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권-1화 (17/23)

1672929696504.jpg 


오피스텔에서 짐을 빼버린 건 고작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자연스럽게 아빠가 준 생활비 카드를 내밀었다가 결제가 거부당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학교까지 직접 찾아온 엄마는 대학원에 입학할 때 나에게 물려줬던 아우디의 차 키를 반납하라고 했다.

우리 부모님이지만 솔직히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어라 군소리하면 그게 더 구차할 것 같아서 엄마가 내민 손에 차 키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아빠 카드를 내던졌다. 이깟 것 없이도 엄마 아들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승규와 동거를 시작했다. 우리 제대로 연애한 지 겨우 한 달인데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다고 농담하자 승규가 피식 웃었다. 승규는 다만 내가 부천에서 생활하기를 힘들어할까 봐 오로지 그 걱정뿐이었다. 나는 너 있으면 힘든 거 하나도 없다고 승규에게 말하고 배시시 웃었다.

승규랑 따로 살 때는 밤이 되어 헤어지고도 마냥 아쉬워서 자기 전에 승규와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서로 통화하면서 종종 매달렸다. 동거를 시작하니 내가 잠들기 전에도 옆에 승규가 있고, 일찍 일어나면 눈을 뜰 때도 옆에 승규가 있는 건 정말 좋았다. 언젠가 승규에게 말했던 것처럼, 집안 어디든 승규의 냄새와 승규의 흔적으로 가득한 것 역시 좋았다. 승규와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말 힘든 게 하나도 없진 않았다. 사실은, 부천에서 사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승규의 얼굴을 보면 물론 마음이 사르르 녹았지만, 아무리 같이 살아도 승규가 24시간 나와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승규가 실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 역시 우리를 에워쌌다.

당장 승규의 집에 막 이사 왔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승규의 집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생활권이 달라진 것을 체감했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길어진 등하교 시간이었다.

차가 있을 때는 솔직히 신촌에서 부천까지를 오가는 게 그렇게까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운전이 귀찮긴 했지만, 매일같이 부천 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번거로운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매일 아침 부천에서 학교로 대중교통을 통해 등교해야 했다.

승규는 자기 차를 내주려고 했지만, 내가 여러 번 거절했다. 나한테 차 주면 자기는 출퇴근 어떻게 하려고. 갑작스레 이사하게 된 것도 미안한데, 승규한테 민폐 끼치긴 절대 싫었다.

승규의 원룸에서 학교가 있는 신촌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편도로 한 시간 반가량이 걸렸다. 외진 원룸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시간만 해도 상당했고, 환승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솔직히 쾌적한 외제차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페달만 밟다가 우르르 쏟아지는 사람들 틈에 끼여서 출근길의 지하철과 버스를 타려니 영 적응이 안 됐다.

겨우 학교에 도착하면 그것만으로도 진이 쭉 빠져서 아무런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에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교수님 수업 조교도 해야 했고, 대학원 수업도 들어야 했고, 졸업 논문도 완성해야 했고, 취업 준비도 해야 했다. 그 모든 일을 해치우고 다시 한 시간 반이 걸려서 원룸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숨이 턱 막혔다.

화요일 목요일에는 이대역에서 과외도 있었다. 학기 중이라 급하게 과외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는데, 다행히 진호의 소개로 영어 과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무 살 때 경험 삼아 몇 번 과외 해본 적은 있었지만, 당장 생활비가 없어서 과외를 하게 되자 수업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스트레스받았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과외까지 하려니까 이미 짜증이 났던 것 같은데, 그냥 초등학생 애 엄마가 주는 돈 사십 만 원에 목매달고 눈치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별수가 없었다. 승규의 집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규에게 돈까지 받아서 쓰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솔직히 아버지 카드 쓰는 게 너무 당연하고 편해서 지금까지 내 돈을 따로 모아놓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직 학생이라서 더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학기 시작하면서 받았던 조교비라도 따로 챙겨둘 걸 그랬다. 정작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있는 돈이라 홀라당 다 써버렸다.

인제 와서야 나 너무 순진했구나 싶었다. 어쩌면 엄마의 말대로 나는 현실을 지나치게 몰랐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비호가 거두어진 나의 삶은 팍팍하고 버거웠다. 하지만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안락을 추구하기 위해 내가 믿는 가치를 포기하는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독립적으로 선택하고 생활할 수 있다는 걸 부모님께 증명하고 싶었다. 승규에게도 내가 이제는 겨우 이 정도의 일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안심시키고 싶었다.

지금은 모든 일이 너무 일시적이고 임시적이었다. 그래서 불안정했고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내가 빨리 취직을 하고 자리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가을이 깊어지자 본격적으로 하반기 채용 공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올라오는 공고들을 꼼꼼히 살피며 취업 준비에 몰두했다.

***

식탁에 앉아 랩탑 키보드를 바쁘게 두들기고 있던 나는 현관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귀를 쫑긋했다.

“승규야 왔어?”

“응.”

고개를 돌리자 승규가 내게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나를 뒤에서 푹 끌어안은 승규가 내 턱 끝을 살짝 잡아들고 키스했다. 쌉싸래한 혀끝이 깊숙이 섞여들었다. 섞이는 침이 새삼 참 달게 느껴져서 나는 눈을 꼭 감고 승규의 입술을 쪽쪽 빨았다.

“일 많이 힘들었지?”

“힘들긴.”

승규가 근사하게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승규의 길쭉한 눈을 보는데 나는 솔직히 마음이 아팠다. 이미 시간이 열 시 반이었다. 내가 부천 집으로 들어온 이후 승규가 야근을 늘린 것을 알고 있었다. 승규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지 알 것 같아서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나는 승규의 피로한 얼굴을 살살 쓸어내렸다. 살짝 터져서 부풀어 오른 입술을 쪼아대듯 쪽쪽 뽀뽀했다. 승규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승규에게 짐이 되는 건 제발 아니길 바랐다. 그러니 내가 빨리 잘 돼야 해.

“희수 너는 뭐 하고 있었어?”

“나?”

“응.”

“그냥, 원서 쓰고 있었지.”

사실 학교 연구실에서 작업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승규보다 집에 일찍 들어와서 이렇게 승규를 기다리는 것이 더 좋았다. 승규가 힘들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그 자리에서 승규를 반겨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잘 돼 가?”

나의 옆자리에 앉은 승규가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승규의 머리칼과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냥, 레쥬메는 다 했는데 커버 레터에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음…….”

“이런 거 많이 안 해 봐서 감이 잘 안 잡혀.”

지금은 승규의 얼굴을 보고 승규의 냄새를 맡아서 훨씬 괜찮지만, 나는 사실 방금까지만 해도 상당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었다. 평소보다 피부 결이 거칠어진 얼굴을 느릿하게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나는 힘없는 얼굴로 승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력서 같은 거야?”

“아 응. 레쥬메가 이력서고, 커버 레터는 그냥…… 약간 자기소개서 비슷한 거?”

“우와. 다 영어네.”

“어어.”

“애인 완전 대단한데?”

내가 몰두하고 있던 랩탑 스크린에 고개를 들이민 승규가 눈을 껌뻑였다. 일부러 나를 치켜세우는 듯한 승규의 과장된 말투가 귀여워서 나는 킥킥 웃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 웃음이 잦아들 무렵, 승규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런 승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승규의 진솔한 눈동자를 또렷하게 지켜보았다.

“승규야.”

“응.”

“그냥 지금 이렇게 내 옆에 있는 거로 충분해.”

그 말에 씩 웃어 보인 승규가 내게 다시 키스했다. 축축하게 닿아있는 것은 사실 입술뿐인데, 승규로 인해 온몸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키스가 점점 진해졌다. 더 하면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를 아쉽게 놓아줬다. 나 이제 진짜 샤워해야겠다. 승규가 낮게 중얼거렸다.

승규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커버 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하도 막혀서, 커버 레터를 위한 파워풀한 동사 모음 따위를 구글에 검색하고 있다 보면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허탈한 기분이 치밀었다. 그래도 나를 안아주었던 승규의 체온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냈다.

“와.”

아랫도리에 수건 하나만을 걸치고 나오는 승규의 벗은 몸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완전, 진짜 조각. 순간적으로 초콜릿을 한꺼번에 백 개는 먹은 것처럼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눈이 마주치자 승규가 입꼬리를 슥 올렸다. 정말이지 나는 그대로 승규에게 달려들고만 싶었다. 그치만.

“오늘 먼저 잘래?”

“많이 남았어?”

“어. 나 이거 자정까지 제출해야 돼서. 불 꺼도 돼.”

“나 괜찮은데.”

“그래야 내가 맘이 편해. 너 내일 일찍 출근하잖아.”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걸어온 승규가 내 정수리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나는 승규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고 웃었다. 승규가 똑 스위치를 누르자 원룸이 어두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규가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희수야.”

승규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족하다고 생각했다.

***

“캘룩, 캘룩.”

새벽에 목이 따끔거려서 눈이 떠졌다. 비좁고 딱딱한 침대가 불편해서 몸을 뒤틀자 내 허리에 둘려 있던 승규의 팔이 나를 더욱 세게 당겼다. 캘룩. 나는 다시 한번 기침을 했다. 타들어 가는 듯한 목구멍이 너무 아팠다. 무거운 승규의 팔을 겨우 들어 올리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일어섰다가, 금세 어깨를 웅크리고 몸을 끌어안았다. 얇고 좁은 창문으로 살살 스며드는 찬바람 덕에 실내가 스산했다. 가을이 한창 여물어 가면서 바람은 매서워지고 공기가 부쩍 건조해졌다. 으슬으슬했다. 몸이 약한 편이라 이런 날씨에는 꼭 감기에 걸리곤 했다.

좁은 방을 가로질러 부엌에서 꼴깍꼴깍 물을 마셨다. 충분히 축축하게 적셨는데도 목구멍은 여전히 따끔거렸다. 코의 점막도 바싹 말라 있었다. 집안 공기가 버석버석 부스러질 만큼 건조했다. 코끝에 닿는 마른 공기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인상을 찌푸렸다.

한숨을 푹 내쉬고 화장실로 향했다. 고이 접혀 있던 수건을 펴서 찬물에 적셨다. 젖은 수건을 승규와 나의 속옷이 듬성듬성 걸려 있는 빨래 건조대에 걸어 놓았다. 그걸로라도, 조금이나마 방 안 상태가 나아지길 바랐다. 그대로 침대로 돌아가려는데 잠자던 승규가 자세를 바꿔서 누울 자리를 좀처럼 찾기가 어려웠다.

자기연민 하기 싫은데, 순간 지금 내 모습이 너무 궁상맞게 느껴졌다.

솔직히 원래 살던 오피스텔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준 공기청정기와 가습기로 언제나 실내 습도가 적절하고 공기가 쾌적했던 ‘내 집’이 떠올랐다. 잠은 편하게 자야 하루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일부러 매트리스는 비싼 거로 샀다. 눕기만 해도 하루의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던 넓고 푹신한 침대가 그리웠다.

여전히 나는 승규를 만나기 위해 원래 가져야 할 것들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승규가 없이는 내가 손에 틀어쥐고 있던 안락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이 단박에 사라지자 느껴지는 하강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승규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건 별개였다.

침대에 겨우 자리를 잡은 나는 아득해진 기분으로 승규의 등을 끌어안았다. 내가 의지할 곳이라곤 곤히 잠든 승규의 따뜻한 체온과 규칙적인 심박 소리뿐이었다.

따끔거리는 목 덕에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자 오한이 슥 도는 게 몸 상태가 영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말 감기가 오려는 것 같았다. 승규는 이미 출근했는지 침대가 싸늘하게 비어 있었다. 늦잠 자서 승규 얼굴 못 본 것에서부터, 아마 하루가 꼬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부천에서 신촌까지의 등교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자 기진맥진해서 지원서를 건드릴 생각도 못 하고 연구실에 늘어져 있는데, 조교를 맡은 수업의 학생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중간고사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내게 다가와 따지기 시작했다.

시험지와 답안을 확인해 봤지만, 그의 주장은 순 억지였다. 성적을 올려 줄 수 없는 이유를 그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했는데, 성적 안 올려 주면 자기 이번에 큰일 난다며 내게 무작정 감정적으로 굴었다. 그의 무례하고 유아적인 태도에 나는 무척 불쾌해졌다. 그렇게 삼십여 분을 시달리고 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밥을 전혀 먹고 싶지 않았는데 이젠 내키는 대로 굶으면 나만 힘들어지는 걸 알았다. 학생식당에서 대충 맛없는 점심을 때웠다. 오후에는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고 논문 진행 상황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야 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교수님의 오피스를 찾았다.

나에게 박사 진학을 간곡히 권유하던 지도교수님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끝내 취업을 고집한 내가 아무래도 괘씸하신 모양이었다. 입학할 때에는 미국으로 박사 간다고 해서 뽑았는데 왜 마음을 바꿔 자신을 곤란하게 하냐며, 내가 그의 뒤통수를 쳤다는 식으로 뼈있는 농담을 하기도 하셨다. 그래서 요즘 연구실 분위기가 개판이었다. 그래 뭐 그것까지는, 다 괜찮았다.

문제는 교수님이 내 석사 논문 피드백을 주실 때 교묘하게 나에게 보복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논문에서 뛰어난 학업적인 성취를 이루고픈 욕심은 있지만, 지금은 취업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논문은 그냥 마무리만 어떻게든 짓고 싶을 뿐인데, 교수님이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는 핑계로 작성한 논문의 문단 하나하나마다 질리도록 꼬투리를 잡았다.

오늘은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분명 저번 미팅에서 말씀해 주신 부분을 제대로 보완해 왔는데, 무슨 이유로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내가 긁어모은 데이터의 신뢰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셨다. 교수님은 내가 마땅찮아 그냥 짜증을 쏟는 건지,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데이터 처음부터 다시 모아야 하냐는 내 질문에 교수님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없으셨다. 교수님이 그렇다고 대답하셔도 나는 사실 그렇게는 못 했다. 데이터 모으는 과정 자체도 힘들었지만, 취업 준비를 병행하려면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사정 뻔히 알면서 저러시는 거였다.

내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면서 기분 풀어드리길 원하시는 걸까. 솔직히 한숨이 푹 나왔다. 지금 당장은 정말 그럴 힘이 없어서 그냥 인사만 교수님께 드리고 오피스에서 빠져나왔다. 눈앞이 막막했다. 일단은 후퇴했지만, 최종 디펜스에서 교수님 허가 못 받으면 학교 졸업 못 한다. 조만간 다시 교수님 찾아뵙고 구질구질하게 사정 설명을 해야 했다.

시간이 빠듯해서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저녁 시간에 잡혀 있는 과외를 오늘만 그냥 미룰까 싶었다. 미루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수업 미루면 돈 받는 날짜도 밀려나는 게 문제지. 한숨을 쉬고 이대역으로 향했다.

솔직히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이 제대로 수업에 집중하고 영어를 배운다는 것도 웃겼다. 그냥 나도 시간 때우고 놀아준다고 생각하려고, 애써 부담 안 가지려고 했다. 문제는 학생이 나를 점점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을 계기로 나를 만만하게 봤는지 모르겠다. 내가 학생을 제대로 제압할 수 없는 빵점짜리 선생님이었는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알파벳을 공책에 좀 써보라고 했는데, 싫다고 떼를 쓰던 학생이 나에게 연필을 던졌다. 손등에 연필의 뾰족한 모서리가 탁 맞았다.

참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나는 선생님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학생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랬더니 놀란 애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애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무슨 일이냐며 방문을 열었다. 의구심 섞인 시선이 나를 훑어 내리자 흠칫 몸이 떨렸다.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는데도 애 엄마의 표정이 좀처럼 좋아지질 않았다. 애가 진정이 안 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거로 하고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아, 과외 잘리면 안 되는데. 사실상 과외비가 내 생활비의 전부라 애 엄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씁쓸했다. 지쳤다.

오늘은 승규도 야근하는 날이라 늦게까지 일한다. 그래도 목소리라도 잠깐 들어 볼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수업 중이던 7시 40분에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푸쉬 알림을 끌어내린 나는 제목을 확인했다.

Thank you for your interests in the position at P&G.

아마 얼마 전에 지원한 신입사원 전형의 결과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통지 메일에 나는 긴장으로 바싹 말라오는 입안을 축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최초로 지원했던 회사이고,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 좆같았지만, 이 회사 서류 통과만 했다면 그래도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눌렀다.

빠르게 메일을 훑어 내렸다. 두 번째 문단에 있는 ‘Unfortunately’라는 단어를 확인하자 심장이 쿵 하고 발끝까지 떨어졌다. 솔직히 잘 믿기지 않아서 메일을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형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 하나 빠지는 스펙이 아니니 취업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했다. 진로 상담 세션에서도 그랬고 동기들이나 친구들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취업 준비에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자만하지도 않았다. 당장 승규랑 살길이 막막하니 정말로 절박한 마음으로 노력해서 원서를 작성했다.

취업 시장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나만은 예외일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첫 회사의 첫 번째 전형에서부터 떨어질 줄은 몰랐다. 충격이었다. 순간 든 생각은, 앞으로도 이러면 어떡하지. 처음으로 취업에 대한 두려움이 실체화했다.

정말이지 세상은 왜 내 마음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걸까.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깊은 좌절과 원망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끈뜨끈한 게 아마도 열이 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나는 아주 너덜너덜했다. 이대로 다시 두 번 환승해서 부천까지 돌아갈 생각을 하니까 아득했다.

차가운 바람이 슁슁 몰아치는 거리를 차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아우디는 언감생심이고, 그냥 택시라도 좀 타고 싶었다. 근데 돈이 없었다. 어플을 켜서 확인해보니 집까지 대충 이만 원이 나온다고 했다.

이만 원 정말 예전의 나에겐 우스운 돈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한 달에 사십만 원 가지고 생활하는데 거기서 핸드폰비 빠지고 식비 빠지니까 정말이지 빠듯했다. 제대로 계획해서 분배하지 못하고, 과외비 막 받았을 때 생각보다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더 그랬다.

과외비 나오려면 아직도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했다. 지금 택시 타면 종내엔 밥을 굶거나, ……아니면 정말로 승규에게 돈을 받아서 써야 했다. 입안이 씁쓸했다.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픈 몸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퇴근 시간이 살짝 지났는데도 오늘따라 사람이 징그럽게 많았다. 자리에 앉지도 못해서 지하철이 덜컹덜컹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몸이 치였다. 아프니까 신경이 예민해져서 역하게 풍기는 사람들의 체취에 욱 하고 토기가 치밀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지하철 환승을 한 번 하고,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마침내 버스 정류장에 내렸지만, 원룸에 가려면 골목길을 따라 앞으로 십오 분은 더 걸어야 했다. 몸이 정말 그대로 푹 고꾸라질 것처럼 무거웠다.

그냥 승규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말할까 고민이 됐다. 하지만 승규 지금 일하는 중일 텐데……. 부르면 당장 와줄 것을 알기에 오히려 더 그럴 수가 없었다. 승규에게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늘 조마조마한 앤데, 설령 오늘처럼 그렇지 않은 날일지라도 승규 앞에서는 씩씩하게 잘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절벅절벅 늘어지는 발걸음을 옮겼다.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열 시에 가까웠다. 어두운 방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자 좁은 방의 초라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승규 냄새는 나는데, 승규는 방에 없었다.

“흐어어어엉!”

결국, 참아 왔던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너무 힘들고, 너무 서러웠다. 당연히 승규와 함께하기로 한 나의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세상 쓴맛 못 봐서 철없는 소리 한다는 엄마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는 게 갑자기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너무 서러웠다. 팍팍해지는 삶에 잘 적응하기가 어려워서 모든 게 버거웠고, 승규가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뀐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또 속물 같아서 싫었다.

으엉, 흐어엉, 흐어어어엉. 한번 울음이 터지기 시작하자 그동안 애써 꾹꾹 눌러 놓았던 모든 게 봇물 터지듯 쇄도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식탁에 고개를 숙이고 계속 훌쩍훌쩍 울었다. 감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 너무 고단해서인지 몸에서는 열이 펄펄 끓었다.

나는 어쩌면 계속해서 다 괜찮다고, 아직 견딜 수 있다고, 그렇게까지는 힘들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이야기해 오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실 나는 너무 힘들었다. 한번 내 안에서 그걸 인정하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겨우겨우 견뎌왔던 수많은 일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철없는 소리 같지만, 솔직히 씀씀이 줄이는 게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한 달에 용돈으로만 이백만 원은 우습게 쓰다가 갑자기 사십만 원 가지고 모든 걸 다 해결하려고 하니까 목 끝이 꽉 차오른 것처럼 답답했다. 적은 돈에 벌벌 떨게 되는 내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쇼핑은 꿈도 꾸지 못했다. 김지운과 유유히 놀러 다니며 봤던 콘서트나 뮤지컬, 오페라 같은 돈 드는 취미도 전부 다 멈췄다. 그거 참는 것까진 사실 괜찮았다. 그런데 평소처럼 밥을 학교 근처의 취향 맞는 식당에서 못 사 먹고, 학식 먹거나 편의점 음식으로 때워야 하자 거기부턴 정말 견디기 힘들게 비참했다.

승규는 정확히 내가 과외로 얼마를 버는지는 몰랐다. 아마 평소에 내가 얼마를 쓰는지도 잘 몰랐을 거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자주 얘기했다. 그치만 난 정말 그러기는 싫었다. 승규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봐서 아는데,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요즘 일까지 늘렸는데, 내가 사치하는 거로 그 귀한 돈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런데도 평소에 쓰는 만큼 돈을 못 쓰니까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과외를 더 늘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작업해야 하는 논문과 작성해야 하는 회사 원서만 두고 봐도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돈 쓰고 싶어서 이 상황에 과외를 늘린다면 그거야말로 주객전도였다.

“흑, 으윽. 으으윽.”

씨발, 근데 진짜 어떻게 이만 원이 없어서 택시를 못 탈 수가 있냐. 생각하다 보니 존나 억울했다. 그리고 내가 되게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거 안 타서 이렇게 힘들 거였으면, 그냥 눈 한 번 딱 감고 탈걸. 뭐하러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고 있나 싶었다. 정 돈 부족하면 승규한테 달라고 해도 그거 싫다고 할 애도 아닌데.

하지만 인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서러움이 북받쳐서 눈앞이 노랗게 물들 지경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그냥 울다 보니까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안 할 수가 있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좋았다. 논문 작성도, 취업 계획도, 돈 걱정도, 그냥 다 뒤로 미뤄 두고 싶었다.

“희수야?”

그렇게 울음에 정신을 놓고 있느라, 나는 승규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렸다.

“흑, 으윽.”

대답하려고 했는데 우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분명히 눈물을 그치려고 했다.

“……너 울어?”

하지만 막상 승규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가 확 북받쳐서 왈칵하고 울음이 또 터졌다. 

“아니, 흑, 아니야.”

“…….”

“나 안 울어.”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내가 우는 거 보면 승규는 나보다 배로 더 힘들 텐데. 황급히 손등을 들어 눈물을 싹싹 닦아냈다. 또 눈물이 새려고 해서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바쁘게 문질러지는 눈두덩이가 퍽 쓰라렸다. 머리에 이명이 울릴 정도로 울어대서 눈가가 퉁퉁 부풀어 있었다.

승규는 그런 나를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

좁은 방 안이 순간 고요했다. 승규와 눈이 제대로 마주치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아. 아득한 한숨을 내뱉는 승규의 표정은 그대로 아스러질 듯 고통스러워 보였다.

내가 앉아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온 승규가 내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몸을 푹 끌어당겨 껴안았다. 얕게 들썩이는 나의 가슴팍에 승규의 얼굴이 비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승규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승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애인.”

일부러 밝음을 가장하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직도 퉁퉁 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나 역시 발랄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 끝이 보기 싫게 갈라져서 민망했다.

“뭐가 그렇게 속상했어?”

승규가 나를 올려다봤다. 뭉게구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승규야말로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팔을 길게 뻗은 승규가 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

“…….”

고등학생 때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사소한 일로 승규에게 응석 부리는 걸 좋아했다. 억울하고 짜증 나는 일을 재잘재잘 늘어놓으며 어리광부리면, 승규가 바다처럼 넓은 가슴으로 내가 하는 말들을 다 품어주고 무조건 내 편이 돼주는 게 못 견디게 좋았다.

“희수야…….”

승규가 착잡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그런 승규를 외면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정말 힘들 때가 되자, 지금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하고 고단한지 승규에게 있는 그대로 고해바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 승규가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승규 마음 속상하게만 하는 걸까 봐 겁이 났다.

“별일 아니었어…….”

“…….”

“그냥…… 응, 별일 아니네.”

나는 얼버무렸다. 내 품에 안긴 승규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하도 심하게 울어대서인지 여전히 띵띵 부은 눈가가 쓰라렸다. 열감이 화르륵 번져 있는 몸이 후끈후끈했다. 괜찮지 않지만, 나는 내 괜찮지 않음으로 인해 승규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크게 몰아쉰 승규가 다시금 내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승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승규가 이미 나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승규가 나를 꽉 껴안았다. 너른 가슴이 나를 지그시 짓누르는 압박감이 좋아서 눈을 내리감았다. 코끝에 은은하게 퍼지는 승규의 체취를 깊이 들이켰다.

“왜 울었는지 나한테 말 안 해줄 거야?”

승규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 승규의 눈동자가 조금 축축했다. 어딘가 쓰라린 마음으로 나는 승규의 남자답고 잘생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다 그쳤다니까.”

“희수야.”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승규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나를 향한 주문, 승규를 향한 확신. 그렇게 되뇌듯 중얼거리며 나는 배시시 웃었다. 승규가 다시금 내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 전반을 꼼꼼하게 매만지던 손바닥이 불덩이 같은 이마에 슥 스쳤다. 승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뜨거워…….”

승규가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까지 괜찮은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감기에 잘못 걸리면 앞으로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질 게 뻔했다. 나는 헛기침을 큼큼하고 따끔거리는 목을 가다듬었다.

“자기야.”

“응.”

“그냥 내가 조금 아파서.”

“…….”

“그래서 그런가 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바라보는 승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승규의 두툼한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만 있었다.

“어디가 아파.”

“그냥 감기 기운.”

내게 기대오는 승규의 몸을 살짝 떼어냈다. 참담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승규를 차마 오래 볼 수 없었다. 몸을 아래로 굽혀 승규의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짧게 뽀뽀했다.

“승규야.”

“응, 희수야.”

“나 약국에서 감기약만 좀 사다 줄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승규가 툭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조금만 기다려, 희수야. 나를 두고 집에서 돌아 나섰다. 승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찬물로 세수를 여러 번 하며 얼굴의 부기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나로서도 정말 참다 참다 어쩔 수가 없어서 울음이 터진 것이었지만, 볼썽사나운 모습을 승규에게 보이게 되어 뭉글거리는 죄책감이 들었다.

싸늘한 바깥세상으로 승규는 감기약을 사러 나갔다. 승규가 나가고 나서야 이 시간에 문 연 약국이 있으려나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깜깜하게 가라앉은 밤을 비추는 좁은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다시 돌아온 승규를 보고는 정말 기쁜 것처럼 산뜻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승규가 내게 흰색 비닐봉지를 쓱 내밀었다. 종합 감기약부터 시작해 해열제에 심지어는 각종 영양제까지, 약국 봉투가 그대로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내게 약을 건네는 승규의 손에는 쌉싸래한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약을 받아드는 대신 승규의 커다란 품에 푹 안겨들었다. 나는 승규를 사랑했다.

***

그날의 사건은 우리 사이에서 없는 일이 되었다. 승규도 내가 울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시 캐묻지 않았고, 나도 눈물이라곤 전혀 흘린 적 없었던 것처럼 발랄한 척 행동했다.

당시 해열제를 먹어서 열은 일단 떨어졌는데, 이후로도 감기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나는 건조한 원룸 안에서 계속해서 캘룩거렸다. 승규는 걱정스럽다 못해 스산한 눈빛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제는 주말이었다. 끔찍한 등하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한결 편했다. 승규는 쉬는 날이 규칙적이지 않았는데, 나랑 살면서부터는 오프를 거의 내가 학교에 안 가는 주말로 돌렸다. 승규와 함께 보낼 주말을 기대하면 그간의 고단함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우리는 집에 같이 있었다. 사실 한창 원서 시즌이라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고 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식탁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랩탑을 들여다봤다. P&G에서의 탈락을 절치부심한 나는 다른 기업들의 지원서를 철두철미하게 작성했다. 그동안 승규는 빨래나 청소 따위의 밀려 있던 집안일을 해치웠다.

서류 작성에 한참 처박혀 있다가도 고개를 슥 돌리면 승규의 잘빠진 옆선이 보였다. 그래도, 정말 그것만으로도 마냥 좋아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견디지 못하고 서로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쪽쪽 하는 것도 좋았다. 승규는 항상 그렇게 나를 달콤하게 만들어줬다.

“희수야.”

“으응?”

승규가 나를 뒤에서 덥석 끌어안았다. 나는 승규를 돌아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선이 맞물리자 눈웃음을 샐샐 쳤다. 승규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내 앞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렸다.

“아직 많이 남았어?”

“아니, 이제 거의 다 했어.”

“그럼 우리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응?”

“그냥, 내가 희수 너 좋아하는 거 사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웃는 승규에게서는 어딘가 씁쓸한 기운이 풍겼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승규가 종일 내 옆에 있어서인지, 오늘은 원서 작성도 집중이 잘 돼서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맛있는 음식 먹으면 피로도 풀리고 기분도 업되고 딱 좋을 것 같았다.

“우와. 좋지이?”

“희수 너 뭐 먹고 싶어?”

승규가 물었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학식과 편의점 도시락은 이제 정말 물리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집에서 승규가 해주는 요리도, 맛없는 건 아니었지만 밍숭맹숭했다. 솔직히 진짜 맛있는 거 먹고 싶긴 했다.

“으음…….”

그때 순간 머릿속에 언젠가 김지운과 함께 갔던 청담동의 스테이크 하우스가 떠올랐다. 거기 분위기도 참 좋았고, 육즙이 적당하게 흐르는 스테이크 미디엄 레어로 딱 알맞게 익혀서 내줬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희수 철없게. 또 정신 못 차리려고 했다. 나는 다시금 승규를 또박또박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 그럼 치킨 시켜 먹자.”

그러나 나의 말을 듣는 승규의 얼굴이 어딘가 떨떠름했다.

“너 정말 그거 좋아해?”

“응. 오늘 왠지 치느님이 땡기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두툼한 스테이크만큼은 아니었지만, 치킨도 뭐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전히 승규는 나에게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비비큐 소이갈릭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승규가 결국 알았다는 듯 핸드폰을 들고 치킨을 시켰다.

“승규야. 진짜 맛있다.”

“그래?”

승규의 질문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승규가 부스스 웃었다. 딱히 뭐 사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치킨이 이렇게 맛있게 느껴질 줄이야. 워낙 허기진 데다가 정신적으로도 좀 스트레스받은 상태여서 그런지, 치킨에 맥주 한 캔까지 싹 곁들이니까 그대로 천상이었다.

확실히 승규와 함께 살면서 나는 사소한 일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서로 얼굴 보고 웃는 소박한 행복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다 먹었어?”

“응. 나 배불러.”

한참을 먹었는데 치킨이 좀 남았다. 입이 짧아서 엄청 맛있어도 막상 얼마 먹지 못한 건데, 승규는 혹시 음식이 내 입맛에 안 맞아서 그런 건가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승규의 볼을 부여잡고 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고마워, 승규야.”

승규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뒷정리할 게 사실 많지는 않았다. 승규가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남은 치킨을 쿠킹호일에 꼼꼼하게 쌌다. 닭 뼈를 모아 쓰레기봉투에 담고 있는데 승규가 별안간 나를 불렀다.

“희수야.”

어딘가 복잡다단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나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우리 얘기 잠깐 할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냉기가 서려 있는 방바닥에 앉았다. 승규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할 말이 있대 놓고 승규는 아주 오랫동안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평소답지 않은 승규의 태도 때문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희수야.”

“으응.”

승규가 나를 아득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평소답지 않은 그 무게감에 조금 얼떨떨해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승규를 바라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어딘가 범상치 않았다.

“그동안 나도 좀……. 생각해 봤어.”

승규가 어렵게 운을 뗐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는 부모님이 내 인생에 제대로 있었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

“나한테 네가 소중한 만큼, 분명 너한테 너희 가족도 무척 소중할 거야.”

승규가 느닷없이 부모님 얘기를 꺼내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사람들 얘기를 꼭 이렇게 밥 맛있게 먹고 나서 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낯을 찌푸려도 승규는 개의치 않고 묵묵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있잖아.”

“응.”

“가끔은 난… 어떤 게 정말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어.”

착잡한 얼굴로 승규가 말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조금 얼어붙은 채 승규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네가 힘들어하는 거 보는 건 죽기보다 싫어.”

토해내듯 말한 승규가 그대로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느릿한 손이 얼굴을 그대로 쓸어 올리자 어딘가 처참하게 보이는 표정이 드러났다.

“혹시 죄책감이나, 나에게 했던 약속 때문에 망설이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

“지금까지 네가 내게 해준 것만으로 충분히, 이제 나는 네 진심 알았어.”

“…….”

“더 이상 너 밉지도 않고, 너도 최선을 다해 나 사랑한다는 걸 알아.”

나는 눈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승규가 지금 내게 하는 말들이, 그가 내포하려는 뜻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희수 네가 제일 중요하잖아.”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희수야, 돌아가도 괜찮아.”

“…….”

“네가 원래 있던 세계에서 네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족해.”

말을 마친 승규가 입꼬리를 쓱 끌어 올렸다. 승규는 그렇게 힘없이 웃고 있었다.

“…….”

“…….”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승규를 활활 노려보았다. 속에서 불길이 화르르 치솟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쁜 새끼.”

꽉 억눌린 목소리가 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별안간 내가 내뱉은 욕설에 승규가 놀란 눈을 했다. 그러다가도 또다시 나를 걱정스럽게 살펴봤다. 언제나 내 마음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던 승규의 그 애틋한 시선마저도 지금은 도리어 나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니가…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승규를 온 힘을 다해 쏘아보며 따져 물었다. 겨우 말을 내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상황에서 울기까지 하면 정말 볼썽사나워질 것 같아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금세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희수야.”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거렸다. 승규가 내 이름을 아련한 목소리로 불렀다. 멈칫 망설인 승규가 울고 있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승규를 향해 얼굴을 홱 쳐들었다. 눈가가 따끔거리는 게 벌써 빨갛게 충혈되어 있을 것 같았다. 승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게 가까워지는 승규의 어깨를 홱 밀쳤다.

“…….” 

내가 밀치는 대로 뒤로 밀려난 승규가 무척이나 아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팔을 뻗었지만 차마 나를 만지지도 못했다. 나는 그런 승규를 마주 보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감정 때문에 계속해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너 진짜, 흑, 나빠.”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승규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가슴을 거세게 두드렸다. 주먹이 꽂히는 가슴팍이 무척 단단했다. 퍽, 퍽. 나는 계속해서 승규를 때렸다. 승규는 아무런 말 없이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흐윽, 으으…….”

눈물로 흥건해진 채 주먹질을 하다가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나쁜 말은 자기가 다 해놓고서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은 눈동자를 하는 승규를 보자 정말이지 마음이 그대로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내가, 흑, 갈 거면 진작 갔지 바보야.”

“…….”

“여기서 이렇게 우는 게 아니라, 엄마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고 있지.”

“…….”

“돌아가라고? 흐윽, 너는 그게 진짜 나한테 할 말이야?”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승규의 가슴을 두드렸다. 미워서, 서러워서, 속이 상해서, 때리고 때리다가 내가 먼저 제풀에 지쳤다. 나는 그대로 승규의 가슴에 풀썩 쓰러졌다. 하아. 승규가 깊숙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나의 등을 끌어안았다.

“조승규 진짜 바보 멍청이.”

“희수야.”

“너 내가 했던 말 왜 자꾸 까먹는 거야.”

“…….”

“나는 너랑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고!”

마음이 울컥 북받쳐서 빽 하고 소리 질렀다. 나를 안고 있는 승규의 손이 움찔 떨렸다. 승규가 거세게 힘을 주어 내 허리를 당겼다.

“나 너 이렇게 사랑하는데. 흐어어어엉.”

울음이 크게 터졌다. 그대로 나는 승규의 품에서 거의 통곡을 했다. 승규는 말없이 그런 나를 안아줬다. 사실 나라고 모르는 건 아니다. 승규가 나 상처 주려고 저런 말 한 건 아니라는 거. 승규 나름으로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나는 사실 지금 우리가 많이 아팠다.

“…….”

“…….”

히끅, 히끅. 나의 눈물이 잦아들자 승규가 커다란 손을 들어서 내 볼을 감싸 안았다. 굳은살이 박인 까끌까끌한 손바닥이 말캉한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려 승규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마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아슬아슬했던 승규의 눈동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희수야.”

승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몰라.”

나는 고개를 슬쩍 돌리고 입술을 뾰족거렸다. 아직도 승규에게 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네가 하는 배려가 나에게는 상처라는 걸 너는 왜 몰라.

승규는 늘 자신의 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헌신적으로 나를 위한 결정을 했다. 하지만 승규가 이럴수록 나는 나의 사랑이 승규에게 충분한 확신을 주지 못했나 혼자 땅 파게 됐다.

승규를 향한 내 마음도 진심인데, 나는 지금 이 순간 완전한 내 의지로 너와 같이 있는 건데. 제발 좀 이제 승규가, 나는 네 옆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나의 절박한 말을 믿어주었으면 했다.

“…….”

“…….”

승규의 엄지가 내 입가를 부드럽게 살살 쓸어내렸다. 나는 다시금 그런 승규를 올려다봤다. 내 눈에 비치는 승규의 얼굴은 지독하게 쓸쓸하고, 하염없이 까마득했다.

“나 때매 니가 해본 적 없는 고생 하는 게.”

“…….”

“나는 너무 마음 아프고 미안해서 그래.”

“…….”

“너 나 아니면 이렇게 힘들 일 없는 애잖아.”

승규는 착잡한 목소리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눈을 날카롭게 찢고 승규를 올려다봤다. 얘 아직도 이런 소리 하는 것 좀 봐.

“야! 조승규!”

내가 냅다 승규의 이름을 불러대자 승규가 움찔 몸을 떨었다. 승규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언제 너랑 같이 있는 게 힘들대?”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핑 돌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진짜 울면서 엉겁결에 말하는 게 아니라 좀 더 확실히 해둬야 한다. 나는 눈가에 손을 가져가고 꾹꾹 눌렀다. 훅, 짧은 숨을 몰아쉬고 승규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다른 거 다 힘들어도, 나는 너랑 같이 있는 거 하나만 보고 버티는 건데.”

“…….”

“니가 나보고 가라고 하면 내가 뭐가 돼, 응?”

승규의 품에 안긴 나는 승규의 허리를 푹 끌어안았다. 승규의 가슴에 흠뻑 젖어 든 얼굴을 묻고 비비적댔다. 가파르게 헐떡이며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느껴졌다. 승규의 미지근한 심장 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그렇게 나 못 믿어?”

“희수야,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나의 질문에 승규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표정이 오묘했다.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표정을 보니 만감이 교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릴 때, 승규의 사랑이 나를 똑바로 서게 했다. 그럼 승규가 흔들릴 때는, 내가 승규를 잡아 줄 차례이다. 그렇게 넘어지지 않도록 꽉 붙잡고, 서로를 의지하고 앞으로도 함께 걸어 나가면 된다.

“조승규우.”

나는 부러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승규를 불렀다. 껴안고 있는 승규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승규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오롯이 진실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였다.

“우리 지금 힘들어도, 이대로 끝 아니잖아.”

나는 확신을 담아 승규에게 이야기했다. 솔직히 가끔은 너무 힘들고, 그러다 보면 차라리 그대로 푹 고꾸라지고 싶고, 그래서 서러움에 펑펑 울게 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의 미래가 빛날 것이라는 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승규 너도 돈 열심히 벌고 있고.”

“…….”

“나도 이제 곧 취직할 거잖아.”

승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승규보다 체구가 작은 게 처음으로 아쉽게 느껴졌다. 몸집만 커다랗지 가끔은 너무나 여린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 승규를, 내가 빈틈없이 온몸으로 꽉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지금보다 훨씬 좋을 거야.”

“…….”

“승규야, 우리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 응?”

승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승규에게 동의를 구했다. 승규가 내게 그렇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나는 승규의 단단한 손을 잡고 다부진 결심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함께 버텨낼 것이었다.

“희수야.”

승규가 내 이름을 부르는 까끌한 목소리를 부르며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사실은 나도 너 가는 거 싫어.”

“…….”

“평생 이렇게, 네가 내 품에 있어 주면 좋겠어.”

나는 빙긋이 웃으며 승규를 올려다봤다. 응, 나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걱정 하나도 안 해도 돼.

“희수야, 아까는 내가 미안해.”

“…….”

“너 의심하거나, 상처 주려고 그런 말 한 건… 진짜 아냐.”

말을 마친 승규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그렇게 나를 바라만 보았다. 나의 모습을 비추는 승규의 고동색 눈동자에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승규가 이를 악물었다.

“그냥.”

“응.”

“앞으로 내가 더 열심히 할게.”

말끝을 슬쩍 흐리는 승규의 목소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나는 승규의 너른 등을 꽉 껴안고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었다. 승규의 냄새에 푹 젖어있자니 정신이 맑게 또렷해졌다.

나는 반드시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 확고해졌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내 능력으로 취직해서 돈도 많이 벌고, 승규 마음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승규와 함께하는 미래를 계속해서 그려 나갔다.

***

우리는 평소보다 격렬하게 섹스했다. 승규와 이어져 있는 순간엔 늘 세상에 우리 둘밖에는 없는 것 같은 강렬하고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승규가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게 아쉬워서, 나는 승규의 허리를 다리로 꽉 감고 승규의 목에 꼭 매달렸다. 내게 퍼부어지는 승규의 입맞춤이 애틋했다.

억지로 하자면 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역시 승규의 좁은 욕실에서 함께 샤워하는 건 좀 무리였다. 안에 있는 걸 빼내야 해서 내가 먼저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대에 길게 드러누워 승규를 기다렸다.

“자기 왔어?”

욕실 앞에서 수건으로 벗은 몸을 슥슥 닦아내는 승규를 보고 나는 눈을 반짝 떴다. 승규가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서랍장으로 향하려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팔을 쫙 벌리고 그대로 내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침대에서 승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이쁘게 굴래.”

“히히.”

승규의 벗은 몸을 꼭 껴안았다. 같은 남자인데 승규와 나는 살성이 좀 달랐다. 승규는 전체적으로 피부가 질깃하고 몸이 단단한 느낌이었다면, 나는 근육이 잘 붙지 않아 몸이 말랑하고 부들부들했다. 그래서인지 서로 맨살을 맞대고 비비고 있으면 피어오르는 오묘하고 낯선 감촉이 못 견디게 좋았다.

굳이 섹스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더라도 이렇게 서로 벗은 몸으로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충만감이 들었다. 정말 승규가 이제는 충분히 내 것이 된 느낌이 들었다. 뭐, 승규 몸이 워낙 좋아서 웬만하면 그대로 벗겨 놓고 감상하고 싶은 사심 역시 물론 조금은 있었다.

“희수야.”

나는 승규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고 갈빗대와 허리, 골반께를 어루만지며 살살 간지럽히고 있었다. 승규가 그런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나는 조금 졸린 눈으로 승규를 깜빡 올려다봤다.

“그날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돼?”

승규의 시선이 나에게 진득하게 내리꽂혔다. 나는 승규의 단단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역시, 그때 집에서 혼자 울고 있었던 내가 승규는 많이 신경 쓰였나 보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이제는 다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많이 괜찮아졌고, 구질구질한 얘기 굳이 승규한테 하고 싶지 않은데. 망설이는 사이 승규가 내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희수야.”

“으응?”

“너 힘든 얘기 나한테 너무 안 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승규의 얼굴은 사실 조금 속상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가 힘든지 알아야, 내가 어떻게 도움 될지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데.”

“…….”

“너무 모르니까. 솔직히 오히려 계속 안 좋은 쪽으로만 상상하게 돼.”

승규의 손가락은 여전히 내 머리칼을 꼼꼼하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대로 내 얼굴을 위로 끌어당긴 승규가 내 이마에 쪽 하고 뽀뽀했다.

“나한테 걱정 안 끼치려고 그러는 것도 알아.”

“…….”

“그래도 자기야, 힘든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나는 승규의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문득 어쩌면 지금 우리의 문제는 서로를 지나치게 배려하려고 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지나친 배려의 부작용은 소통의 부재였다.

힘든 것을 감추려고만 들어서, 우리는 서로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승규가 어떤 심정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정말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다면,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초라함조차 조금씩 나누는 연습을 해야 했다.

“하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눈을 살짝 내리감자 승규의 손가락이 나의 속눈썹 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가닥이 잘 안 잡혔다. 그래도 나는 시작을 가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냥 그날, 유난히 일이 많이 겹쳤어…….”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날 있었던 일을 승규에게 가감 없이, 그러나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은 상태로 얘기했다. 나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승규의 얼굴은 내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조금씩 동요했다. 그러나 안온하고 든든하게 계속 그 자리에서, 나를 끌어안고 쓰다듬어 줬다. 

“진짜 힘들었겠다, 희수.”

“으응.”

나는 나도 모르게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고 승규의 품에 안겨들었다. 원래 이렇게 승규한테 응석 부리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그동안 진짜 너무 혼자서 참아 눌렀던 것 같았다.

“…….”

“…….”

승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긴, 승규로서도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상황일 것이다. 정말 답이 없지. 그래도 하도 말이 없길래 나는 승규를 빤히 올려다봤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승규의 심란한 표정을 보고 괜히 너무 자세하게 말했나 하는 생각이 들려고 할 때였다.

“희수야, 너 내 차 타고 학교 다녀.”

“야, 내가 그거 싫다고 했잖아.”

“누가 내 차 아예 너 준대? 그냥 잠깐 동안만 쓰라고.”

“승규 너도 출퇴근해야 하잖아.”

나는 이도 저도 못 하는 얼굴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괜히 승규한테 피해 주는 일 하기 싫은데, 승규의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

“너 혹시 뭐, 이거 나한테 폐 끼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날카로운 눈동자를 한 승규가 정곡을 찔러서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희수야.”

“으응.”

“내가 남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왜 해.”

승규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뭔가 마음이 크게 한 번 철렁거렸다.

“너 솔직히 생각해 봐. 우리 둘 중에 차 진짜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승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는 같았다.

“정비소 형들한테 부탁하면 분명히 아침저녁에 차 태워 주실 거야.”

“…….”

“너 학교 가서도 할 일 많은데, 가는 길이라도 좀 편해야지.”

“그래두…….”

“내 말 들을 거지?”

그렇게 묻는 승규의 말투가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단정적이어서 나는 뭐라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알았어어…….”

여전히 내가 승규 차 가져가면 승규가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우리 이제 남 아니라는 승규의 말이 마음에 뚜렷하게 남았다. 내가 마침내 대답을 내놓자 승규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승규를 마주 보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냥……. 이대로 승규에게 조금 더 기대고, 승규의 배려를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꺼 카드 줄 테니까 그걸로 밥 먹고 싶은 거 사 먹어.”

“야! 나 그건 진짜 싫어!”

나는 정색했다. 차 받는 거야, 승규 말대로 둘 중에 더 필요한 사람을 굳이 따지자면 나니까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규 돈 받아서 쓰기는 정말 싫었다. 그냥, 엄마 아버지한테 쫓겨나서 애인한테 얹혀살며 돈 받아 쓰는 내 모습을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희수야, 너 나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니냐?”

“응?”

“내가 너 식비도 못 대줄 정도로 무능해 보여?”

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그대로 멈췄다. 아니, 그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너 삼각김밥 먹는다는 얘기 듣고 나는, 솔직히 나한테 화가 너무 나더라.”

“…….”

“밥 먹을 돈 달란 얘기 못 할 정도로 내가 너한테 못나 보였나, 자존심 상해.”

나는 승규를 덥석 껴안았다. 승규가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나는 승규를 낮춰 보거나 한 건 전혀 아니었다.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돈을 일찍 벌기 시작한 승규가 아직 대학생인 또래 남자애들보다 오히려 더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는 상태인 것도 알았다. 다만 나는 내가 승규에게 짐이 되는 게 싫어서.

“안 그래도 할 일 많은 애가 밥까지 부실하게 먹으면 어떡해. 너 말라가지구.”

“…….”

그렇게 말하는 승규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에게 사뿐하게 내려앉는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울컥거렸다.

“희수야.”

“으응…….”

“지금 나는 돈 벌고, 너는 학생이니까 니가 내 돈 쓰는 거 이상한 거 전혀 아냐.”

“…….”

“제발 내 부탁이니까, 밥은 너 먹고 싶은 거 사 먹어라. 희수야.”

“…….”

“그렇게 해 줄 거지?”

승규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중하고 묵직한 시선이 올곧게 나를 향했다. 감동적이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어딘가 마음이 서럽고 슬프기도 했다. 나는 울컥울컥하는 감정의 덩어리를 꽉 안으로 눌러 삼켰다.

“카드 말고 그럼 그냥 돈으로 줘.”

나는 결국 항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고집보다 승규 생각이 더 맞았다.

“그래도 카드 받는 건, 내가 너무 좀 그래.”

삐죽 토라진 얼굴을 한 나의 볼을 승규가 느릿하게 감싸 안았다.

“내가 준다고 니가 아무렇게나 안 쓸 거 아니까 그러는 거야, 희수야.”

“…….”

“내가 너 믿으니까.”

아. 정말 조승규, 대단하다. 승규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나로서도 별도리가 없다. 솔직히 여전히 승규 카드 받아 쓰는 건 마음 어딘가가 불편했지만, 믿음을 얘기하는 승규 앞에서는 나도 조용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가 거듭 거절하는 것보다, 승규의 카드를 받는 게 더 승규 자존심을 세워주고 안심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냥 정말 받고 나서, 쓸데없는 데 낭비 안 하고 아껴 쓰면 되겠지.

“……고마워.”

내가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승규가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는 듯, 내 몸을 푹 껴안았다. 나는 승규의 냄새에 온통 파묻혀서 얕게 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뭔가 재밌는 생각이 반짝 떠올라서 히히 웃었다. 승규가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우리 이러니까 꼭 부부 같애, 그치?”

그 말에 승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사실 약간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승규가 너무 그렇게 반응하니까 괜히 나도 막 얼굴이 후끈후끈하려고 그랬다. 민망해져서 승규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우리는 그대로 따끈따끈해진 몸을 껴안고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근데 그 회사는 진짜 멍청하다.”

그러다가 승규가 뜬금없이 말했다.

“응?”

“어떻게 너 같은 애를 떨어트리냐.”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는 승규의 얼굴이, 정말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라서 나는 킥킥 웃었다.

“뽑아주면 우리 희수 일 진짜 잘할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네.”

나는 승규를 보며 눈을 부드럽게 휘고 웃었다. 막상 이렇게 승규와 농담처럼 이야기를 나누니까, 승규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승규 앞에서 서류 떨어졌다고 하면 내가 능력 없어 보일까 봐 괜히 혼자 미리 창피해했다. 그러나 승규는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온전한 믿음과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너무 버겁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서류 탈락도, 신기하게도 그냥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희수 너는 서류 붙으면 면접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진짜?”

“응.”

“왜에?”

“이 얼굴 보고도 떨어뜨리면 그 사람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거지.”

말을 끝내자마자 내 볼을 양손으로 가득 끌어안은 승규가 내 얼굴 곳곳에 쪽쪽대며 입술을 찍었다. 아, 간지러워어. 괜히 타박하는 소리를 하고 몸을 뒤틀면서도 나는 사실은 하하 웃었다. 그런 내 목소리를 듣고 마찬가지로 하하 따라 웃는 승규의 목소리가 청명하고 달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