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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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가 쉬는 건 아니었다. 빼곡하게 잡혀 있는 보충 수업 때문에 여전히 일주일에 5일은 등교를 해야 했다. 일 학년 때는 방학식을 해놓고 다시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한다는 게 불합리하다고 불평했다. 크게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오히려 반가웠다. 우리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승규와 나의 유일한 접점이기 때문이었다.

‘괜찮을까?’

‘응. 어차피 방학인데.’

‘흐음.’

‘아무도 안 올걸.’

나는 음악 선생님이 방학에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평소보다 적은 인원이 출근하는 선생님들 역시 학교에 오는 게 달갑지 않은 건 학생들과 마찬가지라,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교무실에만 붙어 있다는 것 역시 알았다. 학생들이야 뭐 수업이 끝나면 더 이상 학교에 볼일이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승규와 나는 보충 수업이 끝나면 정규 학기보다 느슨해진 감시를 틈타 음악실로 숨어들곤 했다. 학기 중에 자주 사용했던 옥상은 지금 올라가기에는 지나치게 볕이 뜨거웠다.

음지에 자리한 음악실은 대체로 서늘하고 어두웠는데, 천장 가까이 높은 곳에 난 좁은 창으로 시간에 따라 드물게 빛이 우수수 쏟아질 때가 있었다. 연노란 빛이 교실 바닥으로 동그랗게 쏟아지면 그곳에 승규와 나 둘만을 위한 아늑한 보금자리가 마련되는 것만 같았다.

‘안 더워?’

‘더워.’

‘손 부채질 해줄까?’

‘아니. 그냥 너랑 붙어 있을래.’

‘하하. 귀여워.’

사실 같이 있을 때 별다르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승규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왜 그렇게 설레고 기다려졌는지 모르겠다. 매일 승규의 얼굴을 보면서도,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나는 승규가 궁금했다.

정말 승규와 있으면 세상에 우리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승규가 나에게 입을 맞추고, 우리 사이에 둘만의 작은 세계가 생겨난 뒤로는 항상 그랬다. 승규와의 시간은 안온하고 포근했다. 현실은 사실 그와 같지 않다는 걸 승규도 나도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서 굳이 상기하지 않으려 했다.

집에서 부모님과 마주쳤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우리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나도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승규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돋아난 균열이 덮어 두면 없어지는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애써 보지 않으려 들다 보면, 눈에 띄지 않으니 아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희수야.’

‘응?’

승규의 단단하고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나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오늘 안 좋은 일 있어?’

‘왜?’

‘음. 평소보다 표정이 어두워서.’

티가 났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의 태도는 조금 투박하고 무딘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승규는 가끔 나의 변화를 거의 동물적으로 예민하게 감지해내곤 했다.

‘조승규 이제 완전 귀신같다.’

입을 헤 벌리고 감탄하는 나를 보며 승규가 흐릿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별것 아니라는 듯, 약간은 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흐트러진 내 머리 위로 내려앉은 승규의 손길이 앞머리를 가지런히 쓰다듬었다. 그 나른한 손길에 맞추어 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냥. 수학이 너무 어려워서.’

‘그래?’

‘내신은 괜찮은데 모의고사 문제집만 풀면 막막해.’

‘…….’

‘무작정 외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쪽 머리 타고난 애들이랑 격차도 너무 심하고.’

승규는 얌전히 내 말을 들어주었고, 나는 어쩌면 그렇게 전적으로 나를 수용하는 듯한 승규의 태도에 취해 더욱 말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에게 말하기엔 어딘가 쪽팔리고,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말하기엔 나약해 보일까 봐 차마 마음 밖으로 꺼내놓지 못하던 얘기들.

‘성적 떨어질까 봐 너무 걱정돼.’

그렇게 나는 그 당시의 나를 전적으로 지배했던 한 가지의 두려움을 승규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승규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내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리는 손길만이 있었다.

‘왜에?’

평소였으면 나를 이리저리 잘 달래줬을 텐데, 조금 고민하는 눈치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승규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역시 남에게 말하기엔 조금 유난 떠는 소리였나. 나는 조금 후회하며 승규의 눈치를 살폈다.

‘…….’

‘…….’

손을 그대로 내려 내 볼을 살짝 쓰다듬은 승규가 나와 눈을 맞췄다.

‘그냥.’

‘응?’

‘나는 성적 떨어져도 네가 여전히 좋을 텐데.’

‘…….’

‘그게 지금의 너에겐 많이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나의 볼을 감싼 승규의 손을 살짝 겹쳐 잡은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이 떨어진다니, 가정만으로도 끔찍했다. 승규와 있으면 모든 게 더할 나위 없는 것 같다가도, 가끔 어딘가 삐걱거리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렇게 너무나 당연하게 공유되어야 할 전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기도 했다.

‘그럼, 중요하지.’

‘…….’

‘성적 떨어지면 엄마한테도 혼나고, 선생님들도 실망하실 거고.’

‘응.’

승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싹 말라오는 입안을 살짝 적신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또 나중에 좋은 대학교 못 가면….’

훌륭한 어른이 못 되고? 어른들에게 세뇌당한 대로, 그렇게 내가 의문을 던지지 않고 그대로 체화해버린 내용을 읊으려던 나는 잠시 멈췄다. 승규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승규의 눈동자는 무척 맑았고 언제나처럼 원형적이었다. 그런 승규의 앞에서 그 말을 하려니 어딘가 좀 위화감이 들었다. 

뭐랄까, 내가 좀 속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말을 멈추고 어정쩡하게 웃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규가 내 턱을 살며시 당겨 입술에 쪽 뽀뽀했다.

‘나는 그런 거 상관없어.’

‘진짜?’

‘응. 난 그냥 희수 네가 좋아.’

승규는 그 간단한 말로 열여덟 나의 세계를 구성하던 근간을 사뿐히 부수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승규를 바라보았다. 좋아야 할지 싫어야 할지, 단순한 호오의 판단조차 나는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승규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었지만, 그만큼 당시의 나에게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버거운 얘기였다.

‘더 이리 와 봐.’

‘왜에.’

‘안고 싶어.’

이미 우리는 바짝 붙어 있었는데도, 승규는 나를 바짝 당겨 끌어안았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승규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교복 셔츠 아래로 손을 슬쩍 밀어 넣은 승규가 내 허리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승규와의 스킨십은 여전히 나를 긴장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이 닿으면 이제는 조금은 편안한 것처럼 마음이 느슨해지기도 했다.

너는 살이 너무 부드럽고 향긋해. 신기해. 목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승규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주름진 입술의 감촉이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희수야.’

얼굴을 슬며시 들어 올린 승규가 나를 응시했다. 때마침 스쳐 가듯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내는 얼굴이 찬란했다. 감탄스러웠다. 나는 손을 뻗어 승규의 잘생긴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그런 걱정 안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나는 숨을 살짝 들이켰다. 내 눈앞의 승규는 여전히 눈부시도록 빛을 뿜었다.

‘있잖아.’

‘응.’

‘나는 가끔 너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너를 멀리 데려갈까 봐 두려워.’

승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승규의 눈은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승규는 조금 초조한 기색이기도 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그런 지금의 승규를 사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승규가 내비치는 절박한 마음만은 나를 데일 듯 다가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계속 네 곁에 있고 싶어서.’

‘…….’

‘자꾸 욕심내게 돼.’

승규는 애써 억눌러오던 것을 마치 토해내듯 말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승규의 모습은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바스러져 사라질 것처럼 쓸쓸해 보였다. 안에서 무언가가 덜커덩 내려앉았다. 나는 승규를 꼭 붙잡았다.

‘승규야.’

‘응.’

‘네가 나를 원하는 게 왜 욕심이야.’

‘…….’

‘나는 이미 네 건데.’

당시의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승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고개를 숙여 승규의 달큰한 입술에 입 맞췄다. 쪽, 쪽 소리를 내고 달라붙으며 일부러 조금은 장난치는 것처럼 들었다. 결국은 승규의 입가에서 유리같이 투명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냥,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가 비치는 스산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완전히 달랠 수 없는 나는 순간 매우 무능력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면 승규는 내게 불쑥 어른 같아 보였다. 나로서는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근심을 끌어안고 있는 승규의 모습을 보면 나는 좀처럼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득했다.

‘승규야, 알지? 난 이런 거 다 처음이야.’

‘…….’

‘난 진짜 모든 게 다 처음이야, 너랑.’

결국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들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처음이니까, 너와 나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는 그러니 너도 제발 안도해달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방어.

‘…….’

내가 먼저 시작한 레이스인데도, 요새는 가끔 승규의 감정을 쫓아가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의 승규는 내게 불가해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서로를 애틋하게 좋아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에 드리우기 시작하는 불균형이 있었다.

‘나도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하지만 네가 나에게 보여주는 순수한 감정의 총천연한 색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고 투명해서. 너에게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네가 자꾸만 더 나를, 조금만 더 나를 좋아해 주고 아껴줬으면 했다.

그렇게 나는 영원히 이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사실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나를 가지고 싶어서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는 지금의 남자와, 내 곁에 머무르고 싶어 욕심내게 된다고 속삭이던 과거의 남자를 생각했다. 두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같은 듯 달랐다. 나를 향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아부어 주지만, 그 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사실 지운이 형과 나는 서로 밑지는 게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충족한다. 같은 성적 지향성, 비슷한 교육 수준, 합치하는 가치관, 풍요로운 가정환경, 평균 이상의 외모. 형과 나를 하나로 맺는 조건들은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배경이 너무나 완벽하게 들어맞는 상대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만으로 서로를 놓치기 싫어하는 건 아닐까.

나는 형에게 대체 나에게 왜 잘해주냐고 물었다. 형의 대답과는 별개로, 내가 짐작하는 답안은 정해져 있었다. 형은 나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형이 나라는 사람보다는, 나라는 사람에서 부연하는 조건을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 역시 지운이 형이 가진 여러 가지 매력적인 조건에 끌렸던 게 사실이고, 어쩌면 나라는 사람과 나라는 사람이 가진 조건을 완벽하게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어딘가가 석연치 않았다. 지운이 형은 언제나 나에게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만을 보였다. 화를 내야 정상이고, 추궁해야 당연한 상황조차 지운이 형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형은 늘 그런 식으로 우리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이별의 위기를 발화시키는 대신 혼자서 참아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진실을 애써 캐묻지 않는 건, 사실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면 너머의 진실이 어떻든 상관없기 때문은 아닐까.

관계의 지속을 위해 진실은 덮어 둬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단순한 조건적 결합을 사랑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반면 승규와 나는 그런 식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렸다. 사실은 그때 승규와 나 사이에 오갔던 감정이 오히려 더 원형적인 사랑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사랑 가짜 사랑을 따지고 있는 게 우스운 얘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다고 열망 가득한 눈으로 말하던 승규가 그리웠다. 감히 타인의 애정을 재단할 수 없다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지운이 형 방식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승규를 원하냐는 질문에 확답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승규를 만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여전히 옷을 벗어 내리면 그날 내 피부를 깨물고 빨아 당겼던 승규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거칠고 제멋대로인 와중에도, 승규가 나를 만지던 방식 중에 일부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얼룩덜룩한 몸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감상에 젖어 들었다. 승규가 나를 만졌던 모든 순간의 감촉이 기억으로 되살아나 피부 끝에서 피어올랐다.

울컥 마음속이 젖어 들었다.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없던 일로 할 수 없었다.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승규는 나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극명하게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에게로 매달리기로 작정한 나는 자존심이라고는 시궁창에 내던져버린 사람 같았다. 정말 내가 끔찍하게 싫었다면 애초에 나랑 섹스하진 않았겠지. 애증이라도 괜찮아.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으니, 조금이라도 더 이어 나가고 싶어.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승규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오늘따라 박사님과의 연구 미팅이 길어져서 초조해졌다. 승규가 퇴근하는 시간에 제대로 맞출 수 있을지 불안했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아우디에 시동을 건 나는 승규의 정비소를 향해 난폭하게 운전했다.

운이 좋았다. 정비소에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퇴근을 하는 승규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라도 그대로 승규를 놓칠까 나는 클랙슨을 빠아앙 울렸다. 눈을 가늘게 뜬 승규가 내가 타고 있는 붉은색 아우디를 돌아보았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던 승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차를 다급하게 주차하고 내린 나는 승규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를 향해 절벅절벅 걸어오는 승규의 발걸음이 더 빨랐다. 성큼 내게로 다가온 승규는 내 차 옆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뭐냐.”

“…….”

“넌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냐?”

승규의 냉랭한 목소리가 나를 옭아맸다.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그동안 승규는 한층 더 내게 낯설어져 있었다. 나를 그렇게 뜨거운 손길로 만지던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싫다는데 자존심도 없어?”

“그런 게 아니라, 승규야 나는.”

질문에는 빈정거리는 어투가 서렸다. 승규의 언성이 높아졌다. 승규에게 다가간 나는 승규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뭐가 돼도 좋았다. 나는 변명을 늘어놓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승규가 인상을 쓰고 자신의 팔목을 잡은 나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팽팽하게 대치하는 우리의 모양새는 분명 수상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승규가 한숨을 내쉰 뒤 내 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

“윤희수.”

차의 전면 유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승규가 끓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차마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그대로 안으로 삼켰다.

“나는 진짜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거든.”

“…….”

“한 번 얘기나 해 봐.”

“…….”

“너 나 만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승규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손을 모아 쥐고 손가락을 느릿하게 주무르고 있었다. 무작정 승규를 향해 달려왔지만, 승규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솔직히 불분명했다. 그냥 이대로 승규를 놓칠 수는 없다는 막연하고 유아적인 갈망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그때 너한테 매달렸다고 지금도 그럴 것 같아?”

나의 침묵은 어떤 식으로든 승규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험악하게 눈을 치켜뜬 승규가 나를 거칠게 돌아보았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냥.”

“…….”

“내가,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나는 너한테 하고 싶어서. 사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어떻게든 너를 붙잡을 핑계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그렇게 네가 나를 한 번만 더 돌아봐 주었으면 좋겠어서.

“그러면 달라지는 게 있어?”

승규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 태도가 점차 격앙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채서 흔들기 시작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승규의 기세가 거세졌다.

“솔직히 말해볼까? 너 그냥 너 마음 편하자고 그러는 거 아냐.”

“승규야.”

“넌 끝까지 이기적이야.”

“그런 게 아니라.”

“사람 마음 꼴리는 대로 쥐락펴락하고.”

승규가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랫동안 눌러 놓았던 감정의 앙금이 누수하고 있었다. 승규가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자 나 역시 가슴이 괴로움으로 가득 뭉쳤다. 나를 매섭게 대하는 승규가 낯설었다. 비록 모두가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결과로 생겨난 변화를 감당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처럼 내가 너한테 휘둘려 주길 바라?”

핏발이 선 승규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껏 승규는 단 한 번도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승규가 비치는 공격적인 태도, 감출 수 없는 분노에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 왔다.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결코 이런 걸 원하고 승규에게 온 건 아니었다.

“…….”

“…….”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대로 한참을 숨죽인 호흡만 내뱉었다. 눈물이 축축하게 차오르려고 했다. 나는 온통 비참하고 처연해진 기분으로 승규를 응시했다.

“승규야. 그때 너 나 좋아하긴 했어?”

이건 솔직히 반칙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그때 승규가 나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승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비겁했다. 하지만 이건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카드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난 그때 너 진짜 많이 좋아했단 말이야.”

“하.”

“그렇게 끝나버린 거 아쉽지도 않아?”

“…….”

“승규야, 난 너 생각 진짜 많이 했어. 보고 싶었어.”

나는 승규에게 매달렸다. 그리움에 적신 목소리로 옛날의 우리에 대해 자극했다. 어쩌면 폭력적일 정도로, 내가 그동안 품어왔던 마음을 와르르 쏟아냈다. 그런 나를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는 승규의 눈빛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승규가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훅 하고 더운 바람이 몰려들었다. 승규의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졌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승규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래서.”

“…….”

“윤희수 네가 나랑 하고 싶은 게 뭔데?”

승규의 질문은 사실 본질에 닿아 있었다. 너와 나, 우리가 하고 싶은 일. 문제는 내가 승규가 말하는 본질에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만성적인 공허감에 승규가 내게 퍼부어주는 사랑이 그리우면서도, 나는 너무나 완벽하게 직조되어 있는 지운이 형의 관계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승규를 원하면서도, 승규를 완전히 내 인생에 들이고 싶은 의지도 용기도 없었다.

“그냥”

“…….”

승규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너 화 풀릴 때까지 나한테 함부로 굴면 되잖아.”

“…….”

“너 그동안 쌓인 거 있었으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려.”

나는 불확실한 마음을 계속해서 안쪽으로 숨기고 대신 그럴듯하게 꾸며낸 표면적인 제안을 내걸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느릿하게 깜빡였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기 시작하면, 정말로 나 자신이 가련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씨발 진짜.”

탕. 승규가 조수석 아랫부분을 세게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넌 사람 갖고 노는 게 재미있어?”

“…….”

“왜 가만히 잘살고 있는 사람한테 와서 흐트러뜨려?”

승규는 망가져 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예전에 망가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도 사실, 그런 승규를 바라보는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갈증이 일었다. 어리석은 미련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냥 제발 승규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채워주었으면 하고.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겠지, 너는.”

“…….”

“그래. 너 원하는 대로 해줄게.”

***

차라리 함부로 대해지고 망가뜨려져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나는 은연중에 승규가 나를 정말로 그렇게까지 모질게 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의 승규는 내 팔목을 질질 잡아끌었다. 아우디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승규가 잡은 택시에 올라탔다. 그대로 그의 원룸으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손길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는 거칠게 원룸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다리를 휘청거리는 나를 승규가 메마른 시선으로 지켜봤다. 승규가 내 허리를 잡아챘다. 그대로 딱딱한 침대에 내 몸을 내팽개쳤다. 나는 마치 나를 윽박지르는 듯한 승규의 일방적인 태도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지금 승규는, 나에게 모욕을 주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아읏, 아…….”

속옷과 바지가 우악스러운 손길에 한꺼번에 벗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랫도리만 훤히 드러난 나는 승규가 시키는 대로 상반신을 침대에 눕히고 허공으로 들어 올린 다리를 넓게 벌렸다. 아직 발기하지 않아 흐물흐물한 성기와 동그란 고환, 그리고 그 아래 항문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세에 민망함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애인도 있다는 새끼가.”

“하, 흐으…….”

“딴 남자 앞에서 다리 벌리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허리 아래가 지나치리만큼 무방비해진 나와 대조적으로 승규는 집에 들어올 때와 다름없이 온전한 차림새였다. 승규는 내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매도했지만, 수치심이 자극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승규는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승규는 여전히 서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조금의 동요도 읽을 수 없는 시선이 내 벌어진 다리 사이를 향했다. 발긋한 항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의식되어 다리를 오므릴라치면, 득달같이 알아챈 손길이 가랑이를 다물지 못하게 했다.

“윤희수 너 걸레 다 됐다?”

한참을 내 다리 사이를 쏘아보던 승규는 나를 조롱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가운 공기를 접하는 항문의 주름이 움찔거렸다. 나는 승규에게 치부를 낱낱이 관찰당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나를 전시시킬 셈인가 싶을 때, 승규가 내 가랑이로 침을 뱉었다.

“아읏.”

끈덕진 액체가 조밀한 주름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몰아치는 모멸감으로 귀 끝이 달아올랐다. 승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내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타액을 주름 위에 미끄러트리며 승규의 검지가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구멍이 손가락을 꽉 조여 물었다. 승규는 개의치 않고 더욱 깊숙이 나를 찔렀다. 뻑뻑한 감이 있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집요한 움직임에 내벽이 이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섹스에 익숙해져 버린 기관은 승규가 가하는 자극에 충실히 반응했다.

안이 점점 젖어 들었다. 승규가 나를 쑥쑥 쑤실 때마다 벌름거리는 입구가 손가락에 착착 달라붙었다. 자세 탓에 승규의 손가락을 조여 무는 붉은색 내벽이 나의 눈에도, 승규의 눈에도 훤히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내 몸은 성적으로 착실하게 반응했다. 이제는 승규가 나를 조롱한다고 해도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아앗, 흐으윽.”

손가락 세 개가 안으로 깊숙이 밀려들어 왔다.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은 목적지를 명확하게 겨냥하여 긁어내렸고, 전립선이 건드려진 나는 속수무책으로 신음했다.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다리 사이의 성기가 슬슬 까딱거렸다. 승규는 짜증스럽다는 듯 손가락을 한꺼번에 거칠게 뽑아냈다.

“어차피 넌 내가 아니어도 될 텐데.”

“…….”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거칠어진 목소리로 승규가 물었다. 아니,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다는 읊조림에 가까웠다.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런 게 아닌데, 그런 건 정말 아닌데……. 나도 너 아니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네가 아니고서야 결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건데.

억울했고, 조금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얘기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승규가 그 말을 쉽게 믿어줄 리도 없었고, 나는 나의 말에 합당한 책임을 질 수 없었다.

찍 하고 승규가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는 바지를 완전히 벗지 않은 채, 반쯤 발기한 성기를 바깥으로 꺼냈다. 여전히 허공에 다리를 찢어 벌린 채, 나는 내 가랑이 사이를 차지하는 승규를 멍하니 응시했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승규가 직접 자신의 성기를 주물렀다. 승규의 커다란 손안에서 두툼한 성기가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엉망으로 드러난 나를 내리깔아 보며 스스로를 흥분시키는 승규의 모습이 무척 음란하게 보였다. 몸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나는 승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승규가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비틀었다. 그리고 곧장 드러난 항문으로 성기를 가져다 댔다. 둥그런 귀두가 주름에 문질러졌다. 입구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성기에 긴장한 주름이 반사적으로 벌름거렸다. 그를 내려다보던 승규가 피식 웃었다. 흡사 성기를 갈구하는 것만 같은 나의 움직임이 수치스러웠다.

“흐윽…….”

쿠퍼액이 슬슬 배어 나오는 귀두를 항문 위에 끈적하게 문지르던 승규가 예고 없이 삽입했다. 이미 손가락으로 충분히 이완된 구멍은 상당한 크기의 성기를 별다른 무리 없이 집어삼켰다. 나의 내벽은 승규의 성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대로 활짝 벌어졌다.

“하, 으으… 승규야.”

이윽고 승규가 끝까지 들어왔을 땐 아릿한 고통과 동시에 익숙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나는 북받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승규는 그런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불편한 상반신을 애써 움직여 승규에게 팔을 뻗으려고 했지만, 그 역시 간결한 동작으로 제지당했다.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나의 팔이 망연해졌다.

승규는 대신 양옆으로 벌어지느라 팽팽하게 당겨진 나의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표면이 거친 손이 허벅지를 붙잡고 꾹 눌러오자 압박감이 상당했다. 비단 물리적인 구속보다도, 심적으로 역시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 더 들어.”

승규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위에서 아래로 쾅쾅 성기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성기만 푹푹 꽂는 승규의 움직임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마찰열로 구멍이 금세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예전처럼 승규와 섹스를 하고 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낯설었다.

그제야 나는 승규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승규는 나를 철저하게 그의 배출구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섹스함으로써, 나에게서 윤희수라는 존재를 지워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승규를 부추기고 어깃장을 놓은 것은 결국 나였으면서, 나는 막상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왜 울고 그래.”

“흑, 으윽.”

“네가 우니까 꼭 내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

나는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내 구멍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성기를 박아 넣는 승규가 나를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도 나를 달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명백하게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흐어, 으어엉.”

승규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눈물 줄기가 거세졌다. 나는 얼굴을 흠뻑 적시는 눈물을 손등으로 겨우겨우 닦아냈다. 사랑받고 아껴지는 섹스에 지나치게 익숙한 몸이었다. 겨우 이 정도도 버텨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치미는 서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으흑, 으윽.”

“네가 원한 게 이런 거 아니었어?”

“윽, 흐윽.”

“함부로 해달라며. 화 풀릴 때까지 하라며.”

말을 마친 승규가 쿵,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성기의 끝이 닿았던 부분이 내가 가장 느끼는 지점이라, 나는 눈물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허리를 휘고 몸을 파드득 떨었다. 승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런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울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매섭기만 하던 승규의 눈초리가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나는 조금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흐윽, 승규야.”

“…….”

“나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

내 말에 승규는 여전히 내 허벅지를 꽉 짓누르고 있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하. 승규가 혀끝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승규는 허벅지를 순순히 놓아줬다. 대신 승규는 벌어진 내 다리를 한데 모으고 발목을 한꺼번에 붙잡았다. 그대로 맞닿은 발목을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리자 또다시 성기를 꽉 물고 있는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 흐읏, 아아앗.”

승규는 연이어서 내 아래를 치받았다. 불뚝한 성기는 쉼 없이 내 다리 사이를 드나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내 구멍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은 승규의 태도는 이윽고 그가 내 안에 파정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눈을 내리감은 나는 승규가 움직이는 대로 종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다리를 억지로 벌리고 있던 조금 전보다는 사실 승규를 받아내는 것이 훨씬 수월하기도 했다. 그냥, 내가 불쏘시개로 쑤셔 발생한 일이니까 그대로 버텨내야지 싶었다.

솔직히 더 편하게 생각하고 싶기도 했다. 이렇게나마 승규도 그동안 쌓여 있는 마음 털어내면 좋은 거잖아, 하고. 하지만 나를 철저히 도구처럼 취급하려고 들면서도, 사실은 그렇게 나를 헤집을 때 깊이 상처 입은 듯한 승규의 눈동자를 보면 차마 그런 생각까진 할 수가 없었다.

승규가 사정한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애써 마주하지 않고 쌕쌕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막상 모두 끝나고 나자 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런 섹스를 한 거지 싶었다. 승규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고, 나 역시 고통스러웠다.

“나가.”

승규가 침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바지와 속옷을 집어 들어 내게 던졌다. 나를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 냉랭한 태도였다. 방금 이곳에서 격렬하게 붙어먹었던 게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처럼, 낡은 침대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승규의 정액을 막기 위해 엉덩이를 꽉 오므렸다.

“…….”

우리가 함께했던 예전의 날들이 눈부시리만큼 반짝거려서일까, 그와 대조되는 지금의 상황이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다. 관계라는 게 이 정도까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지금에 비하면 생일날 승규와 했던 섹스는 적어도 최소한의 교감이 있었던 것 같다.

“승규야.”

“…….”

“나 다시 만나 줄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승규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어차피 어울리지 않는 사이라면, 우리에겐 차라리 이런 모습이 알맞은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같이할 수 있는 일종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뜨거웠던 여름은 기어코 끝이 나고야 말았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라지만, 올여름의 마지막은 유난히 매섭고 냉정했다. 미적지근한 늦더위는 조금도 찾을 수 없이, 후덥지근한 기운이 갑작스레 물러난 공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쌀쌀했다. 아직은 9월인데도 교복 마이를 꼭 챙겨 입지 않으면 옷깃으로 시린 기운이 스며들었다.

승규는 변함없이 나의 비밀스러운 연인이었다. 길쭉하게 키가 크고, 얼굴이 서늘하게 잘생기고, 내게는 부드럽게 눈을 휘어주지만 나 이외의 모든 일엔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냉랭하기만 한 특별한 남자. 나는 여전히 승규에게 푹 빠져 있었고, 늘 승규로 인해 들떠 오른 기분으로 생활했다.

여전히 점심시간이 되면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만나긴 했지만,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는 승규와 함께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줄어들었다. 보충 수업, 야간 자율 학습, 학원 스케줄이 내 하루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방학이라는 넓은 터에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가 갑자기 바쁘게 짜인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승규를 만나기 이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했던 모든 것들이 승규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조금은 갑갑하게도 느껴졌다. 야자도 하지 않고 학원도 다니지 않는 승규를 보면 승규는 나랑 정말 다르구나 생각되었던 것 같다. 그가 누리는 자유에 대한 약간의 부러움도 사실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이 수능을 치면 내가 고3이 되는 셈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걸고 있는 기대를 잘 알고 있고, 반드시 그에 걸맞은 성취를 이뤄낼 것이었다. 답답하고 힘겹게 느껴질지라도, 지금의 일상에 충실해야 나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나는 잘할 수 있을 거고, 반드시 잘해야 한다.

학원 수업을 들으면서도 약간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그럭저럭한다는 애들 대부분이 다니는 학원이었다. 모두와 같은 방식으로 모두와 같은 만큼만 노력하면, 결국 딱 남들만큼의 성적을 받는 데 그치지 않는 건 아닌지 초조했다. 수학 선생님의 필기를 사각사각 공책에 베끼며, 엄마에게 수학은 과외라도 따로 하나 붙여달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무음 상태로 돌려놓고 책상에 얹어 놓은 핸드폰 액정이 요란하게 반짝였다. 흘긋 내려다보자 승규의 이름이 보였다. 얼핏 보고 처음에는 문자를 보낸 줄로 알았다. 당장 확인하고 싶지만 쉬는 시간이 될 때까지는 참아야지, 하고 손끝을 꾹꾹 눌렀다. 그런데 액정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승규의 이름을 반짝였다.

잠시 잦아든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 12통이 찍혀 있었다. 어딘가 조금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승규는 내가 학원에 있는 시간에는 일부러라도 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소한 연락도 자제하곤 했다. 평소의 승규답지 않은 태도가 나의 불안을 찌르듯 자극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어떡하지.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더듬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나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핸드폰을 들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인적이 드문 학원 복도에 기대섰다. 심호흡한 뒤 승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한 번을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승규는 나의 전화를 받았다.

[희수야!]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승규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승규의 목소리가 비어져 나오는 핸드폰을 꽉 부여잡았다.

‘승규야, 대체 무슨 일이야.’

[희수야, 할머니가 수술실에 들어가셔서.]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발작이 와서 쓰러지셨는데…….]

나는 막상 들으면서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지금, 하, 혼자 밖에서 기다리는데…….]

겨우 말을 토해내는 승규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승규야, 숨 천천히 쉬어 봐.’

[후으… 후으….]

‘병원 주소 불러 봐. 지금 택시 타고 갈게.’

나는 여전히 가쁘게 오르내리는 승규가 전하는 병원 주소를 그대로 외웠다. 아직 수업이 진행 중인 강의실에 덜컥 들어가 내 짐을 챙겼다. 나에게로 후두둑 쏟아지듯 쏠리는 시선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학원을 갑자기 빼먹으면 분명히 나중에 골치가 아파지겠지만, 지금은 애타게 나를 찾았던 승규의 옆에 있어 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병원에 들어갔다. 승규는 수술실 앞의 텅 빈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등을 굽히고 얼굴을 완전히 감싸 쥔 승규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내 인기척을 알아챈 승규가 고개를 들었다. 승규의 눈동자가 전에 본 적 없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희수야.’

승규가 그렇게 나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순간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그대로 승규에게 다가간 나는 승규를 꼭 껴안았다.

‘흐으으…….’

승규가 내 품으로 와락 쏟아졌다. 나는 승규의 어깨에다가 턱 끝을 대고 커다란 승규의 몸을 받쳐 들었다. 승규는 지금까지 내게 한없이 커 보이고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가 승규를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승규야, 나 여깄어.’

‘아. 희수야, 고마워.’

‘승규야.’

‘고마워. 진짜 고마워.’

승규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며 고맙다는 말만을 읊조렸다. 그런 승규가 애처롭게 느껴져서 나는 가만히 손을 승규의 등에 대고 문질러줬다. 승규의 등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거친 호흡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복도에서 부둥켜안고 있던 우리는 문이 굳건하게 닫힌 수술실 옆에 자리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는 승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솔직히 지금의 모든 상황이 내게는 제대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다만 승규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명확했다.

‘응급실 와서 CT 급하게 찍었는데, 할머니 머리에 피가 너무 많이 차서.’

‘응.’

‘그대로 뇌가 밀리면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승규는 아까에 비교해서는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규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사실 대부분을 몰랐지만, 승규가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승규의 태도로 보아 승규가 할머니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나 보다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

‘…….’

이럴 때는 보통 어른이 동반하는 것이 정상인데, 교복을 채 갈아입지 못한 승규 혼자 수술실 앞에서 종종거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승규에게 어른들은 어디 있냐고 물으려다가, 지난번에 부모님에 관해 묻는 엄마의 질문에 두 분 다 안 계신다고 승규가 답했던 게 떠올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승규가 입을 서서히 열었다.

‘엄마랑은 연락 끊긴 지 오래고.’

‘…….’

‘아버지는 재혼하셨는데, 지방에서 일하셔서…….’

가만히 말을 이어 나가던 승규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승규를 내 쪽으로 조금 끌어당겨 등을 고르게 쓰다듬었다. 어떠한 섣부른 위로도 지금의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가 될 것 같아서 두려워.’

‘승규야.’

‘이제는 정말로 세상에 나 혼자일 것 같아서.’

승규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무덤덤하고 매서워 보이는 표피가 한 꺼풀 벗겨질 때의 승규는 때로 섬찟하리만큼 외롭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지금 역시 그랬다.

‘아냐, 할머니 괜찮으실 거야.’

‘…….’

나의 위로에 승규가 입술만 끌어올려 작게 웃었다. 지금의 한고비를 넘기더라도, 나이 들어 쇠약한 할머니가 영원히 승규의 옆에 계실 순 없는 거겠지. 결코,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지만, 승규도 나도 그 순간 그 사실을 막연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

‘…….’

승규가 나를 응시했다. 어둡게 침잠한 눈동자는 ‘너도 결국은 가버릴 거잖아?’ 그렇게 말없이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몰아붙이거나 추궁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냥 그것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맥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은 상처가 서린 승규의 그 시선이 내게 닿아 올 때마다 전신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따끔거리고 아파서, 나는 속이 너무 상해서…….

‘내가 옆에 있어 줄게.’

그래서 나는 승규에게 말했다. 어쩌면 나는 처음에 승규의 남들과 달라 보이는 승규의 그늘진 면모가 근사하게 느껴져 그에게 더욱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승규가 품고 있는 어둠의 실상은 처참했다. 애정에 목말라 있는, 사랑에 충분히 젖지 못한,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승규가 한없이 가련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승규를 더 사랑해 주고 싶었다.

‘흐윽…….’

그 말을 들은 승규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처음 보았던 승규의 눈물이었다. 나는 자리를 옮겨 승규에게 바짝 다가가 그런 승규를 온전히 감싸 안았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을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닦아 주었다.

‘승규야, 울지 마.’

‘흑, 으윽.’

‘내가 네 옆에 있으면, 그러면 혼자가 아니잖아.’

승규를 달래려는 마음으로 한 말이 도리어 승규를 자극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승규는 내 교복 셔츠가 흠뻑 젖어 들도록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솟구치는 보호 본능에 휩싸여 그런 승규를 계속해서 품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나서야 승규는 울음을 그쳤다. 다행히도 수술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것 봐.’

‘아, 희수야….’

‘다 잘 될 거야, 승규야.’

그렇게 계속해서 나는 승규를 쓰다듬어 줬다. 쓰다듬고, 쓰다듬고, 그렇게 모든 게 흐릿해질 때까지.

나는 진심의 영속성에 대해서 고민한다. 분명 나는 그때의 승규에게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승규의 얼굴을 바라보자, 내 안에서는 찰나의 진심이 북받쳐 올랐다. 그 순간 나는 승규를 사랑했다.

그러나 충동적인 감정에서 비롯한 약속은 얼마나 얄팍할 수밖에 없었는지. 서로가 인지하는 진심의 무게의 불균형은 결국 필연적인 비극을 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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