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속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크게는 취업 준비와 논문 작업을 포함해 사소하게는 조교 업무, 과외 수업, 대학원 강의 수강까지 매일매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쭉 가늠해 보면 언제나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물론 승규가 준 차를 타고 다니고, 승규의 카드로 밥을 사 먹으면서 이전과 비교해서 생활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래서 나는 승규에게 항상 고마웠다. 다만 취업과 졸업에 대한 정신적인 압박감이 여전한 게 문제였다. 나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매일같이 그 묵직함을 더해갔다.
나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사실 중간에 포기해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본 적이 없었다. 늘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에, 외부의 도움을 받고 편한 길을 택했다. 하기 싫은 일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짓누르는 압박감이 때로 버겁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안 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는 완전하게 자립하고 싶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길 원했다.
내가 이렇게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된 건, 모두 다 승규 덕분이었다. 나는 승규로 인하여 삶을 직면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하게 내 삶의 주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비로소 강인해진 나 자신을 마주했다.
연구실에서 랩탑을 켜놓고 지원서 에세이 쓰기에 열중했다. 살면서 마주했던 가장 큰 고난과 그를 극복한 방법을 서술하시오. 질문 그 자체가 지금 이 순간 나의 인생인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연애가 너무 깊숙이 관여된 얘기라, 관련 내용을 에세이에 고스란히 쓸 수 없는 게 유감이었다.
그래도 에세이를 쓰는 마음이 분명히 예전보다 한결 가벼웠다. 이미 가장 들어가길 원하던 기업에서 서류 탈락을 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부담스럽고 거북하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주저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또 떨어진다고 해도, 계속 붙을 때까지 지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원서를 썼다.
그렇게 한참 글을 쓰다가 핸드폰을 흘긋 쳐다봤는데 카톡 알림이 와 있었다. 승규에게서 도착한 카톡인가 싶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내려다보는 나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어딘가 마음 한곳이 쿡쿡 하고 찔렸다.
[희수야 많이 보고 싶구나]
아버지였다.
솔직히 엄마가 승규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는, 욱하는 마음에 엄마 아버지 없이도 나는 보란 듯이 잘 살 거라고 다짐했다. 승규랑 둘이서만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서, 엄마 아버지가 후회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결국은 그들이 틀리고 내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로 화목했던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나에게, 하루아침에 부모님의 존재를 인생에서 분리해 내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까놓고 말해 무척 졸렬한 방식으로 승규와 함께하려는 나를 막았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지금도 몹시 화가 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와 아버지와 완전히 연을 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은, 가족이니까.
아버지가 보낸 카톡을 보자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보고 싶다니, 생전 그런 말씀 안 하시는 분이었다. 그대로 한참을 답장하지 않고 고민했다. 그렇지만 끝내 그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버지가 점심시간에 학교로 찾아오셨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 얼굴이었다. 서로를 마주한 아버지와 나는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를 못했다. 원래도 그렇게 친밀한 부자지간은 아니었지만, 전에 없이 어색했다. 나는 그렇게 묵묵하게 고개만 숙이고 아버지 차에 올라탔다.
도착한 곳은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일식집이었다. 엄마 아버지와 함께 자주 식사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어느새 이미 많이 낯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버지도, 과거의 언젠가는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이 식당도. 그래서 마음이 조금 먹먹해졌다.
전채 요리를 서빙한 종업원들이 다다미방의 문을 닫고 나갔다. 널찍한 방 안에 아버지와 나 단둘만이 있었다. 나는 좀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버지였다.
“그래, 지내는 곳은 어디냐?”
그건 나를 질책하거나 몰아붙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캐묻거나 따지는 목소리 역시 아니었다. 조금 얼떨떨한 채,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부쩍 핼쑥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순전히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하고 계실 뿐이었다.
“……부천이요.”
여전히 나는 모든 지원 하루아침에 모질게 끊어버리고 그렇게 내게서 먼저 고개 돌린 부모님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막상 아버지의 지쳐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자, 공격적으로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나는 순순히 아버지에게 사실 그대로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때 그 친구랑 같이 있어?”
“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아버지가 다기를 들어 차를 마셨다. 큼큼, 작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아버지를 살폈다.
“하…….”
그런 나를 까마득하게 바라보던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교는 빼먹지 않고 가고 있지?”
“…….”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질문을 듣는데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어딘가 쭉 하강하는 듯한 기분을 꽉 다잡았다.
“네. 취업 준비하고 있어요.”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먹어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신 아버지는 또 한참을 말이 없었다. 다다미방의 문이 다시 열리고, 초밥과 사시미가 상 위에 놓였다. 음식을 서빙한 종업원이 나가고 난 후에야 아버지가 입술을 뗐다.
“너 돈은 어디서 나서.”
“……그냥, 과외랑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
“제 애인도 돈 벌고 있고요.”
아버지가 영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데, 순간 아버지가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넓고 듬직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어깨가 어느새 아래로 푹 가라앉아 있었다.
“…….”
“…….”
그냥, 나는 조금 막막해졌다. 승규랑 내가 앞으로 함께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이렇게 부모님과 계속 어색한 관계로 남을 수도 없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냐.”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질문은 어딘가 간절했다. 마음이 저릿해져 왔다.
“아버지, 저 이대로 집에 못 가요.”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내어 드릴 수는 없었다. 이제 막 내 인생에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참이었다. 아버지의 고혈한 표정은 무척 안타까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 집에 들어간다면 지금까지 내 모든 노력과 발버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희수야.”
“……네.”
“너 부모님 평생 안 보고 살 건 아니지?”
아버지가 회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집 초밥 그렇게 좋아했는데, 좀처럼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시선이 닿고 있을 정수리가 따끔따끔거렸다.
“아버지가 그동안 제대로 표현 많이 못 해서 미안하다.”
“…….”
“그래도 아버지도 엄마도 너 무척 사랑한다.”
“…….”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이렇게 직접적인 애정표현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홀연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다시 보았다. 아버지는 전에 본 적 없이 낯설고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여유롭고 관조적으로 보이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생전 처음으로 절실함을 읽었다.
“엄마 말이 너에게 상처 됐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다 너 위하는 마음에 그런 거야.”
“…….”
“엄마도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했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했다. 엄마가 나에게 냅다 들이밀었던 냉랭한 태도를 되새겼다. 승규에게 아프게 내리꽂았던 날카로운 말들을 생각했다. 사실은 엄마로부터 꼭 받고 싶었던, 인정을 떠올렸다.
“이쯤에서 네가 부모 마음 좀 알아주면 안 되겠니?”
“…….”
“엄마 아버지 다… 너 하나만을 보고 평생을 살아왔어.”
어딘가 고조된 듯한 아버지의 말끝이 흐릿하게 떨렸다. 손끝이 저릿거렸다.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새삼스럽게도, 내가 엄마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나를 간곡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도 저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말을 마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
편안했던 부모님의 품이 그리울 때도 물론 있었다.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냉전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아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이제 그들로부터 독립한 나의 인생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품에 수동적으로 머무를 수가 없었다.
“하아…….”
아버지가 다시 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아버지의 앞에 놓인 음식에 눈이 갔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식사에 거의 입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속상해지려다가, 내가 감히 그럴 면목이라도 있나 싶어 씁쓸해졌다.
“이거라도 가져가라.”
양복 재킷의 품에 손을 집어넣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나는 얼떨결에 아버지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안을 슬쩍 보니 오만 원짜리 지폐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어림잡아 봐도 백만 원은 족히 돼 보였다. 두 달 과외비, 거기에 플러스알파. 아니 그보다 사실은, 나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
“…….”
“…….”
솔직히 눈 딱 감고 그냥 받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다.
“아버지, 저 이 돈 못 받아요.”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 봉투를 다시 돌려드렸다. 내가 내민 봉투를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가 고개를 가만히 돌렸다.
“희수야, 아버지가 당장 집에 들어오라는 게 아니야.”
“…….”
“그래도 부모 된 마음으로서 걱정되니까. 밥이라도 잘 먹고 다니라고.”
아버지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아버지 쪽 테이블에 나는 돈 봉투를 얌전히 올려놓았다.
“그래도, 저 이제 제힘으로 생활하고 싶어요.”
“희수야.”
“아버지 아들 다 컸잖아요.”
나는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힘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활짝 웃는 것뿐이었다.
***
“사람들이 엔진 오일 갈라고 하면 불필요한 정비를 권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거든.”
“아, 약간 병원의 과잉진료 비슷하게 보는 건가?”
“그렇지. 뭐 정비소가 차 병원이니까.”
“하하, 맞네. 응. 그래서?”
일과를 마치고 승규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렇게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데도, 나는 승규와 떨어져 있는 순간이 항상 아쉬웠다. 나와 함께하지 않을 때는 승규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늘 궁금했다. 오늘 정비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승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어?”
핸드폰 액정이 깜빡거렸다. 나는 사실 승규랑 있을 때는 핸드폰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느낌이 좀 이상하게 번쩍거렸다. 촉이라고 해야 하나.
“승규야 잠깐만?”
“응.”
도착한 메일을 확인한 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눈을 휘둥그레 뜬 승규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승규야, 나 붙었어!”
최근 어지간한 기업마다 원서를 잔뜩 넣어놓고 전형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서류가 통과했다는 알림을 받자, 정말이지 입이 그대로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직 완전히 합격한 게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눈에 띄는 성과 없이 지지부진 이어지기만 하는 취업 준비 과정에 아무래도 나는 좀 지쳐 있었나 보다.
“애인, 어느 회사 붙은 거야?”
그런 나를 보며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은 승규가 팔을 뻗어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아직 서류만, 서류만 붙었어.”
“그래도.”
“로레알이라고, 화장품 회사.”
“아, 그렇구나.”
진짜 잘 됐으면 좋겠다. 승규가 나를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잘 됐으면 좋겠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승규의 말을 반복해서 답했다. 심장이 쿵쿵 두근거렸다. 벌써 좀 긴장이 되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기왕 서류 통과한 거, 자신감을 가지고 면접에 임하기로 했다. 승규가 언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일단 서류만 붙으면 무조건 프리패스다 생각하고 당당하게 면접장에 갈 생각이었다.
***
첫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도 면접을 봤지만, 아무래도 그때와는 마음가짐이 또 달랐다. 나는 엄마가 사준 디올 슈트를 입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사실 엄마가 사준 슈트 입기 정말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옷 살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도리가 없었다.
그냥 그 자체가 내 인생이 아직은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엄마와 싸우지 않았더라면, 엄마 극성에 면접 때가 되면 새로운 슈트부터 시작해서 구두와 가방까지 전부 미끈하게 맞춰줬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씁쓸했다.
면접장에 도착하자 다대다 블라인드 면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면접이 블라인드로 진행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스펙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실 따지자면 면접관이 공격할 거리는 좀 있었다.
석사 과정에 진학 중인 것은 나의 무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굳이 대학원까지 갔다가 취업 시장으로 진로를 돌린 이유에 관해 설명하려면 막막했다. 당장 돈이 급해서라고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업무 경쟁력이나 회사에 대한 관심도를 시험하는 편이 내게는 더 나았다.
코스메틱 회사라 그런지 아무래도 화장품에 대해서 많이 캐물었다. 날렵한 안경을 쓴 여자 면접관이 내게 로레알 화장품을 사용해 본 적이 있기는 하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 남자치고는 화장품이나 바디 용품을 비롯한 뷰티 프로덕트에 관심이 꽤 있는 편이라 답변이 수월했다. 스킨 케어 루틴에 로레알 계열사인 비요템과 키엘의 제품이 들어 있다고 답했다.
면접 팀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자였다. 어떻게 보면 나는 남자라서, 좀 적나라하게 말하면 외모가 빼어난 남자라서 면접에서 좀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로레알 코리아가 거대 화장품 기업이지만 남자들에게는 아직 인지도가 부족한데, 입사하게 되면 그 점을 중점적으로 보완할 수 있도록 전략을 짜겠다고 했다. 나는 경영학 중에서도 마케팅을 심도 있게 전공했기 때문에, 제품 브랜딩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어필도 빼놓지 않고 했다.
심각한 압박 면접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하면 계속해서 질문이 득달같이 따라붙어서 좀 피곤하긴 했다. 블라인드 면접이 끝난 후에는 영어 면접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면접을 볼 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면접을 마치고 트레이드 타워를 빠져나오자 온몸에 진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승규의 SUV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즈음에 부천 집에 도착하자 승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정갈하게 세팅된 초밥 도시락을 보자 마음이 찡했다. 나 고생했으니 맛있는 거 먹으라고 신경 썼을 승규의 마음이 예뻤다.
승규에게 도도도 달려간 나는 그의 품에 푹 안겨들었다. 우리 희수……. 내 정수리에 얼굴을 파묻은 승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희수야, 면접은 어땠어?”
연어 초밥을 입에 넣으니 그대로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아 피로가 풀리고 기분이 업됐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승규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휘고 웃었다.
“뭐,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나쁘지 않은 정도?”
“음. 솔직히 좀 잘 봤어.”
그 말에 승규가 킥킥 웃었다. 자기는 그럴 줄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팔을 뻗어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나는 내 앞머리를 매만지는 승규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거기 직원의 거의 90%가 여자라는 말은 동기한테 들었는데, 진짜 면접 볼 때 나만 빼고 다 여자니까 좀 민망하더라”
“우와. 우리 희수 그 회사 무조건 붙어야겠네.”
“왜?”
“그래야 딴 남자한테 눈 돌아갈 일 없으니까?”
어쭈. 눈을 뾰족하게 뜬 나는 승규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아야. 하나도 안 아프게 때렸는데 승규가 아픈 척을 했다.
“남자만 가득해도 눈 안 돌아가거든요?”
“하하. 농담이야.”
이런저런 면접 이야기를 풀어주니까 승규가 신기해했다. 승규 생각으로는 남자가 화장품 회사 들어간다는 게 아무래도 좀 놀라웠나 보다. 근데 또 생각해보니 너랑은 어울리는 것 같다고 부스스 웃기도 했다. 웃으면서 우묵하게 파이는 승규의 볼이 보기 좋아서 나는 팔을 뻗어 승규의 얼굴을 매만졌다.
밥을 다 먹고 쓰레기를 치우려고 부엌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승규가 나를 묵직하게 끌어안아 왔다.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어딘가 은근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승규를 슬쩍 쳐다보았다.
“희수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거칠고, 조금은 흥분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쓰레기봉투를 묶고 손을 씻는 내내 승규는 나를 뒤에서 안고 있었다. 일부러 좀 뜸을 들여서 느릿하게 움직인 후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승규를 돌아보고 눈을 깜빡였다.
“왜?”
“나 좀 미안한데.”
“응.”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식으로 운을 띄우는가 싶었다. 아니 솔직히 본능적으로는, 어떤 상황으로 향해 가는지는 사실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대체 어디서 우리 애인 스위치가 눌렸는지 궁금한 거지.
“너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존나 쌔끈해.”
프핫.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쪽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여전히 내 몸에 예쁘게 피트되는 고급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괜히 의식이 돼서 나도 내 옷차림을 한 번 슥 내려다봤다.
“어이구, 그랬어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는데, 나를 말 없이 바라보는 승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아. 이윽고 내뱉는 숨결이 부쩍 거칠어져 있었다.
“어. 좀 흐트러트리고 싶은 느낌?”
아무렇지 않은 듯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사실 욕정이 명백하게 어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허벅지가 좀 조여들었다.
“사실 나 아까부터 계속 서 있었어.”
승규가 나를 백허그 하고 있는 동안 엉덩이에 미친 존재감의 살덩이가 묵직하게 닿아 와서, 그 사실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히 몸을 돌리고 승규를 바라보았다. 하반신을 바짝 맞대자 묵직한 중심이 느껴졌다. 그대로 눈을 휘고 샐샐 웃으며 승규를 올려다봤다. 승규가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
“윤희수.”
“앗, 으응.”
“벽 짚고 서 봐.”
열띤 눈을 한 승규가 묘하게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평소보다 서늘한 느낌을 풍기는 승규의 날렵한 옆선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다. 승규에게서 돌아선 나는 승규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벽을 짚고 엉덩이를 내밀었다.
“엉덩이 내리지 말고.”
승규가 내 엉덩이를 살짝 내리쳤다. 벽을 짚으면서 자세가 애매해져 엉덩이가 아래로 좀 처졌나 보다. 사실 별로 아프진 않았는데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짝 얼어붙은 나는 엉덩이를 위로 높게 쳐들고 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아…….”
내 눈앞에는 낡은 벽만 보였다. 좀처럼 승규가 뒤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답답했다. 유일한 힌트는 승규가 내뱉는 가파른 숨소리였다. 궁금해서 고개를 돌리려고 하면, 승규는 내 목덜미를 지그시 붙잡고 내가 다시 정면을 향하도록 했다.
그렇게 나는 딱 승규의 사타구니가 있는 위치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대기했다. 사실 뭐 후배위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좋아하지. 가끔은 침대가 아닌 곳에서 하는 섹스도 역시 즐겁다. 그런데 오늘 승규는 분위기를 뭐랄까, 묘하게 껄끄러운 느낌이 들게끔 이끌어나갔다.
그래서 많이 긴장됐다. 근데 또 그게 색다른 흥분을 가져다주는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는 나는 눈을 내리감고 승규가 뭐라도 행동을 취하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규의 큼직한 상반신이 내 몸 위에 드리웠다.
그리고 길게 뻗은 손이 딱, 내 목줄기에 닿았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설마 뭐, 이대로 내 목을 조르는 건 아니겠지? 되게 뜬금없는 생각이긴 했는데, 뭔가 지금의 승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바르르 몸을 떠는데, 승규가 내가 매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으응, 승규야 왜?”
“쉬. 앞에 봐야지.”
승규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음성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성적인 기운에 몸이 흠칫 떨렸다. 슥슥 천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넥타이가 풀렸다. 이윽고 검은색의 넥타이가 눈앞에 둘렸다. 머리 뒤쪽 움직이는 손이 매듭을 짓는 것 같았다. 시야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벽을 붙잡고 있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 승규야.”
승규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아무 말 없이 허리만 깊숙이 숙이고 몸을 겹쳐왔다. 그러더니 별안간 내 귀를 빨아 삼키기 시작했다. 예민한 귓가가 단박에 끈적하게 적셔졌다.
눈이 가려지자 다른 감각이 더욱 민감하게 발달했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축축하고 까슬까슬한 혀가 자꾸만 귓가를 쓸어내리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후끈후끈해졌다.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아마 목덜미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을 게 뻔했다.
“으으응.”
나는 우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나랑 승규는 원래 섹스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 오늘은 전혀 아니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승규는 얕게 웃기만 했다. 나는 대체 승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차단된 데다가, 청각적인 정보도 평소보다 제한되어 있으니까 부쩍 답답했다. 어느 곳도 결박당하지 않았는데 단단하게 제압당한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서 엉덩이가 아래로 푹 꺼지려고 하면, 승규는 말없이 내가 허리만 다시 치켜들게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솔직히 그게 약간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짜릿짜릿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나는 넥타이만 풀어 내렸지 여전히 슈트를 온전하게 입고 있는 상태였다. 내 하반신으로 손을 뻗은 승규가 바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가랑이를 불쑥 파고들어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승규는 손을 움직였지만, 내 바지도 팬티도 완전히 아래로 끌어 내리지는 않았다. 딱 동그란 엉덩이가 드러날 만큼만 벗겨진 바지와 팬티가 어설프게 골반에 걸쳐졌다. 차가운 공기에 닿는 맨 살갗이 오소소했다. 뭔가 완전히 더 벗은 것보다 엉덩이만 딱 드러내놓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수치스러워서 나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내가 몸을 조금 뒤틀자 승규가 내게로 상체를 확 기울였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뒷목에 승규의 입술이 닿았다. 목을 베어 문 입술이 살갗을 살살 빨기 시작했다. 다음엔 혓바닥이 목선을 핥아 올렸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이 가려져서 감각이 너무 예민했다. 혀끝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부 위로 바싹 소름이 솟았다.
“하아, 하아….”
나는 어딘가 무력해진 기분으로 밭은 숨을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바지의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초조해지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살짝 핥아 내렸다. 금세 불뚝 솟아오른 뜨겁고 커다란 성기가 엉덩이에 들이밀어졌다.
뜨거운 기둥이 골 사이를 문지르듯 미끄러졌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여린 엉덩이 살에 느릿하게 비벼졌다. 승규도 완전히 바지를 탈의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성기가 엉덩이를 비비고 들 때마다 허벅지에는 거친 청바지의 결이 문질러졌다.
“아, 승규야아….”
새삼 승규의 성기가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넥타이에 가려진 눈을 꼭 감았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얬다. 성기가 삐걱삐걱 문질러지는 입구는 아직 조금도 젖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무린데. 당장 저렇게 큰 걸 어떻게. 엄청 아플 텐데.
“으응, 승규야.”
“…….”
“잠깐만, 그대로 넣으면 나.”
“쉬이.”
승규는 간결한 목소리로 나를 제압했다. 마치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가락 세 개를 내 입술로 가져왔다. 승규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떨결에 두툼하고 길쭉한 손가락을 물었다.
“빨아.”
낮은 목소리가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홀린 것처럼 승규의 말을 따랐다. 입안을 헤집는 손가락을 빨아 삼켰다. 말랑한 혀로 핥아 내리면서 축축하게 적셨다. 와중에도 계속 벽을 잡고 버티고 선 나의 몸 위로 승규는 흡사 표범처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벽을 잡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지려고 했다. 이러다가 아래로 푹 미끄러질 것 같은데, 그러면 뭔가 승규한테 혼날 것 같아서 조금 겁이 났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엉덩이를 높게 쳐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승규의 손가락을 쪽쪽 빠는 동안 하반신에서는 승규의 성기가 내 엉덩이 위로 음탕하게 문질러졌다. 극대화된 감각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를 몰아붙였다. 승규가 허리를 능숙하게 돌렸다. 서늘한 공기 중에 달랑 드러난 엉덩이 위로, 뜨끈하고 거칠하고 종내에는 축축하게 젖어 들기까지 하는 커다란 성기가 마구잡이로 비벼졌다.
그 아찔한 감촉을 도저히 그냥은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물고 있는 승규의 손가락에 완전히 의존했다. 마치 그것이 감로수라도 되는 것처럼 승규의 손가락만 쭙쭙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빨아댔다.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한 침이 어느덧 입가에 흥건했다.
“후으, 으으응.”
승규가 예고 없이 손가락을 내 입에서 쑥 뽑아냈다. 나는 꼭 공갈 젖꼭지를 뺏긴 아이라도 된 것처럼 묘한 상실감이 들었다.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아서 허덕이고 있는데 승규의 젖은 손가락이 예고 없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 아, 스, 승규야!”
거침없는 손가락이 안을 푹푹 쑤셨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젖은 손가락을 잘도 잡아 삼켰다. 승규는 내가 어느 곳을 만져주면 느끼는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조금도 헤매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전립선 근처를 눌러오는 손가락에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살짝 굽혀진 손가락이 내벽을 살살 긁어내렸다. 안 그래도 평균보다 예민한 몸인데 눈까지 가려진 지금은 정도가 심했다. 온몸의 모든 감각이 승규의 손가락이 헤집는 내벽으로만 집중되는 것만 같았다. 직접 자극을 가하지 않는데도 나의 성기가 꼿꼿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승규의 손가락은 점점 더 수월하게 안쪽을 드나들었다.
“희수야.”
내 안에 손가락을 깊이 쑤셔 박은 승규가 갑작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차마 대답도 못 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 아래가 다 젖었어.”
더운 숨이 귓가에서 퍼졌다. 승규의 목소리가 진동이 되어 웅웅 울렸다.
“아응, 그런 말, 흐으, 하지 마아.”
“소리 들려?”
승규가 손가락을 입구에 푹푹 밀어 넣었다. 손가락도 흥건하도록 축축하게 적셔져 있는 데다가, 내벽도 어느 순간 조금씩 젖어 들고 있었다. 정말로 아래가 온통 질척질척했다. 덕분에 승규의 손가락이 구멍을 박을 때마다 진짜로 아래에서 찌걱이고 찰박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아, 제바알.”
나의 애원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 승규가 왼손으로 내 성기를 붙잡아왔다. 나는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승규는 아찔하도록 움직였다. 오른손으로는 내벽의 전립선을 꾹 누르고 손목을 빠르게 흔들어 진동시키면서, 왼손으로는 미끌미끌하게 젖어 들기 시작한 내 성기 끝을 지그시 문질렀다.
그대로 승규가 내 성기를 쥔 채 두어 번 쳐올리자 나는 맥없이 정액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정의 여운을 느끼느라 목을 뒤로 쭉 젖혔다. 쾌감에 흐트러져 있는 나의 엉덩이를 승규가 양손으로 잡아 벌렸다.
“헉!”
그리고 승규가 안으로 들어왔다. 두툼한 귀두가 진입하고, 길쭉한 기둥이 밀려들어 왔다. 빠듯한 압박감에 숨을 쌔액쌔액 내쉬었다.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이 섹스에서 겪는 모든 게 낯설었는데, 막상 내 안으로 확 하고 들어오는 성기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마치 나의 내벽이 승규의 모양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아.”
완전히 내벽에 삽입한 승규가 나른하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 역시 익숙했다. 언제나 내 안에 자신을 다 집어넣고 나면 승규는 흡족함과 벅참이 섞인 신음을 흥분에 겨워 내뱉었다. 이제야 나는 지금 나를 안는 사람이 진짜 승규처럼 느껴졌다.
사실 승규가 뭘 심하게 한 것도 없었다. 못된 장난 수준이지, 객관적으로 그렇게 버겁게 몰아붙인 섹스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괜히 서럽고, 뒤늦게 내게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승규가 새삼 또 그립고 그랬다.
평소보다 낯선 느낌을 주는 섹스도 분명히 어딘가 짜릿하긴 한데, 나는 그래도 원래 승규가 좋았다. 승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나를 뜨겁게 안아주는 건 늘, 언제나 승규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뭔가 마음이 북받쳤다. 나도 모르게 맺힌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내 눈을 가린 넥타이의 보드라운 천이 젖어 들었다.
“승규야아.”
나는 우는 소리를 내며 승규를 불렀다. 승규가 엇박으로 쾅, 하고 나를 박아 올렸다. 아무래도 오늘 얘는 좀 뭐랄까,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쿵, 쿵, 나를 올려치는 성기에 다시 훌쩍훌쩍 눈물이 터졌다.
“흐응, 승규야아.”
“희수야?”
내가 진짜로 울고 있다는 걸 알아챈 승규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내 안을 찧어대던 승규의 커다란 성기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자기야, 나 얼굴 보고 싶어요.”
팔을 다급하게 뻗은 승규가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빠르게 풀어줬다. 나는 승규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양 볼에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을 게 뻔했다.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승규의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됐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 진짜 미치겠네.”
낮게 읊조린 승규가 그대로 내 뒷머리를 끌어당겨 깊이 키스했다. 승규의 혓바닥이 난폭하게 내 입안을 파고들었다. 몸을 숙이면서 삽입된 성기도 더욱 깊숙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쾅, 쾅. 단단한 기둥이 거세게 내 안을 치받았다.
“아, 으응, 흐응.”
“하…….”
“쫌만 살사알, 응?”
아직도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승규가 세게 깊이 박아줘서 좋은데, 너무 갑작스러울 정도로 호되게 밀려오는 쾌감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아래로 푹 가라앉으려는 내 몸을 승규가 단단한 팔로 받쳐 들었다.
“후으, 윤희수.”
“응, 으응, 흑.”
“나 오늘 살살 안 돼, 하.”
솔직히 그 말을 듣는데 왠지 모르게 쭈뼛하도록 흥분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안을 꽉 조였다. 큽. 승규가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서 길쭉하게 성기를 뽑아낸 승규가 입구 근처에 귀두를 걸고 문질렀다. 그러다가 다시 안으로 쾅 하고 파고들어 왔다.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처음에는 대체로 크고 느릿했던 성기의 움직임이 갈수록 짧고 빠듯해졌다. 퍽, 퍽. 내 말랑한 엉덩이에 승규의 튼튼한 허벅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도 안을 엉망으로 짓눌러대서 몸을 제대로 지탱할 수조차 없었다.
벽을 짚은 손이 주르륵 미끄러지고, 엉덩이가 푹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면 다시 승규가 내 골반을 양손으로 받쳐 들어 고정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것처럼 푹푹 찧어댔다. 승규의 귀두가 잔인하리만큼 전립선을 짓누르며 문질러서 다 죽었던 내 성기마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하…….”
뭔가 승규의 움직임이 다급해지는 게, 점점 끝이 찾아오는 것 같아서 나도 엉덩이에 힘을 더 주려고 했다. 그런데 승규가 갑자기 성기를 쑥 하고 나에게서 뽑아냈다. 나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승규도 솔직히 안에 싸는 거 좋아하고, 나도 빼는 건 귀찮지만, 안에 승규가 퍼져나가는 감촉은 좋아하는데 갑자기 왜 그러나 싶었다.
거칠게 몰아쉰 승규가 내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쭉 나를 끌었다. 승규의 팔을 따라 내 몸이 팔랑거렸다. 나는 얼떨결에 승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방금까지 내 안에 들어 있던 승규의 성기가 번들거렸다. 내 머리를 여전히 꽉 쥐고 있는 승규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빨아 볼래?”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조금 잃을 정도로 흥분에 달아오른 승규의 얼굴이 너무 섹시했다. 그래서 나는 금세 납득하고 승규의 성기를 입에 앙 물었다. 쭙쭙거리며 열심히 빨았다. 승규한테서는 짭짤하고 씁쓰름한 맛이 났다.
“흐읏…….”
얼마 지나지 않아 입안에 정액 내음이 확 퍼졌다. 나는 얌전한 얼굴을 하고 내게 토해진 승규를 꿀꺽 삼켰다. 땀에 흠뻑 젖어있는 승규가 털썩 주저앉아 나를 푹 껴안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이제는 완전히 내가 익숙한 승규였다. 승규는 내 뺨을 양손으로 쥐고 내가 좋아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쪽쪽 뽀뽀했다.
“하아…….”
나도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는 승규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고여 있는 땀을 꼼꼼하게 닦아줬다.
“…….”
“…….”
그렇게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먼저 웃었던 게 누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못 견디겠다는 듯 킥킥거리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흥분했어?”
“아… 모르겠어.”
승규가 모른 척 말끝을 얼버무렸다. 나는 그런 승규를 보고 입꼬리를 빙긋 끌어 올렸다.
“우리 애인 이런 취향이 있는지 몰랐네?”
“…….”
승규는 짓궂은 내 질문에 대답을 못 하고 괜히 고개만 슥 돌렸다. 무슨 말로 더 놀려볼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승규가 다시 나를 향했다. 승규의 고동색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넌 솔직히 내가 너 두고 하는 상상의 반도 모를걸.”
벌게진 얼굴의 승규가 조금 심드렁한 듯 부끄러운 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승규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자기야.”
나는 멋쩍은지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는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승규가 나를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응.”
“그럼 하나하나 다 가르쳐 줘.”
눈을 기다랗게 휘고 승규를 유혹했다.
***
섹스를 마치고 승규와 함께 침대에 길게 누웠다. 나는 승규의 너른 가슴팍을 쏙 파고들었다. 승규의 허리를 꼭 껴안고 승규의 탄탄한 상체에 볼을 문질렀다. 살성이 다른 피부가 문질러질 때 생기는 마찰감이 못내 좋았다. 나른한 얼굴의 승규가 그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수야.”
나는 나를 나직하게 부르는 승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떠올렸다. 일부러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이며 승규를 빤히 올려다보자 승규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원래도 계속 얘기하려고 했는데.”
“응.”
“너 면접 보고 온 거 보니까 생각나서.”
우리 애인은, 아무래도 좀 진지한 얘기를 지나치게 섹스 후에 몰아서 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뭔가 지금 승규의 얼굴이 생각보다 진중했다. 나는 아직 들뜨고 간지러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승규의 얼굴을 보았다.
“희수야, 너 나 대학교 안 간 건 알지.”
“응.”
“그래서 내가 일을 일찍 시작했잖아.”
“으응.”
승규는 여전히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조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아놓은 돈이 좀 있거든.”
“응.”
나는 승규를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너 취직하면 최대한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한번 알아볼래?”
“…….”
“더 좋은 집으로, 우리 이사 가자.”
그리고 승규가 씩 웃는데 나는 마음이 쿵 울렸다. 아무래도 지금도 승규와 같이 살고는 있지만, 승규의 원룸은 사실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승규 한 사람이 살기에 최적화된 공간을 내가 과포화시키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나도 막연하게 하기는 했다. 다만 당장 대책이 안 서니까 언제까지고 버텨야 하겠다고 각오했을 뿐이었다.
나한테는 그동안 티 하나 안 냈으면서, 승규가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싶었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어딘가 찡한 게 아프게 울리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처럼 얼떨결에 동거하게 된 게 아니라, 승규가 내게 같이 살자고 정식으로 제안해오는 느낌이라서 심장이 떨리기도 했다.
“그니까 지금 힘들어도 조금만.”
“바보야, 내가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나는 승규의 몸을 확 껴안았다. 나는 요새 승규와의 미래를 꿈꾸면서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승규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승규 역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나를 행복하게 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