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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이 형에게는 무턱대고 승규랑 잘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무척 막막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승규와 나는 이별했다. 헤어짐의 순간 승규가 내게 했던 말들이 대못이 되어 심장이 박혔다. 나는 아픈 승규를 느릿하게 곱씹었다.
지금껏 내가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없는 승규를,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승규는 절대 달라지지 않는 내 모습을 두고 우리 관계에서 혼자서만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구나. 내가 아무 생각 없는 말들로 그의 마음을 베어낼 때마다, 내면이 깎아내려지는 느낌을 감당해내고 있었구나.
이건 사실 단순한 애정을 떠나 근본적인 인간성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승규를 향해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한때 내게 그렇게나 뜨거웠던 승규는 차마 닿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냉랭해져 있었다. 그의 태도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하도록 승규를 망가뜨린 것이 온통 나라는 사실이 뼈아팠다.
그걸 다 알면서도, 다시 내 뜻을 관철하겠다고 승규에게 다가갈 염치가 없었다. 사랑을 핑계로 대고 공연히 상처만을 헤집는 이기적인 행동을 또 한 번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사랑.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승규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아직도 제대로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흐물흐물 물컹거리기만 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승규는 이제는 정말로 다 그만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는 승규의 모습은 처절하고, 한편으로는 비참해 보였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런 승규의 뜻을 존중해야 하는 걸까. 나는 승규를 나름으로는 열띠게 좋아했지만, 생각해보면 언제나 승규의 상황을 배려하면서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
인제 와서 승규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면, 이번에야말로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승규의 뜻은 무척이나 완고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어쩌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의 방식일 수도 있었다.
나라는 개인은 너무나 불완전했고, 그런 내가 하는 사랑 역시 너무나 불완전했다. 그대로 다친 승규를 끌어안기는 어쩌면 역부족이었다. 이만 승규를 놓아주는 게 맞을지도 몰라. 이성적인 사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아줄 수가 없어서, 사실은 절대로 놓아지지가 않아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게다가 승규와 헤어지고, 지운이 형이 물러난 자리에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외로웠다. 주변에서 나에게 애정을 푹 퍼부어주는 사람이 없자 외로움에 너무 취약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거부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더욱 지독하게 깊어지도록 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슬아슬하게 타들어 가는 사랑을 겨우 껴안고 있는 나의 마음은 너무나 연약했다. 나를 둘러싼 밖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어느 방향에도 기댈 이가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려 했지만, 그래서 때로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승규와의 사랑에 혼자 매달리고 있는 것이 의미 없는 행동인 것처럼도 느껴졌다. 승규가 다시 나와 함께해 준다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의 괴로움을 억지로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승규와의 사이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인 지금이 더욱 처참했다.
***
그날 이후로 지운이 형을 만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지운이 형과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형은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거나 몰아넣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운이 형으로부터는 잊을 만하면 하나씩 카톡이 왔다.
[저번에 두 크렘 맛있었다고 했지. 주말에 가로수길 갈까?]
[예술의 전당에 네가 좋아하는 연극 올라왔더라. 보러 가자.]
[형 친구가 에드 시런 콘서트 리허설 들여보내 준다는데, 갈래?]
나와 사귀는 일 년 반의 시간 동안, 지운이 형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푹 담가져 즐기던 안락한 일상을 휘두르며 나를 은근하게 유혹해 왔다.
지운이 형이 넌지시 건네는 제안들은 모두 사실 그 자체로는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지운이 형과 그런 것들을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 형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묘한 오기마저 들었다. 나는 한 번도 형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한편으로는 매우 껄끄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버겁다고 생각했지만,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다. 지운이 형의 카톡은 점점 도착하는 간격이 뜸해졌고,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연애가 끝을 향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지운이 형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나를 파고들어 왔다. 연구실에서 논문 작업을 하고 있던 오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희수야.]
“엄마? 무슨 일이세요?”
[얘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니?]
나는 복도에서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희수 너는 별일 없이 지내고?]
“저야 뭐 논문 쓰고 있죠.”
[에휴. 어떻게 된 게 지운 씨는 꼬박꼬박 안부를 묻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전화 안 걸면 감감무소식이야.]
엄마의 말을 듣는데 순간적으로 뒷목에 소름이 오싹 솟아올랐다. 뭐야. 그 형이 왜 엄마한테 전화를 해.
“지운이 형이랑 통화하셨어요?”
[그래, 했다.]
“혹시 형이 무슨 얘기 했어요?”
지운이 형은 고등학교 때 나와 승규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 내가 전혀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형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형이 엄마에게 승규에 관한 얘기를 흘렸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희수 너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니.]
“…….”
[무슨 얘기 하긴. 지운 씨가 너 같은 줄 알고?]
일단 그건 아닌 것 같아서 한숨을 돌렸다. 하.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지운이 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집요했다. 사귀던 시절에 지운이 형이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우리 부모님을 챙겼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 헤어진 사이에, 피차 성인인데 엄마에게 연락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봐서 이번 주말에는 지운 씨랑 같이 식사하기로 하자.]
당연한 걸까, 엄마에게 연락한 형은 우리가 이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게 더 소름 끼치게 느껴져서 나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십 대 초반에 집에서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선언하고 엄마와는 항상 사이가 껄끄러웠다. 이렇게 전화를 하며 보통 엄마와 아들처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지운이 형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사실상 우리 부모님께서 게이인 나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지운이 형이었다.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아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운이 형과 안정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나는 부모님을 다시금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다. 감추려고 들었던 내 모습을 그들로부터 비로소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실 엄마에게 지운이 형과 헤어졌다고 말하는 건, 단순히 연인 간의 이별에 관한 얘기는 아니었다.
따가울 정도로 껄끄러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모님도 알게 되시겠지.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 형 전화 이제 받지 말아요, 엄마.”
[그게 무슨 말이니, 희수야?]
화들짝 놀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이제 그 사람 안 만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너희 헤어졌니?]
“…….”
엄마가 무척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데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지운이 형과는 헤어졌는데, 분명 헤어진 게 맞는데. 막상 형에게 그만 말을 만나자고 할 때보다,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그냥, 좀 안 좋아.”
결국, 나는 엄마에게 확실하게 지운이 형과 헤어졌다고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시간을 흘긋 확인하니 연구 미팅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형과 헤어졌다고 하면 엄마가 늘어놓을 잔소리가 골치 아팠다. 한번 엄마와 얘기를 시작하면 말이 끊임없이 길어지기만 할 것이다.
“엄마는 왜 다 큰 아들 연애에 신경을 쓰고 그래요.”
[니가 어디가 다 컸어. 아직 애기지.]
그래서 나는.
“아 몰라, 끊어요.”
회피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치자 머리가 온통 지끈거렸다. 아직 환하게 빛나는 액정을 흘깃 살펴보고, 피로감이 급격하게 몰려들어 얼굴을 손바닥에 푹 파묻었다.
엄마와의 전화를 끝내고 참석한 연구 미팅은 끔찍했다. 요즘 통 논문에 진척이 없어서 낑낑대고는 있지만, 솔직히 내가 공부 머리가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다른 사람과 협업할 때에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항상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하고 최소한 한 사람분의 몫은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아이디어를 산발적으로 던지기만 하고 제대로 디벨롭 못 시킨다고 박사님에게 제대로 까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와의 전화 때문에 온통 신경이 지운이 형과 가족, 그리고 승규에 대한 걱정으로 쏠려 있었으니 그 상황에서 연구 미팅에 집중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평소 자부심을 지녀온 공부에서까지 성과를 내지 못해 비판을 받으니 솔직히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냥 지금의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다 엉망진창처럼 느껴져서 성질이 났다. 뭐든 좋으니 이대로 다 내팽개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치기 어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짜증이 치미는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공부는 사실 표면적인 이유였다. 나는 일단 부모님에게 접근하는 지운이 형을 해결해야 했다.
지운이 형을 생각하면 막막했다. 형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형이 좀처럼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무서웠다. 그 형 성격에 이렇게까지 내가 싫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물러날 것 같은데, 굳이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지운이 형이 이렇게 나오니 그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쌓았던 최소한의 유대감이라는 것도 박살이 나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를 모르니 두려움이 생기는 건 당연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명백했다. 내가 지운이 형을 일일이 가늠하고 배려해가면서 행동할 필요는 사실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지운이 형을 만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를 하는 것도 꺼려졌다. 매일 환자를 상대해서인지 형은 언변이 무척 좋았다. 형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어느 순간 묘하게 내가 휘말리는 느낌이 들어서 찝찝했다. 지나치게 수동적인 선택지인가도 싶었지만, 그나마 카톡을 보내는 게 제일 나은 듯했다.
장문의 카톡을 여러 번 작성했다가 지웠다. 구구절절 하고 싶은 말이야 솔직히 많았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꼬투리를 잡힐 빌미만 형에게 주는 꼴이 될 것 같았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바닥에 땀이 고여 들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진 사이에 부모님께 연락하지 말아줘]
지운이 형에게 카톡을 보낸 지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서 1자가 사라졌다. 나는 긴장한 상태로 형의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형은 나의 카톡을 확인만 할 뿐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 후로 엄마에게 전화가 한 번 더 왔는데, 엄마는 다행스럽게 주말에 지운이 형과 식사를 하자는 둥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형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나를 배려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형이 그 후로 엄마에게 무슨 말을 더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제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상황은 그렇게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지운이 형이 내가 보낸 카톡을 확인하고 난 후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른답지 못했는지 깨달았길 바랄 뿐이었다.
***
나는 여전히 승규를 사랑했다. 승규는 이별과 동시에 나의 심장에 강렬한 낙인을 찍고 갔다. 아프도록 활활 불타오르는 그것은 매 순간 나에게 승규의 감각을 되새겼다. 나는 매일같이 승규와의 이별을 곱씹으면서 승규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언제나 동일한 장벽에 의해 좌절되었다. 더 이상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 승규. 아니 단순히 그를 넘어서,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이 으깨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승규.
나는 과거의 내 모습을 여러 번 되돌아봤다. 승규를 다시 만나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도 차근차근 생각해 봤다.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단순히 승규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승규를 향해 맹목적이리만큼 뜨거운 사랑을 최선을 다해 퍼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승규를 위한 일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으니, 언제나 생각이 제자리에 머물렀다. 승규와 나 사이의 정체된 상황을 생각하면 심장이 꽉 하고 아프게 막혔다. 이 상태가 이어지다 보면 정말로 우리의 관계가 헤어진 채 이대로 굳어버리는 건 아닐까 덜컥 두려웠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타개해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정말 무서운 건 이렇게 승규와 이별한 채로도 계속해서 살아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마음이 지독하게 아프고 시렸다. 나는 승규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늘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일상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갔고 논문을 썼다. 그렇게 차근차근 생활하다 보면 승규를 그렇게 원한다고 해놓고 사실은 승규 없이도 내가 멀쩡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나는 사실 괜찮은 게 아니었다. 그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계기는 아주 간단했다. 나는 승규의 카톡을 매일같이 확인해오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무미건조한, 감정이 애써 숨겨진 대화 내역을 외울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아무리 눌러봐도 밋밋한 기본 화면만 내비치는 승규의 프로필을 관찰했다.
먼저 승규에게 연락도 할 수 없고, 승규와 공통된 지인도 없는 나에게 카톡 프로필은 승규와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다. 프로필 사진도 상태 메시지도 매일 확인하지만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라도 승규의 안부를 그를 통해서라도 알 수 있을까 나는 기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느 날, 승규가 웃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잘못 본 줄 알고 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언제나 멋없게 기본 화면으로 비어 있던 승규의 프로필에, 근사한 사진이 등장했다.
승규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창문으로 빛이 스며들어 승규의 얼굴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이 부신지 살짝 눈가를 찌푸린 승규는 자연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입 동굴이 살짝 드러났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막힌 순간을 포착했다.
나는 승규가 정말로 보고 싶었다. 나와 그렇게 헤어진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승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일상의 조각이나마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매일 승규의 카톡을 확인해온 이유였다.
그러나 막상 환하게 웃는 승규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반갑고, 좋았다. 승규가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애틋했다. 하지만 내가 없이도 웃을 수 있는 승규의 얼굴은 마치 승규는 이렇게 이별을 이겨내고 있다고, 너를 잊어가고 있다고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떤 상황에서 찍힌 사진인지 궁금해졌다. 누구와 함께 있었길래 저렇게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머리가 한 번 어찔하더니 그다음에는 싸늘하게 식었다. 생각은 끊임없이 잔가지를 뻗쳐나갔다. 급기야는, 승규 성격에 분명 프로필 사진을 스스로 바꾼 건 아닐 텐데 대체 누가 사진을 바꿨냐며 추궁마저 하고 싶어졌다.
불안한 마음이 스몄다. 나는 다만 승규에게 특별한 사람이 사진을 바꾼 게 아니기만을 바랐다. 아직 내가 너에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그 사이에, 너에게는 이미 누군가가 생긴 건 아니겠지. 솔직히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제는 좀 화가 나려고까지 했다.
너는 나 없이도 정말 괜찮은 거니. 당장에라도 승규에게 달려가 따져 묻고 싶었다. 나는 진짜 아닌데, 나는 이제는 네가 아니면 누구를 만나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이렇게 계속해서 아픈데. 혼자서만 우리가 아닌 미래를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승규가 미웠다.
나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노려보며 한참 동안 숨을 씩씩 내쉬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음이 일었다. 승규가 저렇게 행복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제 내가 승규에게서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는 아닐까? 승규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나를 떠나서 저렇게 웃고 있는 승규의 모습을 보며 예쁘게 놓아줘야 했다.
절망이었다.
그렇게 승규의 프로필을 확인한 뒤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학교에 쌓인 업무를 아무렇게나 마무리 짓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서 잠이 들었다.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는 다양한 승규의 애인들이 각종 상황에서 등장해 한결같이 승규의 곁에서 머무르며 혼자 남겨진 나를 비웃었다. 나는 식은땀에 젖어서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지쳐서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세상이 그대로 뒤집히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가 찡하게 어지러웠다. 후끈후끈 올라오는 열감에 식은땀에 젖어 달라붙은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지에서 저릿저릿 통증이 일기도 했다. 이마를 짚어보자 머리가 뜨거웠다.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뒤늦게 이별을 앓았다. 이건 그냥 감기몸살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의 내가 단순히 신체적인 이유로 아픈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험을 볼 때면 늘 몸이 아팠던 것처럼, 나는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항상 몸에 탈이 났다.
내 온 정신을 승규가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승규를 만날 수 없어서 아픈 거였다. 승규에게 다가갈 수 없어서, 승규가 이대로 정말로 내게서 멀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아픈 거였다.
“으으…….”
흥건한 이마를 한 번 닦아냈는데도 금세 식은땀이 다시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생각보다 꽤 고열인 것 같았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고 귓가에서 이명이 뎅뎅 울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이거 상사병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뒤척이기만 했다. 딱히 병원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승규 때문에 아픈 거라면,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통증조차 모두 있는 그대로 나의 몸으로 물씬 받아들이고 싶었다. 어차피 승규가 나를 떠나간다면, 그래서 더 이상은 승규를 보지 못하면 차라리 이대로 영영 쓰러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흐으, 으으윽…….”
하지만 승규가 내게서 완전히 떠나간다는 생각을 하자 반사적으로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열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볼 위로 펑펑 눈물을 흘려대고 있었다. 두통이 두 배로 심해졌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했다.
계속 울음을 히끅이는 나는 사실은 정신이 흐려지고 판단력이 무뎌지는 게 조금은 반가웠다. 이제 더 이상 승규에게 오기를 부리고 떼쓰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그렇게 먼저 달려들지 않는다면 승규와 나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것 역시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성이 승규에게 먼저 연락해서는 안 된다고 겨우 고삐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온몸으로 승규를 앓고 있는 나는 승규를 보는 것 외에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모호해진 정신을 핑계로 돌렸다. 그렇게라도 승규에게 연락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을 기뻐하는 내 모습이 있었다.
“…….”
전화 세 통을 했다. 몸이 열로 들끓다 못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나는 신호음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승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네 통째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친절한 음성이 승규 대신 나에게 인사했다.
“하…….”
냉혹한 현실이 다가왔다. 내가 그에게 연락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승규에게 나는, 연락을 먼저 해도 그가 절대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화기를 종료시켜서라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흐어어엉…….”
나한테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다가 지쳐 다시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헐떡헐떡 내뱉는 숨이 무척이나 가빴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더 오기를 부리지 말고 병원에 가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몸을 조금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 생기면 늘 지운이 형에게 연락했다. 끝난 사이에 이제 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모님께 연락을 드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한 번 아팠다 하면 희수가 몸이 약하다고 지나치게 야단법석을 떨고 과보호를 하시는 편이라 알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냥 사실 그런 것들은 전부 핑계였다. 나는 지금의 아득한 상황에서 다른 누가 아닌 오로지 승규만이 나를 구원해주길 바랐다. 시야는 눈물에 젖어 들고, 머릿속은 아득하게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에 나는 물먹은 듯 무거운 손을 더듬거렸다.
[조승규]
액정에 떠오른 승규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까무러치듯 놀랬다. 기뻤나? 모르겠다. 그냥 무작정 달려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을 겨우 지탱시키며, 나는 승규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야, 너…….]
감정이 거칠게 일어난 목소리로 승규가 나를 불렀다. 승규는 결코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나는 승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격이었다.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승규야. 나 집인데, 흑, 지금 나 너무 아파.”
[…….]
“흑, 흐으… 막 열 너무 나고, 진짜 어지럽고. 근데 너 너무 보고 싶어서.”
[하아…….]
“승규야. 나, 흑, 진짜 너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지금까지 나를 애써 잡아두었던 이성이 해방되었다. 나는 또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승규에게 마구 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너를 좋아하는 나를 봐달라고 떼를 썼다.
“나 제발 살려줘, 응? 내가 다 잘못했어. 흐어엉.”
승규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겼나 하고 확인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멍뎅하게 울려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하고 승규의 거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 윤희수 진짜.]
“…….”
[사람 미치게 하지.]
낮게 읊조리는 승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희부옇게 흐려진 기억을 애써 더듬어본다. 전화를 받다 그대로 쓰러진 나는 쿵쿵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질척했다. 제대로 걸을 힘도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서 현관을 향했다.
승규는 금방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승규가 다급하게 나의 몸을 들어 올렸다. 내게 닿는 승규의 체온이 오싹할 만큼 차가운 걸 보니 몸이 불덩이처럼 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승규를 껴안고 승규의 티셔츠가 흠뻑 젖도록 눈물을 한바탕 쏟아냈다. 보고 싶었어, 사랑해, 왜 나 두고 갔어, 나 버리지 마, 살려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내쉰 승규는 그대로 나를 등에 업었다. 자꾸만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려고 해서 승규가 단단히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그 후에는 아마 택시를 탔나? 뒤로는 정말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대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던 것 같다. 나는 마침내 승규를 볼 수 있었다. 승규가 내게 와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다만 안심했다. 그렇게 중간에 한 번 깨지도 않고 푹 잠에 스며들었다.
“으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환자복을 입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팔을 확인하니 수액이 꽂혀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아직도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욱신거렸지만, 밤에 비교해서 열은 훨씬 내린 것 같았다. 이제야 정신이 좀 맑아졌다.
“…….”
몸을 일으키자 침대 맡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승규의 모습이 보였다. 승규는 착잡한 얼굴로 갓 눈을 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가 다물었다. 승규를 발견한 나의 얼굴은 잔잔한 감격으로 요동쳤다.
“몸은 좀 괜찮아?”
자신의 얼굴을 푹 쓸어내린 승규가 까슬까슬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승규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자 마음이 먹먹해졌다. 승규가 내게로 정말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아프다는 이유로 또 한 번 감정을 제멋대로 휘두른 자신의 모습은 부끄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가 나에게 이렇게 와줬다는 사실은 좋았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승규는 나의 곁에서 새벽을 꼬박 지낸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솔직히는 조금 기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우뚝하게 나를 지키는 승규가 걱정스러웠다.
“너 일 안 가도 돼?”
“미리 연락했어.”
승규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무뚝뚝한 승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
“…….”
눈이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무엇이든 섣불리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규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는 거 봤으니까 나는 간다.”
승규는 미련을 털어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느라 수액 바늘이 잘못 살을 찔러서 따끔했다. 무작정 나를 등지려는 승규의 팔뚝을 잡았다. 내 손바닥에 닿은 승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승규야.”
“…….”
“승규야 가지 마.”
승규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애절하게 승규에게 매달렸다. 승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승규의 팔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내게로 당겨보려고 했지만, 승규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 너 너무 보고 싶었단 말야…….”
나는 말끝을 흐렸다. 순간 험악해지려던 승규의 표정이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푹 하고 풀어졌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승규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승규가 다시금 간이 의자에 앉았다. 나는 승규를 애달픈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니 애인 부르면 되잖아.”
“그 사람 이제 내 애인 아냐 승규야.”
“…….”
“나 진짜 헤어졌어.”
승규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했다. 나는 결연하게 마음을 다졌다.
“나 너랑 시작하고 싶어서, 그 사람 다 정리했어.”
용기를 내서 승규의 눈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나는 승규에게 어떠한 확신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수없이 망설여왔다. 또 한 번 승규를 다치게 하는 일일까 봐 주춤거렸다. 하지만 나는 승규를 올곧게 향한 나의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바짝 말라오는 입안을 적셨다. 정식으로 승규에게 다시 만나자는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희수야, 우리는 서로 안 맞는 사람이야.”
“승규야.”
“너도 그거 잘 알잖아.”
입을 먼저 연 것은 승규였다. 승규는 언젠가의 내가 승규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줬다. 승규가 나와 그 사이에 단호하게 긋는 경계선에 마음이 칼날로 깊숙이 베는 것 같았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승규를 응시했다. 상처받았다. 하지만 그때의 승규는 지금의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처받았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이제.”
승규가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대로는 정말 아니었다. 나는 그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너무 간절했다.
“승규야, 나는 정말 너 아니면 안 돼.”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려는 승규를 향해 파고들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빠지는 숨을 겨우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승규야 내가 변할게. 이번엔 진짜 잘할게.”
“…….”
“이번에는 너 상처 안 줄게. 너만 바라보고 너만 좋아할게.”
“…….”
“예전에는 내가 많이 나빴던 거 알아, 너가 나 미워해도 이해해. 그래도 나는.”
“희수야.”
내가 다급하게 쏟아내는 말들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던 승규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손을 잡은 내 손등을 다른 쪽 손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승규의 까슬한 손바닥이 부드러운 손등을 겹쳐오는 감촉에 나는 옅게 전율했다.
고독하게 가라앉아 있는 승규의 고동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승규는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고,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승규의 감정을 쉬이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초조해졌다. 승규가 천천히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었다.
“예전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있잖아.”
“으, 응.”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승규에게 우리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손을 잡은 승규는 내가 애써 덮어두었던 과거로 나를 다시금 끌고 들어갔다.
“그때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랑 사귀었는진 잘 모르겠어.”
“…….”
“진심도 있고, 사실 단순한 호기심도 있었겠지.”
“…….”
승규의 말을 듣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솔직히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이후에 누구를 만나든 내가 승규만큼 좋아했던 남자는 인생에 없었다. 나는 그때 승규에게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졌던 진심의 무게는 그때 승규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벼워서, 승규가 나의 마음을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도 나는 그때 네가 나에게 주는 사랑 하나만을 보고 살았어.”
“승규야…….”
“모든 게 암울했던 그 시절을 버티게 한 건 너였어.”
“…….”
“나는 그때의 너도 마냥 미워하기만 할 수는…… 없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승규가 나를 미워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승규는 그런 나를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어쩐지 굉장히 불길한 예감에 젖어 들었다.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희수야, 네가 자꾸 이러면.”
“…….”
“나는 너를 또 한 번 사랑할 수밖에 없어.”
나는 승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면 사랑하면 되잖아. 나도 너를 사랑하는데, 우리 같이 서로 행복하면 되잖아. 하지만 스산하게 가라앉은 승규의 눈동자를 보자, 모든 일이 그처럼 간단하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승규는, 사실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근데 나 사실 너 못 믿어.”
“…….”
“우리가 다시 사랑해도, 어차피 끝이 다 뻔할 것 같거든.”
묵직한 망치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골이 얼얼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승규의 말에 심장이 그대로 으깨지는 것만 같았다. 속상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승규에게 보였던 기만적인 태도 때문에, 승규는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꾸 나 마음 약해지게 하지 마라.”
“승규야.”
승규가 내게 붙잡혀 있던 손을 떼어냈다. 나는 내게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승규의 손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다시금 승규에게 확신을 줄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엄마에게 지운이 형과 헤어졌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로 승규가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짙게 덮쳤다. 승규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게 될 거라면, 정말로 사실은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게 맞았다.
“승규야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놓고 싶지 않은데. 눈망울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만 승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
“…….”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게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인 승규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승규의 뒷모습이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홀로 침대에 남아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다는 승규의 뼈아픈 말을 혼자서 곱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보다 승규의 통화가 오래 계속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혹시 전화를 받는 김에 승규가 나를 두고 아예 병원을 나가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사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갈 수가 있나. 삽시간에 억울함에 물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승규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응급실 복도를 헤맸다.
“아, 그니까 니가 왜 여기까지 왔냐고.”
그때, 승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안도했다. 완전히 가버린 건 아니었구나. 그냥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던 것뿐이었구나. 잠깐이나마 승규를 원망했던 자신을 타박하면서, 나는 승규에게로 걸어갔다.
하지만 승규는 통화 중이 아니었다.
“새벽 두 시에 갑자기 뛰쳐나가는데 사정이 뻔하지.”
“야…….”
“너 나보고 걔한테 다시 연락하면 네 손목이라도 잘라달라며.”
승규에게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강력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여자를 반쯤 가리고 있는 승규의 커다란 등이 보였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승규야.”
“어, 윤희수.”
승규가 내게로 몸을 돌렸다. 무척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승규의 어깨가 반쯤 회전하면서 그 뒤에 있던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세련된 단발머리에 화장이 말끔하게 정돈된 여자가 나를 빤히 쏘아봤다.
“…….”
“…….”
여자는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나를 위아래로 적나라하게 훑어보았다. 추레한 환자복 차림새에 아파서 얼굴이 푹 쪼그라든 나는 조금 주눅 들었다. 그림처럼 말끔한 선으로 립스틱이 발린 여자의 입술은 꼭 다물려진 채였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저기, 누구세요?”
여자는 그런 나의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 승규 여자친구 될 사람인데요.”
나는 얼어붙었다.
“…….”
“…….”
단정한 입술에서 나오는 ‘여자친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승규가 여자도 만날 수 있다는 걸, 아니 원래부터 여자를 만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승규는 나와 완전히 이별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쳐온 현실은 너무나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해서 나는 그대로 혼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내 눈앞에서 여자와 나란히 서 있는 승규의 모습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
“나는 그쪽 누군지 아니까 굳이 얘기 안 해도 돼요.”
그러나 충격에 빠져 깊이 침잠할 수도 없었다. 날카롭게 나를 찌르는 여자의 말에 나는 피하고 싶은 현실로 거칠게 끌어당겨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주 당당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솔직히 완전히 기가 눌렸다. 여자가 눈빛만으로도 나를 뾰족하게 쪼아대는 것만 같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슬쩍 여자의 눈을 피한 나는 애처롭게 승규를 바라보았다. 여자와 나 한가운데에 선 승규는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나는 내심 승규가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생각해보면 여자친구 아니고, 여자친구 될 사람이라고 했잖아. 저 여자 혼자서만 마음대로 착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방금까지도 승규 너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사실은 거짓이라고 제발 말해줘.
“스, 승규야.”
“…….”
나는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러니까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나서…….”
사실은 조금 자신 없는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승규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눈가가 가늘어져 있었다. 승규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희수야.”
내 이름을 뱉은 승규가 말을 멈췄다. 승규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승규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움직이기에 앞서, 여자가 나보다 먼저 승규의 팔뚝을 홱 낚아챘다. 승규가 여자 쪽으로 확 당겨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내게서 멀어지는 승규를 멍하게 바라만 봤다.
“하여튼, 조승규.”
여자가 승규를 밉지 않게 힐긋 흘겼다. 승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 혼자 두면 또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아, 누나.”
“빨리 가자. 진짜 다 끝났다며.”
승규가 우물쭈물했다. 답답한 듯 커다란 손을 들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승규를 바라봤다. 승규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하고 굳어버린 채였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가 나를 알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승규가 저 여자를 따라가는 대신 다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줄 거라고.
“희수야.”
“응, 승규야.”
승규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매달리듯 승규에게 답했다. 승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동자에는 어딘가 애달픈 기운이 묻어났다. 나는 불안하게 맥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주먹을 꼭 쥐었다.
“너 똑똑하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지.”
“승규야, 나는.”
“그냥, 우리는 그걸로 끝내자.”
하. 밭은 숨이 터졌다.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너밖에 없다고 했는데, 네가 없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다고 했는데.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를 단호하게 잘라내는 승규의 마음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승규가 그대로 내게서 돌아섰다.
빨리 가재두. 여자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승규에게 속삭였다. 승규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그러다가 한 번,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이대로 정말 나를 떠나가는 거냐고 승규에게 온몸으로 물었다. 쓸쓸하고 착잡한 승규의 눈동자는 그런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갔다. 승규가 늦장을 부리자 여자가 꼭 나 보란 듯이 승규의 팔목을 낚아챘다. 여자의 손가락이 승규의 팔목을 사륵 감쌌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이 내게서 멀어져갔다.
승규가 나를 버리고 갔다.
그대로 화장실 가장 끝 칸에 가서 혼자 울었다. 엉엉 울고 또 울어서 귓가에 이명이 울릴 때까지 눈물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울음을 토해내도 감정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도리어 가슴속이 더욱 갑갑하게 차오르기만 했다.
여자친구. 고등학생 때 승규를 만나면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개념이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공포가 실체가 되는 순간은 절망 그 자체였다.
나는 승규가 중학교 때 잠깐 사귀었다는 여자애에 대해서도 질투를 유별나게 했었다. 승규는 나를 숭배하는 것처럼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모두 사랑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승규에게 해줄 수 없는 단 한 가지에 대해 극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나는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여자가 아닌 나는, 지금까지 여자만을 만나오던 승규의 인생을 뒤틀어버렸다. 나의 존재가 승규에게는 일반적인 길에서 벗어난 탈선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늘 있었다. 나에게 질리면 언제든 다시 승규가 원래의 궤도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다. 사실 인제 와서는, 그렇게 사는 게 어쩌면 승규에게 더 행복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 여자, 아직 여자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애써 나 편한 쪽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안 되었다. 여자친구 될 사람이라니, 그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종류의 얘기였다. 자신만만하게 나를 깔아보던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화병이 날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차올랐다.
둘이 대체 무슨 관계지. 아직 승규와 사귀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서로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내가 그 여자를 보고 충격에 빠지고 불안에 덜덜 떠는 동안 그 여자는 묘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는 반드시 승규가 내가 아닌 자신을 선택하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도 아니라면서!
순간 잊고 있던 승규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찬란하게 웃고 있던 승규의 얼굴. 범인은 분명 저 여자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 여자가 승규의 사진을 찍고, 제멋대로 승규의 카톡 프로필로 설정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견딜 수 없이 질투심이 치밀었다. 나는 그 여자와 승규가, 적어도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승규는 그 여자 앞에서 저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구나. 나는 그런 특별한 모습은 승규가 나한테만 보여주는 줄로 알았다. 서러웠다. 다 그쳤던 눈물이 다시 핑 돌기 시작했다.
솔직히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 승규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선언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승규가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가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절절히 고백한 지 아직 채 한 달도 안 됐다. 그날 승규는 나를 뜨겁게 사랑하며 내 몸을 안았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단기간에 변할 수 있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승규가 미웠다. 대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미웠다. 승규가 내게 고백했던 마음이 가벼웠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승규는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지게끔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의 끝은 결국 깊은 좌절감이었다. 내가 질투에 날뛰든, 배신감에 날뛰든, 승규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적어도 병원에서 확인한 승규는 나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첫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 여자도 아마 승규를 많이 좋아하고 있겠지. 승규는 그렇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막상 승규의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자, 나는 지금까지 조건 운운하며 지운이 형과 승규 사이를 재고 있었던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승규에 대한 사랑을 고민할 때 나는 항상 내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승규랑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가 승규보다 더 포기하는 게 많다는 믿음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승규에게 역시, 나를 만나는 것은 일종의 희생이었다. 승규에게는 굳이 어렵게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언제나 있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승규는 항상 나만을 원한다고 해주었다. 나로서 모든 게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승규의 마음을 외면해오고 제멋대로 굴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래서 결국 그 마음은, 이제 나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새벽까지만 해도 수액을 맞고 일어나면 퇴원하라고 했다던 의사는 내 상태를 다시금 확인하고는 차라리 며칠 입원하기를 권했다. 나는 실제로 아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마음이 갈가리 찢겨서 조각으로 휘날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해 나갈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의사의 말에 응해 입원한 나는 온종일 잠만 자면서 현실도피를 했다.
퇴원한 후에도 승규에게 다시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미웠다. 그 상황에서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선택하고 내게서 돌아선 승규가. 그리고 두려웠다. 한 번 더 승규에게 전화했을 때엔, 여자친구가 될 예정이었던 그 여자가 정말로 승규의 여자친구가 되어 있을까 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아마도 그때의 그 여자가 찍어줬을, 승규의 카톡 프로필 사진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승규의 모습을 되새겼다.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처참한 상황에서 느꼈던 비참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잔뜩 기가 죽은 채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가 죽어버린 것처럼 힘없이 생활했다. 그렇게 올여름도 어느새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승규와 끝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모든 게 저물어가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던 중, 알려지지 않은 사용자로부터 뜻밖의 카톡이 도착했다.
[윤희수 씨 맞으시죠]
[병원에서 승규랑 봤던 고윤정입니다]
[얼굴 한번 봤으면 하는데~]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또 한 번 병원에서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욱신거렸다. 여러 번 카톡을 읽어 내렸다. 묘하게 일방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말투에 인상을 찌푸렸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거절하면 될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나는 그녀에게 답장했다.
[평일에 신촌으로 오세요.]
절반은 기어코 억누를 수 없는 궁금증, 나머지 절반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보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