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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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근육통으로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소박한 원룸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간밤의 기억이 더딘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침대를 등진 승규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얼얼한 기분으로 얇은 티셔츠 한 장을 입고 있는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승규는 느릿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쌉싸름한 연기 사이로 승규의 얼굴이 드문드문 비쳤다. 흐릿한 시선이 맞물렸다.

“…….”

어깨에 걸쳐져 있던 이불이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문득 내려다본 가슴팍에 순흔이 얼룩덜룩 찍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부끄러워져 나는 다시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는 동안 승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크게 씰룩인 그의 입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한 번 깊숙이 빨아 당긴 승규는 조금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실수였어.”

“…….”

그리고 다짜고짜 선언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승규는 무척이나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승규를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나라고 뭐, 처음부터 계획하고 승규와 섹스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밤 우리가 나누었던 모든 일을 단번에 ‘실수’라는 쉬운 단어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승규의 무표정은 냉엄했다. 이쯤 되니 솔직히 나는 마음이 좀 꼬여 들었다. 그 순간 정말 서로를 원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섹스했다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을까. 그냥 승규는 적당히 잘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잤다가, 막상 해보고 나니 썩 만족스럽지 않아서 저렇게 발뺌을 하는 건가 싶었다.

“싫었어?”

“뭐?”

“나랑 하는 거…… 이제 싫냐구.”

옛날엔 그렇지 않았잖아. 소중하게 대해주고 예쁘다고 해줬잖아. 나는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안으로 삼켰고, 승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여전히 이불을 꽉 손에 움켜쥔 나는 무언가를 갈구하듯 승규를 빤히 바라봤다.

하. 승규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더듬거리며 담뱃갑을 향하던 손이 막상 그곳에 다다라서는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고 꽉 움켜쥐었다. 승규가 이를 악물었다. 그대로 매섭게 고개를 돌리더니, 승규가 나를 노려보았다.

“너.”

“……응.”

“그때 옆에 있던 사람.”

“…….”

갑작스럽게 내뱉어진 승규의 말은 다소 두서없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승규의 시선이 그대로 나를 포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으로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핥아 내렸다.

“애인이지.”

승규의 추궁은 차라리 황폐했다.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됐다. 씨발. 내가 너랑 뭘.”

승규가 허탈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승규를 무작정 쫓아오면서, 지운이 형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지금 내가 그다지 떳떳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역시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우리 둘을 떠올릴 땐 정말로 우리 둘만 있는 느낌이어서. 

“그치만 너하고…….”

“…….”

“너하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

“…….”

“내 입장에서는.”

그리고 조금은 억울했다. 우리가 결국엔 몸을 섞은 그 순간의 직전까지, 승규는 나를 철두철미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애초에 나를 받아줄 생각도 아니었으면서, 나의 애인에 관해서 묻는 게 조금 말이 안 된다고도 느껴졌다.

하지만 승규는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어물쩍 말끝을 얼버무리자 승규의 얼굴이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언젠가 나를 볼 때 스쳐 갔던 그 감정이 승규를 격렬하게 물들였다. 승규는 내게 경멸의 기색을 비치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질린다는 듯한 그 눈빛.

“쓰레기 같은 새끼.”

“…….”

“넌 존나, 변한 게 아무것도 없어.”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게 나를 매도한 승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규를 붙잡아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승규가 뿜어내는 형형한 기운에 감히 그에게 다가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나는 초조해진 마음으로 입술을 물었다.

“다시 돌아오면 너 여기 없었으면 좋겠다.”

어설픈 동작으로 내가 승규의 침대를 빠져나가려는 그 순간, 승규는 나를 남겨두고 원룸을 나섰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은 한 번 나를 되돌아보지도 않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는 사이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생명줄처럼 꼭 쥐고 있던 이불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내 몸 위로 어제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발가벗은 몸을 훑고 내려갔다. 막상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은 것으로도 모자라 탈진할 때까지 섹스했다. 한계치까지 혹사당한 몸은 위험신호를 격렬하게 보냈다.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 벌겋게 달아오른 몸에서는 열이 펄펄 들끓고 있었다. 전신을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나는 승규가 이대로 나를 남기고 가버렸다는 감상적인 서러움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에 그 생각에 매몰되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비틀비틀하게나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건 순전히 생존본능에 의해서였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대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애써 다잡았다. 온전히 정신력 하나에 의지해 차를 운전하고 서울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마침내 도어락을 열고 현관에 다다른 순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긴장이 조금 풀렸던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열에 들끓는 피부가 델 듯 뜨거웠는데 몸을 훑어 내리는 오한은 소름 끼치게 서늘했다. 웅웅 어지럽게 울리는 머릿속에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물먹은 듯 바닥에 널브러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일요일이라서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어 대학병원의 응급실을 찾았다. 열이 39도라고 했다. 해열제와 수액을 맞고 가라는 의사에 말에 수긍하고 짧게 입원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나는 그렇게 침대에 누웠다. 열이 조금 내리고 정신이 맑아지자 한참을 꺼두고 있던 핸드폰 생각이 났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묵직한 죄책감이 우지끈 마음을 울렸다. 연락을 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운이 형이 허겁지겁 병실로 찾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감기몸살.”

켈룩,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때마침 기침이 터졌다. 형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입을 떡 벌린 채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눈가를 슥 비빈 나는 조금 멋쩍은 기분에 얼굴을 가렸다.

“그냥. 비를 좀 많이 맞아서…….”

지운이 형이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내 머리에 손을 짚고 열을 가늠했다. 이런저런 증상에 관해서 묻는 그의 직업적인 질문에 순순히 답을 해줬다. 그러다 질문이 뚝 떨어졌을 때는 그도 나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내 앞머리를 살살 쓸어 올리는 지운이 형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형의 얼굴이 구겨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정말.”

지운이 형이 낮게 읊조렸다. 이해한다. 그가 나에게 뭐라고 화내고 따질 새도 없이 이렇게 먼저 아파 버리는 건 반칙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형이 다시 한번 내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내게서 손을 뗐다.

“어제는 대체 왜 연락이 안 된 거야.”

“…….”

“핸드폰은 왜 꺼놓고.”

“…….”

“너 그렇게 잠수 타서 내가 얼마나.”

그대로 언성이 높아지려던 찰나 지운이 형은 입을 싹 다물었다. 대신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나를 찬찬히 응시했다.

침대에 얌전히 누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어제 그에게 정말로 경우 없는 행동을 했다. 지운이 형이 어제 느꼈던 당황과 걱정, 화를 생각하면 나도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운이 형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미안.”

“…….”

“형 그냥…….”

“…….”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라.”

지운이 형이 허탈하다는 듯 얕게 코웃음 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눈앞에서 최대한 불쌍하고 연약해 보이는 일밖에는 없었다. 쌔근쌔근 아직 고르지 못한 호흡을 몰아쉬는 소리가 형과 나 사이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꿀꺽. 침을 크게 삼키는 지운이 형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울렁거렸다.

손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댄 지운이 형이 내게 가볍게 꿀밤을 먹이며 나를 흘겨봤다. 지운이 형은 역시 감이 좋았다. 여기서 목소리를 더 높이고 나에게 캐물어 봤자, 내가 어제의 일에 대해서 함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상황이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면, 결국에 남아있는 건 헤어짐뿐이겠지. 그의 반응으로 보아 적어도 우리 두 사람 모두 아직 그 선택지를 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튼. 얼굴 반반한 거 하나 믿고 개짓거리 하는 거 아주 윤희수 특기지.”

“…….”

“너 그러다 후회할 날 온다.”

“…….”

“나 아니고서야 너 이러는 거 누가 받아줘.”

지운이 형이 해탈한 표정으로 아직 풀리지 않은 상한 감정을 주절주절 말로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부스스 웃었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지. 조금은 날카롭게 곤두선, 그러나 여전히 애정에 기반한 지운이 형의 타박이 나를 먹였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상황에 마음이 어딘가 씁쓸해졌다.

“미안해.”

나 다른 남자랑 잤어. 그 말은 형을 앞에 두고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쉬어라.”

결국, 지운이 형이 나를 남겨두고 돌아갈 때까지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

그렇게 혼자 남겨진 병실에서 나는 고민했다. 나는 지운이 형이랑 헤어지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대체로 서로에게서 원하는 게 맞아 떨어지는 사이였다. 때때로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면, 형과의 관계는 늘 안정적이었고 편안했다. 설령 내가 먼저 잘못했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아 주는 형의 아량을, 나는 어떤 이유로든 늘 고마워했다.

하지만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나를 몰아붙이던 섹스의 여운이 아직 몸을 저릿하게 울렸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나의 몸을 탐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집에서 나가달라 부탁하던 승규의 냉랭한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갑갑해졌다.

나는 승규랑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걸까. 아니, 질문이 애초에 잘못됐다. 나는 승규와 다시 만날 수나 있는 걸까. 그조차 사실은 확실치 않았다. 아득했다. 승규와 했던 섹스는 승규의 말대로 정말 실수였던 걸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안개는 더욱 자욱해졌다. 내 마음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승규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에 다다르면 더더욱 아리송하기만 했다.

어쨌든 승규랑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운이 형과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

‘물 마시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손등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승규를 멍하니 바라봤다. 승규는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

‘잠 깼어?’

‘그… 물 부엌에 내려가면….’

목소리가 잠겨 제대로 나오질 않아 작게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입을 가린 내 모습을 보며 승규가 얕게 웃었다. 내게로 다시 다가와 턱을 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든 승규가 입가에 뽀뽀했다. 가벼운 정도로만 살짝 입술을 핥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첫 삽입 섹스는 체력적으로 분명 버거웠다. 얼떨떨하게 좋은 기분과는 별개로 온몸에 진이 빠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무리한 스킨십을 시도할 욕구도 안 들 것 같았는데, 또 막상 승규가 다가와 짧게 입술을 핥자 안쪽에서부터 어딘가 달아올랐다.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몸을 살짝 일으킨 나는 그대로 승규에게 팔을 뻗어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살짝 부풀어 오른 승규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할짝할짝 핥아대자 승규가 간지러운 듯 조금 웃었다. 하지만 그대로 승규의 입술 안으로 혀를 집어넣으려 했을 때, 조금은 단호하리만큼 승규가 내게서 떨어졌다.

승규에게 너무 안달 난 것처럼 비칠까 봐 귓가가 달아올랐다. 멋쩍은 마음에 승규의 단단한 목덜미만 가만가만 매만졌다. 승규는 그런 나를 꼼꼼하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걸쳐진 나의 손을 떼어냈다.

‘그…….’

‘…….’

‘이제 집에 가려고.’

이건 무슨 소리지. 나는 갑자기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시간도 많이 늦었고…….’

시계를 흘긋 쳐다보니 열한 시 반이었다. 승규의 말대로 늦은 시간인 건 사실이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는 듯한 승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부모님이 1박 2일로 여행을 간다는 핑계로 승규를 집에 부를 때부터 내게는 승규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게 기정사실이었다.

흠뻑 젖어 들 만큼 애정을 아낌없이 퍼부어주면서도 아주 가끔 승규에게서는 마치 내게서 거리를 두려는 듯한 찰나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조금은 몸을 사리는 듯한 승규를 보면 나는 항상 따끔하게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정말로 승규가 내게서 가버릴까 봐 무서웠다. 나는 승규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승규야. 자고 가.’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승규의 배에다가 얼굴을 문질거리며 중얼거렸다. 승규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냐. 괜찮아.’

‘나랑 같이 자는 거 불편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나는 승규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눈만 떠올려 승규를 바라보았다. 아래서 올려다보자 단단하게 맺혀 있는 하악각이 새삼스럽게 근사해 보였다. 내 남자친구는 곤란해하는 얼굴조차도 이렇게 섹시했다. 나는 승규를 빤히 올려다보며 그를 얌전히 기다렸다. 내 뒷머리를 감싸 안은 승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좀.’

‘…….’

‘우리 집이랑 너무 다르니까.’

‘응.’

‘이상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려운 듯 뱉어낸 승규의 말을 조심스럽게 곱씹었다. 승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우리 집은 주변에서는 손꼽히게 부유한 편이었다. 여러모로 승규와 내가 처한 환경이 다를 것이라는 건 애써 부인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승규가 나는 조금 낯설었다. 평소의 승규가 무덤덤하고 단단해 보였기에 더더욱. 어쨌든 나는 서로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그와 나의 환경적인 격차가 방해될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승규가 지금 그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내가 있는데 뭐가 이상해.’

나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승규에게 안겨들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걱정이 얹혀 있는 승규의 너른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승규는 그런 나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턱 부근을 손바닥으로 붙잡아 들어 올린 뒤, 내 이마에 살짝 입술을 얹어 뽀뽀했다.

‘가끔 너는.’

‘…….’

‘나랑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아.’

방 안은 조금 어두웠고, 모호한 빛에 잠긴 승규의 얼굴은 어딘가 아스라해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진지해지는 게 두려웠다. 그런 말을 하는 승규가 내게 선을 긋고 있을까 봐 싫었다.

‘너야말로 이상한 소리 한다, 조승규.’

나는 명랑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팔을 들어 승규의 볼을 꼬집었다. 눈매가 길고 또렷한 승규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승규의 얼굴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진 나는 과장되리만큼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나 혼자 있기 싫어.’

‘…….’

‘몸도 아프단 말야아.’

열도 나는 것 같구, 팔다리도 막 너무 욱신거려. 승규의 눈을 살짝 피한 나는 입술을 뾰족거리며 덧붙였다. 괜히 팔뚝을 주물러 보고 슥 인상을 쓰기도 했다. 또 한 번 승규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그 정도로 엄살을 피울 만큼 아픈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승규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승규가 가장 약한 부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것 같다. 승규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승규는 방을 나서는 대신 내 침대로 돌아왔다. 승규와 다시 나란히 눕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무처럼 든든하고 단단한 승규의 몸을 껴안고, 나는 다시금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에는 사이좋게 늦잠을 잤다. 나는 늦은 아침을 만들어 주겠다는 핑계로 승규를 또 한 번 붙잡았다. 평소에 부엌에 들락거리는 것도 아니면서, 승규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겠다니 꿈만 야무졌다. 이리저리 들썩거리기만 하다 나는 결국 포기했다. 승규와 나는 결국 조촐하게 식빵과 우유를 꺼내와 배를 채웠다.

‘희수 너, 입에 할아버지 수염같이 됐다.’

‘진짜?’

‘응, 진짜.’

‘아니야, 나 안 그래.’

승규가 슬쩍 나를 놀리자 나는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그렇게 말하는 승규의 입가에도 하얀 우유가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보는 승규도 빙그레 웃었다. 별것 아닌 일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별맛도 없는 식빵 쪼가리를 뜯어 먹었을 뿐인데 정신적인 포만감은 만찬이라도 한 것처럼 대단했다. 겨우 접시와 컵 두어 개를 두고 네가 설거지를 하니 내가 설거지를 하니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바쁘게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나를 바짝 따라오는 승규의 발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엄마 아버지 오셨어요? 나는 황급히 인사하고 얼떨떨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그…… 오늘 오후에 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게 됐다.’

내게 힐끔 시선을 던진 아버지는 별다른 말 없이 방으로 먼저 돌아갔고, 엄마는 그대로 현관에 머물렀다. 팔짱을 낀 엄마가 나보다 약간 뒤쪽에 서 있는 승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누구니?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엄마는 날카로운 눈매로 승규를 훑어 내렸다. 엄마의 목소리는 상품을 판별하는 감별사처럼 냉철했다. 힐끔 승규를 돌아본 나는 승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승규는 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엄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희수 친구 조승규라고 합니다.’

‘같은 학교?’

‘네, 희수랑 같은 반이에요.’

엄마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규를 향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미약한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희수가 집에서 통 얘기를 한 적이 없어서 몰랐네.’

‘아… 최근에 친해졌어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친구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엄마와 나누는 건 사실이었지만, 승규에 대해서만은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승규를 좋아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엄마가 승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내 사정이었고, 승규가 그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몰랐다. 나는 네가 부끄러워서 숨기거나 한 건 아닌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지금의 상황이 따끔따끔했다. 나와 승규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여기서 잤니?’

‘네. 엄마, 제가 초대했어요.’

나는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러나 나를 흘긋 바라본 엄마는 다시금 취조의 시선을 승규에게 분명하게 향할 뿐이었다.

‘그래.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고?’

‘…….’

‘…….’

‘두 분 다 안 계십니다.’

잠깐의 침묵 뒤에 승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 미안.’

엄마는 별로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승규에게 사과했다. 고개를 살짝 젓는 승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어쨌든, 친구가 왔는데 내가 신경을 못 써줘서 미안하게 됐네.’

엄마는 세련된 태도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후의 기억은 조금 희미하다. 엄마는 예의상이라도 승규를 붙잡지 않았고, 승규는 서둘러서 집을 나갔다. 때마침 나를 붙잡아 무어라고 질문을 하는 엄마 때문에 나는 승규를 밖까지 바래다주지도 못했다.

장면 장면이나 나누었던 말들보다, 그냥 초조하게 발을 동동거리던 그때의 기분만이 선명하다. 그 뒤로도 승규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는 엄마에게 시달리다가 마침내 해방되었을 때에는 이미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승규가 집에 잘 돌아갔는지 걱정이 되어 문자를 보내봤지만,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아아. 나는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고 침대에 푹 드러누웠다. 어젯밤 승규가 이야기했던 막연한 걱정이나 부담감이 현실이 되어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승규와 둘이서만 있으면 너무나 행복했다. 이대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믿기지 않는 충만감에 젖어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에 범해진 최초의 침입에는 분명 어딘가 써늘한 구석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역시 우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둘인 건가 싶어 울적해졌다.

***

성악가인 사촌 누나가 중규모의 오페라 홀에서 무대에 오른다고 했다. 부모님을 통해 공연의 티켓 한 쌍이 나에게까지 내려왔다.

솔직히 생일날에 지운이 형이 준비했던 이벤트가 그렇게 망가지고 나는 형을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지운이 형은 내게 전혀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형 앞에서 아주 괜찮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운이 형과 통화를 할 때도 불편함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공연 얘기 역시 망설인 끝에 겨우 꺼냈는데, 형은 뜻밖에도 흔쾌히 승낙했다. 단순히 제안을 수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척 기꺼워하는 태도였다. 공연 당일 오페라 홀에 등장한 지운이 형은 핏이 잘 맞아 떨어지는 매끄러운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런 형의 모습은 무척 근사해서, 나는 왜 애초에 내가 형과 사귀게 되었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현재 시점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도 분명히 최초의 불씨라는 것은 존재했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나를 발견한 형은 나에게 눈으로 슬쩍 아는 척을 하고 그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우리는 공연장의 VIP 열로 향했다. 나의 왼쪽에는 부모님이 앉았고, 오른쪽에는 형이 앉았다. 이윽고 공연의 막이 올랐다.

공연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형이 원래 오페라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지루함에 젖은 나는 조금 상기된 듯한 형의 옆모습을 흘금 쳐다봤다. 공연이 끝나고는 형이 직접 유명 플로리스트에게 주문했다는 꽃다발을 누나에게 안겼다. 사촌 누나는 아직 형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몰랐지만, 형은 누나 역시 언젠가는 우리에 대해서 알게 될 사람처럼 극진히 대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런 식의 식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형과 나란히 앉아 부모님을 마주 보는 일이 나는 여전히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형과 나의 관계를 승인하지만, 결코 완전히 기꺼워하시지는 못하실 부모님도 사실은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형 한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형의 태도 덕분에 지금의 자리가 유지될 수 있는 셈이었다. 소담한 차림의 접시가 하나하나 상에 차려지는 동안, 형은 특유의 넉살 좋은 입담으로 뻣뻣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아, 그리고 이건 별건 아닙니다만.”

청산유수처럼 흘러내리는 말을 멈춘 형이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고동색 쇼핑백에 담긴 것은 아빠의 넥타이였고, 주홍색 종이 상자에 담긴 것은 엄마를 위한 스카프였다. 이런 거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매번 말했지만, 부모님을 만날 자리가 되면 꼭 형은 그들을 위한 선물을 챙겼다.

“부족하지만 취향에 맞으신다면 좋겠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형을 만류했던 내 말이 무색하게도, 부모님은 형이 꼬박꼬박 챙겨오는 선물이 퍽 기꺼운 기색이었다. 기본적으로 선물을 고르는 형의 취향이 적당히 중후하고 세련되어 부모님의 입맛에 맞기도 했지만, 사실 부모님은 그런 선물 하나에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했다.

중요한 건 그들을 위해 노력하는 형의 태도였다. 확실히 부모님에게는 형이 내미는 선물 그 자체보다, 지운이 형이 어떻게든 그들을 향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점수를 따낸 것 같다. 지운이 형은 부모님 앞에서 철저하게 싹싹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일단은 병원이 자리 잡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런가.”

“예, 개원은 부모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으니 키우는 것은 제 몫이죠.”

병원은 어차피 동네 장사야. 지운이 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한 실용주의가 때로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형은 무척이나 수완이 좋았다. 지운이 형은 상황에 맞춰 능청스럽고 편안하게 상대를 대했다. 선을 넘지 않는 한도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만족시켰다. 좀 시니컬하게 말하면, 형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 비위를 잘 맞췄다.

“지운 씨 부모님은 정말로 든든하고 걱정이 없겠어.”

“어머님, 희수야말로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있는걸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부모님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처음에는 평생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엄마 아빠의 기대를 모두 충족시키는 자식이 되고 싶었고, 사실 남다른 성적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 외에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결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어느 날 펑 하고 터져버렸다.

나는 그렇게 게이인 아들 역시 받아들여달라고 부모님께 악다구니를 썼다. 이후로 고루한 싸움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부모님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더 이상 부정하지도 못했다.

최고조를 지난 부모님과의 갈등이 소강상태에 달했을 때 나는 지운이 형을 처음 만나기 시작했다. 망설이다 부모님과의 일을 털어놓자 지운이 형은 내 손을 꽉 붙잡고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아, 형이랑 같이 설득해 보자.

확신에 가득 찬 형의 태도를 접하고 있으면 정말로 모든 일이 형이 말하는 대로 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은 정말 형이 내게 단언한 것처럼 흘러갔다. 지운이 형은 ‘게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부모님의 눈에 능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 잘하는 흠잡을 데 없이 멀끔한 청년이었다.

부모님이 아무리 부인해도 내 정체성이 절대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실망스러운 예감 속에서, 형의 존재는 부모님에게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게이’가 내 아들 혼자만의 일은 아니라는 비릿한 안도감.

형의 끈질긴 노력과 함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자, 부모님은 마침내 게이가 역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정했다. 저렇게 사는 것 역시 삶의 방식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고, 조금씩 마음을 열고 나를 받아들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역시, 형에게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 자네도 골프 친다고 했나?”

“저는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한번 같이 나가지.”

“아버님과 함께 필드 나갈 수 있다면 저야 물론 영광입니다.”

솔직히 형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다른 동성 파트너를 데리고 부모님과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부모님은 더 이상 내가 게이라는 사실에 대해 문책하거나 부정하지 않으시지만, 그건 역시 지운이 형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전제로 했을 때의 일이었다.

형은 게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회적 낙오자로 추락하지 않고 그들의 위신을 어느 정도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을 부모님께 제공했다. 가끔은 기저에 깔린 그러한 계산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느껴져서 조금 메스꺼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형이 만나는 일이 그렇게 달갑고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에게 자식인 나보다 더욱 살갑게 굴며 무슨 말이든 그럴듯한 장단을 맞추는 형에겐 이 모든 과정이 늘 즐거워 보였다.

“안 피곤해?”

식사를 마치고 형의 볼보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질문했다. 형은 식사를 하는 내내 거의 쉬지 않고 말했다. 의사는 서비스업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형이었지만, 정말 일을 할 때도 이러나 싶었다. 솔직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응? 하나도.”

슬쩍 웃어 보이는 형은 별다른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술을 안으로 물어 살짝 깨물었다. 기분이 고맙고 좀 이상하고 그랬다.

“희수 너희 부모님은 늘 교양 있으시고 여유로우셔서 좋아.”

비단 나에게만 아니라 나의 부모님 앞에서도 형은 완벽한 남자친구 그 자체였다. 형의 그 완벽함, 혹은 어쩌면 그러한 완벽함을 연기해내는 치열한 노력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게서는 막연한 의문이 생겨났다.

“형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 해줘?”

“응?”

“그냥. 나는 가끔 형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생각으로만 하던 질문이 무심코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입꼬리를 달싹였다. 병실에서의 일 이후, 생일날 내가 무턱대고 탄 잠수에 대해서 형은 전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은 지나치리만큼 태연해 보였다.

아니 단순히 태연한 정도가 아니었다. 형은 내게 여전히 너무나 훌륭한 애인이었다. 이대로 덮어 둔다는 게 말이 되나? 막상 잘못한 건 나면서,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게 마냥 기쁜 게 아니라 오히려 정말 괜찮은 건가 하는 의아함이 들었다.

“…….”

차를 출발시키는 대신 내게로 팔을 뻗은 형이 살짝 흐트러진 흰 셔츠의 깃을 빳빳하게 정리해줬다. 나를 보는 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 얼굴로 다가온 형의 손이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희수.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그래?”

“…….”

“네가 너무 예뻐서, 뭐 그런 거?”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뜨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사래 쳤다. 그런 건 정말 아니었는데……. 형은 픽 소리를 내고 웃었다. 내 귓가를 살짝 쓰다듬은 형의 손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입가에 손을 가져간 형이 낮게 기침을 했다. 이후 다시금 나를 바라보는 형의 눈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수야.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야.”

나는 말없이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게 있고, 그게 지금 내 옆에 있고.”

“…….”

“그럼 그걸 갖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

“…….”

“쓸데없는 데 감정 소모할 여유 없어.”

히끅. 형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딸꾹질을 했다. 진득하게 이어지던 상황이 와장창 깨졌다. 지운이 형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좀처럼 딸꾹질을 멈추지 않는 나의 등을 형이 툭툭 두드렸다. 나는 눈가에 살짝 배어 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불편하게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분명히 로맨틱한 상황이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형의 말은 마냥 달콤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완전무결한 표면에도 불구하고 막상 껍질을 벗겨내면 안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지금의 이 관계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해결되지 않은 내 안의 결핍을 그 원인으로 돌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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