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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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여자의 화장은 흠잡을 데 없이 말끔했다. 입고 있는 옷도 값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체형의 강점을 적절하게 드러냈고 유행에 알맞게 세련됐다. 겉모습으로 어림잡아 보면 뷰티 업계에 종사하는 건가 싶었다.

잔뜩 긴장한 채 여자를 탐색하는 나는 나를 또렷하게 응시해오는 여자의 앞에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나도 꿀리고 싶지 않아서 대학원 입학할 때 엄마가 명품 브랜드에서 맞춰준 정장을 입고 나갔다.

“…….”

“…….”

테이블 위에는 음료 두 잔만이 단출하게 앉아 있었다. 인사를 겨우 나눈 여자와 나 사이는 어색하게 고요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자몽주스에 꽂힌 두꺼운 빨대를 쪽 빨아먹은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승규랑 동갑이시죠?”

여자가 내뱉은 첫 질문은 뜬금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

간결하게 대답하고 여자를 마주 보았다.

“그럼 나보다 어린 것 같으니까 말 편하게 할게.”

자몽주스를 내려놓더니 슬랙스를 입은 다리를 깊숙하게 꼰 여자가 나를 건너다봤다. 허. 나는 허탈함에 짧은 숨을 뱉었다. 병원에서도 느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를 아래에 두고 누르려는 여자의 의도가 너무 명백해서 나는 절대로 여자에게 짓눌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다.

“너 네가 승규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알긴 하니?”

당장 본론으로 접어든 여자가 나를 압박해왔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잔을 천천히 들고 커피를 슬쩍 마셨다. 입안에 커피향이 쌉싸름하게 퍼졌다.

“승규랑 내 일에 그쪽이 무슨 상관이에요?”

밀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렷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내가 승규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나와 승규 사이의 일이었다. 여자가 그를 꼬집으며 이러니저러니 내 앞에서 무기처럼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건 명백한 월권이었다.

여자는 냉랭하게 굳어 있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가 짧게 혀끝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난 승규가 너 때문에 힘들어할 동안 쭉 승규 옆에 있었으니까.”

여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요했다. 그렇게 말하는 여자가 더 이상 단순히 나를 찍어 누르려고 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말끝에 어린 스산함에 입이 절로 다물렸다.

“…….”

흠칫 몸이 떨렸다. 열여덟의 내가 승규를 떠나고 그렇게 칠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순간뿐만 아니라, 나와 떨어져 있던 세월 역시 지금의 승규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내가 비어 있는 시간의 승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첫째로는 내가 승규를 버리고 갔고, 둘째로는 내가 그런 승규를 돌아볼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이 그런 나에게 내팽개쳐진 승규의 옆에 쭉 머물러왔다고 말했다.

승규가 겪은 괴로움. 순전히 내가 그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결코  아는 척을 할 수도 없고 감히 그래서도 안 됐다. 나는 언제나 그 앞에서는 죄인처럼 숙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모르는 승규의 아픔을 지켜보았다고 말하는 여자를 두고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난 너 인제 와서 이러는 거 되게 좀, 가소롭다고 해야 하나.”

“…….”

“승규한테 사랑한다고 했다며.”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것까지 여자에게 얘기한 건가, 승규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려고 했다. 동시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얘기를 털어놓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런 얘기를 나눌 만큼 내밀한 사이인가, 여자에 대해서 질투가 났다.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눈알만 불안하게 굴리고 있는 나를 보며 여자가 짧게 웃었다. 아주 비릿한 냉소였다.

“승규에 대해 알긴 뭘 얼마나 안다고 사랑해.”

“저기요.”

하지만 여전히, 승규를 향한 나의 감정에 대해 여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불편했다. 내가 그 시절 승규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내가 승규에 대해 가진 마음의 깊이를 예단할 순 없다. 나는 여자에게 반기를 들려고 했다.

“네가 애초에 승규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나 있어?”

하지만 여자는 나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나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승규의 지난날을 함께해온 여자는 승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승규와 재회한 후에도 기형적인 만남을 이어 나갔을 뿐인 내가 승규에 대해서 아는 것들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죄송한데, 그건 그쪽이 그렇게 판단할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해서 승규를 향한 나의 사랑이 거짓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이다. 승규에 대해 단순히 지엽적인 정보를 하나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더욱 진실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내 보기에 너는 그냥 네가 만들어 낸 추억에 혼자 빠져 있는 거야.”

여자는 단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여자가 보이는 지나친 확신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듯 압박했다.

“그딴 추억 너한테나 아름답지.”

“…….” 

“그거 알아?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은 승규에겐 고통이었어.”

예리한 여자의 말이 비수가 되어 마음에 꽂혔다. 내가 한번 해봤던 적이 있는 생각이라 더욱 날카롭게 다가왔다. 승규와 그렇게 헤어진 이후 나는 무참했던 이별의 순간을 나 좋을 대로 삭제한 뒤 승규와 함께했던 사랑이 아름다웠다고 편향적으로 기억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멋대로 재편집된 추억과 향수에 젖어 다시 만난 승규에게 들이대고, 또 한 번 그에게 상처 입힌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함께하는 날들은 승규에게는 결코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통렬한, 그래서 내가 피하고만 싶었던 현실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래 둘이서 잠깐 좋았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승규가 혼자 감당해냈을 세월을 네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

“넌 그거에 대해서 좆도 모르잖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잖아.”

나를 쉼 없이 몰아붙이는 여자의 말투는 어느 순간 격앙되어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이던 냉정한 얼굴이 흥분으로 조금 달아올랐다. 여자는 내게 말하면서 스스로 감정에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네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애면, 지금 이 상황에서 네 변덕이 아니라 승규의 행복을 바라야지.”

“…….”

“네가 승규한테 이럴수록, 승규는 계속 불행해지기만 할 거야.”

나는 일그러지는 것을 꾹 참아내는 여자의 자그마한 얼굴을 보면서 직감했다. 저 여자는 승규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구나. 단순히 연적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승규를 아프게 했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구나. 저 여자는 승규를 사랑하는구나.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여자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고 여러 번 결심했다. 혹시나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모욕하며 나에게서 승규를 앗아가려고 하면, 승규를 향한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꽁꽁 끌어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승규만을 위했다. 승규가 아프지 않고, 승규가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 묘하게 거슬렸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여자는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자신이 승규의 옆에 있을 때 승규가 더 행복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 말 못 하고 멍하게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여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갑처럼 빈틈없었던 태도를 어느 정도 거둔 여자는 급격하게 피로해진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제발, 안 그래도 힘든 애 괴롭히지 좀 마.”

“…….”

“승규는 자기 정말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야 해.”

승규와 함께하지 않았을 때의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승규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처음의 논리를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본 적은 사실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승규는 나랑 있을 때 과연 충분히 행복할까?

어쩌면 저렇게 맹목적으로 승규만을 좋아해 주는 사람과 있을 때, 승규는 여자의 말대로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가진 그런 확신이 부러워서, 내가 가진 이런 불안이 부끄러워서, 나는 여전히 숙인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승규 이만 놔 줘.”

처음보다 훨씬 수그러든 태도의 여자가 내게 말했다. 착잡한 어조였다. 말을 끝낸 여자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반쯤 마신 자몽주스만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또각 걸어가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결국 여자의 말에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떠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무겁도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심장이 죄책감으로 지끈거렸다.

***

여자의 말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연 나는 승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내 옆에 있으면 승규가 자꾸만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 나랑 있으면 자신이 짓뭉개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승규가, 나를 사랑해도 나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승규가 여자가 내게 쏟아낸 말 위로 투과되었다.

어쩌면 여자가 맞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말을 논리적으로 받아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동안 내가 승규에게 저지른 행동들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하지만 승규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해서는 완전히 양보할 수 없었다. 승규가 내 오피스텔에 찾아왔던 그 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몸을 섞으며 느꼈던 지고한 감격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도록 기억했다. 상대를 격렬하게 원하는 그 아찔한 감정이 맞닿았을 때 온몸에 흘러내렸던 전율을 되새겼다. 그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승규 역시 나와 같은 마음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우리가 완전히 이어졌을 때, 느껴본 적 없는 충만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승규와 나는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그토록 뚜렷하고 뜨거운 감정을 억지로 소거해낸 상태에서, 승규와 나 모두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승패가 명백한 결과에 좀처럼 승복하지 못하는 내가 부리는 오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승규를 불행하게 한다는 여자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 여자의 말처럼 지금까지 내가 승규를 힘들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나는 승규를 가득 채우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결연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늦여름인데도 아직도 날씨는 무더웠다. 경기도까지 운전하며 창문을 열어두려다 후덥지근하게 스며들어오는 공기가 불쾌해서 다시금 창을 닫았다. 어느새 퍽 익숙하게 느껴지는 정비소가 보였다. 정비소 건너편에 주차한 나는 아우디에서 내렸다.

“…….”

하지만 나는 내가 계획했던 것처럼 승규에게 찾아가 다시 한번 그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멀찍이 보이는 승규의 일터에서 승규의 바로 옆에 선 여자가 승규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게 적대적인 태도를 내보이던 정비공들이 여자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음료수는 아마 여자가 선물한 것이겠지 싶었다.

승규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소박하게 평화로운 그 풍경을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 마음 안쪽이 우지끈 무너졌다. 초라하고 쓸쓸해졌다. 혹여나 이런 나의 모습을 누가 발견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정비소에서 돌아섰다. 그렇게 차에 다시 올라탄 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서울을 향해 출발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여름이 또 한 번 그렇게 끝이 나는 것만 같았다.

***

결국,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나의 모습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승규의 원룸으로 향했다.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승규를 만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모른 척하고 승규에게 매달려보고 싶었다.

승규의 원룸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뜨거운 열정을 그러안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승규가 다가오면, 냉랭하게 식어버린 눈매로 나를 외면하던 승규가 떠나갔다. 나를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고 열띠게 고백하던 승규가 걸어오면, 나 때문에 자신이 뭉개지는 것 같다고 아프게 토로하던 승규가 물러났다. 내가 오로지 승규만을 생각하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 갔다.

여름 해는 아직 퍽 길어서 좀처럼 저물 생각을 하지를 않았다. 나는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승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원래부터 예민한 피부가 금세 따끔따끔하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덧 서서히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하늘이 연주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설마 지금도 승규는 그 여자와 함께 있는 걸까? 나는 불안해했다.

다리에 금방이라도 쥐가 날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시리게 당겨오는 눈동자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비볐다.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피를 터트릴 것처럼 꽉 깨물었다. 지치고 질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승규를 향하는 기다림이, 사실은 나를 영영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승규에게 매달리고 있는 나 자신이.

밀려오는 피로감에 얼굴을 무릎에 푹 파묻으려고 할 때였다. 규칙적으로 땅을 디디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개를 들자 멀리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원룸 건물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승규를 발견한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솔직히 최악의 경우에는 승규가 여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거로 생각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집 앞을 지키고 선 나를 알아챘는지, 승규가 우뚝하게 멈춰 섰다. 나는 그런 승규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애타게 바라보는 시선이 교차했다.

“희수야.”

승규가 나를 보고 버럭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상상 속의 승규는 다 끝난 사이에 지겹게 질질거리지 말라고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모질게 나를 쳐냈다. 현실의 승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승규의 눈동자가 노을에 물들어 그늘져 있었다. 승규는 다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여기는 또 왜 왔어.”

마치 나를 부드럽게 달래는 듯 묻는 승규의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덩어리를 꾹 삼켜낸 나는 승규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 번 파도치기 시작하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북받쳐 오르는 마음을 토해냈다.

“너 혹시 그 여자 만나?”

승규를 만나면 네가 나를 왜 받아줘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하려고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승규의 얼굴을 마주하자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질투였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도, 나는 승규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

하지만 승규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아직 밝은 기운이 남아 있는 공기가 단박에 지독한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나한테…….”

“…….”

“너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입을 꾹 다문 승규의 앞에서 나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승규의 마음이 그새 변해버린 것이라고는 절대 믿고 싶지 않았다.

“희수야.”

승규가 고통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어쩌면 나는 지금 너를 또 힘들게 하는 걸까. 나를 거칠게 매도했던 여자의 말이 떠올라 기분이 참담해졌다.

“승규야, 너 그 여자 진짜 좋아해?”

“…….”

“이제 나보다 그 여자가 더 좋아진 거야?”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단지 질문만으로도 마음이 그대로 으깨지는 것만 같았다. 비틀비틀 승규에게 다가간 나는 움찔 물러나는 승규의 팔을 붙잡았다. 막 일을 마치고 온 승규의 피부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승규가 아득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의 시선을 외면한 승규가 낮게 중얼거렸다.

“승규야아…….”

“…….”

나는 그 말에 오히려 마음이 철렁 가라앉았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데,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거세게 들끓었다. 그 여자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제는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니면서, 그럼 너 지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왜 만나?”

“…….”

“승규야, 나 제발. 이러지 마, 응?”

나는 승규의 팔뚝을 꽉 붙잡고 힘을 주어 매달렸다. 나보다 키가 큰 승규가 나를 내려다봤다. 고뇌가 가득한 시선이 나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나는 승규를 애처롭게 올려다보았지만, 승규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 승규가 나를 떼어냈다.

“좋은 사람이야.”

승규는 짧게 답했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는 무척이나 지친 기색이었다.

“희수야. 그냥 나도 이제 좀.”

“…….”

“편해지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탁하고 맥이 풀렸다. 너는 승규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할 거야. 어느새 견고한 진리가 되어버린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종을 치는 것처럼 울려댔다. 승규는 그런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내게서 돌아섰다.

***

승규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느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바라본다는 현실은 전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패배감과 씁쓸함을 내게 떠안겼다. 나는 여자를 질투했다.

질투는 사실 나에게는 썩 익숙지 않은 감정이었다. 나는 승규 이후에도 계속해서 연애를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은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이런저런 남자들을 사귈 때도 일방적인 사랑에 푹 잠겨서, 애인이 감히 나를 두고 다른 상대에게 눈을 돌릴 거라는 상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집안에서도 외동아들이라 부모님의 애정을 경쟁할 형제도 없었다.

마음에서 절박하게 돋아나기 시작한 맹렬한 질투는 사람을 점차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원래도 마른 편인 나는 살이 홀쭉하게 내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억지로 뭘 먹으려고 해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동기들과 학교 근처의 레스토랑에 가 밥을 먹을 때에도, 이런 곳에서 승규는 여자와 데이트를 할까 생각하면 숟가락 한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피폐했다. 무슨 일을 하든 결국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란히 서 있던 승규와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상 속의 그들은 처음엔 단순히 팔짱을 끼고 있지만, 그들의 스킨십은 점차 거침없이 진해지기도 했다.

승규와 여자의 접촉이 어느 선 이상을 넘어가면 나는 마치 누군가가 목이라도 조르고 있는 것처럼 괴로워졌다. 사실 나는 아직도 승규가 내 것만 같았다. 승규가 나를 뜨겁게 안아주던 그 순간이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이미 승규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도 했다. 승규는 나보다 여자가 좋은 것도 아니라고 했다. 내가 붙잡은 손을 쉽게 떼어내지 못하는 승규는 분명 나를 향한 미련을 보였다. 그런데도 내가 그 여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그러다가도, 여자는 승규에게 계속해서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승규에게 처절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승규가 나를 떠나서 비로소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니어도, 어쩌면 내가 아니기에 승규는 행복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승규가 행복하면 다 괜찮을 줄 알았던 것은, 사실 자신을 향한 기만이었다.

변하겠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나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승규처럼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히 승규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승규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승규의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 되돌릴 방법이 없는 걸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들고 계속해서 곱씹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되새기고, 결국은 또다시 후회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나만의 사정이었다. 내가 아무리 혼자서 갖가지 생각과 감정으로 들끓어도, 승규와 여자가 함께한다는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에 남아 있는 여자의 카톡을 매시간 확인했다. 승규의 카톡은 그때의 웃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고정되어 있었지만, 여자의 카톡에는 자잘한 변화가 자주 발생했다. 솔직히 여자의 카톡을 볼 때면 늘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었는데, 기분을 잡치리란 걸 알면서도 그걸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행동을 좀처럼 멈출 수 없었다.

여자의 프로필 사진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맞잡고 있는 두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 여자의 손은 매니큐어가 깔끔하게 발려 있었고, 남자의 손등에는 이리저리 잔상처가 나 있었다. 아마도 승규와 여자가 손을 잡은 사진일 것이다.

다정한 프로필 사진을 얌전히 두고 배경 화면은 이리저리 바뀌었다. 한적한 공원이기도 하고, 사람으로 붐비는 영화관이기도 하고, 이름난 홍대의 맛집이기도 했다. 나는 여자가 보란 듯이 바꿔대는 배경 화면의 풍경들 속에서 승규와 여자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읽어냈다.

호기심으로 사진을 누르고 나면 언제나 그 끝 맛이 처절하도록 씁쓸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 쳤지만, 내가 생떼를 쓰는 사이에 현실은 이미 고착화했다.

나는 승규와 내가 꼭 서로여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승규에게 다시 관계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방해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승규의 인생에 있어 나는 방해꾼이었는지도 모른다.

***

승규는 나와 이별했지만, 나 혼자 승규와 이별하지 못하는 날들이 그렇게 이어졌다. 나는 솔직히 승규를 혼자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오피스텔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지운이 형을 보고는 얼굴이 마구잡이로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

지운이 형과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형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건 형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처럼 고급스럽고 세련된 차림새의 형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새 비밀번호까지 바꿨어?”

지운이 형이 나른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뭐 맡겨 놓은 것을 찾는 것처럼 당연하게 구는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어. 누구 때문에 찝찝해서.”

그날 그렇게 지운이 형이 다녀가고 당장 나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꿔 두었다. 그 정도면 사실 내 의사 표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운이 형 같은 남자가 문 앞에서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흐음. 형이 작게 콧소리를 보며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운이 형이 신은 가죽 구두가 오피스텔 복도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공명했다.

“윤희수. 너 자꾸 이러면 재미없다.”

“…….”

“봐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나는 코웃음 쳤다. 지운이 형이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헤어진 지 오래였다. 아니 설령 사귄다고 할지라도, 우리 사이를 누가 누구를 봐주는 상하 관계로 생각한다면 그게 더 웃겼다. 하지만 지운이 형은 불만족스럽게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형이 웬만하면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

“우리 희수 방황이 생각보다 기네?”

조금 놀리는 투로 말한 형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웃었다. 유유하게 구는 낯짝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형을 밀쳐냈다. 나는 지운이 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렇게 말해?”

“…….”

“착각 좀 하지 마. 나 형 다시 만날 생각 없다니까.”

형이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표정이 더 기분 나빴다. 지운이 형이 자꾸만 나를 우습게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짜증이 솟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었나 싶었다. 헤어질 때 이 정도로 질척거릴 줄 알았으면, 애초에 형을 만나지를 말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자꾸 형 말 안 들으면 후회할 텐데.”

“형이 나한테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지 좀 마.”

나는 지운이 형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승규와 잘 되고 말고를 별개로, 이제는 정말 지운이 형에 대해서는 미련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희수야. 알겠어.”

지운이 형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럼 조만간 또 보자.”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형이 사라졌다. 지운이 형이 만지고 간 어깨의 감촉이 소름 끼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가을의 초입이었다.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학교에도 활기가 돌았다. 방학 동안 한적했던 캠퍼스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번 학기에도 교수님 수업의 조교를 맡은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나 수강 정정 기간에는 들끓는 학생들의 문의 덕분에 평소보다 할 일이 배로 많았다.

그래도 당장 눈앞에 일이 바쁘니 감정에 에너지를 소모할 여유는 없었다. 일시적인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나는 승규에 대한 생각에 덜 아파했다. 가끔은 아직 내가 아픈 것이 승규를 여전히 사랑하는 증거 같아서, 그렇게 무뎌지는 승규를 향한 감각에 모호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학생들이 득시글거리는 대강당에서 열리는 강의는 사람 정신을 쏙 뺐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교수님의 PPT 파일이 담긴 USB와 수업자료를 갈무리했다. 깔끔하게 정리한 백팩을 메고 경영대의 연구실로 돌아가는데, 어딘가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연구실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공부하는 연구실이 시끄러운 건 솔직히 딱 질색이었다.

“어머, 그럼 희수랑은 언제부터 만나신 거예요?”

“어디 보자, 이제 이 년 다 되어 가는 것 같네요.”

“뭐야, 그럼 희수 입학할 때부터 계속 애인 있었던 거네. 어떻게 티를 하나도 안 내냐.”

“하긴, 그 얼굴에 고백 들어오는 거 다 철벽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연구실로 들어서는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자극은 시각보다 청각이 먼저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대화 내용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향했다.

“어머, 희수 왔다.”

“윤희수, 얼른 와 얼른 와!”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어머, 얘 놀랬나 봐.’ ‘하여튼 진짜 귀여워.’ 유난스러운 대화와 함께 나에게 다가온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무리의 중심으로 향하게 된 나는 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형 왜 여기 있어?”

김지운 이 인간이 대체 왜 우리 연구실에 있는 건지.

“왜 여기 있긴. 우리 오늘 600일이잖아.”

나를 바라본 지운이 형이 사르르 웃었다. 나는 기함했다. 형이 하는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이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어.”

“…….”

“희수야, 지금까지 나 만나줘서 고마워.”

“…….”

“우리 앞으로도 행복하자.”

지운이 형이 너른 어깨로도 한 품에 끌어안을 수 없도록 거대한 꽃다발을 나에게 안겼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형이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꽃향기가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와아아! 탄성이 터지며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쳤다. 

“어머, 윤희수. 너 애인 있는 거 난 이제야 알았다.”

“나는 연애 상담 너한테 다 했는데, 넌 한마디도 안 하더니.”

“우리 그런 거 편견 없는데,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그래, 너 우리 그렇게 못 믿는 거야? 좀 서운하다 야.”

나는 호들갑을 떠는 동기들을 바라봤다. 어이가 없어서 입술에 비릿한 웃음이 샜다. 솔직히 대학원의 동기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나와 경쟁 관계에 있는 상대였다. 평소 교수님의 시선을 사로잡고, 더욱더 눈에 띄기 위해 물밑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은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뭐, 편견이 없다고? 선의에 가득한 양 나를 보고 웃는 동기들의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그들은 앞으로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용하고도 남았다. 보수적인 늙다리 교수들이 한가득한 학계에서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은 나에게 분명한 낙인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사실 저는 동기분들이 이미 다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

“저번에 얘기한 적 있다고 희수한테는 들었는데.”

나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는 지운이 형을 노려보았다.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는 지운이 형은 지금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헤어져 남이 된 사람의 인생을 단숨에 짓밟아 놓고서.

“어머, 그랬어요?”

“희수가 나빴다.”

“하하, 아녜요. 희수가 은근히 부끄럼을 많이 타잖아요.”

“애인이라고 또 편드시네.”

“하하하.”

나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정작 학교에 다니는 나보다 동기들과 더욱 친근하게 구는 지운이 형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려서 그대로 토할 것만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 지운이 형이 엎지른 물이었다. 내가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손에 닿아 증발하는 물기를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희수 되게 긴장했나 봐, 표정 좀 봐.”

“그러게. 희수야 애인이 일부러 찾아왔는데.”

빳빳하게 굳어버린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동기들 앞에서 지운이 형에게 화를 내거나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실은 지운이 형이 내 애인이 아니고 나를 스토킹 비슷하게 하는 남자라고 말하면 내가 단순한 동성애자에서 사생활이 무척 난잡한 동성애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소문이 조금이라도 덜 이상하게 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두 분이 정말 잘 어울려요. 둘 다 키도 크고 훤칠하니.”

“근데 희수는 좀 고양이 스타일이잖아. 이분은 대형견 과?”

“하하, 우리 희수에 비하면 제 인물이 턱없이 부족하죠.”

그래서 나는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가며 어설프게 장단을 맞춰 웃고 있었다.

이후로도 한참을 시달린 후에야 동기들은 지운이 형과 나를 놓아주었다. 연구실을 빠져나왔는데도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이 하도 커다래서 가는 길목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장에라도 역겨운 향을 풍기는 꽃다발을 내팽개치고 싶었는데, 사람들 눈이 의식돼서 그렇게 내버릴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지하주차장에 이르러서야 나는 처음으로 지운이 형에게 입을 열었다. 나를 내리깔아 보는 형의 얼굴에 비스듬한 웃음이 걸렸다.

“일단 차에 타고 얘기해.”

지운이 형이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형의 말을 듣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해도 언제 누가 등장할지 몰랐다. 이를 꽉 깨물고 형의 볼보에 올라탔다.

“형 지금 나 아웃팅 시킨 거 알아? 학교가 얼마나 좁은데 소문나는 거 순식간이야.”

“…….”

“어쩜 그렇게 사람이 생각이 짧아? 형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는 해?”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지운이 형에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말하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뼈저리게 다가와 서러움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눈물이 치솟으려고 하는 것을 이따위 인간 앞에서 우는 모습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다. 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형을 노려보았다.

내가 감정을 후두둑 쏟아내건 말건, 지운이 형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운전석에 몸을 느른하게 기댄 형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윤희수 너 진짜 귀엽다.”

“…….”

“나 일부러 그런 건데?”

하.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지운이 형이 고의적으로 나를 아웃팅 시키다니. 설마설마하면서도 정말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형 진짜 최악이구나.”

“…….”

“어떻게 사람 인생이 달린 일을 가지고 그래?”

“그러게.”

남 일처럼 말대꾸하는 김지운 저 씨발새끼의 얼굴을 당장에라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싶었다. 겪어본 적 없는 분노로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대체 이 자식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진 사이에 앙심을 품을 수 있다지만, 이따위로 사람 엿을 먹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눈앞이 시뻘게졌다. 그에게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감정을 최대한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심호흡했다. 주먹을 꽉 쥐어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 그를 대처해야 가장 현명할까 고민했다. 그는 그런 나를 덫에 걸린 쥐를 바라보는 악랄한 꼬마처럼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윤희수. 우리 솔직해지자.”

그가 뜬금없이 내뱉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날카롭게 향하는 그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너 어차피 대충 학교 졸업만 하고 나한테 얹혀살 생각 아니었어?”

“…….”

“맨날 유학 가면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고 찡찡거렸잖아.”

저 새끼는 또 한 번 신랄하게 나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입가가 움찔 떨렸다. 솔직히 공부하는 게 지치고 논문이 잘 안 풀리고 교수한테 빌빌 기어야 하는 게 좆같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내가 그렇지는 않았다. 나에겐 분명 나름의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가는 과정에서 지칠 때마다, 김지운은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도록 교묘하게 유도했다. 더 편한 길이 있다고,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세뇌하듯 유혹했다.

“솔직히 네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

김지운은 내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그길로 내 날개를 꺾어버렸다. 정말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다.

“너 편하게 대접받으면서 돈 쓰고 허영 부리는 거 좋아하는 거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

“어지간한 사람 만나서 그거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아?”

“…….”

“희수야, 우리는 게이라서 선택의 폭이 그렇게 넓지도 않아.”

그의 말은 사실을 포함했다.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곱게 자라 보는 눈 높고 돈 쓰는 거 좋아했다. 사귀는 동안 김지운이 나의 그러한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에 그와 만남을 지속했던 것도 맞았다. 이리저리 끌려다닐 뿐, 나는 사실 지금껏 살면서 자기 주도적으로 뭘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 나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는 자기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그럴 땐 나 같은 사람들이 옆에서 선택을 도와주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그는 나를 아주 효과적으로 짓뭉갰다. 또 한 번 자신이 원하는 선택이 내가 원하는 선택인 것처럼 속여 덮어씌우려고 유도했다.

“희수야. 형한테 돌아와.”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였다.

“좆 까 씨발 새끼야.”

나는 저항했다. 논리적으로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지만, 나는 직관적으로 그가 옳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가 다 아는 양 늘어놓는 나의 모습보다 나는 사실은 더 나은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럼 뭐, 어쩌려고.”

욕설을 들은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번거로워 죽겠다는 듯 그가 툭 말을 내던졌다.

“정말 자동차 펑크나 때우는 자식이나 만나려고?”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김지운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나불거리는 건,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런 그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만남을 지속해온 나의 과실도 있으니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승규를 입에 지저분하게 올리는 순간 온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승규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이야. 그쪽은 아닌 것 같은데 너만 혼자서 절절하네.”

재밌다는 듯 그가 빈정거렸다. 그가 입꼬리를 쭉 끌어올리자 드러난 이가 살짝 반짝였다. 나는 불현듯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아무 근거 없이 저런 말을 늘어놓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내가 말 안 해줬나?”

그는 먹이를 가지고 우리 안에 갇힌 동물 앞에 휘젓는 것처럼 나를 약 올렸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긴장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정비공 새끼 말야.”

“…….”

“너 놓은 지 이미 오래야.”

“…….”

“나한테 앞으로 너 잘 부탁한다던데?”

그가 승규를 만났구나.

나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온 힘을 다해 그를 경멸했다.

격 떨어지게 정비공을 만나니, 네가 누리는 생활 수준 포기 못 할 거니. 평소에 김지운이 보인 언행만 놓고 봐도, 그가 승규에게 드리웠을 가시 돋친 말들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하…….”

좀처럼 이해하려고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승규의 행동이 퍼즐 조각처럼 맞아떨어졌다.

동시에 승규가 내게로 와르르 밀려들었다. 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애써 외면하던 승규를 떠올렸다.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애틋한 마음을 되새겼다. 내가 승규를 무척 아프게 한 것도 사실이다. 승규가 이제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의 행동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승규가 나를 밀어내는 이유 저변에 김지운의 외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

“…….”

나는 아무 말 없이 김지운을 바라보았다. 승규와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떠안겨 놓고, 자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대신 결정해주겠다고 말하는 후안무치한 얼굴을 뻔히 들여다봤다. 거세게 파도치던 경멸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나는 오히려 아주 고요하고 냉정해졌다.

“솔직히 형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

“이런다고 내가 형에게 돌아갈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썹이 슬쩍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달싹이는 입꼬리가 미미한 감정의 변화를 보였다.

“다시는 당신 같은 인간 마주칠 일 내 인생에서 없었으면 해.”

나는 지금에야말로 김지운에게 마지막을 선포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나는 그에게 무척 나약하고 얄팍한 인간으로 보여 왔던 것 같다. 그래서 김지운도 이따위 치졸한 노림수를 펼치면 내가 다시 그에게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김지운의 앞에서 승규에 대한 의지를 공표하면서도, 속으로는 막연한 불안감에 젖었다. 솔직히는 나조차 나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렇지 않았다. 김지운의 악독한 행동이 나에게 도리어 깨우침과 확신을 안겼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하…….”

재수 없는 얼굴로 웃음을 흘리는 저 가증스러운 낯짝이 부디 내 말을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알아 처먹기를 바랐다. 이미 김지운은 나를 한 번 망가뜨렸다. 그렇게 자신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승규 건드리지 마.”

“…….”

“한 번만 더 걔 들쑤시면, 그땐 나도 가만 안 있어.”

지금껏 나는 어려움이 닥치면 누군가에게 기대기를 원했다. 대상은 처음에는 부모님이었고, 고등학생 때에는 승규이기도 했으며, 어리석게도 한때는 김지운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일을 대신 해결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항상 마음 한쪽의 무거움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래서 지금 내가 승규에 대해 느끼는 강렬한 보호 본능이 낯설었다. 어쩌면 김지운이 학교에서 나를 아웃팅 시킨 것보다도, 승규를 찾아가 승규의 자존감을 잔혹하게 짓밟았을 말들을 지껄였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나는 김지운을 응징하고 싶었다.

내게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받아야만 했던 소중한 승규에게 그가 한 번만 더 접근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수 자꾸 형 예상을 빗나가네.”

“…….”

“성가시게시리.”

“그딴 식으로 얘기하지도 마.”

더 이상 김지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조차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할 말을 다 끝냈고, 앞으로 마주할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의 차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차의 문이 잠겨 있어서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 올랐다. 그런 내 모습을 눈치챘는지 그가 하하 호쾌한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열어줄게.”

“…….”

“희수 이러다 울겠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볼보의 문을 닫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를 보고 있을 때는 분노가 명료해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막상 밝은 외부로 빠져나오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캠퍼스를 걷는데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다들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면 어떡하지. 덜컥 두려워졌다. 재잘재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느샌가 퍼져버린 나의 소문을 부풀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내게 달려와 손가락질을 하며 게이라는 사실을 까발릴까 봐 몸이 움츠러들었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것처럼 아웃팅이 끔찍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내가 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정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와 마찬가지로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게이이면서도 떳떳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창 게이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이십 대 초반에 집에서 충동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것도 그 영향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언제나 숨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정체성을 완연히 드러내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자,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나인 채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제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달라고, 그렇게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나이브한 욕구이다. 언제나 진심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내가 생존해야 할 경쟁사회에서는 결코 그 정도의 얄팍한 논리로는 승부할 수 없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학점을 받으면서 탁월한 능력을 입증했지만, 대학원 생활은 학부 때와는 또 달랐다. 과연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공부가 아닌, 자기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하는 연구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학계에 계속 남아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학계에 남을지, 아니면 다른 진로를 모색할지 고민하는 것과 선택지가 내게서 아예 박탈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카데미아는 무척 좁고 보수적이다. 게이라는 소문이 나면 작게는 당장 학교생활이 어려워질 것이고, 크게는 후에 교수 임용에서 불리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폐쇄적인 사회에서 게이라는 사실이 나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과연 난 감당할 수 있을까.

게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부럽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막연한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발적인 선택을 전제로 할 때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지극히 사적인 성적 정체성이 내가 속한 사회에 까발려지는 것을 원한 적도, 아니 차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김지운이 가벼운 장난처럼 내게 저지른 일의 무게가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

집에 도착한 나는 와인을 땄다. 잔을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코르크를 뽑아내고 그대로 병 모가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나는 사실 술이 센 편은 아니었다. 기분 내기 위해 가볍게 와인을 즐기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술에 진탕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취하지라도 않고는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승규 생각이 났다. 그러자 그대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를 바라보던 승규의 눈동자는 처절하게 아팠다. 사실 승규는 내가 아니었으면 혼자서 잘 살 애였다. 환경적으로 힘든 부분은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단단하고 확고한 멋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고등학생 때부터, 그런 승규는 나로 인해서 결코 느끼지 않아도 했을 패배감에 늘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놓고 자신을 깔아뭉개는 김지운에 의해 지독한 모욕을 당했을 것이다.

나랑 같이 있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승규의 말을 떠올렸다. 김지운은 아마 나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하고 직설적으로 굴었을 것이다. 김지운 씨발새끼. 죽여도 시원치 않을 새끼.

승규는 정말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어쩌면 승규가 잘못한 거라곤 애초에 나 같은 애를 좋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자 흐어엉 하고 크게 울음이 터졌다. 난 정말로 승규가 좋았을 뿐이었는데. 승규를 좋아해서, 승규랑 잘해보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나에게도 승규가 소중한데.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에 내가 승규에게 가한 것은 아픔뿐이란 사실이 명백해졌다.

계속해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릿속이 알딸딸했다. 승규를 생각하면 너무 속이 상했다. 승규에게 미안했다. 승규가 걱정됐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전하기 위해 승규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는 사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심정이 암담해졌다. 그래, 우리는 헤어졌으니까. 승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까.

진짜 세상이 이렇게 좆같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뻐근하게 올라올수록 머릿속이 흐릿하게 당겨왔다. 그대로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나는 테이블 위로 자꾸만 털썩 고꾸라졌다.

만취 상태가 되자 아주 솔직하고 자기중심적인 마음 역시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까놓고 나는 승규에게 서운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승규 나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나 가지고 싶다고, 그렇게 나 뜨겁게 안아줬으면서. 그 사람이 하는 몇 마디에 뒤로 물러날 수 있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 씨발놈이 하는 말 몇 마디에 날 잘 부탁한다고 그래.

잘 부탁한다는 말이 정말, 뼈아팠다. 서럽고 속상해서 다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승규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그런 말을 해. 부탁하는 대신에 네가 나한테 잘해주면 되잖아. 나는 정말 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는데, 내가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말해도 내 말은 조금도 안 들어줬으면서, 그 사람이 지껄이는 말에는 왜 나를 잘 부탁한대.

조승규 네가 나빴다. 진짜, 이거는 이대로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얼굴을 직접 보고, 얘기를 하고, 따져봐야 할 일이다. 술에 흠뻑 취한 그대로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봐도 어지간히 취해 보여서인지, 빌어먹을 경기도까지 가겠다고 하는데도 택시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밤공기에 몸을 옹송그린 나는 대로변에서 종종거렸다. 결국 따블을 외치고야 택시를 잡을 수가 있었다.

몇 시인지 가늠할 정신조차 없었다. 그냥 아주 늦은 새벽이었겠거니 짐작했다. 승규의 원룸에 도착한 나는 마구잡이로 문을 두드렸다. 조승규. 나쁜 놈. 나한테 얼굴도 안 보여주는 미운 놈. 시야가 어질어질해 굳게 닫혀 있는 문이 두 개로 보였다가 세 개로 보였다 했다. 나는 그대로 주먹이 까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쾅쾅 문을 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잠에서 갓 깨어난 듯 승규는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 씩씩 숨을 몰아쉬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조승규!”

승규의 이름을 부른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대로 그의 품으로 쏟아졌다.

“……!”

안긴 품에선 승규 냄새가 났다. 부드럽고 쌉싸름한, 그래서 내가 너무 그리워한. 그게 너무 좋아서 승규의 가슴팍에다가 대고 마구 얼굴을 비볐다. 훌쩍훌쩍 울었다. 승규가 푹 하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가 내 어깨를 꽉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나를 밀어냈다.

단호하게 나를 거부하는 승규가 서러웠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주르륵,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거 조금 안고 있는 게 싫다고, 사람을 막 밀어내고 그러냐.

“너 미워.”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아낸 나는 툭 내뱉었다. 집에서부터 계속 울어대서 손에 닿는 눈가가 뜨끈뜨끈할 지경이었다.

“진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흐윽.”

말하다 보니까 마음이 북받쳐서 또 울컥했다. 으어어엉.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승규가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도 나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승규가 몸을 숙여 나를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승규에게 달려들었다.

“희수야.”

막 잠에서 깨어나 표면이 거칠게 일어난 승규의 목소리에는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나는 승규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았다. 승규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입술을 문질렀다.

“너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나 가라고 할 수 있어.”

결국, 내가 가장 하고 싶던 말이었다. 이 새벽에 술에 취한 몸을 이끌고 경기도까지 향해야 했을 정도로. 승규가 몸을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조금은 원망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는 승규를 올려다봤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했잖아. 난 그 사람 진저리치게 싫단 말이야.”

“하…….”

“너 그 사람이 나한테 지금까지…….”

김지운 그 새끼가 나한테 한 짓을 떠올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웃팅. 씨발 새끼. 나 앞으로 진짜 어떻게 살지. 말문이 턱 막히고 기가 팍 죽었다. 그대로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승규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승규는 다만 축 늘어지려는 내 몸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희수야.”

“응.”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스스로 지탱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아서 결국은 더욱 승규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는 셈이 됐다. 승규는 포기했는지 차라리 나를 확 당겨 끌어안았다. 승규의 손길이 내 등을 달래듯 살살 쓰다듬었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

“우리 이미 끝난 사이잖아.”

아직도 너는 이렇게 나에게 절대 모질게 굴지 못하면서, 말로는 그런 아픈 소리를 했다. 나는 승규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승규가 말하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고개를 퍼덕퍼덕 가로저었다.

“그리고 굳이 그 사람 말 아니더라도.”

“진짜?”

하지만 승규가 김지운 얘기를 입에 올리기 시작하자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않았다.

“너 그거, 윽, 진짜야?”

나는 정말 승규에게 묻고 싶었다. 나를 버리고 돌아선 게, 정말 순수한 네 마음이었어?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나야 서로 행복하다는 게, 정말 네가 한 생각이었어?

“승규야.”

“……하아.”

제발, 그렇지 않다고 말해줘.

“너 나 사랑하잖아.”

무슨 용기가 솟아서 승규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승규에게 거절당하고, 외면당하고, 내팽개쳐지고, 까이면서도 그 순간 나는 묘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승규를 사랑하는 것처럼, 승규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넌데.”

“희수야.”

“왜 내 말을 안 믿고 그 사람 말을 믿어?”

나는 다시금 승규의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내 허리춤에 얹어진 승규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흐으…….”

솔직히 상황이 빤했다. 어쩌면 나도 겪었기 때문에 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나에게 와서 내가 승규에게 괴로움만을 주었고, 승규를 불행하게 만들 거라고 경고했다. 김지운은 승규에게 가서 승규로는 절대 내가 만족할 수 없고, 승규가 나를 행복하게 할 능력이 없다고 통보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사랑의 전철도, 밟아온 삶의 계단도 그들의 말을 고스란히 방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든 다 개소리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넌 내가 하는 말만 믿으면 되잖아.”

적어도 나와 승규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마음속에 차오르는 의심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니까.

“바보야, 흑, 나 너 사랑한다고!”

나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마침내 승규에게 마음을 토로하자 속이 다 후련했다. 하. 승규가 벅찬 듯 뿜어내는 숨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을 전부 토해낸 나는 여한이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승규의 품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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