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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화창한 날이었다. 바람 한 점 찾을 수 없는 한적한 공기가 눈이 아리도록 청명했다. 말끔하고 매끄럽게 닦인 차의 전면 유리는 투명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반짝반짝 반사했다. 차창으로 고개를 향하면 따뜻한 기운이 코 아래에서 슥 하고 퍼졌다. 부드러웠다.
평화로운 일상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인공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억지로라도 전혀 흠결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샘 스미스 노래 별로래두.”
“왜. 좋잖아.”
“몰라. 느끼하단 말이야.”
지운이 형은 보란 듯이 카 오디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샘 스미스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나는 밉지 않은 눈으로 그런 형을 흘겨봤다. 형도 나도 이번 주말의 교외 데이트를 기다려 오고 있었다.
모든 계획은 예상대로 평탄하게 흘러갔다. 굳이 불평할 거리를 찾자면 나와 살짝 엇나가는 애인의 음악 취향 정도일까. 그러나 연극처럼 오고 가는 사소한 투덕거림은 사실 단조로운 일상을 보완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까탈 부리기는.”
“뭐래.”
“이쁘다고.”
능청맞은 형의 대꾸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는 않을 형의 말끔한 옆선을 훑어봤다. 지운이 형을 만난 지도 이제 일 년이 훌쩍 넘어갔다. 긴장과 설렘이 채우던 자리를 슬슬 익숙함과 안정감이 대신하고 있었다. 처음의 짜릿짜릿한 기분은 없지만, 이대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대체로 나는 쏟아지는 애정에 흠뻑 담가진 채였다.
승차감이 좋은 볼보는 도로를 따라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운전석에 앉은 지운이 형은 핸들을 안정적으로 잡고 있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섰다. 전신이 나른해지며 슬쩍 눈이 감기려는 찰나였다. 신호대기를 할 때면 와이퍼로 전면 유리를 습관처럼 닦아내는 형이 순간 멈칫했다. 나는 사소한 균열에 눈을 치켜떴다.
“어. 워셔액이 떨어진 것 같은데.”
“흐음.”
“자기야. 잠깐 정비소 들렀다가 가도 될까?”
조금은 난처한 얼굴을 한 지운이 형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여 보았다. 지운이 형이 볼보를 애지중지하면서 관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지만, 일정이 조금 늦추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마다할 이유 역시 없었다.
나의 동의를 구한 지운이 형은 내비게이션에 가까운 수입차 정비소를 찍었다. 정비소로 이동하는 동안 지운이 형은 인터넷에서 읽은 유머 글을 전하며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솔직히 엄청 웃긴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적당히 대꾸하며 반응해줬다.
지운이 형이 정비소에 차를 정차시켰다. 이윽고 다가온 정비공에게 형은 간단하게 차의 상태를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조수석의 창문으로 느슨하게 돌린 채 상황을 방관했다. 애써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윽고 차의 보닛이 열렸다. 나는 등을 푹 수그리고 차를 수리하는 정비공을 멍하게 지켜봤다. 그의 기계적인 동작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딘가 권태로운 기분에 잠겨 들었다. 이렇게 불쑥불쑥 스며드는 지루함에 취약하다는 것이, 단정하게 정리된 내 일상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나는 차창 아래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정비소의 풍경은 정지해 있었다. 투박한 생김새의 타이어, 스패너, 공구함 따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빛이 바랜 사물들은 특별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소박했다.
“말씀드린 대로 와이퍼 교체까지 끝났습니다.”
수리를 마친 정비공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그가 지운이 형에게 건넨 별다를 것 없는 말에 순간 동공이 꽉 조여들었다. 들떠 있는 기운이 전혀 없는 담담하고 차분한 음성. 멀게 흩어진 기억의 어딘가를 자극하는 목소리였다.
목덜미가 단박에 뻣뻣해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운전석으로 향했다. 창밖에 있는 정비공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추가 차량 검진에 대해서 지운이 형과 대화를 나누던 정비공의 시선이 나를 가볍게 스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정비공의 표정이 미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정비공은 가늘어진 눈을 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전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평온한 기류가 뒤틀렸다. 그대로 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차량 검진은 다음 기회에 찾아뵙는 거로 하죠.”
“예. 언제든지 찾아주십시오.”
지운이 형은 세련된 매너로 정비공이 제안한 추가 차량 검진을 거절했다. 인사를 마친 정비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운이 형의 볼보로부터 돌아섰다. 나는 그의 너른 등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지운이 형은 내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비공과 내가 교환했던 오묘한 눈빛에 대해서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차량이 정비소를 빠져나와 다시 도로로 향하는 동안 나는 방금 우연히 마주친 정비공에 대한 생각에 정신이 온통 팔렸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어둡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끝없이 철렁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균열은 더욱 크게 번져나갔다. 굳건하게 의지해오고 있던 평범한 일상이 뿌리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운이 형이 하는 농담에 더 이상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육체는 현재에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나의 정신은 언젠가의 내가 내팽개친 과거를 향해 끝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 뒤로 데이트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서 밖에 있기가 곤란하다고 지운이 형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지운이 형은 나의 의사를 대체로 존중해주는 편이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한편, 자신이 준비한 데이트 코스를 선보일 수 없었던 데에 대한 아쉬움 역시 슬쩍 내비치는 점이 지운이 형답다고 생각했다.
형은 나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줬다. 점심때쯤에 밖으로 나갔는데, 집에 돌아온 후에도 아직 날이 채 어두워지지 않았다. 길지 않은 외출이었지만 나는 온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피로했다.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마친 후에도 무기력한 기분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겠네.”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오피스텔에서 혼잣말을 읊조렸다. 넓은 공간에 희미한 목소리가 웅웅 번져나갔다. 사실은 아직도 속이 울렁거렸다. 시야까지 어지럽게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나를 스쳐 지나간 정비공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대로였다.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던 또렷하고 단단한 눈동자, 나를 사랑한다고 나밖에 없다고 말하던 선이 뚜렷한 입술.
승규였다.
***
따끔따끔한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몸을 사용하는 데는 영 젬병이었다. 체육 시간에 달리기 연습을 하다가 와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흙바닥에 쾅 엎어지고 말았다. 체육복 바짓단을 조심스럽게 끌어 올리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피범벅이 된 무릎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순간 나에게 집중된 시선이 창피해서 나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선생님! 반장 양호실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양호실 같은 거 안 가도 된다고 센 척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피가 질질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무릎이 솔직히 너무 아팠다. 나는 절뚝거리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래알이 끈끈하게 들러붙은 무릎을 감히 손으로 훑어 내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체육 시간에 땅에 엎어진 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고, 또 자랑할 만한 일 역시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양호실에 혼자 다녀오려고 했었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급작스럽게 내게 닿아오는 단단한 어깨의 체온에 눈살을 찌푸렸다. 옆을 힐끔 돌아보았다. 조승규. 같은 반이지만, 솔직히 나에게는 영 낯설기만 한 인물이었다.
‘괜찮은데…….’
‘그래, 네가 희수 데려다주고 와라.’
혹시라도 수업 내의 사소한 사고가 큰일로 번지면 곤란한 것은 그였으니, 양호실을 향하는 내게 누군가를 동반시킨 것은 체육 딴에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내 팔을 뻗게 해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한 승규는 빈틈없이 나를 부축했다. 바짝 붙은 우리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양호실로 향했다. 타인과 지나치게 밀착하자 심장이 반사적으로 빠듯하게 뛰어올랐다.
사실 승규와는 같은 반이긴 하지만 지금껏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공부에 모든 신경과 관심을 기울이며 어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늘 노력하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승규는 요란한 싸움에 자주 엮이며 선생님들에게 반항하는 불량아였다. 그런 우리 사이에 이렇다 할 접점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꼭 붙어 양호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예의상 내게 많이 아프냐고 묻는 승규의 질문과 그냥 하고 얼버무리는 나의 대답이 전부였다. 승규와 내도록 붙어 있는 일은 어쩐지 조금 숨 막히게도 느껴졌다. 사실 나는 승규를 의식하느라 무릎의 아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순간, 나는 승규가 굳이 왜 나를 부축하겠다고 자원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양호 선생님 안 계시네.’
진득한 시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승규와 양호실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거의 해방감에 가까웠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양호 선생님의 부재라는 또 하나의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승규가 떠미는 대로 엉거주춤 양호실의 침대에 앉았다.
‘나 솔직히 그냥 수업 째고 싶어서 나왔는데.’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한가득 어려 있었다. 한쪽 입꼬리만 쭉 끌어당기는 웃음이 근사해서 나는 멍하게 그 얼굴을 쳐다봤다. 승규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나는 그가 익히 알려진 반항아적인 면모 그 자체보다도 차라리 특출 나게 잘생긴 저 얼굴 때문에 오히려 더 눈에 띄는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왔다.
‘…….’
승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자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승규가 방금 내게 한 말을 곱씹었다. 그냥, 승규가 왜 나를 따라왔는지 잠시나마 혼자서 고민했던 게 조금 쑥스럽게 느껴졌다. 승규에게는 단순히 수업을 빠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귀찮게 됐네.’
‘응?’
‘봐봐.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승규가 침대에 앉아 있는 내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무릎 위로 체육복이 걷어 올려진 내 다리를 확 잡아당겼다. 말랑한 맨살에 닿는 까끌한 손바닥의 감촉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윽고 승규가 소독약을 너덜너덜한 상처에 바를 때 나는 거의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승규의 손짓은 너무나 거침없었고 지나치게 예고 없었다.
‘엄살은.’
내 무릎을 내려다보는 승규의 속눈썹이 짧고 가지런했다. 입가가 조금 들썩이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승규는 하던 일에 집중했다. 어느새 가지런히 정리된 상처 위에 연고가 살살 발렸다. 그 위로 승규는 밴드를 꾹 하고 눌러 붙였다. 따끔따끔하던 상처가 어느새 간질간질거렸다.
‘…….’
‘…….’
무릎의 상처를 만지느라 승규는 이미 나와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는 상태였다. 그대로 승규가 좀처럼 내게서 물러나려고 하지 않아 손끝이 저릿하도록 긴장이 됐다. 승규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눈길을 빼앗긴 것처럼. 승규의 직선적인 시선이 나의 얼굴 위를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승규의 행동에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그, 고… 고마워.’
내가 고마움의 표시를 안 해서 그랬나 보다. 서둘러 뱉어내고 맞는 말을 했겠지 싶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승규는 도리어 내게로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찰박찰박 찰랑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피할 곳도 없었다. 나를 빼곡하게 직시하는 승규가 작게 웃었다. 커다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코언저리를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살짝 매만졌다. 마침내 승규의 손이 떨어지고, 승규가 내게서 조금 뒤로 물러났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머리 코에 묻었더라.’
고개를 사선으로 돌린 승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지나치리만큼 태연해 보이는 승규가 순간 내 마음에 불러일으킨 파장에 나는 조금 화가 났다. 눈가를 날렵하게 좁히고 승규를 째려보았다.
‘야.’
‘어?’
‘너 왜 나한테 잘 해줘?’
양껏 날카롭게 내뱉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사실은 좀 부끄러운 말이었던 것 같다. 내 말이 끝나고 순간 얼어 있던 승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하하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 좀 웃긴다.’
‘…….’
‘약간, 착각하는 거 좋아하는 타입?’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나친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걸 꼭 저렇게 얘기해야 하나. 분명 내가 억울한 상황이 맞는데, 나는 자꾸만 어딘가 궁지로 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승규가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하려고 했다.
‘너 빨리 가.’
고개를 푹 숙인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를 널찍하게 드리우는 승규의 그림자는 좀처럼 나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침대 근처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근데 반장.’
‘……어.’
‘너 이름이 뭐였더라?’
웃음기 어린 얼굴. 나에 대해 정말로 궁금해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진솔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승규가 내게 보인 최초의 관심이었다. 나는 그대로 승규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침대에 웅크린 채 승규와의 기억을 되새겼다. 7년 전의 과거와 내가 있는 현실이 촘촘하게 교차했다. 승규는 저렇게 살고 있었구나. 정비공이라니. 놀랍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신기한 기분이었다. 조금은 새삼스럽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승규는 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자동차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관심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7년 전의 관심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역추적한다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승규는 그런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기억하는 승규의 모습대로 지금의 승규를 바라봤다.
때 묻은 정비복을 입고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외제차를 수리하는 승규의 모습을 되새기자 어딘가 싱숭생숭했다. 그러다 걔는 허름한 정비복을 입고도 참 잘생겼구나 싶어서 심란한 와중에 웃음이 픽 터졌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좀 더 섹시한 느낌이 더해진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종착지는 결국 나를 바라보았던 승규의 짙은 눈동자였다. 내가 승규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승규는 어떨까? 지금의 승규는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그게 나는 궁금해졌다.
***
일부러 지운이 형의 퇴근 시간에 맞춰 공덕역 부근의 병원으로 출발했다. 불투명한 유리문을 밀자 산뜻하게 정돈된 내부 인테리어가 나를 반겼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얼굴의 간호사가 내게 가볍게 인사했다.
“김 원장님 뵈러 오셨어요?”
“네.”
나를 지운이 형의 싹싹한 후배쯤으로 알고 있는 간호사에게 선량하게 대답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운이 형의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운이 형은 막 백색의 의사 가운을 벗어 내리던 참이었다. 인기척에 돌아선 형은 나를 발견하고 눈을 아이처럼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병원까지는 어쩐 일이야?”
“형 보고 싶어서 왔지.”
나는 부러 평소보다 말랑말랑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지운이 형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가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었던 탓에 주말의 데이트가 어설프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나는 아마도 서운함을 느꼈을 지운이 형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짠.”
“오, 뭐야?”
“선물.”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종이 상자를 지운이 형에게 내보였다. 백화점 식품매장의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픽업해 온 디저트였다. 형은 깜짝 놀란 표정을 드라마틱하게 선보이며 내가 준비한 선물에 충분한 반응을 보였다.
“오늘 일하면서 많이 힘들었지?”
“뭐. 별다를 거 있나.”
“단 거 먹고 풀라고.”
지운이 형이 껌뻑 죽는 눈웃음을 생긋 지어 보였다. 지금의 나는 지운이 형이 좋아하는 대로 앞머리를 가지런히 내린 채 연분홍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있다. 연애를 오래 하다 보면 상대의 취향을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긴다. 아니나 다를까, 업무의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뻑뻑했던 지운이 형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느슨하게 풀어졌다.
편안해 보이는 형의 얼굴을 보자 뿌듯했다. 연보라색 디저트 상자를 형의 데스크 위에 올려둔 나는 지운이 형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반듯하게 매어진 형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결을 매만지는 동안 형과 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였다.
“형, 주말에는 내가 미안했어.”
“으음…….”
“갑자기 그래서 놀랐지.”
형이 여전히 반쯤 걸치고 있는 가운 안에서 살짝 몸을 비비적거렸다. 내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최대한의 애교였다. 이런 행동들은 여전히 나에게 지나치게 간지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관계가 수월하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충실해야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말에 헤어질 때 다소 곤두서 있던 형의 태도가 흐물흐물하게 풀려가는 게 눈에 보였다.
지운이 형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살짝 부풀어 오른 나의 앞머리 가닥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눈이 나른하게 감겨들었다.
“너 아프다는데 형이 뭘 얼마나.”
“으응.”
“데이트야 다음에 또 하면 되고.”
나보다 살짝 키가 큰 지운이 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서운함은 완전히 풀린 것 같고.
“오늘 저녁 같이 먹을까?”
가운을 마저 정리한 형이 내게 물었다. 적당히 가볍게 물어오는 지운이 형의 말투가 부담스럽지 않고 산뜻해서 좋았다. 나이 차이가 좀 나기도 하고, 이미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형은 아직 대학원생인 나보다도 한참은 어른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건 지운이 형이 가진 분명한 매력 중 하나였다.
“아. 나 이따가 박사님이랑 연구 미팅 있어서.”
“그래?”
“응. 학교에 있다가 잠깐 나왔어.”
이대로 지운이 형과 저녁 식사를 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형은 언제나처럼 내 입맛에 맞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나를 안내하고, 적당히 유머러스한 이야기들로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나에게 선약이 있었다. 최근에 참여 중인 산학 협력 프로젝트 때문에 일정이 빠듯하게 꼬여서, 병원에도 겨우 시간을 내서 들른 참이었다.
내게로 다가온 형이 양손으로 내 볼을 움켜쥐었다. 형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볼을 쭉쭉 잡아 늘였다.
“얼굴도 오래 안 보여줄 거면서 이렇게 예쁜 짓 하면 어떡해.”
“에이. 느끼해.”
“틱틱거리기는.”
“하하.”
나는 작게 웃으며 얼굴을 감싸고 있는 형의 손을 슬며시 떼어냈다. 좀처럼 내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형의 시선은 끈끈했다. 사실 형과 나의 태도에는 온도차가 있었다. 나로서는 그냥 딱, 안타까운 감정이 조금 생겨날 정도였던 것 같다.
“태워다 줄까?”
“내 차 가져 왔어.”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응. 고마워.”
갑작스레 팔을 뻗어온 형이 내 손을 잡았다. 그대로 진료실을 빠져나가지 않고 맞잡은 손에 꽉 힘을 주며 미적거렸다. 축 처진 지운이 형의 눈썹이 마치 강아지 같았다. 오늘따라 영 나를 보내기 싫어하는 애인의 태도는 조금 유별났다. 형은 어쩌면 지나치게 감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두 시간 정도 이어진 연구 미팅이 끝나고 확인한 핸드폰에는 지운이 형에게서 온 카톡이 한참 쌓여 있었다. 조금 이따 확인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차의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은 학교로부터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는 않았다.
깜깜하게 내려앉은 밤의 도로를 차량이 속도감 있게 가른다. 나는 건물들이 무수히 뿜어내는 색색의 빛들을 멀거니 지켜보며 운전했다. 공연히 회상에 잠겼다. 오늘 지운이 형과의 만남을 짧게 되돌아봤다. 그리고는 미완성이었던 주말의 데이트를.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결국에는 차량 정비소에서 마주쳤던 승규를.
사실 지금 나의 삶에는 이렇다 할 부족함이 없다. 나는 집안의 지원을 풍족하게 받으면서 꽤 알아주는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해외 명문대에서 대단한 유학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능력도 꽤 인정받는 편이고 현재의 상태도 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연애사도 마찬가지다. 사람인 이상 사귀는 상대에 대해서 백 프로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내 애인인 지운이 형은 키도 크고 얼굴도 멀끔하고 섹스도 그 정도면 잘하는 편이다. 형의 직업이 전문의를 수료한 의사이기 때문에 볼보를 몰고 다니며 으쓱해하는 허세도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괜찮은 커리어 패스를 밟고, 괜찮은 애인을 만나며, 그렇게 괜찮은 삶을 향유한다. 지금의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특출나지는 않더라도 안정적이다. 사실 그 안정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아니, 만족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괜찮음 그 이상을 느끼지 못해온 나의 삶에 대해 때때로 회의감이 고개를 들고는 했다. 사실 솔직히 조승규 이후로는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승규는 내게 고작 괜찮음 그 훨씬 이상으로 특별했기 때문에. 승규와 했던 연애는 정열적이고, 행복하고, 충만했다. 승규가 나의 세상을 가득 채우면 나는 승규 외에는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첫 남자친구인 승규 이후로 지운이 형을 포함한 여러 남자를 오래도 만나보고 잠깐씩도 만나봤지만, 승규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강렬한 감각이 솔직히 잘 잊히지 않았다. 물론 톡톡 튀고 찌릿찌릿한 총천연색의 감정만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승규와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내가 그 시절에 대해 미화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내 인생이 단지 그럭저럭한 괜찮음보다 훨씬 더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려 준 남자. 텅 비워진 내면을 온통 채울 수 있도록 생생한 애정을 가득히 퍼부어주던 남자. 매일 그때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건 아닐지라도, 미련은 잊을 만하면 다시금 어리석게 차오르고는 했다.
처음이라 잘 몰랐었다. 그런 사랑이 삶에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당시에도 그걸 알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관계를 끝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나도 많이 어렸고, 걔한테 내가 잘못한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내가 가족에게 게이라는 사실을 오픈하고 살아가게 될 줄도 몰랐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때 승규에게 나는…….
차라리 걔랑 잘 됐더라면 어땠을까.
급기야 그곳에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희수, 방금 건 솔직히 좀 오버였어. 이미 오래전에 다 끝나버린 일이다. 정확히는, 내 손으로 끝내버린 일. 나는 저릿하게 밀려오는 죄책감으로부터 피하고자 버둥거렸다.
어차피 걘 게이도 아니었잖아. 나랑 헤어진 게 오히려 걔 인생에는 더 나았어. 걔도 나름 잘살고 있는 것 같던데 뭘.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내가 딱히 승규와 뭘 해보겠다는 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우연한 만남 이후 과거의 표면을 뚫고 현실에 치솟은 승규의 얼굴이 계속해서 눈에 밟힐 뿐이었다. 순간의 조우는 내가 늘 마음 한편에 간직해 오고 있던 미련을 그렇게 구체화했다.
나는 승규와 나 사이에서 이지러지고 말았던 어떠한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로, 차라리, 그냥 끝장 다 본 사이였으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오피스텔의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지운이 형의 메시지가 여전히 핸드폰 액정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
양호실에서 승규가 나의 이름을 물었던 그 날 이후로 승규는 나에게 남달라졌다. 교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교복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등을 꼿꼿하게 세운 나는 교실 가장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앉은 승규를 계속해서 흘끔흘끔 쳐다봤다. 승규는 마치 내 모든 시선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 당기는 것만 같았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칼, 날렵한 이목구비,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진 교복, 느슨하게 낮춰진 자세. 무엇보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관조적이고 무료한 시선.
주변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쾌활하고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가 되면 승규에게는 고독한 그늘이 드리웠다. 눈을 아래로 슬쩍 내리깔고 있는 승규에게는 우수 어린 듯한 인상이 풍겼다. 어딘가 시선을 잡아끄는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가 종내에는 나의 마음 역시 잡아끌었다.
그렇지만 승규는 사실 내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양호실에서 내 이름을 묻던 승규의 목소리를 혼자서 여러 번 되새길 뿐이었다. 나는 이제는 멀쩡해진 무릎을 매만지며, 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던 승규의 까끌한 손길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견딜 수 없이 심장이 간지러웠다. 자꾸만 생각이 났고, 자꾸만 보고 싶었다.
이런 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까.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 감정을 느껴본 적 없어서 나는 모든 게 자신 없었다. 설령 그것이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승규에 대한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수업이 끝나고 반 친구들로부터 걷은 국어 수행평가를 정리했다. 이번 수행평가는 성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과제였다. 번호별로 보고서를 한 묶음씩 정리하던 중, 종이 뭉텅이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17번. 승규의 순서였는데, 해당하는 보고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얕게 뛰기 시작했다.
교무실에 수행평가를 곧바로 제출하는 대신 나는 조금 미적거렸다. 사실 우리 반에서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승규뿐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승규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 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벅찼다. 이번 수행평가를 제때 내지 않으면, 이후 성적 관리가 어려워질 거라는 나름의 당위도 있었다.
학생들이 앞문과 뒷문으로 와르르 빠져나가느라 소란스러운 방과 후의 교실, 나는 내도록 바라만 보고 있던 승규의 자리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낡은 가방을 느긋하게 챙기고 있던 승규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 안녕.’
똑 부러지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가갔는데, 막상 승규를 보자 말문이 턱 막혀왔다. 아마 나는 분명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모양새로 승규에게 어설프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어.’
‘…….’
‘안녕.’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린 승규가 느릿하게 인사했다. 승규에게서는 이상하리만큼 또래답지 않은 여유가 풍기곤 했다.
‘너, 그… 국어 수행평가 안 냈더라고.’
‘…….’
‘그거 비중이 커서, 안 내면 성적에 지장 크거든.’
나는 조심스럽게 나의 용건을 내밀었다. 승규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손끝이 간지러워졌다.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손톱으로 손끝의 살을 꼭꼭 눌렀다. 사실은 승규가 국어 수행평가 따위에 조금도 관심이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교실은 어느새 많이 한산해졌다. 주위를 휘 둘러보자 이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승규와 나 둘뿐이었다. 승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 그런 거야?’
‘응?’
한참을 뜸을 들이다 불쑥 내뱉은 승규의 질문은 사실 좀 뜻밖이었다. 당황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승규를 봤다. 꼿꼿이 세운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승규는 여전히 다리를 넓게 벌리고 책상에 비스듬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반장이.’
‘…….’
‘안 낸 사람 하나하나 다 챙기는 건가 싶어서.’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니었다. 나는 수행평가를 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닌 승규였기 때문에 괜히 챙겨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렇게라도 승규와 겹쳐지는 순간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승규는 그런 나의 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
대답을 기다리는 승규의 얼굴을 바라보자 고민이 됐다. 솔직히 학우들의 성적을 걱정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반장의 허울을 억지로라도 뒤집어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미 승규에게 상황의 주도권을 뺏겼다고 생각되어서일까,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너한테만.’
‘…….’
결국, 솔직하게 말해버린 나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분명 빨갛게 달아올랐을 귀 끝이 화끈화끈했다. 아마도 승규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을 정수리가 따끔따끔했다. 아, 실수했다 싶었다.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걸 뭣 하러 일을 만들어서. 나는 이대로 승규에게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말을 걸고 싶었으면.’
‘…….’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를 하지.’
승규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나를 바라보는 승규의 얼굴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승규의 태도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어떠한 긍지가 그때의 그를 그다지도 돋보이게 했던 것일까? 창밖에서 쏟아지는 주홍빛 노을을 그대로 받아내는 승규의 옆선이 무척 근사해 보였던 것만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가자.’
간결하게 말한 승규가 훌쩍 큰 동작으로 책상에서 내려왔다. 나에게 다가와 가벼운 손길로 어깨를 툭 쳤다. 나는 속이 좀 울렁거렸다. 사람 마음 엉망으로 헤집어놓고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승규의 모습이 얄미웠다. 속에서 괜한 오기가 빠끔 고개를 들었다.
불덩이 같은 용기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치밀었다. 나는 승규를 거의 노려보듯 쏘아보았다.
‘핸드폰…….’
‘…….’
‘번호 알려줘.’
***
아침 수업이 교수님의 개인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어긋난 일상은 일탈을 부른다. 촘촘하게 짜여 있던 일정이 갑자기 텅 비어버리면 사람은 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역시 승규가 보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휴강은 한동안 고요하게 들끓고 있던 나의 충동에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했다.
아직은 사람이 드문드문한 이른 오전의 캠퍼스를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휘적휘적 걸었다. 엄마가 쓰다 물려준 아우디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기어를 확 잡아당겼다.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느새 나는 내비게이션에 주말에 들렀던 수입차 정비소의 주소를 찍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낭랑한 목소리로 길을 안내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 때마다 조금씩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입안이 살짝 마르는 것 같아 신경질적으로 생수통을 찾았다. 그러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도 갈증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룸미러에 부분적으로 비치는 나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다. 갈라진 앞머리가 조금 거슬렸다. 대책 없이 무작정 정비소에 찾아오기로 한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상념에 오래 빠질 새도 없이, 정비복을 입은 남자가 운전석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실루엣이 점점 뚜렷해졌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손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내게 다가온 정비공은 승규가 아니었다. 온몸을 갑옷처럼 감싸던 긴장이 무색하게 한순간에 맥이 탁 풀렸다.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창문을 내린 나는 고개를 살짝 빼고 불안한 눈초리로 정비소를 두리번거렸다. 승규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내게 다가온 정비공은 친절한 낯을 하고 있었지만 의아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정비공과 눈이 마주친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음.”
“네.”
“엔진 오일 갈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나는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나에게 간단한 설명을 마친 정비공이 자동차의 보닛을 열고 작업에 들어갔다. 팔짱을 낀 채 좌석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뭐랄까, 좀 허무하달까.
그 날 그렇게 승규를 만난 이후, 모른 척 덮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내게로 물밀 듯 밀려들어 왔다. 최근 승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굳이 승규를 찾겠다고 이렇게까지 정비소를 찾은 것은 역시 좀 바보 같은 짓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원래 오일을 교체해야 할 주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일 교체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보닛을 닫은 정비공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플러싱이 어쩌고 잔여물이 어쩌고, 나로서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에게는 방금 마친 작업의 우수성과 당위성을 증명할 것이 분명한 말들을 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기분이 조금 불안정했다.
“그럼 원래 서울 사시는 분이세요?”
“아, 네.”
“꽤 멀리까지 오셨네요? 오일 갈러?”
“…어쩌다 보니까요.”
정비공과 나누는 대화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과도한 사교성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은 항상 나를 불편하게 했다. 여전히 정비 센터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나는 인상을 옅게 찌푸렸다. 짜증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아무래도 아침에 강의가 취소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역시 굳이 이곳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었다. 대체 난 뭘 기대하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하려던 찰나였다. 차고에서 키가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나의 눈은 본능적으로 남자를 훑어 내렸다. 신발 끈이 느슨하게 풀어진 검은색 부츠. 기름때가 듬성듬성 묻어있는 정비복. 커다란 스패너를 꽉 쥐고 있는 거친 손. 살짝 땀에 젖어있는 목덜미.
그리고 마침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을 퍼뜩 떨었다. 소름이 오싹 돋아 오른 피부 위로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대로 큼지막한 걸음을 옮기는 승규가 내게서 완전히 멀어져 버릴까 봐 나는 바짝 조바심이 났다.
“저기, 죄송한데.”
“예, 손님.”
“저기 저분한테 차량 추가 점검 간단히 받고 싶은데.”
“네?”
“…괜찮을까요?”
나는 방금 막 엔진 오일을 간 정비공에게 아마도 영 생뚱맞게 들릴 요청을 했다. 차분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잔뜩 당겨진 입꼬리의 근육이 부들거렸다. 묘한 표정을 지은 정비공이 내 얼굴을 위아래로 슥 쳐다보았다.
“예. 뭐, 안 될 건 없는데.”
“그럼 감사합니다.”
“야! 승규야!”
우렁찬 목소리로 승규를 부른 정비공이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 차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무어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타들어 가듯 초조한 기분으로 그런 둘을 지켜봤다. 마침내 승규가 내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기 시작하자 심장이 무언가에 우지끈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승규는 내 쪽을 보는 둥 마는 둥 무던하고 친절한 음성으로 인사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승규를 올려다봤다. 심판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이윽고 승규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구김 없이 싹싹한 표정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굳었다. 승규는 동요했다.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의 온도가 시리도록 낮았다. 그대로 나를 꿰뚫어버릴 것만 같은 승규의 시선에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승규는 나를 오래도록 보지 않았다. 피하고, 외면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대로 내게서 돌아선 승규는 가뿐한 동작으로 차의 보닛을 열었다. 빼곡히 즐비한 부품들을 정밀하게 살펴보았다.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차의 부품들이 아니라 나 자신의 속내인 것만 같아서 부끄러웠다.
“차에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다시금 내게 다가온 승규는 놀랍도록 차분해져 있었다. 수더분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금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지도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나를 대할 때 생겨난 불필요한 감정을 싹 제거해 버린 듯, 승규는 나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다. 그냥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굴었다.
“엔진 상태 보니까 차를 좀 험하게 다루시는 것 같은데.”
“승규야.”
“오래 타시고 싶으시면 더 신경 써 주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조승규.”
나는 다소 절박해진 기분으로 승규의 이름을 불렀다. 승규는 못 들은 척 제 할 말을 이었다. 이제는 조금 처절해진 내가 승규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승규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나의 시선을 피하려는 승규와 억지로 눈을 마주했다. 순간 승규의 얼굴에 스쳐 간 짜증이 그대로 심장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승규가 나를 거부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런 상황조차 제대로 예상하고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단순히 승규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정비소에 무작정 와버렸다.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열린 창문으로 팔을 뻗어 승규의 손목을 잡기라도 해야 할까.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승규는 이미 내게서 성큼 멀어져 버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승규의 거침없는 뒷모습을 바라보자 뭘 더 어떻게 해 볼 의욕이 싹 사라졌다.
“…….”
카 오디오에 일부러 비트가 강한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았다. 차라리 다른 무언가에 정신을 팔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온통 승규뿐이었다. 처치 곤란한 물건을 쳐다보듯 성의 없었던 승규의 시선을 떠올렸다. 승규를 보러 가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문전박대를 당할 줄은 몰랐다. 심란했다.
승규는 그동안 나를 전부 다 잊어버린 걸까. 어쩌면 나는 승규에게 단순히 싫은 기억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시나 애틋한 마음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 그렇지만 어쩌면……. 제때를 만난 듯 미련은 진흙처럼 질퍽이며 마음에 똬리를 틀었다.
우리가 한때 공유했던 기억이 반드시 같은 색깔로 마음에 남아 있지는 않을 거라는 짐작은 했다. 그렇지만 나를 매몰차게 대하는 승규를 막상 마주하자 지독하게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