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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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규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나는 궁금해했다. 승규는 그를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조금 놀란 듯한 표정, 붕 떠버린 당혹감과 함께 당시의 상황은 어설프게 수습되었다. 그러나 나의 고백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았다. 이후 승규가 나를 거부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승규의 모호한 태도는 사실 나의 감정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규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약속한 것처럼 많아졌다. 승규가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구관 옥상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로, 나 역시 비밀스럽게 승규를 따라붙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우는 녹슨 문을 열고 옥상에 들어서면, 승규는 내게 힐끔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졸졸졸 승규가 있는 쪽으로 쫓아가 승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승규와 나는 나란히 앉았다. 옥상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무릎을 감싸 안은 나는 내 옆의 승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승규와 눈이 슬며시 마주치면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 공기가 말랑말랑했다. 승규가 단단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손가락 끝이 견딜 수 없이 간질거렸다.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은 퍽 쉽게 달뜨고는 했다.

‘…….’

‘…….’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승규와의 사이에서 생겨나는 침묵이 유난히 긴장됐다. 억지로 그 안에 할 말을 채워 넣지 않으면, 상황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튀어 오를까 두려웠다. 공부하는 거 너무 부담스럽고, 내신 관리 짜증 나. 수학 등급 컷 애매하게 갈릴까 봐 걱정돼. 그래서 나는 승규에게 생각나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다.

승규는 조금도 재미없을 내 얘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에게 귀를 기울여 줬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얼굴은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무심하고 권태롭게만 보이던 승규의 표정에 봄을 닮은 생기가 돋아나는 순간은 항상 나를 짜릿하게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승규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면 우리의 사이가 좁혀졌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빛이 어느 순간부턴가 부쩍 포근해져서 뒷덜미가 간질거렸다.

그렇게 둘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우리가 지금 하는 게 연애 비슷한 건가, 헷갈리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승규와 내가 호감을 기반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음은 직감할 수 있었다. 데면데면 서로를 흘긋거리기만 할 때와 비교해서도 뭐랄까, 조금은 더 특별해진 사이라는 것 역시 피부로 다가왔다.

하지만 연애라는 단어로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섣불리 묶기에는 사실 미묘한 공허감이 들었다. 승규의 앞에서 나는 자꾸만 조심스러워 움츠러들었다. 무언가가 끝까지 당겨지지 않는 느낌. 사실은 그가, 끝까지 당기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솔직히 경계에서 발생하는 아슬아슬함이 주는 긴장감도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너머가 욕심이 나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온화한 시선, 애써 나를 밀어내지 않는 부드러운 태도. 지금도 충분히 좋았지만, 사실 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했다. 부족하게 느껴지는 조금의 간극을 마저 채워 넣고 싶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나는 승규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다는 걸,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그를 위해 무턱대고 승규를 조르고 싶은 충동과, 지금 이상으로 보채서는 안 된다는 머뭇거림이 충돌했다.

그렇게 나는 매일같이 승규에게 잔뜩 애가 타 있는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톡 하고 즙이 터져버릴 것처럼 마음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승규에게 바짝 안달이 나 있는 내 마음처럼, 대기도 습기를 촉촉하게 머금었다. 하복으로 갈아입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마가 찾아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는 빗줄기가 빈번하게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시험을 치르고 성적에 스트레스받아야 하는 건 싫지만, 모의고사 날이면 학교가 일찍 끝나는 것은 좋았다. 보통은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엄마 차를 타고 학원에 가야 했는데, 모의고사를 보는 날엔 조금이나마 자유 시간이 생겼다.

종례를 마친 뒤 일부러 교실을 바쁘게 나서지 않고 미적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한 것처럼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하교하게 되었다. 각자의 집으로 가는 방향은 전혀 달랐지만, 승규가 흔쾌히 내가 사는 동네 방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물기를 찰박찰박 머금은 흙바닥을 승규와 나의 운동화 두 쌍이 나란히 내디뎠다.

‘너는 시험 잘 봤어?’

‘그냥 계속 잤어.’

‘그래도.’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맑고 화창했던 하늘에 갑작스럽게 먹구름이 몰려왔다. 어두컴컴해진 하늘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나더니 빗줄기가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톡톡 쏟아지던 빗방울은 금세 그 덩치를 불려 시야를 빼곡하게 가렸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뒤졌지만 아무래도 우산을 학교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돌아본 승규도 난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우리 뛰어야겠다.’

그때, 승규가 나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이미 내 피부는 빗방울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매끈한 빗물 위로 따끈한 승규의 체온이 감겨들었다. 나를 붙잡은 승규가 그대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승규의 움직임은 무척 날랬다. 당황한 나는 버거운 호흡으로 승규를 쫓아갔다. 등에 걸린 가방이 거칠게 들썩거리고 물이 고이기 시작한 길바닥은 첨벙거렸다.

‘허억… 허억….’

한참을 달려서 차양이 드리워진 골목길을 찾았다. 하지만 마침내 비를 피할 수 있게 됐을 때는 이미 나도 승규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나와 승규는 조금 허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쓸어 올리자 젖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엉겨 붙었다.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교복 위로 빗방울이 도르륵 굴러떨어졌다. 달리기의 여파로 가쁘게 몰아쉬는 밭은 숨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섞여들었다.

‘…….’

‘…….’

소나기는 매서웠다. 나는 좀처럼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는 두툼한 빗줄기를 멍하게 건너다봤다. 물기에 젖은 몸에서는 훅훅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나는 몸을 옹송그렸다. 찌걱이는 소리가 들려 옆을 슬쩍 돌아보자 승규가 물에 젖은 교복 셔츠를 벗어내고 있었다.

셔츠 안에 덧대 입은 얇은 반팔티 하나를 사이로 승규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골격과 근육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왠지 뭔가 보면 안 될 것을 본 느낌이 들어 뒷덜미가 바짝 곤두섰다. 시선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승규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당황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승규가 슬쩍 웃었다.

‘신기하다.’

‘응?’

그리고 조금 갑작스러운 소리를 했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되물었다.

‘너 속눈썹이 길어서 빗물이 고이나 봐.’

말을 마친 승규가 내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승규의 몸도 내게로 기울어졌다. 승규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예고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승규의 접근에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꼭 다문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승규의 손이 내 속눈썹을 슥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떴을 때 승규의 얼굴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속눈썹에 닿았던 손가락을 겹쳐 느릿하게 매만지는 승규가 이거 보라는 듯 조금 짓궂게 웃었다. 여전히 비는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고, 나를 보고 웃는 승규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심장이 아프도록 두근거렸다. 나는 비에 젖은 공기처럼 먹먹해진 기분으로 여전히 축축한 기운이 남아 있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예뻐. 언젠가 승규가 그를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승규에게 내가 정말 특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제때를 만난 듯 마음속에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특별함의 감각을 만끽할 수 없었다. 아직 우리 사이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있잖아.’

‘어.’

‘우리 무슨 사이야?’

‘…….’

‘나 네가 이러니까 너무 헷갈려.’

먼저 이런 말을 하는 게 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순간을 참는 게 사실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괜히 승규에게 책임을 돌리며 넌지시 말을 흘렸다. 이렇게 사람 헷갈리도록 다정하게 대해주는 건 나쁜 일이라고 탓해 보면서.

‘…….’

‘…….’

승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어 질문을 던진 나를 맥 빠지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빠른 속도로 침잠했다. 입을 굳게 다문 승규는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승규와 나 사이 고작 한 뼘 반의 거리를 메우는 공기가 팽팽해졌다. 나는 한동안 정적을 견뎌야 했다.

‘희수야.’

‘…….’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고민에 잠긴 듯 부쩍 어두워진 승규의 표정은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 승규는 때로 세상에 기댈 사람이라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외로워 보였다.

‘솔직히 나는, 시작을 하면 못 멈출 것 같아서 그래.’

승규는 어렵다는 듯 말을 이었다. 끝없이 내릴 것만 같던 빗줄기도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빗소리로 조금은 소란스러웠던 공기가 점차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물에 젖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안으로 단단하게 뭉쳤다.

‘그럼, 안 멈추면 되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승규에게 말했지만, 사실 나의 목소리는 엉망으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게 같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꽉 차오른 머릿속은 마비라도 된 것처럼 온통 얼얼했다.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리는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조여든 동공에서 안광이 번쩍였다.

그대로 내게 다가온 승규가 키스했다. 승규는 마치 깨질 듯한 유리를 대하듯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았다.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순순히 입을 열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고 마침내 내게 닿아오는 승규의 감촉에 집중했다. 우리 둘만의 세계가 처음으로 생겨나는 순간은 애틋하고 비밀스러웠다.

***

지금 승규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두려웠지만, 사실은 궁금해했다. 우리의 관계를 내가 망쳐버린 걸 알면서도, 승규 안에서 존재하는 나는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길 바라는 미약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도 너도 나에게서 완전히 매몰차게 돌아서지는 못할 거라고 우격다짐했다.

나를 모른 척하고 외면하는 승규를 보면서도, 막상 이야기를 나누면 달라질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나를 향해 세워진 승규의 벽도 무너질 줄 알았다. 마주하는 순간 우리가 공유했던 소중한 순간의 조각이 되살아나고, 승규도 나를 향해 다시 웃어줄 줄 알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때 아름답게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처한 실상은 처참했다. 승규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냉혹했다. 승규의 시선에 서려 있던 나를 향한 경멸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쳤다. 너 정말 사람 질리게 한다는 냉정한 단언이 뼈아팠다. 시리도록 짙은 모멸감이 스몄다. 나 자신을 온통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서도, 내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도 분명 과거의 승규가 생생하게 비쳤다. 그러나 지금의 승규는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승규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승규에게서 성큼 다가오는 거리감이 스산했다. 진짜 승규라면 내게 이럴 리는 없다고 우기고 싶었다. 

나 정말 벌 받는 걸까. 무심코 생각하다 그런 내 모습이 승규의 말처럼 정말 지나치게 뻔뻔한 것 같아서 헛웃음이 터졌다.

승규를 위해서라도 더는 그를 찾지 않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히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로서야 절박함이겠지만, 승규에게는 그런 나의 행동이 일종의 스토킹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나는 승규에게 정리되지 못한 감정을 강요하며 폭력적으로 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제는 내려놓자고.

아니, 하지만 결코 승규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실은 나는 우리의 관계를 더 이상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승규에게 다가갔을 때, 승규가 같은 방식으로 나를 거부한다면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웠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도록 달라져 버린 승규의 태도를 확인하면, 지금껏 내가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끝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직면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 갇혀 있는 건 나뿐이야. 승규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고 있지 않아.

그러면서도 나의 감각은 승규에게 여전히 발목 잡혔다. 승규를 보지 못할수록, 승규를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승규에 대한 갈증은 깊어가기만 했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다가도 문득 회상에 잠기게 될 때가 많아졌다.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가정이 오고 갔다.

승규와의 관계에는 차라리 그게 아니었으면, 생각하면서도 도망치듯 일부러 불확실하게 남겨두고 싶은 부분들이 많았다. 반면 내가 속해 있는 현실에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 내가 앞으로 살아갈 기반.

그 모두를 깨트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승규에게 질척이는 감정을 품으면서도, 나는 솔직히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한 번 망가져 버린 관계는 어떻게든 같은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바스러질 것 같은 무언가에 매달리게 됐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요즘의 나는 항상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손에 생생히 만져지는 현실인데도 모든 것이 차라리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붙들어오던 단단한 기둥이 그대로 뿌리 뽑힌 채, 나는 안개가 가득히 낀 공기 중을 하느작하느작 부유했다. 우울함이 넘실거렸다.

“희수.”

“응?”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또 한 번 현실감각을 놓쳐버린 모양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는 지운이 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느러미를 힘없이 뻗으며 회한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던 나는 삽시간에 현실로 끌어당겨졌다. 별안간 테이블에 얌전히 놓인 팟타이의 매콤한 냄새가 코끝을 날카롭게 찔렀다.

“나? 괜찮은데.”

꿀꺽, 침을 삼켰다. 승규를 만나던 어렸을 때와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나는 겉으로 비치는 나의 모습을 더욱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어졌다.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에 다소 무례하게 집중을 잃었던 것이 전혀 없었던 일인 양, 나는 지운이 형에게 배시시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기는.”

“…….”

“내가 하루에 보는 환자가 몇인데.”

하지만 나의 애인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의사라니 애초에 똑똑한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분석적인 건 지운이 형의 단점이었다. 기민하게 나의 기색을 읽어내는 그의 눈치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반갑지 않았다.

더 이상 지운이 형에게 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슬쩍 피하고 창가를 훌쩍 내다봤다. 손을 들어 조금 헝클어진 앞머리를 슥슥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지운이 형은 계속해서 조금은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관찰했다.

“그냥, 논문 스트레스지 뭐.”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순순히 넘어갈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흐음, 지운이 형이 낮은 숨을 내뱉었다.

“교수님이 요새 좀 깐깐하게 구네.”

“그래도. 사람 너무 피 말리는 거 아냐?”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나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었다. 지운이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했잖아. 너 형 집에 들어와서 살아도 돼.”

그리고 지운이 형은 평소 입이 닳도록 읊는 레퍼토리를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아 가면서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다. 너 하나 내가 책임질 능력 없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걱정이냐.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지운이 형의 말에 긍정의 뜻도 부정의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처음에 지운이 형으로부터 저 말을 들었을 때는 글쎄, 좀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지금은 조금 무뎌진 감이 있다. 그냥 형은 그런 말을 하고 싶을 만큼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 맞다.”

외에도 공부보다 건강이 최고라는 등, 꼭 엄마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던 지운이 형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운을 띄웠다.

“이번 주 토요일에 반얀 트리에 룸 예약해 놨어.”

“응?”

“희수 너 생일이잖아.”

지운이 형이 여유롭게 씩 웃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충분한 리액션이 되었는지 지운이 형의 얼굴이 자신만만함으로 물들었다. 요새 워낙 정신을 내놓고 살아서인지, 생일이 가까워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요새 늘 생일 즈음이면 찾아왔던 무더위가 기승이었다.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스파도 하고 푹 쉬면 기분 나아질 거야.”

돈 많이 썼겠네. 나는 무감하게 생각했다. 형이 돈 넉넉하게 버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이번엔 좀 무리했겠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호들갑 떨면서 괜한 일 했다고 얌전 뺄 생각은 없었다. 형 말처럼 호텔에 가서 사치스러운 안락함에 푹 젖어 들면 최근의 나를 사로잡는 쓸데없는 잡념들이 고개를 숙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가서 나 푹 쉬게 하려고?”

“윤희수. 앙큼하기는.”

“하하.”

고맙다는 말 대신 은근한 농담을 건네며 눈웃음을 쳤다. 의기양양해진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걱정 혹은 어쩌면 의구심, 그 어딘가에 걸쳐 있었던 형의 시선이 마침내 거두어지고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훨씬 나아졌다. 나 역시 지금의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지운이 형에게 몰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 형과 헤어지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눕자 마음이 거짓말처럼 뒤숭숭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이미 봉인이 해제된 과거가 스멀스멀 피부를 기어올라 덮었다. 나는 또다시 7년 전의 여름으로 돌아갔다. 아니, 끌려갔다.

맛있는 밥을 먹고, 적당한 선물을 받고, 평소와 조금 다른 섹스를 한다. 지운이 형은 마치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한 양 얘기했지만 사실 생일날 펼쳐질 일들을 생각해보면 패턴이 조금은 뻔했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별다를 건 없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예전에는 확실히 달랐던 것 같다. 승규와 내가 한창이었던 여름의 생일은 조금은 더 특별하고 생기 있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불을 밝혔다.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옷장을 열고 오래된 수납함을 꺼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납함에 아무렇게나 정리된 잡동사니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가락이 목적지에 닿았을 때 아, 하고 입술 새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수납함 가장 깊숙한 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덮여 빛이 바랜 붉은색 페라리 프라모델이 있었다. 멍해진 기분으로 차체를 쓰다듬었다. 프라모델을 가슴에 푹 끌어안자 어쩐지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직접 만든 건데,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어. 수줍은 듯 내게 속삭였던 승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울렸다.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모형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마음이었다.

***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점심시간이 가장 적당했다. 나는 늘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식사를 했다. 급식실을 홀로 박차고 나와서는 잰걸음으로 구관 옥상을 향해 내달렸다. 심장에 빠듯하게 차오르는 숨이 가파른 계단 때문인지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낑낑대며 오래된 옥상 문을 열었다. 마침내 우리 둘만의 세계가 열리면 그곳에는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는 승규가 있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내가 승규를 따라잡는 일은 이상하리만큼 없었다.

승규는 체육 매트 위에 느슨한 자세로 반쯤 누워 있었다. 단추를 풀어 살짝 벌어진 교복 셔츠가 펄럭거리며 안에 입은 흰색 티셔츠를 내비쳤다. 나는 승규의 나른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승규의 모습이 내게 슬로우 모션처럼 다가왔다. 마치 애태우는 듯한 그 속도가 감질이 나서, 나는 급하게 승규에게로 달려갔다.

승규는 제게로 덥석 안겨드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승규의 손이 허리께에서 엉덩이를 슥 훑고 내려오면 척추가 오싹하게 찌릿했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터지는 웃음소리가 청명했다.

매트에 앉은 승규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길쭉하게 누웠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묵묵하게 잘생긴 승규의 얼굴이 빛에 감겨 보였다. 새삼스러운 감동에 잠겨 하염없이 승규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대로 승규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맡기고 싶은 조금 철없는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내 이마를 덮은 승규가 둥글게 굽힌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승규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손이 그대로 이마를 타고 내려왔다. 승규는 혹시나 눈을 찌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의 속눈썹을 매만졌다. 나는 긴장으로 숨을 슬쩍 들이켰다.

이윽고 다정한 손길은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콧대, 뺨, 입술, 그 모양을 그대로 덧그리듯 내 얼굴 곳곳을 승규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걸 확인하고 또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는 것처럼. 승규가 나를 만질 때마다 가느다란 붓이 심장을 보슬보슬하게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승규에게 아껴지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우리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래서 승규의 마음이 가질 크기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승규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계속 억지로 매달려오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작을 선언한 승규의 태도는 전면적으로 달라졌다. 지금까지 그를 가로막고 있던 둑이 허물어진 것처럼, 승규는 내게 와르르 애정을 퍼부어줬다.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동자만으로 나는 승규가 내게 푹 빠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승규는 무조건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쏟고 나를 소중하게 대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서 자연스러워진 애정표현.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강력한 교감.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나를 더없이 소중하게 대해주고 있다는 기적. 가슴께를 뻐근하게 차오르는 행복감은 아무리 거듭해도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먹먹해진 나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슬쩍 떠올렸다. 예전의 날 선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화해진 승규가 나를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승규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기분이 살랑거렸다. 끈적끈적 무더운 날씨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너무나도 뜨거운 승규가 눈부신 태양을 닮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내가 웃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승규의 미간이 살짝 좁혀 들었다. 내가 베고 있는 무릎을 살짝 위로 들어 올린 승규가 허리를 굽히고 내게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대로 입맞춤이 쏟아졌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까 승규의 까끌한 손가락이 스쳐 갔던 얼굴의 곳곳에 도톰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표면이 살짝 거칠게 일어난 말랑한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손발이 안으로 굽어드는 것만 같았다.

‘아, 간지러워.’

‘왜.’

‘아니이, 네가 자꾸.’

괜히 승규의 가슴을 슬쩍 밀어낸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승규의 스킨십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달달함에 온통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져버린 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귓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승규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나를 제게로 당겼다.

눈이 마주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대로 승규가 나에게 키스했다. 달짝지근한 기운이 순식간에 입안을 퍼져나갔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는 벌벌 떨며 입술만 겨우 살살 핥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키스는 점점 더 과감해졌다. 승규의 혀가 대담하게 입천장을 쓸어내리고 나를 몰아붙이는 것처럼 입안을 가득 채우면 전신에 야릇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예뻐.’

길고 집요했던 키스가 끝나고도 어딘가 아쉬웠는지 승규는 나의 입술을 쪽쪽 빨아대며 입가에 짧게 입맞춤했다. 달뜬 얼굴로 쌕쌕 숨을 몰아쉬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승규가 낮게 속삭였다. 승규의 목소리가 젖어있는 입술에 그대로 닿아 올 것처럼 진동으로 우웅 울렸다. 그런 말이라곤 조금도 못 할 것처럼 생겨서는, 승규는 은근히 표현이 거침없었다.

승규가 그런 말을 하면 확 부끄러워지면서도, 역시 기분이 좋은 건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승규가 그렇게 표현해 줄수록 오히려 더 몸이 달았다. 나는 나를 향한 승규의 애정을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었다. 갈증으로 온몸이 따끔거렸다. 승규가 나를 충분히 아껴주는데도 철모르는 아이처럼 더 보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승규의 허리를 껴안은 나는 몸을 치댔다. 깊숙한 숨을 한 번 내쉰 승규는 그대로 내게 이마를 맞대오고 나의 등허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얇은 교복 셔츠 위로 승규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잠들어 있던 감각이 톡톡 깨어났다.

‘승규야.’

‘응.’

‘너는 나랑 사귀고 뭐가 제일 좋아?’

입을 열어 놓고 너무 속 보이는 질문이었나 괜히 좀 민망했다. 하지만 승규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승규의 근사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다시 한번 확인받고 싶었다.

‘음…….’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를 지긋이 응시하는 승규가 고민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듯한 승규의 모습이 나를 조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승규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찾아오는 지극한 두근거림은 때로는 마음을 온통 버겁게 할 지경이었다.

‘너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거?’

‘그게 뭐야.’

한참의 정적 뒤에 마침내 떨어진 승규의 입술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부정적인 말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예상했던 질문과 조금 비껴가서 그랬던 것 같다.

‘그냥.’

‘…….’

‘옛날에는 보면서 계속 생각만 했어.’

‘…….’

‘그래서 좀 답답했어.’

멋쩍은 듯 웃어 보인 승규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승규의 엄지가 느릿하게 내 뺨을 살살 문질렀다.

하아. 나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승규는 늘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하게 불쑥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줄곧 내가 승규를 먼저, 그리고 혼자서만 쭉 좋아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우리가 엇갈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마저도, 어쩌면 승규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무척 달콤하게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너는?’

‘응?’

‘너는 뭐가 좋은데?’

콧등에 코끝을 슥 문질러온 승규가 조금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의 것을 되풀이한 승규의 질문에 나 역시 고민에 잠겼다. 막상 내가 그 상황에 부닥치니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런 나를 응시하는 승규의 입이 점차 일자로 굳었다. 승규 역시도 조금 전의 나처럼 긴장이 되는 걸까.

‘그냥 네가 내 거인 거.’

막상 대답하자 확 부끄러워졌다. 말을 마친 나는 승규의 허리를 당겨 꽉 껴안았다. 얇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너른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너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꽉 붙잡을 거야.’

승규는 그의 가슴팍에 대고 입술을 웅얼거리는 나의 머리통을 아무 말 없이 살살 쓰다듬었다. 한 번 끌어안으면 절대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모든 시간에는 어김없이 그 끝이 있었다. 예비 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교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교실에서는 승규와 나는 서로에게 특별하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승규와 만남에는 언제나 은밀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사이 승규와 연정을 쌓아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비밀스러운 조우에서 발생하는 짜릿함이 오히려 나를 더욱 승규에게 몰입하게 했던 것도 같다.

***

누군가와 이 정도까지 깊은 감정적 교류를 하는 것은 내게는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승규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내게 새로움으로 두근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하루가 균등하게 좋은 건 아니었다. 나도 때로는 승규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승규는 기본적으로 내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해줬지만, 결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태도가 조금 투박하고 덜 다듬어진 면이 있었다.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는 감정 변화가 좀 급격한 편이었는데, 승규의 조그만 손짓에 따라 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을 승규가 매번 눈치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승규에게 팩 토라졌다가, 또 나를 보고 웃는 승규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다시 풀렸다가 했다. 물론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승규의 단점이라고 일컬을 수도 없고, 승규가 나쁜 남자친구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승규의 지나친 승규다움이 유난히 아쉽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는 얘기다.

생일을 앞두고 사실 고민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에는 누구나 아직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마련이다. 생일은 그때의 나에게 무척이나 의미 있는 날이었고, 솔직히 나는 승규에게 축하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내게 가장 특별한 사람이 축하해준다는 것 자체로 그 날이 각별해질 것 같았다.

7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내 생일을 향해 날짜는 하루하루 달려갔다. 승규가 내 생일을 알고 있는지도 사실 모르는 채로, 그렇게 순식간에 생일 당일에 도달해 버렸다. 먼저 승규에게 이야기하면서 생일을 챙겨달라고 할 용기도 없었으면서, 나는 소극적으로 승규가 그냥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만 품었다.

내 태도가 다소 미성숙했다는 걸 당시에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감정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막상 생일이 되었는데 승규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승규가 모르는 건 당연해,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나는 혼자서 울상이었다.

승규는 전날과 다름없이 내게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고 나를 부드럽게 만지려 들었다. 하지만 혼자 속으로 마음이 삐걱거리는 나는 그런 승규에게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승규가 그런 나의 변화를 알아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마음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승규랑 함께 있어도 마음이 어딘가 불편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느꼈다. 솔직히 처음부터 원하는 것을 툭 털어놓지 않은 내 실수가 맞았다. 하지만 마음은 서운하고, 자꾸만 삐죽거렸다. 계속 이러고 있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해서 인제 와서 사실 나 오늘 생일인데, 하고 털어놓는 것도 좀 우스운 것 같았다. 아. 다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 그냥 처음부터 일이 이상하게 다 꼬여버린 듯싶었다.

나는 잔뜩 의기소침했고, 그날의 점심시간은 평소보다 느릿하게 흘러갔다. 조금 지친 기분으로 나는 정각에 가까워지는 시계를 확인했다. 승규에게 평소보다 조금 일찍 교실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희수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팔목을 잡은 승규는 답지 않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승규는 내게 항상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때만은 예외였다. 몹시 망설이는 기색을 비치는 승규를 보며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잠깐만.’

승규는 대체 뭐가 그렇게 자신이 없었던 걸까. 그대로 나를 붙잡아둔 승규가 옥상의 창고에 들어가 부스럭거렸다. 잠시 후 승규는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등장했다. 승규가 내게로 가까워졌다. 나는 승규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승규는 우뚝 멈춰 섰다. 여전히 고개를 슬쩍 곁으로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내게 손에 들린 물체를 건넸다. 나의 시선이 승규의 손을 따라 또르륵 굴러갔다. 자동차 프라모델이었다. 솔직히 의아했다. 이걸 나한테 왜?

‘직접 만든 건데.’

‘…….’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어.’

오랜 망설임 끝에 승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평소보다 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멍해 있던 나는 한 발짝 늦게 승규의 손에 들린 프라모델을 받아들었다. 고개를 기울인 승규가 프라모델을 들고 있는 내 얼굴을 아주 유심히, 또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제야 나는 승규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거 내 선물이구나. 그와 동시에 꽁꽁 뭉쳐 있던 서러움이 톡 하고 풀리면서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승규는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승규야.’

학교, 집, 친구들, 주제를 가릴 것 없이 나에 관련된 얘기를 재잘재잘 늘어놓는 나에 비해서 승규는 과묵한 편이었다. 먼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잘 없었고, 내가 직접 물을 때에도 내키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승규는 좀 나에게 비밀스럽고 위태롭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승규가 유일하게 내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자신의 이야기에 열을 올릴 때가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나는 또래 남자애들에 비해 차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미 승규는 차의 세밀한 구조와 생산 시스템, 카메이커의 특징 등에 대해 통달하고 있었다.

뭐랄까, 세상만사에 큰 관심 없이 무덤덤해 보이는 애가 갑자기 무언가에 열을 올리며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모습은 차라리 기묘했다. 승규가 보이는 그 열정이 낯설어서,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괜히 자동차에 질투심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승규는 언젠가 자동차 모형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자주 하지는 못한다는 말을 슬쩍 흘렸었다.

승규가 내게 건넨 프라모델은 조금의 흠도 없이 반질하게 다듬어져 광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매끄러운 표면 위로 프라모델을 직접 도색하고 조립하고 있었을 승규의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그 과정에서 승규가 여기에 고스란히 쏟아부었을 마음 역시.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었는데.’

‘…….’

말끝을 흐린 승규가 멋쩍은 듯 웃었다. 나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규가 건네준 자동차 모형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승규가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희수야, 생일 축하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그 마음이 너무 나는.

‘고마워.’

사랑스러워서.

‘사랑해, 승규야.’

내가 승규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파문이 일어나는 호수처럼 아름답게 일렁거리던 승규의 맑은 눈동자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도 사랑해.’

그렇게 내가 느껴본 가장 순수한 애정이 나의 심장을 온전히 감싸 안았다.

***

생일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빗물이 타닥타닥 달라붙는 투명한 창문을 건너다보았다. 분명히 그때보다 가진 것과 이룬 것이 훨씬 많은데도, 승규가 내게 생일을 축하해주던 그 순간에 비해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삐릭 울리는 소리에 카톡을 흘금 쳐다봤다. 다섯 시에 오피스텔로 데리러 가겠다는 지운이 형의 메시지였다. 조금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아서 형에게 좀 미안할 정도였다. 지금 시각은 네 시 반. 나는 준비를 이미 마친 채였고, 형이 예고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떨림이 느껴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다섯 시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견딜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다. 애써 걸치고 있는 맞지 않는 옷이 나를 억지로 조이고 드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는 오늘 온종일 승규 생각뿐이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애틋한 순간에 완전하게 잠식당했다.

그러다가 퍼뜩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의 착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금세였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손을 뻗어 차키를 향해 더듬거렸다. 차키를 주먹에 꽉 움켜쥔 순간 심장이 쫙 조여들었다.

나는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더욱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좀 미친 사람같이 굴었다. 째깍째깍 여전히 나를 향해 달려오는 시간, 빠져나갈 구석이 없이 조여드는 현실에서 도망치듯 신속하게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차를 향해 허겁지겁 달렸다. 운전석에 앉은 다음 카톡이 쌓여 있는 핸드폰을 종료시켰다.

까맣게 점멸하는 액정과 함께 차를 출발시켰다. 아직 빗물이 고여 있는 도로에서 나는 난폭하게 운전했다. 빵빵, 나를 탓하고 있는 게 분명한 클랙슨 소리가 귓가에서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나는 계속해서 익숙한 듯 낯선 경로를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승규가 일하는 정비소에 도착했다.

뻔뻔함으로 중무장하고 정비소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를 또라이로 여기건 말건, 오늘 나는 승규를 봐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승규가 쉬는 날이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정비소 곳곳을 살펴봐도 승규의 자취는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의 나를 포기하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맞닥뜨린 허무한 결과에 마음이 끝없이 허탈해졌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승규를 볼 수조차 없다는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내가 현재의 승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고작 이 정비소 하나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아무리 승규가 보고 싶어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아는 유일한 단서에 매달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정비소 건너편에 차를 주차한 나는 무턱대고 그 자리에 서서 승규를 기다렸다.

서울에서는 드문드문하게 잦아들던 빗줄기는 경기도에 이르자 다시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정신이 거의 반쯤 나간 상태인 나는 우산을 잊은 것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먹갈색 구름으로 촘촘하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나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마냥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비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옷자락에 달라붙는 비의 끈적한 촉감은 나의 치졸한 미련을 닮아 있었다. 알고 있다. 지금 이러는 거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짓인 거, 승규에게는 짜증 나게 구는 짓인 거. 그게 다 맞다. 그런데도 지금 이때, 나는 그냥 승규가 보고 싶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마음에 지배당한 나는 오한이 스미는 몸을 덜덜 떨었다. 비는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이대로 모든 게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이렇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싶었다. 그러면 끝내 마법처럼 승규가 내 앞에 나타나 줄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승규는 정말 내 앞에 나타났다. 멀찍이서 진회색 티셔츠를 입고 까만색 장우산을 든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실루엣을 확인한 나는 빗물에 젖은 눈을 마구잡이로 비볐다. 아니나 다를까, 승규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너 뭐냐.”

내게 다가온 승규가 엉망일 게 분명한 나의 꼴을 위아래로 슥 훑어 내렸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오른손으로 우산을 꾹 움켜쥔 승규가 말했다. 승규는 내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나를 측은히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좋았다. 동정심이라도 괜찮으니, 나는 승규에게 이어질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싶었다.

“…….”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비로 엉망이 된 얼굴에 웃음이라도 올려보려 애를 썼다. 승규는 그런 나를 뜻 모를 표정으로 응시했다.

“……오늘 너 생일이잖아.”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수했다는 듯, 말끝을 흐린 승규가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말을 마친 승규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구겨졌다.

“승규야.”

하지만 내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승규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승규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북받쳐 오르는 마음에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빗물에 섞여든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도 나처럼 버릴 수 없는 게 있었던 걸까.

“…….”

나는 승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 승규로부터 아득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네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승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낮게 중얼거리는 승규의 목소리는 조금 스산하기도 했다. 승규에게서는 여전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승규는 지금까지도 나의 생일을 기억했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내게로 다가오지 않았다. 명백히 나를 경계하고 있는 승규의 머뭇거림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펐다.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니었어?”

“…….”

승규가 내게 따지듯 묻자 서러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내게는 아직 승규가 끝나지 않았다. 사실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승규에게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히끅거리며 울기만 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 줄기는 갈수록 거세져서 얼굴을 흠뻑 적셨다. 나는 온몸을 거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씨발, 진짜 돌겠네.”

불쑥 커다란 우산이 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갑자기 멎은 빗줄기에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빡였다. 내 팔목을 덜컥 붙잡은 승규가 나를 우산 안으로 당겼다. 승규는 입을 꽉 다물었다. 슬쩍 마주친 승규의 얼굴에는 일종의 패배감이 어렸던 것 같다.

빗물에 젖은 내 몸이 승규의 상반신에 바짝 붙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피부는 갑작스럽게 닿아오는 후끈한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나는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승규를 올려다봤다. 무표정한 승규의 얼굴에서는 위압감이 풍겼다.

그대로 나를 잡아챈 승규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를 헤치고 걷기 시작했다. 승규의 걸음은 무척 커다랬고, 조금은 신경질적이었다.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는 승규는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붙잡고 간다기보다, 나를 거의 질질 끌고 간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가만히 서서 눈물을 펑펑 흘릴 때는 몰랐는데,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여운이 남았는지 온몸의 뼛속이 웅웅 울리는 것 같고 두통이 지독하게 일었다. 솔직히 승규의 속도를 쫓아가는 게 버거웠다. 무턱대고 나를 잡아끄는 승규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상황에 대한 의문이 솟아났다.

“승규야, 우리 어디, 흑, 가?”

나는 벅찬 숨을 내뱉으며 승규에게 물었다. 승규는 그런 나를 조금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너 다 젖었잖아.”

“…….”

“샤워라도 하고 가.”

히끅. 딸꾹질을 삼켜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규를 바라봤다. 내게 흘긋 닿았다 떨어진 승규의 시선은 다시금 정면을 향했다. 승규의 발걸음이 아까보다는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대로변에 멈춰선 승규가 택시를 잡았다.

***

여름 감기가 그새 스며든 것일까, 추웠다. 피부 위로 쏟아지는 따끈한 물줄기를 맞으며 샤워를 하면서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오한에 이가 딱딱 부딪히면 머릿속을 점령한 두통이 징징 울려댔다. 몸 위에 뜨거운 물이 쏟아질 때마다 시허연 김이 쉬익쉬익 올라왔다. 숨을 안으로 들이마시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공기가 입안을 적셨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샤워기는 조금 녹이 슬어 있었다. 잡아당길 때마다 조금씩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소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쏴아아, 물줄기가 세차게 쏟아지는 소리. 차르륵, 쏟아진 물이 몸 위를 흘러내리는 소리. 차아압, 손이 물에 젖은 몸을 문지를 때 생겨나는 소리.

나는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던 샤워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욕실의 얇은 문 너머로 승규가 밖에서 모든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했다. 샤워는 평소보다 길어졌다. 이미 몸을 여러 번 씻고 헹궈냈지만, 나는 계속해서 물을 몸 위로 흘려보냈다. 그럴 때마다 촤르륵 촤르륵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다시 욕실을 메웠다.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여러 번 꼼꼼하게 닦아냈다. 한때 싸늘하게 식었던 피부에서는 열이 뜨끈뜨끈하게 오르고 있었다. 수건을 어깨 아래로 길쭉하게 늘어뜨려 몸을 최대한 가렸다. 물소리가 멎은 지도 아마 시간이 꽤 흘렀을 것이다.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욕실 문을 바라보며 나는 심호흡했다. 조금 어지러웠다. 마침내 문을 열기까지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신발장 근처에 위치한 욕실 문 앞에는 새 속옷과 반팔 티, 반바지가 가지런히 접혀 놓여 있었다. 허리를 굽힌 나는 옷가지를 느릿하게 집어 들었다. 그대로 품에 꼭 껴안아 버렸다. 산뜻한 빨래 냄새 속에 승규의 체향이 연하게 배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맡는 냄새인데도 코끝에 닿는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코를 박고 그대로 흠뻑 잠겨 들었다. 승규가 은은하게 퍼졌다.

사이즈가 큰 승규의 옷을 걸쳐 입은 나는 어설프고 어색했다. 당연히 젖은 나의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이대로 승규의 옷을 입은 채 움직이기가 어색해 한참을 망설였다. 새삼스럽게 긴장이 됐다. 그렇게 얼떨결에 승규에게 푹 잠겨버린 나는 조심스럽게 방 안을 향했다.

겨우 부엌이 하나 딸린 승규의 원룸의 크기는 아담했다. 승규는 원룸 안쪽 부엌에 있는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서고 있었다. 하. 승규의 모습을 본 순간 입술 새로 젖은 숨이 배어 나왔다.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승규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젖은 발바닥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짜아악 하는 소리가 났다. 묵묵하게 바닥을 보고 있던 승규의 고개가 서서히 위를 향했다. 마침내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승규와 나 사이에는 고작 몇 뼘의 거리만 존재할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만져지지 않는 무언가가 파사삿 튀었다.

여전히 비의 기운을 머금은 공기는 어딘가 질퍽했다. 한 발짝, 두 발짝, 짜악, 짜악, 나는 그에게 더욱 가까워진다. 마침내 코끝이 닿을 거리가 되었을 때, 나는 승규에게 키스했다. 놀랍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승규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

“하아, 하아.”

골반 위쪽을 지분거리며 티셔츠를 끌어 올리는 손길에 몸이 아치를 그리며 휘어졌다. 침대 위로 솟아오른 허리가 거칠게 들썩거렸다. 그대로 내가 입은 티셔츠를 끌어 올린 승규가 드러난 갈빗대를 매만졌다.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승규의 손이 맨살에 닿자 나는 몸서리쳤다.

승규는 지나치리만큼 거칠고 다급했다. 엉망으로 헤집어진 셔츠가 머리통에 걸려 시야가 어두워졌다. 탈의를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않은 채, 승규의 손은 곧장 내 다리 사이를 향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아귀가 서서히 딱딱해지는 중심을 바지 위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손바닥을 넓게 펴서 빠르게 마찰시키기도 했다. 얇은 천 사이로 너무하리만큼 적나라한 촉감이 느껴졌다.

다리를 어정쩡하게 벌리며 승규를 받아내던 나는 양팔을 위로 쭉 뻗어 아직 머리에 걸려 있는 티셔츠를 스스로 벗어내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천 쪼가리를 들어내자 무방비해진 나를 치열하게 바라보는 승규가 보였다. 달뜬 듯한 승규의 표정, 흥분이 묻어 있는 눈동자. 승규의 시선이 닿는 겨드랑이와 유두가 간지러워서 몸을 뒤척였다. 여전히 내 중심을 쥐고 있는 승규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나는 팔을 뻗어 윗옷을 벗은 채인 승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나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피부의 질깃한 촉감이 손끝에 생경하게 닿았다. 그대로 승규를 위로 끌어당겨 승규의 쇄골에 입 맞췄다. 살짝 혀끝으로 핥아내자 땀이 슬쩍 배어난 피부가 달큰하고 짭조름했다. 그마저 좋았다.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승규의 목덜미와 어깨 근방에 쪽쪽 입술을 찍었다.

내 입술이 몸에 닿을 때마다 승규가 크게 헐떡였다. 승규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나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주물렀다. 그러다가 손가락이 머리칼을 파고들어 와 두피를 꽉 감싸 쥐어 온몸이 오싹해졌다.

허겁지겁 옷을 벗겨내고 서로를 겨우 만지기 시작한 단계였다. 그런데도 이미 다리 사이는 뜨거웠다. 아랫도리에서는 승규의 발기한 중심이 내게 비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강하게 압박해오는 성기가 뜨겁게 맥동했다. 달뜬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승규와 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대화가 소거된 채, 우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로의 몸을 탐했다.

승규가 예고 없이 내 뒤통수를 확 잡아챘다. 승규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데 정신이 팔렸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톰하게 부어오른 입술 새로 헉 하고 밭은 소리를 쏟아냈다. 아래에서는 맞물린 두 개의 성기가 둥그렇게 문질러졌다. 발끝이 간지러웠다. 벌게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는 승규의 눈동자가 뜨거웠다. 나는 홀린 듯이 스스로 바지를 끌어 내리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손바닥에 침을 퉤 뱉은 승규가 손가락 두어 개를 엉덩이 사이에 들이밀었다. 승규의 두꺼운 손가락이 마구잡이로 안을 들쑤셨다. 내벽을 넓히겠다는 목적은 분명했지만, 참을성 없는 움직임은 그 부분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상관없었다. 여전히 뻑뻑한 안쪽 때문인지, 승규가 인상을 썼다. 나는 다리를 벌려 그런 승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내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승규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뽑아냈다. 이미 승규의 성기는 바지 아래로 불뚝하게 솟아있었다. 지퍼만 대충 내린 승규가 곧바로 두툼한 귀두를 입구에 들이밀었다. 툭, 툭. 승규가 나를 두드렸다. 생생한 감촉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리를 넓게 벌린 나는 최대한 엉덩이를 이완시키려 노력했다. 빨리 승규와 이어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응…….”

엉덩이 사이가 쩍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기둥이 안을 파고들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과거의 승규가, 내가 낯설어하는 현재의 승규가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어느새 안쪽 깊숙이 자리한 승규의 성기에 턱 하고 밭은 숨이 터졌다.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듯한 포만감에 나른한 신음이 터졌다.

“후으…….”

승규가 몰아쉬는 더운 숨이 얼굴 위로 안개처럼 퍼졌다. 잠시 안쪽에 그대로 머무르던 승규는 예고 없이 거칠게 하반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적나라한 욕망을 채우는 움직임이었다. 퍽퍽 안을 무자비하게 쳐올리는 성기에 힘이 쭉 빠진 나의 다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나는 매달리듯 승규의 상체를 꽉 껴안았다.

“승규야, 하윽.”

“…….”

“아, 흐윽, 승규야!”

그런 승규를 자제시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더 부추기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끈적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트리고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그냥 승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나와 몸을 섞고 있는 사람이 다른 누가 아닌 승규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하…….”

승규의 성기가 안에서 울컥하고 그 크기를 부풀렸다. 더욱 깊숙한 곳으로 승규가 파고들어 왔다. 승규에 의해 온몸이 꿰뚫린 나는 가슴팍을 파닥거리며 눈물에 젖어 드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쑤욱, 하고 밖으로 밀려 나간 성기가 다시 쾅,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윤희수.”

흥분에 잠겨있는데도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승규가 나를 불렀다. 겨우 눈을 뜨고 승규를 올려다보는 나의 목덜미를 잡아챈 승규가 내게 키스했다. 위로는 혀가 거칠게 농락하고, 아래로는 성기가 거침없이 헤집었다. 그렇게 승규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 견딜 수 없이 기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흐윽, 으으, 승규야아.”

“흐….”

“승규, 스, 흐윽.”

승규는 계속해서 나를 침입했다. 승규가 자신을 모조리 쏟아붓듯 내 안을 쳐올릴 때마다 나는 가득하게 차올랐다. 승규가 내게 들락거릴 때마다 나는 저릿한 여운에 파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공허가 비로소 채워지고 있었다.

승규가 지나간 자리에는 둔탁한 통증도 일었고, 아릿한 쾌감도 퍼졌다. 그러나 그 둘 중 어느 것에도 나는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지금의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후으…….”

이윽고 승규가 내 안에 사정했다. 한풀 꺾인 성기가 내게서 쑥 하고 빠져나갔다. 여전히 쫙 벌어진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채 다물리지 않아 까맣게 빠끔거리는 구멍에서 승규의 정액이 찔끔 흘러나왔다. 개폐를 반복할 때마다 희고 끈덕진 액체가 조금씩 새어 나와 침대 시트에 고였다. 승규의 시선이 부끄러운 다리 사이에 달라붙었다.

승규와 나는 섹스했다. 저질러 버린 일이었다. 명징한 증거물을 마주하는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절정까지 치달았던 흥분감이 썰물처럼 쓸려가고 달아올랐던 몸이 삽시간에 식어버리자 가슴이 바짝 뛰어올랐다. 아직은 감당해야 할 것들로부터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는 승규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후회하고 있는 걸까. 승규는 어딘가 부서진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이대로 승규가 내게서 다시 멀어질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또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팔을 뻗어 승규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덜덜 떨리는 손바닥으로 승규의 얼굴을 더듬으며 그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게서 고개를 슥 돌린 승규는 나의 입맞춤을 피했다. 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승규를 올려다봤다. 평소보다 좀 더 들뜬 승규의 얼굴은 섹스의 여운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승규의 입술에서 쌔액 하고 얕은 숨이 퍼졌다.

나를 응시하는 가라앉은 눈동자에 어두운 잿빛의 안광이 번쩍 비쳤다. 입을 꾹 다문 승규는 내 어깨를 잡아채고 내 몸을 그대로 돌렸다. 나는 얼떨결에 침대에 엎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승규가 내 위로 묵직하게 드리웠다. 나는 발버둥 치는 대신 눈을 꾹 감았다.

아래에서 슥슥 살덩이가 맞비벼지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의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입구에 딱딱한 성기가 들이밀었다. 내 허리를 붙잡은 승규가 삽입이 용이해지도록 내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큽. 낮은 신음과 함께 승규는 다시 한번 나를 꿰뚫었다. 거대한 성기가 한꺼번에 끝까지 쑥 밀려들어 왔다.

헉. 나는 겨우 숨을 뱉었다. 그러나 승규는 버거워하는 내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거세게 나를 몰아쳤다. 철퍽철퍽 소리와 함께 성기가 거칠게 드나들자 곧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풀썩 무너졌다.

섹스가 끝난 후 현실로 돌아오며 밀려드는 씁쓸함을 송두리째 거부하겠다는 듯, 승규는 그렇게 절정의 시간을 억지로 연장했다. 그렇게 승규는 내 안에 또 한 번 사정했다. 숨을 돌리는 것도 찰나였다. 다시금 부풀어 오르는 성기의 감촉을 엉덩이로 느끼며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헉 하고 숨을 뱉어낸 승규가 내 몸을 뒤집었다. 침대에 널브러진 나는 승규를 멍하게 올려다봤다. 승규는 스스로를 발기시키고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그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성기를 직접 쓸어 올렸다. 팽팽하게 부푼 성기가 고개를 꺼떡이기 시작하자, 승규가 침대에 나동그라진 내 다리 사이에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안으로 또다시 침범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는 나를 힐끔 쳐다본 승규는 개의치 않고 허릿짓을 더욱 거세게 더했다. 승규가 내게 단단히 세웠던 견고한 벽이 갈라지는 틈새로 애증이 거센 물줄기처럼 쇄도했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승규는 내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확인받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승규야, 그만, 흡.”

“…….”

“아, 흐읏, 제발.”

승규는 어떻게든 나를, 혹은 지금의 섹스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결코 예전처럼 나를 아끼지는 않았다. 아니, 승규는 나를 망가뜨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함부로 다뤘다.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섹스가 버거워 승규의 이름을 겨우 뱉어냈을 때, 승규는 나의 말을 듣는 대신 손을 뻗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승규의 상반신이 거센 힘을 가하며 내 몸을 짓눌렀다. 내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승규가 내 어깨를 꽉 물었다. 이빨 자국이 남을까 걱정할 틈도 없이 승규가 나를 몰아쳤다. 홧홧한 구멍을 수그러들지 않는 성기가 마구잡이로 쑤셨다. 퍽퍽 박아 넣을 때마다 어느덧 내 안을 가득 메운 끈적한 정액이 질질 넘쳐흘렀다.

입이 여전히 막힌 채 나는 팔다리를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승규는 개의치 않고 내게 그를 박아 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급기야 나는 내가 지금 승규에게 사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으…… 으으…….” 

마지막에 가서는 제대로 조이지도 못하고 지쳐서 축 늘어진 채 승규를 받아냈다. 몇 번의 사정이 반복됐는지도 희미했다. 감각이 온통 마비된 것처럼 얼얼해진 엉덩이 사이로 단단한 살덩이가 쑥 뽑혀 나갔다. 골반 위로 뜨거운 정액이 후두둑 흩뿌려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탈진했다.

언젠가 내 벗은 어깨 위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던 승규의 입맞춤이 그리워서 먹먹해졌다.

***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득한 밤처럼 깜깜하게 내려앉은 시야로 언젠가의 낡은 기억이 희부옇게 떠올랐다. 수줍은 웃음이 섞인 나직한 말소리가 들렸다.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포근함에 나는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숨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어린 승규와 내가 있었다.

‘진짜 괜찮겠어?’

알몸의 승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이미 쿠퍼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는 완전히 일어서 꺼떡거리고 있었는데 와중에 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좀 웃겼다. 이어진 전희로 승규 못지않게 나도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팔을 뻗어 승규의 허리를 당겼다. 내가 매일 잠이 드는 침대 위로 승규가 쏟아졌다.

내 생일날,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나눈 이후 우리는 고삐라도 풀린 것처럼 스킨십에 불이 붙었다. 간단한 키스와 애무의 수준을 넘어서, 서로의 발기한 성기를 매만지고 비비는 일도 왕왕 있었다. 지금껏 성적인 자극이 전무했던 나에게는 사실 그 정도의 접촉도 충분한 짜릿함을 안겼다.

하지만 단순히 흥분한 서로를 문지르는 것 그 이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갈증이 일었다. 끝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반드시 승규와 함께 그곳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삽입 섹스를 승규가 먼저 시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승규는 무슨 일이든 내가 아프거나 힘든 게 싫다고 했다.

나는 달랐다. 나를 뜨겁게 들끓는 눈으로 쳐다보는 승규가 그 데일 듯한 열정을 내 안에 모두 쏟아부어 줬으면 했다. 나는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 날을 틈타 승규를 집으로 불렀다. 평소처럼 오가는 스킨십이 진득해졌을 때, 계획대로 나는 승규를 그 이상으로 부추겼다. 

‘아응, 흐윽.’

승규의 성기에는 얇고 미끄덩한 콘돔이 씌워져 있었고, 내 엉덩이 사이는 축축하고 말랑한 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분명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 같은데, 실전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터질 듯이 부푼 승규의 성기는 쉽게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입구 주변에서 미끄러지기만 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우리는 서로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쌕쌕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안달이 났다. 더 확 벌어져야 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막상 딱딱한 끝머리의 이물감이 닿아오자 긴장한 주름은 조밀하게 좁혀들기만 했다. 승규의 귀두가 빙빙 돌 듯 엉덩이골에 주륵 문질러졌다. 원래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기관이 아니어서 그런 건가, 자책감마저 들려고 할 때였다.

‘아윽, 악!’

쑥, 하는 느낌과 함께 승규의 귀두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구멍이 확 벌어지는 느낌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순간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이를 꽉 악문 승규는 그대로 성기를 다시 뽑아냈다.

‘나 진짜 안 넣어도 돼.’

‘아냐, 그냥 해.’

‘희수야.’

승규는 나를 그대로 푹 끌어안았다. 승규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뱉는 숨결에서는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 흥분이 어지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여전히 꼿꼿이 발기한 승규의 성기가 내 허벅지 어딘가에 문질러졌다. 나는 손을 내려 콘돔이 씌워진 승규의 성기를 느릿하게 매만졌다. 내 손이 닿아오자 승규의 성기가 움찔하고 떨었다.

‘너랑 이어지고 싶어, 승규야.’

‘하…….’

‘빨리, 응?’

못 참겠다는 듯 승규가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그대로 내 몸을 뒤집었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엉덩이를 허공으로 높이 치켜든 부끄러운 자세를 했다. 승규의 커다란 손이 엉덩이 양쪽을 붙잡고 쫙 벌리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벌어진 구멍으로 차가운 공기가 간지럽히듯 닿아와 얼굴이 달아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승규의 성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라도 승규가 또 한 번 물러날까, 나는 이물감에도 입술을 꼭 다물고 신음을 참았다.

승규는 아주 느릿하고 조심스러웠다. 다물어지려고만 드는 고집 센 내벽을 서서히 벌리고 꾸역꾸역 들어왔다. 시간이 끔찍하도록 느리게 흘러갔다. 몸이 반으로 쪼개져 버린 듯한 얼얼한 느낌에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안으로 파고들던 승규가 잠시 멈추었다.

‘아, 흑, 승규야.’

그래도 이제 끝이구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좀 풀어졌을 때 승규가 더욱 깊숙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동굴의 끝이 건드려지는 듯한 느낌에 눈앞이 아득했다. 헉, 허억. 나는 제대로 숨을 내뱉지도 못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쉬이, 쉬이.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 승규가 내 호흡이 골라지도록 유도했다. 승규의 커다란 손이 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많이 아파?’

‘아니.’

‘희수야.’

‘나, 흐윽, 하나도 안 아파.’

나는 빤히 보이는 고집을 부렸다. 승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은 나를 살살 달래는 것처럼 어깨에 쪽쪽 입맞춤했다. 피부에 닿는 입술은 깃털처럼 부드럽고 포근했다. 승규는 내게 삽입한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기만 했다. 그래서 승규를 품고 있는 나의 몸도 느리게나마 조금씩 적응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승규를 돌아봤다.

‘넌 좋아?’

‘어, 좋아.’

‘…….’

‘좋아, 희수야.’

그렇게 승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전신을 지배하던 고통이 갑작스레 마취라도 된 것처럼 아릿하게 희미해졌다. 애틋하게 속삭이며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생경한 감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런 승규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승규가 슬쩍 올라가는 내 입가에 쪽 하고 입 맞췄다.

‘조금만 움직여도 돼?’

‘아, 흐윽, 응.’

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아랫입술을 꽉 문 승규가 느릿하게 내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승규의 골반이 내 엉덩이에 치받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승규가 헐떡이며 숨을 몰아쉴 때마다 꿈틀거리는 성기의 맥동이 내벽으로 전해졌다.

이런 게 섹스라는 건가. 아픈지도 좋은지도 모르겠는 와중에 내 얼굴에서는 눈물만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내 몸을 덮친 승규가 내가 고개를 다시 들도록 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승규가 걱정하는 건 싫어서 웃으려고 했는데,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애쓰는 바람에 오히려 더 꼴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승규는 순간 내 얼굴을 멍하게 쳐다봤다. 조금 더 깊이 삽입한 승규가 까끌한 혀끝으로 내 눈물을 핥아 올렸다.

‘아, 흑, 아윽.’

승규의 거대한 성기가 묵직하게 내 안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승규가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버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쾌감을 느끼기에 내 몸은 지나치게 설익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섹스가 처음인 승규도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와 이대로 완전히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마음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아, 쌀 것 같아.’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승규가 낮게 읊조렸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승규의 얼굴로부터 어깨에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애틋해진 기분으로 승규를 돌아보았다. 승규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이를 꽉 악물고 있었다. 나는 다 괜찮다는 듯 승규를 보고 눈을 휘었다. 나와 함께 있는 승규는 무엇도 참을 필요가 없었다.

‘헉…….’

밭은 숨을 내뱉은 승규가 내 등 위로 풀썩 엎어졌다. 내 안을 채우던 성기의 부피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스르륵, 얼얼한 와중에 무언가가 쑥 하고 빠져나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승규의 체온이 내게서 떨어졌다.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열띤 표정의 승규가 성기에서 콘돔을 빼고 있었다.

벗겨낸 콘돔에는 승규가 토해낸 정액이 찰랑댔다. 콘돔을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 승규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내 몸을 꽉 껴안았다. 나도 승규의 허리를 껴안았다. 땀이 배어난 살갗이 비벼지는데도 조금도 불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직도 다리 사이는 얼얼했고, 이제는 쫙 한계까지 벌어졌던 온몸의 근육까지 욱신 쑤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실 나는 승규에 대한 막연한 조바심으로 섹스를 서둘렀다. 넘치듯 사랑을 받으면서도, 나는 지금보다 승규가 나를 더 좋아했으면 했다. 옴짝달싹할 수도 없도록 나에게 푹 빠졌으면 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누구보다 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게 좋았다. 승규를 내 안에 품음으로써 비로소 승규를 완전히 가졌다는 충족감이 들었다. 빠듯하게 차오르는 충만함에 나는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승규가 내게 키스했다.

‘사랑해.’

고백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했다.

‘나도 사랑해.’

나는 수줍게 웃으며 그런 승규의 마음에 답했다.

그렇게 잠깐 후희를 즐긴 후에 섹스의 뒤처리를 하는 건 모두 승규의 몫이었다. 우리 집이니까 내가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는데, 승규는 내가 손 하나 까딱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온 승규가 내 온몸을 닦고 팔다리를 꼼꼼하게 주물렀다.

마치 상전을 모시는 듯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승규가 조금 낯간지러워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승규는 오히려 나를 숭배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예뻐. 사랑스러워. 좋아해. 나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매만지는 동안 달콤한 말들을 끝없이 속삭였다. 나는 이렇게 승규에게 안기는 순간이 절대로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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