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와 단절된 성역은 죽음으로부터 도피한 자들에 의해 폐허로 전락했다. 인간들이 쌓아 올린 인공적인 빛은 자취를 감추었고 불그스름한 빛을 띤 달만이 어둠을 밝히며 서서히 녹아내렸다.
누군가 입에서 굴리다 뱉어 낸 사탕처럼 귀퉁이가 닳아 버린 붉은 달은 가까이 다가가면 코끝에 녹슨 쇠파이프 냄새가 묻어날 것 같았다.
아벤 굴드는 건물의 잔해 더미 위에 서 있었다. 적들은 혀를 길게 빼문 투견처럼 지친 얼굴로 아벤 굴드를 노려봤다. 오랜 시간 동안 그와 난전을 벌인 놈들의 눈동자에는 순수한 증오와 오기, 그리고 광기가 떠올라 있었다.
다만 라스푸틴은 아이슬러나 크롤리완 달리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지저분한 수도복을 걸친 광신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톱을 씹었다. 그는 마치 뭐라도 마려운 놈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아이슬러와 크롤리의 등 뒤에 숨어 아벤 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동료가 공동의 적을 공격할 때도 묘하게 소극적이었다. 원래 비겁한 녀석인데다가 권능 자체가 공격성이 떨어지는 편이라 두 사람은 라스푸틴의 태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오오오-.
악령으로 타락한 잿빛 영혼들이 아벤 굴드를 휘감으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라스푸틴에 의해 부정한 존재인 좀비로 생을 마감한 인간들이었다. 희생자들은 패잔병의 장례를 치르듯 기나긴 행진을 이어갔다. 자아를 잃은 영혼들이 붉은 달빛을 받으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광경은 섬뜩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구원과 자비를 갈구하며 아벤 굴드의 발치에 모여든 영혼들은 그의 몸에 채 닿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아벤 굴드와 오서독스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비릿하게 녹이 슨 달을 등진 아벤 굴드는 적들을 내려다보며 꿈틀 인상을 썼다. 겉으론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다른 오서독스만큼 지쳐 있었다.
“거머리처럼 지긋지긋한 자식.”
크롤리는 늪지대의 악어를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레오폴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대낮에 발가벗고 광장으로 뛰쳐나가 춤이라도 출 수 있을 지경이었다.
“누가 할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군.”
크롤리가 퉷, 하고 내뱉은 말을 들은 아벤 굴드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았다면 코웃음 치며 무시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공방전이 계속 이어진 탓에 평정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적들은 성자의 관에 봉인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끈질겼다. 이전에 그들을 사냥할 때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아이슬러를 비롯한 오서독스들은 흡사 배수진을 치고서 공성전을 벌이는 시민군처럼 그에게 대항했다. 놈들을 이토록 절박하게 만든 건 바로 성배라는 이름의 신기루였다.
문제는 놈들이 성배라고 주장하는 존재가 바로 제이드란 사실이었다. 성배를 착각했다는 건 오서독스들이 단체로 미쳤거나 그들이 단체로 미치도록 누군가 조종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벤 굴드는 줄곧 아이슬러를 비롯한 오서독스들이 어떻게 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저 셋을 부활시킨 배후가 제이드를 성배로 착각하게 만든 범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고난도 주술을 펼칠 만한 지식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서독스들의 본능을 속인다는 건 루테니아의 장로들이 전부 달려들었더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의 흑막이 어떻게 오서독스들을 속였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벤 굴드는 놈들이 다름 아닌 제이드를 성배라고 부른다는 사실 때문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제이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것이었고 그의 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람 또한 자신뿐이었다. 설령 타나토스라 하더라도 제이드는 건드릴 수 없었다.
아벤 굴드는 제이드를 탐낸 적들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생각이었다. 그 어떤 변론이나 재판도 필요치 않았다. 타나토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오서독스를 죽이면 부정한 제약에 얽매이겠지만, 그조차도 상관없었다.
수 세기 동안 기다려 온 성배가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굴드는 제이드의 피를 마실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동안 곁에 남겨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마어마한 집착을 느끼면서도 선뜻 손댈 수 없었던 것이 제이드였다.
그런데 감히 적들이 제이드에게 손을 뻗었다. 제이드에게 눈독 들인 순간부터 놈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놈들을 죽이기 전에 배후를 밝혀내야 했다. 단순히 성자의 관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이드를 성배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아벤 굴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건 루테니아의 소행이 아니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더불어 배후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언제 또 벌어질지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큭. 공허의 피조물…. 망할, 거의 다 잡았는데!”
입속말을 중얼중얼 거리던 라스푸틴이 돌연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틀거렸다. 누런빛이 도는 그의 흰자에 핏줄이 불거졌다. 놈은 반신이 찢겨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라스푸틴?”
“뭐야, 갑자기 왜 저래.”
라스푸틴의 육신 절반이 공허의 괴물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이슬러와 크롤리는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사실 라스푸틴의 안위 따윈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다. 덩치 큰 백인 남자와 소년이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아벤 굴드와 대치 중이라는 점이었다.
라스푸틴에게 문제가 생기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힘의 균형이 삽시간에 무너진다.
무게 추가 한쪽으로 치우침으로 인해 불리해지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었다. 셋이 달려들어도 아벤 굴드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판인데 전력 손실까지 발생하면 그들은 절대 아벤 굴드를 이길 수 없었다.
우우우우-.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동요하는 사이, 심연의 심장부에서 담금질 된 검은 불꽃이 지상을 뒤덮었다.
아벤 굴드는 적들이 노출한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 세기 전, 전장을 누비던 그는 타고난 정복자이자 학살자였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대치 상태를 불식시킬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빌어먹을!”
“피해.”
위험을 감지한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양옆으로 몸을 날렸다. 아벤 굴드의 급작스러운 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거린 건 라스푸틴뿐이었다.
“으… 어어? 크아악.”
수도사가 시커먼 불길에 휩싸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전투 중에 한눈을 판 대가는 참혹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심연의 불꽃은 그의 주변으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장벽을 만들었고 라스푸틴의 피부는 열기에 주르륵 녹아내렸다.
“아아아악, 크윽! 도와줘.”
라스푸틴이 크롤리와 아이슬러를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선뜻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인상만 찌푸렸다. 소년과 덩치 큰 남자가 서 있는 곳까지 강렬한 열기가 끼쳐 들었다.
라스푸틴을 빼내기 위해 무턱대고 불길에 접근했다간 그들까지 위험해질 것이다. 하물며 아벤 굴드가 그들을 바라보며 라스푸틴의 목을 팔뚝으로 조르고 있었다.
검은빛을 띤 심연의 불꽃은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듯 맹렬하게 타올랐다. 등 뒤에서 라스푸틴을 제압한 아벤 굴드는 불꽃 너머로 형형한 눈빛을 흘렸다. 어둠까지 태워 버리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는 라스푸틴과 달리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네놈들이 손을 잡도록 뒤에서 부추긴 게 누구지?”
아벤 굴드가 라스푸틴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조르며 을러댔다. 극도로 오만하고 독선적인 오서독스들은 절대 협력이라는 발상 따위를 떠올리지 못했다. 누군가 놈들에게 은밀히 접근해 서로 협조하게끔 수를 쓴 게 틀림없다. 오서독스들을 교묘하게 조종한 놈이 바로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었다.
성자의 관을 훔치고 제이드를 성배로 인식하게 만든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놈이 뭘 노리는 건진 관심 없었다. 아벤 굴드는 이 사건의 흑막이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이드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벤 굴드의 눈동자는 범인에 대한 분노로 차갑게 불타올랐다. 놈을 잡으면 우선 피부를 산 채로 벗겨 낼 생각이었다. 벗겨 낸 가죽은 소금에 절이고 고깃덩어리가 된 몸통은 꼬챙이에 꿰어 새카만 숯이 될 때까지 화염에 불태우리라 마음먹었다.
“크으으. 네놈, 레오폴트… 지금 그딴 게, 큭. 중요한가?”
얼굴이 전부 녹아내린 라스푸틴이 몸을 안개로 바꾸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놈의 손끝이 잠시 안개로 변했다가 불길에 빨려들어 곧 원상태로 돌아오는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큿, 생각해 보니 중요할 수도 있겠군. 네 비밀을 들켰을까 봐, 흐읏. 두려워하는 거지? 이 교활하고 비열한 협잡꾼 자식, 크으윽.”
라스푸틴은 공허의 피조물이 성배를 감싸던 광경을 떠올리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비밀?”
아벤 굴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엄살이 심한데다가 기회주의자이기도 한 라스푸틴이 이 정도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이 이상했다. 놈의 평소 성격대로였다면 그에게 적개심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협상을 들먹였어야 했다.
“시치미 떼지 마! 크윽. 크롤리에게 다 들었다.”
머리카락까지 사라져서 괴물처럼 흉물스러운 몰골이 된 라스푸틴이 씨근덕거렸다. 아벤 굴드의 시선은 자연스레 크롤리에게 옮겨 갔다.
“아아, 우리들을 성자의 관에서 꺼내 준 서번트가 많은 걸 알고 있더군. 기껏 해 봐야 백 살쯤 됐을까 말까 한 애송이 주제에 어떻게 우릴 깨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루테니아 가문 출신이라 그런 거겠지. 하여튼 그 비루먹은 서번트가 아니었더라면 네 지저분한 흉계를 영원히 모르고 넘어갈 뻔했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불의 장벽 너머에서 아벤 굴드를 노려보던 크롤리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그 재수 없게 생긴 서번트가 루테니아 가문 출신이었어?”
기름기가 낀 금발을 대충 귀 뒤로 쓸어 넘기던 아이슬러가 기겁하며 크롤리를 바라봤다. 그는 금색 눈썹을 비틀며 음습해 보이던 서번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옷차림이 하도 선정적이고 조잡해서 당연히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남창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당혹스러웠다.
아이슬러만큼은 아니지만 아벤 굴드도 적잖이 놀랐다. 그는 루테니아 가문을 용의 선상에서 지웠다. 그런데 성자의 관을 훔친 범인이 루테니아 가문 출신 서번트라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루테니아 가문 출신이라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 진짜 중요한 건 저 자식이 우릴 엿 먹였다는 사실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넌 정말 간교하고 음흉한 놈이야, 레오폴트. 아니, 역시 타나토스의 대리자다운 처신이라고 해야 하나?”
불길에 휩싸여 고통받는 라스푸틴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지 크롤리가 레오폴트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었지만, 레오폴트를 쓰러트리고 나면 바로 적이 될 사이였다.
“넌 제이드인지 뭔지 하는 네 성배를 빼앗길까 봐 우리를 성자의 관에 봉인한 거야. 어때, 내 말이 맞…!”
레오폴트를 향해 소리치던 크롤리가 눈을 부릅떴다. 라스푸틴을 통구이로 만든 레오폴트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금속성을 띤 검은 그림자가 크롤리의 눈앞을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크롤리의 왼쪽 귀와 날개,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소년의 팔과 날개를 망설임 없이 자른 것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아벤 굴드였다.
“으아아악!”
크롤리의 비명 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그의 고통에 감응하듯 파르스름한 빛을 띤 전기가 파지직, 파지직, 소리를 내며 공기를 흔들었다.
“젠장, 크롤리?”
가죽 재킷을 입은 아이슬러가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라스푸틴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불길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둘로 나눈 육체 중 절반이 날아간 상황인 데다 영혼의 핵까지 손상을 입은 그는 좀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두피가 자글자글하게 일그러진 라스푸틴의 몰골은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처럼 끔찍했다.
“제이드가 내 성배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아벤 굴드가 크롤리의 오른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그는 제 영역을 침범당한 수컷처럼 분노했다. 제이드가 자신의 성배라는 사실은 오직 타나토스만이 알고 있어야 할 사안이었다. 설혹 루테니아의 핏줄이라 하더라도 예지만 가능할 뿐, 정확히 누가 성배인지 짚어 내진 못했다.
그런데 제이드가 그의 성배라는 사실을 크롤리가 알아냈다. 크롤리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오서독스들 전부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벤 굴드로서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어서 말해!”
인내심을 잃은 아벤 굴드는 이미 손은 잘리고 없는 크롤리의 오른쪽 팔을 잡아 뜯었다.
“크아아악!”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크롤리의 팔이 뜯겨져 나갔다. 크롤리는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유일하게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날개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적갈색 깃털을 떨어트렸다.
“내게 등을 보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정말 어리석군, 레오폴트!”
아이슬러가 호기롭게 외치며 새파랗게 불타오르는 얼음덩어리들을 날렸다. 레오폴트가 적에게 등을 노출하는 일은 절대 흔치 않았다. 아이슬러는 역습을 펼칠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준 크롤리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두 팔을 잃은 건 안됐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이슬러에겐 잘된 일이었다.
“어리석은 놈.”
아벤 굴드는 흘끗 뒤를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둠을 지배하는 오서독스의 등 뒤로 해골 기사의 형상을 띤 악령들이 나타났다. 말에 올라탄 해골 기사들은 지휘관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들었다.
새파란 화염을 휘감은 얼음덩어리들과 창과 방패를 든 해골 기사들이 충돌했다. 우박처럼 떨어지는 푸른 화염에 맞은 해골 기사들은 풀썩 바스러졌다. 그렇지만 아벤 굴드의 등을 지키는 역할은 훌륭히 수행해 냈다.
“젠장.”
기습에 실패한 아이슬러가 두툼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셋 중에 멀쩡한 건 자신뿐이었다.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라스푸틴은 꼼짝도 하지 못했고 크롤리는 양팔을 잃었다. 전세는 이미 완벽하게 레오폴트 쪽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이제 네 녀석만 처리하면 끝이군.”
아벤 굴드가 음산하게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크롤리의 적갈색 날개를 발로 짓밟은 순간이었다.
“어라, 싸움의 승패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는데요. 접전일 줄 알았는데 시시하게시리.”
어둠 저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곤란해. 이러면 모처럼 준비한 쇼의 재미가 떨어진단 말이에요.”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서번트가 쯧쯧, 혀를 차며 아벤 굴드와 아이슬러를 향해 다가왔다.
“네놈이 어떻게….”
아벤 굴드는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서번트를 보고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저 하급 서번트가 멀쩡한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자의 관을 회수하러 갔던 날 그는 분명 저 하급 서번트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했다. 머리를 터트렸는데도 재생한 전적이 있어서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도록 파수꾼에게….
아벤 굴드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때 폭발이 일어나서 제대로 뒷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다. 아벤 굴드는 넌덜머리가 났다. 먹을 것이 없어도 살아남는 바퀴벌레보다 목숨이 질긴 놈이었다.
“네가 여긴 뭐 하러 나타났어. 아니, 그보다 결계 안으로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이슬러가 문란한 옷차림을 한 서번트를 향해 경계심을 드러냈다. 아이슬러뿐만이 아니라 양쪽 팔을 전부 잃어 비틀대는 크롤리도 놈과 안면이 있는 눈치였다. 통구이가 된 라스푸틴은 의식을 잃은 상태라 저 남창과 면식이 있는 사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백 살 안팎의 나이. 깨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오서독스들과 면식이 있는 서번트. 오서독스들이 왜곡시킨 차원의 벽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술법에 능한 자.
“네놈이었군.”
아벤 굴드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성자의 관에 수작을 부린 게 네놈이었어.”
바니의 정체를 단번에 간파한 아벤 굴드의 주변으로 부정하고 사악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의 발치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그는 핼러윈 날 밤을 떠올렸다. 성자의 관을 숨긴 허름한 주택 앞에서 저놈을 만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한낱 서번트에 불과한 배교자가 이 모든 사건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어쩌면 놈에게 지시를 내린 흑막이 따로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제이드를 이 일에 끌어들인 목적이 무엇인지 추궁하기 전에 우선 놈부터 잡아야 했다.
“제길,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래서 싫다니까. 내가 나설 기회를 안 줘.”
덥수룩한 앞머리로 눈을 가린 바니가 투덜거렸다. 영화처럼 극적이고 위엄 넘치는 등장을 상상하고 있던 바니는 기분이 팍 상했다. 흑막이 모습을 드러냈으면 뒤로 넘어갈 만큼 큰 충격을 받아야 하는데, 대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꼭 그저 그런 조연 1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뭐, 실망할 마음은 없어. 날 우습게 본 대가는 곧 톡톡히 치르게 될 테니까.”
바니는 홍수가 범람하듯 건물 잔해를 뒤덮는 심연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 붉은 눈동자들이 갓 분출된 용암처럼 바니를 에워쌌다.
붉은 눈동자들이 눈을 깜빡거리며 거리를 점령해 가는 광경은 오서독스인 아이슬러조차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만큼 위협적이고 장엄했다. 그런데 바니는 겁에 질리기는커녕 태연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괜히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기색이었다.
“날 해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벤 굴드.”
끈적끈적한 타액을 뚝뚝 흘려 대는 새빨간 눈동자들에게 포위된 바니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딴 허튼수작이 통할 거라 생각하나?”
아벤 굴드가 잔뜩 굶주린 심연의 그림자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려는 순간이었다.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바니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놈은 테두리에 음각으로 이니셜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대롱대롱 흔들어 보였다.
“……!”
바니가 주머니에서 꺼낸 시계가 제이드의 것임을 알아본 아벤 굴드가 흠칫 숨을 멈췄다. 곧이어 손끝이 떨리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서번트가 저 시계를 손에 넣었다는 건 제이드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워워,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요. 그럼 제이드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바니가 머리카락 한 줌을 꺼내 킁킁 냄새를 맡으며 협박했다. 놈이 얼굴에 비벼대고 있는 건 제이드의 머리카락이었다. 놈은 시계와 머리카락을 보여줌으로써 제이드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쳤다.
바니의 너저분한 협박은 확실히 효과를 발휘했다.
“제이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벤 굴드는 당장에라도 놈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이를 갈았다. 그의 눈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분노보다는 제이드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아직까진 딱히.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죠.”
바니는 오서독스들에게 조심스레 눈짓을 보냈다. 제가 주의를 끌고 있을 테니 아벤 굴드를 공격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어리석은 놈.”
아벤 굴드는 바니의 수준 낮은 양동 작전에 깊은 짜증을 느꼈다. 그에게 기습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머리가 나빠도 심각하게 나빴다. 더불어 놈의 계획을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는 하급 서번트가 만들어 준 기회를 사양할 생각도 않고 덥석 받아들였다. 크롤리는 양팔을 잃은 상태였지만 피의 마력까지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냉혹한 눈보라와 전하 속성을 띤 공격이 아벤 굴드에게 퍼부어졌다. 굴드는 과부하가 걸린 공격들을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넓게 퍼졌던 그림자를 불러들여 기습에 대비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젠 내가 반격할 차례군.”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낸 아벤 굴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너머에 있는 바니를 주시하며 으득 이를 갈았다. 그는 바니의 팔다리를 자르기 위해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휘둘렀다. 탈진한 아이슬러와 크롤리는 역습을 막아 낼 여력이 없었고 하급 서번트에 불과한 바니는 그의 공격을 막아 낼 힘이 없었다.
새카만 그림자들이 촉수처럼 휘어지며 잿빛 연기를 뚫었다.
“날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걸요.”
바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벌레로 이루어진 공간을 열었다.
허튼짓을 한다고 코웃음을 치던 아벤 굴드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시꺼멓게 입을 벌린 아공간 너머로 축 늘어진 제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팔은 고문을 당하는 포로처럼 머리 위로 묶여 있었다.
“으으….”
벌레 사슬에 팔다리가 묶인 제이드가 신음을 흘렸다. 안색이 창백한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의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정신이 혼미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바니가 제이드를 방패막이로 내세우자 아벤 굴드는 다급하게 그림자의 궤도를 틀었다.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쿵쿵, 땅에 박힌 그림자들은 바니 주변에 거대한 아치를 만들었다.
“내가 아까 말했죠? 날 너무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제 좀 후회가 되려나.”
아벤 굴드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바니는 히죽 웃었다. 그의 눈동자 위로 누군가 아벤 굴드에게 접근하는 광경이 비쳤다. 얼굴에 주근깨가 빼곡하게 박힌 남창은 제이드가 의식을 차리기 전에 얼른 아공간을 닫았다.
“제기랄, 제이드!”
굴드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벌레들에게 휘감겨 공간 저편으로 사라지는 제이드에게 정신이 팔린 그는 자신의 등 뒤로 접근한 존재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큭.”
비늘로 뒤덮인 날카로운 손톱이 갈비뼈 부근을 꿰뚫었다. 적에게 예상 밖의 기습을 당한 아벤 굴드는 눈썹을 비틀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그가 잘라 냈던 크롤리의 왼손이 보였다.
“흐흐흐, 크윽. 지옥에나 떨어져라, 레오폴트.”
가래침이 들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체격이 건장한 아벤 굴드의 등 뒤에 서 있는 건 크롤리가 아니라 온몸이 새까맣게 탄 라스푸틴이었다. 놈은 행동 불능 상태에 빠진 것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아벤 굴드가 빈틈을 보인자 등을 찔렀다.
라스푸틴이 쥐고 있는 크롤리의 손톱에선 기분 나쁜 검은색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크롤리의 손을 시커멓게 물들인 액체의 정체는 그의 체내에서 쥐어짠 독의 정수였다. 자신의 심장에서 뽑아낸 맹독이 레오폴트의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고 생각하자 라스푸틴은 희열이 들끓었다.
“커어억!”
갈비뼈와 피부가 흉측하게 달라붙은 라스푸틴의 얼굴 위로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오른 것도 잠시, 그는 허리를 뒤로 꺾으며 눈을 부릅떴다.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레오폴트가 무서운 기세로 그의 목을 졸랐다.
“라스푸틴. 영원히, 아무 말도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수도사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쥔 아벤 굴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바니의 교란 작전에 걸려든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검게 구멍이 난 자리에서 끊임없이 피가 쏟아졌다. 라스푸틴의 영혼과 육체의 조각이 녹아든 독 때문에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어억, 안… 컥.”
온몸이 다 새까만 라스푸틴이 겁에 질린 얼굴로 목탄 같은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의 신체 중에서 까맣게 일그러지지 않은 곳은 눈과 치아뿐이었다. 아벤 굴드의 손아귀에 붙잡힌 그의 목에선 검은 가루가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발 사, 살려… 으.”
고개가 한껏 뒤로 꺾인 라스푸틴이 절박하게 애원했다. 새카만 목을 움켜잡고 있던 아벤 굴드는 쪼글쪼글한 수도사의 머리에도 손을 가져갔다. 타나토스의 의지를 대행하는 대리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했는지 아벤 굴드는 정말 그의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이럴, 으억. 순 없어. 안 돼, 레오폴트, 컥.”
라스푸틴은 앙상한 두 손을 모으며 빌었다. 그의 눈가에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성배를 쫓기 위해 육신과 영혼을 절반으로 나눴던 라스푸틴은 서번트 수준으로 약해져 있었다. 그의 육신의 절반이 공허의 괴물에게 물어 뜯겨 괴멸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흠집이 생긴 탓이었다. 제대로 미쳐 버린 아벤 굴드가 영혼의 핵을 부수면 라스푸틴의 존재는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성, 성배도 포기할, 끄억.”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라스푸틴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었다. 그 순간 영혼의 핵을 구성하고 있던 성분이 깨지는 소리가 아벤 굴드의 귓가에 들렸다.
피의 마력을 담고 있던 라스푸틴의 육체가 풀썩 허물어졌다. 머리를 잃은 오서독스의 시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타나토스의 피를 마신 저주받은 존재가 영원한 안식을 얻은 것이었다.
“굉장해. 진짜 저질렀어.”
바니가 입술을 깨물며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내 계획대로 아벤 굴드가 오서독스를 죽였다고!”
억눌린 탄성을 내뱉은 그의 가느스름한 눈동자 위로 희열이 번졌다. 아벤 굴드가 죄인이 되었다. 성자의 관을 훔치고, 제이드를 성배로 착각하게 만들고, 오서독스들의 봉인을 푸는 등의 번거로운 노고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큭.”
바니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독에 중독된 아벤 굴드는 손에 쥐고 있던 라스푸틴의 머리를 떨어트렸다. 시야가 흐려진 그는 신음을 삼키며 검게 뚫린 상처 부근을 움켜잡았다. 검붉은 피가 그의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혈관에 퍼진 독 때문에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한 것도 라스푸틴의 독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라스푸틴은 해치웠지만 전황은 그에게 불리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은 둘째 치고 죄인이 된 몸으로 아이슬러와 크롤리, 그리고 제이드를 인질로 잡고 있는 바니까지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번트나 구울은 얼마든지 죽여도 상관없지만, 동포라 할 수 있는 오서독스를 소멸시키는 행위는 피의 율법에 어긋났다. 빌어먹을 타나토스는 무의미한 분쟁으로 인해 오서독스를 잃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오서독스를 죽인 죄인에겐 성가신 제재가 가해졌다. 타나토스의 대리자이자 배교자들의 왕인 아벤 굴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과거에 굴드가 오서독스들을 죽이지 않고 성자의 관에 봉인하기만 한 까닭도 바로 이러한 제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수 세기 동안 성배를 찾아 떠도는 입장에선 타나토스가 내리는 징벌은 태양만큼이나 껄끄럽고 거추장스러웠다.
“큭.”
타나토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아벤 굴드의 목에 힘줄이 불거졌다. 이를 악물고서 호흡을 고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흉흉한 기운이 맴돌았다. 율법을 어긴 대가를 치르는 아벤 굴드의 모습은 언뜻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마약 중독자를 연상케 했다.
오서독스를 죽인 자에겐 피를 갈구하는 욕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형벌이 내려졌다. 죄인이 된 아벤 굴드가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마약중독자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갈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이 고약한 징벌이 끝날 때까진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혈관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피로 목을 축이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과도한 부상을 입거나 한순간에 다량의 피를 잃었을 때처럼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곤 어렵지 않게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죄인이 된 아벤 굴드의 손발을 옭아매는 갈증은 평소 그를 압박하던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태양의 열기로 뜨겁게 달궈진 사막에 버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타들어 갔다. 온몸의 피가 증발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아벤 굴드가 목마름을 잠재울 방법은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는 그에게 닥친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아벤 굴드는 통제하기 힘든 격정에 휩싸였다. 제이드를 만난 이후로 억눌렀던 고약한 본능이 반역을 일으키듯 머리를 쳐들었다. 그의 발치에서 숨죽이고 있던 타나토스의 그림자도 간신배처럼 스멀스멀 밖으로 기어 나왔다.
타나토스에게 건네받은 반쪽짜리 진리는 아벤 굴드의 귓가에 들러붙어 네 욕망을 직시하라며 그를 충동질했다. 놈의 목적은 아벤 굴드의 이성을 뒤흔들어 자신과 똑같은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타나토스의 그림자는 아벤 굴드가 제이드 때문에 탐욕스런 본성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벤 굴드는 독과 출혈, 타나토스가 부과한 과도한 형벌로 인해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인간이 술이나 아편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는 제이드 곁에 좀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추악한 감정을 모조리 쓸어 담아 두었던 낡은 궤짝이 제 입을 벌리는 환각을 보았다. 그 직후, 아벤 굴드의 귓가에 들려오던 그림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고요했다. 그의 목을 조여 오던 압박감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자, 잘했다, 벌레여! 하아, 하아. 나를 위해 성배를 납치해 오다니, 네 공로를 치하해 주마. 하하핫, 큿.”
두 팔을 잃은 크롤리가 승리를 목전에 둔 지휘관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바니가 아공간을 열었을 때 크롤리 역시 제이드를 목격했다.
“웃기지 마, 크롤리. 성배는 내 것이다!”
프로레슬러처럼 덩치 큰 아이슬러가 포효하며 바니를 향해 달려갔다. 그도 크롤리와 마찬가지로 제이드를 목격했던 것이다. 아벤 굴드를 해치우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성배의 등장으로 인해 둘 다 눈이 뒤집혔다.
오서독스들이 바니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화톳불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불나방을 보는 듯했다. 성배에 가까이 다가가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풍요로운 기운이 그들을 굶주린 짐승으로 만들었다. 죽음으로 뒤덮인 황무지를 배회하는 배교자들에게 성배는 꿀이 흐르는 비옥한 황금 들판 그 자체였다. 낙원을 손에 넣기 위해선 비열한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으으윽, 아이슬러 네놈! 배신할 셈이냐.”
“젠장, 먼저 배신한 게 누군데!”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아이슬러와 크롤리는 거리낌 없이 이를 드러냈다. 라스푸틴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라스푸틴을 애도하는 시늉이라도 해 주길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한 바람이었다.
극도로 이기적인 존재인 오서독스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성배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어차피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을 뿐,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관계였다. 잠재적인 경쟁자가 도태되었는데, 기쁘면 기뻤지 슬퍼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눈보라 사이로 보랏빛 번개가 번뜩였다. 크롤리가 양쪽 팔을 잃은 덕분에 아이슬러가 우세를 보였다. 만약 크롤리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우위를 점하기는커녕 숲에서 벌였던 저번 쟁탈전처럼 그가 밀렸을 것이 분명했다.
덩치와 관계없이 아이슬러보다 크롤리 쪽이 강했다. 소년의 모습을 한 크롤리의 몸속에 흐르는 타나토스의 피가 훨씬 더 짙고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서독스들 중에서 가장 순도 높은 피의 마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벤 굴드였다.
서번트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 강해지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번트들 수준에서 강해진다는 뜻이지 머리를 짓누르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토끼가 제힘으로는 대형 독수리보다 강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계급의 한계는 잔혹할 만큼 명확했다. 오서독스 사이에서도 혈통에 따라 명암이 갈렸다. 나이가 많으면 좀 더 능숙하게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되기는 하지만 힘과 권력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피의 마력이었다.
오서독스들이 총력을 기울여 맞붙기 시작하자 바니는 큼지막한 건물 잔해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특별석에서 복서들의 타이틀 매치를 관람하는 허슬러 표지 모델처럼 요염한 자세였다. 그러나 이곳은 안전한 링 밖이 아니었다. 건물을 썩둑 잘라 내는 광풍이 바니의 코앞에서 휘몰아쳤다. 바니의 머리카락이 난잡하게 헝클어졌고 날카로운 파이프 파편이 할퀴고 간 뺨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단순히 위험하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발을 까닥거리며 싸움을 관망하는 그의 얼굴엔 여유가 흘렀다. 바니는 오서독스들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제 살을 깎아 먹으며 싸워 대는 광경을 경마처럼 즐기고 있었다. 어느 경주마에 배팅을 하든 바니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었다.
고귀하신 두 머저리의 싸움을 관전하던 바니가 아벤 굴드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상처를 누르는 아벤 굴드의 손가락 사이로 하염없이 피가 쏟아졌다. 짙은 루비 빛을 띤 피는 아벤 굴드의 발치에 웅덩이를 이루었다. 타나토스가 내린 형벌과 라스푸틴의 독으로 인해 육신이 마비된 그는 바니를 노려보며 차분하게 오염된 피를 정화했다.
“전세가 뒤집히는 건 시간문제겠는걸.”
바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동족을 살해한 탓에 아벤 굴드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겠지만, 곧 출혈이 멈추고 마비가 풀릴 터였다. 그는 아벤 굴드가 크롤리와 아이슬러를 제압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벤 굴드가 불리할 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남은 두 오서독스도 무리하게 피의 마력을 낭비해 가며 공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아, 거칠게 박히고 싶어.”
혀로 입술을 핥으며 흥분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벤 굴드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하반신이 짜릿짜릿했다. 정말이지 자극적이었다. 마치 살육으로 악명을 떨친 거대한 흑표범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바니는 말을 때리는 채찍을 든 아벤 굴드에게 마구 학대당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머릿속으로는 아벤 굴드의 굵직한 물건이 헐렁한 제 뒷구멍을 거칠게 꿰뚫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는 아벤 굴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현실이 진심으로 아쉬워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시궁창에 빠진 시체나 파먹을 똥파리, 기생충 자식! 도대체 뭘 꾸물거리는 거야! 성배를 당장 내게 넘기란 말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하피 같은 몰골이 된 크롤리가 고함쳤다. 아이슬러를 상대로 악전고투 중인 그는 딴청을 부리는 바니의 태도 때문에 분통이 터졌다.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슬러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놈의 낯짝을 뭉개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니가 그에게 성배를 바치면 불리한 전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긴 했지만 고대의 현묘한 진리를 손에 넣은 순간,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될 터였다.
그런데 바니가 성배를 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놈은 주제도 모르고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크롤리로서는 일개 서번트에 불과한 잡것이 감히 오서독스를 저울질한다는 상황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가 열세에 몰린 상태라 더욱 자존심이 상하고 바니가 고까워 보였다.
“크롤리,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예전엔 내가 미천하고 하찮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니까요.”
아벤 굴드에게 범해지는 순간을 상상하며 다리를 비비 꼬던 바니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크롤리의 기생충 운운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그의 눈동자 위로 음습한 감정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오만하고 멍청한 크롤리에게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정말 용감하네요. 성배를 가지고 있는 버러지를 무시했다간 뼈아픈 꼴을 당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해 봤어요?”
바니는 아이슬러의 공격에 맥을 못 추는 크롤리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크롤리 따위는 상대하지 마. 성배를 나에게 넘기기만 한다면 네게 합당한 대접을 해 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준다고 내 피를 걸고 약속하겠다.”
바니를 구슬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아이슬러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은 그가 크롤리를 상대로 우세를 보이고 있으나 언제 피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낼지 몰랐다. 장기전으로 갔다간 백이면 백, 자신이 불리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니에게 협상을 제시하는 순간 스컹크 신부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사실은 레오폴트와의 접전 와중에도 안경 낀 신부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가짜 보물을 비추는 신기루에 눈이 멀어 뭔가 중요한 걸 놓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롤리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아이슬러는 크롤리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복부를 가격당했다.
“제길, 아이슬러. 지금이 어느 땐데, 제발 정신 똑바로 차려.”
바닥에 처박힌 아이슬러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성배를 손에 넣기 직전인데 도대체 왜 펠릭스 신부가 눈에 밟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이슬러는 이를 악물고서 바니와 아벤 굴드, 크롤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 와중에도 잿빛 머리카락에 안경을 쓴 시니컬한 신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그의 무의식이 제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온 힘을 다해 경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에서 망가진 나침반을 들고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슬러는 성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과 스컹크 신부를 찾아야 한다는 충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이 근처 어딘가에 펠릭스 신부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혹시 크롤리의 전격을 맞아서 온몸이 짜릿한 건가, 의심해 보기도 했지만 전기 통구이가 되는 감각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젠장, 하찮은 벌레 주제에, 크읏. 기세등등하군.”
크롤리가 바니를 주시하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겼다. 라스푸틴의 독에 중독되었던 레오폴트가 언제 그를 덮칠지 몰라 불안했다. 레오폴트가 힘을 회복하고 나면 성배 쟁탈전에서 그가 끼어들 자리는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순순히 성배를 내놔! 네 몸에 내 깃털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
크롤리는 바니를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이 자리에 있는 오서독스 중에서 자신이 가장 불리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터라 그는 더욱 절박해졌다. 게다가 아벤 굴드를 휘감고 있는 검고 사악한 투기 때문에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악령들이 읊조리는 괴기스러운 진혼곡이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설마요, 내 목숨이 걸렸는데.”
바니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알면서 아직도 성배를 내놓지 않는 건 도대체 무슨 배짱이지?”
크롤리는 정녕 네놈 팔을 하나쯤 날려 버려야 얌전히 말을 들을 거냐는 눈빛으로 바니를 쏘아보았다.
“당신 능력의 허점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요. 타나토스가 다 이야기해 줬거든요.”
바니는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몸을 훌쩍 뒤로 날렸다. 크롤리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붉은 깃털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젠장, 거기 서지 못해!”
“빌어먹을.”
한순간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크롤리와 아이슬러는 이를 악물며 상대방에게 퍼붓던 공격을 멈췄다.
“날 가장 먼저 잡는 분에게 성배를 드릴 테니까, 어디 열심히 쫓아와 보시죠.”
바니는 전속력으로 폐허를 가로지르며 입가에 음험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오서독스들과 거창한 술래잡기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망할!”
럭비선수처럼 어깨가 널찍한 아이슬러는 점점 멀어지는 바니의 등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죽을힘을 다해 내달리는데도 성배를 가지고 튄 서번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서번트 주제에 어찌 저렇게 발이 빠른 건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도망치는 데는 도가 튼 놈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니는 시야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극도로 초조해진 아이슬러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성질을 다스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레오폴트가 독에 중독되어 꼼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다 라스푸틴이 목숨과 맞바꿔 가며 그의 몸에 독을 푼 덕분이었다. 아이슬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스푸틴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생각은 없었다.
“제기랄, 멈춰. 나보다 앞서 나가지 말란 말이다!”
아이슬러의 뒤를 쫓아오던 크롤리가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악에 받쳐 소리쳤다. 한쪽 날개가 잘려 나가 등짝이 허전해진 소년은 이제 더 이상 날 수 없었다. 만약 날개가 멀쩡했다면 크롤리는 바니를 순식간에 따라잡았을 테고 아이슬러는 손가락만 빨아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웃기지 마! 내가 미쳤다고 멈, 빌어먹을!”
오직 정면만 바라보며 달리던 아이슬러가 말을 하다 말고 꽥 소리를 질렀다. 크롤리가 앞서 나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거대한 번개 덩어리를 날렸다.
파직, 파지직!
“버릇없는 땅꼬마 자식!”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몰골이 된 아이슬러가 다친 팔을 움켜쥐었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가죽 재킷 위로 파르스름한 전기가 기어 다녔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도 비명횡사할 뻔했다. 열이 뻗친 북부 대륙 출신 남자는 지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는 크롤리에게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커억….”
새파란 화염에 휩싸인 주먹이 크롤리의 복부를 강타했다. 두 팔을 잃은 소년은 무릎으로 주저앉았다. 정신력과 체력, 그에 더해 피의 마력까지 전부 아이슬러보다 먼저 바닥난 탓이었다.
붉은 머리 소년은 의식을 잃었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말 기절한 건지 확인해 보기 위해 아이슬러가 발끝으로 쿡쿡 찔러 봤지만 크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폭력적인 조류 놈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소년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크롤리의 숨통을 끊기 위해 허공에 생성했던 푸른 화염도 거두어들였다. 크롤리의 목숨을 거두려다 마음을 바꾼 것이다.
크롤리는 성격도 나쁘고 배신도 밥 먹듯이 하는 악독한 놈이었다. 하지만 성질이 불같은 소년은 이제 위협이 되기는커녕 무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힘의 근원인 피의 마력이 우물 바닥처럼 메말라 버린 탓이었다.
건방진 꼬마 놈은 더 이상 아이슬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성배를 차지하겠다고 덤벼 봤자 크롤리를 저지하는 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웠다. 인간의 피를 닥치는 대로 섭취한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으로선 크롤리가 기력을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더군다나 아무리 꼴 보기 싫은 놈이라도 오서독스를 죽이는 건 찜찜했다. 피의 율법을 어긴 자에게 내려지는 징벌이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사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상대가 아니라면 오서독스들은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죽이는 일을 삼갔다. 예컨대 인간들이 식인을 대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아이슬러는 성배를 숨긴 서번트를 찾기 위해 폐허가 된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대성당이 가까워졌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건물이 죄 무너져서 지표로 삼을 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젠장,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방향 감각을 상실할 지경이 된 아이슬러는 콘크리트 더미를 밟고 지나가며 투덜거렸다. 성배와 바니를 번갈아 가며 떠올리는데 공연히 또 기분이 복잡해졌다. 이제 성배의 ‘성’자만 머릿속에 떠올려도 펠릭스 신부의 얼굴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유리를 밟았는지 신발 밑창에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 아이슬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스컹크 신부의 안경을 떠올렸다.
“안경을 가져다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아이슬러는 크롤리의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병실에 침입했을 때 침대에 누운 신부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탁자에 놓인 안경을 발견한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불현듯 안경이 심하게 망가졌던데 과연 다시 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눈매가 날카로운 신부가 안경을 고쳐 쓸 수 있길 바랐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 남자는 안경을 쓴 쪽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젠장, 이럴 때가 아닌데.”
기름기가 낀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아이슬러는 이마를 짚었다. 수 세기 동안 완벽한 존재가 되길 갈망해 왔다. 옷차림이 천박한 서번트만 잡으면 그의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딴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제이드란 남자를 데리고 있는 서번트를 뒤쫓는 데 집중해야 했다.
잡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회색빛 털 뭉치 같은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상점을 덮친 트럭 아래로 길게 삐져나온 창백한 손도 보였다.
“설마.”
소스라치게 놀란 아이슬러는 트럭에 깔린 사람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갔다. 잿빛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 스컹크 신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딴생각은 그만두자고 마음먹었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봐, 스컹크 신부님. 내 말 들려?”
그는 트럭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며 잿빛 머리통에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머리카락이 동물 털처럼 거칠었고 군데군데 까맣게 까진 손도 사람의 피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고 보니 펠릭스 신부에게서 아무런 체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슬러는 눈에 힘을 주고서 꿈쩍도 하지 않는 신부를 자세히 살폈다. 트럭에 깔린 남자는 펠릭스 신부가 아니라 가발을 씌운 마네킹이었다.
“멍청하기는….”
제가 인간 모형을 펠릭스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슬러는 트럭을 붙들었던 손을 놓았다. 비스듬히 들려 올라갔던 트럭은 쿵 소리를 내며 마네킹을 깔아뭉갰다.
어쩐지 숨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니.
맥이 빠진 아이슬러는 한숨을 내쉬며 마네킹이 쓰고 있던 가발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코가 장식품도 아닌데,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네킹이라는 사실을 알아봤어야 했다. 그렇지만 잿빛 머리카락을 발견했을 땐 머릿속에 펠릭스 신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해서 다른 걸 살피거나 의식할 경황이 없었다.
가발을 손에 쥐고서 내려다보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줄곧 펠릭스 신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터라 지금 이 상황이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허무했다. 아이슬러는 정체 모를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 싸구려 회색빛 가발을 멀리 내던졌다. 독특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친 것은 그가 막 뒤를 돌았을 때였다.
아이슬러가 마취 총에 맞은 곰처럼 우뚝 멈춰 섰다.
아주 자극적인 냄새였다. 악취로 느껴질 만큼 고약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기 중에 희미하게 퍼진 피 냄새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아이슬러는 며칠 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머리와 몸은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코끝을 감도는 피 냄새가 불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군침을 삼켰다.
그는 참을 수 없이 신경에 거슬리는 이 냄새를 전에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피 냄새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바로 엄격해 보이는 사제복으로 몸을 감싼 스컹크 신부였다.
탕!
총성이 새카만 허공을 흔들었다. 총알은 아이슬러를 노렸지만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참 벗어난 곳을 맞췄다.
하마터면 총에 맞을 뻔했던 금발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를 공격한 사람이 저 멀리 보였지만 아이슬러는 반격할 생각도 못하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의 세포가 아우성을 쳐 댔다. 피투성이가 된 펠릭스 신부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경은 또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안경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아이슬러는 꿀꺽 생침을 삼켰다. 잿빛 머리카락의 가톨릭 신부는 마치 건물 잔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처럼 온몸이 너덜너덜했다.
“제길.”
펠릭스 신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다시 아이슬러에게 조준했다. 뜨끈한 피가 자꾸 눈꺼풀을 찔렀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는 자신을 스컹크라고 부른 망할 오서독스를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시간을 구속하는 결계가 펠릭스 신부의 몸을 돌처럼 뻣뻣하게 만들었다. 꼭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가사 상태에 빠졌을 때보단 결계의 힘이 약해졌지만, 평소처럼 활동하는 데는 무리가 따랐다. 조금 전 방아쇠를 당긴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얼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넋을 빼고 있던 아이슬러는 펠릭스 신부가 쓰러지고 나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등장으로 인해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자신이 성배를 추적 중이라는 사실도 아예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이, 스컹크 신부님!”
단숨에 거리를 좁힌 아이슬러는 넝마가 된 펠릭스 신부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신부의 몸이 온통 피투성이라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인간이 다쳤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과거엔 그도 부족 간의 전쟁을 수행하던 전사였다. 그때는 부상당한 부하를 직접 치료해 주곤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신이 뭘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덩치 큰 곰 같은 사내의 우려와 달리 펠릭스 신부의 상태는 그리 위중하지 않았다. 그를 깔아뭉개고 있던 석재에서 빠져나올 때 이리저리 긁혀서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었다.
“날 스컹크라고 부르지, 쿨럭. 전에 이야기, 했을….”
“신부님, 뭐라고?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려.”
아이슬러는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짚고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마치 키스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큭.”
금발 남자의 숨결이 바짝 다가오자 펠릭스 신부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속을 알 수 없는 적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거부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적은 그에게 스컹크 신부라는 어처구니없는 별명까지 붙여 줬다.
아이슬러는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펠릭스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린 거라고만 생각했다.
“신부님, 이젠 잘 들릴 거야. 아까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 봐.”
펠릭스 신부의 얼굴에 바짝 귀를 갖다 댄 아이슬러는 요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가슴이 맞닿은 자리에서 심장이 뛰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심장은 멈춘 지 오래이니 피부에 전해지는 박동은 당연히 펠릭스 신부의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아이슬러는 꼴깍 생침을 삼키며 가슴을 두드리는 기척에 집중했다. 사실은 스컹크 신부의 가슴께로 귀를 가져갈 생각이었지만, 코끝을 맴도는 피 냄새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꼭 야생 동물을 포획하는 그물이라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아이슬러는 주저주저하다가 펠릭스 신부의 목에 얼굴을 박고서 피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던 덩치 큰 백인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벌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새 악취에 적응이라도 한 건지 펠릭스 신부의 체취와 피 냄새가 더 이상 고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냄새를 잘못 맡은 건가 싶어, 확인 차 다시 한 번 코를 킁킁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신경에 거슬리기는커녕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향이 이젠 그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펠릭스 신부의 피는 흡사 먼지 쌓인 창고 구석에서 발견한 오래된 와인 같았다. 그런 와인은 보관을 잘못해서 한 모금 마셨을 땐 떫은맛이 나지만 꾹 참고 음미하다 보면 그 진가가 발휘되었다.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시금떨떨한 향 사이로 성숙한 과육의 냄새가 올라왔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아이슬러는 자석에 이끌리듯 펠릭스 신부의 상처에 혀를 갖다 댔다.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성배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 봤지만 귓가에 닿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펠릭스 신부의 피를 맛보고 싶은 충동만이 가득했다.
“크윽, 윽.”
펠릭스 신부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이슬러는 검은 수단을 입은 성직자의 어깨를 힘껏 짓눌렀다. 그의 숨소리가 저절로 거칠어지는 게 꼭 숲에서 처녀를 겁탈하려는 야만족 같았다.
“미안, 신부님.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어.”
펠릭스 신부의 목에 코를 박은 아이슬러는 혀끝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간신히 출혈이 멈췄던 자리에서 붉은 피가 피어올랐다.
아이슬러는 넋을 빼고서 구슬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바라봤다. 광택이 도는 진홍색 피가 땅에 떨어지려고 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덩치 큰 백인 남자는 허둥지둥 액체를 핥아 올렸다.
“헉.”
비록 한 방울이었지만 펠릭스 신부의 피를 맛본 아이슬러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이슬러의 등줄기를 따라 짜르르한 전율이 흘렀다.
“신부님, 당신….”
아이슬러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동요가 떠올랐다. 아니, 경악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펠릭스 신부의 피를 목구멍으로 넘긴 순간, 아이슬러는 진실에 눈을 떴다.
제이드의 체취는 분명 매혹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도통 자신의 성배라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모든 정황이 그 동양인 청년을 제 성배라 하는데 대체 왜 이리 미심쩍은 걸까, 의아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제이드는 그의 성배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니가 제이드를 자신의 성배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아이슬러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제가 침침한 성자의 관에 감금되어 있을 때 바니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뿐이었다.
어떡하지?
아이슬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들짐승의 가죽을 두른 야만족처럼 덩치 큰 남자는 가톨릭 성직자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바니가 그에게 정성 들여 건 세뇌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신부님. 내가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생겼는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슬러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가톨릭 성직자는 아이슬러가 머뭇대는 동안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무식하게 덩치 큰 오서독스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었다.
“신부님, 아무래도 당신이 내 성배인 것 같아.”
아이슬러가 칸막이 안에서 무릎 꿇고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방금 알게 된 진실을 토해 낸 순간이었다.
“닥쳐! 이 빌어먹을 노숙자 자식아.”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펠릭스 신부가 아이슬러의 낭심을 무릎으로 올려 찍었다. 콘택트렌즈를 낀 그의 두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어윽! 윽. 젠장. 이봐, 이게 무슨 짓이야!”
소중한 부위를 공격당한 아이슬러가 사타구니를 부여잡고서 눈물을 글썽였다. 비록 죽은 몸이기는 하나 배교자에게도 고환이 민감한 신체 기관인 건 인간과 똑같았다.
“그걸 지금 몰라서, 큭.”
펠릭스 신부는 아이슬러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사지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탓에 무릎이 꺾였다. 중심을 잃은 펠릭스는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아이슬러의 가슴을 향해 고꾸라졌다.
“으으윽.”
거창하게 아이슬러의 품으로 돌진한 펠릭스 신부가 신음을 흘렸다. 혀끝에 짭짤한 피가 닿았다. 어디에 잘못 부딪친 건지 치아에서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펠릭스 신부가 방금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긴 짭짜름한 피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헉.”
펠릭스 신부를 받아 내느라 벌러덩 뒤로 넘어졌던 아이슬러는 손바닥으로 제 입술을 덮었다. 펠릭스 신부와 부딪힌 아랫입술에선 붉은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아이슬러는 펠릭스를 밀쳐 내고서 엉덩이로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펠릭스 신부가 그에게 저돌적으로 키스를 했다. 정확하게는 입술이 아니라 입술과 턱의 경계선에 얼굴을 들이박은 것뿐이었지만, 아이슬러는 키스라고 받아들였다.
“왜 나한테….”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아이슬러의 호흡이 가빠졌다. 춘약이라도 들이마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이슬러에게 힘껏 밀쳐진 펠릭스 신부는 대자로 뻗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잘못 부딪쳐서 의식을 잃은 탓이었다.
아이슬러는 혼란에 빠졌다. 펠릭스가 기절하는 바람에 무슨 생각으로 제게 키스를 한 거냐고 물을 수도 없게 됐다.
남자와 입을 맞춘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인간이었던 시절, 전장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부하들과 코를 비비거나 입을 맞추는 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부하들과 나눈 그것과 펠릭스 신부에게 받은 이것은 느낌이 현격히 달랐다.
성배에게 입맞춤을 당하다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펠릭스가 입술 박치기를 한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은 성배의 피를 마시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수 세기 동안 오직 이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려 왔다.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결국 자신만의 성배를 만나게 됐다. 다행히 지금은 그가 완벽한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도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따져 보아도 아이슬러로서는 흡혈을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마 펠릭스 신부의 목덜미를 물어뜯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펠릭스가 그에게 키스한 이유가 무엇인지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슬러는 기절한 펠릭스 신부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얼른 입맞춤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데 펠릭스가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깨우면 될 일이었지만, 부끄럼을 잘 타는 펠릭스 신부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릴까 봐 걱정됐다. 스컹크라는 소리를 할 때마다 바르르 떠는 걸 보면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 틀림없었다.
사실 펠릭스 신부의 마음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그렇지만 아이슬러는 꼭 본인의 입을 통해 입맞춤을 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문제는 부끄럼쟁이인 펠릭스 신부가 자발적으로 연심을 털어놓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영차.”
아이슬러가 보쌈이라도 하듯 펠릭스 신부를 어깨에 둘러멨다. 많이 다친 것 같으니 일단 치료를 받게 해야 했다. 펠릭스의 고백을 듣는 건 그다음이었다. 레오폴트처럼 성배를 두고 싸워야 할 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조급하게 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펠릭스 신부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또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봄바람이 뺨 위로 살랑거리는 것처럼 설렜다. 그는 펠릭스 신부가 병원에서 입었던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환자복이 마음에 들었다. 스컹크를 떠올리게 하는 사제복 말고 매일 그 환자복을 입히고 싶을 정도였다.
아까 잠시 레오폴트에 대해 생각했던 아이슬러는 레오폴트의 성배인 제이드의 얼굴을 불쑥 떠올렸다. 매끈매끈한 피부를 가진 그 동양인 청년이 자신의 성배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속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성배가 눈앞에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긴 조금 그렇지만 제이드는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피부에서 묻어나오는 체취만으로도 배교자를 설레게 하는데, 혈관에 흐르는 피는 얼마나 향긋할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아이슬러는 배교자들 사이에서도 그리 적은 나이가 아닌 편이었고 지금껏 온갖 인간의 피를 다 마셔 봤다. 인종, 나이, 성별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전부 다 섭렵했다. 그럼에도 제이드만큼 달콤한 체취를 풍기는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레오폴트는 참 대단했다. 어떻게 제이드의 피를 마시지 않고 여태껏 참을 수 있었던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약 그가 레오폴트였다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제이드의 목을 물어뜯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슬러도 성배의 피를 마시는 걸 미루긴 했지만 레오폴트의 경우와는 달랐다. 솔직히 말해서 펠릭스의 피는 썩 맛있는 편이 아니었다.
아이슬러는 레오폴트의 인내심이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제대로 미친놈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혀를 찼다.
레오폴트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성배의 피를 취하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에서건,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인간을 건드리지 않고 곁에만 둔다는 건 정말 심각한 자기 학대였다.
하긴 레오폴트는 원래도 살짝 맛이 간 놈이긴 했다.
워낙 잘생긴 데다가 전신에서 지배자 특유의 위압적인 기품과 품위가 흘러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할 뿐, 놈은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상식적으로 그건 절대 제정신인 배교자가 할 짓이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 아이슬러에게 레오폴트와 똑같은 짓을 해보라고 시킨다면 그는 미쳐도 백 번은 미쳤을 게 틀림없었다.
배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나토스가 알려 주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지식을 손에 넣는 일이었다. 성배의 피를 마셔 완벽한 존재가 되는 일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었다. 특히 레오폴트처럼 탐욕스럽고 잔혹한 성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이슬러가 아는 레오폴트 폰 볼텐슈테른 대공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양보할 줄 모르는 자였다.
***
스스스- 스, 스스슥.
어두컴컴한 공간을 에워싼 벌레들이 끊임없이 몸을 부대꼈다. 놈들은 서로를 잡아먹기도 했고 교미하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다. 광물의 빛깔을 띤 벌레들이 움직이는 광경은 해수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검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바니가 제이드를 감금하기 위해 마련한 음습한 동굴은 독방보다는 넓었다. 그럼에도 아늑하다거나 편하다는 느낌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포로수용소의 독방이 나았다. 최소한 거기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쇠창살이라도 달려 있었다.
“으….”
눈꺼풀을 꾹 닫은 제이드가 신음을 흘렸다. 그는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자세로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제이드가 뱉은 위태로운 숨소리는 벌레들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벌레로 구성된 사슬은 제이드의 손뿐만이 아니라 목도 휘감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벌레가 제 영토를 활보하듯 제이드의 뺨을 돌아다녔다. 정신이 혼미한 제이드는 벌레가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감각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감각을 구분하지 못했다.
‘당신이 아벤 굴드의 아이를 뱄다는 사실을 추론하기가 그렇게 힘들어요?’
‘당신과 찰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아벤 굴드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걸.’
바니가 낄낄 웃어 대는 목소리가 작았다 커지길 반복했다. 환청에 시달리는 제이드의 손가락이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고열로 인해 그의 피부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목덜미는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제이드의 손목을 두껍게 휘감고 있는 벌레의 사슬 사이로 뱀 문신이 빠끔 드러났다.
한때 정교하고 아름다웠던 뱀 문신은 이제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퇴색했다. 제이드의 몸 상태가 악화됨에 따라 뱀 문신이 무너지는 현상도 가속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성당 지하실의 풍경이 눈꺼풀 안쪽에 맺혔다.
제이드는 과거의 영상이 떠오르자 진저리를 치듯 턱을 움직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바니의 목소리를 견뎌 내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버거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이드의 의지로는 기억이 넘쳐흐르는 현상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성당 지하실에서의 기억을 통제하는 건 제이드가 아니라 바로 힘을 잃고 바래 가는 뱀 문신이었다.
노이즈가 낀 과거의 기억들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을 꿰뚫린 버석버석한 미라, 벽에 말라붙은 핏자국, 악마 숭배자들이 만든 제단을 떠올리게 하던 계단, 발목을 휘감던 싸늘한 냉기, 적군들이 내지르던 생생한 비명과 지하실을 가득 채우던 총성, 그리고 적군의 총에 맞아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허벅지와 복부에서 피가 뜨겁게 흘러내리던 감각.
전부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꿈에서 볼 때보다 장면 장면이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조각 영상을 이어붙인 것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는 게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의 피, 나만을 위한 제물.’
적군을 살육한 미라가 바닥에 쓰러진 제이드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언제나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성배라고 부르던 그놈이었다. 이름 모를 뱀파이어의 목소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녹슨 톱니바퀴처럼 쇳소리가 났다.
“크읏.”
제이드는 놈의 얼굴을 보기 위해 미간을 모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비릿한 흙냄새가 떠도는 성당 지하실이 너무 어두웠다. 놈의 얼굴은 먹물 같은 어둠에 잠겨 있기만 할 뿐, 끝내 제이드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젠장, 그딴 자식의 얼굴 따위 알아서 뭐해.
의식이 가물가물한 제이드는 팔에 머리를 기대며 신음을 삼켰다. 어차피 그를 성배라고 부르는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일 년 전 저주받은 성당 지하실에서 만난 자식이 누구든,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은 성배가 맞아요. 단지 아이슬러와 크롤리, 라스푸틴의 성배가 아닐 뿐이지.’
꾹 닫혀 있던 제이드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자신을 최초로 성배라고 부른 존재에 대해 무시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의 어깨가 흔들리자 그의 손목을 결박한 벌레들이 부산스럽게 몸을 부대꼈다.
바니는 뭔가 알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흘린 말이라고 치부하기엔 놈의 미소와 말투가 너무나도 의미심장했다. 하물며 속이 시커먼 그 남창 자식은 뱀파이어들을 이용해 자신과 굴드를 해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제이드는 바니가 던진 말을 필사적으로 곱씹었다. 하지만 새카만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그의 귓가에는 뱀 문신을 새긴 남자를 만나러 가자는 바니의 목소리만이 윙윙, 맴돌았다.
어쩌면 성당 지하실에서 그를 성배라고 부른 뱀파이어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일지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니가 제이드의 손목에 문신을 남긴 남자를 만나러 가자는 소리를 꺼낼 리 없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일 년 전 전투 중에 벌어진 사건이 아직도 그의 인생을 마음대로 뒤흔들고 있었다.
“으으읏, 큭.”
반쯤 의식이 깨어난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몸서리를 쳤다. 하반신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제이드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배 속에 꼬물꼬물 뭉쳐 있는 태아들 때문이었다. 제대로 여물지도 못한 태아들이 느끼는 고통을,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니까 불안이 엄습했다.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 그와 굴드의 자식이라는 존재들에게 몇 번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다들 죽은 건가 싶어 겁이 났지만, 하반신을 들쑤시는 통증은 아직 그들의 숨이 붙어 있음을 의미했다.
솔직히 말해서 제이드는 배 속에 든 존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그의 핏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인 몸으로 임신했다는 거북한 현실을 인정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에게 들이닥친 버거운 현실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배 속의 존재들을 인정하는 건 둘째 치고, 굴드에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꼴깍꼴깍 생침만 삼킬 뿐,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설혹 간신히 새끼 늑대들의 존재에 대해 알린다 하더라도 굴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두려웠다. 비록 굴드가 뱀파이어이긴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별다른 의구심 없이 전부 수용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남자의 임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눈썹부터 비틀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러한 걱정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제이드는 바니에게 납치당해 벌레로 가득 찬 공간에 밀어 넣어졌다. 바꿔 말하면 다시는 굴드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바니는 제이드를 누군가에게 넘길 속셈이었다. 그 누군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제이드를 성배로 여기고 있는 자일 터였다. 아이슬러와 크롤리, 수도사 복장을 한 남자를 제외하면 그를 성배로 부른 뱀파이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하물며 놈은 제이드의 손목에 문신을 새긴 뱀파이어를 만나러 갈 거라고 제 입으로 공언했다.
“으읏, 크으윽.”
벌레들에게 손목을 구속당한 제이드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린데다가 주변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광택이 도는 벌레들이 파도치듯 스멀스멀 움직이는 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감금된 곳은 마치 심해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 같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제이드는 심호흡을 했다. 성당 지하실에서 그의 기억을 지워 버린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기 전에 어서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판단하건대, 그의 기억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은 놈이 남긴 뱀 문신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가물가물한 정신에 불현듯 의문이 일었다. 성당 지하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놈은 왜 자신의 피를 마시지 않고 살려 보낸 걸까, 라는 생각이 또다시 든 것이다. 놈의 입장에서 제이드를 풀어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지하실엔 단둘뿐이었고 제이드는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제이드의 피를 마시기엔 최적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젠장, 괴물의 악취미 따위 알 게 뭐야.
사람 목숨을 가지고 변덕을 부린 뱀파이어의 사정 같은 건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으으윽.”
제이드는 이를 악물고서 손목을 비틀었다. 벌레들이 사사삭, 거리며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손목에 엉겨들었다. 마치 사막의 유사에 휩쓸린 것처럼 벌레들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제길.
피부에 맺힌 땀방울이 목 위로 도드라진 힘줄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눈을 질끈 감은 제이드의 눈꺼풀 안쪽으로 적군이 몰살당하던 광경이 펼쳐졌다.
적군이 쏜 총에 맞아 벌집이 된 제이드는 차가운 성당 지하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군복이 피에 젖어 가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망자의 강에 반쯤 몸을 담근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적군에게 확인 사살당하는 순간만을 무력하게 기다렸다.
그렇지만 제이드는 죽지 않고 생환했다.
총에 맞아 죽어 가던 제이드를 살린 건 성당 지하실의 벽에 봉인되어 있던 뱀파이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신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놈의 힘 덕분이었다.
성당 지하실에서 만난 뱀파이어가 아니었더라면 제이드는 전사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묵직한 관에 실려 고향 땅을 밟은 그의 소대원들처럼 말이다.
만약 이번 일만 아니었더라면 제이드는 그를 구해 준 뱀파이어에게 평생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놈이 망자의 강에서 그의 영혼을 건져 주었기 때문에 그는 굴드를 만날 수 있었다. 눈치는 없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해리와 친구가 된 것도, 단골 술집에서 벤 무리와 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먼 이국땅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제이드는 살렸다 죽였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아무리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구해 줬다고 하더라도 놈이 제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굴드와 만나지 못한 상황이라면 놈에게 이리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네가 살려 준 목숨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놈에게 순순히 목을 내주었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지금은 굴드를 남겨 두고 죽을 수 없었다. 간신히 손에 넣은 삶의 안정과 행복을 이딴 방식으로 짓밟을 거라면 차라리 살려 주지 않는 게 나았다. 어쩌면 놈은 보다 깊은 좌절과 절망을 안겨 주기 위해 제이드를 풀어 주는 변덕을 부린 것일지도 몰랐다.
“으으.”
벽에 고정된 미라가 심장에 박힌 기다란 창을 뽑아내는 광경이 제이드의 눈앞에 번졌다. 잠시 정지해 있던 과거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세월 유폐되어 있다가 자유를 찾은 뱀파이어는 입술에 튄 제이드의 피를 음미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놈의 푸른 눈동자엔 탐욕과 광기가 떠올라 있었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놈의 모습은 잔혹한 성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사악하기까지 한 고대의 악마 같았다.
바짝 말라붙은 미라가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으로 기억해 낸 제이드는 흠칫 턱을 긴장시켰다. 뱀 문신의 힘이 쇠락해짐에 따라 기억이 돌아오는 속도도 빨라졌다.
“흐읏, 윽.”
짙은 안개 너머에 감춰져 있던 기억의 잔해가 돌아오자 그의 심장이 펄떡펄떡 경련을 일으켰다. 타인에게 빼앗겼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건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이드는 듬성듬성 비어 있던 기억들이 채워지는 상황이 그리 기쁘지 않았다.
그는 기억들의 조각들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기를 강하게 바랐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길 거부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트라우마를 떠올리기 싫은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제이드의 의지로는 망각의 성이 무너지는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소실된 기억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건 그의 영혼이 아니라 망할 뱀 문신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환영이 제이드의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젊음을 되찾은 뱀파이어는 사경을 헤매는 제이드의 손목을 움켜잡고서 이를 세웠다.
“으읏!”
환영 속에서 부정한 생명력이 몸속으로 흘러들자 제이드는 진저리를 쳤다. 며칠 전에 꾸었던 꿈속에서 제이드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뱀파이어가 주입한 차가운 기운은 제이드의 육체에 기묘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때만 해도 제이드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미라의 모습을 벗어난 뱀파이어조차도 부정한 생명력이 제이드의 육체에 기이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타나토스가 성배와 관련된 고약한 진실을 고의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가 그의 손목에서 입술을 떼어 내자 모르핀을 투여한 것처럼 의식이 몽롱해졌다. 제이드는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서 어둠에 잠긴 너른 어깨를 올려다보았다.
제이드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내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지하실을 비추던 적군의 손전등이 깨진 탓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 사물을 어렴풋하게 식별할 수 있게 됐다. 마치 야간 작전 중 녹색 투시경이라도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뿐이긴 하지만 혈관을 타고 흐르는 뱀파이어의 타액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걱, 서걱.
제이드의 손목을 휘감은 흐릿한 뱀 문신이 모래가 흩날리듯 증발했다. 다리가 무수히 많은 벌레들은 기이한 현상이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이드의 기억을 훔친 뱀 문신의 수명은 이제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제이드의 피부 위에는 당장에라도 벗겨질 듯한 비늘 몇 개만이 위태롭게 얹어져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변… 성배. 그대에게….’
과거의 기억 속에 등장한 뱀파이어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동굴 천장에 매달린 제이드는 또 한 번 흠칫 어깨를 튕겼다. 뱀파이어의 혀가 휘감기는 감촉이 익숙했다. 피부에 내려앉는 차가운 숨결과 코끝을 맴도는 나른한 체취 또한 낯설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채 어둠을 응시하며 제이드는 턱을 덜덜 떨었다. 불길한 예감이 송곳처럼 그의 목을 찔렀다. 과거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의 눈앞에 흐르는 과거의 영상은 멈추지 않았다. 뱀 문신의 마지막 비늘이 힘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뱀 문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기억을 담은 조각이 첫눈처럼 제이드에게 내려앉았다. 어둡고 음습한 성당 지하실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 그가 무엇을 목격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군복을 입은 과거의 제이드가 뱀파이어의 가슴께에 머물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탄탄한 어깨를 가진 뱀파이어는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듯 제이드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푸른 눈동자를 가진 뱀파이어와 눈이 마주친 현재의 제이드는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굴드의 얼굴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성당 지하실에서 그의 몸에 올라탄 채로 키스한 사람이 바로 아벤 굴드였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 일 년 전, 성당 지하실에서 그를 성배라고 부르고 적군을 몰살시킨 남자가 굴드일 리 없었다. 제이드가 굴드를 처음 만난 곳은 그린텔발트 어딘가에 위치한 성당이 아니라, 번잡하고 낙후된 웨인 시티의 뒷골목이었다.
제이드는 굴드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어둑한 뒷골목에서 강도를 당할 뻔했던 굴드를 자신이 구해 줬다. 만약 굴드가 성당 지하실에서 만난 뱀파이어였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제이드의 목을 물어뜯었어야 했다.
‘…위험해.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제 기억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제이드의 귓가에 뱀파이어의 목소리가 닿았다. 좀 전엔 놈의 음성이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처럼 불분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기억이 모두 돌아온 지금은 뱀파이어의 나른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귓가에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마치 스피커의 잡음이 제거되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도 선명했다.
굴드의 얼굴을 한 뱀파이어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제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엽게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군.’
굴드의 목소리였다.
‘마음이 바뀌었다, 성배. 그대에게 조금 흥미가 생겼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를 성배라고 부른 뱀파이어의 음성은 굴드의 것과 똑같았다.
“큭, 아니야! 그 자식이 굴드일 리 없어.”
목에 핏대를 세운 제이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쇳소리를 내뱉었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심장을 헤집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굴드가 제게 악몽을 선사한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은 성배가 맞아요. 단지 아이슬러와 크롤리, 라스푸틴의 성배가 아닐 뿐이지.’
바니가 그를 조롱하며 지껄였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놈들이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당신은 놈들의 성배가 아닙니다.’
굴드는 제이드가 성배가 아니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스스슥, 스스스스-.
붉은 눈을 가진 벌레들이 갑자기 단체로 수선을 피우기 시작했다.
충격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제이드가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벌레로 뒤덮여 있던 벽에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 금을 그은 것처럼 수직으로 갈라진 빈틈 사이로 언뜻번뜻 폐허가 보였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제이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심해의 터널처럼 영원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을 것 같던 벌레들의 방이 그의 눈앞에서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
전력을 다해 도주하던 바니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무중력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거리가 고요했다. 허둥지둥 자신을 추격하는 오서독스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바니는 어둑한 거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제 냄새를 사방에 뿌린 보람이 있었다. 바니는 놈들에게 붙잡힐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를 먼저 잡는 쪽에게 성배를 넘겨주겠다는 말도 당연히 본심이 아니었다.
비록 아이슬러가 예정보다 일찍 성자의 관에서 벗어나 그를 놀라게 했지만, 오서독스들은 바니가 집필한 각본대로 잘 놀아나 주었다. 아벤 굴드로 하여금 오서독스 살해라는 무거운 죄를 짓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장기짝 노릇을 톡톡히 해 준 덕분이었다.
가짜 성배를 차지하려고 최선을 다한 오서독스들의 노고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고생은 고생이고, 제 역할을 다 마쳤으니 이쯤에서 그들은 무대에서 퇴장해 주는 게 도리였다.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아쉬워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아벤 굴드를 위해 마련한 무대의 소도구에 불과했다. 바니의 계획대로 되었으니 놈들은 이제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또한 놈들은 곧 제이드와 바니를 쫓는 것을 자연스레 포기할 터였다. 제이드가 그들의 성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자의 관에 주술을 걸 때 들이부은 제이드의 피가 워낙 적어 세뇌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
놈들이 진실에 눈뜨게 되면 노발대발하거나 뼛속 깊이 좌절하겠지만 바니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즈음이면 바니와 타나토스의 오랜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져 있을 테니까.
“2막이 오르려면 조금 기다려야겠는걸.”
제자리에 멈춰 서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바니는 건물 잔해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아벤 굴드가 나타날 때까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모름지기 주연 배우가 도착해야 무대의 막이 올라가는 법이었다.
바니는 통굽을 신은 발을 까닥거리며 아벤 굴드가 나타날 만한 방향을 응시했다.
“딴딴따단~ 딴딴따다단~ 음음음르르~ 따라라라란.”
흥분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 결혼 행진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이렇게 다소곳이 앉아 아벤 굴드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마치 제가 신부 대기실을 차지한 순백의 신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음, 그럼 아벤 굴드가 내 신랑인가? 푸흡.”
바니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냐, 아냐. 그 녀석은 신랑이 아니라 나와 타나토스를 맺어 줄 신부의 아버지나 주례 쪽이 훨씬 더 어울려. 어라, 그럼 제이드는 피와 살덩이로 만든 웨딩 케이크?”
들뜰 대로 들뜬 남창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음껏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그의 심정은 붉은 버진 로드 위를 걷는 신부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긴 했다.
그가 타나토스와 처음으로 접촉한 건 아이작 루테니아와 찰스가 죽은 날 밤이었다. 제집 지하실에서 죽어 가던 아이작의 피를 충동적으로 마신 덕분에 타나토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언자 가문인 루테니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이작의 인간성은 쓰레기였다. 하지만 그는 보기 드문 천운을 가지고 태어난 남자였다. 그가 거머쥔 행운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어떤 남자가 천만 달러가 넘는 복권에 연달아 백 번쯤 당첨되고, 별생각 없이 구매한 땅엔 풍부한 석유와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더라,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천운을 타고났다고 해서 꼭 끝이 좋으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몰랐지만, 그가 거머쥔 어마어마한 운에는 횡액이 부록으로 딸려 있었다. 엄청난 행운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부자가 된 남자가 돈 한 푼 써 보지도 못하고 제 하인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빼앗기게 되는 식이었다.
비록 끝은 불행했지만 아이작의 삶은 배교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아이작은 성배를 만났다. 그가 천운을 타고났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성배 때문이었다.
오서독스고, 서번트고 할 것 없이 배교자들은 성배를 갈망했다. 그렇지만 성배는 그리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방황하고서도 성배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배교자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성배를 만날 확률은 앞서 언급한 부자의 예 정도였다.
바니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아이작의 집에 불을 질렀던 날 밤의 기억을 되살렸다. 아이작에게 피를 빨려 죽은 찰스의 시체와 차디찬 지하실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던 아이작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위선자 찰스가 지하실에서 발견된 이유는 그가 아이작의 성배였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아직 루테니아 가문에 적을 두고 있었던 시절, 어떤 배교자의 성배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어떤 배교자의 이름이 제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읽어 냈다. 아이작은 그날 이후로 배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번트와 주종의 관계를 맺고 싶진 않았기에 금지된 연구에 손을 댔다.
피의 세례 없이도 배교자가 되는 데 성공한 아이작은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선교사를 꿈꾸던 찰스를 납치했다. 온갖 사악한 연구를 자행하던 어둑한 지하실에서 그는 찰스의 피와 영혼을 강탈했다. 찰스의 목을 물어뜯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작은 태고의 진리를 손에 넣을 것이라는 헛된 야망에 젖어 있었다. 물론 그의 야망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바니를 제외한 배교자들은 아이작처럼 성배라는 이름의 행운에 크나큰 저주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타나토스가 의도적으로 성배에 대한 진실을 은폐한 탓이었다.
일개 서번트에 불과한 바니가 성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 말했듯 아이작의 피를 마신 덕분에 타나토스와 정신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타나토스는 사실 살아 있는 생명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악의로 이루어진 사념의 집합체였다. 그리고 바니는 별개의 인격을 유지하고 있는 타나토스의 숙주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둘은 곧 하나로 합쳐질 예정이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제이드와 아벤 굴드가 반드시 필요했다.
타나토스와 그는 죽이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마치 단 하나뿐인 연인이자 반려처럼 영혼으로 교감하는 사이라 할 수 있었다. 멍청한 장은 제가 바니의 파트너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착각이었다. 볼품없고 옹졸하기까지 한 대머리 놈은 바니가 잠시 데리고 놀던 노예에 불과했다. 바니가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오직 타나토스뿐이었다.
“아벤 굴드는 아직도 꼼짝 못하고 있으려나. 이제 슬슬 독을 다 해독했을 때가 된 거 같은데.”
바니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섬뜩한 기운이 그의 무릎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침한 인상의 남창은 눈을 부릅뜨고서 제 무릎을 내려다봤다. 맨다리 위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할퀴었지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으아아아악!”
붉은 선을 경계로 바니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바니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온 것은 그의 상반신이 땅바닥에 엎어진 다음이었다.
통굽을 신은 그의 두 다리는 여전히 똑바로 서 있었다. 그 표면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다리를 적셨다. 벌레처럼 바닥에 고꾸라진 바니의 무릎에서도 콸콸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윽, 으으읏. 어떻게 벌써.”
바닥을 뒹구는 바니의 앙상한 몸 위로 건장하고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바니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의 무릎을 절단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건 분명 아벤 굴드였다. 독을 정화하느라 뒤처져도 한참 뒤처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니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벌써’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군. 네가 게으름을 부리다가 따라잡힌 거니까.”
바니의 뺨을 구둣발로 짓밟은 아벤 굴드는 음산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검은 밤하늘을 등진 그의 푸른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주변의 공기는 배교자들을 지배하는 왕의 어깨 위로 넘실거리는 악령들 때문에 탁한 기운을 띠었다.
“크읏, 으으윽.”
바니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아벤 굴드를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육체를 가진 남자는 흡사 인격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마치 타인의 공포를 즐기고 학살을 사랑하던 전쟁광이 오랜 침묵을 깨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와, 완벽해. 당신보다 매혹적인 피조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아벤 굴드가 내뿜는 살기에 짓눌린 바니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배교자들의 왕은 독에 중독되기 전보다 몇 배는 더 잔혹하고 퇴폐적으로 보였다.
바니의 앙상한 몸뚱이가 아벤 굴드의 그림자에 휘감겨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전신이 거꾸로 뒤집어진 탓에 그의 머리카락이 땅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잘린 무릎에서 샘솟는 끈적끈적한 피도 거꾸로 흘러내려 종국엔 바니의 배를 적셨다.
“죽여도 소용없는 것 같으니 이번엔 머리만 남겨 두도록 하지.”
거꾸로 뒤집힌 바니와 눈높이를 맞춘 아벤 굴드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막을 울리는 굵직한 목소리는 오싹한 전율이 일 만큼 달콤했다.
바니는 아벤 굴드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배교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본성이 아벤 굴드를 장악해야만 바니와 타나토스의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바니는 성자의 관을 훔치고, 오서독스들을 부활시켰으며, 그들이 제이드를 성배로 착각하도록 준비했다. 그가 직접 모든 일을 꾸미긴 했지만 결과물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거꾸로 흐르는 피가 남창의 뺨과 속눈썹을 더럽혔다. 붉은 피가 눈을 찔렀지만 바니는 눈꺼풀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입술을 떨었다.
“흐읏. 이, 이러지….”
피 때문에 붉어진 입술 사이로 교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벤 굴드가 참을 수 없이 두려우면서도,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 때문에 흥분이 되었다. 음탕한 눈을 한 바니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위험한 존재인 아벤 굴드가 그의 피학적인 성향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그는 강인한 수컷에게 학대받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 강인한 수컷을 제 손으로 직접 나락에 처박는 일은 훨씬 더 좋았다. 그런 짓만 마음껏 반복할 수 있다면 성적 쾌락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고결한 존재를 자신의 위치까지 끌어내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비겁한 술수를 써서 타락시키고 파멸하는 모습을 볼 때, 바니는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눈빛이군.”
아벤 굴드는 눈썹을 비틀며 손가락을 튕겼다. 주인의 명령을 받은 검은 그림자들은 거꾸로 뒤집힌 바니의 양쪽 팔을 가차 없이 베었다.
“아아아악!”
바니가 머리를 마구 흔들며 고통을 표출했다.
아벤 굴드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바니를 보며 웃었다.
그의 발치에 도사리고 있던 심연의 그림자가 괴물로 변모했다. 고대의 생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게 된 그림자들은 바니에게 달려들어 배를 헤집었다. 굶주린 마수들은 놈의 내장을 난폭하게 잡아 뜯어 사방에 흩뿌렸다. 크롤리가 바니의 몸에 심어 둔 깃털이 밖으로 빠져나와 허공에서 폭발했다. 괴물들은 폭발이 일어나든 말든 놈의 넓적다리뼈를 힘줄과 함께 씹어 삼키는 데 열중했다.
고통으로 인해 눈을 부릅뜬 바니의 몸뚱이가 잘게 찢겨 나가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거나 고개를 돌리게 할 만큼 잔인했다. 그러나 아벤 굴드의 입가에 떠오른 진득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배교자의 왕은 고역스러운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무희의 유연한 춤이라도 감상하는 듯한 태도로 바니가 해체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아벤 굴드는 피의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처럼 배교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레오폴트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시절, 그의 잔학성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배교자인 그는 적에게 공포를 심어 주거나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자극적인 욕망과 말초적인 쾌락에 심취하는 것 또한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본성이었다.
타나토스에게 심장을 제물로 바친 아벤 굴드는 감정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죽은 자가 되기 전에도 그는 끔찍하게 냉담하고, 비정하며, 자기 본위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과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배교자들의 왕인 아벤 굴드는 같은 오서독스들조차 치를 떠는 비틀리고 냉혹한 존재였다.
“더 이상 날 역겨운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 걸 보면 생각이 많이 바뀐 모양이군.”
아벤 굴드는 마수가 바닥에 떨어트린 바니의 장기를 잘근잘근 짓밟아 터트리며 그렇게 말했다. 차가운 눈빛을 한 그는 더러운 것을 닦아 내야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바니의 뺨에 신발 밑창을 문질렀다.
“끄으으윽.”
빨간 고깃덩어리가 된 바니의 눈동자 위로 증오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굴드의 지적대로 그에게 학대당하고 싶다는 충동 따윈 바니의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니가 원하던 폭력과 학대는 이딴 게 아니었다.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군.”
아벤 굴드가 바니의 얼굴에서 발을 떼어 내며 진심으로 칭찬했다.
바니의 몸은 목을 경계로 멀쩡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나뉘었다. 목과 이어진 경추 아래론 신경과 혈관 및 힘줄이 너덜거렸다. 괴물들이 건드리지 않은 머리를 제외하면 그의 몸은 흡사 분쇄기를 거친 부산물처럼 잘게 다져져 있었다.
“으으으.”
굴드를 노려보는 바니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얼기설기 돋아났다.
굴욕감이 목구멍을 들쑤셨다. 몸속 저 깊은 곳에서 아벤 굴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살의가 솟구쳤다. 제게 극악한 고통을 준 아벤 굴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바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근잘근 곱씹으며 네놈은 곧 죗값을 치르게 될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를 박해하고 멸시한 자들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오만한 지배자인 아벤 굴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권능이나 무력의 차이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은 죽음과 복수를 관장하는 타나토스에게 사랑받는 자였다.
늙은 개처럼 바닥을 기게 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배교자들의 왕으로 군림하던 아벤 굴드였다. 바니는 그가 파멸하고 나면 그가 당한 고통을 고스란히 되갚아 주리라 맹세했다.
아벤 굴드는 고귀한 혈통을 가졌다. 하지만 그래 봤자 배교자였다. 오래도록 권세를 누려 온 그도 결국엔 자기 현시욕 강한 아이작 루테니아의 뒤를 잇게 되어 있었다. 창백한 죽음은 가난한 자의 오막살이도, 왕후의 궁전도 두드린다는 소리를 누가 지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도 틀린 게 없는 말이었다. 타나토스와 함께 완벽한 존재가 될 자신만이 죽음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세포가 분열하듯 척추를 중심으로 바니의 조직이 부풀어 올랐다. 사방에 조각조각 흩뿌려진 살점들은 머리를 향해 이동했다. 느린 속도긴 해도 바니의 육체가 조금씩 재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성배를 돌려줄 준비가 됐는지 궁금하군.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놀이를 나와 함께 조금 더 즐길 생각인가?”
아벤 굴드의 굵직한 목소리가 음산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어둡고 폭력적이며, 탐욕스러운 감정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율법을 어긴 죄로 말미암아 아벤 굴드는 성배의 피를 갈구하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지난 일 년간 아벤 굴드에게 외면당한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그의 발치에서 광소를 터트렸다. 타나토스의 그림자는 아벤 굴드의 무의식과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본능에 물든 아벤 굴드는 이제 조금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어서 이 끔찍한 갈증을 달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성배의 피로 영혼을 축이는 행위를 여태껏 왜 주저하고 망설였던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성배의 피 냄새를 맡으며 봉인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대답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아벤 굴드가 손가락으로 놈의 눈깔을 잡아 뽑았다.
“크아아악!”
한쪽 눈을 잃은 바니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울부짖었다. 얼굴이 붉은 피로 뒤덮인 덕분에 두 뺨에 빼곡하게 박힌 그의 주근깨는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벤 굴드가 그림자를 움직여 바니의 몸뚱이를 택시 지붕으로 내던졌다. 마치 좀비의 상반신을 그 위에 던져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건가?”
“결정… 했.”
만신창이가 된 바니가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비뼈와 그 주변의 근육이 재생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아벤 굴드를 향한 그의 복수심 또한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대답은?”
아벤 굴드가 굶주린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지옥의 겁화라도 삼킨 것처럼 목이 타들어갔다. 감당하기 힘든 갈증 때문에 그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크크큿, 돌려 드려야죠. 남의 성배 따위, 키킥! 크흐흣.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쿨럭.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바니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 댔다. 자포자기한 건지 아니면 미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인 사람의 반응이라고 보긴 어려운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놈. 그래, 어디 네 소원대로 해 주마.
택시 지붕에 뺨을 댄 바니가 한쪽만 남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제이드를 가둬 두고 있는 공간을 열기 위해 뼈만 재생된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피부도, 근육도 붙어 있지 않은 뼈다귀 팔을 들어 올리는 광경은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손가락뼈가 달그락거리며 움직이자 벌레로 이루어진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렵게 납치한 제이드를 아벤 굴드에게 넘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니의 얼굴에선 미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느다란 그의 눈에 희열이 번졌다. 두 손만 멀쩡하다면 몰락을 자처한 아벤 굴드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스슥, 스스스슥.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그 사이로 벌레들이 빠져나오면서 틈이 점점 벌어졌다. 벌레들이 둥지를 떠나자 차원 저편의 동굴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까맣게 벌어진 균열 사이로 제이드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아벤 굴드는 성배를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택시 지붕에 마네킹 같은 몰골로 던져진 바니는 제이드와 굴드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색이 창백한 제이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놀란 눈을 하고서 아벤 굴드를 바라봤다. 납치를 당했다가 간신히 풀려나서 그런지 그의 얼굴엔 혼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봉인에서 풀려난 아벤 굴드가 성당 지하실에서 제이드를 처음 발견했을 때 보았던 표정과 흡사했다.
아벤 굴드가 두 팔을 벌려 균열 밖으로 쏟아지는 제이드를 받았다. 익숙한 무게가 가슴에 전해지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슬쩍 입꼬리를 비틀었다. 성배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험악한 기운을 흘리던 아벤 굴드의 눈빛은 어느새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혈관이 말라비틀어지는 듯 지독한 갈증은 여전했지만, 남자는 성배가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 덕분에 메인 디시가 테이블에 내려놓아지는 순간처럼 흥분과 기대를 동반한 약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많이 무서웠습니까?”
아벤 굴드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제이드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닌지, 선이 가는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
굴드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품에 안긴 성배는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혼곤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초점이 불분명한 제이드의 검은 눈동자엔 혼란과 불신, 그리고 불안이 가득했다.
성배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벤 굴드는 심기가 뒤틀렸다. 그렇지만 그는 곧 제이드의 심장 박동 소리로 관심을 돌렸다. 심장이 혈관에 뜨겁고 진한 피를 쏟아 내는 울림이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제이드의 피부가 평소보다 축축하고 싸늘하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거친 정사에 지쳐서 기절한 그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아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더불어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체취는 여전히 잘 익은 포도처럼 달콤했다.
농염한 체취에 흥분한 남자는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제이드의 등을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길이 제이드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등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제 성배가 체중을 맡겨 오자 아벤 굴드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를 경계하던 제이드가 완전히 긴장을 풀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굴드의 착각과 달리 제이드는 그의 품에 편히 기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공황 상태에 빠져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것뿐이었다. 자신이 굴드의 성배라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제이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연달아 들이닥쳐 사고가 정지해 버린 느낌이었다.
정신과 육체 모두가 혼곤한 제이드는 현기증을 느끼며 굴드의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녹슨 못이 수십 개는 박힌 것처럼 심장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정말 내가 당신의 성배냐’고 굴드에게 물어야 하는데 혀가 굳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왜 그대에게 유예를 줬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군.”
아벤 굴드는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니의 계략으로 인해 그는 과거의 이기적이고 포악한 성격으로 회귀했다.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는 그는 여태껏 자신이 왜 성배의 피를 마시지 않고 버틴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성배를 묵혀 봤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았다.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는 건 미련한 고행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로 인해 크롤리를 비롯한 다른 떨거지들이 그의 성배를 노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무엇보다 성배의 피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기준에선 비합리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그의 성배를 직접 보고 나니 의문이 풀렸다. 제이드는 성배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동양인 청년에게 홀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인정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제이드의 매력을 머리로 이해했다는 뜻일 뿐, 아벤 굴드의 감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이드가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존재임은 확실했지만, 배교자의 본능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크윽. 이봐, 아벤 굴드!”
상반신이 거의 다 재생된 바니가 팔꿈치로 택시 지붕을 짚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붉게 충혈된 그의 얼굴엔 광기에 가까운 짜증과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이 병신 새끼! 얼른 아이작처럼 네 성배의 피를 마시란 말이다.’
바니는 제이드를 내어주면 아벤 굴드가 냉큼 피를 마실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예상과 달리 아벤 굴드가 곧바로 제이드에게 손을 대지 않자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빌어먹을! 기껏 성배를 되돌려 받아 놓고 언제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이지, 엉? 당신 새대가리야?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네 성배를 노리고 있다는 걸 벌써 잊어버렸어? 겁 많은 계집애처럼 다른 놈이 제이드를 채 갈 때까지, 크아악!”
택시 지붕 위에서 미친개처럼 발광하던 바니가 검고 불투명한 화염에 휩싸였다. 제이드를 품에 안은 아벤 굴드가 손가락을 튕겨 그의 몸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닥쳐. 네깟 놈이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두 머저리가 내 성배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샛노란 택시가 바니와 함께 불타올랐다. 심연의 심장부에서 태어난 불꽃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아벤 굴드의 눈동자 위에서도 새까만 불꽃이 파도치듯 사납게 일렁거렸다. 바니가 지껄인 말을 곱씹던 그는 제이드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오른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벤 굴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크롤리와 아이슬러의 면상을 떠올리며 부상을 입은 자리를 흘끗 내려다봤다. 출혈은 멎었지만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라스푸틴을 죽인 대가로 그의 영혼에 징벌의 낙인이 찍힌 탓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또 연합해 그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파졌다. 최악의 경우, 제이드를 놈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아아악! 끄으으윽, 타나토ㅅ…. 녹슨, 피. 크아악!”
숯처럼 새까맣게 탄 바니가 불길 속에서 팔을 허우적댔다. 놈은 저주라도 내리듯 악에 받친 얼굴로 뜻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시끄럽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벤 굴드는 눈썹을 비틀었다. 이제 그만 죽어 줬으면 좋겠는데 바니의 명줄은 고래심줄보다 끈질겼다. 머리를 터트려도, 몸뚱이를 잘게 갈아 버려도, 불에 태워도 놈은 되살아났다. 타나토스도 아닌데 어떻게 죽음을 거스를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진정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타나토스와 성배의 피를 마셔 태고의 진리를 손에 넣은 배교자, 단둘뿐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존재라고 하기엔 저 서번트는 너무 약하고 하찮았다.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놈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버러지에 불과했다.
아벤 굴드는 불쾌한 표정으로 바니를 노려보다가 방해꾼들의 존재를 상기했다.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인데 저딴 미물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놈을 없앨 방법은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괴성을 질러 대는 저 입만큼은 닥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니의 혀를 도려내기 위해 그림자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잔뜩 갈라진 제이드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정말… 당신이었던 겁니까?”
안색이 파리한 제이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굴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태풍에 휩쓸린 선실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쇄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흡사 눈물 같았다.
탈수증을 일으킬 만큼 많은 땀을 흘린 제이드는 중환자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아랫배에선 격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고, 손끝은 시체처럼 차가웠으며 입술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그러나 제이드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비단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질없는 기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이드는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이길 바랐다. 자신이 굴드에게 있어서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굴드가 그를 가리키며 성배라고 말했다. 빌어먹게도, 그가 차마 두려워서 물어보지 못한 질문의 대답을 얼떨결에 듣게 됐던 것이다. 배신감, 서글픔, 실망, 그리고 미련이 머릿속에서 뒤엉킨 제이드는 목이 꽉 잠기는 것을 느꼈다.
굴드가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굴드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잔혹한 진실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자신은 굴드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굴드가 관심을 가졌던 건 그에게 강력한 힘을 가져다줄 ‘성배’지 제이드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굴드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는 어리석게도 굴드가 왜 제게 마음을 열지 않는 걸까, 하고 혼자서 가슴앓이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림자를 움직이려던 굴드는 눈썹을 비틀고서 제이드를 내려다봤다. 제이드의 손은 굴드의 멱살을 붙잡고 있다기보다는 셔츠에 손가락을 걸치고 있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어울렸다.
“당신이, 날….”
눈가에 눈물이 부옇게 차오른 제이드가 숨을 헐떡거렸다. 눈꼬리가 젖어 드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철저히 농락한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큭.”
굴드의 품에서 억지로 벗어난 그는 아랫배를 할퀴는 끔찍한 통증으로 인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벤 굴드는 그런 제이드를 가소롭다는 눈길로 내려다봤다.
“흐읏.”
지독한 배신감이 제이드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가 알던 굴드가 아니라 성당 지하실에서 부활한 뱀파이어였다. 제이드와 오랫동안 함께하자고 속삭여 주었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이럴 바에는 왜 그때 날 죽이지 않은 거냐는 원망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 빌어먹을 성배의 피를 마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제이드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건 굴드와 함께한 시간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슬럼가 뒷골목에서 굴드와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굴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다. 제이드를 처음 만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척 연기했다.
평범한 연극배우의 가면을 쓴 굴드는 제이드가 그의 성배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그뿐만 아니라 뱀 문신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제이드는 여태껏 굴드가 뱀 문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제이드의 손목에 문신을 새긴 사람이 굴드인데 뱀 문신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 가던 제이드를 살려 준 사람은 굴드였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굴드의 변덕으로 인해 제이드의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차라리 슬럼가 뒷골목에서 재회했을 때 굴드가 본색을 드러냈더라면 지금처럼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그대가 내 성배라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성격이 바뀐 굴드가 제이드의 손목에 흘끗 시선을 던지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억을 봉인하기 위해 새겼던 문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신이 지워졌다는 건 제이드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뜻했다.
굴드는 무의식적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가 제이드의 기억을 지운 이유는 단지 완벽한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러니 이젠 굳이 그의 정체를 제이드에게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무한정으로 늘렸던 유예를 이쯤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제이드의 눈빛이 그의 심장 부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댈 속인 점에 대해선 사과하지.”
기묘한 감정에 휩싸인 굴드는 제이드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한 제이드를 보고 있으려니 왠지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엽고, 사랑스럽고, 애처로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제이드를 절망에 빠트린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흣, 웃기지 마. 흐읏, 누가 당신 사과 따위….”
제이드는 굴드의 손을 떨쳐 내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굴드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제이드는 억지로 굴드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그 사이,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이드를 내려다보던 굴드는 흠칫 어깨를 튕겼다. 그의 성배가 눈물을 흘리자 갑자기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굴드는 화가 난 사람처럼 눈썹을 잔뜩 비틀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죽어 버린 심장을 찌르는 낯선 고통에 당황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큭.”
굴드가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는 사이, 제이드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속눈썹을 적시며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하고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지는 환청이 굴드의 귓가에 들렸다. 사고가 정지한 굴드는 제이드가 흘린 눈물을 훔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귓가에 닿는 자신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울지 말라는 말이 굴드의 목구멍을 맴돌았다.
속눈썹이 흠뻑 젖은 제이드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는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굴드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본능에 지배당한 이후로 굴드는 제이드를 성배라는 사물로서만 인식했다. 그런데 거기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이….”
굴드가 본능을 억누르며 제이드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술을 연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염병하지 말고 얼른 성배의 피를 마셔! 당신, 완벽한 존재가 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바니가 팔꿈치로 바닥을 기며 불길에서 빠져나왔다. 악에 받쳐 내지르는 그의 목소리는 스피커가 째지는 소리처럼 듣기 끔찍했다.
굴드는 퍼뜩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제이드의 눈물에 닿았던 손이 그대로 멈춰 있다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제이드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삽시간에 흉포해졌다.
“시간 끌지 말고, 그대로 목을 물어뜯어! 도대체 뭘 망설여. 왜 자꾸 뜸을 들이냔 말이야! 설마,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제이드의 눈물 따위가 더 중요한 거야? 엉?”
바니는 굴드의 눈빛이 달라진 것도 모르고 거의 발광하듯 그를 도발했다.
“버러지 놈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군.”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굴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니를 바라봤다. 제이드의 몸에서 미련 없이 손을 뗀 그의 어깨 위로 섬뜩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그는 바니가 짖어 대는 막말보다 방금 자신이 저지르려고 했던 행동에 깊게 분노하고 있었다.
굴드는 이번엔 기필코 바니의 입을 다물게 만들리라 다짐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소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레오폴트으으!”
고함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입에 피 칠갑을 한 크롤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양쪽 어깨에는 번개에 그을린 것처럼 거무튀튀한 라스푸틴의 팔이 각각 달려 있었다. 소년의 입가에 묻은 피의 출처도 라스푸틴이었다. 피의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의 시체에 손을 댄 것이다. 밑바닥을 경험한 크롤리는 오서독스로서의 고고한 자존심 따위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그를 비참하게 만든 아벤 굴드를 죽이고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추잡한 짓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었다.
“크, 크롤리?”
피부가 재생되기 시작해서 더욱 징그러운 몰골이 된 바니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굴드를 자극하기 위해 크롤리와 아이슬러를 들먹였지만,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다른 오서독스가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도록 벌레와 냄새로 교란을 시켰다. 그런데 어떻게 저 빨간 털 꼬맹이 자식이 여기 나타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머리 나쁜 기생충 새끼.”
라스푸틴의 몸에 달려 있던 새까만 팔을 제 어깨에 붙인 크롤리가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며 이죽거렸다. 그때 표면이 바삭하게 구워진 손가락이 쩍,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롤리는 인상을 쓰고서 라스푸틴의 양손을 살폈다.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힘없이 덜렁거리는 손목도 곧 떨어져 나갈 조짐을 보였다.
“젠장, 달고 있으나 마나군.”
크롤리는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며 북북 이를 갈았다. 라스푸틴의 팔을 움직일 때마다 가루가 부스스 흩날렸다. 이래선 거추장스럽기만 한 의수를 달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뭐, 상관없어. 팔 따윈 중요한 게 아니니까.”
키 작은 소년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깨 부근에서 쩌저적, 소리가 났지만 크롤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집중해야 할 사안은 언제든 바꿔 달 수 있는 팔 따위가 아니었다.
양쪽 팔 모두를 잃는 굴욕을 당한 크롤리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얼굴로 레오폴트를 노려봤다. 강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소년은 요사스러우리만치 아름다운 레오폴트의 모습만 두 눈에 담았다. 심지어는 배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성배조차 뒷전인 기색이었다.
“레오폴트, 이 개자식아. 갈기갈기 찢어 버려 주마.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지!”
날개가 한쪽밖에 남지 않은 크롤리가 모든 마력을 퍼부어 거대한 전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땅에 흩어진 자잘한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들썩거리고, 대기를 찢는 번개에 주변 사물이 공명이라도 하듯 부르르 진동했다.
“새대가리 놈, 쿨럭. 돌아도, 흐흐흐, 단단히 돌았네. 그렇지 않아도 눈꼴이 시렸는데, 흐으, 장렬하게 산화하는 꼴을 볼 수 있겠는걸.”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바니는 크롤리의 전하 폭풍 때문에 쏟아지는 돌의 비를 맞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괴성을 내지르며 아벤 굴드에게 달려드는 크롤리에게 닿아 있었다.
새까맣게 타 버린 바니의 피부가 저릿저릿할 만큼 전하 폭풍의 위용은 대단했다. 하지만 분노로 미쳐 버린 크롤리의 전술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전하 폭풍의 공격이 아벤 굴드에게 통하면 다행이지만, 그게 빗나가면 크롤리는 말 그대로 끝장이었다. 마력이 바닥난 상태로 아벤 굴드에게 역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롤리는 바니의 생각처럼 증오심에 사로잡혀 앞뒤 가리지 않는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게 아니었다.
“네놈은 절대 못 막을 거다. 자, 어서 피해! 피하란 말이다.”
크롤리가 핏줄이 불거진 눈을 하고서 소리쳤다. 레오폴트를 공격하는 척하는 그의 눈동자엔 희열이 떠올라 있었다. 조금 전에 보인 소년의 모든 행동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노림수였다. 생명력까지 소진해 가며 만든 전하 폭풍 역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한 연막에 불과했다.
그의 목표는 레오폴트가 아닌 제이드였다. 분노로 이성이 나간 것처럼 행동한 이유는 적이 그의 공격을 막아 내는 동안에 성배의 목을 물어뜯기 위함이었다.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악독한 레오폴트의 손아귀에서 성배를 빼돌리는 일이었다. 성배의 피만 마시면 자신이 궁극적인 승자가 됐다. 레오폴트를 응징하는 건 그다음으로 미뤄도 충분했다. 크롤리의 입장에선 굳이 승산 없는 싸움을 고집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크롤리는 피의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라스푸틴의 피를 마셨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놈의 피를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마력이 늘긴 했다. 그럼에도 아벤 굴드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뒈져 버린 라스푸틴 놈도 피의 마력이 바닥나긴 마찬가지였었다.
게다가 아이슬러가 언제 이 자리에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빌어먹게도 그는 레오폴트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약자로 전락했다. 아이슬러까지 등장하면 그가 성배를 차지할 길은 요원해졌다. 천하의 크롤리 님이 아이슬러 따위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소년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부아가 끓어올랐다. 그는 원래 오서독스 중에서 레오폴트 다음으로 강한 존재였다. 하지만 과거를 들먹이며 불만을 성토해 봤자 현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크롤리는 어떻게 해서든 이 거지 같은 상황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으….”
바닥에 쓰러진 제이드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시야 너머로 어떤 인영이 보였다. 위협적인 살기를 느낀 제이드는 돌부리에 손톱을 세웠다.
정신이 혼미한 터라 그가 본 사람의 인영이 크롤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제이드의 직관은 어서 피해야 한다고 경고를 보냈다. 문제는 하반신을 짓누르는 통증 때문에 도망치기는커녕 몸을 일으켜 세울 기운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성배는 내가 접수해 주마, 레오폴트! 이제 이 지긋지긋한 쟁탈전도 끝이다.”
굴드를 공격하는 척 연기를 펼쳤던 붉은 머리 소년이 결정적인 순간에 방향을 틀었다. 바니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놀라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고 제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진 라스푸틴의 손은 제이드에게 닿지 못하고 파삭, 부서져 내렸다. 굴드가 소환한 지옥의 괴수가 턱을 커다랗게 벌려 크롤리의 목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시야가 불투명한 제이드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거무튀튀하던 손이 곱게 바스러진 잔해가 되어 그의 눈앞에서 흩날렸다.
한때 육체의 일부분이었던 새까만 부스러기들이 낙하하는 광경은 오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마치 장례식 때 내리는 검은 눈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은 굴드가 준비한 장엄한 장례식 한복판에 누워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커억, 네놈….”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크롤리가 피를 토해 내며 레오폴트를 바라봤다. 머리털이 붉은 소년의 눈동자엔 의문이 가득했다. 그는 레오폴트가 거대한 마력덩어리를 공중 분해하기 위해 그림자를 움직이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한데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계획이 실패했다. 크롤리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레오폴트가 부리는 마수가 나타나는 건 그의 예정엔 없던 일이었다.
“그딴 허술한 연기가 통할 거라고 생각했나?”
어느새 크롤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아벤 굴드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크아아악!”
주인의 명을 받은 날카로운 그림자들이 크롤리의 몸을 연달아 꿰뚫었다. 그림자들이 빠져나가자 소년의 몸뚱이는 서커스에 등장하는 칼 던지기 과녁판 같은 모습이 되었다. 바니가 예상했던 방식대로는 아니지만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굴드는 크롤리가 공들여 구상한 작전을 처음부터 간파했다. 그럼에도 놈의 연기에 넘어간 것처럼 행동한 이유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굴드가 제 계획을 간파해 역으로 이용할 거라는 생각을 못한 크롤리는 제 손으로 목을 조르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우어어어! 으아아!”
뒤늦게 정황을 파악한 크롤리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놈의 비통한 절규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붉은 머리 소년의 목을 깨문 마수의 이빨 때문이었다. 흉측한 마수가 혀를 날름거리며 살점을 잡아 뜯었다. 해가 저무는 것처럼 크롤리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당신 정말 대단해! 제길, 난 깜빡 속았는데. 크롤리가 제이드를 쳐다봤을 땐 너무 놀라서 염통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고.”
몸이 반쯤 재생된 바니가 건물 잔해에 의지해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혈관이 붉게 터진 그의 눈동자엔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스쳤다. 크롤리가 제이드의 피를 마시려고 들었을 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당장 세상이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공황 상태에 빠졌다. 굴드 이외의 존재가 제이드의 피를 훔쳐 마시는 상황 따위를 보려고 성자의 관을 훔친 게 아니었다. 다행히 굴드가 크롤리를 깔끔히 처리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크롤리를 향한 바니의 노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네놈의 빨간 털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어. 꼭 닭 벼슬 같다고. 꼬맹이 새끼야!”
그는 바닥에 자빠져서 꿈쩍도 하지 않는 크롤리를 콘크리트 덩어리로 마구 내리찍었다. 크롤리를 응징하는 데 열중한 바니는 스산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제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날 기생충이라고 불렀지? 그 기생충에게….”
퍽, 소리와 함께 바니의 턱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건물 옥상에 세워 둔 페인트 통이 쓰러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눈을 부릅뜨고서 제 아래턱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끈적끈적한 검붉은 피 외에는 손끝에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아래턱뿐만이 아니라 목젖 및 입 안을 채우고 있던 혀까지 깨끗이 사라졌다. 크롤리를 공격했던 괴수가 이번엔 그에게 발톱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조용해졌군.”
바니의 입을 다물게 만든 굴드는 제이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성배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더듬었다. 제이드의 검은 눈동자에는 체념과 절망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굴드가 제이드의 손을 붙잡았다.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제이드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제 성배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남자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으으….”
굴드를 거부하듯 제이드가 손목을 비틀었다. 남자는 한층 더 강하게 제이드의 손을 옥죄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온기를 머금고 있던 청년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남자는 제이드의 손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굴드는 제이드에게 온기를 나눠 줄 방법이 없었다. 죽은 자이기에 인간처럼 체온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이것이 바로 배교자의 한계였다. 심장이 뛰지 않는 죽은 몸뚱이로는 타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없었고, 그의 살과 피를 물려받을 자손도 가지지 못했다.
“크윽.”
제이드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목을 움츠렸다.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굴드는 제이드의 하반신이 피로 젖어드는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어젯밤부터 제이드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혈하는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어쩌면 몸 안의 장기에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굴드는 제이드를 급히 안아 올리려고 하다가 손을 멈칫했다. 자신이 제이드를 병원에 데려간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본능에 눈 뜬 그는 유예를 끝내고 성배의 피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곧 제 손으로 죽일 청년을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한다?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당신을 가엽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삽시간에 눈빛이 바뀐 굴드가 음산한 목소리를 흘리며 제이드의 턱을 움켜잡았다.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가 그의 심장을 다시금 자극했다. 아주 오래전에 죽어 버린 심장이 꿈틀댄다는 건 불길한 징조였다. 굴드는 아까처럼 제이드의 눈빛에 흔들리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며 이성을 다잡았다. 제이드는 지독하게 위험했다. 그의 존재가 치명적인 독처럼 굴드에게 녹아들어 지난 일 년 동안 본능마저 억누르게 만들었다.
“굴… ㄷ.”
제이드가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혈로 인한 통증 때문에 그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젠장,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십시오.”
굴드가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렸다. 제이드의 눈물로 인해 간신히 다잡았던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린다면 또다시 그의 오랜 숙원을 뒷전으로 밀어 버리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굴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완벽한 존재가 되는 행위를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원래 지독하게 이기적인 존재였다.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줄도 몰랐고 자신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또한 몰랐다.
제이드를 아끼긴 했지만 저 자신보다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정도로만 제이드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왜 뭔가 중요한 걸 놓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초조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갈증 때문에 굴드는 더욱 미칠 것 같았다.
“금방 끝날 겁니다.”
굴드는 참다못해 제이드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려 버렸다. 제이드의 눈물이 손바닥에 닿자 배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다. 굴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짐승처럼 거칠게 성배의 목에 달려들었다.
“아윽!”
시야를 박탈당한 채로 굴드에게 목을 깨물린 제이드가 어깨를 뒤틀었다. 제이드의 피를 입 안에 머금은 굴드는 혀로 상처를 문지르며 그의 손목을 강하게 짓눌렀다. 심장을 찌르는 이 무지근한 통증은 고대의 현묘한 진리를 손에 넣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틀림없었다.
“으으읏.”
귓가에 스치는 제이드의 신음 소리 때문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새하얀 목에 이를 박아 넣은 굴드는 정사를 나눌 때처럼 난폭하고 탐욕스럽게 제이드의 피를 입 안에 머금었다. 뜨끈한 붉은 피가 혀에 휘감기는 감각이 황홀했다. 입 안에 가득 퍼진 향은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농염하고 고혹적이었다.
다만 제이드의 피 맛이 예전과 조금 달랐다. 성당 지하실에서 맛보았을 때보다 피의 농도가 짙었다. 게다가 맛은 둘째 치고 그의 피에서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비록 성배이긴 하나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의 피에 마력이 흐르게 된 건지 의아했다. 성당 지하실에서 처음 그의 피를 맛보았을 땐 분명 마력 따윈 섞여 있지 않았다.
‘아마도 내 것이겠지.’
눈썹을 크게 비틀었던 굴드는 입 안에 머금었던 제이드의 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피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의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의 마력이 제이드에게 녹아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의 기운이 그의 것과 아주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도 미심쩍었다.
굴드는 더 이상 사고를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갈증으로 말라붙은 그의 점막이 성배의 피로 젖어 드는데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굴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탐욕스럽게 제이드의 피로 허기를 채웠다. 그 어떤 쾌락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희열이 굴드의 몸에 들끓었다.
“허억, 윽.”
제이드의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굴드는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몸은 환희에 젖어 있는데 제이드의 피를 삼킬 때마다 참을 수 없이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갈증을 채우면 금방 사그라질 줄 알았던 심장의 통증도 점점 선명해졌다. 가장 모순적인 점은,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의 육체가 느끼는 비틀린 쾌락 또한 커져만 간다는 사실이었다.
발랑 뒤집어진 자세로 바닥에 드러누운 바니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타나토스. 아아, 드디어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게 됐어….’
관자놀이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그의 귓가에 신의 은총이 가득 깃든 복음성가가 울려 퍼졌다. 비록 거대한 마수가 앞발로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딴 사소한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의 오랜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으어허우. 으어어.”
아벤 굴드가 건장한 등을 들썩이며 제이드의 피를 탐닉하는 광경은 바니에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선사했다. 바니는 제 직무를 태만시 한 배교자들의 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웨인 시티에 오서독스들이 날뛸 거대한 무대를 마련하고, 대본을 썼으며, 화려한 무대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으니 바니로서는 감격에 젖는 게 당연했다.
그와 타나토스를 한 몸으로 만들어 줄 오서독스가 나타나기까지 장장 팔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지하실에서 죽어 가던 아이작의 영혼을 흡수한 덕분에 바니는 타나토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배교자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도 알게 되었고 타나토스의 총애로 죽음까지 거슬렀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여전히 약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이작이 일개 서번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이작 루테니아는 성배의 피를 마셨을 때 갓 서번트가 된 상태라 개똥처럼 약했다. 놈의 나이가 몇백 살쯤 먹었다면 피의 마력이 조금 늘어났겠지만, 그래 봤자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권능과 피의 마력 모두가 조악하기만 한 서번트 따위로는 타나토스라는 초월적 존재를 지상에 강림하게 만들 수 없었다.
바니에겐 타나토스의 힘을 오롯이 옮겨 담을 수 있는 제물이 필요했다. 서번트처럼 부실하고 약해 빠진 어둠의 부산물이 아닌, 피의 마력이 짙게 흐르는 강자. 그런 의미에서 배교자들의 왕인 아벤 굴드는 최적의 제물이었다.
“흐흐으, 흐흐흐흐.”
성대와 혀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타나토스에게 속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성배의 피를 마시는 아벤 굴드에게 묵념을.’
바니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성배의 몸에 흐르는 피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흡수하고 나면 아벤 굴드는 아이작처럼 고통받다 뒈지게 될 것이다. 서번트보다 강한 오서독스다 보니 아이작보다는 좀 더 오래 버티겠지만, 녹슨 피에 중독되어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된다는 점은 공평하게 똑같았다.
찰스가 실종되고, 바니가 목조 주택에 불을 질렀던 날 밤. 아이작은 성배의 피를 마시고 나서 지하실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지독한 실험을 자행하던 미치광이의 몸에 독을 퍼트린 건 바니가 아니라 성배의 영혼이었다.
수많은 신학자와 배교자들은 <적의 서> 해석본에 등장한 녹슨 피의 존재를 부정했다. 아무도 녹슨 피가 배교자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허구의 산물이라 치부했던 녹슨 피는 실재했다. 배교자들이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성배가 바로 녹슨 피였다.
까마득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옛날, 성배의 피를 마시는 데 성공한 이름 모를 오서독스 하나가 단단히 미쳐 버렸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성배를 제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타나토스가 고의적으로 왜곡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독에 중독된 오서독스는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광기에 사로잡혀 타나토스를 저주하는 글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적의 서 해석본이라고 불리는 미친 자의 유고였다.
진실은 간단하면서도 추악했다. 이그드라실에 얽매인 타나토스는 금단의 열매에 성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대의 현묘한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배교자들을 현혹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금단의 열매를 탐낸 타나토스의 음모에 불과했다.
이그드라실을 지키는 파수꾼인 타나토스는 금단의 열매에 직접적으로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만지지 못하는 금단의 열매를 먹기 위해 배교자를 만들어 거짓된 가르침을 설파했다. 그에 더해 간교한 타나토스는 성배의 피를 마시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까지 철저히 숨겼다.
‘아벤 굴드, 그거 알아? 완벽한 존재가 되는 건 나야.’
바니는 굴드가 녹슨 피의 독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윗입술을 좌우로 길쭉하게 찢었다. 그는 성배에게 손을 대 죽어 가는 아벤 굴드의 피로 목구멍을 적실 생각이었다. 그러면 바니는 타나토스와 한 몸이 되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창조자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마수의 발에 깔려 꼼작도 못하는 신세였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 최후의 승자가 될 몸이었다.
성배의 피에는 배교자처럼 부정한 존재가 아닌, 진정한 생명을 태어나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낙원이라는 정체된 세계에 감금되어 있던 태초의 한 쌍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낼 수 있게 된 것도 금단의 열매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제이드. 애새끼를 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 클 텐데 애인에게 잡아먹히기까지 하다니, 정말 안됐어.’
바닥에 드러누운 탓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보이는 바니는 제이드의 발끝에 대고 중얼거렸다. 두 뺨에 주근깨가 도드라진 남창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제이드가 죽어 가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 영구히 보관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인 탓이었다.
결국 바니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굴드가 제이드의 피를 마시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기록을 남길 수 없다면 머릿속에라도 똑똑히 박아 놔야 나중에 이 순간을 제대로 추억할 수 있었다.
“제인자아아! 아베 구우드!!!”
바니가 돌연 불분명한 발음으로 욕을 뱉었다. 굴드가 짙은 그림자로 거대한 장막을 불러일으켜 그의 시야를 차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바니는 저 장막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빛도 소리도 무거운 그림자의 장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바니는 어떻게 제가 구경할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느냐며 눈을 까뒤집었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두터운 장막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바니는 그를 짓밟고 있던 괴수의 발톱이 폐에 파고들고 나서야 무의미한 발광을 멈췄다.
***
검은 그림자의 장막이 하늘을 뒤덮었다. 하지만 굴드에게 목을 물린 제이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굴드가 장막을 만들어 내기 전에도 그의 시야는 강 밑바닥에 잠긴 것처럼 어두웠다.
“흐읏, 헉….”
굴드의 건장한 몸에 짓눌린 제이드는 뭍으로 던져진 비늘 달린 생물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것도 아닌데 그는 추위를 느꼈다. 어깨를 짓누른 굴드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목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기묘했다. 누워 있는데도 어지럼증을 느낀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굴드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고 있어서 그런지 아랫배와 하반신을 헤집던 끔찍한 통증이 사라졌다. 어쩌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통각이 둔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제이드는 일 년 전, 캄캄한 성당 지하실에서 굴드에게 덮쳐졌던 순간을 떠올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 가던 그가 일 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굴드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될 거였다면 차라리 수많은 전사자 중의 하나로 기록되는 쪽이 나았다.
통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지만 심장을 들쑤시는 날카로운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슬럼가 뒷골목에서 굴드를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고 싶었다. 제이드는 굴드가 저를 기만했다는 사실보다 제 감정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굴드에게 중요했던 건 제이드가 아니라 그저 흥미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는 ‘성배’였을 뿐이었다.
굴드가 피를 마실 목적으로 제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굴드의 성배라는 사실을 숨긴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마음이 있는 척 연기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자신을 사랑한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잘해 줬던 거냐는 원망의 말이 목구멍을 찔렀다. 제이드는 굴드가 자신을 성배로만 생각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굴드가 눈앞에 있는데도 손에 닿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굴드는 제이드의 곁에 있었던 게 아니라 거대하고 단단한 유리벽 너머에 존재했다. 굴드에게 그는 어항 속을 헤엄치는 아름다운 물고기에 불과했다.
제이드는 자신의 모든 걸 다 줘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굴드에게 진심이었다. 하지만 굴드는 그를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가끔씩 그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던 좋아한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굴드의 세계에 제이드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비참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게 진실이었다.
의식이 아득한 제이드는 마치 제가 굴드에게 범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귓가에 닿는 굴드의 숨결과 그의 몸을 한껏 짓누르는 방식, 그리고 흥분이 깃든 거친 숨소리가 성행위를 연상시켰다.
제이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눈을 덮었다. 둔중한 정이 심장 한가운데 깊숙이 박힌 것처럼 괴로웠다. 하필이면 굴드의 다정했던 눈빛과 손길이 떠올라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지옥 같았다. 굴드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지워 버리고 싶은데 지워지지가 않았다. 허황된 기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굴드가 자신을 향해 지어 보였던 미소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었다.
제이드의 심장 박동이 현저히 약해졌다. 굶주린 맹수처럼 탐욕스럽게 제이드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던 굴드는 목구멍으로 피를 삼키는 행위를 서서히 줄여 갔다. 그러나 모든 감각이 현저히 둔해진 제이드는 굴드가 그의 목에 입술을 대고 있기만 할 뿐, 피를 거의 마시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제이드의 피로 입술이 붉어진 굴드는 괴로운 얼굴을 하고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갈증이 어느 정도 채워진 덕분에 정신이 명료해졌다. 하지만 성배의 피를 마셔 허기를 채우는 건 그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굴드는 완벽한 존재가 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제이드의 피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집어삼켜야 했다.
도대체 뭘 망설여! 크롤리를 해치웠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란 걸 왜 몰라. 설마 아이슬러도 네 성배를 노리고 있다는 걸 잊은 건가?
타나토스가 부여한 반쪽짜리 그림자가 기세등등하게 굴드를 다그쳤다. 굴드는 눈을 질끈 감고서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했다. 그의 너른 등이 숨을 쉴 때마다 지반이 움직이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어차피 네가 마무리를 짓지 않아도 이 녀석은 죽어. 완벽한 존재가 되는 일보다 중요한 게 있나?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굴드를 구슬리듯 간사한 목소리를 냈다.
제발 닥쳐.
굴드는 이를 악물며 머릿속으로 소리쳤다.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굴드는 선뜻 제이드의 숨통을 끊을 수가 없었다. 본능과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굴드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숨을 거의 쉬지 않는 제이드의 목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이어서 그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도록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지혈했다.
몸을 일으켜 세운 굴드는 제이드를 내려다봤다. 오래전 죽은 심장이 지끈거렸다. 그의 성배는 굴드를 거부하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굴드는 조심스럽게 제이드의 손등에 손끝을 가져갔다. 타나토스의 말대로 제이드의 생명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좋아합니다.’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밝혔던 날 제이드가 그렇게 말했다.
‘좋아해요. 아주 많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백의 말을 입에 담아 본 어수룩한 소년처럼 제이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지만 굴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단호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굴드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란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한다고, 당당히 선전포고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제이드의 눈동자엔 확고한 세계가 있었다. 굴드의 얼굴을 담는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과도 같았다. 굴드는 아무런 편견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제이드의 눈빛에서 영원하고 불변한 어떤 것을 느꼈다.
굴드는 눈을 덮은 제이드의 손을 치우지 못하고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던 제이드의 눈빛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제가 성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제이드는 다시는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제이드만 포기하면 굴드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반대로 제이드를 선택하면 그는 많은 것들을 잃었다. 전능하다고 해도 좋을 힘을 제 손으로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제이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 이득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치 않았다. 죽기 전까지 굴드의 곁에 있어 주는 것. 하지만 그마저도 제이드가 늙어 죽어 버리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 봤자 백 년이었다. 결국 제이드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70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70년이라는 시간을 얻기 위해 굴드가 치러야 할 희생은 너무나도 컸다. 아니, 희생보다 끔찍한 것은 이 세계에 제이드 없이 그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가 깨끗하게 도려내어진 공백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굴드는 버거웠다. 언제 환생할지도 모르는 제이드를 기다리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공허한 삶을, 영겁의 세월 동안 연명해야 했다.
그는 제이드가 없는 텅 빈 집을 상상했다. 가구에 흰 천을 씌운 그는 꼼짝도 않은 채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눈을 감았다 떠도 제이드의 얼굴을 볼 수 없고, 그의 살결을 만질 수도 없었다. 제이드의 체온, 체취, 숨소리도 오직 그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삶을… 굴드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제이드를 선택함으로 인해 굴드가 얻을 수 있는 건 상실이라는 낯설고 처절한 체험뿐이었다.
“날 봐요, 제이드.”
굴드는 제이드의 눈을 덮고 있는 차가운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제이드의 몸에 기운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손이 덜렁 들어 올려졌다.
이 손을 치우면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제이드의 눈빛을 보게 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평생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내가 하는 말 들립니까?”
제이드는 의식을 잃은 듯했다. 굴드는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변해 버린 제이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성당 지하실에서 총에 맞아 죽어 갈 때보다 더 상태가 나빴다. 굴드는 자신이 제이드에게서 빼앗은 피와 생명의 무게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으.”
다행히 제이드는 금방 깨어났다. 다만 제이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마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트러져 있던 제이드가 돌연 굴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가늠해 눈을 마주쳐 왔던 것이다.
“나를….”
눈앞에 새카만 어둠이 펼쳐진 제이드는 굴드에게로 시선을 보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굴드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제이드의 입에서 더 이상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세요. 듣고 있으니까.”
굴드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울림이 풍부한 굵은 목소리는 평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 굴드는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제이드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몰랐다.
“날, 조금이라도, 허억. 사랑, 한… 겁니, 까. 내가, 흣. 성배라는 사실에, 관계없이. 날….”
제이드의 입술 사이로 뜻밖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제이드가 자신을 비난하고 원망할 것이라고만 짐작했던 굴드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선 한 번도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제이드를 내려다보던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은 굴드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제이드는 혼절했는지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굴드는 좀처럼 동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제이드를 특별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게 사랑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비틀린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 어서 네 성배에게 진실을 들려줘.
굴드의 무의식에 깃든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삽시간에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굴드는 충격에 빠진 사람처럼 턱을 굳힌 채 제이드만 내려다보았다.
왜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거지?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굴드의 귀에 대고 뱀처럼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다. 그럼에도 건장한 몸집을 가진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네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건가?
새까만 연기 같은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그 순간, 화가 난 사람처럼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굴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한 적 있냐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굴드의 입술에서 굵게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이드의 창백한 뺨에 닿은 커다란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언제나 냉랭한 기운이 감돌던 그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커다랗게 벌어졌다.
잘 들어, 나의 주인. 너는 네 성배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단지 널 사랑해 주는 존재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거지.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궁지에 몰린 악마처럼 초조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놈이 지껄인 말은, 굴드가 제이드 때문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일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변명이었다. 하지만 굴드가 제이드를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감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든 태연하게 찢어 죽일 만큼 이기적이고 잔혹했다.
표면이 딱딱하게 굳은 심장에 쩌적, 소리를 내며 균열이 일어났다. 그 갈라진 틈새로, 낯선 감정이 독처럼 흘러내렸다. 그동안 굴드가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부정해 버린 감정들이었다.
당황한 굴드는 제이드의 뺨을 만지던 손으로 균열이 난 자리를 짓눌렀다. 그렇지만 심장에 고여 있던 감정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원한을 표출하기라도 하듯, 견고한 심장의 외벽을 빠른 속도로 부식시켰다.
내 말 똑똑히 들어. 이 모든 건 착각이야. 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괴물이란 말이다!
굴드의 몸을 휘감은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눈썹을 크게 비튼 굴드의 귓가엔 놈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제이드의 절박한 음성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날, 조금이라도, 허억. 사랑, 한… 겁니, 까.’
굴드는 현기증을 느낀 사람처럼 거친 숨을 흘렸다. 그가 땅을 짚어 두 팔 사이에 가둔 제이드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이 까맣게 물든 굴드는 무의식적으로 제이드의 창백한 입술을 더듬었다. 제이드가 이대로 다시는 눈을 뜨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투둑, 투두둑.
심장을 에워싸고 있던 딱딱한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두터운 외피 아래 숨겨져 있던 붉은 생살이 굴드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굴드는 고개를 들어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감정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가 성배라는 사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굴드가 유희라고 생각했던 연극 무대는 막을 내린 지 오래였다. 그간 굴드가 머릿속으로 지껄여 왔던 말들은 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 낸 복잡한 미궁에 불과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제이드는 굴드의 삶에 깊숙이 녹아들었다. 그의 하루는 제이드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도 제이드를 떠올렸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그가 제이드로 인해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제이드 본인조차 모르는 사소한 습관을 발견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제이드의 물건이 그의 집에 늘어 가는 게 만족스러웠다. 제이드가 부재한 삶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굴드는 그의 모든 걸 다 포기해도 좋을 만큼 제이드가 중요했다. 완벽한 존재가 된다 하더라도 제이드가 사라진 세계는 굴드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당신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던 진짜 이유는….”
심장에서 이는 통증 때문에 괴로운 표정을 지은 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록 뒷말을 삼켰지만 그의 마음속에선 이미 대답이 나와 있었다.
“제이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만 곁에 있어 준다면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다 포기해도 좋을 만큼.”
굴드가 힘겹게 제 감정을 인정한 순간,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검은 장막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발톱으로 바니를 짓누르고 있던 검은 괴수도 원래 있던 지옥 밑바닥으로 역소환됐다.
“아, 아.”
바니가 납작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목을 가다듬었다. 마수에게 물어 뜯겼던 발음기관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가 재생되는 과정은 끔찍하리만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고통을 겪게 될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곧 녹슨 피에 오염된 굴드의 힘을 흡수해, 완벽한 존재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이봐요, 아벤 굴드. 죽어 가는 기분이 어때요? 녹슨 피를 마신 기념으로 소감 한마디 해 봐요.”
알몸인 바니가 바닥에 떨어진 통굽 신발을 집어 들며 히죽거렸다. 그러나 굴드는 놈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제이드의 호흡을 확인했다.
“어이, 귓구멍이 막혔나? 내 말 안 들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바니가 신발을 신으며 짜증을 부렸다. 오만상을 찌푸린 바니는 ‘혹시 저 개자식의 귀가 멀어 버린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녹슨 피의 독이 굴드의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졌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굴드의 귀나 눈이 멀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굴드는 바니가 지껄인 말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놈의 헛소리에 반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제 손으로 죽일 뻔했던 제이드를 속히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죄책감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 굴드는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제이드에게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성당 지하실에 쓰러져 있던 제이드를 살려낼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제이드의 육신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핵까지 손상이 간 상황이었다.
사경을 헤매는 제이드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방대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철옹성처럼 우뚝 서 있던 검은 장막과 새카만 지옥의 마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었다. 성배를 빼앗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오서독스들을 상대한 그는 마력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절박한 눈빛을 한 굴드가 시체와 다름없는 제이드의 육신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제이드의 손목을 꽉 움켜잡은 채로 눈썹을 비튼 그의 모습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상을 바라보는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을 연상케 했다.
“잠깐만. 당신, 왜 마력을 쓸 수 있는 거야? 분명 녹슨 피의 독에 오염됐을 텐데, 어째서 멀쩡한 거냐고.”
굴드가 제이드에게 마력을 불어넣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한 바니가 신발을 신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굴드의 견고한 등을 바라보는 바니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배의 영혼을 흡수한 자는 혈관을 타고 번진 독으로 인해 피의 마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빌어먹을. 오서독스라서 녹슨 피에 오염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네. 하긴, 서번트와 오서독스가 같을 리 없지. <적의 서> 해석본을 만든 오서독스 놈도 금방 뒈지진 않았으니까.”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가득한 바니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굴드가 제이드의 영혼을 흡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절벽과 다름없는 검은 장막이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탓이었다.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하지그래?”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바니가 눈을 치떴다. 정체 모를 불안에 휩싸인 그는 굴드가 제이드의 육신에 마력을 불어넣는 광경이 몹시 거슬렸다.
“제이드가 밴 애새끼들이라도 살려 보려는 모양인데, 소용없어. 당신이 뒈지면 말짱 꽝이라고. 제이드 배 속에 든 당신 핏줄을 내가 살려 둘 것 같아?”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바니가 사납게 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닥쳐. 네놈 헛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 지겨우니까.”
굴드의 입술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이드만 담고 있던 그의 푸른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거렸다. 줄곧 바니를 무시하던 굴드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녹슨 피니, 적의 서 해석본이니 하는 허황된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귓등으로 흘려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핏줄’에 관한 화제는 달랐다.
배교자라면 누구나 제 혈육을 만들어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교자의 싸늘한 몸뚱이로는 살아 있는 생명을 잉태할 수도, 잉태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원하고 열망해도 자손을 품에 안는 일만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배교자들이 죽은 자의 삶을 선택한 대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니가 남자인 제이드까지 들먹여 가며 역린을 건드렸다. 굴드로선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헛소리하는 거 아닌데. 설마, 제이드가 당신 애새끼를 뱄다는 걸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야?”
가슴과 등판에도 주근깨가 가득한 바니가 팔짱을 끼고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게슴츠레 뜬 그는 뭔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단히 미쳤군. 인간에, 남자인 제이드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낮게 으르렁대는 굴드의 어깨 위로 검고 흉포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굴드는 바니를 낚아채 사지를 찢고 싶은 충동으로 손이 근질거렸다. 제이드의 몸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리했을 터였다.
“제이드가 당신 성배인데 뭐가 말이 안 돼! 성배는 원래 배교자에게 자손을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아아, 성가셔. 녹슨 피의 독이 다 퍼졌으면 이런 설명 따윈 안 해도 되는 건데.”
바니가 맨살을 드러낸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는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의 가느스름한 눈은 입으로 지껄인 말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표출했다. 바니는 명백하게 들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정체 모를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벤 굴드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제가 직접 설명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당신, 적의 서 해석본 읽은 적 있지? 거기 적힌 말, 전부 다 사실이야. 당신과 똑같은 과오를 저지른 오서독스가 악에 받쳐 쓴 유서거든.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성배의 피를 마셨는데, 알고 보니까! 성배가! 녹슨 피였던 거야!”
바니가 어린아이 앞에서 구연동화라도 보여 주듯 과장스럽게 팔을 흔들었다. 굴드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을 상상하자 아랫도리가 벌렁벌렁하고 겨드랑이 안쪽이 짜릿짜릿해졌다.
“성배의 독이 온몸에 퍼지면 당신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겠지만, 성배는 사실 타나토스가 뿌린 미끼야. 자기는 성배에 직접 손을 댈 수가 없으니까 배교자들을 이용한 거지, 키킥. 다들 타나토스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물론 난 예외지만. 나와 타나토스는 하나가 될 사이거든.”
바니는 굴드가 제 말을 경청해 주길 원했다. 신이 나서 입을 나불대는 그의 심리는 학예회 무대에 오른 유치원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굴드는 바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는커녕, 과대망상증 환자의 헛소리에 진절머리를 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제이드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된 굴드가 바니에게 간헐적으로 내비치는 감정은 짜증과 혐오가 전부였다.
“빌어먹을. 내 말을 정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 제이드의 배에 손을 갖다 대 보면…. 제길, 유산되기 직전이라 아무것도 안 느껴지려나.”
굴드가 제게 관심을 주지 않자 다시금 초조해진 바니가 손톱을 질겅인 순간이었다.
‘유산’이라는 단어가 굴드의 숨을 흠칫 멈추게 했다.
제이드에게 끊임없이 마력을 주입하던 그는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머릿속에서 쿵, 쿵, 북소리가 울렸다. 제이드의 하반신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굴드는 제이드의 피를 마실 때 느꼈던 기묘한 이질감을 떠올렸다. 그의 기운과 흡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 제이드의 피에 섞여 있었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굴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제이드의 아랫배를 내려다봤다.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려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드의 배에 귀를 가져가는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굴드의 손끝이 제이드의 복부에 닿았다. 납작하고 단단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생명이 자리 잡고 있을 만한 구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제이드의 피부를 만지던 굴드는 입을 맞출 때처럼 천천히 상체를 낮췄다. 여기서 더 확인을 해 봤자 무의미한 짓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혹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선 완벽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는 더 이상 바니의 헛소리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제이드의 배에 뺨을 댄 채로 귀를 기울였다. 달콤하고 익숙한 체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렇지만 제이드의 배에선 역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거냐고 탄식하듯 자신을 비웃었다. 그가 배교자라는 사실을 떠나 남자인 제이드가 아이를 수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이드의 배에 이마를 기댄 굴드는 깊은 좌절감과 실망을 느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귓가에 미약한 태동이 스친 건 바로 그때였다.
굴드는 제 귀를 의심하며 등을 뻣뻣하게 굳혔다. 분명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리석은 바람이 불러일으킨 착각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한 절박하고 필사적인 움직임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설마….”
제이드의 배에 얹어진 굴드의 손끝이 떨렸다.
꿀꺽 생침을 삼키며 제이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내 아이를 가진 거냐는 말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의 선 제이드는 그가 질문을 던진다 하더라도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도둑질을 하고도 들키지 않은 소매치기처럼 바니가 히죽거렸다. 제 아이가 제이드의 배 속에서 죽어 간다는 사실로 인해 충격을 받았는지, 굴드의 어깨가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바니는 콘크리트 벽처럼 위협적이고 단단한 등이 움찔거리는 광경을 감상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굴드를 동요시켰다는 사실이 제법 자랑스러웠다. 마치 무대의 조명이 모두 제게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성배가 아이를 만들어 줄 수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배교자들의 간절한 소원 중 하나가 혈육을 가지는 거잖아. 다른 하나는 성배의 피를 마시는 거고.”
배교자들은 아이를 만들지 못하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종종 인간에게 피의 세례를 내리곤 했다. 허무한 짓거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충동적으로 술을 마시듯 그들에게 종속된 피조물을 만들었다. 바니도 재미삼아 그의 피를 섞은 구울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애정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저주받은 육괴에 불과했다.
“성배의 피를 마시고 나서야 성배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기분이 어때. 막, 자살하고 싶어? <적의 서> 해석본을 쓴 오서독스는 자살한 거 같던데. 뭐, 자살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지만, 녹슨 피의 독이 혈관 곳곳에 퍼지면 상당히 괴로운 모양이더라고.”
바니는 쉴 새 없이 입을 나불댔다. 그의 청각, 후각, 시각은 전부 굴드에게 쏠려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굴드의 강인한 육체를 더듬어 촉각도 만족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마력이 남아 있는 굴드에게 접근했다간 또 심장이 후벼 파지거나 목이 날아갈 게 빤했다.
바니는 어쩔 수 없이 머릿속으로 굴드에게 안기는 음탕한 상상을 했다. 저 덩치 큰 남자가 그의 머리를 짓누르며 뒤에서 힘껏 쑤셔 준다고 생각하자 늘어질 대로 늘어진 구멍이 벌름대며 젖어 들었다.
키 작은 인영이 살기를 뿜으며 바니에게 접근했다. 불온한 기척을 감지한 굴드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제이드를 안아 올렸다. 그러나 제 망상에 홀딱 빠진 바니는 지척까지 다가온 섬뜩한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다.
“흐응, 도망치려고? 소용없어. 당신은 나와 타나토스를 위해 준비된 제물이라고. 당신 피를 마셔, 컥.”
콧소리를 내던 바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바니는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크아아악!”
“추으으읍, 씁.”
도축장에서 갓 탈출한 투견 같은 몰골을 한 크롤리가 바니의 살덩이와 피를 한꺼번에 씹어 삼켰다. 크롤리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피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바니의 비명 소리가 전축의 볼륨을 줄이듯 잦아들었다.
“너, 죽은 게 아니었….”
바니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제 목을 물어뜯은 크롤리를 내려다봤다. 그는 어떻게든 붉은 머리 소년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바람의 성질을 띤 크롤리의 마력이 그의 손발을 구속하고 있는 탓이었다.
“크흐흐, 주근 처글 하고 이써찌.”
악귀 같은 얼굴을 한 크롤리가 바니의 피를 빨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살아남으려고 죽은 척을 한 덕분에 소년은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제이드라는 사내가 그의 성배가 아니라는 점과 바니가 죽지 않는 몸이라는 사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배에 대한 진실 등등.
“끄으으으, 윽.”
“네까짓 놈이 감히 크롤리 님을 속여?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았나?”
바니의 목에서 입을 떼어 낸 크롤리가 시뻘겋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엔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증오가 번들거렸다. 바니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그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두 팔을 잃은 것도, 시체의 피나 빠는 추잡한 짓을 하게 된 것도, 전부 바니 탓이었다.
“크읏, 속은 네가 병신이란 생각은 안 해 봤어? 이 새대가리 새끼야, 복수하고 싶어? 어디 마음대로 해 봐.”
고통으로 일그러진 바니의 얼굴엔 여유가 흘렀다. 비록 크롤리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니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타나토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는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였다. 바니로서는 크롤리에게 붙잡혔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덜덜 떨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네놈, 속으로 난 죽지 않네, 어쩌네 하면서 우쭐대고 있지? 하지만 이를 어쩌나. 난 널 없애는 방법을 알아.”
뱃머리에 달린 조각상처럼 팔이 없는 크롤리가 바니의 귓가에 대고 이를 갈았다.
“크롤리, 그딴 허세가 정말 통할 거라 생각해? 너무 멍청해서 불쌍하기까지 하네. 아무도 날 못 죽여. 타나토스가 내 뒤에 있는 이상, 날 죽일 방법은 없다고.”
크롤리의 협박이 같잖다는 듯 바니가 코웃음을 쳤다. 화려한 조명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 완벽한 무대에서 끌려 내려갈 사람은 그가 아니라 크롤리였다. 아직 막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주연배우가 무대에서 퇴장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널 죽일 방법은 없어. 하지만 죽이는 것과 없애는 건 엄연히 다르지.”
바니의 피를 마신 덕분에 마력을 회복한 크롤리가 음산하게 웃으며 제 몸을 변형시켰다. 박제된 가죽이 뒤틀리듯 어깨가 꿈틀꿈틀 부풀어 오르고, 피부 위로 비늘이 뒤덮였다. 삽시간에 거대한 붉은 뱀의 모습으로 변화한 소년의 몸에선 축축한 비린내가 났다.
“무,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한껏 여유를 부리던 바니가 갑자기 안색을 바꿨다. 피부에 닿는 스산한 기운 때문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사람도 한 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뱀으로 변한 크롤리 놈이 뭔가 심상치 않은 짓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진정해. 동요할 것 없어. 제까짓 놈이 몸집을 부풀려 봤자지. 크롤리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누가 이런다고 겁을 먹을 줄 알아? 어차피 난 죽지 않는 몸이라고.’
바니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땀이 샘솟았고,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달달 떨렸다. 귓불 근처에선 크롤리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쉬익, 쉬익, 하는 젖은 소리 때문에 바니는 제가 뱀의 저녁 식사거리로 던져진 생쥐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맛은 없겠지만, 네놈의 더러운 영혼까지 한꺼번에 집어삼켜 주마.”
크롤리는 목젖이 보일 만큼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놈의 목구멍엔 배교자의 영혼을 빼앗는 복잡한 술식과 도형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바니를 배 속에서 소화시킨 다음, 그의 영혼과 힘을 흡수하려는 속셈이었다.
“우, 웃기지 마!”
바니는 제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뱀의 아가리를 올려다보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그는 승자가 될 몸이었다. 타나토스와 함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 될 자신이 이딴 최후를 맞이할 리 없었다. 그가 쓴 각본의 마지막은….
캄캄한 암흑이 바니의 머리를 뒤덮었다. 마치 교도관이 교수대에 오른 사형수에게 자루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앞이 보이질 않았다.
크롤리에게 머리부터 집어삼켜진 바니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산성을 띤 위액이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크롤리의 배 속에 거꾸로 처박힌 바니는 저와 정신을 공유하는 타나토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거대한 악의의 집합체인 죽음의 신은 그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숙주를 이용해 자유를 찾으려 했지만 바니가 실패하자 그를 가차 없이 내쳐 버린 것이다. 바니의 착각과 달리 그는 타나토스에게 조금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바니는 이건 진짜가 아니라 낮에 꾸는 지독한 악몽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마력이 깃든 위액이 제 몸을 녹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게 현실이란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니가 현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못하든, 그가 처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바니가 계획한 거창한 공연은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끝을 맺었다. 바니에겐 안된 일이지만, 한 번 내려간 막이 다시 올라갈 일은 앞으로 영원히 없었다.
“이런, 성배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 주는 걸 깜빡했군.”
바니를 집어삼킨 크롤리가 쇳소리를 내며 클클, 목으로 웃어 댔다. 레오폴트가 성배의 피를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버러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배에 대고 말을 걸어 볼까, 잠시 고민도 해 봤지만 무의미한 짓이라 포기했다. 바니의 영혼은 이미 잘게 분해되어 크롤리의 혈관에 녹아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네놈과 결판을 낼 차례군, 레오폴트.”
바니의 영혼을 먹어 치운 크롤리가 레오폴트를 바라보며 살기를 뿜어냈다.
“네놈, 아직도 제이드를 노리는 건가?”
제이드를 품에 안은 굴드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의 탄탄한 어깨 위로 악령들이 새카만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형체가 불분명한 악령들은 주인의 감정에 반응하듯 흉포하게 울부짖어 댔다. 제이드의 영혼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훼방꾼이 나타나자 굴드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성배 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아. 내가 원하는 건 네 절망이다.”
크롤리가 여러 갈래로 벌어진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제이드가 제 성배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 죽은 척하고 있을 때 바니가 그에게 건 주술이 풀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크롤리가 굴드와 싸우려 하는 이유는 증오심 때문이었다.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꺼져라, 크롤리. 한가롭게 네놈이나 상대해 줄 때가 아니란 말이다.”
굴드가 이를 갈며 발치에 새카만 지옥의 불꽃을 불러일으켰다. 악령들이 지옥의 불꽃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광경은 크롤리를 흠칫 움츠러들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굴드는 여전히 크롤리보다 강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놈을 노려보는 굴드의 눈동자엔 초조가 깃들어 있었다. 죄인의 낙인이 이중으로 찍히는 문제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갈증을 느끼는 기간이 조금 더 늘어날 뿐이니 그런 것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놈을 죽이고 나면 제이드를 회복시킬 마력이 부족해질 것이다. 제이드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둔 굴드로선 단 한 톨의 마력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웃기지 마! 네놈만큼은 절대 용서 못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파멸시킬 거다, 레오폴트.”
크롤리가 쉭쉭, 쇳소리를 내며 강렬한 적개심을 뿜어냈다. 굴드에게 팔을 잘리고,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시체의 피를 마셨다. 게다가 뱀으로 변하기까지 한 그는 이제 다시는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굴드에게 복수할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빌어먹게 성가시군.”
굴드는 제이드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그의 눈동자엔 용암처럼 붉은빛을 띤 분노가 들끓었다. 크롤리를 해치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놈은 영혼의 핵까지 불살라 가며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크롤리도 제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빤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크롤리가 레오폴트에게 덤비려 하는 이유는 제이드를 살려 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크롤리는 다혈질이었지만 그만큼 눈치도 빨랐다. 놈은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는 동안 레오폴트에게 제이드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했다. 가장 훌륭한 복수는 레오폴트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존재를 빼앗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번거롭게 제이드를 노릴 생각은 없었다. 제 몸을 제물로 바쳐, 레오폴트의 마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날 건드린 걸 영원히 후회하게 될 거다, 레오폴트. 다시는 얻지 못할 네 성배, 네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어 주마!”
크롤리가 광소를 터트리며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거품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부글부글 부풀었다. 거대한 살덩어리가 된 크롤리의 몸 위로 바니와 라스푸틴의 얼굴, 그리고 팔다리, 날개 등이 중구난방으로 돋아났다. 증오와 분노에 영혼을 바친 크롤리의 몰골은 갓 실험실을 탈출한 괴물처럼 기괴하고 끔찍했다.
“아니, 네놈 생각대론 되지 않을 거다.”
팔을 축 늘어트린 제이드를 품에 안은 굴드가 눈을 어둡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굴드가 턱짓을 하자 주인의 명령을 받은 악령들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악령들이 흉포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납게 날뛰는 악령들과 달리, 굴드의 눈빛은 의외로 냉정했다. 마치 중대한 결단을 내린 사람 같은 분위기였다.
“지옥에서 만나자, 레오폴트. 절망에 빠진 네놈이 눈물을 흘리며 자살하는 꼴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유감일… 끄으으윽, 컥.”
굴드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던 크롤리가 새카만 악령들에게 에워싸였다. 악령의 서늘한 손길이 스친 자리는 쭈글쭈글하게 말라붙었고, 낙엽처럼 말라붙은 그의 피부 위로 지옥의 불꽃이 내려앉았다.
새카만 화염에 집어삼켜진 크롤리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악령들이 급류처럼 입 안으로 밀려들어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검은 불길에 휩싸인 크롤리는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산화했다. 최후의 순간, 크롤리가 목격한 것은 완벽한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싸늘하게 번들거리는 굴드의 눈동자였다.
크롤리를 암흑 저편으로 밀어 넣은 악령들이 사라지자 폐허에 정적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부서진 차들과 도로, 붕괴된 건물들은 비정상적인 고요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현실 세계와 격리된 거리엔 굴드와 제이드 두 사람만이 남았다.
굴드는 제이드의 희박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서 제이드의 손에 입을 맞췄다. 흡사 성자에게 예의를 표하듯 경건한 입맞춤이었다.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굴드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제이드에게 마력을 불어넣는 행위를 이제 중단할 생각이었다. 제 목숨을 제물로 삼은 크롤리로 인해 마력으로 제이드를 회복시키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제이드를 살리려면 마력을 주입하는 것 외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내가 당신에게 저지르려는 짓을 용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잃지 않을 겁니다.”
굴드는 제이드에게 피의 세례를 내리기 위해 제 손목에 상처를 냈다. 굴드의 손목에 맺힌 붉은 피가 제이드의 입술을 적셨다. 그는 자신의 피가 제이드의 입술 안으로 흘러드는 광경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피의 세례를 내리는 짓만큼은 제이드에겐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굴드가 제이드에게 피를 먹이는 방법을 꺼렸던 이유는 그를 배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건 굴드만으로도 충분했다. 제이드까지 피를 갈망하는 가혹한 삶을 살게 할 순 없었다. 하물며 피의 세례를 내리면 필연적으로 주종 관계가 맺어졌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노예로 종속시키는 악취미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이드를 평생 곁에 묶어 둘 수는 있겠지만, 그 대신 굴드가 사랑하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진다. 굴드의 피조물이 된 제이드는 ‘제이드’라는 독립된 인격이 아닌, 굴드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흐읏, 읏.”
굴드의 피를 입 안에 한가득 머금은 제이드가 신음을 흘리며 눈썹을 비틀었다. 제이드의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피의 양이 늘어감에 따라 맥박이 점점 빨라졌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일반적으로 봤을 땐 썩 좋은 징후는 아니었지만, 제이드의 경우엔 정반대였다. 제이드의 영혼이 안정을 찾아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굴드는 땀에 젖은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의 손목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피를 마시는 제이드가 사랑스러웠다. 제이드가 피를 삼킬 때마다 목의 힘줄이 움직였다. 그 광경이 굴드의 욕망을 자극했다.
“으으….”
곧 의식이 돌아올 것처럼 제이드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긴 셈이지만 피의 세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굴드가 제이드의 피를 마신 다음, 종속의 각인을 새겨 넣어야 의식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만약 의식의 마지막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제이드는 서번트가 되는 게 아니라 죽음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한데 굴드는 제이드에게 피를 먹이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피의 세례를 내리기 위해 제이드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이드를 죽은 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우, 굴ㄷ….”
제이드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는지 힘겹게 눈을 떴다.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했지만 그는 굴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굴드는 뭔가 말하려는 제이드를 저지하며 계속 피를 마시게 했다.
“으으으.”
맨정신으로 생피를 마시기 거북한지 제이드가 고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굴드를 올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제이드의 피를 마시던 남자가 이젠 역으로 그에게 제 피를 마시게 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굴드의 손에 죽을 뻔했던 제이드로서는 혼란을 느끼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내 피를 거부하지 마.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니까.”
목구멍으로 피를 넘기려 하지 않는 제이드에게 굴드가 다소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는 제 생명을 제이드와 연결하고 있었다. 제이드를 배교자로 만들지 않고 살려 낼 길은 이것밖에 없었다.
물론 이 방법에도 몇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이 순간 굴드는 제이드에게서 평범한 삶을 빼앗았다. 굴드의 피 때문에 제이드는 앞으로 나이를 먹을 수 없었다. 수명도 보통 인간보다 곱절로 늘어나, 가까운 사람들이 그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할 터였다. 아는 사람들이 줄어 간다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10년, 20년 정도는 노화를 겪지 않는다는 게 장점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뭐가 문제인 건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선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길 선택하거나,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떠돌아야 했다.
그러나 굴드는 사실 제이드에게서 평범한 삶을 빼앗은 일에 대해 크게 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이드가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교활하고 이기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제이드, 사랑합니다.”
“흐읏.”
제이드는 꿈틀 몸을 뒤틀었다. 굴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내가 이기적이었던 것에 상처 받은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당신이 내 성배라서가 아닙니다.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평생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도 상관없습니다. 내겐 제이드 당신이 영원하고 불멸한 진리 그 자체입니다.”
굴드는 제 말을 듣지 않으려는 제이드에게 계속 억지로 피를 먹이며, 조금 전에야 깨달은 감정들을 입 밖으로 꺼냈다.
“당신을 잃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날 두렵게 만든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영원히 갈증에 고통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이미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했습니다. 당신은 내 기적이고 내 운명의 주인이니까.”
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제이드의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굴드의 차가운 손끝이 피부에 닿자, 제이드가 흠칫 놀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읍, 흐으읏.”
굴드의 손목에 입술을 짓눌린 제이드의 호흡이 가빠졌다. 제이드도 제 아랫배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아이를 가진 게 싫습니까?”
굴드는 제이드를 똑바로 응시하며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흣!”
아랫배에 무게가 가해지자 제이드는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들썩였다. 제이드의 검은 눈동자엔 혼란과 두려움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굴드가 그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어서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이었다.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던 겁니까.”
손바닥에 전해지는 태동이 아까보다 안정적이었다. 강인한 생명력을 머금은 굴드의 피가 그와 제이드의 혈육에게까지 전해진 덕분이었다.
이게 어떻게….
제이드도 배 안의 꼬물꼬물한 생명들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꼈다.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는 굴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이드가 목구멍으로 넘긴 굴드의 피와 현재의 몸 상태를 연관 짓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아이를 가졌다는 걸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습니까?”
굴드가 나직하게 타이르는 것 같은 어조로 속삭였다. 굴드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받은 제이드는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도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남자의 몸으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둘째 치고, 그것을 차분하게 생각해 볼 시간조차 가질 수 없었다.
“숨긴 게, 흐읏.”
제이드는 나도 몰랐다고 항의하려 했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입 안의 점막과 혀를 휘감는 굴드의 피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진 탓이었다.
“배교자가 된 이후로 혈육에 대해선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소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내 아이를 가진 겁니다. 여기에 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압니까?”
길고 아름다운 굴드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을 쓸어내리듯 제이드의 복부를 어루만졌다. 솜털을 건드는 간질간질한 감각으로 인해 제이드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언제나 멀게만 느껴졌던 굴드의 감정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둘 사이에 존재하던 단단한 유리벽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당신과 함께 늙어 가는 평범한 삶을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는지, 당신은 짐작도 못 할 겁니다.”
제이드는 저를 내려다보는 굴드의 시선 때문에 숨이 막혔다. 가슴에 돌이 얹어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보내던 굴드의 손목이 치워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단전 부근에 피투성이가 된 굴드의 손끝이 내려왔다. 그의 닿을 듯 말 듯한 손길은 제이드의 몸을 성적으로 긴장시켰다.
“내 곁에 있어 주십시오. 내게서 뭐든 다 가져가도 좋습니다.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아이도 포기하겠습니다. 내 혈육을 팔에 안아 보는 순간을 평생 동안 갈망했지만, 그 무엇도 당신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습니다.”
“자, 잠깐만요! 윽.”
굴드의 발언에 놀란 제이드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세우자마자 현기증이 들이닥쳤다. 다행히 굴드가 팔을 뻗어 그를 품에 안은 덕분에 바닥과 부딪치는 상황은 면했지만, 새까맣게 물든 그의 시야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됩니다.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사나흘은 걸릴 겁니다. 내 피와 당신의 육체가 완벽하게 융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굴드가 제이드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며 말했다. 제이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문제는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슥거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가 원치 않는다면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굴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굴드의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와 교감을 나누었던 생명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제이드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남자의 몸으로 굴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는 줄곧 혼란을 느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곤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몸에서 자라고 있는 꼬맹이들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제이드는 단지 제가 처한 상황에 당황한 것뿐이지,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싫은 게 아니었다.
“난….”
제이드는 굴드를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겐 여러모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굴드는 제이드의 한마디만 떨어지면 바로 제 핏줄을 해칠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굴드는 제이드를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뱀파이어라면 그 누구도 완벽한 존재가 되는 일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성배의 피를 마셔 완벽한 존재가 되는 대신 제이드를 살리는 쪽을 선택했다.
수 세기 동안 갈망해 온 혈육도, 굴드는 제이드가 원치 않는다면 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제이드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담담히 말하긴 했지만, 굴드가 아무런 고민이나 괴로움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아이를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던 굴드의 눈동자엔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굴드의 입에서 제 혈육을 팔에 안아 보는 순간을 평생 동안 꿈꿨다는 말이 나왔을 때, 제이드는 그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인해 심장이 지끈거렸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망설이지 말고 말해요.”
굴드가 다정하게 속삭이자 제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굴드의 셔츠만 꽉 움켜쥐었다. 그를 속였을 뿐만이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인데 도저히 굴드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굴드가 절실하게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굴드는 제이드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굴드의 진심을 알 수 없어 괴로웠다. 그런데 굴드가 처음으로 그에게 가감 없이 보여 준 진심은 두렵다는 생각이 들 만큼 버거웠다. 어쩌면 굴드가 그동안 선을 넘지 못하도록 쳐 놓았던 심리적인 유리벽은 제이드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였을지도 몰랐다.
제이드는 고개를 돌려 굴드의 시선을 피했다. 제발 내 것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는 굴드의 푸른 눈 때문에 심장이 따끔거렸다. 인생이 걸린 문제라 냉정하게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굴드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어졌다.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줘요.”
제이드가 한참을 고심하다가 양쪽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배 속에 든 꼬맹이들은 어떻게든 책임질 생각이었다. 남자인데 임신했다는 사실이, 그것도 하나도 아닌 상황이 거북하고 껄끄럽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로 자라야만 했던 제이드가 제 아이를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그의 배 속에 자리 잡은 녀석들은 적으로부터 제이드를 보호하려고 온몸을 다 던졌다. 제이드로선 꼬맹이들에게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태아를 책임지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드가 굴드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 건 다른 복잡한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게도 제이드는 여전히 굴드를 좋아했다. 분명 얼마 못 가 굴드를 용서하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저 잘생긴 얼굴을 주먹으로 몇 대 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하겠습니다.”
제이드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는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굴드가 제 품을 벗어나려는 제이드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미안하지만 안 됩니다.”
제이드의 요청을 거부하는 굴드의 말투는 단호하다 못해 강압적이었다. 마치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제 마음대로 행동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듯한 태도였다.
“젠장,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했잖습니까.”
굴드의 품으로 도로 주저앉은 제이드가 눈썹을 비틀었다. 결국 이럴 거였으면서 내 의견을 존중해 줄 것처럼 연기한 것은 도대체 뭐냐고 항의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바라봐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 배 속에 든 내 혈육의 목숨과 직결된 일이니까요. 그리고 제이드 당신도.”
“잠깐만, 내 목숨?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굴드에게 양쪽 손목을 붙들린 제이드가 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하마터면 제이드의 배 안에 든 꼬맹이들이 유산될 뻔했지만, 굴드의 피를 마신 덕분에 괜찮아졌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피를 마시게 해서 당신을 살려 놓긴 했지만, 그 효과는 영구적인 게 아닙니다. 주기적으로 내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다시 문제가 생길 겁니다.”
문제가 생긴다는 건 제이드의 목숨이 다시 위태로워진다는 뜻이었다. 굴드는 피를 매개체로 삼아 제이드와 제 생명을 연결시켰다. 하지만 그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선 앞서 말한 대로 제이드에게 꾸준히 피를 먹여야 했다. 이게 바로 피의 세례를 내리는 대신 그가 선택한 방법의 부작용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굴드와 연결이 된 상태기 때문에 제이드를 예전으로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한 번 배교자가 되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제이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굴드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유감스럽지만 사실입니다.”
굴드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제이드를 내려다보는 그의 진지한 눈빛은 굴드가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제길.”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굴드에게 손목을 붙들린 상태라 몇 걸음 멀어지지 못했다.
“배 속의 태아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려면 당신이 제공하는 영양분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배 속의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 마력이 필요해지는 시점도 짧아질 거고요. 또 유산의 위기를 겪고 싶습니까?”
굴드가 제이드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굴드에게 안긴 제이드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냥 듣기에도 일리가 있는 지적인 데다가, 어렴풋이 그도 눈치채고 있던 바였기 때문이다.
“이런 거… 너무 불합리하잖습니까.”
굴드에게 손목을 붙들린 제이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억울하다는 감정이 배어 나왔다. 그에게 선택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굴드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데, 선택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신이 날 보고 싶지 않다면, 한 달에 한 번씩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 방문하겠습니다.”
굴드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제이드를 회유하려 들었다.
“빌어먹을, 웃기지 말아요. 그딴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바엔 그냥 처음부터 당신이랑 함께 지내는 게 나아.”
제이드는 체념한 얼굴로 버럭 성을 냈다. 어쩔 수 없이 굴드와 함께 지내기로 마음먹었지만 굴드에 대한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애초에 굴드가 그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일은 없었다.
“내 비겁함을 마음껏 욕해도 됩니다. 날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내 곁을 떠나지만 마십시오.”
굴드가 간절한 음성으로 말하며 제이드의 뺨을 감싸 쥐었다.
“제이드, 날 봐요. 다른 말로는 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준다면, 그동안 당신을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던 걸 전부 다 보상하겠습니다.”
“젠장, 뭘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겁니까.”
감정이 격해진 제이드가 거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동안의 전적 때문에 제이드는 굴드의 말에 눈곱만큼도 신뢰가 가질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다 이뤄 드리겠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책임지지도 못할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내가 대통령을 암살해 달라거나, 전 세계 사람들을 죽여 달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제이드가 시선을 발치에 둔 채로 눈썹을 비틀었다.
“당연히 들어 드릴 겁니다. 후자의 경우는 한 일주일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굴드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대꾸했다. 농담이나 과장 따윈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진지한 음성이었다. 설마 굴드가 제가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몰랐던 제이드는 충격으로 말문을 잃었다.
“당신이 말한 두 가지,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면 나와 함께해 줄 겁니까?”
굴드가 제이드에게 확답을 요구하듯 물었다. 머릿속으론 제이드가 낸 두 가지 과제를 최단 시간 안에 끝낼 방법을 찾고 있는 기색이었다.
“제길, 내가 미쳤다고 그딴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겠습니까? 그냥 해 본 소리 가지고 진지하게 반응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무것도 해 줄 필요 없다고요!”
제이드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진절머리를 냈다. 평소에도 사고방식이 독특한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번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라서 그런 것 같긴 한데, 원래 성격도 그리 평범한 편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원하는 게 없습니까?”
굴드가 제이드의 뺨을 감싸 쥔 채로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를 얻으려면 당연히 희생이 따를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좀 쉬게 해 주면 안 됩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충고한 건 당신이잖습니까.”
제이드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굴드의 피를 마시긴 했지만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지금 당장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씻은 다음, 며칠 동안 쥐 죽은 듯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원하는 게 없냐는 굴드의 질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너무 유치하고 사소한 바람이라 굴드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소망은 같은 성별인 굴드가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굴드가 제이드와 함께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듯, 제이드도 굴드를 선택함으로써 어렸을 때부터 쭉 간직해 왔던 꿈들을 몇 개 포기했다. 하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조용히 접은 꿈 때문에 굴드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제이드는 제 의지로 굴드를 선택했다. 그는 줄곧 굴드와 좀 더 내밀하고 진지한 관계가 되길 원했다. 비록 굴드가 첫 만남부터 그를 속이긴 했지만, 제이드는 굴드라는 사람을 알게 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굴드와 만남으로써 그의 삶이 전환점을 맞이했고, 그가 과거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게 됐다. 아직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지만 굴드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제이드는 굴드 이외의 사람과 남은 생을 함께하는 상황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제이드.”
의식이 가물가물한 제이드를 품에 안은 굴드가 이름을 불렀다. 굴드에게 몸을 의지한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꼭 마취총에 맞은 것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사랑합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듯 속삭였다. 가슴을 맞댄 자세로 그에게 안긴 제이드는 참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굴드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제이드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일 년 전에도 그는 지금처럼 의식을 잃은 제이드를 두 팔에 안고서 폐허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수 세기를 살아온 굴드에게 일 년이란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성당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던 순간이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굴드가 사랑하게 된 제이드의 몸 안엔 그의 자손이 자라고 있었다.
현실과 격리된 비틀린 차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결계 너머의 세계에선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굴드는 들쭉날쭉한 빌딩 위로 새하얗게 동이 터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그와 마주하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굴드는 앞으로 아침뿐만이 아니라 태양 아래 서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죽은 자의 삶을 버리고 제이드가 속한 세계에서 그와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