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4/27)

웨인 시티에 지어진 대성당 위로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 회색빛 연기가 종탑을 휘감았고 대성당 주변에 심어진 가로수에 불이 옮겨붙어 사위가 온통 시뻘건 빛을 띠었다.

“어린 양이 네 번째 봉인을 떼어 냈을 때, 나는 네 번째 생물이 ‘나오너라’ 하고 외치는 음성을 들었노라.”

성당 지붕 위에 올라선 라스푸틴이 격양된 어조로 요한 계시록 6장 7절을 읊어 댔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착각하는 그는 종말론과 계시록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빌어먹을, 또 시작이군.”

소년의 얼굴을 한 크롤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손이 한쪽뿐이라 크게 효과는 없었다. 귀를 막아 소리를 차단하는 데 실패한 크롤리는 광신도 자식이 지껄이는 말들을 어쩔 수 없이 전부 들어야만 했다.

“푸르스름한 말 한 필이 나타나리라.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죽음’이었노라. 그의 등 뒤에는 지옥이 뒤따르고 그들에겐 땅의 사분의 일을 지배하는 권한이 주어졌으니 곧,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권한이더라.”

자신의 연극적인 독백에 심취한 라스푸틴이 지상을 내려다보며 소매가 넉넉한 팔을 휘저었다.

성당 주변을 에워싼 주홍빛 불꽃이 장벽처럼 타올랐다. 그 너머엔 간신히 살아남은 팬저 몇몇이 꿀꺽 생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들을 포위한 것은 목이 기괴하게 꺾인 신부님과 특수 기동대 장비를 입은 경찰, 한때 동료였던 팬저들의 시체였다.

크롤리와 라스푸틴의 손에 의해 좀비가 된 인간들이 군대처럼 대성당 앞에 운집했다.

경찰차와 소방차, 그리고 특수 기동대 버스가 문이 활짝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호스에서 콸콸 물이 쏟아져 나왔다.

성당 앞마당에 가득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불똥이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라스푸틴의 명령을 따르는 좀비들이 팬저들을 공격하기 위해 흐느적흐느적 진격했다. 좀비들의 발에 짓밟힌 호스가 바닥에서 펄떡펄떡 몸을 뒤틀었다.

“이익!”

“제기랄, 저리 가!”

둥글게 뭉친 팬저 대여섯이 좀비를 향해 총을 쐈다. 권총 총구에서 쉴 새 없이 불이 뿜어져 나왔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납과 수은, 진은을 정제해서 만든 총알을 맞은 좀비 몇 마리가 차례로 풀썩 고꾸라졌다.

몇몇은 쓰러트렸지만 놈들을 전부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좀비들은 앞줄이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꾸역꾸역 진군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움직임은 다소 둔하지만, 라스푸틴이 조종하는 좀비들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적인 군사였다.

탕! 탕!

“컥!”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된 경찰이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팬저가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경찰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이번엔 한때 동료였던 남자가 권총을 꺼내 팬저들을 겨눴다. 팬저는 좀비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옛 부하의 미간에 칼을 박아 넣었다.

팬저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포위망은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전방에 보이는 성당 주변은 지옥의 입구처럼 화염이 치솟았고 등 뒤로는 높다란 벽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진 팬저들의 얼굴 위로 절망이 드리워졌다.

탄환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저 많은 좀비들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다들 지쳐갔다. 병력이 여러 갈래로 분산된 터라 그들을 구하기 위해 지원이 제때에 당도할 것이란 기대는 버려야 했다.

“끄어, 크어어.”

눈앞의 적을 상대하느라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동료 중 하나가 좀비에게 목을 물어 뜯겼다. 팬저들은 동료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조차 가지지 못했다. 방금까지 아군이었던 남자가 좀비가 되어 그들을 공격하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파울은 질끈 눈을 감으며 동료의 얼굴을 한 좀비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광경을 외면했다.

좀비가 턱을 쩍 벌리며 파울의 목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검고 날카로운 물체가 땅에서 솟구쳤다.

가죽으로 된 자루가 찢어지는 소음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땅에서 솟아오른 검은 가시가 좀비들의 등과 뱃가죽을 꿰뚫는 소리였다.

15세기 전쟁을 기록한 삽화 같은 광경이 대성당 앞에 재현됐다. 파울을 덮치려던 좀비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 몰려 있던 좀비 수십 마리가 검은 창에 꿰뚫려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파울과 팬저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머리 위에서 특수 기동대 장비를 갖춘 좀비 몇 구가 움찔움찔 팔다리를 떨어 댔다. 몸이 반 토막이 나도 격렬하게 더듬이를 움직이는 곤충 같은 모습이었다.

“드디어 행차하셨군, 레오폴트! 네놈의 손을 잘라 내 오른손에 붙여 주마.”

지루한 얼굴로 대성당 지붕에 앉아 있던 크롤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을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화염의 장벽 너머로 레오폴트의 모습이 보였다. 놈이 걸음을 내디디며 손가락을 튕기자 깃발처럼 우뚝 늘어선 좀비들의 시체가 불탔다.

어둠을 녹인 것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레오폴트의 등 뒤로 완벽한 죽음이 늘어섰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 휩싸인 좀비들의 몸뚱이가 삽시간에 새까만 숯으로 변했다.

두려움을 모르던 죽은 자들의 군대가 흠칫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역병 같은 공포가 연기와 바람을 타고 사자死者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펠릭스 신부는 좀비들이 움찔대는 틈을 타 수하들을 대피시켰다.

“레오폴트으으. 감히 네놈이 내 충실한 신도들을!”

허리에 밧줄을 두른 라스푸틴이 좀비들이 불타는 광경을 보고 절규했다. 적그리스도만큼이나 간악한 레오폴트 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레오폴트는 제 놈이 저지른 일에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이익, 지옥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악마여! 이 마귀!”

수도사가 엑소시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며 삿대질했다.

라스푸틴이 흥분해서 날뛰는 모습을 보며 레오폴트가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좀비들을 꿰뚫었던 검은 송곳이 일제히 라스푸틴을 향해 날아들었다.

“헉!”

자신의 눈동자를 향해 뻗어오는 날카로운 그림자를 보고 라스푸틴이 눈을 부릅떴다. 방어를 하거나 피할 겨를이 없어서 레오폴트의 공격을 전부 몸으로 받아 내야 할 상황이었다.

깡!

라스푸틴의 몸뚱이에 구멍이 나기 직전, 크롤리가 왼쪽 손으로 금속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그림자를 튕겨 냈다. 아벤 굴드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화염으로 붉게 물든 안개가 밤하늘을 뒤덮었다.

크롤리가 라스푸틴을 감쌌다?

아벤 굴드는 지붕 위에 서 있는 크롤리와 라스푸틴을 올려다보며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크롤리가 라스푸틴을 위해 나섰다는 사실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라스푸틴의 봉인을 풀어 준 자가 크롤리라는 사실은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크롤리가 정확히 무엇을 노린 건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서독스가 셋으로 늘어나면 그만큼 아벤 굴드의 주의가 분산되기 때문이었다.

“설마 둘이 연합이라도 한 걸까요.”

아벤 굴드의 등 뒤로 다가온 펠릭스 신부가 습관적으로 콧잔등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크롤리와 라스푸틴이 손을 잡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발언을 내뱉었지만,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는 내심 그건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서독스들은 극도로 이기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

아벤 굴드는 펠릭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고수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형체 없는 악의가 유령의 치맛자락처럼 그의 주변을 배회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서독스들은 서로에게 무심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뼛속 깊이 서로를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타나토스에게 심장을 제물로 바친 오서독스들은 불완전한 존재를 증오했다. 원탁에 둘러앉은 같은 계급의 배교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족에 대한 적의, 뿌리 깊은 불신, 그리고 저보다 먼저 성배를 얻어 완전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견제. 이 모든 조건이 서로를 배척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오서독스들은 지독히 오만해서 그들 머리로는 협력이라는 발상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아벤 굴드의 신경을 건드렸다.

타닥, 타닥.

지옥을 지키는 파수견의 혓바닥 같은 화염이 지붕까지 기어 올라왔다. 보수 중이던 대성당 외벽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이 머저리 자식! 머리 나쁜 티 좀 내지 마. 저 자식 손에 또 봉인되고 싶어?”

날개를 펼친 크롤리가 흘끗 라스푸틴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레오폴트를 눈앞에 두고도 방심할 수 있는 건지 광신도 놈의 머릿속을 갈라 보고 싶었다.

라스푸틴은 능력으로 따지자면 오서독스 중에서 순위가 낮은 편이 아니었지만 머리가 덜떨어졌다.

“그, 그래. 마귀를 몰아내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크롤리에게 도움을 받은 라스푸틴이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헐렁한 수도복을 펄럭거리며 좀비들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좀비들은 아벤 굴드를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주인의 명령에 굴복했다. 좀비의 몸뚱이를 조종하는 것은 그들의 근육이나 의지가 아니라 라스푸틴이기 때문이었다. 좀비들이 훈련받은 군인처럼 군실군실 어깨를 부딪치며 대열을 짰다.

“그어어어-.”

아벤 굴드를 향해 접근한 좀비들이 기괴한 안광을 뿌리며 총을 들어 올렸다.

부상 때문에 몸이 편치 않은 펠릭스도 식은땀을 흘리며 권총을 꺼냈다. 경찰, 특수 기동대, 팬저들의 시체가 한꺼번에 자신을 조준하는 으스스한 광경에 압도당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벤 굴드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는지 미간을 좁힌 채 좀비들의 머리 위로 보이는 크롤리와 라스푸틴만 노려봤다.

투당탕탕! 탕, 탕!

좀비들이 기습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탄피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포화는 아벤 굴드와 펠릭스가 서 있는 방향이 아닌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아벤 굴드가 그림자를 채찍처럼 휘둘러 좀비들을 한꺼번에 베어 버린 것이다.

“헉.”

총성을 듣고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던 펠릭스가 눈을 부릅떴다. 허리가 잘린 좀비들이 그의 눈앞에서 내장을 쏟아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반으로 갈라진 그들의 육신은 지상에 넓게 퍼진 아벤 굴드의 그림자에 흡수되는 것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단번에 좀비를 정리한 아벤 굴드는 전에 라스푸틴을 감금했던 구체를 허공에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스푸틴과 크롤리가 차원의 빈틈을 완성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제기라알!”

부하를 모두 잃어 광분한 라스푸틴이 제 육신을 안개로 만들었다. 라스푸틴이 앞뒤 재지 않고 적에게 달려들자 크롤리도 날개를 펄럭거리며 지상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펠릭스 신부는 변변한 저항도 못해 보고 크롤리가 불러일으킨 돌풍에 나가떨어졌다.

깡! 끼이익-.

아벤 굴드가 그림자를 불러들여 양쪽에서 들이닥친 크롤리와 라스푸틴의 공격을 막아 냈다.

오서독스들의 협공을 받은 아벤 굴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라스푸틴의 손목을 움켜잡은 팔에서 치이익 소리가 났다. 독을 뿜어내는 라스푸틴의 손 때문에 푸른 핏줄이 돋은 그의 손바닥이 염산에 담근 것처럼 녹아내렸다.

“성배를 어디에 숨겨 놨는지 말해!”

크롤리가 파르스름한 전격과 돌풍을 일으키며 아벤 굴드를 공격했다. 소년의 눈동자에 핏발이 불거졌다. 마치 반드시 그의 팔을 잘라 제 손목에 이어 붙이겠다고 악을 써 대는 듯한 눈빛이었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

몸뚱이가 물과 안개로 화한 수도사 라스푸틴도 사방에 독을 뿌리며 아벤 굴드에게 달려들었다.

“으으.”

저 멀리 구석에 처박힌 펠릭스가 어깨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신음했다. 아벤 굴드를 보조하고 싶어도 괴물들이 난전을 벌이는 장소로 접근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서독스들을 슬쩍 빗겨 나간 공격에 경찰차와 소방차가 깔끔하게 잘려 나가고, 독 안개가 닿은 모든 사물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펠릭스 신부는 아벤 굴드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게 분명했다.

쾅! 콰과광!

“컥!”

크롤리가 불길에 휩싸인 성당 외벽에 처박혔다. 그 여파로 120년 된 종탑도 흔들리면서 종소리가 데엥, 데엥 하고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크롤리는 날개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유리창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어린 소년의 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끈덕지게 달라붙던 오서독스 중 하나를 간신히 떼어 낸 아벤 굴드는 다시 검은 구체를 불러들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라스푸틴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수도사 복장을 한 오서독스는 액화시킨 수증기로 소방차를 휘감아 아벤 굴드에게 내던졌다.

아벤 굴드는 가뿐히 반쪽짜리 소방차를 피했지만 구체를 소환하던 차원이 닫혀 버렸다.

오서독스들의 훼방은 연달아 이어졌다. 라스푸틴의 움직임을 봉쇄하고서 다시 검은 구체를 불러들이려고 하면 이번엔 크롤리가 깃털을 사방으로 뿜어내며 그를 공격했다.

크롤리의 깃털은 공기 중에서 소규모의 폭발을 일으켰다. 깃털 하나하나의 위력은 크지 않았지만 수백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좀 뒈져! 뒈지란 말이다.”

벽에 처박히고 바닥을 뒹구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크롤리가 마구잡이로 파르스름한 전격을 내리꽂으며 악을 써 댔다.

오서독스들의 공방전으로 인해 처참한 몰골이 된 대성당은 거의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까지 내몰렸다. 대성당 앞에 세워진 인자한 성인의 조각도 조각난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불붙은 낙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아스팔트 도로가 휘었다.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건축물이 흔들리는 광경은 전쟁 중에 폭격을 받는 도시를 연상시켰다.

“젠장! 아이슬러는 언제 오는 거야.”

방심하고 있다가 파수꾼의 공격에 머리가 깨진 크롤리가 바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시뻘겋고 화려한 불꽃이 거리를 점령했다. 화물차 연료 탱크에서 샌 석유를 따라 불길이 확산됐다.

오서독스들의 격돌로 시간이 왜곡된 탓에 사람들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불꽃이 넘실대는 광경을 비추던 자동차 유리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펠릭스 신부 또한 마네킹처럼 제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라스푸틴은 대재앙과 종말을 부르짖으며 건물을 파괴하는 데 열을 올렸다. 레오폴트가 소환한 파수꾼을 상대하는 건 전부 놈의 몫이었다.

라스푸틴만 제대로 활약해 줘도 레오폴트를 좀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놈은 효과적으로 싸울 줄 몰랐다. 제가 만들어 낸 좀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지능을 가진 작자였다.

“훔쳐간 성배를 내놓고 메시아 앞에 회개하라, 레오폴트!”

수도사 복장을 한 라스푸틴이 그렇게 외친 순간, 하수도를 타고 흐르던 물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라스푸틴의 권능으로 독액으로 바뀐 액체가 도로 위로 범람했다

거리에 서 있던 자동차며 가로등 따위가 삽시간에 녹아내렸고, 라스푸틴을 공격하기 위해 도로로 뛰어내렸던 검은 파수꾼들도 독액에 휩쓸려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헛소리만 지껄여 대는군.”

굴드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어둡게 번들거리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분노와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적들을 봉인하겠다는 생각은 일단 집어치웠다. 크롤리와 라스푸틴이 성배라는 단어를 다시는 지껄이지 못하는 몸으로 만드는 게 먼저였다.

제이드는 그의 것이었다. 붉은 피, 상앗빛 피부, 결 고운 검은 머리카락, 손톱, 그림자, 목소리까지 전부.

그는 성배가 자신의 손에 의해 망가질까 봐 언제나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이드의 피부를 어루만질 때도 새끼 고양이를 다루는 것처럼 신중을 기했다. 눈을 감고 잠든 제이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칫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때때로 제이드의 마음이 변해 버리거나 제게서 도망치려 드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아벤 굴드는 제이드의 영혼까지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 피와 뼈, 뇌수와 살점을 먹어 치우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타나토스의 그림자는 제이드의 새하얀 목에 어서 이를 박아 넣으라고 숨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그를 부추겼다.

아벤 굴드는 제이드가 알게 되면 진저리를 칠 만큼 험악하고 끔찍한 독점욕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라스푸틴과 크롤리 따위가 제이드를 성배라고 부르며 소유권을 주장해 댔다.

놈들의 발언에 아벤 굴드는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증오를 느꼈다. 놈들이 어째서 제이드를 성배로 오인하게 된 것인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끄어억!”

아벤 굴드의 눈동자가 광기로 물든 순간, 라스푸틴이 제 목을 부여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회색빛 수도복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발치에서 솟아난 길쭉하고 검은 가시에 목을 꿰뚫렸기 때문이었다.

라스푸틴이 꺽꺽댈 때마다 상처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는 성대에 박힌 검은 그림자를 뽑으려고 애를 썼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림자가 목을 관통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이대로 머리가 잘린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관장하는 타나토스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사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심장은 이미 타나토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생에 대한 집착만 있으면 잘린 목을 타인의 육체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오서독스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은 만큼 라스푸틴으로서는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네 몸을 희생해서 빈틈을 만들어 주다니 감사 인사를 하지, 라스푸틴!”

크롤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등 뒤에서 레오폴트를 노렸다. 하지만 그의 손톱은 레오폴트의 등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섰다. 타르처럼 검고 끈적끈적한 그림자가 날개 달린 소년의 몸을 삽시간에 휘감았던 것이다.

“이익!”

크롤리가 어깨를 뒤틀며 그림자를 끊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을 결박한 그림자는 끊어지기는커녕 한층 더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다시는 제이드가 네놈의 성배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아벤 굴드가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크롤리의 뺨을 잡아 눌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크롤리를 바라보며 등 뒤로 금속 같은 그림자를 움직였다. 목을 부여잡고서 바르작거리는 라스푸틴의 복부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몇 개 더 박아 넣기 위함이었다.

“으으으!”

크롤리는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었다. 하지만 아벤 굴드의 악력에 의해 결국 턱이 벌어졌다.

“비여으응.”

그는 레오폴트를 노려보며 비열한 자식, 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시커먼 그림자가 목을 조르고 있어서 제대로 된 소리를 만들어 내진 못했다.

소년의 혀가 입술 사이로 드러남과 동시에 아벤 굴드의 발치에서 사람 형태를 띤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는 아벤 굴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복부와 목에 그림자가 박힌 라스푸틴은 나비 표본처럼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치광이 수도사가 꼼짝 못하는 이상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어어억!”

사람 형태를 띤 그림자가 크롤리의 입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시커먼 그림자의 손에 혀를 붙잡힌 크롤리가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하지만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벤 굴드가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크롤리를 내려다보는 굴드의 눈동자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끄어어어억!”

그림자의 손에 의해 혀가 길게 잡아당겨지고, 크롤리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벌어진 순간이었다.

화르륵, 쾅! 콰광!

얼음처럼 새파란 화염이 아벤 굴드의 등에 들이닥쳤다. 위험을 느낀 아벤 굴드는 눈썹을 비틀며 몸을 피했다.

크롤리가 바닥에 밀쳐져 저 멀리 미끄러졌고, 푸른 화염이 떨어진 자리에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크롤리를 덮쳤던 시커먼 그림자는 푸른 화염에 휩싸여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투두둑, 후드득.

아스팔트 파편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푸른 화염은 기세등등하게 도로와 가로등을 집어삼켰다. 몇 걸음 떨어진 건물 외벽 위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일렁거렸다.

“큭!”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아벤 굴드는 눈을 사납게 치뜨고서 뺨을 씰룩거렸다. 왼쪽 팔뚝에서 저릿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좀 전 그의 등을 향해 달려드는 푸른 화염을 피하다가 저온 화상을 입었다.

푸른 불꽃이 장엄한 성벽처럼 불타올랐다. 언뜻 새하얗게 보이기도 하는 불꽃은 어둠까지 얼려버릴 만큼 차가웠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새파란 화염의 장벽 너머에서 크롤리와 라스푸틴, 그리고 아벤 굴드를 공격한 범인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르륵, 컥.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

바닥에 드러누운 라스푸틴이 눈동자만 굴려 금발 남자를 올려다봤다. 수도사의 목과 복부를 꿰뚫고 있던 그림자가 부스스 흩어졌다.

“그래. 네 녀석만 일찍 합류했어도 우리가 이렇게 수세에 몰리진 않았을 거다.”

크롤리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라스푸틴의 말을 거들었다. 검은 그림자에 목을 졸린 그의 피부에는 검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이봐,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 아냐? 내가 너희들을 도와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고.”

크롤리와 라스푸틴을 구한 아이슬러가 청바지에 손을 꽂고서 이맛살을 찡그렸다.

벌목꾼처럼 어깨가 딱 바라진 아이슬러는 벌써부터 괜히 낀 건가, 하는 후회가 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기는커녕 대뜸 불평부터 늘어놓는 녀석들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성배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저 녀석들과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긴 했다. 그렇지만 크롤리와 라스푸틴이 저를 향해 으르렁대는 꼴을 보고 나니,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푸른 화염 너머로 레오폴트 폰 볼텐슈테른이 보였다.

“네놈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군.”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외모를 가진 레오폴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푸른 화염을 반사하며 형형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아이슬러를 전율케 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레오폴트가 차분하게 내뱉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이슬러의 귓속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구구구-궁.

금발 남자의 눈앞에서 심연의 심장부에서 태어난 거대한 거인이 소환되었다.

자비 없는 신의 손에 의해 지옥 밑바닥에 처박혔던 고대의 괴물을 지상에 불러들이고 있는 것은 바로 레오폴트였다.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푸른 불꽃 위로 그림자처럼 시커먼 거인이 서서히 일어섰다.

검게 타락한 영혼의 찌꺼기를 온몸에 둘둘 휘감은 고대의 거인은 자유를 갈망하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이 아이슬러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레오폴드가 소유한 막강한 권능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절감한 탓이었다.

아이슬러는 암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가 필사적으로 밀어붙이면 레오폴트의 발을 잠시 묶어 두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지만 라스푸틴과 크롤리 그리고 자신까지, 이 셋이서 힘을 합친다 하더라도 그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자빠져 있지만 말고 일어서, 라스푸틴.”

크롤리가 험악한 얼굴을 하고서 수도사를 다그쳤다. 라스푸틴의 목과 복부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지만 출혈은 이미 멈췄다. 그럼에도 라스푸틴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건 단순한 엄살에 불과했다.

크롤리의 눈총을 받은 라스푸틴이 쉬익, 쉬익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제 몸을 반투명한 상태로 만들었다. 육신을 유지하는 것보다 마력의 집합체인 생령이나 영혼의 형태를 취하는 쪽이 상처가 빨리 회복되었던 것이다.

“불안하긴 하지만… 뭐, 해 보는 수밖에 없나.”

가죽 재킷을 입은 아이슬러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고 좌절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제 와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가 여기서 주춤댄다면 그는 평생 레오폴트를 넘어서지 못했다.

레오폴트에 대한 열등감은 둘째 치고, 오서독스에게 있어서 최우선의 가치는 성배였다.

성배를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았다. 배교자들이라면 누구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성배의 피로 목을 축이길 갈망했다.

강렬한 희열 너머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태고의 섭리와 진리를 구성하는 마지막 조각에 적힌 글귀를 볼 수 있다면 그를 위해 마련된 불타는 지옥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성배의 피를 갈구하는 것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 파멸조차 외면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본능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성배를 손에 넣으려면 레오폴트부터 처리해야 했다. 불리한 싸움이긴 하지만 아이슬러로서는 레오폴트가 빈틈을 보이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운이 따라 준다면 레오폴트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성배를 들먹이며 그를 충동질하던 바니의 미소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크롤리와 라스푸틴을 꾀어내 이 자리에 모이게 만든 것도 바로 그자였다.

놈은 레오폴트의 몰락을 바랄 뿐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했다. 바니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추리를 해 봐도 놈이 품고 있는 흉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성자의 관을 빼돌리고 관 속에 잠든 오서독스를 깨우는 건 일개 서번트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배후에서 바니를 조종하는 존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뚜렷한 흑막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에게 조언을 해 주는 자가 있다면 오서독스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한 오서독스보다 뛰어난 존재는 신과 타나토스밖에 없었다.

크롤리는 그런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눈치였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 똑똑한 줄 아는 녀석이라 ‘서번트 따위가 대단해 봤자’라고 코웃음 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만은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불러들였다.

쿠구구구-궁!

심연의 심장부에서 태어난 거대한 거인이 아이슬러 일행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빌어먹을!”

끈적끈적한 타르 같은 주먹이 머리 위로 다가오자 크롤리, 라스푸틴, 아이슬러가 재빠르게 흩어졌다.

쾅! 콰광!

거인의 주먹이 내리꽂힌 도로에 블랙홀 같은 시커먼 구멍이 생겼다. 공간의 일그러짐 때문인지 검은 전하가 파지직, 파지직 소리를 내며 그 주변을 휘감았다.

주먹과 대지의 충돌로 인한 충격파는 주변 건물들까지 뒤흔들어 부스스 주저앉게 만들었다.

“젠장!”

아이슬러 옆에서 크롤리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거인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들을 공격했다. 고대의 거인이 보여 주는 어마어마한 위력에 다들 등골이 서늘해졌다.

주변의 건물 옥상을 어깨에 둔 거인이 발길질을 가했다. 섬뜩한 바람이 아이슬러의 머리카락을 흩어 놓았다. 간발의 차로 발길질을 피하는 데 성공한 아이슬러는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쿠구궁, 쿠구구궁.

거인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건물 파편이 팝콘처럼 들썩거렸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대지뿐만이 아니라 공기까지 진동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비겁한 자식!”

거인의 손이 닿지 않을 공중으로 높이 치솟은 크롤리가 이를 갈며 아벤 굴드를 내려다봤다.

뽑혀 나간 것처럼 도로에 쓰러진 가로등이 전선이라도 끊어졌는지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차원이 일그러져 시간이 정지한 거리는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삽시간에 황폐화되었다.

“비겁? 네가 약한 것뿐이겠지.”

부르르 주먹을 떠는 크롤리를 흘끗 바라보며 아벤 굴드가 차갑게 웃었다. 뭐가 비겁하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연에 유폐된 신과 악마의 사생아들을 지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그의 권능 중 하나였다. 속임수를 쓴 것도 아니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을 뿐이니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었다.

“이 거만한 자시이익! 기필코 내 앞에서 개처럼 엎드리도록 만들어 주마.”

약하다는 소리에 눈이 뒤집힌 크롤리가 머리 위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번개의 성질을 띤 구체 주변에 자기 폭풍이 휘몰아쳤다. 크롤리가 불러일으킨 자기 폭풍은 폐허가 된 거리뿐만 아니라 아벤 굴드의 옷자락까지 흔들었다.

“무모한 짓을 벌이는군.”

아벤 굴드는 손으로 눈앞을 가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바람에 실려 온 파르스름한 전기가 그의 뺨을 찢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크롤리가 영혼의 심층부를 에워싼 생명력까지 불태워 가며 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위력만은 확실했다.

기세등등한 크롤리의 눈빛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번 공격은 제아무리 아벤 굴드라 하더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권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방어엔 취약한 편이었다.

그는 크롤리를 저지하기 위해 그림자의 영역을 확장했다. 아벤 굴드의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절규했다. 마력이 집약된 전격이 완성되기 전에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드디어 네가 빈틈을 보이는군, 레오폴트!”

짐승의 머리를 달고 있는 거인을 상대하던 아이슬러가 레오폴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안개 형태를 취한 덕분에 거인의 손아귀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라스푸틴도 레오폴트에게 들러붙었다.

오서독스들이 아벤 굴드에게 너무 밀착해 있는 탓에 고대의 거인은 선뜻 그들을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 이제 어쩔 거지?”

노숙자에서 평범한 현대인으로 바뀐 아이슬러가 레오폴트에게 매달린 채로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큭.”

아이슬러와 라스푸틴의 훼방을 받은 아벤 굴드는 으드득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에게 덕지덕지 들러붙은 적들을 떨쳐 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팔을 잡아떼어 내면 문어처럼 또다시 필사적으로 엉겨 붙었다.

아벤 굴드의 집중력이 흩어진 탓에 지상으로 나오기 위해 손을 뻗던 저주받은 영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도로 그림자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하나가 아닌 여럿을 상대하는 일은 생각보다 골치 아팠다. 둘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이 가능했다. 그러나 신경 써야 할 존재가 셋으로 불어난 순간부터 상황이 곱절로 성가셔졌다.

한 놈의 발을 잠시 묶어 두고 다른 하나를 제압하려고 하면, 세 번째 녀석이 끼어들어 그를 방해했다. 이기적인데다 개인주의 성향이 뚜렷한 놈들이라 연합해 봤자 큰 위협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아무리 성배가 걸린 문제라곤 하지만 이 정도 결속력을 보여 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하하핫! 잘했어! 셋을 셀 테니까 절대 그 자식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붙잡고 있으라고.”

두 손으로 빛의 구체를 떠받든 크롤리가 미친놈처럼 웃어 댔다. 라스푸틴과 아이슬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위로 희열이 번졌다. 레오폴트를 포함해 그를 붙들고 있는 경쟁자들까지 한꺼번에 해치울 절호의 기회였다.

“멍청한 놈들.”

아벤 굴드는 제게 들러붙은 아이슬러와 라스푸틴에게 깊은 짜증을 느꼈다. 크롤리를 막지 못하면 위험해지는 건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놈들은 크롤리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크롤리의 손을 떠난 고밀도의 광구는 현대의 폭탄처럼 이 일대를 깨끗이 휩쓸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빨리 몸을 빼낸다고 하더라도 충격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벤 굴드가 꼼짝할 수 없도록 엉겨 붙어 있는 적들은 크롤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마력 덩어리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그는 아이슬러와 라스푸틴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크롤리의 꿍꿍이를 알려 줘 봤자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게 분명한 데다가 상황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나머지 둘 모두, 폭심지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치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아벤 굴드에게 남은 선택지는 마력을 끌어올려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들 사이좋게 뒈져 버리라고!”

셋을 세겠다던 크롤리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빛의 구체를 지상으로 힘껏 내던졌다. 급속도로 팽창한 마력의 집약체는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허공에 잔상 같은 균열을 일으켰다.

“어, 어이!”

“빌어먹을! 크롤리 이 개자식.”

예고도 없이 공격이 들이닥치자 오서독스들이 눈을 부릅떴다.

부랴부랴 아벤 굴드에게서 떨어진 그들은 안전한 곳으로 흩어지려 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고밀도의 빛을 방출하는 거대한 전격은 이미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쿠구구궁!

“크악!”

눈부신 섬광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폭발과 함께 밝은 빛이 번쩍하며 근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땅이 흔들림과 동시에 주변의 건물이 완벽하게 붕괴되었고 공기 중에 짙은 회색빛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폭발의 여파로 현실과 시간이 단절된 공간이 유리창처럼 후드득 깨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새로 외부의 공기가 새어 들었다.

정지된 시간의 속박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것은 폭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던 펠릭스였다. 하지만 숨만 내쉬기 시작했을 뿐 의식을 차린 건 아니었다. 게다가 석재에 깔린 탓에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성배는… 크롤리가, 큭. 차지하겠군.”

수도사 복장을 한 라스푸틴이 하늘을 뒤덮은 연기를 노려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쿨럭쿨럭 기침하는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아이슬러의 눈동자에도 분노와 절망이 깃들었다. 가죽 재킷이 너덜너덜해진 그의 팔에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기포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그는 라스푸틴의 혼잣말에 동의했다. 다들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멀쩡한 크롤리가 성배를 차지하는 데 유리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덩치 큰 금발 남자는 통증이 이는 갈비뼈 부근을 누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산이 분화한 것처럼 온 세상이 회색빛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뭉글뭉글한 연기가 하도 두터워서 크롤리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뭔가를 움켜쥔 거대한 검은 손이 연기를 뚫고 불쑥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좌절하고 있던 아이슬러가 눈을 부릅떴다.

거인의 손에 무참하게 짓이겨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을 배신한 크롤리였다. 아이슬러는 그제야 자신이 크롤리의 배신에 온 정신이 팔려 거인의 존재를 간과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자 라스푸틴도 경악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아이슬러는 어금니를 깨물며 황급히 레오폴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연기 너머에서 레오폴트를 발견한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레오폴트가 아이슬러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틀비틀 일어서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제길….”

그래, 네놈이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 없지.

아이슬러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레오폴트는 결정적인 순간에 거인을 움직여 크롤리에게 타격을 입힘으로써 전세를 단숨에 뒤엎어 버렸다.

전격을 내던지고서 탈진한 크롤리는 아마도 거인에게 그럴듯한 대항도 못하고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크롤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레오폴트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크으으윽. 아윽!”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면서 크롤리를 장난감처럼 움켜쥔 거인의 윤곽도 조금씩 드러났다. 고통에 찬 크롤리의 신음 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몸이 우그러지는 압력 때문인지 놈의 귀와 코에서 검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망할 크롤리 자식.”

아이슬러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몸서리를 치는 크롤리를 올려다보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자신과 라스푸틴, 그리고 레오폴트까지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둘이서 놈을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뒤통수를 친 크롤리의 행위는 열이 뻗쳤지만, 레오폴트를 상대하려면 놈을 거인의 손아귀에서 빼내 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슬러는 무작정 고대의 거인에게 돌격하는 대신 레오폴트를 바라봤다. 레오폴트의 외상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겉모습만큼 그의 상태가 멀쩡한 건 아니었다. 크롤리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탓에 피의 격류가 뒤엉켰고, 그 여파로 마력의 흐름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다.

“라스푸틴!”

아이슬러는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수도사에게 신호를 보내며 레오폴트에게 달려들었다.

“마귀를 몰아내고 새 왕국을 건설하는 덴 고난과 시련이 따르는 법이지.”

라스푸틴이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훔쳤다. 미치광이 수도사는 육신을 독 안개로 바꾸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 헤친 라스푸틴이 권능을 사용하자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할 물이 지하도를 역류해 대지를 적셨다. 폐허가 된 거리 곳곳에서 간헐천처럼 수증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회색빛 매연이 부옇게 떠도는 폐허에 적갈색 비가 쏟아져 내렸다. 독성과 산성을 동시에 띤 죽음의 비를 맞은 건물의 잔해는 얼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삽시간에 둥글게 녹아내렸다.

콰과광! 쾅!

펑!

이글이글 타오르는 얼음 화살과 독의 탄막이 부상을 입은 아벤 굴드에게 무차별하게 퍼부어졌다. 그러나 아벤 굴드는 어둠이 녹아든 그림자를 활용해 가며 노련하고 능숙하게 적들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자 힘의 기반이기도 한 피의 분배에 불균형이 일어나는 상황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크롤리를 손아귀에 쥐고서 마음껏 우그러트리던 고대의 거인이 원래 있던 지옥 밑바닥으로 역소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빨간 머리 소년은 지상으로 추락해 먼지를 부옇게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쿨럭. 켁!”

땅에 처박혔던 크롤리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거인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날개에 힘을 주어 봤다. 그러나 심한 통증만 일 뿐 날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평을 눌러 삼켰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크롤리가 비틀비틀 일어섬으로 인해 아벤 굴드를 가운데 둔 기묘한 대치 구조가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고대 거인의 손에서 크롤리를 구제하긴 했지만 오서독스들 사이에 꾸덕꾸덕한 불신의 늪이 드리워졌다. 그들은 이제 아벤 굴드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원점으로 돌아왔군.”

아벤 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오서독스 셋이서 한꺼번에 달려든 탓이었다.

이불을 돌돌 말고서 소파에 잠들어 있던 제이드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벤 굴드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제이드의 몸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쪽지를 남겨 두긴 했지만 제이드가 혼자 남았다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이드가 잠들기 전에 크게 다툰 터라 그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그렇잖아도 제이드는 뱀파이어들에게 노려지고 있어서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아벤 굴드는 더 이상 제이드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실체는 아벤 굴드의 생각과 달리 오서독스들이 아니었다. 놈들이 성배의 피를 노린다는 사안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토록 껄끄러워지게 된 이유는 아벤 굴드가 제이드에게 감추고 있는 수많은 너저분한 진실 때문이었다.

제이드는 그에게 본능적으로 강한 불신과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벤 굴드는 제이드가 왜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어째서 두 사람 사이에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제이드에게 알려 줘 봤자 거리감만 느끼게 만들 불편한 진실 따위는 저 깊은 곳에 묻어 두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제이드가 거리감만 느낀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신이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축사의 양과 다를 바 없는 처지란 사실을 제이드가 알게 되면 아예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아벤 굴드는 제이드가 그에게서 멀어지도록 내버려 두느니 제이드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아예 눈을 멀게 만들 성격이었다.

제이드가 소중했다.

제이드에게 매혹된 아벤 굴드는 저만의 방식으로 그를 아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제이드를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제이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여태껏 타인의 감정을 헤아려 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아벤 굴드는 자신의 완고함과 편협함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탓이었다.

설혹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시절부터 언제나 타인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오만한 권력자인 아벤 굴드는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붕붕-, 붕붕붕.

곧 터질 것처럼 긴장감이 팽배한 폐허에 곤충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크롤리의 공격으로 인해 생긴 균열 틈으로 곤충의 날개를 달고 있는 징그러운 생명체가 조심스럽게 숨어든 것이다.

바니의 분신이 탐색이라도 하듯 신중하게 더듬이를 움직였다. 경찰서에서 날려 보낸 바니의 분신은 오서독스들에게 가까워지자 날개를 접고서 철골과 돌 부스러기가 널린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동 속도는 느려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현격하게 비틀리고 왜곡된 시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오서독스밖에 없었다. 과거에 비해 급이 낮아지긴 했지만 교황의 하수인인 팬저 기사단장도 차원이 어긋나 버린 여기서는 중력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평범한 곤충 따위는 무슨 수를 쓴다 하더라도 단절된 시공간을 활보하고 다닐 수 없었다.

오서독스들은 아직 벌레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아벤 굴드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임시로 연계했지만, 결속력은 끊어지기 직전인 머리카락 한 올보다 못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서로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하는 경쟁자였다.

바니의 분신은 흉물스럽게 휜 철골 구조물 위에 웅크린 채로 아벤 굴드와 적대 관계인 세 명의 오서독스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냄새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인간의 후각은 퇴화했지만 곤충과 동물들 사이에서 분비물 냄새는 여전히 의사소통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톡 쏘는 것 같은 악취는 천적의 등장을 동포에게 알리고, 구애의 순간에 뿜어내는 시큼한 체액은 암컷을 유혹했다.

바니의 분신은 평범한 곤충들과 달리 위와 같은 단순한 의사 표현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기억, 그리고 복합적인 정보까지도 타인에게 냄새로 전달할 수 있었다.

부웅, 부우웅-.

한참 동안 오서독스들을 탐색하던 바니의 분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저 깊은 곳에서 마력을 불살라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순간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공간에 번쩍, 하고 낙뢰가 떨어졌다.

대기를 불태우는 새파란 화염과 시커먼 그을음 같은 그림자의 방벽이 충돌했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대지에 직선으로 떨어져 날카로운 상흔을 남기는 번개 또한 장관을 이루었다.

활활 타오르는 푸른 화염과 끊임없이 번뜩거리는 번개, 그리고 영혼의 찌꺼기로 이루어진 검은 그림자가 한데 뒤엉킨 광경은 흡사 창을 든 기사들이 진창 속에서 기마전을 벌이는 전투 같았다.

수도복 밑자락이 너덜너덜해진 라스푸틴은 격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자신을 지략가라고 생각하는 수도사는 크롤리와 아이슬러를 거드는 수준으로만 레오폴트를 공격했다.

지금 같은 난전 상황에선 적극적으로 나서 봤자 마력만 소모할 뿐, 그에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았다. 사악한 레오폴트는 힘쓰기 좋아하는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알아서 잘 막아 낼 터였다.

나중을 생각해 피의 마력과 체력을 아껴야 한다고 중얼거리던 라스푸틴이 갑자기 움찔했다. 그가 눈을 부릅뜬 것은 단지 귓구멍으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귓구멍을 부산하게 돌아다닌 벌레는 밖으로 기어 나와 다시 라스푸틴의 콧속으로 들어갔다. 라스푸틴은 경악한 얼굴이 되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의 뺨을 제집처럼 기어 다니는 벌레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제대로 자리를 잡은 바니의 분신은 힘껏 항문을 쥐어짰다. 분비물을 한가득 뿜어내기 위함이었다.

“크윽, 지독한 냄새군.”

후각을 직통으로 자극하는 고약한 냄새에 라스푸틴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를 길게 기른 수도사가 반사적으로 코를 비틀어 쥐는 바람에 분비물을 내뿜던 벌레가 터져 죽었다. 불행히도 라스푸틴의 코를 찌르는 톡 쏘는 냄새는 한층 더 강해졌다.

쿠구궁, 쾅!

라스푸틴이 납작해진 벌레를 빼내기 위해 코를 킁킁대는 동안, 크롤리가 검은 그림자에 휘감긴 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라스푸틴, 너 이 자식 뭐하는 거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운 크롤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중간에서 레오폴트의 공격을 막아 낸 아이슬러도 휙 뒤를 돌아 그를 노려봤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와 멀뚱히 서 있는 이유가 뭐냐며 멱살을 잡을 것 같은 험악한 눈빛이었다.

“제길.”

라스푸틴은 골치 아프게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만졌다. 기회를 봐서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데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만약 자리를 이탈한다면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크롤리와 아이슬러보다 그에게 훨씬 더 문제가 되는 건 레오폴트였다. 라스푸틴은 방금 흘끗 시선을 던진 레오폴트와 눈이 마주쳤다. 사냥감이 빈틈을 보이기만을 차분히 기다리는 듯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적들을 상대하느라 바빠서 제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아벤 굴드가 라스푸틴을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개로 퍼져 나가는 라스푸틴의 능력은 상대하기 까다롭긴 하지만 무력만 놓고 따지자면 다른 오서독스에 비해 약했다. 만약 도망치기 위해 등을 보인다면, 아벤 굴드는 라스푸틴의 숨통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푸석푸석한 머릿결을 가진 라스푸틴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제 몸을 둘로 나눴다. 일반적인 육신의 형태가 아니라 안개의 모습을 취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을 복제하듯 둘로 나누는 권능은 오직 라스푸틴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양쪽 모두 힘과 능력이 절반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아주 유용했다.

라스푸틴은 아직은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크롤리와 아이슬러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독액을 사방에 흩뿌리며 레오폴트를 공격했다.

한편, 본체에서 스멀스멀 분리된 안개는 폐허를 가로질렀다. 기척을 잔뜩 죽이고서 격전지에서 멀리 달아난 라스푸틴의 반신은 시간의 균열 사이로 머리를 슥, 들이밀었다.

“성공했군. 머저리들, 마음껏 머리를 박아 가며 싸워 봐라. 어차피 성배는 나의 것이 될 테니까.”

자신의 절반이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라스푸틴은 음험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 이외엔 아무도 이 자리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레오폴트와 나머지 오서독스들이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이라면 그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성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안개 형태를 띤 라스푸틴의 반신은 벌레가 알려 준 위치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아직 성배의 피를 마신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그의 귓가에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유치장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유랑 서커스의 무대 뒤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유치장에 수용된 사람들은 놀라울 만큼 다양했다.

가벼운 접촉 사고 때문에 끌려온 사람부터 방화 용의자, 마약 딜러, 살인 미수로 체포된 갱까지. 여러 사람을 욱여넣은 공간인 만큼 그들이 구금된 상태에 대처하는 방법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보다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키는 쪽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제이드는 쇠창살 너머로 어서 보석금을 마련해 오라고 고함치는 인간 망종과 그럴싸하게 차려입었지만 입가에 띤 미소가 가식적인 변호사를 차례로 지나쳤다.

“저 자식, 정신병원이라도 탈출한 모양인데?”

쇠창살 밖으로 문신한 팔을 내놓은 남자가 제이드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히죽거렸다. 가죽조끼를 입은 남자가 금니를 드러내며 제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발목을 훤히 드러낸 환자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이, 예쁜이. 이쪽 좀 봐 봐. 좀 만져 보자고.”

누군가 입에 손가락을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이봐, 조용히 해!”

제이드를 안내하던 경찰이 곤봉으로 쇠창살을 때렸다.

“상대하지 마십쇼. 원래 입이 걸은 놈들이니까.”

경찰이 덧붙였다. 제이드는 애매한 미소를 입에 걸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경관이 저를 어떻게 본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저 정도 발언에 움츠러들거나 발끈할 만큼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범죄자들이 지껄이는 말 따위는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치장 복도 저 끝 방에 구금된 뱀파이어 헌터들이 보였다. 그들은 초조해 죽겠다는 얼굴로 쇠창살 앞을 서성댔다.

“나오십쇼.”

검은색 제복을 걸친 경찰이 열쇠로 유치장 문을 열었다. 뱀파이어 헌터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쇠창살 문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라 경관 옆에 서 있는 제이드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그들은 종말의 순간에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빠르게 성호를 그었다.

구금 상태에서 풀려난 뱀파이어 헌터 중 하나가 경찰서 복도에 마련된 공중전화로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걸었다. 경찰서가 어수선했다.

제이드는 매부리코에 머리가 벗겨진 헌터의 부축을 받으며 공중전화 옆에 섰다. 얇은 환자복만 입고 있는 그의 어깨엔 헌터가 벗어 준 가죽 재킷이 둘러져 있었다.

경찰들이 커피를 마시며 흘리는 대화 내용을 들어 보니 누군가 경찰차를 탈취해 달아난 듯했다. 대규모로 출동했던 SWAT팀이 연락 두절이라는 소리도 제이드의 귀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병원에 남은 팀원과 연락이 됐습니다! 웨버 조장도 의식을 차렸답니다.”

검은색 목 티 위에 십자가 목걸이를 늘어트린 팬저가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간호사에게 애걸과 협박을 번갈아 가며 한 끝에 3조 대원과 통화를 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리고 방금 통화를 끝낸 팬저에게서 당장 데리러 오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가 병원으로 전화를 건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부터 상부와 도통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 한 통이면 유치장에서 나올 수 있는 그들이 여태껏 풀려나지 못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도대체 왜 교구와 연락이 되지 않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그들이 집중해야 할 임무는 제이드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겐 제이드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의무가 있었다.

잠시 후, 유리창을 검게 코팅한 밴이 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제이드의 양옆을 지키고 있던 팬저들은 동료가 차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수석 문을 열고 나온 3조 대원의 손에는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제이드가 병원에 벗어 둔 셔츠와 바지를 잊지 않고 챙겨온 것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팬저가 차를 출발시켰다. 뒷좌석에 앉은 제이드는 차가 오른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끼며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 앉은 팬저는 괜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흠흠’ 헛기침했다.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둔 경찰서가 빠르게 멀어졌다. 교통 체증 시간이 끝나서 그런지 도로가 한산했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정면에 보이는 신호등이 주홍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운전자는 신호에 걸리기 전에 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 한층 더 강하게 페달을 밟았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차 안에서도 제이드의 옆자리를 지키게 된 매부리코 남자가 물었다.

“시원한 맥주랑 진통제만 있으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제이드가 힘겹게 웃으며 대꾸한 순간이었다.

“어어!”

운전석에 앉은 팬저가 눈을 부릅뜨고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회색빛 수도복을 입은 남자가 돌연 도로 한복판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쿵

자동차 타이어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 새카만 스키드 마크를 남겼다. 그러나 덩치 큰 차를 멈춰 세운 것은 브레이크가 아니라 바로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트린 수도사였다. 보닛 위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드디어 찾았다.”

자동차 앞 유리 너머에서 수도사가 제이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놈이 우그러트린 보닛 사이로 엔진의 연기가 스멀스멀 비어져 나왔다.

“큭. 제기랄!”

제이드는 굴드가 제 손목에 심어둔 새하얀 뱀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자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괴상한 남자는 뱀파이어가 분명했다.

‘젠장, 미치겠군. 이러다 온 세상 뱀파이어란 뱀파이어는 죄다 내 피를 마시겠다고 달려드는 것 아니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제이드는 입 안이 타들어 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귓가엔 이명이 울렸다. 그는 여태껏 미식축구 선수처럼 덩치 큰 백인 남자와 날개 달린 소년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노리는 뱀파이어가 또 하나 나타났다. 성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이드로서는 온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미치광이 뱀파이어가 차라리 아이슬러나 크롤리의 부하였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수도사 차림을 한 뱀파이어는 절대 다른 사람 밑에서 명령을 들을 부류가 아니었다.

저치는 광신도 집단을 이끄는 권력자 같은 기운을 풍겼다. 게다가 제이드를 바라보는 놈의 눈동자엔 탐욕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팬저들이 다급하게 권총을 뽑아 들었다. 신호등이 깜빡거리던 도로에는 어느새 늪지대 주변에서나 목격할 법한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탕! 탕!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오서독스의 머리를 맞추기 위해 총을 발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탄환은 방탄유리를 뚫지 못했다. 자동차 앞 유리엔 성에가 낀 것 같은 흔적만 남았다.

“액셀을 밟아! 그냥 이대로 박아 버리라고!”

앞좌석 등받이에 얼굴을 들이박은 매부리코 남자가 코피를 훔치며 외쳤다.

“젠장!”

운전대를 잡은 팬저가 이를 악물며 액셀을 밟았다.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 도로를 밀어내는 소음이 허공에 울려 퍼지고, 속도를 나타내는 계기판 바늘이 가파르게 드러누웠다. 하지만 밴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수도사 복장을 한 남자가 밴의 보닛을 찍어 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순순히 성배를 넘겨라, 무지몽매한 인간들이여!”

허리에 밧줄을 두른 오서독스의 어깨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핏빛을 띤 안개는 꿀렁꿀렁 움직이며 밴을 휘감았다.

“으어어!”

라스푸틴의 안개가 10인승 밴을 장난감처럼 거꾸로 들어 올렸다. 밴이 뒤집히자 팬저들은 손잡이를 꽉 붙잡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고 있던 제이드는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큭.”

“성배여, 어서 마차에서 나오라! 그대의 피를 메시아에게 바칠 고귀한 기회를 기쁘게 받아들이란 말이다.”

라스푸틴이 밴을 위아래로 흔들며 소리쳤다. 제이드의 양옆에 앉은 팬저들은 오서독스가 문을 열지 못하도록 문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좌석에서 일어난 제이드는 천장을 손바닥과 팔등으로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차가 뒤집어진 상태라 온몸의 피란 피는 죄다 머리에 쏠린 느낌이었다.

“정녕, 내 말을 거역할 셈인가.”

자루 같은 수도복을 걸친 라스푸틴이 으드득 이를 갈며 밴을 집어 던졌다.

쾅!

“어윽!”

팬저들이 손을 쓸 틈도 없이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밴이 도로 위에 거꾸로 처박혔다. 바닥에 내던져진 충격으로 유리창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설치된 에어백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삐삐삐-.

제이드의 옆자리에 앉은 팬저의 이마에서 끈적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검은 목 티를 입은 팬저는 머리를 잘못 부딪쳤는지 눈꺼풀을 닫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길.”

제이드가 의식을 잃은 뱀파이어 헌터의 허리에 팔을 감고서 문짝을 열었다.

“오오, 그래. 성배여, 나에게로 오라.”

라스푸틴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거꾸로 뒤집힌 밴 앞으로 다가왔다. 희번덕거리는 놈의 눈동자는 마치 악마의 의식을 집전하는 우두머리 광신도 같은 기운을 풍겼다.

“제이드 씨! 여긴 우리가 맡겠습니다.”

매부리코를 가진 뱀파이어 헌터와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운전을 맡았던 뱀파이어 헌터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제이드에게 달려왔다. 제이드가 부축하고 있는 동료를 넘겨받기 위함이었다.

검은색 브이넥 사이로 덥수룩한 가슴 털이 보이는 뱀파이어 헌터는 기절한 동료의 몸을 뒤져 데저트 이글을 꺼냈다. 이어서 그는 묵직한 반자동 권총을 제이드에게 던졌다. 오서독스를 상대로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빈손인 것보다는 대구경 탄환을 사용하는 화기라도 들고 있는 쪽이 백배 나았다.

“도망쳐요! 어서!”

탕, 탕탕!

전복된 밴을 참호로 삼은 팬저들이 라스푸틴을 향해 총을 발포했다.

“제길.”

제이드는 짙은 안개를 뒤흔드는 총성을 들으며 있는 힘껏 내달렸다.

사실 그는 뱀파이어 헌터들을 등 뒤에 남겨 둔 채로 혼자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그는 전력이 되기는커녕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하물며 뱀파이어가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제이드였다. 뱀파이어의 주의를 흩트리려면 그가 필사적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이 더러운 마귀의 앞잡이 같은 놈들이 감히.”

수도복 위로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라스푸틴이 총을 맞고 비틀거렸다. 곡물을 담은 자루처럼 너덜너덜해진 그의 의복에서 걸쭉한 피가 흘러내렸다.

평소 같았다면 팬저의 공격 따위는 라스푸틴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가 처한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성배를 쫓으려고 몸을 둘로 나눈 탓에 그의 힘이 절반의 절반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팬저 몇 마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기타 능력에 비해 육신을 방어하는 힘이 현저히 떨어진 것일 뿐, 그는 여전히 강했다.

탕탕! 탕탕탕!

총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라스푸틴의 육신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유감스럽게도 네놈들을 친히 처벌할 시간이 부족하군. 내가 성배의 피를 마시기 전까지 모두 얌전히 잠들어 있어라!”

라스푸틴이 팔을 활짝 펼치자 기분 나쁜 녹색을 띤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커억! 컥!”

“끄으윽.”

라스푸틴에게 쉬지 않고 총을 쏘아 대던 팬저들이 돌연 목을 부여잡고서 쓰러졌다. 미치광이 수도사 라스푸틴이 주변의 공기를 독으로 오염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리적인 공격은 어찌어찌 막아 낼 수 있어도 숨을 쉬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아스팔트 바닥 위로 고꾸라진 팬저들은 입에 거품을 문 채로 꿈틀거렸다.

독에 중독된 팬저들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다. 사지가 마비되긴 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제이드를 보호해야 할 팬저들이 바닥에 쓰러진 채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욱 최악인 건 제이드 또한 그들처럼 공기 중에 퍼진 독을 들이마셨다는 점이었다.

“우욱.”

소량이긴 하지만 사지를 마비시키는 독을 흡입한 제이드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고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철근을 달고 있는 것처럼 다리가 무거워서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도로를 자욱하게 뒤덮은 안개 위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번졌다.

“자. 어서 내게로 오라, 달콤한 금단의 열매여.”

품이 넉넉한 수도복을 입은 라스푸틴이 종종걸음을 치며 제이드에게 다가왔다.

“빌어먹을!”

제이드는 이를 악물고서 놈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필사적이었다.

굴드와 다투고 나서 아직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절대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굴드에게 제 진심을 전해야만 했다.

제이드는 굴드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든, 전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네가 내 성배라니, 참으로 거룩하고 복되도다. 네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에 내 눈이 멀 것 같구나.”

라스푸틴이 두 손을 부여잡고서 감탄을 거듭했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서 하늘에 기도라도 올릴 듯한 기세였다. 제이드를 게슴츠레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경탄과 소유욕, 그리고 경외심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성배여. 자, 어서 나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 다오.”

“미친놈….”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제이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수도사 복장을 한 뱀파이어가 자신을 향해 지껄이는 말 때문에 귀가 썩는 것 같았다. 조롱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놈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소름이 끼쳤다.

“역적과 다를 바 없는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주제도 모르고 너를 탐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래, 포기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라스푸틴은 고행 끝에 신의 음성을 들은 성직자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느긋했다. 어차피 성배는 독 안에 든 쥐였다. 여기서 라스푸틴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를 처음 본 순간, 타나토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더군.”

라스푸틴은 경이로운 것을 바라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제이드를 주시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진줏빛 피부를 가진 청년의 존재가 라스푸틴을 전율케 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온 성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수도사는 제이드를 발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제이드가 너무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불 근처에 다가가면 자연스레 온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따스하고 황홀한 기운이 성배의 몸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잘 익은 포도주처럼 그윽한 네 체취가 날 미치게 만드는구나, 성배여.”

수도복을 입은 남자는 눈앞에 포도주가 있는 것처럼 코를 킁킁댔다.

“빌어먹을, 닥쳐!”

라스푸틴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들었다. 제이드는 뱀파이어 헌터가 건네준 반자동 권총을 두 손으로 받치며 안전장치를 풀었다.

“윽.”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오른쪽 손목이 심하게 욱신거렸다. 제이드는 누군가 인두로 피부를 지지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렸다. 손목을 휘감은 문신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 아이슬러가 숲에서 그를 공격했을 때 겪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자, 내 품에 안겨 하나가 되… 컥!”

탕! 탕탕!

헛소리를 지껄이던 라스푸틴이 눈을 부릅뜨며 비틀거렸다.

제이드가 놈의 심장에 대고 총을 쏘았기 때문이다. 반동이 심했지만 제이드의 사격 실력 덕분에 대구경 은 탄환은 전부 뱀파이어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네 이노오오옴! 감히!”

라스푸틴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시커먼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놈의 심장에선 거무죽죽한 피가 흘러내렸다.

미치광이 수도승은 제 육신을 삽시간에 강한 산성을 띤 안개로 바꾸었다. 라스푸틴의 육체가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부풀어 오르는 광경은 금지된 실험을 자행한 광신도의 실험실 풍경을 연상시켰다.

“네 겉가죽을 녹여서 흉물스러운 고깃덩이로 만들어 주마!”

광분한 라스푸틴이 제 몸을 활짝 펼치며 제이드에게 달려들었다.

제이드는 침착하고 신속하게 다시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보다 라스푸틴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놈은 제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제이드를 향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물 덩어리를 내던졌다.

“제길!”

위험을 감지한 제이드는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간발의 차로 촤악, 하고 끼얹어진 산성의 물세례를 피한 제이드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제한 속도 60’이라고 적혀 있던 아스팔트가 끈적끈적하게 녹아 없어져 버렸다.

“미치겠군.”

간신히 라스푸틴의 공격을 피한 제이드는 숨을 헐떡거리며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순간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거대한 핏빛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바뀐 뱀파이어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디 또 그 요상한 무기로 날 공격해 보시지.”

안개 형태를 띤 라스푸틴이 히죽 웃으며 제이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산성을 띤 물방울이 제이드의 셔츠 위로 뚝뚝 떨어졌다. 치이익, 하고 섬유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성배여,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라! 내가 널 통째로 녹여서 흡수, 으헉!”

라스푸틴이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제이드를 머리부터 집어삼키려는 순간이었다.

새하얀 소용돌이 같은 물체가 라스푸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제이드의 손목에 깃들어 있던 새하얀 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허억, 허억.”

제이드는 심장이 펄떡대는 것을 느끼며 제 오른쪽 손목과 새하얀 뱀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의 손목에선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새하얀 뱀은 미치광이 수도사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빌어먹으으을! 아악!”

라스푸틴이 늪지대 악어에게 공격당하는 사람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새하얀 뱀은 멀리 떨어진 밴이 들썩거릴 만큼 강렬한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며 라스푸틴을 난폭하게 물어뜯었다.

제이드는 새하얀 뱀이 라스푸틴의 안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모습을 보며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달려갔다. 의식을 잃은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그들을 깨워 함께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광신도 같은 몰골을 한 뱀파이어는 아무래도 아이슬러보다 약한 모양인지, 새하얀 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구우우웅-!

“제기라아알! 레오폴트으으, 날 끝까지 방해하다니.”

라스푸틴은 공허의 피조물의 공격을 막아 내며 울부짖었다. 그는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라스푸틴이 울컥, 피를 쏟아 내며 마력을 최대로 끌어 올렸다. 몸에 무리가 가는 선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육신과 권능이 반의반으로 줄어든 탓에 공허의 피조물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적당히 몸을 사려 가며 싸우다간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이, 이봐요! 젠장. 정신 좀 차려 보란 말입니다.”

전복된 밴 근처로 다가간 제이드는 다급한 얼굴로 헌터들의 어깨를 흔들었다. 쓰러진 사람이 한 명이라면 등에 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식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진 뱀파이어 헌터는 하나가 아니라 넷이었다. 제이드 혼자 힘으로는 덩치 큰 성인 남자 여럿을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없었다.

“빌어먹을, 돌겠네. 이대로 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제이드는 총을 쥔 손으로 밴을 내리쳤다.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뱀파이어 헌터들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갔다. 입가에 거품이 말라붙은 남자들의 어깨를 흔들고 뺨을 때려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쿠구궁, 쾅!

뱀파이어 헌터들을 깨우는 대신 밴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한 순간이었다. 새하얀 뱀과 라스푸틴이 뒤엉켜 싸우던 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생명력을 마력으로 전환해 가며 힘을 끌어올린 라스푸틴이 공허의 피조물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젠장!”

제이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사납게 나부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이는 배를 부여잡고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멀리서 불어닥쳐 오는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흐흐흐, 으흐흐흣….”

폭발의 진원지에서 납작 엎어져 있던 라스푸틴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흐리멍덩한 눈을 한 수도사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걸쭉한 침이 놈의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뭐야, 저건.

제이드는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그를 향해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 뱀파이어의 몸뚱이가 너덜너덜했다.

공허의 괴물을 없애는 데 간신히 성공하긴 했지만 라스푸틴도 멀쩡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새하얀 뱀의 공격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라스푸틴은 툭 건들면 쓰러질 것처럼 흐느적댔다.

“으으으. 너는, 내 것이다… 성배.”

탕탕탕! 탕탕!

“닥쳐, 이 괴물 자식아!”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제이드는 좀비처럼 휘청대는 라스푸틴을 향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탄창이 비었는지 덜컥, 덜컥 하고 방아쇠가 헛도는 소리가 났다.

반자동 권총을 미련 없이 내던진 제이드는 근처에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 헌터의 품을 뒤졌다. 바닥에 엎어진 남자가 갈비뼈로 권총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뱀파이어 헌터의 몸을 비스듬히 밀어 총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 제이드는 탄창이 비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망… 할. 쿨럭, 켁!”

라스푸틴은 목을 부여잡고서 내장 조각이 섞인 걸쭉한 피를 한 사발 쏟아 냈다. 거무튀튀한 피로 얼룩진 라스푸틴의 수도복은 찢어지고 헤져서 넝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지 제이드를 노려보는 뱀파이어의 눈이 반쯤 감겼다. 놈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쉬익, 쉬익,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몇 발만 더 총알을 심장에 명중시키면 적을 완전히 골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으, 흐으으…. 거의, 다, 켈룩, 잡았는데.”

제이드가 총을 장전하는 모습을 본 라스푸틴은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레오폴트가 부리는 괴물과의 싸움으로 인해 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져 있었다.

“곧, 허억. 다시 돌아… 오마. 절대. 너를… 쿨럭. 놓치지 않아.”

미련 가득한 얼굴로 뒷걸음치는 라스푸틴의 육체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라스푸틴의 혼탁한 눈동자는 원통해서 견딜 수 없다는 감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물러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여기서 총알이 몇 발만 더 심장을 관통하면 그의 육신뿐만이 아니라 본체와 절반으로 나눈 영혼까지 위태로워졌다. 지금으로서는 대성당에서 레오폴트와 싸우고 있는 본체로 돌아가 힘을 회복하는 게 최선이었다.

숨을 헐떡거리던 라스푸틴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놈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알려 주듯 손목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잠잠해졌다.

“빌어먹을, 허억. 개자식아,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제이드는 지친 얼굴로 무릎을 짚었다.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닌데 무리를 한 탓에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여기가 도로 한복판이 아니라면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힘겹게 허리를 편 제이드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뱀파이어 헌터에게 다가갔다. 언제 또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서둘러 그들을 깨워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를 악물고서 뱀파이어 헌터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던 제이드는 텅 빈 도로를 둘러봤다. 불현듯 ‘왜 아직도 주변 풍경이 그대로인 거지?’라는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거리에 부옇게 차올랐던 안개는 사라졌다. 그렇지만 차가 다녀야 할 도로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제이드는 주변을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먹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사위가 고요했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달리기는커녕 개미도 얼씬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호등조차 바뀔 생각을 않고 정지해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빨간불이 불길해 보였다.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건 자신과 뱀파이어 헌터들뿐이었다. 사람의 인기척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변을 감지한 제이드가 뱀파이어 헌터의 몸에서 서서히 손을 떼며 등을 긴장시켰다.

시간을 왜곡하는 힘을 가진 뱀파이어가 사라졌으니 지금쯤이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비틀린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제이드는 허리에 꽂아 두었던 권총을 손에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 드디어 방해꾼이 다 없어졌네요, 제이드.”

등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선 제이드가 황급히 뒤를 돌았다. 분명 조금 전까진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니? 어째서 당신이 여길….”

제이드는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남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입술에 달린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는 남자는 바니가 분명했다.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의뢰인이 돌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이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바니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바니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밴이 엎어진 이 도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차원에 속해 있었다.

방해꾼이 다 없어졌다는 바니의 발언이 마음에 걸렸다. 위험을 경고하듯 뱀 문신이 또다시 그의 피부를 옥죄었다.

제이드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오른쪽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이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바니를 만났지만 문신이 반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빙글빙글 웃고 있는 바니를 경계하며 총을 받쳐 들었다. 대구경 은 탄환이 든 반자동 권총의 총구는 바니의 이마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제이드는 바니가 수상쩍은 행동을 취하면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엄지손가락으로 안전장치를 풀었다.

어쩌면 바니는 연락이 닿지 않던 요 며칠 사이에 뱀파이어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전투 내내 평범한 인간이 왜곡된 차원 안으로 발을 들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요, 제이드? 난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소피 집 앞에서 헤어졌을 때, 그대로라고요.”

덥수룩한 앞머리로 눈을 가린 바니가 으쓱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의 입가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변한 게 없다고?”

제이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는 바니가 죽은 자라고 확신했다. 제이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지 뱀 문신의 경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긴 했지만 바니의 몸에서 죽은 자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며칠 전에 봤을 땐 지금 같은 한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날 믿어요, 제이드. 내가 진실만을 말했다고 내 심장을 걸고 맹세할게요. 왜냐하면 난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죽은 자였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스레를 떨던 바니가 돌연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말을 외치려던 제이드가 목소리를 삼켰다. 원래부터 죽은 자였다는 바니의 고백이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제이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바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바니를 가깝게 여기거나 신뢰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뢰인이었기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었다. 스테판을 찾아 달라는 부탁도 어쩌면 제이드를 농락하기 위한 가짜 의뢰일지 몰랐다.

“그거 알아요? 내가 소피와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거?”

두 뺨에 주근깨가 가득한 바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제이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순간부터 그는 줄곧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을 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하물며 제이드를 놀래 줄 깜짝 선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바니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소피?”

제이드의 입술 사이로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바니가 느닷없이 왜 소피를 언급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 소피와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말이 제이드를 의아하게 했다.

소피가 바니를 토드로 착각하긴 했지만 둘은 핼러윈 전날까지만 해도 면식이 없는 사이였다. 소피와 바니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면 간병인인 로사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허투루 들었군요. 제이드, 난 소피보다 대여섯 살 정도 나이가 많아요.”

바니의 입에서 소피보다 대여섯 살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제이드는 흠칫 어깨를 튕겼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찝찝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온갖 착실한 척은 다 하던 소피의 부모님, 목회자가 꿈이라고 지껄이면서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고 나대던 찰스, 오지랖 넓은 소피의 이웃들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죠. 아, 그 동네 살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엿 같았어요. 겉과 속이 다른 역겨운 위선자들이었죠.”

과거를 회상하는 바니의 눈동자 위로 음산한 살기가 번졌다. 음침한 외모를 가진 뱀파이어 청년은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버러지 취급했다며 으드득 이를 갈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찰스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재수 없는 계집과 80년 만에 재회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운명이란 정말 얄궂다니까.”

바니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취미로 몸을 파는 뱀파이어의 과거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사격 자세를 취한 제이드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해졌다. 설마, 라고 생각했던 가정이 현실로 맞아떨어져 가고 있었다.

“난 하나도 안 변했는데 그 계집만 쭈그렁 할망구가 됐다는 상황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참, 치매까지 걸렸으면서 날 알아보다니, 소피의 집착이 대단하지 않아요? 흐음. 이건 집착이 아니라 집념이라고 해야 하나.”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바니는 제이드에게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냐는 눈빛을 보냈다.

“젠장… 소피가 착각한 게 아니었어.”

핼러윈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을 떠올린 제이드의 눈동자 위로 경악이 번졌다.

80년 전 화재 이후로 행방불명된 떠돌이 남창 토드가 바로 바니였다. 찰스가 소피에게 사촌 동생이라고 속인 남자이자, 신학자 루테니아 씨를 찰스에게 소개시켜 준 남창이 제이드의 눈앞에 있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소피는 핼러윈 전날 밤에 바니를 보고 발작을 일으켰다. 그녀는 토드가 나타났다고 필사적으로 호소했지만, 아무도 노부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바니가 뱀파이어란 사실을 몰랐기에 소피가 현실과 과거를 또 혼동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소피의 사진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래된 냄새가 나는 흑백 사진들 속에 소피와 루테니아, 그리고 찰스가 있었다.

하지만 토드의 사진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니, 아니, 토드로 인해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뱀파이어가 늙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피처럼 노인이 되어 있어야 할 남자가 여전히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이상했다.

차라리 몇백 년 전 인물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아득히 먼 시대의 사람이라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는 탓이었다. 그러나 소피와 동시대를 살았던 바니의 존재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재수 없는 계집이긴 하지만 소피는 참 감이 좋은 거 같아요. 그 할망구가 당신을 찰스 오라버니라고 불렀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죠? 만약 내 심장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면 철렁 내려앉았을 거예요.”

앞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바니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닥쳐!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찰스라는 사람과 난 흑발이라는 점만 빼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제이드는 당장에라도 총을 쏠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르렁, 이를 내보이는 모습은 그가 군 복무 중이던 시절을 연상케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물론 겉모습은 그렇죠.”

바니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대꾸했다. 사람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소피가 대단한 거예요.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본질을 꿰뚫어 본 거니까요. 당신과 찰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탕!

제이드가 바닥에 총을 쐈다. 총알이 박힌 곳은 바니가 서 있는 바로 옆자리였다.

“그만 주절대고 본론만 말해. 며칠씩 사라졌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목적이 뭐야.”

총을 쏴서 바니의 말을 자른 제이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그의 목덜미와 이마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독감에 걸린 것처럼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못 보던 사이에 과격해졌네요, 제이드. 당신 피를 노리는 오서독스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나 보죠?”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바니가 쯧쯧 혀를 찼다.

“하긴, 크롤리랑 아이슬러가 좀 막무가내이긴 하죠. 오서독스답지 않게 무식한 구석도 있고. 라스푸틴은 무식하진 않은데 옛날에 이단 심문관 노릇을 하던 작자라 머리가 많이 이상한 것 같더라고요. 하여튼 당신이 이해해요, 제이드. 성배가 걸려 있으니 다들 더 필사적이었을 거예요. 배교자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인간도 사랑에 빠지면 맹목적이 되는 것처럼.”

권총을 쥐고 있는 제이드의 손이 움찔거렸다. 열 때문에 바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지만 성배라는 단어는 귓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언급하는 걸 보면 바니도 놈들과 한패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라스푸틴은 자루 같은 수도복을 입은 뱀파이어의 이름인 듯했다.

“빌어먹을, 일 절만 해. 분명 본론만 말하라고 했을 텐데?”

땀으로 샤워를 한 것처럼 흠뻑 젖은 제이드가 총을 고쳐 잡았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순간처럼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마치 눈앞에서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당신 얼굴이 창백해요. 나와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 만큼 많이 아픈가 보죠?”

바니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행동은 제이드의 경계심을 자극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바니의 얼굴에는 가식이 가득했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대답해. 너도 내가 그 망할 성배인지 뭔지라서 접근한 건가?”

반자동 권총으로 바니의 이마를 조준한 제이드는 비틀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뱀파이어 헌터들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라스푸틴이 퍼트린 독에 중독된 그들은 좀처럼 의식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제이드? 당신의 피를 원해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뭐 하러 여기에 왔겠어요. 당신은 타나토스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금단의 열매….”

탕!

바니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제이드가 방아쇠를 당겨 그의 이마에 시커먼 구멍을 냈기 때문이다.

바니가 지껄이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귀담아들을 가치가 없었다. 제이드의 피를 원한다는 건 그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말과 똑같았다.

“허억, 헉.”

제이드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진 바니에게 다가갔다. 눈을 부릅뜬 바니의 머리 아래로 시커먼 피가 둥그렇게 퍼져 나갔다.

탕탕탕!

제이드는 뱀파이어의 가슴을 짓밟고서 연달아 총을 발포했다. 총알이 바니의 머리를 관통하긴 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목숨이 질기기 때문에 반드시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물 풍선이 터진 것처럼 바니의 두개골 조각과 뇌수가 바닥에 흩어졌다. 머리가 절반쯤 날아간 바니의 얼굴은 본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무참하게 망가졌다.

탕! 탕!

참혹한 몰골이 된 바니의 시체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제이드는 마지막 한 발만 남겨 두고서 전부 뱀파이어의 심장을 쐈다. 적막을 흔드는 총성이 제이드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제길….”

특수 제작된 50 AE탄을 바니의 심장에 박아 넣은 제이드는 질끈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정당방위긴 했지만 의뢰인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상황 때문에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총구에서 흘러나오는 화약 연기 냄새가 역했다.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직업에 환멸을 느껴서 군대를 나왔다. 그러나 전장의 사신은 아직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자신이 시체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띵, 디링-.

얼굴을 덮은 손으로 눈꺼풀을 문지르는데 귓가에서 맑은 종소리가 났다. 굴드가 그에게 선물한 시계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마도 실수로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낸 제이드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오르골 음악 소리처럼 들렸다. 언뜻 차분하고 안정적인 굴드의 목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후우.”

심란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제이드는 속에 담아 두고 있던 감정을 털어 내듯 무지근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목시계의 종소리 덕분에 조금이나마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서 굴드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층 더 간절해졌다.

굴드의 차갑고 커다란 손을 제 뺨에 가져온 다음 익숙한 체취를 담뿍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건 오직 굴드뿐이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욕구 또한 절실했다.

얼른 돌아가자.

제이드는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뒤를 돌았다.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 헌터들 때문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한두 명은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지 손가락을 꿈틀 움직였다. 제이드는 말을 시켜 보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젠장. 아파. 빌어먹을, 정말 엿 같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니야?”

등 뒤에서 바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제이드가 뱀파이어 헌터에게 손을 뻗어 어깨를 흔든 순간이었다.

“너…, 죽은 것 아니었어?”

황급히 뒤를 돌아본 제이드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에선 목을 졸린 듯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도로에 쓰러져 있어야 할 바니가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었다. 분명 총에 맞아 뇌가 아스팔트 바닥 위로 흘러내렸는데 총상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짜잔, 죽었다 살아나는 깜짝 마술쇼예요. 어때요, 신기하죠? 엄밀히 말하면 난 원래 죽은 존재니까 살아났다고 표현하면 안 되지만.”

짧은 반바지를 입은 바니가 음산하게 웃으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가느다란 눈을 희번덕거리며 킬킬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갓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미친놈 같았다.

“자,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

바니가 웃음을 뚝 그치며 걸음을 내디뎠다. 음산한 눈빛을 흘리며 제이드에게 다가오는 뱀파이어는 가면을 벗어던지듯 존댓말도 때려 치웠다.

“움직이지 마!”

제이드는 이를 악물며 다시 총을 뽑아 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축축한 한기가 그의 목을 어루만졌다. 뱀파이어라고 해서 전부 불사는 아닐 터였다. 그런데 뇌 조각이 흩어진 바니가 어떻게 되살아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바니는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닐지도 몰랐다.

제이드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절대 놈에게 붙잡히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 헌터의 손에 발뒤꿈치가 걸려서 하마터면 뒤로 휘청 넘어질 뻔했다.

“제이드, 아직도 모르겠어? 그딴 총 따위로 위협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어.”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바니가 제이드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뭐, 쏘고 싶으면 어디 한번 또 쏴 봐. 어차피 난 죽지 않으니까.”

바니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린 순간이었다.

“사양 않고 그렇게 하지.”

제이드가 뺨을 씰룩거리며 바니의 미간을 향해 마지막 한 발을 쐈다.

하지만 탄환은 바니를 맞추지 못하고 허공에 쏘아 올려졌다. 느닷없이 새카만 까마귀 떼가 나타나 제이드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까악, 까악!

푸드덕.

“이게 어떻게…, 큭. 제길! 저리 비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커다란 까마귀들이 제이드를 에워싸고서 부리로 그의 몸을 쪼아 댔다. 제이드는 권총을 쥔 손을 휘저으며 놈들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날개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져도 끈덕지게 그를 공격했다.

“크윽.”

새카맣게 흩날리는 깃털 사이로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었다. 머리를 감싼 제이드의 손등은 까마귀 발톱에 긁힌 상처로 붉게 물들었다. 눈구멍으로 빨간 벌레가 흘러내리는 까마귀들의 몸뚱이에선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까아악, 까악!

“젠장.”

덩치 큰 까마귀의 발톱에 상처를 입은 제이드가 권총을 놓쳤다. 제이드의 머리를 공격하던 까마귀 중 한 마리가 잽싸게 바닥에 떨어진 총을 움켜쥐고서 제 주인에게 날아갔다.

“하마터면 또 죽을 뻔했네. 아픈 건 정말 질색이란 말이야.”

바니는 까마귀가 가져온 권총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한번 총을 쏴 보라는 발언은 그냥 예의상 해 본 말이었다. 그런데 제이드가 진짜 총을 발포했다. 바니는 제이드의 경우 없는 행동에 몹시 짜증이 났다.

권총을 저 멀리 휙 집어 던진 바니는 벌레를 불러들여 제이드가 있는 쪽으로 보냈다. 벌레들은 바닥에 쓰러진 팬저들을 까맣게 뒤덮었다.

“크으윽. 이거 놔. 바니, 너 이 자식!”

필사적으로 까마귀 떼와 싸우던 제이드가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팔을 뒤로 꺾어 머리를 짓누른 건 바로 뱀파이어 헌터들이었다.

“미친 겁니까? 다들 도대체 왜 이래요.”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제압당한 제이드는 격렬하게 몸을 들썩거렸다.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쳐도 그들은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니의 명령에 따라 제이드를 힘껏 짓누른 팬저들의 눈동자는 혐오스러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눈꺼풀과 안구가 사라진 구멍에서 날개를 비벼 대는 빨간 벌레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일벌들이 돌아다니는 광경이었다. 팬저들의 눈은 바니가 부리는 벌레들이 전부 갉아먹어 버린 상태였다.

“흐음, 이거 라스푸틴에게 따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는걸. 성배를 보호하는 괴물도 없애 주고 덤으로 팬저들까지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다니. 역시 오서독스들은 대단하다니까.”

바니는 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팬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타나토스와 많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지만 바니 자체는 하급 서번트에 불과했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능력으로는 팬저의 정신을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바니가 조종할 수 있는 건 동물과 평범한 인간 정도가 다였다.

이러한 선천적인 힘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바니가 교황청에 소속된 팬저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건 전적으로 라스푸틴의 활약 덕분이었다. 라스푸틴이 독으로 팬저들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마비시켰기 때문에 바니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

“너 이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뱀파이어 헌터들의 손에 의해 손목을 포박당한 제이드가 무릎을 꿇었다.

제이드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바니 따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헌터들이 우악스럽게 그의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스팔트 도로에 무릎을 대야만 했다.

“이런. 날 탓하면 안 돼요, 제이드.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이 귀여운 녀석들이 팬저들의 뇌를 조종하고 있는 거니까.”

덥수룩한 앞머리로 눈을 가린 바니는 뱀파이어 헌터의 얼굴을 기어 다니던 벌레를 한 마리 집어 들어 손바닥에 올렸다. 놈은 기분이 좋은지 다시 제이드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어쩌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말투를 바꾼 것일지도 몰랐다.

“소피가 경찰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만든 것도 바로 이 작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이죠.”

바니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제이드가 눈을 부릅떴다. 소피를 이용해 그를 연쇄살인범으로 모함한 배후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빌어먹을, 너 이 개자식!”

광분한 제이드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저 파렴치한 자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싶은데 두 손이 묶여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제이드는 놈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런 보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했다. 만약 일이 조금만 잘못되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기소되어 구치소로 넘겨졌을지 몰랐다.

“이 쓰레기 자식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제이드는 뱀파이어 헌터에게 붙들린 어깨를 뒤틀며 고함쳤다. 그는 줄곧 자신을 모함한 소피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연쇄살인범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피가 비록 정신은 온전치 않았지만, 절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소피가 왜 거짓 진술을 한 건지 이유를 몰라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이제야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바니의 흉계만 아니었더라도 제이드가 경찰에게 붙잡혀 취조를 당할 일은 없었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당연히 잘 알죠. 당신이 체포되고 풀려나는 상황까지 전부 다 내가 빈틈없이 계획한 일이니까.”

바니가 코웃음을 치며 제이드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제이드는 놈의 손가락을 치우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곧 그의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던 뱀파이어 헌터가 머리를 움켜잡았다. 바니에게 조종당하는 또 다른 헌터는 제이드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으읍, 읍읍!”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말아요. 경찰에 체포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리고 나름 재미있지 않았어요?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간 것도 아니니 심각해질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앙상하게 마른 몸에 짧은 반바지를 꿰입은 바니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흡사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유난을 떤다고 면박을 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으으읍! 읍!”

“솔직히 말해 봐요. 제이드, 당신도 내심 즐겼죠?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조촐한 이벤트에 감동받은 거 다 알고 있어요. 아, 고맙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어요. 나한테도 아쉬움이 많이 남은 이벤트였거든요. 당신이 성배가 아니었으면 그 머저리 변태 자식 대신 당신을 연쇄살인범으로 신문에 실리게 만들어 줬을 텐데.”

바니는 제이드를 내려다보며 심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유명해지는 게 좋죠?”

“흐읍, 으으읍.”

등 뒤로 손이 결박된 제이드는 엿이나 처먹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입에 재갈을 물고 있어서 그의 외침은 목구멍을 맴돌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소리를 이루지 못했다.

제이드는 저딴 자식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바니를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긴 그는 최선을 다해 스테판을 찾아다녔다.

바니는 가련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인 척 굴며 제이드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왜소한 체구에 음침하고 불우한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라도 놈의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력감과 분노가 무딘 칼날처럼 심장을 난도질했다. 스테판을 찾아 달라며 그의 앞에서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사연도 거짓이 분명했다. 놈은 제이드를 기만하고 우롱하기 위해 스테판의 실종 사건을 이용했다. 스테판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던 시간이 아까웠다. 바니가 등 뒤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었을 거란 생각을 하자 머리에 피가 몰렸다.

“신문에 실릴 기회가 사라졌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것 없어요. 경찰이 장을 추격 중이니 매드 버쳐는 금방 잡히겠지만 사건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요.”

바니가 사악한 눈빛을 하고서 활짝 웃었다.

“곧 매드 버쳐의 후계자가 나타날 거예요. 그게 바로 당신이에요, 제이드.”

후계자? 저 자식이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제이드는 눈썹을 비틀었다.

“새로운 매드 버쳐의 첫 번째 희생자 역할을 맡아 줄 사람도 이미 정해놨어요. 그 영예의 주인공은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게 누군지 빨리 말해 보라고요? 성질 급하기는. 당신이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던 스테판이에요. 흥분되지 않아요? 스테판을 죽인 살인범으로 당신의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는 거라고요.”

바니는 인형 놀이라도 하듯 자문자답하며 떠들어 댔다. 제이드는 입이 틀어 막혀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데 놈은 절친한 친구라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장이 온갖 짜증을 다 부리는데도 스테판을 지금까지 살려 둔 이유는 오직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으으읍! 읍.”

빌어먹을 개자식!

제이드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당했다. 스테판은 실종된 게 아니라 바니에 의해 납치된 것이 틀림없었다. 즉, 제이드는 바니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다.

“경찰도 매스컴도 내가 짠 시나리오를 좋아할 거예요. 한 번 풀려났던 용의자가 모방범이 되어 경찰서로 돌아오다니, 얼마나 극적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 같은 건 받지 못할 거예요. 이 모든 건 당신이 죽은 뒤에 벌어질 일들이니까."

즉, 제이드는 무죄를 증명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꼼짝없이 바니가 저지른 범죄를 뒤집어써야 한다는 얘기였다.

“열띤 취재 열기, 매스컴의 관심과 사랑. 당신 집에 들이닥쳐서 옷장이며 서랍을 마구 뒤져 대는 경찰, 당신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프로파일러들. 당신은 죽고 없겠지만 너무 울적해하지 마. 내가 고인이 된 당신을 대신해서 모든 상황을 성심성의껏, 빠짐없이 지켜보고 즐겨 줄 테니까.”

몹시 흥분한 바니는 제이드를 경찰에게 절대 잡히지 않는 전설적인 연쇄살인범으로 만들 거라며 혼자서 난리법석을 피웠다.

“흠.”

제이드의 혈압을 올리는 데 열중하던 바니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은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제이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바니가 뭘 쳐다보고 있는 건지 흘끗 확인했다.

새카만 아스팔트 도로 위에 붉은 피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제이드는 까마귀에게 공격을 받아 찢어진 손등의 상처를 떠올렸다. 뜨끈한 피가 흘러내리는 건 이제 멈췄지만 아직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이런, 아까워라.”

바니는 네발로 기는 것 같은 자세로 아스팔트 도로에 무릎을 갖다 댔다. 놈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제이드가 흘린 피에 혀를 가져갔다.

미친놈.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어깨를 짓눌린 제이드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바닥에 떨어진 피를 정성 들여 핥아 먹는 바니의 모습이 그에게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젠장, 그만해.

제이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진저리를 쳤다. 두 손만 자유롭다면 다시 한 번 놈의 머리통을 총으로 갈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아, 정말 끝내주네. 상상 그 이상이야. 내가 마셔 본 그 어떤 피보다 굉장해.”

콧잔등까지 주근깨로 뒤덮인 바니는 발정이 난 짐승처럼 바닥에 등을 비벼 댔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놈의 눈동자가 몽롱했다. 흡사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흐읏, 흣. 으응. 제이드, 당신의 피는 정말 최고야. 몇 방울 핥아 먹은 것뿐인데 발끝까지 짜릿짜릿해. 흐읏, 헌혈차에서 빼돌린 혈액 팩, 성자의 관 봉인진에 탈탈 쏟아 붓지 말고, 하읏. 조금이라도 맛보는 건데.”

바니가 가슴과 사타구니를 더듬어 대며 숨을 헐떡거렸다. 자위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라 제이드는 속이 메슥거렸다. 가장 불쾌하고 끔찍한 건 놈이 자신의 피를 마시고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후우, 어떻게 보면 혈액 팩에 담긴 당신 피를 마시지 않은 게 다행이네. 소더비 경매에 나온 최상급 포도주보다 끝내주는 당신 피에 홀려서 내 손으로 일을 망쳤을지도 모르니까.”

발정 난 개처럼 배를 까뒤집고서 다리를 비비적거리던 바니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제이드, 당신은 너무 위험하고 치명적이야. 당신 피를 맛보니까 이성이고 자제력이고 전부 증발해 버릴 지경이라고. 타나토스에게 영혼을 판 죽은 자라면 그 누구도 당신의 피를 거부하지 못하고 노예가 되길 자처할걸?”

바니는 혓바닥에 닿았던 피 냄새를 음미하듯 입맛을 다시며 제이드에게 다가왔다.

“으읍, 읍! 으읍읍!”

개자식!

제이드는 뱀파이어 헌터들을 뿌리치려고 힘껏 발버둥 쳤다. 손목을 결박한 노끈이 피부 안쪽으로 파고들었지만 분노와 혐오감 때문에 통증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당신 피를 맛보고 나니까 오서독스들에게 굳이 주술을 걸지 않았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드네. 당신을 성배로 착각하도록 만들 것 없이, 당신 피 냄새만 맡게 해 주면 다 해결될 일이었는데. 괜한 수고를 들였어.”

바니가 허리를 숙여 제이드와 시선을 맞췄다. 놈은 오서독스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손쉬운 방법을 이제야 알게 됐다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성배로 착각하게 유도했다고?

바니를 죽일 듯 노려보던 제이드는 움찔 어깨를 튕겼다. 야구 배트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바니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성배 따위가 아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분노로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뱀파이어들끼리 싸우도록 부추기기 위해 바니가 자신을 이용했다.

저 빌어먹을 남창 자식만 아니었더라도 그가 뱀파이어들에게 노려질 일은 없었다.

바니의 농간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이드는 온몸으로 울분을 토해 냈다.

“워워. 진정해요, 제이드. 배 속에 든 녀석들 때문에 그런가, 이를 드러낸 모습이 꼭 야생 늑대 같네.”

제이드는 개소리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놈을 쏘아보았다. 머리끝까지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배 속에 든 녀석들’이라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제이드가 좀처럼 진정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통굽 신발을 신은 남창은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그를 더 꽉 붙들고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덩치 큰 사내들에게 붙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납게 눈을 치뜬 제이드의 모습은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한 것 같은데, 당신은 성배가 맞아. 단지 아이슬러와 크롤리, 라스푸틴의 성배가 아닐 뿐이지.”

바니가 제이드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제이드의 쇄골과 목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고열 때문에 뜨거운 숨을 내쉬는 제이드의 목덜미는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성배는 배교자, 아. 뱀파이어 한 명 당 하나 밖에 배정되지 않아요. 원래 한 쌍으로 태어난 거죠.”

바니는 역사를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어조로 왼손과 오른손의 검지를 맞붙였다.

“뱀파이어들은 삶의 목적이 완벽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인간처럼 주변 사람과 어울리고 행복하게 사는 일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요. 예를 들자면, 납을 금으로 바꾸기 위해 인생을 건 중세의 연금술사들과 사고방식이 비슷하다고 할까?”

전 재산을 다 바치고, 가족까지 버려 가면서 금을 창조해 내려는 연금술사들의 집착과 광기는 성배를 찾아 헤매는 배교자들의 심리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성배는 뱀파이어들에게 납을 금으로 만드는 방법이 적힌 연구서 같은 거예요. 근데 잘 안 나타나죠. 적게는 몇백 년, 길게는 천 년 가까이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니까. 성배 하나만 바라보고서 사는 삶인데 얼마나 괴롭겠어요? 성배가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미쳐 버리는 녀석들도 많아요. 아벤 굴드나 크롤리처럼 나이 많은 뱀파이어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바꿔 말하면 그만큼 성배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고 해야겠죠.”

바니가 굴드를 언급하자 제이드는 흠칫 어깨를 튕겼다. 뱀파이어가 살아가는 목적은 성배뿐이라는 대목과 굴드가 나이 많은 뱀파이어라는 부분 때문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굴드의 눈앞에 성배가 나타난다면….

제이드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바니가 다시 입을 열어 그의 주의를 흩뜨렸기 때문이었다.

“연금술사의 눈앞에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적힌 연구서를 흔들어 보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연금술을 연구한 연금술사 앞에서요.”

바니가 어디 한 번 상상해 보라는 듯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젠장, 그만 좀 닥쳐. 성배가 뱀파이어들한테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알아먹었으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진 제이드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댔다.

“진정해요, 제이드. 당신을 겁주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당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내가 당신의 피를 마실 생각이 없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었고요. 정말, 미치도록 탐이 나긴 하지만….”

제이드의 미끈한 쇄골에 눈길을 붙박은 바니는 날름 입술을 핥았다. 맥박 때문에 펄떡거리는 푸른 혈관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그으윽, 으읍.”

제이드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외치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바니는 아까 그의 피를 원한다고 지껄였다. 그런데 이제 와 피를 마실 생각은 없다는 소리를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해명이었다.

바니의 머리가 모자란 건지 아니면 자신을 머저리로 본 건지 궁금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조악한 논리를 변명이랍시고 입에 올릴 리 없었다. 뱀파이어가 피를 원한다는 건 한 가지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이거, 아벤 굴드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네.”

바니가 제이드의 목과 귓불에 질척한 입김을 뿌리며 중얼거렸다.

굴드?

바니의 입에서 굴드의 이름이 나오자 제이드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저 자식이 굴드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렇게 황홀한 냄새를 풍기는데, 어떻게 당신 목에 이를 박지 않고 몇 달씩 버틸 수 있었던 걸까. 성배인데다가,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만찬을 눈앞에 두고도 본능을 억누른다는 건 거의 자기 학대 수준인데 말이야.”

게걸스러운 눈빛으로 제이드의 쇄골을 응시하던 바니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백태가 낀 혀를 길게 내민 그는 제이드의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최대한 느리게 핥아 올렸다.

빌어먹을!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붙들린 제이드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다. 목에 닿은 미끄덩한 바니의 혀 때문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바니가 제 목을 핥는다는 사실에 기겁한 그는 굴드에 대한 발언을 듣지 못했다.

벌레가 가득 든 좁은 통 안에 감금된 것처럼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바니는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을 받아 먹는 짐승처럼 제이드의 피부에 맺힌 땀을 구석구석 핥아 댔다.

제이드는 바니를 떨쳐 내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그를 짓누르는 뱀파이어 헌터들 때문에 저항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바니의 혀는 그의 피부에서 떨어지기는커녕 별다른 어려움 없이 쇄골 부근까지 미끄러져 내려왔다.

크르릉.

컹! 컹!

유령처럼 투명한 늑대들이 돌연 모습을 드러낸 건 제이드가 몸서리를 치며 질끈 눈을 감았을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늑대들은 바니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과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늑대들은 마치 가족을 공격한 적을 몰아내는 것처럼 흉포한 기세로 바니를 몰아붙였다.

바니를 공격하는 늑대들은 사나웠지만 오랫동안 불모지를 떠돌아다닌 것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특히 무리에 비해 체구가 작은 녀석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갈비뼈의 윤곽이 다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제 머리를 가누기 힘들어 보일 만큼 쇠약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늑대는 제이드를 보호하기 위해 바니의 발뒤꿈치와 발목을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크아아악, 이런 제길!”

늑대 무리에 기습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바니가 머리를 마구 흔들며 발버둥을 쳤다. 놈의 눈동자에 증오와 광기가 차올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팔을 붙들린 제이드는 꿀꺽 생침을 삼켰다. 늑대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고, 왜 저 늑대들이 바니를 물어뜯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제이드의 팔을 포로처럼 뒤로 꺾은 뱀파이어 헌터들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움찔 동요한 눈치였다.

처음엔 새하얀 뱀처럼 굴드가 그의 몸에 심어 둔 보호자가 나타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굴드가 그의 문신에 부여한 피의 마력은 라스푸틴에 의해 파괴됐다. 더군다나 유령처럼 흐릿한 늑대 무리는 공허의 피조물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새하얀 뱀이 어딘지 모르게 껄끄럽고 이질적인 기운을 풍겼다면 저 늑대들은 정반대였다.

난생처음 보는 존재들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교류한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혈육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만약에 피가 이어진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얼핏 스칠 정도로 친숙했다.

후드득, 후드득.

눈구멍에 벌레가 가득 들어찬 뱀파이어 헌터들이 우왕좌왕했다. 늑대들에게 공격당하는 지배자를 도와야 할지, 아니면 제이드를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저리 자식들, 아악! 제이드를 놓치지 마. 이 늑대 새끼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단 말이야!”

바니는 뱀파이어 헌터들의 덜떨어진 행동에 분노하며 까마귀 떼를 다시 불러 모았다.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가 조종하는 인간들은 복잡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도로 곳곳에 흩어져 있던 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새빨간 눈을 빛내며 늑대들을 공격하는 까마귀들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며 이동하는 메뚜기 떼를 연상케 했다.

까악, 까아악!

깨갱, 캥!

크르릉.

까마귀 떼의 습격을 받은 늑대들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늑대들은 동분서주하며 날카로운 이빨로 까마귀를 물어 죽였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새까맣게 도로를 뒤덮은 까마귀의 행렬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땅에 떨어진 까마귀의 시체는 자루처럼 벌레를 생산해 냈다.

“으읍, 읍!”

무리 중에서 몸집이 제일 작은 늑대가 풀썩 쓰러졌다. 제이드는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뒤틀어 댔다. 늑대들이 고통을 당하자 머릿속 혈관이 끊어질 것처럼 맹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제이드는 온 힘을 다해 뱀파이어 헌터를 떨쳐 냈다. 뱀파이어 헌터 중 하나가 나이프를 꺼냈지만 제이드는 놈이 칼을 휘두르기 전에 급소를 걷어찼다. 뱀파이어 헌터가 떨어트린 나이프를 등 뒤로 집어든 제이드는 손목을 옥죄는 끈을 끊어 냈다.

두 손의 자유를 찾은 그는 다급하게 헌터의 품을 뒤져 권총을 꺼냈다. 다른 뱀파이어 헌터들이 그를 포위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했다.

권총을 발견한 제이드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을 끄집어 내렸다.

“무능한 놈들.”

등 뒤에서 바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제이드가 막 권총을 집어든 찰나였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제이드는 신속하게 뒤를 돌아 바니를 쐈다. 그러나 불행히도 뱀파이어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총구에서 뻗어 나온 총알은 바니의 머리가 아니라 뺨을 스쳤다.

“커억.”

간발의 차로 총을 피한 바니가 악귀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이드의 목을 졸랐다. 늑대에게 공격당해 살점이 너덜너덜해진 놈의 뺨 위로 시커먼 피가 흘러내렸다.

“당신 정말 짜증 나게 끈질겨.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썩은 시체처럼 흉물스러운 몰골이 된 바니가 제이드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왜소한 체구였지만 놈은 뱀파이어답게 우악스런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윽, 컥.”

바니에게 목을 졸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된 제이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바니는 단순히 목만 조른 게 아니라 제이드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중력으로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이를 악다문 제이드의 귓가에 지잉-, 하는 금속성 이명이 울렸다.

까악, 까아악!

늑대 무리를 공격하던 까마귀 떼가 푸닥거리하듯 날개를 흔들어 댔다. 까만 깃털이 흩날리는 광경 너머로 늑대들이 차례로 풀썩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까마귀들과 싸우다 탈진한 늑대들은 더 이상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빠르게 크기가 줄어들었다.

늑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제이드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저 새끼 늑대들을 꿈에서 본 적이 있었다. 불길이 번지는 숲에서 그가 안아 들었던 새끼 늑대들이 바로 저 녀석들이었다.

그 꿈만이 아니라 제이드에게 복권을 사게 만들었던 새하얀 강아지들도 저 새끼 늑대들이 분명했다.

“크윽,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바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제이드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노려봤다. 붉게 헤집어진 근육과 살점 사이로 손목뼈가 훤히 보였다. 오서독스에게 당한 게 아니라면 보통 이 정도 부상은 금방 재생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늑대들에게 물린 상처는 이상하리만치 회복이 더뎠다.

“망할 개새끼들…. 기껏해야 형태도 제대로 못 갖춘 태아인 주제에.”

머리가 산발이 된 바니가 휙 고개를 돌려 새끼 늑대들을 노려봤다. 새끼 늑대들에게 살기를 드러낸 바니의 눈빛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새끼 늑대들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늑대들은 바니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하급 서번트 따위에게 개새끼란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나쁜가 보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적개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바니가 제이드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새끼 늑대들을 윽박질렀다. 눈을 사납게 치뜬 그의 표정은 피해 의식에 시달리는 과대망상증 환자와 흡사했다.

“아윽!”

표면이 우둘투둘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내던져진 제이드가 신음을 흘렸다. 뱀파이어 헌터들은 바닥에 쓰러진 제이드의 팔다리를 잽싸게 찍어 눌렀다.

그러나 뱀파이어 헌터들이 굳이 달라붙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이드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육체에 여전히 거대한 중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하긴, 그 대단하고 고귀하신 아벤 굴드의 핏줄이니 태생이 비천한 서번트 따윈 당연히 하찮아 보이겠지. 네 녀석들 눈엔 밑바닥인 인생을 사는 내가 벌레만도 못해 보일 거야. 그지?”

바니가 이죽거리며 제이드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놈의 눈동자엔 천박한 광기가 번들거렸다.

“큿, 굴드의 핏줄?”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짓눌린 제이드는 눈꺼풀을 커다랗게 벌렸다. 굴드의 핏줄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제이드는 심적으로 크게 동요했다.

굴드에게 혈육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바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늑대들이 자신을 보호하려 한 이유, 그리고 반대로 제이드가 늑대들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낀 이유가 단번에 설명되었다.

“네놈들이 세상으로 나오면 축복받은 인생을 살 거야. 네놈들의 그 잘난 혈통을 과시하며 나 같은 서번트 따위는 코끝으로 부리겠지.”

새끼 늑대들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에도 바니의 혼잣말은 멈추지 않았다. 늑대들이 어디에선가 그의 말을 듣고 있을 거라 확신한 얼굴이었다.

“근데 이걸 어쩌나. 네놈들이 태어나 빛을 볼 일 따윈 절대 없을 텐데!”

바니가 입꼬리를 잔뜩 비틀고서 제이드를 흘끔 내려다봤다. 놈의 악의 어린 시선에 제이드는 쭈뼛 머리털이 곤두섰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했지만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 죽어 버리라고. 네놈들 따윈 세상에 태어나면 안 돼!”

바니가 악에 받친 얼굴로 제이드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찼다. 발길질을 반복하는 그의 눈동자엔 귀기가 서려 있었다.

퍼억, 퍽! 퍽!

“커억!”

제이드는 눈을 부릅뜬 채로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아랫배의 통증이 심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 대단치 않은 폭력이었다. 포로로 잡혔을 땐 이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제이드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들리는 어린아이들의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직접적인 육체의 고통보다 자신과 연결된 ‘어떤 존재들’이 느끼는 통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악! 아파요.

이러다 막내가 죽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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