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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일종의 의무를 동반한다. 물론 기본은 즐거움이지만, 가끔은 애인과의 소통이 지켜야 할 규칙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잠들기 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통화 같은 것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쌀쌀맞았던 오늘의 조승규 생각에 흠뻑 젖어 있던 나는 협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핸드폰은 제법 오랫동안 울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깜빡 잠들었어.”
나는 살짝 하품하고 졸린 목소리를 시늉했다. 지운이 형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얕은 목소리로 웃었다. 억지로 그를 따라 웃는 입꼬리가 뻣뻣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이내 달콤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아주 개 같았어. 솔직히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 희수 보고 싶다.]
“갑자기 왜.”
[그냥 맨날 보고 싶지 뭐.]
형이 뭉글뭉글한 목소리로 치대왔다. 지운이 형은 평소에도 애정을 듬뿍 표현하는 편이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나는 따끈해지는 핸드폰을 매만지며 입술을 다물었다. 이런 것도 다 성격 차이일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간지러운 말을 잘하지 못 하는 편이어서인지, 때로 형이 표현하는 마음들이 순도 백 프로의 진심일까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주어지는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역시 내 문제일 테지.
[너니까 이런 말 하지만 그런 환자는 정말 다신 안 보고 싶다.]
형은 오늘 병원에서 만났던 진상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운이 형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잘 만들어 별것 아닌 사건도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전화를 받을 기분도 아니었고, 오늘은 특히 지운이 형의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승규로 빼곡히 들이찬 마음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받아낼 공간이 없었다.
[희수야.]
“으응?”
평소보다 미적지근한 나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지운이 형이 나의 이름을 불러 환기했다. 나는 몸을 끌어당겨 맨들맨들한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슥 쓸어내렸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뭐, 그럭저럭.”
[흐음… 진짜?]
“…아니, 왜?”
[그냥. 목소리가 영 안 좋아서.]
메마른 입술을 살짝 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학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조승규 만나고 나서 기분이 바닥 치는 게 지운이 형한테까지 티가 날 정도인가 생각하니 자존심이 좀 상했다. 더 싫은 건 지금 이 상황에서도 손님, 나를 그렇게 쌩하게 부르고 완벽하게 타인으로 규정하던 승규의 잔상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으응.”
[사랑해.]
“응. 나도.”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과거와 현실이 교차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온전히 나의 현재에 머무를 수가 없어졌다.
***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핸드폰을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승규라는 이름이 액정에 적혀진 것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다 보면 꼭 내가 진짜 승규를 손에 쥐고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단순히 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만인데, 내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승규가 들어온 것만 같았다.
사실 전화를 할 용기까진 없었다. 승규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통화하며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가 그런 사이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하릴없이 핸드폰을 쓰다듬기만 하다 열 번 고민하면 겨우 한 번 승규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수학 숙제 있는 거 알지.] 나는 주로 그런 말 따위로 운을 뗐다. 승규는 내게 말을 걸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하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미 들켜버린 걸 알면서도, 나는 내 속내를 승규에게 다 보이는 게 두려웠다.
[ㅋㅋㅋ응] 십분 남짓이 지나 도착한 답장을 보면 혼자서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고작 액정에 띄워진 글자 따위인데, 내겐 승규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미 시간은 열두 시에 가까웠다. 아직은 풀어야 할 모의고사 문제집이 한 움큼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눈가를 비볐다. 여러 번 문자를 썼다 지웠다 했다가 손가락 밑이 땀으로 축축해질 때 겨우 보냈다. [언제 잘 거야?]
[나 원래 늦게 자] 이번의 문자는 곧바로 도착했다. 풋. 작게 웃음이 터졌다.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 마냥 좋았다. 승규도 늦게 자는구나. 지금쯤은 침대에 누워 있으려나? 책상에 있는 건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괜히 한번 아직 잠들지 않고 있을 승규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나는 승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됐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승규와는 그 후로도 드문드문 문자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승규와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승규를 마주하는 학교에서는 막상 승규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어딘가 꺼려졌다. 뭔가 잘못하는 느낌도 들고, 선생님 눈이나 친구들 눈 같은 것도 그냥 좀 의식이 됐다.
권태로운 표정을 하고 수업시간을 흘려보내는 승규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기지개를 쭉 켜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승규는 씩 웃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꼿꼿하게 칠판을 응시했다. 그런 순간들 외에는 승규와 이렇다 할 접점이 잘 생겨나지 않아서, 사실은 애가 탔다. 새삼스럽게도 우리는, 공통점이 없는 사이였다.
[내일 영어 단어장 쪽지시험 볼 거래] 잠들기 전 승규에게 문자를 보냈다. 영양가 없는 내용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승규는 항상 내 문자에 꼬박꼬박 답을 줬다. 늦더라도 삼십 분 정도의 간격이면 답장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답장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꼭 움켜쥐고 혹시 내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승규에게는 답장이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고작 문자 한 통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승규는 나를 손아귀에 쥔 것처럼 쥐락펴락했다. 나는 크게 낙담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고작 무시당한 문자 한 통에 사람이 하염없이 작아졌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의 어딘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학교에 도착하면 온 힘을 다해 승규를 노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등교를 하고 1교시가 시작했을 때에도 승규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승규가 정학을 당했다는 사실은 오후에야 알게 되었다. 소식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승규에게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새삼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고민에 잠겨 있던 스스로가 한심할 뿐이었다.
일단 싸움에 휘말렸다는 건 확실했는데 어디까지가 와전된 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승규가 개처럼 패대기친 공고 일진이 전치 6주 판정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고, 각목을 들고 본격적으로 싸우다 야밤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는 말도 있었다.
막상 승규가 교실에 있을 때는 친한 척 곰살궂게 굴던 반 친구들은 대체로 승규의 정학을 흥밋거리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 새끼 존나 쓰레기 아니냐. 누군가 농담조로 내뱉은 말에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온갖 유언비어가 쏟아지는 와중에 누구도 승규의 안위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담임마저도 승규의 정학에 대해서 무미건조한 태도였다. 학교에서 승규가 걱정되는 사람은 정말로 나 혼자인 것만 같았다.
나는 승규가 보고 싶었다. 애들은 승규가 절대 맞고 있었을 새끼가 아니라고 지껄여댔지만, 그래도 큰 싸움에 휘말렸다는데 혹시라도 승규가 다친 건 아닌지 마음이 쓰였다. 승규는 벌써 삼 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승규가 없었던 것처럼 학교의 일상은 평온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승규가 결핍된 나의 내면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교 후 나는 생활기록부에서 옮겨 적은 승규의 주소를 들고 승규가 사는 동네로 향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학원을 빼먹어서 가슴이 콩닥콩닥했지만, 꼭 승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서로 비슷하게 생긴 낡은 판잣집들이 빼곡하게 즐비해 있었다. 산비탈에 위치한 동네는 오르막길이 유난히 많아서 조금만 걸어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배어났다.
한참을 헤매던 나는 달랑 주소만으로 길을 찾는 게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무작정 승규를 찾아오겠다고 나선 나 자신이 조금 무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승규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까 걸었던 것처럼도 느껴지는 빛바랜 골목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반장?’
깊숙한 어둠 사이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대로 몸이 튀어 오를 듯 놀랐다. 서서히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승규의 얼굴이 멀찍이서 보였다. 승규는 골목길 안쪽의 녹슨 전봇대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녕.’
‘…….’
나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승규에게 인사했다. 그대로 담배를 바닥에 던져 끈 승규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랜만에 승규의 얼굴을 보자 마음 한구석에 빛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았구나. 살아 있었구나. 약간은 극단적이기까지 한 감정들로 심장이 조금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승규가 수상하다는 듯 나를 훑어 내렸다.
‘어…… 담임선생님이 가보라고 하셔서.’
나는 가장 간편한 변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승규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심드렁한 태도로 승규의 정학을 알리던 담임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승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
‘내가 와보고 싶었어.’
나는 또 한 번 승규의 앞에서 무력하도록 솔직해졌다. 비로소 의구심이 거두어진 승규의 얼굴은 아주 오묘한 빛을 하고 있었다.
승규는 나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승규를 보는 게 목적이었지 승규의 집을 확인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나는 빠르게 납득했다. 승규는 나의 팔목을 잡고 미로 같은 달동네의 골목길을 스라소니처럼 날렵하게 누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낡은 상회가 등장했다. 스크류바를 하나씩 사서 입에 문 우리는 가파른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에 그믐달이 어스름하게 빛났다.
조금만 움직이면 승규와 그대로 어깨가 닿을 것만 같아서 긴장됐다. 차갑고 달착지근한 스크류바를 쭉쭉 입술로 빨던 나는 내 바로 옆에 있는 승규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승규는 별이 우수수 쏟아지는 밤하늘에 시선이 온통 뺏겨 있었다. 승규가 내 쪽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나는 조금 안심한 채 승규를 대놓고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승규의 얼굴을 가까운 곳에서 마음껏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찰나, 정말로 승규가 내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 것 같자 금세 삐죽삐죽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을 바라고 왔다기보다는 사실 내가 견딜 수 없어서였지만, 그래도 사람이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는데…….
‘야.’
나는 부루퉁한 말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어두워진 동네는 조그만 소리도 생생하게 들릴 수 있을 만큼 고요했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승규가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승규와 눈이 마주친 나는 숨을 순간적으로 흡 들이켰다. 멋쩍은 기분에 괜히 모른 척 중얼거렸다.
‘…….’
내 말에 승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승규의 얼굴을 훑었다. 사실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승규를 처음 봤을 때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볼 한쪽이 퉁퉁하게 부어 있는 승규의 얼굴엔 시퍼런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뺨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밴드를 보고 이래서 그때 승규가 상처를 다루는 일에 익숙하다고 했던 건가 싶었다.
‘넌 아깝지도 않냐.’
‘응?’
‘잘생긴 얼굴에 흠집 나는 거.’
나는 속상했다. 승규가 누굴 패서 전치 6주로 보냈든 반병신으로 만들었든 골로 보냈든, 솔직히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승규뿐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얻어터져 상처를 입은 승규의 얼굴을 보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하…….’
승규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여전히 입술이 불퉁하게 쭉 튀어나온 나는 승규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 끝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낮게 탄성을 뱉었다. 승규의 웃는 얼굴은 언제나 내게 조금 마술적인 감각을 선사했다.
‘낯간지럽게 그런 소리를 하냐.’
‘뭐래.’
좀 오버 했나. 처음 보는 동네, 우연히 마주친 승규, 새까만 밤하늘, 고요한 공기, 반짝이는 별들. 어쩌면 이 모든 게 내 마음을 지나치게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승규가 나를 타박하자 기분이 따끔따끔했다. 스크류바를 와작와작 씹어 먹은 입안이 차갑고 얼얼했다. 나는 무릎을 당겨서 바짝 껴안고 고개를 푹 파묻었다. 어쩌면 승규의 시선이 닿아 있을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공벌레처럼 쪼그라든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둔 승규는 낮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유행하는 노래들을 잘 모르는 나는 승규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승규의 목소리가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일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웠다. 노래를 멈춘 승규가 운동화 뒤축을 콘크리트 계단 바닥에 툭툭 부딪혔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나는 승규를 돌아보았다.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승규의 눈동자는 아득한 어둠 속에서 오싹하리만큼 선명하게 빛났다.
‘왜 싸웠냐고 안 물어봐?’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승규가 물었다. 나는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들고 승규를 쳐다봤다. 보통은 그런 걸 궁금해해야 맞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단지 나는…….
‘그런 게 중요한가.’
그냥 승규가 보고 싶어서. 속상하게 얼굴 이곳저곳에 상처가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치지는 않은 승규를 보니까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어서.
‘…….’
아무 말 없는 승규가 나를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는데 승규의 눈동자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모든 일에 별로 미련 없이 툭툭 털기만 익숙한 것 같았던 애가, 나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윤희수.’
‘어?’
내 이름을 부른 승규가 한참 뜸을 들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다.
‘너 첫인상이랑 되게 다르다.’
‘……나 첫인상 어땠는데?’
‘음. 좀 새침한 느낌?’
그렇게 말을 하는 승규의 새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을 세세하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말 원래 자주 들어.’
어딘가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내뱉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새침하다는 건 아무래도 좀 부정적인 건가? 종종 듣는 얘기였는데 승규의 입에서 나오자 유별나게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승규가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니 마음이 뻐근하게 당겼다.
‘…….’
‘…….’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물어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제는 집요하게까지 느껴지는 승규의 시선이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가득 가두었다.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온 승규가 내 이목구비를 유심히 살펴봤다.
숨을 쉬면 그대로 숨결이 승규의 입술에 닿을 것같이 우리는 가까웠다. 빳빳하게 굳은 나는 제대로 된 생각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승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내 얼굴 곳곳을 관찰했다.
‘너 속눈썹이 되게 길구나.’
‘어?’
‘예쁘다.’
그러다 불쑥 승규가 내뱉은 소리에 그대로 심장이 펑 하고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정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내 심장이 주체하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뛰는 소리가 승규에게 그대로 들릴지도 몰랐다. 덜컥 겁이 나서 나는 화들짝 승규에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홱 돌리고 어깨를 뒤로 뺐다.
‘……너야말로 진짜 이상한 소리 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삐죽하게 입술을 내밀고 계단 바닥을 툭툭 걷어찼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평소에 거울을 볼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봤던 부분인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의식이 됐다. 괜히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손이 움찔 떨렸다. 나는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도 안 나는 것 같은데. ……예뻤나.
‘…….’
‘…….’
말없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승규의 얼굴이 근사했다. 그렇게 또 한 번 승규는 아주 고요하게 나에게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차마 손을 속눈썹으로는 가져가지 못하고, 대신 귓가를 매만졌다.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규와 단둘이 보내는 지금의 시간을 깨트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스크류바를 다 먹었을 즈음엔 할 말도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우리 사이에 용건이란 게 애초에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난 지 오래였다. 누군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법한데도 승규와 나 둘 중 아무도 먼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든 헤어짐을 유예하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승규와 나는 밤하늘을 함께 바라봤다.
이대로 모든 것이 하염없이 계속될 수도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하는 전화벨이 정적을 깨트렸다. 나는 주머니를 다급하게 뒤졌다. 액정에 뜬 엄마의 이름을 확인하자 그제야 아차 싶었다.
이미 시간은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처음 승규의 집을 찾으려고 했을 땐 이렇게 승규와 오랜 시간을 보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사고가 온통 마비된 것처럼,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미처 완전히 헤아리지 못했다.
‘나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엄마가, 그러니까 아니, 나 학원 빼먹어서.’
급격하게 불안해진 나는 횡설수설했다.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끊지도 못하고 꽉 움켜쥐는 손을 승규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승규였다. 가볍게 둔부를 털어낸 승규의 손이 나에게 내밀어졌다.
‘따라와.’
‘응?’
‘너 길도 모르잖아.’
나는 홀린 듯 승규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손이 잠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동안 세계가 뒤뚱 기우는 것만 같았다. 구불구불 난해하게만 보이는 길을 직관적으로 가르는 승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어귀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윤희수.’
‘응.’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그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승규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고마워.’
그렇게 승규가 비죽 웃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 가로등의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조금은 스산하게 빛났다. 어서 가라는 듯 승규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고 얼떨결에 승규에게서 돌아섰다.
전에 없는 나의 일탈에 집안이 뒤집혔다. 엄마의 호된 질책에도 나는 학원을 빼먹은 진짜 이유를 엄마에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나무라는 동안 대강 대답을 하면서도 사실 정신은 다른 곳에 온통 팔려 있었다. 이를테면, 걷기 시작한 지 한참 후에 망설이다 돌아봤을 때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승규의 길쭉하고 어두운 실루엣 같은 것에 대해.
나는 승규가 이미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지금보다 훨씬 더 승규를 더 좋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내며 초라한 골목길에 홀로 우뚝하게 서 있던 승규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얼핏 모든 일에 미련이 없어 보이던 승규는 사실은 지독한 외로움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 그 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서 내가 그 애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에 마음이 시렸다.
***
수요일 오후의 곱창집은 테이블이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왁자지껄한 번화가의 번잡함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나는 구석 쪽 자리에 앉아 진호와 술잔을 기울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아온 진호는 스트레이트인 주변인 중에서는 내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학교는 다닐 만해?”
“안 다녀 본 사람처럼 묻냐.”
“그래도.”
“아, 요즘 마케팅 수업 조별과제 팀원들이 무임승차하려고 해서 골치야.”
진호는 성적 정체성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내가 믿기도 하고, 감정 변화가 크게 없어서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다. 진호가 나와 같은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고등학교 때 처음 생긴 인연이 굳건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내가 대학원도 동 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돼서, 아직 학부생인 진호와 생활반경이 겹쳤다.
“꼭 그러는 애들 있더라.”
“말도 말아.”
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그런 진호를 보고 살짝 웃었다. 어느새 술잔이 비어 있었다. 서로의 술잔을 채워준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미국으로 박사 간다며. 준비는 잘 돼가?”
“음. 잘 모르겠어.”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진호의 말을 쓸어 넘겼다. 솔직히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해도 나 역시 학업적으로 뛰어난 성취와 업적을 달성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각종 논문과 컨퍼런스에 치일수록 내가 과연 공부를 업으로 삼을 만큼 재능이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생겨났다. 죽도록 노력해도 어차피 되지 않을 일이라면 애초에 노력을 시도하고 싶지 않은 비겁함.
“너 영어도 잘하고 집안도 서포트 가능한데 망설일 게 뭐 있냐. 갈 수 있을 때 무조건 가라.”
“하하.”
특히 지운이 형과 연애를 시작하면서는 안락, 혹은 정체에 대한 욕구가 더해졌다. 형은 언제나 내게 내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나 하나 정도는 자신이 커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사실 어느 정도는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굳이 애쓰지 말고 학교만 졸업하고, 탄탄한 직업과 보장된 미래를 가진 형과 동거하며 편한 일 찾고.
“하하.”
“농담 아니야. 헬조선 탈출해야지.”
진호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진호가 휙 털어 삼킨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조금 거친 손길로 잔을 잡아챈 진호가 알코올을 꼴깍꼴깍 삼켰다. 갑자기 빨라진 그의 음주 속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털어 봐.”
진호의 잔이 다시 한번 밑바닥을 드러냈다. 진호는 툭, 하고 말을 걸어왔다. 살짝 술기운이 오른 얼굴이 나를 정방향으로 향했다. 보수적인 무테안경 너머로 진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네가 아무 일 없이 나 만나자고 했을 리는 없고.”
진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느슨해진 눈으로 내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
“…….”
이번에는 내가 반쯤 채워진 소주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이 따끔거리며 증발했다. 무어라 부정하고 싶었지만, 진호의 말은 결국 사실이었다. 나는 입술에 살짝 묻어 있는 소주를 혀끝으로 슥 훑어냈다. 나 하는 양을 말없이 건너다보는 진호의 시선은 조금 신랄한 방식으로 나를 부추겼다.
굳이 뒤로 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진호를 만나고 예의상의 안부를 핑퐁처럼 건조하게 주고받는 동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며 목구멍에서 계속해서 들끓던 이야기가 있었다.
“나.”
“…….”
“조승규 만났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차마 진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확인할 수 없었다. 진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순간의 정적이 무거웠다. 하아. 진호가 기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걘 뭐 하고 살더냐.”
“자동차 정비. 그런 거 하더라.”
돌아본 진호의 얼굴이 조금 뒤숭숭해 보였다. 진하게 찌푸려진 눈가, 살짝 뒤틀린 입가.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그때의 승규를 기억하는 누군가에게 지금의 승규를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 역시.
“윤희수.”
“어어.”
“괜히 조승규 헤집지 마.”
“…….”
하지만 진호는 단호했다. 조금의 양보도 없는 엄중한 눈동자로 진호가 내게 판결을 내렸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격적으로 설명을 꺼내기도 전에 모든 상황을 이미 건너보기라도 한 듯 단정 짓는 진호의 태도가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걔 불쌍하잖아.”
이어진 말에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조금 출렁거렸다. 여전히 나를 날카롭게 향하고 있는 내 친구 진호의 눈동자. 승규가 처음부터 불쌍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승규를 불쌍하게 만들었다는 말인지 모호했다.
“…….”
“…….”
괜히 한번 곱창집의 전면 유리 너머로 밤거리의 풍경을 내다봤다. 유흥업소의 화려한 전단지가 바닥에 팔랑팔랑 흩날리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종이 위로 지저분하게 찍혔다. 찐득하게 엉켜 드는 덩어리를 꾹 삼켜내고 나는 다시 진호를 쳐다봤다. 그래. 차라리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진호의 앞에서 점잖은 척 덮어쓰고 있던 표피를 느릿하게 벗어냈다.
“진호야. 나 솔직히 옛날 생각 많이 나.”
“…….”
“너도 알잖아. 내가 걔만큼 좋아했던 애 없는 거.”
누가 뭐래도 난 승규를 정말 좋아했다. 승규는 내게 특별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승규가 나를 모른 척한 일에 대해서 지나치리만큼 휘둘리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잔인하도록 달라져 버린 현재의 관계가 아프게 심장을 후벼 팠다.
억지로 잊고 살았던 것들이, 외면하고자 했던 선택이 현실의 표면을 뚫고 올라왔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승규가 그런 식으로 내게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회한이 지독하게 스몄다.
“하아…….”
나는 그리움의 구름에 둘러싸였다. 내가 안달을 내는 대상이 과거의 승규인지 아니면 현재의 승규인지도 불분명했다. 아니 그 둘 사이에 명징한 구분선을 만들 수 있는지도 불확실했다. 하지만 단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나는 아직도 이렇게 미련투성이였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승규에게 또 한 번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누군가 한 명쯤은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 네 애인 되는 사람.”
“…….”
“잘 만나는 것 같더만.”
그러나 진호는 간단하게, 당연한 것처럼 나의 기대를 배반했다. 지운이 형과 만난 지도 이제 일 년 반이 되었지만, 진호가 내게 지운이 형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진호를 충분히 이해한다. 친구가 게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게이인 친구가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연애사에 직접 관여하는 건 그보다도 훨씬 버거운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진호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지운이 형의 얘기를 꺼낼 정도로, 진호는 내가 승규에 어떤 식으로든 얽매이고 다가가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내가 참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 뭐.”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진호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럼 애인 자랑 좀 해 볼까? 나는 과장스럽게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고, 진호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소주잔을 입안에 훅 털어 넣었다. 우리는 승규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화두에 오르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시시콜콜한 잡소리로 회귀했다.
계산을 마친 우리가 곱창집을 빠져나왔을 때 이미 가게는 마감 분위기였다. 술을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취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외진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를 향해 조금 걸어 나갔다. 겨우 택시를 잡고 몸을 아무렇게나 뒷좌석에 구겨 넣었을 때, 나를 빤히 바라보던 진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걔 그냥 내버려 둬.”
딸깍. 그리고 차 문이 단단하게 닫혔다. 택시가 매끄럽게 출발했다. 하, 순간 멍해 있던 나는 짧게 혀를 걷어찼다. 누가 보면 성진호 윤희수 친군지 조승규 친군지 모르겠네. 솔직히 처음에는 오기도 좀 들었고, 우둘투둘한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조금 씁쓸해졌다.
진호가 한사코 만류하는 것을 두고도 나는 승규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건 과거에 대한 미련일까. 나는 승규가 나의 현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마 다시 현재가 되기 어려울 거라는 것 역시, 어쩌면 본능적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렸기 때문에 더 아쉬움이 남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승규를 다시 봐야 할 것 같았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승규의 얼굴을 보면 무엇이든 확실히 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가까이에서, 한 번만 더. 그렇게 난 승규가 보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미안했어. 끝내 나는 그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그동안 너 많이 보고 싶었어. 용기 내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도 싶었다. 승규와 다시 대화할 수 있다면, 그래 일단 나는 사과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게 또 한 번 승규에게 상처 주는 행동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승규가 부디 나를 만나주길 바랐다.
***
수업을 마치고 담임이 언급한 방과 후 수업 신청서를 걷어 교무실로 향했다. 막상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담임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대로 신청서만 책상에 올려두고 갈까 하다가, 저번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을 때 그래도 교무실에 오면 선생님 얼굴은 뵙고 가야 한다며 담임이 꼰대 짓을 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담임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쨌든 담임은 생활기록부 작성이라는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였다. 담임이 나에게 다른 반 반장들보다 잡무를 더 많이 떠안기는 편이라는 사실이 좀 불만스러웠지만, 나는 결국 그의 잔심부름과 까탈에 군말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십 분이나 지났을까. 지루해진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교무실의 전경을 훑었다. 교칙을 어긴 학생들을 불러다 꾸지람을 하는 학주, 열정적으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영어, 의자에 느슨하게 기댄 채 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도덕이 보였다.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그림이었다.
교무실을 한 바퀴 빙그르 돈 눈동자의 종착점은 서류가 규칙 없이 어질러져 있는 담임의 책상이었다. 그냥 슥 지나가려던 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A4 용지에 적혀 있는 승규의 이름이었다. 17번 조승규.
주춤 망설였다. 그러나 불온한 호기심이 승리했다. 나는 책상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다. 종이에는 승규 외에도 몇 명의 반 학생들의 이름이 목록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마침내 문서의 제목에 다다른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2학년 4반 급식비 지원 대상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어, 희수 왔냐?’
때마침 담임이 자리로 돌아왔고, 목덜미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당황을 감추고 담임에게 종이뭉치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냐.’
‘말씀하신 방과 후 수업 신청서 걷어왔습니다.’
사실 먼젓번에 무턱대고 승규가 사는 허름한 달동네에 찾아갔을 때부터 승규의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감히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되는 승규의 영역에 침범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결코 이런 식으로 승규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승규의 내밀한 사정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알아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신청서를 건네받은 담임의 눈이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문서로 향했다. 담임은 아직 학생들의 명단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못한 나의 골똘한 시선을 의식했다.
‘올해 우리 반엔 유난히 기초수급자가 많아서 골치야.’
귀찮다는 어조로 담임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뒷덜미가 써늘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어정쩡하게 웃었다.
‘꼭 이런 애들이 보면 부모님도 이혼해서, 어른 손길이 안 가니까 개념이 없다고.’
‘…….’
‘거, 조승규만 봐도 딱 답 나오잖아. 가정에서 지도가 제대로 안 되니까 학교에서 늘상 사고나 치고.’
지금 생각해보면 담임은 반장인 나의 위치를 학생과 교사 사이의 중간자쯤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물론 그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겠지만, 그 때문인지 담임은 내게 이해를 구한답시고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희수 너 같은 애들만 반에 있으면 얼마나 편하고 좋겠냐.’
그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평소에는 그냥 흘려들었던 담임의 말이 내게 다소 가혹하게 다가왔다는 점이 예외였다. 승규에 대해 지금껏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예고도 없이 내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러자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담임에게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황급히 나서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승규에 대해서 좀 더 자연스럽게 알아갔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나는 단지 내가 느끼고 바라보는 승규의 모습 위로 외부적인 편견이나 왜곡된 견해가 덧씌워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 내 바람이 지나치게 순진했던 걸까. 아직도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교실을 둘러싼 작은 세계가 결코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종례를 위해 교실에 들어온 담임은 두꺼비처럼 부푼 배를 내밀고 교탁 앞에서 헴헴 헛기침을 내뱉었다. 훈화를 위한 훈화에 불과한 몇 마디를 의미 없이 나불거리다가 이주일 앞으로 다가온 수학여행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리고 수학여행비. 이런 거 좀 제때제때 납부하면 어디가 덧나냐?’
‘…….’
‘김원호, 유민재, 조승규, 최현식. 늦지 않게 수학여행비 내라.’
‘…….’
‘집에 돈이 없으면 어디다 꿔서라도 내든지.’
담임은 제가 내뱉은 농담이 퍽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혼자서 저열하게 낄낄거렸다. 나는 혼자서 괜히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뻣뻣해진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 외에도 교실의 환경 정리 상태에 대해서 꼬투리를 몇 개 잡은 담임은 그대로 학생들을 내버려 두고 교실을 떠났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책상 무더기가 교실 뒤로 쫙 밀려났다. 청소 시간이었다. 반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역할로 바빴다. 나는 물이 흥건하게 젖은 대걸레를 손에 들고 칠판 근처에서 교실 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걸레를 붙잡은 진호가 내 옆을 알짱거리다 말을 걸었다.
‘야, 담임은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
‘어?’
입방정을 떨어대던 담임에 대한 저주를 혼자서 속으로 퍼붓고 있던 나는 흠칫 놀랐다. 진호가 설마 내 속내를 읽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조금 당황한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진호는 불만에 찬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아니. 설마 진짜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 못 가는 애가 우리 반에 있겠냐고.’
‘…….’
나는 진호의 말을 거들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급식비 지원 대상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교무실에서 봤던 문서의 제목이 스쳐 갔다. 조승규. 종례 시간에 담임이 서슴없이 부르던 승규의 이름이 떠올랐다.
진호의 발언이 조금은 섣부르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확신에 찬 진호의 태도를 탓할 수 없었다. 우연한 계기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명단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아마 진호와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솔직히 그건 나와는 너무 먼 얘기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응?’
‘우리 이번에 제주도 가느라 수학여행비 비싸잖아.’
나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주섬주섬 말을 늘어놓았다. 승규를 변호하거나, 옹호하거나, 보호하고 싶었지만 어떤 태도를 보여야 알맞은지 솔직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정문에서 교실로 들어서고 있던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승규는 대화를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던 걸까.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어물어물 벌려져 있던 입을 꼭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시선이 조금 싸늘해진 것 같았다.
승규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 혼자 의식하고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모르는 척 승규를 평소와 다름없이 대하면 된다.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승규 쪽이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내게 묘하게 냉랭해진 승규를 대하는 나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이건 오해라고, 풀어야 한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던 승규와 나의 사이는 그날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승규는 결국 수학여행을 못 갔다. 방학이면 빈번하게 가족과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나는 제주도 여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승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승규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학교에는 출석해야 한다고 들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서 남아 있을 승규를 떠올렸다. 언젠가 동네 어귀에서 나를 배웅하던 쓸쓸한 실루엣이 겹쳐졌다. 승규는 외로울까. 모르겠다. 수학여행 동안 몇 번 승규에게 문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승규에게서는 답장이 없었다. 승규가 없는 제주도의 풍광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마지막 날 들른 동문시장에서는 모두가 가족을 위한 기념품을 사간다고 야단이었다. 엄마는 내가 여행을 가기 전부터 쓸데없는 기념품 같은 거 절대 사 오지 말라고 질색을 했다. 그래서 가족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소중한 이들을 위해 선물을 사느라 들떠 있는 친구들을 보자 마음이 조금 울렁거렸다. 내게도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너 장난해?’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방과 후 승규를 자료실로 불러냈다. 승규에게 초콜릿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쏘아 보던 승규는 별안간 불같이 역정을 냈다.
‘승규야.’
‘누가 이딴 거 필요하대?’
승규가 초콜릿이 담긴 봉투를 손등으로 거칠게 툭 쳐냈다. 허공에서 균형을 잃은 초콜릿이 이윽고 바닥에 엉망으로 나동그라졌다. 승규가 내게 처음으로 보이는 공격성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마음이 쓰여서, 승규를 챙기고 싶어서 한 일이었는데 승규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
‘…….’
여기서 뭐라고 변명을 덧붙이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았다. 다만 나는 등을 푹 수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초콜릿을 주웠다. 그것은 꼭 흐트러진 마음을 갉아 모으는 행위 같았다. 어디서부터 틀어져 버린 걸까. 나는 힘없이 승규와 나의 지금까지를 되새기며 초콜릿을 모았다.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솔직히 승규가 그대로 나를 내버려 두고 가버렸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승규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렀다. 허리춤에 팔을 올리고 비스듬한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승규와 눈이 마주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승규의 또렷한 동공이 순간 격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윤희수.’
‘…….’
‘너는 내가 불쌍해?’
승규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을 동정하느냐고 묻는 승규의 얼굴은 지독한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아니야.’
‘…….’
‘그런 거 진짜 아니야.’
나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나와는 전혀 다른 승규의 집안 환경을 처음 접하고 놀랐던 것은 사실이다. 승규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승규에게 동정심에 기인해 어떠한 행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보다도, 승규를 대하는 매 순간 나는.
‘난 그냥…….’
‘…….’
‘네가 좋아.’
감정에 북받친 나는 고백을 토해냈다. 속눈썹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흘러내렸다. 사실은 이렇게 간단한 거였는데, 왜 승규가 내 마음을 몰라주고 곡해하나 서러웠다. 나는 격해진 호흡으로 들썩이는 가슴팍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어느새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입술을 악물었다. 겨우 시선을 들어 승규를 다시 응시했을 때, 휘둥그레진 눈을 한 승규는 바보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마음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물꼬가 한번 트인 자리로는 거센 물살이 하염없이 몰아쳤다. 물결에 쓸려가는 나는 촛농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생활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학교에서 참여하고 있는 산학 프로젝트에도, 저널 제출을 목표로 작업 중인 논문에도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이따금 이어지는 지운이 형과의 만남이 나를 현실에 붙들어 놓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나마 형의 얼굴을 보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는 얕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실 그 끈의 조임은 너무나 빈약했다. 나는 어떠한 중력에 의한 것처럼 계속해서 승규에게로 끌려갔다.
솔직해지자면, 진호가 말린다고 해서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단순히 승규에 대한 회한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욕망은 입 밖으로 토해내는 순간 구체화한다. 오히려 진호와 대화를 나눈 뒤로 승규를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또렷해졌다.
학교에서 승규가 일하는 정비소까지는 왕복으로 두 시간 남짓이 걸렸다. 가지 못할 만큼 멀지는 않지만, 막상 운전대를 잡자면 사실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하지만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빼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하루걸러 승규가 일하는 정비소를 찾았다.
그러나 승규를 만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첫 번째로 정비소를 찾을 때도 이미 나는 굳이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엔진 오일을 갈러 온 이상한 손님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두 번째 방문을 기점으로 나는 정비소에서 급격하게 수상한 손님이 되었다. 먼젓번의 정비공은 떨떠름한 의구심을 품고 나에게 인사했다.
나는 자질구레한 이상을 핑계로 승규에게 차를 다시 한번 점검받기를 청했다. 그러나 더 이상 승규가 나의 차를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 승규는 나의 아우디가 정비소에 들어설 때면 항상 다른 차량을 손보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승규를 보게 해 달라는 나의 요구는 매번 곤란한 웃음과 함께 묵살당했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나 역시 승규는 나를 상대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모른 척하기엔 승규의 뜻은 몹시도 명확했다. 솔직히 자존심도 좀 상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만나서 얘기나 좀 하자는 건데 굳이 이렇게까지 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오기도 생겼다. 조승규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하게 모른 척만 할 수 있나 하는 비뚠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승규를 계속해서 찾아야겠다는 쓸데없는 고집이 솟았다. 지저분한 감정들이 애초에 내가 승규를 향해 가지고 있던 미안함 위로 보기 싫게 덕지덕지 붙었다.
너저분한 감정의 잡동사니에 잠겨 있다 보면 또 덜컥 무서워졌다. 정말 승규가 영영 나를 모른 척할 생각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승규는 이미 나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데, 과거에 갇혀 있는 것은 나 혼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나를 가장 두렵게 했다.
더 이상 무턱대고 정비소를 드나들 수는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결코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승규를 만나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전략을 변경했다. 승규의 퇴근 시간 무렵에 맞추어 정비소 건너편에 차를 세웠다. 숨을 죽이고 승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은 승규가 정비소를 빠져나올 때가 되면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우디는 엄마의 취향대로 한 번에 눈에 들어오는 붉은색이었다. 그래서인지, 열에 아홉은 나는 승규와 단박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열에 아홉은 승규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 모른 척 나를 지나쳤다.
내가 이렇게 끈질긴 구석이 있는 줄은 나도 몰랐다. 주변으로부터는 오히려 뭐든 쉽게 질려 하고 귀찮아하는 것이 단점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승규에 한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집요하게 매달려 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인내하고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규와 나의 사이에 열에 단 한 번의 얇은 가능성이 찾아왔다.
“이봐요.”
승규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듯, 승규는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말을 걸었다. 목소리의 표면이 살짝 거칠었다. 나는 오늘도 다른 날처럼 승규가 나를 지나칠 줄로만 알고 있었다. 기습적인 승규의 등장에 나는 바보처럼 입을 헤벌렸다. 기쁨, 서러움, 기대감, 서운함, 두려움. 여러 갈래의 감정들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그쪽 이러시는 거 저 불편합니다.”
“…….”
너울거리는 감정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의 사정과 별개로, 승규는 간단하게 자신의 용건만을 말했다. 과거의 내밀한 관계를 조금도 떠올릴 수 없는 깍듯한 존댓말이었다. 나는 낙담했다. 승규가 나에게 말을 건 것은 나에게 죽었던 관심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서가 아니었다. 승규는 단순히 곤란한 물건을 처치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은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나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승규의 엄격한 얼굴을 보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단순히 승규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딘가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승규가 내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나는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걸 능숙하게 숨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세상이 한번 어지럽게 빙글 돌았다.
다시금 밝아지는 시야에는 짜증스럽다는 듯 눈가가 이지러진 승규의 얼굴이 보였다. 승규는 답답하다는 듯 홱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우리가 뭐, 좋게 끝난 사이도 아니고.”
“잊어버린 건 아니네?”
승규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 역시도 그의 인생에서 그렇게 배제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그러나 나는 승규가 흘린 말꼬리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처음 정비소에서 지운이 형과 함께 마주쳤을 때부터, 승규는 나를 완전한 타인으로 대했다. 승규에게 나는 철저하게 모르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그 전제를 벗어날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 승규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이 나만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는 착란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승규가 처음으로 우리의 한때를 입에 올렸다. 물론 그는 전혀 긍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언급한 게 아니었지만, 나는 현재의 승규에게서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과거의 승규에 대한 실마리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일말의 존재감이나마 나는 여전히 그에게 어떤 기억으로 존재했다. 그 사실만으로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뭐라고?”
승규가 어이없다는 듯 맞받아쳤다.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다소 매서웠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았다. 마침내 승규에게서 보이기 시작한 틈을 놓치지 않고 확 벌려 젖히려 시도했다.
“나 잊어버린 건 아닌가 보다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박또박 명확하게 얘기했다. 혀끝을 가볍게 찬 승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입가에 피식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가 비릿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로 나를 흘긋 내려다보는 승규의 시선에 얕은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전에 본 적 없이 싸늘한 승규의 시선에 뒷목이 선득해졌다. 나는 혹시나 이대로 승규가 달아나버릴까 아찔했다. 더듬더듬 팔을 뻗어 승규의 손목을 잡았다. 승규는 즉시 반응했다. 못 닿을 것에라도 스쳤다는 듯 거칠고 짜증스러운 손길로 나를 털어냈다.
“승규야. 그냥, 잠깐 얘기만 해 줘.”
“…….”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승규에게 내쳐진 손이 충격으로 얼얼했지만 그대로 멈춰 있을 수도 없었다. 승규에게 스쳤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꽉 부여잡은 나는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차라리 비굴해진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말을 계속할수록 승규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초조해졌다.
“야.”
“어?”
“좀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로봇처럼 고저 없었던 승규의 목소리에 돌연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승규를 바라봤다. 승규가 억눌러온 감정의 정체는 선연한 원망이었다.
“이럴 입장 아닌 거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승규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내 그가 내비치는 감정이 날카로운 검처럼 내 심장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냥 나는…….”
“후…….”
“너한테 미안해서…….”
나는 반드시 승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에 휩싸였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승규의 얼굴을 보기 위한 핑계였을까. 막상 그 말을 승규의 앞에서 내뱉게 되는 현실의 순간은 한없이 초라하고 일견 치졸했다. 나는 형형하게 눈을 뜨고 있는 승규 앞에서 하염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너 정말 사람 질리게 한다, 윤희수.”
“…….”
“좀 적당히 해라.”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나는 차마 그를 붙잡지도 못했다. 승규가 떠나간 자리에 바람이 휭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표정으로 내게서 돌아서는 그를 보며,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나는 한때 나에게 하염없이 따뜻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