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규와의 섹스는 물론 언제나 좋았지만, 오늘은 왠지 유난히 더 좋았던 것 같다. 단순히 몸뿐만 아니라, 서로 마음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지금 승규와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 새로이 나아가는 과정이 우리에게 유대감을 선사하고 있는 것 같다.
승규와 같이 샤워를 했다. 우리는 장난치면서 서로의 벗은 몸에 물을 끼얹고 거품이 이는 퍼프를 문질렀다. 그냥 가볍게 몸을 만지던 게 본격적인 스킨십으로 돌변할 뻔해서, 욕정을 자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다. 그렇게 거실로 나와서 승규와 같이 게으름을 피우려고 했는데, 냉장고 안에 물이 없었다.
배스 가운만 하나 달랑 걸치고 있는 나를 소파에 앉힌 승규가 대신 옷을 입었다. 승규는 근처 편의점에 생수를 사러 나갔다. 나는 OCN을 틀어놓고 TV에서 방영되는 철 지난 외화를 무감하게 감상했다. 어서 승규가 돌아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삑삑삑삑삑. 도어락이 울리는 소리에 나는 쫑긋 고개를 들었다. 현관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어, 왔어?”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이내 그리워져 버리는, 반가운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그래, 왔다.”
뜻밖의 인물을 발견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엄마.”
도어락을 누르고 오피스텔에 들어온 사람은 엄마였다.
“희수 너,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었니?”
엄마가 내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섹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나는 맨몸에 배스 가운만 달랑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따라 섹스 중 유난히 집요했던 승규가 남겨놓은 흔적이 혹시라도 엄마의 눈에 비칠까 걱정이 됐다. 입을 꼭 다문 나는 배스 가운만 꽉 여밀 뿐이었다.
승규에게 다급하게 카톡을 보내 엄마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알렸다. 방에서 옷을 제대로 갈아입고 나오자 엄마가 테이블에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지만, 오늘은 유난스러우리만큼 그 기운이 형형했다. 엄마의 냉랭한 표정에 나는 벌써 기가 질렸다.
쭈뼛거리며 엄마의 건너편에 앉았다. 엄마가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시선으로 빤히 응시했다.
“…….”
“…….”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엄마를 기다렸다. 그러나 엄마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차라리 더 목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톡 쏘는 듯한 침묵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
어딘가 꽉 억눌린 목소리로 나는 겨우 엄마를 불러 보았다. 엄마는 애타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그래, 지운 씨랑은 아직도 화해 안 했니?”
그 말에는 순간 나도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말없이 찾아와서 나를 숨 막히게 해 놓고, 굳이 저런 얘기를 해야 하나 싶었다. 엄마이지만, 원망스러웠다.
“엄마, 제가 그 사람 이제 안 만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 생각 고쳐먹으라고 엄마가 말했잖니.”
엄마의 말투는 지나치게 단정적이었고, 그래서 나는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다. 부모님으로서 당연히 아들의 인생에 대해 걱정할 수는 있지만, 성인이 된 아들의 연애 상대에까지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놓고 압박하는 것은 어딘가 엇나간 사랑 방식 같았다.
“엄마랑 아버지도 너희 둘 지금까지 지켜보고 한 생각이 있어서 그래.”
“…….”
“여자여도 지운 씨만 한 사람 찾기 힘들다.”
“…….”
“그 정도로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데다가 인성까지 갖춘 사람이 흔한 줄 알아?”
김지운의 마수는 여전히 엄마에게 드리우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구슬렸는지, 엄마는 아들인 나보다 엄마 아들 인생을 조져놓은 김지운을 더욱 신뢰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나는 상처받은 얼굴로 바라봤다.
내가 엄마에게 김지운이 싫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정말 아무려면 내 뜻은 전혀 상관이 없는 건가 싶었다. 엄마는 내 결정을 그 정도로 믿을 수 없는 건가 의문스러웠다. 깊은 회의감이 일었다.
“희수 네가 인생을 아직 덜 살아봐서, 그래서 뭘 몰라서 그래.”
그 말에는 감정이 쇄도하듯 몰아쳤다. 하. 나는 헛웃음 쳤다. 솔직히 이 얘기를 꺼내면 분명히 엄마가 격분하며 난리 칠 모습이 훤해서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다 큰 아들인데 사회에서 못 나가고 짓뭉개지는 모습 낱낱이 고해바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아끼려 했었다. 하지만 도무지 더 이상 엄마의 말을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김지운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뭐?”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김지운 편을 드는 엄마에게 마침내 고했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울컥울컥했다.
“그 사람 저와 헤어졌다고 아웃팅까지 시킨 사람이에요.”
“…….”
“불쑥 연구실에 찾아와서 게이라는 사실 알려서 학교에 소문 다 났다고요!”
“…….”
“그래서 내가…… 내가 얼마나.”
나는 북받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엄마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해는 했다. 나도 김지운의 실체를 받아들이기가 아직 버거운데, 성에 안 차는 아들 김지운에게 거의 맡겨버리다시피 한 엄마는 더욱 그의 정체를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제 이런 말까지 한 이상 엄마가 김지운이 아닌 내 입장에서 생각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너 설마 유학 포기한다고 한 것도 그럼 그것 때문이니?”
한동안 조용하던 엄마가 내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나는 엄마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승규 때문이었지만, 그것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김지운 때문에 아카데미아를 누비는 학자로서의 내 진로가 망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작게 탄성을 내뱉은 엄마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엄마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엄마.”
“희수야.”
하지만 엄마의 혼란은 순간이었다. 엄마는 처음 오피스텔에 들어올 때마다 더욱 날카롭고 매서운 눈동자로 나를 예리하게 쳐다보았다.
“네.”
“차라리 잘 됐다.”
나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너 이 기회에 게이 그런 거 그만해.”
이윽고 엄마가 내뱉은 말에 마음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엄마도 나름 너 이해해보려고 애썼지만, 역시 아닌 건 처음부터 아니었어.”
“…….”
“대체 이게 뭐니, 남자 만난다고 난리 치다 지금 네 앞날이 다 망하게 생겼잖아.”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내 앞날이 망하게 생긴 건 내가 게이라서가 아니라, 김지운이라는 잘못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잖아요. 왜 그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질책하세요?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몰아붙이는 엄마의 태도가 너무나 거침없고 확신에 가득 차 있어서,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희수야, 이제 방황 그만하자. 너 그냥 여자 만나.”
“엄마…….”
“진득하게 여자 만나고 결혼하면 그런 소문 금방 사라질 거야.”
“…….”
“그래, 그렇게 하자. 엄마는 더 이상 못 참겠다.”
하. 나는 밭은 숨을 뱉어냈다. 솔직히 무척 실망했고, 조금 어이도 없었다. 엄마는 지금까지 내가 게이인 사실을 ‘참아 오고’ 있었던 걸까. 여전히 나의 인생을 틀어쥐고 휘두르려고 드는 엄마를 나는 빤히 응시했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결코 쉽지 않은, 좀 더 솔직해지자면 두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뒤로 물러나면, 승규와 함께하는 미래 역시 멀어지고야 말 것이다. 무엇보다 이 문제에서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엄마였다. 내가 엄마를 위해 게이라는 사실을 바꿔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엄마를 쏘아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눈썹을 들어 올린 엄마가 언짢음을 표현했다.
“엄마! 솔직히 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잖아요.”
그녀가 그저 못 들은 척, 없었던 일로 해두고 넘어가려고 했던 바로 그 사실을 나는 떳떳하게 고할 셈이었다.
“저 여자 못 좋아해요. 남자를 사랑한다고요.”
“…….”
“사회적인 불이익을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
“이게 저인데, 엄마는 왜 있는 그대로의 저를 안 받아들여 주세요?”
말하다 보니까 감정이 고조되어 나는 엄마에게 거의 소리치다시피 했다. 나는 울먹임이 젖어 드는 목소리를 꾹꾹 억눌렀다.
“윤희수!”
엄마가 엄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반항기 어린 눈으로 엄마를 쏘아보았다.
“내가…… 아무래도 지금까지 너를 잘못 키웠나 보다.”
엄마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엄마에게 외쳐도, 엄마는 내 말을 전혀 들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귀해서 그랬는데, 지금까지 너를 너무 오냐오냐만 했나 봐.”
“엄마…….”
한숨을 크게 내쉰 엄마의 얼굴이 희미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머리칼을 한번 쓸어 올린 엄마는 다시금 무척이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만반의 준비를 한 그녀는 나를 호되게 질책하기 시작했다.
“너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는 소리 할 거니.”
“…….”
“세상에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을 해야지.”
“…….”
“윤희수 너 언제 어른 될 거야, 응?”
숨이 턱턱 막혔다. 돈만 안 벌 뿐이지 나는 이미 대학교까지 졸업한 어른인데, 엄마는 나의 성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내리는 결정을 모두 세상을 잘 몰라서 하는 치기 어린 행동으로 치부했다.
나는 엄마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엄마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엄마는 그런 내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의 고요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엄마가 너한테 종종거리며 목매야 해!”
엄마가 내게 호되게 고함쳤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자 눈물이 터졌다. 우는 소리를 내기 싫어서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동안 꾹 참아 왔던 눈물이 내 양 볼을 타고 얌전히 흘러내렸다. 엄마는 그런 내 얼굴을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단호하게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계속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엄마를 노려보았다.
“희수야, 생각 정리해서 일주일 안에 본가 들러.”
“…….”
“엄마가 사랑하는 우리 아들 믿어 볼게.”
***
“그다음에는?”
승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게 끝이야.”
“…….”
“그냥, 그러고 나가셨어.”
나의 말을 가만히 듣는 승규는 나를 섣불리 위로하지 못했다. 할머니 밑에서 홀로 자란 승규가 내가 엄마 이야기를 할 때 어색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담한 마음에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온전히 내 공간이었던 오피스텔이 더 이상 안전한 장소로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도 도우미 아줌마와 엄마가 수시로 드나들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다지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역시 내가 은연중에 가져온 의존적인 태도에 대한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오피스텔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를 않았다. 언제 엄마가 또 갑자기 들이닥쳐서 승규를 만나는 사실에 대해 쪼아대고 내가 게이라는 사실에 대해 압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천에 있는 승규 집에 틀어박혔다. 좁고 솔직히 조금은 누추했지만 그래도 이곳이 훨씬 좋았다.
“하…….”
낡은 침대에 앉아 무릎을 꼭 모으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승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말리는 듯 손가락을 작게 구부렸다가 폈다. 그래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웃어 보인다.
“많이 힘들었지.”
그대로 내게 다가온 승규가 나를 안아줬다.
“아니야, 승규야.”
“…….”
“괜히 내가…… 너까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나는 승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승규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승규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희수야.”
“응?”
“이런 말 아직 너무 이른가 싶지만.”
“괜찮아.”
“음…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 턱 끝을 잡아 들어 올린 승규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따지는 듯한 태도는 아니었다. 승규는 순수하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승규에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승규를 걱정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당장 막막해 죽겠는데 내가 무슨 생각이랄 게 있어야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승규의 눈을 피했다. 다시금 승규의 목덜미에 고개를 푹 파묻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볼을 감싸 쥔 승규가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승규의 시선과 마주쳤다. 승규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아주 단단했다.
“본가에 같이 갈래?”
승규가 물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냥. 나도 이번에는 물러서기 싫어.”
내 볼을 쥐고 있는 승규의 손바닥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숨을 힉 들이켰다.
“우리 사랑하는 거 잘못된 거 아니잖아.”
“…….”
“인정받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
“그분들 앞에서 당당하게 너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승규의 태도는 결연했다. 견고한 확신으로 가득한 승규는 사실 조금 찬란하게도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나라고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부모님께 가서,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인정해 달라고 떳떳하게 외치고 싶었다.
“…….”
하지만 과거의 어느 날, 무척이나 날 선 태도와 언변으로 무장한 채 아마도 승규를 상처 입혔던 엄마가 떠올라 망설여졌다. 친구라는 거죽을 덮어쓰고 있을 때도 그 지경이었는데, 승규와 연인 사이라는 것을 밝히면 엄마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길길이 화를 낼 게 뻔했다.
“그래도…….”
“…….”
“엄마 아버지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무엇보다 승규가 또 한 번 상처 입을까 봐 걱정됐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내가 사랑하는 승규를 상처 입힐까 봐 걱정됐다. 승규는 여전히 나를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내 볼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희수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승규야, 그래도.”
“어차피 우리 계속 만나려면 내가 그분들 계속 피할 수만은 없잖아.”
승규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승규의 제안이 정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영 탐탁지 않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끝없는 걱정이 뭉게구름처럼 가득 드리웠다.
***
엄마가 말한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다. 서래마을에 있는 본가를 찾는 것은 나조차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부모님이 거주하는 고급 빌라의 분위기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대문 앞에 나란히 선 승규와 나는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채였다.
“…….”
“…….”
승규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미리 얘기하면 난리를 치실 게 뻔해서, 부모님께는 일단 나만 집을 찾는 거로 말씀드렸었다. 내 옆에 선 승규를 발견한 아버지는 짐짓 놀란 얼굴을 했고, 엄마는 정말 질릴 정도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불청객이 있네.”
엄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보다 한참 큰 승규를 올려다보는데도 어딘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일관했다.
“안녕하십니까.”
“…….”
“희수랑 만나는 사이인 조승규라고 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승규가 부모님께 인사했다. 당당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사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지금의 분위기와는 다소 동떨어진 면이 있었다.
“…….”
“…….”
부모님은 승규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힐긋 엄마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의 커다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괜히 초조해진 마음으로 양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무척이나 불편한 정적이 금방이라도 푹 고꾸라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아버님, 어머님.”
고요를 깨트린 것은 승규의 용기였다.
“많이 부족하지만, 저 누구보다 희수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습니다.”
“…….”
“…….”
“희수 진심으로 사랑하고, 평생 아껴줄 겁니다. 그러니.”
인상을 확 찌푸리고 손을 가볍게 든 엄마가 승규를 저지시켰다. 당황한 승규가 말을 멈추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승규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승규를 향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의식하고 화들짝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날카로운 눈으로 승규를 찔렀다.
“낯이 익네.”
“…….”
“우리 구면인가요?”
높낮이 없는 어조로 엄마가 승규에게 물었다.
“예.”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의 승규가 대답했다. 괜히 내가 옆에서 손바닥에 땀이 다 고여 들었다.
“하.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머리를 쓸어 올린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홱 고개를 들어 올린 엄마가 승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 유별난 기세에 승규도 몸을 움찔 떨었다.
“주제에 고등학교 때부터 희수 아주 끈덕지게 쫓아다녔나 보네.”
우아한 어조로 부드럽게 발음했지만 본질적으로 엄마는 승규를 빈정거리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엄마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살짝 돌아본 승규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짓했다. 나는 무력해진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 부모님은 두 분 다 안 계신다고 했었지.”
“……예.”
“그래, 지금 직업이 어떻게 돼요?”
“엄마!”
나는 목소리를 높여 엄마를 불렀다. 김지운이 고해바쳐서 엄마는 이미 승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에게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게, 엄마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지가 빤히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희수 넌 조용히 해!”
엄마가 나를 홱 노려보았다. 거의 동요가 없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 역시 들끓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치만!”
“수입차 정비사입니다.”
나의 말을 자른 승규가 대답했다. 엄마가 승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연 소득은 얼마나 되나 모르겠네.”
“…….”
엄마가 다음으로 던진 질문에 나는 무척 충격받았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엄마라서, 나는 엄마가 이 정도로 속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면서 행복한 기억들이 많았는데, 나에게 사랑을 넘치게 퍼부어준 장본인의 민낯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되자 얼떨떨했다.
“우리 희수랑 그쪽, 어울리지 않는 사이라는 거 알 거라고 생각해요.”
“…….”
“왜 자꾸 그쪽 인생에 멀쩡한 희수 휘말리게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엄마가 승규에게 계속해서 모욕을 가했다. 나는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새파란 분노로 온몸이 푸들거렸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방식대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엄마의 태도에 나는 이제 신물이 났다.
“엄마!”
하지만 이번에는 엄마의 뜻대로 되지 않을 테다. 나는 예전처럼, 모든 게 승규에게 휘말려서 일어난 일이라고 엄마에게 굴복하고 비겁하게 혼자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를 그녀의 의도대로 휘둘리게 하는 것은 늘 엄마였다. 나는 이번에는 결단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만 하세요!”
“…….”
“승규랑 나 사랑해서 만나는 사이예요. 누구 하나에 끌려가고, 휘둘리고 그런 거 전혀 없어요.”
“…….”
“오늘 이렇게 같이 온 것도 둘이서 함께 한 결정이니까, 승규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나는 눈을 꼭 감고 빽 소리 질렀다. 모두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게이인 것만 제외하면 부모님에게 늘 착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 아들이었다. 부모님 앞에서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고 정면으로 반항해 본 적이 없었다.
“희수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태도냐!”
그러자 지금까지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아버지가 개입했다. 엄마가 나에게 엄하고 냉랭하게 굴 때마다, 항상 뒤에서 나를 모른 척 따뜻하게 안아주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마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윤희수, 내가 생각 정리해서 오랬지 누가 이딴 자식 우리 집에 데리고 오랬어?”
엄마는 내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금 몰아쳤다.
“희수야, 엄마가 대체 너 어디까지 추락하는 꼴 봐야 하니.”
“…….”
“그때 그 의사랑 만나는 거 인정해 줬다고, 내가 너 아무랑이나 만나는 거 용인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김지운의 얘기가 말에 오르자 묵묵하게 듣고만 있던 승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김지운이 아들 아웃팅 시킨 걸 알면서도 아직 그의 얘기를 내 앞에서 한다는 점에서, 나는 엄마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늘 나를 위한다는 말로 무장하지만, 엄마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엄마는, 네가 게이인 것보다 더 끔찍한 게 네 수준에 안 맞는 사람 만나는 거야.”
“…….”
“지금 선택을 잘못하면 네 인생이 앞으로 쭉 내리막길이라고!”
승규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승규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안 그래요, 여보?”
갑자기 고개를 돌린 엄마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작은 일을 할 때 아버지는 엄마의 눈치를 보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집안의 큰일을 결정하는 건 늘 아버지였다. 이제 내가 믿을 구석은 아버지밖에는 없었다. 제발. 나는 초조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가 난감한 기색으로 내게서 고개를 슥 돌렸다.
“그래. 아버지 생각에도 이 친구와의 만남은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큼큼. 헛기침한 아버지가 지금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 나를 외면했다. 정말 이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무너질 수는 없었다. 승규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규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쏟아내는 엄마로부터 지금 승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엄마 아버지가 아무리 그러셔도 저 이 사람이랑 헤어질 생각 없어요.”
“…….”
“제가 게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고, 이 사람 사랑한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으니 그렇게 아세요!”
나는 엄마 아버지를 똑바로 쏘아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막상 말로 내뱉고 나니까 용기가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승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더 이상 승규가 나 때문에 어떤 식이든 모욕을 감내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 나랑 승규랑 사랑하면 됐잖아. 부모님 인정이 뭐가 중요하다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승규야, 가자.”
나는 승규를 잡아끌었다. 나의 부모님을 흘긋 바라보고, 나를 돌아본 승규가 멈칫 망설였다.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
나는 엄마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윤희수!”
엄마가 듣기 싫을 정도의 고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라 엄마를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
“윤희수 네가 정말 정신이 나갔나 보구나.”
“엄마!”
“희수 네가 한 번도 제대로 힘들어 본 적이 없어서 이 모양이 됐어!”
“엄마가 제 인생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세요?”
나는 엄마의 말을 따박따박 받아쳤다. 내가 느끼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공감하려고 들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내가 느끼는 힘듦의 정도에 대해 재단하는 엄마에게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다.
“너는 좀, 현실을 제대로 체험하고 정신 차릴 필요가 있어.”
“…….”
“앞으로 집에서 오는 지원은 모두 끝이다.”
“그러면 제가 꺾일 줄 아세요?”
“그래, 그 객기 대체 얼마나 가나 보자!”
나는 씩씩 숨을 내뱉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승규를 함부로 대하는 엄마도, 지금의 상황을 방관하는 아버지도 다 실망스러웠다.
“빨리 가자.”
나는 머뭇거리는 승규를 잡아끌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게 나는 뾰족하게 성이 난 엄마의 목소리와 묵묵하게 질책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외면하고 집을 빠져나왔다. 다만 나는 여전히 내 옆에 있는 승규의 손을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
학교를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낯선 사람들이 내 짐을 박스에 정리해 운반하고 있었다. 황당해서 정체를 물으니 이삿짐센터 직원이라고 했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엄마가 집안으로부터의 지원을 끊겠다고 선포하긴 했지만, 당장 바로 다음 날부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몇 번 통화음이 울리기도 전에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냉랭한 목소리에 나는 치를 떨었다.
“엄마,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는 엄마에게 따져 물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이 내 책상을 건드리려고 해서 손도 대지 말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긴. 희수 너 오늘 당장 집으로 들어와라.]
“엄마!”
[집주인과 얘기해서 오피스텔 계약 파기했다.]
“제가 사는 집인데, 왜 제 동의도 없이 이런 일을 하세요?”
[하, 거기가 언제부터 네 집이니? 다 부모님이 해준 집인데.]
솔직히 엄마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이 집에서 이제 꼬박 일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전세금을 보태는 데는 조금의 역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적어도 내게 미리 얘기라도 해줄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엄마의 태도에 화가 났다. 엄마는 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다.
“그래요! 엄마 마음대로 하세요.”
어쩌면 엄마가 이런 식으로 나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까지 나는 엄마가 나를 조금만 짓누르면 그 압박감이 견디기가 힘들어 엄마의 뜻을 유순하게 따르곤 했으니까.
“그런다고 해서 저 집으로 안 들어가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는 엄마의 이런 강압적인 태도가 역효과였다. 나는 투쟁심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차라리 엄마랑 이 기회에 끝장을 봐야겠다 싶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엄마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윤희수, 네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엄마의 언성이 높아졌다.
“엄마가 신경 쓰실 거 없잖아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나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이미 짐이 많이 옮겨진 거실은 휑뎅그렁했다. 솔직히 화도 났지만, 사실은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이 더 컸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나. 안쪽 어딘가가 텅 하고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승규에게 전화해서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얼마나 오래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분간 승규의 부천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캘리포니아로 2주 여행 다녀올 때 썼던 커다란 캐리어를 장에서 꺼내왔다. 캐리어가 활짝 열리자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오피스텔에 있는 건 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당장 사용하지 않더라도 집 안에 두고 있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내 오피스텔 크기의 절반 남짓한, 그리고 이미 승규의 짐으로 채워진 승규의 원룸을 떠올렸다.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져갈 순 없었다.
일단 오피스텔을 떠나서도, 그리고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도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추렸다. 일단 옷가지부터 챙겼다. 랩탑 가방을 조심스레 놓았다. 논문 쓰는 데 필요한 책과 자료집도 넣었다. 욕실에 들어가서 평소 아끼던 갖가지 바디 용품을 바라보다가 그건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그냥, 승규 거 같이 쓰면 되니까.
걱정됐는지 퇴근한 승규가 나를 데리러 왔다. 이삿짐센터 직원들도 다 떠나고 텅 비어버린 집에서 혼자 남아 있자 솔직히 다시금 마음이 거센 파도처럼 날뛰려고 했다. 그래도 승규의 커다란 몸을 껴안으니 조금 안정이 됐다. 집채만 한 캐리어를 승규의 SUV에 겨우 밀어 넣고, 우리는 함께 부천으로 향했다.
원룸에 도착하자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승규의 원룸을 가만 둘러보았다. 솔직히 오늘 내게 일어난 일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원룸은 늘 승규 집이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살아야 할 공간이라고 받아들여 본 적은 없었다. 괜히 한숨이 나왔다.
짐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겨우 씻기만 하고 승규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나 편히 자라고 승규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하는 것을 애써 말렸다. 좁은 싱글 침대에서 몸을 불편하게 뒤척이며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