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3)



그날 이후로 승규와는 좀처럼 연락이 안 됐다. 몇 번 카톡을 먼저 보냈지만, 승규로부터는 답이 없었다. 전화해 볼까도 여러 번 망설이다가, 승규가 정말 안 받을까 봐 무서워서 결국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때 화가 많이 났나, 막연히 생각하면서 나는 초조하게 타들어 갔다. 정말로 많이 화가 나서, 혹시나 나를 다시는 보지 않으면 어쩌지 두려웠다.

설마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마음이 풀리면 승규도 연락받겠지, 주문처럼 되뇌면서 마음 한편으로 걱정을 묻으려 애썼다. 하지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꾸준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승규에게 외면당하자 정말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로웠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지운이 형이라도 만날까 싶어 전화를 걸었다. 형은 오늘 저녁은 병원 회식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구나 싶어 짜증이 치밀려다가, 차라리 잘된 일이지 싶었다. 요즘에는 어차피 지운이 형을 만날 때도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으니까.

대학원 동기들과 저녁을 먹고 혼자서 집에 들어왔다. 그렇게 크지 않은 오피스텔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휑뎅그렁했다. 소파에 앉아 전면 유리 너머로 비치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봤다. 어두운 밤은 무척이나 깊고 그윽하게 일렁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위태로웠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는 그 아득한 광경 안에 푹 잠겨 들 것만 같아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기분이 좀 좋아지고 싶었다. 동시에 조승규 생각도 조금만 덜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반신욕을 하기 위해 욕조에 물을 부었다. 좋아하는 향의 배스솔트를 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밋밋하지만 상쾌한 내음이 코끝에 퍼졌다. 곧이어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그자 사지가 노골노골하게 풀어졌다. 종일 긴장했던 근육이 느릿하게 이완했다. 나는 눈을 내리감고 나른한 기분에 잠겨 들었다.

삼십 분쯤 몸을 물에 담가 두었다. 수건으로 꼼꼼하게 물기를 닦아내고 보송한 배스 가운을 입으니 눅눅하게 늘어졌던 마음도 조금은 산뜻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막 욕실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쿵쿵, 무언가를 거세게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질척이는 발걸음으로 욕실을 빠져나오자 상황은 더욱 명백해졌다. 쿵쿵. 쿵쿵쿵. 무식하게 울려대는 소리의 근원은 현관이었다. 간담이 서늘해져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올라온 거지.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종종걸음으로 인터폰에 다가가 외부를 확인했다. 이윽고 화면에 드러나는 인영을 확인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질렀다. 조승규였다. 미쳤어 정말, 연락도 안 하고 이렇게 갑자기. 당황으로 중언부언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현관을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하…….”

문을 열자 승규가 내게 그대로 쏟아졌다. 나는 엉겁결에 승규의 몸을 받쳐 들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승규는 술에 진탕 취해 있었다. 겨우 배스 가운 하나를 입고 있는 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승규가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야, 조승규…….”

덥고 습한 숨에서 싸하게 풍겨오는 알코올 향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승규는 나보다 월등하게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나는 내게로 쏟아지듯 기우는 승규의 무게중심을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너무 보고 싶은 건 맞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집에 찾아오는 건 당황스러운데, 또 대체 무슨 일로 술을 이렇게까지 마셨나 걱정이 되는데. 하나로 정의할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드는 마음에 승규의 이름을 부른 나는 섣불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승규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불안정한 공기 중에서 우리의 시선이 맞물렸다.

“희수야.”

꼭 언젠가의 옛날처럼, 승규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팔을 위로 뻗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윤희수…….”

나를 부르는 승규의 목소리가 잔뜩 젖어 있었다. 나는 삽시간에 먹먹함에 담뿍 젖어 들었다. 승규는 진득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내더니,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내게서 뒤로 물러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위태로워 보이는 승규를 잡았다. 그러나 승규가 간결한 동작으로 내 손등을 툭 쳐냈다. 슬쩍 들썩이는 승규의 입꼬리가 비릿했다.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린 승규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승규가 내게 물었다. 말에 담긴 내용과는 다르게 사실 나를 을러대거나 따져 묻는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승규의 질문에는 어딘가 체념이 깊숙이 배어 있었다. 얇게 울먹이는 승규의 목소리가 마음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숨을 고르며 나를 내려다보는 승규의 눈이 흐릿하게 잠겨있었다.

“승규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승규가 정확히 무엇을 겨냥해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직선적으로 향하는 승규의 시선이 나를 온통 발가벗기는 것만 같았다. 막연하게 부끄러웠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승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승규가 한 번 더 몸을 휘청거렸다. 나는 또다시 승규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도리어 거칠게 밀쳐졌다. 나는 황량해진 기분으로 승규를 응시했다. 쌔액, 쌔액, 숨을 내뱉는 승규는 나를 벌게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승규는 여전히 취기로 만연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북받치는 듯, 승규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희수야. 너 그때 왜 나 버리고 갔어?”

그리고 승규는 그렇게 내가 절대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마취 총에라도 맞은 것처럼 빳빳하게 몸을 세웠다. 온몸이 승규에게 포박당한 듯, 털끝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내게 거칠게 굴고 무신경한 듯 대하던 가면을 완전히 벗어버린 승규는,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갔으면 그냥 혼자서 잘 살지.”

“…….”

“내 손에 잡히지도 않을 거면서 왜 다시 돌아왔어?”

나는 또 한 번 승규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랫입술만 겨우 깨물었다. 나는 승규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쳐버린 승규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냥 나는 차라리 승규가 나를 아주 많이 원망하고, 또 미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 내가 너 다시 좋아할 줄 알고 이랬지.”

하지만 승규는 내 생각과 정반대의 말을 내뱉었다. 빳빳한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눈을 껌뻑였다. 짙게 가라앉아 일렁거리는 승규의 눈동자에는 한가득 나만이 담겨 있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분명 몸을 겹쳤지만, 승규는 내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참지 못하고 결국 토해내 버린 마음에 나는 그대로 심장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승규의 진심이 더는 모른 척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까.”

“…….”

“너 갖고 싶어서 나 돌아버릴 것 같아.”

승규의 낮은 목소리가 그르릉 들끓었다. 끝이 살짝 갈라진 소리의 틈에서 숨길 수 없는 열망이 배어 나왔다. 단순히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승규를 바라보았다.

인상을 확 찌푸린 승규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손바닥이 스윽 지나가고 드러난 승규의 얼굴이 나를 맹렬하게 쏘아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피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다.

“하…….”

나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토해낸 승규가 내 허리를 단박에 잡아끌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현관 벽에 부딪혔다. 열기로 들끓기 시작한 두 쌍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얽혀 들었다. 승규가 내게 키스했다. 뒷덜미를 잡아채고 허겁지겁 내게 달려들어 입술을 삼켰다. 

“흣, 으읏…….”

승규는 나를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격하고 성마르게 달려드는 움직임에 이가 부딪히고 입술이 씹히기도 했다. 입안에 비릿한 맛이 배어나고 아릿한 통증이 퍼졌다. 단순히 입가뿐만 아니라, 승규에게 짓눌러지는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나는 승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승규의 목을 매달리듯 끌어안고 그의 입술을 절박하게 빨았다.

우리는 끈덕지게 키스했다. 혀가 다급하게 서로의 입안을 넘나들었고, 입술이 숨 가쁘게 비벼졌다. 맞닿은 틈새로 새어 나오는 타액마저 죄다 빨아 삼켰다. 조금이라도 입술이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서로에게 착실하게 달라붙었다.

따끈하게 닿아 있는 입술의 감촉 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키스에 온몸이 흠뻑 담가진 기분이었다. 승규가 하도 집요하게 빨아대 입가가 얼얼할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접촉이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갈급한 마음으로 자꾸만 승규에게 매달렸다.

“음, 으음.”

“하아… 하.”

숨이 부족해 입술이 잠시 떨어지자 그것마저도 못내 아쉬웠다. 나는 그렁그렁하게 젖은 눈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승규가 퉁퉁 부어오른 나의 입술을 슬쩍 매만졌다. 목선을 타고 내려온 승규의 손이 불쑥 가운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목을 뒤로 젖히고 승규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아, 흣, 승규야!”

유두나 허리께를 매만질 줄 알았는데, 나를 파고든 승규의 손은 뜻밖에도 곧바로 성기를 감싸 쥐었다. 기습적인 손길에 다리 사이가 확 오므라들었다.

흘긋 나를 내려다본 승규가 계속해서 내 성기를 주물렀다. 축 늘어져 있던 살덩이가 승규의 까끌까끌한 손바닥에서 크기를 불려 나갔다. 할딱할딱 가쁜 숨을 내뱉는 나의 입술을 승규가 다시금 삼켰다.

애틋하게만 느껴졌던 키스에 단숨에 성적인 감각이 더해졌다. 거칠게 내뱉는 승규의 호흡에서 짙은 욕망이 묻어났다. 오른손으로 내 성기를 단단하게 말아 쥔 승규는 왼손으로는 내 허리와 골반을 끌어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키스를 나누며 주춤주춤 침대를 향해 이동했다.

막상 침대에 눕고 보자 모든 상황이 마치 지금의 섹스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승규가 어깨를 쓸어내리자 내 몸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배스 가운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물에 담가 향긋하고 말랑해진 나신이 드러났다. 나를 바라보며 가슴을 크게 들썩인 승규가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피부가 그대로 코끝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만큼 나를 깊이 들이마셨다.

“하아…….”

승규가 체향을 깊숙이 들이켜자 내 입술에서는 탄성 섞인 한숨이 절로 터졌다. 나는 손끝으로 승규의 티셔츠 아랫자락을 매만졌다. 우뚝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승규는 팔을 X자로 교차시켜 티셔츠를 빠르게 벗어냈다.

나는 천 자락이 들춰지며 드러나는 단단한 복근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단순히 승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승규가 만져주던 성기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

승규는 빠르게 알몸이 되었다. 우리는 완전하게 드러난 맨살을 문지르며 침대 위에서 뒤엉켰다. 차근차근 순서를 밟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탐색은 지독하게도 길었던 방금의 키스로 충분했다. 승규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인지, 다리 사이의 성기가 빳빳하게 솟아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흥분한 승규의 중심을 만지려 했다.

그러나 승규의 성기로 향하는 나의 손가락은 부드러운 손길로 제지당했다. 대신 승규는 내 양 무릎 아래를 받쳐 들었다. 무릎 안쪽의 말캉한 살점이 거친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생경했다. 승규가 그대로 힘을 주어 밀자 내 다리 사이가 쩍 하고 넓게 벌어졌다.

승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벌어진 가랑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승규가 씩씩 뿜어내는 숨결이 회음부에 닿아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간지러웠다. 다리를 바둥거려 보았지만, 승규가 무릎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어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승규야, 거기, 흣!”

“하아…….”

“하지 마, 으, 부끄러워.”

엉덩이 사이의 틈에 입술을 가져간 승규가 입구를 빨기 시작했다. 경악한 나는 종아리를 퍼덕거렸지만, 승규가 나를 단단하게 받쳐 올리고 있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긴장한 입구의 주름이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벌어지는 틈으로 승규의 축축한 혀가 파고들었다. 차마 그를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내 다리 사이를 핥는 승규의 촉감이 오히려 더욱 생생해졌다. 입구를 축축하게 적신 승규의 혀가 뾰족한 모양으로 안쪽을 콕콕 찔렀다. 구멍은 움찔거리며 조여들었다. 이곳으로 다른 남자의 성기가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승규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승규가 구멍을 빨기 시작하자 나는 치부가 낱낱이 드러난 듯한 기분이었다.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승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가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나를 깨끗하게 핥았다. 그것이 마치 나를 제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의식인 것처럼.

타액으로 충분하게 적셔진 입구를 향해 승규가 성기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쿠퍼액으로 젖어 매끈해진 귀두가 엉덩이골을 미끄러졌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선단이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주름이 두툼한 살덩이를 꽉 물었다. 작게 인상을 쓴 승규가 힘을 주어 골반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승규는 진득하게 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하으으으.”

승규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대로 싸버릴 것 같았다. 잔뜩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던 내벽이 성기에 조밀하게 달라붙었다. 배 속에 차오르는 묵직한 압박감에 밭은 숨이 터졌다. 엄청난 충족감이었다.

“아, 흑, 승규야, 아아.”

“후, 후으…….”

나는 허리를 최대한 뒤로 젖힌 채 바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승규가 팔을 뻗어 얕게 경련하기 시작하는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한계까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기둥을 감싸 쥐고 손톱을 세워 요도를 막았다. 마음대로 배출할 수도 없는 상태로 나는 끙끙대며 몸을 뒤틀었다. 승규를 물고 있는 아래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크읍.”

승규가 끓는 듯한 낮은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잠시 멈칫하더니, 성기를 쭉 구멍에서 빼냈다가 다시 거세게 박아 넣었다. 승규의 몸짓에 박차가 가해졌다. 승규가 내게 밀려들 때마다 우리는 하나가 됐다. 거침없이 나를 치받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맞닿은 아래가 불이라도 붙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 하아아…….”

나는 승규의 아래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눈을 깜빡였다. 흐릿해진 시야가 초점을 되찾자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승규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승규의 눈동자에서 간절한 열망을 읽었다.

되새겨보면 승규가 나를 가지고 싶다고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공언한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옛날에도 승규는 자신의 소유욕을 표현하는 것에 조금은 조심스러웠던 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승규는 자신이 단호하게 뱉어낸 말을 곧 행동으로 옮겼다. 승규는 나를 지독하게 원했고, 그래서 나와 섹스하고 있었다.

고통을 가하거나, 원망을 쏟아내거나, 혹은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오롯이 나를 원해서,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부딪쳐오는 섹스였다. 그런 승규의 마음을 느끼는 나는 어느 때보다 몸이 달아올랐다. 지금 느껴지는 감각을 결코 단순한 성적인 흥분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가파르게 고조되는 감정에 온몸이 달구어졌다.

“하, 으응, 승규야.”

“하, 흐으, 허억.”

승규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지고 깊어졌다. 하지만 그런 승규를 따라가는 게 특별히 버겁지는 않았다. 서로를 분명하게 바라보며 우리는 같은 박자를 찾아 함께 움직였다. 승규가 한 번씩 내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텅 빈 자리에 다시 생겨나고, 이윽고 부드럽게 매만져졌다.

“아, 흑, 흐으윽.”

한 번 사정하고 다시 꼿꼿하게 솟아오른 성기는 꺼떡거리고, 진분홍색으로 물든 유두는 돌기가 바짝 솟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쌕쌕 젖은 숨을 내뱉고, 탁해진 눈가엔 쾌감 어린 눈물이 고여 들었다. 나는 거의 온몸으로 지금 승규와의 섹스가 못 견디게 좋다고 외치고 있었다.

“희수야.”

“앗, 으, 으응.”

“윤희수.”

승규가 몸을 아래로 숙이자 이미 삽입된 성기가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승규는 나의 목덜미에 고여 든 땀을 살짝 핥아냈다. 온몸을 파드득 떨어댄 나는 거의 흐느끼듯 신음했다.

“좋아?”

내가 결코 부정할 수 없이 좋아하는 걸 분명 알고 있을 거면서, 승규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필로우 토크로 짓궂게 희롱하는 게 아니었다. 승규는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집요하게 확인받으려 들고 있었다.

“좋냐구.”

승규가 갑자기 나를 어르던 성기를 쑥 뽑아냈다. 끄트머리만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성기가 입구를 간지럽혔다. 성기 근처에서 주름이 쫙 오므라들었다 펴지는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답해 줘, 희수야.”

“…….”

“좋아?”

승규의 질문에는 주어가 없었다. 나는 승규의 질문이 단순히 우리가 지금 몸을 섞는 행위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사실은 그래서 승규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헉, 아악, 아으응!”

신음만을 뱉어내며 고개를 젓는 나를 내려다보는 승규의 입가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짧게 숨을 뱉어낸 승규가 푹 하고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골반을 꽉 움켜쥐더니 작정을 한 듯 거칠게 퍽퍽 박아 넣었다. 일부러 나를 배려하지 않는 움직임이 숨도 못 쉬도록 빠르게 몰아쳤다.

“아, 제발, 쫌만 천천히….”

“하….”

승규가 크게 치고 들어올 때마다 너무하리만큼 전립선이 자극됐다. 내벽이 온통 진동하듯 울려대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찔끔 고인 눈물이 눈가를 타고 스륵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승규는 조금도 나를 쉽게 놓아줄 모양이 아닌 것 같았다.

“아아아…….”

나는 내지르듯 길게 신음했다. 너무 아팠다. 또 사실은 너무 좋았다. 나는 그렇게 애써 솔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 좋아.”

그제야 승규는 나를 괴롭히는 무자비한 움직임을 멈췄다. 승규가 내 몸을 끌어당겨 양팔로 가득 안았다. 골반이 맞물리는 아래에서는 내벽을 차지한 성기가 둥그렇게 문질러졌다.

“승규야, 나 좋아.”

“…….”

“좋으니까, 제발 좀…….”

나는 끝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내 얼굴로 입술을 가져온 승규가 따끔한 혀끝으로 눈물을 살살 핥아내었다. 다정한 손길이 내 뺨을 깨질세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희수야.”

“흐, 으으, 으응.”

“왜 너는 아직도 예뻐서, 하아…….”

“…….”

“나 자꾸 힘들게 해.”

나는 승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나를 안고 좋아 죽겠다는 답을 기어코 받아낸 후에도, 승규는 마냥 기뻐 보이지가 않았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승규의 얼굴이 마음 한구석을 써늘하게 했다. 내가 그 정도로 승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솟으려고 했다.

“으으…….”

솔직히 그걸 정말 몰랐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내 안에서 크게 꿈틀거리는 승규의 성기를 느끼며 나는 승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음을 애써 닫으려고 했었다. 닫아놓는 편이 우리에게 더 좋다고 그렇게 우격다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단속해도 마음은 결국은 이렇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어코 범람하고야 말았다.

“승규야, 나도, 흣, 너, 으응, 좋아해.”

“거짓말하지 마.”

“아, 흐으읏.”

“너 나 갖고 놀잖아.”

하지만 승규의 태도는 냉랭했다. 승규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것을 후회할 찰나도 없이, 나는 그에게 오해받는 것이 덜컥 두려워졌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 흐윽, 진짜로 그런 거 아냐.”

“후읏, 후으…….”

“나도, 하아, 네가 좋아서 그랬어.”

그 의미를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아득한 표정을 한 승규가 내게 키스했다. 또 한 번 서로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가장 깊은 안쪽에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승규를 느꼈다.

***

섹스가 끝나고 내 침대에 누워 잠든 승규를 내려다봤다. 촘촘하게 내리깔린 짧은 속눈썹에 슥 손가락을 가져다 대 봤다. 다음은 매섭지만 웃을 땐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오뚝하고 곧게 솟은 코, 살짝 도톰하고 감촉이 폭신한 입술, 남자답고 근사한 얼굴 골격까지. 손끝에 새겨 넣는 것처럼 그렇게 승규를 하나하나 매만지다가 나는 하염없이 슬퍼졌다.

이제 네가 맑은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했다. 이런 섹스를 하고 관계가 예전과 같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서로를 원해 놓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부표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디로 나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고 물결에 하염없이 휩쓸리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승규랑 나는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너랑 있는 지금이 너무 좋으니까, 알고 싶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최대한 미루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승규를 꼭 껴안았다. 승규의 커다란 품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두툼한 허리를 파고들고 가슴을 바짝 붙였다. 나긋하게 울려 퍼지는 승규의 심장 소리가 내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승규와 함께 나도 그대로 깜빡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삑삑삑삑삑, 현관문의 비밀번호가 찍히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거렸다. 옷가지를 찾으려 했지만 애초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급한 대로 체액이 얼룩덜룩하게 번져 있는 배스 가운이라도 걸쳤다. 가운으로 몸을 꽁꽁 싸맨 후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뭐야. 선물이야?”

막 신발을 벗은 지운이 형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배스 가운 차림의 나를 확인한 지운이 형이 내 전신을 죽 훑어 내렸다. 나는 오늘따라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운 안에서는 아직 엉덩이에서 채 빼내지 못한 승규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했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일단 침실에만 안 들어오면 돼. 형이랑 적당히 얘기 잘해서 돌려보내면. 하지만 가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꼭 잡아 쥔 손은 이미 벌벌 떨리고 있었다.

“형. 오늘 간호사분들이랑 회식 있다고 하지 않았어?”

“회식은 이미 끝났지.”

“아…… 그랬구나.”

팔짱을 낀 형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방금까지 승규와 섹스했던 흔적이 공기 중에 음란한 향취로 배어 있는 것만 같아서 주눅이 들었다. 불안감으로 심장이 빼곡하게 조여 왔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희수야. 너 세 시간 넘게 연락 전혀 안 됐던 건 알아?”

“아. 그러니까…….”

“형은 너 걱정돼서 와 본 거지.”

지운이 형은 여전히 나를 빤히 응시하며 뚜렷한 높낮이가 없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말의 내용은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고 다감했는데, 형은 어딘가 냉랭한 기운을 풍겼다. 별안간 지운이 형의 목소리가 로봇처럼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나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죄책감에서 기인한 나의 착각이기를 바랐다.

“아니면, 내가 들어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형! 나는 소리 높여 형을 다급히 불렀다. 하지만 말을 마친 지운이 형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형을 바짝 쫓아가는 나는 차마 형을 붙잡고 늘어지지도 못했다. 애인의 권한을 행사하는 형을 멈출 수 있는 명분이 내겐 없었다. 피할 수 없도록 드리우는 상황을 상상하자 속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하.”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승규를 발견한 형이 코웃음을 쳤다. 형은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얼굴로 침대를 내려다봤다. 나는 형의 바로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종종거렸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온 것 같은데.”

인기척을 느낀 승규가 부스스 눈을 떴다. 나는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승규가 졸린 눈을 끔뻑였다. 상황 파악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승규의 얼굴은 짙은 당황과 자책으로 물들었고,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

“…….”

발각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애틋하게 원하며 사랑을 나누던 바로 그 침대가 한순간에 비참하고 추레하게 보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지운이 형에게 나는 믿음을 배반한 부정한 연인이었고, 승규는 지운이 형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와 관계를 맺은 외도 상대였다. 달콤함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애써 피해 오던 죄책감의 무게에 삽시간에 짓눌렸다.

쯧. 지운이 형이 짧게 혀끝을 찼다. 그 소리를 들은 나와 승규가 동시에 지운이 형을 돌아보았다. 형은 배신감으로 덜덜 떨거나 크게 충격을 받은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리만큼 평온하고 냉정해 보였는데, 사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더욱 좋지 않았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짐승이 따로 없네.”

“…….”

“일단 옷부터 걸치고 인간답게 얘기하죠.”

지운이 형은 막상 바로 옆에 있는 내게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승규에게 명령하듯 통보했다. 그대로 휙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간 지운이 형은 베란다 근처의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지운이 형을 애타게 바라보았지만, 지금 형은 내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형이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에서 한곳에 서 있지 못하고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갖춰 입은 승규가 지운이 형 앞으로 걸어갔다. 승규와 지운이 형이 대치했다. 형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승규를 훑어 내렸다. 주먹을 꽉 쥐고 선 승규는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분위기가 압박적이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초조한 심정으로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그래, 남의 거 몰래 훔쳐 먹으니 맛이 좋아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지운이 형이 입을 뗐다. 얼굴을 들어 올린 승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승규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지운이 형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

“그때 그분 맞으시죠, 와이퍼?”

우아한 손등을 가볍게 들어 올린 지운이 형이 와이퍼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손동작으로 표현했다. 그가 분명하게 내비치는 모욕적인 태도에 승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를 꽉 문 승규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승규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금 드러난 승규의 얼굴은 흔들림 없이 초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운이 형은 여전히 승규가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공들여 관찰했다. 승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희수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

승규가 지운이 형 앞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에 당황한 건 나였다. 

“다 제가……. 싫다는 희수한테 제가 억지로 밀어붙이고 강요했습니다.”

“…….”

“희수는 저한테 그냥, 얼떨결에 휘둘린 것밖에 없습니다.”

지운이 형에게 거짓을 말하는 승규의 표정은 처참한 비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승규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밀어내는 승규에게 억지로 매달리고 우기고 졸라댔던 건 나였는데……. 인제 와서 지운이 형 앞에서 승규가 나를 감싼다고 해서 우리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쪽이랑 헤어질 생각은…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망설이며 말을 마친 승규의 얼굴은 패배감으로 쓸쓸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승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둔기에 거세게 후려쳐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승규는, 나를 지운이 형에게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하…….”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해냈다. 이건 말도 안 됐다. 승규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섹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승규는 나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자발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나를 원한다고 말해놓고서, 나를 결연하게 포기했다.

나는 울먹였다. 승규가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순간에마저도 너는……. 하지만 나는 나를 그렇게 버리려 드는 승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승규는 마치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치만 사실 내 마음은…….

“조승규, 너!”

견디지 못하고 승규의 이름을 부르자 두 남자가 나를 동시에 쳐다봤다. 애절한 승규의 시선과 권위적인 지운이 형의 시선 모두 나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무언의 뜻을 전했다. 지운이 형이 시끄럽다는 듯 손을 들어 공중에서 탁 털어냈다. 놀란 나는 움찔 몸을 떨고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고.”

“…….”

“알겠으니 그쪽은 이만 돌아가 주시죠.”

“…….”

“난 희수랑 둘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감싸 쥔 턱을 살살 쓸어내리는 지운이 형이 승규를 느릿하게 훑으며 말했다. 형은 나른한 어조로 확신에 찬 의사를 표현했다. 승규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승규는 지운이 형에게 사과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의 90도가 되도록 지운이 형의 앞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승규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 잘못을 시작한 건 애초에 전부 나였다. 그런데도 나의 몫까지 억지로 짐을 뺏어간 승규는 모든 죄의 무게를 혼자서 짊어지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승규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참담한 기분에 휩싸였다. 한참 동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승규가 몸을 다시 꼿꼿하게 세웠다. 나는 뚫어져라 승규를 쳐다봤다. 승규는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현관을 향해 걸었다.

“승규야!”

나는 허둥거리며 승규를 뒤쫓았다. 승규의 뒤에서 허리를 꽉 껴안았다.

“승규야 가지 마. 아니, 나랑 같이 가.”

“…….”

“아, 승규야, 제발.”

나는 울먹이며 승규에게 매달렸다. 테이블에 앉은 지운이 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나와 승규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쓸 틈새도 없었다. 이렇게 승규가 돌아서 버리면, 어쩌면 이대로 영영 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나는 승규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승규를 꼭 붙잡았다. 가지 마, 가지 마.

“윤희수.”

“…….”

“우리 이제 진짜 그만 보자.”

나를 등지고 선 승규는 제대로 나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신 거센 손길로 허리를 붙잡고 있는 나의 손을 떼어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야멸찼는지 승규에게 밀려 나간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질 뻔도 했다. 겨우 균형을 잡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승규가 단호하게 내게 고한 최후의 작별을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다.

지운이 형을 돌아본 승규가 확인하라는 듯 가볍게 눈짓했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은 지운이 형은 그런 승규가 가소롭다는 듯 픽 비웃었다.

“…….”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승규가 가버렸다. 몇 시간 전 승규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우리는 몸을 겹쳤고, 서로 사랑했다. 그 모든 순간이 그대로 바스러져 버리는 듯한 느낌에 뼈저리는 좌절감이 들었다.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그랬는지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결국 바닥에 푹 주저앉은 나는 통곡했다.

끼익. 몸을 일으킨 지운이 형이 나에게 다가왔다.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바닥에 거의 고꾸라져 있는 나의 몸을 들어 올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형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형과 눈을 마주치니까 내가 정말로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승규가…….

“형, 저거 아니야. 흑, 으윽, 저거 다 아니야.”

“…….”

“승규, 흑, 지금 거짓말하는 거야.”

내 말을 들어줄 승규는 이미 떠나버렸는데도, 나는 승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지운이 형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마구 목 끝을 치고 올라와 뒤죽박죽 섞였다. 머릿속의 실타래가 아무렇게나 엉켜 들었다.

“승규가 나한테 먼저 안 그랬어. 흐윽, 다 내가 처음부터 걔한테.”

“…….”

“걔는 싫다고, 안 하겠다고 그랬는데 내가 계속 매달려서. 흐어어엉.”

지운이 형이 울면서 변명하는 나의 뺨을 때렸다.

“……!”

아팠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단박에 말을 멈춘 나는 얼얼하게 부어오르는 뺨을 감싸 쥐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운이 형을 올려다보았다.

“윤희수, 정신 차려.”

“…….”

“여기가 지금 누구 앞인지 몰라?”

지운이 형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나를 윽박질렀다. 무서웠다. 그리고 헷갈렸다. 누구한테 뺨을 맞아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는데,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태연한 형의 태도를 보니까 내가 정말로 맞을 짓을 해서 그런 건가 싶었다.

“아니면 뭐, 사랑에라도 푹 빠지셨나?”

여전히 뺨을 감싸 쥐고 멀뚱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지운이 형이 픽 웃었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형, 나는…….”

어. 맞아. 나 걔 진짜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마음은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이 보잘것없는 종잇조각인 것처럼 취급하는 형 앞에서 나는 차마 그 말을 당당하게 할 수가 없어졌다.

“야, 너 이거밖에 안 되냐?”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형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 봐. 내가 정말 몰랐겠어?”

“…….”

“밖으로 나도는 거 적당히 봐 주면서 넘어가고 있었던 거지.”

“…….”

“내가 이 정도로 굽혀주면, 너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아?”

솔직히 지금 나는 승규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사실 자체가 지금의 지운이 형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 지운이 형 앞에서 승규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던 것은, 그래 분명 잘못한 거다. 아니 애초에 지운이 형을 두고 승규를 만난 게……. 

그래서 나는 나에게 이렇게 갑자기 화를 내고 사납게 돌변한 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냥 승규가 너무 좋았던 거지, 지운이 형에게 일부러 상처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형에게 저지른 잘못은 명백했다. 나는 형을, 속였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형. 나 처음부터 형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하.”

“미안해. 바람피운다는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는 말끝을 흐리고 슬쩍 눈을 들어 지운이 형의 눈치를 봤다. 형의 표정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싸늘하고 냉랭했다. 파고들 틈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두려웠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형을 오히려 더 화나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차라리 입을 다시 다물었다. 

내게서 눈을 떼고 창가로 고개를 돌린 형이 멀찍이 시선을 두었다. 그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몰아쉬는 숨에 그대로 피부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윤희수,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 처음부터 너한테 속은 적 없어.” 

“…….”

“내가 화난 건 말야. 네가 누구랑 붙어먹든 하필 내 눈앞에서 멍청하게 걸린 거야.”

“…….”

“게다가 아무리 놀이 상대라고 해도, 격 떨어지게 정비공이 뭐야.”

형은 나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했다. 푸근하고 어른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잘 설명하면 형이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해줄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지운이 형은 그렇게 늘 나를 다 품어줬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나를 오냐오냐 받아주기만 하던 형은 내 눈앞에서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형이 내게 하는 말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타들어 가는 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

“존나 열 받네.”

지운이 형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모습을 흘긋 내려다봤다. 내 앞에서 한 번도 한 적 없는 상스러운 욕을 내뱉었다. 나는 급격하게 위축됐다.

“희수야. 형이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까 위생 관념이 좀 철저하거든.”

“…….”

“막상 눈앞에서 다른 놈이 쓰는 걸 보니까 좀 더러워서 입맛이 떨어져.”

말을 마친 형이 형은 방금 자신이 때려 부어오른 내 뺨을 느릿하게 감싸 쥐었다. 따끔한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

“넌 반성 좀 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쿵. 또 한 번의 문소리와 함께 형이 사라졌다. 방금의 소란이 무색하게 집안은 고요했다. 나는 적막에 잠긴 소파에 앉았다. 다시금 혼자가 되어버린 나의 모습을 스스로 곱씹으며 지금까지 내가 매달리려 발버둥 치던 게 얼마나 무가치한지, 내가 애써 외면해오던 게 얼마나 나에게 소중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

사랑만으로 모든 게 충분할 것처럼 느껴졌던 날들이 있었다. 세상에 우리 단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갈구했던 날들이 있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 같이 있는 지금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적어도, 우리가 맹목적으로 공유했던 감정은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승규와 헤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것은 정황상 나였다. 하지만 나는 승규와 헤어진 그 순간 이후로 그날의 일을 제대로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기억은 항상 물에 번진 종이처럼 흐릿했다. 어쩌면 일부러 알아볼 수 없도록 덧그려진 낙서 같기도 했다. 

우리 이제 진짜 그만 보자. 나의 잘못마저 끌어안은 승규가 마침내 고한 작별 인사는 아픈 칼날이 되어 깊이 잠들었던 기억을 깨웠다. 소파에 누운 나는 지친 몸을 끌어안고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는 즉시 나는 내가 외면해오고 있던 그 날로 빨려 들어갔다. 

지독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쌩쌩 불어대는 칼바람이 피부를 에이고 들었다. 일부러 감추는 것처럼 목도리를 둘둘 말아 얼굴을 감싼 나는 두툼한 코트를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반드시 외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준 일주일에서 꼬박 육일을 방에 틀어박혀 고민하는 데 썼다. 하지만 결말은 사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승규를 사랑할 용기가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장애물에 맞서 싸울 배짱이 없었다.

나는 끝내 체념했다. 결말을 바꿀 수 없다면,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휘말린 거야. 이건 그냥 실수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해. 이제는 둘만이 있는 게 아니게 되어버린 냉혹한 현실의 논리를 곱씹었다.

나는 반복해서 생각하며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렇게 엄마가 내게 말한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체화했다. 처음에는 죄책감으로 껄끄럽게 느껴지다가도, 계속해서 되새기고 삼키다 보면 그것만이 지배적인 진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승규와 최대한 아프지 않게 헤어지고 싶었다.

언젠가 가본 적이 있던 승규의 동네를 찾았다. 산비탈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외양은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초라하고 허름했다. 색 바랜 크레이트 지붕이 덧대진 판잣집들과 껍질이 부스러져 벗겨지는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며 내가 내린 결정이 맞는 거라고 다시금 되새겼다.

승규의 집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건물들의 개성을 분별하기 어려운 마을의 어귀를 빙빙 도는 나는 금세 지쳐버렸다. 추운 날씨인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고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꾸만 초조해졌다.

하지만 퇴로가 막혀 있었다. 돌아설 수 없는 나는 그렇게 미로에 갇혀 빙글빙글 맴돌았다.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삼십 분쯤 헤맸을까. 내게 빛이 내렸다. 타박타박 스산한 길을 걷는 내 눈앞에 승규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골목 어귀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던 승규는 나를 확인하고는 곧장 바닥에 꽁초를 지져 껐다.

마침내 승규를 만난 것을 반가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나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승규를 응시했다. 승규가 내게로 빠르게 달려왔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다시금 부드럽게 웃는 눈이 크게 휘어져 있었다. 나를 대할 때면 항상 허물어지는 승규의 얼굴은 때맞지 않게 찬란했다.

승규가 덥석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나는 승규의 팔이 닿기 전에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승규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밖이라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런 줄로 생각한 것 같았다. 다시금 나를 바라보는 승규는 여전히 벅찬 얼굴이었다.

‘희수야!’

‘…….’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아 너 핸드폰 뺏긴 거 아직 못 받았나? 날씨 추운데 밖에서 이게 뭐야. 얼굴 빨개진 거 봐. 어느덧 우리가 만나지 못한 지도 열흘 남짓이었다. 승규는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터뜨리는 듯 내게 말을 쏟아냈다.

‘할머니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셔서, 내가 요즘 정신이 없었어.’

‘…….’

‘내가 먼저 너 보러 갔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승규는 내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감정이 고양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작 그를 찾아온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늦게 깨달았다.

‘희수야?’

마침내 이상 기류를 감지한 승규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승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 나는 차마 그런 승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해치워버려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승규야.’

얼어붙은 입술로 꽉 눌려 있는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어쩌면 그때부터 모든 걸 예감하고 있는 것처럼, 승규는 급격하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할 말?’

나라고 해서 그 상황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현실적인’ 논리에 매달렸다.

‘우리 헤어지자.’

나는 승규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를 투명하게 향하는 승규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승규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왜…….’

‘…….’

‘그게 무슨, 희수야, 잠깐.’

승규가 당황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하아. 승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내뱉는 한숨이 시허옇게 공기 중에 퍼졌다. 이번 겨울은 정말이지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나는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승규가 시선을 낮춰 내 얼굴을 향했다.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려던 승규가 차마 내게 닿지 못하고 망설였다. 애써 피해 오고 있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람에 베인 듯 가슴이 시렸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승규야.’

‘그럼 대체 왜.’

내가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도 승규는 이르게 알아챘던 것 같다. 승규의 얼굴이 안쓰러울 만큼 마구잡이로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들어 멀리 보이는 승규의 동네를 바라보았다. 부글부글 차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여러 번 연습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너도 알잖아.’

‘희수야.’

‘우린 그냥 달라.’

꿀꺽 침을 삼키는 승규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일렁거렸다.

‘너 같은 사람 내 인생에서 앞으로 만날 일 없어.’

이렇게 망가지고 나면 승규랑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미련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작별하기 위해서라도 끝맺음은 모질고 날카로운 편이 나았다. 나는 추위로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얼얼한 입술로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

‘…….’

승규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승규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슨 얘기인지 충분히 다 이해했을 거다. 어쩌면 내가 말로 만들어 낸 그 이상까지도 헤아렸을 것이다. 이미 마음을 결정한 이상 승규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승규가 어떤지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희수야.’

‘…….’

승규는 울고 있었다. 굵은 눈물이 아주 조용히 그의 양 뺨을 줄줄 흘러내렸다.

‘너 다 알면서 나 사랑한 거 아니었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토해내는 승규의 질문이 참담했다. 어느새 우리가 함께하는 순간은 이렇게나 비참해져 있었다. 울컥 치밀려는 나약한 마음을 겨우 참았다. 나는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그대로 나를 발가벗길 것만 같은 승규의 질문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 알았어.’

‘…….’

‘근데 아니었어.’

하. 허탈하다는 듯 승규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승규는 금방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비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승규는 내 앞에서 고요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승규에게서 돌아섰다.

‘엄마. 저 전학 보내 주세요.’

‘…….’

‘이제 곧 고3인데, 좋은 환경에서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오자 온몸이 열로 펄펄 들끓었다. 내게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엄마에게 나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답을 안겼다.

‘희수야. 잘 생각했어.’

‘…….’

‘그게 맞는 거야.’

나를 다독이는 엄마의 말에서 안락을 찾으려 애쓰며,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더는 깨지지 않을 안온한 세계로 편입시켰다.

나는 승규를 그림처럼 추억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은 결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내가 애써 피해 오고 있던 기억의 실상은 아주 비겁하고 잔인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보다, 나는 어쩌면 훨씬 별로인 사람이었다.

나의 죄를 짊어진 채 나를 등지고 돌아선 승규의 뒷모습이 아릿한 과거의 기억 위로 겹쳐졌다. 내게 이별을 말하는 승규는 숭고하고 고결했다. 그런 승규와 더욱 대조되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나의 민낯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때도 지금도 승규는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었다. 문제는 나였다. 나 역시 그때로부터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다만 후회했다.

그때 나는 너랑 같이 있는 내가 계속해서 행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어. 하지만 네가 없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