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의 뒤를 쫓듯 새벽이 어둠을 몰아내며 파르스름하게 밝아 왔다.
“허억, 헉… 젠장.”
등에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는 소년이 나무가 우거진 숲을 빠져나왔다. 어금니를 꽉 깨문 크롤리는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출혈은 멈췄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호숫가 저편에서 기중기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고층 빌딩을 쌓아 올리는 공사 현장이었다. 새벽부터 굴착기로 땅을 파는 요란한 소음 때문인지 공원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크롤리는 호숫가 구석에 위치한 배수로 터널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미로처럼 복잡한 지하 배수로에 몸을 숨기고 있을 작정이었다.
태양을 직접적으로 쬔다고 해서 타죽거나 하진 않았지만, 햇볕을 좋아하는 배교자는 아무도 없었다. 동굴 속에서 서식하는 박쥐처럼 그들은 본능적으로 낮을 경계했다.
죽음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태양은 눈에 띄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이교도의 상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하 터널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크롤리는 독기가 바짝 오른 눈을 하고서 악취를 풍기는 지하 배수로를 따라 걸었다.
망할 레오폴트 놈 때문에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됐다. 아무리 오서독스라 하더라도 한 번 잘려 나간 신체 부위를 재생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가 오른손을 사용하려면 남의 팔을 갖다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등한 인간이나 서번트의 팔을 제 몸에 이식해야 한다니, 참을 수 없을 만큼 굴욕적이었다.
“레오폴트 개자식. 내 손을 이렇게 만들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득바득 이를 가는 크롤리의 날개에서 깃털이 떨어졌다. 그의 깃털은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부스러기처럼 흔적을 남겼다.
대부분 꿀렁꿀렁 흐르는 지하 수로에 휩쓸려 터널 저 아래로 사라졌지만 몇몇 깃털이 갓길에 그대로 남았다.
드드드, 드드드-.
주기적으로 천장이 흔들렸다. 지하 배수로 근방에 지하철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크롤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쥐새끼 한 마리가 그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미행이 붙은 건 그가 지하 터널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미행의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크롤리는 일단 놈이 자신을 쫓아오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닌 데다가 어쩐지 놈이 낯설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번트 따위가 무슨 배짱으로 그를 따라오는 건지 궁금했다.
“제 소개가 너무 늦었네요. 바니라고 합니다. 부디 당신의 뒤를 밟은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청년이 히죽 웃으며 어둠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터널 벽 너머에서 지하철이 승객들을 태우고 철로 위를 내달리는지 천장이 또 한 번 길게 진동했다.
“네 이름 따윈 궁금하지 않으니까 뭐하는 놈인지나 말해.”
크롤리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바니의 존재를 묵인해 주던 인내심이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당신이 성자의 관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쓴 사람이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듯 인상이 음침한 청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벌레들을 감시자로 뿌리고 성자의 관에 이런저런 조작을 한 덕분에 바니는 오서독스의 위치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크롤리가 왈칵 표정을 구겼다.
“음,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바니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주근깨 가득한 뺨을 긁적거렸다.
“아니, 봉인을 깨 준 게 너라는 말은 믿어. 네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꽤 익숙하거든.”
크롤리가 새의 발처럼 생긴 커다란 손을 꿈틀거리며 대꾸했다. 처음부터 바니가 낯설지 않았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성자의 관에 묶여 있을 때 봉인을 녹여내던 기운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왜? 꽃이라도 뿌려가며 얼싸안아 줄까? 뜬금없이 내 앞에 나타나서 뭐 어쩌라고. 보답이라도 해 달라는 거냐, 엉?”
크롤리가 지하 터널의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는 도와 달라고 구걸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끼어들어 놓고서 나중에 생색내는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이런, 아니에요. 저는 단지 당신을 도우려는 겁니다. 우리는 분명 목적이 같을 테니까요.”
삐쩍 마른 데다 인상까지 음침한 남자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앞머리로 가린 그의 눈동자엔 여유가 배어 있었다.
“목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오만방자한 새끼야, 네놈 따위가 날 도울 수 있다고? 내가 우스워 보여? 그렇게 쉽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놈 같으냐고!”
다혈질인 크롤리가 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는 앳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절대 멍청하진 않았다. 얼굴이 주근깨로 뒤덮인 남자가 겉으로만 굽실거리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뒈져 버려!”
크롤리가 바니의 목을 잡아 뜯기 위해 손톱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그자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핫팬츠를 입은 바니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입을 열었다. 바니를 노리고 뻗어 나갔던 크롤리의 손톱이 허공에서 움찔 멈췄다.
“약점? 지금 살고 싶어서 되는 대로 내뱉는 거 아니야?”
일단 공격을 멈추긴 했지만 바니의 숨통을 노리는 손톱을 거두진 않았다. 피어싱을 주렁주렁 단 바니를 흘겨보는 크롤리의 얼굴엔 의심이 가득했다.
“정말이에요. 그자의 성배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걸요.”
바니가 빙그레 웃으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
크롤리가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 오른손을 빼앗아 간 레오폴트에게 어마어마한 절망을 안겨 줄 수 있었다.
놈의 성배를 찾아낸 다음, 눈앞에서 심장을 뜯어 버리면?
크롤리는 레오폴트가 좌절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거만한 레오폴트 놈이 자신의 발치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는 게 크롤리의 오랜 숙원이었다.
“누구야! 레오폴트의 성배가 누군데! 죽여 버리기 전에 빨리 불어.”
흥분한 크롤리가 바니의 멱살을 움켜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큭, 당신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크롤리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그의 날개도 지하 터널 천장에 닿을 듯 활짝 펼쳐졌다.
“제이드.”
이 손 좀 놓으라는 듯 비늘로 뒤덮인 손등을 두드리며 바니가 말했다.
“누구?”
크롤리가 눈썹을 비틀었다. 그는 제이드가 성배라는 사실만 알 뿐 이름은 알지 못했다.
“당신의 성배 말입니다. 그 남자가 레오폴트의 성배이기도 해요.”
“너 돌았어? 왜 내 성배가 그 자식이랑 겹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버럭 고함치던 크롤리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슬러가 동양인 남자를 성배라고 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엔 아이슬러가 레오폴트의 사주를 받고 그를 방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아이슬러 놈도 크롤리만큼이나 필사적이었다.
성배를 놓칠까 봐 곰 같은 몸집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성배 하나에 배교자가 여럿이라고?”
크롤리는 혼란스러운지 이마를 짚으며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네.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당신이 완벽한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은 거예요. 빼앗기면 안 되니까.”
크롤리의 손에서 놓여난 바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속살거렸다. 인간이든 배교자든, 분노로 판단력이 흐려진 자는 참으로 다루기가 쉬웠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일은 한층 더 간단해졌다.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자기가 알아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뼈대를 뒷받침할 그럴싸한 근거를 찾아냈다.
“젠장! 아이슬러만으로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젠 그 자식하고도 쟁탈전을 벌여야 한단 말이야?”
크롤리가 초조한 얼굴을 하고서 손톱을 씹어 댔다. 그의 등에 달린 날개가 정신 사납게 움직였다.
“성배가 겹치는 사람은 하나 더 있어요. 지하실에 있던 성자의 관이 총 세 개였다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바니가 잘 생각해 보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잠깐, 라스푸틴 그 미치광이 자식?”
자신이 갓 성자의 관에서 일어났을 때 느꼈던 기운을 떠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지하실에서 교황청의 사제를 상대할 때 레오폴트와 싸우고 있던 건 분명 라스푸틴이었다.
“흐음. 라스푸틴은 레오폴트의 손에 도로 봉인 당한 거 같던데…. 그나마 경쟁자가 하나라도 줄어서 다행이군.”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크롤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골칫덩이가 끼어들었다가 사라진 상황이나 크게 위안이 되진 못했다. 라스푸틴은 원래 그의 안중에 없었다.
“과연 다행일까요?”
바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크롤리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감히 훈수를 두냐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경쟁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그래야 레오폴트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으니까요.”
바니가 바닥에 떨어진 크롤리의 깃털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다혈질인 크롤리가 그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바니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나머지 둘을 부추겨서 레오폴트를 제압하는 거예요. 레오폴트만 묶어 두면 성배는 당신 것이 됩니다. 어차피 아이슬러와 라스푸틴은 당신의 적수가 못 되는 것 아니었나요?”
“…….”
크롤리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찮은 서번트 주제에 참견을 해 대서 짜증이 났지만, 듣고 보니 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아이슬러와 레오폴트 둘 다 성배를 노렸다.
경쟁자들을 혼자 전부 상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각개 격파한다고 쳐도 오른손이 이 모양 이 꼴이라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일단 아이슬러와 라스푸틴, 그리고 당신 셋이서 연합을 하는 겁니다. 나머지 둘도 레오폴트를 상대하는 건 버겁긴 마찬가지일 테니까 조금만 설득하면 넘어올 거예요.”
“레오폴트를 잡은 다음에 뒤통수를 쳐라?”
고민에 빠져 있던 크롤리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 싫으신가요?”
“하지만 놈들도 내 뒤통수를 치려고 들 텐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전 당신이 나머지 둘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설마 자신이 없으신 건 아니겠죠?”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바니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크롤리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건방진 새끼!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성질이 뻗친 크롤리가 눈을 부라리며 바니의 목을 졸랐다.
“컥!”
“네놈 목적이 뭐야. 그럴싸한 계획을 지껄이면서 나한테 접근한 꿍꿍이가 뭔지 말해.”
크롤리가 바니의 목을 짤짤 흔들며 음산하게 협박했다. 순수하게 돕고 싶었을 뿐이라는 말 따윈 씨알도 통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으으, 윽.”
“난 말이야, 네 녀석 정체가 의심스러워. 일개 서번트 주제에 성자의 관은 어떻게 구했으며, 성배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또 무슨 수로 알아낸 거지? 엉? 네놈이 성배의 출현을 예지하는 루테니아 혈족이라도 된단 말이야?”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지껄이는 놈일수록 시커먼 속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신뢰할 만큼 순진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자신을 성자의 관에서 꺼내 준 사내일지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었다. 음침하게 생긴 이 서번트는 저를 이용하려고 접근한 게 틀림없었다. 바니라는 이름도 가명이 분명했다.
무슨 흉계를 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을 앞세워 이득을 얻으려는 놈팡이의 수작에 놀아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정확히, 큭, 보셨는데요? 제 진짜 이름은 아이작, 루테니아….”
크롤리에게 목을 졸린 주근깨투성이 남자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점입가경이군. 지금 나보고 그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믿으라는 거냐?”
크롤리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바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뒤 상황이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지긴 했다. 하지만 루테니아 가문 출신이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피의 세례를 받았을 리 없었다.
“컥. 제 연구 일지입니다. 믿어 주시지 않을 것, 큭, 같아서… 챙겨 왔지요. 피의 세례를 받지 않고 서번트가 되기 위해, 끄윽.”
바니가 품 안에서 낡은 노트를 꺼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크롤리에게 내밀었다.
크롤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받으려다가 왈칵 표정을 구겼다.
오른손이 허전했다. 그는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젠장,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크롤리는 노트와 제 오른손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결국 바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피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인간을 서번트로 만드는 연구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켈룩, 켈룩. 절대 도망치지 않을, 쿨럭! 테니까 천천히 살펴보세요.”
지하 터널 바닥에 나자빠진 바니가 목을 문지르며 킬킬 웃어 댔다.
재수 없는 놈.
크롤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한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네놈…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군.”
팔등으로 노트를 받치고서 휙휙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연구 일지에 적힌 내용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루테니아의 혈족인 바니가 왜 가문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그리고 어째서 오서독스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시끄러워! 네놈이 루테니아라고 해도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 달라지지 않아.”
노트를 들춰 보던 크롤리가 버럭 고함쳤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저 남자는 루테니아 가문의 일원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내민 연구 일지는 몇 년의 노고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런 상세한 연구 기록은 절대 가짜로 꾸며 낼 수 없었다.
더불어 루테니아 가문의 복잡한 혈맥이나 전통에 관한 메모도 아이작 루테니아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딴 지저분한 연구를 잘도 성공해 냈군.”
크롤리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연구 일지를 바니의 얼굴에 던졌다. 그의 눈빛에 경멸이 스쳤다. 바니가 서번트가 되었다는 건 실험이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혈족을 납치해 해부하고 제물로 삼아 가면서까지 연구를 지속하다니, 악독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뭐, 성과는 올리긴 했지만 그뿐이죠. 제대로 인정받기는커녕 가문에서 추방당한 상황이니까요.”
누런빛이 도는 노트를 갈무리하며 바니가 슬그머니 웃었다.
아이작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며 미친놈을 연기하는 게 꽤 재미있었다. 아이작은 정말 쓸모가 많은 놈이었다. 바니는 골수까지 우려내 스프를 끓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재수 없으니까 실실 쪼개지 마.”
앳된 외모를 가진 크롤리가 바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했다. 의혹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왜 날 돕는 거지? 내가 성배를 차지하면 네게 무슨 이득이 떨어지는 건지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 봐.”
“큭, 제 속을 간파하셨군요. 그래요,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당신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닙니다.”
두피가 생으로 뽑혀나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바니가 입을 열었다.
크롤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뭐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심 놀랐다. 바니가 이렇게 대놓고 본심을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내가 바라는 건 레오폴트의 몰락이에요.”
바니는 원한을 품은 양 표정을 꾸며냈다.
“왜지?”
크롤리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작자가 날 두 번이나 죽이려 했으니까요.”
으드득 이를 가는 바니의 눈빛은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내비친 증오심은 연기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진심이기도 했다.
“레오폴트가 내 눈앞에서 절망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하지만 내 능력만으로는 역부족이죠. 그래서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 빌붙어 그자를 파멸시킬 계획을 실행해 보려고 한 겁니다.”
바니가 흘끔 크롤리를 올려다봤다. 자신의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강한 사람 앞에 나타났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크롤리는 바니의 아부를 못 알아들은 척 딴청을 부렸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바니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서도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이제 거의 다 넘어왔다.
바니는 크롤리를 확실히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성자의 관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던 놈이라서 그런지 역시 빈틈으로 파고들기가 한결 쉬운 느낌이었다.
“아까 말씀드렸죠? 우리는 목표가 같아요. 그러니… 크악!”
무릎걸음으로 크롤리에게 매달리던 바니가 제 코를 부여잡았다. 크롤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발로 찼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어디서 네까짓 놈과 날 하나로 묶으려 들어. 루테니아 출신이라고? 그래 봤자 넌 서번트다. 주제를 알아.”
“아윽!”
바니를 걷어차는 둔탁한 소음이 지하 터널의 벽을 타고 울렸다. 지하철이 또 굉음을 흘리며 벽 너머에서 지나갔다. 그 여파로 진흙처럼 꿀렁꿀렁 흐르던 하수가 좌우로 흔들렸다.
“날 배신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바니의 머리를 발로 짓밟은 크롤리가 음산한 목소리로 을러댔다.
“헤헤,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설마? 하고 긴장했던 바니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크롤리가 완전히 경계심을 푼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의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맨입으로는 못 믿어. 주둥이로는 무슨 말이든 지껄일 수 있으니까.”
크롤리의 깃털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지하 수로를 가득 채웠다. 마치 화약 입자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 갱도를 집어삼킨 것 같은 광경이었다.
“크윽!”
수백 개의 깃털이 바니의 입과 코 속으로 밀려들었다. 바니는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감각을 억눌렀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크롤리가 그에게 금제를 거는 상황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크롤리를 직접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
“목숨을 담보로 받았으니 이제 네놈 계획이란 걸 들어 보지.”
크롤리가 인광을 번뜩이며 바니의 가슴을 손톱으로 쿡쿡 찔렀다. 바니가 그에게 해를 끼친다면 심장과 장기에 파고든 깃털이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자신을 배반한다면 결코 바니도 무사할 수 없었다.
찍찍, 찍!
사람 팔뚝만 한 쥐새끼가 하수구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며 발버둥 쳤다. 끈적끈적한 오수에 온몸이 젖은 시궁쥐는 다시 갓길로 올라오지 못하고 금세 지하수로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우선 대성당에 봉인된 라스푸틴부터 풀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니, 당신의 적인 레오폴트가 당황해서 허둥거릴 테니까요.”
머리를 쥐어 뜯겨 산발이 된 바니가 코피를 훔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눅이 든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주제에 오서독스라고 더럽게 거만한 땅꼬마 자식이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아서 잡음이 생길 뻔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바니는 마치 자신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그가 아니지만 압도적인 음악을 창조해 내는 건 자신의 손끝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오서독스들을 무대에 세운 웅장한 오페라가 결말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
바니는 길고 어두운 지하 터널을 건너 장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 어릿광대인 장이 무대에 올라 활약할 시간이었다. 꼭 필요한 배역은 아니지만 막간극에 등장시키고 버리기엔 안성맞춤인 존재였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음지만 걸었다. 멀쩡한 길을 내버려 두고 건물을 빙 둘러가야 한다는 사실이 성가셨지만, 얼음장보다 무자비하고 냉정한 햇살에 피부를 노출시키는 것보다는 번거로운 쪽이 나았다.
낡고 지저분한 복도를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장이 라디오를 듣고 있는지 실내에 음악이 흘렀다.
클래식 음악이라면 질색인 바니는 순간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상하기 짝이 없는 아이작과 찰스가 클래식을 주제로 실컷 떠들어 대던 일이 기억났다.
“어이, 당장 꺼.”
바니가 현관문을 걷어차며 굵직한 목소리를 냈다.
“아얏!”
욕실에서 코털을 정리하던 장이 그의 고함 소리에 흠칫 놀라 가위로 코를 찔렀다. 장의 집은 식객 때문에 온통 암막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으으, 내 코! 아침부터 왜 시비야.”
장이 찔끔 눈물을 흘리며 항의했다. 내 집인데 라디오도 마음대로 못 켜냐는 얼굴이었다.
“시끄러워! 저 망할 라디오를 부숴 버리기 전에 주파수를 바꾸든지 끄든지 둘 중에 하날 선택해.”
기둥서방처럼 패악을 부리던 바니가 돌연 귀를 쫑긋 세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뀌면서 라디오 진행자가 제목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페르골레지가 작곡한 중 8번째 곡 ]