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20화 (23/27)

아벤 굴드는 검은 장막으로 뒤덮인 옥상에 서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이 버젓이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곳은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다. 점액질을 띤 마력의 응집체가 건물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옥상에서 밖을 내려다보는 일은 가능했지만 햇빛은 결계를 통과할 수 없었다.

펠릭스가 부리는 팬저들이 눈에 들어왔다. 교황청의 사냥개들은 굴드의 명령에 따라 골목에 대기한 채 주변을 감시했다.

태양을 혐오하는 배교자들의 특성상 크롤리와 아이슬러는 아마도 낮 동안엔 지하 어딘가에 쥐죽은 듯 숨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었다. 성배에 눈이 뒤집힌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며 이 건물로 들이닥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었다.

카페에 설치한 차양이 사납게 펄럭거렸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바람이 심하게 불어 행인의 옷자락과 낙엽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굴드의 발치에 드리워진 타나토스의 그림자도 심해에서 몸부림치는 괴수처럼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지상을 내려다보는 굴드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번들거렸다. 그는 성황청에서 밤늦게까지 집무를 보고 있는 요제프에게 연락을 취해 인력을 충원하라고 나직하게 윽박질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청이며 단순한 화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사도좌에 앉아 공무에 시달리고 있는 늙은 인간을 닦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서독스가 둘이나 무덤에서 벗어나 지상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놈들을 상대할 팬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새하얀 주케토로 머리를 덮고 있는 교황이라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인력을 만들어 낼 능력은 없었다.

지금도 주교원에 소속된 팬저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현장에 투입한 상황이었다. 인근 국가에 배치되어 있던 팬저들까지 전부 차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롤리와 아이슬러 두 놈 중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기실 교황이나 팬저의 보조 따위를 받지 않아도 오서독스들의 목을 비트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 오서독스들을 하나씩 추격해 성자의 관에 집어 처넣었을 때에도 루테니아나 팬저들의 역할은 미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킬 것이 없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한꺼번에 자신을 공격한다면 일이 편해지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굴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하나가 그를 공격하는 동안 나머지 하나가 제이드를 덮치는 상황이었다.

굴드는 눈썹을 비튼 채 상념에 잠겨 있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소파에 웅크려 누운 제이드는 고단한 뒷골목 생활에 지친 고양이처럼 깊게 잠들었다.

이불을 꽁꽁 휘감고 있는 모습이 굴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마치 그를 거부하는 몸짓 같아 보였다. 굴드는 정오쯤 언성을 높이며 싸운 이후로 제이드의 조그맣고 동그란 뒤통수밖에 보지 못했다.

굴드는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식사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바게트나 비스킷 말고는 소화가 되지 않는다던 제이드의 말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제이드는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갈증 때문에 잠깐 눈을 떴다가 굴드가 떠다 준 물을 마신 후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원체 잠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마치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동면기에 든 것 같은 행동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잘 겁니까, 제이드.”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제이드의 뺨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지하를 제외한 건물 전 층을 구석구석 배회하던 파수꾼들도 굴드에게 현관문 너머에 서 있는 불청객의 존재를 알려 왔다.

굴드는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불편한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이 건물을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잡상인 따위는 애초에 벨을 누르는 일이 불가능했다. 우선 곳곳에 포진해 있는 팬저들이 일반인의 접근을 저지했다.

제이드를 제외한 평범한 인간들은 결계의 방해 때문에 그가 사는 건물 자체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마치 거울의 방에서 출구를 눈앞에 두고도 헤매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집착적으로 문짝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얼른 대성당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현관문 너머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어깨를 부여잡고 서 있는 사람은 펠릭스 신부였다. 굴드는 문을 열기 전부터 그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팬저들이 굴드의 건물에 접근을 허용할 사람은 그들의 수장밖에 없었다.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낀 펠릭스 신부의 낯빛이 창백했다. 허공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었다. 바람 때문에 비스듬히 두르고 있는 신부복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어깨에서 이는 통증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헬리콥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주민은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던 행인도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 하늘을 쳐다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꼭 영화 세트장에 세워 둔 마네킹 같았다. 특정한 존재 몇몇을 제외하면 시간의 흐름이 정지해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

굴드가 음산한 목소리로 을러댔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펠릭스뿐만이 아니라 검은 차를 도로에 세워 두고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팬저들의 표정 또한 박제된 것처럼 다급했다. 그들의 표정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정지해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인 탓이었다.

“라스푸틴이, 풀려났습니다. 크롤리가, 큭. 한바탕, 휘저어 댄 통에, 대성당 쪽 피해가 큽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든지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가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지금, 크롤리가 라스푸틴을 풀어 줬다는 건가?”

굴드의 눈빛이 삽시간에 흉포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어떻게든 감정을 억제하려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침착해지려고 한 보람도 없이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굴드의 감정에 반응하는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사납게 날뛰며 거리를 잠식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크롤리와 아이슬러에 이어 라스푸틴까지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그에 더해 크롤리가 대성당을 공격해 봉인을 파괴했다는 건 놈이 라스푸틴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지금 같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가정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단 주 정부 쪽에 협력을 요청해서 주교들을 시청으로 대피시킨 상황입니다. 거기서 성자의 관을 만드는 막바지 작업에 돌입했고요. 하지만 놈들이 성자의 관을 만들고 있는 주교들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펠릭스가 서둘러야 한다는 눈빛을 하고서 굴드를 재촉했다. 더욱 최악인 건 아이슬러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직까지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놈까지 합세해서 날뛴다면 사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지진이나 가스폭발 정도로 얼버무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펠릭스를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사안은 오서독스들의 횡포로 인한 건물 폭발이나 다리 붕괴 따위가 아니었다. 주교들이 놈들의 손에 살해되어 버린다면 성자의 관을 준비하는 일은 더욱 늦어질 테고, 그 대처가 늦어지는 동안의 피해는 현재의 곱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금방 올라오도록 하지.”

굴드가 이마를 짚으며 대꾸했다.

“자, 잠깐-.”

그는 펠릭스가 항의하기도 전에 뒤를 돌아 어둑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파수꾼들이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출구 주변에 몰려들었다.

“어억!”

펠릭스는 그 광경을 보고 흠칫 놀라 뒷걸음질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결계 때문에 파수꾼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장이 벌름거렸다.

지하실로 뻗은 계단을 내려간 굴드는 펜을 집어 들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메모를 탁자에 남겨 둔 그는 제이드에게 다가갔다. 아까 만지지 못했던 검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샴푸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굴드는 고양이처럼 얼굴을 숨긴 채로 잠든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간신히 걸음을 떼어 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노라고 제이드에게 직접 말을 꺼낼까 싶기도 했지만, 결국 그를 깨우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밖에 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제이드도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곁에 있어 줄 수도 없으면서 억지로 잠을 깨워서 불안을 조성할 바에는 그냥 이대로 곤히 자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다.

굴드가 나가고 나자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공간이 넓은데다 천장이 높은 탓에 히터를 틀어 놔도 어딘지 모르게 공기가 차가웠다.

꼼짝도 안 하고 잠들어 있던 제이드가 깊은 갈증을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생수를 마시기 위해 탁자 쪽으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 않고 있던 제이드는 그만 실수로 생수병을 넘어트리고 말았다.

콸콸콸, 하고 생수가 탁자 위에 쏟아졌다. 잠시 정신이 멍한 상태였던 제이드는 맨발로 바닥을 디디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윽…!”

둘둘 휘감고 있던 이불에서 나오자마자 통증이 엄습했다. 제이드는 일어서다 말고 도로 소파에 주저앉으며 발바닥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뱃속에 든 쥐가 내장을 갉아 먹는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흐읏, 큭.”

잇새로 거친 숨이 비어져 나왔다. 엎지른 물을 치워야 하는데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배를 부여잡고서 고개를 깊게 숙인 그의 하얀 목에 힘줄이 돋아났다.

굴드는 어디 있는 거지?

제이드는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굴드를 찾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이 뻑뻑해서 눈을 뜨고 있는 게 괴로웠다.

“굴, 드?”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했다. 누군가 주변에 있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던 제이드는 탁자를 손으로 짚었다. 몸에 열이 있는 건 아닌데 으슬으슬 어깨가 떨렸다.

자신이 엎지른 물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건조한 공기와 닿은 안구가 따끔따끔해서 한쪽 눈밖에 떠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복부를 쥐어뜯는 듯한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그의 이마와 쇄골엔 식은땀이 맺혔다.

비닐 봉투를 뒤집어쓴 것처럼 시야가 온통 희뿌연 빛이라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다시 주변을 살피는데 물에 젖은 쪽지가 보였다. 굴드가 남겨 놓은 메모가 분명했다.

“으윽.”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생수로 흥건해진 쪽지를 집어 들었다. 잉크가 번져서 자리를 비운다는 단어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장이 짧았다. 언제쯤 돌아오겠다는 말은 처음부터 적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아, 하아.”

메모를 읽던 제이드가 무릎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탁자에 뺨을 기대고서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아킬레스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보였다.

제이드는 흠칫 놀라 등을 뻣뻣하게 긴장시켰다. 왜 출혈이 일은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검붉은 피가 끈적끈적하게 허벅지를 휘감았다. 어제 굴드와 관계를 가진 탓에 내벽에 상처가 생긴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정사의 후유증을 겪었을 때와는 현격하게 달랐다. 더 깊은 안쪽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색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허윽.”

제이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그의 배 속에 손을 넣어 내장을 비틀어 쥐는 듯한 통증이 또다시 엄습했다. 마치 장기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어윽!”

제이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닥에 웅크렸다.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급성 맹장? 아니면 장출혈? 어느 쪽이든 간에 둘 다 수술을 필요로 하는 증세였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악화되면 악화됐지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제이드는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고서 어찌 대처해야 할지 거듭 생각했다. 그는 혼자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굴드의 집에 머물고 있는 이유를 생각한다면 구급차를 부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굴드가 돌아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들려요?

막내가 너무 약해서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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