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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은 처음 오피스텔에서 쫓겨날 때 캐리어에 담아온 짐으로 대충 버티며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가을도 막바지에 다다르자 날씨가 쌀쌀함을 넘어서 추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옷들로는 역부족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다시는 안 돌아올 것처럼 단호하게 집을 박차고 나와 놓고, 그리고 실제로 오랫동안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서 버텨놓고, 겨우 옷이 없어서 다시 집 찾아 들어간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했다.
하지만 새로 사기에는 겨울옷은 너무 비쌌다. 이미 본가에는 널린 게 옷인데 고작 엄마를 피하고 싶어 쇼핑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제대로 된 낭비였다. 사실 승규의 집에 들고 온 캐리어 한 개 만큼을 제외하면 내가 사용하던 모든 물건은 본가에 있기도 했다. 어쩌면 시기의 문제일 뿐, 계속해서 대면을 피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서래마을에 있는 본가를 다시 마주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승규와 함께 본가를 찾았던 그 날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도 엄마와의 사이에 있는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평생 승규랑 같이 살 거니까, 평생 엄마가 승규한테 그렇게 못된 말 한 거 못 잊어버릴 거다.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들어가면 또 엄마가 내게 무슨 날카로운 비수를 쏟아부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게 나가더니 외투가 없어서 들어온 것 꼴 보기 좋다고 나를 비웃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네가 이래 봤자 결국 부모님 집으로 들어오게 돼 있다고 나를 무시할 것 같기도 했다.
에휴. 답이 없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도어락 비밀번호 안 바꾸신 거 보니 부모님도 아들 아예 영영 내다 버리진 않았나 보다 싶었다. 그렇게 거실에 다다른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도우미 아줌마 안 오시는 날인가? 실내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온도는 적절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싸늘하고 황량해서 예전에 내가 알던 우리 집 같지가 않았다. 어디에 외출이라도 하신 건지, 엄마도 안 보였다.
조금 초조해지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엄청난 각오를 하고 들어왔는데, 약간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엄마를 안 만나는 게 다행이었다. 별다른 마찰 없이 옷만 가져가고, 또 내가 아끼던 물건 몇 개만 챙겨서 갈 수 있으면, 그래 그게 가장 최선이지.
그대로 조용히 내 방에 들어갔다. 오피스텔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내 짐이 주인을 얌전히 기다리는 것처럼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옷장을 열자 안에는 이미 내가 자주 입는 겨울 아우터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걸려 있었다. 나는 묵묵히 캐리어에다가 겨울 옷가지를 담았다.
막상 방에 들어와서 짐을 다시 챙기려니까 좀 욕심이 났다. 이것도 가져가고 싶고, 저것도 눈에 밟히고. 그래도 지금 승규의 원룸에 불필요한 짐을 늘릴 수는 없었다. 내가 취직하고, 승규 말처럼 우리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서 자리 잡으면 그때 다시 가지러 오면 된다고 나는 애써 스스로를 토닥였다.
솔직히 나도 너무 오랜만에 집에 오니까 기분이 좀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막연한 이유로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승규를 생각했다.
낑낑대며 집채만 한 캐리어를 끌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최대한 추린다고 했는데도, 겨울옷 부피가 커서인지 이미 캐리어가 가득 차 있었다. 드르륵드르륵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집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복도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는데 멀찍이서 엄마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방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집에 있으면서 나 들어오는 거 보고 가만있을 분이 아니신데 싶었다. 솔직히 나는 그대로 모른 척 돌아나갈 수도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 망설인 후 엄마의 방으로 찬찬히 걸어갔다. 그건 사실 거의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
방에 가까이 다가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캐리어를 끌고 달그락거렸던 나의 소리를 다 덮어버릴 정도로,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공기 중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 가득 찬 와인향이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엄마와 낮술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는 테이블 위에 푹 고개를 숙인 채 엎드리고 있었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평소의 자세와 너무 달랐다.
그렇게 예민하던 분이, 내가 방 안에 들어온 것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은 엄마에게서는 격렬하게 오르내리는 흐느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껌뻑였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내가 보는 엄마는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아끼고 보호했지만, 내가 그녀의 기준에 엇나갈 때는 조금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늘 내게 엄격하고 꼿꼿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엄마가 내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놓고 무너진 모습을 보자 어딘가 얼떨떨했다.
“엄마?”
엄마에게 다가간 나는 뒤에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엄마의 몸이 퍼드득 떨렸다. 뒤늦게 인기척을 눈치챈 엄마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발견한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수니?”
엄마를 바라보는 나 역시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렜다. 언제나 완벽했던 엄마의 눈 화장이 마구잡이로 번져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엄마의 눈두덩이가 엉망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엄마는 제법 오랫동안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를 본 엄마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재빠른 손길로 눈물을 닦아내고 말끔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전 처음으로 보았던 그녀의 약한 모습이 완전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
나는 조금 아득해진 기분으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나를 극성스럽게 옥죄였고, 나는 엄마를 지독하게 원망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 사이에 있는 앙금은 결코 쉽게 풀릴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들어오며 결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엄마는 내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을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냉정한 엄마가 기어코 눈물을 흘린다면, 그 이유 역시 결국 나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엄마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코웃음 쳤다. 싸늘하기만 한 엄마가 이번 일로 그렇게까지 고통받을 거라고 믿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다 한들 엄마가 모든 상황의 원인 제공자이니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무너진 엄마의 모습을 보자 나도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엄마는 이내 나를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완전히 다잡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는 듯, 엄마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생각보다 결정이 늦었구나.”
“…….”
“그래, 고생해 보니까 이제 엄마 말이 뭔지 알겠지?”
엄마는 예전처럼 매서운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이제 나에게는 그 말이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왜소한 체구의 메마른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집에 들어온 거 아니에요, 엄마.”
“…….”
“옷만 가지고 나가려고요.”
“희수야.”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떠나려는 나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엄마가 당황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나의 이름을 불렀다.
“…….”
“…….”
엄마와 내가 대치하는 가운데 공기 중에서 무언가 바사삭하고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차마 엄마를 계속해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엄마를 두고 당장 집에서 나설 수도 없었다.
“……희수야,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다시금 입을 뗀 엄마는 놀랍게도 나에게 호통을 치지 않았다. 조급한 목소리로 나를 붙들었다가, 그런 자신에게 지레 놀라서 다시금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울음을 완전히 그친 것 같았던 엄마의 눈가가 다시금 촉촉해졌다.
나는 내 앞에서 결코 완전히 강인할 수 없는 엄마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엄마에 대한 미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데도, 막상 그런 엄마를 보자 사실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나를 가만히 노려보는 엄마는 나의 부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직도, 너 그러는 거 절대 안 된다.”
엄마가 어깃장을 놓듯 이를 악물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형형했지만, 그 기세가 사실 한풀 꺾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기존의 입장을 완전히 양보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실 엄마가 그러길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해요.”
나는 망설인 끝에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냥, 꼭 이번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엄마한테 그 말을 한 번은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엄마 기대 못 충족시키는 아들이잖아.”
“…….”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가 격랑으로 출렁거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를 의연하게 마주 보았다.
“근데 엄마,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
“그냥 지금 이 모습이 저예요.”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 이십 대 초반에 커밍아웃할 때는,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펄펄 들끓었다. 그래서 더 악에 받쳤고 기를 썼다.
“저는 계속 이렇게 살아갈래요.”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냥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그 사실을 나는 참 오랜 시간이 걸리고서야 깨달았다. 이렇게나 먼 길을 돌아와서야 알았다.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보고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나는 다시금 무너지려는 그녀의 얼굴을 애써 뒤로 하고 엄마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엄마의 기대와 나의 현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렸다. 누구도 먼저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렇기에 그녀와 나 사이에서 영원히 완전한 화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곤두선 마음이 서서히 마모되어 언젠가는 결국 둥글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 막연한 기대이기도 했다. 때로 그것이 나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엄마는 그녀 나름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엄마를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오랜 세월 엄마의 인정을 절박하게 갈구해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엄마의 기대를 충족하는 것이 나의 행복과 결코 동등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매달려 왔던 것들을 홀홀 놓아 주었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이제 나는 엄마와 별개로 나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갖추었다.
***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며 집에 들어오는 나를 본 승규가 놀란 눈을 했다. 나는 승규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승규의 놀란 눈이 이윽고 화난 눈이 되었다.
“왜 이런 일을 혼자 해.”
“그냥 서울 간 김에 해치운 거지.”
사실은 혹시라도 승규가 엄마와 마주치게 되면, 엄마에게 모진 말을 들어야 할까 봐 그게 싫었다. 여전히 우리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승규가 또 한 번 불필요한 모욕을 감내해야 할까 봐 걱정됐다. 승규도 아마 나의 이런 마음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승규의 화난 눈이 이내 아래로 축 처졌다.
잘생긴 애는 시무룩해도 귀엽네. 승규에게 다가간 나는 승규의 커다란 몸을 푹 껴안았다. 내게는 양보할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집에 혼자 다녀와서 승규가 혹여나 서운한 마음이 있다면 살살 녹아내리길 바랐다. 나는 승규에게 몸을 치대며 애교를 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규가 제 가슴에다 대고 쪽쪽 뾰족한 입술을 찍어대는 내 머리통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하아……. 승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슬쩍 내리감았다. 승규의 품은 언제나처럼 단단하고 안온했다. 그래서 감격스러웠다. 괜히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자기야.”
“응.”
코끝을 가슴골에 비비적거리며 나는 꽉 뭉친 목소리로 승규를 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훌훌 털고 왔다지만, 사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발견한, 그리고 끝내는 엄마가 차지했던 중요한 부분을 내 가슴에서 떼어낸 나의 속은 한참 동안 소란스러웠다.
“나 오늘 엄마랑 얘기했다.”
아마 그 마음이 가라앉으려면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여기 내 눈앞에 있는 조승규 딱 하나니까. 지금 이렇게 많이 힘들고 속상한 마음을 승규에게 굳이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뭐라고 하셔.”
“엄마야 뭐…… 여전하시지.”
조심스럽게 묻는 승규에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휴. 한숨을 푹 내쉰 승규가 나를 바투 끌어안았다. 우리 희수 힘들었지. 부드럽게 묻는 목소리에 울컥 마음이 뭉쳤다.
“우리 나중에 이사하면, 나 짐 더 많이 가져올래.”
“응, 여기보다 더 넓은 데로 갈 거니까.”
“살림 합친다, 완전.”
내가 킥킥 웃었다. 꽤 괜찮은 농담 같았는데, 나를 따라 웃는 승규의 목소리 끝이 어딘가 흐릿하고 씁쓸했다. 나는 빤히 승규를 바라보았다. 승규가 자신으로 인해 내가 가족과 사이가 멀어졌다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승규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승규와 눈을 맞춘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있지.”
“…….”
“우리 계속 이렇게 살면 될 것 같아.”
쥐었던 모든 것을 놓아도 조금도 아쉽지 않을 만큼 네가 나에게 소중하니까.
“계속 열심히 하자.”
그렇기에 이제 앞으로를 함께해 나갈 것은 우리니까.
***
나는 요즘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P&G에 떨어지고 쫄려서 서류를 좀 무리해서 많이 넣었더니 그만큼 면접 볼 일도 많았다. 2차, 3차까지 연이어 면접이 있는 회사들은 정말이지 피곤했다. 심지어 1박 2일 합숙 면접을 하는 곳도 있었다.
사실 이미 붙은 회사가 두어 개 있긴 했다. 하지만 일부러 승규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지만, 다급한 마음에 서류는 넣었어도 막상 선택하려니까 이런저런 조건들이 꺼려져서 망설여졌다. 승규와 함께하는 미래가 탄탄하려면 첫 직장이 중요한데, 기왕이면 최대한 탄탄한 기반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최종 면접까지 가고 좋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회사가 몇 군데 있었다. 졸업 논문도 이제 거의 막바지였고, 교수님도 예전처럼 나에게 혹독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동안의 고생이 결실로 영글기를 바라며 나는 하루하루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그렇게 가을이 거의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핸드폰에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틀린 게 없음을 확인한 뒤 나는 곧장 승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무 시간이었지만 잠깐이라도 짬이 나 승규가 전화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셌다.
[희수야?]
내 이름을 부르는 승규의 목소리를 듣자 그동안의 설움과 북받치는 기쁨이 동시에 왈칵 쏟아졌다.
“승규야!”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승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괜찮은 회사에 붙었다.
“나 최종 합격했어!”
[정말? 와! 너무 잘 됐다.]
“히히.”
[어디 된 거야?]
“로레알 기억나? 그때 합숙 면접한다던 데.”
[아, 그 화장품 회사?]
사실 내가 면접을 본 회사가 한두 개도 아니었는데, 승규가 그걸 또 고스란히 기억해 주는 게 못 견디게 좋았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뭔들 안 좋을 게 있을까. 경영대 건물 복도에서 핸드폰을 꽉 움켜쥔 나는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애인 너무 멋있다.]
“고마워, 승규야.”
다 네 덕분이야. 나는 잊지 않고 덧붙였다.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이었다. 회사에 합격한 건 나였지만, 승규가 없었다면 결코 혼자서의 힘으로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합격은 우리 둘이 함께 이루어낸 최초의 성과였다.
[아, 손님 온다, 우리 이따가 저녁에 보자.]
“사랑해.”
[나도.]
낮게 울려 퍼지는 승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
집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진 인기척에 흠칫 놀랐다. 승규가 일부러 나를 놀라게 해주려고 미리 말도 안 하고 일찍 퇴근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을 보니 깜찍한 곰돌이 모양의 초코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웃음이 자꾸 나왔다. 앙증맞은 곰돌이 머리에 초를 한 개 꽂은 우리는 방의 불을 껐다.
“그럼 생일 축하합니다가 아니라 취직 축하합니다인가?”
“좀 이상한데?”
“몰라, 그렇게 하자.”
축하 노래를 부르고 같이 고개를 모아 케이크에 꽂힌 초를 껐다. 꼿꼿하게 서 있는 한 개의 초가 마치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승규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마냥 행복했는데, 이상하게도 조금은 먹먹한 기분도 들었다.
자연스럽게 승규와 처음 재회했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승규에게 매달려 승규를 곤란하게 하고 괴롭게 했던, 철모르던 내 모습을 반성했다. 승규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후회하고 방황하던 시간을 반추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규와 다시 마음이 맞닿았던 기적적인 순간을 덧그렸다.
새삼스럽게 지금의 내가 훌쩍 자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승규를 막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내 삶을 두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규와 함께 손을 잡게 된 순간부터 나는 변화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
모두가 지금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속이 아주 못나고 보잘것없을 때부터, 승규가 내게 조건 없이 퍼부어준 사랑이 너무나 고마웠다. 헌신적으로 나를 어루만졌던 승규의 사랑은 나의 삶을 끝내 우리의 삶으로 변화시켰다.
“너무 행복하다.”
“나도, 희수야.”
오늘로써 승규와 내가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미래가 또렷하게 구체화했다. 우리에게는 분명 앞으로도 어려움이 들이닥치겠지만, 지금 이렇게 해낸 것처럼 언제고 같이 또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심지어 이제 부모님의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서도, 나는 적어도 나의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취를 이뤄냈다.
“희수야.”
“응?”
“너 부모님께 말씀은 드렸어?”
나는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딸꾹질했다. 내가 부모님 생각했던 걸 어떻게 알고. 매일 살 비비며 같이 잠들어서인가, 조승규 이제 사람 마음까지 읽을 줄 알게 됐나 싶었다.
“……아니.”
막상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까 굉장히 내가 불효자 같았다. 나를 먼저 내친 건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속이야 편하다. 그렇지만 엄마도 아버지도 사실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는 결코 완전히 부인할 수가 없었다. 연락 안 하고 일부러 모른 척 사는 사이인 건 맞다. 그래도 이렇게 인생에 큰일이 생긴다면, 적어도 그분들께 알려드리는 게 도리인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도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승규 말 틀린 거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저 말을 승규가 한다는 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우리 부모님은 승규에게 큰 상처를 안긴 장본인이다.
나야 부모님이라 어쩔 수 없이 사랑한다지만 승규는 그들을 미워하고 차갑게 등 돌려도 차라리 그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나보다 먼저 나와 나의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하는 마음 넓고 따뜻한 내 애인이, 나는 새삼 너무 예쁘고 대단해 보였다.
“으응.”
나는 살짝 목이 메려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승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래야지.”
“그래, 그렇게 해.”
눈물이 핑 도는데 이렇게 좋은 날에 우는 모습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승규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근데 쫌만 이렇게 안고 있다가.”
“하하.”
“…….”
“희수 하고 싶은 대로 해.”
승규의 체취를 맡고 승규의 심박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내가 이렇게 승규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에 대해 새삼스레 다시 생각했다.
[회사에 취직해서 12월부터 일합니다.]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와 아버지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버지와는 짧게 통화를 했다. 아버지는 내가 무척 기특한데, 한편으로는 섭섭하다고 하셨다. 그에다 대고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게 되자,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마침내 부모님의 품을 떠나게 되는 증명이구나 피부로 느껴졌다.
엄마는 카톡을 읽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엄마 마음에는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엄마와는 별개로 내가 앞으로 승규와 함께 걸어 나갈 삶에 대한 확신이 있으므로, 엄마의 반응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엄마의 카톡을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희수야.]
[네 뜻 이제 알겠으니 집에 들어와라.]
나는 한동안 엄마의 카톡을 들여다보았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사랑하는 엄마 아들인 내가, 끝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이나마 변한 게 있었다. 엄마가 내 뜻을 알겠다고 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 한편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동안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처럼 부인하고 깔아뭉개기만 해왔으니까.
나는 찬찬히 엄마가 보낸 카톡을 바라보았다. 엄마 역시 나름대로 나와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어쩌면 저기까지가 엄마의 최선이 아닐까 하는 싶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는 승규를 만나는 나를 영영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역시, 이대로도 나는 괜찮았다. 이제는 그렇게 엄마를 향한 미움도 놓아주려고 한다.
아무래도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목소리를 들으며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
“희수야.”
잠결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나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정신이 느릿하게 맑아졌다. 좁은 침대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실 아직도 잠이 완전히 덜 깼다. 다시금 승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가지 마.”
애절하게 울리는 승규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이 단박에 달아났다.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승규야.”
“아, 희수야…….”
“나 여기 있잖아.”
나는 승규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악몽을 꾸느라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던 승규가 눈을 끔뻑였다. 아직 졸린 기운이 가득한 눈이 나를 가늘게 바라보았다.
“아. 있구나.”
승규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승규가 나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끌어안았다.
“너 간 줄 알았어.”
“…….”
그렇게 말하는 승규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확인한 승규는 이내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코까지 도롱도롱 골기도 했다. 하지만 잠결에 나를 찾는 승규를 확인한 나는 좀처럼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물론 깨어 있을 때 승규는 나에게 그런 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온전하고 열렬하게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승규의 깊은 내면은 두려움에 잠식당해 있었다. 여전히 승규는 내가 떠나는 악몽을 꿨다.
그건 내가 승규에게 가한 원죄였다. 어린 날의 내가 지독하게 잔인하고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승규를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은, 지금의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승규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런 나의 의연한 다짐도 승규가 가진 근원적인 공포를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좁은 창으로 새파랗게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내리쬐는 희부연 햇볕이 곤히 잠든 승규의 옆선을 섬세하게 매만졌다. 나는 한참이고 빛에 스며든 승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죄스러운 마음으로 승규의 얼굴에 손을 경배하듯 가져갔다.
죄책감으로 마음이 묵직하게 무거워졌다. 내가 사랑하는 승규가 견딜 수 없이 애틋하고 애처로웠다. 언젠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나를 신뢰할 수는 없다고 했던 승규의 말을 기억했다.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처참한 이별의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승규의 볼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어느 날의 내가 내팽개쳐 산산조각이 난 상처투성이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손안에 들어 올렸다. 그곳으로는 어린 승규가 왈칵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부모님에게 외면당한 승규는, 끝내 수술실에 계신 할머니마저 돌아가실까 봐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가 되는 것을 지독하게도 두려워했다.
그리고 내가 승규에게서 달아나버렸을 때,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승규의 공포는 곧 현실이 되었다. 승규는 세상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을 것이다. 나는 승규에게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승규가 나를 가장 필요로 했을 때, 승규의 옆에 머무르지 못했다.
승규와 함께하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어렸을 때 내가 그렇게 승규를 떠난 게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그때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후회가 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속이 상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처박혀 마냥 아래로 잠기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반추를 통해 사람은 현실에서 새로이 행동하고 끝내는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승규가 함께하는 것을 반대했던 부모님으로부터였다. 최근 엄마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부모님과 나는 결코 서로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다. 끊으려고 해도 쉽게 끊어낼 수 없는, 미워하려고 해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렇게 사랑으로 끈덕지게 얽매인 관계가 가족이었다.
나는 신뢰에 대해 생각했다. 승규가 나에 대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감에 대해 고민했다. 나와 부모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승규와 나도 그렇게 영영 떨어질 수 없도록 무언가에 의해 묶여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 승규도 앞으로는 밤에 좀 더 편하게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까지 내 행동을 막고 있었던 일부는 피해의식이었다.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승규에게 해줄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외면해왔다. 그래서 괜히 여자를 만나던 승규를 보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질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듭이 반드시 법률적인 제도를 통해 묶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항상 사람을 그리워하고 정에 목말라 있던 승규에게, 나는 가족이 되어 주고 싶었다.
험한 일을 하느라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승규의 손을 잡아들었다. 승규가 채 깨어나기 전, 두툼한 승규의 손가락에 몰래 줄자를 감아봤다.
***
이번 달 과외비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정말이지 정해진 날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일주일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통장에 과외비가 입금된 것을 확인한 나는 당장 미리 봐두었던 주얼리샵으로 향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받은 돈 써버리는 것 이제 정말 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번 일은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 충분히 예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취직도 하고 논문도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생활비 나올 구석이야 어떻게든 생길 것 같았다.
나는 진열대 안에 담겨 있는 반지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학교를 오가면서 지나칠 때마다 자주 들러서 마음에 드는 것을 이미 골라놓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신중해지고 싶었다. 온전히 내 기준으로만 결정하고 싶어서, 점원의 안내도 일부러 물렸다. 그렇게 한 삼십 분 동안 반지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것 같다.
“둘째 줄에, 왼쪽에서 세 번째 것 좀 보여주세요.”
나는 화이트골드 커플링 한 쌍을 가리키며 점원에게 요청했다. 반지를 꺼내서 진열대 위에 올린 점원이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반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디자인이 아주 심플하고 우아하죠.”
“…….”
“훤칠하게 미남이신데, 여자 친구분이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나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두 개 다 남자 사이즈로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백에 깔끔하게 포장된 커플링 한 쌍이 나의 손에 쥐어졌다.
사실 프러포즈가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아마 예전의 나였더라면 분명히 일의 구색을 중요하게 여겼을 것 같다. 하지만 승규와 함께하면서부터 나의 생각도 저절로 변화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일상을 위한 다짐이니까, 사실 우리가 매일 보내는 일상 속에 녹아 있는 편이 더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승규와 집에 같이 있다가 자연스럽게 건네주고 싶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까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승규가 설거지하는 소리가 골골골 들렸다. 커플링이 담긴 상자를 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승규의 너른 등을 바라보며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승규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빨간 비닐이 벗겨지고 큼직한 승규의 손이 드러났다. 투박하고 거친 그 손을 멀찍이 보는데, 갑자기 뭔가 위기감이 확 들었다. 뭔가 지금 이 순간조차 놓치면, 타이밍을 잃어버려서 승규에게 영영 반지를 못 줄지도 모르겠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다급하게 승규에게 달려갔다.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아내는 승규가 나를 의아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관심사는 승규가 아니었다. 승규의 손이었다. 정확히는, 아무런 장식 없이 벌거벗고 있는 승규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스, 승규야!”
“왜 그래 희수야? 무슨 일 있어?”
“너 손 좀 봐봐.”
“응?”
승규가 의아하다는 듯 양손을 가슴께에 들어 올렸다. 나는 냅다 승규의 왼손을 잡아챘다.
“그냥 너무 허전한 것 같지 않아?”
“뭐가?”
“아니, 봐봐. 그렇잖아. 아무것도 없으니까.”
“응?”
나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마구 주워섬겼다. 면접 보러 다닐 때는 내가 입만 떼면 사람들이 놀라서 막 우와우와 했는데, 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바보 멍청이처럼 되지.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승규야.”
여러 번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상황인데도, 막상 닥쳐오자 나는 승규 앞에서 엄청나게 떨고 있었다. 동거하고 수입을 같이 쓰면서 이미 농담처럼 부부 같다는 말을 주고받았고, 실제로 거의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나…… 사실 너한테 줄 게 있어서 그래.”
마침내 우리의 관계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할 때가 다가오자, 나는 그 순간의 무게감에 완벽하게 압도당했다.
“…….”
“…….”
바싹 말라오는 입안을 축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린 나는 조심스럽게 벨벳으로 된 녹색 상자를 열었다. 내가 공들여 고른 커플링이 마침내 그 모습을 승규 앞에서 드러냈다. 놀란 얼굴을 한 승규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이번에는 정말 멍청이같이 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며, 나는 승규의 앞에서 제대로 말하기 위해 수백 번 연습했던 이야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꺼냈다.
“그때, 너랑 같이 있어 주겠다는 약속 어겨서 미안해.”
“…….”
“이번에는 나, 절대 너 떠나는 일 없을 거야.”
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침을 꿀꺽 삼키는 승규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다시 눈을 위로 들어 올리자, 감정이 파도치듯 일렁거리는 승규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승규와 눈을 맞추며 살짝 웃었다.
“승규야, 그러니까, 나의 가족이 되어 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승규의 왼손을 잡아들고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중간에 몇 번 삐걱거리다가, 반지는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승규의 손이 반짝였다.
“너도 나한테 끼워 줘.”
나는 무척이나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올라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까, 최소한 설거지 직후보다는 더 나은 타이밍이 있었을 것 같았다. 괜히 지금 말했나, 혼자 땅 파고 있을 때 승규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왔다.
“아…….”
그렇게 얇은 반지가 내 손가락으로 밀려들어 왔다. 반지가 내 손가락에 완전히 자리 잡았을 때, 어딘가 철컥하고 맞물리며 속박당하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이건 승규와 나를 하나로 잇는, 우리가 절대 서로를 떠날 수 없게 하는 끈이었다. 나는 새삼 감격해 승규를 바라보았다.
“희수야.”
“응?”
“사랑해.”
승규가 전에 본 적 없이 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사랑해.”
그렇게 우리는 충만해졌다.
로맨틱한 순간에는 격정적인 섹스가 늘 뒤따라야 할 것 같은데, 삶을 살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오늘 하루가 부쩍 고단했는지, 저녁을 먹을 때부터 승규의 눈에는 사실 잠이 이미 가득 차오른 채였다.
그래도 승규는 계속 나랑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내일 아침에 또 일찍 출근해야 하는 것을 알아서 내가 억지로 재웠다. 안 자겠다고 떼써서 이불 덮어주고 토닥토닥 자장가도 불러줬다. 절대 자기 싫은 것처럼 굴더니,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 몇 번에 승규는 금세 잠에 톡 떨어졌다.
숨을 짧게 들이켠 나는 잠들어 있는 승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기분 탓인지, 승규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비로소 승규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렇게 얌전히 눈을 내리감은 승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나의 왼손으로 승규의 왼손을 꽉 잡아보았다. 반지를 끼운 우리의 손이 하나가 되어 맞물렸다.
우리가 지금 디디고 선 이 땅이 모든 사람의 이상향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동화 속에서 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서 행복을 발견했다. 승규와 나는 그렇게 낙원의 저편에 우리의 자리를 찾았다.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우리가 이대로 함께하는 한, 그곳에서는 달콤한 영원이 노래처럼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