 애에게 어설픈 선물을 안기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나는 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희수의 취향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차라리, 이렇게 희수가 좋아할 만한 것을 애매하게 가늠할 바에야, 나에게 가장 확실하게 소중한 것을 희수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적어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 애에게 기꺼이 쏟아부을 수 있었다.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 타미야의 페라리 프라모델 키트를 샀다. 희수에게 줄 선물이라고 생각하니까 상자에 담긴 내용물을 만지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100개가 넘는 부품들을 하나하나 매만지며 필요에 따라 직접 도색하고 짜임새 있게 조립했다. 나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프라모델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희수를 얼마나 아끼는지, 희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막상 완성한 프라모델을 두고 보자, 뿌듯함이 차오름과 동시에 사실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은 분명했지만, 과연 그 애의 눈에 찰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하고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프라모델을 받은 희수가 감동한 얼굴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프라모델을 든 그 애는 무척 기뻐하며 태양처럼 환하게 웃었다. 객관적으로 희수와 내가 어울리지 않는 사이일지 몰라도, 적어도 희수만은 나의 진심을 알아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희수를 향한 나의 애정에 대해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좋았던 때가 무상하고 비참하도록, 희수는 나를 버리면서 그 마음마저 모두 짓밟고 떠났으니까. 한때 그렇게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내가 느끼게 한 게, 차라리 더욱 잔혹한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면서, 그때 나에게 그렇게 웃어주었던 그 애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연한 기회로 다시 마주친 희수의 모습은 나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희수는 뭇 남자들의 드림카가 될 만한 값비싼 외제차를 모는, 딱 봐도 무척이나 부유해 보이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언제나 나는 나를 버리고 간 그 애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써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놓았던 기억이 끄집어내져서 씁쓸했지만, 어차피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흘려보내려 했다.

희수가 기어코 나를 다시 찾아왔을 때는 솔직히 무척 황당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서, 굳이 나에게까지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희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내가 걔한테 뭐나 된다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던 건 바로 희수였다.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게 가벼웠기 때문에, 희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윤희수 때문에 지금까지의 삶이 우지끈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던 나는 그 애가 죽도록 미웠고, 또 죽을 만큼 그리웠다. 나는 희수에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한 나의 삶이 그 애로 인해 다시 한번 온통 뒤흔들렸다.

어떨 때 희수는 나를 절박하게 원하는 것 같아 달콤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사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내게 애써 숨기려고 노력하지조차 않았다. 씁쓸했다. 그렇게 희수가 내게 하는 장난질이 어린아이다운 못된 변덕에 비롯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애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그렇게 희수는 다 꺼져버린 것 같았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던 그 애를 향한 나의 마음을 불쏘시개로 들쑤셨다. 여전히 부드럽기만 한 그 애의 몸을 다시 안으면 추억과 비감이 뒤범벅된 진창에 빠져들었다. 난 대체 너에게 뭐니. 가끔은 그렇게 대놓고 묻고 싶기도 했다.

사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냥 내가 애써 부정하고 싶을 뿐이었다. 희수가 나를 만나며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다 보이면서도, 그래도 나는 희수에게 끌려갔다. 나를 가지고 논다고 해도 다시 한번 희수를 본 나는 그 애가 좋아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나를 항상 절망에 빠뜨렸던 것은 나에게는 내 인생을 전부 쏟아부을 수 있을 정도로 간절했던 마음이 막상 그를 받는 희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한없이 무거웠고, 희수는 한없이 가벼웠다. 그 애가 한 번이라도 그때의 내가 가졌던 절박함을 알아준 적이 있을까 생각하면 기분이 아득했다.

그래서 희수가 다시 한번 프라모델을 들고 환하게 웃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처음의 순간과 비슷한 감격에 젖어 들었다. 솔직히 나는 희수가 아직도 내 선물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내가 희수에게 온통 내리부었던 마음이, 희수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었구나. 나와 헤어진 후에도, 희수는 그 당시 내가 주었던 마음을 간직해오고 있었구나.

그렇게,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구나.

솔직히 우리가 헤어져 있던 7년간의 기간 동안, 나는 희수가 어떻게 지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로써 하나의 사실은 확실해졌다. 헤어져 있는 동안 희수가 언제나 나에게 함께했던 만큼, 나 역시 희수의 곁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해왔다.

나는 그냥,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아있는 최후의 앙금까지도 사르르 녹아버리게 하는 너는 왜 내게 이토록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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