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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찾아뵙고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엄마와 아버지는 생각보다 매끄럽게 내 결정에 동의했다. 안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최소 5년, 혹은 그 이상 미국에 혼자 보내는 것을 썩 석연치 않아 하던 분들이었다.
사실 엄마는 내가 애초에 유학에 대단한 의지가 없었던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말고 이제는 확실히 네 길을 걸으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정 안되면 아버지 회사에 들어오는 길도 있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취업 준비를 해보라고 하셨다.
부모님과 대화를 나눈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고 이대로 졸업 논문은 마무리 짓되 유학 대신 취업으로 진로를 돌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아웃팅을 당한 뒤로는 교수님을 대하는 것도 매우 서먹했는데, 뜻밖에도 교수님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훌륭한 인재라서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되물으셨다. 조금 망설이시더니, 외국으로 나갈수록 교수는 철저히 연구 실적만으로 평가받으니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해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덧붙이셨다.
생각지도 못했다. 교수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배려와 나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나는 감동했다. 사실 그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것보다, 막상 유학하는 나의 미래는 훨씬 더 괜찮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교수님께 고개를 깊게 숙이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승규와 함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한 번 승규를 버리고 떠날 생각이 없었다. 교수님께서는 국내에서 박사를 하는 방법도 있다고 권유하셨지만, 아웃팅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학생인 상태를 5년이나 더 유예하는 것 역시 부담스러웠다. 학생으로 머무르면 부모님께 완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에 도움을 찾게 될 것 같았다.
승규와 미래를 함께하려면, 더 이상은 지금까지처럼 타인에게 나의 인생을 기대서는 안 됐다. 내가 혼자서도 똑바로 설 수 있어야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길이 안정적일 것이다. 온전히 독립적인 결정을 위해서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자립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취업 상담 세션에 다녀왔다. 지금까지 취직하는 걸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내 스펙은 나쁘지 않았다. 학점 관리야 학부 시절부터 워낙 철저했고, 경영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이리저리 교수님 뒤치다꺼리하며 각종 세미나에 따라다니고 프로젝트 참여하느라 관련 분야 경력이 풍부하게 쌓여 있었다. 정량적인 스펙이 모자란 것은 아니니 결국은 방향성의 문제였다.
보수적인 조직 사회에서 퍼질 소문이 무섭기도 하고, 개인주의적인 기업 문화가 아무래도 나에겐 더 맞을 것 같아 학교 게시판에 올라오는 외국계 기업의 공고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기왕이면 출근이 이르고 퇴근이 이른 쪽이 좋을 것 같았다. 회사가 끝나면 당장 승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게. 당연한 얘기지만 돈도 많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 승규 맛있는 거 많이 사주게.
아직 레쥬메는 차마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지만, 내가 갈 만한 기업들을 찾아보고 정보를 추리는 것만으로도 큰 결심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온전히 나만의 결정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게 된 기분은 후련하고 개운했다. 조금 뿌듯하고 으쓱하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는 승규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미래에 대한 계획이 불확실하다고 했을 때, 급격하게 어두워지던 승규의 표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승규에게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취업을 향해 굳어졌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앞으로 같이할 미래를 함께 그려보자고 하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고 부천을 찾은 나는 승규가 사는 원룸 근처의 골목에 아우디를 주차했다. 승규의 동네에 오는 것만으로도 곧 승규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거 승규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에그 타르트도 한 박스 사 왔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화분 밑에서 원룸 열쇠를 꺼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승규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승규는 통화 중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전화해도 괜찮다는 듯 승규에게 손을 들어 표시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규의 얼굴이 어딘가 묘했다.
“윤정아, 그건 내가, 아 누나!”
일부러 들으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통화하는데 들리는 걸 어쩌라고. 여자의 이름을 들은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승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잠깐만.”
핸드폰을 잠시 얼굴에서 떼고 내게 말한 승규가 나를 혼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승규는 한참 동안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노려보며 따각따각 흘러가는 초침도 하나하나 세고 있는데, 승규는 좀처럼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솔직히 뭐랄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에라도 문밖에 달려가서 전화기를 뺏고 싶었는데, 뭔가 내가 그럴 처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했다.
“아, 희수야.”
난처한 얼굴을 한 승규가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 돌아왔다. 나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앞으로 승규에게 이해심 많고 이타적인 애인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자와 연락하는 건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승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때 그 여자지.”
“응.”
승규가 순순히 대답했다. 순하게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오늘만큼은 뭐랄까, 조금 얄미웠다.
“……근데 이제 연락 올 일 없을 거야.”
승규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네 생각 아니야?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승규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는 그대로 믿어야 맞는 거지. 그래야 한다. 이해심 많은 애인. 이해심 많은 애인. 이해심 많은 애인.
“너 그 여자랑 잤어?”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너무 궁금했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승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명확한 대답을 내어주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러운 얼굴을 했다.
“……윤정이랑 잘 해보려고 했어.”
와. 부인하지 않는 승규를 앞에 두고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승규도 내가 김지운이랑 자는 걸 알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새삼스럽게 내가 승규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구나 싶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승규는 나와 헤어져 있는 동안 그 여자를 만났으니까 나를 배신하거나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게 아닌데도, 진짜 막 마음이, 좀처럼 형용이 안 될 정도로 우지끈했다.
“그냥 희수야. 솔직히, 나도 너 정말 잊고 싶어서.”
“…….”
“걔가 나 많이 좋아해 주니까, 알면서 기댔어.”
“…….”
“계속 같이 있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좋아지지 않을까 해서.”
내가 화를 낼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갑자기 새빨갛게 물드는 시야에 머릿속이 어질거렸다. 내가 질투심에 휩싸여 수백 번 혼자 상상하던 시나리오는, 내가 한 발짝만 늦었어도 고스란히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승규는 정말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
착잡했다. 그것은 사실 비단 나의 감정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상처받은 얼굴로 침대에 알몸으로 엉켜 있던 우리에게서 돌아서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승규를 내어줄 수는 당연히 없었지만, 나는 그녀 역시 승규를 사랑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시선을 괜스레 아래로 향했다. 세상이 작게 빙글 돌았다. 열여덟 살의 승규는 진심이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며 나와의 시작을 망설였다. 내가 아는 승규가 사람 마음을 일부러 가지고 놀 애는 아니었다. 너 정말 잊고 싶어서. 나는 다만 승규가 내게 했던 그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처음에 길길이 날뛰고 싶을 정도로 치밀었던 화가 가시자, 어느 순간부터는 씁쓸함이 넓죽하게 퍼져나갔다. 승규 말대로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애 내가 괜히 뒤흔들어놔서, 그렇게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까지 하도록 몰아붙인 건 아닌가 생각했다.
“윤정이한텐 내가 다 잘못한 거야.”
고개 숙인 승규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흠씬 무거워졌다. 적대감만을 느꼈던 여자에 대한 막연한 유감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결국은 또다시 우리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승규가 안쓰러웠고, 내가 승규를 그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붙였다는 사실에 대해 자책했다.
“…….”
그렇지만 어질러져 버린 과거에 발목 잡히기보다, 나는 앞으로 계속 함께할 우리에 대해서 매달리고 싶었다. 승규에게 다가간 나는 승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 숙인 얼굴을 매만지며 까슬하게 일어난 입술에 쪽 뽀뽀했다.
“그렇게 이름 부르지도 마. 질투 나.”
그래 뭐 다 좋은데, 왜 윤정이래. 그 여자 나한테는 나이 어리니까 말 깐다고 멋대로 굴어놓고 승규는 이름까지 막 부르게 두고. 나는 승규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나는 승규를 절대로 뺏기기 싫었다. 코끝을 마구 문지르며 승규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희수야.”
승규가 내 이름을 부르며 등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불안했다.
“승규 너 맘 흔들리는 거 아니지?”
사실 정말로 묻고 싶었던 건 그 말이었다. 울컥하고 치밀던 화, 비릿하게 퍼지던 후회, 그런 건 다 소용없었다. 나는 지금 현재 승규의 마음이 어떤지가 궁금했다. 승규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승규는 좋은 남자니까 그 여자에게 많이 미안해하고 있을까 봐. 혹시나 그 미안함이 언젠가는 책임감으로 번져나갈까 봐.
“이걸로 마음이 흔들렸음.”
“…….”
“너랑 나랑 진작에 헤어졌게.”
승규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안심할 수가 있었다. 어미에게 매달린 아기 코알라처럼 승규를 꼭 껴안고 놓아 주지 않으려 들었다. 승규는 자꾸만 응석 부리듯 자신에게 달라붙는 나를 조금도 밀어내지 않고 고스란히 품어주었다.
***
승규가 생각만큼 에그 타르트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기가 죽었다. 내가 사 온 거니까 물론 기뻐하며 먹는데 표정이 영 이상해서 집요하게 캐물었더니, 물컹물컹해서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시무룩해졌다. 여기 엄청 유명한 덴데……. 그럼 다음번엔 뭘 사와야 하지 고민됐다.
나도 입이 짧고 승규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박스에 담긴 타르트를 반은 남겼다. 대충 정리를 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승규랑 같이 있으면 솔직히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음흉한 시선으로 승규의 몸을 훑게 된다. 승규가 섹스를 너무 잘하는 게 내 탓은 아니지 않은가.
쪽쪽, 서로를 마주 보고 입술을 부딪치다 스킨십이 진해지려고 할 때였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여자의 전화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가장 중요한 얘기를 못 꺼낸 것 같았다. 승규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낸 나는 축축하게 가라앉은 승규의 눈을 올려다봤다.
“승규야.”
“으응.”
내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낮게 그르렁댔다. 그런 승규가 사랑스러워서 나는 승규의 등을 쓸어내렸다. 승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나 교수님한테 유학 안 간다고 하고 왔어.”
“…….”
“졸업하면 취직하게 하반기에 원서 넣을 거야.”
승규가 조금 또렷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승규의 올곧고 진중한 시선 앞에서 나는 당당한 연인이 되고 싶었다.
“나 너랑, 계속 같이 있구 싶어서.”
말을 하다 보니까 조금 울컥했다. 희수야. 벅차게 속삭인 승규는 그대로 그런 나의 몸을 푹 껴안았다. 밀려드는 체온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 엄청 좋은 데 들어갈 거야.”
“그래?”
“응. 앞으로 너 호강시켜 주게.”
승규가 애정이 듬뿍 떨어지는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뺨을 살살 쓰다듬는 거친 손바닥의 감촉이 견딜 수 없이 좋았다.
“윤희수 귀엽게.”
승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게 키스했다. 서로의 옷을 벗긴 우리는 빠르게 얽혀들었다.
삽입 섹스가 무리가 될까 봐, 오늘은 그냥 서로 빨아 주기만 하고 몇 번 문질러서 물을 뺀 뒤 끝냈다. 같이 있으면 좋아서 참기가 정말 어렵지만, 언젠가 승규의 말처럼 조금씩 천천히 아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들끓는 마음을 꾹꾹 가라앉혔다.
좁은 욕실에서 꾸역꾸역 같이 샤워를 하고 보송보송해진 채 우리는 서로의 알몸을 껴안고 있었다. 섹스도 좋지만, 몸을 섞고 난 뒤 한껏 말랑말랑해진 마음으로 함께 맨살을 문지르는 게 때로는 더 좋았다. 나른한 기분에 승규의 품에 파묻혀 눈을 깜빡일 때였다.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나를 방해했다. 어지간하면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액정에 떠오른 글자를 보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승규를 내버려 두고, 전화를 받았다.
[희수야. 지금 어디니?]
엄마였다.
“엄마? 저… 지금 집이죠.”
승규네 집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으니까 마음이 어딘가 뜨끔거렸다. 사실을 그대로 고해바칠 수가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무슨 소리야, 엄마가 지금 너 오피스텔 왔는데.]
심장이 쿵 하고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흘긋 시계를 쳐다보자 아홉 시 반이었다. 대체 왜 이 시간에 엄마가 집에.
“……저 그냥 잠깐 밖에.”
[윤희수, 엄마가 사소한 거짓말도 절대 하지 말랬지.]
“아 엄마….”
[하, 그건 됐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승규가 숨을 죽이고 엄마와 통화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너 새로운 사람 만나면 엄마한테 먼저 얘기를 해야지.]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승규를 두고 나는 순간 멍해졌다. 승규랑 나랑 다시 만난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걸 엄마가……. 상황은 사실 명료했다. 짐작할 만한 경로는 단 하나였다.
“김지운이 그랬어요?”
하. 엄마랑 전화하는 중이 아니었더라면 욕설을 내뱉었을 것 같다. 학교에 와서 나를 아웃팅 시킨 거로도 모자라, 부모님까지 건드리며 나를 조종하려 드는 김지운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너 지금 중요한 게.]
“김지운이 그랬냐구요.”
[윤희수. 너 엄마한테 지금 언성 높이니?]
“하…….”
하지만 김지운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엄마는 나에게 항상 어려운 존재였다. 냉정하고 차갑게 나를 내리누르는 엄마의 말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속이 갑갑하게 차올랐다. 기분이 상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지운 씨 아니었으면 엄마가 깜빡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나를 두고 엄마가 먼저 그렇게 얘기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확인사살을 당하자 뒤통수를 쾅 하고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거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꽉 부여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엄마, 제가 그 사람 전화 받지 말랬잖아요.”
솔직히 엄마한테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동시에 그때 엄마와 전화를 할 때 확실하게 김지운과 끝냈다고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다 내가 우유부단하게 굴어서…….
그렇지만 와중에도 나는 분명히 엄마에게 더는 김지운의 전화를 받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아들인 나보다 김지운을 더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건가 싶어서 새삼 서러워졌다. 김지운이 대체 엄마 아들에게 어떤 짓을 한 줄 알고.
[됐고. 빨리 오피스텔로 와라.]
그러나 나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한 엄마는 그렇게 통보했다.
“엄마!”
[엄마랑 얼굴 보고 얘기해.]
그대로 뚝 끊겨버린 전화를 나는 망연하게 지켜보았다.
“아.”
“희수야.”
그런 나에게 다가온 승규가 나를 푹 하고 커다란 품으로 끌어안았다. 승규에게 파묻혀 특유의 살 냄새를 맡자 불안한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아 승규의 목덜미에 대고 얼굴을 문질렀다.
“어머니 전화야?”
“응.”
“뭐라고 하셔.”
승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승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지금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나를 승규가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히 나 때문에 승규까지 심란해지는 건 싫었다. 나는 승규를 바라보며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내가 차 운전할까?”
승규는 애초에 나를 붙잡으려고 들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내게 비치는 묵묵한 방식의 배려가 마음에 지끈하게 닿아왔다. 아, 정말 지금 얘를 두고 어떻게 가라고. 나는 다시 승규의 허리를 껴안고 승규의 입술에 쪽 가볍게 입 맞췄다.
“괜찮아, 너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휴.”
나를 내려다보며 마찬가지로 내 입술에 쪽, 뽀뽀해준 승규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늦은 밤이라 도로에 차가 드물었다. 그대로 아우디를 몰고 나는 서울에 있는 오피스텔까지 밟았다. 한편으로는 무척 조급하기도 했고, 동시에 맞닥뜨리는 시간을 계속해서 미루고 싶기도 했다. 마음 안쪽이 초조함으로 타닥타닥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엄마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속이 아득해졌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가까운 데 있다더니 오래 걸리는구나.”
“죄송해요.”
나는 엄마가 턱짓하는 대로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마 엄마를 마주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바늘로 콕콕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하아. 길고 아득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우리 사이의 정적을 먼저 깨트린 것은 엄마였다.
“요즘 네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들었다.”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랐다. 엄마는 어느 상황에서든 평정을 쉽게 잃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주제를 입에 올리면서도, 무척이나 차분하고 냉랭했다.
“지운 씨가 그 얘기 처음 했을 때, 엄마는 정말 믿고 싶지 않았어.”
믿고 싶지 않았다는 엄마의 말이 순간적으로 나를 열여덟의 미성숙한 과거로 끌어당겼다. 엄마는 그때도 꼭 지금같이 말했다. 승규와 나의 관계를 알고 나서,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승규와 나를 아예 없는 일로 치부했다.
그때 그렇게 엄마의 말을 단단한 방패 삼아 두려운 현실의 뒤로 숨어버렸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동시에,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샘솟았다. 나는 결연하게 마음을 다지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마음이 변했다니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한데, 된 사람이라 그런지 지운 씨는 와중에도 네 걱정뿐이더라.”
“…….”
“엄마도 마찬가지야. 수준에 안 맞는 사람 만나면 결국은 네가 불행할 수밖에 없어.”
“…….”
“희수야, 엄마는 네가 마음 다잡고 지운 씨랑 꾸준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을 통째로 조지려 들어놓고, 그동안 부모님께 온갖 선물 갖다 바치고 사탕발림 퍼부으며 신뢰를 구축한 김지운이 엄마에게 무슨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았는지 참 어이가 없었다.
엄마가 아들인 나의 의사를 존중하는 대신 김지운이 있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엄마는 김지운의 실체를 아직 모르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학교에서 아웃팅 당했다는 사실까지 집에 알리기가 망설여져서 그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꺼려졌다.
“…….”
“…….”
엄마는 입술을 꼭 닫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엄마, 제 인생이잖아요.”
“…….”
“이제는 제가 원하는 건 직접 결정하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승규랑 있을 때 내가 결국 불행해지니 마니 하는 것은 결코 다른 사람이 감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승규와 같이하면서 나의 행복을 직접 쟁취해 나가는 일이었다.
“희수야.”
“네.”
하아. 한숨을 내쉰 엄마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너는 스물다섯이나 먹어놓고 아직도 혼자서 갈피를 잘 못 잡잖아.”
“엄마…….”
“진로만 봐도, 유학을 하겠다 취직을 하겠다 늘상 어영부영.”
“…….”
“엄마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니?”
엄마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나를 아프게 했다. 지금까지 엄마의 눈에 내가 그렇게 비쳐오고 있었나 싶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도 엄마 아들이잖아. 그런데도 나 못 믿어요?
“지운 씨처럼 올바르고 능력 있는 사람 내버려 두고, 만난다는 게 겨우…….”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노력하던 엄마가 무언가가 북받치는 듯 말끝을 흐렸다. 나는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가 인생 살아봐서 알아, 희수야 너 지금 그거 사랑 아니야.”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솔직히 화가 났다. 김지운과 고윤정을 포함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나는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지금 사랑인데, 절대로 사랑이 아닐 수가 없을 정도로 이렇게 절절하게 느끼는데, 다른 사람이 결코 지금의 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단언할 수는 없다.
“엄마, 그만 해요.”
나는 엄마를 노려보았다. 내가 평소답지 않게 날카롭게 반응하자 엄마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엄마가 뭐라고 하시든 저는 그 사람 다시 안 만나요.”
“…….”
“그리고 저 지금 만나는 사람 정말 사랑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마음 그대로의 말을 당당하게 얘기했다. 그런 내가 어이없다는 듯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윤희수, 너 정말 정신 안 차릴래!”
늘 교양 있고 우아한 엄마가 내게 뾰족하게 듣기 싫은 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차라리 웃었다. 그런 나를 보는 엄마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정말로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의 나는 살면서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리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여기서 더 정신 차리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
“저도 성인이니까, 누굴 만나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
“그러니 엄마도 이제 제 인생을 존중해 주세요.”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느새 다시금 처음의 냉랭하고 평온한 표정을 덮어쓴 엄마는 간결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마음 언제까지 가나 한번 보자.”
엄마는 그대로 나를 남겨둔 채 집을 나섰다.
***
엄마의 앞에서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말을 뱉어놓고, 막상 엄마가 떠나고 나자 귀신에라도 씐 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푹 파묻고 숨을 쌕쌕 내쉬었다. 엄마가 했던 말들이 이리저리 얽혀들어 머릿속을 어지럽게 넘나들었다. 깊숙한 물속으로 푹 잠겨 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젖어 들고, 퉁퉁 부풀어 오르고.
잠식당하던 나를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액정에 뜬 승규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희수야.]
“승규야아.”
[너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혼자 있으니까 심장이 쿵쿵 뛰고 너무 무서워. 그래도 지금 네가 이렇게 나에게 전화를 해 줘서…….
“응, 괜찮아.”
나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해 승규에게 말했다. 승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랑 얘기했어?]
“그냥, 좀 싸웠어.”
[우리 일 때문에 그런 거야?]
“어, 음…… 그냥.”
있잖아 그냥 나는, 지금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승규야.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승규가 달려와 버릴까 봐, 차마 입을 떼지 못한 나는 울컥대는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꾹 삼켰다. 이렇게 낮고 부드럽게 내게 다가오는 승규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 그대로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 이번에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다 했어.”
[우리 희수 장하네.]
꼭 애기 어르는 듯한 그 말투에 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엄마와의 대화를 더듬었다. 솔직히 이대로 엄마가 물러날 거로 생각하지도 않고, 앞으로 엄마를 계속 설득해야 하는 건 내 문제이지만, 정말 지금 빡치는 건.
“김지운이 우리 만나는 걸 엄마한테 얘기했나 봐.”
[하, 씨발.]
승규가 격앙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솔직히 나 대신 욕해줘서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서 나, 그 사람 좀 봐야 할 것 같아.”
[뭐라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만나서 얘기 좀 하게.”
승규에게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승규야? 나는 전화가 끊겼나 싶어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희수 너 혼자서?]
“어, 아마 그래야지?”
[희수야, 내가 같이 가면 안 될까?]
승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승규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승규가 내게 보이는 배려와 걱정이 고마웠다. 하지만 나와 부모님, 그리고 김지운이 얽혀 든 얘기를 하는 자리에 승규가 있는 그림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마워 승규야. 근데 일단은 그 사람이랑 나랑 둘 얘기니까.”
[희수야 나는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대낮에 병원 근처에서 만나자고 하면 별일 없을 거야.”
[하…….]
“그 인간이 동네 사람들 눈치 얼마나 보는데.”
언제나 나의 의사를 존중하는 승규이지만, 이번만은 영 탐탁지 않은 듯 승규는 쉽게 나에게 대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그 자식.]
그건 사실이라서 아무런 반박을 못 했다. 좀 위험한 게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악랄하지.
[희수야, 그럼 나한테 언제 어디서 만날지만 알려줘.]
“승규야.”
[알고만 있으려고 그래, 그냥.]
그 말에는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승규가 나를 지극히 걱정하는 마음을 나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약속 잡으면 알려줄게.”
그제야 승규는 조금 안심이 된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을 감고 전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승규의 얕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벌써 열두 시 넘었다. 안 자도 돼?”
[이제 자야지.]
“으응.”
[희수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렇게 우리는 서로 전화기에다가 쪽쪽 뽀뽀를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솔직히 나는 김지운을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그냥 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내 마지막 보루인 부모님을 건드린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뭐가 되었든, 김지운과 끝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얘기 좀 해.]
김지운에게 카톡을 보냈다. 당당하게 전송 버튼을 눌렀지만, 사실은 여전히 불안해서 답장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쥐고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
***
승규에게는 괜찮은 척했지만, 나도 솔직히 김지운을 만나는 게 겁이 나긴 했다. 김지운은 나를 아웃팅 시키면서 이미 한 번 내 상식을 깨부쉈다. 솔직히 열 받으면 그 인간이 무슨 일을 할지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가니까 더 두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도 일단 무조건 낮에 만나고,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서 보면 안전하겠다고 판단했다. 일 년 반을 사귀고도 우습게도 나는 김지운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한 게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병원이 위치한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판에 무척 신경 쓰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눈이 나를 지켜줄 유일한 방패였다.
하지만 그는 굳이 점심시간에 맞춰 병원까지 직접 찾아가겠다는 나의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병원 근처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럼 언제는 뭐 적절해서 내가 병원 들락거리도록 두었나 싶었다. 결국, 김지운과 나는 병원이 위치한 공덕역 부근에서 차로 20여 분 정도 떨어진 카페에서 보기로 합의했다.
“어, 미안.”
“…….”
“환절기라 그런가, 오늘따라 환자가 좀 밀렸다.”
김지운이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약속 시각에서 15분을 늦었다. 안 그래도 이 인간을 마주하는 것이 역겨운데, 카페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리느라 나는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였다.
“나는 오늘은 라떼가 땡기는데.”
나에게 인사한 김지운은 우리가 어제 보았던 사이인 것처럼 태연하고 다정하게 굴었다. 편안하고 나른한 표정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너 정말 미쳤어?”
“희수야?”
“헤어진 사이에 부모님께까지 연락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
저 인간을 붙잡고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나를 향하는 그의 눈이 못된 흥미로 반짝였다. 빙긋이 올라가는 그의 입술을 그대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 그거?”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나를 상기시켰다.
“희수야.”
“…….”
“우리 사이에 어머님께 안부 인사 좀 드린 것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래?”
공기가 아직 후덥지근할 때 나는 그에게 이별을 선포했다. 이제는 찬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했으니 그로부터 시간도 꽤 흘렀다. 그런데도 김지운은 아직 그와 내가 연인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차라리 진드기가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겼다.
“씨발 새끼야, 너 나 아웃팅 시킨 거 까먹었어?”
“…….”
“대체 무슨 낯짝으로 아직까지 들이대는데? 제발 그만 좀 해.”
“…….”
“왜 이렇게 사람이 구질구질하게 굴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를 아웃팅 시킨 김지운 때문에 경영대학원 게이가 된 나는 아직도 학교생활이 껄끄러웠다. 단순히 평범하게 헤어진 사이래도 이렇게까지 매달리면 경우 없는 건데, 내 인생을 작정하고 망쳐놓고서 뻔뻔한 얼굴로 나에게 다정한 척 구는 이 새끼가 정말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구질구질?”
그의 입꼬리가 슥 뒤틀렸다.
“하. 그러니까 희수 네가 좋은 말로 할 때 굽히고 들어왔어야지.”
“…….”
“너 곧 졸업하고 나면 이제 어쩌려고. 대책 없잖아.”
“…….”
“그냥 형 집으로 들어와서 살아. 내가 돈 벌어다 줄게.”
아직도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가 소름 끼쳤다. 그리고 그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 새삼 모욕적이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와 사귀는 동안 졸업하면 자기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버릇처럼 내뱉던 그의 말이 순수하게 내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지운을 보았다. 여전히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반질반질한 가식적인 표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의 비틀린 소유욕이 견딜 수 없이 끔찍했다.
“진짜 말이 안 통하는구나.”
“…….”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우습나 봐? 나라고 너 아웃팅 못 시킬 것 같아?”
첫째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지는 게 두려웠고, 둘째로는 그와 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추락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김지운을 아웃팅 시키는 것은 사실 최후의 방법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나도 강하게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희수야, 우리 애써 힘 빼지 말자.”
그러나 김지운은 아웃팅을 시키겠다는 내 말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깜짝하지를 않았다. 나는 당황했다.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치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내가 보기에 그냥 시간의 문제야.”
“…….”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너는 결국 나에게 돌아오게 돼 있어.”
김지운은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확신에 가득한 채 그렇게 나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그가 싫다고 우리 사이는 끝이라고 온몸으로 발악하듯 외치는데도,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돌덩이처럼 확고하기만 한 그의 태도가 정말이지 기가 질렸다.
“하, 그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네.”
나는 빈정거렸다. 그가 그런 나를 굽어살피겠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희수야, 지금 너는 굉장히 사춘기적인 감정에 혼자 도취해 있어.”
“…….”
“순간의 실수로 나만큼 희소성 있는 남자 놓치면 분명 후회할 거야.”
“…….”
“네 허영조차도, 내가 너를 속속들이 잘 아니까 하는 말이지. 다 너 위해서.”
그가 뻔한 레퍼토리를 또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결코 그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지껄이는 개소리가 다만 우스울 뿐이었다.
“나를 위한다고? 웃기지 마.”
“…….”
“네가 지금 하는 짓이 뭔데? 내 인생에 함부로 끼어들어서 마음대로 짓밟고 방해할 뿐이잖아.”
“…….”
“사랑, 그래 그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어. 그래도 날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말하다가 보니까 목이 꽉 멨다. 뜨겁게 치밀려는 것을 목구멍으로 겨우 꾹 삼켜냈다. 나는 마음을 다시 단단히 먹었다.
“대체 나를 파괴하면서까지 네 옆에 두려는 이유가 뭐야?”
“희수야. 그게 무슨 서운한 말이야.”
그가 내 말이 듣기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처럼 교조적인 얼굴을 하고 자신을 비호했다.
“이거 다 너랑 너희 가족 위한 일인데, 희수가 근시안이라 형 마음을 몰라주네.”
“하, 개소리하지 마.”
“뭐, 내가 괴롭히는 건 그 정비공 새끼 하나 정도려나?”
“김지운.”
그가 승규를 입에 올리자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나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아니면 뭐, 그 정비공 새끼랑 너랑 둘이 이제 감정 동기화라도 됐나 봐?”
“승규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랬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암체어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킨 그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 정말 지루하게 구네.”
“…….”
“야, 내가 경쟁심이라도 생기도록 좀 그럴듯한 남자를 물든가.”
“…….”
“자동차 정비공이 뭐야. 가오 떨어지게.”
나는 내게 다가온 그의 어깨를 힘주어 밀었다. 격하게 치미는 분노로 눈앞이 흐릿했다.
“입 닥쳐.”
너무 화가 나니까, 오히려 냉랭해졌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선고했다.
“너 같은 새끼랑 만나느니, 목매달고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
“…….”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쓰레기 같은 새끼야.”
나는 주눅 들지 않았다. 더 이상 그가 두렵지도 않았고, 기죽지도 않았다. 저따위로 최악인 새끼에게 벌벌 떨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물러서지 않는 나의 눈동자가 재밌다는 듯 그가 픽 웃었다. 그런 그를 간단하게 무시하고, 나는 한마디 한마디씩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말했다.
“쓰레기라니 희수야.”
“…….”
“갑자기 그러니까 너 낯설다?”
김지운은 쓰레기라는 말을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은 그는 무척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근데 윤희수. 우리 애초에 같은 종자잖아.”
“…….”
“그래서 너도 나 만난 거 아니었어?”
“하…….”
하지만 그는 혼자서만 그 명칭을 덮어쓰지 않았다. 나를 그에게로 잡아끌었다.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관계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고발했다. 나는 작게 숨을 뱉었다. 속이 갑자기 울렁거렸다. 하지만 또렷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아니야.”
나는 김지운을 쏘아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와 사랑 없는 가식적인 만남을 이어 나가는 동안, 나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쓰레기로 머물렀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승규로 인해 나는 달라졌다.
“흠…….”
그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를 잠자코 노려보았다.
“우리 희수. 좋은 집안에서 반반하게 잘 태어났는데 참 멍청하고, 무능하지.”
“…….”
“그런 네가 같은 계층 사람한테 순순히 다리나 벌리는 거 말고 먹고살 뾰족한 수가 있어?”
나를 오만하게 깔아보는 그가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순간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골이 얼얼해서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한때 사귀었던 사람에게 던지기에는 너무하리만큼 모독적인 언사였다.
“김지운.”
그가 방금 내뱉은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됐다. 다닥다닥 다슬기처럼 피부 위로 달라붙으며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려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뭘 하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승규의 말을 떠올렸다.
그딴 소리를 하고도 나를 여전히 유들유들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김지운을 보자니 이제는 정말로, 궁금해졌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나는 대체 너한테 뭐였어?”
“질문 수준 하고는.”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궁금하다니 대답해 줄게.”
그가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와 침을 삼켰다.
“섹스 토이?”
나는 얼어붙었다.
“희수 너 꼭 부자들 취향에 알맞게 잘 길든 예쁜 장난감 같아.”
“…….”
“뭐, 다른 말로 하면 고급 창녀?”
“…….”
“딱 가구처럼 집에 쟁여놓고 꼴릴 때 박기 좋아.”
지나친 충격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온통 경직됐다. 전신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김지운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건 폭력이었다.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종류의.
“…….”
그때였다.
“씹새끼, 너 오늘 내가 죽일 거야.”
갑자기 들린 욕설에 나는 눈을 크게 껌뻑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카페 카운터 쪽에서 승규가 날래게 튀어나왔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채 승규를 돌아보았다. 기억 속의 언젠가 본 적 있었던 서슬 퍼런 광기가 승규의 눈에서 번쩍였다. 승규는 단박에 김지운의 멱살을 잡아챘다.
“윽, 으윽.”
“개만도 못한 새끼. 너 내 앞에서 그 말 다시 한번 지껄여 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승규가 김지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곧바로 피가 툭 터졌다. 나는 김지운이 당황하는 얼굴을 처음으로 봤다. 비틀거린 김지운이 승규에게 반격하려 했지만, 승규는 김지운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김지운을 가뿐하게 바닥으로 내리 눕힌 승규가 그의 배를 거세게 밟았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어 커다란 주먹을 김지운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사지를 퍼덕거리는 김지운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애썼지만, 승규가 거세게 하반신을 짓눌렀다. 게임이 안 되는 상대였다. 김지운도 키가 큰 편이지만 애초에 승규와는 체급이 달랐다.
퍽, 퍽. 무지막지한 소리와 함께 무자비한 폭행이 계속됐다.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물러섰다. 승규가 내비치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누구도 섣불리 승규를 말리지 못했다. 김지운의 명품 셔츠가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핏물이 흥건하게 카페 바닥에 고이고 김지운이 정신을 잃을 때쯤에야 격렬한 소리는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