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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추악하고 비겁한 나 자신마저도 나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계속해서 피하고도 싶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그렇게 모른 척 넘어가고도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승규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승규가 보여준 사랑의 크기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마침내 직면했다. 올곧고 우직하게 나만을 향했던 승규의 진실한 마음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투명하게 비추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의 모습은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다.
나로 인해 불필요한 모욕을 당하고 고개를 숙이던 승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승규는 나를 원망하는 대신 위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승규 단 한 사람뿐이었는데, 나는 한 번도 모자라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승규를 상처 입혔다.
그렇게 승규가 내게서 완전히 떠나간 후에야 나는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승규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채 지독한 이기심으로만 움직여왔다. 그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이 그리워하고, 똑같이 후회를 하겠지.
아니. 나는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짜릿한 희열이나 넘칠 듯한 행복은 없었지만, 이 정도면 모난 데 없이 매끄러우니 괜찮다고 애써 믿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의 안락함이면 충분하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건 열여덟의 내가 승규를 버리고 택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건 모두가 거짓이었다. 나는 결연해졌다.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나를 깨트리고 싶어졌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일도, 승규를 속이는 일도 그만두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변화를 꿈꾸기에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잘못이 우리 사이를 베어낸 상처는 부정할 수 없이 깊었다. 사실은 모든 게 엉망으로 망가진 지 오래라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폐허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텅 비워진 내 안에서는 승규를 향한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맥동했다. 이제 정말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사랑하고 싶어서.
승규는 내게 다시 만나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승규에게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느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맞았는데도 머릿속이 이상하리만큼 개운했다. 전에 없는 확신이 나를 망설임 없이 움직이도록 했다. 떠오르는 오늘의 태양과 함께 나는 아우디에 올라탔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경기도에 있는 정비소에 도착했을 때는 열 시 남짓이었다. 뒤늦게 승규가 한창 일할 시간인가 생각이 미쳤다. 너무 갑작스러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서 승규에게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할 우리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승규는 정비소에 없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다른 정비공들에게 승규의 안부를 물었다. 승규는 오늘 휴가를 내서 정비소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무척이나 떨떠름하게 내게 대답을 내어주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불안해졌다.
나는 더듬거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을 꺼내서 곧장 승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불안에 떨기도 찰나, 사무적인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곧장 승규의 원룸으로 향했다. 굳게 잠긴 원룸의 문을 두드렸다. 주먹이 까질 정도로 철문을 두드렸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정신을 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얼굴이 뜨겁도록 달아오르고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렸다. 문을 열고 나온 옆집 사람이 수상쩍다는 듯 나를 흘겨봤다.
건물을 빙 돌아 자취방의 창문 방향으로 돌아갔다. 불이 꺼져 있었다. 멍한 얼굴로 창문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지만 좁은 자취방에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애써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불길한 예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승규가 사라졌다.
나는 헐레벌떡 정비소로 돌아갔다. 다른 손님의 자동차를 고치고 있는 정비공의 팔목을 무작정 붙잡고 승규의 안부를 물었다. 정비공은 무척 난감하다는 듯, 그리고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 스패너를 내려놓고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대체 얼마나 휴가를 낸 거냐고요.”
“아, 올 때 되면 지가 알아서 오겠죠.”
“지금은 어디에 있는데요? 걔 핸드폰도 꺼져 있고, 집도 비어 있단 말이에요!”
다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박에 다닥다닥 내게 달라붙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뒤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의 사무적인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던 정비공의 얼굴이 짜증으로 확 구겨졌다
“이봐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정비공은 험악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서슬에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
“당신 찾아오면 승규가 자기 행방 절대 알려주지 말고 쫓아내랬어.”
“……네?”
“그쪽 조승규 스토컵니까?”
그럼 승규가 나에게서 일부러 숨으려고……. 나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손을 덜덜 떨었다.
“예전부터 쭉 보는데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
“거 멀쩡한 사람 좀 그만 괴롭혀요!”
에이, 퉤. 시멘트 바닥에 걸쭉하게 침을 퉤 뱉어낸 정비공이 내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눈을 끔뻑거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눈부신 희망으로 가득했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어떻게든 앞으로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풀려나갈 거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다고 해서 현실이 따라서 변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으로 이루어진 자기객관화는 도리어 내게 전에 느껴 본 적 없는 섬찟한 기분을 안겼다. 내가 사랑에 빠져서 어쩔 수 없이, 다분히 낭만적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단순히 승규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
목구멍에 울컥 차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꾹 삼켜내고 차로 돌아갔다. 시동을 켜고 핸들을 잡았지만 나는 마치 그 자리에 못 박히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승규 역시 내가 그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래서 승규는 이렇게 내게서 달아나 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분명히 어제의 승규는 나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혹시 승규는 그 짧은 사이에 내가 다시 싫어진 걸까? 불안했다. 사실 승규가 나를 싫어할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끝도 없었다. 나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고, 아이같이 매달리기나 하고.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가 나를 좋아해 줄 이유가 있긴 한 걸까 생각하면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아니면 내가 싫지 않더라도, 그때 승규는 정말 나를 영영 안 볼 생각으로 돌아선 걸까? 그건 너무 잔인하다. 나도 승규를 사랑하고, 승규도 나를 사랑하는데 우리가 같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그대로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제발 승규에게 나를 향한 미련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별다른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오자 온몸에 진이 빠졌다. 여전히 승규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별안간 사라진 승규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도 없었다. 무력했다. 새삼스럽게 내가 승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게 느껴졌다. 사는 곳과 일하는 정비소 외에는, 나는 나와 헤어져 있는 동안 승규가 살아온 삶을 몰랐다.
그래서 잠적한 승규를 추적해 보려고 해도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승규가 이럴 때 연락할 만한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어디론가 떠났다면 갈 만한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기대 볼 만한 정비소의 사람들은 나에게 명백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이 새삼스럽게 한심했다.
다음 날에도, 다음다음 날에도 나는 정비소를 찾았다. 여전히 승규는 휴가라고 했다. 승규의 동료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정비소 주변을 빙빙 돌았다. 기적적으로 승규가 내 눈앞에 나타나 주길 바랐다. 하지만 승규는 정말 정비소에 출근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승규의 집 역시 여전히 비어 있었다. 까맣게 밤이 내려앉아도 어두침침한 원룸에서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나는 승규의 원룸 건물 앞에 무작정 쪼그리고 앉았다. 처량한 모습으로 승규를 기다리며 너무 늦기 전에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승규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대로는 정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사라져버린 승규 때문에 애가 탔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가, 이렇게 무심하게 자취를 감춰 버린 게 원망이 됐다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는 무엇도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방학이어도 여전히 연구실에는 얼굴을 내비쳐야 했지만, 학교 일은 이미 뒷전이었다. 나는 지금 승규 외에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별다른 진전 없이 그렇게 승규의 정비소와 집만 들락거리다가 불현듯 진호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진호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나는 당장 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진호야.”
[윤희수. 무슨 일이냐?]
진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승규에게 성큼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손끝이 간질거렸다. 시늉으로라도 진호의 안부를 묻는 것이 순서였지만, 다급해진 나는 예의를 지키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진호야 내가 갑자기 미안한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무섭게.]
“너… 혹시 승규 소식 알 만한 애들 알아?”
내가 조심스럽게 물은 질문에 진호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조승규?]
“응. 조승규.”
나는 승규의 이름을 말하며 고개를 빠르게 주억거렸다.
[너 설마 걔 다시 만나냐?]
진호의 목소리에 섞인 질책의 기운에 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진호는 고등학교 때 나와 승규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그런 진호의 눈에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면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 진호야.”
[…….]
“진짜 급해서 그러는데, 누구라도 좀 알면 좀 연결해 주면 안 돼?”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말했다.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긴장되는 마음에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너 그렇게 전학 가고 얼마 안 지나서 걔네 할머니 돌아가셨잖아.]
“…….”
[그 후에 조승규 거의 바로 자퇴하고 잠수타서 동창들도 다 걔 연락 안 돼.]
“…….”
[걔 어떻게 사는지도 나는 니 연락 받고 알았다.]
아. 심장 안쪽 어딘가에서 끈이 뚝 하고 끊겼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몸서리쳤다.
“그랬구나.”
[…….]
“…미안해.”
[응?]
“내가 진짜… 정말 미안해….”
나는 멍해진 얼굴로 그렇게 핸드폰에 대고 대상을 모를 사과만을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냥, 적당히 좀 해 둬라. 희수야.]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자 눈물이 주르륵 났다.
나는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이 뼈아팠다. 나는 지난 칠 년간 진호에게 그때의 승규에 대해서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닌 것처럼 그때의 승규를 외면해 오고 있었다. 그래놓고 내가 급해진 다음에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덮어두었던 과거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런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승규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나가는 대신 매일 승규의 원룸으로 향했다. 하루아침에 주거지를 변경할 수는 없으니, 만약 이사하더라도 승규의 집을 계속 지키고 있으면 어쨌든 얼굴을 한번 볼 기회라도 생길 것이었다. 결국 내가 매달릴 수 있는 단서는 승규의 집밖에는 없었다.
여름의 밤은 무더웠고 암담했다. 스산한 골목에 자리한 원룸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모른 척 장밋빛으로 물들여 놓았던 과거와 현재가 자꾸만 그 처참한 실상을 드러내고 나를 잡아 삼키려 들었다. 나는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었다.
조그만 인기척에도 혹시나 승규일까 몸을 번쩍 일으켰다. 하지만 대부분 움직임의 정체는 밤을 누비는 고양이거나 흔들흔들 걸어가는 취객이었다. 하염없는 기다림이 반복되자 정말로 이대로 승규가 영영 돌아오지도 않을 것 같다는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럴 때면 찔끔 새어 나오는 눈물을 모른 척 닦아냈다.
꼬박 칠 일째 되는 날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 드리우는 커다란 그림자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캐주얼한 옷차림에 집채만큼 커다란 배낭을 멘 승규가 피로한 낯을 하고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나는 손등을 들어 빠르게 눈을 비볐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서인지 승규를 보면서도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입만 떡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왜 여기 있냐.”
마침내 승규가 내뱉은 목소리는 그 표면이 거칠게 일어 있었다.
“우리 이제 안 보기로 했잖아.”
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정말 승규였다.
“승규야!”
다급하게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가 쥐라도 났는지 저릿했다. 반사적으로 내게 팔을 뻗은 승규가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훅 하고 뜨거운 체취가 풍겼다. 하지만 내가 다시금 곧게 서자 승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련 없이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
“…….”
우리의 재회는 내가 예상한 것처럼 극적이지도, 감격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딘가가 어색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승규의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혀끝을 내어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적셨다. 손바닥에 땀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
“내가 얼마나, 하, 걱정했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입술 새로 비어져 나왔다. 막상 말을 시작하자 그동안 애태우며 승규를 기다렸던 시간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상기된 얼굴이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너는 무슨 일인데.”
“……승규야.”
“니가 왜 날 기다려.”
승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분명히 나는 승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그를 절박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승규를 접하자 조금 주눅이 들었다.
내 마음이 달라졌다는 걸 승규에게 전하고 싶었다. 과거에 나는 정말 승규에게 혹독하게 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그 사실이 내 안에서는 생생하게 펄떡거리는데, 막상 말로 그런 나의 마음을 설명하려니 아득했다.
내가 하는 말이 승규에게 진부하게 들릴까 봐 걱정됐다. 그동안의 내가 아무렇게나 앞뒤 생각 안 하고 이기적으로 나만을 생각하며 변명처럼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던 말들과 지금의 내가 할 말이 겹쳐질까 봐 두려웠다. 이번의 내 마음가짐은 정말로 다른데……. 차라리 그대로 심장이라도 뒤집어 까서 승규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으니, 결국에 나는 승규에게 다시 한번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나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승규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다만 그뿐, 승규는 나의 사과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찌르르. 매미 우는 소리가 후덥지근한 공기에 번졌다. 나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나는, 그러니까, 승규야 내가.”
말이 자꾸 엉켜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리를 미리 해둘 걸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치게 많았는데, 막상 승규를 눈앞에 두니까 서로 막 나오겠다고 다투기만 해 질서 없이 엉망으로 어질러졌다.
“그, 옛날에 너한테 그렇게 나쁘게 대했던 것도.”
“…….”
“이번에……. 나 때문에 네가 안 좋은 일에 얽혀든 것도.”
그래도 나는 두서없게나마 지금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승규야, 다 내가. 너한테…….”
나는 그런 내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승규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히 서 있는 승규의 발끝이 탁탁 바닥을 불규칙하게 두드렸다.
“됐다, 희수야.”
“…….”
“인제 와서 굳이 그런 얘기 안 해도 돼.”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나를 보는 승규는 지나치게 냉정했다. 처음 나를 만날 때처럼 공격적인 태도를 억지로 꾸며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고요한 호수처럼 차분하고 침착했다. 열망이 되었든 원망이 되었든, 나를 향해 언제나 들끓고 있었던 승규의 감정이 이번에는 쉽사리 읽히지 않았다.
“승규야.”
어딘가 절망스러워진 나는 승규에게 팔을 뻗었다. 승규는 단정한 손길로 자신의 팔뚝을 붙잡은 내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승규야, 나 너 사랑한단 말야.”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이런 말 가볍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의 내 마음은 간절한 진심이어서.
그 말을 듣는 승규의 표정이 비틀렸다.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하얀 이가 반짝 빛났다.
“너랑 제대로 시작하고 싶어.”
이런 식으로 멋없는 고백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내게서 돌아서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낯선 승규를 붙잡아야만 했다. 결국 내가 승규에게 정말로 하고 싶던 말 역시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너 만나는 사람 있잖아.”
입가를 살짝 들썩인 승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헤어질 거야.”
“…….”
나는 몸을 움찔 떨고 빠르게 대답했다. 솔직히 그제야 지운이 형이 생각이 났다. 승규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이후, 지운이 형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지운이 형에게서 특별한 연락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아니, 이미 헤어진 거나 다름없어.”
“…….”
“나 그 사람 별로 안 좋아해, 승규야.”
생각해보니 아직 지운이 형과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도록 나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형도 나에게 정이 떨어진 것 같고, 나 역시 형과 관계를 이어 나갈 마음이 없으니 형과의 사이는 사실 끝난 셈이다.
커다란 손을 든 승규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마를 쓸어 올리는 손바닥이 이내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을 내놓았다. 드러난 얼굴은 내게 실망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지쳐 있기만 했다. 나는 불안해졌다. 승규가 크게 한숨 쉬었다.
“너는…….”
“…….”
“뭐가 그렇게 항상 쉽냐.”
승규가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승규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경황이 전혀 없었다. 지금이라도 승규 앞에서 지운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 헤어지자고 말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무엇보다, 이렇게 애타는 나의 마음이 승규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는 게 답답했다. 어딘가가 완전히 변해버린 듯한 승규의 태도가 갑갑했다.
“희수야.”
“응.”
“…….”
“응, 승규야.”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승규의 목소리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렸다.
“나도 그동안 생각을 좀 해봤는데.”
“…….”
나는 숨죽이고 승규를 기다렸다. 불길한 예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희수야. 이제는 정말 끝인 것 같다.”
승규의 선언에 갓 태어나기 시작한 나의 새로운 세계가 우지끈 무너지기 시작했다.
“승규야…….”
나는 애절하게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솔직히 나도 너한테 미련 있었어.”
“…….”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도 너 계속 못 잊었어.”
“…….”
“그런 내가 호구 같아서 화가 치밀다가도, 그냥 내 감정이 그랬어.”
평온한데도 어딘가 아프게 느껴지는 승규의 목소리가 자신을 나지막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울렁거리는 심장을 꼭 부여잡고 승규를 애달프게 바라봤다. 우리가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승규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는, 나는 입이 두 개라도 결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너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
“다시 만나도 우리 사이가 달라질 수 있을까?”
“…….”
“답을 알면서도 널 안으니까 욕심이 생겨서 억지로 붙들고 있었어.”
말을 마친 승규가 슬쩍 웃었다. 그렇게 승규가 엷고 쌉싸름한 그 미소와 함께 완전히 나를 내던지려는 것만 같아서, 나는 패닉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이건 아니다.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
“스, 승규야.”
“…….”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진짜.”
승규가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충격으로 입이 꾹 다물렸다. 희수야. 승규가 다시금 내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마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애정이 한차례 지나간 자리에는 회한만이 짙었다.
“너 만나다 보면 내가 짓뭉개지는 것 같아.”
“…….”
“그냥 나라는 사람이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입술을 꼭 다물었다. 승규는 그런 나를 보고 쓸쓸하게 웃었다.
“나 정말, 인제 그만하고 싶다.”
나는 차마 더 이상 승규에게 매달릴 수 없었다.
나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태도가 승규를 어떤 식으로 휘두르고 있었는지 그제야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온갖 자기변명으로 점철하고 나 역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했지만, 사실 난 나를 좋아하는 승규의 마음을 이용하고 나 좋은 것만 취해 왔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포기할 생각도 희생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내 몫의 고통을 고스란히 승규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마음에서 뒤늦게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은 이미 확인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민낯을 더욱 집요하게 박피했다. 너무 미안하고, 속상하고, 후회됐다. 그런데 정말로, 나를 보고 웃는 승규의 앞에서는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희수야, 잘 살아라.”
“…….”
“행복하고.”
내게 인사한 승규가 나를 남겨두고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저벅, 저벅 움직이는 승규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승규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 피해자인 척할 수 없는 이제는 감히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매일 학교에 가는 대신 승규의 원룸에 오면서 나는 다짐했다. 승규가 무슨 말을 하면서 나를 밀어내든 승규를 붙잡을 것이라고. 나를 억지로 밀어내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승규를 붙잡고 매달려서 끝장을 보고야 말 거라고. 그렇게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을 증명할 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단단하고 끈끈하게 다졌다.
하지만 나 때문에 자신이 뭉개지는 것 같다는 승규의 말은 정말이지 나의 예상 밖이었다. 승규가 어렵게 꺼내 보인 속마음은 감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때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지만, 내가 보는 승규는 기본적으로 단단하고 중심이 탄탄히 잡힌 사람이었다. 그런 승규에게 내가 가한 폭력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승규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나는 승규를 여전히 사랑한다. 승규와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승규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버린 사이에서 다시 싹이 돋아날까 싶다가도 포기하지 않으면 무언가 길이 보일 거라고 애써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우격다짐하지 않으면 내가 그대로 무너져버릴 거만 같았다.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까지 운전하는 동안 지금껏 내가 손에 억지로 쥐고 있던 것들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승규가 나를 진심으로 밀어내는 순간,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부슬부슬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욱신거리고 피곤했다. 서둘러 잠으로라도 도피하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힘없는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는데 뜻밖에도 조명이 켜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윽고 테이블에서 발견한 인기척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운이 형이었다.
내 오피스텔이 마치 저의 집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는 지운이 형을 보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운이 형은 베란다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 나른하게 몸을 기대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와인 병은 반쯤 비어 있었고, 형의 얼굴엔 적당한 취기가 어려 있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형에게로 걸어갔다. 형은 나를 보고도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눈으로만 내 전신을 훑어 내렸다. 나는 테이블에 세워진 와인병의 레이블을 흘긋 바라보았다. 와중에서도 집에 보관하던 와인 중 제일 값나가는 것을 골라 병을 딴 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최소한 오늘 승규를 만나고 얻은 하나의 소득이 있다면 지운이 형을 마저 정리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어쨌든 형과는 일 년 반 동안 만나온 사이다. 좋든 싫든 사실은 제대로 마무리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되었든 한 번은 만나야 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나는 지운이 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늦었네?”
“…….”
“어디를 다녀왔을까.”
짤각이는 소리와 함께 지운이 형이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는 태연한 형의 태도에 기가 차서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얼떨떨했지만, 생각해보면 무슨 이유로든 애인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내 뺨을 때려놓고도, 지운이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었다. 일주일 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 그렇게 어질러진 채 전혀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운이 형은 흡사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나의 행방에 대해 질문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절로 동그랗게 벌어졌다. 솔직히 황당했다.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나는 팔짱을 끼고 형을 쏘아보았다. 지운이 형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막상 형의 얼굴을 보자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잘못한 건 있지만, 형도 분명히 잘못한 게 있는데 당시에 너무 주눅 들어서 형에게 별말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 이제 끝난 사이잖아.”
인제 와서 나를 왜 때렸니 구구절절하게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끝난 사이니까. 그냥 지금이라도 확실히 해 두면 될 일이다. 하지만 한 번 상해버린 감정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 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형에게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형은 그런 내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듯 나를 지켜봤다. 형이 한 모금 더 와인을 들이켜자 둥그런 잔이 깨끗하게 비었다. 와인잔을 내려놓고 턱 끝을 슥 매만진 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끝내자고 한 적이 있었나?”
날카로운 나의 태도가 무색하도록 형은 여유작작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이어지는 말은 마디마디가 또렷했다. 와인에 젖은 형의 입술이 조명을 받고 살짝 번들거렸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 안광이 번쩍였다. 나는 조금 주춤거렸다.
“형, 그동안 연락 없었잖아.”
그래도 이번에는 완전히 밀려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 상태로 연락이 뚝 끊겨버리면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관계가 종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솔직히, 그런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형이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어 한다면 그게 차라리 더 이상했다.
“내가 얌전히 기다리랬지.”
“…….”
“동네 강아지처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랬어?”
하. 입술 새로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형은 마치 내가 자신 소유의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지운이 형이 나에게 기다리라고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형의 일방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내가 형의 말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 사이에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
“…….”
“난 형이랑 계속 사귈 생각 없어.”
지운이 형이 피식 웃었다. 형이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우리 이만 헤어지자.”
나는 형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내 말이 끝나자 형이 몸을 의자에 느슨하게 젖혔다. 테이블 위를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윤희수.”
형이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딴 놈이랑 붙어먹다 들킨 주제에 너 좀 뻔뻔하다?”
“…….”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지운이 형이 정곡을 찔렀다. 나는 당황을 얼굴에서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도 지운이 형에게 화가 나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잘잘못을 따지자면 내가 형에게 가한 것이 더욱 질이 나빴고 시간적으로도 우선했다. 지운이 형이 그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일단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운이 형.”
“…….”
“일단 그건 내가 미안해.”
나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해보라는 듯 형이 턱 끝을 까딱였다.
“말했듯이, 나도 일부러 형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
“들킨 것도… 그래. 내가 부주의했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운이 형이 나를 추궁하는 지금의 상황이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운이 형은 내가 형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표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이용해 나에게서 일종의 우위를 점하려고 드는 것 같았다. 조금 선득한 기분이 들어서 몸을 움츠렸다.
만약에 내가 형과 계속해서 만나고 싶었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고민이 많이 됐을 것 같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형은, 비록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지만 이제까지 내가 알아오고 사귀어 온 남자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그런 형의 모습에 배신감도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형에게 매달리는 처지가 아녔다. 오히려 형이 이런 태도를 내게 보이기 때문에 일말의 아쉬움마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이 사람과는 어쨌든 헤어질 거니까, 그의 실체에 대해서도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런 얘기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흐음.”
“그냥 좋게 헤어지자.”
나는 다시 한번 형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신경이 좀 거슬린 듯, 형의 눈썹이 위아래로 움찔거렸다. 형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훑어 내리는 시선이 꼼꼼하게 표정을 관찰했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희수야.”
“왜.”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운이 형이 질문했다. 또 한 번 내가 승규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로 이야기의 주제를 돌리고, 내가 죄책감을 가지게 하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형과 헤어지려고 하는 이유는 승규와 섹스하는 걸 들켜서가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으로…….
“형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승규를 사랑해서, 승규를 만나고 싶어졌다. 지운이 형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내 안의 논리는 간단하고 명쾌했다. 그러나 형은 내 말을 듣자마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식이었다. 나를 깔보는 듯한 형의 태도에 신경이 곤두섰다.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윤희수.”
“아, 왜.”
“네가 언제는 나 사랑해서 만났어?”
하지만 형의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운이 형과 함께했던 과거의 관계를 되돌아봤다. 우리가 함께했던 날 중 나는 단 한 순간이라도 그를 충실하게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그럼 지금까지 나는 형이랑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형.”
“…….”
지운이 형은 똑똑한 남자였다. 지금에 이르러 순수한 사랑을 논하기에는 형과의 관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이미 계산적이었다. 나는 과거에도 형을 사랑하지 않았고, 지금도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으니 헤어질 이유도 없다는 그의 자명한 논리가, 이제 갓 눈뜨기 시작한 진실한 사랑에 대한 나의 관념을 거세게 짓눌렀다.
“희수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 것 같아?”
나를 어르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하는 형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심장을 꿰뚫었다. 내 안에서 갓 새롭게 태어나려는 변화의 새싹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내가 지금 치고 있는 발버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결국에는 전부 수포가 되고 말리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처럼.
“생각해 봐. 우리처럼 서로 잘 맞는 사람도 없어.”
“…….”
나는 더는 지운이 형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입안이 바싹 말라와 침을 꿀꺽 삼켰다.
“좁은 게이 사회에 나만 한 남자 만나기 힘든 거 너도 알잖아.”
“…….”
“희수야, 나도 너 많이 좋아해. 너 아주 예쁘고 우아하거든.”
지운이 형이 내게로 얼굴을 기울였다. 예고 없이 성큼 다가오는 형과 코끝이 부딪힐 뻔했다. 나는 움찔 놀라 물러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얼굴은 가깝게 붙어 있었다.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나를 향하는 형의 선명한 눈동자가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정비공이 지금 좋은 것 같아?”
“…….”
“우리 희수.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이 귀하게 자라서.”
“…….”
“지금 누리는 생활 수준 절대 포기 못 할 텐데 어쩌지.”
울컥 치솟는 마음에 나는 형을 노려봤다. 나는 분명 승규가 없이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승규를 사랑하니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형은 내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막상 구질구질하게 구르다 보면 정신이 아주 번쩍 들 거야.”
악귀 같은 형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운이 형의 입을 빌려서 나오고 있지만, 사실 형이 지금 나에게 하는 얘기는 열여덟 승규를 버린 이후 내가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쉼 없이 되풀이해오던 말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승규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했다고 생각했지만, 갓 돋아나기 시작한 신념은 사실 미약했다. 시간과 함께 굳어진 관념이 나를 빠듯하게 압박해왔다.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지운이 형의 말을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부정하면, 지금까지의 나를 이루고 있는 근간 역시 와르르 무너지고 나라는 사람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승규를 위해 새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새로운 탄생을 위해 대체 어디까지가 무너져야 할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지켜야 할 부분인지 적당한 경계를 가늠할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자식이랑 나는 태생 자체가 다르거든.”
그런 나의 심경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린 형이 오만하게 웃었다.
“다 털리고 나서 후회하고 형 찾아왔는데.”
“…….”
“그때 형이 대체품 찾았으면 어쩌려고?”
형을 마주하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이 느릿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게로 다가오는 형에게서 알코올 향과 더불어 기념일에 내가 선물한 니치 향수의 향이 났다. 지운이 형이 나를 끌어안았다. 사고가 마비된 나는 형을 밀어내지 못했다. 맞닿는 체온과 함께 몸이 겹쳐졌다.
“이리 와, 형이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게.”
“…….”
“너는 그냥 모른 척 나랑 있으면 돼.”
“…….”
“그럼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나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나도 모르게 가빠지는 숨에 가슴팍이 얕게 오르내렸다. 지운이 형의 제안은 간악하고 달콤했다. 나의 가장 약한 구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렬하게 파고들었다.
솔직히 당장 나부터도 나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25년을 지금처럼 살아왔는데, 과연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을까.
일주일 전, 그렇게 승규를 보내고 날을 지새우며 깨우쳤던 일종의 고양감을 되새겼다. 나는 그것이 탈피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던 나의 모습을 비로소 되돌아보고 더 나은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려웠다.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순간의 충동적인 기분이면 어떻게 하지. 어쩌면 충격적인 사건을 접해 단지 판단력이 흐려져 평소에 안 하던 생각이 솟아난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잠깐의 변덕이라면,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정말로 변화할 수 있을까.
“형…….”
“…….”
나의 허리를 감싸 안은 지운이 형은 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승규의 것처럼 단단하지는 않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전한 품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형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분명 지운이 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형의 말을 듣는다면, 형은 아마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어 줄 것이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앞으로도 유지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도와줄 것이다. 가식적인 관계라고 해도, 지운이 형이 꼬집은 것처럼 사실 이전과 비교해 딱히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희수야, 괜찮아.”
“…….”
나는 동요했다. 지운이 형은 나의 등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군더더기 없는 형의 손길이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형을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다.
나도 형의 말에 흔들리는 내가 싫었다. 누군가 나를 억세게 붙잡아 주길 바랐다. 차라리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한 대 때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애써 기댈 곳을 찾아보아도, 새롭게 건너온 미지의 땅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승규는 우리 사이가 이제는 정말로 끝이라고 말했다. 헤어짐을 말하는 승규가 보이는 태도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모른 척 뻔뻔하게 매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아팠다. 설령 내가 승규를 조른다고 할지라도, 승규가 예전처럼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을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만약 승규가 내 옆에 있다면 같이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승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승규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되새기며 지운이 형의 유혹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규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
그럼 나는 정말 혼자가 되는 건가?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로?
“…….”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힘을 주어 지운이 형을 밀어냈다. 나의 손에 순순히 물러나는 지운이 형은 사뭇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설령 그렇게 혼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운이 형과 이런 식의 관계를 이어 나가는 건 옳지 않았다.
“형이랑 헤어질래.”
지금 내가 지운이 형에게 맥없이 굴복한다면, 그것이 승규가 나에게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가 될 것 같았다. 내가 그 정도로 바닥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나 승규랑 잘해 볼 거야.”
나는 지운이 형에게 선언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승규이니까. 지금 승규가 나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운이 형과 완전히 정리하고 승규를 다시 만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았다.
지운이 형은 무척 거슬린다는 표정을 했다. 가늘게 찌푸려지는 그의 눈가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당당하게 그에게 공표했지만, 나는 내심 그가 두려웠다.
“아, 정말이지.”
낮게 중얼거린 지운이 형이 팔을 쭉 늘리며 작게 기지개를 켰다. 나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걔도 너한테 동의한대?”
지운이 형이 무심한 어조로 던진 질문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누군가 거세게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글쎄. 나라면 아닐 것 같은데.”
“…….”
“…….”
“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
나는 형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불안이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형이 두려웠다. 형에게 승규를 모르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쏘아댔지만, 지운이 형은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승규 역시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승규의 마음을 제대로 모르는 것은 나였다.
“귀엽기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걸 가지고.”
지운이 형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 이제 진짜 달라질 거야.”
나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것이 정말 지운이 형을 향한 말인지, 아니면 불안정한 나의 마음을 향한 주문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래. 한번 노력해 봐.”
나는 지운이 형이 또 무슨 말들로 나를 몰아칠까 미리 주춤대고 있었다. 그러나 형은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상황이 더 이상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간편하게 뒤로 물러났다. 지운이 형의 태도는 퇴각하는 사람의 그것치고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형이 응원할게, 우리 예쁜 희수.”
지운이 형은 마치 강아지를 다루듯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