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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승규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꽉 감싸 쥐고 눈을 느릿하게 껌뻑거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등지고 앉은 승규의 너른 등이 보였다.
“승규야.”
그 순간 승규의 이름을 부른 것은 본능이었다. 나는 아직 멍멍한 정신으로 나를 돌아보는 승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승규의 눈빛에서 감정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나는 입을 가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나 얼마만큼 잤어?”
“한 세 시간?”
나의 목소리는 채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승규의 간결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솔직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아직도 속이 조금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젯밤의 기억은 생생했다. 아니, 다른 부분들은 흐릿하게 희미해졌지만, 승규와 나누었던 대화만은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
“…….”
승규는 묵묵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취해서 갑자기 너한테 막 그런 거….”
“…….”
“잘못했어.”
내가 승규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새벽에 예의 없이 무턱대고 승규의 집에 들이닥쳐 울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선택을 또 한 번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진상 같은 내 모습이 창피한 건 사실이었다.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해 징징거리고 매달리며 생떼를 썼던 나 자신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사실 나라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승규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승규를 만날 용기가 없어서 일부러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돼버린 걸 나도 어떡해. 나는 아무 말 없는 승규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괜히 손톱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어.”
나의 말에 대답하는 승규의 목소리가 까끌까끌했다.
“근데 내가 어제 했던 말은 안 미안해.”
그러자 나를 향하는 승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나는 지금에야말로 우리가 어른답게 대화를 나눌 순간이 도래했다고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승규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늘 내가 제대로 사과했던 적 없는 것 같은데.”
“…….”
갓 운을 뗀 나를 응시하는 승규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승규야,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네 상황보다 내 감정이 먼저였던 것 같아.”
“…….”
“솔직히 말해서, 너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어.”
나는 승규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승규는 숨죽인 채 그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가 없이는, 결국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더라.”
“…….”
나는 팔을 뻗어 승규의 손을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마침내 승규에게 진심으로 그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저릿하게 북받쳤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나로 인해 승규가 느꼈던 고통과 내가 지독하게 앓았던 후회가 담겨 있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지금까지 너 상처 줘서 미안해.”
“…….”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어서, 너 사랑해서 너무 미안해.”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는데, 말을 시작하자 다시금 울컥울컥 치미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승규에게 확 달려들었다. 애틋하게 그리웠던 그의 너른 품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담아 꽉 껴안았다.
“이번엔 내가 진짜 잘할게.”
“희수야.”
“나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 승규야?”
나는 승규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뒤늦게 깨달은 사랑의 무게가 사무치게 심장에 파고들었다. 제발,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지금까지의 내가 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만 애썼다면, 이번에는 내가 너를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싶어.
“희수야, 그치만.”
나의 등에 손을 조심스럽게 댔다가 뗀 승규가 머뭇거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솔직히 승규가 어떤 말을 할지 나는 예상했다.
“알아, 너 여자 만나는 거.”
차마 승규의 입으로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선수를 친 나는 그를 대신해 말했다.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심장이 찌르르했다. 금방이라도 다가올 절망이 넘실거리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너도 나랑 이러는 대신에 결혼해서, 편하게 살 수 있는 것도.”
나는 승규에게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여자와 결혼해서 닮은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승규를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견딜 수 없이 따끔거렸다.
“…….”
“…….”
고개를 살짝 기울인 승규가 바닥을 향하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의 시선을 향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어서 나는 초조하게 입술만 핥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승규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희수야, 그거 알아?”
“응?”
나는 승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난 그런 거 처음부터 중요했던 적이 없어.”
말을 마친 승규가 내게 키스했다.
“하아…….”
입술이 맞닿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곳은 비로소 승규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겹쳐 입고 있던 허울을 벗어 내리고, 에워싸고 있는 장애물을 넘어서고, 마침내 솔직하고 완전해진 우리는 서로에게 닿았다.
“…….”
“…….”
잠시 입술을 뗀 승규와 나는 마주 보았다. 어지럽게 얽혀들었던 혀끝처럼 서로를 옭아매는 눈동자가 촛불처럼 흔들렸다. 승규가 슬쩍 웃었다.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고 나도 승규를 보고 웃었다.
뭐라고 말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나눈 키스 단 한 번만으로, 나와 승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확연히 달라졌다. 마침내 서로를 원하는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전신에 얕게 전율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후…….”
나는 벅찬 마음으로 승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또 한 번 승규의 입술을 물자, 승규가 나의 허리를 감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키스에도 갈증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나는 승규의 입술을 빨면서 절박하게 매달렸다. 내 입안을 커다랗게 헤집어주는 승규의 혀가 못내 좋았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빨며 시작했던 키스는 어느 순간 격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를 끌어안은 승규는 거침없이 혀를 움직였다. 도톨한 승규의 혀끝이 입천장을 슥 스쳐 지나갈 때마다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촉, 촉,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음, 으음.”
“흐응.”
키스가 이어지면서 승규와 나는 당연한 것처럼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몸을 만지는 손길은 이제는 마냥 다급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이제는 서둘러 붙잡지 않아도 상대가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승규의 손이 내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놓았다. 거친 손길이 엉덩이를 또 한 번 크게 주무르자 반사적으로 비음이 터졌다. 승규가 내비치는 노골적인 욕망에 다리가 절로 느슨하게 벌어졌다. 하아. 내 귓가에서 승규가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 역시 승규를 욕망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티셔츠 끝자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대로 조급하게 윗옷을 벗어젖혔다. 스스로 탈의하는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이 뜨거워졌다. 승규의 손이 불쑥 나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찍, 하고 바지 지퍼를 끌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승규가 바지를 쉽게 벗겨낼 수 있도록 엉덩이를 바짝 당겼다.
승규가 팬티와 바지를 단숨에 끌어 내리자 나는 한순간에 알몸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와 작게 헐떡였다. 나는 승규를 간절히 향했다. 솔직히 나는 한시가 급한 심정인데, 승규는 제 옷을 벗는 대신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사실 누가 봐도 넋을 빼고 있는 게 당연한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봐아.”
나는 괜히 승규를 슬쩍 밀며 타박했다.
“그냥.”
“…….”
“너무 예뻐서.”
그렇게 말한 승규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솔직히 그런 식의 말을 승규가 해주리라고 기대한 건 맞았다. 하지만 막상 승규의 입으로 예쁘다는 말을 듣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괜히 따끔따끔한 귓불을 매만졌다.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승규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불순물도 없었다. 나를 향하는 승규의 감정은 그렇게나 진솔하고 순수했다. 언제나, 매 순간 그랬었다. 그를 느끼는 나는 뜨거워졌다. 나를 선망하고 갈망하는 승규의 열렬한 시선이 못 견디게 좋았다.
“부끄러워. 너도 빨리 벗어.”
슬쩍 승규의 눈을 피한 나는 손을 뻗어 승규의 티셔츠 아랫자락을 끌어 올렸다. 피식 웃은 승규가 직접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탄하고 건장한 승규의 전신이 드러났다. 내게 예쁘다고 속삭였던 조승규야말로 말도 안 되게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나는 새삼 감탄했다.
“…….”
“…….”
그렇게 마주 본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마침내 상대를 온전히 가질 수 있게 된 순간, 승규도 나도 섣불리 서로에게 손을 뻗지 못했다. 몸을 처음 섞는 사이도 아니면서, 지금 이때 상대를 만지는 일이 망설여질 만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살피는 시선만이 벗은 몸을 간지럽게 훑어 내렸다.
“하아…….”
결국, 먼저 손을 뻗은 것은 나였다. 나는 과감하게 승규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흣. 승규가 낮게 신음했다. 반쯤 서 있던 승규의 성기가 내 손바닥 안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승규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파묻은 나는 승규의 성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 희수야. 갑자기 그렇게 만지면.”
큽. 작게 숨 삼키는 소리를 낸 승규가 바짝 긴장했다. 승규의 성기는 내 손에서 착실하게 크기를 부풀렸다. 기둥이 꼿꼿하게 솟아오르고 귀두가 꺼떡거렸다. 내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곧장 반응을 보이는 승규가 좋았다.
“하아.”
처음에 주춤거리던 승규도 어느 순간 목을 뒤로 젖히고 나른한 얼굴로 내 손길을 즐겼다. 미끌미끌하게 배어 나오는 쿠퍼액을 귀두 전반에 펴 바르듯 문지르며 나는 승규의 성기를 빠르게 마찰했다. 펄떡이는 승규의 성기가 어느덧 완연하게 발기해 모양을 갖췄다. 막상 다 커진 모습을 보자 그 크기가 새삼 어마어마해서 기가 질렸다.
두툼한 기둥에 핏줄이 울뚝불뚝하게 솟아 있고 귀두가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성기의 모습은 흉악하리만큼 적나라했다. 그런데 동시에 뭐랄까, 난 그게 굉장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빨고 싶어.”
“희수야.”
“그렇게 할래, 응?”
안 그래도 되는데. 승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눈동자는 정염에 젖어 들어 있는 채였다. 나는 승규의 몸을 잡아끌어 그를 침대에 앉혔다. 근육이 탄탄한 승규의 허벅지가 넓게 벌어졌다. 승규의 다리 사이로 들어간 나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로 코앞에서 크고 두툼한 막대기가 위협적으로 꺼떡거렸다.
“하아…….”
나는 펠라는 영 익숙지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승규라면 뭐든 다 좋았다. 입을 아 벌리고 승규의 귀두를 앙 베어 물었다. 따끈하고 비릿한 살덩이가 입안에 퍼졌다. 쪽, 하고 승규를 그대로 입안으로 빨아 당겼다.
“하아.”
낮게 울려 퍼지는 승규의 신음이 저릿하고 달콤했다. 그에 자극을 받은 나는 거대한 승규의 성기를 좀 더 안으로 당겨 물었다. 쩍 벌어진 입으로 기둥이 끝도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솔직히 순간 생리적인 불쾌감이 일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팔을 길게 뻗어 승규의 골반을 잡았다. 그리고 기둥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거칠거칠한 성기의 표피가 금세 타액으로 젖어 들었다.
나는 머리통을 앞뒤로 움직이며 승규의 성기를 빨아 삼켰다. 솔직히 승규는 내가 물기에는 너무 컸다. 한계까지 크게 벌리느라 입 근육이 뻣뻣하게 땅겼다. 그래도 나로 인해서 흥분한 승규가 머리칼을 거세게 움켜쥐면 그 얼얼한 버거움을 잊을 만큼 강렬하게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희수야, 그만해도 돼.”
“아이야, 어 알래.”
솔직히 계속 빨다 보니까 힘들었다. 침도 막 입에서 줄줄 새어 나오고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에마저 승규가 나를 배려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탱탱한 승규의 성기를 입에 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아니.”
“…….”
“내가 빨리 너 안에, 후, 들어가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승규의 그 말에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펑 터질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를 침대에 눕힌 승규는 관능적인 손길로 내 전신을 매만졌다. 어쩐지 나를 매만지는 그대로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얼굴을 푹 가렸다. 승규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으면, 승규의 손가락이 유두를 건드렸다. 축축한 입술이 목선을 쭉 타고 쇄골까지 내려오면, 까끌까끌한 손바닥이 허리를 뭉클하게 쓸어내렸다.
나는 승규에게 마음이 잔뜩 달아 있었다.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갔다고 생각하는 승규를 혼자서 절박하게 그리워하며 고단한 시간을 보냈다. 그랬기에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나를 소중하게 아껴주는 승규가 더욱 감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승규의 손이 몸을 스칠 때마다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오늘, 후, 왜 이렇게 예민해?”
“아, 흐읏, 모르겠어.”
승규의 말캉한 입술이 나를 빨아 당기고 승규의 까칠한 손바닥이 나를 쓸어내렸다. 그렇게 승규가 나를 탐하는 모든 순간마다 나는 거의 몸서리쳤다. 몸이 정말이지 부들부들 떨렸다. 안쪽 깊은 곳에서 불꽃이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하게 애타는 마음을 좀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흐, 아읏, 승규야, 나 죽을 것 같아.”
아직 승규의 애무는 상반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도, 승규의 손이 채 닿지도 않은 나의 성기는 이미 꼿꼿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승규는 부드럽게 나를 예열하려는 것 같았지만, 승규의 손길이 진해질수록 나는 잔뜩 초조해져 안달을 냈다. 마음은 이미 저 끝까지 가 있는데, 그에 비해 쾌감은 지나치게 느린 속도로 달아올랐다.
“아, 승규야, 승규야아.”
“후… 희수야.”
나는 내 왼쪽 유두를 입에 물고 집요하게 핥아대는 승규의 이름을 마구 불러댔다. 자신을 보채는 나를 승규가 열띤 눈으로 올려다봤다. 나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승규를 바라보았다.
“나, 그냥, 아으, 흐으.”
“…….”
“그냥 빨리 해 주면 안 돼?”
꽉. 나의 다리 사이를 누르고 있던 승규의 성기가 묵직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승규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승규가 내게 그대로 달려들었다.
“하아…….”
나는 그런 승규를 위해 다리 사이를 넓게 벌렸다. 이대로는 흐물흐물하게 풀린 몸이 그대로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스스로 무릎 아래를 손으로 받쳐 들었다. 승규는 훤히 드러난 내 입구에 로션을 묻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찌꺽찌꺽 소리를 내며 구멍을 넘나들었다.
승규는 공을 들여 내 안을 넓혔다. 내벽을 훑어 내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꼼꼼했고 집요했다.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이 안을 주르륵 긁어내렸다. 미리 성감대를 찾아 꾹꾹 누르는 손길에 등골이 찌릿하게 울렸다. 다 좋았다. 다 좋은데,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해내기에 내가 지나치게 참을성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 그냥, 넣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럼 너 아프잖아.”
“아니, 흐으, 그래두우.”
승규가 일부러 그러려는 건 아니었겠지만, 승규의 섬세한 손길 덕에 나는 잔뜩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잔뜩 후끈거렸다. 안절부절못하며 다리를 들썩거려 허공에서 종아리가 맥없이 달랑거렸다. 제바알. 하지만 내가 토해내듯 뱉어내는 말에도 승규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여기 엄청 말랑말랑해.”
“아, 흐으응.”
결국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내 안을 죄다 녹진녹진하게 녹인 후에야 승규는 나를 놓아줬다.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체액과 로션으로 범벅된 손가락이 내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벌어진 구멍이 뻐끔거렸다. 솔직히 나는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진이 다 빠졌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도, 또 나에게 다가올 더한 쾌락을 알기 때문에 잔뜩 달아오른 채였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하느작거리는 내 머리를 승규가 지그시 감싸 쥐었다. 승규가 나의 목덜미를 단단히 고정하고 자신을 정면으로 보게 했다. 속눈썹을 여러 번 깜빡인 나는 뒤늦게 승규를 바라보았다. 나를 향하는 승규의 눈동자는 짙은 열기로 들썩이면서도 신기하리만큼 단단했다.
“이제 넣을 거야.”
그건 동의를 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선전포고에 더 가까운 말이었다. 움찔. 승규의 선언에 다리 사이의 구멍이 파르르 떨렸다. 승규가 나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잡았다. 이미 널브러져 있던 다리가 거의 일자가 될 만큼 쫙 벌어졌다. 흡.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쿠퍼액으로 미끈미끈해진 귀두가 엉덩이골을 미끄러졌다.
“하, 흐으읏.”
“후으.”
쩍 하고 엉덩이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승규가 그대로 나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느릿하게 들어오는 기둥이 좁은 공간을 넓히고 자신의 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승규가 내 안에서 펄떡이며 맥동했다.
이미 안을 충분히 풀어둬서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감이 지나치리만큼 고조된 것이 문제였다. 아, 아아아. 버겁도록 커다란 성기가 내벽을 자극하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몰아치는 쾌감에 그대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하.”
몸을 숙인 승규가 내 귓가에 밭은 숨결을 뱉었다. 성기를 문 나의 구멍이 팽팽하게 벌어져 있었다. 승규의 거친 음모가 내 엉덩이에 문질러졌다. 기어이 내가 승규를 끝까지 삼켰다는 증거였다. 눈이 절로 감겨들었다. 승규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히 이어졌다는 충족감을 만끽했다.
“후으…….”
승규는 내 안에 성기를 밀어 넣기만 한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열띤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머무르자 정말 닿지 않을 것만 같은 나의 가장 깊숙한 안까지 승규가 모두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꽉 찬 것 같아.”
나는 어딘가 몽롱해진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황홀했다.
“만져 봐.”
나는 승규의 손을 향해 팔을 뻗었다. 승규가 조심스럽게 자신이 들어 있는 내 아랫배를 만졌다. 단단한 손바닥이 근육이 잡히다 말아 말캉한 살점을 쓸어내렸다.
“히히.”
나는 제 안에 들어 있는 나를 확인하는 승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벽의 압박감 때문인지 살짝 일그러져 있던 승규의 표정 역시 온화하게 녹아내렸다.
“웃긴 왜 웃어.”
“그냥. 흐으.”
“그냥 뭐.”
“너무 좋은데, 쫌 이상해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승규가 나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봐줄 것을 알아서이기도 했다. 섹스를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면서 승규가 지금 내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좋고, 또 막 이상했다.
“이상해?”
내 말에 피식 웃은 승규가 쾅 하고 박아 넣었다.
“아흣.”
예고 없이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성기에 절로 신음이 터졌다.
“그렇게 갑자기, 학, 박지 마.”
“싫은데.”
다시 한번 쾅, 승규가 안을 치받았다. 내 안을 잔뜩 차지한 채 등을 깊숙이 숙인 승규가 나의 목선을 쭉 핥아 올렸다. 그러느라 속에 들이찬 성기의 각도가 비스듬히 빗겨 가면서 예민한 내벽이 사정없이 문질러졌다. 발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힉.”
짧은 숨을 내뱉은 나는 그대로 사정했다.
“벌써 쌌어?”
그렇게 묻는 승규는 놀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 나는 창피해서 다리를 꽉 오므렸다.
“아, 갑자기 너무 조여.”
“으읏.”
“희수야, 힘 좀 빼봐.”
“몰라아.”
승규가 그 큰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찰싹 쳤다. 순간적으로 하반신의 근육이 놀랐다가 다시 풀어졌다. 그 틈을 타 승규가 성기를 뒤로 뺐다가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때리구 그래애. 나는 어리광 섞인 목소리를 했다. 그러자 승규가 하하 웃었다.
“방금 그거 다시 해봐.”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승규의 얼굴을 매만졌다.
“응?”
얼뜬 표정을 한 승규가 철썩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나를 박았다. 나는 찌릿하게 밀려드는 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그게 아니라…….
“아니, 그거 말구.”
나는 승규의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슬쩍 그 끝을 끌어 올렸다. 말로 하기는 어딘가 마음이 수줍었다. 고맙게도 나를 눈치채준 승규가 나를 보고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너무 찬란해서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나는 우리가 섹스를 할 때 승규가 웃는 게 좋았다. 마침내 그럴 수 있게 된 게, 정말이지 간절한 마음으로 좋았다.
“너무 좋다.”
나는 승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쿵, 하고 밀어 넣은 승규가 내 입술에 뽀뽀했다. 퍽, 퍽, 아래에서 성기를 세게 올려칠 때마다 쪽, 쪽, 위에서는 입술이 내 몸 곳곳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아, 아아!”
아래를 치받는 승규의 움직임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승규는 나를 향한 그의 욕망을 거세게 내 안에 쏟아부었다. 철썩, 철썩. 승규가 빠르게 드나들 때마다 아래에서 적나라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다리로 승규의 허리를 감았다. 승규가 힘 있게 나를 몰아치면 감정과 쾌감 모두가 극한까지 고조되었다.
“하, 윤희수.”
벅찬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친 승규가 내 안에서 잘게 진동했다. 아래를 헤집는 움직임은 거침없었지만, 나를 대하는 승규의 태도는 하염없이 다정했다. 승규는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서 나와 눈을 맞추고, 파드득 떨리는 내 몸에 입술을 쪽쪽 찍었다.
“희수야.”
“으응?”
느릿하게 성기를 뽑아낸 승규가 나를 불렀다. 다시 들어와야 할 때가 됐는데, 승규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안달이 나서 승규의 어깨를 잡았다. 솔직히 약간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승규에게 대답했다.
“이제 나 두고 안 갈 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전히 쓸쓸함이 한곳에 남아 있는 승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음을 애써 다잡은 나는 붙잡은 승규의 어깨에 힘을 세게 주었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응, 안 가.”
제발 내가 그에게 확신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무 데도 안 가.”
나는 답했다. 하, 숨을 몰아쉰 승규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다시금 승규가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꼭 승규의 모양대로 벌어졌다. 이대로 영영 승규가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승규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승규야, 나도 사랑해.”
나는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하아…….”
사정의 순간이 임박하자 승규가 나에게 다시 키스했다. 아래에서 꿀렁대는 성기가 내벽에 정액을 길게 토해내는 동안, 우리는 세상에 단둘밖에는 없는 것처럼 절실하게 서로에게 입 맞췄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는 승규를 내 안에 품었다.
***
승규의 품에서 눈을 떴다. 좁은 창문으로 희미한 햇빛이 희부옇게 새어 들어왔다. 눈이 부셔 속눈썹을 여러 번 깜빡였다. 으음. 나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신음했다. 새벽에 승규가 좀처럼 놓아주지 않고 집요하게 괴롭혔던 온몸이 욱신거렸다. 도대체 몇 번을 사정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엉덩이 사이에 가득한 정액이 금방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 가슴팍을 내려다보자 가관이었다. 하도 빨고 짓씹어 퉁퉁 부어오른 유두는 물론이고 가슴 전체가 얼룩덜룩한 입술 자국으로 한가득했다. 사실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승규가 남긴 지난밤의 흔적은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생생하게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몸을 매만졌다.
승규와 다시 만나 섹스하면서, 맨 처음의 관계를 제외하면 승규는 나에게 못되게 굴려고 애쓰면서도 자국이 날 만큼 내 피부를 세게 물지는 못했다. 이제는 당당하게 온몸에 번질 수 있는 소유욕의 흔적이 내가 온전히 승규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그죽죽하게 부어오른 울혈이 사실은 좀 자랑스럽게도 느껴졌다.
기지개를 쭉 켰다. 그대로 몸을 반쯤 일으킨 나는 고개를 돌리고 승규의 방을 휘 둘러보았다.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예전에 벽에 억지로 걸어주고 간 달력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실 내부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 전반적으로 방이 훨씬 단정하고 정돈된 느낌이 났다. 꼭 누군가의 손길이 꾸준하게 닿아 있는 것처럼…….
조금 선득해진 마음으로 승규를 내려다봤다. 승규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짧고 단정한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승규를 바라보며 짧게 숨을 흡 들이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승규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승규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으음…….”
승규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승규의 얼굴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눈을 완전히 뜬 승규가 나를 확인하고는 부스스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런 승규의 품에 안겼다. 희수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승규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
나는 스며드는 불안감을 차마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다만 승규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의 너르고 탄탄한 가슴팍 위에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코끝을 문질거리며 훅 하고 승규의 체취를 갈급하게 들이켰다. 희수야, 간지럽잖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승규가 속삭였다. 승규의 커다란 손이 아직 어젯밤의 여파로 얼얼한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둘만이 있는 시간은 오래도록 계속하지 않았다.
달그락.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야, 너 속옷 빨래.”
승규와 나는 여전히 침대에서 알몸으로 엉켜있는 채였다. 자연스럽게 승규의 집 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우리를 발견했다. 툭, 여자의 손에 들린 에코백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승규를 더 꼭 껴안았다.
“하…….”
여자는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분노하지도 않았다. 다만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모든 것을 예감했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차마 그런 여자를 마주할 수가 없어 승규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기어코 네 무덤을 파는구나, 조승규.”
여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잔뜩 가시를 세웠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상처가 완전히 숨겨지지 않았다. 내가 꼭 옭아맨 탓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된 승규가 동요했다.
“윤정아.”
침을 꿀꺽 삼킨 승규가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너 정말 이럴 거야?”
“…….”
여자는 자신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승규가 침대에서 조금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더욱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던 여자의 표정이 결국 엉망으로 구겨졌다. 눈을 꼭 감았다가 뜬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 쟤 하는 꼴 질린다며. 넌더리가 난다며.”
“…….”
“천사 같은 얼굴로 그러니까 더 끔찍하다며.”
격앙된 여자의 목소리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총알처럼 후두둑 쏟아지는 말에 조금 겁에 질린 나는 몸을 옹송그렸다. 승규가 지금껏 내게 직접적으로 보인 적 없던 상처의 적나라한 실상은, 얼떨떨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가, 좀 상처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가, 어떻게 보면 당연하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승규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승규를 다시 붙잡았다. 내게로 꽉 잡아당겼다. 하. 작게 한숨을 내쉰 승규가 나를 난감하게 내려다보았다. 승규는 결국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안도했다.
“개새끼.”
울먹임을 토해낸 여자가 승규에게서 등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떠나고도 오래도록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서로를 계속해서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
나는 뭔지 모를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승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내가 나쁜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승규가 떠올리고 있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나였으면 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승규가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했다.
“승규야.”
나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응.”
용케도 그런 나를 눈치챈 승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숨을 길게 내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 너한테 그랬어?”
“…….”
“너 많이 질리고, 끔찍하게 했어?”
무척 조심스럽게 내뱉은 목소리가 연약했다. 나는 자신 없었다. 그래도 승규한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내 머리통을 감싸 쥔 승규가 느릿한 손길로 나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몸을 옹송그렸다.
“응. 나 너 많이 미워.”
승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더 이상 끓어오르지도 않고, 이제는 차라리 평온하게 식어버린 목소리였다. 내가 밉다는 승규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은 무엇보다, 덜컥 무서워졌다.
“후회해?”
혹시라도 생각에 깊이 잠겨있던 승규가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을까 봐. 아니 사실은, 승규가 애초에 나를 사랑하게 된 사실을 후회하고 있을까 봐.
“뭐를?”
승규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에는 조금은 씁쓸하고 스산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에 대한 회한이었다.
“…….”
“…….”
나는 승규의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희수야.”
“…….”
“근데도 나 너 사랑해.”
‘근데도’라는 짧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승규의 갈등을 짐작하자 마음이 아득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승규의 손가락을 느끼며 나는 조용하게 울었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내가 승규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승규와 나 사이를 벌리는 틈에는 평생이 가도 결코 완전히 아물지 않을 상처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껄끄러운 죄책감이 있었다.
나에게 휘말린 승규는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결합은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차라리 파탄된 잔해 위에서 다시 우리를 쌓아 올리는 행위였다. 그 과정은 순전히 아름답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의 우리가 서로에게 가졌던 순수한 밀도의 애정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만으로는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승규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나는 과거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미래의 우리를 꿈꾸었다. 지금의 우리가 디디고 선 기반은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했다. 그 위로 새로운 사랑을 쌓아나가는 행위는 절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나아가기로 했다.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